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십자가상에 있는 예수님의 고난(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2장 예수님의 섭리노정)

무지... | 20180612175919

6. 십자가상에 있는 예수님의 고난
         
슬픔과 고통과 한을 남겼던 예수님의 생애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다가왔을 때, 그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대하여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한복음 7장  3~4절)' 했던 것을 보더라도, 그 가정 전체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환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민족의 운명을 해결하기 위한 엄청난 뜻을 실현해야 하는 예수님에게 제1의 발판이 되어야 할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이 깨져 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명절이 되어 먹을 것이 있으면 그의 형제들은 자기들끼리 숨겨 놓고 예수님을 따돌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을 것을 그리워한 것이 아닙니다. 몰리던 예수님은 그런 것보다도 명절을 맞이하여 부모의 품에 안기고 부모의 손을 잡고 그날을 즐기는 사람들을 볼 때, 그런 것이 말할 수 없이 그리웠습니다.
크나큰 사명과 크나큰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 역사 이래 처음으로 요셉 가정을 하나의 터전으로 삼아 이 터전 위에 하나님이 소원하는 가정을 세우고, 예수님의 친족을 기반으로 세례 요한을 포섭할 터전을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이 떠나가고 부모가 떠나가고 형제가 떠나가고 친척이 떠나가니, 예수님은 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찾아가는 노정은 예수님의 제2차적인 노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정을 잃어버리고 공생애 노정을 출발할 때 그는 누구보다도 슬픈 마음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가정에 대해 크나큰 천륜의 뜻을 두고 바랐는데도 불구하고 그 가정을 버리고 나서야 했던 외로운 그 마음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에는 오직 승리의 날을 바라보면서 '그날이 오면 알리라' 하며 참고 나왔습니다. 그에게 외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비장한 결의가 있었던 반면 그 마음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슬픈 마음을 품고 나선 예수님을 향하여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며 그를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일파는 모심의 도리와 충성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예수님과 분립된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볼 때 외적인 가정, 즉 가인적인 가정의 입장이었던 세례 요한을 찾아가는 예수님 앞에 그마저 예수님의 내적인 심정을, 품은 뜻을 알지 못하고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툴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예수님은 그의 가정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세례 요한으로부터 증거는 받았으되 그 앞에 마음을 주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중심삼고 외적 울타리를 만들어 전체를 수습하시려 했던 소망은 여지없이 깨져 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예수님은 유대교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를 찾아간 것은 세례 요한의 실수까지도 수습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유대교도 역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기를 배척하는 유대교를 뒤에 두고 교단이 반대하던 민족을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만일 그 나라가 하나의 독립국, 하나의 주권 국가가 되어 있었더라면 군왕이나 그 나라의 주권자를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 나라는 주권을 상실하고 로마의 속국이 되어 있었고, 그렇다고 로마를 대적하여 나설 수도 없는 입장에 처해 있던 예수님의 가슴에는 말할 수 없는 한이 서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33년 생애 노정에서 슬픔과 고통과 한을 남겼지, 소망과 행복과 뜻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민족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했고, 교단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 세례 요한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했고, 그의 가정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한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이 고을에서 반대하면 저 고을로, 이 거리에서 반대하면 저 거리로, 유대인이 반대하면 이방민족에게로, 이 가정이 반대하면 저 가정으로 방랑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장  20절)'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가려야 갈 곳이 없고 오려야 올 곳도 없는 예수님이었지만, 그는 이루어야 할 책임과 사명을 짊어지고 내적으로 고뇌해야 했습니다. (14-217, 64.12.27)
     
