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복귀를 위한 예수님의 생애관(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3장 참사랑의 예수님)
무지... | 20180626103154
7. 복귀를 위한 예수님의 생애관 한 인간의 생의 가치 타락한 인류는 아직까지 세계가 입증해 줄 수 있고, 땅이 입증해 줄 수 있으며, 하늘이 입증해 줄 수 있는 영원한 생(生)의 가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개인의 생의 가치를 찾고, 개인을 거쳐 세계적인 생의 가치를 찾고, 세계를 넘어 천적인 영원한 생의 가치를 찾아야 할 복귀의 사명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섭리의 뜻을 세워놓고 전체의 생의 가치를 찾아 나온 목적은 여러분 자체나 세계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하나되어 하나님이 기쁠 수 있는 동시에 세계가 기쁠 수 있고, 세계가 기쁠 수 있는 동시에 개인이 기쁠 수 있는 생애의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하늘의 구원섭리도 끝날 것이요, 사탄을 중심한 세계적인 인륜도 끝날 것이며, 개인적인 도덕관념도 끝나게 됩니다. 타락한 인류에게는 이러한 생애노정을 개척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개체적인 자기로만 보기 쉽지만 자체 가운데는 창조의 전체이념(全體理念)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은 먼저 세계적인 생의 가치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개인적인 생의 가치가 성립됩니다. 이러한 생의 가치를 찾기 위하여 생활해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자체를 분석하여 자신이 요구하는 천성의 생명을 대신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야 되고, 역사적인 모든 이념을 하나로 귀일시켜 세계적인 생을 완결지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의 생활적인 면에서 영원한 생이나 세계적인 생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생의 발판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지금의 생이 세계적인 생을 거쳐 영원한 생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주적인 생을 세워야 할 인간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복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6천년간 수고해 왔는데, 하나님의 이런 수고의 역사를 복귀섭리역사라고 합니다. 이런 천주적인 생의 가치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은 4천년 수고의 노정을 거친 후에 그 전체적인 생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한 분을 보냈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9, 57.1.6)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을 품으려 한 하나님 예수님의 섭리적 생애라 하면 여기에는 전체성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기까지 하나님의 섭리는 4천년 역사를 경과했고, 예수님이 이땅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새로운 섭리를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지상의 인간들과 자유롭게 대할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천사들을 심부름시켜 섭리해 나오던 구약시대를 지나 땅 위에 직접적으로 역사할 수 있는 실체를 가진 그리스도를 세워 놓으심으로써, 타락한 인간들을 다시 품으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왔다 가신 후 지금까지 2천년 역사가 흘러갔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날 여러분이 아버지의 은사권내에 들어옴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실 수 있고 성신의 보호를 입어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시간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4천년 동안 인간을 직접 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천사를 심부름시켜 인간을 찾아온 아버지의 수고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영계와 육계를 갈라놓고 섭리하던 하나님이 인간 앞에 직접적이고 평면적인 섭리를 세우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왔다 간지 2천년 역사가 경과한 오늘날 그 은사 앞에 택함을 받으려면, 예수님 오기 전 4천년 동안 영적인 면에서 인간을 찾아온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자신의 생활과 생애와 영생의 목표를 걸어놓고, 여러분 하나를 그의 생활에 동반시켰고, 그의 생애에 동반시켰고, 그의 영생에 동반시켜 이끌어 나가려고 하시는 섭리의 뜻을 대하고 있는 역사적인 과정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뜻을 30여 평생의 생활목적으로 또 전체적인 생애의 목적으로 세워서 이것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2천년 역사를 거쳐 여러분의 선조들을 이끌어 나왔습니다. 또 앞으로도 여러분의 후손을 이끌고 나가야 할 섭리적인 책임이 예수님에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예수님이 섭리의 뜻을 대할 때, 예수님 자신만이 기뻐하는 생활, 예수님 자신만이 기뻐할 수 있는 생애, 예수 자신만이 영생을 걸어 놓고 안일의 한날을 맞으실 수 없습니다. (3-183, 57.10.27) 예수님의 생활의 표준 예수 그리스도는 한 몸이로되 그 몸은 영원하고 무한한 세계적인 생을 대신하였고, 영원한 개인의 생을 대신하셨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오신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그분은 현실을 토대로 영원한 소망을 나타내야 했으며, 하늘땅 위에 영원히 실존할 수 있는 생의 가치를 증거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띠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개인의 생을 위하여 생활하시지 않았고, 세계의 생을 위하여 생활하셨으며, 나아가서는 그것을 넘어서 영원한 생을 위하여 한날 한날을 싸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활의 표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바라보고 느끼고, 생활하신 모두는 자기 개인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개인적인 동시에 세계를 대표했고, 세계를 대표한 동시에 하나님을 대신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도 예수님 일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세계를 위한 말씀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대신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의 내용을 깨달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을 성취해 드리지 못합니다. (2-11, 57.1.6) 예수님이 세우신 사랑의 기준 예수님은 이런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사랑을 내세웠습니다. 