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산을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슬픈 심정(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3장 참사랑의 예수님)
무지... | 20180624210525
6. 산을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슬픈 심정 예수님과 산 예수님께서 중대한 일에 봉착할 때마다 발걸음을 옮겨 찾아가신 곳은 높은 산이었습니다. 예수님 앞에는 광야에서 사탄에게 이끌려 올라갔던 한 산이 있었고, 유대백성들의 불신으로 최후의 십자가를 지는 문제를 하늘 앞에 결정짓기 위하여 찾아간 변화산상이 있었으며, 죽음의 골고다의 길을 넘어가기 위한 결정적인 기도를 했던 겟세마네동산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산을 찾아가던 예수님의 발걸음이 어떻게 움직였으며, 그가 느끼던 슬픔과 서러움의 심정이 어떠했으며,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났던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천년 전 광야로 나가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을 대하여 싸움의 노정을 가던 예수님의 애타던 심정을 알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굶주리고 난 후 사탄의 3대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은 하늘에 대한 염려와 인류에 대한 염려와 피조 만물에 대한 염려를 그 일신에 지니고 전후 좌우를 명백히 갈라내야 했습니다. 그러한 책임을 진 예수님에게 그 장면은 하늘과 사탄, 하늘 일과 사탄의 일을 판가리해내야 할 중대하고도 비장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때에도 역시 예수님은 사탄에게 이끌려 산상봉에서 시험을 당했습니다. 광야노정의 3대 시험에서 예수님이 사탄을 굴복시키고 최후의 승리를 한 곳도 높은 산 꼭대기였습니다. 택함받은 세례 요한과 그 일당에게 배척을 받고 유대민족에게 배반을 당하고 찾아가는 광야노정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 땅 위에 어느 누구도 체휼하지 못한 슬픈 심정을 지닌 노정이었습니다. (5-193, 59.1.25) 산을 찾은 선조들의 충절을 회상하며 각오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하늘의 독생자요, 4천년 역사를 해결할 자요, 그 시대와 천추만대의 후대 앞에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표적으로 나타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백성도 뒤로 하고, 교단도 저버리고, 택한 세례 요한도 요셉 가정도 남겨 두고 친구도 없이 홀로 광야로 나가던 서글픈 심정을 우리는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광야를 걷던 예수님은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쫓겨난 후 에덴동산을 잃어버림으로써 그들의 후손 역시 그 동산을 찾아 헤매던 장면을 그 마음에 그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당한 아담 이후 슬픔의 동산에서 살아온 역사적인 선조들을 회상하게 될 때, 예수님은 산이라는 명사와 함께 산에 대해서 심각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김을 받았던 것을 쫓김 받지 않았던 입장으로 원상복귀하기 위하여 1천6백년 이후에 나타난 노아가 1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아라랏산 기슭에서 모든 역경을 참으면서 방주를 만들던 절개에 찬 모습을, 그의 절개심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그와 같은 생애를 보낸 것은, 오늘의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노아가 이와 같이 산정에 올라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수고했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이 제물헌제에 실수한 이후 이삭 번제의 명령을 받고 산상을 향하던 모습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 사라의 만득자(晩得子)인 이삭을 속여서 모리아 산상으로 데리고 가던 아브라함의 비장한 심정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인 이삭을 제물로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도 물론 하나님을 위함이요, 오실 메시아를 위함이었습니다. 또 모세는 바로 궁중 40년과 미디안 광야 40년의 수고의 노정을 거쳤습니다. 이렇게 서글픈 심정을 품고 나오던 모세 앞에 호렙산 기슭의 불붙은 가시덤불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서 새로운 약속을 하던 장면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모세가 하나님을 호렙산에서 만나 불변의 인연을 맺는 장면, 원수인 사탄을 이 우주에서 기필코 제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을 대하는 모세의 충절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모세가 인연 맺는 그 장면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 땅에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세는 80노객이요, 광야에서 시달린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의 심정에 사무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표준을 갖고 있던 모세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60만 대중을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는 황무지인 광야로 끌고 나온 입장에서, 끝까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야 할 책임을 짊어진 모세가 그들이 잘못되거나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까 염려해서 찾아 올라간 곳이 시내산이었습니다. 시내산정에서 모세는 40주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내려오게 되는데, 예수님은 그러한 모세의 사정을 연상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위함이요, 메시아가 오실 길을 닦기 위함이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선민을 세워 찾고자 하는 복귀된 나라를 찾아 세우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사탄편인 바알의 제사장들과 대결하던 장면은 모두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러한 회상을 하며 걷던 예수님은 선조들이 산정에 올라가서 판가리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점을 찾기 위하여 하늘 앞에 기도한 사실이 모두가 하나님을 위함이요, 나아가서는 자기를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회상하며 비장한 심정을 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예수님의 심중의 세계를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5-194, 59.1.25) 뜻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장한 심정을 품고 나선 예수님 역사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결심을 하고 나선 예수님은 40일 금식을 하면서 옛날 선조들이 걸어나온 슬픔의 노정을 자기 일신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누구보다 절절히 느꼈습니다. 