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야기
제 2권 사랑 원론편
제 4 장 사랑의 이상
소목차
1. 너와 나
2. 정을 중심한 인연의 세계
3. 사랑이상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4. 위하여 존재하는 세계
5. 사랑의 도리
6. 희생과 사랑과 은혜
7. 참된 사랑과 통일세계
8. 참사랑을 중심한 참된 가정과 우주
1. 너와 나
행복․평화․이상의 기원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면 행복은 어떠한 곳에서 찾아지느냐? 나와 너 사이에서 행복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행복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평화도 나와 너 사이에서 시작되고, 이상도 나와 너 사이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나와 너 사이에서 이상적인 환경이 완전히 설정되지 못하면 참된 이상․행복․평화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 자체를 생각해 볼 때, 마음이 나라면 몸은 너와 같은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기준을 갖춘 자리에서 완전히 즐기고,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기틀을 지니고 있다고 자랑하려면 마음과 몸 같은 너와 나의 이 상대적 관계가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평화와 행복을 지탱할 수 있는 주체성을 지녀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가진 내 개체 가운데 주체성을 설정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문제가 지극히 중요합니다. 만약 그러한 주체적인 동기를 몸 마음을 통해서 나에게서 설정하지 못하면 영원한 행복은 찾을 수 없습니다.
종적인 세계를 대해 나는 땅 위의 한 축이지만 상대적 세계로 보면, 내가 남자라면 아내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너와 나 사이의 주체적인 불변의 한 기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 부부는 행복한 부부다, 평화스러운 부부다, 이상적인 부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그 기틀이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 역사를 대신한 수많은 가정, 현시대를 대신한 수많은 가정, 미래를 대신한 수많은 가정 앞에 주체적인 하나의 통일의 기원이 되어 우리 둘이 행복하다. 우리 둘이 이상적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상은 변하지 않고 영원성을 가져야 합니다. 행복과 평화도 영원성을 지녀야 합니다. (86-96)
너와 나의 문제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남편 앞에 부인이 나라 하면 남편은 너고, 남편이 나라 하면 아내는 너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에서 태어났고, 너와 나의 관계에서 살고, 너와 나의 관계에서 죽습니다. 어떤 특정한 나라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그렇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좋은 것은 어디 가든지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어디 가든지 거기에 호응하지 않은 곳이 없다 하게 될 때 이는 이상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86-103)
이것을 생각해 볼 때에, 부부로서의 불변의 주체성을 어떻게 지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둘 사이가 행복의 기틀이 되지 못하는 한 그 행복은 오래 못 가서 왼쪽으로 굴러 떨어지든가 오른쪽으로 굴러 떨어지든가, 그렇지 않으면 탈락되든가 하는 운명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남녀가 부부를 이루어서 너와 나 사이에 불변의 통일을 갖춘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나된 자리에서 행복을 노래하게 될 때, 그 행복은 영원합니다. 또 이상적인 내용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둘이 변치 않는 주체적인 그 무엇을 갖게 될 때 영원한 이상이 설정됩니다. (86-96)
종적 기준과 일치되는 사람이 마음이 곧은 사람
평화(平和)는 수평(平)이 되어서 화(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평화는 혼자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것은 상하관계에서나 좌우관계에서나 전부가 화해서 기쁠 수 있고, 모든 것이 기울어지지 않고 원만해야 됩니다. 그래야 평화입니다. 또 평화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상(理想)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상은 뭐냐? 그것이 돌아야 합니다. 평면으로만 도는 것이 아니라 입체성을 띠고 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입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저 사람은 이상적인 인간이다 할 때, 이 이상적 인간은 미래에 대한 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즉 현실이란 평면적인 생활도 있지만 미래가 있어야 그 생활이 구형(球形)을 갖추게 됩니다. 이상은 평면으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 자체도 반드시 이상적인 창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평면적이고 종적인 인간과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고 봅니다.
그래서 마음은 종적 기준입니다. 마음이 곧다는 것은 수직선임을 말합니다. 그러니 종적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벌써 그 자체가 수직의 입장이라는 걸 어느누구든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수직이라 말하지 수평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곧다 할 때, 이 말은 무엇을 중심하고 하는 말이냐? 수평을 중심하고 하는 말입니다. 본래 곧다는 말을 성립시킬 수 있는 선위조건이 무엇이냐? 수평이라는 개념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이 수평에 90각도라는 내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곧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90도면 수직이 그어집니다.
그러면 수평은 뭐냐? 하나님은 천지를 지을 때 무엇부터 지었겠느냐? 수평선을 긋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엔 각도를 잡았을 것입니다. 수평 각도를 잡을 때는 사방을 반드시 생각해야 됩니다. 사방 일주는 360도가 그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평기준을 중심하고 반드시 각도를 잡는데, 0도가 있습니다. 그 0도 되는 점이 뭐냐? 그것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수직이 있을 수도 없고 각도가 있을 수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영점(零點)입니다.
이것은 또 뭐냐 하면 수직점입니다. 그 수직점은 어떤 점이냐? 이 점은 모든 것의 중심점입니다. 그래야 각도가 맞지, 360도의 중심점이 안 돼서는 360도가 전부 틀어져 나갑니다. 그러면서 고정입니다. 역사가 변천하고 사회환경이 변하더라도 이 각도의 계수(係數)에서 이것은 역사성과 환경성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직 하면 반드시 90도라는 관념 밑에서 말합니다.
양심이 곧다 하는 말은 수평을 기준으로 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 수평은 사회의 기준, 기조(基調)입니다. 우리의 선조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생활, 보편적인 생활은 수평을 그립니다. 그 사람이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무엇을 놓고 말하는 것이냐? 지금까지 사회의 제도라든가 법을 중심으로 해서 바로 수직의 입장에 있느냐를 놓고 말합니다. 수직의 입장에 있으면 옳다고 합니다.
사회적인 수평기준은 그 나라 국민에 따라서 각기 다릅니다. 수평을 중심하고 생활하는 방법이 다르지만, 그 사회제도가 수평이 된 거기에 수직적인 양심성(良心性)을 지닌 사람을 바르다고 합니다. (86-98)
사방성을 갖춘 존재가 이상적인 존재
하나님이 천지를 지을 때, 하나님이 수직의 입장이므로 수평을 먼저 그렸습니다. 그러면 수직에서 절대 필요한 것이 뭐냐? 수평과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수직 하면 벌써 수평을 내재적인 관념으로 인정하고 하는 말입니다. 또 수평 하게 되면 수평만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라 수직을 내재적인 관념으로 인정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수직적인 존재기 때문에 인간은 수평, 횡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종적인 사랑이고, 인간의 사랑은 횡적인 사랑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부부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수평적인 존재입니다. 눈도 수평입니다. 코도 수평입니다. 이것이 조금만 찌그러져도 기분 나쁩니다. 얼굴도 그렇습니다. 귀도 수평인 것이 좋습니다. 완전 수평은 짧아도 좋지만, 완전 수직은 길수록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짧은 것이나 긴 것이나 같은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니 형(型)에 있어서는 별것 없습니다. 크다고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직관계의 횡선(橫線) 종선(縱線)은 크나 작으나 동등한 가치를 지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격의 평등 가치론도 설정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사람은 마음과 몸이 하나돼야 합니다. 마음이 나라면 몸은 너입니다. 이것은 주체와 대상 관계를 말합니다. 완전히 수평이 된 사람은, 완전히 수직이 된 양심적인 사람은 주고받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주고받아서 원형(圓形)을 그려야 합니다. 이것이 만사(萬事)에 치우치지 않게끔 멋지게 돌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만 돌아서는 안 됩니다. 왼쪽으로 돌아가도 멋지고, 바른쪽으로 돌아가도 멋져야 됩니다. 이럴 수 있으면 이상적입니다. 이상적이라는 것은 한쪽 눈으로 봐도 아 좋다!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은 상태입니다.
이상적이 되려면 사방성(四方性)을 갖추어야 합니다. 일방통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방통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갔다 돌아오지 못하지만, 로터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로터리를 좋아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상적인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이상적인 남자, 이상적인 여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사람의 얼굴 가운데 제일 이상적인 것이 뭐냐? 그것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얼굴 가운데 움직이는 것이 뭐냐? 눈입니다. 그 다음에 입입니다. 그래서 눈이 잘생기고 혀가 잘 도는 사람을 우리는 한몫 한다고 합니다. 벌써 눈이 잘 도는 사람은 재치가 있습니다. 또 혀가 잘 도는 사람은 말을 잘합니다. (86-100)
모든 만상이 둥글게 되어 있는 이유
우리 눈은 둥글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눈을 깜박깜박 하는 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눈이 사각형으로 돼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눈이 둥글게 되어 있어서 무엇을 볼 때 피곤하지 않습니다. 자극이 없어서 피곤하지 않습니다. 둥근 것은 자극이 없습니다. 둥근 것을 만지면 촉감은 있지만 거기에 또 다른 자극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각(角)이 있으면 소모시키는 자극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만상(萬象)은 원형운동을 합니다. 운동을 하는데 자극이 있으면 걸립니다. 둘이 주고받는 데 있어서 뿔이 나 있고 침(針)이 나 있으면 아이구, 좋다! 하며 쓸어줄 때 찔립니다. 사람의 얼굴이 왜 둥글게 생겼느냐? 쓸어줘도 기분 나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궁둥이가 왜 둥글게 생겼느냐? 마찬가지입니다. 쓸어줘도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요런 모양이 되고 싶다 할 때, 그것이 어떤 모양이라는 느낌이 드느냐 하면, 둥근 모양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달도 둥그렇습니다. 그래서 초생달보다는 보름달을 좋아합니다. 초생달은 비정(非情)의 달입니다. 반면에 둥그런 보름달은, 이런 말은 없지만 희정(喜情)의 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하, 좋다! 할 때 입을 어떻게 벌리느냐? 하 할 때 입을 크고 둥그렇게 벌립니다. 이렇듯 좋은 것은 둥그렇습니다. 기쁨은 둥근 데서 나옵니다. 발성도 그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을 벌리고 하하하 하지, 입을 오므리고 후후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원형을 닮아서 운동하게 마련이고, 원형을 닮지 않은 것은 우리의 이상적인 존재성에 가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이 원형은 너와 나의 조화의 기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눈도 그런 이상적 형태를 닮으려니 둥그렇게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입도 모양은 일자형이지만 둥그렇게 돼 있습니다. 이 이는 뾰족합니다. 이가 둥글면 음식을 씹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둥근 모양을 닮았습니다. 어느누구든지 이의 가장자리가 면도칼로 싹 자른 듯이 일정하지 않고 제 나름대로 둥글게 돼 있습니다.
이 코도 둥그렇게 돼 있습니다. 날이 섰지만 둥그렇게 돼 있습니다. 코가 무등산처럼 두둑하게 생긴 그런 코는 복코입니다. 그렇다고 코가 뾰족한 사람은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둥글수록 좋습니다. 얼굴도 납작한 것보다 둥글수록 좋습니다. 얼굴도 반듯한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원형이 아닌 얼굴은 한번 보면 다음에는 싫어집니다. 그렇지만 원형은 보면 볼수록 보고 싶고 친근감이 갑니다.
왜 그러냐? 일광(日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지는데, 달라짐에 따라서 그것이 언제나 미를 갖춥니다. 이것이 납작하면 저녁이나 아침이나 마찬가지지만, 원형이기 때문에 각도에 따라서 묘미가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은 둥글게 생겼는데, 그것은 이상적인 형을 갖추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으로써 보다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상적인 형태, 즉 원형을 많이 갖추고 있습니다. 콧구멍도 둥그렇고, 귓구멍도 둥그렇고, 목구멍도 둥그렇습니다. 목구멍은 뭘 먹지 않을 때에는 붙어 있어서 납작하지만 원형을 닮았습니다. 내장까지 전부 원형을 닮았습니다. 손가락도 길기는 하지만 원형을 닮았습니다. 왜 그렇게 생겼느냐? 천지의 이치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의 이상을 그리는 이런 입장에서만 모든 작용이나 행복, 희망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형을 닮아 있습니다. 그것이 천지창조의 이치입니다. (86-104)
사랑은 성숙기에 상대를 통해 나온다
그러면 하나님은 둥근 분일 것이냐, 평평한 분일 것이냐? 하나님은 둥근 인격자, 원만한 인격자입니다. 둥글기는 하지만 공기를 안 넣은 공같이 납작해서는 안 됩니다. 공에 공기를 팽팽하게 불어넣으면 원만(圓滿)하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인 우리는 원만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언제나 보충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면에서나 내형적인 면에서나 원만합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아닙니다. 그 한 가지가 뭐냐? 사랑입니다. 사랑에 있어서는 하나님도 원만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사랑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살, 열 살 때까지도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열 다섯 살, 열 여섯 살, 사춘기가 되어서야 사랑이라는 게 나옵니다. 그 사랑은 혼자 있을 때는 나오지 않습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나옵니다.
사람에게 사랑이 있지만 상대가 있어야 사랑이 벌떡거리고 나옵니다. 없는 게 아니라 있지만 혼자서는 작용을 못 합니다. 상대적 요인이 안 돼 있기 때문에 작용을 안 합니다. 우주의 모든 만상은 절대 손해나는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남자라는 존재 앞에는 보기 싫은 여자라도 있어야 합니다. 남자 앞에 보기 싫은 여자라도 있어야 사랑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랑은 성숙기에 나옵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대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못 합니다. 혼자서는 못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때와 사람이 태어난 때는 다릅니다. (86-106)
너와 나가 이상적인 관계를 이루려면
만일 하나님이 나라 하면 너는 인간입니다. 어떠한 인간이냐? 타락하지 않은 인간입니다. 나와 같은 인간인데 타락하지 않은 인간입니다. 모양은 마찬가지입니다. 웃는 모양도 마찬가지인데 내용면에서 타락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그저 땅만 바라보고 삽니다. 뭘 찾을까 하고 45도 이하만 바라보고 삽니다. 그렇지만 타락하지 않은 사람은 45도 이상 올려다보고 삽니다. 그렇다고 45도 이상만 보겠다고 눈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위 45도와 아래 45도를 수평으로 맞춰 너와 나의 관계가 하나되어서 바라봅니다. 인격자는 그렇게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앞으로 하늘만 보아서도 안 되고 땅만 보아서도 안 됩니다. 타락한 세상 사람들은 공짜 돈이 어디에 떨어져 있지나 않나, 금덩이가 있지나 않나 하며 땅만 보고 살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반대로 하늘만 바라보고 삽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온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구름 타고 와서는 안 됩니다. 하늘과 땅이 조화된 수평선상의 길로 와야 합니다. 나를 중심하고 보면, 예수님이나 오시는 주님은 뭐냐? 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중심하고 보면 인간은 너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에서 종적으로 만나야 되느냐, 수평으로 만나야 되느냐? 어떻게 만나야 되느냐? 수평으로 만나야 됩니다. 역전이라든가 부두에 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수평으로 만납니다. 종평(縱平)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전부 다 수평으로 만나게 돼 있습니다.
이상(理想)은 수평선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수평선상 외에는 이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옥 하면 수평 밑이고, 천국은 수평 위입니다. 수평선상에서 기반을 닦아야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닦지 못하면 올라갈 수 없습니다.
너와 나라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나를 중심하고 친구할 때는 무슨 사이냐? 너와 나 사이입니다. 언제는 좋다가 언제는 나쁘면 너와 나는 좋은 말이 아니라 나쁜 말입니다. 좋다는 것이 일시적인 형편에 따라서 변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친구와 너와 나라는 관계가 돼 있다고 할 때, 그 친구가 아침에는 좋았는데 저녁에 나쁠 수 있느냐? 나쁠 수 없습니다. 절대적입니다. 그러면 이상적입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너와 나의 관계가 영원히 수평을 이루든가 수직선상에 놓이든가 언제나 맞아떨어질 수 있는 입장에 있게 될 때는, 이상이 이루어지고 이상의 판도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남자 여자가 부부를 이루었다면 너와 나의 상응관계가 영원해야 합니다. 처음에 좋았다면 끝에도 좋아야 합니다. 시종일관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이 나쁜 것입니다. (86-108)
완전한 주체 앞에는 완전한 대상이 생긴다
그러면 돈을 쓰는데 나를 위해서 쓰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너를 위해서 쓰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너를 위해서, 즉 남을 위해서 쓰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남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도 통일교회를 위해 고생한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욕하는 사람을 위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쓰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쓴다, 나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차원에서 쓴다 생각하고 써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종교는 어때야 하느냐? 통일교회는 종교를 통일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와 하나되는 것은 물론이고 불교와도 하나돼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되는 운동을 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왜 망하지 않느냐? 남을 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종단은 아무리 핍박을 받더라도 망하지 않고 발전합니다.
천운(天運)도 이상을 바라고 이상의 세계를 찾아 나가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또 이상을 주관하는 주체자 하나님도 그러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너와 나의 행복을 찾아서 너와 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가는 사람은 반드시 상대가 설정되게 마련입니다. 천지 이치가 그렇게 돼 있습니다. 완전한 플러스만 되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천지 이치입니다.
완전한 것은 없어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원리가 완전한 원리라면, 그것은 과학세계에 영원히 존속합니다. 그걸 지지하는 상대자가 반드시 나옵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다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자동적으로 생겨나게 돼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받아주지 않더라도 통일교회가 완전한 플러스가 될 때는, 덮여 있는 나뭇잎과 같은 그런 시시한 것들은 다 물러가고 진짜가 거기에서 소생하여 통일교회와 합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통일교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조그마한 마이너스에서부터 자꾸 커 갑니다. 이리하여 이들이 하나되어 하나의 원형을 그리고, 이게 다시 커져서 더 큰 원형을 그려서 구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체가 나쁠 때는 상대 자체도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완전한 플러스라면 이 세계에 완전한 마이너스적 인간이 나타나야 됩니다. 그게 우주의 원칙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적인 세계, 이상적인 세계, 창조이상적인 세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작용을 하기 때문에, 본래 천지를 그런 작용을 중심하고 지었기 때문에 이 원칙은 영원 불변하므로 완전한 플러스가 있을 때에는 완전한 마이너스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만약 완전한 플러스가 있는데도 상대 되는 마이너스를 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 주위의 모든 존재들이 협력해서 옹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주가 파괴돼 버리기 때문에 그 마이너스를 옹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종교는 맞고 핍박받으면서도 발전합니다. 종교는 왜 핍박받으며 발전하느냐? 종교가 완전한 플러스인 하나님의 섭리의 뜻 가운데 섰으니 완전한 마이너스가 되어 새로운 플러스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치면 칠수록 새로운 마이너스가 나와서 이 플러스 되는 종교를 보호하고 구하는 역사가 벌어집니다.
이 원칙은 우리가 사는 동네나 국가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괜히 까닭없이 선한 사람을 쳤다가는 골탕 먹습니다. 통일교회가 선한 길을 가는데 이런 통일교회를 치면 골탕 먹게 마련입니다. 결국 친 사람의 복을 그냥 그대로 인수하게 됩니다. (86-111)
상대기준이 일치돼야 행복해진다
나라가 나라 할 때 세계는 너입니다. 그런데 너의 기점은 한 나라입니다. 상대적 기원은 한 점입니다. 한 점에서 시작합니다.
이 관계는 우주와 연결됩니다. 땅, 온 지구성이 내 것이다 할 때, 네 것은 무엇이냐? 지구성이 우리 집이다 할 때, 네 집은 누구 집이냐? 네 집 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연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 관계가 반드시 성립돼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말했지만, 상대성원리에 의하면 상대적 여건이 없고서는 이상이 있을 수 없고, 진보나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화론에서는 어떻게 진화했다고 보느냐? 아메바에서 진화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너가 없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나만 있으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너와 내가 좋을 수 있는 내용을 중심하고 발전합니다. 너와 나 사이의 상관관계에서 이상적인 주고받음에 의해 보다 차원 높은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너와 내가 좋을 수 있는 이상은 어디에서 오느냐? 이것은 보다 차원 높은 가치를 발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가치는 어디에서 오느냐? 보다 낮은 차원의 너와 나 사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데서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이것으로 다 해결됩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느냐? 나를 위해서 일하느냐, 너를 위해서 일하느냐? 너를 위해서 일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좋으냐, 남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좋으냐? 남을 위해서 일하는 게 좋습니다. 그 기준은 통일교회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우주의 원칙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기준이 조성돼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고 저쪽에서 상대기준을 이루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돼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우리의 조상, 그 원리원칙의 근본이, 그 원인이, 동기의 존재가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 입장의 사람은 동기의 내용을 떠나서는 결과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인생살이는 수십억 년, 수십억 대를 가더라도 그 인생살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살이는 본래 원인에서부터 가게 되어 있는 그 길을 가야 됩니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나옵니다. 그 원인에 일치하게 될 때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86-114)
상대를 위해 투입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
하나님이 상대존재를 창조했는데, 창조할 때 본래 하나님이 힘을 대량 투입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좋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좋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좋게 하기 위해서 투입해서 만들었습니다. 먼저 투입해서 이상상대 창조라는 표제 하에 모든 천지만물을 지어 나갔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상 실현의 과정을 거쳐 나오고 있습니다.
이상상대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상적으로 투입해야 합니다. 이상적으로 투입하지 않고는 이상적인 상대가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왜 남을 위해서 이렇게 투입하느냐? 남을 위해주는 것은 이상 존재를 재창조하기 위해서, 이상 존재를 재출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내가 남을 위해서 투입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무엇이 찾아지느냐? 나만이 아니라 너라는 상대가 찾아집니다. 즉 내가 남을 위해서 1백 퍼센트 투입하면 투입할수록 나에게 이상상대가 형성됩니다. 이상상대가 형성되어야만 영원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자기의 인연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다 선하고, 보다 이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를 왜 믿느냐? 내가 좋기 위해서 믿느냐, 통일교회를 좋게 하기 위해서 믿느냐? 또 통일교회는 무엇 때문에 나와서 이러느냐? 통일교인들을 좋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통일교인들은 통일교회를 위해서, 통일교회는 통일교인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렇게 되면 돌아갑니다. 돌아가면 이상이 벌어집니다. 운동할 때도 이렇게 직선으로 가다가 홱 도는 것이 쉬우냐, 원형으로 서서히 도는 것이 쉬우냐? 원형으로 돌기가 쉽습니다.
하나님도 지금 일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일하느냐?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일하느냐? 이상 실현을 위해서 일합니다. 이상 실현은 1백 퍼센트 참을 투입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실된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서 변천하는 역사지만 변하지 않는 진실성을 투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이상적 상대가 어느 땐가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또 통일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상대를 이루기 위해서, 이상상대권을 상속하기 위해서 하나님같이 지치지 않고 변하지 않고 계속 투입하면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이상을 그려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불행이 뭐냐? 주려야 줄 수 없고, 받으려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줄 수 있고, 밤이나 낮이나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86-116)
보다 큰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사랑이 이상적인 사랑
그러면 이상세계는 어떠한 세계냐? 그 세계는 너와 나 사이에서 세계 만민을 대해 너라는 관념을 가지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동서남북 사방 360도를 중심으로 내가 핵점(核点), 중심이라면 나를 중심한 원형은 얼마든지 좋다 하는 세계입니다. 여기에서는 방향에 따라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동쪽과 서쪽이 차이가 있으면 이상적이 아닙니다. 또 남쪽과 차이가 있어도 안 됩니다. 어디나 다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내 친척을 사랑하는 것과 내 민족을 사랑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크냐?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더 큽니다. 또 내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세계를 사랑하는 것 중에 어떤 게 더 크냐?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더 큽니다. 이건 클수록 좋습니다. 클수록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좋습니다. 돈으로 말하면 클수록 점점 돈이 많아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세계적 인격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처녀들은 세계적 인격자한테 시집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범위가 크면 클수록 좋기 때문에 세계적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결혼하는 데도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사람과 결혼하는 것보다 외국인과 결혼해야 합니다. 그리고 외국 사람 가운데서도 흑인과 해야 됩니다. 꼭대기만 좋아하는 것은 이상적이 아닙니다. 아래를 더 좋아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세계의 흑인 중에서도 불구자를 맞아 나는 이상적으로 살 수 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통일교회 아가씨들은 대한민국 사람, 우리 나라 대통령이 될 수 있는 후보자와 결혼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농부나 막노동을 하는 사람과 결혼하더라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 하는 여자라면, 어떤 사람한테 시집가더라도 남자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차이에 따라 더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 일생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크면 클수록 좋습니다. (86-118)
2. 정을 중심한 인연의 세계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산다
종교는 마루 되는 가르침입니다. 제일 마루가 되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종교입니다. 종교의 종은 마루 종(宗) 자고, 교는 가르칠 교(敎) 자입니다. 이 종(宗)은 제일 마루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집으로 말하면 대들보입니다. 집을 구성하는 데에 대들보가 없으면 안 됩니다. 대들보가 없으면 공간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다 무너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은 반드시 대들보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마루, 맨 꼭대기 되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종교입니다.
