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례 요한과 예수님
종교의 사명
타락인간이 복귀하는 데는 결코 그냥 그대로 복귀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창조원칙에 따라서 복귀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복귀역사, 재창조역사를 통해서 섭리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천사장이 있고 해와가 있고 아담이 있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위((四位)의 형태를 갖춘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복귀하는 데는 재창조원칙을 통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를 복귀하기 전에 천사장을 찾아 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타락하지 않은 종, 다시 말하여 인간 앞에 충성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종 중의 종이 되어야 할 천사장이 그러한 종이 못 된 것을 복귀하기 위한 역사를 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천사장의 터전을 확대시켜 하나님과 인간 앞에 충성을 다해야 할 책임을 못한 종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해, 하나님과 인간 앞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대표자를 선출하기 위한 역사를 해 나오셨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나타난 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입니다.
그 종교가 반드시 찾아야 했던 것은 앞으로 올 메시아입니다. 아담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 아담을 먼저 짓고 그 다음에 해와를 지었습니다. 순서가 그렇습니다.
천사장의 사명을 할 수 있는 판도를 넓히기 위해서, 천사장을 복귀하기 위한 세계적인 대표자를 구하기 위해서 종교를 세워 나왔다고 했는데, 그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 곧 종교가 바라는 소망이 무엇이냐?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던 천사장의 입장을 완결짓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영원히 신임 받을 수 있는 종으로 결정됨과 동시에 아담 앞에 영원히 충성한다는 조건을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종교로서 찾고자 하는 천사장의 입장을 완전히 찾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나 유대교의 역사과정에서 당대를 책임졌던 제사장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모시기 위한 국가적이요, 세계적인 판도를 넓히기 위한 기초작업을 해 나온 데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기필코 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귀원칙, 창조원칙에 어긋납니다. 천사장이 복귀된 기준 밑에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담을 사랑하고, 사람 앞에 영원히 종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 앞에 충신의 사명을 할 수 있는 종교적 대표자들이 나와야 됩니다. (46-197, 71.8.15)
세례 요한의 입장과 사명
성경에 세례 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산 것이 잘산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장차 올 메시아를 만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절대적인 신앙을 갖고 나갔습니다. 그런 놀음하는 것을 자기 부모가 좋아했겠어요? 그 형제들이 있었으면 좋아했겠어요? 그렇지만 세례 요한은 그런 환경을 극복한 대표자입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에 가 보면 그곳은 메뚜기와 석청이 많이 나는 곳이 못 됩니다. 언제나 그런 생활을 했기 때문에 메뚜기와 석청이 없을 때는 얻어먹기가 일쑤였을 것입니다. 아이들한테 손가락질 당하고, 이상한 사나이라고 동네방네 소문이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세례 요한이 하나님을 믿는 마음은 절대적이어서 악의 세계에서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분립된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리에서 메시아를 맞게 한 것입니다. (53-274, 72.3.1)
유대교를 두고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례 요한은 수많은 종교권에서 하나님이 세계적으로 선택한 대표적인 천사장형으로서, 천사장의 사명을 완결지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죽든지 살든지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그의 생명이 존속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요,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은, 에덴에서 천사장이 아담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하나님과 아담을 대신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태어나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존속해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기뻐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기뻐한다면 그 기쁨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없으며, 그가 아무리 가치적인 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만나서 가치적인 인연을 맺고 예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가치의 내용과 접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빼놓고서는 그가 아무리 가치적인 생활을 했고, 또 그의 생애가 아무리 거룩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담 때문에 천사장을 지었으므로 세례 요한이 이 땅 위에서 아무리 충성을 다한다 하더라도, 아담을 위하여 충성하는 실질적인 기반을 갖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 충성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담을 위하여 지었던 종, 즉 세례 요한의 사명은 아담을 통하여 완결을 봐야 합니다. (46-198, 71.8.15)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는 가인 아벨 관계입니다. 한 아버지의 혈통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사가랴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잉태한 다음 사가랴의 집에 가 있었습니다. 6개월 동안 있으면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사가랴가 아니라면 원리가 틀립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신으로 잉태했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성신으로 잉태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을 성신으로 잉태했어요? 예수님을 그냥 그대로 동정녀가 낳았어요? 동정녀가 아기를 가지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기독교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리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사생아인 것을 몰랐을 것 같아요? 다 알았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싸웠습니다.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 볼 때 대답을 안 하니까, 그것을 중심하고 싸운 것입니다. 요셉이 물어 볼 때마다 '성신으로 잉태했다!' 하면, '이 쌍간나, 살려 주었는데 무슨 수작이냐?' 