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수님과 이스라엘 선민
이스라엘 선민을 세우게 된 배경
여러분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선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라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 물어 봐도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선을 바라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 세상이 선한 세상이 되지 못하고 악한 세상이 되었는가? 이것이 뜻을 품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고충의 고개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본심으로 선을 추구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본심으로 악을 그리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추구하지도 않고 그리워하지도 않은 악이 선보다도 많은 것을 보게 될 때 오늘날 이 세상은 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인간들이 선으로 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악한 개인으로부터 악한 가정이 생겨났고, 그 가정이 모여서 악한 사회, 악한 민족, 악한 국가를 이루어 오늘날 전세계가 악의 권내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인류가 바라던 소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바라던 소원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기필코 이 세상의 악을 제거할 수 있고, 이 세상의 악을 청산지을 수 있는 새로운 섭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악한 세상을 그냥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한 그 세계를 세워 드리기 위한 운동이 벌어져야 됩니다. 이 운동이 하나의 가정으로부터 벌어져서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확산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은 하나님이 역사적인 인연을 통해서 새로운 선의 기반을 넓히기 위하여 세웠습니다.
개인을 세워서 악한 개인에 대한 싸움을 전개시켜 이 세계의 악한 개인에 대하여 승리의 기준을 세우게 하였고, 가정을 세워서 이 세계의 악한 가정에 대하여 승리의 기준을 세우게 하였으며, 종족․ 민족․국가를 세워서 승리의 기준을 세우게 하여 악한 세상을 제거하고 선한 종족․선한 민족․ 선한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때를 마련하여 하나의 나라를 준비해 놓고, 그 나라 가운데 세계를 대신하여 전체의 뜻을 세울 수 있는, 즉 세계를 하늘편으로 귀결시킬 수 있는 전체적인 책임을 짊어진 한 분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냐? 그분은 악한 세상에서 선을 중심삼고 악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분이라야만 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6-17, 65.12.26)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
예수님의 사명은 악한 세상을 복귀하여 선한 세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제일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독생자의 명분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입장에서 이 땅에 오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선한 왕의 왕으로 이 땅 위에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단결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이 악한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관이나 국가관, 세계관, 우주관은 어디까지나 타락권내의 악과 더불어 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직까지 이 땅 위에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선과 짝할 수 있는 개인생활, 사회생활, 국가생활, 세계생활, 우주생활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셔서 일생 동안 전하고자 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모든 희망의 뜻을 종결시켜야 할 사명을 갖고 오셨습니다. 시대적인 악을 퇴치하고, 승리의 한날을 맞아 선한 민족을 중심한 선의 국가를 편성하여 만왕의 왕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던 근본책임과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개인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고,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고, 종족적인 승리의 터전,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됩니다. 그 터전 위에 예수님의 생활관과 세계관을 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일대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가정적인 싸움에 승리할 수 있고, 종족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민족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국가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한날을 바라고 선민을 세워 키워 나왔습니다. (16-18, 65.12.26)
예수님을 모시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선민은 자기들의 생활관과 인생관과 우주관을 이 땅에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관과 인생관과 우주관으로 대치시켜야 했습니다. 그때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그러한 입장에서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천년의 역사를 종결지을 수 있는 선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선의 목적을 연장시켜 다시 악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의 2천년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은 자기가 통치해야 할 선의 나라, 선의 민족, 선의 종족, 선의 가정, 선의 개인을 바라보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찾으시려던 그 나라와 그 민족과 그 종족과 그 가정, 그리고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참다운 식구와 형제들이 있었느냐?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구원섭리를 이 땅 위에서 완결짓고 간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세워 4천년 동안 키워 나올 때, 배반하는 그들을 승리의 터 위에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셨던가!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맞는 그날부터 그분과 하나되어 국가적인 악과 세계적인 악을 물리치고 선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그러한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마음속으로 원했겠는가?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낼 때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바랐을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입장에 서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소망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만민을 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선민을 세웠겠습니까? 그렇게도 애써 길러 놓은 이스라엘 민족, 4천년의 역사적인 승리의 터전 위에서 성장해 나온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모시지 않았다니….
