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탄일을 맞는 우리의 자세(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4장 예수님의 심정과 사랑을 닮자)
무지... | 20180704071818
2. 성탄일을 맞는 우리의 자세 성탄일의 의의 기독교의 수많은 교인들이 축하하는 날 중에서 제일 중요한 날은 12월 25일인 크리스마스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12월 25일을 지키지 않고 1월 3일을 크리스마스로 지켜 왔습니다. 이 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역사가들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대략 추측해서 25일을 전후로 하여 일주일 혹은 이주일 이내의 어느 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확실히는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째서 1월 3일을 지키느냐? 이것은 영계에 들어가 예수님과 대면해서 문답한 그 결과로 그날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통일교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크리스마스는 1월 3일, 틀림없는 1월 3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지금까지 이 날을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사회의 풍조라든가 세습적인 인연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지방교회는 자의에 따라 이날을 기념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2천년 전, 성경에 나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베들레헴 성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비록 그 순간이 예수님에게는 한 개인으로서 태어나는 시간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우리 인류에게나 하나님에게는 둘도 없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이 있음으로써 타락한 인류에게는 새로운 광명의 날이 찾아질 수 있는 것이요, 이 날이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지상에서 이뤄지는 한 터전을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날을 세우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고 수많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메시아를 보낸다는 것을, 즉 구세주를 보낸다는 것을 수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그 날에 표준하게 하고 온갖 소원을 그 날에, 온갖 희망을 그 날에,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그 날을 중심으로 연결되게끔 몰아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편안한 환경에 들어가 그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 날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방 사람을 동원하여 쳐서라도, 외로운 자리를 거치게 해서라도 그 날을 마음 깊이 그리워하고 생각할 수 있게끔 몰아왔습니다. 또 성경 여러 곳에도 메시아가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을 예언해 놓았기 때문에 성경을 신봉하던 그때의 서기관 바리세인들은 메시아가 어느 곳에서 태어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더욱이 자기들이 소망하던 메시아요, 이스라엘 나라를 세계적인 국가 형태로 전개시킬 수 있는 책임자로 믿었기 때문에 그 소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을 맞이할 스스로의 준비는 어떻게 되어 있었느냐 하면, 그 소망의 기준 앞에 일치될 수 있는 내적 심정의 기준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156-293, 66.12.25) 예수님의 탄생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지 못한 이스라엘민족 베들레헴 도성에는 수많은 집이 있었을 것이며, 거처할 곳이 많았을 것이지만 갈 곳이 없어 외양간에서 예수님이 탄생한 그 입장과 환경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탄생한 그 장면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내적인 사정은 말할 수 없이 서글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민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하늘의 황태자께서 이와 같이 비참한 자리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호화찬란한 환경을 지니고 만민이 환영하는 가운데서 탄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고, 그래야 할 그날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환경을 갖추지 못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바라던 소망의 실체가 탄생하여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소망한 바는 간절하였으나 직접적으로 대할 수 있는 스스로의 준비와 태도는 갖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메시아가 틀림없이 온다는 것은 민족 전체가 알고 있었으되 그 민족이 오시는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준비는 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이스라엘 민족 전체, 더욱이 틀림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아는 그 민족이요 교단이었다면, 책임진 교법사들은 남이야 어떻든간에 메시아를 맞기 위한 거국적인 행사를 위해 준비라도 해 놨던들 메시아는 그와 같이 말구유에 눕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어느 누가 오실 메시아를 위해서 방을 한 칸 마련한다든가, 그가 계실 수 있는 생활적인 환경을 마련하는 이스라엘 민족이었던들 사정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헤롯왕 앞에 동방박사를 통해서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것이 보고될 때, 온 예루살렘 성전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이 소문은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들었을 것인데도 그 메시아를 찾아 모시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소원의 기준이 마음으로는 간절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스스로 해야 할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환경을 바라보면서도 약속한 때가 이르렀기 때문에, 지상의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때를 맞추어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냈던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몽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가르쳐 