     
예수님은 왜 비참한 무리들을 찾아가게 되었던가
     
이렇게 가정에서 몰리고 친족에게 몰리고 교단에서 몰리고 민족에게 몰린 예수님은 할 수 없이 맨 비참한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그 시대에 뭇 사람이 환영하고 뭇 사람이 바라보는 자리에 선 사람들은 단념하고, 할 수 없이 비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되었느냐?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누구보다도 고귀한 자리에 선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야 하고, 그 시대의 제사장 교법사들을 전부 그의 휘하에 두고 유대 나라를 재창건해야 할 사명을 가진 주님인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민족적인 기대는 뒤로 하고 비참한 무리들을 찾아가게 되었던가? 이러한 것을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할 수 없이 원통해하고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미천한 자리를 찾아가던 예수님은 최고의 자리에서 민족을 수습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수습하여 만방에 널려 있는 나라들을 장중에 휘어잡고 악을 심판하여 원수의 국가를 전부 항복시킨 후 아버지 앞에 영광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통일의 한 날, 승리의 한 날을 그 마음에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크나큰 소망과 크나큰 책임, 크나큰 사명이 그 가정으로부터, 세례 요한 일파로부터, 유대교로부터, 그 시대의 지도자로부터 배척을 받아 여지없이 일그러진 환경에서 이것을 다시 수습해야 하는 내적 고충은 순탄한 길을 가는 사람의 몇 백배 이상이었습니다. 이러한 고충을 품고 가야 했던 애절하고도 불쌍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이 감람산 기슭에서 그토록 애절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려야 했으며, 어찌하여 이 거리 저 거리로 몰려다녀야 했느냐? 그가 가는 곳곳마다 어찌하여 배반자의 무리를 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느냐? 이것이 수수께끼라면 수수께끼요, 인간적인 사정으로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로되 하늘편에서 볼 때는 분하고 원통한 사실입니다. 이런 일을 저질러 놓은 유대교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하며, 세례 요한의 책임이 얼마나 크며, 요셉 가정과 마리아의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가? 
예수님은 어디로 가려야 갈 수도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등 무식한 어부와 세리를 찾아가던 그 발걸음마저 민족이 곳곳에서 막고 있으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어디를 뚫고 가려야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버리고 이방으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복귀섭리의 뜻을 중심삼고 4천년 동안 수고한 터전이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에, 민족적인 모든 것을 판결지어 내적으로라도 이끌고 가야 합니다. 민족은 잘못했지만 책임진 분야에서 그들을 어떤 조건이라도 세워서 하나님 앞에 내적으로라도 상속받아 가면 모르되, 상속을 받기 전에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14-219, 64.12.27)
     
     
예수님의 억울하고 분한 사정
     
예수님은 세계를 갖기 위해 오신 분이요, 하늘땅을 품기 위해 오신 분이요, 만민을 통치하기 위한 주권자로 오신 분이요, 만세의 영광이 그로 말미암아 지상에 이루어져야 할 중심적인 존재로 오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전부 이땅에 주기 위하여 오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했기 때문에 줄 수 없는 사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포용해 주어야만 했던 예수님의 억울하고 분한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소망, 천주사적인 소망을 품고 환경을 개척해 나간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신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 저주를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럴 수도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책임을 짊어진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여 저주해 버리면 4천년 동안 수고한 하나님의 수고가 여지없이 깨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은 분하고 원통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수고가 깨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만일 오른손에 쥐려 했던 것을 쥐지 못하면 왼손으로라도 쥐고 나아가 격돌해서 하나님이 남긴 뜻과 수고한 터전을 상속받아, 그것을 다시 세워 드릴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남기지 않으면 안 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분하고 원통하게 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을 저주하고 싶었으나 그런 사정이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나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심정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소원과 역사적인 한을 전부 해원성사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기에 이 민족을 세워 나오기까지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고난의 노정을 갈 적마다 다칠세라 피해를 입을세라 보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길이길이 남겨질 무리로 이끌어 나오며, 유대교단을 중심삼은 메시아 사상에 의하여 전체가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역사적인 터전이 예수님 앞에 모두 반대된 입장에 서게 될 때, 이를 바라보는 예수님은 그 개인적인 서러움도 컸지만, 하나님의 수고의 공적 앞에 머리를 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환경을 다 잃어버리고 겟세마네 동산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의 길에 섰을 때, 그를 반대하던 무리들은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그를 세운 하나님과 그를 따르던 민중의 소망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슬프고 고통받는 것쯤은 당연하고 또 그 어려움은 참을 수 있으되, 그 배후에서 4천년 동안 찾아 나온 하나님의 수고의 전부가 깨어져 나가는 것이 슬펐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노정을 개척해 나오는데 제물이 되었고, 모든 수고의 노정에서 남아졌지만 현실에서 책임 다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대에 비례하여 그들에 대한 저주와 분함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하여 저주를 돌려서는 안 될 사정이 있었기에 그는 땅에 왔던 한 조건을 민족과 세계 앞에 남겨야 할 책임을 생각하면서 겟세마네 동산까지 갔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정이 어떠했다는 것을 오늘날 신부 되기를 자처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14-221, 64.12.27)
     
