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예수님의 십자가(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2장 예수님의 섭리노정)
무지... | 20180611063812
5.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곧 복귀다 우리는 이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인공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짓 주인인 사탄과 하나가 되어 결국은 사탄이 인류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의 '살아있는 죽음'에 대해서 깊이 우려하고 슬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쇠사슬을 스스로 끊을 수 있고 스스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분입니다. 그 힘은 하나님 자신의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구원은 간단하게 말해서 복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 의사는 무엇을 어떻게 합니까? 그는 환자가 정상적인 건강으로 되돌아가게 해줍니다. 그것이 치료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를 물에서 건져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란 비정상적이며 본 궤도를 벗어난 자리에서부터 선한 본연의 자리로 인간을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복귀와 똑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천국으로 복귀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당신의 결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사기 46장 11절)'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본래 계획하였던 자리로 복귀하겠다는 결정적인 각오를 드러내어 내가 분명히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복귀하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재창조자로서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죄 많은 모든 인간들을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으로 바꾸어 놓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는 이 지구상에 천국을 복귀하기 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17절에 기록된 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3-199, 74.9.18) 메시아를 위한 준비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복귀하려고 그의 아들을 보내기 전에 먼저 보낼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국가를 준비함으로써 메시아가 강림하실 수 있는 믿음의 기대(基臺)를 세우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탄의 소유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메시아가 아무런 준비된 터전도 없이 지상에 오시면 이 사탄세계는 그를 없애버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 주관(主管)할 수 있는 한 나라의 주권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용의주도하게 역사(役事)하였습니다. 유대 나라가 바로 이 메시아를 위한 준비의 열매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메시아가 착륙할 수 있는 기지로 준비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터전 위에 하나님은 당신의 최후의 중심인물인 메시아를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기독교는 2천년 전의 유대 나라와 같이 메시아의 재림을 위한 착륙기지입니다. 기독성도들은 그의 재림을 위한 신앙의 터전을 마련하여 역사의 최후의 완성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의 이 세계는 문제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메시아만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메시아의 사명은 타락하여 고통받고 있는 인류를 이 죄악 세상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본연의 완성된 하나님의 선한 세계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이 세계를 주관하고 있는 사탄의 악한 지배권을 몰아내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를 세우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복귀할 목적을 가지고 오셨던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의 재림의 목적도 본연의 하나님 나라를 복귀하려는 것으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동일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불변한 목적이요 유일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택한 현대의 선민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구세주의 협조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터전을 예비하여 그가 오실 때 그를 영접하고 지상(地上)에서 사탄을 몰아내는 메시아의 사명에 동참함으로써 전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막연한 천국을 꿈꾸고, 그 천국의 안이한 보금자리를 차지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참된 기독교인들의 자세가 아닙니다. (73-203, 74.9.18) 하나님의 뜻은 전세계를 구원하는 것 하나님은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하늘편 챔피언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희생의 제물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저를 당신의 제단 위에 어린 양으로 써 주시옵고, 저를 희생시켜서 이 세계를 구하시옵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20세기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이 모든 부름을 듣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나만의 천국(天國)', '나만의 구원(救援)'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세계가 파괴되어 가고 있는 때에 나만의 조그만 천국이 보전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만약 전세계가 구원된다면 여러분 자신의 구원은 이미 거기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계속 개인 중심으로 흘러간다면 머지 않아 멸망하고 맙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바라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슬픔과 비탄으로부터 해방시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문제를 해결해 드릴 때 모든 인간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됩니다. 그런 정신을 갖게 되면 기독교는 인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心情)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불붙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전세계를 구하는 것이지, 기독교나 특정 교회만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성서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이 말씀에는 세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세계를 그처럼 사랑하는 것이지 기독교회나 기독교인만을, 또는 특수한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세계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메시아는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에게 '주님이여 당신은 기독교인만을 위한 구세주이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주님은 대답하기를 '아니다! 나는 전인류를 위한 구세주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에게 '하나님이여, 당신은 기독교인만을 위한 분입니까?'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아니야! 나는 전우주의 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야'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2천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자기를 중심한 이익을 목적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마치 군인정복자처럼 오셔서, 자기들을 위해 원수를 갚아주고 로마 제국을 멸망시켜서, 이스라엘 나라에 영광과 권세를 부여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는 참뜻을 몰랐습니다. 그와 반대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도구와 같이 이용하여 세계를 하나님의 품속으로 이끌어 오고자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세계를 복귀하고 전인류를 완전한 선의 세계로 복귀하고자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실패의 하나님입니다. 사탄에 의하여 패배한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73-204, 74.9.18)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떠한 개인의 뜻에 의해서 탄생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분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낸 구세주로 믿고 있습니다. 