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예수님의 참사랑의 길(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3장 참사랑의 예수님)

무지... | 20180630083721
9. 예수님의 참사랑의 길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용서법만이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재창조해 나왔습니다. 인간의 창조이상이 완성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미완성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수습하자니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미완성 단계에 있으니 완성을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창조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재창조과정을 밟아 올라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구원섭리입니다. (27-65, 69.11.23)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한 남자를 찾았다고 할 수 있으려면 세계적이어야 합니다. 국가적이어서는 안 되고 세계적이어야 합니다. 사탄도 미치지 못하는 아들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해와가 타락하였던 이상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이렇게 침범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이런 입장에서 이렇게 나오지 않았느냐? 하나님을 고생시킨 네가 죄인이 아니냐?' 하고 사탄에게 항의할 수 있는 아들이 되기 전에는 처리할 법이 없습니다. 
사탄은 '네가 뭐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계를 이겨야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참소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탄인 나도 숭배하는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런 자리에 나가야 될 것이 아니냐'고 사탄이 참소합니다.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무기는 사탄보다 나아야 합니다.
'너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서려면 결국 사탄이 침범 못하는 하나님과 같은 마찬가지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니 사탄을 용서해야 됩니다. 여기에서 용서법(容恕法)이 나옵니다. 사탄에 대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으면 사탄도 꼼짝 못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지금 사탄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데, 이 땅 위에 '하나님이여! 저 원수를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해 주십시오'라고 한 사람이 역사상에 있었느냐?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도 놀라는 것입니다. '야  저녀석 봐라! 나보다 낫다' 하고 말입니다.
그 용서법, 그런 사랑의 법은 사탄이 목을 졸라 죽이는 자리에서도 세계적으로 전체적으로 실효를 낼 수 있고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나를 살려 주소. 저놈을 쳐서 벌을 주소'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여, 저들이 몰라서 그러니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소' 할 수 있다면 그 자리가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 이상의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이 끊어지는 자리에서도 원수를 대해 용서하고 사랑을 빌었습니다. 그런 사실은 역사적인 혁명의 기원이요, 역사를 뒤집어 놓고, 하나님이 새로운 터전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기원이 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66-133, 73.4.22)
     
     
십자가상에서도 하늘을 염려하고 원수를 사랑한 예수님
     
예수님은 교단으로부터 몰림받고 민족으로부터 몰림받았습니다. 교단의 이단자로, 율법의 파괴분자로 보인 그는 자기 종족에게 몰리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세례 요한 일당한테도 몰렸습니다. 광야에 나갔으나 거기서도 사탄에게 몰렸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전체가 동원하여 십자가의 길로, 골고다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반역자로 내모는 민족을 위하여 오히려 눈물을 흘린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단으로부터 이단자로 취급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어떤 제사장보다 그들을 위해 더 피눈물을 흘린 사람입니다. 그 시대의 어느 한 사람도 자기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없으되 예수님은 그 시대의 친구였습니다. 민족의 반역자로 몰림받았으되 민족의 충신이었고, 교단의 이단자로 몰림받았으되 교단의 충신이었습니다. 
그의 걸음은 찢기고 몰리고 쓰러지는, 십자가를 진 처참한 걸음이었습니다. 무모한 악당들이 채찍을 들어 내모는 자리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만일 예수님이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었더라면,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 하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동산에서 세 제자를 뒤에 놓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자기의 사정도 딱 하나 자기 일신은 민족의 제물이요, 인류의 제물이요, 천륜의 제물인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슬픔도 슬픔이거니와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염려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민족을 위해 나타났으나 민족 앞에 배반받는 자신을 바라보는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것을 더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황태자요, 만우주의 주인공이요, 메시아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처참한 십자가의 운명을 탄식하려면 이 우주를 동원하여 탄식할 수도 있었으나 탄식할 수 없는 자신임을 느끼셨기 때문에 몰리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을 면목없게 생각하셨습니다. 
교단을 규합하고 민족을 규합하여 하늘의 왕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아버지 품에 안겨 드려야 할 책임을 짊어졌던 예수님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때에 원망할 어떤 무엇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 잔을 피하게 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신 것도 자기 일신이 죽는 것이 서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일신이 죽음으로써 민족의 서러움과 하늘의 서러움이 가중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쓰러지면 후대의 세계 인류 앞에 가중될 십자가가 남아지고, 그로 인해 슬픔의 역사가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고, 골고다의 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으며, 죽음의 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골고다의 길을 가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골고다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 뿐만 아니라 더 어려운 길이 남아질 것을 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양손 양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자리, 가시 면류관을 쓰는 자리에 선다 하더라도 이것이 자기에게서 그치지 않을 것을 아시고도 예수님은 하늘을 향하여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십자가의 길이 다 끝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위하여 울며 염려하는 마음의 호소가 하늘과 통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하늘 앞에 저지른 모든 잘못을 짊어지고 하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산 제물로 하늘 앞에 바쳐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 세상에 분함이 있다 하더라도 죽어가는 예수님, 하늘을 염려하며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가는 예수님을 대하던 하나님의 분함 이상의 분함이 없을 것이요, 4천년 역사노정에 하나님의 분함이 있다 하더라도 이 이상의 분함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어가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장 노아 때 이상의 심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민족을 붙들고 죽고, 교단을 붙들고 죽고, 십자가를 붙들고 죽었기 때문에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고 계십니다. 이런 심적인 인연이 후대의 인간, 남아진 이스라엘 민족과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배반하는 후대의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고 계십니다. 배반하는 후대의 교단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6-27, 59.3.15)
     
