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야기
3권 예수님의 사랑편
제1장 예수님의 사랑
소제목
1. 하나님의 뜻과 메시아
2. 하나님의 자랑이 된 예수 그리스도
3.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4. 인류의 조상이요 참부모로 오신 예수님
5. 예수님은 우주적인 혁명의 주인공
1. 하나님의 뜻과 메시아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인간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주님이 다시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이 왜 다시 와야 되느냐? 주님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다시 와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영원하고 불변하고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은 단 하나지 둘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정하고 그분이 뜻한 것은 반드시 성사하고야 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분부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의 말씀을 한 것은, 선악과를 따먹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이루어질 뜻의 세계로 가게 하기 위해서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이 본래 의도한 뜻의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타락은 공중이나 혹은 높은 데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본래 뜻하던 그 뜻에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뜻 가운데 있었다면 영원할 수 있는 영생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뜻에서 떨어짐으써 사망의 세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떨어졌다는 것은 병난 것을 말하는 것이요, 고장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6절을 보게 되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것을 탄식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이 후회한 것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타락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타락하지 않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는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74-137, 74.11.28)
본래 하나님이 의도한 뜻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타락하지 않았던, 본래 하나님의 의도한 뜻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냐?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 가운데서 완성을 향하여 자랐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오늘날 인류역사노정에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자란 참다운 형제의 전통이 성립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형제의 전통 위에서 이들이 성숙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일남 일녀를 지은 것은 이들이 성숙하면 반드시 성례식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러다가 친히 축복하여 결혼식을 올려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더라면 참된 부부의 전통이 남아졌을 것입니다. 또한 서로 사랑하는 참된 부부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남으로써 참된 부모가 성립되었을 것이며, 이 참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딸은 죄 없는 선한 아들딸이 되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인류역사는 하나님이 보증하는 사랑 가운데서 참된 부모의 죄 없는 자녀로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참된 가정이 생겨났으면 그 가정을 중심삼고 횡적으로 벌어짐으로써 참된 종족이 형성되었을 것이고, 그 종족은 참된 국가로 발전되었을 것이며, 그 국가는 참된 세계로 발전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는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하나님을 세계를 다스리는 왕으로 모실 수 있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주권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섰다면, 오늘날 우리 인류는 단일민족, 즉 아담의 전통을 이어받은 아담의 후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그 아담이 하던 말과, 아담이 이룬 생활 방도를 전통으로 해서 이상적 문화세계를 창조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는 하나님을 영원히 주권자로 모시고 하나님의 주관을 받는 나라기 때문에 그곳이 바로 지상천국입니다.
하나님에게 치리 받던 사람들이 지상에서 살다가 가는 곳이 영계의 천국입니다. 그렇게 산 어머니 아버지가 천국에 가게 됨과 동시에 그 가족이 같이 가고, 그 종족․민족․국가․세계가 몽땅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 자리에는 구주가 필요 없습니다. 거기에는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기도니 하나님을 믿는다느니 하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오늘날 신앙이니, 종교니, 구주니, 지옥이니 하는 말이 생겨나게 된 동기는 타락으로 인해 초래된 결과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이 구상한 뜻의 세계를 한 번도 이루어 본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타락한 결과의 세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74-138, 74.11.28)
타락으로 말미암은 결과의 세계
타락한 결과 우리는 사망권 내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한 그 말씀과 같이 우리는 사망권 내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예수님은 사탄 마귀가 우리 인류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야 할 아담과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사탄 마귀를 아버지로 모시게 됐다는 이 원통한 사실이 바로 타락의 보응입니다.
그런 연고로 사탄의 품에 품겨 자라는 아담과 해와는 서로가 원수의 입장에 섰습니다. 해와가 아담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타락한 아담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타락시킨 해와는 아담의 원수입니다. 이처럼 타락으로 서로 원수와 같은 형제의 전통, 죄를 가질 수밖에 없는 형제의 전통이 세워졌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성숙한 것이 아니라 사탄 마귀의 지배하에서 자라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 결혼식으로 인하여 죄 있는 부부의 기원이 성립되었습니다. 죄 있는 부부의 성립과 더불어 죄 있는 가운데서 아들딸을 낳음으로써 죄 있는 부모가 성립되었고, 죄 있는 아들딸이 번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가 원수와 같은 입장에서 싸우는 악한 형제들이 번식되어 그 가정들이 종족을 이루고, 종족들이 분립되어 국가를 이루고, 국가들이 분립되어 세계를 이루어 놓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1절에 이 세상 임금을 사탄 마귀라고 했듯이, 자연히 이 세계는 사탄 마귀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할 텐데 어떻게 사탄 마귀, 하나님의 원수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왕이 되었느냐? 이것은 인간 타락의 결과입니다. 더 나아가 공중 권세까지도 사탄 마귀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녕 하나님이 원하던 뜻의 세계냐? 아닙니다. 타락함으로 인해 슬픈 결과의 세계가 초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에 떨어진 인간들이, 하나님의 원수, 사탄 마귀 앞에 지배받는 이 인간들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원하는 본연의 뜻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느냐? 불가능합니다. 사탄이 돌이켜 주지 않는데, 그걸 뚫고 나갈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타락함으로 인해 사탄 마귀가 생겨났다는 것과 사탄이 세계를 지배하여 사탄주권세계가 되었다는, 사탄이 이 땅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죄를 청산하고 사탄 마귀의 주권을 타파해서 인류를 하늘편으로 찾아오고 사탄을 완전히 매장할 수 있는 계획을 하나님은 다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74-140, 74.11.28)
메시아의 사명
오늘날 기독교니 뭐니 하는 종교권을 왜 만들어 놓았느냐? 그것은 악한 사탄 마귀에게서 분립해 본연의 뜻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준비의 터전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탄 마귀의 주권을 빼앗기 위해서는 개인으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편에 선 강력한 하나의 나라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이 주류적인 입장에서 택해 준비한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요, 그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지금 우리는 구원섭리과정에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본연의 자리에서 떨어진 것을 다시 찾아가는, 복귀해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복귀의 길이 곧 구원의 길입니다. 구원섭리의 뜻은 본래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뜻이 아닙니다. 이 구원섭리를 끝내고, 타락하지 않았던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책임자로 오시는 분이 바로 구세주,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사탄세계의 주권을 빼앗아 인류로 하여금 속죄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본연의 뜻의 세계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서 오십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본연의 세계로 들어갈 때는 종교도 끝나고, 구세주의 사명도 끝나고, 지옥도 끝나고, 사탄 마귀와 이 사탄세계의 모든 것이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늘나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본연의 뜻의 세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타락한 세계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우리는 구주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메시아가 오시는 뜻이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본연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았고, 인류가 본연의 세계로 돌아가려면 개인보다도 국가 형태를 갖추어 세계 형태로 확대시켜서 하나님 편의 공고한 터전을 넓히고 사탄세계를 굴복시켜 사탄주권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렇게 하여 하나님 편으로 돌이키려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인 것을 알았습니다. (74-142, 74.11.28)
하나님의 소원과 예수님을 보낸 목적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목적은 잃어버린 아담을 찾기 위한 것이요, 잃어버린 아담을 찾아서 잃어버린 해와를 재창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담으로 지음받은 기준에서 아담 대신 사명을 짊어지고 해와를 이 땅에서 다시 찾아 참된 부모의 자리에 서야 됩니다. 예수님을 그런 자리에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예수님을 보낸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세워 그를 위주로 참다운 부모가 생겨났으면 참다운 자녀를 번성시켜 그 자녀들로 하여금 참다운 부모의 축복을 받아 참된 가정들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 가정들을 점점점 발전시켜 참다운 종족, 참다운 민족, 참다운 국가, 참다운 세계를 이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참부모의 혈연을 통한 백성을 세워 한 나라를 이루려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담 입장이면 예수님은 아담이 타락하여서 실수하였던 모든 내용을 탕감해야 됩니다. 아담의 자리에서 하나의 가정을 찾아, 여기에 자녀를 세워서 가인적인 자녀를 아벨적인 자녀로 복귀시켰다는 조건을 세워야 됩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세계를 가인적인 세계에 세움으로써 찾아진 메시아의 후손을 아벨적인 세계형으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상극적인 입장에 서지 아니하고 하나의 주체를 대해 대상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예수님을 아벨적인 국가를 대신할 수 있는 중심 대표자로 모시고 그 앞에 굴복했더라면, 거기서부터 하늘나라의 부모가 생겨나고 하늘 나라의 가정이 생겨나고 하늘나라의 족속과 민족과 나라가 생겨나니, 그 나라를 중심삼고 하늘 왕궁을 위주한 천지의 중심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목적이었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우리에게는 아벨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천하를 대표할 수 있는, 하늘과 땅을 대신하고 아버지의 창조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 즉 아버지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대표할 수 있는 실체로 빚어 만든 것이 아담이었는데, 그 아담이 깨져 나감으로써 다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후아담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찾아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소원하던 아버님 대신의 실체를 위주로 하여 오늘날 인간과 하늘을 연결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후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셔야 합니다. 메시아로 모시는 데 있어서는 세계적인 아벨적 대표로서 그 가치를 하늘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로 알고, 그 앞에 굴복하여 내 본질을 잘라 버리고 접붙임으로써 나도 그와 같은 가치의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알고 굴복했더라면 거기에서 가인과 아벨세계를 복귀하여 종에서 양자의 과정을 거쳐 직계 자녀의 자리까지 나가게 됩니다.
직계 자녀의 자리까지 나간 다음에는 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부모를 찾아서는 뭘 할 것이냐? 이 천지간에 사탄이 나라를 만들어 놓고 세계를 호령하고 있으니, 이 사탄세계를 대신한 하나의 국가를 만들고, 하나의 주권을 세워서 사탄세계를 호령하는 선의 국가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해야 할 책임이었습니다. (153-221, 64.1.3)
예수님 앞에 이스라엘 민족이 취해야 했던 자세
아담이 타락한 이후 예수님 때까지의 4천년 이스라엘 역사는 외적으로는 세계를 찾는 역사였지만, 내적으로는 단 한 사람을 찾는 역사였습니다. 그 한 사람이 와서 세계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이 가정의 기반과, 종족의 기반, 민족의 기반, 국가의 기반을 닦지 않고는 이 세계를 선한 세계로 복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이 오기 전에 선민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의 선한 가정, 하나의 선한 씨족, 하나의 선한 민족, 하나의 선한 국가를 미리 세워 놓았습니다. 그렇게 세워 놓은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의 남성이 나타나 그 나라와 하나되는 날에는 자연히 가정이 찾아지는 것이요, 종족이 찾아지는 것이요, 자동적으로 민족이 찾아지는 것이요, 나라도 저절로 찾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라를 중심으로 준비했습니다. 외적으로 보게 될 때에는 나라를 위해 준비했지만, 내적인 입장에서는 한 사람을 위해 나라를 약속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이스라엘 민족은 몰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위해 이스라엘 나라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서부터 섭리의 방향과 엇갈리게 되었고, 죽음의 길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예수님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 민족이 비참하니까 비참한 이스라엘을 구할 구주가 영광 가운데에 오셔서 로마를 누르고 원수의 세계를 정복해 줄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주님으로서, 구주로서 예수님이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 앞에 굴복해야 했습니다. 로마제국 앞에 굴복하는 것 이상으로 굴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것을 몰랐습니다.
그때 사탄세계를 대표한 세계적인 왕국 앞에 굴복당한 이스라엘 민족이 취해야 했던 본연의 자세는 어떤 것이었는가? 로마제국 앞에 강제로 굴복당한 이상으로 예수님 앞에 굴복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제국 앞에 굴복하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 앞에 굴복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예수님의 수난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를 제쳐놓고 로마의 압제 하에 있을 때보다 더한 수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고 하며 예수님과 규합하였더라면 예수님은 절대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었더라면 예수님은 가정을 찾을 수 있었고, 이스라엘을 대표할 여성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4천년 역사를 탕감할 수 있는 여성을 찾을 수 있게끔 내적인 인연을 미리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과 하나되기만 했으면 이러한 하나의 여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 여성을 찾음과 동시에 하나의 씨족을 찾는 것도 문제없었습니다. 하나의 종족, 하나의 민족을 찾아서 일시에 출발함으로써 세계적인 행차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게 되어야 할 섭리는 근본적으로 전복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나라가 받들지 못하니 민족을 찾아 헤매야 했고, 민족이 받들지 못하니 종족을 찾아 헤매야 했으며, 종족이 받들지 못하니 가정을 중심삼고 섭리해야 될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정마저도 그를 받들지 못했습니다. 결국 가정이 깨어져 나가니 가정을 이루어야 할 해와, 즉 상대적 여성을 찾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30-212, 70.3.23)
예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의 처지
반드시 국가와 민족과 종족과 씨족과 가정을 중심삼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 가정을 중심삼은 여성을 찾지 않고는 이스라엘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배반을 하고, 민족과 종족과 가정이 전부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외로운 자리에 선 예수님 앞에는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위해야 했던 나라는 망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위해야 했던 민족도 망해야 됩니다. 그 종족, 그 가정 전부가 산산조각이 나야 됩니다. 그래서 2천년 동안 이스라엘 나라가 그러한 역사노정을 걸어온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됩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세웠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배반했으니 그들은 원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2천년 가까운 역사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인간들에게 밟힘을 당하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위하여 오신 만왕의 왕 되시는 메시아를 모시지 못한 것을 탕감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몇천 년 동안 탕감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다시 나라를 회복해서 이스라엘 주권을 찾게 되면 또 싸워야 됩니다. 옛날 로마제국과의 싸움 이상의 싸움을 사방으로 해야 됩니다. 그때는 일방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출발할 때 국가적 기반 위에서 사방으로 세계를 향하여 출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국가를 대신해서 싸워 이겨야 할 책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었는데도 이스라엘 민족이 그 책임을 못했고, 예수님을 중심삼고 그 시대에 무난히 로마제국을 굴복시켰더라면 세계 전체가 굴복했을 것인데 도리어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그것을 탕감해야 됩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때 이스라엘 민족 600만이 학살당했던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지만 국권을 회복한 그 자리에서는 사방의 국가들, 즉 아랍국가들을 상대로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새로운 역사시대에 소생하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입장입니다. (30-214, 70.3.23)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들어야 했다
만일 유대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였더라면 오늘날 기독교는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세계 기독교가 민주 세계권을 움직일 수 있는 기반을 닦았는데, 산 예수님을 중심삼고 유대교 터전이 일치되었더라면 단시일 내에 세계를 제패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오늘날처럼 유대교인이 중동에서 이스라엘 주권 기반을 완전히 닦아 세계로 진출하는 데 있어서 신음하는 터전이 아니라, 벌써 세계를 지배하고 세계를 하나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를 위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왔지, 오늘날 기독교를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4천 년 동안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그 메시아를 맞게끔 하기 위해 4천 년 동안 준비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이 바라던 메시아가 왔는데 어찌하여 맞아들이지 못했느냐?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냐? 로마 총독 빌라도가 못박은 것이 아니라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잡아 죽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기독교가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주님이 오면 그를 잡아 죽이게 되는 것과 딱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에 와서 죽지 않고 이루어야 할 뜻을 다 못 이루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사탄 마귀의 주권을 깨부수고 사탄 지배하에 있는 세계 인류를 하나님의 본연의 뜻 세계로 돌아가게 해야 하는 것이 본연의 뜻인데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지 못했으니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다시 오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유대교를 평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릇된 것을 회개하고 이제라도 바른 길을 찾아가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유대교인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회개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 미국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 길이 유대교인이 국가적으로 세계무대에 나설 수 있는 하나의 길입니다. (74-144, 74.11.28)
유대교와 기독교와 통일교회가 바라는 메시아는 하나
그러면 도대체 기독교의 사명이 무엇이고 유대교의 사명이 무엇이냐? 주님이 오시면 주님과 완전히 하나돼야 합니다. 메시아가 와서 자, 이리로 전체가 가자 하고 지향하면 전체가 가야 됩니다. 전체가 하나되어 돌아가야 됩니다. 사탄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 나서면 거기에 협조해야 됩니다. 사탄을 추방하는 데 있어서 최대의 협조적 기반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대교인과 기독교인과 오늘날 통일교회가 바라는 분은 딴 사람이 아니라, 메시아 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고, 그 하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대표자가 메시아이기 때문에 유대교인이 바라는 메시아와 기독교인이 바라는 메시아와 통일교회가 바라는 메시아가 다를 수 없습니다. 한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방 종교에도 재림사상이 있어서 자기들의 도주가 다시 온다고 믿고 있지만, 다시 온다는 그 말이 그 교주를 지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올 메시아 한 사람 앞에 귀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방계적 섭리의 뜻 가운데서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가 문제입니다. 메시아를 만나지 못하면 본래의 하나님의 뜻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계 만민은 구세주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성립됩니다.
