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예수님의 사정과 심정에 하나되자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뜻을 종결지어야 했던 예수님
오랜동안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받들어 나오던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택함을 받은 유대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택한 하나님의 바람이었고, 또 그들 자신의 소망이었습니다.
이러한 뜻이 이루어지는 한때를 바라서 하나님은 당신이 믿을 수 있고 창조이상을 실현하는 전체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외아들인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인간 앞에 주인으로 나타내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려던 축복을 이루어야 했고, 또 역사적인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뜻을 종결지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어찌하여 이 땅에서 섭리의 뜻을 성취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이상동산을 이루시지 못하고 가셨는가?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슬픔을 자아내게 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소망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고 자기 자체를 희생해서라도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피조세계의 중심존재로 세워졌던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4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 나왔고,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시조의 과오를 책임지고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이념, 자신의 목표로 삼고 나타나신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유대민족은 예수님이 역사적인 소망을 대신한 동시에 당시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대신한 분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고고(孤高)한 한 개인이로되 그 자체는 역사를 대신할 수 있고, 현실을 대신할 수 있는 동시에 천륜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이상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오던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은 예수님이 그러한 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협조하기는커녕 공공연히 방해하고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어느누구 한 사람을 친구로 세워놓고 자신의 슬픔을 토로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성사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쁨이 되고, 유대교단과 세계 인류의 기쁨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주인공으로 나타나셔야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굶주림과 슬픔을 당하는 불쌍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2-206, 57.5.26)
예수님의 서러움은 어느 정도였던가
이스라엘 민족과 인류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슬픔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예수님은 당시의 환경만을 보고 슬퍼하시고 서러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서러움은 아담의 타락 이후 4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 온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대신한 서러움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4천년 기나긴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수고한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서러움을 대신한 서러움이었습니다.
4천년 하나님의 서러움과 천상에 있는 천천만 선지선열들의 서러움을 대신 지니고 오신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서러움을 하나님과 천천만 성도와 천군천사들은 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서러움은 당신을 위한 서러움이 아니라 당신을 죽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서러움이요, 유대교단을 염려한 서러움이었으며, 세계적인 뜻길을 염려한 서러움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한 후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지만,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의 서러움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한의 심정과 지상의 인간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품고 오신 예수님을 유대교단이 메시아로서 모셔드리지 못하였으니, 예수님의 슬픔은 한층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켜야 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이 세워주신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예수님을 배신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예수님은 30여평생 하나님의 눈물을 대신하여 한없이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생활을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의욕에 찬 소망을 품고 아버지의 사정과 심정을 소개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3년 공생애기간 동안 서러움이 북받침을 참으시며, 겟세마네동산을 거쳐 골고다의 산정까지 몰리며 쫓김을 당하시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하고도 처참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곡한 기도를 드리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서러움과 천천만 성도들의 서러움과 만 인간의 서러움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하는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요, 당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성도들도 죽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러운 심정이 북받쳐 하늘 앞에 호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서러움과 인간의 서러움을 대신하고, 후대 억조창생의 서러움을 대신하여 애달피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여러분은 그런 예수님을 역사적인 예수님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서 또 다시 그때와 같은 사정에 처해 있을지 모르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 이 세계에 드러낼 수 있는 예수님의 후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 속에 맺힌 예수님의 한과 서러움은 풀 수 없습니다. (2-208, 57.5.26)
역사적인 서러움을 책임져야 할 끝날의 성도들