즉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하늘땅에 완결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복음의 중심이 바로 사랑입니다. 개인이 자기 일신의 생을 영원한 가치의 기준에 결부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남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남을 자기 이상 사랑하는 것으로 생의 가치기준을 세우셨습니다. 천적인 전체의 생의 가치를 대표해 나타나신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자기 개체의 구원을 위해서는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을 소유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나를 위한 사랑보다도 동료를 위한 사랑, 동료를 위한 사랑보다도 세계를 위한 사랑, 세계를 위한 사랑보다도 하나님과 영계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까지 위하는 사랑을 갖고 나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개체의 생의 가치를 찾기 위한 개체적인 관념을 가지고, 혹은 개체적인 사랑을 가지고 사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사랑하실 때도 단지 그 친구관계에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세계를 대신해 사랑한다는 관념과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랑한다는 마음을 갖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일대일 관계에서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개인을 사랑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포돼 있고, 우주적인 사랑이 내포되어 있으며, 개인적인 사랑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체험해야만 예수님의 생의 가치를 올바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계를 위하여 자신이 존재한다는 생애의 표준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하면서 친구를 사랑할 때도 그 이면에는 세계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관념을 지니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세계적인 구원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동시에 전체를 위해서도 죽을 수 있는 희생과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때 하늘을 향하여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고개를 넘어서 아버지의 뜻대로만 살기를 원하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노정에는 놀라운 사랑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주적인 생명을 복귀하기 위한 사명을 지니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의 가치를 찾기 위해 내세운 것도 역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 개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위하고, 영원한 세계 즉 영계에 있는 영인들까지도 위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전체 복귀의 생을 감당해야 할 우리가 한날 한날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한 예수님의 생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에 부딪치든지 그날 그 시간에 느끼는 감정으로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주적인 전체의 성품을 대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대신하겠다는 각오와 결심으로 모든 것을 대해야 합니다. 그러한 한날 한날의 생활을 거쳐야만 세계적인 생을 완결지을 수 있고, 영원한 생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하루하루의 생활이 여러분 자체에만 미치는 순간적인 생명의 가치를 갖고 있다면 영원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생 동안 매일매일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려 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계속 이루어져 나왔습니다. (2-11, 57.1.6) 하나님과 인간의 거리를 좁히시려던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이 땅 위에 태어나기 전까지는 인간과 하나님은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있는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사탄 세상의 모든 조건을 밟고, 즉 공중권세를 잡은 어두운 사탄의 세력을 뚫고 하나님에게 찾아 올라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만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대할 수 있었던 것이 구약시대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과 수고만 가지고는 도저히 당신을 찾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안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 입체적인 입장에서 공중권세를 뚫고 올라가야만 할 입장에 있던 인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며 서러운 눈물을 흘려야만 했던 타락한 인간에게 평면적인 입장에서 상대적인 가치를 갖고 하나님을 대신하는 한 중심을 대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4천년 섭리역사에서 사탄에 대한 일대 승리의 조건이요, 자랑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불신함으로써 예수님이 땅 위에 오신 목적을 다 성취하지 못한 연고로 아직까지 우리는 하늘을 향해 기도해야 하고 정성을 다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원래 인간의 시선을 평면으로 보고 움직일 수 있게 창조되었는데 마음은 하늘을 향해야 될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평면권내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성취해야 하나님이 기뻐하고 예수님과 성신이 기뻐할 수 있고, 땅 위에 있는 만민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한때가 이루어져야만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첫 단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으나 인간의 불신으로 인해 돌아가셨으므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맞아들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그 섭리적인 생애의 첫출발로서 하늘이 섭리의 뜻을 따라 생활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이 생활의 중심은 사람들을 끌고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동시에 인간을 참소하는 사탄과 대결하여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양면적인 입장에서 