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믿음 소망 사랑의 왕자(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4장 예수님의 심정과 사랑을 닮자)

무지... | 20180711074517
6. 믿음 소망 사랑의 왕자
          

절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 인간
     
우리는 자기의 가치가 무한한 줄 알고 있습니다. 가치의 내용은 알지 못하면서 가치를 지닌 존재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완전한 가치를 찾아 세워 완전히 남을 수 있는 역사적이며 우주적인 대실존 앞에 멋지고 늠름하게 자랑할 수 있는 모습이 못 되어 있는 우리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그 가치의 존재들, 가치의 모습을, 가치의 인연을, 가치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곳을 찾아 나가야 할 모습들입니다. 이것을 시인하면서 만상을 바라보고 대우주를 바라보게 될 때 허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의지할 그 무엇을 추구하고 추구해야 할 운명에 처하여 있는 것을 항시 양심의 작용을 통하여 체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하나님이 없다 할지라도 가상적인 절대자를 세워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 그러한 위치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과연 느끼고 즐기고 노래하는 어떠한 행동이 있다 할진대, 그것과 가치적인 인연을 맺고 느끼며 즐거워할 수 있는 모습인가를 생각해 볼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가 지적하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단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불쌍한 사정에 엉클어져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여기에 어떠한 인연을 세워야 할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가치의 주체요 가치의 본체라 할진대 하늘이 그 가치의 인연을 찾아 세우기 위해 수고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는 사랑이니 무엇이니 하는 말이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타락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연의 위치를 상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연의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 이러한 우리는 이 전체의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이여󰡑 하고 울부짖어야 되겠고,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절대자여󰡑하고 울부짖어야 되겠고, 선의 형체를 갖춘 그 무엇이 있다 할진대 그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나타나 주기를 간구해야 되겠고, 그러한 절대자나 하나님 혹은 선한 존재를 간곡한 마음으로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관계, 이러한 입장에 있는 인간임을 아는 연고로 우리를 찾아오기에 온갖 수고와 노력과 자기 희생도 개의치 아니하고, 인류를 붙들기 위해 자신이 소모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전체의 가치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고 계시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할진대, 우리는 공손한 마음을 갖고 쌍수를 합하여 그 앞에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전체의 움직임을 헤아려보고, 역사의 움직임을 헤아려 보고, 심정의 움직임을 더듬어 보게 될 때, 나 자신은 알지 못하나 역사의 배후, 내 심정의 깊은 배후에서는 그 무엇이 나를 이끌고 있고, 나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내 심정 깊이에는 나로 하여금 가치를 추구케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연한 것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돌려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나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 인연을 풀어 그 가치를 논하게 될 때, 최대의 선인 하나님이 여기에 개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7-152, 59.8.30)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왕자가 되어야 할 인간
     
