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세계경전 - 2부 죄와 구원 - 6장 악, 죄, 그리고 인간의 타락)

무지... | 20180418081331

고통
     
부처의 사성제 중 첫째는 인간 존재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고통은 잘못된 집착을 통한 자아로부터 생기는 일종의 질병과 같은 인간의 조건이다. 다른 경전처럼 불경은 고통을 이 세상을 뒤덮은 우주적 불이라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힌두교에 의하면 인간은 과거 행위의 결과에 따라 삶과 죽음의 끝없는 순환을 거치게 되어 있다.
         
성서에서 여러 측면에서 불교 경전과 같은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전도서는 인간의 일이 헛되다는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욕망을 다 충족시키는 사람은 없으며, 일단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람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이와 유사한 것이 중국 경전에도 있는데 중국 경전은 사람이 가장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사람의 행동은 격렬해지거나 배반하거나 폭력적으로 끝나게 된다고 기술한다.
       
기독교의 원죄론도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인생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비슷한 견해를 전달하고 있다. 문선명 선생은 끝없는 불행에 빠진 인간 타락에 대해 슬퍼하며 인간 타락이 가져온 결과를 설명한다.
           
1. 슬픔의 세계 
        
종교 경전 
     
고성제란 다음과 같다. 태어남이 고통이요, 늙음이 고통이요, 질병이 고통이요, 죽음이 고통이요, 슬픔과 괴로움과 절망이 또한 고통이라,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것이 고통이요, 원한 있는 이와 만나는 것이 고통이요, 바라는 바가 채워지지 않음이 고통이라. 필경 집착으로 가득한 오온은 본래 고통이라.
상윳타 니카야 56.11 (불교)
          
땅에서 불행이 솟아나는 일 없고 흙에서 재앙이 돋아나는 일도 없으니
재난은 사람이 스스로 빚어내는 것, 불이 불티를 높이 날리는 것과 같다네.
욥기 5.6-7 (기독교)     
     
이 세상은 감관들의 접촉으로 불타오르며 고뇌에 빠져 스스로 한탄하네.
내 것이라 부르는 것은 무엇이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무상하리라.
변하여 다른 것이 되는 것 그것이 만유의 본성인 것을 그러나 그 속에 빠져 즐거워하네.
기쁨 속에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을 품은 것은 무엇이나 고통이라.
우다나 32 (불교)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불타고 있는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눈이 불탄다. 보이는 형상들이 불탄다. 눈으로 짓는 인상이 불탄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감각들은 눈으로 짓는 인상으로 인하여 일어나느니, 그것 또한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는가? 욕망의 불로 타고 증오의 불로 타며 미혹의 불로 탄다. 내가 말하노니, 그것은 태어남으로 불타고 늙음으로 불타며 죽음으로 불타며 슬픔, 비탄, 고통, 고뇌, 낙심으로 불탄다.
       
귀가 불탄다. 소리가 불타며 듣는 의식이 불타며 귀가 짓는 인상이 불탄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감각들이 귀로 짓는 인상으로 인하여 일어나느니, 그것도 또한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는가? 욕망의 불로 타고 증오의 불로 타고 미혹의 불로 불타고 있다. 내가 말하노니, 그것은 태어남으로 불타고 늙음으로 불타며 죽음으로 불타며 슬픔, 비탄, 고통, 고뇌, 낙심으로 불탄다.
       
코가 불탄다. 냄새가 불타고···.
혀가 불탄다. 맛이 불타고···.
몸뚱이가 불탄다. 접촉되는 대상들이 불타고 접촉하는 의식이 불타며 접촉하는 의식이 불타며 접촉하는 감각이 불타며···.
의근이 불탄다. 상념들이 불타고 상념하는 의식이 불타며···. 무엇으로 더불어 불타는가? 욕망의 불로 타고 증오의 불로 타며 미혹의 불로 탄다. 내가 말하노니, 태어남으로 불타고 늙음으로 불타며 죽음으로 불타며 슬픔, 비탄, 고통, 고뇌, 낙심으로 불타고 있느니라.
상윳타 니카야 35.28, 불의 설법 (불교)
     
파리드여,
나는 혼자만이 슬픔을 지녔다고 여겼더니
슬픔은 지천에 널렸도다.
내가 높은 지붕에서 굽어보았거늘
집집마다 슬픔의 불길로 휩싸였도다.
아디 그란트, 샬로크, 파리드, p.1382 (시크교)    
     
말씀 선집 
     
본연의 동산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사망의 세계에 떨어져 흑암과 싸웠사옵고, 원수들의 장중에 사로잡혀 탄식과 절망 가운데 있었사오나 본연의 마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양심을 통하여서는 본연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사옵니다.
(6.291, 1959.06.14)
          
