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열반(세계경전 - 제2부 죄와 구원 - 제7장 구원, 해방, 각성)

무지... | 20180424091203
공, 열반
 
불교에서 말하는 내적 평화의 궁극적 상태인 공, 즉 열반은 자아, 열정, 그리고 욕망이 없는 상태다. 그것은 사고나 언어, 인식의 어떤 지적 개념도 넘어선 상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공에는 가득함, 담대함,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설명이 불가능한 신비스럽고 놀라운 상태다. 문선명 선생은 공의 상태를 ‘영점’이라고 부른다. 그는 공의 신비로운 느낌을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공허한 공의 상태에계신 하나님과 공명 관계로 설명한다. 문선명선생은 남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비우는 적극적인 방법을 가르친다. 자기를 내주는 것, 남을 위해 사는 것, 주기 어려울 때도 주는 것, 이러한 실천이 명상과 마찬가지로 영점으로 이끌 수 있다. 
 
종교경전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지혜의 눈으로 이 이치를 볼 때 괴로움을 싫어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p.350법구경 279(불교)
 
도를 터득한 인물은 명성을 듣지 않고, 지극한 덕을 지닌 인물은 명성을 지니지 않고, 위대한 인물에게는 자기가 없다. 장자17(도교)
 
이기심이 있는 곳에 그대가 있을 수 없고, 그대 있는 곳에 이기심 없다
아디 그란트, 마루 키 바르, M.1, p.1092(시크교)
 
토라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자와 함께 한다. 탈무드, 소타21b(유대교)
 
높은 천계의 평야는 여기 또는 저기에 있는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어떤 변칙이나 넘침도 없는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의 몸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생각과 열정을 여읜 가슴 속의 상태이다. 인베 마사미치, 신대구결(神代口訣)(신도)
 
이것은 평화요, 이것은 수승한 것, 즉 모든 충동의 적멸, 모든 편견을 벗어버림, 욕망으 소멸, 평정, 멈춤, 열반이다. 앙굿타라 니카야 5.322(불교)
 
사람이 모든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나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을 때, 그는 지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최상의 자유 속에 있다. 그는 거기에 머무르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얻어맞은 불꽃과 같다. 불꽃 속에서 그것은 사라지고 없으며, 더 이상 아무 것도 그것에 관하여 알려질 수 없다. 그것은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난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불꽃 속에서 그는 사라지고 없으며, 아무것도 더 이상 그에 관하여 알려질 수 없다.
 
사람이 사라지고 없을 때, 그대가 그를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에 관하여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거기에 없다. 그대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존재 양태들과 모든 현상이 제거될 때, 모든 형태의 묘사 또한 제거되고 없다
숫타 니파타 1072-1076(불교)
 
이미 세속의 여정을 마치고 근심과 걱정을 떠나 모든 속박을 끊고 자유를 얻은 사람 그에게는 털끝만한 고되도 없다. 마부에 의하여 잘 길들여진 말처럼 모든 감관이 잠잠하고 교만과 번뇌를 끊어버린 사람은 신들조차도 그를 경애한다.
 
대지처럼 너그럽고 잘 수양된 사람은 하를 내는 법이 없다. 그는 마치 흙탕에 휘둘리지 않는 호수같으며 그와 같이 평정심을 지닌 사람에게 윤회는 없다.
 
바른 지혜를 얻도 오명을 여이었으며 완전한 평온과 부동심을 지닌 자 그의 마음은 고요하고 그의 말은 고요하며 그의 행동 또한 고요하다.
 
