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적 욕망의 통제
모든 종교에서 궁극적 실재를 갈구하는 구도자는 욕망을 통제하고 육신의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혹독한 자기 통제, 금식, 몇 시간의 참선수행 등을 통해 몸을 치고 몸의 힘을 약하게 하는 것은 모두 육적 욕망에 대항하고 궁극적으로 이것을 제압하는 좋은 방법이다.
사람에게 가장 큰 도전은 성욕 주관이다. 예수님은 유혹에 대해 무자비할 것을 가르치셨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너의 눈을 뽑아버려라.” 실제로 불교의 한 비구니는 자신의 죄는 아니지만 상대방의 죄를 뽑아내기 위해 이렇게 했다고 전해진다. 불교에서는 육신을 하나의 액체와 수액, 담즙, 분뇨 등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로 봄으로써 ‘육신의 메스꺼움’에 대해 명상하는 수행을 장려한다. 이것은 반대 성을 바라볼 때 생기는 성적 욕구를 수그러들게 하기 위함이다. 문선명 선생 역시 몸을 ‘사탄의 무도회장’이라고 여기며 몸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통해 성욕을 자제할 것을 충고하신다.
자아주관과 관련된 말씀은 제12장 ‘자아주관’에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완벽한 자아주관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문선명 선생은 이것이 인간 타락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라고 설명하신다. 자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극단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따라서 종교는 몸을 치고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강도 높고 무자비한 방법들을 개발해 왔다. 몇몇 종교에서는 이러한 수행이 수도원 제도로 체계화되기도 하였다. 모두가 이 길을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목적을 향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1. 육적 욕망의 제어
종교 경전
사랑하는 이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대항하여 싸우는 육적인 정욕을 멀리하시오.
베드로전서 2.11(기독교)
땅에 속한 지체들, 곧 음행과 부정과 욕정과 악한 정요과 탐욕을 죽여 버리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이런 자들 가운데 살면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들, 곧 격분과 분노와 악의와 모독과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 같은 것들을 버리시오.
골로새서 3.5-8(기독교)
주님께서 주신 명확한 징표에 의지하는 사람이 그들 자신의 욕망을 따르면서 그들이 행한 사악함에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같을 수 있겠는가?
꾸란 47.14(이슬람)
오직 육욕을 완전히 근절할 때 우리는 폭력을 버릴 수 있다.
아차랑가 수트라 4.45(자이나교)
소박함을 나타내고, 순박함을 지키고,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망을 적게 한다.
도덕경 19(도교)
마음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는 욕망들이 포기될 때 필멸자는 불멸을 얻는다네.
가슴을 짓누르는 모듬 매듭들이 풀릴 때 필멸자는 불멸을 얻는다네, 여기 바로 이 생에서.
브리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 4.4.7(힌두교)
빛과 어둠처럼 즐거움과 고통은 일상사임을 알고 다만 자신의 마음과 욕망을 다스리라.
아차랑가 수트라 2.78(자이나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경계해야 할 일이 세 가지 있다. 소년기에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색을 경계해야 하며, 장년기에는 혈기가 굳세므로 싸움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기에는 혈기가 쇠진해지니까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
논어 16.7(유교)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세 가지란 어떤 것들인가? 즐겁다는 느낌, 괴롭다는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다는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즐겁다는 느낌은 괴로움이라고 알아야 한다. 괴롭다는 느낌은 독화살이라고 알아야 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다는 느낌은 덧없다고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에 대해 실로 이렇게 알았을 때 그 비구는 성자이며 올바로 깨달음이라고 일컬어진다.
이티붓타카 47(불교)
말씀 선집
마음과 몸이 대등하기 때문에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몸뚱이를 약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득세해 가지고 약하게 된 몸뚱이를 몇 달 동안 끌고 넘어가게 되면 몸뚱이를 다시 올려놓아도 올라올 수 없게끔 습관화 되어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자기가 계획하는 모든 일이 하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잘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냥 놔두어도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양심을 위주로 한 절대적인 자리에서 생애를 엮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 생활의 목적입니다.
(38.272, 1971.01.08)
종교는 어떻게 해야 몸뚱이를 때려잡을 것이냐 하는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강제로 구속해야 합니다. 몸뚱이가 하자는 것은 전부 다 용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극장가에는 가지 말라, 서울에 가거든 종삼 거리는 다니지도 말라’고 하며 전부 막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처녀의 궁둥이를 따라다니지 말라. 처녀들은 남자를 전부 도둑놈으로 알고 곁눈질하지 말라’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처녀들은 연애할 수 있어요? 없습니다. 또 통일교회 총각들은 연애할 수 있어요? 없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강제로 연애하지 말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하고 싶으면 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강제로 못하게 하면 더 합니다. 자기들이 해보고 스스로 나가 자빠져야 하는 것입니다.
몸뚱이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선을 향해 가는 길은 극복을 요합니다. 몸뚱이의 욕망을 잡아서 모가지를 비틀라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교만을 좋아합니다. 전부 자기를 위하려고 합니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라는 식입니다. 몸뚱이는 그런 것을 원합니다.
(39.193, 1971.01.10)
젊은 녀석들, 여자를 보게 되면 유혹되고 싶은 생각 끊어 버리라는 말입니다. 듣던 것 끊어 버리고, 세상에서 좋다는 것, 이거 전부 다 일시에...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몸을 치라는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참된 종교일수록 몸을 희생시키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종교 역사를 봅시다. 고행을 시키고 희생봉사해라! 합니다. 왜 그러느냐?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 가고 싶거들랑 인간 지옥세계에 가서 천국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비참한 세상이요, 행복한 세상이에요? 비참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비참하고 혼란하고 혼돈된 세계가 행복한 세계가 되려면 다 밥 먹고, 그저 놀고, 술 마시고, 춤추고 그래 가지고 그 행복한 세계가 언제 이루어집니까? 더 비참해집니까, 덜 비참해집니까? 더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론을 내야 됩니다. 이런 비참한 행복한 세계를 찾으려는 사람은 더 비참한 길을 뚫고 넘어가야 됩니다. 더 비참한 데서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습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없거들랑 하나님도 없고 다 없는 것입니다.
(91.286-287, 1977.02.27)
몸을 치는 것은 사탄을 없애자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몸을 침으로 말미암아 그 몸을 누가 점령할 수 있는가 하면 성신이 점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몸을 치는 것은 성신이 몸을 점령하게 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 몸을 치는 것은 결과적으로 사탄을 치는 것이 되므로 내 몸을 침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치고 사탄을 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점령했던 것을 대신 성신이 점령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1.126, 1956.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