누구보다도 그 나라의 주권자들, 누구보다도 그 나라의 사상적인 분야를 책임지고 있던 교법사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이단자로 몰아 예수님의 앞길을 막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부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16-19, 65.12.26)
예수님의 소원과 심정을 누가 알았던가
예수님의 소망은 불쌍한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학정으로부터 구원하고, 당시에 세계를 선의 세계로 통일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 주고 메시아로 알았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역사적인 배후를 짊어지고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었던가?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와 직결되어야 했느냐? 이스라엘 선민과 유대교가 가야 할 하나의 귀결점은 메시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맡은 바 목적을 놓고 메시아와 화합하여 일체가 되고 절대적인 입장에서 단결된 하나의 국가 형태를 갖추어 로마와 부딪쳐야만 했습니다. 다음엔 로마와 전세계를 통합해서 지중해를 중심삼은 세계적인 판도를 구축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했다면 이 세계가 오늘날과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라신 사도는 세상의 악을 따르는 못난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은 그렇지 못했으니 그 당시 예수님이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예수님은 못난 사도들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바라신 사도들이 찾아졌다면 이스라엘은 악의 세계를 넘어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세계를 이루어야 할 역사적인 책임을 안고 계셨기 때문에 악을 물리치는 것을 최대의 소원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이를 물고, 혀를 깨물면서 하루하루 살아나가셨습니다. 이것을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만민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지, 십자가에 죽어서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세계를 일시에 구원해야 했던 예수님의 목적이 왜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그것은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가정과 종족과 세계를 일시에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예수님이 바라시던 소원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로부터 일시에 구원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예수님이 얼마나 초조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조차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누가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주었던가? 감람산 골짜기를 거닐 때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호소하던 예수님의 내적인 심정을 누가 알았던가? 예수님은 로마의 권세를 얼마나 헐어 버리고 싶어하셨던가! 반대하고 알아주지 못하는 유대교의 무리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하나님 앞에 엄숙히 제사드릴 수 있는 참된 유대교와 참된 이스라엘을 예수님은 마음속에 얼마나 그리워하셨던가! 제자들도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꿈도 안 꾸었습니다.
예수님은 믿고 천국 가겠다는 제자들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무리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나라의 집권자들과 사상적인 분야를 책임지고 있는 유대교단의 지도자들과 하나되어 로마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켜야 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하나되어서 메시아를 앞세워 나가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했으니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민들이 예수님을 반대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16-21, 65.12.26)
예수님은 죽으러 오시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죽으러 이 땅에 오셨다. 내 죄를 위해서 신랑 되시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나 대신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이다. 그렇게 피를 흘리심으로써 내 죄를 대속(代贖)해 주셨다' 하며 예수님을 대속의 주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예수님은 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혈을 많이 흘리는 것이 좋습니다. 이왕 보혈을 흘리면서 죽을 바에는 만민을 위해서 한꺼번에 많이 흘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문제가 됩니다. 사람이 죽는 데 비참하게 죽은 사람하고 덜 비참하게 죽은 사람이 있을 때 어떤 사람에게 더 동정이 가겠습니까? 비참하게 죽은 사람에게 더 동정이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똑같이 죽었다 하더라도 총 한방 맞고 죽은 사람보다 비참하게 피를 많이 흘리고 죽은 사람이 더 동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왕지사 우리를 위해서 피를 많이 흘리고 죽으면 그게 더 좋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보혈을 한꺼번에 많이 쏟고 죽기를 원했을까? 진정으로 예수님이 죽기를 원했을까요? 예수님은 신랑이신데, 신랑이신 그 분이 나를 위해 죽겠다고 할 때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 예수님 시대에 살던 사람들도 신랑이신 예수님이 죽는다는데 왜 가만히 있었을까요? 거기에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랑인 줄 몰랐습니다. 몰랐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아직까지도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람의 손을 통해서 죽이려 했다면 가롯 유다가 죽이기 전에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에게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자기가 제물 입장이므로 예수님의 아버지 어머니가 예수님을 잡아죽여야 됩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이 땅 위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이끌어냈습니까? 