메시아 한 분을 중심삼고 보면 유대교는 맏형님과 같고, 기독교는 둘째 형님과 같고 통일교회는 세째와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입니다,형제. 그러면 유대교인들이 바라던 메시아와 기독교인들이 바라던 메시아가 한 사람인데, 유대교인들이 바라던 그 한 사람의 메시아가 기독교에서 믿는 예수님이냐? 만일에 예수님이 유대교인들이 바라던 메시아였다면 유대교인들은 책임 못 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기독교에서는 재림주를 바라고 있습니다. 두번째 주님을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도 재림주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은 메시아를 맞기 전에 유대교와 기독교와 통일교회에 하나되지 못한 내용이 있다면 이것을 밝혀서 하나 만드는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의 메시아를 두고 보면 모두 형제이기 때문에 유대교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할 입장이었고, 기독교는 통일교회를 받아들여야 할 입장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영계에 들어가 보니까 이 땅에 왔던 예수 그리스도는 2천 년 전에 유대교인들이 오기를 바라던 바로 그 메시아였습니다. (74-143, 74.11.28)
기독교는 선생님과 통일교회를 대해 이단이니 뭐니 하며 상당히 논란을 벌이고 있는데, 선생님이 이단이 아닙니다. 기독교와 유대교를 하나 만들고, 앞으로 주님이 어떻게 오시는가를 밝히 가르쳐 줘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런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하나님은 그 종 선지자에게 밝히 가르쳐 주지 않고는 역사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끝날에 벌어질 일을 예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두고 볼 때, 선생님이 그런 사명을 못 한다고 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결과를 두고 보십시오. 하나님이 같이 하면 흥할 것이고, 하나님이 같이 안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유대교나 기독교나 통일교회는 하나의 메시아를 중심삼은 한 형제이므로 엇갈린 모든 것을 다 해소해서 메시아와 더불어 죽든지 살든지 완전히 하나되어 메시아를 맞아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이 원하는 종교에 대한 뜻입니다. (74-146, 74.11.28)
2. 하나님의 자랑이 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자랑이 되어야 했던 아담 해와
천지 만물을 지은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천지 만물과 천사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자랑의 실체로 지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만물 앞에 서면 만물은 아담 해와에게 경배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지어 놓은 피조의 동산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깨어졌습니다. 즉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 앞에 자랑이 되어야 했던 만물의 가치가 제대로 나타날 수 없었고, 무형세계의 가치의 중심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인간이 그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랑의 뜻으로서 하나님 대신 만물 앞에 나타나 화동의 중심으로서의 영광을 받아야 할 인간의 위치가 근본적으로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타락 이후 6천년이 경과한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찾아온 표준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고, 형상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대신하고, 천륜의 행사를 대신한 전체의 대표자,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대표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 이후 4천년 만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대신하고, 외적 형상을 대신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이념으로 세웠던 자랑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수행해야 했던 본래의 사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일대에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어느 부분 부분 또는 어느 한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심정과 형상을 대신한 자녀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책임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실체로 나타나 먼저 만물 앞에 자랑할 수 있어야 했고, 그 다음에는 사탄 앞에 자랑할 수 있어야 했으며, 천천만 성도들 앞에 자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기뻐하며 영광을 누리려던 것을 복귀하는 한 날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중심존재인 예수님을 세워놓고 역사하며 섭리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나라를 건설하게 했고, 그 가운데 당신 앞에 세워질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칭송하고, 하나님이 자랑하고자 했던 그 기준에서 감사의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했다면 이토록 오랜 6천년 동안의 역사적인 서러움은 남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1-29, 56.5.16)
하나님의 자랑으로 세워진 믿음의 왕 예수님
하나님의 자랑으로 나타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 보여지는 것과 이스라엘 민족이 자랑하고 있던 것과는 판이했습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대해 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하던 것과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뜻을 받들면서 싸우시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랑하는 내용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랑할 수 있었던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 앞에서 자기들이 그때까지 세워 나오던 민족적인 자랑을 포기해야 하는 자리에 처했습니다. 자기들의 자랑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자랑하기 위한 새로운 자랑을 가지고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온유 겸손히 엎드렸던들 십자가의 어려운 관문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남아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십자가의 도리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구원되었다는 말은 있어도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구원되었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축복하여 십자가에 속죄의 권한이 있음을 믿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에 속죄의 권한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영적인 속죄가 가능하지만,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실천하였더라면 영․육 아울러 구속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타락했고 4천년 동안 섭리역사가 연장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연장된 4천년 역사를 가로막기 위해 사탄 앞에 세운 하나의 중심은 믿음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믿음의 왕으로 이 땅에 나타나셨습니다. 4천년 역사가 흘러오는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대할 수 없었던 온 만민들 앞에 예수님은 믿음의 왕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자랑하실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였지만, 그러한 믿음으로써는 하나님의 천륜의 심정을 통한 상하의 내적인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또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왔다 갔지만 그들이 믿고 그들이 따라가던 것을 통해서는 하나님 속에 사무쳐 있는 사랑의 원칙을 알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성도들이 걸어 나오던 그 역사적인 믿음의 과정 전체를 도맡아서 혈혈단신으로 모든 사탄의 역사를 끊어놓으려 했습니다. 4천년의 믿음을 총결산하는 입장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중심형으로, 믿음의 주인공으로 왔다 가셨습니다.
이 하나의 기준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대신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했는데, 선포하신 말씀은 구약 말씀 그대로가 아니었습니다. 구약 신앙을 가지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선지선열들이 말씀하고 예언했던 그 한계권 내에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믿고 나온 구약성경의 말씀권 내에서의 메시아의 사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 없는, 그때까지의 역사상에 없는 믿음, 그때까지 나타나지 아니한 새로운 믿음, 세계의 어떤 환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믿음을 가진 믿음의 대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대표자, 믿음의 왕으로서 구약성경에 없던 새로운 말씀을 발표했습니다. 그 말씀은 신약의 말씀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어떤 한계 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시기 전의 4천년 역사와 예수님의 30여 생애와 영원한 미래에까지 미치는 그의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억조창생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반대하는 자리에 있더라도 나는 그 뜻 하나만을 붙들겠나이다.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는 것을 나는 믿겠나이다 할 수 있는 믿음의 기준이 세워져야 예수님이 만민의 구세주, 믿음의 왕으로 설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과 믿음은 인간들이 4천년 동안 믿어온 차원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일대를 거쳐 먼 후대, 즉 영원까지 미치는 믿음,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고 그 당시에 나타나지 못했던 사랑과 선을 나타낼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상에 없는 믿음의 왕이었고,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1-31, 56.5.16)
사탄을 이긴 승리의 왕 예수님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이 수 천년 동안 사탄과 싸워 나왔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비로소 승리의 왕으로 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자랑한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조들이 이 땅에 와서 사탄과 싸웠습니다. 메시아를 보내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수많은 선지자들이 와서 사탄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탄을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4천년 동안 사탄과 싸웠지만 사탄을 점령하지 못했고, 사탄을 굴복시킬 수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비로소 사탄을 점령하고 굴복시켰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사랑의 원칙을 가지고 사탄을 굴복시켰습니다. 사탄을 굴복시키는 데는 사랑의 원칙이 아니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 앞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한 외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30여 평생의 생활을 보면 어느 한 부분 효자의 생활이 아닌 부분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생활은 밤이건 낮이건 어떤 시간도 떼어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 땅 위에 너 하나밖에 없구나 할 정도로 효자의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자기의 육신은 무시되더라도 만민의 구주로서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마음밖에는 없었습니다. 오로지 아버지여! 저 하나가 사라져서 당신이 4천년 동안 찾아오신 사랑의 대신 존재, 당신의 사랑을 받는 아들로서 그 사랑의 대가를 돌려 드릴 수 있는 효자가 되겠습니다 하는 이 하나의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민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렇다 할 수 없었습니다. 천지의 중심으로 맺어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연된 부자관계라는 천륜의 힘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환경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골고다 산상의 외로운 자리에서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알았고, 4천년 동안 고대하신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이 변치 않는 이상,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로서의 자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독생자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의 화신체로 온 피조만물 앞에 자랑했습니다. 사탄세계 앞에 자랑했습니다.
오늘날까지의 6천년 역사상에는 자기를 낳아 준 부모에게 효성을 다한 사람이 많습니다. 사탄 품안에서의 효자 효녀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할 수 있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려면 역사상의 모든 사탄권내의 효자 효녀들을 합한 이상의 가치와 실적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할 수 있고, 천상 천하에 유일하게 천륜을 대신한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이 수많은 군중을 바라볼 때 어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가치와 그들의 가치 사이에는 천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늠름하게 하늘 앞에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과 사랑으로 맺어진 부자의 관계에서 나오는 힘에 의해 사탄까지 망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권내의 많은 사람들이 사탄에게 동조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기준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나타나는 거기에는 원수들 앞에서 철옹성과 같은 방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중심삼고 모이는 곳곳마다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천년 동안 선조들이 승리한 것과 패한 것 모두를 합하여 자신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쟁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6천년 동안 사탄과 투쟁해 나왔는데, 어찌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4천년 동안 많은 선지자들이 승리한 것을 전부 합한 가치 이상의 승리의 실적을 거둘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우리의 선조들이 어떻게 사탄을 대해 승리할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 땅 위의 성도들에게 염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사탄을 굴복시킬 것이 아니라 오늘날 전체의 성도들이 모두 사탄을 굴복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30여 평생 승리의 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승리하지 못할 말은 피했습니다. 승리할 수 없는 말은 피했습니다. 예수님이 패할 수 있고, 사탄이 접근해 올 수 있는 말은 피했다는 것입니다. 남 보기에는 한 사람의 동네 총각이었지만 일단 전체를 책임지고 나셨기 때문에 그의 말이나 행동이나 소망은 전체를 승리의 기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말과 행동과 소망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수고하시며 다져 놓은 승리의 발판 위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은사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서 승리하여 이뤄 놓으신 승리의 발판 위에 서서 어떻게 하면 더 높이 올라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이 여러분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음을 알고 하늘에 올라갈 때까지 승리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성신의 사랑을 느껴서 하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승리하셨지만 십자가에 돌아가신 연고로 영적으로만 승리의 기대를 닦으셨습니다. 그래서 2천년의 역사를 종결해야 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영적인 기대 위에 서서 예수님의 몸을 대신하여 승리의 터전을 이루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우리에게는 영적인 구원을 완성시켜 주는 신약성경의 차원을 넘어서 실체적인 구원을 완성시켜 주는 새로운 말씀을 하늘이 이 땅에 선포하게 되면 사탄이 이를 반박할 것인데, 이때 반드시 사탄과 싸워 이겨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1-34, 56.5.16)
예수님은 전체의 뜻을 책임진 왕자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조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가? 예수님은 책임을 지는 왕자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날 때부터 요셉의 집에서 목수의 일을 했지만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요셉의 가정에서 목수의 일을 도우면서 가족의 생계를 떠맡고 있는 부모를 도와주는 생활을 했지만, 예수님의 마음에는 그것만이 생활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큰 뜻을 마음에 품은 동시에 작은 일에까지도 책임을 다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전부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완수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책임을 이 땅 위에 완수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30년 생애는 영원 불변의 실적, 책임을 다한 실적을 이 땅 위에 이루어 놓은 생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믿음의 복음이 남아 있는 한 그의 생애도 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일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적인 면에서도 책임을 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역사 해온 뜻에 대해서도 홀로 책임을 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의 책임을 대신하여 나선 이가 이 땅 위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혈혈단신으로 책임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홀로 전체의 뜻을 책임지는 것에 대해 외로워한 반면 더 큰 책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루하루의 생활은 전체적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발판을 놓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30년 준비시대와 3년 실천시대, 3일간의 완성시대까지 예수님은 사탄을 굴복시키는 것과 그 토대 위에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켜 드리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임을 절감하며 산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순간에도 이 책임을 잊어버린 일이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산정에 나갈 때에도, 온 만민이 비방하고 사탄이 조롱하는 최후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맡은 바의 천륜의 책임을 홀로 감당하겠다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책임완수의 일념을 갖고 십자가의 고비를 넘었기 때문에 부활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을 재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었으므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가셨다가 다시 오셔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부활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서도 흩어진 제자들을 염려했고, 무덤의 3일간에도 이 제자들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부활하신 후에도 갈릴리 해변가로 제자들을 찾아다니셨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책임감이 없었던 그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비록 어려운 자리에서 배척한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은 부활 후에 먼저 갈릴리로 찾아가셔서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의 고개를 넘을 때 변하지 않는 제자들로 세워 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인격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제자들과 그 이후의 수많은 성도들, 2천년이 경과한 오늘날 우리들까지도 책임지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은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므로 예수님은 전 인류까지 책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계신 것이 아니고, 잘 사는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생사가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려운 일이 많지만 이 이상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자들은 까딱 잘못하면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칼날과 같은 아슬아슬한 선상에 서 있는 사람들을 모두 오른편으로 끌어내는 책임을 예수님은 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는 옛날에 30여 평생을 지낼 때도 그랬고, 죽음의 길에 들어섰을 때에도 그랬으며, 어느 때 어느 시기에도 한결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인간들은 이런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 책임과 사명, 이 한 뜻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1-37, 56.5.16)
전체의 책임을 감당해야 할 우리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을 모시려면 예수님께 책임을 지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4천년 역사를 책임지셨고, 당대의 인류를 책임지셨고, 돌아가신 이후 2천년 동안 인류를 책임져 나오셨는데, 우리 자신들도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 책임을 지우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스스로 아바 아버지여 2천년 동안 책임져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려움을 알겠나이다 하면서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책임을 지고 계신 예수님을 원통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보잘것 없는 우리들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머리 숙일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여! 부르면서도 뼈가 녹는 듯한 심정, 살이 녹는 듯한 심정을 느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비로소 4천년의 뜻을 책임지려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너 하나만이 내가 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구나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모든 책임의 보따리를 뒤집어 쓸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세워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전체의 책임을 감당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책임하는 그 일이 어렵다면 어려운 그 일을 나에게 지워 주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심정으로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나타나 염원하시는 그 심정을 저를 통하여 나타내시옵소서 저를 통하여 보여 주시옵소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끝날에 남아질 무리입니다. 이런 무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2천년 동안 인류를 위해 책임을 져 나오시던 그 목적을 어디에서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역사에 대한 책임과 현실에 대한 책임과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하던 그 책임을 우리에게 지워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하늘 앞에 책임을 돌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4천년 동안 안타까워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땅 위에서 책임의 왕으로서 역사적인 모든 책임을 감당해 나오시던 예수 그리스도 대신 그 책임을 지고 싸우겠나이다. 원수 사탄과 수천만 인간들이 환영하지 않더라도 제가 대신 책임지고 싸우겠나이다라고 기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와야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의 동산에서 쉬실 수 있습니다.