구세주가 필요하게 된 것은 인간의 타락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타락한 인간을 구하려는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은 반드시 구세주를 통해서 인간과 관계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이 하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목적은 잃어버렸던 자녀를 찾고, 그 자녀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가정․종족․국가․세계를 다시 찾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목적에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4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통해서 개인적인 수련 과정을 거치게 하면서 종족․민족․국가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무한히 수고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이 타락하기 전 하나님으로서의 이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타락함으로써그 이상이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을 다시 구원, 복귀해 타락하지 않았던 본연의 이상을 재차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보낸 목적입니다. 타락한 세상에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들을 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95-310, 77.12.25) 예수님은 죽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하나의 역사적인 수수께끼가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시기 전 4천년 동안 하나님은 메시아를 위하여 이스라엘 선민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해야 된다고 선민들에게 미리 예언을 통하여 통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정했던 바대로 준비를 위하여 섭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내에는 사실상 위대한 메시아적인 정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때에 약속의 말씀(言約)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에 맞추어 하나님이 택했던 선민들 속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기 위해 보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당초부터 하나님이 예정했던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질문할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다시 돌아온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틀림없이 '우리는 그를 받아들이지요. 그를 환영합니다. 그와 하나가 되고 그를 따를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다시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면 당신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겠습니까?' 그들은 틀림없이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의 선민들이 만일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뜻은 분명히 선민들이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데 있었습니다. (73-218, 74.9.18) 무지가 예수님을 죽였다 선민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그 책임을 전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보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일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나사렛의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몰랐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더라면 그들은 그를 십자가상에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에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또 성경 속에서 사도 바울은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린도전서 2장 8절)' 하고 증언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였는지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무지와 맹목에서였습니다.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때 현실적으로 일어났던 일에 대한 진정한 내용을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낸 유일한 목적이 그를 십자가상에 못박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민을 준비하는데 그렇게도 오랜 기간을 소요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불신자들 속이나 야만인 가운데 보내는 것이 훨씬 손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보다 빨리 예수님을 죽일 수 있어서 구원이 보다 속히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에게는 죽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아를 영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구약 속에서는 하나님이 되풀이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이스라엘 민족이 영광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온 후로 선민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징벌을 받았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망했고, 그 민족은 온 세계에 흩어졌습니다. 그것은 오직 선민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들은 그 뜻의 결실체인 메시아를 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이스라엘 민족이 몰랐던 것이 문제입니다. (73-212, 74.9.18) 구약의 문자에만 묶여 있던 성구의 노예들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첫째의 이유는 구약(舊約)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 선민들은 구약성서를 문자 그대로만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암호같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한마디 한마디와 한 글자 한 글자를 문자 그대로만 해석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구약(舊約) 성구(聖句)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서는 신약성서 안의 계시록(啓示錄)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시간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최후의 기록에는 메시아가 장차 어떻게 오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라기서 4장 5절에서부터 6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약 9백년 전에 살았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그는 땅에서 살다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들은 구약에 기록된 대로 언젠가는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다시 땅으로 돌아와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성취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선민들이 고대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왔습니까? 문제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예기(豫期)하고 있던 그러한 방법으로 엘리야가 돌아오지 않았던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들은 엘리야가 기적적인 방법으로 되돌아왔다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나사렛에서 온 한 청년이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내가 왔다'고 온 세상에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성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 선민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나사렛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엘리야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들은 일이 없지 않은가!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니 메시아가 올 리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오리라고 한 말라기의 예언은 예수님의 사명완수(使命完遂)에 대한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하려고 온 이스라엘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이스라엘 선민들은 한결같이 '만일 당신들의 선생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엘리야는 어디에 있는가? 구약성서에는 메시아가 나타나기 이전에 엘리야가 온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말을 부인했습니다. (74-148, 74.11.28) 세례 요한이 엘리야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질문에 대답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구약성서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하층(下層)에 속하는 갈릴리 지방의 어부들이거나 세리 혹은 매춘부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질문에 크게 당황하게 된 제자들은 답변을 위해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광경이 마태복음 17장 10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대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은 사실 제자들에게 큰 쇼크였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신 예수님의 대답이 성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선민들에게는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어도단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에 맞춰 생각해 봅시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의 세례 요한은 오늘날의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인 '빌리 그레이엄'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위대한 예언자로서, 전 이스라엘에 명성을 떨치고 비상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알 수 없는 한 청년이 돌연히 나타나서 전세계를 향하여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고 선포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은 그에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약속했던 엘리야는 어디 있습니까?'