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예수님이 가신 뜻길(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3장 참사랑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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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예수님이 가신 뜻길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셨나 하나님의 소망의 실존체로 이 땅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하나님은 4천년 동안의 기나긴 세월을 간곡한 심정과 애절한 심정으로 수많은 선지와 수많은 선조들을 세워 역사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를 섭리해 온 단 하나의 목적은 소망의 실체인 예수님을 세워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의 기점에서 하늘의 소원과 역사적인 선조들의 바람과 전인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순간을 바라 하늘은 역사해 왔고 우리의 선조들은 싸워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볼 때 그는 둘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요, 이 세계 만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날 때 하나님이 나타날 수 있고, 예수님이 기뻐할 때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으며, 예수님이 영광을 누릴 때 하늘의 영광으로 나타나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가 아니면 하늘의 보좌도, 영계도, 지상의 어떤 만물도 그 가치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전체의 중심되는 가치적 존재가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러한 천적인 가치를 지니고 오신 예수님, 이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보게 될 때도,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들의 선조를 자랑하고 자기들의 역사를 자랑하고 자기들이 택함받은 선민임을 자랑했지만, 그는 그때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상에 나타났던 어떠한 의인보다도 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를 버리고는 자기 생명도 취할 수 없고, 그를 버리고는 자기 교단도 세울 수 없고, 그를 버리고는 자기 민족도 세울 수 없고, 그를 버리고는 이스라엘이 소망하던 나라도 세울 수 없는, 없어서는 안 될 하늘과 땅의 중심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분을 인간들에게 보낸 것은 탄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땅이 이 분을 맞이하여 낙망하고 절망하도록 하기 위해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이 분을 통하여 기뻐하기 위하여 보냈고, 땅의 인간들이 이 분을 맞이하여 기뻐하도록 하기 위한 중심존재로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거일동은 하늘의 영광을 그릴 수 있어야 했고, 그가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은 역사적인 원한의 조건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영광의 감정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는 그러한 생애가 되지 못했습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맞이한 그날부터 누구보다도 그를 영광스러운 자리에 모시고, 누구보다도 그를 위하고, 누구보다도 그를 칭송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민족은 민족대로 떠나버리니 예수님은 민족을 잃어버린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민족을 붙들기 위해 예수님을 보냈지만 그 예수님을 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나니 하늘의 기쁨도 잃어버리게 되었고 천국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6-165, 59.4.26) 뜻을 염려하는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장 7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개척의 노정을 출발할 때 간곡한 심정으로 외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민족이 누구보다도 간곡한 마음으로 메시아의 실체를 구해야 할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구할 줄 모르고, 누구보다도 애달픈 심정으로 찾아야 할 유대교단들이 찾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시며 사셨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두드려야 할 유대교인들이 두드릴 줄 모르고 있는 실정을 바라보시며 사셨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실체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마음이 간절하지 못한 민족을 바라보신 예수님은 머지않아 하늘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는 민족과 관계를 맺어 천적인 뜻을 이루어야만 하는 사정을 알기에 한 날, 한 시간, 한 초도 뜻을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뜻의 실천자로 오신 예수님의 심정은 마리아가 뜻에 대해 염려하던 심정 이상의 심정이었습니다. 요셉 가정에서 생계를 위해 요셉의 일을 묵묵히 협조하던 예수님의 심정은 민족을 바라보면 볼수록, 민족에 대한 신망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뜻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새로이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러한 30여년의 준비기간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뜻을 염려하는 간곡한 심정을 품고 남이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하늘을 위하여 민족을 대신하여 책임을 다하기에 수고하신 예수님의 생활이었습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누구보다도 간곡한 심정으로 구하기에 수고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6-170, 59.4.26) 하늘을 위하여 30여년을 준비해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철이 든 후부터는 먹는 것도 민족을 위하여 먹었고, 사는 것도 민족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가 무엇보다도 고심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신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를 