그것은 오실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해 이스라엘 민족이 울타리가 되어 주님에게 총알이 날아오면 대신 맞아 죽고, 주님이 내몰리면 대신 몰리고, 로마 제국이 주님에게 달려들면 대신 대적하여 싸우게 하기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울타리가 되어 주고, 철옹성 같은 궁성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신랑으로 오실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만년 공사를 세계적으로 준비시키려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이끌어냈지 오실 주님을 죽이라고 데리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41-221, 71.2.16)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죽으러 이 땅 위에 오셨다고 하는 사람과 통일교회 선생 님 중 어느 쪽의 말이 이치에 합당하겠습니까? 선생님 말이 이치에 합당합니다. 이것은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다면 누가 죽입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몰아 죽이지 않았다면 누가 예수님을 죽이냐는 말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죽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죽이겠습니까? 로마 백성도, 로마 병정도 예수님을 못 죽입니다. 원수 국가인 로마를 타고 앉아 세계를 정복해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온 예수님이신데 이 원수 나라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민족이 그를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2천년 동안 오직 메시아만을 바라고 나온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택한 다음 야곱을 21년 동안 하란 땅에 보냈다가 다시 끌어내고, 또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 들여보내 400년 동안 고생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별의별 기적을 다 일으키면서 보호 육성하여 끌고 나온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잡아죽이라고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뭡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죽지 않았더라면 그냥 독신으로 늙어 죽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새로운 뜻에 따라 맞이한 신부와 같이 살다가 죽었을 것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부는 하나님의 며느리입니다. 그 아들과 며느리의 아들딸은 하나님의 손자 손녀입니다.
하나님은 손자 손녀 보기를 원했겠습니까, 원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죽은 송장도 끌어안고 전도하면서 똥 묻은 것도 닦아 가지고 아들로 삼기를 원하는데, 깨끗하고 죄 없는 신랑이신 예수님이 신부를 맞아 죄 없는 아들딸을 낳는 것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아들 며느리가 낳은 아들딸은 하나님의 손자 손녀입니다. 그 손자 손녀가 낳은 아들딸은 하나님의 증손자 증손녀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손자 손녀의 계대(繼代)가 3대(三代)쯤 가다가 끊어지기를 바라겠습니까,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겠습니까? 영원히 그 대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이 땅 위에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지파와 족속과 나라가 생겨납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들딸도 예수님을 믿어야 됩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 가느냐 이겁니다. 예수님의 아들딸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천국 가기 때문에 그 아들딸의 아들딸도 예수님을 안 믿어도 그대로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으니 다 틀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신부 자리도 없어졌고, 아들딸의 자리도 없어졌고, 예수님의 손자를 중심삼은 예수 지파의 자리도 없어지고, 족속의 자리도 없어지고, 민족의 자리도 없어지고, 나라의 자리도 없어졌습니다. 예수님 혈통의 씨가 마르고 없으니 다시 로마정권의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사탄 세계에서 그래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어 미국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전세계를 압도하게 만들었는데, 예수님의 직계 아들딸이 있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을 잘 해주고 세계를 통일시켰겠습니까? 예수님이 망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운명을 가진 기독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41-222, 71.2.16)
십자가에 의한 구원의 한계
예수님의 족속이 남아 있다면 여러분도 그 족속과 사돈 될 가망성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데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그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도 애급에 들어가, 그 사지에서도 자꾸 번성해서 애급 나라가 불쌍해질 뻔했는데, 만약 예수님의 직계 아들딸을 남겨 놓았다면 하나님이 잘 퍼지게 하겠습니까, 안 퍼지게 하겠습니까? 잘 퍼졌으면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았겠습니까? 나라가 이루어졌으면, 그 나라는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나의 주권 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일 수 있습니까? 기독교가 세계의 종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실이 하나님의 내면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속이 있었다면 우리도 친척이 될 수 있고 사돈도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돈이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 사돈님 한다는 것입니다. 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있다면 비록 타락한 인간이지만 타락한 세계의 아가씨를 보고, '저 아가씨가 아니면 난 죽는다'고 하면서 예수님께 결혼시켜 달라고 떼를 쓰면 예수님도 별 수 없습니다. 결혼시켜 줘야 됩니다. 그러나 그 식이 다릅니다. 탕감과정을 거치는 식이 되어야 합니다.
