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야기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제 1장 하나님
1. 하나님은 계시는가
신의 실존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
이 세계에는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고,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적인 나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나라들이 하나의 세계, 평화의 세계를 바라고 있지만, 그런 하나의 세계나 평화의 세계를 이룬다는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시대에 처해 있음을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힘, 인간의 지혜, 인간의 문화, 그 무엇 가지고도 진정한 의미의 평화의 세계나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확실히 해명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온 인류가 알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확실히 알게 될 것이고, 그 지향하는 뜻을 알게 되면 그 뜻이 지향하는 세계가 바로 하나의 세계요, 평화의 세계요, 이상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세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인류는 하나님과 더불어 그 뜻을 따라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확실하게 있다는 것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과연 하나님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지금까지 인간이 철학적으로 규명해온 문제요, 종교가 추구해온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막연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보다도 실질적인 자리에서 하나님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안 보이는 것이 원칙
하나님은 과연 있느냐? 누가 꼬집어서 아야 하고 소리치는 것보다도,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보다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이 있느냐?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있다고 할 때,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아 없는 것 같지만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머리에 있느냐, 심장에 있느냐? 마음은 내 몸 어디에나 있습니다. 내 몸 가운데 없는 데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도 이 세계가 하나님의 몸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 세계 어디에나 있습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게 되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얼굴을 그리려고 하면 잘 그릴 수 없습니다. 화가도 자기 얼굴은 잘 그리지 못합니다. 사진을 보고는 잘 그릴 수 있지만 매일같이 거울을 통해서 자기 얼굴을 보지만 보고 돌아서서 그리려고 하면 그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얼굴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매일 거울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아야 할 텐데도 잘 모릅니다. 기분 나쁠 때 보면 제일 못생긴 얼굴 같지만, 기분 좋아 웃는 것을 보면 아, 이렇게 저렇게 생겼으니 복이 붙었구나 하면서 잘생겼다고 합니다.
자기 얼굴을 똑똑히 안다면 큰일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못생긴 사람은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못생긴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어른거리게 되면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잘 모르기를 잘했습니다. 자기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찾아다니니 재미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울수록 수평에 놓여지게 됩니다.
포화상태라는 것이 있습니다. 포화상태라는 것은 경계선에서 내려가면 내려갔지 그 이상은 올라가지 못하는 절정상태를 말합니다. 절정상태에서 내려가면 포화상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화도 아니요, 절정도 아니요, 내려가는 것도 아닌 두루뭉수리한 경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혼자 가만히 있을 때는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마음이 있는지, 몸이 있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전부 두루뭉수리입니다. 그것은 제일 가깝기 때문입니다. 왜냐? 같은 감정권내에서 하나되면 될수록 안 보입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은 그 자체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눈은 자기 자체를 보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상대를 보기 위해서 생겨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안 보이는 것이 원칙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이 미인으로 맵시 있게 생겼지만, 매일 똑같은 얼굴이라면 지겨울 것입니다. 남자로서 일생동안 매일 똑같은 얼굴만 대하고 살겠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얼굴이란 참으로 변화무쌍합니다. 웃을 때는 웃는 표정으로 장단 맞추고, 성날 때는 얄궂은 표정으로 장단 맞추고, 감정에 따라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넙적해졌다 길어졌다 하는 표정으로 바뀝니다. 이렇기 때문에 재미있습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잘 모르는 것이 원칙입니다. 아내의 얼굴이 동네 어느 처녀의 얼굴보다 더 확실하게 보인다고 말하는 남편은 아내와 재미있는 생활을 못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권에서는 서로 하나되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취했다고 하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백을 백으로 보는 자리냐, 아니면 백을 십으로, 또는 백을 천으로 보는 자리냐? 취했다고 하는 자리는 백을 열로도 볼 수 있고 천으로도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에 취하게 되면 자기 남편, 자기 아내가 아무리 못생겼다 하더라도 천하의 미남이요, 천하의 미녀로 보입니다. 그저 기둥에 못을 박아 얽어매어 놓은 것처럼 얼굴에 변화가 없다면 지겨워서 못 삽니다.
여자가 시집가서 처음에는 신랑이 못생겼다고 타박을 하지만, 살다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남편이 이런 면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면, 못생길수록 더 맛이 납니다. 팥밥과 쌀밥이 있을 때 보기에는 쌀밥이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만 팥밥이 오히려 더 구수하고 맛이 있습니다. 거기에 조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이 다행
가까울수록 모르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 안에 안 계시는 곳이 없는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기가 있는데도 공기가 있다는 것을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고 숨이 막혀야만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또 맥박이 1분에 칠십 번 정도 뛰고 있는데, 이것도 평소에는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 걸어갈 때 맥박이 뛰는 것에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고, 눈을 깜박거릴 때도 맥박이 뛰는 것에 보조를 맞춰 깜박거리며 산다면 신경이 쇠약해져서 사흘도 못 가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것들을 모르기를 잘했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온 천하를 요리하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있다고 합시다. 힘으로 말하자면 에베레스트산도 날려 버리고 지구도 구멍 낼 수 있는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보면서 살라고 한다면 살 수 있겠느냐? 그런 전지전능한 분을 우리가 눈으로 보면서는 신경이 쓰여서 마음놓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안 보이길 잘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보였다면 우리는 신경이 쇠약해져서 한 시간도 못 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용은 모두 선생님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겪었던 것들입니다. 남이 했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지금까지 더듬어온 경험담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이 다행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태양빛을 받고 살지만 그것에 대한 고마움을 모릅니다. 그게 고맙다고 해서 태양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인사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큰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 줄 모릅니다.
만일 이 세계에 공기가 한 되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이 짓궂은 분이라면 세계통일은 문제없습니다. 아마 5분 이내에 통일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기를 몽땅 끌어가면서 너희들 통일할 거야, 안 할 거야? 하게 되면 세계 인류가 합창으로 통일하겠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일시에 통일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공기를 가지고 그렇게 안 하시는 것이 고마운 일입니다. 공기가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공기는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기에 대해 고맙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도둑놈같이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4분의 3이 물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몸을 물주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물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느냐? 오뉴월 복더위에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오르면 심한 갈증이 납니다. 대개 언덕배기에는 과수원이 있는데, 거기에서 냉수 한 그릇을 얻어먹는다면 그 맛은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 물을 먹고 나서도 물을 떠다준 그 사람에게는 고맙다고 하지만 물한테는 고맙다고 하지 않습니다. 물님, 고맙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태양빛은 아주 귀중합니다. 만일 태양이 없다면 모든 것이 얼어 죽게 됩니다. 햇빛은 생명을 지탱시키는 데 절대 필요한 요소입니다. 이렇게 제일 귀중한 것을 공짜로 받고 있으면서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 물과 공기와 태양빛이 제일 귀중합니다. 밥은 일주일 동안 먹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사람은 21일 금식도 하고, 40일 금식도 합니다. 그래도 안 죽습니다. 밥 없이는 정신력으로 살 수 있지만 물과 공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태양이 없어도 살 수 없습니다. 태양이 없다면 모든 것이 얼어 버리기 때문에 살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우리는 크나큰 혜택을 받고 있으면서도 고마운 줄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마음
그러면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우리는 보이지는 않지만, 공기가 있는지 없는지 압니다. 어떻게 아느냐 하면, 공기로 숨을 쉬고 살기 때문입니다. 공기가 무슨 맛이 있어요? 맛이 없고 보이지도 않지만 분명히 공기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압니다.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참 신기합니다. 형제끼리 재미있게 노는데, 어머니가 시장에서 과자를 사다가 형과 동생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형은 다 먹었고 동생은 일부만 먹고 일부는 남겨두었다 나중에 먹겠다고 과자를 살짝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어 잠이 들었습니다. 형이 새벽에 소변을 보기 위해 일어났다가 소변을 보고 나서 자려고 하는데, 동생이 숨겨 둔 과자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먹으려고 하면 마음이 어떻게 하느냐? 이놈! 먹으면 안 돼! 합니다. 아무리 밤중이라도 살짝 먹으려고 하면 마음은 감독관 중에서도 지극히 엄격한 감독관이기 때문에 먹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몸이 잠에서 깨면 마음도 눈을 뜨고, 어디 가더라도 따라다닙니다. 그러다가 몸의 행동이 조금만 달라져도 마음은 네 이놈! 합니다. 그런 것을 다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 보이는 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 그게 믿어지느냐? 우리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양심작용의 주체
우리 인간에게는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양심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간은 그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피조물과 창조주가 합할 수 있는, 하나의 공동목적을 제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다면 그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이 바라는 창조의 목적과 일치될 수 있는 점에 도달할 수 있는 어떤 힘의 작용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인간을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니 절대자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합할 수 있는 제1의 기반, 접촉할 수 있는 제1의 터전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대해서 그 목적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게끔 우리 인간 가운데 작용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존속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바라는 제3의 목적 기준 앞에 도달해서 하나님도 기쁘고 인간도 좋아할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을 때, 인간을 창조하던 창조목적의 기준과 지음받은 우리 인간으로서 가야 할 목적의 기준이 서로 다를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되어야만 하나님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요 인간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인간 가운데 절대적인 하나님을 찾아올라갈 수 있는 무슨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 작용이 없게 되면 도달할 수 없으니 그것을 바라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자극시켜서 끌어내어 밀어주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양심입니다.
양심은 어떻게 작용하느냐? 높아지기를 바라고 작용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현재의 자기보다 나아져라, 나아져라 하고 재촉합니다. 이 작용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양심은 현재의 자기보다도 높아지라고 촉구하지 낮아지라고 촉구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보다도 내일, 내일보다도 모레, 금년보다도 내년, 혹은 10대 때보다도 20대 때, 20대 때보다도 30대 때, 가면 갈수록 더 높고 더 가치적인 자기를 형성하라고 촉구하는 그 힘이 양심작용입니다.
양심작용으로 본 하나님의 실존성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작용이 있어야 하며, 작용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존재를 위한 하나의 원칙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우리 양심은 틀림없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일생 동안 작용합니다.
작용하는 데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지, 그렇지 않고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전기를 보면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는데, 그것이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결코 작용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그 양심이 작용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양심이 작용을 계속하려면 반드시 주체와 대상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그 주체와 대상 관계를 우리는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양심이 있는데, 작용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어서는 작용을 할 수 없습니다. 양심 자체를 두고 그 양심이 주체냐 대상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인간의 양심은 어디까지나 대상적인 존재지 주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인지 모르지만 작용의 원칙을 따라 찾아가게 되면, 반드시 작용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주체가 있습니다. 그 주체와 대상은 서로가 손해 나는 것을 바라고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이익이 될 수 있는, 보다 나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작용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의 양심은 보다 나을 수 있는, 보다 큰, 보다 가치적인, 보다 세계적인 것을 향해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다 이익 될 수 있는 그 길을 찾아 나서는 양심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양심작용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이 하나의 목적을 바라고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체와 대상이 우리의 양심 가운데서 작용하는 것을 두고 볼 때, 그 양심작용이라는 것은 주체가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천리원칙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작용을 계속하는, 고차적인 무엇을 추구하는 것을 보게 될 때 고차적인 주체가 없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의 주체 되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없다고 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양심작용을 부정해야 합니다. 양심이 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신비로운 인체를 보아서도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곳이 얼굴입니다. 그 얼굴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곳이 눈입니다. 이 눈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눈은 어디서부터 왔느냐? 부모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부모의 눈은 어디서 왔느냐? 조상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인간인 아담 해와까지 가서 머물게 됩니다.
그러면 최초의 그 눈이 태어날 때, 태양이 있는 것을 알았겠느냐?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눈 자체는 복사열에 의해서 수분이 증발될 수 있는 이 지구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눈썹은 눈에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있는데, 눈썹 자체도 생겨날 때, 공기 가운데 있는 먼지가 눈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생겨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물질로 된 우리 사람의 눈 자체가 갖춘 내용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천문학적 지식 기반 위에 나타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눈이 생겨나기 전에 태양이 있었고, 눈이 생겨나기 전에 공기가 있었고, 눈이 생겨나기 전에 증발작용이 있었다는 것을 그 눈 자체는 몰랐지만 그 누군가가 이것을 알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박물학적인 지식 기반 위에서 눈 자체가 생겨났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물질로 구성된 그 눈 자체는 몰랐지만 그 눈 자체가 존재하기 전에 태양이 있고, 공기 중에 먼지가 있으며, 이 수분이 증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군가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눈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안과 의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과 의사들도 아직까지 신비스런 눈의 세계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눈은 무궁무진한 신비의 궁(宮)이 돼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눈 자체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태양이 있고 공기중에 먼지가 있으며 수분이 증발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여기에 맞게끔 탄생시킨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탄생시킨 주체가 누구냐?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귀도 생겨날 때 공기가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공기가 없으면 귀도 필요없습니다. 공기가 있어야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리가 갑자기 귀에 들이닥치게 되면 큰일나기 때문에 귓바퀴에 산맥 같은 것을 크고 작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큰 산맥, 작은 산맥 같은 것이 있어 화음이 되게 해서 들어가게끔 했습니다. 그 태어난 귀 자체는 몰랐지만 그 배후에는 이렇게 될 수 있게 한 무슨 동기가 있어서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또 혀도 기기묘묘합니다. 입속에서 끌어당기고 밀고 하면서 작두 같은 이 사이를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도 충돌 없이 박자를 잘 맞춥니다. 조화통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말을 참 빨리 합니다. 이렇게 빨리 하는데도 어쩌면 이렇게 박자를 맞추어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정이 들 수 있게끔 말하는지 정말 기기묘묘한 조화통입니다. 만약 손가락이 혀와 같은 일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큰일납니다.
