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환
평화는 정의가 있는 곳에서 번창한다. 정의는 갈등하는 양쪽의 사람들에게는 동일하게 나타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잘못을 바로잡고 빚을 갚고 손상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어떠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이웃에게 잘못함 것에 대해 보통 회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회개에는 상환이 뒤따라야 한다.
상환은 손해에 정확히 상응하는 값은 아닐지라도 잘못한 사람이 손해를 본 사람에게 자진하여 보상할 때 가장 효과적이다.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후 독일이 프랑스와 영국에 제공하도록 강요된 전쟁 배상금과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유태인과 그 외의 나치 희생자들에게 제공한 상환을 비교해 보라. 독일에 전쟁 배상금이 강요된 전자의 경우에 그 전쟁 배상금은 독일인들에게 커다란 분노를 일으켰고, 히틀러의 등장으로 직접 연결되는 복수에 대한 요구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다. 나치의 범죄에 대해 독일인들이 진정으로 회개한 후자의 경우에 그 상환은 독일과 이전의 원수국가들 사이에 선의지를 신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우리가 범한 잘못에 대한 진심어린 회개에 이어서 우리가 손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상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평화 창조의 원칙이다. 또한 우리가 의식하지 않은 채 지은 죄, 또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부채, 또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잘못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서도 상환해야 한다.
문선명 선생은 이 개념을 ‘탕감복귀’의 가르침으로 정립하였다. 그는 ‘탕감’이란 보험에서 손해 배상청구액처럼 고정된 액수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편의 괴로운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주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만일 상대편이 용서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작아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수년 동안 배신과 불신으로 관계가 긴장된 상태라면 그것은 커질 것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구절은 본래의 성경적 의미에서 반환을 만들기 위한 법적 공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유대교에서 그렇게 이해되었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자신들이 빚진 전부를 되갚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구절은 종종 복수의 정당화를 위해 잘못 인용되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고통을 당한 집단에 의한 복수는 일종의 거친 정의이지만 그것은 평화에 도움이 도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폭력의 악순환을 조장할 뿐이다. 세계경전은 용사하는 것이 더 좋다고 가르친다.
종교경전
오, 내 몸 안에 거하는 이여, 당신이 행한 모든 것을 보상하소서!
가루다 푸라나 2.35 (힌두교)
속죄 날은 하늘 향한 죄를 속죄하는 날이다. 그러나 인간을 향한 죄는 상처받은 자가 용서하지 않는 한 속죄 받을 수 없다.
미슈나, 요다 8.9 (유대교)
사마아가 이맘 말리에게 계획적인 살인을 한 자가 회개할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그가 답하길 “없다. 살해당한 자의 친척에게 위자료를 주고, 노예들을 풀어주고, 두 달 내내 금식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자발적인 기도를 하는 방법 외엔 없느니라. 만약 그가 이를 행하면 나는 그의 회개가 받아졌으리라 희망하리라.”
사마아가 물었다. “그런데 그가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이까?” 그가 말하길 “그러면 무슬림에게 돈을 구해 그의 혈족에게 배상을 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하디스 (시아파 이슬람)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출애굽기 21.23-25 (기독교)
우리는 그 속에 그들을 위해 생명에는 생명, 눈에는 눈, 코에는 코, 귀에는 귀, 이에는 이, 상해에는 동형동태 형을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그것(동형동태의 응징)에 대해 (포기의) 자선을 베푼 자는 그것으로 (그의 죄를) 속죄 받으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으로 심판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이 바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니라.
꾸란 5.45 (이슬람)
큰 원한을 풀어 줄지라도 반드시 나머지 원한은 남게 마련이다. 어찌 그것을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계약문서의 왼쪽 반만을 잡고서, 백성들에게 독촉하지 않는다. 덕이 있는 위정자는 계약문서만을 맡아 관리하지만, 덕이 없는 위정자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데에만 힘쓴다.
