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참사랑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3장 참사랑의 예수님)

무지... | 20180616165642

2. 참사랑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
          
인류역사는 하나의 남성을 찾아 나온 역사
     
우리의 본심은 사탄과 인연을 맺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인연 맺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몸이 이것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몸은 사탄과 짝을 맺게 되었고, 마음은 하나님과 짝을 맺으려고 합니다. 인간은 이 두 갈래 길에 놓여 있습니다. 삼팔선, 즉 경계선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경계선에서 작용하는 힘의 3분의 2가 몸이고, 3분의 1이 마음입니다. 그러니 마음과 몸이 싸우면 몸이 번번이 이깁니다. 
왜 그러냐? 마음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랑을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상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몸이 마음보다 더 강하냐? 하나님과 마음의 사랑을 맺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먼저 몸의 사랑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마음보다 강합니다. 아직까지 마음의 사랑은 맺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사랑을 맺기 위하여 찾아 나온 것이 하나님의 섭리역사요, 종교의 역사입니다. 신랑 신부의 마음의 사랑, 새로운 신랑 신부의 마음의 사랑 기원을 역사에 제시해 놓기 위해서 종교가 그것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자리잡은 남자가 나오지 않고는 완전한 여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그런 남자를 찾아 나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하나님과 마음의 사랑, 즉 본심이 지향하는 사랑의 인연을 찾아 그것과 완전히 관계를 맺어 절대적 기준에 연결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을 찾아 나온 역사입니다. 이것이 메시아 대망사상(待望思想)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재림주님이 온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미륵보살이 온다고 하고, 유교에서는 진인이 온다고 하는 등 고차원적인 종교에는 재림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내용을 중심으로 섭리해 나옵니다. 이렇게 이론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인류역사는 하나님이 그러한 하나의 남자를 찾아 나오는 역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62, 69.11.23)
     
     
하나님이 찾아 나오는 남자
     
세계의 모든 문화권은 이상적인 하나의 남성에 의한 이상적인 사상권을 목표로 하고 형성돼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절대적인 사상권을 중심삼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상은 하나의 절대적인 이념권을 중심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상은 하나의 남자로부터 나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남자가 이어 나왔습니다. 여자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한 남자를 찾아 나오는 역사입니다. 
그 남자는 본심의 사랑을 중심삼고 최초로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못 이루었기 때문에, 몸의 사랑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마음의 사랑을 갖지 못합니다. 아담 해와가 이율배반적인 내용을 중심하고 사탄에게 끌려감으로써 마음의 사랑이 몸의 사랑에 눌렸습니다. 마음의 사랑을 통하여 몸이 사랑을 받아야 할 것인데, 오히려 몸의 사랑을 중심삼고 마음의 사랑이 눌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사람은 3분의 2는 사탄세계에, 3분의 1은 하늘세계에 속해 있는데, 마음의 힘을 가하여 3분의 2를 점령하고 있는 몸을 끌어내야 합니다. 마음이 몸을 반드시 때려잡아야 합니다. 원수를 때려잡아야 합니다. 이 싸움을 하며 6천년 역사를 이어나왔습니다. 마음의 사랑의 중심이 나오지 않고는 이 싸움은 끝날 수 없습니다. 
몸적 사랑이 마음적 사랑보다 강합니다. 몸적 사랑의 상대가 마음적 사랑의 상대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사랑의 상대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나 바람보다 몸의 소원이나 바람이 더 강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음적 사랑의 상대를 확실히 알게 되면 몸적 사랑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확실히 제시할 수 있는 마음의 사랑을 중심삼고 재창조하고 계십니다. 
아담 해와를 창조했지만 타락했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여기고, 다시 만들어 수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적 사랑의 주체를 대표한 남성을 찾아 나옵니다. 역사적인 대표자가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생명을 중심한 마음의 사랑과, 생명을 중심한 최고 인격의 표준이 되는 분입니다. 이분을 하나의 모델로 하여 지금까지 사탄세계에서 이어받은 신념이나 사랑의 감성을 모두 매장하여 무(無)의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본래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몸과 같은, 본성의 사랑을 중심삼고 백 퍼센트 화합할 수 있는 몸의 상대를 찾아야 됩니다. 본연의 마음 사랑을 실체와 결부시켜 타락의 인연을 벗어난 하나의 남성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몸, 즉 내적인 성전을 이루어 하나님과 하나되어 등장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남성이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인류 최초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태어난 사랑의 조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나 다시 오시는 주님은 본연의 마음을 중심삼은 사랑의 세계의 아버지, 우주의 사랑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몸은 마음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된 입장에 있지 못한 인간은 그러한 입장에 서 있다 하는 조건을 세워 하나님으로부터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접붙임을 받되 줄기를 잘라 접붙임을 받아야 됩니다. 메시아와 타락한 인간은 씨가 다르기 때문에 줄기를 잘라서 접붙임을 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복귀섭리의 경로입니다. (27-63, 69.11.23)
     