준 모든 사실을 진정 그 마음에 품고, 태어날 그 아들이 이스라엘을 구할 구주요 만민의 메시아로 온다는 것을 생활과정에서 절절히 체험하고 느꼈다면, 성경 말씀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방박사의 증거함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마음에 예수님 탄생을 명심했지만, 요셉은 여기에 대해 모른다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하늘의 명령을 받고 직접적인 사명을 짊어진 부모마저 하늘의 기준 앞에 합당한 부모의 자세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만삭이 되어 해산날이 언제 올지 모르는 마리아와 요셉은 거기에 대비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베들레헴 성을 찾아가기로 했다면, 거기에 사람을 보내서라도 여관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베들레헴을 찾아가 호적 하러 온 수많은 사람들로 여관마다 다 찼기 때문에 갈 곳이 없어 마굿간에서 하룻밤을 새우는 기간에 예수님이 탄생했습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요셉가정 자체가 하나님이 당신의 황태자, 독생자를 보내는 심정에 합당한 자세가 되어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책임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자신도 그랬고, 요셉 자신도 역시 그랬고, 그 환경에 처해 있는 친척도 역시 그랬다는 것입니다. (156-294, 66.12.25)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로부터 외면당한 예수님 예수님의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 부부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종족 전체가 축하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런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의 소원에 있어서 부모가 책임 못 한 사실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 위에 찾아왔지만 복중에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연 가운데 복중에서부터 낳을 때까지 10개월 동안 남에게 얘기할 수 없는 근심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복중기간에 하늘과 땅이 그를 맞이하여 환희할 수 있는 환경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도 서글프지만, 하늘 앞에 정성을 들이고 만민 앞에 스스로 이 일에 대해 확고하게 사실로서 증거할 수 있는 외적인 준비를 못했다는 사실 또한 하나님이 볼 때는 슬픈 일이었습니다. 요셉가정에서 그러했기 때문에 유대교인이나 이스라엘 민족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하늘땅의 사명을 짊어지고 오는 분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환경에 태어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서 하나의 섭리의 목적을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갖은 서러움과 역경에 부딪히더라도 하나님이 작정한 목적을 위해서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태어나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자랄 때에도 역시 예수님은 요셉에게는 의붓자식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에 마리아가 잉태했으나 그를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천사의 명령을 듣고 얼결에 데려왔지만 시일이 가면 갈수록 인간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의 약속과 더불어 보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해 준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염려하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동생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더더욱 의붓자식의 서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자라게 될 때 그는 가정에 심정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러했고 자라고 있는 동생들도 역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말없이 요셉가정의 생계를 돕기 위해 목수의 보조역할을 할 뿐, 협조하는 생활을 연속할 뿐이지 자기 스스로의 소원이라든가 자기 스스로의 천척인 크나큰 사명에 대한 것을 부모 앞에 제시해서 권고할 입장에 서지 못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동생들까지도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형님이 나타나길 바란다면 어찌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내용이 요한복음에 나와 있겠습니까? 이것을 보게 될 때 동생들까지도 그를 하늘이 보낸 메시아로 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의 명절이라든가 그 가정에 좋은 날이 있으면 예수님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는 자리를 갖지 못한 서글픔이 예수님에게는 한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라 뜻을 증거하고 하늘의 사명을 실행하기 위하여 나선 도상에서부터 3년여 생애를 지나면서 그가 간 최후의 길까지 더듬어 볼 때 예수님은 가정으로부터, 환경으로부터, 교회로부터, 혹은 그 사회로부터, 그 나라로부터 외면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 위에 발 붙이고 평화의 나라를 창건하겠다는 소망을 이 땅 위에 발 붙이고 펼 수가 없는 환경에서 사신 예수님의 생애를 다시 한 번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156-296, 66.12.25) 아담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여러분이 예수님이 탄생한 날을 기념하는 데 있어서, 태어난 것만이 기쁜 것이 아니고 그가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가 온 것은 자기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보내서 왔기 때문에, 개인으로 왔다 간 것이 아니라 위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온 것이요, 아래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온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책임과 민족에 대한 책임, 더 나아가서는 세계 인류에 대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제한된 책임만이 아니라 후대의 역사적인 책임까지 짊어졌으니, 예수님의 생애가 얼마나 고독하고 얼마나 어려웠었던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심정적인 기준에서 그를 동경하고 그의 편이 되어서 그가 그리워했을 형님 대신이 되고, 동생 대신이 되고, 부모 대신이 되고, 혹은 친척, 삼촌, 사돈 등 그 모든 종족적인 환경을 대신 하는 일원으로서 그때의 외로움을 위로해 주어서 풀지 못한 한을 풀어 주겠다는 간곡한 마음을 지녀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날을 