지금 이 시대는 누구나 말하고 있고, 또 많은 선지자들이 예고했던 '끝날'이며, 예수님께서 민족과 교단으로부터 버림받아 돌아가신 후 다시 오실 것으로 말씀하셨던 '재림의 때'입니다. 이러한 때를 맞아서 여러분은 찾아오실 예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어야 하겠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단과 유대민족보다도 더 간절하게 하늘 뜻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찾아올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책임지셨던 4천년 역사의 서러움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성신까지 오셔서 애달파 했던 2천년 기간을 가한 6천년의 역사적 서러움을 대신하고 책임짐으로써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인해 끊어진 천륜의 대유업을 인계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는 역사적인 인연을 벗어나 자체만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주를 책임지고, 미래를 책임지고, 6천년 하나님의 서러움과 천군천사의 서러움을 대신하고, 이 땅의 만민의 서러움을 대신하여,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판날을 바라보며 타락권내에 머물러 있는 것을 서러워하고 염려할 줄 아는 심정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의 서러움과 당신이 돌아가시게 된 사연을 알겠나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간곡한 심정으로 뭇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안타까워했던 그 사정과 심정을 체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역사의 주인공이요, 우주의 주인공이시며, 미래의 이상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모시고자 해도 모실 수 없으며, 그러한 예수님의 서러움을 풀어드리고자 해도 풀어드릴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4천년의 서러움에 갇혀 있었고 30여 평생 만민과 후손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정을 걸어놓고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며 이것을 타고 넘어가 창조이상권(創造理想圈)에까지 도달하기 위해 새로운 신앙기준을 세워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실증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중심 사명을 맡은 유대교단이 있었던 것같이 오늘날 그리스도를 중심한 세계적 이스라엘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도 대표적인 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역사는 동시성을 띠고 전개되어 나오므로 하나님은 끝날의 사명을 담당하는 하나의 종교를 세워 섭리역사를 귀결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끝날을 맞이한 우리로서는 그러한 대표적인 종교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종교를 찾으려 할진대 역사적인 교훈으로서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범한 역사적 과오를 더듬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지나친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웠고, 지나치게 의식과 규례에 얽매임으로써 천륜의 법도에 어긋난 생활을 하였습니다. 끝날에 처한 오늘날에도 그러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종말시대에 처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시 오시는 주님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밟아 오시게 되기 때문에 세계적인 서러운 고개를 넘어 이 땅에 다시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의 반대에 의해 고난의 길을 걸으셨고 끝내는 겟세마네동산을 거쳐 갈보리산정까지 쫓겨가셨던 것과 같이, 다시 오시는 주님도 세계적인 이스라엘과 유대교적인 교단의 반대를 거쳐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을 넘어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 면에서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을 바라보고 느끼던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하고, 역사를 바라보고 느끼던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하고, 미래를 염려하는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 서러움에 맺혀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찾아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여러분은 예수님 이후 2천년 역사를 가한 6천년의 역사적인 전체의 서러움을 풀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오시는 주님과 더불어 골고다의 길을 넘어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2-210, 57.5.26)
체휼해야 할 예수님의 심정과 사정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하나님을 향해 호소할 때,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졸고 있던 세 제자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천적인 가치를 알고서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아드림으로써 부활하실 주의 영광을 확인해 드릴 때, 그 행위를 비웃고 막아선 제자들의 무지한 행동이 예수님의 원한이 되었음을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길을 가시면서 서러운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만은 그런 예수님을 위로하고 염려하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대신한 예수님의 천적인 내적 심정을 체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녀에게 축복을 내리셨고, 환희의 은사로 그녀를 하나님의 뜻 앞에 세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럽고 고달픈 수고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자기의 위신과 체면도 다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찾기 위해 안타까운 심정을 갖고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가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수 있는 영광을 입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 이상으로 간절하고 애달픈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비록 주를 찾았다 하더라도 영원히 주님을 모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주님의 충만한 사랑의 품에 안기고 사랑의 동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6천년 서러운 심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서러움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고, 또 영계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심정을 소유해야 됩니다. 그런 여러분이 될 때에 하나님과 천상의 성도들이 여러분을 환영할 것이고, 예수님과 만민도 여러분을 환영할 것이며, 여러분은 막달라 마리아의 입장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권내에서 이상적인 생활무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6천년 슬픔의 역사를 회복하여야 할 여러분의 육신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해서 섭리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과거와 현실과 미래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분 한 개체는 전후 좌우 상하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서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무분별하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를 초월한 영원한 가치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 개체에서 성취해야 된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예수님이 고통과 서러움을 당하셨던 한을 품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온 인류가 환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당하신 고통과 서러움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시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 그리고 택함받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가정까지 예수님을 저버렸기 때문에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을 대신하고 예수님의 사무친 원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는 당시 예수님을 저버리던 중심 교단인 유대교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모시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계적으로 배반당하신 예수님을 위하여 혼자서라도 세계를 상대로 싸울 수 있고, 유대 교법사들에게 배반을 당하신 예수님을 위하여 어떠한 배반도 나홀로 가로막겠다고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길이 복귀의 길입니다.