끝날에 들려오는 것은, 내 생명의 호소를 들을 자가 누군고? 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을 물려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호소를 들어줄 사람이 누구인가! 하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만민을 위해서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쉬지 못하시고 아직까지 기도하고 계신 것은 예수님께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서지 못할 자리에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오늘 우리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천년 동안 수고하고 계신 예수님을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생명을 끊어서라도 책임을 완수하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생명의 책임이 이 땅위에 남아 있습니다. 이 생명의 책임을 완수해야 하는 때가 재림시대입니다. 이 생명의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 나타남으로써 재림시대는 시작됩니다. 그는 역사적인 생명의 책임과 미래적인 생명의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기에 여러분도 최후의 싸움에서 그와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1-39, 56.5.16)
예수님을 내세워 자랑했어야 할 인류
예수님은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한 결정체(結晶體)요, 사랑과 심정의 화신체(化身體)였습니다. 또 그의 말씀과 사정과 소망과 심정은 하나님의 전체 속성을 대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을 대신하고 자랑할 수 있는 한 존재로 세웠던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이라는 긴긴 세월을 참아 나온 끝에 예수님을 자신의 대신자로, 자랑할 수 있는 중심존재로 보냈는데, 그러한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자기를 한번도 자랑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한번도 자랑해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만큼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들어 자랑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오셨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가정과 교단과 민족과 세계 앞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4천년 동안 고대하던 자랑의 결실체로 오셨기 때문에 자신을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 앞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수만 군중 앞에 자기를 세워 자랑할 발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세울 때에는 하늘땅의 모든 피조만물 앞에 자랑하고 사탄 앞에까지 자랑하기 위하여 세웠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느 한 사람도 그를 자랑하지 않았고 하나의 가정도 하나의 교단도 하나의 민족도 세계도 그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을 배반한 종족의 후손인 우리는 하늘 앞에 위신과 체면을 세울 수 없는 무리입니다. 역사적 죄과를 저지른 우리 인간은 자기를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위치에 서지 못하고, 그런 환경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사람과,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교단과,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민족을 만나지 못한 것이 하늘의 무한한 슬픔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이 그를 4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세웠을 때 황공하옵니다 하고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에 사무친 것은 그 세우신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변명하기보다 나를 세우기 위해 수고하신 아버지의 소원이 이렇게 될 줄이야?라고 탄식하며 하늘 앞에 머리를 숙였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러한 심정을 가졌던 예수님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세계 앞에 세우고 싶었던 자랑의 한날을 이루어 그를 모셔야 하는 것이 자신들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지금까지 바라는 소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조하고 인류를 세워 자랑하고 싶었던 그 본연의 심정을 깨달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자랑해야 할 예수님, 영광의 모습으로 자랑해야 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처참한 모습이 되었던 억울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 형틀을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걸어가던 예수님의 마음, 민족을 대하여, 하늘땅을 대하여, 사탄을 대하여 품으신 그 원한의 심정을 해원하고 싶은 마음이 여러분의 가슴에 가득 차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하늘 뜻에 대한 간곡한 심정이 사무쳐야 됩니다. (5-248, 59.2.8)
예수님을 자랑해야 할 우리
심정의 결실체로 오셨고, 인류의 소망의 결실체로 오셨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과 끊을 수 없는 부자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해 오셨던 참아버지를 원한의 자리에 몰아넣은 것이 우리의 선조들이었고, 사탄이 저지른 행사였으니,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그 선조들의 죄를 청산 짓고, 사탄을 심판하고 싶은 불타오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혈육에는 악성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이여! 힘을 주시옵소서. 하늘이여! 저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고함을 칠 수 있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됩니다.
자랑의 동산이 슬픔의 골고다로 변하다니 이 웬 말입니까?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할 줄만 알았지, 하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예수님을 자랑하지 못하고, 하늘을 대해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산 제단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던 예수님의 심정을 자랑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땅에서 찾으려던 하나의 사람과 하나의 가정과 하나의 민족을 붙들어서 하늘의 뜻을 이루려 했던 심정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버리더라도 우리가 최후에 해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저지른 모든 죄를 청산하고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여 하늘이 그렇게 찾고 있던 하나의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가정과 종족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그러한 선민이 나타나야 하고 그러한 천민(天民)이 나타나야 합니다. 인간의 사정이 아무리 억울하고 어떠한 곡절이 맺혀 있더라도 그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뜻을 이루기 위한 마음이 여러분에게서 솟구쳐 올라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상봉한 바울은 그날부터 예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면목이 없는 자신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위해 살려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겠다는 심정에 사로잡혀 죽으나 사나 당신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새로운 터전이 여기서부터 닦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그의 심정을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정과 소원을 자랑하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이 찾고 있던 신부를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찾고 있던 신부를 자랑하는 동시에 예수님이 찾고 있던 가정, 민족, 국가, 세계를 자랑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드러내어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자랑하고자 하는 우리들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를 가로막고, 나를 찢고, 나를 핍박하는 십자가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며 가는 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가는 걸음입니다. 이것은 무한히 슬픈 일입니다.
실체 예수님을 자랑해야 되는데 골고다의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될 조건이 인간 앞에 남아진 연고로 그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으면 여러분 자신들은 자랑의 조건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무한히 고통당했다는 이 하나의 자랑의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의 심정이나 예수님의 심정을 지닌, 온 만상에 대하여 자랑의 조건을 갖춘 하늘의 아들딸들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런 세계를 알고 감정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느낀다 할지라도, 실제로 여러분이 활동하는 생활권내에서 자랑의 조건을 갖추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장 13절)고 한 것과 같은 기준을 갖고 나서야만 하나님이 우리를 믿을 수 있고 예수님이 우리를 믿을 수 있는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 자랑할 수 있고 예수님이 우리를 세워 자랑할 수 있습니다. (5-250, 59.2.8)
자랑이 된 예수님과 우리의 사명
하나님은 사랑하는 예수님을 세워서, 믿음의 예수님을 통하여, 혹은 진리의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들을 사랑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마음으로라도 믿음의 예수님을 본받으라 할 때, 예, 그렇소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승리하신 예수님을 본받으라 할 때 그렇소이다,책임지고 계신 예수님을 본받으라 할 때, 예, 그렇소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어느 한 때, 어느 한 시간도 쉬시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쉬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랑으로 세웠던 이런 조건들을 여러분들이 대신 맡아야 됩니다. 그리고 영계에 가신 예수님의 자랑의 조건을 이 땅 위에서 이루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먼저는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믿는 것을 자랑해야 되고, 다음엔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자랑해야 됩니다. 책임지지 못하는 세상에서 책임지는 것을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형편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도 보잘것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인간들이 사탄과 싸워야 할 때, 아바 아버지여, 이 세계 만 인간이 사탄과 싸워 이길 수 있게 힘을 주시옵소서. 온 인류가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체의 적을 맞아 혼자 싸워서 승리해 가지고 아버지여, 기뻐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계의 모든 책임을 지고 나가는 모습을 하나님에게 보여 드리고 억천만 인간, 혹은 천천만 성도들과 피조세계 앞에 책임지고 나가는 중심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하여 땅을 대한 하나님의 원한을 해원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펼 수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랑이 영계의 예수님을 통하여 땅 위의 우리에게 미치고, 땅 위의 우리를 통하여 만물세계에도 그 자랑이 미쳐야 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창조이념, 인간을 만물의 주인공으로 세워 만물 앞에 자랑하려고 했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인간과 만물이 하나님에게 감사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1-41, 56.5.16)
하나님과 예수님이 자랑하실 수 있는 내가 되자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을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으나 그것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로 불쌍한 죄인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길에서도 하나님 앞에 자랑해야 되겠다는 심정을 갖고 가신 예수님의 생애를 바라보며, 오늘날 우리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에게서 열매맺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은 신부를 세워 그 열매를 맺고자 2천년 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이것을 알고 여러분 자신들은 예수님의 신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은 존재, 예수님이 자랑하고 싶은 존재, 나아가 여러분이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어린양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자랑하려 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있는 전후 좌우 상하의 모든 것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자신의 주위에 속한 모든 것을 자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전체의 주인인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자랑의 조건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끝날에 처한 우리는 자신을 냉정히 비판해야 됩니다. 나는 누구를 통하여 자랑하고 있습니까? 하늘은 누구를 통하여 자랑하고자 하며, 예수님은 누구를 통하여 자랑하고자 하며, 나는 누구를 통하여 자랑하고자 합니까? 하늘을 내세워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고, 예수님을 내세워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고, 온 만물을 내세워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께서 자랑하고 싶었던 본연의 모습, 아버지의 심정을 대신한 자랑스런 모습이 여기 있사오니 이 몸을 내세워 사탄 앞에 자랑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랑의 마음과 생명의 권한과 본연의 성품을 갖추어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내가 되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모든 것을 피조 만상 앞에 자랑할 수 있으며, 만 인간 앞에 자랑할 수 있으며, 삼위신 앞에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탄까지도 옳소이다. 당신이 세우신 하늘의 아들딸이요, 그들은 하늘이 자랑할 만하오니 그들을 내세워 영원히 당신의 영광을 누리시옵소서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존재가 나타나기를 열망하며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그 소원의 한날, 자랑의 한날을 찾아 죽음의 고개도, 슬픔의 고개도, 억울함의 고개도, 피의 고개도 넘으며 찾아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었던 본연의 심정을 통해야 되겠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대해 내가 이 세계를 다 잃더라도 너 하나를 찾으면 만족하도다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그 사무쳤던 원한을 해원하는 동시에 소원과 이상을 성취해야 참다운 사랑의 중심과 하나될 수 있고, 영원히 떼려야 뗄 수 없는 부자의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이 우리를 영원히 자랑할 수 있고, 우리들 또한 하나님을 영원히 자랑할 수 있으며, 하늘 땅 위에 있는 모든 존재가 우리를 자랑의 조건으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입장에 서야 되겠습니다. (5-252, 59.2.8)
3.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1) 실체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실체의 하나님으로, 실체의 아버지로 오셨다. 그 아버지도 실체의 아버지가 계시는 동시에 무형의 아버지가 계신다. 우리 사람과 마찬가지다. 몸이 있는 동시에 마음이 있다. 내 마음의 실체가 몸인 것과 같이 무형의 하나님을 닮아 실체를 쓰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8-124, 59.11.29)
하나님은 무형(無形)의 신(神)으로서 눈물 흘리고 무형의 신으로서 피와 땀을 흘리는 것을 개의치 않았으나, 그것을 인간 앞에 실체(實體)로 보여 주지는 못했다. 그것을 실체로서 인간 앞에 보여 주고, 실체로서 인간을 품어 주기 위해 인류의 참아버지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10-278, 60.11.6)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냐?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닮은 분이다. 하나님을 닮은 예수님인데, 그 하나님은 어땠느냐?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원수를 잊어버리고 또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서 나온 분이 하나님이다. (138-174, 86.1.21)
실체의 하나님으로 만든 것이 아담 해와다. 그러니 아담 해와는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야 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일체가 되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야 할 아담이 빵꾸를 냈으니 그것을 때우기 위해 오신 것이다. 빵꾸라는 말이 속된 표현이긴 하지만 실감이 나기 때문에 쓴 것이다. (19-162, 68.1.1)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부르는 음성을 듣지 못하는 연고로 실체의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 주고, 실체되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무형의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내게 하여 선포하신 말씀이 곧 복음의 말씀이다. (1-47, 56.5.20)
예수님은 하나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의 동산을 성취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실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듯 예수님을 중심삼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3-323, 58.2.2)
2) 예수님은 하나님의 황태자
예수님은 이 땅의 구세주로 보낸 하늘의 황태자요,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다. 만군의 여호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10-264-20, 60.11.6)
예수님은 하늘의 황태자요, 만민의 구주요, 온 피조세계의 주인공으로 오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분으로,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고, 만민의 심정을 대신한 분으로 만민이 추앙할 수 있으며, 만물의 심정을 대신한 분으로 만물이 노래할 메시아, 구주로 보냈다. (9-328-7, 59.6.21)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황태자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천지 모든 만물의 대주재, 곧 주인이 다. 천지를 지은 분이요, 영원무궁토록 왕 중의 왕으로 계시는 분이다. 그러니 우리가 형용하지 못할 정도로 높고 크다. 예수님은 그렇게 크신 분의 아들로 태어난 하나님의 황태자다. 이렇게 말해야 실감이 난다. 메시아, 구주 하면 실감이 잘 안 나지만 하나님의 황태자라 하면 실감이 난다.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로 태어난 분이 예수님이다. 그런 예수님을 인간들이 잡아죽였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는가? (12-213, 63.5.15)
예수님은 하늘의 황태자, 하늘의 왕자인데도 불구하고 이 땅 위에 태어나실 때, 마굿간이 웬 말인가? 서러움에 북받쳐 있는 예수님의 서러움도 서러움이지만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내적 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300-8, 56.12.23)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그분은 하늘의 독생자요 하늘의 황태자이며, 만민의 구세주요 영광의 메시아로서, 고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다. 그러한 메시아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기뻐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분을 맞이하는 만민도 그분을 찬양하며 기뻐하여야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그분을 불신하고 저주했기 때문에 그 기쁨이 서러움이 되었다. (2-303, 57.6.30)
2천년 전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요, 황태자다. 이런 예수님이 와서 해야 할 사명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수습하고 로마와 대결하여 로마를 점령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 400년 후에 로마제국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로마를 점령해야 했다. 그러면 그때 이미 예수님의 이념은 세계적인 승리의 기반을 갖추었을 것이다. (13-167-9, 64.3.15)
예수님께서 30여 생애를 불쌍히 사시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목적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황태자요, 홀로 창조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천상천하의 주인공으로 오셨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자 예수님이 땅에 와서 고난당한 것은 예수님이 잘못하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민족과 교단이 몰라서 그랬고, 사회와 가정이 몰라서 고난의 길을 갔던 것이다. (3-332-8, 58.2.9)
예수님은 하늘의 황태자요, 만우주의 주인공이요, 만왕의 왕으로 오셨지만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다. 악을 대한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자랑할 수 없었다. 예수님이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참으신 것은 어느 한날 하늘의 법도를 완전히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4-187-6, 58.4.20)
예수님은 인류의 고난을 짊어지고 인간의 말단의 자리에서 출발하여 최후에는 골고다 산정까지 갔다. 그 자리는 예수님 일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자리였다. 오! 하나님의 아들, 하늘의 황태자, 하늘의 왕자의 모습은 어디로 갔던고! 인류의 메시아, 구세주로서의 그 모습은 어디 갔던고! 그 자리는 자신의 어떠한 가치를 일푼어치도 주장할 수 없는 분하고 억울한 자리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죽음의 고개를 넘어 하늘을 바라보시며, 하늘의 이념동산을 향하여 나가실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이념이 사망의 힘보다 강했고, 역사적인 어떠한 힘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고로 사망권을 헤치고 부활이 벌어졌고, 반대하는 인간들을 회개시켜 오늘날의 기독교가 승리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5-279-9, 59.2.22)
예수님은 진정한 아들로 왔고, 오빠로 왔고, 남편으로 왔고, 그 다음에 진정한 아버지로 왔고, 진정한 아저씨로 왔고, 진정한 할아버지로 왔고, 진정한 왕으로 온 분인데도 불구하고 이분을 잡아죽인 죄, 한 사람만 죽여도 용서 못 받는데, 역사 이래에 전체를 총합한 대왕의 권위를 갖고 왔던 그분을 죽인 죄는 무엇으로 용서받을 것인가? 용서할 법이 없다. (68-327, 73.8.5)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권을 대신한 형상적인 실체다. (153-123, 63.11.15)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요, 하나님의 황태자요, 하나님의 왕자다. 오늘날 대통령 아들만 돼도 뽐내고 그러는데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주인공이요, 시대적인 주인공이요, 미래적인 주인공으로 계실 수 있는, 영광된 자리에 주체로 계시는, 홀로 계시는 절대자 하나님의 아들이다. (150-96-11, 60.9.4)
예수님은 억천만상을 다 지은 하나님의 독생자다. 독생자는 하나님의 황태자다. 하늘 왕국에 영원무궁토록 계실 독생자 황태자다. 이런 목적을 바라보고 세운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목의 날이 곧 그 분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재림의 날이다. (7-173-10, 59.9.6)
오시는 주님은 무슨 예물을 갖고 찾아오시느냐? 인류의 메시아요, 하나님의 독생자요, 하늘의 황태자인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 위해 찾아오신다. 예수님과 같은 입장이 될 수 있는 영광스런 왕관을 부여하기 위해 찾아오신다. (8-331-11, 60.2.28)
예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이 보낸 황태자다. 하나님이 보낸 왕자다. 황태자로 오시는 메시아, 그 메시아 앞에 신부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자격을 갖추어야 되느냐? 신랑 될 그분 앞에 안팎으로 상대될 수 있는 자라야 한다. 그가 인류를 사랑하듯이 그 신부도 인류를 사랑해야 되고, 그가 하나님을 대하여 염려하듯이 그 신부도 염려해야 되고, 그가 현세로부터 앞으로의 세계를 책임지듯이 그 신부도 책임을 져야 된다.