     
제자들과 하나되지 못한 예수님의 슬픔
     
예수님은 3년여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제자들, 즉 '당신이 가시려는 곳은 저희가 소망하던 곳이요, 당신이 계신 곳은 저희가 찾아 나오던 곳이요, 당신이 사시던 그곳은 저희가 행복의 터전으로 바라던 곳인 줄 아오니, 당신과 더불어 살고 당신과 더불어 죽겠다'고 다짐했던 베드로 등 12제자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형용할 수 없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사정할 수 없는 외로운 심정을 품고 하나님 앞에 면목없어 하시던 예수님, 민족에게 쫓겨 감람산 또는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홀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진정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한 이 땅을 행복의 터전으로 바꾸기 위하여 독생자인 자신을 이 땅에 보냈는데, 도리어 자신이 슬퍼하는 입장에 서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정에 못을 남기고 가게 됨을 생각하게 될 때, 예수님은 하나님 대하여 면목이 없었습니다. 수천년 동안 수고해 온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기 위해서 오신 이스라엘의 구세주요, 이스라엘의 군왕이 되실 예수님이 민족을 잃어버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담판짓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천지의 불쌍한 고아였습니다. 이 땅의 어느 한 곳에도 마음 둘 수 없었던 가장 불쌍한 고아와 같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슬픔과 기쁜 감정은 있기 마련인데 예수님은 기쁨의 대상 하나를 찾지 못한 외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상에서 제일 슬픈 고아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사명과 책임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외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기에는 정말 면목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떠나가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던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를 부르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세포가 뛰고 뼛골이 녹아지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3년을 같이한 세 제자들은 잠들고 말았습니다. 한 시간도 참지 못해 거기에 동참하지 못한 것은, 메시아를 대접해야 할 이 땅의 인간으로서 이 이상 원통한 일이 없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의 슬픈 심정에 공명하여 그 옷깃을 붙들고 그와 함께 통곡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기독교가 이토록 비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수제자가 되어 죽었으면 그들은 부활했을 것입니다. 전인류를 위하여 찾아온 메시아 앞에, 역사적인 사명을 책임진 예수님 앞에 그들이 해야 할 책임을 못다 함으로써 예수님이 가신 이후의 기독교는 비참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세 제자가 책임 못한 죄 때문입니다. (14-222, 64.12.27)
     