그러면 종교에서 가르치는 마루 되는 것은 뭐냐? 종교는 사람에 대한 것을 가르쳐주는 것을 위주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뜻을 이루려고, 사람이 사는 생활적인 관계를 이루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신, 가장 높고 가장 귀한 하나님에 대한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교회,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나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세계에 대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가야 하느냐? 물론 인간 자체만으로 갈 수 있는 일상 생활목표도 있지만, 제일의 목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남자 여자 둘이 만나는데, 어떻게 만나야 하느냐? 하나님을 중심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만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그냥 그대로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 여자가 합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그냥 그대로 합하라 하면 안 됩니다.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도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엇을 중심으로 하고 도느냐? 하나님의 지식이나 힘을 중심하고 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하고 돕니다. 하나님 자신도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돕니다. 우리에게 몸과 마음이 있듯이 하나님도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몸을 중심으로 중앙점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중심이 돼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상대적 관계에 있는데 그것이 하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 중심의 핵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머무를 수 있는, 하나님이 떠날 수 없는 그 하나의 중심 핵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고착돼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동할 수 없습니다. 이동하게 되면 중앙점을 잃어버립니다. 탈선하는 동시에 하나님 자체가 고착할 수 있는 자리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 자리를 상실하게 되면 이상적인 안착점, 혹은 안식점은 우주 어디에 가더라도 없습니다. 그 점은 둘이 아니라 단 하나입니다. (141-12)
하나되고 확산되는 것이 인간생활의 공식
그러면 남자 여자가 비로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어디냐? 동쪽의 끝도 아니요, 서쪽의 끝도 아니요, 남쪽의 끝도 아닙니다. 그곳은 남자 여자가 합하는 하나의 중앙점인데, 중앙점은 남자의 자리도 아니요, 여자의 자리도 아닙니다. 서로가 자리를 엇바꿔 가면서 너와 내가 하나됨을 자랑할 수 있고, 하나됨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을 조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어 하나님을 중심으로 남자 여자가 가정의 기반을 닦았다면 그 가정은 영원히 행복한 가정입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사랑의 큰 말뚝에 닻줄을 달아 맨 배와 같습니다. 사랑의 큰 말뚝에 매놓았기 때문에 아무리 떠돌더라도 그 배는 그 말뚝을 중심으로 돌게 마련입니다. 그 자리는 행복한 자리입니다. 이것은 누가 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영웅적인 남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걸 파괴할 수 없습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돌면서 삽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하나된 자리에서 또 확대해 나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중심을 찾아 하나님과 화합해 나오게 될 때 비로소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못하고서는 완전한 인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을 그리워하고 인격을 그리워할 수 있는 남성이면 남성, 여성이면 여성으로서 독자적인 사랑을 갖춘 하나님을 대신한 남성, 혹은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인격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차원 높여 가면서 살아 가는 것이 인간의 생활입니다. 그러면서 가정을 중심으로 사회를 느껴야 되고, 사회를 느끼고 체험하면서 국가를 체험하고,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를 체험하고, 세계를 체험하면서 영계까지 확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대로의 자기 중심한 입장에서가 아니라 반드시 한 중심을 중심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점을 중심으로 원형이 확대되는 거와 같이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로 가야 합니다. 또 아무리 세계까지 갔다 하더라도 다시 어디를 찾아가야 되느냐? 고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환고향해야 됩니다. 자기 고향을 떠난 사람은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세계로 가서 돌아 들어올 때는, 바깥쪽으로 갔으면 돌아올 때는 안쪽으로 돌아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게 구형의 세계를 향해서 내 자신이 횡적으로 반경을 그려서 또다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중심으로 한 우리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개인을 중심으로 한 생활의 모델, 즉 공식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 하나만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가정도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인격과 화합한 부모와 자녀를 중심으로 하나되어 확산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확산해야 하느냐? 사랑은 컸다 작았다 하는 그런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호흡할 때 내쉬는 것과 들이마시는 것이 차이가 있다면 불원한 장래에 이 존재세계에서 사라집니다. 내쉬는 숨과 들이마시는 숨이 균형이 맞아야 됩니다. 그 박자에 의해 조화를 이루는 선상에서 우리의 생명이 유지됩니다.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되어야 하고, 하나되어서는 반드시 확산해야 됩니다. 확산해 가면 갈수록 어떻게 되느냐? 소모가 벌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리워집니다.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이때 어디로 돌아가야 하느냐? 중심점을 통해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돌아가게 되면 또다시 그 중심의 사랑과 중심의 인격에 접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거기에서 또 하나되어 다른 의미에서, 더 큰 의미에서 아! 지금까지 경험한 것은 이러하니 더 큰 곳을 향해서 가야 되겠다 이렇게 되어 확산돼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리 세계무대에 나가 성공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하더라도 성공하고 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141-14)
정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
고향이 별거 아닙니다. 고향에 가도 별거 없습니다. 고향의 생활환경을 보면 자기가 외지에 나가서 성공한 그 환경보다 못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무엇이 있느냐? 정적이었던 자신의 과거가 살아 있습니다. 정을 중심으로 살던 옛날의 그곳을 잊을 수 없습니다.
타향살이와 고향살이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정서적인 내용입니다. 정서적인 내용이 다릅니다. 타향에서 아무리 잘살더라도 고향의 깊은 사랑의 내적인 인연을 중심으로 관계가 맺어지면 다릅니다. 환경적인 여건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 가면 벌써 사람이 다릅니다. 또 여기 한국과는 환경이 다릅니다. 그리고 모든 생활환경이 반대입니다. 한국에서는 오라고 할 때는 손등을 위로 해서 손짓을 하는데 미국에서는 손바닥을 위로 해서 손짓 합니다. 전부가 반대입니다. 자는 것도 동양 사람은 반듯이 누워 자는데 그 사람들은 대부분 엎드려 잡니다. 많은 부분이 반대입니다.
왜 그렇게 반대로 되어 있느냐? 그래야 모든 것이 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멀리 돌아서 합할 수 있는 상대적 위치를 취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돌아가서 다시 만나야 되겠기에 생활문화가 다릅니다. 동서양의 출발 기준이 다르고, 생활풍습이 다르고, 문화배경이 다르지만 심정을 중심으로 한 역사과정은 반드시 돌아가서 합쳐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깊은 심정적 기준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가면 갈수록 어디로 가고 싶으냐? 중앙선을 넘어 점점점 세상 끝에 가면 갈수록 세상 끝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난 돌아가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어디에 가서 죽고 싶어하느냐 하면, 고향에 가서 죽고 싶어합니다. 외지에 나와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고향에서 잘먹고 잘살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잊을 수 없는 정서적인 내용이 거기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옛날 자기가 자랄 때 아버지 어머니에게 사랑받던 흔적이 남아 있고, 또 옛날 남편 또는 아내를 만났던 그런 인연이 있습니다. 그때가 처음이기 때문에 그 시절의 사랑을 중심으로 엮어진 자연환경을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 것은 귀합니다.
선생님이 잊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덟 살 무렵에 외가에 갔을 때, 외할머니가 삶아주던 고구마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구마는 본래 일본에서 들어온 것인데, 넝쿨 밑 땅속에 열매가 맺힙니다. 외가집에 가니까 외할머니가 아이쿠, 우리 손주 왔구나! 하면서 고구마를 캐다가 삶아주는데 참 맛있었습니다. 둘이 먹다가 어떻고 어떻다 하는 말도 있는데 그만큼 맛있었습니다. 한 소쿠리 삶아주던 것을 먹던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처음 먹어 보는 것이었으므로 껍질도 벗기지 않고 그냥 먹기에 바빴습니다. 지금도 어디에 가든지 색다른 걸 먹게 될 때는 그 고구마 먹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첫맛을 들인 것, 그 첫것이 귀합니다.
사람이 첫정을 느낄 때가 언제냐? 어머니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자랄 때의 여러 가지 사연을 첫정으로 느낍니다. 모든 것이 생생히 살아납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나느냐? 정을 중심으로 살아납니다. 이게 귀합니다. 지식을 중심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적인 것을 강하게 느낄 때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서적인 관계에서 맺어진 사건이나 인연은 잊을 수 없습니다.
고향에 가면 옛날의 정서적인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은 늙었지만 옛날에는 이랬구만. 철이 없을 때는 이렇게 지냈고, 결혼을 해서 아기 엄마가 되었고 이제는 할머니가 됐구만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그 모든 것이 그리워집니다. 고향에 돌아와 손자를 보면 그 손자가 자기를 대신하는 것같이, 즉 과거에 당신이 이랬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보면, 혹은 둘이 좋아하는 부부를 보면 옛날에 우리가 좋아 지내던 것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보여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옛날의 모든 것을 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맞춰질 때는 주체적인, 정서적인 배경이 딱 되어 있습니다. 환경을 정서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이런 인연이 나를 중심으로 가정 전체, 마을 전체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고향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합니다. 고향을 멀리 떠난 사람이 성공하여 금의환향해 봐야 거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10년, 20년, 30년이 지나 나이가 오십이 넘고 육십이 넘어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와 봐야 어머니 아버지 다 떠났고, 형님 누나도 다 떠나 아무도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금의환향해서 그 모든 것을 고향 땅에 심어 놓고 싶어합니다.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서 복잡하게 살아 왔고, 뭐 어떻고 어떻고 한 사연은 많지만 그 사연은 전부 흘러갑니다.
조국이 좋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선생님이 조국을 찾아오면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어디로 가고 싶으냐? 조국이지만 김포공항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중심지 서울을 찾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서울을 지나 평안북도 정주의 산과 바다가 있는 내 고향 집, 그곳을 찾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인간이 그러니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141-17)
정서적인 느낌을 어디에서 느낄 수 있느냐
하나님은 정서적인 그 느낌을 어디에서 느낄 수 있느냐? 우리가 혼자 있을 때 정서적인 것을 느낍니까? 혼자서는 못 느낍니다. 새라도 보고, 혹은 꽃이라도 봐야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 꽃을 보고 벌이나 나비가 날아와서 꽃 속에 있는 꿀을 빨아먹는 것을 볼 때 정서가 일어납니다. 꽃만 봐서는 재미가 없습니다. 상대적인 무엇이 있어서 작동이 벌어져야 비로소 정서가 유발됩니다. 하나님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정서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상대와 관계를 맺어야 정서가 발동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거룩한 창조주고 우리 인간은 속된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이 관계맺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데, 원숭이와 사람이 틀린 것이 40여 가지나 됩니다. 그런데도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너희 할아버지는 원숭이같이 생겼다 하면 듣기 좋습니까? 저기 저 녀석 생기기는 잘생겼는데, 빨리 뛰는 게 원숭이 같다 하면 기분 나빠합니다. 선생님이 원숭이 띠지만, 원숭이를 닮았다고 하면 기분 좋지 않습니다.
싫든 좋든 저 녀석은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닮았어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닮은 것이 자연 이치입니다. 다른 사람을 닮았다고 하면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닮은 소성을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으면 그 기준에 비례하여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141-20)
남자 여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되어야
남자 여자가 하나된다 할 때, 무엇으로 하나되느냐? 상대적 관계에서 비례적인 기준에 의해서 정서의 양이 결정됩니다. 하나님도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남자 여자가 하나된다 할 때, 그 하나되는 것은 남자 여자가 둘이 맞서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의 모체를 중심으로, 횡적인 주체의 핵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안개 낀 날 가로등을 보면 둥그렇게 달무리 모양으로 보입니다. 왜 달무리 모양으로 둥그렇게 보이느냐? 빛은 전부 직선으로 같아야 할 텐데 왜 그렇게 되느냐? 어떤 매개체를 중심으로 얼마만큼 가게 되면 반드시 각도가 달라집니다. 수증기에 빛을 비추면 반사되는데, 반사될 때 각도가 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무리같이 보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뭘 말하느냐? 그 빛 자체도 반드시 구형의 형태를 갖춰서 작용하려고 합니다. 상대가 있으면 반드시 방향을 전개시키려고 합니다. 전개시키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이상적인 곳을 향해서 들어갑니다. 그러한 작용을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남자 여자 둘이 만나서 손바닥을 대고 좋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 나 좋아? 해서 좋다고 하면 손바닥을 대고 맞추어야 할 텐데 그러지 않습니다. 뭘 가지고 맞추느냐? 손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상대편 뒤로 가려고 하지 앞으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자 여자가 똑같으면 큰일납니다. 여자가 작으니까 손을 대면 벌써 돌아갑니다. 그러면 몸이 기울어집니다. 움직일 때에는 손이 아래로 가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손을 대면 몸이 벌써 한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동작하기에 편리한 방향을 결정하고 들어갑니다.
여자는 손을 올려서 잡게 되어 있지 내려서 잡게 안 되어 있습니다. 남자 여자가 껴안을 때, 여자는 손이 수평선 이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반면에 남자는 절대 수평선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돌겠다는 것입니다. 춤출 때 가만히 서서 춤추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하나되었다, 행복하다 하는 것은 가치 있는 무엇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 가치 있는 것이 뭐냐? 우주에서 제일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으로 둘이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어 돌 때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무질서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통일원리에 나오는 개성진리체라는 말은 놀라운 말입니다. 하나님의 개성진리체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몸 마음이 하나되면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된 그 자리를 중심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게 돼 있지, 하나님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 안 돼 가지고는 인간과 하나되게끔 안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야 남편이 필요하고 아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되어야 색시가 필요하고 신랑이 필요하지, 자기 몸 마음이 하나 안 돼 있으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다른 데 두고 다니면 상대가 싫어합니다.
사람은 두 마음이 있습니다. 그 두 마음이 뭐냐 하면 하나는 몸의 마음, 하나는 마음의 마음입니다. 세 마음을 가졌다는 말은 안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 마음 가진 남자야 할 수는 있습니다. 한 마음 가진 남자면 위대한 남자입니다. 그러나 두 마음 가진 남자야 할 때는 저것 저것! 그럽니다. 그건 무엇을 말하느냐? 두 마음을 가졌다는 말은 하나가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된 자리를 통해서 갑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 이상이 있지 둘로 갈라진 자리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 사랑의 완성적 인격의 주체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 주체를 중심으로 사랑의 인격으로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도 그걸 닮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그 법도에서 수직적 하나님과 90각도의 평형으로 남자 여자가 합하여 서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141-21)
남자와 여자는 상대적으로 되어 있다
이 방대한 우주도 반드시 주고받는 작용을 합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고, 그 외에 8개의 행성이 태양을 돌면서 태양계를 형성하여 하나의 구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사랑하려고 했느냐? 하나님과 제일 닮은 사람을 사랑하려고 했습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말하는데, 남자는 내려다보려고 하고 여자는 올려다보려고 합니다. 남자는 여자의 몸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인격을 내려다봅니다.
그리고 여자는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 두 가지를 갖고 있습니다. 서로 상대적 관계입니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여성 호르몬과 남성 호르몬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적인 무엇을 바랍니다. 또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자기 마음에 맞아야 상대가 되지, 맞지 않으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합하지 않고 서로 반발합니다.
그러니 부부끼리 사는 것을 가만히 보면, 큰 남자가 큰 여자를 데리고 사는 법이 없습니다. 서양의 어디를 가 봐도 그렇습니다. 반비례적입니다. 가끔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보면 자연법도에 따라 큰 남자는 작은 여자와 삽니다. 그렇게 상대적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뚱뚱한 남자는 홀쭉한 여자가 필요합니다. 나중에 며느리를 얻든가 사위를 얻을 때, 남자가 뚱뚱한데 여자가 더 뚱뚱할 때는 그건 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싸움을 하더라도 두 뚱뚱이가 싸우게 되면 박자가 안 맞습니다. 하나님도 짓궂은 데가 있어서 싸우는 모습도 보고 싶을 것입니다. 두 뚱뚱이가 붙들고 뒹굴고 하는 그 꼴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동정할 수 없습니다. 실컷 싸워라, 또 싸워라. 이놈들, 누가 지나 보자 이럴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아야 됩니다. 둘이 싸우게 될 때, 남자가 뚱뚱하고 여자는 홀쭉하니 여자가 밑에 깔리게 된다면 하나님이 이걸 보고 이놈의 자식, 왜 그래? 하고 여자를 동정할 것입니다. 이렇게 동정받을 수 있는 우리라야 정서적인 유발점이 있습니다. 뚱뚱이끼리 싸우게 되면 이 쌍것들, 잘들 해봐라 그럴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에도 돌을 때리는 소리와 같은 파괴음이 필요합니다. 기분 나쁜 소리지만 그런 파괴음이 음악에 필요합니다. 돌끼리 마주쳐서 나오는 제일 듣기 싫은 소리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깊은 골짜기, 얼마나 깊은지 조그만 돌 하나밖에 들어갈 수 없는 그런 골짜기도 필요합니다. 깊고 높은 산에 참새도 앉을 수 없는 뾰족한 돌 봉우리도 필요합니다. 그걸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할 때, 조화의 폭이 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괴음이라고 다 나쁜 게 아닙니다. 그런 상대적 관계의 자리에서는 참 멋집니다.
그래서 좋다 나쁘다 하는 말은 무엇을 중심으로 하는 말이냐? 하나의 핵이라든가 중앙점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 기분 좋은 사람한테 무엇 때문에 기분 좋아? 하면 대답을 못 합니다. 막연합니다. 좋기는 좋은데… 하고 맙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정서적입니다. (141-23)
조화를 이루려면 상대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행복한 하나님이냐? 사랑의 정서를 느낄 수 없다면 아무리 전지전능하고 위대한 하나님일지라도 고독한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고양이라도 품고 내가 고양이를 잘 만들었구나. 내가 귀를 이렇게 만들 때 기분이 참 좋았지. 이 발톱도 쥐를 잡아먹으라고 이렇게 만들었지. 허허허, 기분 좋다! 하면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 좋다는 말은 정서적인 동기가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정서적인 동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상대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의 상대는 우리 인간밖에 없습니다.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 자신이 또 다른 하나님을 만들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니 똑같은 또 하나의 하나님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똑같은 하나님이 밥을 먹을 때 같이 밥 먹고, 손질하게 되면 같이 손질하고, 또 일어서게 되면 같이 일어서고,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억천만년 똑같이 행동하게 되면 살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하루도 안 가서 눈이 뒤집어질 것입니다. 또 말을 하게 되면 며칠이나 할 것 같습니까? 며칠 안 가서 죽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상대적이어야 합니다. 높다고 언제나 높을 수 없습니다. 높기만 하면 그건 없어집니다. 내려와야만 소유할 수 있는 면적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선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것보다는 꼬불꼬불하게라도 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남자 여자가 만났다 하더라도 남자 모두, 여자 모두는 본래 사랑의 뿌리인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태어났습니다. 그 뿌리에 인연을 맺어야 할 존재입니다. 뿌리가 없는 풀을 부평초라고 하는데, 뿌리가 없는 것은 언제나 안심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불안합니다. 부평초라 하더라도 뿌리가 있으면 아무리 태풍이 불고 물결이 인다 하더라도 갈 수 있는 데만큼 가다가는 되돌아옵니다. 그걸 범위로 해서 빙빙빙 돕니다. 그것이 한 곳으로만 가게 되면 뿌리가 한 곳으로 치우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 때는 동풍도 불고, 서풍, 남풍, 북풍도 부는데 왜 이렇게 불어야 되느냐? 사람들은 바람이 제멋대로 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동풍이 불었으면 서풍이 불어야 곧바로 섭니다. 동풍이 불 때 며칠만 계속 불게 되면 뿌리가 동풍에 넘어지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바람을 받는 쪽 뿌리가 길어야 됩니다. 이걸 그냥 두면 이 풀이 서쪽으로 기울어져서 자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풍이 불어야 합니다. 서풍이 불면 동풍과 서풍의 조화 속에 뿌리가 곧게 됩니다. 또 남풍이 불면 북풍이 불어야 합니다. 전부 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의 중심점을 세우기 위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고기압이 되었으면 저기압으로 되지 말라고 해도 됩니다. 여자가 다 성숙했으면 남자를 찾아가지 말라고 해도 눈을 감고라도 찾아갑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꽉차게 되면 어디로 가야 되느냐? 내려가야 됩니다. 더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계의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의 골짜기를 메워주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자연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만한 부자가 되었으니 이제는 세계적인 부자가 되어 나를 중심으로, 내 일족을 중심으로 잘살겠다 하고 살면 오래 안 가서 그 욕심에 치여 죽습니다.
선생님도 부자라면 부자입니다. 사람들이 선생님보고 부자라고 합니다. 돈은 많지만 선생님 지갑에는 한푼도 없습니다. 선생님은 돈을 한푼도 보지 못하고 수억 달러를 쓰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쓰느냐? 선생님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깍정이입니다. 역사적인 시대가 온다는 말을 하면서 아내 생일이 되었는데도 선물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선물은 무슨 선물이야? 하는 식입니다. 선물이 아무리 좋더라도 거짓된 마음으로 다이아몬드 선물을 해주는 것보다는 진정한 마음으로 선물을 못 해줘서 미안합니다 하는 한마디가 더 귀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그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선물은 안 해줘도 좋습니다. 생일에 깊은 사랑의 마음으로 한 살을 더 먹는구만. 우리의 갈 길이 바쁘다 하면서 하늘 앞에 효도할 수 있는 그런 가정이 되면 하나님이 보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 둘이 선물을 주고받고 좋아하면 하나님이 보고 시기할 것입니다. 이것들, 나에게 먼저 인사도 안 하고 이게 뭐야! 이럴 것입니다. 생각이 다릅니다.
선생님은 귀한 것이 생기면 쌓아 두었다가 남 줄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 아들딸을 위해 잘 쓰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10년 전에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10년 전의 것인데 쓰지 않아 지금에 와서는 못 쓰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10년 전에 내가 이걸 잃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인데 이렇게 되었구만 합니다. 그렇지만 후회는 안 합니다. 나보다는 전체를 위해서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사람을 위하고 세계 사람에게 주고 싶은 나의 심정에 하나님까지도 반하게 된다면, 천지의 모든 물건은 내 궁둥이를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자꾸 따라옵니다. 차 버려도 따라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다 내 영토가 됩니다. (141-26)
정서적인 인격에 따라 훌륭함이 결정된다
그러면 모든 정서적 기원이 어디냐? 정서적인 내용이 어디에서 나오겠느냐? 새도 어미라면 새끼를 사랑할 줄 압니다. 이걸 인간이 가르쳐준 게 아닙니다. 어디에서 그렇게 배웠느냐? 새끼를 보호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힙니다.
동물은 수놈과 암놈이 때가 되면 사랑이 발동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때가 되면 누가 먼저 발동하느냐? 암놈이 먼저 발동을 합니다. 암놈은 발동을 하면 눈이 뒤집어지고 입술이 붓는 등 모든 부분이 붓습니다. 소를 예로 들어 말하면, 암소가 울면 벌써 수놈은 암놈 우는 소리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들을 때는 암놈 소리나 수놈 소리나 같은 것 같은데, 수놈은 암소가 우는 걸 벌써 압니다. 어디에서 그 소리가 들리면 벌써 그곳을 향해서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전부 다 그렇게 좋아하면서 살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여자 혼자 사는 것도 불행한 것입니다.
그 암놈은 처음 만나는 수놈에 대해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귀한 손님을 만나는 것 이상, 가장 가까운 무엇을 만나는 것 이상 좋아합니다. 처음 만난 수놈이 뭐가 그렇게 반가운지 너무 좋아합니다.
누가 그렇게 가까우라고 가르쳐주었느냐? 자기 어머니가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자기 어머니도 몰라봅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고 뭣이고 다 버리고 혼자 가서 그러고 있습니다. 그게 다 자연의 이치입니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때에 따라서 컸다가 작아지고 작아졌다가 커지면서 발전하는 자연의 이치에 박자를 맞추지 않으면 존속하지 못합니다. 그 박자에 놀아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할아버지도 자기 할머니에 대해서는 별수 없습니다. 할머니가 도와 달라고 하면 도와줘야 합니다. 자기 집안의 종가댁 할아버지는 세도가 당당하지만 그 할머니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너와 내가 같은 박자에 놀아나기 때문입니다. 높고 훌륭하다는 것도 전부 사랑을 중심으로 돌게 마련입니다.
선생님이 일반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정서적인 세계에 박자를 맞추는 것은 누구보다도 폭이 넓고 깊고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역사의 사정을 알고, 세계의 모든 사정을 통하고, 미래 인간의 사정은 이럴 것이다 하는 것을 예상하고 그것을 그려 갑니다. 그런 면이 다르지 다른 면이 다른 게 아닙니다. 학식이 높은 것은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돈 많은 것도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그 사람이 갖추고 있는 정서적인 인격이 얼마만큼 크냐가 문제입니다.
그러한 큰 인격을 갖춘 분을 남편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여자라면 너나할것없이 다 합니다. 그분을 찾아가고 싶어합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크고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못생긴 부인이지만 정서적인 터전의 닻줄을 매놓은 그 인연을 따라서 좋아하려고 합니다. 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141-35)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부자관계
그러한 정서적인 면을 추구하는 인간은 누구를 닮았느냐?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뿌리입니다. 우리 인간은 조상이라는 줄기를 통해서 가지를 거쳐 잎까지 되어 있습니다. 이 잎에는 줄기도 있고, 가지도 있고, 뿌리도 있습니다.
요즘은 식물을 세포로 번식시키는 시대입니다. 이 세포 하나를 따내서 유리관 같은 데 넣고 배양하면 자랍니다. 그런데 이 세포 하나에서 꽃이 나옵니다. 꽃이 나오는데, 그 색깔은 어디에서 보급받았는지 씨를 뿌려서 피운 꽃과 같은 색깔이 나옵니다. 또 그 세포 안에는 줄기 인자도 있고 뿌리 인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뿌리도 나오고 줄기도 나옵니다.