그러한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복 달라고 기도하면 안 된다. 화를 저에게 주시옵소서라고 먼저 기도해야 한다. 왜냐? 복을 주러 왔던 예수님을 배반해 버렸기 때문에 그 역사적 죄를 나를 희생하여 탕감하고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아는 신부관은 그렇다. 내 죄를 용서받기 전에 역사적인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된다. 아담 해와가 저끄린 죄의 뿌리까지 몽땅 뽑아 뒤넘이칠 수 있는 결의와 함께 슬픔과 고통, 곡절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모든 것을 탕감하겠다고 하는 사람이라야 신부가 되는 것이다. (14-212-6, 64.12.27)
3) 사람이신 예수님
예수님도 역시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성은 우리와 같다. 그렇지만 자기 일신의 죄를 해결하지 못하는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전 인류의 과거와 미래의 죄를 책임지신 예수님은 수고로움도 잊으시고 외로운 자리에서 자기의 죄를 원망하는 개인 개인을 위로해 주시는 입장에 섰다. (1-162-7, 56.7.11)
예수님은 인자로 이 땅에 오셨다 가셨다. 예수님은 체(體)를 갖춘 하나의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가셨다. 우리가 영계를 통하여 보면 예수님은 우리와 일문일답할 수 있는 체를 갖고 계시기에,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고 감사드릴 수 있지만, 성신을 대해서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신은 체를 갖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1-162-8, 56.7.11)
하나님은 어떠한 수고를 해 나오는가? 본연의 개인, 즉 본연의 남성을 찾아 나온다. 또한 그 본연의 남성을 통하여 본연의 부모를 찾겠다는 것이다. 이 대표적인 본연의 남성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본연의 남성으로서 본연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모의 인연을 맺으려고 신랑 신부라는 이름을 찾아 나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는 이러한 테두리 안에서 발전해 나오게 된 것이다. (22-9, 69.1.1)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잉태됐다는 사실은 비로소 인간세상에 하나님의 사람이 복중에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장자권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이 구세주가 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예수님이 불교의 석가모니나 공자나 혹은 마호메트와 다른 게 뭐냐? 예수님은 혈통을 전부 다 깨끗이 해서, 사탄이 남겼던 장자권 참소권을 청산지어서, 복중에서 이것을 전부 다 전환시켜서 태어난 전통적 입장에 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의 혈육을 갖고 태어났지만 인류역사노정에 복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장자의 위치를 취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독생자다라고 했다. 독생자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된다. (137-17, 86.1.1)
사람 중에서 참다운 사람은 누구냐?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아담의 대신자다. (34-273, 70.9.13)
예수님은 참사람으로 왔다. 참사람으로 왔는데, 하나님과 같을 수 있는 기준은 뭐냐? 참사랑에 일치될 수 있는 내적 인연을 가진 것이다. 그 자리가 뭐냐?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가 완성해서 인류의 시조로서 참사랑의 대상권을 찾아 이상세계에 전개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참된 혈통적 인연을 파탄시켰으니, 이것을 청산해 놓고 본래의 참사랑을 중심삼은 부모의 자리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오셨던 분이 메시아다. 그 메시아는 완성한 아담격이다. 그래서 성경에도 예수님을 제2 아담이라고 한 것이다. (138-249, 86.1.24)
예수님은 어떠한 분으로 오셨느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참감람나무로 오신 것이다.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는 무엇이 다르냐? 외모로 보면 다 마찬가지다. 예수님도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고, 입고 먹고 자고 해야 된다. 우리와 모두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으로 보면 그 근본 뿌리가 다르다. (21-186, 68.11.20 )
4)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혈통적 내용을 갖추고 오신 세계적인 대표자이다. 또한 역사적인 내용을 전부 가려 가지고 오신 분이기에 그야말로 하나님을 위주한 혈통적인 내용을 지니고 태어난 첫사람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이런 동기와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참된 아들로 이 땅 위에 탄생하게 된 것이다. (35-222, 70.10.19)
예수님이 누구냐? 하고 물을 때 누구긴 누구야? 하나님의 독생자지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독생자는 대관절 어떤 분이냐? 우리 인간 세상에서 높다는 분을 치자면 독생자라는 건 아무개 집의 맏아들이라는 그 말인데, 그것보다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자다 하면 조금 더 실감이 날 것이다. (159-210, 69.5.12)
예수님은 남자 중의 남자다. 남자 중에서 비로소 4천년만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장성한 아들이다. 타락한 인류가 생겨난 이후 그 후손은 많았지만 그 후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 된 자가 없었다. (160-38, 68.8.11)
예수님이 누구냐? 어떠한 분으로 왔느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왔다. 그리하여 독생자로서의 사랑을 받았다.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 받을 수 있는 독생자였다. 부모의 사랑을 몽땅 받을 수 있는 외아들로 왔던 것이다. (61-26, 72.8.20)
예수님은 4천년 동안 하나님이 그리워하던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분이었다. 그리워하던 실체를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가 마굿간에서 탄생하던 그날, 하늘의 천군천사도 그를 환영하며 송영을 드렸다. 이방의 동방박사들도 그에게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으며 양치는 목자도 그에게 경배했다. 예수님이 누우신 자리가 비록 말구유였지만 4천년만에 비로소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이었기에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대했던 것이다. (8-97, 59.11.22)
예수님은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했는가? 그에게는 하나님이 친구의 아버지도 아니요, 나라의 통치자도 아니요, 세계적인 어떤 통치자도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시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했다. 하나님이 있으면 아들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첫째 아들이자 외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출발 때부터 하나님은 내 아버지요, 나는 그의 독생자다고 했다. (23-18, 69.5.11)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잘하는 것 없이 그저 나무나 베어다가 툭툭 깎는 까뀌질이나 했던 사람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하는 마음을 품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분은 딴 사람의 아버지가 아닌 바로 내 아버지야! 하는 마음을 갖고 나왔다는 것이다. (41-151, 71.2.14)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라고 예수님은 말했다. 아버지면 됐지 그것도 편치 않아서 그 다음에는 나는 독생자다라고 했다. 독생자는 첫사랑을 받을 수 있는 왕자라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근사한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 중에서도 시시한 아들이 아니다. 첫사랑을 받을 수 있는 독생자라는 것이다. 독생자니까 하나님도 첫사랑을 해야 된다. 첫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길을 딱 뚫어 놨다. (160-270, 69.5.17)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냐? 예수님께서는 국가를 통치하고 세계를 통치하고 인류를 통치할 수 있는 이념과 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으며,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주장하신 분이다. (5-321, 59.3.1)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다. 원래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류의 조상 아담이 독생자였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여 죽어 버렸기 때문에 다시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해와는 누구냐? 독생녀였다. 이 아담과 해와가 사춘기를 지나 성숙하여서 인생의 봄 절기를 맞이하게 되면 하나님이 결혼시켜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결혼식을 해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못 해주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중심삼고 어린양 잔치라는 명사를 세운 것이다. (23-164, 69.5.18)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말했다. 그가 발표한 내용 가운데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것이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한 말이다. 독생자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그 사랑을 몽땅 독차지할 수 있는 대표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장한 골자가 그것이다. (50-123, 71.11.6)
하나님이 이 땅 위에서 축복하려면 제일 사랑하는 아들에게 축복해 줘야 된다. 그러므로 제일 사랑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아들이 이 땅 위에 와야 되는데, 그가 만민의 구세주인 예수님이다. (156-224, 66.5.25)
5) 제2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
4천년을 거쳐 6천년을 역사해 오는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은 잃어버린 아담을 다시 찾는 것이다. 아담 대신 보내신 예수님은 제2 아담이다. 예수님을 놓고 하나님이니 뭐니 하고 있으나 그게 아니다. 성경에도 예수님을 후아담이라 했다. (7-116, 59.7.26)
예수님은 타락한 세상에 하나님편의 장자권을 지니고 왔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을 통해서 이루려던 하나님의 본래의 이상과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맏아들이다. 4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났지만 전부 사탄의 아들딸이었지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독생자이며 제2의 아담이다. 제1의 아담은 타락했지만 제2의 아담인 예수님은 타락하지 않고 완성한, 하나님의 심정과 일체된 아들이다. (19-197, 68.1.7)
예수님은 타락한 기준을 넘어선 아담으로 오신 분이다. 아담의 대신자로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후아담, 즉 둘째 아담이다.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복귀된 사람으로서 이 지구상에 나타난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19-192, 68.1.7)
예수님은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일치될 수 있는 완성한 아담으로 오신 분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면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둘째번 아담이라고 지적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참된 아들의 자리, 부부의 자리, 부모의 자리를 결정짓지 않고는 하나님이 계획한 가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지상에 나타나야 되는 것이다. (54-108, 72.3.20)
예수님은 잃어버린 아담을 대신하여 하늘이 찾아 세운 존재였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과 동시에 하나님의 가슴속에서 4천년 동안 사무쳤던 슬픔을 체휼하여 아기 예수를 붙들고 신 울어 줄 수 있고, 기뻐해 줄 수 있어야 했다. 그러한 사람들이 많아야 할 것이었는데, 탄생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기뻐해 주고, 하나님 대신 울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5-90, 59.1.3)
제1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원한이 맺히게 되었는데 제2의 아담, 즉 복귀된 아담격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셔야 했던가? 먼저 예수님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이 오시도록 해야 했고, 자신의 몸에 참사람의 뜻을 지녀야 했으며, 참다운 주관자가 되어야 했다. 이런 실체로 오셔서 천적인 사랑을 증거하고, 인간적인 사랑을 증거하고, 만물의 정(情)까지도 증거하여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체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 (4-13, 58.2.16)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였다. 5일 동안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6일째 되는 날에 아담을 창조하였는데 그 아담과 같은 분이 예수님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2의 아담, 즉 후아담인 것이다.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을 창조하고 그 아담을 중심삼고 해와를 창조하였으니, 이 후아담을 중심삼아서 후해와를 세워야 했는데 세우지 못했다. 해와는 누가 세워야 하느냐? 아담이 세워야 한다. 해와가 타락할 때 아담이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해와를 아담이 찾아 세워야 한다. (17-190, 66.12.18)
예수님은 누구냐? 아담 대신이다. 잃어버린 아담 대신이다.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 다시 품기 위해 찾아진 아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러분과 다르다. (39-86, 71.1.10)
6) 인류의 조상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인류의 조상으로 오신 분이다.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이 조상이 없어졌기 때문에 역사노정의 한때에 이런 분이 나타나야 된다. 하나님이 그런 분을 보내지 않고는 하나님이 없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은 필시 그런 아들을 하나 보내야 된다. 그 아들로서 태어난 분이 예수님이다. (159-210, 69.5.12)
예수님은 인류 앞에 참아버지로 서려고 했다.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을 세우려다가 실패해서 구멍이 이렇게 뺑뻥 뚫어졌으니 이것을 때우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류의 타락한 거짓 조상이 아니라 타락하지 않고 본래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축복을 받고 이루어야 할 인류의 참된 아버지적 존재로 왔다. (160-38, 68.8.11)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본래 인류의 참조상이 되어야 할 인류의 조상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거짓 조상이 되었기 때문에 참조상의 인연을 다시 복귀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160-210, 69.5.15)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해와가 인류의 참부모가 되어야 하는데 타락함으로써 그 자리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 잃어버린 자리를 찾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23-162, 69.5.18)
예수님은 인류의 참부모요, 인류의 참조상으로 오신 분이다. 이러한 예수님을 죽인 것은 자기 부모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의 죄악된 부모를 죽였어도 목을 잘라야 할 텐데, 천륜을 대표하고 역사를 대표하고 인류의 소망을 대표하여 오셨던 참부모를 잡아 죽였으니, 하늘의 법도에 걸리지 않을 자가 없다. (15-335, 65.12.7)
7) 인류의 참부모로 오신 예수님
역사상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부모로 등장할 수 있었던 사람이 누구냐? 아담 해와다. 그 아담 해와가 타락한 후에 메시아를 보냈는데, 그 메시아는 누구냐? 아담 해와가 잃어버렸던 참부모의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서 오신 분이 메시아요, 예수님이다. (120-186, 82.10.15)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참부모가 되지 못하고 거짓 부모가 되어 거짓 자손을 낳았으니, 이를 다시 복귀하기 위한 참부모로 오셨던 분이다. 아담 해와는 참부모가 못 된 동시에 참부부도 못 되었고, 참부부가 못 되었으니 참자녀도 못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완전히 믿고 예수님과 하나되면 참자녀 복귀, 참부부 복귀, 참부모 복귀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라 한 것이다.