     
예수님의 신부될 사람의 자격
     
여러분은 어떠한 자리에서 메시아를 찾기 원합니까? 여러분들은 어떠한 자리에서 신랑된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어떠한 준비와 어떠한 모습으로 그 앞에 나타나기를 원합니까? 오늘 이 현실에서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호화찬란하게 갖춘 영광의 등불을 가지고 '그대는 나의 신랑이요' 하며 맞이하는 신부를 예수께서 원할 것이냐? 겟세마네 동산과 같은 외로운 자리에서 눈물지으며, 끓어오르는 심정을 붙안고 '우리의 선조들이 책임 못하여…'라고 말하는 비참한 모습의 신부를 원할 것이냐?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주님은 영광의 신부를 만나기 전에 고난의 신부를 찾아가십니다. 여러분은 고난의 신부된 인연을 거쳐 여기에 신부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노정입니다. 아버지의 슬픔을 그 자식이 벗으려면 아버지의 슬픔 이상의 슬픈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신부를 맞기 원할진대 어떠한 신부를 원할 것이냐? 예수님이 지금까지 말하지 못한 전부를 알고 그 가슴속에 맺혀 있는 모든 것을 알아서 위로해 줄 수 있는 신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가슴속에 맺혀 있는 한과 고통을 풀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신부, 그런 신부를 예수님은 요구할 것입니다. 선민으로 택하여 4천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수고를 하면서 찾아 나오던 그 이스라엘 민족을 저버려야 하는 하나님, 그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의 둘도 없는 독생자인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배반하는 민족을 대하여 그래도 복을 주어야 할 하나님,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입장에 계신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는 신부를 요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황태자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왕자입니다. 황태자로 오시는 메시아, 그 메시아 앞에 신부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자격을 갖추어야 되느냐? 신랑될 그분 앞에 안팎으로 상대될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그가 인류를 사랑하듯이 그 신부도 인류를 사랑해야 되고, 그가 하나님을 대하여 염려하듯 그 신부도 염려해야 되고, 그가 현세로부터 앞으로의 세계를 책임지듯이 그 신부도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러한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복 달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화를 저에게 주시옵소서'라고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복을 주러 왔던 예수님을 배반해 버렸기 때문에, 그 역사적 죄를 나를 희생하여 탕감하고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죄를 용서받기 전에 '역사적인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해야 됩니다. 아담 해와가 저지른 죄의 뿌리까지 몽땅 뽑아서 뒤넘이치겠다는 결의와 함께 슬픔과 고통, 곡절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모든 것을 탕감하겠다고 하는 사람이라야 신부가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적인 싸움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대신해서도 싸우지만, 수많은 민족을 위해서도 싸우고 계십니다. 이 시간에도 죽음의 고비가 뒤넘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든 시간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진대 하나님은 그를 위해 슬퍼해 주어야 되고, 그의 갈 길을 개척해 주어야 되고, 그의 방패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신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루 한 시간도 편안한 잠을 잘 수 없고 하루도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또한 그 신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땅에 맺혀 있는 역사적 분함을 풀기 위해 세계를 대표해서 '아버지, 저를 때리시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세상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효자는 자기의 동생이 잘못하여 부모가 채찍을 들면 '아버님, 어머님, 저를 때리시고 동생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의 본질이 변했습니다. 이 한국에서 하나님 앞에 불리울 수 있는 대표적인 신부가 있다 할진대, '아버지시여 ! 수많은 교단의 슬픔을 전부 저에게 책임지워 주시고 저를 때려 주십시오' 해야 됩니다. 세계를 대신한 신부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저를 채찍해 주시옵소서' 해야 할 것입니다. '나 하나 배척받고, 나 하나 버림받고, 나하나 핍박받고 나혼자 책임져서 전세계 인류가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내 영광이요 소원입니다' 하는 사람과, '좋은 것은 내 것, 너의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신부로 택하겠습니까? (14-223, 64.12.27)
     
     
예수님의 역사적인 최후의 한 마디에 담긴 뜻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니 그들은 이미 반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당신이 가지고 온 복은 우리가 짊어질 수 없을 만큼 무겁습니다' 했다면 세계가 돌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해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 당시 그의 제자들은, 요즘 말로 하면 '너는 좌정승, 나는 우정승' 이런 얘기나 했다는 겁니다. 고난받고 핍박받으며 몰림길에 선 예수님에게 그런 영광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핍박의 길이 있다는 것을 제자들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으니 천하통일은 문제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족과 교단을 잃어버린 예수님에게는 이를 다시 수습해야 할 2차적인 노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2차적인 노정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한 내적인 인연과, 교단과 민족에게 남은 외적인 인연을 결정지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명이 예수님에게 있는데도 그의 제자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 무식한 자들이 알게 뭡니까? 얼마나 답답했으면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는 말을 했겠습니까? 이 얼마나 처량한 말입니까? 
예수님이 가는 길은 민족 앞에 쫓김받는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핍박의 길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재창건하는 길이었습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수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고 유대교단을 세우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수고한 그 수고를 단시일에  조건만이라도 갖추어 탕감해야 할 책임이 남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영광만을 바라는 제자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할 수 없이 홀로 하늘과 땅과 역사적인 인연을 책임지고 십자가 앞으로 나가셨습니다. 이 땅 위에 세운 민족이 책임 못한 것을, 세운 제자들이 책임 못한 것을 대신 책임지겠다고 나선 걸음이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골고다 산정까지의 걸음입니다. 
십자가상에 매달려 계시던 예수님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기 직전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4천년 동안 그렇게 섭리를 이끌어 나오며 하늘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기를 고대하여 보냈던 메시아가 운명하는 그 시간에는 하나님까지도 십자가에서 얼굴을 돌리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왕자로 왔던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비운의 말을 남긴 것은 인류 역사의 오점이요, 역사적인 오점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는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산정에서 남기신 한을 청산짓기 위해서 눈물과 피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정을 오를 때 그 뒤를 따르던 여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내 눈물은 인류에게 남아진다, 내가 가는 십자가의 길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십자가의 길이 된다고 하는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면 내 책임은 끝나지만, 내가 간 후 너희들의 책임은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책임, 가정적인 책임, 종족적인 책임, 민족적인 책임, 국가적인 책임, 세계적인 책임, 천주적인 책임이 남아 있으니,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눈물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며,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벅찬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던 예수님은 역사를 더듬고 세계를 더듬고 혹은 과거를 뉘우치고 시대를 비판하면서 심판의 한 기점을 남겨야 할 억울한 입장에서도 수고한 하나님을 이 땅에 모실 수 있는 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엄숙히, 묵묵히 골고다 산정까지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한 그 말은 자기 개인만을 중심삼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 크나큰 사명을 갖고 온 메시아로서 한 말입니다. 나를 버리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나와 더불어 같이했던 수많은 사람은 버리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버리지 말고, 열두 제자를 버리지 말고, 이스라엘 나라를 버리지 말고, 앞으로 올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사적인 최후의 한마디였습니다. (14-227, 64.12.27)
     
