2. 복귀역사의 기점 (사랑이야기 - 제 4권 참부모의 사랑편 - 제 2장 재림주님은 인류의 참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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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귀역사의 기점 참부모는 복귀섭리의 기점 하나님의 복귀역사의 중심은 세계도 아니요, 어떠한 나라도 아니요, 어떠한 특정한 종족이나 민족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같이할 수 있는, 즉 하나님이 세워 줄 수 있는 나라가 있기 전에 그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민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민족이 있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종족이 있어야 되고, 종족이 있기 위해서는 가정이 있어야 되고, 그 가정이 있기 위해서는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이 부모를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개인 복귀섭리역사를 해 나왔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종결되는 귀결점이 어디냐 하면 부모입니다. 지금까지 흘러 온 역사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면 크고 작은 나라도 많았고, 군소 민족도 많았습니다. 또한 종교인들의 가정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나라가 하나님이 찾고 있는 나라가 되지 못하였고, 그 민족이 하나님이 찾는 민족이 되지 못하였고, 그 가정이 하나님이 찾는 가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가정과 민족과 나라는 전부 다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영원히 남을 수 있는 하나의 가정, 그 가정을 통해서 영원히 남을 수 있는 하나의 종족과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이 지금까지 수습해 나온 복귀섭리 역사입니다. 이렇게 수습해서 하나의 가정을 전체 대신으로 사랑할 수 있는 한날을 찾아 나온 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이 수고해 나온 역사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나라를 세우고, 민족을 세우고, 종족을 세우고, 가정을 세웠다 하더라도 나라와 민족과 가정까지 수습해 나온 그 모든 수고를 잊어버리게 하는 하나의 기준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정도 아니요, 어떠한 형제도 아니요, 바로 부모입니다. 인류의 참된 조상의 기준이 여기에서 결정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실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지금까지 싸워 나온 싸움을 종결짓고 최고의 승리도 다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바란 소원의 기점도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가정을 세우는 데 있어서 새로운 출발을 볼 수 있는 기점이 참부모입니다. 본래 이런 자리에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가 서야 합니다.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의 소원은 아담 개인에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원한 것은 그 둘을 중심삼고 하나의 부모의 자리를 결정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이요, 하나님의 창조목적입니다. 그러면 사위기대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아담 해와가 하나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자라 나오던 아담 해와가 하나의 사랑으로 묶여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출발의 기점을 이루는 그 자리는 인류의 조상이 갖추어야 할 최초의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그 누구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체적인 사랑을 이루었더라면, 여기에서부터 인류의 참부모는 틀림없이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이 소원하는 그 기준과 일치되지 못하고 어긋남으로써, 즉 우리 인류 조상이 실수함으로써 그 길이 여지없이 파탄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외부 사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문제, 즉 사랑을 중심삼고 걸려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역사에 없는 수고를 하여도 지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국가가 서로 등을 지고 갈라진 것을 묶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묶는 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한꺼번에 전부 묶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종족, 그 종족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가정, 그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참된 남자와 참된 여자를 세워 외적으로 갈라졌던 것을 본래의 것으로 전부 묶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해와 대신 인류의 본래 부모가 되는 기준을 대표할 수 있는 참된 남자 여자 두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본래 기준을 향해 거꾸로 묶어 나가야 하는데, 이렇게 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사실입니다. (25-12, 69.09.21) 탕감복귀 섭리역사의 어려움 지금까지 역사는 탕감복귀역사입니다. 탕감복귀역사 가운데에는 수많은 가정이 동원되었고 수많은 종족이 동원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나라가 동원되어 거쳐갔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어떤 가정이나 어떤 종족이나 어떤 민족이나 어떤 국가도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일치되었던 때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슬퍼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세웠고, 언제나 하나님이 낙망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가정과 종족, 민족, 국가를 대해 나오던 하나님의 슬픔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슬픈 사연들을 어느 때 해소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복귀도상에서 지극히 난문제입니다. 그러면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국가를 두고 볼 때, 그 가운데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어떠한 나라일 것이냐? 