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심장(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3장 참사랑의 예수님)

무지... | 20180622091630
5.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심장  
     
예수님의 심정과 심장
     
아담과 해와가 타락한 그날부터 하나님의 소망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성전으로 완성한 사람, 하나님과 일치되는 심정과 심장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대신한 하나님의 실체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한 역사적인 섭리노정을 대신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성전인 동시에, 4천년 동안 섭리했던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대신한 분으로서 실체적인 산 가슴을 갖고 나타나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줄 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었고, 하나님의 사정을 느낄 줄 아는 예수님의 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뛰는 심장은 하늘을 동맥삼고 인간들을 정맥삼아 하늘이 동하면 예수님도 동하고 인간이 정하면 예수님도 정하는 일체의 관계를 맺어야 했고, 그것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는 예수 그리스도의 내적 심정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몸을 대신한 예수님의 외적 심장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30년의 준비기간에 남이 모르는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창조의 이념을 이루어 영광을 누리려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피조만물은 주인을 잃어버린 입장이 되었으므로 이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아시는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쓸쓸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30년 준비기간을 거치신 예수님이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하여 택해 세운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뜻을 받들고 나타나 새로운 복음을 전하게 될 때, 그 가슴은 말할 수 없는 사명감에 벅찼을 것입니다. 30년 동안의 슬픈 생애를 청산하고 하늘의 서러움과 하늘의 슬픔을 가로막아 잃어버린 에덴의 주인공을 다시 회복시켜야 할 사명을 짊어진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이 뛰는 심장을 갖고 나타나셨습니다.
택함받은 선민 앞에 나타나 하나님 대신 새로운 말씀을 전하게 될 때, 뜻을 따라나오던 이스라엘, 섭리의 뜻을 대신하여 부름받은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이념의 전체를 대신한 분으로, 자기들의 소망의 실체로서, 자기들의 영광 자체로 모셔드릴 수 있는 환경을 갖추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벅찬 가슴을 갖고 나타난 예수님 앞에 반기를 들고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대신하여 세웠던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써 서러움을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선민이 예수님 앞에 뜻을 대하여 나타나지 못하게 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고 서러워하던 심정을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신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무한히 슬프셨을 것입니다. 분개심도 컸을 것입니다. 하늘 앞에 호소하고 저주하며 그들을 치라고 명령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심정을 다 떨쳐버리고 뛰는 가슴을, 뛰는 심장을 억눌러 가면서 옛날 에덴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이 참던 그 심정을 생각하시며 서러운 심정을 품었던 것입니다. 반대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여 소망을 두시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속죄의 제단을 쌓아 놓아야 할 세례 요한이나 아브라함 이후 40여대 동안 선민의 혈족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인도되어 온 요셉 가정도 사라지고, 뜻을 받들어 자기를 잉태하고, 낳은 후에 30년동안 길러오던 마리아와 형제들과 종족들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장 20절 )'고 하신 예수님의 심정, 하늘의 뜻을 붙들고 외로운 신세로써 싸워나가야 했던 예수님의 뛰는 심장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뛰는 심장 속에 하나님의 수고가 컸던 것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분개심은 컸을 것이고, 택한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크면 클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한 원한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3-299, 58.1.26)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가 될 자 누구였나
     