     
십자가상에 서신 예수님의 고통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할 기독교인들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우리는 아버지 앞에서 민족을 부여안고 몸부림치오니 민족을 버리지 말고, 이 세계를 부여잡고 몸부림치오니 이 세계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는 심정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니 앞이 깜깜했습니다. 땅을 바라보아도 깜깜했고 만민을 바라보아도 깜깜했습니다. 너무도 깜깜했던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상에서도 한줄기 끓어오르는 마음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 가운데는 '하나님이여 영원히 버리지 마시옵소서. 아담 해와로 인하여 인류가 버림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역사적인 심정을 붙들고 수고하신 당신의 수고를 버리지 마시옵고, 당신이 공들인 것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를 버릴지라도 당신이 세우고자 하셨던 소망은 버리지 마시옵소서. 이 민족을 통하여 만민을 통치하고자 하신 당신의 이념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하는 벅찬 마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도 괜찮지만 당신의 뜻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신을 위한 충신의 도리는 세우지 못했사오나 충성된 마음만은 갖고 있습니다. 또한 효자의 도리는 세우지 못했사오나, 효성된 마음만은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는 이런 사람마저도 없는 상황에 저마저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개체를 한탄하여 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역사성을 띤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고한 아버지를 부여안고 호소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념이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거기서 재창조, 부활의 권능이 벌어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한 것도 사랑을 가지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노고를 생각한 것입니다. '저들을 버리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됩니까? 제가 천번 만번 죽음의 길을 가더라도 저들을 버리면 하나님의 수고의 공적이 깨져 나갑니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붙들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4천년만에 왔던 메시아를 우리 선조들은 어찌하여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분노해야 할 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제자들의 행동입니다. 세상의 한 나라를 위해서 가는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없거늘, 자기가 섬기던 스승이 죽음의 길을 가는 데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메시아를 만나려면 죽음 길을 자진해서 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고자 하는 사람도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서 부활해야만 됩니다. 이것이 천리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면 잃어버린 자리에 가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십자가가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예수님의 한이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한의 실체가 제물이 되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개인․가정․종족․민족을 거쳐서 하나님의 주권 국가를 세워 가지고 이 세상을 수습해 나오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제2의 판도를 수습해야 하는 기독교는 예수님과 성신의 이름으로 수습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성신은 다시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 긴긴 세월을 수고해야 합니다. 한 가정을 찾기 위해서 아브라함 가정을 세우던 이상의 수고를 해야 하고, 한 민족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고난을 당하던 이상의 고역을 당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환경에 떨어졌던 이스라엘 민족사, 2천년 전의 환경을 재현한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입니다. (14-229, 64.12.27)
     
