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요셉 가정과 예수님의 한(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2장 예수님의 섭리노정)
무지... | 20180608065523
2. 요셉 가정과 예수님의 한 요셉 가정은 하나님이 택한 가정 하나님이 요셉 가정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냈는데 요셉 가정은 이스라엘 전체의 가정 중에서 하나님이 택한 가정이었습니다. 요셉 일가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전체에 연결되게 되어 있었는데,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 가정으로 요셉 가정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불행한 요셉 가정을 제일 사랑하였는가? 이는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을 그 가정에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 가정은 그 아들을 보호하고, 그 아들의 뜻 전체를 자기들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요셉 가정은 하나님이 택한 가정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셉의 친척이었습니다. 또 요셉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민족의 대표 가정으로 요셉 가정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 한 분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요셉 가정에서 정혼한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태어났습니다. (16-24, 65.12.26) 이스라엘 나라는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되었습니다. 유대교도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되었습니다. 요셉 족속도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수님을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은 유대교요, 유대교의 중심은 요셉 족속이요, 요셉 족속의 중심은 마리아요, 마리아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중심이니까 요셉 족속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니 교회의 중심이요, 나라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중심된 자리에서 가정을 가졌다면 그 가정은 중심된 가정이 됩니다. 중심 가정이니까 종족의 중심도 되고, 민족의 중심도 되고, 국가의 중심도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가정을 가졌다면 한꺼번에 다 통일됩니다. 가정을 이루었다면 씨족도 통일되고, 교회도 통일이 되고, 나라도 통일됩니다. 한꺼번에 다 통일됩니다. 종적으로 연결된 것을 일시에 횡적으로 탕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지금까지 종적 역사를 거쳐오면서 생겨난 나라와 교회와 씨족과 가정이 한꺼번에 통일되는데, 그 통일된 가정은 새로운 가정이요, 통일된 씨족은 새로운 씨족입니다. 주권자가 달라지니 모든 것이 새로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또 통일된 그 교회는 새로운 교회입니다. 제사장이 달라졌습니다. 국가가 통일되면 그 국가는 새로운 국가가 됩니다. 일시에 다 됩니다.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주권자를 중심한 국가가 하나된다면, 하나님이 소원하던 뜻이 성취됩니다. 교회에 대한 소원이 성취되고, 요셉 족속에 대한 소원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다 성취됩니다. 소원이 다 성취되었으면 하나님의 한과 예수님의 한이 안 맺힙니다. 그 다음 이스라엘의 한도 맺히지 않고 일시에 다 풀립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이 맺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생을 했습니다. 나라가 예수님을 반대해서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교회가 반대하니 교회도 잃어버렸습니다. 그 다음 요셉 족속도 예수님을 바알세불이 들린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하나가 안 되었습니다. 마리아도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심정을 갖지 못했고, 자기의 생명을 바쳐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따라다녀야지, 왜 따라다니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41-241, 71.2.16) 마리아를 데려온 후 당당하지 못했던 요셉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했을 때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요셉은 자기 어머니 아버지한테 의논하고 데려왔을까요, 살짝 데려왔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또 대낮에 데려왔을까요, 아니면 밤에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데려왔을까요? 감쪽같이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그 집에 이틀 사흘, 며칠 동안 있으면 안 됩니다. 보이지 않게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유대 나라에 가 보면 변소 같은 데도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빨리 다녀와야 됩니다. 요즘은 문화시설이 잘 돼 있어서 구석진 방안에 있으면 1년을 가도 모르지만 당시에 그럴 수 있어요? 지금도 유대 나라에는 지붕 없는 집들이 많습니다, 비가 안 오니까. 그러한 집에 총각의 방이 따로 있겠어요? 그런데 방에다 처녀를 떡 데려다 놓았으니 며칠 후에는 그 소문이 났겠어요, 안 났겠어요? 동네 어른들까지도 다 알게 됩니다. 이상하다고 수군수군하고 다녀서 다 알았을 것입니다. 요셉의 어머니 아버지가 그러한 소문을 들었겠어요, 못 들었겠어요? 요셉의 어머니 아버지가 소문을 듣고 와서는 요셉에게 '어찌된 것이냐?' 하고 물을 때, 요셉은 자신만만했어야 됩니다. 마리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당당하게 얘기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꾸물꾸물 댔다는 것입니다. 또 친구들이 '이 녀석아, 저 여자를 왜 데리고 왔어?' 할 때 요셉이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꾸물꾸물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처녀가 아기를 배면 돌로 맞아 죽는 시대였습니다.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가르쳐 줘서 마리아를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그도 마리아가 성신으로 잉태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어요? 약혼녀가 아기를 뱄을 때 그 신랑 될 사람이 그 아기의 애비가 누구냐 할 때, '애비가 누군 누구예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신으로 잉태했어요' 하면 그것을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 요셉의 기분이 나빴다는 것입니다. 기분은 나빴지만 데려왔습니다. 