사특한 믿음 없이 절대를 깨달아 윤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욕망을 버린 사람 그는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법구경90, 94-97(불교)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판단도 또한 그러하다. 사리자여, 이모든 사물은 그 성질이 공하여 셩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판단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고 촉감과 생각의 대상도 없다. 시각의 영역도 없고 의식의 영역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 함까지도 없다.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없어짐,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또한 얻는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반야심경(불교)

남백자규(南伯子葵)가 여우(女優)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이가 많은 데도 얼굴빛이 어린 아이와 같으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여우가 ”나도를 얼었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 남백자규가 ”도는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까?’라고 말하였다.
여우가 대답했다. “아, 어찌 되겠소? 당신은 그런 사람이 못 되오, 복량의(卜梁倚)란 사람은 성인의 재질은 지니고 있었지만, …그에게 도를 가르쳐 주기로 하였소. 사흘이 지나자 천하를 잊게 되었소. 천하를 잊게 된 후에 도를 그대로 지키며 7일이 지나자 만물을 잊게 되었소, 만물을 이지게 된 후 에도 도를 그대로 지키며 9일이 지나자 삶을 잊을 수 있게 되었소. 이미 삶을 잊게 된 후 아침 햇살처럼 밝은 깨달음이 열렸소. 깨달음이 열린 후 유일무이한 도의 경지를 볼 수 있게 되었소. 도를 볼수 있게 된 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잊게 되었소.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초월한 후에는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소. 삶의 욕망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으며, 삶의 욕망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하오. 그는 모든 것을 보내지도 않는 것도 없고, 맞아 들이지 않는 것도 없으며, 파괴하지 않는 것도 없고, 생서시키지 않는 것도 없소. 그런 것을 두고변화 속의 영녕(瓔寧)이라고 하오. 영녕이란 변화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오.” 장자6(도교)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툼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한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움직임을 거쳐 그침으로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 오직 양변에 머룰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건가.
한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추어 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참됨을 구하여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잠시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없느니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p.352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양단을 알고 자 할진댄,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여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좁은 견해로 여우 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지도다.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서, 혼침(昏沈)함이 좋지 않느니라. 좋지 않으면 신기를 괴롭히거늘,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 건가.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동일함이라.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법은 다른 법이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하여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랴.
미혹함은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끼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눈에 만약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으니라.
한결 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만법이 다 현전함에,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그 까닭을 없이하면,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 건가. 구경하고 궁극하여,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여우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며 일체가 멀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돠.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의식과 망정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 재빨리 상응코자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취로 들어옴이라. 종취란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생각이 만년이요.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밥이 바로 눈앞이로다.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만약 이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 되느니라.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마치지 못할까 뭘 걱정하랴. 믿는 마음은 둘 아니요, 둘이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니로다. 승찬, 신심명(불교)
 
말씀선집 

완전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나’라는 개념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279.146, 1996.08.04)
 
몸뚱이를 때려 잡아서 만년 일방통행을 하게 되면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온 것도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한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의 세계, 영의 자리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 되면 못 느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무의 경지에 왜 들어가야 되느냐? 거기서 유의 유를 중심삼고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상대가 나나나 가지고 화합할 수 있는 데서 유를 백 퍼센트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의 경지요, 영점 자리에서라는 것입니다. (256.212, 1994.03.13)

하나님은 왕 제로(Zero)의 자리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려면 dfj분들이 제도 포인트보다 더 낮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살이 되어서 그 왕 제로의 자리를 보호할 수 있든지 해야 됩니다. 왕 제로의 자리가 마음의 위치라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살의 위치이기 Eoas에 그 제로 포인트를 보호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적인 것을 찾기 위해 불교에서는 참선이라는 것을 통해서 양심이 무엇이냐 해서 마음의 밑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230.134, 1992.05.01)
 
