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야 할 예수님의 생애노정(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3장 참사랑의 예수님)
무지... | 20180618065231
3. 가야 할 예수님의 생애노정 예수님이 주장한 교리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첫번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독생자는 하나님의 사랑 전체를 받을 수 있는 대표자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누구보다도 사랑 받는 대표적 자리에 섰다는 입장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는 역사시대에 어느 누구도 발언하지 못한 것인데, 예수님은 천정(天情)과 인정(人情)을 대표해 발언하는 데 제일인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대해 신랑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신봉하던 모든 신자들은 신부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 예수님과 같은 공적 생활을 거쳐갔습니다. 그 신랑 신부라는 것은 인정과 인륜을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천정과 천륜을 중심삼은 신랑 신부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종이 되지 않고 친구가 된다' 더 나아가서는 '형제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이 주장한 교리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의 자리에 서는 것이요, 그런 아들로서 하나님이 바라는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 형제지권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인륜과 인정을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천륜과 천정을 플러스시켜서 천주가 공인할 수 있는 세계관을 중심삼고, 하나의 섭리관을 중심삼고 일치된 노정에서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가정적으로는 가정의 주인이요, 생활적인 면에서는 형제적 인연을 갖추는 것이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바랐던 소원이요,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와서 실천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50-39, 71.10.31) 예수님이 가야 했던 길 예수님이 가야 할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독생자의 길을 지키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소년시대, 청년시대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장년시대, 노년시대를 거쳐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은 물론, 저 세계에 가서도 영원히 하나님의 독생자 입장에서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나야 되는 것이요, 자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야 되는 것이요, 철이 들어 생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환경에서 해야 됩니다. 청년시대에도 그래야 되고, 장년시대에도 그래야 되고, 노년시대에도 그래야 됩니다. 인간으로서 생애노정을 다 마치고 난 후에도 역시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날 때부터 전 생애노정까지 사랑하였지만, 예수님을 사랑했던 인간을 대표한 개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요셉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어머니 입장에서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지만, 인간을 중심삼은 입장에서 사랑하기가 쉬웠지 천정을 대표한 자리에서 나면서부터 생애노정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사랑하는 어머니의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칫집에서 그 어머니를 대해서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 누구 앞에 내놓을 수 없는 슬픔을 품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한 단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의 가정적 배경을 두고 보면 요셉은 의붓아버지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의붓아버지 품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사이를 두고 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에게 기쁜 존재이기보다는 도리어 의심받는 존재요, 마음과 심정세계를 엇갈리게 하는 존재로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맞지 못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사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트러블이 생기고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천정의 인연을 대표한 아들로 태어났으면 그 천정을 예수님 자신에게만 미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받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 자신에게만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횡적으로 아버지면 아버지에게 연결시켜야 되고, 어머니면 어머니에게 완전히 연결시켜야 합니다. 부모에게 사랑을 연결시키고, 형제에게 연결시키고, 친척 교회 이스라엘 나라에까지 그 사랑을 횡적으로 연결시켰더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50-40, 71.10.31) 사랑을 하지도 받지도 못한 예수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과연 전면적으로 인간을 대해 '내사랑이 이렇다' 해서 그 사랑을 전부 퍼부었던 사람이 있었느냐? 30세에 공생애노정을 나서서 제자들을 찾아다닌 예수님 입장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혹은 열두 제자들이 과연 예수님이 사랑하고 싶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느냐? 그 제자들은 그 시대에 어떠한 권위를 갖춘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외적 환경에서 존경받을 수 있는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공생애노정을 거칠 때, 세리의 친구요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는 죄인들과 더불어 동거하기를 즐겨하고 같이하기를 즐겨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대하던 무리는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대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멸시받던 세리와 어부들이 예수님의 친구 입장이었습니다. 