우리 인간 자체는 누구를 닮았느냐? 조상을 닮았습니다. 인간의 맨 위 조상은 누구냐? 우리 인간은 원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제2의 존재입니다. 제1의 존재, 즉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어떠한 근원에서 빚어진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근원 자체가 뿌리가 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 근원에 연결된 관계의 결실체로서 태어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은 원인적인 뿌리와 통할 수 있는 소질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세포가 자기 조상을 닮은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머니가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의 어머니가 있었으면, 어머니의 실체가 있었으면 창조가 필요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시는데 아버지격 주체로 존재합니다. 그러니 어머니격 존재가 필요해서 그 어머니격 존재를 창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무형의 신으로 계시는 하나님은 이 우주만을 상대로 해서는 자극을 못 느낍니다. 마음 자체만으로는 마음 자체가 아무리 자극을 해도 무형의 실체로는 느끼지 못합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같은 것이니까, 같아서 도니까 자극이 안 옵니다. 그러나 서로 상충된 것끼리 만나면 자극이 있습니다. 더운물과 찬물이 합하면 폭발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극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상대적 거리가 있는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것이 필요해서 플러스로서 마이너스적인 상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것, 외적인 것의 두 성품이 있는데 플러스격 상대형으로 아담을, 마이너스격 상대형으로 해와를 지었습니다. 그 둘을 지어서 하나님은 어디에 가 있으려고 했느냐 하면, 아담 속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아담 속에 들어가서 해와와 하나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해와는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부인이요, 외적으로는 아담의 부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자기와 자기 부인을 실체화시킨 것이 우리 인류시조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를 통하면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면 마음에서 오냐 하고 대답합니다. 그런 체험을 해보았습니까? 그런 경지에 못 갔으니 그렇지, 마음에 물어 보면 다 답이 나옵니다.
관상을 봐주는 관상쟁이나 영통한다는 무술가(巫術家)들은 저급한 영이 마음에서 가르쳐주는 것을 가지고 그 노릇을 합니다. 그걸 들을 수 있는 본연의 성품이 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저변으로 내려가지만, 자꾸 떨어져 내려가지만 본성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관계할 때는 작용하면 할수록 승화됩니다.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내려가는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아담은 누구냐? 아담은 하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의 몸으로 만들었습니다. 무형의 실체로는 실체 자극의 세계를 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무형으로 되어 있으면 다른 것을 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아담의 마음에 들어가 아담이 성숙하기를 바랐고, 해와의 마음에 들어가 해와가 성숙하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이 성숙하기를 바라던 그때에 아담 해와가 타락했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직계 혈통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뿌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했기 때문에 인류역사 세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뿌리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이걸 몰랐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서 우주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하고 기도하면 부자의 관계다 그럽니다. 부자의 관계는 뭐냐? 그걸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풀어서 맞춰야 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영통인들이 그 세계를 몰랐습니다.
역사 이래 비로소 선생님이 이걸 체계화했습니다. 현시대와 더불어 미래의 세계까지 풀어서 사람이 되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명주실 꾸러미가 제멋대로 엉클어진 것과 같은 것을 풀어야 합니다. 푸는 길은 둘이 아닙니다. 단 하나입니다. 절대 한 길입니다. 이 한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인간의 저끄러진 역사상의 모든 죄상을 풀고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본연의 사랑의 자리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본 고향에 가지 못합니다. (141-37)
3. 사랑이상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과 인간은 사랑이상을 중심한 필연적 관계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인간시조 아담 해와를 통한 사랑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우리 인류시조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을 했더라면 완성한 그 자리에서 사랑의 이상이 실현되었을 것입니다. 사랑의 이상이 실현된다는 것은 곧 인간이 사랑을 중심으로 완전히 완성되는 동시에 하나님도 이 사랑을 중심으로 창조이상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일지라도 혼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을 이루려면 반드시 상대적 기반이 있어야 됩니다. 이게 없으면 사랑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어디서부터 나오느냐 하면, 자기에게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로부터 자극을 받아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것도 결국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을 지은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대상이 되는 하나의 영원한 실존자로서, 영원한 실체로서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이상을 인간과 하나님이 공히 완성하기 위해서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지었습니다. 이건 운명적입니다. 운명적이라 하면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피해 갈 수 없는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 피해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이것은 필연적이요,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중심으로 필연적인 목적성사, 운명적 완성점을 향해 가는 데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을 통해 살게 될 때 인간세계에는 행복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루고자 하는 완성이라든가 이상실현이라는 것은 사랑의 기준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주의 모든 존재는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살아 갑니다. 창조된 모든 만물의 시작도 어디서부터였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피조세계의 중심인 인간은 더욱이나 사랑을 중심으로 출발했습니다. 사랑에서 출발해서 사랑을 완성해서 영계에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137-208)
하나님과 인간은 본래 부자의 관계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는 부자의 관계입니다. 부자의 관계는 뭘 두고 하는 말이냐? 부자관계는 핏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막연히 하나님 아버지! 합니다. 왜 하나님 주인이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라고 하느냐? 아버지라는 말 가운데는 사랑이 개재돼 있고 핏줄이 개재돼 있습니다. 직계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한 몸이 돼야 합니다. 핏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피는 생명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그러니 자녀는 부모의 혈통을 이어받은 생명을 지닌 존재인데, 부모의 혈통은 사랑에 의해서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태어난 아담과 해와가 자랄 때에 요즘과 같이 돈이 필요했겠느냐? 우리 시대에나 돈이 귀하다고 하지 그때에는 돈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요즘 보석으로 취급하는 다이아몬드나 금도 없었습니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광석 가운데 박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금광석을 제련한 24금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벌거벗고 사는 거기에 권력이 있었겠느냐? 오직 사랑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로서 자녀인 아담 해와를 사랑하고, 그 자녀는 부모의 사랑의 품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타락은 무엇이냐? 아담 해와는 몇 살쯤에 타락했겠느냐? 지금까지 신앙인들은 그것도 생각 안 했습니다. 또 아담 해와를 지을 때 성숙한 사람으로 지은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 이치대로 아기에서부터 자랐습니다. 자랄 때에는 천사가 보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이 통일원리에서 말하는 원리결과주관권(간접주관권)입니다.
원리결과주관권은 피조세계의 만물들이 공통적으로 거쳐야 하는 그 기준을 말합니다. 모든 동물들이 자라듯이, 알에서 깨어나든가 새끼로 태어나 자라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유아(乳兒)시대부터 성숙할 때까지 자라 나갑니다. 유아 때에는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모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지능이 점점점 발달함에 따라서 대외관계를 넓고 높고 깊게 앎으로써 성숙하게 됩니다. 자연계와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에서 심정적 지표가 되는 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람에 따라서 갖춰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의 주인공인 하나님이 사랑을 중심으로 아담 해와에게 야, 내가 바라던 표준대로 이제는 다 자랐구나. 너는 아들로서 다 자랐고, 너는 딸로서 다 자랐구나. 내가 바라던 그때가 다 되었으니 이제 너희들을 축복해주마할 수 있는 한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때가 성숙한 때입니다. (142-266)
아담 해와가 성숙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성숙한 것은 무엇이 상징하느냐? 남자면 남자로서 자기만을 아는 것을 성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가 남자라는 것을 알지만 상대를 아는 때가 성숙한 때입니다. 남자에게 필요한 것이 여자고 여자에게 필요한 것이 남자라는 것을 알 때, 서로 이성에 대한 관계를 알 때 사랑이 움틉니다. 10대를 거쳐서 20대가 되어 갈 쯤에는 이성에 대한 눈이 떠집니다.
만약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성숙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하나님은 무형의 신입니다. 인간은 그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성경 창세기에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닮았는데, 하나님의 남성적 성상을 실체화시킨 존재가 아담이요, 여성적 성상을 실체화시킨 존재가 해와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두 가지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과 몸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주체고 몸은 대상체인데, 이 몸 마음이 나 하나로는 자극을 못 느낍니다. 상대적인 실체로 분할되어서 그들이 크는 것을 볼 때에, 상대적으로 사랑을 느끼고 또 그들도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성숙했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성경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 마음은 무한히 큽니다. 마음이 얼마나 크냐 하면, 그 위대하고 엄청난 하나님을 모시고도 끄떡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마음속에 임재하고 해와의 마음속에 임재해서 둘의 몸 마음을 하나되게 합니다. 이들의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서 순환운동을 할 때, 몸과 마음이 종적으로 순환운동을 한다면 아담 해와는 횡적으로 순환운동을 합니다. 이것이 이성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 가지고 부딪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접붙여야 됩니다. 만약 완전히 하나됐다면 그것을 떼어낼 사람이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성숙하면 자연히 동쪽의 아담과 서쪽의 해와가 서로 그리워서 가운데로 와서 둘이 이마를 맞대고 뺑뺑 돕니다. 옛날에는 서로 밀치며 야! 왜 오는 거야? 했는데, 서로 붙들고 돈다는 것입니다. 해와는 옛날엔 오빠인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하면서 돕니다. 이때는 오빠가 아닙니다. 서로 좋아하며 머리를 맞대고 뺑뺑 돕니다. 어떻게 하고 뺑뺑 돌겠느냐? 붙들고 돕니다. 완전히 일자로 딱 붙들고 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 여자가 무엇으로 하나되느냐? 사랑으로 하나됩니다. (142-268)
하나님도 사랑에는 꼼짝못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지만 한 가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은 금도 만들 수 있고, 다이아몬드도 만들 수 있고, 힘도 있습니다. 다 할 수 있고, 다 만들 수 있는 그분이 마음대로 못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사랑이 있습니다. 있기는 있는데, 자기 혼자 내 사랑, 내 사랑! 이러면 미친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별수없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도 홀로 있는 자리에서는 사랑을 찾을 수 없습니다. 상대적인 지점에서 상대권을 세워 놓지 않고는 사랑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혼자서는 외로우니까 사랑을 찾기 위해서 이 세상을 지었습니다.
사랑은 혼자서는 못 합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은 창조주는 거룩하고 피조물은 속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건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사랑을 찾을 것이냐? 상대관계에서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은 어디에서 사랑을 찾을 것이냐? 혼자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아, 내 사랑, 지옥 끝에 내려가서 내 사랑 찾아봐야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랑을 찾으려면 사랑의 대상자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빼고는 전부 다 하나님이 지은 것인데, 그 피조만물 가운데 그래도 하나님을 대해서, 사랑을 대해서 쑥덕공론하고, 욕심이 커서 아이구, 그거 나 한번 갖고 싶다 할 수 있는 존재가 무엇이냐? 그게 원숭이겠느냐, 고릴라겠느냐? 하나님이 원숭이를 사랑하겠다고 하겠느냐? 달고 다니는 꼬리만 봐도 정이 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를 하나님의 창조 박물관을 아무리 뒤지고 뒤져 봐도 피조물 가운데는 사람이라는 여자와 남자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사랑이 필요하다면 남자를 잡아다가, 여자를 잡아다가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헌금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이처럼이 뭐냐? 독생자를 죽이면서라도 그 이상 사랑하려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죽여서라도 찾아야 할 것이 사랑입니다.
또 성경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다. 둘째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 하나님은 사랑을 제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사랑이냐 하면 참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미치고 싶겠느냐, 사랑 앞에서 뻣뻣하게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쇠꼬챙이처럼 서 있고 싶겠느냐? 하나님도 사랑에 미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에 미쳐서 눈이 처지고, 코가 늘어지고, 팔다리가 제멋대로 되어 뒹굴뒹굴 굴러다니면서 나 행복하다 하며 춤출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고, 냄새 맡을 줄도 압니다. 하나님도 인간과 똑같으니까 인간이 하는 것은 다 할 수 있습니다. (142-269)
모든 존재물은 상대를 위해 있어
성경 창세기에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해 놓고 아담 홀로 있으니 외롭다고 해서 해와를 지었습니다. 지어 놓고는 지극히 선한지라라고 했습니다. 선한지라 하는 말은 창세기에 있는데 웃었더라 하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타락했다는 말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은 웃어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웃을 줄 아는데 왜 웃어 보지 못했느냐? 인간의 타락으로 보고 웃을 수 있는 상대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동네에 미남자로 소문난 남자가 있다 할 때, 제비 꼬리같이 잘생긴 여자들이 전부 다 그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났으면 뭘하고, 아무리 생각했으면 뭘합니까? 만나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연이 맺어져야지 혼자 아무리 생각해 봤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또 혼자 웃을 수 있습니까? 웃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혼자 웃겠습니까? 하나님이 혼자 웃으면 그 하나님은 미치광이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이 눈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있습니다. 귀, 코, 입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무엇을 위한 것들이냐? 자기를 위해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눈은 상대를 보기 위해서 있습니다. 또 귀도 상대가 말하는 걸 듣기 위해서, 상대 때문에 있습니다. 코도 그렇고, 입도 그렇습니다. 입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이야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틀림없이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으니 햐, 기분 좋구나! 하면서 확 풀어지게 한번 하하하! 하고 웃어 보았겠습니까? 아무리 미남자라 해도, 그 동네 여자들이 아무리 프로포즈를 하더라도 때를 놓쳐 상대를 못 찾고 할미새 꽁지처럼 하얗게 되었다면 행복하겠습니까?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비참한 분입니다. 돈이 없어서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없어서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지을 수 없어서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를 잃어버려서 비참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서 지었던 사람이 타락했다고 해서 사람을 다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다시 접붙여서 순을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서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맺게 하여 새로운 씨를 뿌려 타락하지 않았다는 결과를 가져오는 역사를 하면 했지, 다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세웠던 아담 해와를 단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지었기 때문에 그 기준은 변할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다 성장했을 때 하나님이 아담 해와 속에 들어가 서로가 사랑할 수 있게 됐다면 이들을 누가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류의 청춘남녀들도 사랑을 할 때는 부모가 반대하고 누가 아무리 뭐라 하더라도 죽느니 사느니 합니다. 상사병에 걸리면 약으로 못 고칩니다. 그 병에 걸리는 날에는 고질통입니다. 타락한 세계의 청춘남녀들도 그런데, 급이 낮은 천사장 사랑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간의 사랑도 이만한데, 본연의 세계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랑의 혈통을 이어받아 접붙인 그 사랑을 누가 떼어놓겠느냐? 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떼어놓지 못합니다. 아무리 떼려 해도 뗄 수 없습니다. (142-272)
남녀의 가장 거룩한 곳이란
여자를 살펴보면, 가슴이 나오고 궁둥이가 튀어 나왔습니다. 그렇게 생긴 것이 무엇 때문이냐? 자기 때문이 아니라 아들딸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편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자가 여자 때문에 태어나지 않았고, 남자가 남자 때문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여자 때문에, 여자는 남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태어난 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고입니다.
그리고 남자의 생식기가 있고 여자의 생식기가 있는데, 그 주인이 누구냐? 여자의 생식기 주인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고, 남자의 생식기의 주인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도덕이 문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절대적입니다. 그곳이 뭐냐 하면, 사랑의 왕궁입니다. 생명의 왕궁이고, 혈통의 왕궁입니다.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그것 붙들고 살고, 어머니 아버지도 그것 붙들고 살고, 우리도 그것 붙들고 살고, 우리의 아들딸들도 그것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오늘날 세계적으로 제일 나쁜 욕설로 쓰이느냐? 그것이 인간을 망쳤기 때문입니다. 개인 자기만을 생각했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악마의 사랑, 악마의 생명, 악마의 핏줄을 이어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10대에 그렇게 뿌렸기 때문에 수확기가 된 지금 전세계 청소년들을 윤락화, 악마의 천국으로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느냐? 이걸 수습하지 못하면 이상세계는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정하느냐? 오직 선생님이 아니고는 수습할 도리가 없습니다. (210-159)
사탄의 정체를 알아야
그러면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이 이상적 존재로 완성시키기 위해 세운 아담 해와가 이상적 존재로 완성하여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할 텐데 타락하여 그런 부모가 못 되었습니다. 타락한 그 부모에서 이어내려온 인류의 후손 전체가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누구하고 관계를 맺었느냐? 사탄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탄과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창조할 당시 원리에 없는 존재입니다. 비원리적인 존재입니다. 원리에는 없는 존재가 나와서, 다시 말하면 주인이 될 수 없는 존재가 나와서 오늘날 인류를 주관하는 주인 놀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 사탄이 주인이 되었느냐? 무슨 힘에 의해서 주인이 되었느냐, 그렇지 않으면 돈을 주고 사 갔느냐? 인간이 무엇 때문에 사탄한테 침해를 받았느냐? 이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탄은 무엇이냐? 사탄의 정체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사탄이 된 동기를 알아야 합니다. 병이 나면 그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병의 원인을 확실히 규명해서 거기에 해당하는 처방을 통해 투약을 해야지, 맹목적으로 그럴 것이다 해서는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날다가 폭발해 버렸습니다. 최고의 과학 공식에 입각한 지식 기반 위에서, 완전히 공식화된 과정을 통해 이것은 틀림없다 해서 발사했는데도 사고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곧 확실치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입장에서는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데서는 이상이 실현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악마는 도대체 무엇이냐? 우주의 대왕님으로 군림하여야 할 우리 인류시조의 기반을, 다시 말하면 우주의 왕과 왕후의 자리를 하나님의 종이 겁탈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천사가 이런 놀라운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악마가 되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우주 대왕의 권한을 갖고 즉위하는 한 날을 하나님은 고대하고 있었는데, 요사스러운 해와의 행동으로 왕후와 왕권을 사탄이 타고 앉았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타고 앉았느냐? 사랑을 통해서 타고 앉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능력이 많은 분이니까 사탄이 실수를 했어도 그까짓 것 집어치우고 하나님 마음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됩니다.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리는 헌법입니다.
한 국가가 제정한 그 헌법은 주권자나 국민이 준수해야 할 원칙과 약속, 규약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규약이 있으면 그 규약을 지키고 나서 그것이 나쁘다 할 때에는 뜯어고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을 지켜서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서 나쁘다 했을 때에는 그걸 시정할 수 있지만, 좋다 했을 때에는 시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절대적인 원리의 법도는 변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왜 하나님이 타락한 천사장을 제거하고 인간을 빨리 구원하는 섭리를 못 하느냐 하는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다. (142-265)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류를 통일해야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의 간부(姦夫)입니다. 이 요사스러운 것이 천리의 대도를 파탄시켜 놓고도 뻔뻔스럽게 아직까지 이 지구성에서 인류를 놓지 않고 갉아먹고, 벗겨먹고, 훑어먹고 있습니다. 이놈을 쓰레기통에 처넣어야 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의 간부요, 우리 인류시조 아담의 간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왜 그런 하나님이 사탄 마귀는 용서하지 못하느냐? 사탄이 접해 있는 사람은 용서하되 사탄 마귀는 용서하지 못합니다. 사탄한테 붙들린 사람은 찾아와야 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용서하지만, 악마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돌아가려는 본심이 있습니다. 봄철만 되면 빼빼 말랐던 나뭇가지도 봄볕에 움이 트는 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본심은 가만히 자유만 주면 자연히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못살게 막 처넣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자기의 운명이 그렇게 비참하게 되어 있는 것을 모르는 이 인류를 전부 다 해방시켜 하나로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악마의 사랑으로 통일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 눈이 영원히 좋아하는 사랑입니다. 내 귀가 듣고 듣고 또 들어도, 24시간, 일생 동안 계속 들어도 듣기 싫지 않은 말이 하나님의 사랑의 말입니다. 지금까지 귀가 그런 사랑의 말을 들어 봤느냐? 또 눈이 보고 보고 영원히 보더라도 싫지 않고 피곤하지 않은 사랑의 상대가 나왔느냐?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이구, 졸음이 온다. 이제 사랑의 말 그만둬라! 그러겠습니까? 하나님도 사랑을 한번 붙들면 영원히 붙들고도 더, 더, 더 하며 좋고 좋다! 할 것입니다. 붙들면서 싫다고 하겠습니까, 죽을 힘을 다하여 죽어 나자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영원히 붙들고 늘어지겠습니까? 사랑 얘기를 할 때는, 하나님도 그래, 그래. 좋다! 합니다. 그 사랑은 본연의 사랑, 이상적인 사랑입니다. (142-281)
본연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가 사랑했던 그 사랑은 참사랑입니다. 타락권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탕감복귀해서 본연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했던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만우주를 대해서 주인의 자격으로 사랑하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못 갑니다.
그리고 눈이 물크러지도록 하나님이 그리워야 됩니다. 교회에 가고 싶어서 밤에도 잠을 못 잘 정도로 그리워야 됩니다. 선생님이 계시는 곳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보고 보고 보고도 또 보고 싶고, 가고 가고 가고도 또 가고 싶고, 만나서 살면서도 영원히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그런 세계입니다. 좋다면 영원히 좋은 세계입니다. 그 세계를 지금 우리가 겨냥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걸 두고 볼 때, 모두가 여기에 불합격자입니다. 그러니 한 가지 길로 선생님이 가는 데를 따라가야 됩니다. 선생님 궁둥이를 따라다녀야 됩니다. 따라다닐 때는 바로 보고 따라다녀야지, 얼굴을 돌리면 안 됩니다. 한발짝 잘못 디디면 악마의 그물에 걸려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악마를 어떻게 처치하느냐? 사탄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본연의 사랑 줄기만 나타내면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타락권 이상의 사랑이 나타나면 사탄도 어쩔수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못 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말은 타락권 이상의 사랑으로 나와 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합니다. 사랑을 말할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으로 오신다고 말합니다. 신랑 신부라는 말을 했고, 또 만민은 형제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가족 편성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기 때문에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어떻게 되었으며 어떻게 가는가를 모릅니다. 덮어놓고 믿으면 천국 간다고 그럽니다.
세상에는 요사스러운 젊은 청년 남녀들이 많습니다. 악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난장판 삶을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 따라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인들은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웁니다. 왜 그러냐? 악마의 그물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걸 청산지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런 내용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천주까지 이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역사 이래 인간세계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선생님 외에는 없습니다.
악마의 핏줄로 얽힌 그물을 어떻게 벗어날 것이냐? 할 수 없습니다. 땜질을 해야 됩니다. 그걸 째 버리고 땜을 때워야 됩니다. 땜질을 하려면 그물코와 같은 코를 매달아서 땜질해야 됩니다. 그렇게 땜질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하면 접붙이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못 갑니다. (142-284)
4. 위하여 존재하는 세계
사랑․이상․행복은 홀로 이룰 수 없다
예로부터 인류는 영원하면서 참되고 변치 않는 사랑과 이상과 행복과 평화를 그려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이 시대는 불신의 세상이요, 혼란한 시대입니다. 이런 가운데 인간이 소망하는 요건들을 찾아서 성사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봤지만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이 시대에 우리 인간으로서 이것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인간을 넘어서 영원 불변의 참된 어떤 절대자를 찾아 그분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분이 참된 사랑, 참된 이상,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을 염원한다면, 그분을 통해서만 이것을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생각할 때, 그런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왕이요, 이상의 왕이요, 평화와 행복의 왕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이와 같이 인류가 추구하던 이상적 요건을 성사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제시하는 내용을 우리가 알고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더라도, 사랑과 이상과 행복과 평화는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상대적인 관계에서만 성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이 절대자로 계신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바라는 사랑과 이상과 행복과 평화도 홀로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반드시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그러면 이 피조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성사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성사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행복과 하나님의 평화를 완결지을 수 있는 대상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혼자 사랑해서 무엇 하며, 하나님 혼자서 이상을 찾으면 뭘 하며, 하나님 혼자서 평화롭고 행복해서 뭘 하겠습니까? 상대 되는 인간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런 요건들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75-315)
하나님과 인간은 대상적 존재가 더 잘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가 젊은 시절에 자기 대상을 선택하게 될 때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원하느냐,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원하느냐? 이렇게 묻는다면 누구나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원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미남 미녀가 결혼을 해서 첫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그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자기 멋대로 생긴 그런 아기라 하더라도 그 아기를 바라보면서 이 아기는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보다 더 잘생겼다고 하면 그 부모는 입이 귀 밑까지 벌어지면서 기뻐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인간이 이렇게 돼 있느냐? 사람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존재지 원인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결과적인 존재가 그러하다면 원인적인 존재가 반드시 그러한 내용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하나님보다 더 훌륭하기를 바랍니까, 못하기를 바랍니까 하고 질문한다면, 하나님도 역시 대상적인 존재가 자기보다 더 훌륭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훌륭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이와 같은 원칙을 통해 볼 때,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 인간 자신은 본래 하나님보다도 높아지기를 바라고, 하나님보다도 가치 있기를 바라는 존재입니다.
오늘날 신학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은 대등(對等)한 자리에 설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창조주 앞에 사랑의 실현, 평화의 실현, 이상의 실현, 행복의 실현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볼 때, 본연의 인간은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고 더 높을 수 있는 대상의 자격을 지닌 존재요, 자녀의 가치를 지닌 자격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자신이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대상으로 서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대상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녔고, 보다 높은 자녀의 가치를 지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영원하다면 우리 인간도 잠깐 있다가 없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속세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도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한때 있다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식과 떨어져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영원하고 유일하고 절대적인 이상 하나님의 대상인 우리 인간 자체도 영원하고 절대적이요, 유일한 가치의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가장 이론적인 결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런 이상적 요건을 중심으로 하여 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대상의 가치를 지닌 존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러하다면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영원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영생한다는 말은 타당한 결론입니다. (75-316)
이상적 존재의 기원은 위하여 사는 데 있다
그렇다면 지혜의 왕이고 전체의 중심인 하나님이 참된 사랑과 참된 이상과 참된 행복과 참된 평화의 기원을 주체와 대상 중 어디에 두겠느냐? 주체가 있고 대상이 있는데, 주체를 위하는 길과 대상을 위하는 길, 이 두 길 가운데 하나님은 도대체 이상의 요건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 창조주인 하나님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참된 사랑, 참된 이상, 참된 행복, 참된 평화를 이루는 데 있어서 대상이 주체를 위하는 데에 그 이상적 기원을 둘 것이냐 아니면 주체가 대상을 위하는 데에 그 기원을 둘 것이냐? 하나님이 그 이상적 기원을 주체 되는 자기를 위하는 데에 세운다면, 하나님이 그럼과 동시에 모든 사람도 자기가 어떠한 대상 앞에 주체의 입장에 있으면 자기를 위하라는 입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될 수 있는 길이 막힙니다. 분립되고 맙니다.