하나님이 배후에서 자기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절대적인 가치를 인간 앞에 부여하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수고해 오셨고, 이후에도 그 수고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게 될 때, 하나님을 생각만 하여도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대하여 그들이 내용도 모르고 뜻도 모르는 말씀을 선포해 왔습니다. 종교를 세워 놓고 간곡한 인연을 맺기 위한 내정의 뜻이 있으면서도 인연을 맺어야 할 우리 앞에는 막연하게 나를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선포한 내용은 막연한 것이었습니다. 또 나를 바라보라고 외쳐 나왔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를 사랑하라고 외쳐 나왔습니다. 그것이 무슨 인연과 무슨 내용으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나 듣고 겪어 보니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심적인 인연의 세계의 그 무엇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러한 막연한 말씀에 의지하여 믿고 나왔고, 바라고 나왔고, 사랑하고 나왔습니다. 또 신앙자들은 믿는다는 자리에서 쓰러졌고 소망한다는 자리에서 쓰러졌고 사랑한다는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신앙노정에서 쓰러진 자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다가 죽은 자가 어느 일개국의 충신 열사보다 몇 천만 배 많습니다. 소망하다 죽은 자가 많고 사랑하다 죽은 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믿음의 왕자라고, 소망의 왕자라고, 사랑의 왕자라고 칭송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하나님을 대하여 원망해야 합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믿는다는 말, 소망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이 없어야 합니다. 
6천년의 섭리를 들춰 보게 될 때, 믿음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라다가 쓰러진 자는 있으나 믿음의 대왕자가 되어 인류 앞에 받듦을 받은 자가 없었고, 소망의 한 터전을 찾기 위해 헤맨 자는 많았으나 그 소망의 터전 위에서 하늘의 칭송을 받은 자, 인류의 칭송을 받은 자가 없었으며, 사랑을 말한 자는 많으나 그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찾아 헤매던 믿음의 실체요,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한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민족은 몰랐습니다. 세계 인류 가운데 아무도 안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7-154, 59.8.30)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그러니 예수님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오셨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세계를 뒤로 하고 알아주는 분을 찾아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믿음을 상속받고 인류의 소망이 되는 하나님의 소망을 상속받아 그 무형의 하나님을 대신한 실체적인 믿음의 주체, 실체적인 소망의 주체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상대적인 믿음의 주체가 아니고 절대적인 믿음의 주체로 무형의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 위에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은 믿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믿어야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소망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실체를 쓴 인간 앞에는 실체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류는 예수님을 실체의 모습으로 세워준 하나님의 수고의 공덕 앞에 머리 숙이고 천만 번 울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터전을 세우고, 소망의 환경을 개척하고, 사랑의 울타리를 세우려 했던 예수님의 이념은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4천년 역사는 믿음의 실체를 세우기 위한 역사요, 예수님과 성신 이후의 2천년 역사는 소망의 실체를 세우기 위한 역사입니다. 주의나 사상기준도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소망하는 세계관과 그 반대의 세계관이 오늘날 민주(民主)와 공산(公産)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소망이 끝에 다다랐기 때문에 이 때를 끝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끝날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조상이냐? 믿음의 조상이기보다는 소망의 조상입니다. 소망 중에서도 실체로서 소망할 수 있는 조상입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 마음이 귀한 줄 알았습니다. 마음 가운데 심정이 귀한 줄 알았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마음의 실체대상과 심정의 실체대상이 되는 분 이상의 소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류를 대하여 󰡐너희는 신부요 나는 신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세계는 아무리 나갔댔자 소망하는 그 이상의 한계를 못 넘어갑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말씀적인 소망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말씀을 지나 실체를 고대해야 할 때입니다. 천만가지의 믿음의 명사보다도, 훌륭한 믿음의 역사보다도 한 사람의 실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실체가 나타나지 않으면 말씀적인 소망의 세계관은 막혀 버립니다. 실체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한, 그 세계는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7-155, 59.8.30)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목적
     
오늘날 기독교는 명실 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고, 민주주의를 중심삼고 움직이는 민주진영의 세계노선도 기독교 이념의 한 부분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나, 이제 그것도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말씀만 가지고 즐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실체로서 영원한 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는 회오리 바람과 같이 돌고 있습니다. 소용돌이치는 오늘의 사조 밑에 모여 있는 우리는 과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이후 역대 선지들의 모습을 추앙합니다. 그 이후 2천년의 소망의 왕자였던 예수님을 바라보고 치열한 투쟁의 역사를 회고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루려했던 것은 말씀을 위주한 약속의 소망이었지 실체적인 생활로 나타날 수 있는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바란 소망의 한날이 실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때가 끝날입니다. 그것을 이루려는 것이 재림이상이요, 그 뜻을 성사시키기 위해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이제 믿음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실체이기 때문에 그를 믿으면 예수님 이전 4천년 동안 믿어 왔던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 없는 백성 앞에 믿음을 세워야 했고, 소망없는 백성 앞에 소망을 세워야 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이후의 예언을 보십시오. 믿음을 기반으로 한 소망은 메시아 한 분을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상징적인 약속권내에서 신랑 신부라고 하는 소망을 갖게 되었으니,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이해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실체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면 그래야 이치가 맞습니다.
소망의 실체요 믿음의 실체이신 그 분이 이루려고 하는 소망과 믿음의 목적은 인간들이 자기를 찾아 사랑을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주의 사랑의 품에서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최대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세운 목적, 하나님이 소망을 세운 목적, 하나님이 사랑을 세운 목적, 그 목적은 예수님만도 아니고, 아브라함만도 아니고, 우리 선조 중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오늘의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6천년 동안 믿어 주고 찾아온 그 분이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천지가 뒤집히는 곡절이 있습니다. (7-156, 59.8.30)
     