     
원수를 위해 복을 빌 수 있었던 예수님
     
아무리 찾아보아도 역사적으로 대표되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로마 병정들이 자기의 양손과 발에 못 박은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원수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원수를 대해서 말하기를 '아버지여! 저들이 행하는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하오니 용서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복귀섭리, 혹은 구원섭리의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이 반대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마저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반대를 받으면서도 참아 나온 것은 원수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의로운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망령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이상으로 찾던 의인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습니다. 의인을 찾아오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역사의 미래 노정을 바라보고, 앞일을 아는 예수님을 당당히 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맏아들로서 그 이상 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원수를 위해 복을 빌었습니다. 이런 일은 역사 이래 없었습니다. 
야곱은 아무리 승리하여 이스라엘이 되었지만 간교한 사람입니다. 모세가 아무리 훌륭했지만 무뚝뚝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과 애급 사람이 싸울 때 애급 사람을 당장 돌로 때려죽였습니다. 의리 있고 영웅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걸 볼 때 모세는 울뚝불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최후의 결단을 짓기 위해서 밤을 새워 가면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이 따라와서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는 자기 앞에서 세 번씩이나 졸고 있는 심각한 심판의 자리에서도, 그들에 대해서 복수심을 갖지 않고 결연한 마음으로 죽음의 자리까지 밀고 나간 예수님, 이분이야말로 역사 이래 둘도 없는 단 한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 가운데 '야! 너만은 내가 기억하겠다. 역사상에 너만은 내가 기억하겠다'는 내적인 결의를 자극시킬 수 있는 예수님의 행로였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아무리 타락한 세상이라도, 자기 아들딸이 죄를 짓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이놈의 자식아! 잘 죽어라! 시원하다. 아이구 나는 죄인의 어머니 아버지가 되었다. 허허허' 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그런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는 미치광이입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그 눈에서 6천년의 역사적인 눈물이 솟구칠 것이고, 자신이 대신 죽고 싶은 마음이 심정 깊이 스며들 것입니다. 나라가 있으면 나라를 주고라도, 헌법이 있으면 헌법을 뜯어고쳐서라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살리고자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전체를 부정하고 아들의 행복을 긍정하겠다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천지의 대주재요 심정의 최고 원인이 되는 부모의 자리에 계신 하나님이 아들딸이 망하는 것을 보고, 죽는 것을 보고 좋아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보다도 더 급박한 일이기 때문에, 쳤다 하면 그 상황이 될 것입니다. (64-217, 72.11.12)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계를 만들려고 십자가의 길을 간 예수님
     
