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 | 20180725085107
이성적 지식과 영적 지혜
이성적 지식과 구원과 교화를 위한 영적 진리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세상의 유용한 이성적, 개념적 지식들이 영적 구도자들에게 항상 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지식이 지나치면 도리어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얻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에 깊게 파인 골이 있는 것처럼, 현세 철학의 개념적 체계와 종교의 영적 진리 추구에도 그런 간격이 존재한다. 세속적 학습을 중시하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세계의 경전들은어느 것을 우선해야 할지 점검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주제는 배움의 습득 방식이다. 이성적 지식을 습득하는 사람들은 감각 자료의 인식과 이론의 합리적 체계화를 통해 지식을 학습하는 반면, 영성에 밝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내면에 대한 직관과 감수성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다. 이성에 의존하는 것은 영적 구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많은 종교 수행, 예를 들어 선불교의 수행에서는 이성 차단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선불교에서 한 수도자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하자. 이 사람이 질문으로 혼란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때는 모든 해답이 개념적 이해를 넘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러나 문선명 선생은 이성과 영성 두 길 모두가 천국에 이르는 길이며, 둘 사이의 균형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세속적 지식과 종교적 진리의 대립에 대해 다시 언급하고 있다. 특히, 영적 지혜를 통해 방향성이 정립되지 않았을 때 무분별한 과학기술이 초래할 수 있는 병페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과학과 모든 속세의 지식들은 문선명 선생의 말씀 ‘절대가치’를 통해 갈 길을 인도받아야 한다. 절대가치란 온 인류와 모든 존재자를 이롭게 하는 하나님의 참사랑이다.
1. 구원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성적 지식
종교 경전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관해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압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고린도전서 8.1-3(기독교)
방금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은 진실로 나를 꾸짖으셨다.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책을 보는 것이므로 광야의 어디로 떠나라. 책은 네가 가 f길을 방해하므로 너의 앞날은 처량하기 때문이다. 네가 백인처럼 사는 것을 보니 아무런 환상도 네게 나타나지 않을 것 같구나.“
델리웨어족의 증언(미주 원주민 종교)
책을 쓰려면 한이 없는 것이니 너무 책에 빠지면 몸에 해롭다.
전도서 12.12(기독교)
지식으로 쌓은 수천수만의 공적도 저승길을 동반하지 않으리라.
아디 그란트, 자푸지 1. M.1, p.1(시크교)
참된 목적으로 자아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지식이다. 그 외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무지이다.
바가바드기타 13.11(힌두교)
신의가 있는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신의가 없다.
선량한 사람은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선량하지 못하다.
진실로 앎이 있는 사람은 박식하지 못하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도덕경 81(도교)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 중에서 오직 마음만이 주인이로다.
이런저런 해석을 따라 형상들을 파악함으로써 그것은 미혹되며 실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네. 이 세상의 모든 철학들은 정신적 날조에 지나지 않네.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교의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네.
대방광불화엄 10(불교)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0-25(기독교)
랍비 엘리자르 히스마가 말했다. “새를 제물로 바치고 여성을 정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천문학과 기하학은 부차적 지식일 뿐이다.”
미슈나, 아보스 3.23(유대교)
예언자와 성현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고 거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마이모니데스, 당황한 자들의 지침서 1.32(유대교)
인간의 철학은신을 인간처럼 만들어 왔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인간을 신처럼 만든다. 전자는 실수이고 후자는 진리이다. 형이상학은 물리학을 넘어선다. 그리고 물질은 형이상학적 전제나 결론에 들어오지 않는다. 형이상학의 범주는 오직 하나의 기반인 신성한 정신에 놓여 있다.
과학과 건강, 269(크리스천 사이언스)
말씀 선집
인간의 머리를 중심삼고 이상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뜻길, p.173)
종교의 기원은 철학의 기원과 다릅니다. 철학은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길이지만, 종교는 하나님을 만나 가지고 생활하기 시작하는 길입니다.