그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다 놓고, 그 아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떻게 해서 아기를 가졌는지 물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마리아에게 그렇게 물어 볼 때, 마리아가 '내 복중에 있는 아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신으로 잉태했습니다' 한다고 그 대답을 믿겠어요? 그런 대답을 하니 '내가 너를 구해 주고 살 길을 열어 주었는데 아직까지도 날 속이기 위해 그런 수작을 부리느냐'고 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마리아의 배가 불러 있으니 요셉이 마리아에게 다그쳐서 추궁했는데 대답이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서 충돌이 생기고 하다 보니 그러한 사실이 온 동네에 다 소문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어디에 가서 아기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심장을 가졌더라도 그런 판국에서는 '나 아기를 낳겠어요' 하게 안 됩니다. 마리아가 갈 수 있는 길은 사람이 없는 무인지대, 사막지대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 스스로도 하늘 앞에 눈물지으며 호소하던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의 왕자로서, 이스라엘의 왕과 제사장들이 예물을 드리고 경배를 드리는 영광된 자리에서 태어나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세상도 모르게 감쪽같이 낳으니 이방에서 계시 받은 동방박사 세 사람만 찾아왔던 것입니다. 인류를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을 인류의 참군왕으로 인간이 맞아들였다는 조건을 세우고 인간으로 하여금 체면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국경을 넘어 찾아오게 하여 경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억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41-244, 71.2.16) 서럽게 자란 예수님 예수님은 비참한 환경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와 요셉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난 그날부터 하나님 앞에 충성의 법도를 세워서 먼저 하나님을 받들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 터전은 요셉 가정에서부터 마련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셉 가정에서부터 그것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도 하늘의 고운 천사들의 지도를 받아서 자신이 낳은 아들이 장차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자라실 때 하나님이 언제나 마리아에게 같이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마리아는 어찌 하다 보니 예수님이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셉 가정에서 예수님은 자랐습니다. 한편, 요셉에게는 예수님이 진실로 성령으로 잉태했는지, 아니면 누구에 의하여 잉태했는지 의심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정혼한 처녀가 아기를 배 와서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니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르쳐 준 그 사실은 믿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마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어찌 심한 고통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되어 예수님은 의붓아버지의 품에서 서럽게 자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러웠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으로부터 무엇을 하라는 말을 들을 때에도 진정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 듣지 못했습니다. 의붓아버지의 의심을 받는 입장에서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학대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16-24, 65.12.26) 그러니 예수님의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집으로 가려고 해도 갈 수 없고, 씨족을 찾아가려고 해도 갈 수 없고, 교회를 찾아가려고 해도 갈 수 없고, 나라를 찾아가려고 해도 갈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니 죽는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머무를 데가 없었습니다. 의붓아버지인 요셉의 등살에 뼛골이 녹아났습니다. 예수님의 사정을 상세히 알아보면 땅을 치고 통곡할 사연이 맺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의붓아버지나 의붓어머니에게서 자란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잘 해주어도 잘 해주지 않는 것 같고 항상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41-243, 71.2.16) 한 많았던 예수님 마리아 역시 요셉에게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요셉이 조금만 얼굴을 찌푸리는 일이 생겨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그런 사람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의붓자식을 데리고 시집을 간 부인이라면 남편이 조금만 얼굴을 찌푸려도 그 모든 것을 어찌 자기의 의붓자식과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입장에서 행복의 터전을 갖지 못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한이 많았습니다. 명절날이 가까워 오면 자기 동생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기뻐하고 즐기며 준비할 수 있었지만, 생각이 많은 예수님은 옷 한 가지 해 달라고 할 때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처량한 모습으로 명절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아느냐?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물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명절날 집에서 떡 같은 것을 해놓았다 하더라도 '어머니, 나도 좀 주십시오!' 하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좋은 것이 있더라도, 동생들이 입고 있는 아름다운 옷을 바라보면서도 '나도 좀 주십시오. 나도 좀 해주십시오' 하고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던 예수님! 나이가 같은 친구들과 어깨를 겨누고 환경에 보조를 맞추며 나날을 즐길 수 없었던 예수님!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런 것을 누가 알아요? 그저 '오오! 만왕의 왕,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 위에 오셨다!'라고만 알고 있지, 명절 때 때때옷 입고 부모와 함께 기뻐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어린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 천지를 둘러볼 때 그리운 것은 자신을 품어주는 부모의 정이었습니다. 동생이 있어도 동생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예수님! 그 동생들 앞에서 형이라 자처할 수 없는 사정에 놓여 있던 예수님! 참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장 20절)'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이냐? 나면서부터 그랬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자기의 혈육을 대하여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태복음 12장 48~50절)'고 하셨느냐?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한을 가슴에 품은 채 가신 예수님입니다. (16-25, 65.12.26)