입술도 보면, 고무 중의 최고의 고무입니다. 벌릴 때는 한껏 벌릴 수 있고, 오므릴 때는 아주 작게 오므릴 수도 있습니다. 자유자재입니다. 가죽보다 낫고 생고무보다 낫습니다. 말을 할 때나 먹을 때나 한 울안에서 입술과 이와 혀의 박자가 어쩌면 그렇게도 잘 맞는지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또 코를 보면 콧속에 털이 있습니다. 그 털은 공기 가운데 먼지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있습니다. 공기 가운데 먼지가 있는 것을 알고 다 걸러내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코를 중심으로 얼굴에 양쪽으로 골이 파여 있는데 왜 그렇게 돼 있느냐?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도랑이 있느냐? 그 도랑을 보면 흉합니다. 그러나 그게 없으면 빗물 같은 것이 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보기에는 흉하지만 도랑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땀이 나서 흐르게 되면 입안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입안으로 땀이 흘러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흉하지만 도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코가 왜 이렇게 아래가 넓으냐? 입을 방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코가 만약 뒤집어졌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소나기라도 오면 큰일납니다. 코가 선장의 담배 파이프처럼 붙어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비나 눈이 오면 그대로 콧속으로 들어가게 되니 심각합니다.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 이미 서서 다닐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눈썹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눈썹은 이마 위에서 땀이 흘러내려 눈속으로 들어갈 것을 미리 알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생겨났습니다. 눈을 자세히 보면, 그것도 미덥지가 못해서 눈꺼풀로 둘러 놓았습니다. 눈꺼풀로 둘러서 눈을 보호하게끔 해 놨습니다. 눈물은 음푹한 곳을 통하여 옆으로 흘러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안전보장이 잘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설계를 했는지 모르지만 어떤 과학자가 연구해도 다 알지 못할 만큼 완전무결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은 우주의 신비의 왕궁입니다. 수많은 의학박사가 연구해도 다 못 할만큼 무궁무진한 연구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갖추어진 터전 위에서 우리가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결론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그것을 모르고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는 몰랐지만 알고 있는 분을 동기로 해서 결과적인 존재가 태어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완전히 안 분이 누구냐? 하나님이든 절대자든 이름은 아무거나 붙여도 좋습니다. 주체 되는 그분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면 됩니다. 그분을 영어로는 갓(God)이라 하고 한국말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없었다면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 그 누구도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통해서 태어났지만 자기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의 부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부모 이렇게 해서 우리의 종지조상인 아담 해와까지 올라가게 되면 아담 해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인류의 시초가 되는 조상도 자기들이 원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군가가, 그 어떠한 분이 동기가 돼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 하게 되면, 남자 여자를 말합니다. 남자에게는 여자가 없으면 안 되고, 여자에게도 남자가 없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남자가 원해서 남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그 남자에게 필요한 여자도 자기가 원해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고 보니 남자가 되었고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자로서 남자로서 자라고 보니 비로소 부부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찾아 나가는 길이 우리 인생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근본 원인 되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없었다면 우리의 존재세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남자 여자가 서로 만나 생활하는 과정에서 방대한 인류가 되었습니다. 그 인류는 수많은 국가에 연결되어 있고, 수많은 국가는 수많은 종족, 수많은 가정, 수많은 개인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도 그 개인 가운데 한 사람이고, 그 가정의 일원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로 맺어진 그 가정, 혹은 친족은 자기들이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나 가정의 일원이 됐고, 친척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또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4천만명이 넘는 대한민국의 국민도 자기들이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 대한민국을 형성하였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은 우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 같지만 그 근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제지인연이나 부자지인연을 논하는데 그 인연도 하나님이 없었더라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결과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나 우주도 결국 하나님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38-222, 39-149, 56-131, 67-276
2. 창조의 원칙과 진화론의 허구성
힘이 먼저냐, 존재가 먼저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자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은 알겠지만 영계에 가 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그 작용을 통해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이지, 실제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우주는 존재의 세계라고 오늘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반드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너나 나나, 식자(識者)나 무식자(無識者)나 누구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생각합니다. 힘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존재하는 물건이 원인적인 것이냐 결과적인 것이냐 하는 것을 두고 볼 때, 현재 존재하는 것은 원인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어떠한 절대자, 어떠한 주체, 어떠한 원인을 통해 결과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빚어진 그 존재에게는 반드시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힘이 먼저냐 존재가 먼저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존재하기 전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대한 이 우주는 이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의 기대 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우주가 형성되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힘이 먼저입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물질적인 존재가 먼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이 먼저입니다.
또한 힘 자체는 그냥 그대로 존속할 수 없습니다. 힘이 계속 존속하기 위해서는 작용을 해야 합니다. 작용을 하는 자리에서만이 힘이 존속합니다. 전기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은 전기 자체를 보아서가 아니라 그 전기의 작용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힘은 반드시 작용한다는 그 원칙을 떠나서는 존속할 수 없습니다.
존재와 작용의 원칙
모든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작용해야 하는데, 작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돼야 하느냐?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 작용하는 것은 이 우주에 없습니다.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 상대적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의 인연 가운데서 작용이 벌어지고, 그 작용을 통해서 힘이 존속하고, 힘이 존속함으로써 하나의 존재물이 형성됩니다.
그러면 그 존재의 배후에 힘이 있기 전에 선행조건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작용입니다. 작용을 해야 합니다. 또 작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선행조건이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귀납적인 방법을 통해서 추리해낼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없는 데서는 작용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선생님도 말을 하게 될 때, 듣는 사람이 없는데 말을 한다면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체와 대상 관계가 없는 데서 말을 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입니다. 그리고 주체와 대상이 반드시 서로 주고받는 작용을 영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주체나 대상이 보다 이익 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런 데서만 작용이 계속됩니다.
작용이 계속 유지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 보다 플러스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데서만 작용이 계속되는 것이지, 마이너스되면 점점 작아지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만일에 작게 되는 것을 바라보고 작용하게 된다면 이 세계는 형성될 수 없습니다. 곧 주체와 대상이 서로 보다 플러스될 수 있는 목적을 바라보며 작용하지 않고, 서로 작게 되는 목적을 바라보면서 작용한다는 원칙이 성립된다면 이 방대한 우주는 형성될 수 없습니다.
원소면 원소를 놓고 보더라도 그 원소가 어떠한 상대적 원소를 대하여 작용하는 데는, 서로 나을 수 있는 하나의 목적을 바라고 작용해야만 계속적인 작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 보다 더 작아질 수 있는 목적을 바라고 작용한다면 계속적인 작용을 유지할 수 없고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원칙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된다면 이 우주는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작용하는 데는 반드시 두 작용체가, 주체와 대상이 보다 플러스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작용을 합니다.
손해나는 자리에서는 절대 작용하지 않는다
주체와 대상이 작용하는 목적을 보게 되면, 이는 주체보다도 크고 대상보다도 큰 제3의 존재가 나옵니다. 우리가 어떤 집회에 참석한다면 그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참석할 때의 마음보다도 더 플러스될 수 있는, 좀더 나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서 참석합니다. 만일 그 집회에 참석해서 마이너스의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러한 작용은 점점점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현상세계에서 보이는 모든 작용은 스스로를 감소시키기는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작용을 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매일 시장에 나가는 주부가 있다고 하면, 시장에 나갈 때 한푼이라도 손해 보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가는 데는 반드시 이익을 바라고 나갑니다. 이 원칙이 자기 스스로 바라는 목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계속적인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손해 나는 자리에서는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주의 천리요, 천칙(天則)입니다. 만약 손해 나는데도 작용을 한다면 거기에는 파탄이 벌어집니다.
친구를 중심삼고 그 친구가 좋다 할 때, 두 사람 사이에서 손해 나는데도 좋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든지 플러스되는 면이 있어야만 오랫동안 친구의 입장을 유지할 수 있지, 대하면 대할수록 손해만 보게 되면 갈라지지 말라고 해도 갈라지고 말 것입니다. 끝장을 보지 말라고 해도 끝장을 보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존재 원칙입니다.
남자 여자, 혹은 젊은 청년 남녀들이 서로서로 좋아하는 것을 보더라도, 서로가 대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둘이 보다 이익 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발견하게 되면 서로 교제를 계속하지만, 손해 나게 되면 그 둘은 갈라지지 말라고 해도 자연히 갈라지게 마련이고, 둘의 사이는 더욱 나쁜 결과를 빚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용이라는 것은 주체와 대상 관계가 있어야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작용은 주체와 대상이 서로 이익이 되는 공동목표 하에서만 계속되는 것이지, 손해 나는 공동목표 하에서는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주의 존재 철칙이요, 법칙입니다.
또 화학을 공부하는 화학도가 실험실에서 자기가 목적 하는 그 무엇을 연구하기 위해, 갑이라는 원소와 을이라는 원소를 작용시키려고 아무리 힘을 가하고 노력해도 작용하지 않는 원소가 있는가 하면, 생각지도 않고 아무런 힘을 가하지도 않았는데 작용하는 원소가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이 화학도는 자기가 바라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원소와 원소를 합하려고 하지만, 그 원소 자체는 작용하게 되면 자체에 손해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작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는 다른 원소끼리는 왜 합하게 되느냐? 그것은 플러스면 플러스 원소, 마이너스면 마이너스 원소가 서로 상대적 관계에서 보다 나은 결과를 바라볼 수 있어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작용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주의 존재 원칙을 규정지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반드시 하나의 원소가 자기 자체보다 나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오는 데서만 작용한다는 원칙입니다. 자체보다 못한 결과가 나오는 데서는 작용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마이너스가 되는데도 작용하는 천리원칙을 세워놓았다면 이 우주는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하나의 원소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물질의 구성 단위인 원자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전자와 양자가 서로 상대적 관계를 맺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작용하는 것은 서로가 작용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자와 양자가 작용하는 것은 그 자체보다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모든 존재는 주체와 대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체와 대상이 끊임없이 작용을 함으로써 힘이 형성되고, 그 형성된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주체와 대상이 보다 나아지지 않고서는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힘의 원칙과 사랑의 원칙
아메바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도 작용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체와 대상 관계를 가진 사람이 서로 사랑을 중심으로 생리적 작용을 주고받으면 생명이 태어납니다. 아메바는 아메바 자체에서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주고받아 작용합니다. 두 목적이 하나의 결과가 되어야 발전합니다. 그렇지 않게 될 때는 작용하지 않습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아메바를 두고 볼 때, 주고받는 작용을 해서 아메바 이상 큰 것이 나올 수 있느냐? 그 이상 큰 것이 나와야만 발전합니다. 이 말은 힘이 작용했으면 더 큰 힘이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고 더 큰 에너지가 생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발전이란 에너지가 작용하면 할수록 자꾸 불어나야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작용하면 어떻게 되느냐? 작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작용하게 되면 그 자체에서 소모가 벌어집니다. 흡수작용을 하면 보급해야 하기 때문에 소모가 벌어집니다. 생명의 기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모시키는데 힘이 더 커질 수 없습니다. 입력만큼 출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더 작아집니다. 전기 모터를 볼 때, 들어가는 전기의 힘과 나오는 힘이 같으냐? 소모가 벌어지기 때문에 나오는 힘이 더 작습니다.
그런데 진화라는 것은 뭐냐? 입력보다 출력이 더 크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느냐? 이것은 힘의 원칙으로 볼 때 불가능합니다. 입력보다 출력이 크게 되려면 제3의 힘이 플러스되어야 합니다. 만약 진화론이 옳다면 우주에는 큰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3의 힘이 필요합니다.
원숭이와 사람은 종자가 다릅니다. 원숭이가 문화적인 생활을 하느냐? 사람은 생명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종교가 따라다녔습니다. 그렇지만 원숭이는 문화를 가지고서 세계를 통일하자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를 점령하여 자기 나라로 만들거나 국경선을 만들어서 네 나라 내 나라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과는 종자가 다릅니다. 원숭이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그저 먹는 것이 최고고, 먹고 나서 번식하면 그만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람과 원숭이는 전혀 다릅니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했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입력보다 출력이 작다는 원칙에 벗어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주체가 대상을 대해 열만한 사랑을 주었다면 대상에게서 주체에게 아홉만한 사랑이 돌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작게 돌아오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최소한 같지 않으면 플러스되어 돌아오는 것이 사랑의 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물론 모든 만물은 보통 힘의 작용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에 의한 작용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사랑은 작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좋아합니다. 부모와 같은 아들딸, 혹은 부모보다 나은 아들딸이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법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곤충이나 모든 식물들도 사랑에 의해서 생명을 유지해 나갑니다.
씨는 망하지 않습니다. 작용을 하더라도 망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주는 힘보다 돌아오는 힘이 더 강하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힘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 힘을 통해 인간은 퇴화하지 않고 유지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손수건 같은 미미한 것을 하나 줘도 그것을 생명시합니다. 사랑은 그런 무한한 힘이 생기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번식은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진화론의 허구성
요즘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인간이 아메바에서부터 진화했다고 합니다. 생물학자들은 원숭이가 자기 할아버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사스런 것들이 천하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통일교회 선생님이 나왔습니다.
힘의 이치는 들어오는 힘(入力)과 나가는 힘(出力)이 서로 같은 법이 없습니다. 공식이 그렇습니다. 반드시 들어오는 힘이 큽니다. 이걸 물리라는 과목을 통해서 배웠을 것입니다. 전기를 두고 보더라도 모터를 거쳐 나가는 힘보다도 들어오는 힘이 더 큽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작용하면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작용하는데 더 커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아메바가 작용하는데 어떻게 플러스가 되느냐? 플러스될 수 없습니다. 플러스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돼야 하느냐? 플러스가 되게 하려면 제3의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들어갈 때보다 고차적인 기준의 힘의 작용체가 가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과 원숭이를 비교해 봅시다. 원숭이는 그저 낑낑거리면서 먹고 자고 새끼 낳는 것이 제일입니다. 원숭이가 고향의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울고 그러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원숭이가 형을 위해서, 혹은 부모를 위해서 죽으려고 하느냐? 그런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습니까? 형을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 죽으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원숭이와 사람은 근본이 다릅니다. 종자가 다릅니다. 그리고 원숭이는 모여 앉아 조상이 어떻고, 신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의논하지 않습니다. 영계가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평화의 세계라든가 하나의 세계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원숭이가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사람들은 개나 돼지와 같은 패들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중심으로, 보다 큰 것을 소망하면서 살게 되어 있지 자기보다 낮은 것을 소망하면서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은 생겨날 때부터 신을 숭상해왔습니다. 신을 숭상하지 않은 종족이 없습니다. 신을 생각하고 우리 인간이 보다 나을 수 있는 우주를 생각하면서 나왔습니다. 원숭이는 그런 것을 생각할 수도 없을 뿐더러 몇천 몇만 단계가 지나가도 안 됩니다.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을 주장하는 교수가 있다면 그 교수가 교단에서 내려섰을 때, 아! 선생님, 훌륭한 강의에 감탄했습니다. 원숭이 손자님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 같으냐? 그렇게 하면 분명히 네 이놈! 하고 욕을 했으면 했지, 야! 학생, 참 훌륭한 학생이구만. 내가 말한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참으로 유망한 학생이구만. 아이구, 참 반가운 말일세. 자네는 틀림없이 내 사위감이야 하겠어요? 대번에 이놈의 자식! 할 것입니다.
인간만이 절대자 하나님의 절대 대상
천지 만물 가운데 절대자인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상대의 가치를 지니고 나타날 수 있는 존재물은 어떤 것이냐? 곤충일 것이냐, 아니면 우리집 마루밑에서 콜콜 자는 예쁘장한 강아지일 것이냐? 이러한 것들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절대 대상이 될 수 있느냐?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강아지보다 더 지혜로운 원숭이들이 참소할 것입니다.
그러면 원숭이일 것이냐?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원숭이와 같은 뼈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차원이 다릅니다. 영적인 존재인 사람은 영적 존재가 아닌 원숭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근본이 다릅니다. 원숭이의 손과 발의 모양은 사람과 비슷합니다. 이렇듯 많은 부분이 사람과 닮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부분이 사람과 닮았다는 것을 들어서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과 원숭이를 해부학적으로 보면 48가지가 틀리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화론에서는 원숭이가 비약적인 발전, 즉 돌연변이에 의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논리는 그럴 듯하지만 여기에는 무신론자들의 마술적인 요인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이런 허무맹랑한 말을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원숭이를 절대적인 하나님이 절대적인 상대로 세웠다고 하면 사람들이 비판합니다. 하나님 상대가 저게 뭐야! 대변도 가리지 못하는구만. 다니는 것이 저게 뭐야? 네 발로 다니는구만 하면서 참소할 것입니다. 네 발로 다니는 것은 아직까지 미완성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도 아기 때에는 네 발로 다닙니다. 그래서 원숭이는 형(形)으로 보아서도 미완성형입니다. 사람은 네 발로 다니지 않고 두 발로 다닙니다. 그것은 벌써 원숭이보다는 입체적으로 안전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은 하늘과 땅의 연락기관입니다. 하늘을 향해 횡적으로가 아닌 수직으로 다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대자의 자리에 있는 하나님이 그 상대적 존재를 피조만물 가운데서 찾아 세운다면 어떤 존재를 찾아 세우겠느냐? 틀림없이 두 발로 걸어다니는 사람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원숭이가 영통(靈通)해서 방언한다는 말 들어 봤어요? 신약성경 베드로후서에 발람에게 나귀새끼를 통해 증거한 것은 돌변적인 역사(役事)입니다. 나귀에게 영(靈)이 들어가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책임을 못 하니까 할 수 없이 나귀를 통하여 역사한 것이지 본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만이 영계를 통할 수 있습니다.
