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성 깨달음은 무지의 어둠을 제거하는 것이다. 여러다른 전통에서 궁극적 실재를 인식하는 방법에 따라 깨달음은 내적 지혜의 직관적 파악이거나 말씀의 진리에 의한 조명, 혹은 초월적 실재의 직접적인 이해로 표현될 수 있다. 한편, 잘못된 사고방시과 헛된 욕망으로 모호해진 진리 자체가 깨달음을 통해 서 갑자기 드러나기도 한다. 세상의 삶에 더럽혀져 멀었던 마음의 눈이 참 실재의 광경을 보고 열리게 된다. 깨달은 사람은 그가 얻은 지식에 따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때의 삶은 그 전과 같은 수 없다.
여기엔 진리를 인식하는 이성적 깨달음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마음을 깨닫게 하고 무지의 어둠에서 잃어버렸던 길을 환히 밝혀준다. 문선명 선생은 기독교 전통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전환하여 가르친다.
둘째 문단의 구절은 깨달음을 자아실현,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는 내적 경험, 또는 내면의 하나님 발견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구원의 경험을 기술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보편적인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열리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받기 때문에 영혼을 뒤흔드는 경험일 수 있다. 잘못된 모든 것을 털어냄으로써 깨달은 마음은 신적 마음의 기준과 일치하므로 강력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문선명 선생은 누구나 온전함 또는 완성의 길을 가면서 그런 경험을 체험하도록 촉구한다. 그는 어떤 개명에 의한 지식이나 신앙도 내면의 하나님의 현현을 대체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끝으로, 영적 오관을 열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듣고 감각할 수 있는 무속신아의 깨달음이 있다.
어느누구라도 적절한 훈련을 거치면 이러한 지식과 영적 에너지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
1. 참 진리의 빛 종교경전
그리고 일러 가로되 진리가 도래하고 거짓이 멸망하리라. 실로 거짓은 멸망하리라. 실로 거짓은 멸망하게 되어 있노라. 꾸란 17.81(이슬람)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두움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8.12(기독교)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 옵니다. 시편119.105(기독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8.32(기독교)
거룩한 스승께서 말씀으로 불을 밝히셨도다. 이로써 자아의 신전에 어둠이 걷히고 보화로 가득 찬 놀라운 방이 활짝 열렸도다. 이를 바라보매 우리가 놀라 몸을 떠나니, 그 장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도다. 아디 그란트, 비라발, M.5, p821(시크교)
본성으로 복귀하는 것을 상도라 하고, 상도를 아는 것을 총명이라고 한다. 상도를 모르면 허튼 짓을 저지르고 흉악한 재화를 초래하게 된다. 영원한 상도를 알고 실천하면 관대하게 포용할 수가 있고, 관대하게 포용하면 공평무사하게 되고, 공평무사하면 넓게 두루 통하고, 넓게 두루 통하므로 하늘이라 하겠고, 하늘의 경지는 곧 무위자연의 도이며, 도를 따르니 영구할 수 있으며,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도덕경 16(도교)
스승이시여! 놀랍고도 불가사의합니다. 스승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운 듯하고 감추어진 것을 밝히 드러내 보임과 같고, 길 잃고 방황하는 자에게 길을 일러 주는 것과 같고 어둠 속에 등불을 내다 걸어 눈 있는 자가 삼라만상을 환히 보게 하는 것과 같이, 세존께서는 온갖 방편으로 가르침을 밝혀 주셨습니다. 우다나 49(불교)
그들이 예언자에게 내려진 계시를 들었을 때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가득 차는 것을 너희는 보게 되리라.이는 그들이 진심을 알았기 때문이니라. 그들이 말하기를, 주여, 저희가 믿사오니 저희를 증언자로 기록하여 주시옵소서. 꾸란5.83(이슬람) 말씀선집 타락인간에 있어 앎은 생명의 빛이요 또한 소생의 힘이 된다. 그리고 무지느 s사망의 그늘이요 또한 파멸의 요소인 것이다. 무지에서는 어떤한 정서도 일어날 수 없으며, 무지와 무정서에서는 어떠한 의지도 생길 수 없다.