때는 지나갔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뛰는 심장의 맥박이 오늘날 여러분의 심장과 혈관, 동맥과 정맥을 통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천적인 심장의 맥박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책임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예수님은 2천년 동안 고대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이나 기다려 왔습니다.
발 붙일 곳이 없는 사정에 처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뒤에 두고, 하늘을 신봉한다는 유대교를 뒤에 두고, 30여 생애를 걸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천신만고 수고를 하며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도 뒤에 두고, 택함받은 아브라함의 혈족으로 내려오던 요셉 가정도 뒤에 두고, 하늘을 등지고 가정을 등지고 교단을 등지고 돌아서 광야로 나가실 때 예수님의 뛰는 심장은 어떠했을 것인가? 
돌아서서 가시는 그 발걸음에 원한이 있었다면 하늘을 대신하여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민족을 원망하고, 분풀이를 한다면 저주의 불길을 내려 달라고 심판의 호소를 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민족의 갈 길을 염려하고, 배반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염려하면서 그들을 다시 품기 위하여 광야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민족을 뒤에 두고 광야에 나가 40일간 금식했습니다. 이처럼 광야에 나가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40일간 외로이 헤매게 된 것을 생각하면 분함이 사무칠 수 있었으나 4천년 동안 참아 나온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고, 그래도 이 민족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을 느끼신 예수님은 이들에게 제2의 생의 기대(基臺)를 조성해 주기 위하여 광야에서 먹을 것을 먹지 않고 40일간 하나님 앞에 민족적인 제물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기간 중에 먹을 것을 먹지 못해 몸이 마를대로 말랐습니다. 40일간 금식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조여들었고 심장은 쇠하여 들어갔지만, 40일 금식 고개를 넘은 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하고, 먹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심장이 죽어 들어가는 예수님을 염려하여 울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힘없는 몸이었지만 천륜의 새로운 이념이 막혀버린 것을 터치기 위한 싸움의 노정에서 끓어오르는 마음을 품고 계셨던 예수님, 하나님의 외로운 심정을 생각하며 사무치는 마음을 품으셨던 예수님에게 친구는 나타나지 않고 사탄이 나타나 시험했습니다. 이런 사정에 처하면서도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야만 했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탄이 나타나 예수님의 마음과 몸까지 파괴시키기 위해 3대시험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고, 민족을 대신하고, 선조들을 대신하여 새로이 결심하고 나선 예수님의 뛰는 심장을 우리는 느껴야 합니다. 
결국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자신을 배척했던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찾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또 자신을 반대하고 몰아낸 유대교를 다시 찾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광야에 나가 하나님과 담판지은 후에 이 죄악의 도성을 복귀시키기 위한 싸움에 불타는 충성심을 갖고 결연히 나섰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예수님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을 대신하여 죽을지라도 자기 일신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각하고 자기를 시험하던 사탄을 대하여, 자기를 배척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제2의 공세를 펴고 나섰던 예수 그리스도의 뛰는 심장을 느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니까 그런 사정을 참을 수 있었고, 그런 고난과 비난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니까 더 참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남보다 더 예민하고, 남보다 더 극한 심정에 사무치셨기 때문에 누구도 갖지 못한 비장한 심정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가 잃어버린 도성을 다시 찾기 위해 나섰을 때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슬픈 생활과 헐벗는 생활과 굶주리는 생활을 다 거쳐나온 입장에 섰을지라도 땅 위에서는 예수님의 사정에 동참하는 동지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나의 친구요, 하나님만이 나의 아버지라는 심정을 가지셨습니다. (3-301, 58.1.26)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민족이 배반하고 교단이 비난하고, 친척과 혈족이 외면하고, 자신의 모든 것이 없어질지라도 오직 예수님의 안위와 소망과 심정을 채워주는 것은 하나님은 나와 같이 계시다는 사실, '하나님은 내 것'이라는 하나의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4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다시 하늘을 염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 일으키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만 인류에게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광야에 나가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인 줄 알았습니다. 자신을 길러주고 무한한 기쁨으로 찾아오는 분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자 언제나 자신을 키워주고 자신을 품어주고, 자신을 위로해 주던 하나님의 어려운 사정과 슬픈 심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상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직접적인 하나님, 자신과 같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각오로 원수들 앞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40일 금식기간이 끝나고 새로운 싸움의 노정을 출발한 예수님, 민족을 대신하여 4천년의 하나님의 원한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물리치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예수님은 예수님 일신만으로 나선 것이 아니고, 4천년 동안 그리던 모습,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아니었고, 예수님의 행동도 예수님 자신만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한 것이었고, 예수님이 하신 행동도 하나님의 행동을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속에 살아 계시어 자신의 심장을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이스라엘 동리를 찾아 들어갔습니다. 처음에 민족이 반대할 때에는 외로운 심정을 갖고 광야에 나갔지만 이제는 몰려오는 시련과 핍박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부딪쳐 승부를 짓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갖고 나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다시 찾아드리기 위해 나선 예수님, 몸이 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후회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에 불타면 불탈수록 더욱 뛰는 심장을 억누를 수 없었던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님의 사정을 알아 주셨습니다. (3-303, 58.1.26)
     