방향이 있다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
아메바가 번식하여서 아메바보다도 큰 존재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다른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아메바 자체가 그런 힘을 가하면서 발전할 수 있느냐? 자체적으로 그런 힘을 보충할 수 있느냐? 자체적으로는 그런 힘을 가할 수 없습니다. 자체가 힘을 창조하여 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큰 존재가 생겨날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이 무하마드 알리와 같은 권투선수와 시합을 해서 이길 수 있어요? 이기려면 무하마드 알리보다 더 큰 힘과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과 기술을 어떻게 보충할 수 있느냐? 돌연변이에 의해 힘이 커지든가 아니면 알리보다 더 큰 힘을 낼 수 있는 주사를 맞든가 해서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알리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메바에게도 더 큰 존재가 생겨나게 할 수 있는 다른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다음에 아메바가 발전하는 데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향이 있다면 도대체 어디로 가느냐? 동서남북 3백60도가 있는데, 하나의 높은 차원으로 갈 수 있는 방향성을 어떻게 갖게 되느냐? 3백60도를 갔다 왔다, 올라갔다 내려왔다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되면 아메바에서 그보다 더 큰 존재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방향을 누가 제시하느냐? 내가 방향도 정하고 힘도 가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물질세계에는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생겨나는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있어야 방향도 있는 것이지, 목적이 없는데 방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도서관을 향해서 간다 할 때, 왜 도서관에 가느냐? 그냥 그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거나 책을 보거나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갑니다. 다 이렇게 방향이 있다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메바에게는 자기 이상의 힘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과 방향을 가질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목적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자체로서 할 수 없기 때문에 제3의 힘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목적과 방향성을 제시하는 원인적인 존재
이 세상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세계는 어디서 생겨났느냐? 오늘날 과학자들은 '자연히 생겨났다'고 하는데, 그건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다 속임수입니다. 그러면 그 '자연'은 어디서 생겨났느냐? 다시 말하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느냐? 과학자들은 그냥 저절로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 피아노면 피아노도 그냥 생겨나고, 마이크도 그냥 생겨났다는 것이냐? 또 이 인체는 아무리 수백 만 명의 의학박사가 연구해도 해결하지 못하는 신비의 왕궁인데 '너 어떻게 생겨났느냐?'할 때, '그냥 생겨났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결국 원인 없이 생겨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동기적 존재가 있다는 이론은 타당한 이론이요, 그러한 이론을 세우는 것은 과학적입니다. 과학적이라는 게 뭐냐? 가설이 현실적 사실로 들어맞게 될 때 과학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힘이 저절로 나온다는 것은 과학적이지 못합니다. 그건 과학적이지 못합니다. 힘이 나오려면 불을 피우든가 주사를 맞든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의 방향성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그 자체가 방향을 가질 수 있느냐? 물질 자체가, 자연 자체가 그런 능동적인 주체성을 가질 수 있느냐? 없습니다. 과학적이라고 하려면 이론에 맞아야 합니다. 이론은 가설과 증명과 현실이 일치돼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이 우주의 원인적인 존재입니다. 이러한 모든 작용의 원인적인 존재, 힘을 가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목적을 제시하는 원인적인 존재가 있다 하는 것은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인격적인 신이라고 합니다. 그건 왜 그러냐? 반드시 동기를 중심으로 방향을 가지고 목적을 제시하기 때문에 인격적인 신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원인을 통해서 방향을 따라 목적의 세계로 나갑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전체의 원인적인 존재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는 하나님을 안 계신다고 하는 것은 죄중의 죄
인생에서 제일 문제 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죄인 중의 가장 큰 죄인이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이 있는데도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자식이 어머니 아버지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 자식을 효자라고 하겠느냐 불효자라고 하겠느냐? 불효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있는데도 없다고 하는 사람은 어떠냐? 마찬가지로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 망합니다. 그러므로 있는 하나님을 없다고 하는 것 이상 큰 죄는 없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놓고 하나님과 담판을 지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식의 입장으로 들어가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하는 것을 담판지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나중에는 하나님도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보니 하나님은 확실히 있었습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56-131, 41-165, 39-289, 38-139, 89-64, 39-149
3.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닮고,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은 하늘과 상대 되는 것으로 땅을 지었고, 자신을 대신한 실체대상으로 우리 인류의 조상을 지었습니다. 자기의 형상을 본떠서 우리 인간을 지을 것을 계획하고 그 인간의 형상을 상징적으로 본떠서 먼저 만물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크게 보면 한덩어리요, 작게 보면 모두 하나님의 대신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모르지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품을 만든다면 그 작품은 만든 사람의 성격을 닮습니다. 그 사람의 성격이 우락부락하면 그 작품도 우락부락하고, 그 사람의 성격이 차분하면 작품도 차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이러이러하므로 하나님의 성격도 이러이러하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누구를 닮았느냐?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하나님편에서 볼 때 나는 하나님을 닮았고, 내 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나를 닮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편에서 보면 아들은 아버지를 닮았지만, 아들편에서 보면 아버지는 아들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닮고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욕심은 누구의 욕심을 닮았느냐? 하나님의 욕심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의 욕심을 닮았으니 그 욕심은 최고의 것을 갖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분이고 절대자이기 때문에 시시한 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며 우리 인간은 상대적 절대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못 올라가면 영원한 세계에 가서라도 올라갑니다. 사람은 절대자 앞에 상대적 절대자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자인 하나님이 영원한 분이므로 그 상대자인 인간도 영원한 존재입니다.
남자 하나님과 여자 하나님의 중화체로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몇 분이 필요하냐? 좋은 것이 있을 때,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은 한 분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많더라도 한 분만 필요합니다. 전체를 관리하고 체계를 세워서 적용하려니 많은 하나님이 필요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한 분만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자도 하나님이 필요하고 남자도 하나님이 필요한데, 여자 하나님과 남자 하나님이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자 하나님과 여자 하나님이 같아야 되는데, 남자는 우락부락하고 여자는 아기자기하니 어떤 하나님이어야 하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남자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좋으냐, 여자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좋으냐? 남자는 하나님의 오른팔을 잡아당기고 여자는 왼팔을 잡아당기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렇게 보면 여자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되어야 할지, 남자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되어야 할지 처신 방법이 복잡합니다.
하여튼 하나님의 사정은 모르지만 인간의 사정으로 볼 때, 하나님은 두 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여자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있고 남자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여자와 남자가 싸울 때 하나님끼리도 싸우게 되므로 하나님은 한 분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중화체로 계시며 격위는 남성격 주체로 계십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이 결론을 참 잘 내려 놨습니다. 선생님이 생각 없이 쓱쓱 해서 내린 결론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느냐?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는데 일남일녀를 창조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귀납적으로 보면 하나님 가운데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되어서 하나의 주체로 나타난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아담 해와는 이런 성품을 닮아 났습니다.
콩을 보더라도 두 조각이 하나의 껍질에 싸여 하나의 콩을 이루고있습니다. 그 속의 두 조각 사이에는 배아가 있는데, 거기에서 줄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두 조각 가운데서 한 쪽만 없어져도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쪽이 없어지면 생명이 존속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되어 있으므로 그 둘이 싸우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둘을 꽁꽁 묶어서 절대 떨어질 수 없게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수 있게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와 남자가 싸우면 안 됩니다. 여자는 자기에게서 제일 좋은 것을 자기 주머니에 두지 않고 남자의 주머니에 갖다 넣겠다고 하고, 남자도 자기에게 있는 제일 좋은 것을 여자의 주머니에 갖다 넣겠다고 하면서 서로 주겠다고 하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가 하나님을 당신 것으로 하소 한다는 말입니다. 아내가 당신의 하나님이오 하면, 남편은 아니오, 당신의 하나님이오 하면서 서로 위하게 되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 자기 하나님이라고 싸우게 되면 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망하지 않을 방법으로 여자와 남자가 서로 없으면 죽고 못 살게끔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인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보면 남자는 주체요, 여자는 상대적 주체입니다. 여자가 상대적 주체라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주관하지만 여자도 남자를 주관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가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잘살자는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을 못 만났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일등 가는 미인이라 해도 이 미인 앞에 남자가 없다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미인은 쓰레기통에나 들어가야지 별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절대자도 혼자 있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절대자인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절대자라고 해서 혼자 가만히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재미가 없으니까 할 수 없이 우리 인간을 만들어서 재미있게 같이 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대통령이고 박사 학위를 한 1백 개쯤 가지고 있고, 책도 도서관에 있는 책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거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중얼중얼하며 내 자리가 참 좋구나. 오늘은 밥도 맛있었지. 아이고 좋아! 아이고 좋아! 이런다면 격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안 어울립니다. 그게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상대가 없는데 혼자 좋아하면 미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그린 세계지도를 보고서 태평양이 조금 작아졌는데? 아시아가 조금 작아졌는데? 고것 참! 이런다면 정상입니다. 왜 정상이냐? 상대가 있으니까 정상입니다. 또 세계 대통령이 떡 앉아서 법관을 향해 여봐라, 아무개 대감 대령하라고 했다고 합시다. 사람이 있을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여봐라! 한다면 그것은 미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없다면 허사입니다. 자기 혼자서 아무리 웃거나 울어도 허사입니다. 울어도 상대가 있을 때 진짜 울 수 있는 것이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아무리 울려고 해도 울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없는 세상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혼자 살림살이를 하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사랑할 대상을 찾을 도리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말할 상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별수 없이 사람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결국 누구의 하나님이냐? 인간의 하나님입니다. 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도 살림도 인간과 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이 정도의 자격자라면 명문집안 출신입니다. 이만하면 사람의 자격이 괜찮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아버지이다
본래 이 우주의 중심은 절대자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었으니 지은 분이 중심으로, 주인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아버지가 되니까 자기 아들딸에게는 중심이 됩니다. 그분이 인간을 지었다 하더라도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을 대하는 자리에서는 자식을 위해 있게 마련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있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자식이 침해를 받을까봐 걱정하고, 자식에게 무슨 문제가 생길까봐 보호해주고, 또 어떤 반대의 요건이 나타날까봐 방어해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런 부모의 본질을 찾아나가는 길, 부모의 본질에 연결해나가는 길이 선의 길, 즉 사랑의 길입니다. 이런 부자관계의 사랑의 인연을 연결할 수 있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그런 선의 자리를 통해서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로되 중심적인 사랑이 임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상에 사랑의 중심이 결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중심적인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냐? 맨 처음 사랑이 이 땅에 나타날 때, 어떤 사랑이 먼저 나타났느냐? 부부의 사랑이 먼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를 중심삼고 내 아들딸의 사랑이 먼저 나타났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사랑의 뿌리는 어디냐? 인간은 그 어떠한 중심 앞에 아들딸의 입장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뿌리는 바로 부모의 사랑이며, 그 사랑이 맨 먼저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격적 신으로서 인간을 자신의 아들딸로 지었다면, 그 아들딸을 지어 놓고 어떻게 했겠느냐? 물론 좋아했겠지만 좋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게 마련인데, 아들딸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입니다. 그런 분이 아들딸을 사랑하는 데 한 50퍼센트만큼 사랑해서 되겠느냐? 1백퍼센트 사랑해야 합니다. 1백퍼센트 사랑하기 위해서는 일생 동안을 거쳐가야 합니다. 일생 동안 사랑해야 그의 아들 된 인간이 행복하지, 소년시기에만 사랑하고 장년시기에는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사랑을 중심하고 한 이상을 향해 나가는 한 소년시기에는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그 후로는 불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 인간이 태어나 자라서 완성해가는 일생 동안 쭈욱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아들딸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모체입니다. 여기에서 부모의 사랑이 우러나왔고, 자녀의 사랑이 우러나왔고, 형제의 사랑이 우러나왔고, 친척의 사랑, 민족의 사랑이 우러나왔습니다.
좋은 것을 무한히 주고 싶어하는 하나님
부모는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가 갖기보다는 앞으로 자기를 대신할 수 있고, 자기가 맡길 수 있고, 자기가 믿을 수 있고,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에게 상속해주려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또한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가 있다 할 때, 그 군주 역시 잘살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합니다. 귀한 것이 있으면 그 귀한 것을 자기 개인만의 것으로 하지 않고 나라 전체의 것으로 하고 싶어하는 것이 진정한 군주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선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귀하고 좋은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하지 않고 전체의 것으로 하며, 또한 그 가치를 전체의 가치로 연결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을 참으로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천리의 원칙이며, 인간 본연의 마음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지극히 선한 분이요, 모든 만물의 근본이 되는 분이요, 사랑의 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한 후 온 우주의 귀한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참으로 믿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제일 귀한 것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싶어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어떻게 갈라지느냐? 마음대로 주고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갈라집니다.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받을 대상이 없고, 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줄 주체가 없을 때는 불행합니다. 줄 때는 자기의 제일 귀한 것을 서슴지않고 줄 수 있어야 하며, 어떠한 환경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이 인간 본연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행복한 자리에 서 있느냐? 하나님의 가장 귀한 것을 사랑하는 개인이나 가정․사회․국가․세계 혹은 주권자라면 주권자, 백성이면 백성에게 고스란히 주고 싶은데도 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안심하고 기쁘게 주고받을 수 있는 한날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냐? 그것은 참되게 줄 수 있는 세계적인 발판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는 데 있어서도 어느 누가 참소할 수 없고, 받는 데 있어서도 어느 누가 조건을 제시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자리를 소원합니다. 그러한 자리를 세계적으로 넓혀서 온 만민을 거기서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거두려는 소기의 목적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런 자리를 갖지 못한 하나님은 주고 싶은 마음이 크면 클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슬픔과 고통도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과정에서 개인을 통하여 천주에까지 주고자 하는 하나님은 주기 위한 그 거리를 단축하고자 합니다. 주는 데는 어떠한 환경의 제재나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주고 싶어합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주고 싶을 때에도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주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주고자 합니다. 명령하고 가르침받는 자리에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심정이 통하는 자리, 하나님의 영광과 만우주의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자리에서 주고받고 싶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세워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심정의 주체이시다
하나님은 심정의 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한히 슬픈 감정을 갖고 있으며 무한히 기쁜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기쁘고 좋은 감정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슬프다면 인간들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은 슬픈 심정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사람이 웃는 모양은 우는 모양과 비슷합니다. 웃는 모양과 우는 모양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어떤 사람은 웃는 모양이 꼭 우는 것 같습니다. 얼굴의 변화를 보면 웃을 때도 눈이 작아지고 얼굴에 주름살이 잡히고, 울 때도 그렇습니다. 웃을 때는 공적인 것을 드러내고, 울 때는 사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웃을 때에는 공적인 것을 드러냅니다. 옛말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웃는 사람에게 나쁘게 하면 벌 받는다는 말이요, 웃음을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를 못 받는다는 뜻입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웃는 것은 무한히 공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웃고 있느냐, 울고 있느냐? 하나님은 공적인 분이기 때문에 울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웃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충만한 웃음을 웃고 있어야 하는데, 까딱하면 폭소를 터뜨리고 까딱하면 폭소의 반대되는 폭비(爆悲)를 드러내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슬픈 면을 알게 되면, 그 슬픔 앞에서는 내 슬픔은 사라져 기쁨이 나옵니다. 슬픔이 지나면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는 눈물 콧물을 흘리고, 창자가 끊어지고 숨이 끊어지는 듯한 경지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한바탕 울고 나면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에 충만해 있는 반면 무한한 슬픔이 폭발될 수 있는, 안팎으로 두루 충만함을 갖춘 분입니다. 그래서 그 슬픈 일면을 찾아들어가 끝에 가면 기쁨으로 화합니다. 또 기쁜 일면을 찾아들어가게 되면 슬픔의 경계선이 점차 드러납니다. 이것이 교차되어 하나를 이룰 때 폭발적인 만족을 느낄 것입니다. 뜨거운 것과 찬 것이 부딪치면 어떻게 되느냐? 폭발합니다. 그러나 뜨거운 것끼리 부딪치면 폭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조화를 이루며 존재하고 있는 절대적인 주체가 하나님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순수한 울음은 어떠한 것이냐? 세포와 모든 신경기관이 일치되는 자리에서 나오는 울음이 순수한 울음입니다. 일치되었다는 것은 충만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울음은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는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또 기쁨을 느끼면 그 기쁨으로만 충만할 것이 아니라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슬픔도 있어야 합니다.