이렇듯 인간에게 있어 지.정.의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될 때, 거기에 인간다운 인간의 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성에 대하여는 성서를 보아도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서랴. 그러므로 이 새 진리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하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반역하는 타락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구원하시려고 애써 오신 애달픈 심정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원리강론, 총서) 오늘의 세계는 영적인 대 각성이 필요한 때를 맞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세계 모두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새로운 이해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만나 떨어지려고 해도 떨어질 수 없는 본연의 간계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234.241, 1992.08.22)
여러분이 깨고 보면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나서 그 부모를 붙들고 눈물지을 수 있는 그날을 재림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나면 내 앞에는 인류가 6천년 동안 슬퍼한 슬픔을 대신하여 슬퍼하신 참부모님이 계셨다는 것, 나를 찾아 천년을 헤매신 참다운 부모님이 계셨다는 것, 내가 슬퍼하기 전에 나를 대하여 슬퍼하신 하늘이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심정에 사무쳤던 모든 사실이 한날에 전개될 때, 비로소 나는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고 하늘은 나를 대하여 아들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 날이 바로 최후의 깨는 날인 것입니다. 그때는 역사적인 소망의 심정과 그 외의 일체가 내 일신의 가슴 속에 찾아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의 기쁨은 하나님의 전체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기쁨이요, 그때의 감정은 인류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인 것입니다. (6.155, 1959.04.19)
2. 내적 각성 종교경전
브라흐만은 일체만유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니, 그는 행위요 지혜이며 지고선이다. 가슴 속 내밀한 곳에 숨겨진 그를 아는 자, 그는 이 땅에서 무지의 사슬을 끊으리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2.1.10 (힌두교) 심장의 황금 도성에, 부분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랑의 주가 거한다. 그를 빛들의 작렬하는 광선으로 알아라. 태양도 빛나지 않으며, 달도 별도 빛나지 않는다. 번갯불의 섬광도 없고 대지에 불도 붙지 않는다. 주는 모든 것에 의하여 반영된 빛이다. 주가 빛날 때, 모든 것이 그를 따라 빛난다. 문다카 우파니샤드 2.2.10-11 (힌두교)
하나님은 하늘의 땅의 빛이라. 그 빛을 비유하사 벽 위의 등불과 같은 것으로, 그 안에 등불이 있으며, 그 등불은 또한 유리 속에 있도다. 그 유리는 축복받은 올리브기름으로 별처럼 빛나도다. 그것은 동쪽 있는 나무도 아니요 서쪽에 있는 나무도 아니니라. 그 기름은 불이 닿지도 아니하나 더욱 빛나 빛 위에 빛을 더하도다.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는 자를 그 빛으로 인도하시며 사람들 위에 비유를 보이시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심으로 충만하시노라. 꾸란 24.35 (이슬람)
때가 얼룩진 거울이 깨끗해졌을 때 빛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체화된자는 자아의 본질을 보는 순간에 하나로 통일되며, 그의 목표가 성취되며, 슬픔에서 벗어난다.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2.14(힌두교)
품속에 있는 영원한 자아는 이 세계가 그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는 다리요 경계선이, 밤과 낮도 그 경계선을 넘나들지 못하며, 늙음도 죽음도 그 경계선을 가로지르지 못하며, 슬픔도 기쁨도 선행도 악행도 그 경계선을 건너지 못한다. 모든 사악함이 그를 피해 달아 나느니, 그는 모든 악을 여의어 있는 까닭이다.
