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투쟁
현실적 인간은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내적 충돌 현상에 직면해 있다. 인간이 이러한 내적 모순에 사로잡혀 있는 한, 신성적 자아를 실현할 수 없으며 온전한 상태를 이룰 수도 없다. 역설적으로 세속의 삶에 빠진 인간은 뚜렷한 죄의식을 제외하고는 그들 내부의 싸움을 감지하지 못한 채 살아 갈 것이다. 반면, 양심적인 삶이나 종교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문선명 선생은 인간의 내적 모순은 인간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가르친다. 그는 하나님이 그런 모순을 가진 인간을 창조할 리가 없으며,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선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인간도 완성을 이룰 희망조차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간의 내적 모순은 타락으로 인해 인간성이 왜곡됐다는 증거다. 타락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투쟁도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종교 경전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내가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장본인은 나 자신이라기보다는 내 안에 있는 죄일 것입니다.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욕은 내게 있으나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행한다면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선을 행하려는 내게 악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있으나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가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 7.15-24 (기독교)
나는 무엇이 선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것을 애써 행하지 않으며,
무엇이 악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또한 그것을 금하려 하지 않도다.
마치 내 가슴에 어떤 거룩한 혼이 있어 나를 내몰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언제나 그렇게 행하느니
오호라, 나는 몹쓸 사람이로다. 마하바라타 (힌두교)
랍비 이삭이 말하였다. “사람이 악으로 기울기 쉬운 경향은 날마다 새로운 변화를 가지면서 사람을 괴롭힌다. 그래서 성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 된 생각만 하였다.’ ”(창세기 6:5). 그리고 레위의 아들인 랍비 시므온은 이렇게 말하였다. “악을 지향하는 마음은 날마다 사람에 대하여 항거할 강력한 힘을 모은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려고 애를 쓴다. 만약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악을 행하는 세력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분께 큰 축복이 있기를.”
탈무드, 키두신 30b(유대교)
천신, 인간, 아수라, 야차, 건달마, 그리고 일체의 중생들이 시기와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에, 비록 그들이 “우리가 의좋게 미워하지 않으며 해치거나 악의를 품는 일 없이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할지라도, 여전히 증오와 악의와 원한에 찬 마음으로 살아갈 뿐이다.
디가 니카야 2.276 (불교)
모든 사악은 목에 채워진 쇠사슬과 다르지 않다.
아디 그란트, 소라트, M.1, (시크교)
적과 적이 서로 치고받으며 싸우고 원수끼리 물어뜯으며 싸운다 해도 사악한 마음이 저지르는 해악보다는 그래도 덜하다. 법구경 42 (불교)
실로 하나님은 조금도 인간을 잘못되게 하지 않으시나 인간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도다.
꾸란 10.44 (이슬람)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마태복음 26.41 (기독교)
자신의 영원한 실재를 알고
자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기의 벗이며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기의 적인 까닭이다.
드높은 자아로 자기를 정복할 때
친구로서의 자아를 지니지만,
만일 스스로 영원한 자아의 실재를 그칠 때
자아는 실로 적과 같이 대항해 오리라. 바가바드기타 6.5-6 (힌두교)
예언자가 선포했다. “우리는 작은 성전(聖戰, 알지하드 알-아스가르)에서 큰 성전(알 지하드 알-아크바르)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하나님의 예언자시여, 무엇이 더 큰 성전입니까?‘ 하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약한 자신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니라.“
말씀 선집
사람은 본래 악을 피하고 선을 추구해 나가고자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선한 세계를 세우고 악한 세계를 제거하기 위하여 언제나 달려가고 있지만, 그 반면 내 자신 속에서 악한 마음이 선한 마음을 향하여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우리가 잘 느끼고 있습니다. 선한 마음을 강하게 들고 나오면 나올 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악한 마음이 언제나 대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6.51, 1970.11.15)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질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욕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본의를 흐려서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그 욕망이 선보다도 악으로 나아가기 쉬운 생활환경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를 맺는 욕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심은 이러한 욕망이 자신을 불행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악을 지향하려는 욕망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욕망을 따라,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본심이 지향하는 욕망을 따라 선을 이루려는 몸부림을 치는 것이 바로 도인들의 생활이지만,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 본심대로만 살다 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0-11) 라고 하였으며, 또 인간의 이러한 참경에 직면하였던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2-24)라고 개탄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선한 욕망을 성취하려는 본심의 지향성과 이것과는 반대로 악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사심의 지향성이, 동일한 개체 속에서 각기 상반된 목적을 앞세우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간의 모순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내에 모순성을 갖게 될 때에는 파멸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모순성을 가지게 된 인간 자체는 바로 파멸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모순성은 당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존재도 모순성을 내포하고서 생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러한 모순성을 지닌 운명적인 존재였다면 애당초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모순성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파멸상태를 일컬어 기독교에서는 타락이라고 한다.