예수님은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계에서는 사탄으로부터 참소받고 보이는 육계에서는 모든 불신의 도배들로부터 반대받는 입장에서 예수님 홀로 4천년 동안 섭리한 하나님의 서러움을 대신하여 서러워하고, 천륜의 슬픔을 대신하여 슬퍼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은 그분의 시선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였던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에 따라 택함받은 유대교를 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 완수를 위해 협조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할 유대교단은 예수님 앞에 일체 나타나지 않고 전부가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것이 필연적인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진정한 심정을 헤아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사탄의 세력을 막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육적으로 날아오는 모든 불신의 화살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싸움만을 할 수가 없습니다. 더 크고 더 먼 하나님의 뜻과 소망을 바라보고 거기에 자신의 몸 마음을 맞추어야 할 입장에 있던 그리스도의 생애의 출발을 여러분이 같은 입장에서 동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출발한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고 어떻게 해야 사탄을 굴복시키며, 어떻게 해야 타락성을 갖고 있는 만민을 복귀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것입니다. (3-185, 57.10.27) 예수님이 순종의 도리를 가르치신 목적 이 땅 위에서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들이 누려왔고, 하나님이 주관해야 할 인간들을 자기들이 주관해 왔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은 사탄의 압박 밑에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먼저 반대하는 사람보다도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반대케 하는 영적인 사탄과 대결해야 했습니다. 이런 싸움에서부터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의 본질과 대결하기 위하여 나타난 예수님은 그의 생활권내에서 먼저 사탄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그의 생활권내에서 실천적인 행동을 제시한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말씀도 그렇거니와 그의 마음도 그렇고 그의 생활도 그렇고 그의 생애도 그렇고 그의 죽음까지도 사탄이 하지 못하는 조건을 찾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천리 법도가 엄연히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법도를 중심삼고 모든 것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천리 법도에 의해 사탄을 분립하셨던 것입니다. 사탄의 본질은 교만과 혈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못나서 온유겸손한 입장에 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최고로 높을 수 있고 영광을 누릴 수 있었으나, 예수님은 이것을 다 버리고 온유겸손한 입장에 서신 것입니다. 사탄이 이런 예수 그리스도와 대결하여 싸우려 했으나 사탄에게는 하나님 앞에 굴복해야 할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끝까지 온유겸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본질인 교만과 혈기에 반대되는 온유겸손을 갖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엄연히 천리법도가 있는 것을 아는 사탄이기 때문에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온유와 겸손을 들고 나서게 되면 사탄세계도 자연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을 아시는 예수님은 사탄이 하지 못한, 사탄이 할 수 없는 온유겸손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와 같이 온유겸손한 입장에 서야 중심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에게로 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순종(順從)과 복종(服從)을 보여 주셨습니다. 순종은 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명령에 따르는 것이고, 복종은 응할 수 없는 환경에서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신하는 인간들에게 이런 순종과 복종의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 역시 사탄의 본질, 사탄의 모든 생활적인 요소를 가로막기 위한 것입니다. 사탄은 자기를 중심삼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사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뒤를 좇으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이 자기를 믿고 자기에게 순종하여 하늘을 따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뜻을 모르고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하나님 뜻 앞에 불의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예수님은 순종의 길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기실 하늘의 영광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만민과 만물, 사탄까지도 주관하고 그들의 희생과 봉사를 받아야 할 입장이었으나 그 반대의 입장에 서셨습니다. 사탄이 당신 앞에 순종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도록 만들기 위해, 즉 이런 사탄의 모든 세력을 굴복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무한한 희생과 봉사의 제물을 드리는 노정을 걸으셨습니다. 사탄세계는 사람을 대하든지 혹은 피조물을 대하든지 무한히 이용하고 착취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 반대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이 하지 못하는 생활을 예수님이 대표적으로 하셨기 때문에, 즉 온유겸손하고 순종하고 복종하며, 희생과 봉사의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사탄도 그러한 면에서는 굴복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예수님이 가르치신 온유와 겸손, 순종과 복종, 희생과 봉사에 비추어 보고 그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활권내에서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아직까지 사탄의 종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187, 57.10.27)