40일 금식 후 3대 시험 과정에서 사탄에게 이끌려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가던 예수님은 4천년 역사 전체의 노정을 마음으로 염려하면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사탄을 굴복시키느냐 못 시키느냐 하는 비장한 심정을 갖고 높은 산꼭대기를 향하여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광야노정에서 사탄에게 이끌려가던 발걸음은 자기를 위한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개인 복귀와 환경 복귀와 세계 복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을 그 심중에 품고 이러한 상징적인 조건의 과정을 거쳐서 산정(山頂)에 오르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대 시험이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역사적인 새로운 선조로서 전통을 세우고 하늘의 심정을 상속받겠다는 마음을 품고, 사탄을 따라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렇게 뜻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장한 심정을 품고 나선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떠한 역사적인 선조보다도 확고한 각오를 하고서 사탄을 그 장중에 쥐고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광야로 나가셨고 산정에 홀로 섰던 예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역사노정을 회상할 때 자기 일신이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함을 느낀 동시에, 그 당시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게 될 때도 역사적인 책임을 느끼며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5-194, 59.1.25) 사탄을 대한 예수님의 비장한 심정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세례 요한을 세워서 하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닦게 하였습니다.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터를 닦게 하기 위해 미리 세례 요한을 보냈는데, 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축복하고 4천년 동안 끌고 나온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적인 책임을 담당하고 나타날 수 있는 백성과 택한 자가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된 예수님은 낙망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모든 택한 백성과 세워진 무리를 생각하게 될 때는 슬픔에 북받치지 않을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자리를 만든 동기와 기원을 더듬어 살피고, 그 당시까지의 역사적인 심정을 헤아려보게 될 때 이런 곡절을 있게 한 존재가 바로 사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기필코 사탄에게 승리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갖고 사탄의 시험을 대했던 것입니다. 사탄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 4장 8~9절)'고 말했으나,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사탄을 배척했습니다. 그리하여 사탄 앞에 하나의 승리의 기준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슬픔과 시대적인 슬픔에 연결시킬 수 있는 자신의 기준을 획득해서 역사적인 인연의 발판이 되어 있는 택함받은 이스라엘과 세워졌던 유대교를 향하여 다시 찾아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사정을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광야노정에서 승리의 기준을 세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을 찾아갔으나 그들은 모두 환영해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과 머무는 곳곳마다 환영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핍박과 반대와 조롱으로 대했습니다. 첫 번에 배척을 받고 광야노정에 나간 것도 섭섭하고 분한데, 사탄을 대하여 승리한 조건을 갖고 다시 백성을 찾아 나선 예수님 앞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이 비통하고 서러운 심정에 사무쳤습니다. (5-197, 59.1.25) 또다시 산을 찾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외로운 처지 예수님은 오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홀로 외로운 자리를 찾아 들어가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외로울 때 찾아가신 곳은 고요한 산중이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하나되었더라면 그날부터 예수님은 하고 싶은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계획과 실천 방법까지 다 갖고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천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족을 장중(掌中)에 넣고, 민족을 앞장세워 세계 개척을 위하여 새로운 행군을 해야 할 하늘이 보낸 메시아가 그렇게도 불쌍하였습니다. (10-59, 60.7.3)
핍박받는 어지러운 환경에서도 민족과 교단을 돌이키기 위하여 산정에서 기도하였고, 3년 공생애노정을 통하여 사탄과 싸웠으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끝에 가서는 자기가 죽어서라도 기필코 무지한 백성을 각성시켜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변화산상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는 어떠한 노력을 한다 해도 성과가 거두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난 후에는, 자기가 죽어 제물로 피와 살을 뿌려서라도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을 맺고 있는 그들, 하늘의 심정에 연하여 있는 그 무리를 구하겠다는 간곡한 마음을 품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을 품고 찾아간 곳은 훌륭한 궁전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받아줄 제자의 집도 아니고, 그 나라의 백성의 집도 아니요, 당시 유대교인들의 집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간 곳이 어디였느냐 하면 변화산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 나간 것은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겠다는 기준을 가지고 민족을 붙안기 위함이었지만, 변화산상으로 찾아간 것은 가졌던 결심을 다 버리고 자신의 몸을 민족 앞에 나누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시간 그렇게 산을 오르던 예수님의 심정과 모습을 회상하고, 그것을 자신의 애달픔으로 체휼할 수 있고, 또 그런 심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하늘 대한 예수님의 서러움과 민족을 대한 예수님의 서러움, 그리고 교단을 대한 예수님의 서러움까지도 체휼할 수 있을 것입니다. (5-198, 59.1.25) 변화산상에 오르게 된 전후 사정과 예수님의 비장한 심정 변화산에 올라갈 때에는 세 제자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기에 민족을 대표해서 택한 제자 입장이었으나 산에 오르시는 예수님 앞에 아무런 도움의 조건도 세워드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를 찾아나갈 때는 그래도 천사가 와서 수종을 들어주었는데, 민족을 위하여 싸우고 민족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며 변화산을 오를 때는 민족을 대표하여 따르던 세 제자마저 예수님의 수종을 들지 못했습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슬픔으로 시작되어 슬픔으로 끝난 예수님의 생애는 비통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내게 있는 모든 정성을 다 들여 원하시는 뜻을 따라나가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역사적인 어떠한 선조들보다 굳은 지조와 충의와 성심과 노력을 기울여 3년 공생애노정을 걸었으나 민족에게 몰리고 교단으로부터 몰림받았습니다. 