맞이하는 것이 하늘과 역사시대에 왔다 갔던 예수님과 지금까지 믿는 성도들이 요구하고 바라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태어나던 그 순간은 하나님에게는 말할 수 없이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역시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도 역시 기뻐해야 할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쁨과 예수님의 기쁨과 이스라엘의 기쁨이 서로 따로따로 갈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하늘의 기쁨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간 곳이 없고, 역경의 복귀노정을 개척해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슬픈 길을 걸어 나오는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기쁨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그날부터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있으되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국가와 민족이 아닙니다. 복귀섭리의 뜻을 대신해 나왔다는 선조들을 두고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기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아벨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과 모세를 거쳐서 예수님 당시까지의 그 역사과정에 있어서 하늘이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기쁨의 날을 맞이하기 위한 싸움의 노정은 거쳐왔지만, 기쁠 수 있는 한 날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에게 비로소 기쁠 수 있는 한 날이 찾아왔다면 그날이 예수님이 탄생하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날은 하나님의 기쁨의 날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함으로써 천상세계가 기뻐하고, 천상세계가 기뻐함으로써 도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추앙하는 모든 백성이 기뻐해야 할 날입니다. 그러한 날을 맞기 위하여 예수님이 탄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였으니, 아버지가 기뻐함으로써 자식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뜻을 이루어 드리려면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을 예수님만이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탄세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뽑아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편성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 놓은 목적이 예수님이 탄생한 날을 국가적인 기쁨의 날로 이루어 놓으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목적이 예수님이 탄생하는 날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아담 한 자체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소원, 아담을 통하여 이루려 했던 하나님의 기쁨, 이 전부가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이 실수함으로써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재현하여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을 이스라엘 나라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이 예고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승리의 나라로 등장하느냐, 그러한 나라를 갖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더불어 기쁜 날을 맞이하느냐 하는 문제가 예수님이 탄생하는 그날부터 제기된다는 것입니다. (156-298, 66.12.25)
예수님이 태어난 비참한 환경을 생각하면 분해 메시아를 복중시대부터 정성을 다하여 모시면서, 그가 태어나는 날을 자기 꿈이 실현되는 것과 같은 소망의 한 날로 기다려야 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승리한 후 사탄세계가 나라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한 국가 형태로까지 길러 가지고 그곳에 메시아를 보냈으니, 그날을 기다리기에 얼마나 지루했겠습니까? 하나님이 4천년 동안 막혔던 가슴속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순간이 메시아가 탄생하는 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복중의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내가 되어서 그가 태어나는 날을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지성을 다하여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준비했다가 그가 태어나면 이렇게 키우겠다고, 어렸을 때는 어떠한 옷을 입히고 어떻게 키우겠다고, 어떻게 모셔야 되겠다고 마음의 단장을 하면서 그날을 고대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리아가 다윗성 베들레헴을 찾아갈 때 혼자 가게 했겠습니까? 그가 가는 주위에는 수많은 군중이 옹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삭이 되어 하루하루가 염려스러운 판국인데 그냥 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주위에는 수많은 군중이 따라가고, 며칠 전부터 다리를 놓아 베들레헴에서 제일 좋은 여관을 마련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을 갖지 못한 마리아와 예수님의 환경이었음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만일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온 모든 사람의 수보다 그를 옹위하고 그가 머무는 환경을 지키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그럴 수 있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탄생하는 메시아를 동방박사가 맞이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슬픔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이 그것입니다. 동방박사가 증거하는 것과 같이 증거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사태는 일시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일시에 국가적인 문제가 됩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해서 여러분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은 역사적인 선조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는 앞으로 역사시대를 탕감하고 새 시대를 창건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역사시대를 탕감하려면 역사시대를 심판해야 됩니다. 잘했고 못했고를 심판해야 됩니다. 