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 제3부 인생의 여정 - 제16장 기도와 숭배
헌신
2. 하나님을 위한 사랑과 동경
종교 경전
모든 존재 속에 거하는 지고한 주, 모든 피조물의 참된 자아는 전심의 신애를 통해 실현될 것이다.
바가바드기타 8.22(힌두교)
모든 숨결에서, 지극히 미세한 것에서도 주를 기억하는 자들, 언제나 가슴속에 주의 이름을 새겨 가진자들, 나나크가 말하노니, 그들은 축복을 받으리니, 완전한 신앙자로다.
아디 그란트, 바르가우라. M.5.p.319(시크교)
차코라 새가 푸른 달빛을 갈망하듯, 연꽃들이 찬란한 아침 햇살을 원하듯, 꿀벌이 꿀을 얻고자 꽃을 찾아다니듯, 오, 주여! 나의 가슴이 그대를 애타게 원합니다.
바사반나, 바차나 364(힌두교)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하나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언제나 임 계신 데 이르러 당신의 얼굴을 뵈오리까? “네 하나님이 어찌 되었느냐?” 비웃는 소리를 날마다 들으며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 이것이 나의 양식입니다.
시편 42.1-3(기독교)
사랑하는 당신이여, 제가 무엇을 더 말해야 하겠습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다시 태어나서나 당신은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사랑의 올가미는 나의 가슴을 당신의 발에 묶습니다. 나의 마음은 오직 당신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쳤습니다. 이 가정에서 저 집에서 누가 실로 나의 것입니까? 내가 누구를 내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혹독하게 추웠으며, 나는 당신의 발아래에 귀의합니다. 나의 두 눈이 깜박거리는 동안에,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합니다. 나는 내 가슴이 죽었다는 것을 압니다. 찬디다시가 말하노니, “내가 실에 꿰어 목에 걸고 있는 시금석.
찬디다사(힌두교)
한 번은 크리슈나의 양어머니 아쇼다가 어린 크리슈나를 품에 안고 있던 중에 갑자기 화덕 위에 끓어 넘치고 있는 우유를 내려놓으려고 황급히 그를 땅에 내려놓았다. 이에 아기는 화가 나서 굳은 우유가 들어 있던 항아리를 깨버리고 방구석에 있던 치즈를 들어 얼굴에 짓이겼다. 그리고는 구워 놓은 빵을 원숭이들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와 이 광경을 보고는 그를 심히 꾸짖었다. 또한 나무절구에 그를 동여매어 벌주려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밧줄이, 비록 충분히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짧아 보였다. 이에 그녀는 밧줄을 좀 더 가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너무 짧았다. 그녀는 찾을 수 있는 모든 밧줄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크리슈나를 묶을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양어머니 아쇼다를 매우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크리슈나는 내심 미소 지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어머니가 완전히 지키고 어쩔 줄 몰라 허둥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묶이도록 허락했다.
시작도 없고, 중간도 없고, 끝도 없으며, 만유에 편재하여 무한하며, 전지전능한 크리슈나라 할지라도 그는 오직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 때문에 그녀에 의해 자신이 묶이도록 허락한 것이다. 그는 전능하신 주요 만유의 주시며 일체만물의 주재자시다. 그러나 그는 그를 신애하는 사람들에게 속박되도록 자신을 허락하시느니라.
스리마드 바가바탐 10.3(힌두교)
말씀 선집
얼마나 하나님을 흠모하고 사모하였느냐? 현재의 내 입장을 전부다 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몽땅 바쳐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문제, 다시 말하면 완전한 플러스 앞에 대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에 대해서 직행해 오는 것입니다. 순수한 직행의 행로를 통하여서 그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를 향해 돌진해 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마이너스는 새로이 후방에서 밀어주는 반대의 작용을 일으킬 것입니다.
(36.100, 1970.11.22)
이념은 만민에게 통할 수 있지만 실체는 하나밖에 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념을 믿었다고 하는 신앙자는 많지만 실체를 믿었다고 하는 신앙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그대의 마음이며, 그대의 서러움이 내 서러움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날까지 맺혀진 하늘의 원한의 심정, 뼈골이 녹아지는 듯한 서러운 심정을 느껴봤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디를 가든 하늘을 대하여서는 자기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졸도할 정도의 심정을 갖고 이 땅 위에서 3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4.126, 1958. 3.23)
오늘날 우리는 신앙이라는 말을 걸어 놓고 고대하고 있으나, 그러한 단계를 넘어서 생활적인 신앙을 해야 되겠습니다. 즉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식구, 하늘과 같이 생화하는 백성,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즐길 수 있고 노래할 수 있으며,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역사과정의 수많은 우리 선조들 앞에 신앙이라는 말을 세워 놓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해 고대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 자리에서 싸우고 있는 신앙자라로서의 그 자체가 아니라 끝 날까지 남아져 아버지와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셨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고대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대하신 것은 신앙을 위하여 기꺼이 사라져 갈 수 있는 나, 신앙을 위하여 죽었다가 부활할 수 있는 나, 사망권을 벗어나 생명권내에서 부활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고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 수 있는 그런 나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이 고대하던 나, 그 나를 그리워할 줄 알고 그 나를 찾기 위하여, 그 나를 만나기 위하여 허덕이는 여러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6.84-85, 1959.3.29)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붙들고 6천년의 역사적인 서러움에 사무친 심정을 위로하고 해원해 드리는 것입니다. 서러운 아버지의 가슴을 붙들고 아버지를 부르게 될 때에 그 한마디의 말로써 갈라졌던 천지가 다시 인연 맺어질 것입니다. 이런 기준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는다 할 때는 하나님의 서러움은 여러분으로부터 떠나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조건에서 여러분은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3.58, 1957.9.22)
배가 고픈 것이 슬픔이 아니옵고, 환경에 몰려 억울한 자리에 선 것이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것, 그 이상의 슬픔이 없는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자리는 아무리 없는 자리일지라도 무한히 있는 자리요, 아버지가 계시는 자리는 지옥의 중심일지라도 천국으로 화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저희들은 죽으나 사나 있어야 할 곳은 아버님이 계신 곳밖에 없는 것을 아옵니다.
(43. 135. 197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