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세계경전 - 제2부 죄와 구원 - 제8장 종교)

무지... | 20180506080639

불교


문선명 선생은 자신의 고향인 한국의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친 불교에 대해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문 선생님은 타락의 수렁에서 참된 본성의 자아를 회복하려는 세계종교의 가르침에서 불교의 가르침, 특히 자기 부정의 실천이 가장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문 선생님은 ‘영점’, 곧 공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참된 깨달음이라고 천명하신다.
  
그러나 문 선생님의 견해에 의하면 불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측면, 즉 인격신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참사랑 이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부처를 가르친 분도 하나님이며 동양에 빛을 주기 위해 불교를 세운 분도 하나님이었다. 모든 종교인들은 불교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데, 특히 그릇된 자아를 극복하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자기 부정의 방법에 대해서 그러하다.

1. 불교의 가치
   
종교 경전 
  
길 가운데 팔정도가 가장 수승하고, 진리 가운데 사성제가 으뜸이라. 덕행 가운데 무욕보다 더한 것은 없으며, 사람 가운데 박은 눈을 가진 이가 가장 뛰어나다.
이것이 하나 뿐인 길이니, 지견을 청정하게 하는 다른 길은 더 없다. 이 길을 따르라. 이것은 악마를 떨게 하리라.
이 길을 따라 가면 괴로움의 끝에 이르리라. 나는 괴로움의 가시 넝쿨을 없애는 법을 알고 이 길을 열어 선언하노라. 법구경 273-275 (불교)
   
머리장식이나 가문이나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실과 정의를 가진 자, 그는 청정하다. 그를 또한 바라문이라 한다.
 
바라문 여인의 태에서 태어나고 바라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지 않는다. 자신의 소유물에 얽매여 있는 자 그는 다른 사람들을 “어르신”이라 불러야 한다. 그러나 아무데도 걸림이 없고 자신에 대한 집착을 여윈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여기 이 세상에서 자신의 괴로움이 다 끝났다는 것을 알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초연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약한 것이든 강한 것이든 살아있는 것에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죽이거나 죽게 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적의 있는 무리 속에 있으나 적의를 품지 않으며 폭력을 쓰는 무리 속에 있으면서도 평온하며 집착하는 자들의 무리 속에 있으면서도 집착을 떨쳐버린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탐욕과 성냄과 오만과 위선이 바늘 끝의 겨자씨처럼 떨어져나간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법구경 393, 396, 402, 405-407 (불교)
   
잘 장식된 왕의 수레도 닳아 없어지고 이 몸도 그와 같이 늙어버리지만 선한 이의 가르침은 시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선한 이는 선한 이들 사이에 그것을 드러낸다. 법구경 151 (불교)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노쇠와 죽음은 재생에 의하여 조건 지어진다.” 비구들이여, 여래들의 출현이 있든지, 또는 그와 같은 출현이 없든지, 사물들의 이와 같은 본질, 즉 이 인과적 위상들, 이 인과적 질서, 저것에 대한 이것의 상관성은 여전히 타당하다. 
상윳타 니카야 2.25 (불교)
  
나는 반야께 경배하노니, 그는 숭앙되어 마땅하도다. 근 무오청정이며, 온 세상도 그를 물들이지 못한다. 그는 빛의 원천이니, 삼계의 모든 이들로부터 어둠을 몰아내며 오탁과 마상으로 일어나는 무명을 거두어 이들을 제도한다. 그 속에서 우리가 귀의처를 찾으며, 비길 데 없는 것이 그의 일이라. 그는 우리가 깨달음의 나래를 얻어 안락에 들게 하며, 눈먼 자에게 빛을 주어 모든 두려움과 고통이 사라지게 하며...
자신의 공생으로 일체 보살의 어머니가 된다. 그는 모든 불법의 보화들을 나누어 주는 이로서 부처의 십력이 일어나게 한다. 그는 부서질 수 없으며, 자신감의 네 기반의 도움으로 돌보는 이 없는 자들을 돌보는 이로다. 그는 생사윤회의 해독제요, 일체법의 본 모습을 여실히 아는 이니, 이들 가운데 길을 잃고 헤매지 않는다. 부처들의 완전한 지혜 반야께서 법륜을 굴리도다. 팔천송반야경 7.1 (불교)
  
말씀 선집 
  
불교 문화권을 형성한 불교는 고대 문명권 내에서 그 환경권 내의 주체 대상의 관계를 중심삼아 인도를 수습하고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왔습니다. 
(144.182, 1986.04.24)
   

  
2. 불자의 각성
   
종교 경전 
  
분투하여 욕망의 흐름을 끊으라. 바라문이여! 욕정을 버리라. 일체법이 멸하여 허망한 것임을 알면 멸함이 없는 아는 자가 되리라. 
법구경 383 (불교)
    
일체법이 우리의 마음에 내재하는 까닭에, 우리가 인도에서 발상된 불교를 보더라도 그 이념은 세계적인 이념입니다. 세계적인 관점을 가지고 현실적인 생활무대를 넘어서서 초자연적인 세계의 이념까지 내포한 종교라야 끝 날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9.279, 1960.06.12)
    