알아 예수님을 붙들고 구한 자가 없었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자가 없었으며, 예수님을 붙들고 그의 심중을 두드린 자가 그 당시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불쌍한 예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민족 대신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고, 민족을 대신하여 찾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고, 민족을 대신하여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위로는 하늘을 대신하여,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선 반면, 아래로는 땅을 대신하고 민족을 대신하여 간곡히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간곡한 심정을 품고 찾으면서 민족의 심정을 두드려 민족의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은 하늘을 위하여 30여년을 준비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늘이시여! 나를 보내신 아버지시여! 나를 보내신 것은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요, 나를 보내신 것은 민족의 생명을 아버지와 인연맺기 위함임을 아오니, 민족의 실수와 민족의 부족함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불신하고 배반하는 민족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은 그 민족이 자고 있을 때에도 향락을 누리고 있을 때에도 편히 자지 못하고, 쉬지 못하고, 즐거워하시지 못하고 민족을 붙들고 하늘과 인연 맺어주기 위해 싸우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 자신만이 알고 계셨습니다. 민족 중의 어느 한 사람 예수님의 심정을 위안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환경과는 동떨어졌던 예수님의 심정은 뜻의 때를 고대함에 반하여 말할 수 없이 초조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30여년이 지나 뜻의 실천노정을 각오하고 나서던 예수님의 심정은 비장하다면 말할 수 없이 비장할 것이요,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이며, 인간으로서는 체휼할 수 없는 애달픈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뜻을 실천하려는 공생애노정을 염려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6-171, 59.4.26) 40일 금식과 사탄 시험을 당해야만 했던 예수님의 슬픈 심정 예수님은 이렇게 하늘을 대신하여 만민의 구세주로서 만민을 구원하러 오셨으나 구원을 받아야 할 민족 가운데에 예수님의 심중을 헤아려 나타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심중은커녕 그의 30년 수고의 노정도 알지 못했습니다. 광야생활을 하고 민족을 책임져야 할 입장에 있던 세례 요한 일당마저도 반대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슬픈 심정으로 민족을 바라보면서 세례 요한에 대해 한가닥 기대를 걸었지만, 세례 요한마저 예수님을 외면하고 나서게 될 때 예수님에게는 더 큰 슬픔이 가중되었습니다. 민족 앞에 하늘의 복음을 갖고 나타나야 할 때가 가까워 오는데도 불구하고 민족이 간 곳 없고, 민족 앞에 하늘이 세운 세례 요한도 간 곳 없어져, 예수님은 인간 앞에 나타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노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 있었던 40일 금식기간이 영광스러운 기간이요, 예수님께 반드시 있어야 할 기간으로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기간을 거치게 된 것은 예수님 앞에 민족이 사라진 연고요, 세례 요한 일파가 사라진 연고였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동방의 세 박사와 안나, 시몬, 그리고 뜻을 품고 예수님을 잉태하였던 요셉가정의 마리아가 예수님이 실천노정을 나설 때 그를 알아 주지 못하였던 연고이기도 했습니다. 땅의 주인공으로 오신 예수님이요, 만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오신 하늘의 황태자이신 예수님이요, 또한 만민의 구주이신 예수님이 이처럼 불쌍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4천년 역사를 종결짓고 예수님이 새로 꾸며야 할 하늘 제단은 영광의 제단이요, 기쁨의 제단이요, 승리의 제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제단을 꾸미기 위해 나선 예수님은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굶주리는 예수님이 되었고, 사탄의 시험을 받는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사탄에게 시험받는 그 장면은 온 인류가 가장 비통하게 여겨야 할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주리신 후 사탄에게 농락당하고, 그 사탄이 제시한 여러 조건의 시험을 당하는 슬픔의 시간은 원래 민족이 겪어야 할 시련기간이 되어야 했는데, 도리어 예수님의 슬픔으로 인계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택함받은 선민임을 자랑하는 그 민족을 끊어버리고, 그 민족을 원망하고 저주하여야 할 입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굶주린 몸을 일으켜 하늘의 심정을 붙들고 민족을 위해 사탄과 싸우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처한 자리는 이스라엘 민족도 모르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각오하고 하늘 앞에 나타나실 때의 예수님의 심정은 어떤 슬픔의 자리를 거쳐서라도 자신이 온 목적과 자신이 품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편단심이 변할 수 없었습니다. 본래 아버지의 뜻이 민족을 통하여 만민을 구하려는 것임을 아시는 예수님이고 그 뜻을 존중하는 예수님이었던 연고로 굶주림과 헐벗음도, 부딪쳐오는 어떠한 핍박과 시험도, 그가 30여년 동안 뜻을 고대하고 바라던 마음을 깨뜨리려야 깨뜨릴 수 없었습니다. 뜻을 품고 나타날 적마다 예수님은 하늘을 대신하여 자기가 겪게 되는 서글픔과 하늘이 당하는 서글픔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뜻을 대하여 더 한층 굳은 결심을 했기에 배반한 민족과 배반한 무리를 다시 찾아 나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찾아주기를 바라셨으나 그렇게 해주지 않음으로써 반대로 죽고 난 후에 그들을 찾아주어야 했습니다. 