이런 까닭에 그 경계선을 가로질러 영원한 자아를 서우치한 자는 그가 혹 소경일진대 눈을 뜰 것이며, 그가 혹 큰 상처를 입었을진대 씻은 듯이 나을 것이며, 혹 그가 고뇌 속에 있을 진대 이를 벗어나리라. 그 경계선이 험루어질 때 밤은 낮이 되느니, 브라흐만의 나라는 빛인 까닭이니라. 찬도그야 우파니샤드4.1.2(힌두교)
명이라는 비구가 타이유산 만큼이나 멀리서 육조를 뒤따르고 있었다. 육조께서 명이 오고 있는 것을 알고 바위 위에 가사와 발우를 내려놓고 말하였다. “이 가사는 믿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억지로 빼앗는다고 빼앗아지는 바가 아님을 알라. 만일 그대가 그것을 가져가려 한다면 지금 그것을 취하라.” 명 비구는 그것을 취하려 하였으나 태산같이 무거워 꼼짝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그가 소리쳤다. “저는 법을 구하러 온 것이지 가사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부디 저에게 당신의 드높은 가르침을 내려주소서.”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 순간 비구 명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가?” 이 말은 듣고 비구 명은 문득 깨달음에 들었다. 그의 온 몸이 땀에 흠뻑 젓었다. 그가 흐느껴 경배하며 말하였다. “스승께서 방금 저에게 내리신 신묘한 말씀과 그 신묘한 뜻 이에 이보다 더 깊고 신묘한 것이 있나이까?”육조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대에게 말한 것은 전혀 비밀스런 것이 아니니라. 그대가 자신의 참된 자아를 성찰하게 될 때, 보다 깊고 신묘한 것은 무엇이나 바로 그곳에서 발견되느니라.” 무문관23(불교)
말씀선집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본신이 그릇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든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러분이 딴 것 보고 물어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심에게 물어 보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 귀한 것과 하나 돼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본심과 하나 될 때 자기 일신의 모든 것을 알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전계발이라든가 본심의 마음 문을 맞춰야 된다는 것입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맞춰야 됩니다. 이러한 심전계발이 본성계발인 것입니다. 생활 가운데서 그것을 중심삼고 나가려면 영계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07.216-217, 1998.11.21) 현재 여러분이 대하고 있는 스승이나 그가 가르치는 기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본심을 찾아서 마음의 귀를 통하여 천륜의 부르심을 듣고, 마음의 눈릉 통하여 신성을 보고, 마음의 촉감을 통하여 하늘의 심정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지나온 6천년의 역사과정을 그대로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참으로 귀한 것이 하늘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들의 마음도 그에 못지 않게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상대할 수 있는 높은 가치기준을 세우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고, 마음의 핵심을 찾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천륜앞에 설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날까지 여러분 나름대로 성실한 신앙생활을 해 나왔다고 하겠지만 ‘여러분은 과연 자랑할 무엇을 갖고 있습니까?’ 반문한다면 ‘나는 자랑할 것을 갖고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설혹 여러분들 가운데 하늘 앞에 자랑할 무엇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으 그것을 본심을 통하여 자랑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천륜을 대신하여 영원한 이상을 입증할 수 있는 긍휼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생활한다면, 여러분들은 절대로 어긋날 길을 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흔히 관념적인 세계와 그런 상대로부터 위안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타락했지만 인간들은 본래부터 영원하신 천성과 통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마음 가운데는 창조이상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악을 벗고 완서하여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 무한히 기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 신앙자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 혹은 불교도들이 참선을 통해 무아의 경지를 찾아가는 목적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마음의 핵심이 될수 있는 요소를 깨우치자는 것입니다 (2.192-193, 1957.05.19)
석가모니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은 어디서 가르치느냐? 그 공명의 한 가운데에 들어가면 하나님과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는 천년만년의 역사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모지를 옮겨지는 비참한 인생의 말로를 쳐다보면서, 서로 고민하는 인간의 생애를 되풀이하는 고통의 경지를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하는…. 이것이 각자에게 지워진 숙제입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공명권에 들어가는 훈련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223.357, 1991.11.20) 마음과 몸이 대등하기 때문에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몸둥이를 약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득세해 가지고 약하게 된 몸뚱이를 몇 달 동안 끌고 넘어가게 되면 몸둥이를 다시 올려놓아도 올라올 수 없게 습관화되어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자기가 계획하는 모든 일이 하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잘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냥 놔두어도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양심을 위주로 한 절대적인 자리에서 생애를 엮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 생활의 목적입니다. (38.270-272, 1971.01.08)
3. 제3의 눈이 열림
종교경전
나는 눈이 멀어 이 세상의 사물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위로부터 빛이 올 때 그것은 나의 마음을 깨우친다. 마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나는 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력을 통해 나는 나의 부족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그 중심에 조그만 공간이 있는 하나의 성소인 바, 거기에 위대한 영이 거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눈이다. 이것은 위대한 영의 눈인데, 그것에 의해 그 분은 모든 것을 보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분을 본다. 만일 마음이 순결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위대한 영을 볼 수 없다. 블랙엘크(미주 원주민종교)
깨달음은 무당이 느끼는 신비한 빛으로 이루어진다. 무당은 갑자기 그의 몸에서, 머리에서, 두뇌 속에서, 불가해한 탐색 빛, 빛나는 불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눈을 감고서도, 어둠 속에서 사물과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곧 일어날 사건을 볼 수 있고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당은 미래와 타인의 비밀을 볼 수 있다.