(원리강론, 총서)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마음입니다. 양심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하늘의 의를 위해 존재합니다. 양심은 항상 선을 향해 달리려 합니다.여기에 몸은 반항을 합니다. 몸은 자기만 편하고자 하고, 이기적이며, 본능적 요구에 따라 욕망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양심은 이 몸을 질책하여 마음에 순응케 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항상 피나는 갈등과 투쟁이 한 몸 안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219.118, 1991.08.28)
지금 우리의 생명의 씨를 어디서 받았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받았습니까, 사탄에게서 받았습니까? 사탄에게서 받았다는 것을 어느 눅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심은 사탄의 씨가 아니라 본연의 이상적인 생명의 씨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상충이 벌어졌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 편에 서고 몸뚱이는 사탄 편에 서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몸 마음의 통일을 가져오지 않는 한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235.203, 1999.09.20)
인류역사에 종교가 필요하다면 그 종교로 말미암아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육신을 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역사가 망했고, 육신으로 말미암아 사회가 망했고, 육신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육신은 원수의 모태요, 죄악의 근본 뿌리라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18.322, 1967.08.13)
나, 나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수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과 몸이 하나 못 된 것이 원수입니다. (128.108, 1983.06.05)
이 몸뚱이는 사탄의 무대가 되어 있습니다. 몸뚱이는 사탄의 무도장이 되어 있고, 마음은 하나님의 무도장이 되어 있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몸 마음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혈통을 중심삼고 자연히 하나 되는 것입니다.
(235.203, 1992.09.20)
대부분의 종교가 인간 삶에서 무지를 악의 근원의 하나라고 여긴다. 하나님과 인생의 목적에 대해 무지하면 인간 가치에 혼동을 야기하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모든 형태의 방종과 부도덕의 근원이라고 가르쳤다. 이슬람에서는 ‘알라를 망각’ 하면 사람들이 인생행로에서 벗어나고 영혼을 잃게 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무지가 자아를 미망으로 이끌고 결국 망상(모하)을 갖게 한다고 가르친다. 많은 경전들이 세속적 삶을 오염시키는 환상적 목표와 허영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사람이 지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철학을 접하게 되는데, 분명히 말해서 어떤 철학도 진리를 완벽하게 밝히지 못한다. 타당한 통찰이라도 잘못된 견해가 섞여 있어서 가치의 혼란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고, 회의주의와 무신론으로 이끄는 경우도 있다. 문선명 선생에 의하면 이는 인간 타락에서 유래한 근본적 무지의 결과다. 공산주의와 투쟁을 해온 20세기 선각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특히 이런 현대적 형태의 무지인 공산주의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여기의 결론 부분의 구절들은 인간의 영적 무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 구절들에서 무지는 통찰력을 흐리게 하는 가리개로 묘사한다. 부처는 나방이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것처럼 사람들이 이 세상의 환상적 허무에 빠져든다는 비유를 사용하였다.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는 이러한 무지(아비댜)는 사람들을 생과 사의 수레바퀴(삼사라)에 묶이게 하며 궁극적 실재를 찾는 대신 쾌락을 추구하게 한다고 가르친다.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는 이 주제에 대해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문선명 선생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만연한 무지는 인간을 영적 진리에 눈멀게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알 수 없게 한다고 말한다.
1. 하나님에 관한 무지
종교 경전
하나님을 망각하는 자들처럼 되지 말라. 만일 그리하면 그분은 그들 자신의 영혼을 망각하도록 하느니라. 꾸란 59.19 (이슬람)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지 않고 감사도 드리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허황하여 그 분간 없는 마음이 어두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는 자라고 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자가 되어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발 가진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 욕정대로 서로 자기들의 몸을 욕되게 하며 더럽히는 것을 그들의 자유에 맡겨 두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숭배하며 섬겼습니다. 그러나 영원하도록 찬송을 받으실 분은 창조주 뿐입니다. 로마서 1.21-25(기독교)
어리석은 자들, 제 속으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들 하면서, 썩은 일, 추한 일에 모두 빠져서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여호와, 하늘에서 세상을 굽어보시며 혹시나 슬기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 찾는 자 혹시라도 있는지 이러저리 두루 살피시지만 모두들 딴길 찾아 벗어나서 한결같이 썩은 일에 마음 모두어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언제나 깨달으랴, 저 악한들.