하며 예수님을 놓고 부처끼리 싸우고, 아들딸을 낳은 후에도 계속 싸움을 했다는 것입니다. (235-237, 92.9.20)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원리적 관점에서 보면, 그 6개월은 인간들의 6개월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6천년의 6수를 대표한 기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짓기 전에 만물을 지었고, 만물을 짓기 전에 천사세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 아담을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단계의 기준에서 천사장을 대신하는 입장에 서야 했던 세례 요한을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도록 제반 준비를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유대교의 모든 전통사상을 일신에 귀결시키고 안팎으로 나라와 교회를 움직여서 충성의 도리를 다하여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을 순수하게 받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예수님을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외적인 문제를 책임져야 되고, 내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것도 협조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어떤 문제까지 협조해야 했느냐? 타락을 천사장이 시켰기 때문에 천사장 입장이었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 앞에 있는 안팎의 모든 사연을 대신 책임지고 예수님이 복귀의 사명을 하는데 협조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상대를 결정하는 문제에도 예수님 자신이 주도적으로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타락을 천사장이 시켰기 때문에 천사장을 복귀한 입장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안팎을 가려야 할 복귀의 중대한 문제, 다시 말하면 신부를 복귀하는 문제까지도 전폭적인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쓰라림과 고통이 있으면 누가 책임져야 되느냐? 천사장이 잘못하여 그런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세례 요한 자신이 그 모든 어려운 문제를 책임지고 예수님이 가는 길 앞에는 환난이나 시련이 일체 없게끔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당대의 세례 요한에게 맡겨 준 사명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난 사가랴 가정은 마리아 가정과 친인척간입니다. 마리아는 세례 요한의 이모가 되고,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이종사촌이었습니다. 가정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요셉 가정과 사가랴 가정이 하나되고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하나되었다면 예수님은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셉 가정에서 목수의 조수를 하기 전에 사가랴와 세례 요한의 협조를 받았다면, 그의 일생에 목수의 조수 생활 30여 년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뜻적인 입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메시아를 위해서 준비된 사가랴 가정이나 사가랴 자신에게 있어서나, 또 30여 년의 생애 동안 메시아를 맞기 위해 수고의 노정을 갔던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께 목수생활을 시키고 집을 떠나 외로운 생활을 하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가까운 입장에서 내적인 사정을 통하고 내적인 사연을 의논해 가면서 이스라엘 나라와 복권을 위해 안팎으로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어려운 문제는 세례 요한이 책임지고 재미있고 기쁜 일은 예수님 앞에 재료로 줄 수 있게끔 개인 개인이 안팎으로 갖춰짐과 동시에 가정이 안팎으로 갖추어져야 했습니다. 유대교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 가정이요, 이스라엘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세례 요한 가정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중심삼고 안팎으로 하나될 수 있는 기준을 결정 지었더라면 그것이 핵심이 되어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를 자동적으로 하나로 흡수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46-199, 71.8.15)
세례 요한의 격위와 사명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이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 타고 다시 오신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 전에 이 땅 위에 천사장의 사명을 완결지을 수 있는 하늘의 충신이 나와야 됩니다.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뜻을 위해서다'라고 선포하는 자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이 예수님 당시에도 벌어졌습니다. 그 사명의 대표적인 중심 존재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나니! 내가 온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증거하기 위해서다'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종으로 와서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대표하여 타락한 직후의 아담의 자리를 복귀해야 했습니다. 타락 직후의 아담의 자리,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자리로 연결될 수 있는 자리를 복귀해야 했던 것입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자리를 복귀하여 세상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상속해 주기로 약속해야 할 대표자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은 세례 요한 개인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 이스라엘 역사를 대표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말이요, 4천년 역사를 대표하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전 인류를 대표하는 말입니다. 또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준 그 자리는 역사적인 모든 책임을 상속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다음부터 예수님은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아직까지 하늘의 충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충신이 나오려면 이 땅 위에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이 나와야 됩니다. 