타락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오늘날 어떠한 세계에 처해 있느냐? 행복한 세계가 아닌 불행한 세계에 처해 있고, 기쁨의 세계가 아닌 슬픔의 세계에 처해 있으며, 감사하며 사는 세계가 아니고 원망하며 사는 세계에 처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런 불행한 세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결코 여러분 앞에는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불행한 자신임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빼어낼 수 없는 비통한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탄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증거입니다. 또, 여러분에게는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지요? 이것은 본연의 에덴동산을 향해 나가지 못하도록 사탄이 우리의 마음에 철망을 씌워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생명이 없는 사망의 세계이며, 절망과 암흑의 세계입니다. 인간들은 원래 생의 가치를 노래하면서 살아야 할 입장에 있었고, 생명을 중심삼고 영원한 하나님의 이상과 화동할 수 있었던 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의 이상 앞에 설 수 있는 소망이 끊겨져버린 가운데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246, 1957.06.09)
         
전체가 악에 접할 수 있는 요인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악이 가는 길에서 교육은 필요 없습니다. 교육을 받지 않고도 누구든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악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이기 때문에 교육을 받지 않고도 누구든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의 길을 가게끔 교육할 필요성이 있습니까? 스스로 그렇게 됐기 때문에 오늘날 인륜도덕을 중심삼고 양심의 표준 앞에 가려가라고 교육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중심삼고 교육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교육의 표준에 입각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악한 것은 배우지 않고도 누구든지 다 할 수 있고, 누구든지 다 만점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은 언제나 선하라 하고 마음은 언제나 선한 사람이 되라고 쉬지 않고 나를 자극시키고, 나에게 권고하는데도 불구하고 선한 내가 되었습니까?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오늘도 탄식이요, 내일도 탄식이요, 이 해도 탄식이요, 청춘시대도 탄식이요, 중년시대도 탄식이요, 노년시대도 탄식이니, 탄식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악한 것으로 끝장을 보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36.57, 1970.11.15)
          
인간의 타락으로 역사는 슬픔으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그 출발점에서 가장 슬픈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과 생명과 모든 것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행복과 생명과 모든 것이 인간으로부터 잘려 나가 버리고, 인간은 깊은 절망과 어둠과 불행 속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완전한 절망과 어둠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요, 부모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슬픔이 인간이 느낀 것보다 말할 수 없이 더 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52.36, 1971.12.12)  
     
2. 인생무상
         
종교 경전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전도서 1.2-3 (기독교)
        
주님을 불신하는 자를 비유하사, 그들의 업적이란 폭풍우 치는 날 폭풍에 휘날리는 재와 같으니, 그들이 얻은 것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니라. 진실로 그것은 목표에서 멀리 벗어난 방황이로다. 꾸란 14.18 (이슬람)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향상과 여러 가지 세속적인 것드에 대하여 많이 생각한다. 그러나 달콤한 설탕을 입힌 유혹적인 과자 같은, 그러나 그 속에 지독한 쓴맛으로 가득한 이 부패한 세계에서는 그 어떤 향상도 없다. 그것은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것을 잡으려 해보라.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요가 바시슈타 (힌두교)
         
황금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고 해도 사람의 욕망에 만족은 일어나지 않는다.
법구경 186 (불교)
         
욕망이란 이를 탐닉함에 의해서는 결코 잠잠해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마치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쏟아 부으면 그 불꽃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라.
마누법전 2.94 (힌두교)
          
미혹된 자는 자신의 고통을 삭여내기 어렵나니, 이는 갈애에 꺼들어 음란을 일삼는 까닭이요, 마침내 그는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심한 고뇌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리라. 아차랑가 수트라 2.74 (자이나교)
         
술에 취한 사람처럼 미망의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악령 들린 사람처럼 이리저리 날뛰며, 큰 뱀에게 물린 사람처럼 감각의 대상에 물려 허덕이며, 어두운 밤처럼 격정으로 앞이 캄캄하며, 요술처럼 미혹되고, 꿈처럼 거짓되며, 바나나 속처럼 무기력하며, 광대처럼 찰나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그림 속의 사물처럼 보기에는 그럴싸하다고··· 그들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 마이트리 우파니샤드 4.2 (힌두교)
         
나 설교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으며 하늘 아래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알아보자 지혜를 깨치려고 무척 애를 써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괴로운 일을 주시어 고생이나 시키신다는 것을 알기에 이르렀다.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니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 구부러진 것을 펼 수가 없고, 없는 것을 셀 수 없지 않는가!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왕 노릇 한 어른치고 나만큼 지혜를 깊이 깨친 사람이 없다. 나만큼 인생을 깨쳐 지혜를 얻은 사람이 없다.” 나는 이렇게 자신을 가지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어리석고 얼빠진 일인지 알아보려고 무척 애를 써보았지만, 그것 또한 바람을 잡는 것 같은 일이었다. 어차피 지혜가 많으면 괴로운 일도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도 많아지는 법이다.
         