또 그 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민족은 어떤 민족일 것이며, 그 민족을 편성할 수 있는 종족은 어떤 종족일 것이며, 그 종족을 이룰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어떤 가정일 것이냐?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사탄과 일체가 되어 사탄과 헤어지려야 헤어질 수 없는 혈연관계를 맺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는 인연이요, 끊어 놓아도 다시 맺어 버리게 되는 인연입니다. 이러한 운명 가운데 인류는 처해 있습니다. 이런 사망권내에 있는 인류를 수습하여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가정 기준을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의 국가 기준을 만들었다 해도 그 가운데 하나님이 세울 수 있는 종족을, 종족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세울 수 있는 가정을, 가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인류의 참부모의 기준을 이 타락한 세계에서 찾아 세운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기독교의 이름을 갖고 기독교권내에 있는 국가들이 많습니다. 혹은 수많은 종족과 가정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가 설정해 나오던 그런 가정과 나라가 이것이다 할 수 있는 기준과는 너무나 먼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의 습관화된 생활을 놓고 보면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이 하늘 앞에 축복받을 수 있는 권내에 섰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축복받을 나라라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모든 나라가 그러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국가가 있지만 한 국가를 표준하여 찾아 나온 하나님의 심정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높고 귀한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위업과 악한 현실적인 세계 무대와는 그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먼 거리를 누가 메울 것인가? 이것을 누가 탕감해 낼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언제나 하나님편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고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냥 메워지지 않습니다. 여기는 반드시 수많은 민족과 국가를 대신해서 탕감의 제물을 제시하지 않고는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국가 민족이 이 탕감의 조건을 알아서 모든 것을 탕감시킬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누가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 앞에 탕감조건을 제시해 이 거리를 단축시켜 메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싸워 나온 것이 6천년의 복귀섭리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는 특정한 나라를 세웠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역사적인 탕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탕감 내용을 갖춘 나라가 있다 하더라도 세울 때의 기준과 그 나라가 가는 기간이 10년이면 10년, 20년이면 20년 혹은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언제나 하나되어 나갈 수 있겠느냐 할 때,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인간이 번번이 그랬듯이 민족이면 그 민족 역시 하나님과 일치되어 하나님의 역사적인 거리를 메워 나오는 데 협조하는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 민족이 몇 해 몇 달 기간은 어떤 인연 가운데서 하나되었는지 모르지만, 수십년 동안 하나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운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그 나라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수 있는 기간을 같이 맞추어 나가지 못하면 그 나라는 완전히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5-14, 69.09.21) 참부모를 찾으려는 뜻 이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의 운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 왔느냐? 하나의 특정한 민족을 중심삼아 그 국가의 거리를 메우게 했습니다. 또 그 민족이 메우지 못하면, 그 민족 중에서도 특정한 종족, 예를 들면 김씨면 김씨, 박씨면 박씨로 하여금 민족이 메우지 못한 그 거리를 메우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종족이 하나님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국가와 당시의 국가와의 거리를 메우는 데 있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 종족 가운데서 특정한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이 메우지 못한 거리를 보충토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종족의 책임을 대신할 수 있는 특정한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세운 그 가정이 책임 못하게 될 때는 그것을 연장시켜 나갈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남겨야 됩니다. 그러면 그 남겨야 할 기준이 무엇이냐? 부모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복귀역사를 해 나오는 데 있어서 최종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참된 부모에 있습니다. 참된 부모를 요구하는 것은 참된 가정을 대표하기 위한 것이요, 참된 가정을 요구하는 것은 참된 종족을 대표하기 위한 것이요, 참된 종족을 요구하는 것은 참된 민족, 참된 국가, 참된 세계를 대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발전되어 나갑니다. 이것을 거꾸로 보면 세계를 대표해서는 국가가 제물 되어야 하고, 국가를 대표해서는 민족이 제물 되어야 하고, 민족을 대표해서는 어떤 특정한 종족이 제물 되어야 하고, 그 종족을 대표해서는 어떤 특정한 가정이 제물 되어야 하고, 그 가정을 중심삼고는 어떤 특정한 대표적인 자리에 선 사람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어디에 귀결되느냐 하면, 부모에 귀결됩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역사의 동기가 될 수 있고, 모든 국가 형성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모든 민족 편성의 기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부모를 중심삼고 복귀섭리역사를 엮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나라와 민족을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참된 부모의 기준을 중심삼은 가정이 완전한 터전 위에 서 있으면, 그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 민족 국가를 새로이 편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전체를 잃어버렸다 해도 그런 내용을 재편성할 수 있는 기원이 되는 기준, 다시 말하면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한 기점이 될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바로 참부모의 자리입니다. 