     
 예수님과 성신의 사랑을 통한 중생
     
믿던 아버지, 소망하던 아버지, 사랑하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여러분이 붙들 때, 예수님도 󰡐지금까지 너를 만나기 위해 허덕여 왔고 , 너 때문에 수고하였다󰡑고 말할 수 있고, 하나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이시여! 같이 삽시다. 예수님이여! 같이 삽시다󰡑 할 때, 󰡐오냐, 너와 더불어 영원히 같이 살자󰡑 할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망상적인 천국, 가공적인 천국은 인류에게 필요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실체적인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싸워야 됩니다. 
예수님이 가시면서 󰡐내가 못다 이루고 가니, 나를 믿는 대신 성신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받는 줄 아십니까? 성신을 믿어도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하려는 것이 성신이니 성신도 믿어야 합니다. 
성신은 무슨 신이냐? 어머니신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성신은 어머신이요, 예수님은 인류의 참아버지입니다. 참아버지는 완성한 아담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여 인류의 조상이 못되었으니 우리는 전부 참조상이 아닌 거짓조상의 후손들입니다. 여기에 참조상으로 오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참아버지란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삼위신이 어쩌고 저쩌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아버지이고 성신은 어머니이므로 이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중생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 없이 태어날 수 있습니까? 
묵시록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장 17절)󰡓고 했습니다. 그런 날은 성신이 실체를 쓰는 날입니다. 그때가 재림시대입니다. 신부 단장을 마치는 날입니다. 어린양 잔치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참부모를 거꾸로 모셔들이는 날입니다. 그렇게 되면 명사적인 하나님, 신앙적인 대상으로 필요했던 하나님은 지나갑니다. 이름만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외형적으로만 믿는 신앙생활은 필요 없습니다. 실체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체와 소망의 실체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사랑의 실체, 사랑의 주체도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냈는데 인간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불신함으로써 그는 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다시 올 것이냐? 한 신랑이 오셨던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다시 오실 수 없습니다. 와봐야 또 다시 푸대접 받겠기에 오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면 나를 찾아오시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신자가 기독교를 망치고, 하나님의 뜻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실체, 소망의 실체, 사랑의 실체가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한, 믿음을 세운 목적과 소망을 세운 목적과 사랑을 세운 목적이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니면 하나님도 이 세계를 움직이지 못하신다는 그런 신념으로 사셨습니다. 자신이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7-157, 59.8.30)
     