항상 기쁨만 자극시켜 주면 나중에는 기쁨을 못 느끼게 됩니다. 기쁨이 있는 반면 그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슬픈 일면도 내재돼 있어야 합니다. 그 슬픈 일면이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에 우리 의식기관으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절대적인 선 자체, 기쁨 앞에서는 슬픈 일면은 넘어갈 수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고,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기쁨만을 느낄 수 있는 경지는 기쁜 경지가 아닙니다. 그런 경지가 방향이 바뀌어서 반대의 경지가 될 때에는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친구를 원할 때 눈물이 있는 친구를 원합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질질 짜는 그런 친구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물이 있는 반면 웃음이 충만한 사람을 원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찡그린 얼굴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넘치는 희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남이 울 때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복 받는 사람입니다. 복은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에 찾아옵니다.
그 복받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에 복은 찾아오기 때문에 복받을 수 있는 자리는 부자의 관계와 같은 자리일 것입니다. 자식이 슬퍼하는데 자기와는 관계없다고 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아무리 그렇게 다짐하여도 다짐하는 그 의식을 넘어서 먼저 눈물이 앞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몽땅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나는 사랑이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밤에도 좋아하고, 낮에도 좋아하고, 일하면서도 좋아하고, 쉬면서도 좋아하고, 춤추면서도 좋아하고, 울면서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사랑이 있다. 몽땅 있다고 한 것입니다. 몽땅이라는 말은 그 속에 전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제일 좋아하는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만하면 근사합니다. 그런 사랑을 몽땅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기에 인간이 그 사랑을 몰랐을 때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사랑을 맛보면 죽더라도 놓을 수 없습니다.
삼십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간 더벅머리 총각이 그 동네에 있는 미녀를 사랑해서 그녀에게 장가들려고 할 때에는 마음으로만 끙끙 해서는 장가가지 못합니다. 삼십이 되도록 끙끙 앓았다고 사랑을 알 수 있느냐? 모릅니다. 왜 모르느냐? 혼자이기 때문에 모릅니다. 만약 둘이 사랑을 했다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혼자서는 못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몽땅 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혼자 사랑을 받겠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게 될 때 혼자 받는 것을 좋아하느냐? 하나님은 몽땅 사랑이니까 몽땅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느냐, 몽땅 사랑받는 것을 좋아하느냐? 하나님이 몽땅 사랑받는 것을 좋아한다면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받기만 한다면 인간에게 줄 사랑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몽땅 사랑인데, 그 몽땅 사랑을 창고에 쌓아 두고 깍쟁이 장사꾼처럼 하나하나 주는 것이 아니라 와르르 꽝 퍼부어줍니다. 몽땅 퍼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몽땅 퍼붓는 그 사랑을 받아 지탱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몽땅 퍼부어 주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크겠느냐? 거기에는 하늘도 몽땅 빠져들어가고, 땅도 몽땅 빠져들어가고, 지금까지 왔다가 간 수많은 선조들도 몽땅 빠져들어가고, 현재 살고 있는 인류도 몽땅 빠져들어가고, 앞으로 올 후손들도 몽땅 빠져들어가야 되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자면 우리 가슴이 얼마나 커야 되느냐? 우리 가슴이 크면 사랑을 몽땅 받을 것이고, 가슴이 작으면 그 사랑을 몽땅 못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몽땅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 주지도 않고 몽땅 사랑이라고 한다면 기분 좋겠어요? 우리 가슴이 사랑보다 작아 그 사랑을 몽땅 다 받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랑을 절반쯤만 받고 싶어하느냐, 아니면 넘치도록 받고 싶어하느냐? 우리 인간의 배포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다 받고도 감출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그렇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사랑이 있으면 그것을 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감당할 만한 여력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최고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람은 사람 축에도 못 들어갑니다. 사람이라면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몽땅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조금만 남겨 놓아도 안 된다고 합니다.
몽땅 사랑은 하나님 사랑인데, 하나님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몽땅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이 아닌 것은 싫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부자관계는 사랑이 아니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부관계도 사랑이 아니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형제지관계도 사랑 아니면 성립되지 않고, 동포의 관계도 동포애가 아니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종족을 넘고 민족을 넘는 세계 인류 박애사상도 역시 넓은 사랑이 아니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이 보편화되고 우리 생활권의 환경이 될 수 있는 인연과 터전을 마련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몽땅 사랑을 받는 세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환경을 갖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몽땅 사랑이냐? 사랑이 아니고서는 모든 것이 틀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랑을 말했고, 석가모니가 자비를 말했습니다. 자비도 사랑의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을 좋아하는 분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살고 싶어하느냐? 사랑 가운데서 살고 싶어합니다. 어디서 일하고 싶어하느냐? 사랑 가운데서 일하고 싶어합니다. 어디서 자고 싶어하느냐? 사랑 가운데서 자고 싶어합니다. 어디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싶어하느냐? 사랑 가운데서 노래하고 춤추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39-289, 39-149, 127-232, 36-91, 44-179, 111-70
4.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무형으로 계시는 하나님
우리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으며, 미래에도 없을 세계에서 가장 귀한 단 하나의 보물을 가졌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관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그런 분인데, 어디에 보관해야 하느냐? 누구나 하나님을 갖고 싶어할 텐데, 하나님을 갖는다면 어디에다 보관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물이 있다면 그 보물을 보관해야 하는데, 보관할 장소가 없습니다. 창고에 보관하면 누가 빼앗아 갈 수 있고, 계속 보관할 가망성이 없기 때문에 창고에 보관할 수도 없습니다. 안심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것을 품속에 안고 다닐 수도 없습니다. 언제 목이 달아날지 알 수 없습니다. 어디 건사할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보물이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자기 눈에만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절대 안 보이고 내 눈에만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건사할 수 있고, 자기만 상대할 수 있습니다.
제일 귀한 물건이 있다면 하늘 꼭대기에 갖다 놓고 싶겠느냐, 갖고 다니고 싶겠느냐? 갖고 다니고 싶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가지고 다니면서 한시도 그 물건과 떨어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최고 보물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우리가 갖고 있다면, 그분을 어디에 모시고 싶어하느냐? 안전하게 모실 수 있는 창고가 있다면 어디일 것이냐? 그 창고가 우리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안전하게 모실 수 있는 창고입니다.
그 마음의 창고에다가 보이는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합니다. 보이면 기분 나빠서 안 됩니다. 하나님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남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가 가졌다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을 모시는데 나만 알고 있고, 나만 비밀로 갖고 있는 분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 모시게 될 때, 그분은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최고의 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만 통할 수 있는 분을 갖고 있다고 할 때 비로소 안심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어디에 갖다 모시려고 하느냐 하면, 우리 마음속에 모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런 것까지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어야만 둘도 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 자리가 행복의 자리입니다. 그렇게 행복을 느끼려고 마련한 자리가 마음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 보이기를 잘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보였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몇천 년 동안 이 작은 지구덩이 가지고도 서로 많이 차지하겠다고 나라끼리 치고 뺏는 싸움을 했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사람까지 빼앗으려는 싸움을 합니다.
그런 판국인데 천주의 대주재 되는 하나님이 인간의 눈에 보인다면 그 하나님을 서로 빼앗으려는 싸움을 했겠느냐, 안 했겠느냐? 그렇게 되면 이 싸움을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이기를 잘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보였다면 나라끼리 서로 자기 하나님이라고 싸울 것입니다. 그 싸움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싸움이 있을까봐 무형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있으면 마음이 압니다. 틀림없이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바람벽도 뚫어볼 수 있습니다. 태평양 바다 속도 뚫어볼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인간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도 몇천 년 전에 죽은 성인들을 현실 세계에서 운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니까 하나님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영원을 시간으로는 포착할 수 없습니다. 영원 안에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안 보여도 됩니다.
하나님은 무형으로 계시는 것이 최고 편리한 방법
이 우주는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그 크기가 2백10억 광년이나 되는 대우주입니다. 이제 과학자들이 점점 지식이 많아지면 더 큰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1광년이란 빛이 1년 동안 나아가는 거리를 말합니다. 1초 동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돌 수 있는 빛인데, 이 빛이 1년 동안 나아가는 것이 1광년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큰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주인은 얼마나 크겠느냐? 키가 크다면 얼마나 크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크다면 하나님 자신이 거추장스러운 몸을 끌고 다닐 수 있겠느냐? 철거덕철거덕 다닌다면 얼마나 불편하겠느냐? 한번 움직이면 우주가 전부 놀라 자빠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그런 불편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주인이 되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백10억 광년이나 되는 우주를 '내 품에 품겨 오라. 넌 내 안에 있어라' 할 수 있는 몸을 가진 하나님이라면 얼마나 거추장스럽겠어요? 하나님이 볼 때도 한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하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중앙에서 마음대로 거동할 수 있는 무형의 존재로서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제일 편리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누가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형이니만큼 존재세계를 마음대로 뚫고 오더라도 아무도 지장을 안 느낍니다. 우리 몸에 하나님이 와서 마음대로 지나가더라도 그걸 못 느낍니다. 그러니 얼마나 편리하냐? 그러니까 하나님이 생각 끝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있는 것이 제일 편리할 것이다 해서 그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됐습니다.
하나님이 커야 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야 하는데, 그렇게 크다면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제일 작게 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주머니에 들어와서 잠도 잘 수 있고, 재미있게 놀 수도 있습니다. 여자들이 핸드백에 별의별 알록달록한 것들을 넣고 뭘하고 돌아다니는지 하나님이 '뭘하고 돌아다니노?' 하면서 조사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하냐? 그리고 사람의 몸 마음에 삭삭삭삭 들어가서 마음 보따리에 뭘 품고 다니나 조사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하냐? 그러니 큰 덩치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공기가 통하는 것을 모릅니다. 공기가 통하고 있지만 그걸 못 느낍니다. 공기가 통하는 것도 못 느끼는데 하나님이 통하는 것을 알겠느냐? 이렇듯 하나님은 무형의 신으로 있는 것이 최고 편리한 방법입니다. 그러면서 이 큰 우주를 보자기로 싸고도 남을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무형의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의 마음은 이 우주도 작다고 보고 더 큰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음 있는 곳에 하나님이, 내가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못 봤지만 하나님이 있는 것을 압니다. 어떻게 아느냐? 우리 마음을 보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마음이 있기는 있는데, 어디에 있느냐? 우리 몸의 심장 가운데 있느냐? 심장을 쪼개면 마음이 쑥 뛰쳐나오는 걸 봤느냐? 마음은 우리 몸 가운데 어디에나 있습니다. 코에 있다 하면 코에 있습니다. 머리카락에 있다 하면 머리카락에 있고, 발바닥에 있다 하면 발바닥에 있습니다. 내 등뼈 가운데 있다 하면 등뼈에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피가 있는 곳, 내 신경이 가 있는 곳은 전부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기 머리카락에 살짝 댔을 때 너 왜 머리카락에 대니?' 하지 않고 야, 너 왜 내 몸에 대니?' 그럽니다. 또 등에 닿으면 '너 왜 내 등을 건드려?' 하지 않고 '야, 어째서 나를 건드려?' 그럽니다. 그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그것들이 나를 대표해서 있기 때문에, 내 가운데 다 있기 때문에 머리카락 대신 나, 등 대신 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발가락 대신 나, 손가락 대신 나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내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나'라는 것은 뭐냐? 머리카락도 나, 등도 나, 손도 나, 발도 나, 나에게 속해 있는 모든 사지백체는 '나'입니다. 그러니 내 속에 있다는 말은 전체의 어디든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주고받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해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곳에 있느냐? 하나님에게 '하나님, 어떠한 곳에 있습니까?' 하고 물어볼 때, '어디 있긴? 나 여기 있다'라고 대답하는 하나님이라면, 점수를 준다면 30점도 안 됩니다. '어디 있소?' 할 때 '여기 있다'고 그러면, '여기가 어디요?', '그저 여기 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이 어디에 있소?', '사랑이 나와 더불어 있지', '나와 더불어 어떻게 있는 거요?', '그저 있는 것이지' 그렇게 말해서는 백점을 못 맞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문제를 걸고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살아 있는 하나님인데, 살아 있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시 운동을 하는 우주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면 우주 가운데 어디에 있느냐? 우주 가운데 제일 운동을 잘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맨 처음 운동을 할 때는 왔다갔다하지만 완전히 운동할 때에는 한 자리에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돌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주고받아 돌게 되면 딱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거꾸로 가도 그 자리에 있고, 옆으로 가도 그 자리에 있고, 바로 가도 그 자리에 있고, 변함이 없다면 얼마나 멋지겠느냐? 하나님이 생각하는 분이라면, 운동하는 세계에서 중심의 자리에 있고 싶어할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요, 지극히 타당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곳이 그런 세계인데, 하나님이 운동을 할 때 혼자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상대적 관계에서 주고받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 곳이라야 하나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러한 곳에 들어가 있다면 얼마나 어지럽겠느냐? 그렇게 운동하는 곳에서 따라 돈다면 어지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하는 전체에 맞출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세계는 주체와 대상, 내성과 외형으로 되어 있고,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그런 우주 가운데 들어가 운동하려면 그런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큰일납니다. 파괴됩니다. 거기에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도 내성과 외형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이 잘 주고 잘 받는 곳에는 하나님이 언제든지 가서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운동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모든 운동하는 곳에는 핵이 있습니다. 원자를 보면 양자와 전자가 운동을 하는데 거기에는 중심, 핵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목적이 있는데 목적이라는 것은 핵과 마찬가지입니다. 핵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연결돼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 구성과 발전하는 세계의 운동원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처하는 곳이 어디냐? 그곳은 완전한 주체와 완전한 대상이 완전히 잘 주고 잘 받아 영원히 운동할 수 있는 불변의 중심 자리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같이하는 존재는 영원합니다. 왜 영원하냐? 하나님의 성상을 닮아 하나님과 같은 힘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어디냐
하나님의 집은 어디냐? 하나님은 어떤 집을 원하느냐? 사랑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살 수 있는 집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인간의 몸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성전에 들어와서 누구의 눈을 통해서 보고 싶어하겠느냐? 하나님의 눈으로 보겠느냐, 인간의 눈으로 보겠느냐? 내 눈을 통해서 우주를 보고 싶어하고, 내 귀를 통해서 우주의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내 코, 내 오관을 통해서 우주를 느끼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좋다 하면 몸은 자연히 좋아하게 됩니다. 마음은 어떻게 돼야 좋아하느냐? 사랑이 깃든 곳에 있어야 좋아합니다. 그러면 자유롭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참사랑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자유가 아니라 구속입니다. 요즈음 미국 청년들이 마약을 먹고 '마약을 먹는 것은 내 마음이다' 합니다. 그게 자유냐? 자유라고 하면서 마약을 먹지만, 그건 구속입니다. 거기에는 사랑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지은 것도 사랑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려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볼 수 있는 내 눈이 되어야 합니다. 공적인 눈이 되어 희생적인 입장에 서야 하나님을 대신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순수한 사랑의 창문이 열립니다.