그런 후에야 시대에 대한 사명과 책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원을 밝혀 놓지 못하고는 시대적인 사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나 그것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내려온 역사이기 때문에 이것을 밝히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복중으로부터 모셔야 했습니다. 그가 태어날 때 강보에 쌌다고 했습니다. 그 보자기가 어느 누가 만든 보자기입니까? 그런 상황에서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외양간에서 해산하는 형편이니, 그 상황에 어디 손 가까운 데에서 찾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이 비천한 어떤 아낙네의 손을 통해서 만든 보자기인지도 모릅니다. 이게 될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어디 갔습니까? 메시아가 처음 입는 옷이 하늘이 생각하지도 않고 하늘이 꿈도 꾸지 않았던 그런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만든 강보라니, 4천년 동안 하늘이 준비한 이스라엘은 어디 갔느냐는 것입니다. 또 그가 태어나서 목욕을 했다면 어디서 했을까요? 목욕은 누가 시켰을 것인가? 마리아가 아기를 낳았으니 동네 부인들이 달려왔을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사태가 벌어졌으니, 아기를 낳아 본 부인들은 그 사정을 알기 때문에 협조하는 것입니다. 그 아기 예수님을 씻어 주었을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그릇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씻어 주었을 것인가? 소 여물을 퍼주던 뚝배기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죄짓고 당장 형벌을 받을 사람이 쓰던 세숫대야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신자들이, 하늘 앞에 정성을 다하여 그 아기가 탄생하는 그 시간을 맞아 가지고 목욕시킨 조상을 가졌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메시아의 몸을 사탄들이 드나들 그런 손길로써 씻어 주다니 이 불경을 무엇으로 하늘 앞에 사죄하겠습니까? 선생님은 궁금했습니다. 그때 그가 젖을 먹을 때 어디에서 먹기 시작했을까? 보통 24시간은 지나고 젖을 먹이는데 처음 어디에서 먹였을까? 외양간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젖을 먹는데 소 오줌 똥 냄새가 진동하는 자리에서 먹다니,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다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뭐 예수님이 탄생할 때 말구유에서 탄생해서 강보로 쌌다고, 그 강보를 무슨 하나님의 옷자락같이 생각하고, 그 말구유를 하늘의 보좌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서글픔이 어려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이 한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 한을 탕감하기 위하여 시대적인, 역사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여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윗성을 찾아갈 때 그를 부축해 주는 우리의 조상이 못 되었다는 것이 한입니다. 그가 해산하는 수고와 역경 가운데 있을 때 밤을 새워 가며 시중들지 못한 것을 염려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잠만 자고 꿈에도 그걸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벌을 받아야 됩니다. (156-309, 66.12.25) 예수님이 태어난 순간은 하나님에게는 서러웠던 순간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탄생하는 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기뻤겠습니까? 아닙니다. 만일 헤롯왕의 아들이라면 만조백관이 옹위하는 가운데서, 수많은 백성이 찬양하는 가운데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추울세라 더울세라 온갖 정성을 다 하하여 거족적으로 그 아기의 탄생을 축하했을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그날을 축하의 날로 정하여 경축행사를 거행했을 것입니다. 더욱이나 로마 황제의 아들이 태어났다면, 지중해 일대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판도를 가지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로마의 왕자가 태어났다면, 얼마나 수많은 민족이 찬양하고 정성을 다하여 예물을 보냈겠습니까? 한때 왕의 아들로 태어나도 그러하거늘, 천추만대의 창조주요 만우주의 주인 되는 하나님의 왕자로 태어난다면 하나님은 그 아들은 얼마나 영광스럽게 맞이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라보는 표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만이 예수님을 맞아 주기를 바랐겠어요? 아닙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민족이 거족적으로 그의 탄생을 축하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을 아는 하나님이 얼마나 딱했으면 이방의 점장이를 통해 이스라엘에 온 구세주를 증거했겠는가? 이것이 원통한 일입니다. 유대의 모든 교법사들은 어디 가고 점성술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기쁜 일로 알고 있는데 이 사실이 불경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면 교회, 이스라엘 나라면 나라, 하늘을 위하여 충성을 다짐하고, 시대적인 선각자로서 지도자적인 책임을 짊어진 제사장, 서기관, 교법사들이 일체가 되어 찾아와 수천년 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가보를 예물로 갖추어 메시아 앞에 봉헌하여도 부족할텐데 그들은 어디가고 관계도 없는 이방의 점성술객들이 찾아와 예물을 드렸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모독이요, 하늘나라의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이 받들지 못하고 교단이 받들지 못하니, 하나님은 탄생한 메시아를 땅 위에 드러내고 인간 세상에 찾아왔다는 조건적인 인연이라도 남겨 놓아야 할 뜻이 있기 때문에, 하늘을 숭상하고 세계적인 위대한 인물이 어디에 태어나는가를 관찰하면서 그를 찾고 고대하던 점성술객들을 통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서러움과 분함이 얼마나 컸겠나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동방박사가 찾아온 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어찌하여 우리 민족은 동방박사 이상으로 하늘 앞에 충성을 다짐하고 스스로 제물된 생애노정을 거치면서 메시아 한 분을 모시기 위해 정성들이지 못했느냐? 