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 제3부 인생의 여정 - 제16장 기도와 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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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를 넘어서
지나치게 종교적 의례에만 의존하다 보면, 실제 행동이나 지식과는 동떨어진 엄숙한 기운만 팽배할지도 모른다. 의례는 결코 경건한 마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신과 일대일로 하나되는 경험들을 대체 할 수 없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는 종교 내부에서부터 의식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어떤 종교의 창시자가 겉으로는 다른 종교의 의식주의를 강하게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말씀은 본질적으로 자기 종교 신도들에게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문선명선생도 지나친 의식주의에 대해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시며, 두 가지 내용을 덧붙여 말씀하신다. 첫째, 의식이 다른 종단과 신앙 사이에 벽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하나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일이다. 모두가 하나되어야 할 이 시대에 의례적 장벽은 초월되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과 예수님을 향한 경건한 신앙적 의식 자체가 언제나 그분의 심정과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내적 지혜까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죽음에 사용된 저주받은 형틀이자, 이땅에 지상천국을 이루려던 뜻을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예수님의 수천년의 슬픔과 좌절의 근원인 십자가에 대해 많은 기독교인은 그것을 구원의 상징으로서 이해하고 받들고 있다.
고대 종교적 의식의 중심에는 동물헌제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 거의 없어졌다. 많은 종교가 여전히 헌신적 신앙 활동을 중시하고 연구하며 경전에 나타난 고대 제사의식의 핵심을 소중히 여기고 있지만, 더 이상 같은 형식의 제사의식을 행하지는 않는다. 탈무드에서는 이웃에 대해 자비를 베푸는 것이 속죄양을 통해 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부처님은 동물 헌제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으로 인해 악한 업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 대신에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돌보고 탁발승에게 보시를 베풀면서 충족될 수 있는 영적 봉헌의 의미를 가르친다.
1. 최선의 의례는 사랑의 마음과 의로운 행동
종교 경전
높이 계시는 하나님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수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 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사람아.
여호와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미가 6.6-8(유대교)
삼백 항아리의 훌륭한 음식으로 하루에 세 차례식 제사지낸다 해도 한순간의 자비행이 가져오는 공덕의 한 부분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가르주나, 보의 화환283(불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여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밖에는 먹지 못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 조차도 주인이다.”
마가복음 2.23-28
옛날 조상신들 가운데 하나가 후손의 영토에서 배회하다가 스루가 지방의 후지 산에 도착했을 때 마침 저녁 무렵이 되었다. 그는 후지 산 신의 거처로 가 하룻밤을 묵을 수 있도록 간청했다. 그러나 후지산의 신은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햇가 일을 신께 바치는 날인지라 저의 가솔들은 정결과 금욕을 하라는 금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재워 준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닐 듯 싶습니다. 날이 날인만큼 이렇게밖에 할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신은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나는 그대의 조상이다! 그런데도 나를 묵게 해줄 수가 없다고? 그렇다면 나는 그대가 사는 이 산에 봄이나 겨울이나 눈이 내리도록 할 것이며, 일 년 내내 안개와 추위가 이 산을 덮도록 하여 아무도 그대에게 제물을 바치러 이 산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겠다!”
이 말을 마친 뒤 그는 히타치 지방에 있는 쓰쿠바 산에 올라가 하룻밤 묵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쓰쿠바 산의 신은 “오늘 밤 우리는 햇과 실을 바치기 위해 금욕을 하게 되어 있지만 당신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군요”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방문객을 공손히 모시고 음식과 거처를 제공했다.
그러자 이 조상신은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나에게 참으로 극진하구나, 또한 그대의 사당도 얼마나 위엄이 가득한가. 이제 그대는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더불어 영원히 번성할 것이며, 사람들은 그대에게 영원토록 제물을 바치기 위해 오리라. 그대의 자손들이 끝없는 평안을 누리며 살리라.”
그리하여 후지산은 연중 언제나 눈이 덮여 사람들은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와 반대로 쓰쿠바 산은 오늘날까지도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게 되었다.
히다치노쿠니 후도기(신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를 차린들 무엇 할 것이냐?”
논어 3.3(유교)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목욕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성스런 강물에 몸을 적신다 하여 사람이 청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법과 진실이 있을 때 비로소 그가 청정해지느니, 그를 일러 바라문이라 하느니라.
우다나 6(불교)
당신이 시작하여 거룩하게 된 사랑과 믿음을 거짓으로 따르는 행악자들, 그들은 선한 마음에 발붙일 곳이 없으므로 오, 주여! 그들에게서 의를 거둬들이시라.
그 야수들이 우리에게서 물러설 때까지!
아베스타, 야스나 34.9(조로아스터교)
얕은 공덕을 쌓으며 길을 가지 않는 미혹된 사람들은 그 공덕을 쌓음이 곧 길을 가는 것이라 여기나니, 탁발걸식과 제사로 쌓은 공덕이 아무리 크다 해도 죄악의 근원이 우리들 마음의 삼독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
육조단경 6(불교)
분별없는 사람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하며 경전의 화려한 말에 사로잡혀 있는 신학자들은 단지 덧없는 결과를 지니는 말들을 내뱉는다. 그들의 말은 제의 행위를 통한 보다 나은 내생을 약속하고, 온갖 제사들을 강조하며, 향락과 권력을 추구한다.
이 사람들의 마음은 천계에 대한 욕망과 시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권력과 향락에 매달린며 스스로의 말에 속아 산다. 그들에게는 만족을 지닌 아무런 지식도 없으며, 삼매 속에 확주하는 지식도 없다.
바가바드기타 2 42-44(힌두교)
말씀 선집
모든 종교인은 깊은 자기 성찰의 내적 기대위에서 굳세게 일어나, 온갖 비리가 난무하는 현실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뜻의 지상실현을 위하여 창의적인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인간과의 관계는 경전이나 예배의식 안에서만 관계가 아닙니다. 신의를 품고 24시간 생활속에서 이를 실천하는 자각된 마음속에 거하시면서 인간과 함께 생활하시기를 소원합니다. (135.222, 1985.11.16)
여러분이 아무리 예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아무리 예수의 얼굴을 만져보고, 아무리 예수와 같이 다니고, 아무리 예수와 같이 살았다 하더라도 심정이 통하지 않으면 모두 소용이 없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만지고, 심정을 통하여 같이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10.200, 1960.10.2)
하늘을 추앙하는 사람은 많사오나 하늘을 위하여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적사옵니다. 저희들은 하늘을 위하여 책임을 져야만 되겠사옵니다. 하늘길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사오나 그 길에 놓여 있는 가시밭길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억 천 만세 수고하셨사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하늘의 길, 참된 길을 가기 위해서 넘어가야 할 수고의 길을 피해가려 하고, 저희의 슬픔과 고통도 아버지 앞에 맡기려 하고 있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16.15, 1965.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