승리의 한날을 예고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시켰던 요셉의 가정과 요셉의 종족까지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 전체적인 불신의 조건들을 여러분 일대에서 홀로 탕감하여 승리의 조건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여러분이 되지 않는다면 다시 오시는 주님께서 이상적인 민족과 교단과 가정을 가지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서러움의 길만 가신 것이 아닙니다. 무한히 외로운 길을 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전체의 뜻을 이 땅의 인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지만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없어서 알려주지 못했던 예수님이었으므로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 성(城)에서 반대하면 저 성으로, 이 고을에서 반대하면 저 고을로,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풀지 못하여 안타까워하신 예수님, 자신의 서러운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들을 찾기 위하여 감람산 기슭을 찾아 헤매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늘의 사랑과 천륜의 인연을 가지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셨지만, 역사적인 노정에서 전무후무한 서러움과 고독한 심정을 지니셨던 그 사정을 오늘날 여러분만이라도 알아드리고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느끼고 그러한 예수님의 사정과 하나된 입장에서 생활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오! 주여', '아버지!' 하는 이 한마디로써 예수님과 심정으로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여러분은 역사를 초월하고, 환경을 초월하여 예수님의 고독한 심정을 체휼할 수 있어야 합니다. (2-212, 57.5.26)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살아야 할 끝날의 성도
예수님은 외로우신 분이며, 서러움의 주인공이요, 서러움의 왕자이셨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불쌍한 분이셨습니다. 이 땅 위에 어떤 불쌍한 사람, 어떤 외로운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보다 더 불쌍하고 어떤 외로운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대신 서러워할 수 있고, 예수님 대신 애달파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어 안타까웠으며,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어 주는 사람이 없어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천심을 통하고 본성의 인연을 맺어서 하늘 앞에 승리의 영광을 돌려드릴 인간들을 찾으려고 초초한 모습으로 오셨다가 그 뜻을 이루시지 못한 예수님의 한 맺힌 심정을 체휼하고 천심을 대신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수고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헤아리며, 불쌍하신 예수님을 동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하나님 우편에서 영광의 주님으로만 계시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예수님은 땅 위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영계에 가셔서도 만민의 죄를 감당하는 속죄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불쌍한 분이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실생활에서 믿고 따르고 모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서러움, 천주적인 서러움, 세계적인 외로움, 천주적인 외로움을 겪으신 불쌍한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하며,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그러한 자신이 되었는가를 자문자답하고 분별해야 할 때입니다. (2-214, 57.5.26)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성취해 드리기 위한 필수 조건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이룩하시고자 하던 영원한 뜻을 유업으로 계승받아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성취해 드려야 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기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은 무엇인가?
불신과 죄악으로 물든 6천년 역사를 종결짓기 위해 오시는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교단과 사도와 가정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위한다 할진대는 지금까지의 교단적인 인연을 초월해서 오늘의 현실에서 역사적인 신앙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단의 기준을 갖추어야 하고, 미래의 복음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도와 가정의 기준을 조성하여 영원한 승리의 발판을 이룩함으로써 하나님의 이상동산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인류와 세계를 위해 오셨던 예수님을 당시에는 세계와 민족, 교단과 가정이 배반하였으며 심지어는 택함받은 제자들까지 불신했지만, 오늘날 여러분만큼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그의 사정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반하는 세계와 교단과 종족을 바라보며 서러워하신 예수님에게는 그 심정과 통할 수 있는 부모가 있어야 했습니다. 성경 말씀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선생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왔나이다' 하니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예수님에게는 진심으로 당신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부모와 형제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다운 부모와 참다운 형제가 없어서 이와 같이 슬프고 외롭고 불쌍한 처지에 있었으며, 종족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주의 길을 곧게 해 드려야 할 세례 요한에게까지 배신을 당하여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한을 품으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하여 예수님의 사정을 통하고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모든 이념을 계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정과 종족이 예수님 탄생과 관련된 이적과 기사를 보고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무지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들지 못했습니다. 본시 그들은 예수님의 천적으로서의 사명을 깨달아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고 환경을 준비하여, 섭리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예수님의 발판이 되어야 했습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후에 예수님이 따로 사도를 찾아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 이후 요셉까지 60여대를 거쳐 나오면서 혈통적인 인연을 통해 세워진 예수님이었으므로 그의 가정과 종족이 그를 옹위하여 불신하는 교단과 민족과 세계에 대립하여 싸울 수 있는 하나의 종족권을 형성했더라면 예수님은 결코 서러운 입장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2-215, 57.5.26)
끝날에 처한 성도들의 사명
