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논쟁하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할 수 있다. 단순한 헌신과 맹목적 신앙만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요구할 때, 스스로 도전해 보았지만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잠시 멈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자신의 확구한 입장을 포기하지 않은 채 우리는 하나님께 사물의 존재방식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과연 더 나은 방식은 없는지에 대해 논쟁하기도 한다. 우리는 세계의 경전에서 하나님과 논쟁한 선지자나 성현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은 의심에 가득 찬 자, 무신론자, 혹은 신앙 없이 불평하는 자 등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참다운 정의심을 발휘하여 하나님에 관한 것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분으로 여긴다. 그들은 하나님 진리와 그의 현존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을 갈구한 불타는 정열의 소유자들이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논의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하나님이 좀 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다른 신을 섬겼을 때,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며 자기 민족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무함마드도 50개의 의무 기도 항목을 5개로 줄여 줄 것을 간청하기 위해 하나님과 논쟁을 펼쳤다. 고난은 죄에 대한 대가라고 배워 온 욥은 자신이 분명히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과 논쟁했다. 탈무드의 한 현인은 하나님께 인간 자유의지의 가치에 대해 명분을 밝혀 주시라고 주장했다.
이런 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은 과거의 성현들과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온전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확고한 신념과 정의감에 기초하여 하늘에 도전하였다. 유한적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하나님임을 알았기에 그들은 고결한 양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서 정통 교리에 도전하면서 목숨을 걸고 논쟁을 펼쳤다.
종교 경전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아우성을 나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 너무나 엄청난 죄를 짓고들 있다 내려가서 그 하는 짓들이 모두 나에게 들려오는 저 아우성과 정말 같은 것인지 알아보아야 하겠다.”
그 사람들은 걸음을 소돔 쪽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냥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물었다. “당신께서는 죄 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께 기어이 쓸어버리시렵니까? 저 도시 안에 죄 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곳을 쓸어버리시렵니까? 죄 없는 사람 오십명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죄 없는 사람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
창세기 19.20-25(기독교)
사십 일이 지난 다음 여호와께서 나에게 계약 조문을 새긴 돌판 두 개를 주셨다. 그러고는 이렇게 이르셨다. ‘일어나 여기에서 당장 내려가거라. 네가 이집트에서 구출한 네 백성이 저렇게 못된 짓을 하고 있구나. 내가 명령한 길을 저렇게도 쉽사리 버리고 우상을 부어 만들다니. .... 말리지 마라. 내가 저들을 멸하여 하늘 아래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게 하리라. 그리고 저들보다 강하고 많은 민족을 너에게서 일으키리라.’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없애버리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 앞에 사십 일간 밤낮으로 엎드려 있으면서 이렇게 빌었다. ‘나의 주 여호와여! 주께서는 크신 힘으로 이 백성을 건져내시고 주의 것으로 삼지 않으셨습니까? 그러하오니 이 백성을 멸망시키지 마소서. 주께서는 이 백성을 강한 손으로 구출해 내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의 종이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해서라도 이 백성이 고집이 세고 바탕이 나빠서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습니다마는 부디 못 보신 체 해 주소서.’
자칫하면 주께서 구출해 내시기 전에 우리가 살던 땅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약속해 놓고 약속한 땅에 저들을 데려가지 못하는 것을 보니 여호와도 무능하구나, 또는 데려다가 광야에서 죽여 버리는 것을 보니 퍽이나 미웠던가 보군’ 하겠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주의 백성이 아닙니까? 주께서 당신의 것이라고 하여 몸소 팔을 뻗으시고 크신 힘으로 구출하신 백성이 아닙니까?