그래서 향락에 몸을 담가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 보았더니 그것 또한 헛된 일이었다.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았고 누리고 싶은 즐거움을 다 누렸다. 스스로 수고해서 얻은 것을 나는 마음껏 즐겼다. 나는 이렇게 즐기는 것을 수고한 보람으로 알았다.
         
그러나 내가 이 손으로 한 모든 일을 돌이켜보니, 모든 것은 결국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 하늘 아래서 하는 일 가운데 쓸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왕위에 오르는 사람이래야 선왕들이 이미 한 일밖에 더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지혜롭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리석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했다. 빛이 어둠보다 낫듯이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낫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지혜로우면 제 앞이 보이고 어리석으면 어둠속을 헤맨다고 했지만, 그래 보아야 둘 다 같은 운명에 빠진다는 것을 나는 안다.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운명에 빠진다면 무엇 때문에 지혜를 얻으려고 했던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이것도 또한 헛된 일임을 깨달았다.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모든 일은 잊혀지고 말리라.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죽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산다는 일이 싫어졌다. 모든 것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라,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나에게는 괴로움일 뿐이다. 나는 하늘 아래서 애쓰며 수고하는 일이 모두 싫어졌다. 힘껏 애써 얻어 보아야 결국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하는 것, 그것을 물려받아 주무를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 그런데도 내가 하늘 아래서 지혜를 짜고 애를 써서 얻은 것을 물려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라. 나는 하늘 아래서 수고한 모든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고 돌아보기도 싫어졌다.
       
지혜와 지식을 짜내고 재간을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겨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제아무리 애를 태우며 수고해 본들 돌아올 것이 무엇이겠는가? 날마다 낮에는 뼈아프게 일하고 밤에는 마음을 죄어 걱정해 보지만 이 또한 헛된 일이다.
전도서 1.12-2.23 (기독교)
          
위대하신 상제님은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
포악하신 상제님은
그 명령이 편벽되고, 
하늘이 백성을 낳게 하셨으나
그 천명을 믿을 수만은 없어라.
모두가 시작은 좋아도
유종의 미를 거둔 사람은 드물도다. 시경 255 (유교)
        
기교를 가지고 힘겨루기를 하는 사람은 시작할 때는 정당하게 겨루지만 끝에 가서는 음흉하게 수작을 부린다. 그리고 꼭 이기겠다는 경쟁심이 커지면 결국에는 간교한 꾀를 많이 부린다.
예절을 따라 술 마시는 자들도 처음에는 질서정연하게 마시나 끝판에는 난잡해지고 심해지면 이상한 쾌락을 심하게 좇는다. 모든 일도 역시 같다. 처음에는 선량하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야비하게 되고, 처음에 조촐했던 것들이 나중에는 거창하게 확대되게 마련이다.
장자 4 (도교)
       
말씀 선집 
     
인간이 행복을 찾아가는 데는 어떤 행복을 찾아갈 것이냐? ‘인간이 어떤 유형의 행복을 찾아가든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백년밖에 더 되나. 청춘시대라는 것은 한번밖에 없는데 젊을 때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놀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죽는 것이 그럴 듯한 인생이지’ 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했지만, 나중에 가면 모두가 허사입니다.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몇 해 안 가서 모든 것이 다 싫증난다는 것입니다.
(41.144, 1971.02.14)
          
지금까지 종교는 내세를 찾기 위하여 현실을 부정하기에 필사적이었으며, 심령적인 기쁨을 위하여 육신의 행복을 멸시하기에 몸부림쳐 왔다. 그러나 끊어버리려야 끊어버릴 수 없는 현실과, 떼어버리려야 떼어 버릴 수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육신의 행복욕은 끈덕지게 도인들을 붙들어 오뇌의 골짜기로 몰라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인들의 도의 생활에도 이러한 모순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모순성을 지닌 도인생활의 파멸, 이것이 바로 오늘의 종교인들의 생태인 것이다. (원리강론, 총서)
          