친척과 제자들 어느 누구 한 사람 자신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 가운데서 예수님은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외로운 자리에서 슬픔을 느끼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 4천년 동안 수고해 나온 역사의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인가 하여,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정을 고하기에 민망스러운 심정이었습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있는 예수님에게 민족에 대한 원망이나 교단에 대한 원망, 혹은 타락된 아담 해와에 대한 원망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여지가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옛날 선조들은 슬플 때 하늘의 위로를 받았으나 예수님은 슬픈 자리에서도 슬프다고 기도할 수 없는 자신임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눈물이 먼저 예수님의 무릎을 적셨을 것입니다. 그 모습은 하늘땅 위에 죄인 중의 죄인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4천년 동안 수고의 역사를 거듭하여 섭리한 하나님 앞에, 승리의 조건을 세우지 못하고 패배의 일로에서 서글픈 사정을 품고 변화산상에 홀로 나타나 하늘을 대해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게 된 예수님은 차마 입을 열어 기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과 사정이 딱하였기에 하나님은 엘리야와 모세를 보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의논하게 했습니다. 제자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슬픔에 잠길 것을 안 예수님은 백성을 위하여, 또 후대를 위하여 하늘이 염려할 것을 아시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놓고 슬퍼하셨습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서라도 소망이 없고 앞길이 가로막힌 환경에 처해 있는 유대백성들을 살려야 할 것을 느낀 예수님은 엘리야가 '아바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호소하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은 참으로 비통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선조들이 하늘을 대하여 나오는 데 있어서 그 행한 일들이 이렇듯 슬픈 역사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이 자기들이 죄의 종족임을 알고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 대신 민족의 서러움을 염려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예수님 대신 기도해 주기를 원하였으나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우리의 선조들이 걸어나온 역사노정의 실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예고 받은 예수님은 그 죽음의 한날을 남몰래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날이 점점 촉박해지고 사태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자신이 십자가에 나가기 전에 먼저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종결지어야겠다는 심각한 심정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심정이 그의 몸마음에 어리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최후의 길을 가야 할 구세주의 사명을 짊어진 자신임을 예수님은 알았기 때문에 죽음의 길을 거친 후의 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러한 죽음으로 역사적인 서러움과 시대적인 서러움, 미래의 서러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고개를 넘고 난 후에까지도 저끄러진 채 남아 있을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은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는 예수님을 알아준 사람은 땅 위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사정을 알아주는 제자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정을 아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만이 아는 서글픈 심정을 지니게 되었고,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원한을 품게 되었고, 비운의 장벽과 검은 구름이 앞을 가로막는 환경, 죽음 앞에 몰리는 비참한 환경에 처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이 슬프다면 이 땅 위의 어느 누구보다 슬펐을 것이요, 분하고 억울하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이 분하고 억울했을 것입니다. (5-199, 59.1.25)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비장한 기도 예수님은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를 대신하여, 민족과 교단을 위하여 왔으나 그가 나아가는 길은 너무도 슬펐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슬픔이 자신의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슬픔이 역사적인 슬픔으로 시대적인 슬픔으로 연결될 것을 알았기에, 또 미래의 슬픔으로 연결될 것을 알았기에 몸둘 바를 모르고 초조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찾아가신 곳이 겟세마네동산이었습니다. 만민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최후의 슬픔을 토로한 곳은 제자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믿고 있는 유대교단도 아니요, 유대나라의 궁중도 아니었습니다. 