내가 남자로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눈으로 미녀를 보면 '저 사람을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하게 되지, '아, 저걸 내가 어떻게 겁탈할까?' 그러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여자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떨까?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게 공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느냐?' 하고 알아봤는데, 없을 때에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줘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생해야 됩니다.
여자도 그렇습니다. 미남자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면 세계관이 달라지고 생활관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살면 내가 아무것도 없이 일생 동안 살았더라도 그 뒤에는 세계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안에 있습니다.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우리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마음이냐? 공적인 마음, 원리적인 마음, 희생하겠다는 마음 가운데에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면 천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낙심할 때는 '아,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떠나는구나. 하나님이 보따리 싸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떠나면 다 잃어버립니다.
남자 여자가 하나된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와
남자는 왜 태어났느냐? 남자 때문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 때문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남자 때문입니다. 존재의 기원은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중심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면 남자 여자는 무엇으로 구별하느냐? 머리카락도 있고, 눈도 있고, 코도 있고, 듣고, 말하고 다 마찬가지인데, 무엇으로 구별하느냐?
남자 여자는 딱 한 가지 가지고 구별합니다. 그게 뭐냐? 가장 귀한 것입니다. 남자로서 주장할 수 있는 특권적인 부위가 남자에게 가장 귀한 것이고, 여자로서 주장할 수 있는 특권적인 부위가 여자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것이 남자 여자를 규명하고, 남자 여자의 동기와 결과를 규명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여자에게 가장 귀한 부위는 무엇을 하는 곳이냐? 무엇과 인연짓는 것이냐? 결합하는 곳입니다. 사랑을 연결하기 위한 메인 파이프입니다. 우리 몸의 보이지 않는 4백조 되는 세포가 그 메인 파이프로 해서 딱 한꺼번에 움직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발전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지성소가 어디냐? 하나님이 눈을 부릅뜨고 심각하게 찾아가는 사랑의 지성소가 어디냐? 하나님은 사랑의 주인으로서 지성소를 찾아가는데, 그 지성소가 어디냐? 우리 눈도 아니고, 입도 아니고, 손도 아닙니다. 그게 어디냐? 생식기입니다. 그래서 여자 남자가 일생 동안 이것을 붙들고 '당신 없으면 못 살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인인데, 어느때에 그곳에 찾아오느냐? 여자만 있을 때 찾아오겠느냐, 남자만 있을 때 찾아오겠느냐? 플러스 마이너스가 하나되어 더 클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찾아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추상적으로도 그런 결론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오는데, 여자와 남자가 하나되어 그것이 하나의 마이너스 형태를 갖춘 그 자리에 찾아옵니다. 여자나 남자나 지성소를 갖고 있습니다. 그 지성소가 인간의 생식기입니다. 지성소는 돈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귀하다. 하늘땅을 주고, 뭣을 주고도 못 바꾼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이 찾아오는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소는 이 우주의 중심인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되고, 이상이나 모든 것을 소유하기 때문에 특권이 있는 곳입니다. 지성소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생명과 사랑 중에 어느 것이 더 귀하냐? 지금까지 이것을 몰랐습니다. 사랑이 더 귀합니다. 왜 그러냐? 남자의 생명이, 여자의 생명이 지성소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에는 지성소가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사랑에는 지성소가 연결되기 때문에 사랑이 생명보다 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앞에서는 자기를 주장할 권리가 없습니다. 순응해야 합니다. 부부 사랑의 원칙에 있어서는 남자도 자기 권한을 주장할 수 없고, 여자도 자기 권한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랑에는 굴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천리입니다. 영원히 가져야 할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있는 지성소에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성소만이 전체를 대표하고, 전체를 소유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이 밥을 먹기 위해서 사느냐, 살기 위해서 먹느냐? 밥을 먹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요, 살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자기 생명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기 생명을 바쳐서라도 보호해야 되고, 여자도 남자를 생명을 바쳐서 보호해야 됩니다. 자기가 죽더라도 사랑을 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사람은 지성소에 설 수 있는 것이요, 자식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성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효자는 어떤 사람이냐? 부모를 위해서 생명을 바친 사람이 효자입니다. 애국자는 성스러운 국가 사랑을 통하는 사람이고, 성인은 성스러운 세계 사랑을 통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늘과 땅을 합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스러운 아들입니다.
이런 결론은 모든 동물한테 물어 봐도 '하하하! 옳고말고, 옳고말고', 광물한테 물어 봐도 '그렇지!', 새들도 '그렇지, 그렇지!', 전부 '그렇지, 그렇지!'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영계에 가도 '그렇지, 그렇지!', 하나님이 봐도 '그렇지, 그렇지' 한다는 것입니다. 만사가 오케이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원칙으로 피조 만물을 지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사랑 때문에 움직이고,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태어나고, 사랑 때문에 노래하고, 사랑 때문에 말하고, 사랑 때문에 먹고, 사랑 때문에 호흡하고, 사랑 때문에 춤춥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술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우주 사랑의 메인 파이프 라인입니다. 메인 파이프 라인이 밤낮없이 프리 섹스하고 돌아다닌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만큼 세상 천지가 깜깜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구, 나 저 남편 싫어' 할 때는 우주가 왕창 깨져 나갑니다. 메인 파이프 라인이 완전히 깨져 나갑니다. 여자가 그러면 그 여자는 이 세상을 파괴하는 괴물이요, 남자가 그러면 그 남자는 세상을 파괴하는 악마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138-141, 85-141, 97-239, 132-64
5. 우주의 근본은 무엇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의 상대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물으면, 절대자요, 유일무이하고 전지전능한 분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분과 인간은 어떠한 관계냐?라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 아버지는 어떤 의미에서 부르는 아버지냐? 다만 존중하기 위해서 부르는 막연한 아버지냐, 아니면 정말 그러한 내용을 가진 아버지냐?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생각지도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면 어떤 아버지냐? 우리를 낳아준 육(肉)의 부모를 중심삼고 볼 때, 그 부모와 하나님은 어떠한 관계냐? 이것이 막연합니다.
우주의 근본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근본은 무엇이냐? 인간의 근본은 생명입니다. 생명의 근본은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랑의 근본은 무엇이냐 할 때, 인간 이상의 것으로 올라갑니다. 그 이상의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혼자 있어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상대적 관계를 가질 때에 쓸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말을 할 때,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절대적인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상대적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고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데는 상대적 여건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 상대가 누구냐? 그 상대가 동물, 혹은 만물 중의 어떤 것이 될 수 있느냐? 그건 사람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동물이든지 하나님을 추앙하고 숭배하는 종교 형식을 가진 동물은 없습니다. 인간만이 하늘을 추앙하고 숭배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지라면 그 사랑에 상대 되는 자격을 갖고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는 답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뿌리를 어디에 내릴 것이냐? 사랑하는데 어떤 자리에서 사랑하느냐? 주종(主從)의 자리에서 사랑하느냐? 주종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절대적인 사랑의 주체라면 절대적인 사랑의 상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사랑해야 절대적인 사랑이 성립합니다.
종의 입장은 거리가 있습니다. 안팎이 하나되어 신경이 한 방향을 통해서 투입되고 주입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각기 다른 목적을 중심삼고 관계되어 있는 것이 종의 자리입니다. 사랑의 흐름에 있어서 그 동기를 같이할 수 없고, 바라는 최고의 상대적 여건을 같이할 수 없습니다. 외적 여건만을 관계지을 수 있는 자리가 종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종의 자리에 두고 사랑하려고 했느냐? 그렇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양자를 추구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양자로서 사랑하기를 바라느냐?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양자 이상입니다. 양자 이상의 자리가 뭐냐?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아버지가 되어야 하고, 우리 인간은 그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길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주종의 사랑 관계를 중심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인 상대로서 사랑 관계를 중심으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아들딸이 되는 자리입니다. 만일 그 이상의 자리가 있다면 인간의 욕망은 또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최고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우리 인간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응당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우주의 근본은 부자의 관계다
그러면 그 아들의 자리는 어떠한 권위를 갖느냐? 그 아들이 어떠한 권위를 갖고 나오기를 바라느냐? 자녀에게 비판받는 아버지로서의 아들을 하나님은 원치 않습니다. 그런 종족의 대표자, 그런 나라의 대표자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절대자니만큼 절대자의 자리에 선 아들, 그런 권위를 가진 아들을 원합니다. 이런 아들의 권위를 가진 자리는 국가적이 아니라 세계적입니다. 더 나아가 천주적입니다.
우리 타락한 인간도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세계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싶어합니다. 그런 마음은 어린아이에게도 있습니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은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더 높고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까지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그렇습니다. 최고 높은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들어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하나님과 나는 영원히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하나되어 그자 나요, 나자 그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를 원하는데,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사랑의 자리입니다. 그런 사랑을 중심으로 영원한 관계가 맺어집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사랑의 주체이므로 우리 인간이 그분과 관계를 맺어 사랑의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는 인간 세상에는 영원한 사랑을 중심한 이상세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상세계는 어떠한 소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화의 기원이요, 행복의 기원이기 때문에 정서적인 분야를 절대시한 터전 위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세계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상대적 여건을 중심으로 깊고 넓고 높게 세계 이상의 가치를 다짐할 수 있는 심정의 터전을 갖고 나서게 될 때, 그 앞에 외적으로 갖추어진 그 권위가 내적으로도 빛나는 것이지, 내적 기준이 갖추어지지 않을 때는 아무리 외적 기준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도리어 불행을 자초하는 조건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은 부자의 관계인데, 어떻게 해서 그런 관계가 맺어졌느냐?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서 이 우주의 중심이 뭐냐고 묻게 되면, 부자지관계(父子之關係)라는 답을 얻게 됩니다. 우주의 중심이 뭐냐? 한마디로 부자의 관계입니다.
부자관계라고 해서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의 관계는 보통 생각하는 자기 어머니 아버지, 즉 인륜도덕을 중심삼은 부자의 인연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 부자관계의 정(情)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있는 그 자리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인간이 찾아야 할 우주 최고의 진리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하나님은 인류를 찾아나왔고 인류는 하나님을 찾아나왔지만, 확실한 일치점을 못 본 채 흘러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과 하나님이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 합하고자 하는, 하나되고자 하는 공동목적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도대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어떤 자리에 처하게끔 만들어졌느냐?
우리 인간의 욕망을 보게 되면, 최고의 것을 전부 다 갖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점령했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 속에 한 가지라도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까지 점령하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결국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게 될 때, 비로소 그 하나님은 영원히 내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소유는 영원히 내 소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지 못하면 지금 아무리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을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주체 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사랑을 중심으로 서로 점령하고 점령당할 수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간이 제자의 입장에서 사랑받는 자리냐?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딸이 있고 아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위가 되고 며느리가 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냐? 아닙니다. 인간은 그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 이외의 자리는 원치 않습니다. 이런 자리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부자관계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찾아오고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무엇이냐? 이것은 인간이 찾아야 할 우주 최고의 진리입니다. 이러한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문제를 놓고 누구보다도 고심한 사람이 통일교회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이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서 이것을 심각한 입장에서 추구해서 얻은 답이 부자의 관계입니다.
이때의 부자관계는 오늘날 우리를 낳아준 부모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한 절대적인 하나님과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인류가 도달하여야 할 본연의 자리는 하나님이 아버지요 우리는 자녀라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엄청난 자리를 우리에게 허락하였습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아버지의 것은 모두 자녀에게 상속됩니다. 세상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생 동안 수고해서 돈을 벌어 집을 짓고 재물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어린 아들딸이 이건 우리집이야. 전부 다 우리 것이야 한다고 해서 자식에게 이 녀석아, 내가 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한 줄 아느냐? 하고 책망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녀를 보고 이 녀석 이거 기특한데 하며 칭찬을 합니다. 그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더 귀엽게 보입니다. 더 큰 소망을 갖고 바라보게 됩니다.
하물며 타락한 인간도 그런데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의 아버지라고 하는 하나님이야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은 우주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속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사랑, 절대적인 그 사랑도 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도 더 잘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부모의 욕망입니다.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못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하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아들딸이 자기보다 더 높다고 해서 불평하고, 자기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자기를 주관한다고 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부모는 잘났는데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애기가 못났다 하더라도 이 아기는 어머니 아버지보다 더 잘생겼소 하면 그 부모는 좋아합니다. 그런 마음은 누구를 닮았느냐? 인간이 타락했을망정 하나님의 본성을 닮았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무가치하게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무가치하게 지었다면 하나님은 이상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에 무엇이든지 다 압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르고 지었다면 그 하나님은 불완전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지을 때도 절대적인 상대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
하나님은 아담 해와의 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사랑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 바라는 종착점은 무엇이냐? 그것은 아들딸을 만나 사랑하는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바라는 종착점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의 아들딸로서 사랑받는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 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아들딸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 둘이 상봉하는 자리가 부자의 자리입니다. 그 이상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최고의 욕망은 세계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세계를 지도하는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 속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까지도 점령하여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습니다. 하나의 원소가 형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모체가 되어 이상적인 실체권을 갖춰 영원히 존속할 수 있게 지어진 존재가 본래의 인간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형성되는 기준에서 생각할 때, 그 주체와 대상은 반드시 사랑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됩니다. 그 외에는 하나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외에는 무엇으로도 하나되는 법이 없습니다. 지식으로도 안 되고, 권력으로도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이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인간을 지었지, 생명의 욕구로 인간을 짓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욕구로 인간을 지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적인 문제가 근본이지 외적 지적인 문제가 근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체적인 존재요 인간은 대상적인 존재로서 서로 상응하고 영원히 일체권을 이룰 수 있는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 자리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우리 인간은 아들딸이 되는 자리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는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로 신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륜의 원칙을 따른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우리 인간이 도달해야 할 소망의 자리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내 사랑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점령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우리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내놓고 일생을 투입해서라도 점령하려고 할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야 할 인생길이 우리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을 아는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라고 밤낮으로 재촉합니다. 이런 양심작용은 혁명할 수 없습니다. 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 세계보다 더 큰 것이 있으면 그것도 점령하겠다고 하는 양심작용은 그 어떤 힘으로도 혁명하지 못합니다.