무당 후보자는 그의 오두막집 의자에 앉아서 영혼을 부르며 오랜 시간 기다린 후에 이 신비한 빛을 감지할 수 있다. 그가 그것을 처음으로 경험할 때 그것은 마치 그가 있는 집이 갑자기 일어서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해서 마치 대지가 거대한 평언인 것처럼 그는 산을 꿰뚫고 그이 전면을 멀리 본다. 그래서 그의 눈은 대지의 끝을 볼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더 이상 그에게서 감춰질 수 없다. 그는 멀리 있는 사물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먼 이국에 감춰져 있거나 죽은 자의 땅에 올려지거나 내려 보내진 영혼, 도둑맞은 영혼을 찾아낼 수 있다. 이글룰릭 에스키모족 무당의 가르침(미주 원주민 종교)
말씀선집
성경에 나오는 묵시록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생님이 영계를 알기 때문에 상헌 씨를 영계에 보내서 세계의 사람들을 단시간 내에 복귀하기 위해서 영계의 실상을 보고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실로 믿게 된다면 이 인류는 순식간에 자기의 갈 기릉ㄹ 다 정리하고 고개의 문턱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을 수 있는 본성의 심성이 계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몸 마음이 하나로 공명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육신이 보는 세계밖에 모르고 영계를모릅니다. 오관을 넘어 십관을 계발해 가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직접적인 관계, 참사랑과 관계를 맺어야 공명되지, 자기들 사랑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사랑의 파괴입니다. 어둡습니다. 그 사랑은 하면 할수록 어둠에 묻혀서 절연체가 묻으면 전기가 통하지 않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399.220, 2002.12.24) 타락인간은 종교에 의하여 신련과 진리로써(요4:23) 그의 심령과 지능을 깨우쳐서 그의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여 나간다. 그런데 진리에 있어서도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는 종교에 의한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무지를 타개하는 과학에 의한 외적인 진리의 두 면이 있다. 따라서 지능에도 내적인 진리에 의하여 깨우쳐지는 내적인 지능과 외적인 진리에 의하여 깨우쳐지는 외적인 지능의 두 면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지능은 내적인 진리를 찾아 종교를 tdnj 나아가고, 외적인 지능을 외적인 진리를 찾아서과학을 세워 나가는 것이다.
신령은 무형세계에 관한 사실들이 영적 오관에 의하여 영인체에 영적으로 인식되었다가 이것이다시 육적 오관에 공명되어 생리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진리는 유형세계로부터 직접 인간의 생리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도 영육 양면의 과정을 거쳐서 오개 된다.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이 합해야만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적 과정에 의한 신령과 육적 과정에 의한 진리가 완전히 조화되어 심령과 진능이 아울러 깨우쳐짐으로써, 이 두 과정을 통해 온 양면의 인식이 완전히 일치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피조세계에 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지에 빠진 인간으로 하여금 신령과 진리에 의하여 심령과 지능을 아울러 깨우치게 함으로써,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를 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이러한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을 받아서 그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높아지게 되는 것이므로, 그를 깨우치기 위한 신령과 진리도 또한 점차로 그정도를 높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리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지만, 무지한 상태로부터 점차 복귀되어 나아가는 인간에게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나 방법은 시대를 따라 달리 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