하나가 될 수 있고 평화의 기원이 될 수 있는 그 길은 어디에 있느냐? 위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뿐만 아니라 참된 인간은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참된 사랑은 위하는 데서부터, 참된 이상도, 참된 평화도, 참된 행복도 위하는 자리를 떠나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천지창조의 근본 원칙이었습니다.
참된 부모는 어떤 사람이냐? 자식을 위해서 태어났고, 자식을 위해서 살고, 자식을 위해서 죽는 부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참된 부모의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요, 참된 자식 앞에 이상적인 부모로서 등장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식 앞에 평화의 중심이 되는 것이요, 행복의 기준이 됩니다. 반면에 참된 효도는 어디에 기준을 세울 것이냐? 그 반대의 입장입니다. 부모를 위해서 태어나고, 부모를 위해서 살고, 부모를 위해서 목숨을 다하는 사람이 참된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부모 앞에 이상적인 자녀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녀요, 행복과 평화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식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위해서 존재하는 데서만 이와 같은 이상적인 요건, 즉 참된 사랑, 참된 행복, 참된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75-318)
우주 창조의 원칙과 인간 행복의 기원
그러면 참된 남편은 어떤 사람이냐? 태어나기를 아내를 위해서 태어났고, 살기를 아내를 위해서 살고, 죽기를 아내를 위해서 죽는다는 남편이 있다면 그 아내는 남편을 과연 참된 사랑의 주인이요, 참된 이상의 남편이요, 참된 평화와 행복의 주체로서의 남편임에 틀림없다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식을 대한민국에 적용해서 볼 때, 대한민국의 참된 애국자는 어떤 사람이냐? 나라를 위해서 태어났고, 나라를 위해서 살고, 나라를 위해서 어려운 환경도 개의치 않고 위로는 군왕을 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여 묵묵히 생명을 바친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범위를 세계로 넓혀서, 역사노정에서 성인 중에 누가 제일 위대한 성인이냐? 이 공식을 적용해서 볼 때, 그분은 누구보다 인류를 위해 산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를 위해 왔고 인류를 위해서 죽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응당 미워해야 할 원수, 자기 생명을 빼앗는 원수를 위하여서까지 기도해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역사에 없는 성인 중의 성인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주창조의 원칙이요 인간 행복의 기원은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왜 태어났느냐? 많은 사람들은 남자는 이러이러한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 이런 나 자신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남자는 남자 때문에 태어났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습니다. 본래 남자가 태어난 본의가 어디에 있느냐? 남자는 여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남자는 어깨가 넓고 여자는 아래가 넓게 되어 있습니다. 지하철이 만원일 때 비좁은 의자에 앉더라도 위가 넓고 아래가 넓은 남자 여자가 앉으면 딱 들어맞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것을 보더라도 서로가 위할 수 있는 상대적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남자 때문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또 여자도 여자 때문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자도 태어나기를 남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을 천지창조의 대주재(大主宰) 되는 하나님이 창조의 원칙으로 세웠기 때문에, 그 원칙을 따라서 가지 않고는 선하고 참되고 행복한 세계, 혹은 사랑과 이상과 평화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75-319)
종교의 가르침은 본연의 세계 법도에 맞춘 것
선생님은 영적 체험, 즉 영계에 대한 내용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는 본연의 세계,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 또는 극락이라는 곳의 구조가 무엇을 기준으로 돼 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만이 들어가는 곳이요, 위해서 나고, 위해서 살고, 위해서 죽어간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것이 우리 본향(本鄕)의 이상적 구조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그 세계로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역사과정에 수많은 종교를 세워서 훈련시켜 나오고 있습니다.
왜 종교인은 온유겸손해야 되며 희생해야 되느냐? 본향의 법도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본향에 돌아갈 때를 대비해서 그 본향에 알맞게끔 지상생활 과정에서 훈련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보다 차원 높은 희생을 강조하고 봉사를 강조합니다. 그 세계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게 될 때, 이러한 내용을 제시하는 자체가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하나님이 섭리해 나온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방대한 성경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은 단 두 마디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 원칙에 다 맞아떨어집니다.
예수님은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역설적인 말을 한 것도 결국 본연의 세계의 위해서 존재한다는 원칙에 일치시키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75-320)
타락이란 자기를 중심한 데서 비롯한다
성경의 내용을 살펴볼 때, 타락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었을 때, 주체인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지 못하고 자기를 주체로 생각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자기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어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 타락의 원인입니다. 모시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입장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입장에 섬으로써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해와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아담을 타락시켰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타락시켰습니다. 누구를 중심으로 타락시켰느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위하여 존재한다는 원칙을 포기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들었던 입장에서 타락했습니다. 그것이 죄악세계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런 악의 자리에서 우리 선조가 그와 같은 결과를 자아냈습니다. 그러한 선조의 후손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 자기부터 생각합니다. 이것은 타락이 가져다준 결과의 선물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하나님은 그냥 놓고 볼 수가 없습니다. 선한 세계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한 세계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운동을 역사를 통해서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인류역사에서 그와 같은 실적의 기대를 남긴 사실을 우리가 발견했을 때, 하나님은 역사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72-18)
하나님이 위하여 존재하는 원칙을 세운 이유
그러면 하나님은 왜 위해서 존재한다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느냐? 그 몇 가지 요건을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본심을 헤아려 볼 때, 어떤 분이 자기를 위하여 진정으로 생명을 다한 그런 신세를 진 사실이 있다면, 우리 본심(本心)은 그걸 갚는 데 있어서 50퍼센트는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50퍼센트만 갚으라고 하느냐, 1백 퍼센트 이상 갚으라고 하느냐? 이렇게 물으면 우리 본심은 확실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1백 퍼센트 이상 갚으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A라는 사람 앞에 B라는 사람이 1백 퍼센트의 신세를 끼쳤다면, B는 그걸 갚는데 1백 퍼센트 이상으로 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A는 1백 퍼센트 이상으로 돌려준 B에 대해서 그보다 더 높여서 갚아주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데 있어서, 그 주고받는 도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점 많아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영원이라는 개념이 설정됩니다.
영원이라는 개념은 자기를 위하는 데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운동하는 것을 보더라도 밀어주고 끌어주는 이런 상대적 방향이 크면 클수록 빨리 도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의 왕이 되는 하나님이 위하라는 법도를 세운 것은 영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원칙을 알기 때문에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의 개념이 성립됨과 동시에 영원히 발전하고 영원히 번창합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전진하고 발전합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발전적인 자극을 느낄 수 있어야만 행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요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하나, 왜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느냐? 예를 들어, 어느 가정에 열 식구가 있다고 합시다. 거기에서 제일 꼬마 동생이 나머지 식구를 위해서, 누구보다도 그 가정 전체를 위해서 산다면, 나이 어린 동생이지만 부모도 그를 내세우게 되고 형제도 그를 내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날이 가면 갈수록 가정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 동생은 자동적으로 그 집안의 중심존재로 등장합니다.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한 이후에 하나님 자신이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위해서 존재하는 분으로서 만우주의 중심존재로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을 닮은 그런 사람은 아무리 나이 어린 동생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작은 아들일지라도 그는 틀림없이 그 가계(家系)에서 중심 자리에 나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위하면 위할수록 위해서 사는 거기에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존재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에 선 사람은 하나님이 중심존재로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자리에서는 이상적 통일, 완전 통일을 성사(成事)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남한테 주관받는 것을 죽어도 못 참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욱이나 식자층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위해서 존재하는 그분 앞에 주관받고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영계의 조직을 보면, 천지의 대주재 되는 하나님은 우주 만유의 존재 가운데 위해서 존재하는 중심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그분 앞에 지배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천년 만년 지배받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이러한 이상적 통일권이 이런 자리에서 성립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서 존재한다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원인은, 사람들은 사랑은 내 사랑이다. 이상은 내 이상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사랑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이상도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사랑과 이상을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느냐? 오로지 대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대상이 없어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 고귀한 사랑과 이상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히 그 고귀한 사랑과 이상을 받아들이려면 위하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것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5-321)
종교 통일도 위하여 존재하는 원칙을 갖게 될 때 가능
이러한 원칙을 생각해 볼 때에,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데서만 진정한 사랑을 충족시킬 수 있고, 진정한 행복, 진정한 평화, 진정한 이상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느 사회나 세계 어느 곳에서나 성립됩니다.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이름은 엄청난 이름입니다. 도대체 통일은 가능한 것일까?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될 것인가?
기독교만 하더라도 이제까지 4백 개 이상의 교파로 나누어져서 싸워 나왔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자체는 이미 붕괴 단계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단계에서 통일교회가 뭐냐며 문 아무개의 머리가 좀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기독교의 통일이 그렇게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하여 존재한다는 철칙을 가진 교파라면, 그리고 그 교파 이상으로 모든 교파가 노력한다면, 거기에서는 반드시 하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교(異敎)라 하더라도 그 종교가 주장하는 그 정신 이상으로 노력한다면 그 종교까지 하나가 된다고 믿습니다. 주체 되는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므로 그런 분의 상대적인 위치를 지켜 나가면 자연히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수십년 동안 한국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개인과 가정 혹은 수많은 종교, 혹은 국가 주권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변명한 일이 없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시키면서도 그 보상을 바라거나 변명을 하지 않는 하나님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그분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묵묵히 가야 합니다. 그리고 갈 길이 바쁘기 때문에 시끄러운 주위 환경에 대해 개의(介意)할 만한 시간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지금까지 살아 나왔고 일해 나왔습니다. (72-21)
보다 위하는 사람일수록 주인이 된다
통일교회는 그렇게 얻어맞고 그렇게 짓밟혔어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우리는 세계적인 기반을 만들어 나왔습니다. 미국에 가서 큰소리를 친 것도 그러한 내용이었습니다. 개인주의는 멸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 미국이 아무리 세계를 지도한다 하더라도 미국이라는 나라를 미국 국민 이상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운동을 하는 종교단체가 생긴다면, 미국은 그 종교에 의해서 지배되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기 때문에, 진실로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한다면 모든 것은 주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점령하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세계에서 할 수 있었던 그 이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하는 사람이 태어났다면, 그 사람에 의해서 세계는, 그리고 하나님의 세계는 본질적인 길을 세워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 통일교회가 일본에서 상당한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일본을 구하고 세계를 구한다고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일본만을 위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일본이 진정으로 아시아를 위하여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다면 그런 비참한 결과는 자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진정으로 아시아를 위했다면 오늘날 일본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틀림없이 아시아의 맹주(盟主)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우주의 원칙을 생각해야 합니다.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나 혹은 친구간, 혹은 회사의 사장과 부하 직원과의 관계에 이 원칙을 적용한다면 반드시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고, 크게 번창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연히 중심자가 되는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한테 영원히 주관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주관받고자 하는 사회와 나라, 국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가 마음이 잘 통해서 사랑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통해야만 국민을 주관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국민이 된다면 그런 국민이 사는 나라야말로 이상적인 나라일 것입니다. (72-23)
위하여 존재한다는 새로운 가치관이 확립돼야
흔히 세상에서는 아! 인생은 무상(無常)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는 인생관의 확립, 국가관의 확립, 세계관의 확립, 더 나아가서는 우주관의 확립, 신관(神觀)의 확립이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 계통적 단계의 질서를 어디에다 둘 것이며, 그 차원적 계열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 원칙에 입각해서 우리 일생을 두고 볼 때, 가장 가치 있는 인생관은 내가 전인류를 위해 있고, 전세계를 위해 있고, 국가를 위해 있고, 사회를 위해 있고, 가정을 위해 있고, 남편을 위해 있고, 아내를 위해 있고, 자녀를 위해 있다는 인생관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행복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이상의 인생관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의 결론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희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의 철칙입니다. 그러한 사람에 의해서 가정이 구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가정은 씨족을 위해서, 씨족은 또 민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봉사해야 됩니다.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구함을 받게 됩니다. 민족은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봉사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또 그 나라를 중심으로 거기에서 머무르면 안 됩니다. 그 나라를 넘어서서 희생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나라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국의 하나님입니다. 세계를 하나의 가정으로서, 하나의 나라로서 세우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나라를 희생해서라도 세계를 살려야 된다는 사상이 생겨나지 않으면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초민족적인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소련은 슬라브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제패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중국과의 관계가 결렬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미국도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해서 세계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미국을 제일로 하는 세계제패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을 희생해서라도 세계를 살려야 합니다. 그러한 나라가 되면, 국토가 없어지고 국민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을 했다는 문화권이 남아지면 그 문화권은 세계를 제패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현실의 아시아에 있어서도 공산주의라는 세계 조직체제를 막아내기 위하여 자기 나라를 희생시키고 하나로 뭉치는 운동이 벌어진다면 이 아시아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륙을 넘어 육대주가 하나되면 세계는 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가정은 씨족을 위하여, 씨족은 민족을 위하여, 민족은 국가를 위하여, 국가는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하나의 세계를 위하여 사는 남자 여자가 되지 않으면 우주의 주체인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나라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세계를 지도할 수 있고, 세계를 위하여 사는 성인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세계 역사를 치리(治理)합니다. 따라서 종교를 중심으로 문화권을 성립시킨 것도 그러한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칙은 한마디로 말해서 위하여 존재한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원칙은 우주(宇宙) 본원(本源)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 위에서만 행복과 평화와 이상과 사랑이 구해질 수 있습니다. (75-324)
위하여 사는 데서만 천국 실현이 가능해
그러면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무엇으로 측정하느냐?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종교인이라도 그가 천국갈 것이냐, 지옥갈 것이냐를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느냐? 자기를 위해서 살아 온 생애가 많으면 지옥행입니다. 남을 위해서 산 생애가 자기를 위해서 산 생애보다 1퍼센트라도 많으면 그는 지옥을 넘어서 천국을 향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위해서 산 비율이 높을 때에는 지옥에 갑니다.
선생님은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 이 나라를 위해서 이바지해 왔습니다. 각자 자기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이바지해 왔지만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 전국민이 각 분야에서 이러한 사상으로 혁명을 하는 날에는 아무리 대한민국이 비참하더라도 희망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그러하고, 사회에서 그러하고, 위정자나 단체의 지도자로부터 이 민족이 이런 사상을 갖추는 날에는 이 민족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이 민족은 반드시 아시아에 영향을 미치고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상적 체제를 하나의 공식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겠느냐? 결론적으로 말하면,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살고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살며, 그 부부는 자식을 위해서 살고 자식은 부모를 위해서 살고, 그 가정은 종족을 위해서 살고, 그 종족은 민족을 위해서 살고, 그 민족은 나라를 위해서 살고, 그 나라는 세계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라가 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세계 만민을 자녀로 삼고 싶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은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주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국가나 단일민족권의 탈을 벗지 못한 그런 종교는 하나님의 전체 뜻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구하는 것이 주목적인데, 세계는 어떻게 돼야 구원받느냐? 그 원칙은 간단합니다. 가정은 종족을 위해 있고, 종족은 민족을 위해 있고, 민족은 국가를 위해 있고, 국가는 세계를 위해 있고, 세계는 하나님을 위해 있으면 됩니다. 세계를 위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이 온 우주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세계가 하나님을 위하는 자리에 선다면 하나님은 세계를 위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요, 나라를 위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요, 민족을 위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요, 종족을 위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요, 가정을 위하는 자리에 섭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서 말한다면, 내 것은 아내의 것이요, 그 부부의 것은 가정의 것이요, 가정의 것은 종족의 것이요, 종족의 것은 민족의 것이요, 민족의 것은 국가의 것이요, 국가의 것은 세계의 것이라는 관념을 가진 그 세계는 결국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이면 그것은 누구의 것이냐? 내 것이 됩니다. 그런 자리에 나아가야만 인간의 욕망을 최고로 달성한 자리에 서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계 제일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치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에 만유의 중심인 하나님의 것이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그런 영광의 자리에 인간이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짓는다면, 위해서 사는 데서만 가정천국 실현이 가능하고, 국가천국 실현이 가능하고, 세계천국 실현이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인류와 더불어 행복하고 이상적인 동산이라고 하며 춤을 추고 노래할 수 있는 세계로 연결될 것입니다. 그런 곳이 바로 종교가 목적으로 하는 천국이요, 그 천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곳이 바로 지상천국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 원칙을 가지고 가정과 직장에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보다 흐뭇한 내일의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이고, 내일의 개척자로서 중심적인 책임을 당당히 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국가 자체를 두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적 국가는 어떻게 돼야 되느냐? 자기 나라를 위해서 있으라고 하는 나라는 나쁜 나라로 지탄받아 온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전세계 국가 중에서 세계를 위해서 정책을 펴고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공산주의는 망해 가고 있습니다. 1957년을 정점으로 해서 공산주의가 갈라진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소련을 위주로 한 공산주의가 슬라브 단일민족을 중심으로 세계제패를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민족만을 위하는 공산주의가 됐기 때문에 망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민주주의의 주도국가 자리에서 몰락해 가고 있는 실상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세계를 위하는 민주국가가 돼야 할 텐데 세계를 버리고 자국만을 위하려고 하는 미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후퇴 일로에 선 미국은 자체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날 한국에서도 하나의 국가관 확립을 제창하고 있는데, 아시아에서 한국만을 위주한 국가관을 확립하면 그것은 역사의 한 시대와 더불어 흘러가고 맙니다. 소련 공산당이 그랬고, 미국 자체가 그러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렇게 나라는 작고 소수의 민족이지만 세계를 위하는 민족사상을 가졌다면, 나라의 형태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21세기나 25세기 혹은 30세기에 가서는 한국은 기필코 세계를 지도할 것입니다.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참된 국가는 어떠한 국가냐? 세계를 위하는 국가입니다. 또 참된 세계는 세계만을 위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 세계 자체는 결과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동기의 기원이 되는 하나님의 관점과 일치될 수 있는 사상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를 위하는 내용의 사상을 가지고서는 세계를 지도하고 해결해 나갈 수 없습니다. (75-330)
5. 사랑의 도리
나를 알아야
나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냐 하면, 종적인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의 계승자요, 횡적인 참부모의 사랑을 중심한 계승자의 결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은 몸과 마음이 자동적으로 90각도로 하나되어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타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혈통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사탄은 상대이상이 되는 아담과 해와를 보호하지 못하고 파괴시켰습니다. 우주의 원칙에 반발한 것입니다. 우주력이 보호하는 아담 해와에 침범해서 겁탈해 버렸습니다. 그 핏줄을 이어받아서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 앞에 또 다른 플러스로 등장했기 때문에, 이율배반적인 입장이 됐기 때문에 몸과 마음은 영원히 원수가 되어 싸워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거하는 것이 종교의 사명입니다. 종교가 아무리 하더라도 그 진리를 모르면 해방이 안 됩니다. 이론의 모든 걸 깨쳐서 그것을 해명해야 그 실체, 실제적 사회환경의 존재성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론에 맞지 않는 존재성은 남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랑길을 찾아가야 할 인간입니다. 인간 하면 남자 여자인데, 남자는 무엇이고 여자는 무엇이냐? 왜 태어났느냐? 여자로 태어난 걸 한탄한 여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남자로 태어나지 왜 여자로 태어났어? 하고 한탄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탄할 것 없습니다.
남자는 밖에 나가 온갖 것을 잡아서 집에 돌아와 누구한테 자랑하느냐? 평면적으로 자랑할 사람은 아내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남자는 춘하추동 사계절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녀서 무엇을 얻든지 잡든지 해서 아내에게 다 줍니다. 남자의 수확물을 거두어서 지킬 수 있는 주인이 여자입니다. 나중에는 사랑까지도 갖다 줍니다. 남자는 주려고 하고, 여자는 받으려고 합니다.
시집가는 사람한테 너 왜 시집가? 하면 사랑받기 위해서 간다고 그럽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시집간다는 말 들어 봤습니까? 그런 말들이 왜 나오느냐? 그건 활동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자는 사랑을 받는 동시에 사랑을 해야 됩니다. 구형이니까 양(陽)쪽으로 왔으면 남자는 음(陰)쪽으로 돌려줘야 됩니다. 돌려주면 그 사랑을 중심하고 생명으로 돌아가려고 그럽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의 생사지권을 염려하면서 아이구, 영원히 계시오 아이구, 건강하소 이러는 것입니다. 자기는 못먹더라도 남편이 건강하기를 바라고, 뒷면으로 높아져야 됩니다. 뒷면이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밀어줬으면 그걸 반대로 일으켜서 돌아가야 됩니다.
남편도 사랑 가운데서 아내의 뒷골목을 거쳐 넘어가야 되고, 아내도 남편의 뒷골목을 거쳐 넘어가야 됩니다. 그래야 구형이 형성됩니다. 구형 가운데 포괄된 부부로서 서야만 90각도를 중심한 중앙선에 가까이 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남자나 여자나 왜 태어났느냐 하는 문제의 답은 간단합니다. 남자는 여자 때문에 태어났고, 여자는 남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싸우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좋아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좋아하는 데는 지식이나 무슨 물질이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적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내라는 걸 생각할 때는 다 용서해줍니다. 사랑하는 남편이라고 생각할 때는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화가 나더라도 구형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첫번 눈을 맞춘 그 인연을 존중해야 됩니다. 그걸 벗어나면 우주에서 추방당합니다. (187-76)
왜 결혼해야 되느냐
남자 여자는 사랑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종적인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될 때 횡적인 사랑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종적인 사랑과 횡적인 사랑이 하나될 때는, 참사랑으로 몸과 마음이 하나되면 동위권을 갖습니다.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밀실에 들어가면 나도 거기에 찾아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이 가는 데는 어디든지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 벌거벗고 자는데 아내가 벌거벗고 남편 이불에 들어가면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그럴 때 남편이 왜 벌거벗고 들어와? 하며 발길로 차는 것이 아니라 어서 들어오라고 환영합니다. 아내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벗고 자는데 남편이 벌거벗고 들어오려고 하면 어서 들어오라고 이불을 젖혀줍니다. 남자 여자는 사랑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남자 여자는 왜 결혼해야 되느냐? 종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영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영존하느냐?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완전히 하나될 때는 사랑을 중심한 우주력이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할머니식구들이 선생님을 찾아오는 것은 사랑의 힘이 끌고 오기 때문입니다.
소가 암내를 낸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암소가 새끼를 배려고 할 때는 수놈 냄새가 나면 담이 있건 뭣이 있건 다리가 부러져도 받아 버리고 수놈한테 달려갑니다. 주인이 있어도 주인을 받아 치고 나갑니다.
동물의 사랑도 그렇게 직행하는데 인간의 사랑은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젊은이들을 보면,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는 죽자 살자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여자는 남자 사랑을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 젖가슴이고 뭣이고 짓눌러주고 밟아주고 마음대로 해주는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좋습니다.
여자의 젖가슴이 큰 것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서고, 궁둥이가 튀어나온 것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서입니다. 여자들은 20세가 되면 얼굴보다는 입술이 더 빨개집니다. 보통 때 보면 입술이 더 빨개집니다. 이게 신호등입니다.
여자 몸의 신호등이 바로 입술입니다. 입술이 빨개지면 눈, 코, 귀, 입, 손, 할 것 없이 온 몸이 민감해집니다. 사랑만이 오관의 자극을 통일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폭발적으로 흥분하는 것입니다. 눈도 만세, 코도 만세, 입도 만세, 귀도 만세, 궁둥이도 만세, 다 만세입니다. (187-78)
가정의 화목은 여자가 잘 해야
그러면 여자가 남자를 따라다녀야 되겠습니까, 남자가 여자를 따라다녀야 되겠습니까? 생리적으로 볼 때 여자가 빨리 성숙합니까, 남자가 빨리 성숙합니까? 여자가 빨리 성숙합니다. 그렇지만 남자는 모릅니다. 그러니 여자들이 남자보다 냄새를 더 피웁니다.
꽃이 먼저 향기를 피웁니까, 나비가 먼저 날기 시작합니까? 꽃이 향기를 피워야 나비가 납니다. 이건 여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천지이치가 그렇습니다. 여자는 15, 16세가 되면 내 상대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서 야단입니다. 곱게 치장을 하고는 자기 짝을 찾습니다. 아무리 얌전한 여자라도 사춘기가 되면 남자들이 걸어가는 궁둥이를 훔쳐보면서 저놈의 자식, 나를 몰라보고 가는구나 그럽니다. 얌전한 것 같아도 속으로는 아이고, 휘파람이라도 한번 불고 가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여자는 가짜 여자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할 때 좋아하는 것이 남자하고 여자가 다르겠습니까, 같겠습니까? 벼락을 칠 때 큰소리가 나는데, 플러스 전기하고 마이너스 전기가 같이 크게 들릴까요, 따로 크게 들릴까요? 같이 크게 들립니다. 남자 여자가 전기가 통했는데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같습니다.
그러면 여자가 쉰 살이 넘어서 혼자 되면 시집가고 싶겠습니까, 안 가고 싶겠습니까? 또 쉰 살 된 홀아비는 장가가고 싶겠습니까, 안 가고 싶겠습니까? 가고 싶어합니다.
혼자 사는 쉰 살이 넘은 어머니를 시집 보내드리는 딸이 불효 여자입니까, 시집 안 보내드리는 딸이 불효 여자입니까? 어떤 여자가 효녀입니까? 보내드리는 여자가 효녀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언젠가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선생님, 이제라도 상대를 하나 맺어주세요 했습니다. 독신축복을 받았는데도 상대를 또 맺어 달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상대가 없으니까 적적했던 모양입니다. 여자들도 그렇습니다. 못된 영감이 방안에서 똥을 싸면서 소리를 질러도 그게 싫지 않습니다. 영감이 죽기를 바라는 아내는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영감이 그러고 있으면 저거 죽으면 좋겠다 하면서 갖다 내버리려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어떤 통일교인의 아버지가 한 5년 동안 반신불수가 되어 자리에 누워 있어서 어머니가 뒤를 받아냈는데, 그 어머니가 아버지 몸이 쇠약해져 식물인간이 되다시피 했어도 숨을 쉬면 숨소리라도 듣고, 자기를 바라보면 눈동자라도 맞추고, 남편 몸이라도 거둘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가 슬퍼하는 것을 보니까 처량하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슨 힘이 어머니를 그렇게 했겠습니까? 사람은 그런 길을 찾아갑니다. 싸구려 풋내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귀중한 것이 사랑입니다.