사탄과 동반하여 갈 수 없는 하늘 길 지금까지 여러분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자기를 중심삼은 혈기와 교만으로 사는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루빨리 그런 입장에서 벗어나야 하겠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워놓은 기준,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한 최후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준인 온유와 겸손, 순종과 복종, 희생과 봉사로 혈기에 의해 하늘을 핍박하는 자들을 향해 싸워나가겠다는 내적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뜻에 대립하여 뜻을 반역하는 입장에 선 것이 사탄이요, 이런 것이 사탄의 생활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뜻에 반발하려고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 아니라 사탄의 세력이 환경에 꽉 차 있고, 그 환경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사탄의 세력이 자기를 중심삼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끝날에는 사탄이 가는 길과 하늘이 가는 길, 두 갈래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사탄이 가는 길과 하늘이 가는 길은 다릅니다. 하늘이 가는 길은 사탄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즉 사탄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대하여 순종복종하고, 뜻을 온유겸손하게 실천하고, 섭리의 뜻 앞에서 전인류를 대신하여 희생봉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한과 슬픔이 사탄세계에 맺혀져 있으나 희생과 봉사를 각오하고서 이 길을 해결하려고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선함에 있어서 왕 중의 왕이요, 온유겸손함에 있어서 왕 중의 왕이요, 순종과 복종함에 있어서 왕 중의 왕이며, 희생봉사하는데 있어서 왕 중의 왕이었습니다. 땅 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온유할 줄 모르고, 순종할 줄 모르며, 희생 봉사하는 제물의 길을 걸을 줄 모릅니다. 예수님은 4천년 역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고, 수많은 성현들이 왔다 갔지만 그들이 하지 못하던 것, 즉 하늘 앞에 최고의 온유의 기준, 최고의 순종의 기준, 최고의 제물의 기준을 세워놓았던 연고로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밟고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사탄을 굴복시키는 피나는 노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온유겸손하고 순종굴복하고 희생봉사하는 생활을 하셨는데, 하나님이 이땅을 대하여 오랜 역사를 거쳐오며 수고한 그 마음과 동일한 심정을 지니고 그러한 생활을 해 나왔기 때문에 사탄이 근본적으로 굴복해야 했고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역사적인 출발점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면서도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려 하는 길을 가로막고 도리어 자기에게로 이끌어가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고, 스스로 대항하려고 하며, 스스로 인간들을 이용하려 합니다. 이런 사탄이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께 나아가면 감히 머리를 들려야 들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조건이 예수님의 생활권내에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면 우리에게서 사탄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이런 역사적인 출발을 이룩한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과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기준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생하면 나도 영생하고 하나님이 불변하면 나도 불변하고 하나님이 무한 자비하면 나도 무한 자비하겠다는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잘 느끼고 하나될 수 있었기에 사탄 대한 싸움의 노정에서 승리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오늘까지 이 사탄세계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내적 심정이 연결되는 말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어떠한 곡절, 어떤 사무친 내용이 있는가를 안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3-189, 57.10.27) 예수님의 사명을 상속받아 뜻을 완결해야 할 우리 예수님은 우주적인 생을 복귀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봉사와 개인적인 희생과 개인적인 고난의 노정을 거치셨습니다. 책임을 지는 데 있어서도 당대에만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고, 전체적인 복귀의 사명이 끝날 때까지 전 인류의 생명을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갖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2천년 역사가 경과한 오늘날까지 우주적인 생의 복귀의 사명을 책임져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만으로 그 사명을 완결하지 못하자, 성신을 보내 역사하셨으며,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까지 동원해서 그 사명을 완결시켜 나오고 계십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복귀하기 위해 오셨지만 그 일을 완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그 일을 이루어야 할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날까지도 이 땅 위에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수고하고 계십니다. 그 책임은 예수님 자체만으로는 완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그 사명을 완결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우주적인 복귀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그 사명을 책임지고 나서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일대(一代)에 그 사명을 종결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면, 일생을 통하여 기필코 그 사명을 이루겠다는 굳은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한날 한날의 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섭리역사과정에서 수고하고 계신 사실을 체휼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세워 나왔던 우주적인 복귀의 사명자로서 수고해 오신 그리스도의 뜻이 여러분을 통하여 완결되지 못합니다. 