예수님이 원수를 위해 복을 빈 것이 원수를 공인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책임을 맡기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는가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수고와 고난이 선조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모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비록 고통받다 이슬같이 사라지지만 4천년 동안 수고한 하나님의 거룩한 공적의 터전만은 상속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고 기도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11-196, 61.7.17)

예수님이 '하나님을 무조건 믿으면 로마제국, 이스라엘 나라가 전부 내 것 된다' 이렇게 믿었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안 되었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입장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는 입장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아, 하나님 은혜를 믿습니다. 로마나 세계가 내 것이니 무조건 믿습니다' 하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안 통했는데 여러분에게는 통한다는 말이 이론적이요, 가당한 말입니까? 이상세계로 가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하는 게 가능한 일이냐? 
그렇다면 예수님이 전도를 뭣 하러 했겠습니까? 12제자가 무엇이고, 70문도가 무엇이고, 120문도가 무엇입니까? 왜 핍박을 받고, 왜 십자가를 지고 다녔느냐? 가만히 믿고 앉아 있으면 되었는데, 예수님이 간 길이 옳은 길이라면 그런 핍박의 길을 가지 않고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피를 흘리면서도 가지 않고는 뜻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이 여기서 증명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갔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와 환경이 안 되었으니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책임져야 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이처럼 사랑할 수 있게끔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그랬으니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124-296, 83.3.1)
     
     
예수님이 원수를 위해 복을 빈 것은 지극히 지혜로운 행동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 준 사실은 역사시대에 없는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으로써 수많은 원수와 원수 사이의 칸막이가 터져 나갔고, 이것은 고립된 역사시대에 서로서로 자기를 중심삼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일수록 그가 가는 길이 복잡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수많은 원수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한 노정을 거치지 않고는 소원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뜻을 품은 사람들이 가는 길에는 작은 원수, 큰 원수, 여러 종류의 원수들이 많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방법을 몰라서는 그 크나큰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당하는 환경에는 원수가 많기 때문에 그 모든 원수를 원수로 갚으려는 사상을 가지고는 미래에 참된 길을 남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빈다는 사실을 원수가 알게 될 때는 저절로 원수가 갚아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은 앞으로 먼 길을 가는 도상에서 수많은 원수가 있을지라도 그들과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물리칠 수 있는 동기가 됩니다. 
응당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원수를 갚지 않고 도리어 원수를 위해 복을 빌었다 하는 말을 원수가 듣고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원수를 갚아야 할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원수를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지극히 어리석은 일 같지만, 지극히 지혜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42-189, 71.3.7)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의 길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타락한 천사장이 하나님을 참소하더라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당신이 세운 법도를 준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장이 이미 타락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피조물을 그가 세운 법칙 또는 규칙에 따라서 주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타락 이전의 천사장에게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천사장은 하나님에게 '하나님, 당신은 저를 완성기까지, 완성기 이후까지라도 사랑하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천사장은 장성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내가 사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여전히 사랑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장이 참해야 할 바를 완수할 때까지, 천사장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천사장이라는 존재입니다. 천사장은 '하나님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아들 아담과 딸 해와도 역시 나를 완성기까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원칙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천사장을 몰아내려면, 먼저 여러분의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합니다. 그럴 때까지는 여러분이 천사장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그 자녀가 천사장을 충분히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때 성사되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은 사탄을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보다 천사장을 더 사랑했다는 자리에 서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에 의해서 살해되었지만 그는 사탄을 사랑했고, 사탄을 위해서 기도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고 예수님이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 천사장을 사랑해야 하는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지점으로부터 사탄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원리에 의해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편에 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사탄편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복귀되기를 바라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52-87, 71.12.22)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말씀의 참 의미
     