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때 그 젊은이가 '빌리 그레이엄이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고 있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이에 대해 틀림없이 여러분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서 빌리 그레이엄이 엘리야가 될 수가 있습니까? 그는 푸른 하늘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그가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반응할 것입니다. 그들도 역시 그러한 대답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와 아주 똑같은 불신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고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그가 푸른 하늘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해서 이스라엘 선민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였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의 선민들은 엘리야가 성경에 기록된 예언대로 푸른 하늘로부터 되돌아온다고 하는 신앙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의 문자에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73-210, 74.9.18) 불신한 세례 요한 당시의 세론(世論)은 아주 무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있고 권위있게 전 이스라엘을 향하여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선민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간단하게 무시해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었습니다. 선민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직접 세례 요한을 찾아가서 물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광경을 우리는 요한복음 1장 19절에서 21절에 걸쳐 읽을 수 있습니다. '…네가 누구냐 물을 때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세례 요한은 모든 것을 부인했습니다.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또 그는 예언자(선지자)라고 하는 것조차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에 대한 예언자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본인은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정황(情況)을 보고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의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패자(敗者)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편에 서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코너에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결국 일대 사기꾼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례 요한이 부인한 후 예수님은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73-214, 74.9.18)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된 이유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게 된 첫째 이유는 구약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해석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세례 요한이 그 사명에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인당했고 결국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1장 1절부터 3절까지에서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이 그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한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는 사람의 질문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일찍이 요단강가에서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요한복음 1장 34절)' 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한 사람입니다. 똑같은 사람이었고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뒤에 와서는 예수님에게 '진정으로 당신이 메시아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듣고 예수님은 얼마나 낙담하셨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얼마나 신앙이 약한 사람이었습니까? 세례 요한의 사명은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선민들로 하여금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특별히 이 땅 위에 보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와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그 사명을 다해 줄 것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을 시켜 예수님에게로 찾아와서 '진정으로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칼로 찔림을 당하는 이상의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느꼈는가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무서운 쇼크를 받았습니다. 그는 분노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 '그렇지 않다' 하고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태복음 11장 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한 요한, 실패한 자, 그대는 이미 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아.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실족했지. 참 안 되었어 요한' 이것이 세례 요한이 실패했을 때 그에게 보여준 예수님의 위안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라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라 하더라도 세례 요한보다는 큰, 그처럼 작은 자리에 세례 요한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은 지금까지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 사명에 실패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73-212, 74.9.18) 진리에 대한 겸허한 마음이 필요한 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했다는 그의 사명을 놓고서는 여인이 낳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의 모든 예언자들도 똑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보다 먼저 있던 모든 예언자들은 그들과 주님 사이의 시간적인 거리를 놓고 메시아를 위한 증거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시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으로 나타나신,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위한 증거자로서의 특권을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증거하는 사명으로 볼 때 세례 요한은 누구보다도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들 중에서는 그가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시는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세례 요한은 가장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비참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보다 먼저 태어났던 모든 예언자들은 영계(靈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몰랐습니다. 그는 의심했습니다. 그는 회의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으며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캄캄한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그 자신의 증거를 끝까지 들고 나서는 데 있어 실패했습니다. 그는 실패자가 되었고 천국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낮은 사람이 되어 마침내 세례 요한은 목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선포하고 증거하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그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목베임을 당하였던들 그는 영광스러운 순교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헤롯왕의 개인적인 사랑의 스캔들에 휘말려 목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사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시봉(侍奉)하는 일만이 그의 유일한 책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 천적(天的)인 사명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의미없는 고통을 받았고 마침내 의미없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독실한 사람이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생겼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왕이 되었다면 세례 요한은 총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놓고 예정한 위치였습니다. 