     
 끝날의 성도의 믿음과 책임
     
지금은 증거시대입니다. 과학적인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은 논리적인 것입니다. 논리적이라면 원인과 결과가 체계적으로 부합되어야 합니다. 논리적 사실을 생활적인 면에서 실증하고 실행할 수 있을 때, 그것을 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생활적이고 실증적인 입장을 떠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걸 떠나서 민족이니 무어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실체를 가지고 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끝날은 믿음을 세우기 위한 4천년 역사와 소망을 세우기 위한 2천년 역사가 끝나는 때요, 믿음의 왕자요 소망의 왕자요 사랑의 왕자가 나타나는 때입니다. 주님이 둥둥 떠서 구름을 타고 온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해가 나고 하늘이 청명하게 맑은 날엔 구름이 없으니 주님이 못 오실 것 아닙니까? 
선생님도 그런 신앙생활을 해 보았습니다. 안타깝고 답답하여 땅을 치면서 하늘을 대하여 항의도 해 보았습니다. 결국 헤치고 들어가 보니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른 말을 하다 보니 욕먹는 자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이단자의 명패를 달고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날 바울도 이단자의 괴수였고, 참을 갖고 오셨던 메시아도 바알세불의 신이 들린 괴수라는 빈정거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서러움입니다. 서러움으로 시작된 역사이니 서러움으로 끝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잘 믿는 신도들이 있다 할진대 교회의 마루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신도를 귀중하게 보십시오. 교역자들이 몰아낼 때 눈물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면서 나가는 양떼들을 따라가 보십시오. 거기에는 새로운 꽃동산이 가까이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냉랭한 찬바람이 불어오는 한 순간이 지나가면 봄절기가 올 줄 누가 알았던고. 그 몸은 역경 속에 있으나 그 심중은 봄절기를 맞이할 수 있는 늠름한 신부의 모습을 한 사람, 주님은 그러한 자를 찾아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인 앞에서 웅변을 토하는 말씀의 왕자는 많으나 실체의 주인공은 없습니다. 믿음의 실체인 교역자는 없습니다. 소망의 실체인 교역자는 없습니다. 사랑의 실체인 교역자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교단, 이 신도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끝날의 성도들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 한국 천지에 문(文)이라는 한 존재는 이단자의 괴수로 몰리고,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민족이 복받게 된다면 그 길을 가겠습니다. (7-159, 59.8.30)
     
     

말씀보다 더 중한 실체
     
사실적이고 증거적인 제단이 없어졌으니 실체적인 제단을 꾸밀 수 있는 하늘의 믿음의 왕자는 어디 있는가? 지금은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군중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장병을 거느리고 호령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수만 장병을 위해 잠못 이루는 장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간을 대해 추울세라, 더울세라, 배고플세라 염려하면서 역사해 왔습니다. 
선두에 나서서 나를 보라고 외치는 바리새 교인들이었지만, 예수님은 뒤로 돌아서서 눈물지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선두에서 외치는 사람이 인류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와 더불어 사조와 더불어 쓰러지면서도 하늘을 붙들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고 눈물 흘린 사람들 때문에 역사가 이 모양으로라도 흘러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맞을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말씀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말씀의 내용보다는 실체가 문제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대는 무엇을 갖고 있느냐? 너는 무엇 갖고 있느냐? 신앙의 자체가 될 수 있는 그 자신이 필요하고, 소망의 자체가 될 수 있는 그 자신이 필요하고, 사랑의 자체가 될 수 있는 그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만 갖추고 있으면 주님이 천년 후에 오시더라도 나를 버리지 못합니다. 󰡐믿음 있는 곳에 내가 있고, 소망 있는 곳에 내가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내가 있다󰡑 할 수 있는 자신이 되면 문제가 없습니다. 
이제 역사를 실체적으로 해명해야 할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한날은 실체를 만나는 날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망상이거나 가공적인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주의 신부될 자격자가 있습니까? 그렇게 됐다는 사람 봤습니까? 된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됐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믿음의 내용을 갖추고, 역사적인 소망의 내용을 갖추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의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모든 내용을 갖춘 실체, 그 자체로 말미암아 6천년 역사를 섭리해 온 하나님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이 놈의 죄악세상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합니다. 실체를 찾기 위해 수고한 6천년의 역사, 인간들로부터 수없이 배반당해 나온 지긋지긋한 역사입니다. 꿈에도 다시 보고 싶지 않고, 꿈도 꾸기 싫은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붙들고 다시 생각하고 서러워하고 되풀이하며 이루어야 할 것이 실체입니다. 그 하나가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믿음도 내것이요, 소망도 내것이요, 사랑도 내것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을 갖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천년 만년 믿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체입니다󰡑 하고 6천년을 섭리해 나온 하나님을 믿는 것 이상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믿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육신을 믿고 여러분 마음을 믿고 여러분 심정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고자 6천년 동안 믿고 나온 전부를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대신, 예수님 대신, 성신 대신, 만민 대신 죄악과 맞서 싸워야 되겠고, 그릇된 모든 것을 부수는 심판자를 대행할 수 있는 자격자로서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입장까지 나가야 합니다. (7-160, 59.8.30)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신을 해방시켜 드려야 할 우리
     