     
선지자들의 화신체였던 예수님의 각오
     
예수님은 역사적인 소망의 실체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옛날 아담이 소망하던 실체요, 노아 앞에 약속했던 소망의 실체요, 노아의 애달픈 사정을 대신한 실체요, 노아의 심정을 대변하는 실체였으며,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그렇고, 더 나아가 그 시대의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혀를 깨물고 이를 악물며 참아 나아간 원인은 어디 있었느냐? 그는 역사를 걸어 놓고 마음속으로 호소했습니다. '나는 아담과 같은 사람은 되지 않겠습니다. 이 땅에 불신의 씨를 뿌린 아담과 같이는 되지 않겠습니다. 사랑해야 할 동생을 죽인 가인과 같이는 되지 않겠습니다. 죽일 수 있는 자리에서도 용서해 주겠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때 노아 할아버지의 친아들로 태어났더라도 노아가 120년 동안 아라랏산에서 방주를 짓던 작업에 대해서 별의별 욕을 다했을 것입니다. 배를 지으려면 강가나 바닷가에서 지을 일이지 산중이라니…. 그것은 일부러 세상의 어떤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꿔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내나 아들딸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가정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전도를 해야 됩니다. 민족은 물론이요, 눈뜬 사람 전부, 집안 사람 전부가 배척하면 할수록 뜻 앞에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당시, 노아 할아버지의 아내가 날이 새기 전에 와서 '영감님, 방주 지을 시간이 늦어지니 어서 일어나세요. 새벽기도 해야 되는데 어서 올라가 보세요' 그랬겠어요? 요즘 한국 여자들은 일년만 고생시켜도 바가지 아니라 멱살을 쥐고 그럴텐데…. 그랬겠느냐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말이 120년이지….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또 그 세 아들이 '아! 우리 아버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시니 어서 하십시오' 그랬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는지 그들이 알 턱이나 있나요? 그렇다고 하나님이 '야, 노아야 반드시 어려움은 있는 것이다' 했겠어요? 그러나 노아는 한번 받은 명령을 120년 동안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끌고 나갔습니다. '너희들이 그를 쳐라, 그를 배반해라, 동료들도 반대해라' 해 가지고 그들을 치기에 합당한 조건을 성립시키고서야 심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방주를 짓던 노아의 화신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조소가 내 일신에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생명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정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충신입니다. 
아브라함도 우상 장사 데라의 아들로 태어나 호화롭게 살던 환경에서 하나님이 불러냈습니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나라' 하셨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 부모 잃은 자식이 되라는 것입니다. 친척이나 가정을 중심으로 애착을 느끼던 전부를 깨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버지가 우상 장사인 것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며, 이것을 다른 무엇으로 뜯어고칠 수 없겠는가 하는 혁명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불러낸 것입니다. 불러내 보니 쓸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드려라'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려라' 하니, '예'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미쳤지요? 미쳐도 잘못 미쳤지요? 미쳐도 올바로 미쳐야지, 이것은 잘못 미친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나는 하나님 앞에 아담 대신자요, 아벨 대신자요, 노아 대신자요, 아브라함 대신자요, 이삭 대신자요, 야곱 대신자니 믿음의 아들딸을 대해서 참다운 어버이가 되겠다는 입장에서, 그는 십자가 상에서도 '내 몸이 제물 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죽겠습니다' 할 수 있었습니다. (14-231, 64.12.27)
     
     
기독교의 구원은 십자가의 구원이 아닌 부활의 구원이다
     
앞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와서 '내 신부 될 사람 있으면 목을 내놓고 나와라'할 때 서슴지 않고 나올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아이가 우는데 젖 좀 먹이고 나서…' 그래도 되겠어요? 목숨을 걸고 가야 됩니다. 
하늘을 찾아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십자가 도상에서 사탄을 굴복시켜야 됩니다. '이놈의 사탄아, 4천년 동안 하나님의 섭리를 파탄시켜 온 사탄아' 하고 참소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부활의 영광된 자리에 나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완성의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망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전부 버리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다 버리는 것입니다. 어미를 버려라! 자식을 버려라! 다 버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노정은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구원도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고난의 열매로써 한을 청산짓기 위한 자리입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떠나서 승리하여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영생의 자리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달아 놓았는데,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가? 원통하다고 그럴 것입니다. 부활의 도리를 믿어 찾아야 합니다 부활의 도리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그런 길을 밟고 나온 것입니다. 
신부의 도리를 찾아 나가는 우리는 오늘 역사적인 예수님의 심정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이 민족을 부여안고 세계를 부여안고 통곡해야 합니다. '모든 슬픈 사정이 있다면 나를 제물로 삼아서 내가 비참한 자리에 나가겠습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여, 내가 그런 각오를 하겠습니다. 아버지여! 선조들이 남긴 역사적인 오점을 내가 탕감하고 청산하겠습니다' 하는 부르짖음이라도 있어야만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런 입장에서 '나는 아담같이 안 되겠습니다. 가인같이 안 되겠습니다. 함같이 안 되겠습니다. 제물 실수하던 아브라함같이 안 되겠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2타하던 입장에는 서지 않겠습니다. 책임 못한 세례 요한의 자리에는 안 서겠습니다. 책임을 완성하는 자리에 서겠습니다' 했던 것입니다. 아담이 믿지 못하여 실수한 것을 믿고 넘어가야 합니다. 땅을 적신 피의 호소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역사적인 기준에서 싸움이 벌어질 것을 아신 예수님은 '내가 죽더라도 피로써 호소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한 공적으로 하나님의 분한 역사를 막아야 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그에 못지 않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고역 생활을 해야 했던 것처럼 역사적인 원통함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예수님은 했던 것입니다. 
원래 모세가 아버지라면 아론은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론이 책임 다하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던 것과 같은 역사적인 모든 실수의 조건을 자기 일신에 걸고 그 반대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부여안고 넘어가야 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버린다는 것은 역사를 탕감하겠다는 것이요, 부활했다는 사실은 재역사가 출발한다는 것을 예고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를 탕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자리를 통한 부활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14-233, 64.12.27)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적인 심판관
     