천사장은 그 하나님의 아들을 모심으로써 하늘 앞에 충신의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함으로써 충신의 기준이 결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기필코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충신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세운 것은 그때까지 4천년 동안 하나님과 대결해 온 사탄의 괴수 천사장, 하나님을 배반한 그 천사장 말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짐하고 나서는 천사장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고, 예수님을 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려움을 자기의 어려움으로 알고 그것을 헤쳐 나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러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슬픔은 더욱 가중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했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세 제자 가운데 들어가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환영하던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신랑 신부의 본연의 이름을 갖춘 하나님의 아들딸 앞에 충성한 천사세계의 대표적 실체로서 천사세계를 이끌고, 실체 사탄세계를 방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올 수 있는 천사장의 실체목적을 완결한 세례 요한이 되어야 하는데, 그가 그 사명을 완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사명까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 되는 도리가 생겼습니다.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신랑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영광 가운데 출발해야 했던 예수님은 슬프고 원통한 종의 멍에를 쓰고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과정이 남아 있기에 그 고개를 넘기 위해 나온 것이 기독교의 2천년 역사입니다. (15-245, 65.10.17)
세례 요한의 위대한 점과 그가 가진 메시아관의 한계점
성경에 나타난 세례 요한을 살펴보면, 세례 요한은 광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는 집을 떠나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분립해서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는 오실 메시아, 하나님, 그의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이 그가 자기보다 앞서 왔던 선지자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는 메시아가 온 세계를 통치하시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는 남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나라를 위하여 눈물 흘렸고, 유대 민족이 사탄세계를 다스릴 메시아가 오시기를 바라며 눈물을 흘렸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울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그는 선지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할 수 없었지만 세례 요한은 오시는 메시아를 위해 그의 갈 길을 곧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오실 분을 위해 기도를 하지 못했지만, 세례 요한은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그분을 위해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그가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요한이 그 자신의 나라의 통치자를 위하여 기도를 했지만, 반면에 예수님은 전세계의 통치자로 오셨습니다. 요한의 관점은 하나님의 심정과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메시아관은 자기 나라를 위한 메시아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메시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꿈꾸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규칙이었던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수님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전세계를 구하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야는 더 넓었으며, 요한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시야에는 하나의 국가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서로 다른 길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반대했던 이스라엘 민족편에 서게 되어 예수님의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편에서 예수님과 하나되었더라면,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과 세례 요한을 모든 선지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믿었던 온 민족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52-54, 71.12.14)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야 했던 세례 요한
예수님 가정이 그를 믿고 철옹성 같은 울타리가 되었다면 베드로 같은 어부나 무식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들이나 사촌, 육촌, 팔촌 등 문중에서 열두 제자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촌이나 사돈의 팔촌이 되었습니까?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태복음 11장을 보면,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1장 7~8절)' 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태복음 11장 12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래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갔던 것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세례를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누가복음 7장 19절)' 하고 수작을 했습니다. 천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고 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 자신이 이루어야 할 천국을 힘쓰는 베드로가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태복음 11장 11절)'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제일 컸다면 영계에 가서도 커야 되는데 거꾸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선지자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예언적인 증거를 했지만, 예수님의 실체를 보고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은 세례 요한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이 제일 큰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는 데 있어서 세례 요한은 맨 꼴찌입니다. 영계에 간 수많은 선지자들은 먼 미래를 두고 메시아를 증거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메시아를 직접 모시는 입장은 아니지만 영계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시고 있는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모시는 데는 맨 꼴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해석해야 풀리지 거꾸로 들이 맞춰서는 되지 않습니다. 성경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41-247, 71.2.16)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세례 요한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을 몰라서 반대했지만, 예수님을 증거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과연 믿었느냐? 