그 일파들은 전부가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12사도들이 존경하는 입장이 되었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과정에서 기독교의 발전과 더불어 기독교 문화권이 발전함에 따라 그 비례적인 가치로 세워진 기준이지 예수님 당시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을 거쳐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때, 예수님이 지극히 사랑했던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저버렸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죽어가는 자리에서 함께 죽기를 다짐하는 참다운 제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죽기를 맹세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어도 선생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맹세했던 베드로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그런 것을 아는 예수님이 과연 천정의 일념을 다짐하는 자리에서 수제자 베드로 이하 열두 제자들을 사랑할 수 있었겠느냐?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되어 있는 참아들로서, 하나님의 심정을 대표한 자리에서 인간을 진정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저버린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얼마나 고독했을 것인가? 이 땅 위에 찾아온 것은 사랑을 받기 위함인 동시에 사랑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을 하려니 사랑할 사람이 없고, 사랑을 받으려니 사랑해 줄 사람이 없는 입장에서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고독한 심정은 누구도 몰랐습니다. 그 누구도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산정을 거쳐 죽음의 자리에 임할 그때까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예수님을 위해서 애절한 심정을 가지고 당신이 가는 길을 나도 가야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하나의 사랑의 대상이 있었던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그렇게 고독한 길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50-42, 71.10.31) 예수님이 바라시던 사랑의 심정 예수님은 좌우의 강도들과 같이 죽음의 길을 가는 고독에 극한 자리에서 오른편 강도의 몇 마디로 위로를 받고 '너는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가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인간을 찾아왔다가 떠나가야 할 지극히 고독한 자리에서 이 땅 위에 인정의 일면을 남기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예수님으로서는 오른편 강도에게라도 그러한 심정적인 내연을 남겨 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다시 인간세계를 찾아와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찾을 도리가 없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오른편 강도를 중심삼고 동정하는 자리에 섰던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비참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 인연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강도, 죽음의 자리에 동참한 오른편 강도에 대해 동정의 마음을 남기고 가려 했던 예수님의 사정은 참으로 비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 위에 찾아온 것은, 4천년 동안 수고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던 것은 오른편 강도 하나 만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보내 죽음길을 가려가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고이 품어 키우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고, 유대교를 만든 것은 유대교 자체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남아짐으로써 그 나라가 남고, 예수님이 남아짐으로써 그 교단이 남게끔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워진 것이지, 예수님 이외에 남아질 수 있는 교단이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는 반기를 들고, 그 교단은 죽음길로 내모는 입장이요,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는 길을 동정하지 않는 외로운 자리에서, 제자마저도 배척하는 심각한 죽음길에서 동정의 한마디를 남긴 사람이 오른편 강도였습니다. 그 오른편 강도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나라 전체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하나님의 심중의 사랑을 대표한 예수님은, 그 나라 전체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자기가 받는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을 가지고 지금까지 수난길을 가려 나오면서 참고 남아진 무리들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요셉 일족과 사가랴 일족, 자기의 친척 전부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아들로서의 권위를 대신하고, 또 같은 사랑을 받는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은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 부모는 물론이요,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들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내 형제, 내 부모라고 붙안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언제 어느 때 예수님이 그러한 사랑을 해봤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못 해본 예수님이었습니다. (50-43, 71.10.31) 부활 직후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더냐 십자가에 돌아가신 3일 후에 부활해서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찾아간 예수님의 그 길은 기쁜 길이 아니었습니다. 생전에 이 땅 위에서 심정적 인연을 맺어야 했는데, 그 누구도 하나님이 준비한 자리에서 맺지 못하고, 이 터전을 다 쓸어 버리고 난 이후에 인연을 맺었는데, 그때가 부활 직후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한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야 주님인 것을 알고 반가워 예수님을 붙들려 할 때, 예수님이 그리 말라고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데는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고 나서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나서 친척을 사랑하고, 친척을 사랑하고 나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나서 세계를 사랑해야 합니다. 