(189.70, 1989.03.19)
도서관마다 즐비하게 꽂혀 있는 경서나 철학 서적들을 섭렵한다고 해서 몸과 마음의 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447.163,2004.05.01)
하나님이 알기 위해서 지은 게 아닙니다. 창조이상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걸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창조이상의 뜻, 우리 이상의 목적은 지식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건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14.130, 1986.04.12)
학생 여러분들, 이제 알았으니 이제부터 서울대학에 다닌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난 뭐 훌륭하게 안 봅니다. 일년 동안 공부한다 생각해도 한 주일에 닷새 잡으면 오칠은 삼십오(5X7=35) 서른 다섯 시간, 100날 잡으면 7백 시간입니다. 이것을 24시간으로 나눠 보면 얼마 됩니까? 그래 봐야 며칠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거 가지고 자랑하고, 주제넘게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좋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사랑은 순식간에 배울 수 없습니다. 사랑의 실천력이라는 것은 영원을 기준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장구한 세월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1년, 2년에 패스할 수 없습니다. 10년, 20년, 30년, 40년 가도 졸업장을 탈 수 없습니다. 차원이 자꾸 높아져서 뒤로 돌아와 닿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학문을 하게 되면 박사 학위를 딸 수 있지만, 사랑의 철학 과정이라는 것은 무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싫증나고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재미있고 세상의 무엇보다도 행복하고 감사하고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113.324-325, 1981.05.10)
절대적 가치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 정서와 결부되어서 생각해야 됩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 자체가 목적이며, 완성이며, 최고가치인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베푸는 사람이 기쁘고, 그것을 받는 사람이 또한 기쁜 것입니다. 원래 사랑은 본성으로 느낌으로써 개체 안에서 싹이 트고 체휼되는 것이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세계는 인식을 통해서 계발되지만 정(情)의 세계는 계발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가치는 지식의 차원이 아닌 절대사랑의 차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제1원인자는 우리의 인식 영역 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서적 차원에서 감응 체휼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입체적 내용이 결핍된 가치는 영원불변하지 못하며 언젠가는 흘러가고 맙니다. 현재까지 여러 갈래의 주의와 사상들은 일면으로는 인류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만, 오히려 인류의 사상체계를 오도하고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끌지 못한 면도 많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 가치체계의 재평가가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102.59-60, 1978.11.25
2. 영적 지혜의 습득
종교경전
신에 대한 신앙은 붙들리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격언(신도)
어떤 비구가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선사가 대답했다. “없다.” 무몬은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이 오묘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그대는 사유의 길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
무문관 1(불교)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복음 4.24(기독교)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물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에서 배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말로 합니다. 곧 신령한 것으로 신령한 것을 설명합니다.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요, 그런 사람은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런 일들이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누가 그 분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2-16(기독교)
지식은 다섯 가지, 즉 감관지, 경전을 통한 시식, 투시, 텔레파시, 그리고 전지이다. 이 다섯 가지 지식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앞의 두 가지는 간접적인 지식이며, 나머지 세 가지는 직접적인 지식이다. 감관지에서는... 단지 불명료한 것들에 대한 파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투시, 텔레파시, 전지는 직접적인 지식이며, 그것은 감관이나 경전이라는 매개물 없이 생생한 방식으로 영혼에 의해 지각된다.
탓트바르타수트라 1.19-29(자이나교)
말씀 선집
원래 참사랑은 경험을 통해서 얻고, 체휼을 통해서 알게 되어 있습니다. 참사랑은 말이나, 글, 혹은 일반 교육을 통해서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기로 지음 받은 아담 해와는 성장하면서 단계적 생활을 통해서 경험으로써 참된 자녀의 심정, 참된 형제의 심정, 참된 부모의 심정을 체휼하여 완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전체적으로 체득할 때, 비로소 창조목적을 완성한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228.209, 1997.03.13)
대개 우리 사람을 보게 되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지성적인 사람으로 진리로써 어떤 것을 탐구해서 이치에 맞으면 인정하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부정하는 타입의 사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이치보다는 감으로 파악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우리 통일교회 술어로 말하면 영적이다, 지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의 사람, 지적인 면의 사람, 영적인 사람은 내적인 면에서부터 느껴서 외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이요, 지적인 사람은 외적인 면에서부터 느껴서 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나가는 종류요, 하나는 들어오는 종류입니다. 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지성적인 사람은 대개 기도를 싫어합니다. ‘아 기도, 기도가 무슨 필요 있느냐?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어떻게 하노?’ 실감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그걸 딱 생각하면 미신 같고, 믿을 수 없고 자기 자체가 부정되는 것 같고, 이런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이건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이론을 따져서 무엇을 찾겠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는 동시에 나면서부터 ‘하나님!’ 하는 말이 아주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좋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게 되면 밥을 안 먹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감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개 영적인 운동에 있어서 혁명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지성적인 사람은 못 합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봅니다. 대개 신앙세계에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지적인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고 미욱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이야 어떻든 느끼는 대로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 해보는 것입니다.