항상 여자들이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가정 불화를 일으킨 원인이 80퍼센트가 여자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자꾸 뭘 나타내려고 그럽니다. 잘 보이려고 합니다. 무엇을 걸고, 머리를 지지고, 옷을 알록달록하게 입고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꽃과 같습니다. 꽃 향기가 오래갑니까? 오래 안 갑니다. 여자들은 아기를 둘만 낳으면 아무리 미인이라 해도 보기 싫게 됩니다. 그때에는 오히려 처녀 때 두툼하고 보기 싫던 여자들이 보기에도 잘 익은 동치미 같습니다. (187-80)
사랑이 가지는 특권
결혼을 하면 동거권이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병이 났을 때나 피곤할 때나 외로울 때나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게 동거권입니다. 그게 동참권입니다. 그가 왕의 자리에 올라갔으면 왕의 자리에 찾아갈 수 있고 어디라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경계선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결혼에는 무슨 권한이 있느냐 하면 상속권이 있습니다. 둘이 사랑하게 되면 그분 것이 내 것이 됩니다. 부부끼리 저금통장을 따로 가져야 되겠습니까, 하나만 가져야 되겠습니까? 하나만 가져야 됩니다. 왜? 그 저금통장은 우리 것이 아니라 우리 아들딸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 것을 우리 것 하는 것과 내 것 하는 것 중에 어느 게 더 좋습니까? 우리 것 하는 게 더 좋습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깃들 수 있습니다. 내 것 할 때는 사랑의 상대권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세계를 위해 빚을 져 가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빚을 져 가면서 일하던 것을 후대에 물려주더라도 원수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부모는 귀하신 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빚을 졌기 때문에 그 나라가 머리 숙이고 만국이 머리 숙이는 것입니다.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자기 후손한테 빚을 남겨줘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를 위하고 부자관계 하나만 생각하기는 쉽습니다. 사랑을 가지고 후손 앞에 세계를 위하고 하늘땅을 위해서 빚을 남겨주는 것은 후대가 갚고도 또 갚고 또 갚고 억천만 년 갚아 갑니다. 후손이 아니고는 그 갚는 것을 받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손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아들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행복했겠습니까, 불행했겠습니까? 선생님 아들딸들은 지금까지 불행했습니다. 이제 젊은이들이 되었지만, 그 애들이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미워한 적이 많았습니다. 자기들로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밥도 같이 먹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언제 같이 앉아서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여 본 기억이 없습니다. 맛있는 고기가 있어도 먹으라고 준 기억이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살다 보니 그랬습니다.
살림살이 걱정을 한 번도 안 해봤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사, 내가 걱정하는 것보다도 더 잘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외적인 면에서 고생해 봤지만 선생님 가정에는 내적인 환란이 없습니다. 탕감원칙에 의해서 할 수 없었던 그런 일들은 있었지만 병이 나고 죽고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잘 자랍니다. 그게 복입니다. 선생님이 걱정 안 해도 다 보호해줍니다. 자기들이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감기를 앓고 그래도 그냥 놔둡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 깨끗이 낫습니다. 하늘이 보호해준다는 것입니다. (187-82)
남자에게 업혀 올라가는 여자가 되어야
사람은 남자와 여자입니다. 여자는 절반밖에 안 되는 존재인데, 남자를 품어서 사랑으로 소화해야만 원만한 여자 인격이 완성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여자들은 가끔 남편한테 맞아야 됩니다.
여자들은 입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입을 벌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됩니다. 여자는 입이 무기입니다. 그리고 표정이 무기입니다. 여자들 무기는 그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말 때문에 망합니다.
영화나 방송 드라마를 보아도, 여자가 말 한마디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소화할 수 있는데 아이구, 나가지! 하고 보따리 싸들고 한번 나갔다가는 못 들어옵니다. 그걸 보는 아들딸도 엄마가 저러니 아버지한테 박대받는 것이 이치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보따리를 싸면 안 됩니다.
매를 맞으면 보따리 싸지 말고 차라리 이불에 누워서 앓으라는 것입니다. 누워서 복수하는 게 낫습니다. 밥을 한 일주일 안 먹고 천연덕스럽게 오는 것 다 간섭하고 지금 오시나요?그러면 남편이 잠을 안 자고 일주일 동안 지켜줄 테고, 그러면 화(和)가 벌어집니다. 그게 얼마나 멋진 복수입니까? 위하면서 복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나쁜 것, 남편은 나보다 나쁜 것!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악한 남편이요 부족한 남편이라 해도 그분은 나를 위해서 역사시대를 찾아왔다. 죽고 살고 망하고 하는 그 남성세계 역사 가운데서 그 깃발을 이어받아 나라는 여성을 찾아왔다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깃발을 여기에 꽂고 둘이 평화의 왕국을 이루자고, 사랑의 나라를 이루자고 만난 것입니다. 이게 부부입니다.
사랑이 살아 있어야 됩니다. 사랑이 죽으면 안 됩니다. 맹세는 다 집어던지고 남편한테 이 자식아! 해서는 안 됩니다. 여자는 반현(半弦)입니다. 반쪽 구(球)입니다. 경계를 넘어서면 안 됩니다. 여자의 갈 길은 아래서부터 왼쪽의 절반을 그려야 됩니다. 남자를 침범하면 안 됩니다. 남자를 밟고 올라서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자는 어떻게 올라가느냐? 남자가 다 내려오게끔 해놓고서 나는 거기에 업혀 올라가는 것입니다. 올라갈 때는 업혀 올라갑니다. 남자를 위하는 사람은 자연히 그 동네에서 올라갑니다. 할아버지 등도 타고 올라가고, 동네 사람들 앞에 올라갑니다.
그런 후덕한 마음을 가진 아주머니가 사는 집안이라면 그 집안에서는 3대 이내에 그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나옵니다. 그게 무슨 이치에서 그러냐? 3대에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전체를 지배할 수 있고 이 양면까지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3단계만 넘어서면 새로운 소망의 세계가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선형으로 커집니다. (187-85)
투입하는 데서 순환법도가 벌어진다
사람은 여자와 남자입니다. 남자는 왜 태어나고 여자는 왜 태어났느냐?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선생님은 위하는 철학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 자신을 위하라고 하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사랑으로 자기 전체를 투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을 중심으로 최고의 저기압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기 중에 고기압권이 만들어지면 공기가 자연히 저기압권으로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돌아갑니다. 대기는 제일 저기압권, 낮은 데로 흘러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최고 사랑의 표적으로 삼고 창조에 모든 것을 완전히 투입하다 보니 사람이 최고 사랑의 대신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도수가 차면 그냥 그대로 순환합니다.
왜 투입해야 되느냐? 투입하는 데서 순환법도가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순환하는 데는 소모가 벌어집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힘은 소모가 벌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커집니다. 역학에서는 언제나 입력이 출력보다 큽니다. 그러나 사랑의 세계에서는 입력보다 출력이 큽니다. 그것은 영적 기준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인간들을 대해서 자연세계는 균형을 취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없어지면 떨어져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샘에서 솟는 물과 같이 퍼내고 퍼내도 또 나옵니다.
하나님이 자기 전체를 투입한 것은 순환법도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은 폭발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아와서 만나게 될 때는 폭발작용을 해서 자연히 순환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폭발작용을 합니다. 그러니 영원히 컸다 작았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는 사인(sign) 곡선을 그립니다. 바다 물결이 왜 그렇게 출렁이느냐 하면, 바람이 그렇게 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냐? 그래야 천지의 모든 것이 같이 삽니다. 그렇게 호흡해야 됩니다. 올라갔다내려갔다 하는 운동을 해야 사는 것입니다. 물도 가만히 두면 썩습니다. 흘러가면 썩지 않습니다. 일년 열두 달 계속 운동하면 썩지 않습니다. 천지 이치는 유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구도 숨을 쉽니다. 그건 잘 모를 것입니다. 한 호흡을 할 때 1미터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사람도 숨을 쉬는데, 숨을 내쉬면 들이마셔야 됩니다. 내쉬는 시간이 길면 들이마시는 시간도 길어야 이상적인데, 이때 한꺼번에 들이마시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순리대로 안 할 때는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리대로, 주는 대로 환경에 맞춰 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병이 납니다. 순리와 차이가 나면 우주력이 나를 칩니다.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허물어뜨립니다. 반작용이 일어나서 나를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187-87)
위하는 데서 완전한 통일권이 벌어져
하나님은 독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투입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천년 만년 하나님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위하는 천리의 우주 존재세계에서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위하는 데 있어서 동서양을 통할 수 있고 고금을 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동양을 대해서나 서양을 대해서나 다 같은 사랑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양 서양을 극복할 수 있고, 과거․현재․미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과거․현재․미래를 극복할 수 있으니 언제나 발전할 수 있고, 동서양을 극복할 수 있으니 동서양을 통일할 수 있습니다. 이건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몸을 위해서 언제나 투입해야 됩니다. 몸을 위해서 언제나 투입하려니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내 조그만 몸이 원하기만 하면 벌써 마음이 사인합니다. 언제나 나를 위해 투입해주려고 합니다. 투입해줬으면 돌아와야 될 텐데 돌아오지 않으면 마음은 슬픕니다.
그래서 주려야 줄 수 없고 받으려야 받을 수 없을 때 불행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주고 싶을 때 주고 받고 싶을 때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사랑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혼자 주고받을 수 있습니까?
통일원리는 무엇이냐? 통일원리를 어디에서 찾느냐? 위하는 길 외에는 통일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얘기해 봅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제일 귀한 것을 서로 차지하고 싶을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이 있으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 먼저 갖고 싶어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여자가 먼저 받고 싶겠습니까, 남자가 먼저 받고 싶겠습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귀한 것을 자기가 먼저 갖겠다고 하면 큰일입니다. 자기를 주장했다가는 전부 파괴됩니다. 하나님은 위해서 존재하는 분이기 때문에 개인을 위하는 사람은 상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전체를, 자기보다 큰 것을 위해야 됩니다. 천지 이치가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아이구, 여자로 말하면 나보다 모든 면에서 작고 부족한데, 남자인 내가 먼저 가져야지 네가 먼저 가져? 하고, 여자는 당신이 뭐냐고 하면서 먼저 갖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적인 면에서는 남자보다도 여자가 뾰쪽하고 깁니다. 그렇게 자기를 주장하면 문제가 벌어집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통일을 가져올 수 있느냐? 남자가 내가 먼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려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요 이래야 됩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잡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만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여자가 내가 먼저 잡는 것은 당신 때문이오. 내가 아끼는 당신을 위해서 하는 거요 할 때는 남자도 오케이입니다. 하나님도 서로 위하는 걸 볼 때 나를 잡아라. 나도 오케이다라고 합니다. 전체가 완성이 벌어집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주장할 때는 자기 파괴, 상대 파괴, 하나님 파괴가 벌어집니다. 완전히 분리됩니다. 거기에서는 통일의 이론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간단하지만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이상을 찾아가는 최후에는, 궁극에 가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종적인 통일을 바라는데, 그 종적 기준이 어서 오라고 당겨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 위해야 됩니다. 위하는 데서 완전 통일권이 벌어집니다. (187-89)
위하는 자가 중심존재가 된다
성경에도 그랬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게 첫째 되는 계명이다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했습니다.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몸은 타락한 몸이 아닙니다. 부모를 위해서 끝까지 희생하는 사랑으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생각하고 그 부모를 사랑하던 이상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천지 어디에 가든지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왼손이 자기를 위한다고 자기를 주장해 보십시오. 이게 한번 고장나면 바른손이 위해주겠습니까? 점점점 잘한다. 너 죽어라! 너 죽어라! 합니다. 그러면 이 생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눈이 발아! 너는 나 때문에 걸어다니지? 내가 보지 않으면 길을 마음대로 걷지 못해 하면서 자기를 주장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위하는 데서 모든 것이 평준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위하는 자는 어떻게 되느냐? 중심존재가 됩니다. 중심존재는 전체를 위해서 있습니다. 또 책임자는 뭘 하느냐? 전체를 보호합니다. 위하는 자는 중심존재가 되고 책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출세를 해서 중심존재가 되어 전체를 책임지려고 하지만, 나라의 책임자는 나라를 위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망각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자기 몸보다, 자기 가정보다 더 위하는 사람입니다. 나라를 이용해서 자기 중심으로 자기 일족만을 위하는 책임자는 왱가당댕가당 우주가 파괴해 버립니다.
선생님은 욕을 먹더라도 정의를 위해 돈을 쓰려고 합니다. 돈을 대한민국을 위해 쓰기보다 세계를 위해 쓰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가 세계를 위한 본부를 짓겠다는데 왜 못 짓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계본부를 지으면 대한민국에 얼마나 큰 복입니까?
거기에 세계 정상급의 사람들이 왕래할 테니, 돈이 들어오고 물질이 들어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합니다. 선생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세계의 챔피언들입니다. 그러니 한국에는 얼마나 이익이 되겠습니까? 오늘도 세계의 전략가들을 수습하는 그런 왕초가 아침에 선생님을 찾아와서 얘기를 듣고 갔습니다.
선생님은 중국과 대만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대만이 싸우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들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 여러 일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문총재 외에는 하나 만들 수 없다 해서 중국정부가 불이 붙어 있고, 대만정부가 불이 붙어 있습니다. 중국과 대만의 통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187-91)
지옥 밑창을 뚫고 넘어가면 거기가 천국
그러면 통일교인들의 중심이요 책임자인 선생님이 통일교인들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원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이 얽혀 있기 때문에 관계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부자관계의 인연을 중심으로 하여 사랑의 도리를 통한 가정이상을 가르치고, 그 가정이상을 확대하면 지상천국이 된다고 말하고, 그 이념이 세계 박애주의라고 제시합니다. 이것을 볼 때 사랑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위대한 것이 그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세계 각 나라에 선교하러 나가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모릅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 선생님이 죄를 짓고 있는 죄인같이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남방 같은 데는 사철이 여름이기 때문에 악어나 하마가 득실득실합니다. 그런 강을 한 달에 한 번씩 비자 문제 때문에 건너갔다 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한 선교사도 있습니다. 그런 강을 헤엄쳐서 왔다갔다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여자 몸으로 그런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악어가 득실거리는 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헤엄쳐서 건너다닌다는 것은 신앙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러면 죽더라도 천국 갑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벌써 영계에서 몇 시에 떠나라 하고 가르쳐줍니다. 몇 시만 되면 들어가서 숨을 쉬지 말고 건너가야 된다 하고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만 맞춰서 그대로 하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 가 봐야 하나님이 계시는 걸 압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을 고생시키겠다는 것은 뭐냐? 부모도 몰라주고, 형제가 몰라주고, 참부모님이 몰라주어도, 누가 들이 박게 될 때 아이고! 나는 왜 고독단신이야?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길을 돌아서 찾아와야 됩니다. 그냥 그대로는 못 찾아옵니다. 찾았다 하더라도 다시 떠나서 돌아와야 됩니다.
그래서 전부 쫓아내서 들이 몰아대니까 할 수 없이 갑니다. 안 갈 수 없습니다. 몰아내는 것이 밀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평이 안 되어서 그렇지 수평으로만 돌아오게 되면 자연순환이 벌어집니다. 운동하는 것은 절반만 넘으면 자연히 돌아갑니다. 그러지 않고는 천국 못 갑니다. 지옥 밑을 돌아서 가는 그곳이 천국입니다. 인간이 싫다 하는 저쪽편 길을 개척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지옥 밑창을 뚫고 돌아가야 됩니다.
선생님은 한국의 지옥 밑창, 일본의 지옥 밑창, 미국의 지옥 밑창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감옥이 선생님을 막지 못했습니다. 감옥을 뚫고 넘어간 그곳에는 언제나 평화의 종소리가 선생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30세까지는 고생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187-93)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는 배고픈 것을 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제일 참기 힘든 것은 배고픈 것과 자는 것, 그 다음에는 정욕입니다. 몸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 들어가면 이것들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습니다. 배고픈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밤에 잠을 자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밤에 잘 때에는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이 청소작업을 합니다. 동맥과 정맥을 중심으로 심장을 깨끗이 하고, 모든 장기를 깨끗이 합니다. 그런데 잠을 안 자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가지고는 그것을 전부 다 정화시키고도 남습니다.
몸 마음이 하나되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아무리 남자 여자라 하더라도 원리원칙에 위배되는 그런 사랑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벌거벗고 있는 1백 명의 미인 가운데에 누워 있더라도 남자로서 사랑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여자로 말하면, 미남들 가운데 혼자 들어가 있어도 아무 사랑의 감정 없이 숫처녀가 혼자 자는 거와 같이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까지 거치지 않고는 해방권이 안 생깁니다. 그걸 극복해야 됩니다.
해와는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아내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속에 들어가고 해와 속에 들어가서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성성상으로 분립해서 사랑으로 규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방을 사랑으로만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나입니다. 그런데 이성성상의 분립된 입장에 있기 때문에 다릅니다. 왜 분립했느냐? 사랑을 보다 자극적으로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자극적이면서 위치를 이동시키기 위한 것이고, 또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위치를 변화시키니까 번식이 벌어집니다. 종적인 하나님 가지고는 번식하지 못합니다. 종적인 자리는 한 자리지 두 자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했느냐? 횡적인 기준은 360도가 있기 때문에 번식의 터전이 됩니다. 종적인 기준은 선밖에 없기 때문에 번식이 안 됩니다. 그래서 번식을 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한 것입니다.
종적인 기준의 하나님은 번식을 할 수 없으니 종적 사랑을 중심으로 최후에 횡적인 것에 들어가서 다시 합합니다. 그래서 번식이 벌어집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360도를 확대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 기준을 중심으로 상하로 평형선을 통해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두 방수, 열두 수가 나옵니다. 띠도 열두 띠입니다. 춘하추동 열두 방수를 중심으로 해서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도 전부 같지 않습니다. (187-94)
인간이 태어난 것은 사랑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해서다
인간이 태어난 것은 사랑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의 우주를 여행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게 불행한 것입니까, 행복한 것입니까? 나는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핏줄을 이어받았는데, 그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 동참했습니다. 그게 위대한 것입니다. 생명의 출발지는 뭐냐?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나에게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몰랐지만 그 사랑의 근본 동참자입니다. 그러니까 위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동위권을 갖습니다. 작다고 어머니가 나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작은 나를 밤낮 들여다보고 몸을 굽혀서 그저 하늘같이 위하고, 땅같이 위하고, 우주같이 사랑하려고 합니다. 사랑은 동위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상대에게는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사랑도 주고 싶고, 생명까지도 주고 싶어합니다. 사랑에는 상속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인 동시에 내 것이요, 내 것인 동시에 우주의 것이요, 우주의 것인 동시에 하나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될 때 나는 부모 사랑의 동참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전통을 불러 보면 선조로부터 그 원칙은 마찬가지기 때문에 천년 만년 마찬가지의 종적인 대(代)를 이어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핏줄로 이어 나오는 것입니다.
김씨면 김씨 핏줄이 있고, 문씨면 문씨 핏줄이 있습니다. 문씨가 지금까지 전국에 40만 명이나 퍼져 있지만 문씨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 핏줄로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핏줄을 더럽힌 사람은 역사를 배반한 사람입니다.
미국이 자유를 부르짖다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자유에는 원리원칙이 있습니다. 평화는 혼자일 때는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상대와 같이 어떤 형태에서 완전히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싫은데 나만을 위하는 게 자유입니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우주가 원하는 자유입니다. 위하는 자유를 만들어야지, 자기 독자적인 면에서 고립적 자세를 지니고 나가면 그 독재자의 자유는 파괴를 가져옵니다.
선생님이 미국에서 돈을 많이 썼는데, 그것은 사랑을 소개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사랑을 위해 돈을 투자한 것이지 돈 때문에 돈을 투자한 게 아닙니다. 사랑은 영원하니 영원한 사랑을 가지면 미국 국민은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하나님 앞에 가나 어디에 가나 부끄럽지 않습니다. 감옥에 있는 죄수를 대해서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내가 감옥에서 그들에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을 자기 어머니 아버지 이상 사랑했습니다.
선생님은 댄버리 교도소에서 1년 2개월 동안 있다가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출소하는 시간이 오전 여덟 시인데, 그곳에 있는 모든 소원(所員)들이 환송하게 생겨서 문제가 벌어지겠으니 뒷문을 열고 다른 길을 통해 나가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뒷문으로 나가게 했느냐? 댄버리 관계자들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오히려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옥중에서 선생님은 그들을 사랑했지만 그들은 사랑하지 못했으니 부끄러운 것입니다.
선생님은 통일교회를 사랑하며 나왔습니다. 이제 그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부부가 되어 아들딸을 낳아서 책임을 다하고 난 다음에 선생님의 뜻을 사랑해야 됩니다. 선생님의 모든 이루어진 뜻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해야 됩니다. (187-96)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마치는 인생길
하나님의 뜻이 뭐냐? 창조이상입니다. 창조이상은 뭐냐? 책임분담이 뭐냐? 사랑을 중심으로 모든 소유 결정을 해서 자주적인 대상 아니면 주체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을 중심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한 마음을 갖고 남편을 사랑하면 여자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쌍년이 됩니다. 바람피우고 돌아다니고 개 같은 짓을 한다고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합니다.
사람은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받습니다. 10개월 동안 어머니 아버지가 그저 만지고 품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태어나서도 사랑합니다. 학교를 다 마칠 때까지 사랑합니다. 대학교 마칠 때까지 부모의 사랑권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자기 아들딸을 최고로 사랑하는데, 남과 같이 해주지 못하면 가슴이 아프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들딸을 낳아 봐야 우리 부모가 이랬겠구만 하고 압니다. 아들딸들을 그렇게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렇게 놔두고 돌아다닐 때 부모는 어떻게 편안한 잠을 자겠으며, 언제 편안한 시간을 가졌겠느냐? 언제나 초조한 마음, 불안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하는 걸 알고 우리 부모가 훌륭하다 하는 걸 깨달아야 됩니다.
태어나서 18세에서 20세가 되면 철이 들고 결혼할 때를 맞습니다. 결혼해서도 사랑입니다. 결혼하고 또 몇년 동안 아들딸을 낳고 사랑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다가 아들딸을 시집 장가 보내게 되면 이제는 손자를 사랑하게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들딸보다도 손자 손녀를 더 사랑합니다. 할머니가 있는 사람은 다 느낄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보다도 할머니 사랑을 더 많이 받습니다. 할머니의 소원이 뭐냐 하면 손자 손녀를 쓰다듬는 것입니다.
전부 사랑에 엉켜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손이 많으면 많을수록 복입니다. 사랑에서 낳아 사랑에 의해 흘러 나오게 돼 있습니다. 인생행로가 그렇게 사랑길을 이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때문에 태어난 인생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기를 낳아 본 여자에게 물어 보면, 낳을 때는 죽을 것 같지만 낳아 놓으면 그것이 순식간에 없어진다고 합니다. 배멀미를 하는 사람은 죽겠다며 토하고 야단하지만, 육지에 닿아 한발짝만 내려놓으면 대번에 낫습니다. 딱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선생님 어머니가 한 말을 잊지 못합니다. 선생님이 조그마했을 때 누나가 시집간다고 삼촌을 비롯해 사돈의 팔촌까지 한 자리에 모였는데, 그 자리에서 어머니가 한 말이 세상에 뭐니뭐니 해도 아이를 낳아서 키울 때가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고생은 되지만 그때가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아기가 배가 고프면 어머니 젖이 불어 옵니다. 1백 사람이면 1백 사람이 젖이 불어서 아파 오면 안 조이는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젖이 제일 예민합니다. 그런데 배고픈 애를 안고 젖을 먹일 때의 기분이라는 건 말로 표현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기 어머니가 아니고는 모릅니다. 그 불었던 젖이 줄어들면 얼마나 시원하고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아기가 젖을 쪽쪽 빨아먹으면서 만지는 걸 볼 때 어머니의 사랑이 거기에서 우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희로애락의 쌍곡선이 부딪치는 그 어머니의 마음은 체험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하는 말이, 8남매를 시집 장가 보내고 나니까 세상에 그렇게 적적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던 아들딸 집을 마음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가려고 하면 못 갈 것은 없지만 시집을 먼 데로 갔으니 하루에 한 번씩 돌아다닐 수도 없고, 그러니까 언제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워하는 사랑으로 아들딸이 잘 있나 가 보고 싶어도 못 가게 되면 기도를 하고 복을 빌고 그럽니다. 그게 귀한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늙어 갑니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리적인 법도요, 지상세계에서 천상세계까지 그냥 그대로 계속됩니다. (187-99)
사랑의 도리는 위하는 것
사랑의 도리는 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에 가면 위해 살던 사람들이 높은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러니 남자로서 여자로서 사랑의 길을 가기 위해서 하는 것이 결혼이므로 결혼의 귀중함을 깨닫고 결혼이라는 배를 잘 몰고 가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뱃사공입니다. 배는 남자가 사공이 돼도 가고, 여자가 사공이 돼도 갑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이끌고 가던 남편이 병이 나든가 지치면 아내가 배를 몰 줄 알아야 됩니다. 남편을 태우고 건널 줄 알아야 되고, 업어서 건널 줄도 알아야 됩니다. 죽겠으면 죽으라고 차 버리면 안 됩니다. 아내가 지쳐서 못 가면 남편이 아내 대신 그냥 그대로 순리적으로 이어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것이 부부입니다. (187-101)
또한 부부는 앞으로 자식한테 양심적으로 당당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길을 올바로 가야 됩니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했지 할 수 없어서는 부모로서 자식을 대해 부끄러움을 느껴야 됩니다. 부부간에 도 당신을 근본적으로 사랑했지 할 수 있어야 부끄럽지 않습니다. 부모 대해서도 사랑을 해야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렇게 볼 때 자유와 해방을 어디에서 잡을 수 있느냐? 자유에서는 해방이 없습니다. 책임 없는 자유는 망동입니다. 그러니 부모를 봐도 부끄럽지 않고, 아내를 보나 남편을 봐도 부끄럽지 않고, 자식을 봐도 부끄럽지 않고, 나라를 봐도 부끄럽지 않고, 세계를 보나 하늘땅을 보나 부끄럽지 않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제재를 받지 않고 부모도 환영하고 모두가 환영합니다. 춤을 추고 노래를 해도 그저 마음대로입니다. 사랑에서만 마음대로가 벌어집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상속권이 있고, 자유의 모든 근본 형이 있습니다.