     
원수를 용서해 주고 사랑하라
     
하나님은 한 남성을 찾아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창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재창조해 나왔습니다. 인간의 창조이상이 완성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미완성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수습하려는 것입니다. 미완성 단계에 있으니 완성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창조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재창조과정을 밟아 올라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구원섭리 노정입니다. 
하나님은 칼을 들어야 하느냐, 용서를 해야 하느냐? 용서하기가 쉬운 일입니까?  철천지 원수를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만일에 여러분이 그런 원수를 대한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가슴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딸을 전부 잡아죽이고, 안팎의 세상을 전부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녀석입니다. 이런 원수를 대해서도 아무 일이 없는 것같이 대해야 할 입장에 계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대하지 않고는 복귀역사를 못 하는 것입니다. 원수진 일이 없는 것같이 생각하지 않고는 구원역사를 못 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아닌 것같이 대하지 않고는 용서했다 하는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비로소 역사에 없었던 새로운 법도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진 일이 없는 것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하나님도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구세주 사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가는 길은 천리원칙이요, 이 원칙이 아니면 내가 몽땅 바치고 싶어해도 받을 수 없는 당신이며, 이 원칙을 따라가지 않으면 풀 수 없는 것이 당신의 사정이기 때문에, 나는 그 원칙에 따라 당신을 찾아갈 것입니다. 당신의 천리원칙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나를 바치겠습니다…' 이런 조건하에서 복귀역사가 출발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연의 세계로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원수를 용서해 주는데 칼 가지고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소위 원수라고 하는 그 원수를, 하나님은 창조과정을 파고들어 우주 전체의 수천만 존재들을 일시에 파탄시킨 사탄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원수인데도 용서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원수가 되지 않았을 때 사랑하던 것 이상으로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하던 마음, 옛날에 아담 해와를 대하던 그 사랑의 마음 정도 가지고는 복귀할 수 없습니다. 원수의 자식이 되었는데, 타락하기 전에 아담 해와를 사랑하던 그 마음 가지고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를 사랑하던 그 이상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의 자식을 자기 자식 이상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동기를 갖추어야 합니다. 
역사상의 그 누구도 그런 내용을 중심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어떤 성인현철도 '원수를 용서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단 한 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운명하면서 '저들이 지은 죄를 알지 못하나니 아버지여 용서하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자기의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하나의 깃발을 들고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소원이 완전히 막히는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만민을 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서 죽어갔기 때문에, 그 마음과 원수를 사랑해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문화가 출발되었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그와 같은 고비를 넘고, 그 마음 세계의 동행자가 되고, 그 마음은 하나님을 대신한 대변자가 되어 진리와 뜻을 중심삼고 싸워서 승리한 실적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27-65, 69.11.23)
     