신명기 9.11-29(기독교)
사도님이 말씀하였다. “천사가 나를 (하늘로)들어 올렸을 때 하나님은 나의 백성들을 위해 하루 50차례의 예배를 규정하셨다. 이 규정을 가지고 돌아올 때, 모세 곁을 지나가게 되어 그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 백성을 위해 하나님은 얼마나 규정하셨나요? ‘50차례의 예배를 규정하셨어요’ 라고 내가 대답하자, 모세는 ‘주님께 다시 돌아가시오. 당신 백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하나님 앞으로 가니 그분이 그 횟수를 반으로 줄여 주셨다. 그런 후 모세 옆을 지날 때 그에게 ‘횟수가 반으로 줄었소’ 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자 그는 ‘주님께 다시 가시오. 당신 백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다시 하나님 앞으로 가자 그분은 그 횟수를 또 반으로 줄여 주셨다. 모세에게 돌아와서 새로 줄여주신 횟수를 알려주자, ‘주님께 도로 가시오. 당신 백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라고 되풀이하였다. 내가 다시 하나님 면전에 나타나자 그 분이 나에게 말하셨다. ‘그렇다면 5차례의 예배가 되도록 하라. 그러나 내 눈에는 50차례의 가치가 있으니, 내 앞에서 규정되어진 것이 결코 바뀌어서는 안 되니라.’ 내가 모세에게 왔을 때 그는 다시 주님께 가라고 했지만, ‘주님 앞에 가기를 내가 부끄러워 하노라’ 라고 대답했다.
부카리 하디스(이슬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정복할 때 나는 잃었고, 내가 정복당하였을 때 나는 얻었다. (노아때에) 홍수로 그 세대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내가 지은 세상을 멸망시켰는데 잃은 것이 없겠느냐? 그와 마찬가지로 바벨탑 세대들에게 대해서도 똑같다. 소돔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똑같다. 그러나 금송아지를 만든 죄에 대해 용서를 빌었던 모세가 나를 이겼다. 그리고 나는 얻은 것이 있으니 내가 이스라엘을 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페시크라 랍바티 32b-33a(유대교)
나는 이를 악물고 목숨을 내걸고 맞서리라. 어차피 그의 손에 죽을 몸, 아무 바랄 것도 없지만 나의 걸어온 발자취를 그의 앞에 낱낱이 밝히리라.
이렇게 그의 앞에 나설 수 있음이 곧 나의 구원 일는지도 모르는 일, 위선자는 감히 그의 앞에 설 수도 없다네. 그러니 나의 말을 신중히 들어주세. 내가 진술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나 이제 재판받을 마음 준비가 다 되어 있네. 무죄로 풀려날 줄도 알고 있네. 그러나 만일 그 누가 나타나 나의 죄를 입증한다면 나는 말없이 사라져 버릴 것일세.
하나님, 두 가지 부탁만 들어주소서. 그리하시면 나도 당신 앞에서 숨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주먹을 거두어 주소서. 당신의 진노를 거두시어 두려워 떨지 않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어서 말씀하소서. 서슴없이 답변하겠습니다. 아니면 내가 말씀 드리겠사오니 대답하여 주소서.
나에게 죄악이 있다면 얼마나 있다는 말씀입니까? 반역죄가 있다면 어찌하여 알려주시지 아니하십니까? 어찌하여 나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이 몸을 원수로 여기십니까?
욥기 13.14-24(기독교)
랍비 엘리에젤이 성결의식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주기 위해 세상에 있는 모든 주장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그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엘리에젤이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만약 나의 주장이 법에 합당하다면 이 구주 콩 나무가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자 구주 콩 나무가 정원에서 삼백 규빗이나 뛰어올랐다. 현자들이 응답하였다. “강물로부터는 아무런 증거도 얻어낼 수 없다네.” 엘리에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만약 나의 주장이 법에 합당하다면 이 강물이 증거 할 것이다.”
그러자 강물이 거꾸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현자들이 응답하였다. “학원의 벽으로부터는 아무런 증거도 얻어낼 수 없다네.”
다시 엘리에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만약 나의 주장이 법에 합당하다면 이 학원의 벽이 증거할 것이다.” 그러자 벽이 흔들리고 무너질 것 같았다. 랍비 여호수아가 벌떡 뛰면서 벽을 꾸짓었다. “현자의 제자들이 법에 대한 논쟁을 하는데 그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냐?” 랍비 여호수아에 경의를 표해 벽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랍비 엘리에젤에 경의를 표해 현자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그래서 오늘까지 논쟁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다시 랍비 엘리에젤이 현자들에게 말하였다. “만약 나의 주장이 법에 합당하다면 하늘이 증명해 줄 것이다.” 거룩한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왔다. “왜 너희는 랍비 엘리에젤과 논쟁을 벌이느냐. 엘리에젤이 주장하는 모든 내용은 다 법에 합당하느니라.” 그러나 랍비 여호수아가 다시금 일어나서 “이 목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야”라고 외쳤다.