예수님 믿고 천당 가겠다고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천국 가겠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천국 좀 보내 주십시오. 천국 가서 예수님 만나 보겠다고 하지 말고 이 땅 위에 천국을 만들어 예수님을 모셔 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겠다고? 죄악에 물든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랑을 요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황태자입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게 믿어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겠다면 예수님이 죽던 그 이상의 심정으로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는 마음이 사무쳐야 됩니다. 그런데 전부 강도의 심보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 자기들 뜻대로 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영계를 들춰 봐도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틀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해방시켜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구속을 받고 있구나. 나 때문에 하나님이 구속을 받고 있구나. 나라는 한 개체 때문에 하나님이 사탄의 참소를 받고 있구나. 나 때문에 예수님도 죽었구나. 나 때문에 성신이 피어린 투쟁의 역사를 뒤넘이쳐 나오는구나. 하나님이시여,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안식시켜 해방의 자리에 옮겨 드리겠습니다. 예수님도 성신도 해방의 자리에 옮겨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는 신앙에 주린 자, 소망에 주린 자, 사랑에 불타는 자를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찾아왔습니다. 
이 말에 모순이 있습니까? 그렇게 우리를 사랑한다고 해야 하나님이 내 아버님이십니다. 그런 경지에서는 산을 바라보아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책임 못하는 우리로서는 역사를 들춰 봐도 가슴을 쳐야 하고, 활개를 치며 발걸음을 옮길지라도 탄식의 왕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국 보좌에 편안히 앉아 계신 분이 아닙니다. 지옥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는 하나님은 지옥 이상의 고통을 당하는 분이라는 것을 인류는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지옥 이상의 고통을 당하지 않고 지옥이 있도록 했다면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역사노정에서 지상지옥의 고통을 어느 한 부분도 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은 지옥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런 허무맹랑한 말이 어디 있느냐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념에서 하나님을 믿고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만 인류의 참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기 위해 지옥의 고통을 다 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음부(陰府) 3일 기간이라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는 지상 구주가 되어야 했고 영적 구주가 되어야 했습니다. 지옥에 들어가서도 전도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지상 지옥의 밑창을 뚫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역사노정에서 밟히고 역사노정에서 밀려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걸음을 걸었으니 우리도 그런 사정의 동반자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천국이라는 영광의 동산을 상속해 주겠다는 것이 복귀섭리요, 구원섭리입니다.
󰡐하나님, 제가 지옥에 가서 하나님의 고통을 체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심정을 갖고 기도하는 자는 지옥 가지 않습니다. 󰡐오, 하나님, 지옥이 싫사오니 천국만 보내 주시옵소서󰡑 하는 자는 지옥 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아바 아버지여, 내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것은 4천년 동안 이 민족 이 백성을 구하기 위해 지옥의 고통을 당한 하나님의 심정과 내정을 살펴보게 될 때, 자신도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7-162, 59.8.30)
     