민족이 예수님을 모셔 주지 못해 살아 있는 자리에서 인류를 구원해야 할 예수님이 죽어서 구원의 역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살아 계신 실체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여 두드려야 하고 구해야 하고 찾아야 하는데, 죽고 난 뒤에 두드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신세요, 전세계 인류의 신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잘못 때문입니다. (6-172, 59.4.26) 하나님의 슬픔과 분함과 원통함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슬픔과 원통함은 예수님이 살아 있는 자리에서 구해야 할 때를 잃어버린 것이요, 살아 있는 자리에서 찾아야 할 때를 잃어버린 것이요, 또 살아 있는 자리에서 두드려야 할 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리에서 하늘의 비밀을 밝힐 수 있게 그 문을 개봉해야 할 환경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 깨닫고 보니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은 이미 영계에 가셨습니다. 그렇게 되니 예수님을 보낸 인간은 가신 예수님을 대하여 구해야 할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신 예수님을 찾아야 할 신세가 되었고, 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두드려야 할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끝날에 처한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가시기 전에 구할 줄 알고, 가시기 전에 찾을 줄 알고, 가시기 전에 두드릴 줄 아는 인간들을 찾아 세우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슬픔이요, 인류의 슬픔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써 이러한 비운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천노정에서 뜻을 품고 나설 때,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걸음이 그런 걸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의 내용은 예수님 생애의 전반적인 사실을 암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구하는 자리, 찾는 자리, 두드리는 자리를 거쳐 뜻을 찾아 나선 예수님의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험산준령이었고, 영광스럽고 큰 승리의 궁전이 아니라 좁은 십자가의 문이었습니다. 민족이 믿지 않고, 민족이 따르지 않고, 민족이 바라보지도 않는 입장, 민족이 싫다 하는 입장에 서신 예수님은 소수의 제자들을 모아 놓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7장 13~15절)'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의 사회환경과는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자신을 예로 하여 자신과 그 사회환경의 중간 입장에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민족 앞에 나타나 실천노정을 걸으실 때 탄탄대로를 걷지 못했습니다. 유대교단이 가로막고, 민족이 가로막고, 세례 요한이 가로막았습니다. 그에게 갈 길이 있다 할진대 그 길은 모든 사람이 가기 싫어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도 문이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닦아야 했고 가로막힌 담에 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걸음을 걸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6-174, 59.4.26) 선민의 불신으로 초래된 고난의 길 4천년 섭리역사노정에서 하늘로 통하는 하나의 문을 세워 하늘과 만민이 연결될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이스라엘민족이 믿고 받들었던들 평화의 길은 열렸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워 놓은 유대교단은 하나님이 왕래할 수 있는 대로(大路)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백성들의 출입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이 반대하니 민족의 갈 길이 막히고 민족의 문이 막혔으며, 교단이 반대하니 교단의 갈 길이 막히고 교단의 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유대민족에게 몰리고, 유대교단에게 몰리고, 자신의 증거자들한테 몰리고, 나중에는 제자들에게까지 불신당하신 예수님이셨기에 인간으로서 갈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의 길을 아니 가시려야 아니 가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성을 찾아가는 4천년 역사노정에는 문이 많은 것 같고 6천년 역사를 통합해 보면 천국으로 가는 문이 더욱 많은 것 같지만 예수님이 열고 가신 문은 단 하나요, 그 문이 아직까지 이 땅 위에서 열리지 않았습니다.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고취하고 교파를 세워 소개하고 주장하며 가는 길이 하늘로 가는 길처럼 보이고 이들이 안내하는 문이 하늘로 안내하는 천국문 같이 보이지만,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개척하시던 그 길,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열던 그런 좁은 문이 아니고서는 천국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6-175, 59.4.26) 탄식과 절망에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살다간 예수님 예수님은 불쌍하게 태어나 불쌍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몰려 비참한 운명과 불쌍한 자리에서 탄식과 더불어 사라져 가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을 보면, 예수님은 일생 동안 자기 뜻대로 살다 간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으니 그는 부자유스럽게 행동한 사람입니다. 원수가 나타나면 그 원수를 대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했기 때문입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자기의 소신은 있을망정 그 뜻대로 행동할 수 없다, 그것이 효의 길이요 충의 길입니다. 세상에서의 효자도 자기 개인의 몸과 자유의사는 갖고 있지만 일체의 생활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위해서 일생을 희생하면서 부모의 뜻대로 가려고 하는 사람을 효자라고 합니다. 하나의 군왕을 중심삼고 볼 때, 군왕의 뜻대로, 자기의 뜻을 완전히 무시해 놓고, 주권자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충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도 자기 뜻대로 나지 않았고, 살면서도 자기 뜻대로 살지 않았고, 최후에 죽을 때까지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고 간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남의 뜻대로 태어났고, 사는 것도 남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 남은 남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절망으로 갔느냐 희망으로 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비록 몰려서 죽고 비참하게 죽더라도 내 소원만은 절망이 아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비록 탄식의 자리요, 낙망의 자리요 절망의 자리지만, 내 희망만은 승리를 표방하는 데 있어서 당당했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은 절망에 부딪치는 것이요 낙망에 부딪치는 것이지만, 아버지의 뜻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요 승리이기 때문에, 그 승리를 표방하는 자리에서 자기의 생명을 넘나드는 순간이나마 불충 불효의 위치를 넘을 수 있다는 데 희망을 가지고 담대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64-215, 72.11.12) 십자가상에서도 충효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몸부림친 예수님 예수님이야말로 역사 이래의 비참과 절망의 첨단인 비운의 길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누구보다도 가까운 자리에서 붙들고 넘어간 사람입니다. 