떡 먹듯 나의 백성 집어삼키고 하나님은 부르지도 않는구나.
시편 14.1-4 (기독교)
누구든지 다른 이에 대하여 악을 행하려는 자는 신을 기억하지 않는다.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하늘을 알지 못하는 자는 덕에 대해서도 순수하지 못하다. 도에 통달하지 못한 자는 어떤 일도 잘 하지 못한다. 도를 알지 못하는 자는 불쌍하구나!
장자 11 (도교)
하나님을 부정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감히 거짓말을 못할 것이다. 안식일에 랍비 르우벤이 티베리아에 있을 때 한 철학자가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스런 사람은 누구입니까?” 랍비 루우벤이 대답하였다. “창조주를 부정하는 사람이다.” 철학자가 “어째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랍비 르우벤이 대답하였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결코 살인하지 않을 것이며, 간음하지 않을 것이며,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에게 거짓 증언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기 전에 이러한 십계명을 부정하는 자는 결코 없는 법이다. 십계명의 내용과 같은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는 자는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토세프타 셰부오트 3.6 (유대교)
악귀적인 사람은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은 하며,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순결도 선행도 진리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도 천칙도 도덕이나 윤리도 없다. 육적 쾌락이야말로 인생의 전부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견해를 고집하면서 미망에 빠진자들은 보잘것없는 지혜로써 악한 마음으로 잔인한 행위들을 일삼으니 그들은 결국 세상을 파멸시키는 세상의 적이 된다.
위선과 자만, 그리고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미망 속에 살며, 채워질 줄 모르는 욕망을 좇아 부정한 목적으로 만사를 행한다. 오직 죽음으로써 끝이 날 한없는 근심에 자신을 맡기고서도 욕망의 충족을 최고로 삼아 이것뿐이라고 확신한다.
온갖 음모와 근심의 사슬에 얽매이고 노여움과 탐욕에 이끌리여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부정한 수단으로 재물을 쌓으려 애쓴다.
그들은 말한다. “오늘은 이것을 얻었고 내일은 저것을 얻으리라. 이것은 내 것이며 저것도 또한 내 것이 되리라. 저 적은 내가 멸하였고 다른 적들도 또한 멸하리라! 나는 신과 같지 않은가?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도다. 나는 성공한 자요 강한 자니 행복한 자로다. 나는 부자이며 고귀한 사람이니, 나와 견줄 자 감히 누군가? 나는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칠 것이며 자선을 베풀리라.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의 관용을 즐기리라.” 무지에 의해 미혹된 자들의 행위는 이러하다. 자신의 탐욕에 얽매이고 미망의 그물에 걸려 육욕을 탐닉하는 그들은 어두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리라.
바가바드기타 16.7-16 (힌두교)
말씀 선집
지금까지의 출발 기준이 무지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창조이상이라든가 인간의 정착 기지가 가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으로부터 세계까지 엉망진창으로 되어 있습니다.