우리가 돈을 벌어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죽도록 해 가지고, 20대를 지나서 30대, 40대, 50대, 60대, 한 30년을 노력하지 않으면 백만장자가 될 수 없다고 볼 때, 60대에 가서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60대가 되면 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돈이 좋아서 60세가 되도록 벌어 놓고 보니 은퇴를 해야 됩니다. 은퇴 연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백만장자가 된 입장에서 그 돈더미를 바라볼 때 희망적이겠습니까, 절망적이겠습니까? 과거를 생각할 때, 기가 찬 사실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 놓고 나서 그 돈을 번 그 자체를 가만히 생각할 때, 기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느라고···. 여기서 무슨 대학을 가서 박사가 되고 뭐가 되고 야단을 합니다. 수건을 동여매고, 밥도 잘 못 먹고, 놀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쉬지도 않고 밤을 세워 가면서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땄다고 합시다.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가 되어서 세상에 훌륭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자신을 가만히 보면 비참한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노벨상 수상자가 되고,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좁은 전문분야입니다. 이 넓은 세상 가운데 조그만 굴을 뚫어 그 분야에 대해서 알아 가지고 이 울타리 가운데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전체를 보게 될 때, 자기는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무엇을 안다고 자랑을 하지만 지극히 작은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안다는 것, 지식이 인간에게 행복을 갖다 주고 인간에게 안일을 갖다 주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하여 학교에 들어가서 유명한 교수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같이 분필이나 잡고 무얼 쓰고, 무얼 맡고 이러고 일생 동안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필 가루를 먹으면서 큰소리를 쳤지만 그 분야에서나 큰 소리를 하지, 세계에 무슨 영향을 미치고, 대번에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 그런 건 하나도 모릅니다. 세계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의 뜻이니 뭐니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의 뜻이니 뭐니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보다 더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지식이 있다고 해도 일생 동안 그저 책벌레로, 자기에 대해서 자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 누가 그 분야에서 말 한마디 하면 그걸 주어다 모아서 또 비교 연구하고, 그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주장했다는 게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또 유명한 학자가 됐으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거기에 내 생명을 투입하고 내 전체를 투입하기에는 너무나 아깝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권력입니다. 어느 누구나 이 나라의 대통령이 한번 되었으면 하고 꿈을 꾸지요? 무엇이 한번 되었으면 하고 꿈을 꿉니다. 권력, 힘, 그런 힘을 쥐어 봤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게 만년을 갑니까? 여기 미국 대통령은 4년 동안 권력을 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과정에서 눈을 한번 깜박이는 것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먹고, 춤을 추고, 뭐가 어떻고, 그거 미치광이 같은 기분이라는 것입니다. 좋다고 해도 한번 거기서 딱 끝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가 찾아와 가지고 그것을 알아줍니까? 도리어 평민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98.82-85, 1978.04.30) 


3. 눈물의 길
        
종교 경전 
     
키사 고타미라는 여인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가 죽었다. 슬픔에 젖은 그녀는 아들을 안고 온 이웃을 다니며 약을 구하러 쫓아 다녔다. 사람들이 말했다. “아이는 이미 죽었는데, 저 여인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
       
마침내 키사 고타미 여인이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나는 당신에게 아이를 낫게 할 약을 줄 수는 없소.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있는 의사를 내가 아오. 샤캬무니 부처를 찾아가시오.”
     
키사 고타미는 부처에게 매달려 울부짖으며 간청하였다. “주여! 스승이시여! 내 아들을 낫게 할 약을 내려주소서”
부처께서 대답하셨다. “나에게 한 웅큼의 겨자씨를 가져다 주시오.” 여인이 기뻐하며 그것을 마련해 오마고 대답하자, 부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겨자씨는 아들이나 남편 또는 부모나 친구 중 아무도 잃은 자가 없는 집에서 가져와야 하오.”
        
불쌍한 키사 고타미는 겨자씨를 구하러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녀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말했다. “자, 여기 겨자씨가 있소, 가져가시오.” 그러나 그녀가 “당신 집에서는 아들딸이나 부모형제를 잃은 적이 없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이 그녀에게 대답하였다. “아! 살아있는 자는 오히려 드물며 죽은 자가 많으오. 부디 뼈에 사무치는 우리의 슬픔을 상기시키지 말고 가시오.”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지 않은 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키사 고타미는 지치고 낙심하여 어두운 길을 가다가 어느 언덕에 주저앉았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에는 가가호호 등불이 켜지다가 점점 꺼져갔다. 마침내 온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그녀는 문득 사람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켜졌다가 다시 꺼지는 등불처럼, 왔다가는 필경 돌아가야 하는 운명임을 깨달았다. “슬픔에 잠긴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죽음에 예외가 없거늘, 이 황량한 골짜기에 온갖 이기심에 찌든 이를 불멸로 인도하는 길이 있거늘.”
       