만일 양심이 없으면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고통도 안 받을 것입니다. 이 양심이 있어서 밤이나 낮이나 남 모르는 가운데 악한 행동을 하더라도 네 이놈! 하고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양심작용은 악한 행동에 대해 언제나 공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이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 양심작용을 보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악만 없다면 우리 인간은 대단히 빠르게 그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이 고귀한 양심을 중심으로 찾아가는 본연의 가치의 자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하고 엄청난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자리는 그 자리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리가 우리 인간이 도달해야 할 소망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가 되고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더라도 아버지는 위에 있고 자기는 아래에 있는 것 같은, 상하관계와 같은 그런 기분이 듭니다. 그때 우리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아버지, 아버지가 앉으신 그 자리를 저에게 주세요. 저도 아버지의 자리에 앉고 싶어요 하는 욕망이 우리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네 이놈, 안 된다 한다면 다 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이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서 그래라, 어서 그래라 하면서 그 자리까지도 인간에게 부여해줍니다. 그 자리까지 인간에게 주고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임재하여 우리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고 있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성전에 임하여 우리 몸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즉 주체와 대상이 횡적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아담이 모든 만물을 일컫는 바 그것이 이름으로 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주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담이 어떻게 알아서 이 우주 만물을 주관하겠느냐? 그러나 하나님이 아담의 마음에 임재해서 하나되면 하나님이 아는 것을 아담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으로 하나되면 그것을 누가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갈라진다면 이상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그와 같이 고귀한 자리, 하나님이 처해 있는 동등한 자리까지도 주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부모와 아들딸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서서 부모를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해도 부모는 그것이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절대적인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인간이 절대적인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설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요, 인간은 외적인 하나님
아버지 되는 하나님은 자식을 대해 자기의 제일 좋은 것을 전부 주고파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기보다 못난 자식을 바라는 부모는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를 닮아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습니다. 자식 되는 사람이 진짜로 나타나면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싶어하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완성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 서면 하나님 자체는 위에 있고 인간은 아래에 있는 그런 상하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으로 하나되면 어떻게 되느냐? 안팎 관계, 내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요,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의 상대적 관계이기 때문에 외적인 하나님이 됩니다. 이상(理想)을 중심으로 말을 하게 될 때,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 하나님은 동쪽에 있고 인간은 서쪽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은 위에 있고 인간은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한 자리에 있어야 하느냐? 동기가 하나님이요, 결과가 인간이기 때문에 동기는 가운데 있고, 결과는 바깥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요, 인간은 외적인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머무를 수 있는,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의 관계를 맺어 서로 살아갈 수 있는 이상적인 터전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일신(父子一身)입니다. 일신인데, 상하관계의 일신이 아니라 안팎관계의 일신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는 무엇이 있어야 하느냐? 아담 해와, 그 자녀가 제일 사랑하는, 제일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제일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깊은 곳에 숨겨 놓습니다. 사랑하는 물건을 길거리에 내던지지 않습니다. 귀한 물건일수록 깊이 감춰 둡니다. 그러면 인간에게서 제일 귀한 것이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을 어디에 모실 것이냐? 높은 산중에다 모셔 둘 수 없습니다. 언제나 나와 같이 있는 곳에 모시고 싶어합니다.
또 인간의 욕망은 내가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언제나 나와 같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그것을 다른 사람은 볼 수 없고 나만 보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제일 사랑하고 나에게 귀한 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면 기분 나쁘다. 나만 볼 수 있고, 나만 알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모셔두고 싶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마음 중심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이 나만 볼 수 있고, 나만 알 수 있고, 내 자체 가운데에만 있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셔두면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나만 알고, 나만 보고, 나만 좋아할 수 있는 곳은 이 우주 공간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 내에서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이 이상적으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마음 중심입니다. 그 외에는 모실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임해야 되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집과 같은 입장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이 우주를 창조한 절대자 하나님이 들어와 살 수 있을 만큼 크냐? 마음이 초가집만큼 작아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크냐? 하나님이 열 분이 있다 하더라도 전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렇습니다. 큰 것이 있으면 전부 다 내 것 만들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 앞에 갖다 두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모셔 놓고 그 하나님 앞에 따르는 모든 나라까지 다 갖다 넣고, 혹은 세계가 있으면 그 세계까지 모두 갖다 넣고 싶을 만큼 방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모시더라도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다른 데 모실 데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같이 가고 싶어하고, 같이 있고 싶어하고, 같이 살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같이 살고 싶어하느냐? 하나님을 파고들어가서 하나돼 같이 살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부자의 관계가 가진 특정한 내용
69 - P.078, 1973.10.20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의 관계라고 했는데, 부자의 관계가 가진 특정한 내용이 무엇이냐? 아버지와 아들이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사랑이 교차되는 그 중심, 생명이 교차되는 그 중심, 이상이 교차되는 그 중심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랑과 생명과 이상은 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가면 하나님도 사랑이요 나도 사랑이요, 하나님도 생명이요 나도 생명이요, 하나님도 이상이요 나도 이상입니다.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최초의 인연이 부자관계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예를 들어서 얘기해 봅시다. 우리가 어머니 아버지를 통해서 태어나려면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이 움터야 합니다. 상대적 관계가 성립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그 사랑의 환경에서, 생명의 일치점에서 생명이 연결돼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싫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좋아서 못 살겠다고 해야 합니다.
부부가 사랑을 맺고 하나되어야 부부의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의 사랑은 내 사랑이요, 남편의 생명은 내 생명이요, 남편의 이상은 내 이상이 됩니다. 반대로 아내의 사랑과 생명과 이상도 마찬가지로 남편의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하나된 자리에서 자식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의 실현체요 투입체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생명의 연장체입니다. 또한 어머니 아버지의 이상의 구현체입니다. 자식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과 생명과 이상의 기반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부모는 그 자식을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보면 볼수록 생명이 약동하고, 보면 볼수록 이상적인 상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어디서 연결되는가
69 - P.079, 1973.10.20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은 어디서 연결되느냐? 생명이 교류하는 곳, 사랑이 교류하는 곳, 이상이 교류하는 곳입니다. 그 점이 어떤 점이냐? 부자관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요, 이상의 주체이므로 자녀에 대해서는 위신과 체면을 초월합니다. 아무리 죄인 된 못난 자식이라도 하나님을 붙들게 되면 하나님이 야 이놈아, 안 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안고 비벼주고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체험한다면 뼈살이 녹아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독하고 아무리 고난의 자리에 가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갈 수 있다면 고통을 모릅니다. 그런 길을 살 수 있다면 억만금을 주더라도 사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돈 가지고 못 삽니다. 뼛골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의 심정을 설명하기 전에 주체요 대상이라는 감정의 흐름이 속에서부터 폭발되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에는 사랑과 이상이 통하게 돼 있습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생명이 약동하고, 이상을 중심으로 생명이 약동하게 돼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은 거룩하며 우리 인간은 죄인이고 피조물이니 가치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라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말처럼 그런 입장이라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연결될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한 중보가 있으니 그는 곧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됩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사람이요, 우리는 죄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교류될 수 있고, 생명과 교류될 수 있고, 이상과 교류될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요, 우주의 근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우주의 근본이 부자관계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됩니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가치를 알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본향을 찾아가야 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가 살 수 있는 하나님나라를 건설해야 합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48-200, 54-81, 56-131, 69-71, 84-178, 53-280, 86-9, 104-95, 112-289, 118-285
6.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몸이다
하나님은 마음도 있고 몸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몸이 있긴 있는데 영적입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지만 무형의 하나님으로는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무형으로는 선생이 될 수 없고,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실체의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체(體)를 입어야 합니다. 체가 필요합니다. 실체의 주인이 되고, 실체의 선생이 되고, 실체의 아버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체를 입어야 합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완성해서 영계에 가면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몸이고 하나님은 아담 해와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계에 가더라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완성한 사람을 실체세계의 몸 마음과 같은 하나의 결과로 이루어놓자는 것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창조한 목적입니다.
결국 실체세계의 마음과 몸을 가진 아담 해와와 같이 영계, 무형세계에서도 마음과 몸을 가진 아담 해와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의 마음이 저나라에서 몸이 되고 하나님이 그 마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하면 마음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니 땅 위에서 완성하지 못하고 가면 저나라에서 마음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인간으로 태어난 이 지상에서 본연의 마음을 다시 찾아 영원한 세계에 변화된 몸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영적 마음과 같은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준비를 못 하면 저나라에 가서 마음 없는 사람과 같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몸입니다. 실체를 가진 몸입니다. 그런 아담 해와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는데, 그 하나님은 누구냐? 아담 해와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처음 입었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하나님과 하나됐으면 그 아담 해와는 모든 가정의 중심이요, 종족․민족․국가․세계의 중심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아담이 이름 짓는 대로 되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몸을 통해서, 아담의 육신의 기관인 입을 통해서 하지만 하나님이 하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떠한 관계로 지었는가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과 어떠한 관계로 있고 싶었느냐? 인간의 부모의 자리에 있고 싶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알고 있고, 이 관계는 물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본래는 그러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어떠한 권력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단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말은 상대적 관계에서 성립되는 말입니다. 아무리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혼자서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상대적 관계가 있어야 사랑이 성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를 지은 목적은 기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하고 기쁘냐? 보고서 기쁜 것이 아니요, 말하고 기쁜 것이 아니요, 만져보고 기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으로 하고 기쁜 것입니다. 따라서 기쁨을 성사하기 위해서 만물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이냐?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이라는 말은 무엇이냐? 집입니다. 집은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완성했다면 사랑을 가진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하여 아담과 일체 이상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즉 아담 해와와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나님이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담 해와를 지었다고 했기 때문에 아담적 형상 성상과 해와적 형상 성상을 지닌 분이 사랑을 가지고 아담 해와의 마음에 임하게 되면, 하나님은 내적 하나님이고 아담 해와는 외적 실체를 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피조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통하지 않고는 사랑을 이룰 수 없느냐? 하나님은 무형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 대한 체험이 있다면 알겠지만, 영계에 가면 예수님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그 말씀을 현현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의 몸을 써야 하는 이유는 무형으로는 유형인 인간의 부모로 현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체를 가진 부모의 자리에 현현하기 위해서는 체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중심하고 외적 형상인 아담 해와의 형상을 입어야 만인류의 조상으로 현현할 수 있기 때문에 아담 해와를 창조하였습니다. 즉 체를 입기 위해서 아담 해와를 창조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사랑을 성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의 마음에 임하여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됨으로써 그 하나님이 말로만 하나님이 아니라, 말로만 부모가 아니라 내용으로나 외적으로나 완전히 부모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 아담 해와를 창조했습니다. 인내천(人乃天)이란 말도 이러한 원리 가운데서 유래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은 것은 첫째는 체를 입기 위해서고, 그다음엔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실체를 영계와 연락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을 지었습니다.
아담 해와를 이중구조로 지은 이유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이중구조로 지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형상을 보면 체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무형의 하나님은 체가 없습니다. 체를 입지 않고는, 체를 갖지 않고는 영계나 지상세계를 치리(治理)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지전능한 절대자라 하더라도 인간의 부모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체를 입은 대표가 아담 해와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는 인류의 시조인 동시에 천지를 주재하는 하나님입니다. 실체를 가진 하나님, 즉 영원한 무형세계의 하나님의 형상을 대신 입고 나타난 부모의 자리에서 세계를 통치할 책임이 아담 해와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면 영계와 육계는 무엇이냐? 영계의 대표는 하나님이요 지상의 대표는 아담 해와인데, 이들이 연합해야 합니다. 아담은 지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 지상 나라의 왕입니다. 영원한 왕권을 갖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해와는 왕후입니다. 그 영원한 왕권을 대표한 부부가 그냥 그대로 영계에 가면 하나님 대신 역할을 합니다.
하늘나라에 무형의 하나님만 혼자 있어서 뭘 하겠느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있어서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부모가 되려면 체를 갖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과 같은 체를 입으려니 부득이 아담 해와를 이중적인 존재로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이중구조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느냐? 무형의 하나님과 똑같이 되게 하려니 마음과 몸이 일생을 거쳐 저나라에 갈 때까지 하나되었다는 기준을 세워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고 저나라에 가면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합니다. 실체적 왕권을 가진 부모가 무형의 부모인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영원한 천상세계에 체를 입은 왕권을 현현시키기 위해서 아담 해와를 이중구조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이유는 같은 부모의 자리에 서기 위한 것이요, 체를 입기 위한 것입니다. 같은 부모의 자리라는 것은 안팎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외적인 부모는 아담 해와요, 내적인 부모는 하나님입니다. 내적인 하나님이 마음과 마찬가지입니다. 몸적인 하나님이 아담 해와고, 마음적 하나님이 하나님입니다. 그 부모가 여러 명 있는 게 아니라 한 분입니다. 한 분이니까 그 한 분이 들어와 계실 수 있는 아담 해와, 남성 여성의 이성성상을 가진 분성전(分聖殿)과 같이 딱 해 놓고 하나님이 거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반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본래의 기반이 깨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리 이 땅 위에 많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관계 없습니다.
본래 창조이상은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인데, 이것이 실현되지 않았으니 재창조역사, 복귀라는 재창조 과정을 거쳐 실현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어느 정도 사랑을 베풀어야 하느냐? 절대자인 그분이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을 지었다면 최고의 자리에서 사랑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면 어떠한 자리에서 받고 싶으냐 하고 묻게 될 때, 누구든지 종의 자리에서 받고 싶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과 양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어느 자리에서 받겠느냐고 하면 양자의 자리에서 받겠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양자의 자리에서 사랑을 받고 싶으냐, 직계 자녀의 자리에서 사랑을 받고 싶으냐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느냐? 그것은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직계 자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보다 더 나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어합니다.
인간의 욕망을 두고 볼 때, 남녀노소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은 자리는 종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양자의 자리도 아닙니다. 아들딸의 자리에서 사랑을 받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욕망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은 불가능한 입장에서 추구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을 지은 절대자 하나님이 최고의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도 최고의 자리에서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내적인 바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도 최고의 자리에서 사랑을 받고 싶어하며, 하나님도 최고의 자리에서 사랑을 하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그 최고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 자리는 바로 아들의 자리요 딸의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또 하나님도 인간을 최고의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에게 사람을 지을 때 어떤 자리에서 사랑하려고 지었소? 하고 물었는데, 종의 자리에서 사랑하려고 지었다고 대답한다면 그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양자의 자리에서 사랑하려고 지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아들과 딸의 자리에 세워놓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천정(天情)이 있고 우리 인간에게는 인정(人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인정과 천정이 서로 합할 수 있는 귀결점은 도대체 어떤 자리냐? 그 자리는 절대자인 하나님도 원하고 인간도 원하는 단 하나의 자리입니다. 즉 한 부모를 중심으로 한 아들딸의 입장에서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인정과 천정이 합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분이고, 사랑이 제일 많은 분이며,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분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이러한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인간은 그분을 제일 좋은 분으로 모시고 그분과 제일 좋은 관계를 맺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묻기를, 하나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모시고 싶으냐, 아니면 아버지로 모시고 싶으냐고 하면 누구든지 할 수만 있으면 절대자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싶다고 대답합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장가를 간다면 누구의 사위가 되면 좋겠느냐고 물으면, 대다수의 남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대통령의 사위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한 여자들에게도 누구의 며느리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그 나라의 대통령의 며느리, 군왕이면 군왕의 며느리가 되고 싶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 그러냐? 대통령이나 군왕이 그 나라의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그러한 최고의 자리를 지향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자 합니다.
그러면 인정과 천정이 합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것은 부자의 관계입니다. 사람과 하나님, 인정과 천정, 인륜(人倫)과 천륜(天倫)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인간을 아들딸이라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인륜과 인정이 성취되고, 천륜과 천정이 완성됩니다.
인간 최고의 소망이 무엇이냐
인간은 최고 높은 자리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난다면 어떠한 자리에서 만나고자 하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서 만나려고 하느냐? 도대체 그 자리가 어디냐? 어떠한 자리에서 만나고 싶어하느냐? 최고의 자리입니다. 인간으로서도 최고의 자리요, 하나님으로서도 최고의 자리입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만나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어디냐? 인간의 최고의 소원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생명의 인연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리에 서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생명줄이 끊어졌습니다. 생명줄이 끊어졌기 때문에 사랑줄도 끊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최고의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최고의 소망은 우리 인간의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보니 아버지의 자리가 자기 자리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 욕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욕망을 놓고 볼 때, 우리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고 싶어하느냐? 부자관계는 상하관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으로 만족을 못 합니다. 상하관계도 맺고, 그다음에 좌우관계, 전후관계, 내외관계까지 맺으려고 합니다. 그 자리까지 가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내외관계는 무엇이냐? 하나님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중심으로 분 하면 하나님은 마음 하나님이요, 사람은 몸 하나님입니다. 여기까지 나가자는 것입니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두고 볼 때, 내적인 것이 좋고 외적인 것이 못하다 하게 되면 또 문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또 상하도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사랑으로 엉클어져야 합니다.