     
3년 공생애노정을 걷던 예수님의 심정과 심장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을 걷기 시작하신 초기는 제자들로 사도들을 택해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하게 될 때에도, 4천년 동안 아담을 잃어버리고 서러워한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대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실체성전이 되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실체성전이 되게 인도하겠다는 마음이 뼈에 사무쳤습니다.
반대하는 이스라엘 민족도 사탄의 종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체로 나타나야 할 하나님의 아들딸인데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반대하는 그들을 보며 서러워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은 자기를 위해 사신 노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셨으며, 제자들과 인류를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뛰는 심장은 하나님을 대신했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서러움이 예수님의 서러움이요, 이스라엘 민족의 서러움이 예수님의 서러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사도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민족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심정에 사무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자기의 친자식 이상으로 소중히 여겼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은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심정을 갖고 참사랑의 생활을 하신 노정입니다. 죄악에 허덕이고 있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였고, 민족과 사도들의 심정을 대신하였던 예수님인 것을 안 사람이 없었고, 예수님의 사정을 안 사람이 땅 위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3-304, 58.1.26)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신 예수님의 심정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애달펐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따르는 세 제자들은 예수님과 행동을 같이하지 못하고 각자 따로따로 행동했습니다. 예수님만을 통해서 가야 하고,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호소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하는 심정으로 호소했고, 제자들을 염려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음을 모르고 피곤에 지쳐 잠들었던 것입니다. 
생사의 결판을 짓는 마당에서 예수님의 심정은 하늘과 땅이 녹아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3년 동안 친아들딸같이 길러준 사랑하는 세 제자는 예수님의 심정을 모르고 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불같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세 번씩이나 나와 제자들을 깨우시던 예수님의 딱한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며 느끼던 서러움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제2 민족으로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반대하고 유대교가 반대하여 다시 3년 공생애노정을 거쳤지만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느낀 하나님의 서러움과 예수님이 30년 사생애기간과 3년 공생애기간에 느끼셨던 서러움, 나아가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 애달픈 심정을 느끼면서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의 심정을 느낀 사람이 없었습니다. 3년 공생애노정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하던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걸어가신 일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목적이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33년의 생애를 걷고 보니 남은 것은 예수님 혼자였습니다. 40일 금식을 끝마칠 때도 안타까운 심정과 서러운 사정에 사무쳐 있는 예수님에게 원수 사탄이 나타났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인간 세상을 대해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고, 어느 곳에도 의지할 수 없고, 거처를 정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정에 처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원수 사탄이 나타나 시험하니 예수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대민족과 인류를 염려하시기에 초조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역사적인 사명을 대신하여 탕감의 노정을 다시 걸어야 할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표한 예수님의 애달픈 심정을 대신할 수 있고, 대신 싸워 드릴 수 있으며, 예수님의 뛰는 심장을 대신하여 염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참아들딸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3-306, 58.1.26)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심정과 심장
     
소망의 조건을 전부 끊고 나선 광야 노정에서 예수님은 사탄과 싸워 승리하셨지만, 예수님에게는 실체 제물을 드려야 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으나,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과 교단을 잃어버리시고 혈혈단신 불쌍하게 골고다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또 이 사정에서 원망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요, 저주하여야 할 12사도였으나, 채찍으로 몰아내고, 고함치고 아우성치는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며 말없이 십자가를 지고 필사적으로 골고다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기에 인간적인 감정이 있었다면 억울했을 것입니다. 저주와 원망이 사무치고 통분한 마음이 가슴에 꽉 찼지만 이 민족을, 이 세상을 다시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저주의 입을 막고 서러운 심정을 돌이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을 대신하여 이 민족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하면, 후대의 인간에 대한 구원섭리가 다 파괴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구원의 한 기준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억울함으로 나타내고, 하나님 대신한 자체로서 저주하고 원망하는 입장이었다면 이 세상은 희망이 다 끊어졌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 시간으로 마지막이 되었을 것입니다.
죽음의 고개를 넘고서라도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저주하고 원망해야 할 민족을 대하여, 복수해야 할 원수들을 대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 하고 애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2 구원섭리의 뜻을 인계받아 출발한 안타깝고 심각한 순간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제2 구원의 실천자로 세울 수 있었고, 인간들에게 부활의 은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정에 처한 예수님은 원수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과거 역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염려하시고, 후대의 자손들을 염려하시며 자기의 피살이 찢어지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늘의 역사적인 서러운 심정을 대신 짊어지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원한과 역사적인 구원을 위한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하늘이여! 탕감하시옵소서!'라고 호소하셨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서 하나의 위안의 장소도 찾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만민을 위하여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외로운 고아와 같이, 몰리는 방랑아와 같이 외로운 길을 걷던 예수님의 생활이 종국에는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하나님의 서러움은 하늘땅을 뒤집어 엎는 듯 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세 시간 동안 천지가 어두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잃어버린 아담을 찾기 위해 후아담으로 세웠던 예수님이었으나 골고다의 죽음길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바라보는 기막힌 심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서러움이 내 서러움보다 크고 하나님의 분함이 내 분함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아픔이 나의 아픔보다도 크다는 것과, 반대하는 민족이지만 다시 찾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도리어 '내 죽음은 경하나이다' 하며 순종의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이런 순종과 효성의 심정에 벅찬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렇게 돌아가셨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위로하는 사람, 예수님의 시체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셔 드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제멋대로 취급하던 로마병정들은 나중에는 창을 들고 예수님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이렇게 심장을 찔린 예수님의 괴로움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의 피가 다 빠진 심장이로되 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잔인한 원수들 앞에 선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해야 합니다. (3-307, 58.1.26)
     