영계와 육계는 평형입니다. 종이 한 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으로 이 땅 위에서 땅 끝을 거쳐갈 때 내가 합격자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그냥 그대로 순리적으로 천상세계 어디든지 가더라도 환영합니다. (187-97)
6. 희생과 사랑과 은혜
복 중에 최고의 복이 무엇이냐
사람들은 대개 누구 집을 가면 눈치를 봅니다. 그렇게 눈치를 보는 것이 좋습니까, 어떻습니까? 음식을 먹을 경우 더 먹고 싶으면 누가 볼 테면 보라며 더 먹는 것이 좋습니다. 무사통과가 좋다는 것입니다. 무사통과는 사랑이 없으면 안 됩니다. 사랑이 없어서는 무사통과 환경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아들딸들이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자려고 할 때에 어머니 아버지,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고 잡니까? 무사통과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싫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이요, 봉사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보통 그 여자 시집가기 전에 그렇게도 고생하더니 참 시집을 잘 갔어라고 말할 때, 그 여자가 어떤 남자를 만났을 때 시집을 잘 갔다고 하겠습니까? 여자를 밤이나 낮이나 무조건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났을 때 시집 잘 갔다고 합니다. 언제든지 무슨 잘못된 일이 있으면 내가 잘못했소 하면서 전부 자기가 책임을 지고 색시를 사랑하는 그런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면, 그 여자는 틀림없이 시집을 잘 간 것입니다. 또 그렇게 희생적인 사랑을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신랑이라면, 그 신랑은 장가를 잘 간 것입니까, 잘못 간 것입니까? 잘 간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까, 안 바랍니까?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가 희생적인 사랑을 주고받으면 누가 좋아합니까? 아들딸이 좋아합니다. 그렇게 부모가 서로 좋아 지내면 그 좋아 지내는 것이 아들딸에게 좋습니다. 아들딸의 환경이 좋아집니다. 그 아들딸이 볼 때 그야말로 멋지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복 중에 최고의 복이 무엇이냐? 남을 위해 희생적인 사랑, 봉사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얼굴을 보나 마음을 보나 유순한 처녀라 할지라도, 한 번 꼭 찔러 보고 두 번 찔러 보고 세 번 찔러 보고 네 번까지 꼬집어 보면 대개는 토라집니다.
그 유순한 처녀라도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사랑을 하게 되면 바라보고 비교하다가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절망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세상에 불쌍하게 태어난 존재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하게 됩니다. 여자가 남자의 노리개야, 부속품이야? 부속품이라도 움직이는 데 박자를 맞추어 움직여줘야 부속품 역할을 하지, 이게 뭐야? 이렇게 됩니다. 자기를 위하는 사랑은 처음에는 좋은 것 같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갈라집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남편한테 당신이 뭐야? 무슨 남자의 사랑이 그래? 사랑을 더 많이 해주어야지. 당신이 남자니까 더 사랑해줘야지 이러면 그 남편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자기를 중심한 사랑은 끝장이 납니다. 그렇지만 새신랑이 새신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하면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냐 할 때 내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43-308)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냐
참된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냐? 남편 앞에는 색시요, 색시 앞에는 남편입니다. 사랑의 소재지는 자기가 아니라 남입니다. 그것이 천지 이치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상대기 때문에 상대에게 머리를 숙이고 비나이다 해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희생하고 남을 위하게 될 때에만 사랑의 본연의 소재지에서 사랑이 영원히 움직이고 꿈틀거립니다.
자기 자신이 사랑의 소재지라면 희생하는 것은 소모입니다.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체가 사랑의 소재지라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은 자기 자체의 소모에 불과합니다. 상대가 사랑의 소재지기 때문에 그 사랑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당당해서는 안 됩니다. 온유겸손하고 높여주고 희생봉사하는 데서만 사랑이 옮겨올 수 있습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상대방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완전히 점령하기 전에는 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 사랑이라고 하려면 상대를 완전히 점령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내 사랑이 안 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나는 이렇게 잘났기 때문에 당신 같은 여자가 본래부터 나를 사랑하게 되어 있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오 이렇게 큰소리를 친다면 처음 한두 번은 잘 들어주겠지만, 밥 먹듯이 자꾸 그러면 한번 복수하고 싶어지고, 그런가 안 그런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지는 것이 여자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소재지는 자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겠습니까? 그 사랑이 자기에게 있습니까? 나라에 있습니다. 세계를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냐? 세계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계를 위해서 봉사해야 됩니다. 모두가 봉사하는 가운데서도 생명을 내놓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으면 희생하려고 하는 그 사람 앞에 먼저 사랑의 인연이 맺어질 것입니다. (43-311)
참사랑은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
행복의 소재지는 사랑이고, 사랑의 소재지는 자기가 아니라 상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려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됩니다. 세계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됩니다. 생명을 내놓지 않는 사랑은 사랑답지 못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0세 된 할머니라 해도 자기 사랑하는 남편의 생명을 단 사흘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서라면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을 하더라도 고마워할 수 있는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어야만 그 부부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사랑은 희생을 기반으로 합니다.
선생님은 한 번도 잘 먹고 잘 살아라. 포동포동하게 살이 쪄서 말이나 돼지처럼 살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나타나면 또 고생하라는 타령이 나올 것 같구만. 두고 보자. 내가 점친 것이 백발백중일 거라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백발백중입니다. 백발백중인 것이 참입니다. 늙은이가 보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요, 젊은이가 보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요,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면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참이 아닙니다. 가짜는 이렇게저렇게, 왔다갔다 합니다. 사랑은 영원히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참은 영원한 것입니다. 행복이란 그렇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말씀을 하시면 반드시 고생하라는 말씀부터 하시는데,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길래 이렇게 고생을 시키려고 하시느냐?고 할 것입니다. 알고 보니 고생시키는 것이 잘한 일입니다.
고생을 시키더라도 자기를 위해서 고생을 시키면 망합니다. 그렇지만 남을 위해 고생시키면 흥합니다. 남을 위해 고생하는 사람은 사랑을 점령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수고했을 때는 그 수고의 대가로 반드시 받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그 사람의 사랑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이 사람들이 고생을 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좋아하지 잘살면 언제 알았더냐 하고 꿈도 안 꿉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대하는 것이 도리어 이들을 사랑하는 결과가 되고, 이들이 선생님을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이 됩니다.
그리고 통일교인들은 대부분 몽시나 기도 중에 선생님을 만나 봅니다. 이것이 사고입니다. 왜 그러냐? 이것은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몽시로는 언제나 선생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선생님이 가까운 오빠처럼 나타나서 손을 붙잡고 꽃동산에서 활개를 펴고 힘차게 뛰어다닙니다. 선생님은 원수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통일교인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존중합니다. (43-314)
제일 높은 자리로 점핑할 수 있는 길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동네에서 손가락질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마을, 저 고을에서 아, 저사람! 하고 손가락질받기를 원하겠습니까? 그러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은 그 나라의 여자 축에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겠습니까?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더욱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통일교인들도 선생님이 멋지기를 원하지 꾀죄죄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선생님이 가는 곳마다 그곳 사람들 모두가 선생님을 위해주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이냐? 동네를 위하여 정성을 들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함으로써 그 동네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동네가 자기를 위하게 되면, 이것은 한 리(里)면 리의 보고거리가 되어 점차로 점프하게 됩니다.
한 면(面)에 열 개 리(里)가 있다면 그 보고거리가 열 개의 리에서 드러났다 할 때는 그것이 운을 타는 것입니다. 운을 타고 그 보고거리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리에서 삥 돌고 쭉 드러나면 면장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면을 탄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면장에까지 올라가 면장이 이장들을 불러놓고 각 리의 특별한 사연이 무엇이냐고 해서 그 일을 보고받으면, 그것이 일등이 되는 것입니다. 면장이 아하, 우리 면에도 이런 특별한 예가 있구나! 하게 되어 그 면장 가슴속에 딱 일등으로 자리잡습니다.
그러고 나서 군에서 면장회의가 있을 때, 그 면장이 군수에게 그것을 보고하면 군수가 이것이 수많은 면 가운데서 제일이다. 야! 그거 훌륭하구만 하면 또 한 번 점프해서 군수의 꼭대기를 타게 됩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나라로 갑니다. 작은 동네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라로 올라갑니다.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세계로 갑니다.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하늘나라로, 하나님 앞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에게 갑니다. 참의 행로는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에게로 갑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으로 가는 데 있어서 연락병이 누구냐? 통일교인입니다. 군 꼭대기를 타고서 우리 군에 있는 아무 동네의 아무개가 제일이라는 깃발을 갖다 줍니다. 올림픽대회 같은 큰 대회의 개막식 때에는 성화를 점화합니다. 그렇게 성화를 들고 뛰어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군수가 그 깃발을 들고서 도지사 앞에 갑니다. 도에는 수많은 군이 있는데 그 군의 보고 가운데서 또 일등을 했다고 합시다. 사람을 죽이는 보고는 한 번으로 끝나지만 사람을 살리는 보고는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그렇게 되면 또 한 번 점프합니다.
이렇게 한 번 뛰고, 두 번 뛰고, 세 번 뛰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장관에게로, 대통령에게로 돈도 안 들이고 행차하게 됩니다. 받들어 모셔가는 것입니다. 나랏님한테 바칠 것은 모셔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중앙에까지 올라와 장관이 특출하고 특별한 보고거리가 있으면 보고하시오 할 때 이것이 보고되어 일등을 하면 그것이 어디로 가느냐? 대통령에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면 대통령은 이것을 외국에 가서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국가 가운데에서 이와 같은 선한 사람이, 이와 같은 사건이, 이와 같은 공적이 있을소냐 하고 자랑해서 거기에서 일등을 하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위에서 관리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일 낮은 자리에서 출발해서 곧바로 직행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고 싶겠습니까, 안 가고 싶겠습니까? 가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죽을 것입니다. 그걸 원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일이 무슨 일이냐? 리에서 일등한 내용을 면민 앞에 제시할 때 면민이 옳소, 군민 앞에 제시할 때 군민도 옳소, 도민도 옳소, 전국민도 옳소, 하나님 앞에 제시할 때 하나님도 옳다 하는 날에는 만세의 영광이 그에게 같이하는 것입니다. (43-316)
희생적인 사랑의 길만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다
통일교인들은 리를 대표해서 살고, 면을 대표해서 살고, 군을 대표해서 살고, 도를 대표해서 살고, 전체를 대표해서 살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4천만 민족을 대표한 기수요, 60억 인류를 대표한 기수다 하는 자세를 갖고 정성을 들여 나가야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지금 그 자리에서 얼렁뚱땅 적당히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생명을 걸고 해야 됩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상 큰 사랑이 없다는 말도 그래서 성립됩니다. 그런 일은 남을 위하여 희생적인 사랑을 갖지 않은 길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희생적인 사랑 앞에는 머리를 숙이기 때문에 참된 자리를 잡아서 열매만 맺는 날에는 날아갑니다. 끝도 없이 날아갑니다.
그래서 통일교인들을 그런 자리에서 연마시키고, 그런 자리에서 공신을 만들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생명이 다할 때까지 수고하고 고생하여 희생적인 사랑의 주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주의요, 하나님주의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 제일 나쁜 사람으로 죽었지만, 그분의 행적은 하늘나라까지 올라갔습니다. 어떻게 해야 가능하냐? 자기의 생명을 바쳐 희생하는 길만이, 희생적인 사랑의 터전을 준비해 놓는 길만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터전을 준비하기 위해 통일교인들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마운 일이요,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43-316)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서 열매 맺느냐
사랑의 근거지는 나 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서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세계 복판에서 열매 맺습니다. 세계 복판에서 열매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돼야 하느냐? 나라의 복판에서 열매 맺어야 되고, 도의 복판에서 열매 맺어야 되고, 군의 복판에서 열매 맺어야 되고, 면의 복판에서 열매 맺어야 되고, 리의 복판에서 열매 맺어야 되고, 마지막으로 가정과 내 자체에서 열매 맺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탕감을 거쳐야만 가정으로, 가정의 탕감을 거쳐야만 종족으로, 종족의 탕감을 거쳐야만 민족으로, 민족의 탕감을 거쳐야만 국가로, 국가의 탕감을 거쳐야만 세계로, 이렇게 발전해 나갑니다.
따라서 희생적인 사랑을 깊이 뿌리기 위하여 생명이 다할 때까지 몸부림쳐 나가야 하는 것이 심정세계를 창건해야 하는 우리 통일교인들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만국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면, 일대, 이대, 삼대, 십대, 천대, 만대를 거친 후라도 아무런 싸움 없이 세상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한 사람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고 완전히 세계를 정복하는 끝날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이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길을 개척하는 걸음을 걸어 나왔습니다. 이 길을 중심하고 시범을 보인 것이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걸어온 노정입니다. 그것이 틀렸느냐, 맞았느냐? 기독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도 망하지 않고 흥해 나왔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문화권을 중심으로 전세계가 하나될 수 있는 이 자리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전통적 사상입니다. 그 전통적 사상을 선생님이 더욱더 꽃피우고 빛내야 합니다.
과거에는 종교가 남자와 여자를 분리시켜 놓고 가정을 부정하는 길을 갔지만, 오늘날 통일교회는 가정을 이루어 세계를 사랑하는 길을 가자고 하고 있습니다. 가정 전체가 나라를 사랑했다 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역사상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개인구원을 위해서 순교의 길을 가고 희생의 길을 갔지만, 통일교회는 그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고 가정을 희생하자는 것입니다.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 가정이 희생의 자리에 서게 되면 영원히 하나님편에 설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지에 설 수 있습니다. (43-319)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정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체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의 소재지는 희생 봉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고스란히 꽃피우고 향기를 내며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서 가정을 중심으로 사랑의 터전을 이루는 곳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합니다. 그래서 사위기대의 사랑을 말합니다.
참사랑은 무엇이냐?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서로가 희생하는 전통을 갖추지 않으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깨지는 법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인연은 깨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 아들딸은 자기 부모에게 절대로 불효할 수 없습니다. 또 남편은 아내를 대해, 아내는 남편을 대해 당신은 나를 위한다는 입장에서 서로가 더 위해주고 더 희생하는 자리가 넓어질 때 그 가정에는 복이 찾아옵니다. 그러한 가정이 하나님이 찾아오는 복지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복을 받되 가정만의 복으로 받아서는 안 됩니다. 복을 받되 나라를 돕고 나서 복받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복을 받되 세계를 돕고 나서 복받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정이 천국 가정입니다. 자기 가정만을 위한 복받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가정이 복받는 때가 지나가면 망합니다. 그러나 복을 받되 나라를 업고 가정의 복을 받게 되면 내가 가정의 복을 다 누렸더라도 나라의 복을 또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세계를 업고 가정의 복을 맞아들이면, 내가 망하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또 세계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올라가서 내 생명을 희생시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다 하면, 다 망하더라도 나는 나중에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받을 수 있고 축복받을 수 있는 가정은 어떤 가정이냐? 일대에 수고한 터전에서 복받기를 바라는 가정은 진짜 복받는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고로 사람들은 선한 조상을 갖기를 원합니다. 복이 선대(先代)로부터 상속되어 내려오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을 존중시하고 전통을 이어받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는 백년 동안에, 일생 기간에 완전히 복귀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는 숱한 몇천년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그 복의 때를 찾아 나오고 있지만, 복은 아직까지 안 찾아왔습니다. 세계적인 복의 시대는 아직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세계가 하나되어 하늘땅이 화동하고 하늘땅이 기뻐할 수 있는 세계적인 천지의 때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세계가 그때를 찾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43-323)
큰 은혜는 반드시 거기에 비례하는 수고를 요구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국가적인 복을 아직까지 맞지 못했습니다. 그 국가적인 복을 맞기 위해서는 남북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소원은 남북한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남북한이 하나되어야만 비로소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한에 살고 있지만 남한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통일된 자리에서 축복을 받고, 모든 민족들에게 추대를 받고, 민족의 전통을 세워주는 가정이 되겠다고 하면서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되느냐?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됩니다. 남한만이 아니라 남북이 통일된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됩니다.
아무리 복을 받은 가정이라 하더라도 나라가 비운에 사로잡힐 때에는 그 나라의 주권과 더불어 그 가정도 거기에 휩쓸리게 됩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면 가정은 아무리 망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쳐도 망하는 운세권으로 말려들어갑니다.
가정과 나라 중 어느 쪽이 더 귀합니까? 가정보다 나라가 더 귀합니다. 나라가 아무리 흥하더라도 세계가 망하는 운세로 말려들어갈 때는 그 나라도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하지 않는 세계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면 큰 은혜란 무엇이냐? 은혜가 찾아오는데 십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십년 은혜요, 백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백년 은혜요, 천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천년 은혜요, 만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만년 은혜입니다. 십년 은혜를 받고 싶습니까, 만년 은혜를 받고 싶습니까? 만년 은혜를 받고 싶을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그러려면 만년 동안 희생하겠다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 길을 어떻게 가겠습니까? 만년 동안 가기 위해서는 만년 동안 갈 것을 남겨야 됩니다. 만년을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돈을 남기면 그것이 만년 역사의 전통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류를 사랑한 것은 억천만년 갑니다. 그렇게 사랑한 것은 억천만년 가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한 애국지사의 사랑은 그 나라가 존재할 때까지 억천만년이라도 남아집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때에 가서는 나라만을 사랑한 애국자는 남아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인은 남아집니다. 성인의 사랑은 세계적이기 때문에 성인은 남아집니다. 성인들은 나라의 배척을 받으면서 고독단신으로 자기의 생명을 걸고 그 당대(當代)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후대(後代)를 위하여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성인은 내적인 인연과 전통적인 생애와 자각의 실적을 남기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현세에 살고 있지만 미래를 위해 살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에서 산 성인의 희생적인 사랑의 도리는 세계에 남아집니다. 그러기에 성인 중의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인 중의 성인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최고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의 인연을 심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런 전통을 만년 남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통일원리가 이렇다고 말만 남겨놓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말에 따라 실천하겠습니까? 실천을 해야 됩니다.
자식을 사랑할 때도 뼛골에 사무치도록 깊이 사랑하여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은공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도록 함으로써, 자식이 부모의 가르침이 이러하니 이렇게 가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고,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는 내연의 터전을 상속시켜 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만년 갈 수 있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 후손에게 만년, 만대까지 이것을 상속해주어야 합니다. 영계에서 누가 그 복을 받아서 나누어주느냐 하면 상속해준 사람이 복을 받아서 자기 후손에게 나누어줍니다. 즉 만년 복받게 해준 선각자요 주인인 그 조상이 복을 전부 받아서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에 가 보면,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후손들이 복을 받는데 예수님으로부터 복을 나눠 받습니다. 결국 그것은 누구의 뜻이냐? 예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자의 뜻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 되는 것은 뭐냐? 큰 은혜라는 것은, 큰 복이라는 것은 반드시 거기에 비례하는 수고를 요구합니다. 큰 복을 받기 원하거든, 천년의 복을 받기 원하거든 천년 동안 그 복이 지탱할 수 있는 수고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복이 남아지지 않습니다. 그런 걸 알아야 됩니다.
큰 복은 자기 개인의 공적을 의지해서는 받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한 선조들이 남긴 복을 물려받기 위해, 세계적인 선한 선조들 가운데 자기 조상이 없다면 세계적인 선조와 같은 형의 스승을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인의 도리를 가르침받는 것입니다. 성인의 도리를 교육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계받습니다. 그것을 인계받으면 그분들이 바라던 소망의 세계를 내가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43-325)
통일교회에서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냐
옛날 성인들은 개인적인 수난시대에 죽어 갔습니다. 그 개인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 가정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되고, 종족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되고, 민족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되고, 국가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되고, 세계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 세계적인 시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수난의 과정에서 누가 희생의 대가를 치를 것이냐? 기독교를 보게 될 때, 기독교가 예수님과 선조로부터 전통적인 사상을 이어받아서 그 과정을 거치면서 치러야 할 그 대가를 누가 치르느냐? 예수님이 그러한 것을 심어놓고 갔기 때문에 그 과정을 이어받은 기독교가 대가를 치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수님처럼 죽음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죽고 살고 해서 살아 남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가정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종족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민족적으로 책임을 다하며 나왔습니다. 나라가 망하면서도 지금까지 남았습니다.
그러면 남아 나오면서 받을 수 있는 그 은사의 터전은 뭐냐?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끝날에 메시아가 올 수 있는 은사의 터전입니다. 그 은사의 터전을 아무 공 없이 맞을 수 있느냐? 반드시 내정적인 심정을 중심으로 탕감의 과정을 거쳐서 정성들여 점핑해 타고 넘겠다는 불변의 자세와 그런 과정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뭐냐? 생명을 다하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것 이상은 없습니다. 생명을 다하는 희생적 사랑, 그 사랑을 중심으로 점핑해야 합니다.
자기 리(里)만을 위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점핑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리를 위해서 일하더라도 세계를 대표해서 일한다는 사상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의 가르침은 절대사상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에서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통일교회에서 받은 은혜는 몇천만 대(代)의 수많은 인류가 찾아 나오던 최후 결실의 은사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한 개인의 공적과 수고만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못 받습니다. 받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심정을 전부 본받아야 합니다.
심정은 하나입니다. 심정은 여기에서도 통하고 저기에서도 통합니다. 아담에서 출발한 부모의 심정, 부부의 심정, 자녀의 심정을 원칙으로 해서 이 시대에도 넓은 범위에서 전체를 걸고 싸워 승리의 터전을 닦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터전 위에서 그러한 책임자를 만나 그 책임자의 명령을 받아서 거기서부터 뿌리를 잡아 가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복을 받을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면 통일교인들의 뿌리는 얼마나 깊으냐? 6천년 이상 됩니다. 우리가 남아지기까지 하나님과 선조들이 수많은 곡절을 거치고 수많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현재의 나 한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치른 대가를 총합하면, 대한민국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대가를 치른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 은사를 받았는데 통일교회를 한 십년쯤 믿은 자격을 내세워서 나는 당당하다 할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10년 15년 믿었다는 사람들이 선생님도 우리가 아니면 뜻을 못 이루지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평을 할 단계가 아닙니다.
억천만년 만에 처음 나타난 한 번밖에 없는 은사를 받아 억천만년 수난의 고비를 거치면서 수많은 수고의 대가를 치러 온 터전이 열매맺을 수 있는 자리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어떠한 인연을 통해서인지 모르지만 한 번밖에 없는 이 시대에 인연이 되어 이렇게 통일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10년 동안 통일교회를 따라 나왔다고 해서 그 10년 동안 산 것을 가지고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이걸 이어받기 위해서는 천년의 한을 품은 심정을 가지고 정성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현재에 세우기 위해서는 내 한 몸이 백번 천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하면서 마음으로도 넘고 행동으로도 넘어가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한 기준도 세우지 않고 복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도둑놈입니다. 공 없이 수고하지 않고 소유를 탐하는 자리에서 도적의 길이 생겨나고 강도의 길이 생겨납니다. 이 자리는 지극히 두려운 자리입니다. (43-327)
은사를 맞기 위해서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통일가에서 맞을 수 있는 은사는 억천만세에 남아질 은사요, 역사상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은사입니다. 그러한 은사를 맞으려니 얼마나 희생을 해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냐!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대가를 치러야 될 것이냐!
이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상적이요 망상적인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희생적인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맺어져 오고 그 인연이 상속됩니다. 그러니 통일가 전체가 합하여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희생하고 이 세계를 위해서 희생해야 되겠습니다. 내 일신이 객사의 몸이 되어 독수리밥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뼈는 변하지 않는다는 각오로, 예수님의 살은 여기저기 찢겼더라도 뼈는 꺾이지 않았던 것과 같이 나도 그런 결과를 남기면 한이 없겠다는 심정으로 나가야 합니다.
천년 만년의 역사과정을 거쳐서 찾아온 하늘의 은사를, 비록 초라한 몸이지만 어떻게 내 손길을 통하고, 내 발걸음을 통하고, 내 간절한 울부짖음과 간절한 요구와 간절한 행동을 통하여 이 세상에 남길 것이냐? 비록 내 일대에 남기지 못하더라도, 자식의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부디 내가 이룬 전통을 상속받아 내가 바라는 나라를 기필코 이루어야 된다고 유언하고 가야만 이것이 천년의 유업으로, 만년 복귀의 터전으로 남아질 것입니다.