부활한 자리에 그 누구보다도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찾아와야 할 사람은 예수님과 지극히 가까운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여야 하고, 제자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활한 예수님 앞에 한 여인만 나타났을 때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간 배반하였던 제자들을 다시 수습하는 자리에 나섰다가 떠날 날이 가까워 오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다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게 될 때, '주여! 주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하고 막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첫번에는 얼굴을 들고 반겨 대답했지만, 다시 예수님이 심각한 자리에서 쏘아보며 묻게 될 때, 베드로의 마음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당당한 자신을 갖고 '그 무엇이 맞부딪쳐 오더라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천지가 요동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꺾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베드로가 대답한 것이 아니라, 엇갈린 입장에서 왜 이렇게 물을까 하며, 며칠 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던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즉각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 물음에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했을 때는 얼굴을 들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세 번씩이나 배반한 녀석이 그렇게 묻는 장본인 앞에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당신이 알지 않소. 그 무엇이 반대하더라도 다 제거해 버려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고 도리어 스승에 대해서 반문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두 번 묻고 세 번 묻게 될 때, 점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는 그 말 속에는 지극히 고독했던 예수님의 생애를 종결짓기 위한 최후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입장으로 와서 그 사랑을 인간에게 몽땅 부어 놓고 가야 할 예수님이 오히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비참한 자리에 서게 되고 말았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내가 안다'고 칭찬하는 말로 부활 이후 찬양할 수 있는 사도를 못 가진 기독교는 비참한 종교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제자를 가지지 못한 예수님, 제자마저 사랑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50-45, 71.10.31) 십자가란 구원의 도리가 아닌 기독교의 수난의 도리 예수님의 공생애노정은 거룩한 노정이 아니라 비참한 노정이었습니다. 4천년 이스라엘의 역사가 뒤집히는 노정이요, 유대교의 역사가 깨져 나가는 노정이요, 요셉 가정의 축복의 터전이 폭파되는 노정입니다. 제자들과의 인연이 전부 다 갈래갈래 찢겨져 소망이 없는 노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과 연결시켜 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고 난 후에도 배반했던 제자들을 찾아가 사정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가 막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배반했던 무리들인 열두 제자를 중심삼고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 것을 수습했던 것입니다. 사랑의 인연을 찾아왔던 예수님을 죽음길로 몰아냈기 때문에 그런 무리는 벌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을 남기기 위해서 가던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어받기 위해서 찾아가는 무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십자가가 생겨난 것은 구원의 도리가 아니라 기독교의 수난의 도리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수난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갔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가지 않고는 사랑의 자리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기 전이 아니라 죽고 난 후에 사랑의 약속이라도 받겠다고 찾아 나온 것이 지금까지 2천년 기독교 역사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은 신랑이요, 자신들을 신부라고 믿고 나왔습니다. 사지사판에서 시련의 순교 역사를 거쳐온 선지선열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 '내 사랑하는 신랑이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에게 퍼부어 주시옵소서' 할 수 없습니다. 살아서 못 한 사랑을 죽어서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비참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적으로 한번 만나려면 7년 이상의 수난길을 가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죽을 힘을 다하고 나서 부활의 권한을 찾아 가지고 거기에 동참자가 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 사랑의 인연을 거쳐서 오른편 강도 이상의 자리에 서지 않고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기 전 자리로 끌어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됩니다. 죽을 고비를 넘어가서 베드로와 같은 자리에 서야만 사랑의 약속을 받고 돌아올 수 있는 것이지 그전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50-49, 71.10.31) 사랑의 도리를 펴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 예수님은 사랑할 수 있는 나라와 교회와 종족과 부모, 형제의 권(圈)을 거느려 제자들을 사랑해야 됩니다. 먼저 하나님이 이루어 놓은 나라의 중심은 교회요, 교회의 중심은 요셉 족속이요, 요셉 족속의 중심은 요셉 가정이요, 요셉 가정의 대표자는 마리아요, 마리아 앞에 나올 수 있는 중심존재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예수님으로부터, 마리아로부터, 요셉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동시에 사탄의 어머니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동생을 낳는 그런 어머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장막절이 되어 모두 예루살렘으로 갈 때 예수님도 가지 않으니까 예수님의 동생들이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 한복음 7장 4절)' 하고 비소(鼻笑)했습니다. 이런 껄렁껄렁한 동생들을 낳은 마리아가 잘못입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 나라요, 이스라엘 나라의 중심은 유대교요, 유대교의 중심은 요셉지파입니다. 하늘의 족속을 대표할 수 있는 지파가 요셉 가정입니다. 