불교를 중심삼고 동양 종교가 있는데 불교가 섭리에 제일 가까운 것입니다. 유교도 있지만, 유교는 주류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이 확실치 않습니다. 그리고 불교에도 영적 세계의 체험이 있기는 하지만 불교에서는 일체법의 논리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 신을 모릅니다. 인격적 신을 모르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유대교를 중심삼은 동양의 종교를 주심삼고 아시아를 통일할 수 있게끔 다 해 놓았습니다. (208.312, 1990.11.21)
   
불교는 신이 있는 것을 가르쳐 주지만 실천의 신보다도 법의 신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격적신에 대해서는.... (53.297, 1972.03.04)
   
석가모니는 모든 이치를 법에 귀일시켰습니다. 법의 대상은 인간의 대상적 관계인 환경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사랑을 표준한 것이 아니라 법을 표준한 것입니다. 그래서 법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산수도를 하며 고독한 생활은 하지만 사랑의 이상세계에 대해서는 역시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50.116, 1971.11.06)
    
진여의 참된 본질을 알지 못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보디삿트바 실라 수트라에 이르기를, “우리 마음의 본바탕은 본래 무구청정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아음을 바로 알아 그 본바탕이 무엇인지 그 실상을 여실히 안다면, 모두가 보리를 얻으리라”하였다.
육조단경 2 (불교)
    
부처 여래는 청정 법계신의 신묘한 몸을 지니는 까닭에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아무 장애 없이 드나든다. 따라서 그대가 부처를 깨달았을 때, 그것은 실로 삼십이 상(相)과 팔십수형호(隨形好)를 지닌 그대의 마음이다. 요컨대, 부처가 되는 것은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아니, 부처는 실로 그대의 마음이다. 모든 부처들의 참되고 원만한 지혜의 바다는 자기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그 원천이 있다. 관무량수경 17 (불교)
    
하늘과 땅에서 오직 나만이 존귀한 자이다. 디가 니카야 2.15 (불교)
  
말씀 선집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 혹은 불교도들이 참선을 통해 무아의 경지를 찾아 들어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요소를 깨우치자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의 기준을 세워, 보고 듣고 느끼는 마음의 중심을 천륜 앞에 세운다면, 하나님 앞에 경배 드리며 할렐루야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193-194, 1957.05.19)
    
불교에는 자성을 밝혀야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석가모니가 말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나한테 물어 보면 나에게 하나님이 들어와 있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밝혀야 됩니다. 마음이 선생보다 나은 것입니다. 마음은 영원한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삿된 마음을 가지기 말라는 것입니다. 공리에 속한, 공된 자리에 선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133.179-180, 1984.07.10)
    
석가모니만 해도 그가 그 신비의 경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말한 것은 정상적인 일반 사람의 생각 가운데서 그런 경지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몸이 공명할 수 있는 어떤 경지에 투입되어 거기서 부딪치는 자아를 각성하게 될 때, 천하의 전부는 ‘야, 내가 제일이구나!’ 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경지의 인식을 통해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141.235, 1986.02.26)
    
하나님은 어디 가서 있어야 되느냐? 자기를 중심삼지 않고 완전히 전체를 위한 제로, ‘왕 제로’가 되는 곳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왕 제로의 자리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려면 여러분들이 ‘제로 포인트’보다 더 낮아져야 됩니다. 그리고 살이 되어서 그 ‘왕 제로’의 자리를 보호할 수 있든지 해야 됩니다. ‘왕 제로’의 자리가 마음의 위치라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살의 위치이기 때문에 그 ‘제로 포인트’를 보호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그 하나님적인 것을 찾기 위해 불교로 말하면 참선이라는 것을 해서 양심이 무엇이냐 하고 마음의 밑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230.134, 1992.05.01)


3. 불교의 지혜
   
종교 경전 
  
수보리여, 참으로 여래가 “나는 법을 설했다”는 생각을 품는다고 말하지 마라. 만일 누가 이와 같이 말하기를 “여래는 법을 설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하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설법’이라고 말하지만, 설법의 이름을 얻을 만한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금강경 21 (불교)
  
여래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 그것이 또한 내 자신이 이룬 것이니, 거기에는 조금의 증감도 있을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자아실현의 세계는 일체의 언설이나 분별에서 자유로우며, 언설의 이원성을 또한 떠나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까닭에 내가 말하기를 여래는 깨달음을 얻은 이래로 적멸 열반에 들기까지 그 동안 한 말이 아무 것도 없으며 영원히 단 한 마디도 하는 법이 없다 하느니라. 능가경 61 (불교)
   
말씀 선집 

동양에 가면 불상이 있는데, 그 불상이 말을 합니까? 불상을 보게 될 때 그 입으로는 말도 안 하고, 욕도 안 하고, 칭찬도 안 하고 ‘쓰윽’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데도 한 곳만 ‘주욱’ 보지, 여기저기 안 보는 것입니다. 보려면 중요한 한 곳만 보면 됐지, 시시하게 잡다한 것은 봐서 뭘 할 것입니까? 금보따리 하난 가지고 그것만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복잡한 세계를 수습하는 최고의 왕이 무엇이냐? 침묵이다 이것입니다. (228.77, 1992.03.15)


출처: http://cafe.daum.net/THEKINGDOMofGOD/Tgm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