     
예수님의 이념과 정신을 맡을 수 있는 자
     
이러한 정의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할 기독교가 그 기반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우리의 손으로 건설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말없이 싸우고, 말없이 행진해야 합니다. 그 길, 복귀의 길은 영화의 길이 아닙니다. 영화를 원하게 되면 우리에게 소망의 한 때가 오지 못합니다. 거기에 정력을 기울이고 거기에 소모할 시간이 없습니다. 세상이야 이러든지 저러든지 갈 길을 가자고 나선 우리입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통일교회를 찾아오거나 말씀을 들으러 온 자가 있습니까? 통일교회의 길은 가기가 힘듭니다. 고통의 담벽에 머리를 받히고 몸을 부딪히며 피살이 에어지는 자리를 거쳐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주님도 그렇게 갔고 선지자들도 늘 그렇게 갔습니다. 역사를 맡았던 자들은 역사의 정기를 품고 피를 머금은 채 싸움의 용자로 나선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런 무리들이 역사를 이끌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천정을 붙안고 왔던 예수님의 이념과 예수님의 정신을 맡을 자도 바로 그러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맹목적인 신앙의 시대는 지나갔고 허구적이고 가공적인 논리의 기반은 무지에 의한 것이며, 이 기반에는 완성이 없다는 것을 단정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제기해야 할 문제는 내가 나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듯이, 예수님이 성신을 믿고 성신이 예수님을 믿듯이, 내가 나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륜의 이치가 변할지언정 나는 변할 수 없다.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예수님의 말씀은 변할 수 없다.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나는 변함이 없다󰡑 할 수 있는 단계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개인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믿습니까? 천국에 가겠다고 날뛰는 여러분, 자신을 믿습니까? 말로만 믿는, 내용이 없는 믿음은 쓸데없습니다. 내용이 없는 껍데기, 쭉정이는 쓸데없습니다. 그래서 알곡과 쭉정이 비유의 성경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알맹이의 믿음, 알맹이의 소망, 알맹이의 사랑의 화신체들이 되어 움직인다면, 이 세계가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미국천지가 아무리 광활하고 선진국 입장에 있더라도 문제없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어느 한날 굴복할 것이다󰡑 하는 자신을 갖고  하나님을 대신한 사람은 영원한 소망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라 하였으니 여러분이 그 사랑을 품고 주기 위해 노력하고 주기 위해 허덕이고 주다가 죽을 자리를 찾지 못해서 허덕여 보십시오. 그래도 이 나라가 망하겠습니까?
영원히 내가 나를 믿고, 내가 나 자신을 소망으로 삼고,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저의 사랑을 받으시옵소서. 하나님, 저의 소망을 보고 즐거워하소서. 하나님, 저의 믿음을 보고 즐거워하소서󰡑 할 때 하나님이 󰡐오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세운 목적이 그것이요, 소망을 찾는 목적이 그것이요, 사랑을 그리워한 목적이 그것이니,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주님과 상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소망과 믿음의 목적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살기 위한 것입니다. 종교의 명사를 다 떨쳐 버리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사는 새로운 이상세계가 지상천국입니다. 그 세계는 가공적(架空的)인 세계가 아닙니다. 논리적 견지에서 필연적인 사실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을 수준이 높은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런 세계에 남을 민족은 믿음에 불타는 민족, 소망에 불타는 민족, 정열에 불타는 민족입니다. 역사의 모든 장(場)을 들추고 국가의 흥망사(興亡史)를 헤아려 믿음의 절개를 붙들고 싸워 나온 민족이 어디 있나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소망에 불타는 민족, 정열에 불타서 하나님의 일이라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움직이려고 하는 민족, 그 민족은 하늘 앞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7-164, 59.8.30)
     
     
하나님의 아들딸의 책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내용을 놓고 볼 때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을 친구로 삼겠습니까? 믿을 만한 사람, 소망이 있는 사람, 맛이 있는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으니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믿을 만한 사람, 소망이 있는 사람, 맛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살면서, 환경이 어떠하든 처지가 어떠하든 오늘의 생활에서 맛을 느끼고 사는 사람이 지상천국에 살 수 있는 사람이요, 맛을 느끼며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마음에 있나니 그 마음의 천국을 중심삼고 죄악된 세계 속에서도 고통을 느끼지 않고 외적 세계를 코웃음치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천국 백성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문제는 어디에 귀결되겠느냐? 외적 세계도 좋고, 국내의 모든 것 다 좋다는 것입니다. 세계는 될대로 다 되어 끝이 되었으니 오늘 문제 해결의 시점은 어디냐? 문제 해결의 초점은 나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대상적 위치에서 그의 대상적인 가치를 세워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6천년 동안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해야 합니다. 󰡐얼마나 우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 얼마나 바라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 얼마나 그리우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 하는 그 한마디를 하나님은 듣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아들딸을 만나서 하늘과 지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라고 축복한 후 6천년의 한을 잊어버리고 󰡐오늘이 내 생일이요, 내 환희의 날이로구나󰡑 하고 싶어합니다. 6천년의 한을 기억하지 않고 새로운 천지에서 새 아들딸과 정적인 노래를 하며 살고자 하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의 아버지요, 그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7-170, 59.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