     
끝날의 성도에 대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소원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증거해 나오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대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자기의 심장과 같이 느끼고 예수님의 뜻을 대신 인계받을 자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죽은지 3일만에 무덤을 헤치고 부활하여 택한 제1 이스라엘을  잃어버리고, 제2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복음 운동을 전개하여 찾은 사람들이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신자입니다.
오늘날 세계 기독신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실수를 복귀하기 위한 제2 이스라엘이요, 제2의 선민입니다. 그래서 이 민족 앞에, 인류 앞에 이 하나의 소망과 구원의 뜻이 남아 있으므로 이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예수님도 하나님도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4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나타나야 했는데 깨진 이스라엘을 오늘날 우리는 복귀한 이스라엘로, 예수님을 반대하던 이스라엘을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스라엘로 복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해 오신 예수님을 배척한 이스라엘은 깨졌으나 오늘날 제2 이스라엘인 우리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억울함을 해원해 드릴 수 있어야 다시 주님을 맞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끝날의 성도들에게 바라는 최대의 요구는 다시 오시는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애달픈 심정을 품고 나오던 그 심장의 내정을 체휼하는 아들딸입니다. 그러한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나와야만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한을 풀 수 있고, 하나님의 한도 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한까지 풀어드려야 인간들은 기쁨의 한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한 후에도 배척하던 제자들을 만났지만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부활한 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 붙들려 할 때에도 붙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의 한 날이요, 기쁨의 한 순간이었으나 역사적인 슬픔을 이어온 그 사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예수님 앞에 기쁨의 한 조건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부활한 후에 예수님을 붙들던 마리아의 심정을 넘어서서 예수님의 내적 심정을 통찰하고 그의 심정까지 알아서, 하나의 주인공의 자격을 갖추고 하늘과 땅을 어깨에 짊어진 승리자의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어떠한 인간 세상의 사탄이라도 밟고 하늘 앞에 나설 수 있는 하나님의 심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벨의 피가 역사를 대신하여 호소한다 했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해야 할 예수님은 피의 제물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린 것으로만 끝낼 것이 아니라, 이 피를 거두어 다시 우리 몸 마음에 지녀 그 산 피로 사람을 움직여 낼 수 있는 천적인 심정과 심장을 소유한 자격자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배척하던 자들을 대하여 다시 한 번 용서의 마음을 품으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하며, 죽든지 살든지 하나가 되어 죽음과 삶의 길을 가겠다고 각오하고 나섰던 제자들이 배척하고 나설 때, 거기에서 예수님이 다시 아량으로 그들을 대하여 당신이 대신 죽음의 고비를 당할지라도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용서하였던 그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또 배척했던 제자들을 다 뒤에 두고 부활하여 기쁜 마음을 갖고 홀로 승천하여야 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반대했던 사도들을 찾았던 심정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3-309, 58.1.26)
     