신명기 30.12(기독교)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후에 랍비 나단이 엘리야 예언자를 만나서 그에게 물었다. “거룩하신 분께서, 그분께 축복이 있으시기를, 랍비 여호수아의 비난을 들었을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껄껄 웃으시며, ‘나의 철부지 어린이들이 나를 이기더군. 나의 철부지 어린이들이 나를 이기더군’” 하고 말씀하셨다네.
탈무드,바바 메치아 59a-b(유대교)
말씀 선집
이스라엘민족이 모세를 불신함으로써 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받들지 못했던 것과 같은 두려운 일이 끝 날의 성도들에게도 벌어질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자신이 하나 되지 못하는 사실에 직면하게 될 때 모세는 불신하는 민족을 책망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부족을 하늘 앞에 호소했습니다. 즉 그는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금식기도하면서 ‘아버지여, 이 민족이 어찌하여 허락하신 땅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책임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를 제물삼아 민족의 멸망의 길을 막아 주시옵소서! 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1.144,1956.07.01)
만일 한 달 동안 매일 열 시간씩 열심히 일했는데도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했을 때는 열다섯 시간 일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배가 되는 곱 시간을 투입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되면 네 시간을 더해서 스물 네 시간을 일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되거들랑 ‘하나님 도와주어야 되겠습니다.’ 라고 하나님하고 뿔대질(양이나 염소들이 뿔로 들이 받는 모양)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뜻인 동시에 당신의 뜻이 아니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잖소?’ 하면서 심각하게 하나님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올라가면 하나님도 올라가고, 여러분이 내려가면 하나님도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54.325,1972.03.31)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온 걸음이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이여, 저를 배반하시옵소서’ 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탕감복귀 하는 것입니다. ‘저를 모른다 하시옵소서. 최후의 수난의 때까지 당신이 저를 몰라본다 하더라도 저는 효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이 길은 응당 제가 가야 할 길입니다.‘ 라고 하는 결의로 나서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들 안 도와주더라도 그의 후손은 영원히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31.49,1970.04.12)
중세는 봉건제도와 로만 카톨릭의 세속적인 타락으로부터 오는 사회 환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이 억압되어 그 자유로운 발전을 기할 수 없게 된 때였다. 원래 신앙은 각자가 하나님을 찾아 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직접적으로 맺어지는 종적인 관계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과 승려들의 간섭과 형식적인 종교의식과 그 규범은 당시 인간들의 신앙생활의 자유를 구속하였고 그 엄격한 봉건계급제도는 인간의 자주적인 신앙 활동을 속박하였던 것이다.
창조원리에 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을 그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완수함으로써만 완성되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또 인간은 자유의지로써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개성을 완성함으로써 인격의 절대적인 자주성을 갖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으로 그 인격의 자주성을 추구하게 되어있다.
중세사회에 있어서의 교황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교황과 승려의 세속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없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중세인들이 인본주의를 부르짖게 됨에 따라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형식적인 종교의식과 규범에 반항하게 되었고, 인간의 자주성을 유린하는 봉건계습제도와 교황권에 대항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또 인간의 이성과 이지를 무시하고 무엇이든지 교황에 예속시키는 데서만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고루한 신앙생활에 반발하게 되었으며 자연과 현실과 과학을 무시하는 둔세적(遁世的), 타계적(他界的), 금욕적(禁慾的)인 신앙태도를 배격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마침내 중세 기독교인들은 교황정치에 반항하게 되었다.
(원리강론, 메시아 재강림 준비 시대 1.2)
기도로써 신령한 것을 감득할 수 있는 성도들은 새 시대의 섭리를 심령적으로 알게 되므로 낡은 시대의 진리 면에서는 상충적인 입장에 서면서도 신령을 따라 새 시대의 섭리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중에는 구약성서에 집착된 인물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 마음에 느껴지는 신령을 따라간 사람들뿐이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말세에 있어서 극심한 심령적인 초조감을 면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막연하나마 신령을 감득하여서 마음으로는 새 시대의 섭리를 따르려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에 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