참부모는 하늘이 공인하고 땅이 공인하고 천정이 공인하는 부모다. 하나님도 천사들도 이 땅의 피조만물도 옳소이다 하는 부모다. 참부모로서 공인을 받고 나타나신 분이 누구였느냐 하면 예수님이다. 또한 오시는 주님이다. (8-109, 59.11.22)
아담이 완성하여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의 혈족이 되었더라면 참부모의 역사를 중심삼고 인류는 참하나님의 직계 자녀로서 완성하여 완성 세계인 이상적 세계, 하나님이 주관하는 사랑의 세계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상실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타락한 부모가 생겨났기 때문에 타락한 인류의 원죄를 청산할 부모로 왔다. 그러므로 그 부모는 영계의 부모로 와서는 안 된다. 지상의 우리와 같이 육을 쓴 모습,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흙으로 빚어 만들었듯이 그런 모습으로 와야 한다. (145-133, 86.5.1)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냐? 예수님은 잘못되어 잃어버린 부모 대신 하늘로부터 새로이 보내심을 입은 완성격 아버지다. (140-149, 86.2.9)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냐? 아담이 거짓 부모, 거짓 아버지가 되어 타락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참아버지로서 오신 분이다. 예수님이 참아버지로 올 때는 하나님과 사랑을 맺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했다. 또 잃어버린 해와를 찾아야 되기 때문에 독생녀, 또는 성신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성신이 곧 어머니다. 인류의 부모가 악을 뿌렸기 때문에 인류의 부모로서, 책임자로서 하나님을 중심삼은 이런 부모가 나와서 참부모가 되어야 한다. 참부모는 기독교를 통해서 와야 되기 때문에 이런 내용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다. (160-281, 69.5.17)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으니 하나님 대신자요, 인류의 참아버지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참아버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참아버지 대신 존재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잃어버렸다. 아무리 잘났다고 할지라도 타락한 후손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본연의 참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다. 의지할 곳이 없어 허덕이고 발버둥치는 고아다. 마음세계에 있어서는 고아와 같으니 허덕일 수밖에 없다. (8-125, 59.11.29)
예수님은 타락으로 잃어버린 인류의 참아버지가 될 수 있는 존재였다. 오랜 역사와 더불어 말씀의 실천적 기반 위에 세워진 말씀의 실체로서, 아버지 대신 존재로 오신 분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고 말씀하셨다. 오직 예수님만이 도의 중심이요, 마음의 중심이요, 심정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왜냐? 예수님이 아버지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만민의 구세주며 하늘땅을 대표하는 것이다. (7-267, 59.9.27)
예수님은 무형의 아버지를 대신한 실체의 아버지였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다. 죽어서도 우리의 아버지, 살아서도 우리의 아버지다. 생애를 바쳐 모셔야 할 아버지요, 영생의 나라에서도 모셔야 할 아버지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딸을 만나 한번도 아들이라고 불러 보지 못하고 한번도 딸이라고 불러 보지 못한 채, 아들한테 몰리고 딸한테 몰리다 나중에는 창에 찔려 죽어갔다. 비통한 일 중에 이 이상 더 비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8-250, 60.1.17)
예수님은 누구냐? 메시아는 메시아인데, 형님 오빠격의 메시아가 아니고 아버지 어머니격의 메시아다. 성신은 어머니요, 예수님은 아버지다. 즉 예수님은 참부모의 자격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갈 자가 한 사람도 없다. (22-16, 69.1.1)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신랑과 신부라는 표준을 세우셨다. 아담과 해와가 뿌렸던 죄악의 쓴 뿌리를 몽땅 뽑아 버리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와 같은 입장에서 오셔서 이 땅 위에 아담 해와와 같은 입장을 재현시켜 놓고 그것을 뽑아 버려야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직접 낳아 줄 아버지 입장이 되어야 한다. (21-183, 68.11.20)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냐, 메시아는 도대체 누구냐?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거짓 부모가 생겨나 망할 수 있는, 지옥갈 수 있는 아들딸을 낳았다. 원리적으로 볼 때, 본래 인간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천국의 백성으로서 이 땅 위에 살아야 할 텐데, 타락의 보응으로 말미암아 원수세계에 품겼기 때문에 메시아가 필요하게 되었다. 메시아라는 분은 타락된 부모가 아니고 본연의 부모의 자격을 가지고 오는 분이다. 오늘날 인류가 자신들이 가야 할 탕감길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메시아는 탕감길을 가려서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온다. (135-315, 85.12.15)
8) 선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4천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범죄로 인한 두려움을 느끼지 아니하고, 죄로 말미암은 슬픔을 감촉하지 아니한 사람, 즉 하나님이 선의 감촉과 선의 심정에 사무쳐서 지었던 본연의 아담 해와를 동경했다. 예수님에게는 인류의 참된 선의 조상이 되어야 할 아담 해와의 모습을 대신 복귀하기 위한 역사적인 인연과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을 대신하여 왔다고 하는 신념이 사회의 어떠한 환경보다도, 살아가는 자기의 어떤 심적 동향(動向)보다도 컸다. (6-73, 59.3.29)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원한과 땅의 원한을 제거할 수 있는 선의 실체로 오신 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고, 하늘을 대신할 수 있고, 땅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고대하던 이상적인 선의 실체로 이 땅에 오셔서 생활을 통하여 본연의 선의 수확물이 되어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었다. 그러한 사명을 갖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불신으로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게 됨으로써 선의 수확이 되어야 할 분이 희생의 제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2-79, 57.3.3)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예수님은 이 악한 세상에 하나의 누룩으로 오신 분이다.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많은 내용을 알고 있겠지만, 누룩이란 어떤 것을 화합시키고 변화시키는 하나의 원료다. 예수님이 누룩으로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타락성을 갖고 있는 인간들을 본성의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사명을 갖고 오셨다는 뜻이다. (2-139, 57.3.17)
상징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본연의 성품을 대신한 분, 즉 천성의 중심인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 계셨던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품의 본바탕을 중심삼고 움직여야 하는 것이 인간의 양심이고, 그 양심을 중심삼고 나타나야 하는 것이 인간의 행동이다. 이것은 천적인 전체의 섭리를 총괄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2-65, 57.2.24)
예수님은 천적인 이념을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념을 인간생활 속에 실체화시키기 위해 순수성과 고결성을 지니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성상(性相)을 대신하여 순수성과 고결성을 지니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인격을 알아주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2-315, 57.7.7)
9)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체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4천년 역사가 흘러오는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대할 수 없었던 온 만민들 앞에 예수님은 믿음의 왕으로 나타나신 분이다. (1-31, 56.5.16)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 앞에 하나님을 대신한 하나의 실체로서, 하늘의 혈통을 대표할 수 있는 분으로서 예수님을 이 땅 위에 보냈다. 즉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제일 처음으로 하나님의 역사적인 소망을 성취해 드리기 위해 오셨던 분이다. (3-117, 57.10.13)
예수님은 어떤 심정을 지니고 이땅에 나타나셨던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대신해서 나타났고, 하나님의 역사적인 말씀을 대신하여 나타났으며, 하나님이 찾으려던 소망의 실체로 나타나셨던 분이다. (3-155, 57.10.20)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예스, 예스 한 게 예수님이다. 선생님도 하나님 앞에 예스, 예스, 예스다. 내가 예수님한테 지려고 안 한다. 예수님보다 앞서려고 한다. (104-212, 79.5.6)
4천년 역사노정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기쁨을 소개할 수 없었으나,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기쁨이 소개될 수 있었고 하나님이 허락하는 행복의 동산이 건설될 수 있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역사적인 새로운 존재다. 예수님의 한 모습은 선조들이 소망하던 하나의 실체요, 선조들이 싸워나오면서 찾고자 하던 소망의 존재였다. (6-271, 59.6.7)
예수님은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인계받은 인격자요,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시킬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을 인계받은 분이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분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분이요,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실체인 동시에 사랑의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완전한 사랑의 인연을 갖추고 나온 분이다. (27-334, 70.1.1)
예수님은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라, 옳은 일을 해야만 천국 간다는 말씀은 안 했다. 그 분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배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오라고 했던 것이다. 따라가게 되면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이다. (23-20, 69.5.11)
예수님은 본연의 주인공이요, 맨 처음으로 하늘의 이념을 갖춘 실체, 하늘과 영원히 동거할 수 있는 이념을 완성한 실체로 나타나셨던 분이다. 그 분은 인류를 전체적으로 대할 때에는 지도자시고, 우리 개인 개인을 대할 때에는 아버지시며, 본래의 창조이념세계를 찾아가는 입장에서는 신랑이시다. 예수님은 이것을 결론지어 놓고 가셨다. (6-110, 59.4.12)
예수님은 우주적인 사랑의 표준이었다. (2-67, 57.2.24)
10) 섭리역사 속의 예수님
우리 선조들 가운데 개인적인 뜻을 대표하여 세운 사람은 아브라함이요, 가정적인 뜻을 대표하여 세운 사람은 야곱이요, 민족적인 뜻을 대표하여 세운 사람은 모세요, 세계적인 뜻을 대표하여 이 땅에 세운 분이 예수님이다. (14-295, 65.1.10)
예수님은 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는 아담을 대신했고, 종족을 중심삼고 볼 때는 야곱을 대신했고, 민족을 중심삼고 볼 때는 모세를 대신했고, 나아가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는 온 인류를 대신하는 책임을 지고 오셨다. 더 나아가서는 세계뿐만 아니라 하늘의 서러움까지도 그 마음에 지니고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4-165, 58.4.6)
예수님은 세계적으로 개인을 대표한 분이요. 세계적으로 가정을 대표한 분이요, 세계적으로 종족을 대표한 분이요, 세계적으로 민족을 대표한 분이요, 세계적으로 국가를 대표한 분이다. 그런 예수님이 국가를 중심삼고 싸우는 데 있어서 그 승패의 기준은 무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만큼 사랑했느냐 하는 것이다. (48-309, 71.9.26)
예수님은 아들의 사명을 하기 위하여 왔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의 사명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수습하고 예수님이 설 수 있는 가정을 수습하는 책임을 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책임을 못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그것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단계 떨어져 내려와 제자들을 모아서 가정 대표를 만들려고 했고, 교회 대표를 만들려고 했고, 나라 대표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50-205, 71.11.7)
예수님은 역사적인 열매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결실체인데 타락한 세계의 결실체가 아니다. 타락한 세계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다. 복귀섭리를 해 나온 하나님을 중심삼은 역사적인 결실이다. 사탄세계의 결실과는 다르다. (57-157, 72.5.31)
기독교를 볼 때 구약시대는 종의 도리를 한 역사다. 구약 전 시대는 종의 도리를 이어받기 위한 것이요, 구약시대로 들어오면서 양자의 도리를 이어받아 그 책임을 하고, 그 다음에는 아들을 이어받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 사상이다. 메시아는 누구냐? 하나님의 사랑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했다. (113-94, 81.5.1)
메시아란 4천 년 동안 인간 세상을 대표해서, 혹은 지금까지 하늘땅을 대표해서 진액을 총합해 뽑아 내온 결실이다. 그 결실은 땅만의 결실이 아니다. 결실하기 위해서는 농사짓는 주인의 정성이 부합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주인과 같은 하나님이 들인 정성에 부합되어 완전한 결실체로 세워진 존재다. 예수님이 만세의 인간을 대표한 결실적인 기준에 섰기 때문에 그를 중심삼고 세계적으로 탕감할 수 있는 중심이 결정된 것이다. 그런 입장에 서지 않고는 제물이 될 수 없다. (157-76, 67.2.14)
예수님은 어떠한 분인가? 그는 세상의 권세를 가진 분이 아니었다. 세상적인 학식을 가진 분이 아니었다. 그는 시대적인 반역자로 몰림받은 분이다. 죄악세상 가운데에 공의를 대신하여 몰림받았던 대표적인 주인공이었다. (4-76, 58.3.9)
예수님은 소생, 장성, 완성의 단계를 거쳐 완성한 아들로서 당당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순수한 단계에서 태어난 분이다. 예수님은 소생․장성․완성의 단계로 볼 때, 완성단계에 올라설 수 있는 대표적인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과는 차이가 있다. 단계적으로 볼 때 하나는 타락한 아담 복귀형에 선 것이요, 또 하나는 완성한 아담형에 섰다는 것이다. (61-178, 72.8.30)
예수님은 인류의 제물이다. 예수님이 양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양은 아무것도 모른다. 예수님이 양과 다른 것은 우리 인간의 고통을 느낄 줄 안다는 것이다. 죄를 지은 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인간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 타락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 타락한 그 비참함이 어떻다는 것,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 과거를 잘 알고 현재를 잘 알고 미래를 잘 아는 분이다. (99-76, 78.9.1)
예수님은 외로우신 분이며, 서러움의 주인공이요, 서러움의 왕자이셨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불쌍한 분이다. 이 땅 위에 어떤 불쌍한 사람, 어떤 외로운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보다 더 불쌍하고 외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2-214, 57.5.26)
예수님은 천지의 만왕의 왕이요. 인류의 부모 중의 부모요, 스승 중의 스승이다. 3대 명함을 가졌다. (41-226, 71.2.16)
11) 부활의 권한을 갖고 계신 예수님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은 영원하다. 예수님은 말씀과 실체가 하나되신 분인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생명을 대신한 분이었기 에 이 세상의 어떤 사망과 고난도 예수님을 영원히 죽일 수 없었다. 예수님은 부활의 권한을 이미 갖고 계셨던 것이다. (3-325, 58.2.2)
예수님은 개인으로부터 얻어맞은 분이다. 나아가 제자들로부터 얻어맞았고, 교회로부터 얻어맞고, 국가로부터 얻어맞고, 세계로부터 얻어맞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에 굴하지 아니했다. 어떤 개인에게 굴하지 아니했고 교회 앞에 굴하지 아니했으며, 민족과 국가 세계 앞에 굴하지 아니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이고 내적인 파란곡절을 거치고 난 후에도 하늘 대한 불변의 충성심을 지녔기에 부활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4-148, 58.3.30)
예수님은 4천년 역사와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부활의 실체였다. 그는 역사노정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분, 하늘 땅을 대신해서 새로 오신 분이었다. (6-281, 59.6.7)
12) 만민의 구주이신 예수님
오늘날 기독교의 모든 교직자, 수많은 세계의 신학자들은 메시아는 이 세계를 구해주러 오는 구주다 하는데, 그 구주는 어떤 구주냐? 배고플 때 밥을 먹게 해주는 것도 구주요, 목 마를 때 물을 먹게 해주는 것도 구주요, 슬플 때 슬픔을 거두어 주는 것도 구주요, 고통스러울 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도 구주요, 일국이 망할 수 있는 운명길에 설 때 그걸 해방권 내로, 자주적인 국가 형태가 되게끔 구해 줄 수 있는 사람도 국가의 구주가 된다. 그러나 그런 구주가 아니다. (108-228, 80.10.16)
예수님은 심정적인 주의와 이념을 갖고 이 땅 위에 오셨다. 그렇지 않으면 구주가 될 수 없다. 설혹 구주가 되더라도 외적인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구주는 될지 모르나,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생명을 연결시켜 나가는 구주는 못 된다. 진정한 구주는 심정적인 내용을 갖춘 분이라야 한다. (9-251, 60.6.5)
예수님은 어떠한 분인가? 그분은 믿음의 메시아요, 생명의 메시아요, 사랑의 메시아다. 즉 그는 믿음의 구주요, 생명의 구주요, 사랑의 구주로 오신 분이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인류역사를 주관해 오면서 자신의 생명과 사랑이 심적 기준을 이루기를 소망했는데 이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이 지상에서 다시 시작되었으며 복귀의 새로운 뜻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4-76, 58.3.9)
타락한 인간을 구원해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분은 어떤 분인가? 그분은 인간을 대표하는 입장에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히 끊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고 나타나는 주인공이다. 이런 인연과 사명을 띠고 이 땅에 강림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또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3-32, 57.9.15)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어떤 길은 부모의 인연, 부부의 인연, 국가의 인연을 연결짓는 길이었다. 예수님은 천륜의 심정을 통하신 분이요, 천국의 심정을 통하신 분이요, 섭리역사를 주관하는 창조자의 심정을 통하신 선의 중심이다. (3-53, 57.9.22)
오시는 주님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기 위해서, 인류를 사망에서 구해 주기 위해서 인류의 어머니를 찾아오신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아버지로 오셔야 한다. 기독교 사상의 중심이 사랑으로 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중심은 무엇이냐? 사랑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신부와 인연을 맺어야 할 신랑으로 오시는 것이다. (16-183, 66.3.22)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요, 4천년 동안 선민이 바라던 소원의 실체요, 천적인 사정과 천적인 심정을 품고 오신 분이었다. (10-57, 60.7.3)
예수님의 눈은 창세 이후 4천년 역사를 거쳐온 하나님의 성상을 바라보는 눈이요, 인간의 잘못으로 인하여 영계의 지옥에 있는 뭇영인들을 바라보는 눈이요, 낙원에 있는 영인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할 책임감을 느끼면서 바라보는 눈이었다. 또 하나님의 슬픔을 대신하여 땅에서 택한 이스라엘 민족과 온 세계 인류가 그와 하나된 인연을 갖지 못하고 반대하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예수님의 시선은 아담 해와 타락 이후 4천년간 슬퍼하던 하나님의 슬픔을 대신한 시선이었다. (4-175, 58.4.13)
예수님의 사랑, 인내심, 충성심 같은 것들은 예수님 자신에서 기원된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연결시키는 중보의 역할을 하신다. 무지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化身)이요, 하나님적인 가치의 실체(實體)다. (2-344, 57.8.4)