     
역사적인 해원의 출발점
     
역사적인 해원은 예수님의 슬픈 심정을 위로하여 기쁜 심정이 되게 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날 땅 위에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붙들고 슬퍼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택한 제2 이스라엘적 입장에 있는,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을 바라보게 될 때, 택한 이스라엘을 다시 수습하여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산 제물을 드려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애달픈 사정이 역사적인 원한으로 맺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제2 이스라엘을 동원하여 이들의 보호자가 되고, 이들을 대신하여 싸우는 대표자가 되고, 이들을 대신하여 사탄 대해 싸우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정을 체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심정을 체휼하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인계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나섰던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시던 것과 같은 사탄의 시험이나 가이사의 심판이나 로마 병정의 창질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책임을 완수하는 하나의 동지가 있어야 하며,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하나의 가정과 종족․사회․국가․세계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교단을 밟고 올라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단결해야 될 때가 왔습니다. 말씀을 통과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소유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소유해야 했었는데, 예수님이 실체 통과의 문이었는데도 이 문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고, 나아가 신․구약 말씀으로 통과할 시대가 지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실체 통과시대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말씀을 잃어버린 것이 에덴의 원한의 조건이 되었지만 실체를 잃어버린 것이 더 큰 원한이었습니다. 누가 말씀을 딛고 올라가 실체 통과의 문을 개방시킬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런 문이 없으니 오늘날 우리들이 이 문의 재료인 돌이 되어 이 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만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즉 수억의 사람이 읽고 있는 성경말씀보다도 이 말씀을 통과한 한 아들을 더 중요시합니다. 그 아들은 말씀을 머리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심장과 몸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머리로 아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말씀을 가슴으로 알고 몸으로 알아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기 혼자서도 사탄 대해서 싸울 수 있는 실체제물을 요구하는 때가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30여 생애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풀기 위해 구약의 말씀을 박차더라도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되어, 어느 누구도 갈라 놓을 수 없는 이 하나의 문을 이 땅 위에 만들어 놓기 위해 수고한 생애였고, 또 그런 자격을 갖춘 한사람을 찾기 위한 싸움의 노정이었습니다. 
이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셔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되자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는 원한의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원한을,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해 예수님이 몸부림치시며 수고하셨지만 이 일을 성취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6천년 역사의 종말에 처한 오늘, 그 섭리를 인계받아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하나님과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이 땅 위의 신부는 누구일 것인가? 그 신부는 신․구약을 알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30여년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숨은 슬픔을 품고 남모르는 배척을 받았습니다. 40일 동안 먹지도 않고 사탄과 싸운 예수님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고 맹세하고도 배반한 제자들을 다시 품기 위해 나섰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꿈에도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로되 예수님은 부활 후에 제자들을 다시 찾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예수 그리스도이거늘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를 대신해 교단을 조성해 나오던 사두개교인과 바리새교인들이 전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았는데, 오늘날 여러분은 그런 교단을 밟고 올라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3-311, 58.1.26)
     
     
하나님의 한을 풀어드리는 참아들딸이 되자
     
여러분은 아버지의 말씀을 대신해 그런 교단을 밟고 올라선 실체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심장과 심장이 연한 예수님의 제물을 하나님이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된 산 실체의 제물이 이 민족을 대신한 교단 위에 나타나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민족과 인류는 잠자고 있습니다. 
세계가 하나의 심장의 움직임에 의해 하나의 형태를 갖추어 나왔고, 하늘의 심정과 예수님의 피살을 통하여 역사가 흘러나왔는데 이제 열매 맺을 수 있는 하나의 실체가 우리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안타까운 심정과 뛰는 심장을 소유하는 상대자가 되어야만 제3 이스라엘로 남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심정을 품고 제물되셨고, 제2 이스라엘을 만들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런 각오를 가져야만 제3 이스라엘의 선조가 될 수 있으며 지상천국 즉, 에덴 동산의 본연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부활의 실체를 갖추어 역사적인 모든 고통을 거치고, 시대적인 원한을 벗어난 모습으로 하늘을 찾아 나서야 하나님의 아들딸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가 하나님의 4천년 역사의 심정을 대신하여 실체의 제물로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6천년 동안 복귀섭리하신 하나님의 심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대신하여 하늘이 동하면 같이 동하고 정하면 같이 정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 6천년 역사를 회고하며 서러워하고, 불신했던 이스라엘을 생각하며 서러워하고, 미래에 제3 이스라엘의 안식의 동산을 세워야 할 사명을 품고 염려하면서 누가 가든 아니 가든 '나 홀로 이 책임을 지겠나이다' 하고 하늘 앞에 맹세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사수할 수 있는, 후계자의 책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이제 신․구약의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신․구약 말씀보다도 예수님의 심정이 무엇이고, 예수님의 심장이 어떠한가, 즉 예수님의 내적인 심정을 알고 외적인 심장의 동함을 알아서 하늘이 동하면 여러분도 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또 하늘의 동과 정에 같이 움직이고, 천륜을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 승리의 제물로 여러분을 바쳐드려야만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한을 푸실 것이요, 하나님도 이 땅 위에서 한을 풀 수 있고, 만민 만상 모두가 하나님 앞에 그를 따라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연히 이런 입장에 섰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역사적인 운명을 대신하여 필연적인 노정의 제단을 인계받았다고 생각하십시오. 이제 여러분 자신이 예수님이 골고다 산정에서 쌓고 넘어가던 서러움의 장벽을 밟고 올라서서 겟세마네동산으로부터 골고다의 산정까지 올라가 열두 사도를 한데 묶는 승리의 제단을 쌓고, 사탄을 굴복시켜 '아버지여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승리의 아들딸들이 되어야만 주님 앞에 신부의 자격을 갖출 수 있습니다. (3-313, 58.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