예수님을 모시지 못한 요셉 가정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 때문에 싸움이 많았습니다. 동생들까지도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혼자 있을 때 동생들이 와서 '세상 사람들이 형님만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사람 많은 데 가서 선전하지 왜 여기 있소' 하며 비난을 했습니다. 이렇게 동생들의 비난까지 받으면서 처량하게 살았습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이 이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예수님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다 들어서 압니다. 선생님이 꾸며서 하는 얘기가 결코 아닙니다. 언제나 예수님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와 동생들은 불평 불만이 많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갈 때도 길을 가다가 형제들에게 물을 떠 먹이더라도 그 어머니는 예수님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 예수님께 먼저 떠 주고 하니 그 길에서도 트러블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올라갔다가 돌아갈 시간에 기분이 나빠 서로 싸우면서 돌아갔습니다. 싸우는 마리아의 신세를 본 예수님도 어떻게 얘기를 할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요셉도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데리고 가자는 얘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도 안 데리고 마을까지 거의 다 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간 것을 알고 있는데 가만 보니 꼴이 안 되겠으니까, 할 수 없으니까 둘이 만나 얘기해서 사흘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성전에서 한 예수님의 말이 항거의 말인 줄도 모르고 칭찬의 말로 해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도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마리아가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책임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41-246, 71.2.16)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했습니다. 이걸 보면 어머니가 뜻대로 못 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어머니가 예수님을 따라다녔어야 했습니다. (41-243, 71.2.16)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요셉도 예수님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라야 됩니다. 예수님이 밥을 굶으면 자기는 굶더라도 대신 밥을 얻어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집을 나가게 될 때 요셉과 마리아가 따라 나서면 예수님 동생들도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요셉 가정이 그 동네에서 중심되는 가정이라면 이종사촌인 세례 요한도 따라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41-247, 71.2.16) 인류구원의 책임감을 지고 남몰래 정성들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목수인 요셉 밑에서 조수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낫을 들고 나무를 깎고 대패를 들고 나무를 밀 적마다 이스라엘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된 이스라엘 민족이 이래서는 안 되겠으니, 내가 대신 깎고 다듬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겠다는 엄숙한 책임감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언제나 이스라엘을 품고 사랑하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뒤넘이칠 수 있는 마음으로 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념을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의 소원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의논하면서 그의 생애를 단장하기에 전심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깊은 밤 부모와 형제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자는 고요한 밤에 밖에 나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그 마음을 호소했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혹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그것들을 자신의 친구삼아 '너는 내 사정을 알고 내 뜻을 잘 알지' 하면서 마음을 달래곤 했던 것입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몰랐지만 만물과 자연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이 땅 위에 오셨고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할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참다운 인간을 찾지 못하고 참다운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찾지 못함으로써 자연의 품을, 그리고 하나님의 품을 은근히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래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다운 아들이요 하나님의 왕자요 만민의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가 태어난 그날부터 하나님의 왕자로 모셨어야만 됩니다. 매일같이 예수님께 경배해야 됩니다. 만왕의 왕이요, 길이길이 온 천주를 지배할 수 있는 하늘의 주권자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태어난 그날부터 요셉과 마리아는 그에게 정성을 다하고 충효의 도리를 다하여 모셔야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기 아들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천법으로는 그래야만 됩니다. 