깊은 밤에 하나님과 의논하여 모든 것을 결정짓기 위하여 올라가신 곳은 아무도 가지 않는 겟세마네동산이었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밤이 새도록 '내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태복음 26장 39절)' 하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분하다면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럽다면 말할 수 없이 서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4천년 역사가 하루에 넘어가고,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루 아침에 망하고, 4천년 섭리의 터전이 한 시간에 무너지고, 세워졌던 유대교단이 한 시간에 무너질 것을 생각하게 되면, 그가 흘린 피땀은 역사의 거리를 연결시킨 피땀이요, 그가 흘린 피눈물은 역사의 거리를 연결시킨 피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백성들은 이러한 내용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은 선생님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따르겠다고 맹세는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그 비통한 심정을 인계받고, 그 피눈물나는 비통한 사정과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땅 위에는 그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오직 예수님이 홀로 행하고 가셨지, 이 땅 위의 인간 중에는 그러한 심정을 인계받을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놓고 겟세마네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하늘을 대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장 36절)'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호소는 하늘땅이 터져나가는 한마디요, 사망세계가 권세를 갖고 들어서려는 것을 저지하려는 비장한 한마디였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가 기독교 신자들에게 죽은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세기를 지나도 이 애달프고 피어린 최후의 호소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오! 하늘이여' 하고 부르짖던 예수님의 심정에 여러분의 심정이 같이 동하는 한날을 소망하여 하늘은 다시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끝날의 성도들은 갈보리산상과 겟세마네동산에서 호소하시던 예수님의 그 역사적이고 비장한 심정을 이어받아야겠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잠을 자던 예수님의 세 제자와 같은 입장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각성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 올라가 하늘을 향하여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던 것과 같은 심정을 품고 '아바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내어 주지 마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실 때, 그와 같은 심정으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 대신 제가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하나의 신자가 없었고 하나의 민족이 없었습니다. (5-201, 59.1.25) 예수님의 피와 눈물의 터전이 되었던 산 예수님이 걸어가신 생애노정은 산꼭대기에서 벌어진 그러한 일과 같은 비장한 일의 연속이었지 기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외로울 적마다 감람산 골짜기를 찾아들었고, 슬픈 적마다 고요한 삼림을 동무삼아 무언의 설교를 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를 붙들고 그의 깊은 심중의 내용을 호소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자리를 갖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대할 적마다 슬픔과 서러움을 갖고 대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소원은, 보이는 모든 산천이 하나님의 눈물과 인연 맺어져 있고 선조들의 애달픈 심정과 인연지어진 터라는 것을 회상하면서 이 모든 산천이 슬픔과 눈물의 산천이 되지 말고, 기쁨과 영광의 제단을 꾸며 승리의 송영을 드리는 산천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산을 바라보며 우리의 선조들이 과거에 비장한 각오를 하고 모든 슬픔의 역사를 이 산에서 종결지으려 한 것을 알고, 그 산들이 선조들이 사탄세계를 대해 승리해 줄 것을 바랐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산들은 예수님이 비장한 장면 장면에서 승리의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기도한 곳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 승리와 영광의 제단을 쌓고 '아바 아버지여,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누리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산을 바라보게 될 때, 예수님의 피와 눈물의 터가 되었던 산임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겟세마네동산에서 하나의 풀포기를 붙들고도 호소하셨을 것이며, 하나의 바위를 붙들고도 호소하셨을 것입니다. 그 바위 그 풀은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에 연하여 그 심정 가운데 잠길 수 있었으나 그 당시 인간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슬픔의 인류가 된 것을 자탄하고, 만물을 보기가 부끄럽고 산을 보기가 부끄러운 자신들임을 깨달아 끝날에 이 땅 위에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는 예수님을 산으로 쫓아버리던 유대민족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가정에서부터 모시고, 사회에서 모시고, 국가에서 모셔야 합니다. 들이나 산 어디서든지, 심지어는 산꼭대기에서까지도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늘 앞에 기쁨의 존재로, 영광의 존재로 주님을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한마디는 슬픔의 말이 아니고 기쁨과 사랑이 어린 말씀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해 드릴 책임이 있습니다. '산아! 산천아!' 하며 슬픔의 역사를 탄식하던 하나님의 눈물을 받은 산들, 혹은 이 땅에 대해서, 피조 만물에 대해서, 역사노정에 대해서, 이 시대에 대해서 어느 하나의 존재물도 하늘은 서글픈 눈물을 통하여 바라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어떤 존재물에게도 슬픈 심정으로 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산정에서부터 승리의 조건을 갖추었고 생활환경에서도 승리의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산꼭대기에서도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날을 소망하신 예수님입니다. 산을 찾아가셔서 승리의 한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역사적인 심정이요, 예수님의 시대적인 걸음이요, 또한 예수님의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들은 오늘의 광야노정에서 예수님 대신 사탄과 싸워야 되겠고, 변화산상에서 싸우시던 예수님 대신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줄 알아야 합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역사적인 인연을 맺으시던 예수님의 심정을 갖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슴 터지는 벅찬 심정을 가지고 이 땅과의 인연을 맺고자 하는 하늘의 심정을 인계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하늘의 심정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세워 놓지 않으면 예수님이 걸으신 산정(山頂)의 수고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5-203, 59.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