타락한 세계의 사람들이 예수님과 사돈을 맺는다면 왕궁에 있는 훌륭한 패들은 모두 예수님의 친척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이 예수님의 권내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기독교가 지금까지 쫓기고 구름떼처럼 몰리며 나라 없는 신세가 되어 억울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해서 죽었습니까, 몰려 가지고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기도는 기성교회의 주장대로라면 잘못한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어디 있고 내 뜻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라고 한 것도 수작이 됩니다.
그 기도 내용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 이것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아는 입장에서 한 기도입니까, 죽지 않을 입장이었는데 죽게 되니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고 놀라서 한 기도입니까? 놀라서 한 기도입니다. 그러한 기도를 세 번씩이나 했습니다. '내가 그래야 되겠느냐? 본래는 내가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으면 모든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나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에, 만민을 긍휼히 여기는 입장에서 후대에 그렇게 피를 흘리며 따라올 수많은 신도들, 그런 기독교의 비참함을 생각할 때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잘못하면 둘 다 놓쳐 버립니다. 두 손에 떡을 쥐었다가 다 놓쳐 버리겠으니 한 손만이라도 떡을 쥐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영육 두 세계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육적인 세계를 버리고 영적인 세계라도 구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는 영적인 천국을 모색해 나온 것입니다. (41-224, 71.2.26)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는 예수님을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나라와 교단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땅과 백성과 주권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백성을 갖고 주권을 갖고 땅을 갖고 있습니까? 미국이 그렇습니까? 미국의 대통령은 기독교 지도자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기독교 국가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나라와 땅이 없기 때문에 지상에서 몰리면 쫓기고 죽어가면서 세계적인 판도를 넓혀 나왔습니다. 기막힌 서러움을 겪어 나온 불쌍한 기독교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오늘날 기독교인이 탕감해야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속죄를 받지 못합니다. 죽음으로써 속죄 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으로 인한 속죄보다 내가 죽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600만명이나 히틀러에게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인 데 대한 탕감입니다.
예수님은 천지의 왕도 되고, 인류의 부모도 되고, 최고의 스승도 됩니다. 3대 명함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만왕의 왕이요. 인류의 부모입니다. 그리고 스승 중의 스승입니다. 그러한 3대 내용을 갖춘 예수님을 죽였으니 용서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죄인을 용서해 주는 법이 있어요? 하나님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기가 막히는 길을 가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41-226, 71.2.16)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소원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소원해 나온 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이 사랑하고, 교회가 사랑하고, 종족이 사랑하고, 가정이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놓고 소원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아들을 위해서 준비했기 때문에 준비해 나온 그 나라와 교회와 씨족과 가정이 일치 단결하여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먼저 준비된 것들은 예수님 앞에 가인과 마찬가지입니다. 천사장이 됩니다. 가인과 아벨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지 못 했기 때문에 한이 맺혔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했고, 형제를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했고, 종족을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했으며, 교회를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전부 반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한입니다.
예수님은 한이 맺히지 않게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종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왔는데도 사랑할 대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한 한을 풀어야 됩니다.