아들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을 훌훌 털어버린 키사 고타미는 죽은 아들을 숲속에 묻고 부처께로 다시 돌아갔다. 그에게 귀의하여 마침내 법 안에서 평안을 찾았다.
붓다고사, 겨자씨의 비유 (불교)
 
말씀 선집 
     
눈물의 역사의 기원을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하면, 그것은 어디서부터 시작했겠습니까? 타락하게 될 때 아담 해와가 먼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흘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 해와가 눈물을 흘린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 게 아니라 자기들의 슬픈 사정을 중심삼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흘린 눈물은 누구를 위해 흘렸겠습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천도를 어김으로써 추방당해야 할 그런 운명에 처하게 된, 자식된 아담 해와를 바라보며 흘린 눈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위해 흘린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자식을 위해 흘린 눈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그 자체는 비참한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그 자체는 비참한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눈물의 역사가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도 눈물의 시작을 먼저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게 될 때 인간도 비참한 것이요, 하나님도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흘리는 눈물은 인간 자신에게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건 응당 흘려야 할 눈물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눈물의 역사는 인류의 시조로부터 시작되어서 눈물의 발판은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나왔습니다. 그러한 비참한 자리에서 전쟁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가 반복하면서 역사는 발전되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개인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받아서 눈물을 흘리는 역사로부터 가정이 피해 받고, 민족이 피해 받고, 세계가 피해 받아 눈물을 흘리는 역사가 거듭된다는 것입니다. 
      
눈물의 역사를 걷어치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슬퍼하고, 자기 가정을 위하여, 자기 민족을 위하여, 자기 국가를 위하여, 자기 세계를 위하여 슬퍼하고 난 이후에야 새로운 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있지, 이것을 위해 슬퍼하지 않고는 선의 세계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타락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세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면 세계적인 입장에서 맨 밑창에 떨어진 인간이 이것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가야 됩니까? 그러려면 이 세계의 사람들은 자기들을 중심삼고, 자기 일이라든가 자기 가정이라든가 자기 국가라든가 혹은 자기의 주의와 주장을 중심삼고 슬퍼하는데 이 세상을 극복해 나가야 됩니다. 반대로 가야 됩니다. 반대의 길을 가야 되는 것은 틀림없는 결론입니다. 이처럼 인류의 정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항상 눈물에 젖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대적인 입장에서 슬퍼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인간이 행복한 곳은 어디입니까? 자신이 눈물을 극복하는 길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여 넘어간 자리에 행복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류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눈물의 역사를 하나님과 인간이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는 눈물이 시작하지 않았던 자리이니 우리는 이 모든 눈물의 세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을 초월해서 넘어가지 않고는 행복의 기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그 입장을 극복해서 우리는 전진해야 하고, 이 슬픈 눈물의 고개, 이 인간의 눈물의 고개뿐만 아니라 하늘이 흘린 눈물의 고개를 넘어가야 할 운명이 오늘날 인간이 가야 할 운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두 종류의 눈물의 고개를 다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불쌍하냐 하는 이런 고통의 와중에서 스스로 몸부림치며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그러므로 남이 모르는 가운데 인생문제라든가 자기의 일생의 문제를 중심삼고, 이 사회 문제, 전체의 문제를 걸고 고민하고 눈물을 흘리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고,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스스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 시대에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고민도 하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인생의 축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눈물을 극복함과 동시에 이 세계의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을 극복시킬 수 있는 길이 없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자기 스스로 인생문제를 고민하고 이 세계문제를 고민해서 눈물을 흘린다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근원을 뒤집어 놓아야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슬픈 눈물을 흘린 고비뿐만 아니라, 세계가 눈물 흘렸던 고비뿐만 아니라, 세계가 눈물 흘렸던 고비뿐만 아니라, 하늘이 눈물을 흘렸던 고비를 돌려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돌려놓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되 자기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자기 편, 자기를 중심삼고 눈물을 흘리는 역사를 가지고는 새로운 이상세계로 전진하는 데 아무런 보탬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타락한 아담 해와 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여기서 하늘이 슬퍼했던 또 다른 하나의 영역을 우리는 발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눈물을 흘렸다면 인간이 하늘이 흘린 눈물의 경지를 넘어가지 않고는 인류의 행복의 기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넘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길을 발견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이라는 주체를 발견하고 그가 눈물을 흘렸던 그 경지 이상의 곳을 내가 탐지하여 그런 곳을 가겠다고 하는 욕망을 지녀야 됩니다.
(94.306-310, 1977.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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