13) 참된 구세주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세계의 중심존재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온 분이다. 예수님을 믿는다 할 때 그 믿음 가운데는 세계가 다 들어간다. 하나님도 들어가고, 땅도 들어가고, 전체가 들어간다. (124-293, 83.3.1)
하나님이 제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메시아가 됐다. 그래서 유대 나라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나왔다. (107-18, 80.2.21)
오늘날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 하고, 구세주라 하고 혹은 신랑이라 하는데, 그 모든 상징적인 말이 문제가 아니라 그 중심존재가 누구냐가 문제다. 진리를 말하되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된 자리에서 진리를 말하는 사람, 참된 행동을 하되 사랑을 동기로 삼아 행동하는 사람, 참된 삶을 살되 형식과 규례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 세상을 구하되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구하는 게 아니라 참된 사랑을 중심삼고 말과 행동을 통해 구하고자 하는 사람, 그런 분이 메시아다. (113-315, 81.5.10)
예수님 뒤에는 하나님이 어디나 따라갈 수 있다. 예수님이 가는 데는 어디나 갈 수 있고, 예수님이 사는 데는 어디나 하나님도 살 수 있다. 그런 대표자가 구세주요, 메시아다. (237-269, 92.11.17)
세계 중심자가 누구냐 할 때, 그는 종교에서 말하는 메시아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란 말은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다. 그 만왕의 왕이 총칼을 가지고 지배하거나, 돈 또는 지식 가지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24시간 화합할 수 있고, 24시간 좋아할 수 있는 본성의 사랑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 모든 사람들이 국가를 넘어 울타리로 삼고 싶고 품기고 싶어하는 사랑의 품을 갖고 있는 분이 메시아다. (121-199, 82.10.27)
14) 예수님과 성신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다. 그 아들딸을 기반으로 하여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심정을 접붙여야 한다. 그래야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8-207, 59.12.20)
예수님은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이요, 성신은 사랑할 수 있는 딸로 왔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잘 모르고 있다. 성신은 어머니신이다. 어머니신이 성신이다. 예수님은 아들이요 성신은 딸이다.이것이 인간의 표본이다. 인간은 예수님과 성신을 표본삼아 이들과 인연을 맺음으로써 하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 (8-276, 60.2.7)
예수님은 후아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후해와가 있어야 할 텐데 후해와는 누구냐? 기독교에선 성신을 상징적으로 말해 왔는데 성신이 바로 후해와, 어머니 신이다. 인류의 어머니인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후해와로 어머니 신인 성신을 보낸 것이다. 구멍이 뚫어졌으면 뚫어진 구멍을 때워야 하고,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잃어버린 곳에 가서 찾아야 하듯이, 해와로 말미암아 이 땅 위의 인간들이 전부 사망세계에 들어갔으니, 성신이 와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9-138, 60.5.1)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로 계시는 하나님 대신자로 예수님을 보냈다. 예수님은 구주의 입장이요, 아버지의 입장으로서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아버지고 성신은 참어머니다. (19-164, 68.1.1)
세워진 인류의 조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새로운 조상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새로운 조상을 중심삼고 섭리하기 때문에 새로운 조상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이치가 딱 맞다. 예수님 한분으로는 통하지 않기에, 예수님과 성신을 통해야 한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 신이고 성신은 어머니 신이니 타락한 인간들은 누구나 그런 부모의 인연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 (20-268, 68.7.7)
성신은 어머니 신이다. 그 어머니 신 앞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신이자, 구주(救主)다. 인간을 진짜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면 인간에게 종의 구주가 아니라 아버지 구주를 보낼 것이다. 종의 구주로서 인간을 구해 주면 인간도 기분 나쁘다. 만일 사랑하는 아들딸이 물에 빠졌다면 어머니 아버지가 야! 이 종 녀석아. 우리 아들딸이 빠졌으니 빨리 들어가서 건져 오거라, 이놈의 자식 그러겠는가? 사랑하는 아들딸이 물에 빠졌다면 형제보다도 부모가 먼저 뛰어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주 중에서 형제 구주도 원치 않는다. 부모 구주를 원한다. (48-226, 71.9.19)
예수님과 성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하느냐 하면, 해산의 사명을 하고 있다. 예수님과 성신이 해야 할 사명은 아들딸을 해산하는 일이다. (75-38, 75.1.1)
암탉만 있으면 홀알(무정란)을 낳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을 다시 낳으려면 어머니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자기가 못 낳겠으면 접붙여서라도 낳았다는 조건을 세워야 할 텐데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그럴 수 있는 기반이 없어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영적 부모의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구세주인 동시에 나를 다시 낳아 준 영적인 아버지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면서 성신을 보내 준 것이다. 성신은 어머니 신이다. (95-170, 77.11.11)
아담 해와가 이 땅 위에서 참된 사랑을 하다 저나라에 가면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가 생겨난다. 무형의 하나님이 실체를 쓰는 것이다. 인간의 아버지로 실체로 나타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의 모습으로, 해와의 모습으로,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왔다 가기 이전까지 성신은 참어머니의 성상이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와 천년 만년, 여자는 남자와 천년 만년 같이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128-329, 83.10.2)
인간이 거듭나려면 예수님과 성신을 통해서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조건을 중심삼고 다시 태어나야 된다. 그 조건을 거쳐야 된다. 그렇다고 직접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는 조건을 거쳐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 품에 품겨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아버지를 더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한 것이다. 아버지를 더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뼛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참부모, 영적 부모다.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모해야 한다. (132-33, 84.5.19)
4. 인류의 조상이요 참부모로 오신 예수님
인류역사는 타락하지 않은 종지조상을 찾아나온 역사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할 때,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대표자나 책임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가의 통치자도 아니요, 어느 한 시대 하늘의 사명자나 선지자도 아닙니다. 인간 구원의 중심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이면(裏面)에서 조상의 책임을 대신 상속받아 오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런 분이 아니고는 세계적인 승리의 조건을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인류 시조로부터 타락이 빚어졌고 그 이후 인간들도 계속 실패했습니다. 이 실패를 걷어치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간 조상의 입장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한 분을 찾아 인류 앞에 소개하는 것이 세계의 수많은 종교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양심이 목표로 하는 이상을 중심삼고 세계의 인류를 하나로 수습해야 합니다. 이것을 수습하려면 타락한 조상의 후손으로서 그 모든 죄의 보따리를 청산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구원 완성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조상되는 대신자는 천상세계로부터 대(代)를 이어 이 땅 위에 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완전 탕감하여 승리권을 세울 수 없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의 권한을 세운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로서의 기준도 아니요, 아들로서의 기준도 아니며, 종으로서의 기준입니다. 또 야곱이 천사와 얍복강에서 씨름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천사장이 인간을 타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천사장을 대신한 천사를 굴복시키고 승리의 권한을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기준의 이스라엘을 계대(繼代)하여 실체적인 이스라엘권을 조성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기준의 이스라엘권을 가졌던 이스라엘 민족도 실체적인 기준, 즉 아벨의 입장에서 승리의 권한을 세우지 못하게 될 때는 번번이 망했습니다.
오늘날까지의 기독교 역사는 무엇이며, 선민사상이란 무엇이냐? 기독교 역사는 종의 터전 위에 양자를 세운 역사였습니다. 아들은 아들인데 직계 아들이 아닌 양자였습니다. 양자에게도 물론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상속권은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와 직계자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양자는 그 핏줄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는 자기의 핏줄을 잘라 버리고 접을 붙여 직계의 혈통으로 전환돼야 합니다.
혈통이 다르다는 것은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다른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본래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부모에 의하지 않고는 죄를 탕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역사는 타락하지 아니한 종지조상(宗之祖上)이 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분이 올 때까지 종교의 이념을 중심으로 연결시켜 왔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못 간다고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기독교인은 만민의 구세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불교나 유교에서는 우리도 세계적인 종교인데 기독교만 중심삼고 만민을 구원할 것이 무엇이냐고 말할 것입니다. 하여튼 불교나 유교도 동서양의 문화를 묶기 위해 하늘이 특별히 세운 종교입니다. 세계적인 아벨, 혹은 양자로서 책임을 할 수 있는 역사를 대표한 종교입니다. 그렇지만 불교나 유교에서는 인류의 조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땅 위에 죄악이 출발되었던 것은 인류의 종지조상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책임지고 탕감할 수 있는 입장에서 나는 인류 조상이다라고 할 수 있는 분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주장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 한마디가 세계사를 출발시키는 새로운 선민적 표어(選民的標語)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이 말은 예수님이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이 예수님이 주장하시는 말씀인 복음 가운데 나타났다는 사실이 오늘날 이 땅 위에 새로운 시대가 출발할 수 있는 기원이요, 새로운 세계가 출발할 수 있는 터전이 된 것입니다. (20-114, 68.5.1)
제2의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가르친 진리와 다른 종교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국가와 인류의 도덕을 가르치며, 영계에 관한 내용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는 영계를 가르쳐 주고, 유교는 사회의 인륜 도덕을 가르쳐 줍니다. 이들은 땅에 대한 치리, 영계에 대한 치리법(治理法)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가정을 세울 수 있는 혈통적 기원인 사랑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이 기독교가 타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전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피와 살이 얼크러져 일체로서 움직일 수 있는 부자의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예수님은 신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랑인 예수님은 신부를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서로가 형제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와 신랑 신부, 아들딸이 일체가 되어 사탄세계를 청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조상으로 오셨습니다. 아담이 타락하여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제2의 아담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신랑의 입장에서 신부를 맞아 부부를 이루어야 했고, 인류의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원래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부모가 되어 하나님을 중심한 세계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타락함으로 써 사탄이 주관하는 거짓부모가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본래 하나님의 창조이상으로 세우고자 했던 참부모는 없어졌습니다. 참된 인류의 조상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20-116, 68.5.1)
예수님의 공생애 노정은 슬픈 노정이었다
6천년 전,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짓고 창조이상을 이룰 날을 소망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아담 해와, 즉 참아들딸을 중심삼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생활 터전을 그리워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가 깨져 나감으로써 역사적인 비참상이 벌어졌습니다. 아담 해와가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지가 생긴 이후 처음 벌어진 비참한 장면이었습니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 오셨던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참부모로 오셨습니다.
타락 전의 영광의 세계는 전부 아담의 것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세계의 주인인 하나님도 아담의 것이었습니다. 세계가 모두 아담의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움직이는 데 장애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행하고자 하는 것에 장애가 없어야 하고, 그가 하고자 할 때 제재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천하가 전부 그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아담과 해와를 창조했으나 그들이 깨져 나갔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부 끊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보낸 목적은 이 아담과 해와가 실수한 전부를 회복하여 본연의 아담 해와에게 부여해 주려고 한 전체의 이념을 생활 가운데서 내적으로 느끼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메시아가 태어난 첫날부터 시작했어야 할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에 능통하지 못함이 없어야 할 입장에 선 분이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유대나라의 환경이 어땠느냐?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유대교단은 모세 오경의 틀에 잡혀 있었습니다. 요셉 가정도 그랬습니다. 하늘적인 맡은 바의 책임과 생활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을 가지고 제재 받지 않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생활해야 할 텐데 그럴 수 없는 예수님의 내적 고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런 내적 고충을 느낀 반면 요셉과 마리아는 어떠했는가?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예수님이 고충을 당하고 슬픔을 느끼면 그를 붙들고 우리가 있으니 네 소원은 기필코 이룰 것이다 하며 그의 내적 슬픔을 위로해 주는 것이 어머니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이요, 형제들이 할 도리인데,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30여 년의 준비 기간에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기대도 다 무너지고 깨져 나갔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어머니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기대는 몇 번씩 꺾여 나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한없이 많아도 말을 못했습니다. 그저 묵묵했다는 것입니다. 왜냐? 자신이 메시아의 사명을 짊어지고 온 것을 아는 어머니가 해야 할 책임, 즉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아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못하고 있으니 메시아로서 인간 세계의 전체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 자식이지만 메시아로 모셔야 했습니다. 요셉도 아침마다 일어나면 경배해야 했습니다. 부모를 중심삼고 형제 친척들도 전부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부모인데 부모에게 천법을 적용할 수 없는 착잡한 예수님의 사정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갈 길이 이렇고 이러이러한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을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간접적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알아주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30세에 집을 나갔습니다. 공생애 노정을 출발한 것입니다.
공생애노정은 거룩한 노정이 아니고 예수님의 슬픈 노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집을 나갔을 때 그의 동생들이 따라다녔습니까? 그의 어머니가 따라다녔습니까? 아무도 없이 혼자 다녔습니다.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예수님을 찾을 때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도 하셨습니다.
메시아가 찾는 개인은 어디 갔으며, 메시아가 찾는 가정은 어디 갔으며, 종족은 어디 갔으며, 교단은 어디 갔으며, 민족은 어디 갔는가? 아무 것도 찾지 못한 메시아의 울부짖음 소리를 누가 들었던가? 아직까지도 기독교는 깊은 잠에 빠져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봐도 이런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14-277, 65.1.3)
참부모의 사명을 갖고 오신 예수님
메시아가 온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나라의 주권자라면 그 입장에서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것처럼, 세상을 구할 구세주로 온 예수님도 구세주의 입장에서 민족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보낸 구세주의 인격 기준에 상대가 될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서 예수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무엇을 했습니까? 메시아가 오시는 줄이나 알았습니까? 죄를 지긋지긋하게 지어 놓고도 천국이 이루어지면 거기서 한 자리 해먹을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는 나라를 찾기 전에 교단이 필요했고, 교단을 찾기 전에 민족이 필요했으며, 민족을 찾기 전에 종족이 필요했고, 종족을 찾기 전에 가정이 필요했으며, 가정을 찾기 전에 개인이 필요했습니다. 그 개인이 누구였습니까? 여자의 대표자는 마리아요, 남자의 대표자는 요셉이었습니다. 그들을 세상적으로 보면 어머니 아버지였지만 뜻을 중심삼고 보면 부모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타락하지 않은 참부모였습니다. 참부모의 사명을 갖고 왔습니다.