(325.220, 2000.07.01)
일반인들에게는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먹느냐, 어떻게 차리고 사느냐 하는 문제, 이것이 중심입니다. 물론 인간관계에서 인륜도덕에서 서로가 발전하고 좋을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민족과 국가와 세계의 문화 배경의 차이에 따라서 도덕 기준이라든가 사회제도가 전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된다면 오늘날 역사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가야 할 본연의 기준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표준으로 세워 나가는 인륜 도덕들이 여러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로 수습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본래 인간이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살다가 본래의 갈 길, 본연의 세계에 근거해서 우리가 태어나 가지고 살다가 가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이것이 확실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영계가 있는지 없는지,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140.122-123, 1986.02.09)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고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다 보니, 그들이 세워 놓은 이상적 환경에서 죽기 전에 누구보다도 잘살아 보고 싶은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세계적인 환경에서 행동을 해보고, 한번 관계를 맺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향락에 떨어지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윤리, 도덕 등 모든 것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가치관의 상실이라는 것도 유만부동이지, 역사적 전통까지도 거부하고, 가정의 부모와 형제 부부라는 가정제도까지 전부 파탄시켜 놓았습니다. 모두 개인적 향락을 위해 모든 상대적 여건을 제거시키고 있습니다. 개인의 향락을 즐기려는 데 부모가 있어서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향락의 길을 걸어가려는데 그 여편네가 있어서 반대하니 여편네를 얻지 않는 것입니다. 전부 다 하루하루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172.15-16, 1988.01.03)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지향하는 하나의 목적세계, 하나의 이상세계를 실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그와 같이 모르는 자리에서 타락한 선조를 중심삼고 대를 이어 태어난 인간들이기 때문에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140.14, 1986.02.01)
인간이 타락을 지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무지에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과 몸의 내외 양면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지적인 면에 있어서도 내외 양면의 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지에도 내적인 무지와 외적인 무지의 두 가지가 있게 된다. 내적인 무지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생의 목적은 무엇이며,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내세와 하나님에 대한 존재 여부, 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무지이다. 그리고 외적인 무지란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자연계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물질세계의 근본은 무엇이며, 그 모든 현상은 각각 어떠한 법칙에 의하여 일어나는가 하는 것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원리강론, 총서)
영적인 무지는 종교로써 타락인간 가운데 잠재해 있는 그 본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이 보이지 않는 원인적인 세계를 찾아 나아감에 따라 점차 일깨워져 왔다. 그러나 종교는 누구나가 다 긴절한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면의 계발은 어느 특수한 인간에 있어서는 비약적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대단히 완만한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오늘에 있어서도, 영적인 면에서는 고대인이나 대차 없는 인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원리강론,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연장시대 7.2.2)
미국에 와서 놀란 것은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 제기랄)’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쁜 말을 할 때나 놀랄 때나 욕할 때 ‘지저스 크라이스트!’ 하는데 그것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복 준다는 말입니까, 화 준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생각과 자기들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젊은 놈들은 전부 연애하고 성개방이니 뭐니 해가지고 마음대로 놀고 싶은데 하나님은 안 된다고 하니 좋아하지 않습니다.
(91.22, 1977.01.16)
2. 잘못된 견해
종교 경전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아!
이사야 5.20 (기독교)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릇된 소견을 지닌 자들은 죽어 악도에 떨어진다.
두려울 것 없는데 두려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바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릇된 소견을 지닌 자들은 죽어 악도에 떨어진다.
잘못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잘못이 있는데 없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소견을 지닌 자들은 죽어 악도에 떨어진다. 법구경 316-318 (불교)
도가 없어지자 후에 덕이 있게 되었고,
덕이 없어지자 후에 인이 있게 되었고,
인이 없어지자 후에 의가 있게 되었고,
의가 없어지자 후에 예가 있게 되었고,
예는 충과 신이 희박해져서 나타난 것이며, 모든 혼란의 시초이다.
도덕경 38 (도교)
말씀 선집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성서를 보아도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서랴. (원리강론, 총서)
인간이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살아야 하고, 일일의 생활을 주도 받아야 할 입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혹은 ‘결정적으로 하나님이 없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죽었다. 우리 인간세계에서 하나님을 쓸어 버려야 되겠다’ 고 하는 비참한 역사적인 환경이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계에 전개되어 왔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만들었습니까, 우리 인간이 만들었습니까?
(135.268, 1985.12.15)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심각한 문제점들, 가치 체계의 혼란, 도덕적 퇴폐, 마약과 테러, 전쟁과 대량학살, 인종문제, 인권과 부의 균배문제, 무신론에 입각한 공산주의 문제 등등 수많은 병폐들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신을 떠난 인류가 무신론에 입각한 물본주의(物本主義), 무신론에 입각한 세속적인 인본주의, 향략주의 등에 편승하여 당도한 세기말적인 종착점입니다. 이 모두는 이 세대의 정신적·영적 고갈과 신앙심의 쇠퇴에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135.221, 1985.11.16)
나는 인본주의를 송두리째 배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인본주의가 철저한 무신론에 입각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창조주의 창조의 의의가 부인되면 인간은 한줌의 흙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기껏해야 인간은 하나의 기계로 간주될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범한 오류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도 없으니 인간은 기계나 동물과 다를 바 없고, 거기에 도덕이 있을 수 없고, 영혼이나 영생을 인정하지 않으니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무책임해지고,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갖은 포학을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34.232, 1992.08.22)
3. 영적 무분별과 환상
종교 경전
불신자들은··· 넓고 깊은 바다의 암흑 속에 심연과 같으니라. 파도 위에 파도가 그 위를 덮으며, 구름이 덮이고 암흑의 층이 겹치도다. 그가 손을 내밀어도 그것을 볼 수 없나니,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지 못한 자, 그에게는 아무런 빛도 없느니라.