본래 아담 해와는 영원히 변치 않는 가정의 부모가 되어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형성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시 찾아 내려와 새로운 각도에서 편성하려는 것이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입니다. 이런 뜻 가운데서 그러한 사명을 종결짓기 위해 오셨던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대표해서 오셨느냐? 탕감이라는 내용을 중심삼고 세계를 대표해서 오셨고, 국가를 대표해서 오셨고, 또한 민족과 종족을 대표하고 가정을 대표해서 오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전체를 대표하고 전체의 중심으로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그러한 분으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국가의 대표로 믿지 못했고, 민족의 대표로도, 종족의 대표로도, 더 나아가서는 한 가정의 대표로까지도 믿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것은 전체의 대표로서 전체의 중심으로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25-16, 69.09.21) 예수님의 소원 예수님이 소원하신 것은 하나의 나라였고, 하나의 민족이었고, 하나의 종족과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참부모가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참부모를 결정하는 데에는 하나의 여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여성을 찾아오는 데는 그냥 끌어 올 수 없습니다. 보통 한 남성이 한 여성을 맞는 것이라면 언제든지 맞을 수 있지만, 예수님이 한 여성을 맞는 데는 종적인 환경이나 횡적인 환경에서 자유롭게 맞이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 여성을 맞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국가적인 대표의 기준을 세워야 되고, 민족적인 대표의 기준을 세워야 되고, 종족적인, 가정적인 대표의 기준을 세워야 됩니다. 당시까지의 4천년 역사의 섭리 내용과 일치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걸고, 이것을 완전히 탕감시켰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예수님이 하나의 신부를 맞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아서도 예수님은 신랑으로 왔으니 그 예수님 앞에는 신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는 평면적이며 횡적인 기준에서 그저 하나의 남성 앞에 하나의 여성으로 등장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국가를 대표하고, 하나의 민족을 대표하고, 하나의 종족을 대표하고, 그 종족을 중심삼은 수많은 가정들을 대표하는 기준에 선 여성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대표적인 여성은 어떠해야 되느냐? 딸의 입장에서는 딸 중의 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아내의 입장에서는 열녀 중의 열녀가 되어야 하고, 수많은 어머니 가운데서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기준을 엮어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그러한 여성은 반드시 역사적 배경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나가는 여성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 혹은 이스라엘 나라 앞에 없어서는 안 될 역사적인 배경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성은 스스로 나라를 대표할 수 있고, 민족을 대표할 수 있고, 수많은 가정을 대표할 수 있고, 수많은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 특정한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결정짓지 않고는 탕감복귀의 기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체의 중심이 되는 부모의 기준을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탕감복귀역사이기 때문에 기쁜 역사가 아니라 슬픈 역사였습니다. 이 슬픈 역사 가운데는 수많은 국가들이 말려들고,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종족들이 말려들고, 수많은 가정들이 말려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슬픔으로 엮어져 온 역사의 결과로 남아진 세계의 수많은 국가와 민족, 수많은 종족과 가정이기 때문에 이 모두를 대표해 나설 수 있는 그 여성은 그저 단조로운 여성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특정한 내용을 갖추고, 그것을 책임질 수 있다는 결의를 한 여성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가운데에 수많은 나라를, 수많은 종족을, 수많은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특정한 내용을 갖춘 여성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성은 그러한 결의와 자신을 가지고 역사적인 모든 남성을 대표해 오시는 예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남성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국가면 국가를 대표할 수 있고, 민족이면 민족을 대표할 수 있고, 종족이면 종족을 대표할 수 있고, 가정이면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으로 믿고 그와 하나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 있는 기준이 설정되지 않고는 복귀된 가정을 중심한 참부모의 인연을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25-18, 69.09.21) 기독교의 사명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예수님이 택한 12제자와 70문도가 내정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기반이 못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동원해서 민족을 대표하고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적인 울타리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기반 위에 하나의 결실체로 자신을 연결시키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역사적으로 책임 못했던 많은 남성들을 재현시켜 그 시대에 평면적으로 벌여놓은 대표적인 형이 12제자와 70문도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그 12제자와 70문도가 완전히 하나되면 역사 과정에서 실패했던, 그 시대 시대마다 탕감하지 못하였던 모든 남성들의 실수가 탕감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들과 완전히 하나되어 역사적인 실패를 수습할 수 있는 실체적인 권을 횡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완전하게 철옹성 같은 울타리를 만들어 사탄이 공격하려야 공격할 수 없는 하나의 남성으로서의 승리 기반을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 울타리의 사명을 해야 할 사람이 12제자요, 70문도입니다. 