인간 조상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써 타락된 혈통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바라는 본연의 이상세계, 타락하지 않은 그 세계에서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하나님의 직계 혈통을 받아 아들딸을 낳는 참부모가 되지 못하고, 사탄과 인연을 맺어 죽은 자식을 낳은 사탄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전부 거짓부모를 만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부모의 혈통을 부정하고 참부모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타락하지 않은 참부모로 왔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세상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아버지고 어머니지만 뜻으로 보면 참부모인 예수님 앞에 부모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기 위해 왔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참부모의 사명을 갖고 온 메시아기 때문에, 아무리 그를 낳은 사람이라도 그 메시아 앞에서는 자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믿어집니까?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천지개벽이냐? 선생님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들이 그 아버지 앞에 아버지가 되어 일을 하는 것이 천지개벽이라고 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메시아 앞에 효자는 요셉이요, 효녀 중의 효녀는 마리아요, 메시아 앞에 충신은 요셉이요, 충녀는 마리아가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는 죽더라도 먼저 죽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제자가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할 말을 다 못하고 갔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할 말을 다 못하고 갔습니다. 천적인 사명을 짊어진 예수님이 세상적으로는 아버지요, 내적으로는 아들과 같은 입장에 있는 요셉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다 말하지 못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장 12~13절)고 했습니다. (14-279, 65.1,3)
이스라엘 나라를 준비해 나온 이유
예수님이라는 분은 본래 인류의 참조상이 되어야 할 인류의 조상이 타락함으로써 거짓 조상이 되었기 때문에 참조상의 인연을 다시 복귀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아담과 해와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싸웠습니다. 부모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아들인 가인을 복귀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부모를 복귀하지 못 합니다. 원리가 그렇습니다.
아담시대도 그러한데 예수시대는 어떻겠느냐? 인류의 부모로 등우지 않고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담가정에서 가인, 아벨, 셋, 이 세 아들을 중심삼고 여덟 식구를 잃어버린 결과가 됐기 때문에 예수님도 인류의 참된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것을 틀림없이 다 찾아 놓고서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가인 아벨과 같은 기준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미리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하늘은 세계의 수많은 사탄 국가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승리한 하나의 조상을 만들어 하나님 편에 일편단심 일체가 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 가정을 번식시켜 종족, 종족을 번식시켜 민족, 민족을 번식시켜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승리라는 뜻입니다. 승리한 나라라는 뜻입니다. 타락한 세계에서 하나님편의 승리한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국가가 있지만 하나님은 지금까지 당신의 발판이 될 수 있는 한 평의 땅도 없었고, 하나의 가정도 없었고 하나의 민족과 하나의 국가, 하나의 주권도 없었습니다. 이런 땅 위에서 하나님이 사탄세계를 빼앗아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주권국가를 성립시키지 않고는 안 됩니다. 대결할 수 있는 비슷비슷한 국가 기준을 닦지 않고는 세계적인 싸움을 못할 것을 잘 아는 하나님은 훌륭한 민족, 하나님편 울타리 안에 완전히 들어 온 훈련된 하나의 가정을 통해서 애급에 60만 대군을 남기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복귀노정을 중심삼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4천년 역사를 통하여 유대 나라 주권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권이 사탄세계에 지배받는 주권이 됐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가인이 아벨을 지배했기 때문에 반드시 아벨이 가인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아벨의 목적을 완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책임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강대국인 로마의 속국권내에 예수님이 와서 가정을 다시 결속시켜―이건 내적 싸움입니다─ 외적 싸움을 할 수 있는 내적 국가의 표준으로서 가정을 다시 예수님과 결속시킨 다음에 종족을 결속시키고, 종족을 결속시킨 다음에 민족을 결속시키고, 민족을 결속시킨 다음에 국가를 결속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준비된 것이 이스라엘 나라였습니다.
그렇지만 로마제국의 속국이 돼 있기 때문에 이 속국에서 해방의 기치를 들어 먼저 나왔던 형님격인 사탄의 대표적인 국가 로마제국을 깔아뭉개고 굴복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살았더라면 로마제국을 40년이면 굴복시킬 것이었는데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4백년 후에야 굴복시킨 것입니다. (160-210, 69.5.15)
예수님을 핍박한 이스라엘 민족
택한 이스라엘 민족은 2천년 동안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아가 왔으니 그 메시아를 중심으로 철석같이 단결해야 했습니다. 그가 동으로 가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면 서로 가고, 사지가 떨어져도 같이 떨어지고, 목을 매도 같이 매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준비된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약속했던 한때를 맞이한 그 민족은 그 주인공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야, 네가 뭐냐 이런 식으로 대했습니다.
하늘의 때를 맞추어 30년의 준비기간을 거친 예수님은 필시 이 때가 민족을 구할 때라고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허락한 때를 붙들고 나왔지만,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택한, 땅 위의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하늘의 때를 몰랐습니다. 누가 알았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때를 모른 이스라엘 민족이니 지옥 가야 합니다. 당연히 심판 받아야 합니다.
환경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피 흘리고 찢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의 공적을 두둔했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 때를 갖고 오신 주인공을 두둔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 오신 주인공 앞에 환경의 터전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오히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그들은 세계 도처에서 죽도록 고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천적인 때를 맞추기 위해 심정적으로 준비했고 그 환경을 그리워하면서 밤낮으로 애썼으나, 그가 준비한 때를 알아주고 맞이하기 위해 나타난 무리가 어디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찾아 나섰던, 예수님의 환경이 되어야 했던 성전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보고 바알신에 접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4천년 동안 많은 수고를 해 굳게굳게 약속한 메시아를 보냈는데 그렇게 박대할 줄이야! 예수님은 하늘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늘의 때를 가지고 온 분이요, 하늘의 배경을 갖춘 분이요, 하늘의 주권을 가진 왕자요, 하늘의 황태자입니다. 하늘의 배경을 갖추고 지상을 치리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맞이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 때를 맞아 환경을 갖추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은 오히려 예수님이 세우시려는 때를 무너뜨리고 환경을 개척하려는 것을 가로막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이런 죄를 저지른 것이 우리 선조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왔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보내는 데 왜 4천년이나 걸렸습니까? 왜 선한 선조를 죽여 가면서 그런 일을 하느냐는 거예요. 예수님은 할 수 없으니 패배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비밀리에 제자들을 찾아 하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부탁하고 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은 패배의 장군입니다. 땅위에 왔다가 때를 잃어버린 패자요, 환경을 잃어버린 패자입니다. 때를 이루고 환경을 개척해야 할 사명이 있는 예수님 앞에 죽음이 웬 말입니까?
그 때를 소망하면서, 그 환경을 소망하면서 그 때와 그 환경을 이루어 달라고 맡긴 사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 사도 이후의 기독교사입니다. 예수님은 다 남기고 갔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때를 맞이하고 환경을 맞이하여 황태자로 등장했다면 천지는 모두 그의 수하에서 치리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못 되었습니다. (9-257, 60.6.5)
기독교인들이 이루어야 할 사명
예수님은 만우주를 통치하여야 할 우리 인간의 참조상입니다. 예수님은 아담 이후 4천년이 지난 후에 이 땅에 오신 역사적인 조상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꺼꿀잡이로 찾아 세우니 참조상인 것입니다. 제1아담이 실패해서 타락한 조상이 되었으니, 제2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천상과 지상의 모든 법을 장중(掌中)에 넣고 때와 환경을 정리한 다음 하늘 주권국가를 세워 이 땅 위에 백성들을 지휘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었던들 오늘날 우리는 타락된 세상에서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했습니까? 못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가시면서 다시 올 테0니 참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복 받고 편안히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 길을 가는 데는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고, 잃고자 하는 자는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몰림뱅이로 지내온 무리였습니다. 역사의 뒷골목에서 은밀히 약속해 나온 무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무리들을 수습하여 제2 이스라엘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는 제2 이스라엘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 기독교인들이 이루어야 할 사명은 무엇이냐? 주가 이 땅 위에 오셔서 때를 잃어버렸으니 때를 찾아야 됩니다. 우리의 선조 이스라엘 민족이 때를 잃어버렸으니 때를 찾아야 됩니다. 환경을 잃어버렸으니 환경을 찾아야 됩니다. 때와 환경을 갖추어 주인공이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끝날의 성도들이 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9-259, 60.6.5)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써 아벨의 사명을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수습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에서 양자권을 찾아 세우고 여기서 다시 기독교를 중심삼고 제2 이스라엘을 형성했습니다. 그 터 위에 재림의 한날을 고대하면서 2천년 동안 투쟁의 역사를 이끌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2의 아담으로 오셨지만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제3의 아담으로 오십니다. 제3의 아담이 왜 와야만 되느냐? 그것은 이 땅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 위에서 사고가 났으니 이것을 수리해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수리할 수 있는, 고장나지 아니한 새로운 주인이 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새로운 주인이 와서 사고 난 것을 고쳐 주시기를 고대해야 됩니다.
제3의 아담이 누구냐? 이 땅 위에 인류 조상의 이름을 지니고 세번째로 오시는 분입니다. (20-121, 68.5.1)
조상적 사명을 짊어지고 천사장의 사명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
탕감법이 생기게 된 것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 때문입니다. 결국은 부모 때문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시는 주님은 누구냐? 메시아는 누구냐? 그는 참된 부모입니다. 참된 부모는 이 세상을 이기기 위해 오시는 분이요, 영적 사탄세계를 이기기 위해서 오시는 분입니다. 세계의 끝날이 되어 가지고 세상의 사탄을 완전히 청산하고, 영적 사탄세계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참된 부모입니다.
그가 지상에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영적 기반을 승리한 후에야 지상의 실체기반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영적 사탄세계를 이기려면 영적 사탄세계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또 육적 사탄세계를 이기려면 육적 사탄세계를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말한 그 원칙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와 타락한 이후의 아담 해와의 입장을 가리는 길입니다. 결국 우리는 천사장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천사장은 개인을 대표한 천사장 입장, 가정을 대표한 천사장 입장, 종족을 대표한 천사장 입장, 국가나 세계를 대표한 천사장 입장이어야 합니다. 그 천사장 입장의 조상이 여러분의 조상들입니다. 세계를 대표해서 그 조상의 사명을 대신해 온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조상으로서의 참된 개인을 대신하고, 종족, 민족, 국가를 대신해서 세계를 향해 넘어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조상적 사명을 짊어지고 천사장의 사명을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가 사탄세계지만 예수님은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를 협조하던 천사장의 입장이기 때문에, 여기에 협조할 수 있는 길을 닦아 나왔습니다. 즉, 예수님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천사장이 협조하던 그 원칙적인 기반 밑에서 협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계에서 개인적인 모든 것을 탕감했더라도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올라갔다가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또, 종족적인 기준에서도 올라갔다가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언제나 이 놀음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개인적인 기준, 가정적 기준, 종족적 기준, 민족적 기준, 국가적 기준, 세계적 기준으로 언제나 발전의 행진을 해 나왔습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영적인 면에서 개인적으로 승리하고, 가정적으로 승리하고, 종족적으로 승리하고, 민족적으로 승리하고, 국가적으로 승리하고, 세계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하나되면 오늘 우리도 그와 같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믿고, 가정적으로 믿고, 종족적으로 믿고, 민족적으로 믿는 그 분야의 책임 여하에 따라서 세계적인 발전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예수시대가 옴으로써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를 향해 나갈 수 있는 영적 승리의 전통적 기반이 성립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 나는 그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영적 천국은 사탄을 영적으로 승리한 기반 위에 있습니다. 결국은 개인적으로 승리하고, 가정적으로 승리하고, 국가적으로 승리해서 넘어가야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전통을 가지면 그와 더불어 하나가 됨으로써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천국이 거기서 열립니다. 그러면 영계의 조직이 어떻게 돼 있다는 것을 전부 다 환하게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영적인 세계에 대한 모든 것은 승리했지만, 실체 세계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걸 남기고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이루기 위해서 재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적 승리를 한 다음에는 육적인 승리를 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영적으로 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다시 와야 된다는 원칙이 여기서 나옵니다.
오시는 주님은 영적 세계에 세워 놓은 승리의 전통을 상속받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메시아, 즉 천사장적 사명을 완결시킨 그분으로부터 협조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부 인계를 받아야 됩니다. 영적으로 모든 것을 이어받기 위해서 영적인 신약시대 이상의 모든 것을 재탕감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 그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완전히 이어받을 수 있는 기준을 결정해야만 영적 사탄세계까지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영적 기준을 세워 그 전통을 인계 받은 기반에서 실체세계의 승리만 하면 됩니다. 영적으로 세워 놓은 원칙을 따라서 육적으로 갖다 맞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73-97, 74.8.4)
메시아라는 분은 참부모 대역자로 오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세계에 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어머니 아버지와 형제를 다 버리고 따라오도록 하는 운동을 일으켜야 됩니다. 그런 다음 사랑의 힘을 가지고 하늘나라의 전통을 다시 세우는 일을 하려는 것이 기독교의 출발입니다. 그런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늘날 선생님은 이 세계에 있어서 예수님이 이루지 못한 참부모의 전통을 어떻게 재현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통일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역사 가운데는 개인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전통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형제의 전통, 그 다음에는 신랑 신부의 전통, 그 다음에는 부모의 전통, 할아버지의 전통, 종족의 전통이 그 일가에 남아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것이 세계적이어야 됩니다. 초민족적이어야 됩니다. 지금 이 세계는 타락권입니다. 반대입니다. 이걸 넘어서야 됩니다. 그러려면 개인적 전통, 가정적 전통, 종족적 전통, 국가적 전통을 세운 다음 이걸 넘어가야 됩니다. 타락권을 전부 끊어 버리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종족, 국가, 세계의 전통을 상속해서 넘어가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이상한 것이 그것입니다. (107-158, 80.4.20)
5. 예수님은 우주적인 혁명의 주인공
인간이 새로움의 실체로 완성되기를 바랐던 하나님
새것이 창조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그것은 하나의 혁명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엿새 동안에 지어진 모든 물건 즉, 미물인 곤충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을 볼 때, 보다 더 새롭고 보다 더 나은 존재를 하나님이 창조하고 최후로 사람까지 창조했습니다. 사람을 창조함으로써 보다 높은 하나님의 내적인 성상과 외적인 형상을 완결 짓고,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새롭고도 변치 않는 실체를 갖추기를 바랐던 것이 창조주의 이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이 즐길 수 있는 영원한 새로움의 실체로서, 만물 만상을 대신하고 어떠한 피조물과 비교해 보아도 이는 과연 아름답고 과연 좋다 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으로 지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지어 놓은 것이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아담 해와였습니다.
하나님의 본연의 선하심과 내적인 영광을 실제 생활을 통하여 드러내야 할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 인하여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대신하여 새로운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리에 머물게 된 것이 인간의 타락입니다.
인간이 타락했을 망정 하나님의 뜻은 불변의 뜻으로서 기필코 완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창조주로서의 위신을 지킬 수 없으며 권한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세워가려는 것이 복귀의 역사요,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늘이 이러한 입장에서 우주의 만물 만상을 대하게 될 때, 하늘과 땅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고 피조물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는 하나의 귀한 존재, 하나님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전체의 성상을 새롭게 드러낼 수 있는 보다 차원 높은 새로움의 실체가 주인공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날은 언제일 것인가? 이런 감격적이고도 충격적인 한 날을 맞기 위해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이 하나의 목적을 세워 놓고 복귀섭리를 거치면서 끊임없는 수고로 역사해 나오고 계십니다.