그 다음엔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총각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신랑된, 남편된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된 예수님을 맞이해 보았습니까? 할아버지된 예수님을 맞이해 보았습니까? 그리고 씨족의 족장된 예수님을 맞이해 보았습니까? 민족의 중심된 예수님을 맞이해 보았습니까? 국가의 주권자된 예수님을 맞이해 보았습니까? 다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이스라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쫓겨다니는 예수님밖에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한입니다. 이렇게 원한에 사무치게 되었으니 그 백성이 남아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2천년 동안이나 세계에 유리걸식(流離乞食)하면서 가는 곳곳마다 말발굽에 밟혀 죽고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많은 피의 대가를 치렀습니다.
1948년 8월 1일 유엔의 결의에 의해 비로소 독립이 되어 재봉춘의 때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그 민족으로서 맞이할 수 있는 때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죄를 세계 앞에 탕감하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시기를 맞아 이스라엘 민족 600만이 학살됨으로써 역사적인 죄를 다 탕감하게 하였고, 재봉춘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새로운 세계 역사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41-250, 71.2.16)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슬픔을 부여안고 우신 예수님
예수님은 유대 나라를 넘어 로마로 가는 길을 똑똑히 바라보셨습니다. '만일 유대교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된다면 로마는 내 손으로 넘어온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바라보셨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400년 걸려서 로마를 정복했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살아 계셨다면 로마가 문제겠습니까? 이스라엘을 기반으로 로마를 정복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것이 원리이기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20세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점점 피폐해졌습니다. 로마의 압정 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앞날의 소망이 다 막혀 버리고 황혼길로 접어든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민족에 대한 사랑에 불타 올랐습니다. 이스라엘을 걸어 놓고 민족에 대한 사랑에 울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호소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일이 가면 갈수록 점점 조급한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움직여야 된다는 소신을 가진 예수님은 유대교를 밟고 올라서고 더 나아가서는 로마까지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인생관과 새로운 세계관, 그리고 새로운 이념을 중심으로 로마를 일시에 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하고 준비했던 이스라엘이 가정과 민족과 교단이 하나되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 맺힌 원한이 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설 수 있는 터전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 자신이 설 수 있는 언덕이 없는 것을 한탄했습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을 기다리고 찾아야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선조들이 희생의 제물로 죽음의 길을 가면서 닦아온 그 터전은 이스라엘을 행복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민족이 메시아인 자신을 몰라보니 그것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외롭고 분했겠습니까?
예수님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초조함을 느끼는 한편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한 분인가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여안고 효성의 도리를 다하려했던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 삼면사방 어느 곳에도 그를 붙들어 주는 사람은 없고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도리어 하나님 앞에 슬픔이 되는 것들 뿐이었으니, 그 슬픔을 부여안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 예수님의 사정이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또 유대 민족 앞에 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가슴은 얼마나 서러웠겠는가!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운명길이 다가온 것을 생각하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장 39절)' 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때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십자가의 이슬로 희생당하는 것이 한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이스라엘 선민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수고했던 것을 생각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위해 울면서 걸어 나오신 피맺힌 고난의 과정이 이제 자기가 죽으면 전부 산산이 깨져 나가게 될 것을 아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수고한 역사적인 서러운 사정을 부여잡고 우셨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 역적이 된다는 사실을 아시는 예수님은 죽는 순간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시며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운 민족인데 저들을 버리면 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염려하셨습니다. 민족을 붙들고 미래의 운명을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배반하는 민족을 염려하면서 그 소망의 한 날을 위해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한없는 슬픔과 새로운 소망에 대한 서러움이 어리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아는 하나님의 서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누가 이 땅 위에서 이러한 사정을 알아서 해원해 드리며, 또 그 원한을 풀어 드릴 것인가! 이 일은 끝날의 성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통일교회가 나왔습니다. (16-37, 65.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