이러한 터전, 즉 이러한 배경 위에 공고히 서서 앞에서 말한 여성을 찾아 어머니의 기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노정에서 싸워 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대의 싸움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내적인 사정이 예수님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그 시대의 12제자나 70문도는 몰랐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러한 환경의 터전을 한번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상대도 찾지 못하고, 그런 내정을 통고할 수 있는 하나의 제자도 찾지 못하신 채 30여 년의 생애를 지내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기에 한이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많은 한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역사를 엮어 오면서 수고한 터전 위에 예수님을 보내 한 때를 맞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소원하던 모든 내용이 근본적으로 파탄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 남성의 역사로 엮어 왔던 4천년 역사에 하나의 승리적인 기반을 세우기 위해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세우지 못하고 가야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었으니 그 사정이 얼마나 딱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하나 죽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하나 죽음으로써 4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남자를 통하여 역사해 나오던 하나님의 섭리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더 슬퍼하셨습니다. 자기가 죽는 그 설움보다도 하나님의 섭리가 실패로 돌아가는 설움을 더 크게 느껴 내정적으로 깊이 슬퍼하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는 죽더라도 역사적인 모든 터전을 다시 한번 수습하겠다는 신념과 결의와 각오 밑에서 십자가의 길을 당당코 돌파해 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점을 마련할 수 있었고 영적으로 제자들을 다시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제2의 울타리를 만들어 오늘날 남성을 중심삼은 기독교 역사를 재편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영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2천년간 수많은 순교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발전시켜 나온 것이 기독교 역사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역사를 중심삼고 볼 때, 기독교는 막연한 국가의 이념권 내에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민족을 다시 세워 예수님 당시에 해결짓지 못하였던 모든 내적인 문제를 재현시켜 완전히 해결지어야 합니다. 그런 탕감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25-20, 69.09.21) 새 역사는 참부모로부터 시작된다 새로운 세계는 참부모가 이 땅 위에 새로운 기반을 닦음으로써 시작됩니다. 그 부모로 인해 새로운 자녀, 새로운 종족,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천주가 편성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다시 와서 섭리해야 할 소망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날이 한꺼번에 와서는 안 됩니다. 종의 종의 길을 전부 수습해야 되고, 종의 길을 수습해야 되고, 양자의 길을 수습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아들의 길을 수습해야 됩니다. 그러나 6천년 역사과정에서 모두 저끄러졌으니 오시는 주님은 이것을 일대에 걸어서 역사적인 6천년사를 수습했다는 승리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역사를 심판할 수 있는 참다운 기준을 세우기 전에는 이 땅 위에 참부모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 신랑되신 주님이 나를 찾아오십니다라고 말하는 도둑들입니다. 그런 신앙하려고 했으면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런 길을 걸어 나왔겠습니까? 선생님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기도를 했습니다. 눈물 흘리는데 있어서도 누구한테 지지 않았고, 회개하는데도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 했습니다. 또한 열의를 내라면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의 열의를 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반대하는 길을 왜 가느냐? 이 길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들춰보고 맞춰봐도 틀림없습니다. 역사는 이러한 원칙에 의해서 정비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원리 원칙에 부합될 수 있는 사람, 천리 공법 앞에 완전히 순응하고 상응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들의 역사적인 소원이요,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도를 닦아 나온 사람들의 소원입니다. 양심의 기준을 중심삼고 투쟁하면서도 승리의 한날을 갖지 못한 것이 역사적인 한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때려 몰아서라도 통일교인들을 그 자리에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 앞에 공헌하는 것이요, 현시대 앞에 승리의 권한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천번 만번이라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산중에서 도닦는 사람들이 정도령을 기다리며 선천시대니 후천시대니 하면서 새로운 천지 부모가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데, 천지 부모가 무엇입니까? 바로 참부모입니다. 역사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느냐? 새로운 부모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천지 부모가 나오기 전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수 없습니다. 사탄과 싸워 승리하여 당신은 천지 부모요라고 공인받은 참부모가 나와야 됩니다. 