안팎이 서로 사랑했다 할 때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또 부모와 아들딸이 하나가 되면 여기에도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횡적인 일체, 종적인 일체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서부터 사랑의 핵심이 이루어져 우주로 벌어져 나갑니다.
하나님과 내가 주고받아 하나만 되는 날에는 그도 나요, 나도 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14장 20절에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는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고귀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실체를 쓴 하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쓴 몸이기에 인간은 외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특권을 인간에게 부여하려고 합니다. 왜냐? 우리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도 누구를 사랑할 때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어합니다. 내 것을 모두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관시키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몰래 숨기려고 한다면 거짓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권세를 인간에게 주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일체이상입니다. 사랑을 중심삼은 일체이상이 창조이상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114-9, 133-86, 39-7, 39-289, 69-71
7.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우리 인간이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싫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중심으로 보더라도 대통령과 가까운 관계에 있으면 예술가면 예술가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모두 이익을 보기 위해서 야단합니다. 그것은 중심존재를 의지하여 자기를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누가 끊을 것이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의 원천이요, 행복의 원천이요, 평화의 원천입니다. 영적 체험을 해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을 때는 만물이 와서 붙으려고 합니다. 어디로 도망가려고 해도 따라다니고, 무엇을 하려고 해도 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못 받으면 다 도망가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는 자리에 서게 될 때에는 만사가 형통이요, 만사가 희망차고 영원합니다. 거기에서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통일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태양보다 강합니다. 아침에 햇빛이 나면 모든 식물의 순은 태양을 향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생명의 기원이요, 우리 본심의 기원이요, 이상적 요소의 주체적 기원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권을 통하게 되면 어떤 기분이냐? 봄날 향기나는 동산에서 아름다운 꽃들을 바라보며 향기란 향기를 다 맡아 취한 기분과 같습니다. 또한 봄철 잔디밭에 앉아 솜 같은 뭉게구름을 보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그 무엇을 느끼는 기분과 같습니다. 그럴 때에는 우리의 모든 세포가 춤을 춥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력을 지닌 모든 존재의 힘의 원천이요, 행복의 원천입니다. 또 희락이나 평화, 인간이 소망하는 것의 절대적 요건이요, 신앙의 절대적 요소입니다. 영계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행복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느냐? 그것은 마치 따스한 봄날에 하늘에는 흰 구름이 두둥실 떠 있고, 땅에는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개미들도 세상 구경하겠다고 발랑발랑 기어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졸졸졸 흐르는 개울가에는 버들강아지가 움트고, 개구리가 봄날의 새 노래를 부르고, 벌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그런 환경에 취해서 잠이 들 것 같은데 들지 않고, 기분 좋아서 영원히 좋다 할 수 있는 그런 맛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이상상대를 대해 느끼는 기분은 벌 나비가 날아드는 꽃동산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기분 좋다는 것입니다.
아가씨들이 시집가서 남편이 자기를 사랑해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사랑해준다면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아예 남편 옆에 딱 붙어 살려고 합니다. 여자는 남자가 소 앞발 같은 손으로 자기 손을 꽉 잡아주면 좋아합니다. 영화를 보아도 그런 영화를 보고 싶어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당신 손은 참으로 곱소.하면 기분 나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하나로 만듭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하면 딱 맞붙어 버립니다. 그렇게까지는 안 되겠지만 그 이상의 심정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산다면 전부 다 하나되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세계에서 살려고 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면 언제나 춤추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한다고 협박을 하고 핍박을 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겨울에 찬바람이 불어와 정신이 들게 해주는 것밖에 안 됩니다. 밥을 굶는 자리에 있어도 그 고통이 나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행복이란 무엇이냐? 전후 좌우 상하가 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관할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없는 자리가 행복한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자리라고 해서 울지 않습니다. 오히려 웃습니다. 고통스런 자리라 해서 비참한 자리가 아닙니다. 행복의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자기의 자세를 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발굴지는 어디냐
참된 사랑의 기원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의 발굴지는 어디냐?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느냐? 아닙니다. 남녀가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세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자관계의 사랑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전통으로 남기고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는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 하고, 종적인 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이 종적인 관계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성립되기 때문에 부자간의 사랑 외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랑에는 거리가 없습니다. 이 종적인 관계에서는 하나의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중심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중심은 제일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중심이 둘이면 싸움이 벌어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변증법은 근본적으로 파탄되게 되어 있습니다. 중심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외의 것은 전부 하나의 중심을 보조하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흡수하든가 흡수되든가 해야 합니다. 그런 두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존재의 필연적인 환경이 성립합니다.
피와 살이 연결되는 중심은 종적입니다. 자기로부터 아버지, 할아버지, 이렇게 올라가는 것은 종적입니다. 이런 식으로 쭉 올라가면 결국 수천의 사람들이 하나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발전이고 변화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가 혁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동물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직계로 연결되는 자리는 그 자리뿐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주면서도 좋아하는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우주는 실체세계요, 절대자의 상대적 세계입니다. 물질세계의 중심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부모의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나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표면화되고, 그 내정적 실상이 부자의 관계에 그냥 그대로 표면화되는 가정이 있다면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데에 계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해주어야지 별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합니다. 동기가 되기 위해서는 목적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될 때는 천태만상으로 돌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간에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본받아서 형은 동생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일원화된 가정은 가정애가 꽃핍니다. 이것이 또 사회애가 되고, 더 나아가 민족애가 됩니다. 이와 같이 나아가면 세계애가 됩니다.
사랑의 본질과 하나님의 사랑
부모의 사랑이 왜 귀하냐? 부모의 사랑은 종적인 사랑이지만 종적인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횡적인 사랑이 깃들게 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귀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가 그릇될까봐 생활을 통해서 자녀의 길잡이가 되는 내용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종적인 사랑은 반드시 횡적인 사랑을 창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이런 원칙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종횡으로 집약되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듯 종횡의 요소를 책임진 것이 부모의 사랑이기 때문에 자기의 귀한 것을 그냥 그대로 자식에게 주려고 합니다. 그냥 그대로 주어서 횡적으로 넓히려고 합니다. 사랑의 본질은 그런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이 왜 그러하냐? 상대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간에는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원형을 그립니다. 주체는 종적이요 대상은 횡적인고로 이것이 90도를 이루어 원형을 그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본질은 반드시 종횡의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종횡 가운데 무엇이 먼저 출발하느냐? 종이 먼저 출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사랑이 흘러 나옵니다. 사랑의 내심을 분석해 보면 종횡의 사랑의 본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종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종적인 사랑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횡적인 내용을 갖췄기 때문에 횡적인 아들딸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아들딸이 종적으로 넓힐 뿐만 아니라 횡적으로도 넓혀 나감으로써 거기에서 만유의 존재가 종적인 환경을 중심으로 횡적인 환경으로 퍼지고, 세계와 천주까지 확산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마음이 동기가 되어 세계를 지배하겠다, 무엇을 갖겠다, 무엇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종횡의 사랑의 인연이 자신의 본질적인 마음의 바탕에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본질적인 욕구에 따라 우리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반드시 인간에 의해 횡적으로 뻗어나갑니다. 이것은 그림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자는 실체의 형태를 대신해서 반응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기의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주고받으면 반드시 반응이 생기는 것과 같이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으면 반응하는 극이 생깁니다. 그런 것이 다른 데에서 또 벌어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횡적으로 뻗어나갑니다.
하나님의 사랑-무한정으로 주고자 하는 사랑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게 될 때, 얼마만큼 주고 싶어하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이만큼이면 됐다 하는 한계를 두고 주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무한정으로 주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몽땅 주고도 너로 말미암아, 네 안에 살고 싶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게 하는 본질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사랑 가운데 들어가서는 종살이를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의 밥상 위에 올라가 똥을 싸도 그것을 바라보고 기쁨을 느낍니다. 사랑은 법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간에게 사랑을 주었다고 해서 나는 완전히 다 주었는데 너희는 왜 안 주느냐? 이럴 수 있느냐? 절대적인 사랑을 가진 하나님은 아직까지도 주고 싶은 사랑을 다 못 주어 안타까워합니다. 자아를 주장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주고자 했던 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완전한 사랑을 주지 못했으니 인간세계에 대하여 사랑을 주고 나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입장일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이기에 생각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나는 다 줬으니 이제는 너희가 가져와라 하는 하나님이라면 필요없습니다.
무한히 주고 싶어하는 하나님이 오늘날 악한 세계에 있는 인류를 바라보며 사랑을 주려야 줄 수 없어서 느끼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클 것이냐?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고 나서도 부족함을 느끼는 하나님인데, 아무리 주고 싶어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못 가진 하나님은 얼마나 원통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홀아비나 독신자가 행복합니까? 나라를 다 갖고 세계를 다 가졌다 하더라도 혼자 산다면 행복한 사람입니까, 불행한 사람입니까?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영원히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어도 그 사랑 가운데 있습니다. 눈물을 흘려준다면 최고의 눈물을 흘려줄 수 있고, 정의 인연을 완전히 맺을 수 있는 그런 분이 하나님이 아니면 없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 품에서 죽는다는 것은 최고의 행복입니다. 여자들도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죽으면 한이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사랑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
사람은 좋은 것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선전하고 싶어합니다. 선전하고 싶다는 것은 뭐냐? 관계를 맺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선전이나 자랑은 왜 하느냐? 너도 이와 같은 관계를 맺어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냐? 부모가 제일 좋고, 그다음은 나이며, 그다음에는 자식입니다. 이것으로 역사가 계승됩니다. 이러한 내용이 집약된 것이 무엇이냐? 즉 우리의 생명을 연결시키고, 생명에 연결된 그 환경을 중심으로 사랑의 이념을 꽃 피울 수 있는 그런 환경의 터전이 무엇이냐? 가정입니다.
자식은 어머니는 영원히 내 것이다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자기의 피살을 나누어주면서 좋아합니다. 이것을 볼 때, 좋은 것이 뭐냐?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한테 주면서도 좋아합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고, 자기에게 제일 귀한 것을 주고도 더 주고 싶어합니다. 주고 나서 그것을 돌려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 적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식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주면서도 더 좋은 것을 못 주어서 한이지만, 자식은 나는 효자다 하면서 만족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은 다릅니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 엄마 아빠는 뭘했어요?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라는 한계선을 못 넘습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은 자기라는 한계선을 넘습니다.
이런 사랑이 무슨 사랑이냐?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이 인간 앞에 나타난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부모보다 나은 분입니다. 우리 부모는 자식만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세계 인류를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합니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 아버지는 나만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만민을 어머니 아버지 이상의 자리에서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천년 만년 주고도 또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을 끊임없이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 주고 나서 야, 요거 몇냥 몇전이다 하는 장사꾼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필요없습니다.
인간이 왜 하나님을 좋아하면서 따라가느냐? 하나님은 천년 만년 모든 것을 주고 또 주면서도 부끄러워하며 지금은 이것밖에 안 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라, 몇백 배 몇천 배 더 좋은 것을 줄 터이니 하면서, 오늘 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면서도 미래에 더 좋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과 함께 있으면 비록 못먹고 못살더라도 행복합니다. 못먹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미래의 소망의 자극이 현실권에서 충격적으로 느껴집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결심을 할 수 있습니다.
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그런 부모를 가진 자식이 엄마 하고 끌어안게 되면 몸만 끌어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미래를 위해 서로 위로의 눈물을 같이 흘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절망이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소망을 현재의 자극으로 여기고 서로 결의하고, 서로가 맞부딪쳐서 격려할 수 있는 폭발이 일어나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비참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자극을 끌어들여 현실에서 가치를 찬양할 수 있으니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권에서 사는 사람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존의 바탕
사랑이 없으면 영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데, 사랑 없이 영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생이 어떻게 가능하냐?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 힘이 소모됩니다. 하면 할수록 힘이 소모됩니다. 다시 말하면 작용을 하면 힘이 소모된다는 것입니다. 작용을 했는데 오히려 힘이 솟아나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현상세계, 자연세계의 공식입니다. 그런데 이 공식에 어긋나고 상충되는 것이 단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힘이라는 것은 어떠냐? 전기를 일으키는 발전기에 들어가는 힘과 나오는 힘을 보면 들어가는 힘이 나오는 힘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오는 힘은 언제나 작습니다. 다시 말하면 운동을 하는 가운데 힘이 소모되기 때문에 나오는 힘은 들어가는 힘보다 언제나 작습니다. 이것이 힘의 원칙입니다. 들어가는 힘보다 나오는 힘이 작기 때문에 그 힘을 같게 해주기 위해서 휘발유를 태우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 작용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작용이 영속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진실로 사랑했다 할 때는,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보다 작게 돌려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없습니다. 내가 진정한 사랑을 받았다면 돌려줄 때는 더 보태서 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부모는 천번 만번 희생하면서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되돌려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을 받은 아들딸은 더 보태서 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 주고 나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도 더 주고 싶은데 못 주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런 사랑입니다. 주고 나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진정한 사랑의 주인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옷을 해입히고 나서도 더 좋은 옷을 해입히지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주면서도 충만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느낍니다.
사랑은 주면 줄수록 더 큰 것으로 보태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없이는 흥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랑의 인연과 사랑의 도리에서만 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벗어나면 전부 망합니다. 사랑을 벗어나서 주고받으면 주고받을수록 망합니다.
순전한, 완전한 사랑은 주면 줄수록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면 줄수록 플러스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작용하면 할수록 들어가는 힘보다 나오는 힘이 더 큽니다. 작용하고 나면 더 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갖지 않고서는 영존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렇게 보태주는 힘의 작용이 없으면 영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영존할 수 있는 바탕이요 동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큰 힘이 내재할 수 있으므로 그런 존재는 영생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 가운데서 살고 싶어하고, 사랑 가운데서 죽고 싶어합니다. 사람은 이것을 이상의 요소로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지 못하면 인간이 아무리 소망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망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영생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영원히 잘 주고 잘 받을 수 있게 하는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의 갈 길입니다. 여기에 비로소 소망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99-193, 37-7, 34-215, 36-44, 36-273, 38-222, 115-169
8.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휼
우리는 절대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이상적이다 하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잠깐 있는 것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 사랑을 빼놓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혼자 놓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상적인 상태가 되려면 보호의 환경이 있어야 합니다. 그건 자동적인 말입니다. 보호할 수 있는 환경도 있어야 되지만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또 평화스럽고 안식할 수 있는 자리에서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갖추지 않으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 자체가 그럴 수 있느냐?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그럴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건 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절대자가 필요합니다. 절대자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자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교는 그러한 이상경을 바라면서 더듬어 나오고 있습니다. 종교는 무엇을 하는 곳이냐? 참된 형제의 인연을 찾고, 참된 부자의 인연을 찾고, 참된 상대 인연을 찾자는 곳입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런 절대자가 있으면 우리는 그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믿고 따라가고 싶으냐, 절대자와 직접 관계를 맺고 싶으냐? 우리는 절대자의 상대가 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주체가 필요합니다. 가는 길은 종의 길이라도 결국 주체를 바라기 때문에 신을 안 바라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전부 신을 추구합니다.
그러면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으냐? 제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싶다, 그 하나님을 내 주체로 모시고 싶다, 그 하나님을 내 친구로 갖고 싶다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내 형님, 내 동생과 같이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느냐?