자신이 죽는 자리에 나가는 딱한 사정보다도 하나님의 심정 가운데는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더 비참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도량을 가졌습니다. 양손과 발에 못을 박히게 되었을 때, '아이고 아야!' 했더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뼛골에 스며드는 아픔이 아무리 절망을 촉구하더라도 '참아라!' 생명이 다하더라도 '참아라!' 하면서 견뎠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가슴엔 그 이상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도리어 눈물을 흘리는 자리, 피 흘리는 곤경의 자리에 떨어져 자기 몸이 시들어 가는 입장에 서더라도 하나님을 다 사랑하지 못한 한을 품은 효자였습니다. 내가 살아서 아들딸과 씨족, 민족을 거느리고 하나님의 한을 세계적으로 대신 짊어지겠다는 효성스런 뜻을 나타내지 못한 한을 품고 간 예수님, 그 묵묵한 예수님의 사상과 신념에 동행한 사람이 누가 있었느냐? 그것을 보는 하나님도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슴이 찢어지고 그 몸이 말라가는 고통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부르는 예수님의 한마디 한마디는 하나님의 심정을 뚫고 나가는 화살 이상의 예리한 창이 되어 아버지의 가슴을 찔렀을 것입니다. 최후에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말을 들을 때, 기가 막힌 노릇이었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신 그 이면에는 '마음을 다해 당신 앞에 효도를 다하려고 했습니다' 하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불효의 채찍을 남길 수 있는 한 순간이요, 하늘 앞에 6천년 원한의 조건을 남길 수 있는 무서운 자리를 넘어가는 그 순간, 불효자는 될 수 없다고 각오했지만, 생명이 오락가락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찰라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늘 대해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일신에 사무치는 것을 누구보다 두렵게 생각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한 싸움에서도 지지 않고 하늘만을 위하여 충의 도리와 효자의 도리를 심어 놓고 생명이 다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자기 소신을 끝까지 관철했다는 의미에서 '다 이루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맞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중심으로 불효의 자리를 이어받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세계의 공포가 휘몰아쳐 오고, 자기 일생 일대의 모든 것이 하향선으로 엇갈리는 아찔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개인의 사정도 생각했을 것이고, 어머니 아버지도 생각했을 것이고, 종족도 생각했을 것이고, 앞으로 올 나라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내 나라를 위하는 자세도 필요하지만, 나 하나가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남기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내적으로 다짐하며 스스로를 제어하는 마음에 사무쳤습니다. 그 마음을 어기지 않는 입장에서 자기 스스로를 이김으로써, 스스로의 소원을 이루는 동시에,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려면 예수님의 불충이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과 불충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안팎으로 들어맞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자리에서 갔기 때문에 그의 무덤에는 부활의 서광이 비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전세계가 전부 뒤넘이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역사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수많은 선조들이 피를 흘리며 로마박해 4백년 기간을 거치는 피의 종교로 출발했습니다. 죽음길로 개척한 길이니 그를 따라가는 후손도 죽음길을 가지 않고는 갈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피를 흘리지 않고는 살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대로 정도의 길을 밟아서 세계적인 발전을 이룩해 나왔습니다. (64-222, 72.11.12) 예수님이 가신 길 예수님은 3년 공생애 실천노정에서 생명을 걸어놓고 싸우다 가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피를 뿌리며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지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민족이 배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교단이 배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부모 형제,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제자들, 더 나아가서는 세 제자까지 배반하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을 따라 수많은 인류들이 가야 할 길인데, 그 길을 따르는 데는 목적이 뚜렷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가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이러하다는 목적이 뚜렷해야 되는 동시에 내용도 뚜렷해야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뜻의 길이었습니다. 이 뜻에 대한 내용과 목적은 예수님이 3년 동안 수고하여 찾은 내용이요, 수고하여 세운 목적이었습니다. 