예정대로 되었다면 예수님께서 택하신 12사도와 70문도와 120문도들은 모두가 세례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서 선발되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선민들과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될 수 있고, 그들을 융합시킬 수 있는 조절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와 같은 환경에서 누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음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지금은 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그에 대한 판단은 미루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진리가 해같이 빛나는 영계(靈界)로 가게 됩니다. 아무도 그것을 피할 도리가 없으며 그때에 가서 우리는 그 전체적인 진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상생활(地上生活)을 할 때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복이 있으며, 이 지상생활에서 여러분이 가진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결국은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73-199, 74.9.18) 구름 타고 오시는 것으로 예상됐던 예수님 예수님이 메시아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결정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선민(選民) 이스라엘은 다니엘의 예언(다니엘 7장 13절)대로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적처럼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현현(現顯)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요셉의 아내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예수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느냐? 그는 당신이나 나와 같은 한낱 인간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하게 한 또 하나의 중대한 이유였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예수님의 사명 수행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안겨줬습니다. 우리는 요한 2서 1장 7절에서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라고 사도 요한이 경고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2천년 전에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한 말인데, 그것은 단지 예수님이 육신(肉身)을 썼다는 그 하나만의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구름을 타고 현현하는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들을 가리켜 '적 그리스도'라고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숨겨져 왔으며 오늘날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특별히 이 시대에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가 가까웠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크리스천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명확한 진리의 계시만이 모든 기독교회를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하나되게 하며 우리가 진리를 알 때 그 진리는 우리를 그릇된 신앙이나 분열로부터 구원해 줄 것입니다. (73-217, 74.9.18)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의 의미 이제까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의 참된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태복음 26장 38절)' 하시고,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願)대로 하시옵소서(마태복음 26장 39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만이 아니라 3차에 걸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괴로워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그의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실을 전적으로 왜곡하는 잘못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압정 속에서도 수십만의 기독교인들은 당당하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 형리(刑吏)들에게 '나는 나의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죽을 가치가 없다. 원컨대 나를 거꾸로 매달아 죽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도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첫 순교자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을 때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에 스데반은 평화스럽게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죽어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서를 떠나서도, 미국 독립 때 청년 장교였던 나단 헤일(Narhan Hale)도 체포되어 사형당할 때 말하기를, '나는 내 조국을 위하여 바칠 내 생명이 하나뿐인 것이 유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물며 그가 오신 목적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전세계를 구원하는 데 있었다면 그런 기도를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메시아 될 자격이 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어떤 이기적인 입장에서 하신 것도 아니요, 죽음이 두려워서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약 십자가에 달리시는 길이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의 길이었다면 언제든지 몇 천번이라도 죽으려 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메시아로서의 사명 때문에 초조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 때문에 번민하셨습니다. 그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린 후의 비참한 결과를 예견하시고 비통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이 천국을 실현하는 대업(大業)을 또 다시 2천년간 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고, 그동안 인간들은 심한 고통을 당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수백 만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피를 흘리며 순교를 당하는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버림당하고 황폐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승리와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셨지, 십자가에 처형되어 홀로 가시기를 결코 원치 않으셨습니다. 비참하게 하늘에 돌아가기를 원한 게 아니라 승리의 왕자로서 금의환향(錦衣還鄕)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절망적인 때라도 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지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최후의 담판기도를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슬픔과 고뇌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 가롯 유다야말로 영웅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상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누군가가 하나님의 아들을 원수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롯 유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장 24절)'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장 46절)' 라고 부르짖으셨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예수님은 그때 참으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영예롭습니다'라고 외치셨을 것입니다 (73-199, 74.9.18)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제2차적인 사명 십자가상의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의 본래적인 노정이 아니라 예정된 코스의 변경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결국 그분의 제2차적인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변화산상(變化山上)에서 결정됐습니다. 이 내용에 대한 말씀이 누가복음 9장 30절에서 31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예수님이 '장차 인자(人子)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게 되리라'고 말씀하실 때, 그의 수제자 베드로는 강력하게 만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복음 16장 22절)'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돌이키시며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태복음 16장 23 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증거로 이 특이한 성구를 곧잘 이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라. 