마태복음 11장 2절 이하를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나가 전도하는데,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은 예수님한테로 모든 사람이 몰려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하는 말이 '선생님한테 세례 받은 예수님께로 모든 사람이 가나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또 언젠가는 요단강가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대하여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하더니, 언제는 제자를 보내어 예수님을 의심하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어 묻는 말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러한 말을 듣게 될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세상 천지에 교회와 나라와 백성이 전부 반대하고 누구 하나 지지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요단강가에서 자기를 증거한 세례 요한 하나만은 자기를 지지할 줄 알았는데, 그마저 그러니 기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6절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을 지적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다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풍자적으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냐. 그런 자들은 궁중에나 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고 들이쳤습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오. 마태복음 11장 11절에 예수님이 기가 막혀 세례 요한을 다시 공격하는 말이 '여인이 낳은 자 중 세례 요한보다 더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영계에 간 사람들이 많은데 왜 그렇게 반대적인 현상이 벌어지느냐? 이제 그 뜻을 밝혀 주겠습니다. 모든 선지자의 사명은 오실 메시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과거에 왔다 간 선지자들은 메시아를 증거하는 데도 먼 역사적 거리를 두고 증거했지만,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직접 증거했습니다. 그러니 증거라는 입장에서 보면 제일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천국에서 제일 작으냐? 천국에 있는 모든 선지자들은 이 땅 위에서 핍박받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고 믿고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작아야 됩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만이 천국을 빼앗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힘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힘썼으면 어떻게 됐을 것이냐? 힘썼더라면 수제자는 베드로가 아니고 세례 요한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세례 요한이 수제자가 됐더라면, 열두 제자인 사도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70문도, 120문도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도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하나됐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잡아죽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선지자인 세례 요한은 유대교의 고위층과 모든 서기관들을 합하여 예수님과 하나되게끔 했어야 합니다. 그 일을 하도록 준비한 대표자가 세례 요한이 아니었더냐? 그건 틀림없습니다.
14절까지 보면, '모든 선지자와 율법에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구약성경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의 열매되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과 하나됐더라면 신약이 출발됩니다. 만인의 주님이 되었다면 무식한 사람들을 제자 삼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으니까 그랬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런가 안 그런가 알아봅시다. 요한복음 3장 30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대해서 증거하여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답변한 세례 요한의 말에 대하여,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례 요한이 겸손하고 온유하기 때문에 그런 대답을 했다고 위대한 선지자로 모셔 왔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를 선하고 높은 분으로 봅니다. 세례 요한이 메시아와 행동을 같이했다면, 메시아가 흥하면 세례 요한도 흥하는 것이요, 메시아가 망하면 세례 요한도 따라서 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두 갈래 길이 생겨날 수 있었느냐? 그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런 말을 듣게 될 때 충격 받을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끝날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죄악을 청산하고 안팎의 그릇된 관념을 청산할 때가 되었으므로, 역사적 과정에 숨겨졌던 모든 것을 들춰내어 청산 짓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증거할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믿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73-214, 74.9.18)
세례 요한의 불신의 결과
세례 요한이 실수하고 요셉 가정이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이 그 책임을 몽땅 추궁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신임하는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리에서 예수님 앞에 책임을 다 갖다 맡기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외적으로는 십자가를 지고 내적으로는 가정의 어려움, 즉 심정적인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외적으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내적으로는 심정적인 비탄을 느끼면서 책임을 수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천사장이 해와를 타락시켰습니다. 거기에 아담도 끌어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에 세례 요한이 협조하여 신부를 맞았더라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위기대를 이루었더라면 지상의 복귀는 그때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상대가 결정되어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기 전 하나님을 중심삼은 천사장과 아담 해와와 같은 입장이 당시의 유대교를 중심삼은 이스라엘이라는 허락한 터전 위에서 결정되었더라면, 거기서부터 창조원리에 의한 복귀의 형태가 지상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예수님 앞에 비통한 사연이 열매맺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천사의 사명도 실패로 돌아갔고, 해와의 사명도 실패로 돌아갔고, 아담의 사명도 실패로 돌아갔으며, 하나님의 섭리도 실패로 돌아가 하나님은 다시 슬퍼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죽었지만 그가 죽은 후에 부활해서 세례 요한을 대신한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사람이 하나될 수 있는 입장이 됨으로써 예수님과 성신을 중심삼고 복귀역사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했지만 부활한 터전 위에서 성신을 중심삼고 영적으로나마 하나님을 중심삼은 천사장 복귀형과 아담 복귀형과 해와 복귀형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계와 육계가 갈라져 어려운 수난을 거치는 타락권을 개재시키긴 했지만 그런 내용을 갖춘 조건을 중심삼고 기독교가 새로운 출발을 했습니다.