그 가정의 중심은 마리아요, 마리아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도리를 펴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생자의 사랑을 받았으니 인간세계 만민에게 횡적으로 적응시킬 수 있는 그 사랑의 진액을 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길을 헤쳐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남길 수 있는 사랑이 문제입니다. 그 사랑을 예수님이 그냥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냥 가져가면 예수님은 망합니다. 그 사랑을 남겨야 할 사명을 갖고 이 땅 위에 왔다가 못 남기고 갔으니 다시 와서 남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땅 위에 다시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온다고 합니다. 한을 풀려면 원수들 앞에 실체로 다 풀어 놓아야 원한이 풀립니다. 이 땅 위에 사랑의 인연을 중심삼은 예수님의 신부가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신부는 예수님의 부인입니다. 부인이 되기 전에 먼저 상대가 되고 그다음에 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50-54, 71.10.31)
유대교는 신부를 마련해 가지고, 오시는 메시아 앞에 신부 족속, 신부 민족, 신부 교회, 신부 나라를 마련해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신부의 가정, 신부의 족속, 신부의 교회, 신부의 나라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부를 위한 나라, 신부를 위한 교회, 신부를 위한 족속, 신부를 위한 가정이기 때문에 신부가 시집가는 날 모두 함께 신랑 앞으로 가야 합니다. 나라의 중심은 교회요, 교회의 중심은 요셉의 씨족이요. 요셉 씨족의 중심은 요셉 가정이요, 요셉 가정의 중심은 마리아요, 마리아의 중심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신부를 중심삼고 관계되어 있는 나라와 교회와 종족과 가정은 전부 신부가 시집가는 날 같이 가야 합니다. 시집가는 날 같이 가야 할 운명에 있는 신부가 '아이고 우리집은 이렇게 부자집이고, 우리집은 이러이러한 법을 갖고 살았는데, 신랑집은 왜 이렇게 가난해' 하고 불평하다가는 쫓겨납니다. '우리가 살던 법은 이런데 이 집 법은 왜 이래' 하고 반대하다간 쫓겨나는 것입니다. 신랑이 세우려는 도(道), 신랑이 생활 무대를 갖추려는 환경을 부정하다가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기 전, 재봉춘시대가 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나라는 망할 나라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는 예수님을 죽인 죄로 2천년 동안 나라없이 유리고객하는 민족으로 수많은 민족의 발굽아래 희생당하는 민족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 민족이 자주적인 국가 형태를 갖추었다는 것은 때가 된 것을 말합니다. (50-59, 71.10.31) 인간이 찾아 나아가는 최후의 목적점 타락한 인간들은 사랑을 잃어버린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인간들 앞에 사랑의 주인공으로서 지상에 다시 천적인 사랑을 복귀하려고 왔던 예수님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영계로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영적인 사랑의 기준을 세워 놓고 육적인 사랑을 복귀해 나가는 노정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상하가 있고 전후가 있고, 좌우가 있습니다. 그 상(上)을 대신함이 부모요, 하(下)를 대신한 것이 자녀요, 전후를 대신한 것이 부부요, 좌우를 대신한 것이 형제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칙입니다. 인간은 이 길을 찾아나가야 하는데 그 중에서 전후 관계에 있는 부부 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신랑 신부를 제일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신한 신부, 자녀를 대신한 신부, 형제를 대신한 신부를 찾으려 하십니다. 신랑 신부를 보내어 땅 위에 하나의 기준을 세우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은 신부를 중심삼고 상(上)으로는 하나님, 하(下)로는 자녀, 좌우로는 형제가 있어 그 전체가 사위기대의 형태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대표한 상대존재인 신부를 찾아 나온 역사가 2천년 섭리노정입니다. 남자된 자는 여성을 존중해야 하고 여자된 자는 남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여자는 남자를 대할 수 있고, 남자는 여자를 대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의 분체(分體)요, 여자는 어머니의 분체입니다. 분신(分身)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귀과정에서 남녀가 서로를 대할 때 그 얼굴을 보고 따라가는 사람은 깨어집니다. 상대를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일성(一性)이라 생각하고 남자면 여자, 여자면 남자를 존중해야 합니다. 상호 존중심을 가지고 개개인의 상대적인 성품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 본연의 인간들이 걸어야 할 노정입니다. 자식을 대할 때에도 그들이 아무리 자기의 아들이라도 그를 아버지의 분신으로, 딸은 어머니의 분신으로 생각하고, 그 성(性)을 존중할 줄 아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전개하여 만물을 창조하고, 그것을 총합시켜 만물의 주인공으로 인간을 창조했던 그 이념을 마음에 품고서 자식을 붙안고 사랑할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타락세계에 있는 그 자식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슬퍼하던 그 감정에 '오냐 너는 하나님이 기뻐하고, 인류가 고대하고, 만물이 고대하던 본연의 사람이 되라' 하며 눈물 흘릴 줄 아는 참다운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찾는 신부는 하나님의 대신이요, 인류의 대신이요, 천추 만대 후손의 대신 존재라는 감정을 가지고 신부를 찾으셨습니다. 이것이 신랑된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런 신부를 찾는 날에는 하늘과 땅을 품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부모를 대해서도 마찬가지요, 자녀를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를 대신하고 자녀를 대신할 수 있는 일체이상(一體理想)의 감정을 가지고 실체형(實體形)을 갖춘 신랑 신부로서 상봉하는 날이 와야 합니다. 그날이 와야 천지, 즉 피조세계의 비극적인 모든 것, 또는 하늘과 땅에 막혔던 모든 것이 전후 좌우 상하로 화동(和動)할 수 있습니다. 그 날이 우리 인류가 바라는 날입니다. 그런 사랑의 심정을 갖추고 하늘 땅 앞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4천년을 역사하여 예수님과 성신을 세운 것처럼, 실체신랑의 입장에서 실체신부를 상봉하게 됩니다. 이런 관계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요, 이러한 실체적인 상대를 찾는 것이 인간이 걸어가는 목적(目的)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몸에 하나님이 들어와 일체(一體)로 화(和)할 수 있는 이상동산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인간이 찾아 나아가는 최후의 목적점이요, 인간이 찾아야 할 필연적인 운명의 표준점입니다. (5-81, 58.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