하다 보니 그것이 실천하는 환경에 백중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럼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물로 등장할 수 있는 일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하늘의 영적 벼락을 한번 맞고 나서 돌아버렸습니다. 그러니 외적으로 탐구하는 것보다는 내적으로 이렇게 폭발적인 느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부를 부정하고 그것을 존중시한 것입니다. 거기서 새로운 기독교의 혁명의 기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이 두 종류가 있는데, 나는 어떠한 타입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대개 영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크지만 진리면에서는 뾰쪽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처음에는 굵지만 끝이 뾰쪽해지면 이것은 시종여일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못 가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반드시 굴러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진리는 크지만 영적인 면이 이렇게 작다면 이것이 영원히 못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하는 생활을 우리는 해야 됩니다.
기도와 진리, 영적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행을 만들어서 화(和)하는 자리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계와 육계를 조정해야 됩니다. 영적 세계의 중앙에 서야 될 것이요, 진리 세계의 중아에 서 가지고 중심적 자리에서 좌우로 조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고는 완전한 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76.136-137, 1975.02.02)
타락인간은 종교에 의하여 신령과 진리로써(요 4:23) 그의 심령과 지능을 깨우쳐서 그의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여 나간다. 신령은 무형세계에 관한 사실들이 영적 오관에 의하여 영인체에 영적으로 인식되었다가 이것이 다시 육적 오관에 공명되어 생리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진리는 유형세계로부터 직접 인간의 생리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도 영육 양면의 과정을 거쳐서 오게 된다.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이 합해야만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적 과정에 의한 신령과 육적 과정에 의한 진리가 완전히 조화되어 심령과 지능이 아울러 깨우쳐짐으로써 이 두 과정을 통해 온 양면의 인식이 완전히 일치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피조세계에 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5.1)
3. 영적 지혜의 결핍과 고도로 발달한 지식의 위험
종교 경전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생활을 해서,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거든, 여러분은 헛되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이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가 아니라 세속적이고 육욕적이고 악마적인 것입니다.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3.13-17(기독교)
지식에는 거룩한 것과 사악한 것 두 종류가 있을을 진정 알지라. 하나는 거룩한 영감의 샘에서 솟아나오나, 다른 하나는 헛되고 모호한 사상의 반영일 뿐이라. 거룩한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사악한 지식의 동인은 이기적인 욕심의 속삭임이라.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이 네게 가르쳐 주시리라”라는 원리에 의해 안내 된다. 다른 하나는 “지식은 인간과 그 창조주 사이의 가장 비통한 장막이다”라는 사실의 확인일 뿐이다. 거룩한 지식은 인내와 열망과 참된 이해의 결실과 사랑을 낳는 반면, 사악한 지식은 오만과 허영과 자만심만을 낳을 뿐이라.
키타브 이 이칸 69(바하이교)
위에 있는 자가 진심으로 지혜만을 좋아하고 도를 알지 못한다면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어째서 그러함을 아는가? 대체 활, 쇠뇌, 그물, 수살, 덫, 새를 잡는 올가미 등을 이용하는 지혜가 많아지자 새는 하늘 위에서 어지럽게 날게 되었다. 낚시, 미끼, 그물, 반두, 통발 등을 이용하는 지혜가 많아지자 물고기는 물속을 어지럽게 헤엄치게 되었다. 덫, 그물, 올가미, 토끼그물, 함정 등을 이용하는 지혜가 많아지자 짐승은 늪 속을 어지럽게 뛰어다니게 되었다. 지혜, 거짓, 비방, 원한, 위선, 교활, 견백(堅白)의 궤변, 논쟁, 동이(同異)의 궤변 등이 많아지자 세상의 습속은 그 변론에 현혹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천하는 언제나 큰 혼란에 빠지는데 그 죄는 지혜를 좋아하는 데 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알지 못하는 일을 추구할 줄은 알면서도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일을 추구할 줄 모른다. 모두 그가 좋지 않게 여기는 일을 비난할 줄을 알면서도 그가 이미 좋다고 생각한 일을 비난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세상은 크게 혼란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위로는 해와 달의 밝음을 가리고 아래로는 산과 강의 정기를 소멸시키며 가운데로는 4계절의 변화를 무너뜨렸다. 꿈틀거리며 기어 다니는 벌레에서부터 퍼덕거리며 날아다니는 새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 본성을 잃고 만다. 지혜를 좋아한다는 것이 이토록 천하를 혼란하게 하다니 참으로 심하도다!