먼저 여러분 자체를 하늘 앞에 맹세의 조건물로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계를 위하여, 하늘땅을 위하여,혹은 뭇 백성을 위하여 단 한번 세운 맹세의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통하여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생을 바쳐 수고해 나온 기준을 일시에 넘어섰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앞으로 어느 한때 하늘 앞에나 세계 앞에, 또는 개인 앞에 드려지는 하나의 맹세의 제물이 되겠다는 각오를 확실히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느 곳에 가든지, 어떠한 곳에 처하여 어떤 일을 하든지 그날 그 시간에 처한 환경에서 언제나 맹세의 조건물로 서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하나님 앞에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찾아 드려야 할 사명이 남아 있으니, 여러분은 자신을 맹세의 조건물로 세워 예수님의 생과 관계맺을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체를 세계적인 조건물로 세우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수고해 온 수많은 선지자들을 대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맹세의 제물이 되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개체 개체가 그러한 맹세의 조건을 조성해야 여러분은 하나에서부터 둘이 되고, 넷이 되고 세계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이 이루어질 때 생의 가치를 찾기 위한 세계적인 고난이 종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을 찾기 위한 세계적인 고난을 종결시킬 수 있는 기준이 여러분 개체에서 형성되어 교회․사회․국가․세계에까지 확대돼야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워 우주적인 생을 복귀하려는 섭리의 뜻이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섭리의 뜻을 대하여 나온 여러분 자체를 생각해 볼 때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생각해 볼 때,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대신하는 개인과 가정이 나와서 사회․국가․세계까지 연결시킨 기준이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에서부터 전체, 즉 세계 인류 전체가 그 권내에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기준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복귀의 사명은 종결되지 않습니다. (2-15, 57.1.6) 끝날의 성도들이 가져야 할 삶의 목적 참된 개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웠으나 하나님의 뜻이 지금까지 가정․사회․국가․세계로 확대되어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서러움이 우주적인 서러움으로 남고, 또 하나님의 서러움, 천주적인 서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간들은 그러한 서러움을 풀고, 영원한 하늘의 승리가 이루어지는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일신을 통해서 하늘과 땅의 전체의 섭리의 가치를 증거하고, 하늘땅의 전체의 사랑을 나타내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은 천륜을 표준한 생애노정을 거쳐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세계적인 생활과 우주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마음 자세를 갖춰 나가야 됩니다.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갖춰져 나간다면 그 뜻을 다 실천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적인 면에서는 계속해서 전체와 관계를 맺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천국은 너희 마음속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지니고 우주적인 사랑과 진리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인간 개개인에게 부여한 모든 가치를 완결시켜서 그것이 그들 각자의 근본이 되어야 천국이 이뤄진다는 뜻에서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권에 속한 개인들이 단합해 세계적인 생명운동을 일으키고, 영계에 있는 수많은 선영인들까지 전체와 관계를 맺게 해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주적인 생을 복귀하시려던 뜻이 종결됩니다. 우주적인 복귀의 사명을 띠고 오신 예수님을 따르던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러한 예수님의 사명을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義)보다도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더 소망하고 그것을 생의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끝날에 처한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어떠한 외적인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개인의 안일을 위하거나 개인이 잘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잘사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이 바뀔 때는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이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일이 막혀버리게 됩니다. 반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여러분에게 있어서, 문제는 여러분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어느 정도까지 희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인을 위해 희생하면 개인적인 주인공이 될 것이요, 세계를 위하여 희생하면 세계적인 주인공이 될 것이요, 하늘땅을 위하여 희생하여 승리적인 생애 기준을 세운다면 하늘땅을 주관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들이 당신의 인격을 닮아 생명적인 가치를 찾아 세우도록 지금까지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개체를 찾아 세워 이런 생의 복귀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인류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 또 현실의 세계적인 면에서 볼 때, 혹은 미래의 영원한 소망적인 면에서 볼 때,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책임도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여러분이 먹고 사는 모든 생활의 표준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전체적인 생을 복귀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하겠고, 하나님이 찾으려는 전체 생명의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셨던 사랑을 중심하여 실천하겠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나서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만 하나님이 우주적인 생을 복귀하려는 뜻이 여러분을 통하여 완결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한 개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이 함께 하고, 더욱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2-17, 5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