본래 하나님이 예수님을 요셉 가정에 보낼 때는 예수님을 서럽게 하기 위하여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가르쳐 주어서 마리아의 복중을 통하여 예수님을 탄생시킨 것은 그가 영광을 받고, 보호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지 몰리고 쫓김 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 가정에서부터 틀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때를 알고 하늘의 사명이 자기 일신에 짊어져 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은 자중하면서 그 형제들과 부모를 하나님의 뜻 앞에 인도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마태복음 23장 37절)'고 하신 말씀도 이스라엘 민족을 보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가정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 가정을 위해서 힘썼습니다. 천륜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책임을 지고 오신 예수님께서, 즉 무엇보다도 귀하고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일을 하셔야 할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자기의 사랑하는 부모를 먼저 위해 주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의 사랑하는 부모한테 먼저 드리고 싶은 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또 누구보다도 자기의 사랑하는 동생, 자기의 사랑하는 친척에게 먼저 주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철이 들면서부터 하나님이 요셉 일가를 찾아온 역사적인 인연을 생각하고, 요셉 일가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몇 번이고 하늘 앞에 다짐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셨느냐? 원칙은 식사 때 밥을 담을 때도 예수님 것부터 먼저 담아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생활 전체를 책임져야 됩니다. (16-27, 65.12.26) 본래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크고 엄청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것을 요셉 가정에서부터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래야 할 원리적인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동생들도 따라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놓고 동생들은 '형님이 메시아로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사람들이 많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왜 안 가느냐'고 비난했습니다. 동생들이 그렇게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을 괄시했습니다. 정상적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그 집안에서부터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야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입니다. 친척입니다. 친척들이 다리를 놓아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되어서 예수님의 뜻을 받들고, 형제들이 제자가 되고 친척들이 모두 사도가 되어서, 즉 형제와 친척들이 12제자, 70문도, 120문도가 되어서 악한 세상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다른 종족, 다른 민족과 대결하여 나갔다면 예수님은 절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습니다. 가정에서부터 형제들을 중심삼고 기틀을 잡음으로써 이루어야했던 예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 엄청난 천도는 그 부모와 형제들부터 받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요셉 일가는 하나님이 찾아온 4천년의 은사를 일시에 잃어버리게 되었고, 하나님을 일시에 배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쫓아냄으로써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괜히 베드로, 야고보 같은 어부들을 찾아 다니셨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왜 요셉 가정을 떠나 제자들을 택하기 위하여 돌아다니셔야 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16-29, 65.12.26) 30세에 집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사정과 억울함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한복음 2장 4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곡절과 사연이 얼마나 많이 맺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배후의 사실들이 일일이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말못할 사정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자기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신 말씀과,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는데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태복음 12장 50절)'고 하신 말씀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다니면서 세 번씩이나 간곡히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뜻을 받들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륜이 인륜 앞에 흡수될 수는 없습니다. 인륜이 천륜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를 이 땅 위에 보낸 뜻이 인륜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을 정리하고 심판할 수 있는 천륜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륜의 법도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놓고 얼마나 통사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세 번씩이나 권고하였지만 그것이 어머니에게도 요셉에게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30세가 되었고, 30세가 되자 결국 하나님의 뜻을 위해 집을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0세에 집을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사정과 억울함,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괴롭고도 서러웠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아직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가족과 일가, 즉 하늘이 마련해 준 4천년의 터전을 버리고 나와야 했던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서러우셨겠는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16-30, 65.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