그 부모가 나오기 전에는 천지개벽은 되지 않습니다. 천지개벽이 되어야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의 출발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심정을 중심삼고 자라난 아들딸들이 하나님이 창조 당시에 아담과 해와에 대하여 소망하였던 그 심정을 지니고 일체의 생활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 대해 소망하였던 것을 대신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아담 해와 대신 그러한 자녀들을 불러서 만세의 축복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 심정의 혈통이 너희와 더불어 길이 같이 할지어다라고 축복해 줄 것입니다. 이렇게 축복받은 참부모가 이 땅 위에 나와야 합니다. (17-127, 66.12.11) 하나님의 뜻을 품은 지도자의 고충 본래 역사는 남성과 여성을 중심삼고 접촉시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하나의 기점에서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 연결은 참부모라는 내용을 중심삼고 되어야 하며, 그 참부모는 역사의 기원으로 출발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역사가 출발되었더라면 영원한 결과의 세계까지 뻗어나갈 것인데, 이것이 틀어졌기 때문에 역사의 기원을 다시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기원을 다시 만들기 위해 벌여 놓은 역사를 수습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참부모의 인연을 중심삼고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을 반드시 맺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새로운 역사시대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통일교회가 현실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선생님의 책임은 무엇이냐? 참부모의 인연을 결정지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중요한 사명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결정짓기 위해 여자는 어떠한 여성이 되어야 하고, 남자는 어떠한 남성이 되어야 하느냐? 즉 선생님 자신은 어떠한 아버지가 되어야 하며 어머니는 어떠한 어머니가 되어야 하느냐?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나라의 문제도, 세계의 문제도, 하늘땅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완전한 승리를 결정짓지 않고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섭리는 다시 연장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196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적인 싸움을 해 나오는 데에 있어 기준이 되어 왔습니다. 두 분이 하나된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이 만나서 하나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모든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과 한국을 중심삼고 볼 때, 두 나라 사이에는 합하려야 합할 수 없는 수많은 내용이 있습니다. 즉 문화가 다르고, 역사가 다르고, 사회의 모든 조직들이 다릅니다. 이 다른 환경이 그냥 그대로 하나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탕감내용이 걸려 있는 문제, 바로 이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이 하나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구렁텅이가 있다면 그 구렁텅이는 어떠한 구렁텅이보다도 더 깊은 구렁텅이일 것이요, 산이 있다면 그 산은 어떠한 산보다 더 높은 산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평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심정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산정과 깊은 골짜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평지가 될 수 있는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 그 기준이 세워지는 때가 참부모가 이 땅에 인연을 갖추고 등장할 때고, 그때까지의 역사는 슬픔의 역사입니다. 인류사에 이러한 탕감노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내정 가운데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이루려 하였던 소원의 뜻을 아담 해와가 몰랐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담 해와 타락 이후 슬픔의 역사를 4천년 동안 엮어 나왔지만, 그 역사과정의 수많은 인간들도 몰랐습니다. 4천년이 지난 후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을 대신하여 하나의 남성으로서 하나의 여성을 취해 역사적인 모든 해원성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품고 나아감에 있어서 당해야 했던 예수님의 내적인 고충을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몰랐으니, 예수님이 다른 누구에게 그 일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탄식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어느 누구도 몰랐습니다. (25-24, 69.09.21) 참부모가 가야 할 길 그러면 참부모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되어 사탄의 참소권을 벗어난 자리입니다.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내용을 남기지 않고 완성기준을 넘어선 자리에 올라가야만 비로소 참부모의 기원이 생깁니다. 이것이 원리적 견해로 본 참부모의 기원입니다. 그러나 그 견해에 합당한 자리는 간단하게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5-30, 69.09.21) 하나님은 때가 되기 전에 반드시 준비시킵니다. 군대가 위험한 때를 대비해서 훈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국가가 국민을 총동원해서 긴급사태에 대비한 훈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결정적인 큰 때가 오기 전에 반드시 훈련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훈련은 하나님이 앞장서서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간에는 하나님은 완전히 떠납니다. 왜냐하면 타락의 결정을 아담 해와가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이 같이하고 언제 동정하느냐? 완전히 나만 남았나이다 하는 자리입니다. 둘이 아니고 혼자 남는 자리입니다. 