꾸란 24.40 (이슬람)
이 세상은 깜깜한 어둠 속과 같아 여기서 명료하게 가려보고 아는 이가 드물다. 그물에서 벗어나는 새가 드물 듯이 천상에 오르는 이가 심히 적다. 법구경 174 (불교)
이 광대무변한 우주는 하나의 수레바퀴, 브라흐만의 수레바퀴라. 생사윤회 하는 일체만유가 그 위에 있나니, 돌고 돌아 멈추어 서지 않도다. 개아가 스스로 주에게서 떨어져 있다고 여기는 한, 생사 윤회의 사슬에 얽매여 영원히 그 수레바퀴를 돌고 돌 것이니라.
무상한 것과 영원한 것, 나타나 보이는 것과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진 이 우주를 강대한 주가 지탱하고 있나니, 개아는 주를 망각한 채 쾌락을 탐하여 속박 속에 있도다.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 1.6-8 (힌두교)
어느 때 세존께서 사밧티 교외의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 동산에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먹을 뿌린 듯 어두운 가운데 등불이 타오르는 곳에 앉아 계셨다. 온갖 부나비들이 타오르는 등불 속에 날아들어 몸을 태워 죽으며 다시없는 재난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시던 세존께서 그 속에 담긴 뜻을 헤아려 아시고 이러한 우다나를 노래하셨다.
사람들이 허둥대며 휙휙 지나가지만
그 본질에 이르지는 못하네.
점점 새로운 속박을 더할 뿐
등불에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뛰어드는구나. 우디나 72 (불교)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럽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생각과 양심까지도 다 더러워졌습니다.
디도서 1.15(기독교)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신이 그들의 생각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까닭입니다.
고린도후서 4.4 (기독교)
어둠 속에 살고 있지만 스스로 지혜롭고 박식하다고 생각하는 바보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 온통 비뚫어지고 그릇된 길을 따라 끝없이 돌고 도는구나.
카타 우파니샤드 1.2.5 (힌두교)
말씀 선집
여러분 중에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절망의 구렁 가운데 사로잡힌 자가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상세계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또, 흑암 속에서 상하, 전후,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고, 무질서한 혼미와 와중에서 중심을 망각하며 천륜의 법도를 유린하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도 역시 천성의 이상동산과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2.246-247, 1957.06.09)
천지가 캄캄해지고 지옥으로 변해 버려 하나님까지도 없어져 버린 처절한 세계가 되어 버린 사실은 인간은 지금까지도 모르고 살아온 것입니다. 원수의 핏줄이 생명선인 줄 착각하고 거기에 목을 걸고 살아가는 군상들이 오늘 타락의 후예 된 인류의 처량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지상지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비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가슴이 얼마나 비통하셨겠습니까?
(평화신경, 평화메시지 1.18, 2005.09.12)
60억 인류가 청맹과니가 되어 한 치 앞을 못 보면서도 하늘의 진리를 놓고는 모두가 분명하지 못한 철학자나 신학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가슴에 한을 심어 나온 역사였습니다.
(447.165-166, 2004.05.01)
불행하게도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영적 오관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면서 살고, 육적 오관을 통해서는 만물을 자유자재로 주관하며 동시에 영계와 육계를 대표한 참된 주인이요, 참된 부모요, 참된 왕이 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으로 인해 영적 오관이 완전히 마비가 되어 버린 청맹과니의 입장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육적 오관에만 의지하고 살아야 할 반쪽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모되는 하나님을 볼 수도, 음성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게 되었으니 어찌 부모의 사랑을 알 수 있으며, 사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433.193, 2004.01.27)
인간들에 있어서 가장 큰 슬픔은 아버지의 사랑과 인연 맺지 못한 것이요,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본연의 양심을 잃어버린 것이며, 그 심정과 양심이 화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이 화합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한 것임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타락한 연고로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감각이 저희에게서 떠나갔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여 만상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저희들에게서 없어졌사오니, 아버지, 그 심정을 회복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6.298-299, 1959.06.14)
출처: http://cafe.daum.net/THEKINGDOMofGOD/Tgmb/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