이런 역사가 예수님 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중심삼고 영육을 통하여 완결지어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민족과 가정,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 사명을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추방 받는 종교가 되어 이 지구성에 발붙이기 위해 모진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46-200, 71.8.15)
지금까지의 영적 역사의 목적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써 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가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해서 영적인 사위기대 형태를 갖추어 역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타락은 창조원칙에 배치된 것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사위기대의 완결을 봐야 됩니다.
육적인 실패를 가져옴으로써 영적인 기반을 중심삼고 기독교가 연결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전세계의 남자나 여자들은 어디까지나 반쪽입니다. 몸이 있으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소망 이외에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교는 세상을 끊고 순전히 영적인 구원을 소망해 나온 것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반쪽이라는 것입니다.
영이라는 것은 육을 통해서 생겨나게 되어 있는 것이지, 영을 통해서 육이 생겨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지상에 있는 신도들을 보게 되면 그 영이 본래는 육을 통하여 생겨나야 하는데 육을 통하지 않고 생겨난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와 마찬가지입니다. 천사세계의 미완성급에 연결되어 다시 완성의 한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나오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이 지상에는 천사세계를 이기고 천사세계를 새로이 수습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와야 됩니다. 그 사람은 그냥 상속받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싸워 이겨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실체를 가진 천사장형이 됩니다. 영적 세계는 곧 천사세계의 연장이기 때문에 실체 사람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육을 중심삼고 육의 완성과 더불어 영의 완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영적 구원의 기반은 닦았지만 육적 기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의 실체를 쓴 세례 요한과 같은 입장을 결정지을 수 있는 터전이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중심삼고 영육 아울러 천사장 복귀의 사명을 할 수 있는 입장이었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2천년 동안의 기독교는 영육을 중심삼고 사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육은 떼어놓고 영적으로만 그 사명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다시 육적 터전을 연결시키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육적 터전을 연결시키는 놀음을 하는 데도 역시 세계적으로 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천사장이 아담 창조에 협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협조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영계가 협조해 왔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협조하는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성신이 기독교 신자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딸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천사장의 자식들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원리적으로 볼 때, 제2 이스라엘권이 제1 이스라엘권보다 못합니다. 제1 이스라엘권은 육적 기대(肉的基臺)가 있었지만 제2 이스라엘권은 육적 기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수 천년 동안, 영적 세계의 사명을 담당한 수많은 종교들은 아담을 대신 모실 수 있는 실체적 천사장을 만들기 위한 싸움을 해 왔습니다. 실체적 천사장, 즉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세계가 동원되었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 전체가 동원되었습니다. 끝날에 성신을 물 붓듯이 부어 주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영적 세계의 영(靈)들이 이 땅에 와서 완전한 영을 주입하여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완성적 아담, 즉 타락 전 아담과 같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귀한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영계는 지금까지 수고해 나왔습니다. (46-202, 71.8.15)
천사장의 사명을 지닌 사람들이 가야 할 길
지금까지 수많은 도인들이 나왔습니다. 도인들은 전부 자기들이 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세례 요한이 선포한 것하고 예수님이 선포한 것이 무엇이 다르냐? 하나는 외적이요, 하나는 내적입니다. 하나는 천사형이요, 하나는 아담형입니다.