자신과 함께 사탄세계를 대하여 싸울 수 있는 가정적인 환경을 잃어버리신 예수님이셨기 때문에 다시 오시게 되면 예수님은 우선 당신의 서러움과 고통을 막아줄 수 있는 가정적 터전을 찾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심정일체를 이루어 그러한 가정적 울타리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정적인 울타리가 없었던 것이 예수님의 원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시에 예수님의 가정적인 울타리가 되어 '예수님은 참다운 나의 주님'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참다운 자녀들이 나타났다면 예수님의 원한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시 오시는 주님의 가정적인 울타리가 돼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서러움을 위안해 드릴 수 있는 형제가 있었더라면 그 형제를 통해 예수님의 한이 해원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종족을 중심삼고 유대민족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협력자가 되었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당시에 유대교단을 넘어 세계로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던들 예수님의 복음이 이방에서부터 전파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그러한 종족과 민족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에 부딪치더라도 목숨을 걸고 그분의 가정적인 발판과 종족적인 발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끝날에 처한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성도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늘이여, 6천년의 원한을 나에게 맡기시옵소서, 예수님의 서러움을 나에게 맡기시옵소서, 천상에 있는 서러움을 나에게 맡기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하나님의 서러움과 예수님의 외로운 심정과 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사람을 하늘은 이 시간도 찾고 계시며, 어제도 그저께도 일년전에도 천년 전에도 2천년 전에도 소망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을 거쳐 민족을 대신한 제물의 길, 골고다의 죽음길을 가시면서도 그러한 길을 가게 했던 불신의 민족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으신 것과 같이, 부모의 심정을 소유하고 부모의 처지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신랑 신부의 입장도 느껴 보아야 되겠고, 하늘가족과 하늘종족의 입장도 느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여러분을 중심삼고 이상적인 가정과 종족을 건설하실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끝날입니다. 창세 이후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의 가정, 창조이상으로 바라던 이상적인 가정은 아직까지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애달픈 심정을 백 퍼센트 체휼하는 존재가 이 땅 위에 나타나야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원한이 풀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2천년 전 주님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교법사․제사장․세례 요한 가정이 불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던 그 입장에서 벗어나 믿고 모시는 사명을 여러분이 담당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의 예수님은 불쌍하신 분이었고 서러우신 분이었습니다. 6천년 역사의 종말기에 처한 우리는 예수님의 그러한 심정과 통할 줄 알아야만 오시는 주님을 바르게 모실 수 있습니다. (2-216, 57.5.26)
천륜의 뜻을 책임지고 나가야 할 우리
여러분! 핍박이 있다고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울더라도 여러분 자신만을 생각하고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늘 앞에 '예수님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세계적인 서러움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어떠한 고통의 자리도 개의치 않고 나가겠나이다!' 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세계적으로 불쌍한 자리, 죽음도 개의치 않겠나이다! 이 일을 위하여 나의 모든 욕망도 버리겠나이다!' 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렇게 인륜의 고개를 넘어 천륜의 법도를 통할 수 있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즉 부활의 영광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심정을 그대로 몸 마음에 나타내어 행동하는 자신이 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한 인간, 본성을 갖춘 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신앙관념으로 영원한 천륜을 헤아리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영원한 천륜을 대신하여 나타나는 메시아를 그처럼 간절히 기대했던 유대민족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유대교적인 신앙과 모세 오경을 중심한 교리적인 관점을 가지고 영원한 이상의 기준을 세워 고질화시킨다면 유대민족처럼 자신도 모르게 사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불신한 유대교 신자나 유대민족과 같은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한 순간도 사탄에게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생사의 판가리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상하 전후 좌우의 사탄이 공격해 들어올 수 있는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서러운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부모 형제의 입장에서 함께 눈물흘리고 서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하며, 뼈살이 녹는 하늘의 은사에 함께 감격할 수 있는 동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내 것으로, 기쁨이 있으면 부모의 것, 형제의 것, 친구의 것으로 돌려야 하겠고, 예수님이 인류를 사랑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형제들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아줘야 합니다. 크게 용서해 주는 것도 그 사람의 사정을 백 퍼센트 알게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인간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형제의 사정뿐만 아니고 예수님의 사정을 잘 알아서 서로서로 사랑하고 위해 주는 하늘가정을 만들고 종족을 이루어서 예수님께서 복귀하시려던 선의 세계를 이 땅에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택함받은 지상의 성도들이 뭉쳐 하늘가정으로부터 하늘종족, 하늘민족을 이루어서 예수님께서 민족과 4천년 역사를 대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차원을 넘어 세계와 6천년 역사를 대표해 나타나게 된다면 하나님의 심판 행사는 거두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종족과 전체가 하나될 때, 가신 예수님은 영광 가운데 현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기준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통일교회라는 간판을 걸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식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식구입니다. 우리는 형제 아닌 형제로서, 종족 아닌 종족으로서 하나의 형제와 종족이 되어 천륜의 뜻을 책임지는 이스라엘을 형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의 서러움을 체휼하며 개척의 길을 가야 하고, 사탄과의 싸움의 노정을 거쳐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서럽게 가셨던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219, 57.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