그 말은 죽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로 나가시려는 당신을 반대한 베드로를 꾸짖으시고 그를 사탄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근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변경하고 예수님의 사명을 바꾸어 놓으신 것을 안 연후에 베드로를 꾸짖은 것이며, 하나님은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 예수님이 가지고 오셨던 지상천국의 건설이라는 본래적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사명의 최종단계에서 하나님은 영적 구원(靈的救援)이라는 제한된 사명이라도 해주기를 예수님에게 당부하셨는데, 가련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감의 변동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언뜻 보아 예수님을 위로하는 듯한 베드로의 말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2차적인 사명을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을 피하는 것은 예수님의 강림을 완전히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2차적인 사명인 영적인 구원을 생각하시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선민 이스라엘의 몽매와 죄악으로 인해서 필요하게 된 제물의 길을 용납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고난이 지니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치르는 속량(贖良)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는 것을 허락했으며, 그 대가로 예수님을 부활케 해 육신은 구원해 주지 못했으나 영적인 구원을 위한 기대는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승리는 십자가상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이룩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져다 준 구원이었습니다. (73-220, 74.9.18) 예수님을 받아들였더라면 유대 민족으로부터 영접을 받았더라면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이 되어 제자들을 하나로 묶고, 야곱과 아랍족속들의 12지파를 포함한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합했을 것이며,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의 가정이 됐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택하신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하고 하늘의 주권을 확립하셨을 것이며, 그의 당대에 하늘나라의 법도가 마련됐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주권이 실체(實體)를 이뤄 대적할 자 없는 국가가 수립됐을 것이며, 첫아담을 통하여 이룩하려던 하나님의 통치하의 그 나라는 후 아담 예수 그리스도, 즉 왕을 통해서 이룩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제국도 하나님 나라에 굴복했을 것입니다. 이사야 9장 7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 정사(政事)와 평강(平康)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位)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自今)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萬軍)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그의 제자들은 온갖 고난을 받고 피를 흘리면서 맨손으로 로마를 향해 행진했습니다. 결국 4백년이 못 가서 로마제국은 이 맨손의 무리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이 신성한 무리들을 거느리셨다면 그 때, 즉 예수님 당대에 전 로마제국은 하나님의 주권 앞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당시의 대 로마제국은 온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전세계의 복귀(復歸)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로마를 만방(萬邦)의 중심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로마에 천국(天國)이 도래(到來)만 한다면 그것은 용이하게 전세계로 퍼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로마제국에 그의 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면 로마의 힘과 영향으로 세계 도처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예수님 생전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더라면 예수님은 전세계에 걸쳐 실체적인 천국을 건설하셨을 것이며, 오늘날 로마 가톨릭 이니 감리교니 그리스도교니 장로교니 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파의 그 어느 하나도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천국시민이 됐을 것이고, 기독교사는 피를 보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순교자도 없었을 것이고, 교회에 십자가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다면 메시아의 사명이 종결됐기 때문에 물론 재림할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배신을 당하신 것은 슬픈 일입니다. 아담과 해와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은 에덴 동산의 이상을 이루지 못했고, 택함받은 백성들의 비협조로 예수님은 지상천국을 이룩하지 못하셨습니다. (73-199, 74.9.18) 오늘의 기독교는 영적 구원만을 이룬 부활의 종교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기독교도 역시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주님이 고난을 받으실 때 곁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제자들도 배신하고 수제자 베드로마저 그리스도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기독교도 다시 살았으며, 그때 40일 동안 예수님은 함께 기독교의 기반을 굳히셨으니 그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의 시초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승리적인 부활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리이며 여기에는 사탄의 영향력이 배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肉身)은 구속물(救贖物)과 제물로 드려졌으며, 예수님이 그 육신을 제물로 바칠 때 인류의 육신도 제물로 함께 드려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2천년 전 그때 육신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영적 구원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세계는 사탄의 귄세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온 세계에 있는 우리의 육신 안에서 세차게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 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로마서 7장 24~25절)'라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은총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자신이 아직도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즉 그의 육신은 아직도 속량되지 못하여 죄 가운데서 신음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때에만 한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는 영적인 구원만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우리의 몸을 죄악의 결박으로부터 풀어주실 때까지는 사탄의 주관(主管)에 얽매어 우리의 몸은 죄의 법을 섬겨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만이 우리의 영적, 육적 구원을 완결지으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오늘날 영적 구원만을 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는 달리 육적(실체적)인 기반을 갖지 못한 기독교를 주관하는 하나님은 영적인 왕국밖에 주관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옛날 예수님을 바라던 유대교인과 같이 지상에 나라와 교회를 중심삼은 아무런 터전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미국이 이스라엘 나라와 같이 오시는 메시아의 주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기독교의 대표 국가가 돼 있습니까? 육적으로는 아무런 발판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는 시간은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와 세례 요한 일당과 열두 사도를 전부 다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오른편 강도도 죽는 자리였습니다. 죽어 가지고 영적으로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바로 영적 구원의 길이 열린 시간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십자가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기독교가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한 후, 40일 이후에 생겨났습니다. 이건 십자가와 관계없고 부활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의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적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영적 세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사탄이 이 나라와 이 세계의 주권자가 돼 있으니, 사탄이 주관하는 세계가 돼 있으니 이걸 놔둘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타파해 가지고 다시 본래의 하나님의 뜻의 세계로 돌이켜야 하니 메시아가 다시 와야 됩니다. 오시는 메시아가 구름 타고 와서 이 세계를 구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16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할 때 베드로에게 천국문 열쇠를 주면서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두고 보면, 땅에서 타락해서 땅에서 맺혔으니 땅에서 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영계가 문제가 아닙니다. 땅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땅으로부터 와야 되는 것입니다. (74-73, 74.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