도덕경 79 (도교)
누구든 선행으로 악행을 덮어버릴 수 있으리라. 그와같은 사람은 이 세상을 비추리라. 마치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법구경 173 (불교)
만일 한 사람이 진실로 악한 행위를 했다면, 그러나 그 후에 그의 길을 변경하고 뉘우친다면, 사악한 어떤 것도 행하지 않고 모든 선한 것을 경건하게 실행하기로 결심했다면, 그는 결국은 틀림없이 좋은 우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을 재난을 축복으로 바꿈이라고 한다.
태상감응편, 보상과 응답 5 (도교)
나에게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이라도 자기 죄를 청산하고 돌아와 오라로 살기만 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전당 잡은 것을 돌려주고 훔친 것을 갚아주며 생명을 보장해 주는 법규를 따라 살고 그릇된 일을 하지 않으면 죽지 않고 살게 된다. 전에 저지른 잘못은 모두 잊어주겠다. 그가 올바로 살았으니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
에스겔 33.14-16 (기독교)
마침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였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누가복음 19.2,8-9 (기독교)
말씀선집
복귀섭리는 반드시 탕감을 중심삼고 발전도 하고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탕감이 왜 필요합니까? 역사적인 실수를 청산함과 동시에 역사적인 죄를 중심삼고 언제나 참소해 나오는 사탄을 분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을 중심 삼고 보더라도, 현재의 ‘나’라는 자체가 현재만의 ‘나’라는 것은 오늘날 개인을 중심삼고 있는 현재의 ‘나’가 아니고 전 세계를 대표한 입장에 있는 ‘나’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99.164-165, 1978.09.18)
탕감복귀는 잃어버린 그와 같은 정상 그대로 놓고 복귀하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라는 것입니다. 병이 났으면 병이 난 상태에서 거꾸로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시대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252.128, 1993.11.14)
법정에서는 판사, 검사들이 구형할 때, 그것을 고맙게 받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감형을 해주려고 하는 것이 판사의 심정이요, 검사의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판사나 공판정을 무서워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충고하는 개인을 무서워할 수 있는 사람이 죄를 짓고 형을 살더라도 벗을 길이 있지, 전부 다 무서워하지 않고는 벗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104.279-280, 1979.06.01)
우리 동료지간에 있어서도 말 한마디 잘못하여 실수하게 되면, 그것으로 사이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부부끼리도 그렇습니다. 한마디의 말이 동기가 되어 가지고 기분 나쁘게 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갈라지고 그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고통을 받는 자리에 떨어졌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먼저 말한 것의 근원을 파서 이것이 잘못 됐으니 이것은 이렇고 이것은 이렇다고 하여 당신이 잘못한 것인가 내가 잘못한 것인가를, 친구라면 그대가 잘못한 것인가 내가 잘못한 것인가를 가려 이것을 청산지어야만 거기서 풀리는 일이 벌어지지, 그냥 그대로 덮어놓고 ‘그러자’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남아지면 남아질수록 그것으로 인해 두고두고 원수가 되어 영원히 남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국가 간에 전쟁을 했을 때도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누가 옳고 그른가를 판단해가지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든가 뭐하든가 다 해서 메워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89.116-117, 1976.11.01)
빚을 지면 그 사람을 위하여 종노릇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 반대하려야 반대할 수 없는 자리까지 나가야 그때에 비로소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뜻길, p.324)
탕감복귀는 외적 세계를 완전히 부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복귀돼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 부정할 수 있는 단계가 남아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참사랑의 기준 앞에 서지 못하면 완전부정입니다.
(312.334, 1999.11.07)
하나님은 맞고 빼앗아 나옵니다. 레버런 문은 지금까지 맞고 반대를 받으면서 빼앗아 나왔습니다. 전 세계가 반대했습니다. 전 세계가 반대하는 것은 전 세계가 굴복한다고 예고하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반대하면 할수록 세계를 대했던 하나님은 레버런 문편으로 가겠습니까, 반대하는 편으로 가겠습니까? 왜 선생님 편으로 옵니까? 반대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릅니다. 반대하는 원수를 복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피에는 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소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68.204, 1987.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