아담은 반드시 천사장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을 때 천사장의 협조를 받아서 지었기 때문입니다. 또 천사장에게 아담을 보호하고 키워야 할 사명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사명을 해야 하는 것이 지금까지 기독교를 믿는 교인들이고 도를 통한 수많은 도인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계에 널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세계적 사명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어야 되느냐? 예수님은 천사장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천사장의 사명을 완결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을 탕감할 수 있는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사람이 나오려면 그 사람의 가문은 반드시 비참한 역사를 거쳐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이 육적인 면에서 잘난 사람이어야 되겠느냐, 못난 사람이어야 되겠느냐? 혹은 모든 면에서 갖춘 사람이 될 것이냐, 병신이 될 것이냐?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놓고 탕감복귀 원칙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천사장이 잘못함으로써 죽어서는 안 될 예수님을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가 실수해서 그렇게 되었지만­물론 천사장의 꼬임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지만­복귀된 입장에 있는 죽어서는 안 되는 예수님이 죽게 된 것은 세례 요한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실체를 쓴, 영육을 대표한 제2의 천사장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죽게 했으니 예수님의 죽음을 탕감하기 전에는 절대 다시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런 사명을 짊어진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는 놀음도 하고, 자진해서 죽음의 길을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박게 해 가지고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그 고통을 체험해 보려고 했습니다. 모듬매를 맞아 죽은 사람도 있고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 한 사람 희생됨으로써 역사과정에서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를 중심삼고 개인적인 십자가의 희생이 벌어지고, 가정적인 희생, 종족적인 희생, 민족적인 희생, 국가적인 희생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3 이스라엘이 될 나라는 결국 맞아야 됩니다. 또 아벨이 될 사람도 맞아야 됩니다.
아벨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을 맞기 위해 천사장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천사장 혈통을 부정하기 위해서 아벨을 세워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벨은 맞게 마련입니다.
예수님 같은 세계적인 아벨이 누구 때문에 죽었습니까? 세례 요한이 잘못해서 죽었습니다. 아벨은 맞게 되어 있습니다. 아벨이 맞게 되니 아벨의 가정도 맞게 마련입니다. 아벨의 씨족도 맞게 마련이요, 아벨의 종족도 맞게 마련이요, 아벨의 민족도 맞게 마련입니다. 아벨 국가도 맞게 마련이요, 아벨 세계도 맞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지금 공산세계한테 아벨 세계가 맞고 있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복귀되려면 그래야 됩니다.
맞는 데는 누가 제일 많이 맞아야 되느냐? 종교인들입니다. 종교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어느 한 때 한 번이라도 당당한 때를 맞아 보았어요? 언제 종교가 때를 맞이해 봤어요? 역사적인 종교가 때를 맞아 봤어요? 하나님의 아들을 세운 종교라면 그렇게 고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사장 복귀의 터전을 넓혀 나온 섭리권이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때를 맞지 못했습니다. 지식 있는 사람도 세계를 지배해 봤고, 힘센 사람도 한 지역을 지배해 봤습니다. 상류층도, 노동자 농민까지도 전부 지배해 봤는데 종교인들만 아직까지 그런 때를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종교인만 때를 못 맞았습니다.
나중에 전체를 총합해서 청산 짓고 때를 맞아야 할 패들이 종교인들입니다. 종교권을 두고 볼 때, 현재의 기독교나 불교가 맞으려고 하지 않고 서로가 밟으려고만 합니다. 그런 종교는 망합니다. 희생길을 도피하는 종교는 망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종교는 예수님의 죽음을 탕감복귀 해야 할, 천사장의 기반을 닦아야 할 운세권에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인들은 대표적으로 맞아야 할 사명을 지고 있습니다. 선두에서 머리를 맞아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도피하려고 합니다. 그런 종교는 망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드는 종교는 망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발전해 나오면서 죽임을 당하고 희생을 당하고 순교를 당할 때, 선전하고 데모하면서 죽지 않고 숨어 다니면서 죽었습니다. 언제 한번 기독교가 원수를 대해 복수하자고 데모나 해봤습니까? 지금까지 한번도 힘을 써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발전해 나왔습니다. 밟히고 맞는 가운데 발전해 나왔습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천대받게 한 존재가 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천사장이 복귀하려면, 벌받은 입장에서 복귀해야 합니다. 복귀섭리 자체는 하나님이 세워 놓지만 그냥 복귀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그런 천사장의 입장에서 천사장 복귀권을 감당해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일 미워할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희생시켜 그 희생된 승리의 터전 위에서 당신의 아들딸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끝날까지 죽음길을 가는 것입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아들에게 그런 법을 적용한다면 하나님은 무자격자지, 사랑은 무슨 사랑입니까?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교훈이 어디 있어요? 천사장 입장이기 때문에 아담을 죽인 죄를 탕감 받으려면 죽고자 해야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몇백 배라도 곱게 죽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종교는 천사장 복귀권이었습니다. (46-204, 7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