창세 이후부터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모두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지금까지 없었던 최고의 기쁨을 누리게 될 새로운 우주적인 존재를 찾게 되는 그 날이 어느 때에나 올 것인고, 하며 그 한 날, 그 한 존재를 애타게 고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인간과 만물이 같이 즐기고 기뻐하며 화동할 수 있는 창조이상세계를 이미 다 설계해 놓고 계시며, 이상적인 생활면까지도 이미 다 구상해 놓고 계십니다. 내적인 상징으로 이루어진 하늘과 외적인 상징으로 이루어진 땅이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을 중심삼고 하늘과 땅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이런 하나의 기준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은 수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뜻은 무엇인가?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깨뜨려버릴지라도 놓을 수 없는 단 하나의 뜻이 있다면, 그것은 완성인간입니다. 인간이 완성될 때까지는 원리적인 창조의 법도를 거쳐서 진리의 실체가 되어야 하는데, 타락함으로써 비원리적인 실체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되 그의 내적인 성품과 외적인 형이 하나님의 영원한 실체를 대신한 분신체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인간의 형은 갖추고 있으되 창조이상의 형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인간에게 창조이상의 형을 다시 주입시키고 계십니다. 새로운 하나의 실증체(實證體)를 찾기 위해 수고하고 계십니다. (1-227, 56.11.11)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님
하나의 중심되는 본체, 소망의 존재로서 오셨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때까지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수고했습니다. 창조 이후 비로소 화동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존재로, 만물 만상 앞에 보여줄 수 있는 존재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잃어버린 선의 기준을 찾기 위하여 수고한 하나님은 4천년 역사를 거쳐오면서 사탄의 참소하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민족적인 발판을 만들어 나왔습니다. 이 민족적인 발판은 하나님과 만물을 대신하고 천상천하의 모든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으로 세운 예수님을 위한 발판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소원의 푯대되는 존재로 대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반대하는 타락의 역사를 다시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만우주를 새로움의 세계로 다시 이루어 놓기 위해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전체의 주인공으로 모셔야 할 유대백성들이 모시지 못함으로써 전체의 주인공된 사명을 가진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서러움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 동안 줄곧 모세를 통해 내려 준 율법과 야곱에게 내린 언약이 자기들의 이상을 이루어 줄 수 있고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맨 밑에서부터 점진적으로 끌어올리는 역사를 했습니다. 소생적 구약역사를 거쳐 나온 후에는 장성적인 신약시대를 거쳐서 완성급까지 나아가는 천지 창조의 원칙적인 순로를 다시 거쳐 나가는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그 시대 사람들이 용납할 수 없는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구약 율법보다 더 높은 새로운 말씀이요, 종래의 것보다 더 높은 새로운 가치와 인연 맺기 위한 말씀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백성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던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나님의 전체적인 창조이상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늘땅을 대신하여 우주적인 사명을 완수하려고 끊임없이 혁명적인 과정을 거쳐 찾아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나서 우주적인 뜻의 길을 가게 될 때에는 타락 인간을 본연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과정이 있었고, 그 과정에는 무수한 싸움의 곡절과 혁명적인 과정이 있었습니다. (1-229, 56.11.11)
우주적인 혁명을 제시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심정을 잃어버리고 양심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생활의 목표를 잃어버린 몸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한꺼번에 다 안 됩니다. 악한 것은 떼어버려야 합니다. 양심이 하늘 편에, 선한 세계에 제일 가깝기 때문에 양심이 문제가 되지 몸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는 몸을 치는 것입니다. 밥을 먹는 것이 다 뭐야! 원수의 배통을 이겨야 합니다.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사탄을 안식시키는 것입니다. 이 몸에 대해 적개심을 가져야 합니다. 원수인 이 몸을 대해 보복할 자신을 가진 자라야만, 그런 자신을 갖고 승리한 자라야만 하늘의 정병이 될 수 있습니다. 크나큰 선의 이념을 중심삼고 몸의 정욕이나 식욕 등 욕망의 일체를 자유 자재로 주관할 수 있는 사나이나 여인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끝날이 되면 누구의 명령을 받지 않고도 세상 만사를 다 잊어버리는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런 심정적인 혁명이 벌어지지 않는 한 천국백성이 못 됩니다. 지금까지 아들이니 처자니 무엇이니 무엇이니 하던 모든 것은 꿈과 같은 것입니다. 아이고 내 사랑하는 아들딸, 아이고 내 사랑하는 남편 아내, 아이고 내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하는 것들이 다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입니까? 사탄을 근거로 하여 인연된 것들입니다.
대심판이 무엇이냐? 사탄세계의 무대를 쳐 갈기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와 심정의 인연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부모와 자식을 배반하게 하는 사조(思潮)로 흘러갑니다. 암만 붙들고 앉아 있어도 갈라 세웁니다. 형제와 형제가 싸우게 만들고 부부가 서로 싸우게 만듭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것을 세워야 합니다. 하늘의 심정을 다시 접붙여 주려니 그런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고 했습니다.
이런 원칙적인 관(觀)으로 볼 때, 과연 예수님은 구주입니다. 어떤 구주냐? 사랑의 구주입니다, 사랑의 구주. 고마운 일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이러한 부르짖음이 없었던들, 오늘날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세상의 부모를 버리면 하늘 부모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낳아 준 부모가 진짜 부모예요? 나를 지으시고 생명까지 불어넣어 주신 부모가 진짜 부모입니다. 사랑하는 육신의 부모 대신 하늘의 부모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세상 것과 합동작전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은 원수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외치고 나설 때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나 혹은 처자나 시어머니나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과연 메시아입니다. 성경 66권이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자기 자식 이상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됩니다.
천국 갈 수 있느냐? 천국 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냐? 자기 아들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해야 됩니다. 자기 몸보다도 성신을 더 사랑해야 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입니다.
마음은 몸의 신랑이고, 심정은 마음의 신랑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심정의 주인입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입니다. 성신은 신부입니다. 그래서 마음적인 형이 예수님이요, 몸적인 형이 성신입니다. 천지를 대신하고 심정의 하나님을 대신하여 마음적인 형인 예수님과 몸적인 형인 성신이 역사(役事)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세계를 찾아나가는 중심입니다. 신랑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신랑입니다. 우주가 생겨난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혁명을 제시하기 위해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10-99, 60.7.17)
예수님의 소망과 유대민족의 불신
혁명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은 어느 정도의 소망이냐? 오늘날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에서 가지는 그런 소망이 아닙니다. 세계를 넘어 무한대의 하나님나라까지 연결될 수 있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예수님의 소망인 동시에 예수님과 하나된 하나님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내려 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백성 앞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대표한 실증체로서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느냐? 예수님은 지금까지 역사상에 없었던 새로운 진리의 주인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부르짖었지만 그것은 개인 차원의 진리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민족과 모든 국가를 대신할 수 있는 진리라고 주장했을지 모르지만, 실제 그러한 진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과 땅을 다시 비춰줄 수 있는 진리를 갖추어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그 말씀은 그 시대, 그 세계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적인 것이요, 새롭고도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혁명적인 이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을 고대하던 유대백성들이 알았다면 여태까지의 자기들의 생활을 버리고 이 진리를 갖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야 할 유대민족이 이루어야 할 한날을 깨뜨려 놨으니 우리가 이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맺힌 것을 풀어줘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들지 못함으로써 희생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민족을 세워 놓고 그 민족 가운데서 하나의 중심을 세워 그 중심으로 하여금 우주적인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30여 년간에 걸쳐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나타내셔야 할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인류는 말씀의 실체를 찾는 그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대신하여 이 땅 위에 전파하려 하셨던 우주적인 새로운 진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말씀은 예수님 당시에 민족적인 말씀으로, 또 세계적인 말씀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말씀으로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그 당시에 이 땅을 구원할 수 있는 중심의 말씀으로 나타났다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따르는 개인이 있고, 따르는 민족이 있고, 따르는 세계가 있었던들 하나님의 뜻을 책임진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 그 뜻을 다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그러한 개인과 민족과 세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삼고 예수님을 대신해야 할 사랑하는 제자들, 사랑하는 가정, 사랑하는 교단, 사랑하는 국가가 예수님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었어야 했는데, 자기들의 교단적인 차원에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가지고 예수님을 대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끝날의 성도인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냐? 부끄러운 우리 자신에게 우주적인 존재가 되기를 소망하시며 우주적인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한 개인으로 오셨으나 그는 평범한 개인이 아니요, 천하만상의 피조물 전체를 대신한 분이었습니다. 온 피조세계의 창조원리적인 전체의 진리를 대신한 분이었습니다. (1-237, 56.11.11)
예수님의 말씀은 우주적인 혁명의 말씀
역사과정을 거쳐 결실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선조들이 지나온 전체의 역사와 생활을 초월하여 여러분에게 구원을 베푸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주적인 혁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당시 유대백성을 대하여 하시던 말씀과 그가 나타내신 모든 것은 자기 일신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대해야 하는 타락권내의 백성과 예수님 사이에 상충적인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난다 할 때, 이 말씀이 민족 앞에 나타나면 민족을 혁명할 수 있는 말씀이 될 것이요, 개인에게 나타나면 개인을 혁명할 수 있는 말씀이 될 것이요, 세계 가운데 나타나면 세계를 혁명할 수 있는 말씀, 또한 하늘땅을 새로이 혁명할 수 있는 말씀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그때의 유대백성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그때까지 믿어왔던 모든 율법주의 앞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모든 율법은 완성을 보아야 한다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우주적인 신앙관이 들어 있는 말씀, 우주적인 가치를 지닌 말씀의 뜻을 이스라엘 민족이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말씀은 그 시대에는 우주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우주적인 혁명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치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못하다. 또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치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볼 때 하나님이 창조이상으로 바라던 우주적인 하나의 완성체를 이룰 때까지 진리를 찾아 나가는 데는 우주적인 노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것은 우주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우주적인 사랑으로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했기 때문에 천사장과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이상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사랑의 문을 꿰뚫고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이 사랑의 문을 뚫으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라 하신 목적이 무엇이냐? 예수님 자신이 사랑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그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사탄권내에 붙들려 있는 힘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붙들어 인간들을 하나님과 본연의 사랑을 주고받는 자리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나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언적인 혁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혁명을 일으키셨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천적인 사랑의 혁명을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은 개인 대 개인의 사랑은 물론이요, 가정적․사회적․국가적․세계적인 진리를 대신한 사랑이었습니다. 우주를 대신한 사랑의 혁명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사랑은 자기를 중심삼은 사랑입니다. 혹은 국가를 중심삼은 사랑입니다. 지금까지는 자기의 나라를 사랑한다든가 혹은 자기의 가정을 사랑한다든가 하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국가 이상, 국가권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랑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소망은 한 민족, 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하늘과 땅이 하나될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사랑은 세상적인 사랑, 자기를 중심삼은 민족이나 국가적인 차원의 사랑이 아니고 세계를 넘어서 하늘땅까지 연결되는 사랑입니다. (1-234, 56.11.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주적인 사랑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가정이나 국가 앞에 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니 우주적인 사랑의 주인공 되시고 신랑 되신 예수님은 가정적인 핍박과 국가적인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하늘땅의 억조 창생들,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을 기원으로 하여 비로소 사랑의 인연을 맺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연을 맺게 해주는 책임이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개척하여 찾아 세운 사랑은 세상적인 사랑과는 정반대 되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기껏해야 나라를 위하는 사랑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주적인 사랑입니다. 즉 개인을 넘고,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고, 세계를 넘어 하늘에까지 사무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냐? 양면을 갖추는 사랑입니다. 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들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탄까지도 위해 주는 사랑입니다. 사탄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 표준을 걸어 놓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마태복음 5장 44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우주적인 사랑의 기준을 이 땅에 찾아 세워야 합니다. 우리들이 죽을 때까지 이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우리의 후손을 통해서라도 이 기준을 세워 놓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며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장 30절)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슬픔과 자기의 억울함도 다 잊어버리고 하늘 뜻을 이루기 위해 고생하셨습니다. 자기의 일신을 통하여 우주적인 생명을 다시 찾는 일이 저끄러지려고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아픔도 잊어버리고, 자기의 억울함도 잊어버리고 온갖 고난을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자신만이 살려는 생애가 아니라 민족과 나라는 물론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생애였습니다. (1-236, 56.11.1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예수님은 이런 가치적인 존재로 오셨지만 가치의 주인공, 우주의 주인공이 못 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이런 우주적인 가치의 목적을 달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 자신들은 예수님의 심령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진리와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신령역사를 거칠 때 무한한 은혜가 내려오면 그것을 개인적인 은사로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시일이 지나 환경적인 은사, 교단적인 은사를 거쳐 세계적인 은사로까지 뻗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사가 내리면 개인적인 생각에서 자신만의 은사로 여기면 안 됩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은혜를 받고 개인적인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를 얻었다면, 그것을 내 것으로 소화시켜서 그 진리를 세계에까지 책임지고 전파시켜 나갈 줄 알아야 됩니다.
이와 같이 세계와 더불어 나간다면, 그것은 나의 은사가 되는 동시에 하늘땅의 은사가 됩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의 신앙 관념이 여러분 하나를 구원하려는, 개인적인 구원관념에 머문다면 거기에서 끝나고 맙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넘치는 은사가 개인적인 것으로만 머물러 있다면 옛날 유대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얻은 바 진리가 나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개인을 통하고 가정을 통하고 사회를 통하고 세계를 통하여 하늘의 섭리사에 미치는 소망의 중심을 갖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의 개인적인 은사를 통하여 부활과 중생의 역사를 하도록 합니다. 개인적이고 민족적이고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구원을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개인적인 구원과 민족적인 구원과 세계적인 구원과 우주적인 구원이 남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버지 앞에 감사할 때도 개인적인 감사뿐만 아니라 가정적․사회적․국가적․세계적인 차원에서의 감사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회개할 때도 개인적인 회개로부터 가정적인 회개, 국가적인 회개, 세계적인 회개를 해야 하며 하늘땅을 놓고 회개하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개인적인 구원관념을 넘고 가정적인 구원관념을 넘고 사회와 국가적인 구원관념을 넘고 세계적인 구원관념을 넘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탕감이 시작됩니다.
유대백성들이 민족적인 구원관념과 함께 세계적인 구원관념까지 가졌다면 예수님은 이 유대백성을 통해서 세계인류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1-233, 56.11.11)
각성해야 할 끝날의 성도들
오늘날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찾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고, 민주주의 세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활시키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크신 은사를 받고 큰 책임을 지고 있는 민족이나 그렇지 않은 민족이나 똑같습니다. 이 땅 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남아 있고, 땅 위에 없었던 새로운 우주적인 참진리와 사랑과 생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우주적인 진리와 우주적인 사랑과 우주적인 생명은 여러분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 위의 인류를 구하기 위해 수고하신 분으로서 불쌍하다면 예수님보다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계를 대신한 말씀이었습니다. 땅 위에 뿌려졌어야 할 진리의 말씀이요, 땅 위에 받아들여졌어야 할 하늘의 말씀이었으며, 땅 위에 심어졌어야 할 우주적인 생명의 말씀이었는데 땅 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예수님은 부정당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이 믿지 않음으로써 예수님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해 왔는데, 이 하나님의 수고를 덜어드릴 수 있는 생명의 주인공, 진리의 주인공이 이 땅에 오신다면 땅 위의 모든 양심적인 사람은 그를 사모할 것입니다. 땅 위에 도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생명의 길을 찾아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더불어 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이 소망하는 기준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개인적인 사랑의 기준, 개인주의를 갖고 살고 있습니다. 옛날 유대교인들도 이런 마음을 갖고 살았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러한 일이 예수님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늘땅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말씀과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념적인 말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체화할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끝날인 오늘날, 여러분은 각성해야 됩니다. 새로운 진리와 생명과 사랑을 가지고 민족을 구하고 세계를 구하고 하늘땅의 6천년의 원한을 해원해 드려야겠습니다. (1-237, 56.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