장자 10(도교)
말씀 선집
우리는 오늘날의 제 과학과 철학들이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해 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자연과학이 해온 위대한 약속들은 번번이 악한 방향으로 쓰여 졌고, 인류의 참된 행복만을 위해서 쓰이지 못했습니다.
사회과학 분야도 이기적이고 당파적인 정권들의 영향 하에 너무 부패되어서 많은 경우에 역기능을 발휘하여 왔습니다.k 철학 역시 선이나 인간의 궁극적 이상을 향한 위대한 추구를 포기해버린, 생명을 잃은 학문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학자들의 무기력과 소극적 자세로 말미암아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연구 업적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적극적인 지도를 요하는 세계의 요청에 응해야 한다고 봅니다. 세계는 바른 가치관에 의해서 주체역량을 행사하는 학자들의 책임성 있는 실천을 요구합니다.
(170.269-270, 1987.11.27)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창조목적에 부합하는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원래 거대한 가치관을 소유해 온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가치관을 무시하고 과학의 만능성을 믿고 그것을 만병의 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결과 과학기술은 점점 공해를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과학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단순한 수단이며 목적일 수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영과 육의 결합체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육적 생명을 바탕으로 해서 가치 있는 인생, 곧 사랑과 진리와 선과 미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편의적으로 말하자면 과학기술은 영적 생활에 부합되고 육적 생활에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치 있는 생활을 강조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과학은 도리어 가치관의 파괴를 가져오며 오늘날과 같은 공포와 불안의 현실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 불안한 현실에서 인간을 구하는 것은 진정한 가치관을 추구하고 발견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은 말할 것도 없이 절대가치에 기인한 이 가치관에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절대가치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진리와 선과 미가 곧 절대가치입니다. 결국 과학기술의 악용에 따르는 피해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은 과학 자체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방향에 그 기술을 응용할 때에 가능합니다.
(106.53, 1979.11.23)
케임브리지에 갔더니 옛날 고전 서직이 몇 만권 있다고 자랑하고 그래서 그걸 공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하고 가만히 보니, 공부하는 사람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지키는 사람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힘의 시대가 지나간 다음에는 지식이, 지식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시대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전부 공부 잘하는 녀석이 출세하고 세계를 움직인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공부, 공부 그랬지요? 다음에는 요즘에 와서는 돈, 돈. 지식보다도 돈, 돈 합니다. 학자가 열심히 머리가 빠지도록 공부를 해도 월급이 적으니 노동자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학자 해서 뭘 하느냐 이렇게 돼 가는 것입니다. 돈이 세계를 지배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빠지도록 공부해서 뭘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 벌고 돈 많이 받으면 좋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지식의 시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돈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사탄이 제일 원하는 세계입니다.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도 그렇습니다. 세상 지식, 과학을 알다 보니 하나님에 대해 다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철학이, 지식의 왕등골 같은 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이 전부 무신론이 되었고, 신학 자체도 하나님이 죽었다고 합니다.
종교는 머리와 같은데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조상이 원숭이다. 하나님이 조상이 아니라 원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고 원숭이가... 하나님이 조상인데 변해 가지고 원숭이가 조상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거 얼마나 떨어졌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볼 때 ‘하하, 이거 좋구나!’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러니 방망이를 들고 ‘이놈의 힘아, 이놈의 지식아, 이놈의 물질아’ 하며 들이 때려 부수고 싶다는 것입니다.
(99.103-104, 1978.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