이것은 절대적인 사랑이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왜냐? 사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의 자리에 가도 불평하지 않고, 남편이 아내의 자리에 가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자리가 바뀌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좋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뭐냐? 그것은 아버지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을 최고의 이상적인 요인으로 삼습니다. 사랑 앞에는 아무리 권력 있는 사람도 순응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더라도 사랑 앞에는 전부 굴복합니다. 그걸 반대하고, 그걸 배척하고, 그걸 밟고 올라서겠다는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랑에 지배를 받겠다고 하지 사랑을 지배하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사랑에 지배를 받고, 사람도 사랑에 지배를 받고, 모든 존재가 사랑에 지배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사랑이 위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슨 가치를 가졌느냐?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가치적인 관을 중심하고 볼 때,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적절한 말입니다. 절대적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절대적이라는 말을 존속시킬 수 있는 내적인 동기가 되는 것이 뭐냐 할 때, 그것은 아무리 봐도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사랑이 있어야만 절대적이라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상대적인 여건에서 나타납니다. 상대적인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혼자서는 절대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혼자서 사랑이 이뤄지느냐? 상대를 부정해서는 사랑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나님의 가슴에 나타나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만물에 나타납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자식에게 나타납니다. 또 남편이 있는 곳에는 아내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남편이 입은 옷에서도 아내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요즈음 여자들은 참 편합니다. 옷을 만드는 데 재봉틀을 사용하고, 남의 힘을 빌립니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를 봐도 저고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일일이 바늘로 한땀 한땀 떠서 온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것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입니다. 가슴에서 나오는 사랑은 그만두고라도 생활에서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자식을 보아 부모의 사랑을 알 수 있고, 남편의 옷 끝을 보아 아내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 나타난 사실을 보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느냐? 알고 보니 전부 다 싸움을 하고 복잡해져 있는데 사랑은 무슨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입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 자신에게만 나타나서는 인간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천년 왕국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참 조화롭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감정이 모두 그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을 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쁜 모습과 슬픈 모습은 다릅니다. 기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사람이 슬픔을 주관하고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바뀝니다.
슬픈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고통입니다. 고통을 주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돈을 주관해야 합니다. 돈을 종이쪽지로 생각하고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슬플 때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나타나는데, 어떻게 나타나느냐? 사랑의 순서에 따라 나타납니다. 먼저 부모의 사랑, 다음에는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입니다. 여기에 하나 플러스할 것이 있으니 그것이 형제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만 가지면 하나님과도 친구같이 지낼 수 있고, 아버지같이 지낼 수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부모 중의 부모입니다. 왜냐? 세상의 모든 부모를 주관하고도 남을 수 있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대표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형제의 사랑도 들어가고, 이걸 확대하면 국가나 세계의 사랑도 들어갑니다. 이것이 요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요, 부부의 사랑이요, 자녀의 사랑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것이 최고 멋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 마음에 나타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야 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나라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우주, 모든 존재세계 앞에 나타나고, 인간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자식에게 나타납니다. 남편의 사랑은 아내에게 나타나고, 아내의 사랑은 남편에게 나타납니다. 그것이 사랑의 공약이요, 사랑이 움직이는 방향이요, 사랑이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따르지 않고서는 사랑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나타나는데, 그 인간을 믿을 수 있느냐? 인간 중에는 도둑도 있고, 강도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나타납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미국 사람한테 나타나는 것보다 한국 사람한테 나타나고, 한국 사람한테 나타나는 것보다 우리 집에 나타나고, 우리 집 가운데서도 아내한테 나타나는 것보다 남편인 나한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나타나는데, 나의 어디에 나타나느냐? 마음에 나타납니다. 마음 가장자리가 아니라 마음 깊은 데에 나타납니다. 그것이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나타나면 영원히 갑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이 영원히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나타나는 것이야. 영원히 변치 않아. 천지가 변할지라도 이 공약은 변치 않아 이렇게 자리가 잡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곳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기 때문에 나에게 나타난다면 내 자체의 변하지 않는 마음 터전 위에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 동안 먹는 것도 그 사랑을 위해서 먹고, 자는 것도 그 사랑을 위해서 자고, 활동하는 것도 그 사랑을 위해서 활동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그 사랑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 완전한 기준을 갖고 있는 한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우주의 공약 전부가 헛된 것입니다. 헛되고 사(邪)된 것입니다. 종교고 뭣이고 다 사된 것입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고 영원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 나타나느냐? 보이지 않는 마음에 나타납니다. 그 사랑은 영원한 것이요, 불변․유일․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요동하지 않는 그 마음, 불변하는 내 인격 기준에 나타납니다. 그 마음, 심정을 포괄할 수 있는 마음 바탕이 변하지 않는 기준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납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완전한 마이너스가 있어도 완전한 플러스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의 공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사랑해 주소 그런 말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땅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사랑할 대상이 뭐냐? 4대 조건인데, 하나님과 천사와 만물과 인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사세계의 천사를 사랑하고, 그다음에는 이 땅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그렇게 변하지 않게 될 때는 반드시 하나님도 찾아오고, 천사도 찾아오고, 만물이 웃습니다. 땅보고도 얘기하고, 산보고도 얘기하고, 나무보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늘땅이 품어주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이냐? 마음이 왔다갔다하는 사람이냐? 인심은 조석변이요 산색은 고금동(人心朝夕變 山色古今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심은 조석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천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해가 떠서 낮이 되고, 해가 지면 밤이 되는 천지이치가 변하냐?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일년을 365일로 책정해서 계수(計數)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계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변하면 큰일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높고 넓은 최고 가치의 주인으로서 인간을 관리하고, 인간을 살리기 위한 바탕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점령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은 아들딸이 되면 하나님의 것이 다 내 것이 됩니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 것이 다 내 것입니다.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학교에 다니는 대통령의 아들이 있으면 그 학교의 아이들이나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그에게 속닥거려서 그와 사귀려고 합니다. 그런데 천지에 제일 좋은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누가 싫다고 하겠습니까? 생명을 걸고 따르려고 할 것이고, 생명을 걸고 그에게 주관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위주한 통일이 자연히 벌어집니다. 이것은 강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설명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었다면 사랑이 어떻다는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사랑을 해보지 못한 총각 처녀들한테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해서 그들이 아느냐? 고아에게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니 어떻더라고 아무리 몇천 번 설명한다 해도 모릅니다. 또 부모의 사랑이 어떻다 하는 것은 자식을 낳아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모릅니다. 그저 그렇다더라 하는 것은 아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더라가 그렇다와 같으냐? 그렇다더라는 그렇다와 극과 극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은 이렇다 할 수 있으려면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사랑권, 즉 본연의 자리에서 출발하지 못했습니다. 천사장급 사랑의 자리에서 출발했습니다. 천사장급 사랑도 자기 사랑의 상대를 위해 생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버립니다. 그런데 그보다 차원 높은 본연의 인간의 가치를 알고,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당당히 사랑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이 통하겠느냐? 그걸 체험했다면 하나님이 있느니 없느니 논하는 무골충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고도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아봤는데, 사랑은 이렇다 하는 것을 느껴봤는데, 내 세포의 신경이 그 이상 강한 자극을 느낄 수 없는 자리에서 사랑을 받아봤는데, 그래도 없다고 하겠느냐? 의식기관이 그 무엇보다 강한 의식을 느껴봤는데 그것을 부정하겠느냐?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몸은 맥박이 뛰고 있지만 그 횟수를 세지 않습니다. 가슴에서 망치로 두들기듯 두들기고 있는데, 그 소리가 들리느냐? 파리가 머리카락을 살짝만 스쳐도 느끼는데, 가슴에서 망치로 두들기는 것같이 두들기고 있는데 느끼지 못합니다. 파리가 슬쩍 스치는 것은 느끼면서도 망치로 두들기듯 심장이 고동치는 것은 못 느낍니다. 청진기로 들어보면 쿵딱쿵딱 합니다. 힘의 세기로 보면 그것은 파리가 살짝 스치는 것보다 몇십 배 몇백 배 강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은 느끼지 못하면서도 파리가 스쳐가는 것은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게 조화통입니다.
그 쿵딱쿵딱 하는 맥박의 횟수를 세었다가는 모두 신경병에 걸릴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의식하고 산다면 큰일납니다. 오늘은 이렇게 움직이다가 내일은 살짝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다가는 병이 날 것입니다. 그러니 모르기를 잘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 있는 신경이 안 보이기를 잘했지, 거미줄같이 널려 있는 신경이 작용하는 것을 보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몸은 기계로 말하면 최고의 정밀기계입니다. 수억 개가 되는 부속품이 있는데, 이것이 고장 안 난다고 볼 수 있느냐? 그것이 다 안 보이길 잘했지, 그것이 보인다면 큰일날 것입니다. 심장이 뛰는 것을 모르길 잘했지, 알면 큰일납니다.
그것은 왜 모르느냐? 너무 가깝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이 있는 그 이상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내가 존속하는 생명 감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벽이 되어 있어서 영화 스크린과 같이 반사되어야만 비쳐지는데, 그것을 타고 넘어가 있기 때문에, 그 벽을 돌아가서야 느끼게 되어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도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안 보입니다. 가까워도 안 보이고 멀어도 안 보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을 느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안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면
천사장급 사랑을 가지고도 죽자살자하는데, 아담급 사랑이라면 어느 정도이겠느냐? 아담급 사랑은 어느 만큼일 것이냐? 물이 펄펄 끓는 데에 찬물을 퍼붓거나 얼음을 집어 넣으면 어떻습니까? 팍 소리가 납니다. 뜨거운 데 찬물이 들어오니 좋다고 합니다. 폭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면 어떻게 되느냐? 머리카락도 춤추고 세포도 춤춘다는 것입니다. 1백퍼센트 그 사랑에 취하면 나가자빠지는 것이 아니라 천년 만년 살고지고가 됩니다. 누가 깨우려고 하면 깨우지 말라고 합니다. 요지경 판이 벌어집니다.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차적인 사랑에 취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사람은 취해서 살아야 합니다. 취해서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술가들은 예술에 취해 삽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구상하는 책을 쓴다든가, 어떤 명작에 취해 삽니다.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지백체는 입체적인 하나님의 이상적인 사랑에 취해서 살아야 하고 그분만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외적으로 술 먹고 취하자, 아편 먹고 취하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편보다 못하냐? 하나님의 사랑이 술보다 못하냐? 하나님의 사랑이 꿀단지만 못하냐? 세상의 똥개 같은 짓을 사랑이라고 하면서 그것 가지고도 죽느니 사느니 하고, 사랑은 영원하다느니 어떠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사람이라면 누가 춤을 가르쳐주기 전에 자연히 춤을 추게 되어 있습니다. 주파수만 맞춰서 조종하면 무인 비행기가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놀아나는 대로 놀아나지, 나 싫소 하고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맛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맛이겠느냐? 모든 것을 종합한 최고의 맛입니다. 이 말은 좋아서 쥐면 끝이 없이 쥘 수 있고, 펴면 끝이 없이 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으로는 어디든지 채울 수 있고, 사랑으로는 어디든지 미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껴안으면 어떻습니까, 손을 잡고 아, 사랑한다이럽니까? 아마 눈알이 다 튀어나오고 콧물 입물이 나오도록 껴안아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게 껴안고는 가만히 서 있지 않고 빙빙빙 돕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우주가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한번 취하게 되면, 모든 신경이 하나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데 갈 데가 없습니다. 눈의 세포도, 코의 세포도, 귀의 세포도 거기에 집중되고, 몸의 세포라는 세포는 전부 다 거기에 집중됩니다.
만일 절대적인 하나님이 사랑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온 힘을 다 기울여 사랑을 할 것입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하겠느냐? 아무리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도 이 사랑의 힘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강한 게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참사랑하면 온 신경과 힘을 여기에 집중합니다. 하나님도 거기에는 정신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데도 죽자살자 하며 사랑하는데, 하나님도 그 사랑을 맛보면 죽더라도 요 사랑만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그런 사랑을 할 상대를 찾았다면, 하나님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야단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면 천지가 다 쩌렁쩌렁 할 것이고, 하나님이 그러면 미국도 쾅, 한국도 쾅, 지구가 울탕굴탕 할 것입니다. 이 지구성의 기쁜 날이 어떤 날이냐? 지구의 소원이 뭐겠느냐? 그 사랑의 날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손끝이 닿고 발끝이 닿는 데서 좋아해보고 웃어보는 것이 지구의 소원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통령이라든가 유명한 사람들이 베푸는 만찬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맛을 보면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 한번 참석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미 초청장을 우리가 다 받아 놓고 있습니다. 초청장은 이미 역사시대 이전에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초청장을 받은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만찬에 참석하라고 보낸 초청장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취하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에 취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모래알 하나를 놓고 천년을 들여다봐도 싫증이 안 납니다. 그 기분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자기 손을 들여다보면 손에서 빛이 납니다. 밤에도 혼자 잘 때는 자기가 황금판에 누워 있고, 황금빛을 발하고 자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꿈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디 가서 동산에 올라가면 만물이 노래하며 환영합니다.
또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靈人)들이 따라다니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으면 그 아들딸을 어머니 아버지가 따라가지요? 어머니 아버지가 자기 위신을 버리고 그 아들딸을 따라가고 찾아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권세가 많은 하나님이라도 찾아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자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 수 있는 자리입니다. 거기서 한번 보기 시작하면 눈을 깜박깜박 하는 것이 귀찮을 정도입니다. 그런 세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에 취해서 억천만세를 살 수 있도록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는 게 원수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에서 시작해서 사랑을 갖고 생활하다가 사랑의 열매로 거두어집니다. 죽는 것이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의 사랑을 받았고, 자녀의 사랑을 받았고, 부부의 사랑을 가지고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내적인 사랑의 세계에 뿌린 모든 것을 일생을 거쳐 열매를 맺어서 이것을 거두어 가지고 저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왜 죽느냐? 이 실체를 쓴 몸으로는 제한된 사랑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대의 하나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실권을 갖고 나타나려면 제한된 육신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형(無形)의 영(靈)으로 화(化)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이상을 온 천지에 동일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고통 길이 아니요, 행복한 우주의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 첫 개문(開門)입니다. 죽어가는 시간은 개문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면 모든 것에 기쁨이 충만해
우리가 누구를 만나서 기뻐할 때 무엇을 갖고 기뻐해야 하느냐? 얼굴을 보고 기뻐하기보다 하나님의 사랑, 지금까지 없었던 위대한 사랑을 가지고 기뻐해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은 못 하지만 사랑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주체가 이 우주에 없으면 우주가 빈 것 같고, 집에 없으면 집이 빈 것 같고, 내 속에 없으면 속이 빈 것 같고, 다 빈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꽉 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합니다. 전부가 충만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기쁨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러한 심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 심정을 느꼈다가 없어지면 못 삽니다. 그러니 그 사랑의 주체를 다시 만나야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 가정을 봐도 그렇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어머니를 제일 좋아하는데, 학교에 갔다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막 뛰어 집에 들어가 보니 다른 형제들만 있고 어머니가 없으면 아무도 없네 이럽니다.
이렇듯 사랑의 주체가 없으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사랑의 주체가 있으면 모든 것이 찹니다. 그 사랑이 꽉차야 모든 것이 차기 때문에 무한히 줄 수 있고 참되게 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주고받는 것은 이상의 실현이요, 이상의 번식입니다. 사랑의 세계는 거리를 초월합니다. 사랑이 얼마나 빠르냐 하면 빛도 못 따라갑니다. 제일 빠른 것이 사랑입니다. 제일 밝은 것도 사랑입니다. 제일 완전한 것도 사랑입니다. 제일 완전히 차는 것도 사랑입니다.
어디서 엉뚱한 짓을 하던 사람도 진짜 사랑하는 상대가 나타나면 얼굴에 꽃이 핍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느냐? 사랑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총이 아닙니다. 위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 우주의 주인 되는 사랑, 우주의 중심 되는 사랑, 우주의 원천 되는 사랑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67-166, 20-7, 83-154, 39-220, 59-292, 81-9, 9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