그 누구한테도 형언할 수 없는 지극히 외로운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는 그런 입장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한 고개를 넘을 적마다 반드시 그런 자리가 있습니다. (25-36, 69.09.21) 오늘날 통일교회 선생님이면 선생님 자신이 내정을 몰라서는 탕감역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내정을 통일교인에게 털어놓고 의논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부모가 잘못했기 때문에 부모될 수 있는 사람만이 해결지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것은 난문제로서 첩첩이 가로놓여 있지만 외적으로 보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보면 세계적으로 엇갈린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으니 여기에 깃들어 있는 모든 사연을 탕감하고 나와야 할 길이 참부모가 가야 할 길입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뜻을 펴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뜻을 펼 수 없는 실정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선고를 받게 될 때도 그것을 무난히 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환경에서는 뜻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의 길로 내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연이 오늘날 통일교회에 깃들어 있습니다. (25-26, 69.09.21) 참부모가 가야 할 길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정의 십자가를 지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됩니다. 이것이 참부모가 가야 할 운명의 길입니다. 또한 그 길은 하나님이 협조해서 넘는 길이 아니라 홀로 넘어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넘을 때 하나님이 협조하여 같이 넘었다면 탕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외면하는 입장에서 홀로 넘어야 합니다. (25-36, 69.09.21)
참부모의 기준 참부모의 기준점은 특정한 하나의 남성입니다. 그 남성은 6천년의 복귀섭리역사 과정에서 모든 국가면 국가, 민족이면 민족을 중심삼고 그 과정에서 실수했던 수많은 남성을 대표하여 승리의 결정권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기준을 세운 터 위에 하나의 상대적인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해와가 사탄에게 끌려감으로써 잃어버렸던 것을 전부 다시 찾는 역사를 해야 됩니다. 아담을 통해 해와가 빚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그 남성의 상대가 재차 빚어져야 됩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싸움을 지금까지 해 나왔습니다. 통일교인들도 축복받으려면 반드시 그 기준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 기준을 넘는 데에 있어 7년노정은 불가피합니다. 이 7년 고비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생애를 바쳐 싸운 것은 그 고개를 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4천년 역사에 해당합니다. 원래 예수님 때에 이것을 연결해 7년노정을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지 못함으로써 2천년이 연장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재현해서 그 4천년 역사에 해당하는 역사적인 탕감노정을 걸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복귀원리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내용과 성경 가운데 미지의 사실을 전부 해명했습니다. 그리고 아담 가정에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그리고 모세 시대를 거쳐 예수님 시대까지 제일 깊은 곳을 파고 들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펼치면 크지만 손에 쥐면 한줌에 쥘 수 있는 그물과 마찬가지로 심정적 기준 앞에 한줌에 쥘 수 있는 내용을 가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려서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건으로 제시해 사탄세계에서 승리를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세계에서 통일교회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으며, 수많은 영통인들에게도 선생님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4천년 역사 속의 많고 높은 고지를 전부 평지로 만들어 심정적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승리적 관계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을 선생님이 세워 아무런 지장이 없는 내적 결정을 지어 놓았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사적인 탕감노정을 결정지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어떠한 일에 결단을 내리면 그 결단은 세상뿐만 아니라 영계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것은 영통한 사람들에게 알아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외적 세계만이 아니라 영적 세계까지도 들이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천년 역사 속의 모든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산정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많은 우리 조상을 대해 슬퍼했습니다. 수많은 우리 조상한테 배반당하고 배척받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모든 사연들의 깊은 골짜기보다 더 깊은 골짜기에 들어갔습니다. 조상들이 가지 못한 깊은 골짜기까지 들어가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선생님의 한마디 위로가 6천년 동안 지상에 왔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위로를 대표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통일교인들은 그런 사실들을 너무나 막연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원리는 그렇지만 실감이 안 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멀다는 것입니다. 심정적으로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그 기준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 기준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하며, 영적 체험에 들어가려면 기도를 해야 됩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원수세계에 들어가서 반드시 싸워야 합니다.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중심삼고 옳은 것을 찾아서 생명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통일교회를 볼 때, 지금까지 믿고 있는 통일교인들이 알고 있는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장막을 헤치고 들어간 깊은 골짜기가 있고, 역사 과정에서 느끼지 못하는 깊은 내용이 있습니다. (25-32, 69.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