아담 가정에 아벨을 세우고, 노아 가정에 함을 세우고, 아브라함 가정에 이삭을 세우고, 야곱 가정에 요셉을 세우고, 모세 앞에 아론을 세우듯이 예수님 앞에도 세례 요한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역사를 망쳤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타락했고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부자가 역사를 망쳤으니, 이러한 역사를 복귀하기 위한 쇠사슬을 짊어진 예수님은 세계적인 부모의 입장에서 세계 인류의 대표인 세례 요한을 맏아들격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런 후계자가 자빠져 버렸습니다. 그것도 시시한 일로 목을 내놓고…. 그것이 세례 요한의 책임이겠습니까? 그는 유대 관원을 움직일 수 있는 인격자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3년여 동안 도의 생활을 겸비한 사람이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선지자로 또는 예언자로 모셨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이 실수하여 넘어지니 할 수 없이 그 대신으로 베드로를 세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례 요한 대신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힘쓰는 자가 얻나니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결판짓는 마당에 베드로에게 '역사적인 선조들의 모든 잘못은 내가 책임질 수 있으니, 너는 아들의 책임을 다하라' 한 것입니다. '아담 가정의 참다운 아벨이 되고, 노아 가정의 참다운 함이 되고, 아브라함 가정의 참다운 이삭이 되라. 복귀의 산물인 이 모든 것을 믿는 입장에서 제물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면 베드로는 믿음의 아들입니다. 아들 만들려고 했으니 베드로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서 죽었더라면 기독교 역사는 이처럼 비참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한 후에 제자들을 수습하여 영적 구원의 복귀 역사를 하셨습니다. 육적 복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통일교회의 다른 점입니다. 기독교는 영적 구원의 입장에 있지만 통일교회는 영육 구원을 주장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지 않고 뜻을 이루었다면 예수님의 아들딸들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멘'이고, 신앙생활이고 다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믿어야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잘났든 못났든 예수님의 핏줄로 태어나면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민족적인 책임자가 되고, 교단적인 책임자가 되고 국가적인 책임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책임자가 못 되고 갔습니다. 
그런 길을 가기까지의 예수님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이스라엘 민족과의 모든 관계가 다 청산되었느냐?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길을 가면서 자기 가정에서 쫓겨나고 친척에게 쫓겨나고 교회와 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죽인 연고로 배반받고, 죽음의 길을 간 예수님 이후부터 험한 길을 가는 민족이 됐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심판관(審判觀)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몰리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쫓기고 몰리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메시아를 그렇게 대했으니 탕감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쫓겨남으로써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전부 쫓겨났습니다. 세계에서 국가에서 자기 가정에서 전부 쫓겨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 집안이 전부 반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배반받던 그 노정을 전부 걸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종결지으려면, 한 나라에서 예수님이 당대에 당하던 모든 고난을 탕감해야 됩니다. 유대 나라는 예수님이 가신 이후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유리고객했습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배척받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14-234, 64.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