선생님이 통일교인들 앞에서 노력하는 것은 이들에게 빚을 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빚을 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고생하는 자리에 세워놓고 선생님이 편하려고 한다면 이 단체는 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생시키고 책임을 안 진다면 그 하나님은 망합니다. 하나님을 더 고생시킬 수 있는 자리가 이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고생을 하는 데 있어서 그 고생을 보람 있는 고생으로 여기고 기꺼이 고생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 통일교회이기 때문에, 고생으로 신음하는 하나님을 고생으로 탕감해서 해방시켜 드릴 수 있는 길이 여기에서 성립됩니다. 고생은 고생으로 탕감해야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우리가 고생할 때 하나님이 애야, 이제 그만 해라. 너 하나를 놓고 내가 백 번 죽어도 좋다 하고 치켜주실 수 있는 입장이 된다면 천하가 뒤집어질 것입니다.
고생길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하여 더 고생하겠다는 마음으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힘없는 다리를 끌고 지친 몸을 이끌고 절규하는 심정으로 나서게 될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은 뿌리를 깊이 내릴 것이고, 민족을 넘어 세계가 연결될 수 있는 천운의 노정은 나를 통하여 파동 치고 세계로 뻗어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흡사 방송국에서 내보낸 전파가 파장을 이루어서 온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런 맥박의 동기가 되고 생사의 기원을 좌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리에서 이런 사명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43-328)
7. 참된 사랑과 통일세계
참사랑의 기원
우주의 근본문제를 볼 때, 사랑이 먼저냐, 생명이 먼저냐? 사랑이 먼저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생명은 부모의 사랑에서 왔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고 부모의 부모, 부모 이렇게 올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절대자인 하나님도 참사랑 앞에는 절대 복종하고, 또 그 참사랑을 절대 중심으로 하고 살겠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참사랑을 최고의 절대 중심으로 세워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고 우리는 자식인데, 아버지는 행하지도 않으면서 자식에게만 행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도 그 귀한 것에 절대 복종하고 나서 우리에게 절대 복종하라고 해야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까지도 절대 복종하면서 살고 싶어하는 참된 사랑이야말로 지옥까지도 점령할 수 있는 기틀이 됩니다. 참사랑을 소유하게 되면 슬픔과 고통도 그 참사랑 안에서 기쁨으로 승화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우주의 개인적인 권력, 지식, 금력 이상의 절대적 권한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 인간 본성의 욕구인 참사랑입니다.
그러면 참사랑은 어디에서 왔느냐? 말할 것도 없이 우주의 근본 되는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랑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결혼하려는 신부는 마음속으로 남자는 나보다 잘났으면 좋겠어! 합니다. 신랑도 자기 색시가 자기보다 잘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부모는 누구나 자기 자식들이 자기보다 더 훌륭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들은 다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참사랑을 놓고 볼 때 그렇습니다. 나 개인을 넘어서 그런 원인적 내용을 추구하는 욕망이 근본에서 왔기 때문에, 그것이 전달된 현실의 나에게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근본이 이러한 것임을 귀납적으로 결론 내리면, 하나님도 대상은 당신보다 더 잘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성의 기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상대를 통해 기쁨을 찾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조각가가 작품 하나를 만드는 데도 얼마나 힘을 들입니까?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젊음을 불태우면서 전력을 투입합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나님한테서 왔습니다.
하나님은 참사랑의 상대로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만물지중 유인최귀(萬物之衆唯人最貴)라는 말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상대가 필요해서 만든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만물을 중심이 되는 인간을 본떠서 화합하고 흡수할 수 있도록 창조한 것도 사랑이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피조세계를 살펴보면, 광물세계 식물세계 동물세계는 물론 인간세계까지 쌍쌍제도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모두들 쌍쌍으로 존재하느냐?
광물세계를 보아도 플러스 이온과 마이너스 이온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원소와 원소끼리도 서로 아무렇게나 결합하지 않습니다. 상대적 요인이 맞지 않으면 하나님이 결합하라고 명령해도 결합하지 못합니다. 그와 반대로 상대적 요인이 맞는 원소끼리는 하나님도 그들의 결합을 말리지 못합니다. 비록 급은 낮지만 이처럼 광물세계도 사랑의 창조이상형 모델의 핵에 반응할 수 있도록, 거기에 통할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사랑의 본질을 가지면 하나님의 심정에서부터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심정과 모든 만물, 동물세계까지 통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면 바위하고도 통합니다. 그러한 깊은 신비경에 들어가면 삼라만상이 다 친구입니다. 희열이 넘치는 사랑의 경지에 들어가서 내가 웃으면 모든 만물과 하나님까지도 화동합니다. (201-345)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란
결혼한 사람이면 남편이나 아내가 있을 것입니다. 그 남편 아내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눈 하나, 팔다리 하나만큼씩 사랑합니까? 알고 보면 남자는 여자 때문에 태어났고, 여자는 남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위하는 참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지었습니다. 남녀가 음양의 조화로 사랑이상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최고 사랑의 상대로서 쌍쌍의 피조물 가운데 주인 자리에 세워진 걸작품이 사람입니다. 즉 우리 자신입니다. 인간은 쌍쌍으로 살게 되어 있고, 참사랑의 인연을 가지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목수가 집을 지을 때 수평을 먼저 봅니까, 수직을 먼저 봅니까? 수평을 먼저 봅니다. 그러나 수평을 먼저 본다는 말은 수직을 인정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수직이 먼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라는 말은 남자가 먼저 있어서 나온 말입니다. 남자라는 말은 여자를 선위조건으로 하고 나온 말입니다. 또 횡(橫)이란 말은 종(縱)을 확정하고 하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선위 존재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위하여 존재하는 상대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위하려는 목적을 두고 이루어진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투입하고 또 투입하고, 주고 또 주고도 잊어버리는 사랑입니다. 주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사랑은 무한히 돌 수 없습니다. 사랑은 무한히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었다는 기억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주고 또 주더라도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에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의 사랑을 누가 주었습니까? 우리 부모가 주었습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이 주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사랑을 아버지의 입장에서 주고도 잊어버리고, 설사 그 사랑을 받은 아들딸들이 배반할지라도 또 주려고 하니 그런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옷을 사주는데 그 많은 좋은 옷 중에서 덜 좋은 것을 살 수밖에 없는 그 부모의 마음, 사주면서도 더 좋은 옷을 사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그런 부모의 심정, 그런 깊은 경지에서 천리(天理)의 뿌리가 연결됩니다. (201-347)
참사랑이 가는 길
그렇기 때문에 참사랑이 가는 길은 위함을 받기 위한 길이 아니고 위해주기 위한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도 사랑의 상대를 창조할 때 위하는 입장에서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전부를 투입하고 또 투입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본연의 중심존재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입니다.
위하는 데 있어서도 이렇게 참사랑으로 1백 퍼센트, 1천 퍼센트 위해서 다 주고 나면 진공상태가 되어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저기압이 생기면 고기압은 자동적으로 순환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위하려고 하는 곳에는 무한한 힘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인간을 위하려고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주고 또 주려고 하는 본성의 작용이 자꾸 계속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사랑의 길에는 영생의 논리가 개재됩니다.
참사랑의 기원인 하나님의 참사랑의 파트너로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숙해서, 절대불변인 참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았다면, 우리 인간세계는 근본적인 통일의 역사가 전개되어 전쟁의 피흘리는 서러운 역사가 없었을 것입니다.
때려죽이고 싶은 원수가 있어도 하나님은 벌을 줄 수 없습니다. 왜 벌을 못 주느냐? 그를 사랑하는 그의 부모와 아내, 아들딸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눈물의 골짜기를 넘은 분으로서, 그 원수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그의 부모와 아내, 그리고 자식들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채찍을 내리치지 못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정말로 체휼하게 되면 원수를 갚을 수 없습니다. 그걸 알고 나면 도리어 사람을 시켜서 원수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으로 품으려는 천리의 대도 앞에 내가 가까이 서게 되고, 거기에 천지가 감동하여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너는 나를 닮았구나! 아이구, 좋아! 합니다. 그런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한 힘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참사랑에서만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는 아들딸과 부모를 위해서, 남북이 원수시하는 그 고개를 넘어서 위하는 사랑을 가지고 통일을 바라야 합니다. 남북통일은 우리 자신만의 소원이 아닙니다. 부모 형제와 친족의 소원이며, 7천만 민족의 소원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소원하는 통일을 위해 각자가 책임을 지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기 책임을 안 하겠다는 사람은 민족의 반역자가 됩니다.
우리가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살고 십년, 백년, 천년, 만년 살더라도 무엇을 바라야 되느냐? 돈이 아닙니다. 나라가 아닙니다. 통일의 절대적 기원이 되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바라야 됩니다. 우리 손이 잘리고 사지가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하는 자식을 찾아가는 길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참된 부모인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종적인 하나님을 대표해서 세상에서 오색인종을 넘어 사랑하는 내 아들딸보다도, 내 아내보다도, 내 부모보다도, 나라를 사랑하는 어떤 애국자 이상, 어떤 충신 열녀 이상으로 살아 왔습니다. 참된 사랑과 통일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349)
자기를 주장하는 곳에는 통일이 없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은 위하려고 하는 데 뿌리를 둔 데 반하여, 우리 인간 세상의 사랑은 자기를 위하라고 하는 데 뿌리를 두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자기만 위하려고 하는 데는 통일이 없습니다. 자기만 위하려고 하면 상대권이 희생되며 파괴를 가져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우주가 독재자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이상적인 상대를 파괴하는 것, 이것이 악마입니다.
미국은 기독교문화권 국가인데, 어쩌다가 이 미국이 개인주의의 왕국이 되었느냐? 하나님의 본질로 볼 때, 전체가 악마의 씨앗이 되었기 때문에 끝이 멀지 않았다고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지금 미국의 퇴폐풍조가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미국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미국은 지금 마약과의 전쟁을 하고 있지만 이 나라의 군사력, 경제력, 지식력 등 국력을 총동원해도 마약과 불륜, 부패를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가 하는 수 없이 의사가 되어 칼을 들고 곪은 곳을 째고 병을 치유하여야 할 소명을 지니고 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구체적 책임을 져야 할 통일교회의 교리는 이론적으로도 맞아야 합니다. 참사랑을 중심한 통일의 이론 근거를 어디에 세우겠느냐?
첫째로는 하나님이 있고, 그 다음에는 아담과 해와가 있습니다. 남자인 아담은 크고 여자인 해와는 작지만 하나님만 점령하면 모든 것이 오 케이(OK)입니다. 아담이 앞에 가고 해와는 아담 뒤를 졸졸 따라가다가 하나님을 발견했다 할 때, 이 하나님을 누가 먼저 붙잡겠느냐? 자기를 주장하는 곳에는 통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같이 위해서 산다는 입장에서 아담이 내가 먼저 하나님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당신 때문이오 하면, 조그마한 해와는 어서 잡으시오 합니다. 또 해와도 내가 하나님을 먼저 잡으려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하면 아담이 기뻐합니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이 보고 너희들 어디서 그렇게 배웠느냐? 할 때, 아담 해와가 배우기는 뭘 배웁니까? 하나님이 본래 이렇게 지으셨고, 이상적 창조의 길을 따라, 참사랑이 가는 길이 그런 길인 것을 저희가 알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면 하나님은 팔을 벌리며 내 딸아, 내 아들아! 합니다. 여기에서 통일이 벌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하려는 참된 사랑의 세계에서 통일의 이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가 나온 것입니다.(201-351)
본향적 인간의 길을 찾아가려면
오늘날 인간세계의 사랑은 나를 중심한 사랑인데, 그것이 어디와 관계가 있느냐? 마음이 아닌 몸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몸이 악마의 무도장이 되었습니다. 악마의 닻줄을 매는 말뚝이 되었습니다. 마음은 하늘을 대신한 플러스의 자리에 있는데, 몸이 또 다른 플러스가 되어서 마음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시정해야 할 것이 우리 인생의 의무입니다. 이것을 아는 하나님은 수리공장으로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심을 중심으로 하는 악한 몸이 있으니 이 몸을 강제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몰아치라고 합니다. 즉 금식하라, 희생봉사하라, 죽어 살아라 합니다. 몸의 욕망을 약화시켜서 마음이 하자는 대로 순응할 수 있게 3년 내지 5년 동안 습관화함으로써 마음을 중심한 생활을 전수해주기 위한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또 하나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악마는 24시간 우리를 통해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적인 자리에만 계시기 때문에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활동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사방에서 활동합니다. 360도 사방에서 언제나 활동할 수 있으니 그런 사탄 앞에 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수직의 자리에 있습니다. 수직은 횡적 기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은 횡적 기반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환경에 강한 육(肉)한테 끌려가기 쉽기 때문에, 수직의 자리에서 정성들이고 기도함으로써 3~4배의 힘을 마음에 받고, 몸을 자유롭게 치리(治理)하여 3년 내지 5년 동안 끌고다니면서 습관화시켜야 합니다. 그 두 방법밖에는 수리할 수 있는 길이 절대 없습니다.
그런 수양하는 종교의 문을 통하지 않고는 본향적 인간의 길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철학의 길, 지식의 길, 습관적 양심의 길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몸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마음은 종적이고 몸은 횡적입니다.
근본에서 타락하지 않았으면 이 몸 마음이 하나되었을 것인데, 본연의 하나님의 이상 앞에 하나 못 되게 만든 것이 원수입니다. 그게 바로 악마입니다. 그 악마가 인간을 타락시켰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어디를 가렸느냐? 입을 가렸느냐, 아니면 손을 가렸느냐? 하체를 가렸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때에 인간시조가 타락했습니다. 그렇게 심어 놓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인간세상에 악의 핏줄이 거기서부터 뻗어 나왔기 때문에, 말세가 되면 전세계적으로 청소년들이 아담 해와와 같이 사랑의 윤리를 파괴하고 퇴폐풍조로 흐릅니다. 이때가 되면 사탄의 시대가 땅 위에 도래합니다. 이렇게 될 때는 하나님이 철퇴를 내리는 심판의 날이 찾아옵니다.
마음은 손을 들고 통곡합니다. 천리 대도에 있어서 인간을 본연의 시발지인 하나님 품으로 인도해 가야 할 양심의 사명과 소명은 다 실패했습니다. 누군가 나와서 세계 인류를 이런 타락한 환경에서 구도의 길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통일교회입니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통일교회는 참사랑의 이상(理想)으로 신인(神人)과 심신(心身)을 통일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참사랑, 참생명, 참핏줄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가 거기에서 나왔으니 우리에게도 참사랑이 있고, 참생명이 있고, 참핏줄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하고 부자일신의 관계를 갖고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몸 마음이 참사랑으로 자연히 통일되어 있듯이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도 참사랑으로 자연히 통일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의 사랑, 생명, 핏줄을 이어받은 타락 인간은 몸은 사탄편, 마음은 하나님편의 일선에서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은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354)
사랑의 3대 속성
누구나 선생님 말대로만 하면 몸을 굴복시켜 마음과 1백 퍼센트 하나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몸 마음이 하나되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한 사랑을 지닌 자는 영원한 하나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사랑에는 3대 속성, 즉 상속권이 있고, 동거권이 있고, 또 동참권이 있습니다. 남자는 대통령이고 여자는 초등학교도 못 나왔을지라도 사랑하는 부부가 되면, 대통령 것은 아내 것이 되며, 밤낮 언제라도 대통령과 동거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모든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권한도 갖습니다.
사랑에는 이런 위대한 3대 속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불변의 참사랑과 일치된 입장에 있으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 내가 가세할 수 있고, 언제든지 동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됩니다. 또 눈을 감지 않고도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통한 심정을 체휼하면 길을 가다가도 멈추고 통곡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부모는 자식이 외지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느낌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다가도 악! 소리치고 일어납니다.
사랑에는 그런 힘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과 일체가 되면 두 세계는 공존하고 통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본질적 참사랑, 천년 만년을 위하고 더 위하겠다는 그런 참사랑을 내 몸과 마음에 1백 퍼센트 흡수할 수 있는 속성을 갖추게 될 때, 마음에는 하나님의 참사랑의 뿌리가 생겨 하나님이 느낀 모든 것이 통하게 되고, 몸은 자동적으로 거기에 공명합니다. 마음세계의 참사랑을 중심으로 공명체가 될 수 있도록 창조된 것이 몸이니 몸과 마음의 통일세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본질적 참사랑을 회복해야 됩니다.
우리 인간이 이런 참된 사랑에 일체화되어서 공동 일체권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사랑이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 생명이고 하나님의 혈통이 내 혈통이요, 하나님의 소유인 피조세계가 내 피조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같은 천하를 품는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서야 천국에 입적하게 되어 있습니다.
참사랑이 깃드는 곳에는 천운이 따릅니다. 또 그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영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진짜 선생님의 생애가 불쌍한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자꾸 눈물을 흘리면 비몽사몽간에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런 경지는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를 믿고 눈물을 흘리며 불쌍한 선생님을 위로하는 마음이 생겨나면 그런 세계에 휙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 무슨 변화가 일어나느냐? 참된 기쁨이 찾아오므로 둥둥 날아다니게 됩니다. 밤잠을 안 자도 피곤한 줄 모르고,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릅니다. 낮과 밤을 혼동하게 되고, 아침인지 저녁인지를 분간 못 할 정도의 기쁨이 생깁니다. 또 얼마나 영적으로 밝아지는지 모릅니다. 통일교회를 믿으면 그런 세계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선진국가의 대학을 나오고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자기 결혼 상대를 선생님한테 맡깁니다. 선생님은 아프리카 사람이든 남미 사람이든, 동양 사람이든 서양 사람이든, 오색인종을 한데 모아 놓고 남녀의 짝을 맺어줍니다.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생명을 넘어서도 할 수 없는 일을 선생님에게 다 맡기겠다고 하는, 역사에 없는 새로운 혁명적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201-356)
인간의 사랑 완성과 타락
참사랑의 기준을 놓고 보면, 아담 해와는 쌍쌍제도로 이루어진 사랑의 자연동산을 보면서 배우고 성장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새도 수놈 암놈, 나비도 수놈 암놈, 전부가 쌍쌍이 되어 좋아하면서 새끼를 치고 살아 가는 것을 보고 인간은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성숙하여 플러스를 대표한 사랑의 왕자가 남자요, 마이너스를 대표한 사랑의 왕녀가 여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저 남자가 바로 내게 필요한 남자구나 하고 믿게 되고, 남자도 여자를 대하여 저 여자가 정말 내게 필요한 여자구나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 자녀를 낳아 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참사랑이 종과 횡으로 상봉할 수 있고 정착할 수 있는 교차점을 이루게 됩니다. 왜냐하면 참사랑이 찾아가는 길은 직단거리를 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아담 해와를 연결하는 참사랑의 길도 직단거리로 된 수직밖에 없으며, 동서로 연결하는 부부간의 참사랑의 길도 직단거리로 합하는 점은 한 점밖에 없습니다.
인간도 성숙해서 남녀가 참사랑을 중심으로 서로 직단거리에서 만나면 종적인 수직선과 횡적인 수평선과도 만나게 되는데, 자동적으로 90각도를 이룹니다. 이 점이 바로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점이며,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위치로서 단 하나밖에 없는 참사랑을 묶는 중심점이요, 모델이 되는 점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가 성숙하기도 전에 천사장 때문에 이 각도가 틀어지고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성숙했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사랑의 배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일이면 백년가약을 맺는 결혼식을 하려고 하는데 그날 저녁 도적이 와서 신부를 겁탈하여 도망가서 살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신부가 그래도 과거에 상대로 맺으려고 했던 남자를 못 잊어 찾아왔다면 그 남자가 아! 환영할지어다. 어서 와라 하겠습니까? 눈에 불이 납니다. 그러면 우리의 부모 되는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손대고 싶어도 손을 못 대고 아픈 심정을 억제하며 심어진 악이 망할 때까지 그 도수가 차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뿌린 대로 거둡니다. 그늘 아래서 한 쌍의 음란으로 뿌려진 것이 가을이 되는 지금 전세계에 촌촌이 퍼져 있는 청소년의 윤락상을 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그때입니다.
악마는 하나님한테 당신의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사랑의 절대권 이상인 참된 단일 종족권을 만들기 위한 사랑의 혈통권이 이와 같이 파괴 상태에 이르렀는데 지금도 창조이상적 논리가 적용된다고 말하겠습니까? 하고 비웃고 나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얼마나 기가 찬 노릇입니까? 본래 주인의 아들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원수의 아들이 되어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도탄중에 빠져 있는 인류를 바라보는 하나님은 한없이 비통해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완성한 아담 해와처럼 천사장을 사랑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므로, 예수님도 실패하지 않은 아담 완성자로 와서 하나님과 더불어 원수를 사랑했다는 확실한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천국에 못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도 이 문제에 걸려 일생 동안 고생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참사랑으로 일체 되는 곳에는 승리의 기준이 확립되므로, 사탄도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지관계로 일체화한 참사랑 앞에는 순응합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사탄의 피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만 생각하는 주의와 자각성 주체성을 들고 나온 것이 사탄의 행동이니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 제일주의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선한 사람은 전체를 위하려고 하지만, 사탄을 닮은 악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갈라지고, 공인(公人)과 사인(私人)이 갈라집니다. (201-359)
하나님과 본연의 아담 해와는 어디에서 만나느냐
자기 육신을 만족시키려는 사랑길을 달리는 퇴폐족들을 이 지구상에서 전부 말살시켜야 합니다. 그렇다고 다 죽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본래 상태로 돌려놓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분립시켜서 찾은 종교권의 사람들은 돌감람나무 입장인데 하나님의 소유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유로이 할 수 있습니다. 재림주님이 오시면 한꺼번에 잘라서 접붙이기 쉽도록 마련한 것입니다. 접을 붙여서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로, 즉 본연의 상태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도 본래의 아버지를 찾아야 됩니다. 그들도 본래 아버지의 생명의 씨를 못 받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참사랑으로 하나님의 핏줄과 연결된 참아들딸로서의 일체이상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가 와야 됩니다.
메시아는 어떤 사람이냐? 메시아는 참된 부모로 와서 거짓 부모에게서 태어나 거짓 뿌리가 심어진 것을 뽑아 버리고 본연의 형태를 복귀해서, 사탄을 추방하고 모두가 환영할 수 있는 자유해방의 천국세계를 창건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은 종적인 참사랑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깝습니까? 그래서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참부모가 오시면 비로소 하나님의 수직과 인간의 수평이 90도를 맞출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90각도를 맞출 수 있는 교육을 합니다.
참사랑의 공명권에 들어가면 하늘땅이 훤히 보입니다. 석가모니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한 것은 뭐냐? 그 공명권의 핵심에 들어가 보면 천하가 다 내 손 안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고, 천리가 나와 더불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사랑의 공명권에 들어가면 신앙이 필요없습니다. 구세주가 필요없습니다. 해방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는 누구냐? 하나님의 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 몸이 성전이 된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 하고 부르면 왜 그러냐? 하고 내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섭리를 하신 이유는, 첫째는 참사랑의 대상을 찾기 위해서고, 둘째는 체(體)를 입기 위해서입니다. 체가 귀합니다. 천상천국에 체를 입은 아들딸들이 오게 되므로 하나님도 체를 입은 형체를 갖춘 아버지로 임재해야 합니다. 그 체가 무슨 형태냐 하면 아담 해와 체의 내적 형태입니다.
또 인간의 마음과 몸은 서로 닮았습니다. 닮고서도 서로 하나 못 되는 것은 사탄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탄의 무대를 생애 기간에 청산짓지 못하면 저나라에 가서도 영원히 고심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본연의 아담 해와는 어디에서 만나느냐? 하나님의 사랑과 참부모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과 참부모의 생명, 하나님의 혈통과 참부모의 혈통이 결합하는 곳은 수직과 수평을 연결한 90각도밖에 없습니다. 이 점이 참사랑을 성립시키는 공식점입니다.
하나님은 종적인 참사랑의 부모고, 완성한 아담과 해와는 횡적인 참사랑의 부모입니다. 이와 같은 두 부모의 사랑․생명․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난 나의 마음은 종적인 내가 되고 몸은 횡적인 내가 되며, 이 종적인 내가 통일체가 될 때 인간은 영원한 하나님의 참사랑 파트너가 됩니다.
그러면 인간에 있어서 참사랑의 기원지와 참생명의 기원지, 그리고 참혈통의 기원지는 어디냐? 생식기입니다. 그런데 이 생식기가 천리를 파괴한 흉악한 궁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악의 본원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를 통해 거짓 사랑과 거짓 생명과 거짓 혈통이 심어졌습니다. 지극히 성스러워야 할 그곳이 천지에 제일 악한 곳이 되었기 때문에 쌍것이 된 것입니다.
남편 아내는 서로 그것을 붙들고 삽니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것을 의지하고 삽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쌍것이 되었느냐? 천리를 파괴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란한 도시, 음란한 나라는 망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에 타 버린 것과 같이 멸망합니다. 로마가 달리 망한 게 아닙니다. 절개를 못 지킴으로써 음란에 빠져 망한 것입니다.
미국이 왜 망하고 있느냐? 선생님이 일찍이 경고했습니다. 미국은 근친상간이 많이 벌어집니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데리고 살고, 아버지가 어머니가 있는데도 딸을 데리고 삽니다. 망할 수 있는 도수가 다 차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직격폭탄을 맞을 수 있는 시대에 들어가는 이 무서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선생님과 통일교회가 필요합니다. (201-360)
인간이 찾는 참은 무엇인가
통일이라는 말은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선한 사람이건 악한 사람이건 누구나 원하며,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남아지는 말입니다. 또 통일은 인간은 물론 모든 만물과 하나님까지도 원합니다.
