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무용성 - 1.비폭력의 길 (세계경전 - 제3부 인생의 여정 - 제22장 평화)

철장왕 | 20190226064941

전쟁의 무용성
 
전쟁은 평화를 낳는 것이 나니라 더 많은 전쟁을 낳을 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전쟁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30년도 채 안 되어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에 휩쓸렸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에 위대한 성현들이 비폭력주의를 가르쳤다. 그들은 보복하지 않고 상냥한 마음으로 기꺼이 공격을 감내한다. 이것이 평화세계를 건설하는 데 최상의 가르침이다. 이것 이외에 어떤 방식으로도 하나님 왕국은 구현될 수 없다.
그럼에도 흥망성쇠의 역사에서 사람들이 잔혹한 침략자를 만났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을 스스로 방어할 것을 허락했다. 갈등하는 두 집단 사이에서 하나님은 침략자에 대항하는 방어자의 편에 선다. 그래서 역사를 통해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전쟁을 일으킨 침략자는 한 결 같이 패배자가 되었다. 이것은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서 전쟁이 무용하다는 것을 다시 깨우친다.
 
1.비폭력의 길 
 
종교경전
그때에 예수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자기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서 그 귀를 잘랐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마태복음 26.51-52 (기독교)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외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5리를 자자고 하거든 10리를 같이 가주어라. 
마태복음 5.39-41(기독교)
 
승리는 원한을 낳는다. 패자가 고통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마음이 평화로운 자는 승패를 버리고 행복하게 산다. 
법구경 201 (불교)
 
보라! 저들은 적의 생명을 빼앗기보다는 자기들의 목숨을 먼저 희생하려 하였고, 형제를 사랑하매 전쟁에 쓰일 무기들을 땅속 깊이 파묻었나니라.
몰몬경,앨마서26.32(예수그리스도후기 성도교회)
 
죄지은 자들이 죽어야 한다고 기도하는가? 그보다는 그들이 회개하여 더 이상의 악이 없도록 기도하라. 
탈무드, 베라코트 10a (유대교)
 
무력은 평화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한다. 만일 그대가 사탕수수로써 바라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왜 독약을 사용하겠는가?  
소마데바,니티바크야므리타 344 (자이나교)
 
갑자기 왕(襄王 숙)이 묻기를 ‘천하가 어떻게 안정되겠는가?’ 하거늘, 나는 ‘하나로 통일되는 데서 안정될 것이다’고 대답하였다. ‘누가 능히 통일시키겠는가?’ 하고 묻거늘, 나는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맹자Ⅰ.A.6(유교)
 
몇몇 아이들이 강가에서 놀고 있었다. 그들은 모래성을 만들었으며, 각기 자신의 모래성을 지키며 말했다. “이것은 내 것이야.” 그들은 자신의 모래성을 만들면서 무너지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모래성들이 완성되었을 때,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모래성을 발로 차서 완전히 망가뜨려 버렸다. 부서진 모래성의 주인이 화가 나서 부순 아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주먹으로 때리며 소리쳤다. “이 아이가 내 모래성을 망가뜨렸어! 모두 와서 내가 이 아이를 혼내줄 수 있게 도와줘.” 다른 아이들이 와서 그를 도왔다. 그들은 모래성을 부순 아이를 막대기로 때렸으며, 그 아이가 땅바닥에 넘어지자 짓밟기까지 했다. 그런 후에 그들은 각자의 모래성으로 계속 놀았으며, “이것은 내 것이야, 다른 누구도 이것을 가질 수 없어. 가까이 오지 마! 내 모래성을 건드리지 마!” 그러나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 누구도 자신의 성이 되었던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한 아이가 자기 것을 발로 짓밟자, 다른 아이는 두 손으로 자기 것을 눌러 부숴버렸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¹³ 
요가차라 부미 수트라 4 (불교)
 
그가 민족 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면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4 (기독교)
 
말씀선집
무기를 써서 평화의 세계를 만들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또, 레버런 문의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전부 다 힘을 대변하지만, 힘을 쓰지 않고 사랑으로써 어떻게 소화시키느냐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103.184, 1979.02.25)
 
과거의 역사적인 위인들, 성인들 중에 와 가지고 그 시대에 핍박을 안 받은 사람 있습니까? 그렇게 역사과정에서 반대 받게 될 때, 내가 옳다고 변명한 사람들은 성인 축에 못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역사와 더불어 그런 비난을 받고 한을 품었지만, 묵묵히 입을 다물고 갔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시대의 승리자로서 다시 등장한 것은 왜냐? 악과 더불어 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0.34, 1975.10.04)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왜 한 대 치면 같이 치고, 서로 싸우고 대항하지 못합니까? 권력자가 있으면 권력자를 들이치고 싸움을 하라고 가르쳐 주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본래의 인류가 소망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싸움을 통해서 소망을 찾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에덴동산의 이념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이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구원섭리의 길을 가는 것은 본연의 동산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인데, 그 본연의 동산에서의 이상세계 실현이라는 것은 싸움을 해가지고 찾는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본래 에덴동산은 싸움이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서로가 자기를 높이는 세계가 아니라, 겸손과 사랑이 깃드는 세계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본래의 동산의 내용을 추구해 가는 이상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 앞에 싸우고 질투하고 시기해 가지고는 그 본질의 세계와는 상관없는 결과에 처하기 때문에, 그런 자들은 하늘에 속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길을 하늘은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서 코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본래의 세계가 그렇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교만한 사람은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천국에 가서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싸우는 사람,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의 참된 종교는 ‘나가서 싸워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이용하고, 남을 전부 다 지배하라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모토로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98.33, 1978.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