인간은 ‘나’라는 주장을 어디서부터 했을까요? 별수 없이 타락한 세계의 미국이면 미국의 백성으로서 교육받은 자기의 역사적인 전통이라든가 국가적 전통을 중심삼고 ‘나’라는 의식을 갖게 된것입니다. 창조이상적인 의시기권 내에 설수 있는 하나님 자신이 내 것, 내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갖고 있는 ‘나’라고 하는 개념은 하나님의 본래 창조이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우리는 자신을 완전 부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개인으로서 완전한 나의 자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자기를 영점에 놓고 자기를 완전 부정하는 길밖에 없스빈다. 그 자리라야 몸과 마음이 완전통일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상태에서 창조를 하셨을 것 같습니까?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된 자리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절대사랑과 절대신앙을 중심삼은 절대투입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이익이나 사정을 생각할 수 있는 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백 퍼센트 주고도 또 주는 위하는 사랑의 시원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나’를 어디서 찾겠습니까? 참사랑을 실천하는 삶에서라야 가능합니다. 자신을 완전히 영점에서 부정하고 가정을 위하고 세계인류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되면‘참된 나’는 자동적으로 찾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귀섭리, 구원섭리의 길을 걷고 있는 인간들의 피하지 못할 운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내세우며 나를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나긴 역사의 뒤안길에서 참된 나를 말하수 있는 자식을 잧아 한에 얽힌 복귀섭리를 해 오신 하나님의 싱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함부모 나를 주장할 수 업는 것입니다 (3.256.298-301,2001.10.21
체휼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흠모하는 그런 입장에 서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되느냐? 이 문제가 문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되느냐? 이 문제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되느냐? 주체가 확정돼 있지만 내가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오관으로 알듯이 그렇다 하는 것을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오관으로 알듯이 그렇다 하는 것을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디서부터 살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그 주체로부터 살필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살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로부터 살펴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 자체를 중심삼고 볼 때, 나라는 존재는 몸과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있는데 몸을 중심삼고는 이것을 살필 수 엇습니다. 결국은 마음을 중심삼고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무리 인간들을 두고 볼 때, 그 마음 자체가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전부 같으냐? 그 바탕은 같을지 모르지만 마음자체는 소성(素性)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하나의 원형을 그린다 하게 되면, 수평선을 그어 가지고 여기서 1도2도 해가지고 쭉 십자를 그음으로 말미암아 360도의 원형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나의 수평선을 긋고 하나의 수직선을 긋는 여기서 90각도의 분별의 도수가 정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우리 마음이 원형과 같은 입장에 있으면 이것을 어떻게 긋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수평선은 긋는 사람에 따라 그 수평선의 형태는 각각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본 성도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0도에서부터 360도를 그어 나가는 데는 반드시 도수는 이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수가 가산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360도 형태와 우리 마음이, 마음 바탕이 이런 원형이라면 그 각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전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우리 얼굴이 다르고 우리 취미가 다르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다른 거와 마찬가리로 그 도수를 그릴 수 있는 평행선과 수직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되어 있으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돼 있고, 그것이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도수를 맞추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영점자리를 찾아야 됩니다. 영점자리가 어디냐? 그것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체에, 그 마음의 심성을 이와 같이 표시하면 반드시 영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점이 있어서 그 영점 자체를 수평선으로 한다면 그 수평선을 중심삼고 어떠한 수직선이 그어질 것입니다. 하늘이 주체라면 그 주체 앞에 내가 대상적인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주체되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대상으로서 감응할 수 있는 바탕을 반드시 주었기 때문에 평면적인 마음 바탕의 기준 앞에 수직으로 향하는 그러한 방향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평선을 보게 된다면, 이것은 평면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이 수직으로 서게 되면 이 수직선의 기준이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점 기준을 어떻게 맞추느냐하는 것입니다. 이쪽으로 가면 반드시 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 영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발전소에 가 보면 미터기가 많이 있습니다. 미터기에 영점 기준과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가감의 조정을 해서 그 방향이라든가 힘이라든가 양의 기준을 잡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영점 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점 기준은 어떤 자리냐?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참선을 하는 사람들이 무아경이라든가 하는 말을 쓰는데 그것도 역시 그런 경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영적 기준에 접근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이 되게 되면 반드시 자기의 수평선 기준이 반응할 수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76.125-127, 197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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