그 내용과 목적은 30여년의 생애를 희생하여 찾은 내용이요 목적이었기에, 어떤 환란이 일시에 예수님을 친다 할지라도, 죽음의 장벽이 휩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뜻으로 남습니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비에 부딪쳐서 사망의 물결이 휩쓴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 하나님은 내게 부활의 권한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라고 믿으며 모든 것을 박차고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죽음을 박차고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부활의 권한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 내용을 가지신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좁은 길, 험한 길을 가셨으니, 오늘날 우리들도 그의 뒤를 따라 그러한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자들은 예수님이 슬픈 세상을 바라보시며 구하던 마음을 느끼는 자, 사망의 땅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이 찾던 마음을 품은 자, 멸망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며 가슴을 두드리면서 인간에게 새생명을 주입해야겠다는 간곡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하늘이 바라는 목적을 심중에 지니고 이 땅을 대하여 싸우겠다는 각오를 갖고 나서기 전에는 하늘이 우리를 예수님이 가신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거쳐 가신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6-176, 59.4.26) 천국문을 통과하려면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생전에 제2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지 못한 것이 탄식의 내용인 연고로 예수님은 2천년 동안 성신과 더불어 만민을 동원하여 제2 이스라엘 선민권을 조성해 나오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선민권이 조성되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끝날의 성도들은 12사도들의 문을 거쳐 예수님이 들어가신 문을 통과해야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끝날의 성도들 앞에 열려 있는 천국문은 12사도형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의 성도들이 천국에 가려면 이 12사도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오늘날 세계 기독교인에게는 수많은 문이 열려 있습니다.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개하는 문이 사명을 하고 있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원칙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삼은 12사도로부터 기독교가 시작되었으니 끝날 성도들은 그 12사도의 문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6천년 종말에 찾아야 하는 선민은 예수님 당시의 제1 이스라엘형인 제2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파에 속하여 어떤 문을 거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12사도의 한 이념의 표지를 이마에 받고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 앞에, 예수님 당시의 사명을 대신하여 그 시대의 사명을 실체로써 종결지어야 할 세계 기독교인들 앞에 12사도형의 문을 찾아야 할 때가 옵니다. 무수히 갈라졌던 종파는 천지운세에 따라 자기들도 모르게 통일이념 형태를 갖춘 환경권내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 그리고 그 외의 각 교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가를 알아 예수님의 12사도의 반열을 찾아 들어가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60만 대중을 거느리고 12지파와 70장로를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선민인 이스라엘을 수습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도 역시 12제자와 70문도를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이념을 세계적인 이념으로 세우고자 하셨으나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제2 이스라엘권내에 있습니다. 제2 이스라엘권내에 있으되 그들은 자신이 제2 이스라엘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지 모르는, 지파 반열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세계 기독교인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12사도로 말미암아 택한 민족을 수습하고 12지파의 반열을 재수습하려다가 실패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계 기독교인들 앞에 다시금 12지파, 70문도, 120문도의 형을 땅 위에 세워 천적인 섭리와 맞춰야 할 사명을 갖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지금은 사도의 문을 거치고 나서 예수님의 문을 거친 자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이 땅 위에 참다운 성도가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잘 믿는 성도가 있다 할지라도 '너는 어느 지파냐?' 하고 물으면 '나는 어느 지파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하나의 지파, 하나의 지도자를 못 가졌다 할진대 천국을 건설하는 시대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이념이나 하나의 민족 앞에 있어서 자기의 위치가 뚜렷하지 않으면 애매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간섭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오늘 끝날의 성도들이 역사적인 원한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2천년 전에 택함받은 제1 이스라엘이 택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선민권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선포하신 진리로써 민족을 초월한 전세계 크리스천들은 제2 이스라엘의 선민권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이 제2 이스라엘 선민의 권한을 갖고 있는 끝날에 처한 기독교 성도들은 하늘을 배반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 되지 말고, 재림하시는 주님 앞에 잃어버린 제1 이스라엘을 대신할 수 있는 제2 이스라엘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때는 교파가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끼리끼리 모아야 할 때입니다. 끝날은 6천년 역사노정에서 선한 사람을 거두어들이는 인류역사 종말시대의 수확기입니다. (6-178, 59.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