예수님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으면 사탄을 사랑하라는 것이냐?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 사랑하라고 한 것이, 사탄을 사랑하라는 말이냐?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할 때, 예수님이 말하기를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아들 되는 예수님이라면 사탄까지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죄 지은 사람을 자꾸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용서해 주고 나서 나중에 전부 죽여 버린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용서해서 구해야 하지만 사탄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용서해 줄 수 있으되 사탄 마귀는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용서를 거듭하는 것도 원수를 추방하기 위한 작전입니다. 이 원수들이 인간을 유린하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원수를 갚기 위한 작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수를 위해 기도한 것은 사탄이 붙은 그 사람을 원수시한 것이 아닙니다. 원수는 사탄인데, 사탄편에 있는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사탄편에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지 사탄 그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한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몸이었습니다. 그것을 안 찾으면 하나님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완성하는 데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는 입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파탄시켰으니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파탄시킨 사탄인데 이를 용서한다면, 이 우주의 이상이라는 것은 완전히 깨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이상이고 뭣이고 완전히 깨져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들도 제일 좋아하는 것, 제일 이상으로 찾아가는 것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완성하는 데서만 하나님의 전체 목적, 인간의 전체 목적이 성사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완성해야만 모든 부활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으로만 사탄도 분립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타락한 세계에서는 완성한 사랑이 아니라 미완성적 사랑에서 사탄이 뿌리를 박고 들어옵니다. 사탄이 혈통적 관계를 맺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완성한 사랑은 하나님의 직접주관권 내로 들어가게 됩니다. 원리적입니다. 어차피 여기로 올라가야 됩니다. 이것이 직접주관권입니다. 부활의 목적이나 예수님이 온 목적은 사랑권을 완성해서 하나님의 직접 사랑권 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외는 없습니다. (92-187, 77.4.10)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그와 같은 고비를 넘고, 그 마음의 세계에 동행자가 되고, 그 마음은 하나님을 대신한 대변자가 되어 진리와 뜻을 중심삼고 싸워서 실적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27-65, 69.11.23)
     
     
원수까지 사랑하자는 운동을 제시해 나온 기독교
     
어떤 성인 현철도 '원수를 용서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단 한 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운명하면서 '저들이 지은 죄를 알지 못하나니 아버지여 용서 하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자기의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하나의 깃발을 들고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소원이 완전히 막히는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만민을 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서 죽어갔기 때문에, 그 마음과 원수를 사랑해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문화가 출발되었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7-65, 69.11.23)

이 땅 위에 하나님이 제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나라의 방향을 제시하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와 이스라엘이 피압박 국가와 압박 국가, 피지배 국가와 지배 국가라는 것, 이 두 사이에는 담벽이, 원수라는 높은 담벽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담벽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와 이스라엘 사이의 담벽이 그 시대에 제일 높은 담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는 힘으로써 나를 정복하지만 나는 반대로 너를 사랑으로써 정복하겠다는 표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로마 병정에 대해서 '하나님이여, 저들이 행하는 죄를 알지 못하고 저런 일을 하니 용서해 주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럼으로써 세상 사람이 미워하는, 원수시하는 국경을 넘어 본향을 찾아가는 길을 추구할 수 있었습니다.
원수는 개인 원수가 있는 동시에 가정 원수가 있습니다. 세계 사람을 모두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개인 원수가 있고, 가정 원수가 있고, 종족 원수가 있고, 민족 원수가 있고, 국가 원수가 있고, 세계 원수가 있고, 수많은 원수가 사방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 말은 나를 따르고 내 주장을 따라가는 사람 중에는 개인 원수 앞에 희생당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희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 원수에게 희생당하고, 종족 원수에게 희생당하고, 민족 원수에게 희생당하는 일이 있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타이틀로 언젠가 승리할 수 있는 한 날이 있을 것이며 그 날을 고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하나님이 사탄처럼 복수한다면 이 세상은 다 없어지고 맙니다. 
기독교를 중심삼은 하나님의 조국 광복은 이러한 사상을 가진 개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사랑으로 품고 국경을 허물고 모든 환경과 문화를 넘어 소화해 나가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운동을 제시해 나오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하나님이 있는 한 세계적 종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납니다. 빨간 꽃 종자를 심으면 빨간 꽃이 피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한 원수, 원수를 갚는 놀음의 씨를 뿌려 사탄 악마의 씨가 번성했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씨를 뿌리면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나무로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 이치입니다. (107-18, 8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