그런데 인간세계에서의 참의 기준은 변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철학계와 사상계에 손꼽을 만한 유명한 대가들이 나타났지만, 그 제자들은 언제나 자기 스승을 밟고 올라서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욕망은 한없이 큽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까지도 이리 가! 저리 가! 하고 명령할 수 있는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양 사람만이 아니고 서양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욕망의 한계선의 분모는 다 통일되어 있습니다. 학교의 교사는 교장이 되고 싶어하고, 대학의 교수는 총장이 되고 싶어하고, 대한민국의 백성은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고, 또한 우주의 일원으로서 우주의 중심자인 하나님 대신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이런 욕망의 방향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변하기 쉽고 큰 욕망을 가진 인간이 찾는 참은 무엇이냐? 남자 앞에 참은 여자고, 여자 앞에 참은 남자입니다. 부모 앞에는 자식이 참이며, 자식 앞에는 부모가 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참은 인간이며, 인간 앞에 참은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남녀를 통하여서만 통일적 참사랑을 찾을 수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도 참사랑을 중심으로 통일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참사랑에서만 남자와 여자의 절대가치가 성립되며, 생명을 저버리면서까지도 복종하려고 합니다.
절대자인 하나님은 참사랑을 절대가치의 중심으로서 최고의 귀한 자리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참사랑 앞에 절대복종하며 살고 싶어합니다. 결혼은 남녀의 절대가치인 횡적인 참된 사랑에 절대복종하며 살고 싶어하고, 하나님의 절대가치인 종적 참사랑을 점령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생이 왜 태어나고 왜 사느냐 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으며, 창조이상이 있습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몇천억 원의 돈에 팔겠습니까? 진정 사랑하는 남편을 하늘땅과 하나님까지 몽땅 준다고 해서 바꿀 아내가 있습니까? 인류역사를 놓고 볼 때 인생관, 우주관, 신관 등 모든 문제의 해결은 참된 남자와 참된 여자와 하나님이 참사랑으로 완전히 하나로 통일되면 됩니다. 이것이 절대가치의 근원지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 욕망의 한계성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참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사랑 중에서도 참사랑입니다.
이제 전세계 인류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구세(救世)의 진리입니다. 인류가 영원히 필요로 하는 참사랑과 참생명의 말씀입니다. 재림주가 세상을 구하려고 오신다면 인류를 철창으로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때려서는 단 한 사람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손이 두꺼비 등처럼 우툴두툴하고 손가락이 꼬부라져서 펴지지 않을 정도로 수고한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은, 불효자식을 회개시키고 되돌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몽둥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심판의 대왕이요 천지를 마음대로 주도하는 하나님이라도 참사랑 없이는 천주통일은 불가능합니다. 참사랑은 어려움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참사랑에는 자기 생명을 던지면서도 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201-339)
하나님의 전략전술과 악마의 전략전술
그런데 인류역사를 보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참된 통일과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참된 사랑을 찾기 위해 애쓰고 수고해 왔는데, 왜 참된 통일과 하나의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참된 사랑을 가진 자가 없느냐? 그것은 타락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통일을 바라고는 있지만 진정 그 통일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참된 통일의 동기는 나의 아내, 아들딸, 친척, 국가, 하늘땅 등 상대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역사를 통하여 볼 때, 하나님의 전략전술과 악마의 전략전술은 정반대로 행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략전술은 맞고 손해배상까지 청구하여 찾아오는 작전인데 반하여 사탄은 먼저 치고서 빼앗깁니다. 1차, 2차, 3차대전을 봅시다. 3차대전은 사상전입니다만, 모두 먼저 친 쪽이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둑질당했다고 해서 쳐서 빼앗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맞아줍니다.
부모는 희생하면서 불효자식을 회개시키는 길을 갑니다. 하나님은 천리의 공도를 세우기 위해 스스로 사탄을 찾아가서 주인이 오면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주는데도 사탄은 이놈의 자식, 뭐냐! 합니다. 가르쳐주려고 간 주인이 오히려 얻어 맞습니다. 그러나 맞고 나서는 손해배상까지 받아 옵니다.
선생님이 그랬습니다. 공적인 입장에서 맞아 왔습니다. 공자도 상가집 개란 말을 들었지만, 역사가 지나고 나서 성인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 당대에 성인이 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로마제국 앞에 반란죄로 몰려 죽은 분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당대에는 비참하게 죽었지만, 역사시대를 거치면서 점점점 올라갔습니다. 손해배상을 청구하는데도 10년, 20년에 끝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간이 길면 길수록 세계를 완전히 포위합니다. 수천년 동안 참고 참아서 손해배상을 전부 계산하니 은행에 예금한 돈이 이자를 낳고 또 낳아서 나중에는 그 은행까지도 사고 남을 수 있는 돈이 됩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면서 찾아오는 분입니다. 맞고 빼앗아 오는 전략전술을 쓰는 분입니다. 악한 세상이 전면적으로 파괴해 놓으면 천운이 도와주어서 몽땅 넘겨다가 도약을 시켜준다는 말입니다.
핍박을 받는 것은 원수의 소유권을 상속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천운의 보호를 받습니다. 참사랑은 보이지는 않으나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인간은 보이는 귀금속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불변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금은 불변의 노란 빛깔, 다이아몬드는 불변의 단단함, 진주는 불변의 조화의 빛깔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귀금속은 영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 가운데 보물과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성인들입니다. 성인의 가르침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어떤 성인이 올바로 가르쳤다면 영계에 가서도 그의 가르침은 천상법에도 통할 수 있는 불변의 것이어야 합니다. 성인도 자기의 가르침이 지상에서는 변치 않는다고 주장했더라도 천상세계에 가서 박자가 맞지 않으면 가짜 성인으로 낙인 찍힙니다.
그러면 성인 중에 진짜 성인은 누구냐? 하나님이 만일 영계에 와 있는 4대 성인을 불러 놓고 너희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면, 제 소원은 우리 종단을 통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대주인이고 만유의 중심이신데 이런 당신 앞에 제일 가까이 있으면 복이지요. 하나님, 당신의 딸이 있다면 나는 당신의 사위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첫사랑을 받은 독생자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아질 수 있는 주인공이 됩니다. 참사랑만이 문제입니다.
그 종주(宗主)들 중에서 예수님만이 독생자로 오셨지만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갔기 때문에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분도 그 사랑을 스스로 발표는 했지만 실현을 못 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도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생을 바쳐 왔습니다. (201-341)
위하고 또 위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혈통, 참부모의 사랑, 참부모의 생명, 참부모의 혈통을 상속받은 아들딸이 되면 하나님처럼 몸 마음이 싸우지 않고 통일천하의 뿌리, 즉 기원이 생겨납니다.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언어의 혼란이 벌어지고 요사스러운 세상 판국이 벌어졌습니다. 뿌리를 잘못 박은 연고입니다. 그래서 그 뿌리 되는 악마를 처단해야 됩니다.
시집가는 처녀에게 왜 시집가느냐고 물으면 사랑받기 위해서 간다고 하는데, 이제 그런 말을 철폐해야 됩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와 시동생들을 비롯한 일족을 위하고, 그 나라를 위해서 살 때 그 여인은 십년도 못 가서 그 가문의 어머니 자리, 왕궁의 할머니 자리, 며느리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자기를 위하라고만 하면 왱강댕강 사고가 생깁니다. 밀려서 코너에 몰리고 뒷방으로 몰리고 급기야는 문 밖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천리의 명제입니다.
그런 위하는 생을 살면, 그 사람의 일생은 역대 선조들의 기준을 넘어서 비로소 역사 이래에 필승의 승세자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할 수 있는 천도의 길을 가는 거인의 일생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을 잡아서 위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나 하나를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남자가 되면 아내를 재창조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대신이 되어 2년 3년 투입하고 위하는 사랑을 베풀고, 나 닮기를 소원하면서 말없이 밤이나 낮이나 품고 또 품고 자식 키우듯이 정성들여 보십시오. 그 아내는 절대로 배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위하는 참사랑과 합일이 되어야만 가정의 통일도 가능하며, 자식을 위해 말없이 10년, 1백년 사랑을 베풀게 되면 그 부모의 사랑은 빛이 나는 것입니다.
가슴의 털이 다 빠지도록 21일간 바깥 출입도 하지 않고 참아 가며 알을 품어서 병아리를 까는 암탉을 보고도 배워야 합니다. 새끼 때문에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갑니다. 새끼를 까고 그걸 보호하기 위하여 독사가 달려들어도 물려 죽는 순간까지 독사의 머리를 쪼며 싸웁니다. 위해서 싸우는 사람은 벌을 받지 않습니다. 전체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벌 받는 자리에 가면 전체가 총동원하여 그를 구해줍니다. 이처럼 망하는 천리가 아니라 흥하는 천리를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전세계의 통일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냐? 창조원칙에 따라 위하고 또 위하라는 진리입니다. 이상적 사랑의 대상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 실패한 연고로, 정의의 혈통이 뿌리 내리지 못한 이 세상에 새생명의 씨를 가지고 침투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통일교인들은 부모의 심정으로 종의 몸을 지니고,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면서 천지창조의 대주인 된 우리 부모의 한을 풀어드려야 할 역사적인 십자가를 짊어진 것을 망각하지 말고 구세의 길로 전진해야 합니다.
그러한 무리가 국경을 넘어 온 세계로 퍼지고, 오색인종이 지구성의 동리 동리에 깃발을 열 개 백 개 휘날리게 될 때 그 세계는 지상천국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가 필요없습니다. 국경이 필요없습니다. 경찰관도 필요없게 됩니다. 통일교인들이 되면 도둑질하라고 해도 못 합니다. 생리적으로 벌써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운동에서부터 참된 사랑의 통일은 시작되는 것이요, 참된 통일세계는 반드시 현현합니다. (201-363)
8. 참사랑을 중심한 참된 가정과 우주
3대 주체사상의 궁극적인 모델은 하나님
우리는 모두 부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승이 있고, 그 다음엔 나라의 주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참을 놓고 볼 때에는 여러 기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 참된 부모가 되었습니까? 또 스승이라도 미국에 있는 하버드, 예일, 그리고 컬럼비아와 같은 아이비 리그에 속한 대학이나 영국의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라면 다 참된 스승입니까? 나라의 주인도 참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는 다 같을 수 없습니다.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대통령이면 다 참된 대통령입니까?
사실 오늘날 가정에서는 자녀가 부모를 못 믿고, 부부끼리도 서로 못 믿고, 형제끼리도 불신하는 사이가 되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을 믿을 수 없고, 나라에서는 나라의 책임자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실정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바라는 이 세 가지 중요한 자리, 즉 부모, 스승, 그리고 나라의 주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참이라는 기준에 합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참된 부모가 되고, 참된 스승이 되고, 참된 주인이 되어야 한다면, 그러한 세계 최고의 기준, 그 모든 모델의 중심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부모 중의 참부모요, 스승 중의 참스승이요, 왕 중의 참왕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참부모고, 영원한 참스승이고, 영원한 참주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면 우선 하나님과 같은 참부모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참스승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은 참주인이 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3대 주체사상입니다. 궁극적인 모델은 하나님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보내는 메시아는 누구입니까? 메시아는 바로 참부모로 오시는 분이요, 참스승으로 오시는 분이요, 참왕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정을 가져 민족을 하나 만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시 와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메시아는 제3차 아담으로 오시어 세계적 기준에서 참부모권과 참스승권과 참왕권을 가르쳐주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있고, 나라가 있고, 세계가 있고, 하늘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어느 때나 3대 주체사상이 바로 확립돼야 합니다.
우주의 핵과 같은 것이 가정
사람은 반드시 공간세계에 서게 되면 상하가 필요하고, 좌우가 필요하고, 전후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내 존재 위치가 확립됩니다. 우리가 상하를 바로 갖추고 있느냐, 좌우․전후를 바로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이 됩니다.
상하․좌우․전후관계, 그리고 가정의 문제나 나라의 문제, 세계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공식은 하나입니다. 개인을 중심으로 상하․좌우․전후가 있듯이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식이 있어야 하고, 남편과 아내가 있어야 하고, 형제자매가 있어야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라에 있어서도 나라의 주인을 중심으로 모든 가정이 동서의 문명, 남북의 문명을 다 품고, 그 다음에 세계 만민을 형제자매와 같이 품어 결국 하나의 가정모델을 이루는 것입니다. 모델은 똑같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 모델의 중심입니다. 자기가 있은 후에는 자기 가정이 있어야 되고, 나라와 세계와 하늘땅, 그리고 하나님까지 나아가야 된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며, 실제 모두 다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주에 있어 그 핵과 같은 것이 가정 개념입니다. 하늘을 부모로 보면 땅은 자녀입니다. 동서를 보면 동쪽은 남자를 상징하고 서쪽은 여자를 상징하기 때문에, 여자는 결혼함에 따라 어디든지 남편의 위치를 따라갑니다. 서쪽이 태양 빛을 받아 빛날 때 동쪽과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형제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인 형님이 역사할 때 동생들은 협조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부자관계가 있어야 되고, 부부관계 그리고 형제관계가 있어야 됩니다. 즉 이 세 관계가 한 점에 있어야 됩니다. 그 중심점은 하나입니다. 상하․좌우․전후의 중심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이 중심점이 틀리면 상하․좌우․전후관계의 균형이 다 깨집니다. 그래서 결국 상, 하, 좌, 우, 전, 후, 그리고 하나의 중심점까지 모두 7수를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7수를 이룬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전한 참사랑으로 하나되어 이 모든 것이 완전히 구형을 이루어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가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러키 세븐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로 정착해 돌게 되면 8수를 이룹니다.
참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는 한 이 중심도 변치 않고 영원히 돌 수 있었는데,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심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전부 쫓아내 버렸기 때문에 참가정이상이 모두 무너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참가정이상의 재건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통해야
서양과 동양은 그 생활관습에서 다른 점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 면에서 정반대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사람을 부를 때 손바닥을 아래로 해서 손짓을 하는데, 그렇게 하면 서양사람들은 오히려 더 멀리 가 버립니다. 그러니 내가 싫어서 가 버리나? 하고 오해하게 마련입니다. 서양의 글은 횡적인 것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는데, 동양의 글은 종적인 것으로 본래는 위에서 아래로 쓰고 읽습니다. 그러니까 서양 책은 왼쪽부터 열어 보지만 동양 책은 오른쪽부터 열어 봅니다.
서양문명은 횡적 문명입니다. 악수로 인사하는 것은 횡적인 인사입니다.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하는 동양문명은 종적입니다. 동양에는 가정제도의 핵이 조상이 되어야 한다는 전통이 있지만, 서양에는 조상을 핵으로 삼는 개념이 없습니다. 자기 중심입니다.
모든 것이 핵에서부터 연결되기 때문에 핵이 움직이지 않으면 전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중심 핵으로부터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모두 다 동등합니다. 그걸 쪼개면 12조각이 되는데, 그 12조각은 어디에다 갖다 맞춰도 다 맞습니다. 할아버지가 원하면 손자가 반대하지 않고, 아들딸도 그것을 원하게 되어 3대가 모두 함께 원하게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 아들딸 전부 중심에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중심으로 볼 때, 부자관계도 하나여서 일체라고 말하고, 부부관계도 일체라고 말하고, 형제관계도 일체라고 합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이러한 관계를 일체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의 중심인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사랑을 중심으로 부모와 자식이 하나가 되고, 부부도 한 몸이 되고, 형제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모든 것의 가치가 동등해집니다.
참된 진리의 길
그러면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돈 많이 번 백만장자가 되는 것입니까? 나라의 최고 권력을 손에 쥔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아들딸인 아담 해와에게 바란 것은 그들이 자라서 효자․충신․성인․성자(聖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라는 것과 같이 가정에서 효자가 되겠다는 생각, 나라에서 충신이 되겠다는 생각, 세계에서 성인이 되겠다는 생각, 그리고 하늘땅 앞에 성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모든 성인들은 효자가 되고, 충신․성인․성자가 되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인간의 인격 완성에 필요한 효자․충신․성인․성자의 도리에 합격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내용을 모르고서는 가정에서 참된 부모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참된 부모라면 효자․충신․성인․성자와 같은 전진적인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자기 자식들에게 효자․충신․성인․성자의 도리를 다하게 하고, 그 후에 하나님까지 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볼 때 비로소 참된 부모, 참된 스승, 그리고 참된 주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참된 부모의 자격이 있고, 참된 스승의 자격이 있다 할 때는 참된 주인의 자격도 갖추게 되고, 나아가서 참된 왕이 될 수 있는 자격까지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은 참된 효자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충신의 개념도 없습니다. 성인의 개념도 없습니다. 성자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그래서 망하는 것입니다.
누가 성자가 되기를 바랍니까? 하나님이 원합니다. 성인은 누가 원합니까? 세계가 원합니다. 나라는 무엇을 원하느냐 하면 충신을 원합니다. 가정은 효자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진리의 길입니다.
사랑을 중심한 이러한 진리는 한 방향으로 영원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참된 부모가 되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참된 주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인이나 참된 성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정에 그러한 참주인이 없었고, 나라와 세계에 그러한 참주인이 없었고, 결국 하늘땅에 참주인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 진리의 길을 가야 하는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알아야 됩니다.
참된 부모는 효자가 됐으니 충신이 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참된 부모는 그 효자에게 너는 가정을 희생시켜 충신의 길을 찾아 나라를 섬겨야 되고, 나라를 희생시켜 성인의 도리를 다해 세계를 위해야 되고, 세계를 희생시켜 하늘땅이 바라는 길을 가야 되고, 하늘땅을 희생시켜 하나님을 찾아가야 된다고 가르쳐줘야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가정을 위해서 희생해야 효자가 됩니다. 또 애국자가 되려면 그 가정 전체를 희생시켜서라도 나라를 구해야 됩니다. 성인은 자기 나라를 희생시켜 세계를 구해야 됩니다. 성자는 세계를 희생시켜 지상천국을 이루어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부모들 가운데 보다 더 자식을 위해 사는 부모가 참부모요, 어떠한 스승보다도 보다 더 위하겠다는 스승이 참스승이고, 어떠한 대통령보다도 더 위해서 희생하는 대통령이 참대통령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투입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평화와 통일의 세계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란 하나도 없다
그런데 개인주의가 나올 수 있습니까? 자기에게 있어서 자기만을 주장할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으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난자로부터 자라 태어날 때, 99.999퍼센트가 어머니의 뼈와 피, 살입니다. 그리고 0.001퍼센트인 아버지의 정자 하나가 합해져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기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태어날 때 자기 자신만이란 개념은 없었습니다.
아무리 잘났다는 사람도 자기 혼자서 잘나게 됐다고 말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뼈나 피, 살 전부가 어머니 뱃속에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이 몸의 중요한 부분들은 어머니 몸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우리 몸의 모든 요소는 난자와 정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주의란 있을 근거가 없습니다.
위라는 말이 생겨날 때에는 아래를 인정하고 하는 말입니다. 위라는 것만 가지고 개인주의가 성립될 수 있습니까? 개인만이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른쪽이라고 하는 것은 왼쪽이라는 것을 전제하고서 하는 말입니다. 전후를 보더라도, 전 하면 후를 먼저 인정하고 하는 말입니다. 남자라는 말도 남자 혼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자를 선위조건으로 삼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누구 한 개인의 말이 아니라 우주적인 사실입니다.
남자는 왜 생겨났습니까? 남자들은 흔히 자기 혼자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들 하지만, 남자는 여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는 필요없습니다. 절대적으로 필요없습니다. 결국 자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오관을 보십시오. 내 눈이 내 눈을 보기 위해서 생겨났습니까? 코나 귀, 입, 손도 모두 상대를 위해서 생겨났습니다. 오관을 총동원해 집중시킬 수 있는 그 힘이 뭐냐 하면 참사랑입니다. 눈, 코, 귀, 입, 그리고 손은 참사랑을 위해 생겨난 참사랑의 도구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사람을 도둑이라고 합니다. 남의 것을 가져다가 자기 것으로 써 먹는 사람이 도둑입니다. 그러니 여자를 위해서 태어난 남자의 오관과 몸을 자기 멋대로 쓰는 사람은 도둑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무엇이 다릅니까? 생식기관을 포함한 그 몸이 우선 다릅니다. 그러면 남자의 생식기관은 누구에게 절대로 필요합니까? 남자의 생식기관은 여자를 위해서 있습니다. 인간의 생식기관이 하나는 오목이고 하나는 볼록인데, 왜 그렇게 됐습니까? 둘 다 뾰족하든가 둘 다 납작할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다르게 생겼습니까? 모두 상대를 위해서입니다. 남자 것은 여자가 절대 원하고, 여자 것은 남자가 절대 원합니다. 절대로 여자 것이 남자 것이고, 남자 것이 절대로 여자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걸 점령함으로써 사랑을 안다는 것입니다.
둘이 하나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통해서만 최고 경지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절대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다 인정해야 됩니다. 둘이 완전히 하나되는 그 자리에서 이상적인 부부가 생겨납니다. 바로 그 자리에 절대사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그와 같은 사랑의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합니다.
그러므로 앱설루트 섹스(절대성)는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고, 프리섹스는 자기와 사탄을 중심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은 문학작품이나 미디어를 통해 프리섹스를 자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 모두는 정치인이나 경제인, 예술인, 작가, 언론인들과 하나가 되어 앞장서서 프리섹스를 막아야 합니다. 프리섹스는 완전히 없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인을 받은 선생님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 현재 입장과 180도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나라가 되고, 다른 세계가 됩니다. 틀림없이 변합니다. 변화시켜야 할 이 악한 세계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탄을 포함한 악한 세계의 사람들은 하나님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두가 선생님을 반대해 왔습니다. 국가와 세계 차원에서도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으므로 하나님이 선생님을 보호해 왔습니다. 사탄은 선생님을 싫어하지만 하나님은 좋아합니다. 아무리 선생님을 서럽게 하고 아래로 짓누르고 무시한다 할지라도 선생님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누구도 선생님을 반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 어떻게 이러한 세계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어떠한 힘을 가지고 세계의 석학들과 최고의 지도자들을 가르치는 이러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힘을 선생님에게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고, 그러한 방향성을 가르쳐주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보호하고 가르쳐주므로 선생님은 항상 성공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역사 이래 영계를 통할 수 있었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선생님만큼 영계를 알고 하늘나라 영계를 통일해서 이 땅에 온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어인을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상 통일을 못 합니다. 하나님이 영계에서 그토록 훈련시켜 기른 것과 같이, 이 땅에서도 그렇게 계속 인도하고 있습니다.
20여년 동안 선생님은 신교(新敎)의 땅 미국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 2천년 동안 엄청난 순교의 피를 흘린 기독교를 이 나라에 정착시키려는 하나님의 의중을 알았기 때문에 미국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구교의 땅 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40여년 전에 선생님을 받아들였으면 남북미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한국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래 하나의 세계시대의 도래
그러면 참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되느냐? 자기 생명을 던진 후 또다시 부활해서 세 번 이상 더 투입하겠다고 하는 데서 참사랑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타락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걸고서라도 이것을 넘어서야 됩니다.
그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와서 그 길을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위타주의입니다. 우리 부부는 일생동안 수백억 달러의 돈을 벌었지만, 우리 것은 한푼도 없습니다. 다 세계를 위해서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또 고생하고 벌어서 또 투입하는 그런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래 하나의 나라와 하나님 아래 하나의 세계 중 어느 것을 좋아합니까? 일부 미국 사람들은 하나님 아래 하나의 세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 일부 백인들은 흑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앵글로색슨계 백인 개신교도들이 미국의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을 중심한 미국은 세계를 위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미국만을 위한다고 하면 미국은 존속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때가 바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래 하나의 세계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계를 위해 일하고 계시며, 또한 그러한 섭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돕고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한 사람들을 도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세계에서 살기를 바라면서도 그러한 섭리의 동참자가 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세계문화 창건의 주역이 되자
하나의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우리 부부는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인종과 종교, 국경, 언어의 장벽을 초월해 미래세계의 기반을 다질 이상적인 유엔대학을 세우는 것입니다. 또 세계적인 지식을 교류하기 위해 원격 통신대학이 필요합니다.
의학에서는 타락으로 인해 생긴 육신의 병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의 화합을 통해 동서양의 갈등까지도 고치게 한다는 차원에서 통일사상과 통일의학을 개발해야 합니다. 동서 사상과 의학이 합해야 앞으로 에이즈와 같은 난치병을 고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의학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농촌의 젊은 사람들 중에 에이즈와 같이 현대의학으로도 고치기 힘든 병들을 고칠 수 있는 특별한 치료법을 영계로부터 가르침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세계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벌어집니다.
이 모든 과제들은 이미 미국의 브리지포트 대학과 한국의 선문대학을 중심으로 실천에 옮겨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선생님은 이미 미국에 워싱턴 타임스뿐만 아니라 전 남북미 나라들을 커버하는 언론기관을 만들었으며, 이 언론기관들은 곧 세계 1백85개국으로 확장되어 세계가 하나로 배우고 협력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미국에 가서 미국 국민에게 하나도 빚을 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국이 신세를 졌습니다. 하늘로부터 받은 축복으로 선생님은 미국을 축복해주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하늘로부터 받은 축복을 세계에 전부 나누어주었습니다. 남미도 한국도 선생님을 환영하여 미국과 같은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보다 더 많이 투입하고, 보다 더 많이 주고 잊어버리는 자가 중심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법입니다.
앞으로 가정에 있어서 부모 앞에 효도하고, 나라 앞에 충신이 되고, 세계 앞에 성인이 되고, 하나님 앞에 성자가 되는 길을 가야 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가정․나라․세계․하늘땅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이 우주 자연 가운데 천운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받는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혈족이 되어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한 참된 가정과 참된 세계(우주)문화 창건의 주역으로서 다가오는 21세기를 평화와 통일의 세계로 건설해 나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