     
복귀노정의 철칙
     
하나의 남자로 오신 예수님 앞에 하나의 여자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남자는 있었으나,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여자는 없었습니다. 천성의 인연을 본심으로 알아서 모실 수 있는 한 여성을 고대했지만 그러한 여성이 없었습니다. 전부 자기를 중심삼은, 자기의 소원을 중심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천륜을 중심삼은 천국 이념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 뜻, 자기 소원, 자기 욕망을 중심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욕망은 세속과 더불어 이미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하나님과 인연 맺을 수 없었습니다. 
본연의 법칙에 의해 재출발해야 합니다. 마리아부터 재출발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가 여쭙기를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했을 때,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뜻대로 못 했다는 뜻입니다. 
세계적인 원수들을 구원하는 길을 닦아야 할 예수님 앞에, 하나님의 원수를 사랑하고 넘어갈 수 있는 신앙을 갖고 그런 결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품은 자가 되어 예수님을 도운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겠다고 몸부림친 남자나 여자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늘의 뜻을 소홀히 하여 그 뜻을 품고 왔던 사나이를 쫓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몰아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선생님에게는 원수가 많습니다. 가인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못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세 사람 이상 굴복시켜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제자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열두 제자, 그 중에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이 죽기 전에 먼저 생명선을 넘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죽기 전에 먼저 아들이 죽겠다고 나서야 합니다. 
초조한 하나님 앞에 아담 해와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뜻을 세우려고 했더라면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관계에 있는 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입장이고, 제자들은 아들의 입장입니다. 아들 입장인 아담이 부모인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타락입니다.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대의 경로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부모가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자식이 먼저 죽겠다고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의 철칙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에 내어놓고 세 제자는 자기들의 살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를 때도, 예수님은 원수를 갚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비참하고 추하고 억울한 자리에서 가라지 같은 추한 악당들과 부딪쳤으니 천지가 아득해지는 사연이 많았지만, 그런 사연보다도 하나님에게는 본연의 사람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타락한 인간을 어떻게 하여 본연의 아들딸로 복귀시키느냐 하는 사연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런 사연에 입각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어 상대적 관계를 갖추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새로운 이념의 역사가 출발되었습니다. (27-67, 69.11.23)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신 실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내적인 성품을 대신해 모든 어려움과 슬픔을 참으면서 사랑하던 하나님의 심정을 이어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느 자리 어느 곳에 있든지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한 실체로서 사탄과 싸워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사탄과 싸우는 과정에서, 사탄이 자기를 위한 목적을 중심삼고 공격하게 될 때 그 영향은 예수님 자신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떤 수난을 당하게 되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참으신 것같이, 만민을 위하여 참으신 것같이, 당시까지의 섭리노정에서 사탄을 대해 하나님이 싸워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30여년을 홀로 참으시면서 사탄을 대해 싸우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운명하는 그 절정의 순간까지의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실체로서 줄곧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생애입니다. 그의 생애노정, 곧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신 노정은 사탄과 싸우면서 걸어온 시련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탄 앞에 내주어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느 정도까지 사랑했느냐?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은 실상 죽음을 넘어서는 자리에서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대신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개도 넘을 수 있다는 절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사탄은 굴복합니다.
4천년 동안 하나님 홀로 전체의 세계를 바라보며 슬퍼하고 걱정하고 수고했는데, 예수님 한분이 지상에 세워짐으로써 그를 중심삼은 사탄과의 새로운 싸움이 전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것을 잊고 하나님을 위해 싸워나갔을 뿐만 아니라, 죽는 자리에서도 자기를 위한 욕망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승리의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죄악의 인간들을 위해 자기 일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사탄이 반대하는 것까지도 잊을 정도의 간곡한 심정으로 인류를 위해 손을 들어 기도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세계에서 나타낼 수 없는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나타냈기 때문에, 사탄이 그의 사랑 앞에 굴복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자기 나름대로 찾으려하는 뜻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통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인하여 4천년 동안 섭리해 온 하나님이 서러워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도 서러워하기 시작하였고, 사탄도 서러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을 놓고 하나님과 인간만이 슬퍼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놓고 사탄도 슬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탄의 슬픔이 커지면 커질수록 예수님의 사랑의 결실은 더 많아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을 실증하는 십자가의 승리로 말미암아 4천년 동안 섭리해 온 하나님과 불변의 인연을 맺었고, 불변의 승리, 불변의 사랑의 실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과 하나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이상 예수 그리스도 또한 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였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예수님 한 분을 세워 비로소 그 뜻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을 통하여, 그 뜻을 이 땅 위에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4천년 섭리를 증거하는 실체로 나타나야 했는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뜻이 사탄에게 짓밟힌 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실체로서, 4천년 동안 섭리해 온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었는데, 그것이 부활의 영광이었습니다. (1-81, 56.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