그 이상의 사람이 왜 없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을 볼 때, 메시아가 태어난 날이 기쁜 날이었으나, 하나님에게는 유대교단을 잃어버리는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과 멀다는 것이 증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4천년 동안 그렇게 수고하면서 길러 나온 이스라엘이었지만 외적인 중거자가 나와 메시아를 모셨다는 자리에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될 하늘의 사연이 여기에 엮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은 얼마나 괴로웠던 시간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4천년 하늘의 역사를 총탕감하기 위한 책임을 짊어지고 이 땅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운명과 세계사적인 운명을 책임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세계에 새로운 주권국가를 세워,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하고 세계를 통일해야 할, 하늘나라를 창건해야 할 책임자입니다. 그런 책임자가 태어나는 그 자리가 마굿간이라니 이것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 기독교에서는 마굿간에서 태어난 그 자체를 신성시합니다. (156-301, 66.12.25)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탄절을 축하해야 그러면 오늘 우리는 그날을 어떠한 입장에서 축하해야 되느냐? 이스라엘의 실수를 시정하여 이스라엘의 인연을 되찾을 수 있는 입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맞을 수 있었던 동방박사 이상의 성의를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가 태어날 수 있는 자리, 그가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을 다 알아 가지고 태어나기 전에 복중의 메시아를 모실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태어난 메시아를 모시는 것만이 아니라 복중에서부터 모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그러한 사람이 없었으며, 주님이 복중에서 자랄 때 그 어머니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지 못했으며, 그 어머니의 생활이 편안하도록 책임지고 돌봐 주겠다는 아낙네가, 사내가 없었던가! 주님을 복중에 있을 때부터 모시고 정성들이는 무리가 4천년 동안 키워 온 이스라엘 나라에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적인 사명을 망각해 버린 이스라엘을 제치고 새로운 이스라엘의 이름을 가지고 복중에 있을 때부터 그를 하늘의 왕자로 모실 수 있는 충신 열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인연을 가지고 하나님 앞의 메시아를 위하고 모시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이 복중에 있을 때부터 모신 사람이 하늘 앞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사도들을 택할 때 그가 병신이라 하더라도 그를 먼저 택하여야 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제자들을 사랑하기 전에 그를 사랑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아들딸이 있었던들, 그러한 사람이 있었던들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기독교는 이방의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인연을, 충성의 인연을 밟고 옮겨 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들 예수님이 몰려 죽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터전을 지켜 역사적인 인연을 상속받을 준비를 한 터전 위에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역사는 옮겨 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못 옮겨 가니 이스라엘 민족 또한 옮겨 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못 옮겨 가니 예수님을 중심삼은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가서 4백년 동안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거치고 핍박을 받으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에서 어느 기간을 거쳐 승리했습니다. 기독교의 승리의 터전이 로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서글픈 일입니다. 예수님이 복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들이고 마리아를 모셔 가면서 그의 손으로 하늘의 왕자를 받겠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 인류가 책임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 뻗어나갈 수 있는 자세를 갖추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복중으로부터 태어난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됐기 때문에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복중으로 태어나는 메시아를 맞을 수 없는 기독교의 역사가 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라는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녔기 때문에 앞으로 주님이 이 땅에 와도 자라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는 기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지녔기 때문에, 이 땅 위에 다시 오시는 주님도 뜻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고 다시 부활적인 승리의 터전을 맞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후계, 즉 제2 이스라엘 기독교가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를 하는 데는 인류 역사의 고비를 그냥 그대로 재현시켜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이스라엘이 얼마나 책임을 못 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죄지은 것을 회개하는 것보다도,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맞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복중시대부터 '오냐, 네 민족을 위하여 네 나라를 위하여 보내는 하늘의 왕자를 맞을 수 있는 자들이 너희들이로구나'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속에 기억될 수 있는 이스라엘의 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한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데는 흘러가는 역사시대의 사람들이 축하하던 것처럼 축하할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밟고 올라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낼 때 마리아를 찾아오셨던 간곡한 심정을 대신하여 마리아를 모실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메시아를 대할 줄 아는 주인공이 되어 이날을 축하해야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이날을 축하한다면 여러분은 세계사적으로 역사적으로 이러한 내용을 모르는 수많은 기독교인보다 하늘 앞에 가까운 심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156-303, 66.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