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과 해석
경전은 종교적 지식의 기초다. 모든 고등종교는 창시자가 깨달은 신적 진리와 영적 가르침을 기반으로 정초되었고, 그것이 곧 경전으로 수록되었다. 그러므로 경전은 신앙인들의 삶을 이끌어주는 근간이 된다. 한편, 새로운 개념과 혁신적 신학적 사상이 등장했을 때 경전은 이들을 평가할 수 있는 불변의 기준이고도 하다. 규칙적인 경전 학습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하고 지혜를 얻기 위해 권장되고 있다.
그러나 경전을 정확하게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경구 의미에 대한 불일치는 그동안 신앙공동체에서 끊이지 않는 분쟁과 분열을 초래해 왔다. 그 한 원인은 경전이 비유와 상징적 언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유와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적 분별력과 때로는 성령의 힘이 필요하다.
또 하나의 논쟁은 경전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할 것인가, 시대적 풍조에 따라 고려할 것인가이다. 종교는 늘 경전의 문자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영적 통찰력에도 개방적이어서 그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불교 용어로 ‘뗏목’ 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 뗏목을 타고 질곡의 바다를 건너 축복받은 저 땅을 향해서 자유롭게 걸어갈 수 있는 도구라는 의미다. 그러나 경전에 써진 그대로만 의미를 이해하면 앞으로 영적 성장에는 짐이 되기도 한다. 과거의 해석은 새로운 해석에 양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예수님 때처럼 경전 자체가 걸림돌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이 장은 하나님의 무한한 진리를 유한한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경전의 한계를 지적하며 마무리하고 있다. 예수, 부처, 그리고 기타 종교 창시자들은 하늘의 진리에 대해 자신들이 알았던 일부만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당시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따라 전할 수밖에 없는 환경권에 살았다. 문선명 선생은 모든 경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 완성을 향한 인류를 선도하기 위해서 시대적인 때와 장소에 따라 허락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하신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하늘의 진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세계는 과학시대에 걸맞게 표현된 새 진리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1. 경전의 규칙적 탐구를 통한 교훈 습득
종교 경전
당신의 법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자나 깨나 나는 그 말씀을 되새깁니다.
시편 119.97(기독교)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그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유능하게 하고 온갖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4-17(기독교)
현자들이 거룩한 말씀에서 보았던 행위들은 세베다성전에 명쾌히 언명되어 있나니,
그대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아, 익혀 준행하라!
이것이 선생의 세계로 가는 그대들의 변함없는 길임을 잊지 말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1.2.1(힌두교)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
신명기 6.6-9(기독교)
우리[하나님]는 진리로서 꾸란을 계시하여 그것은 또 진리로서 전해졌니라. 하나님이 그대[무함마드]를 보냄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죄인들을 경고하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꾸란을 수시로, 부분적으로 계시함은 너희가 사람들에게 점차적으로 낭송할 수 있게 함이라. 하나님은 그것을 단계적으로 계시하였도다. 말하라. 너희가 그것을 믿거나 말거나 이전에 지식을 자고 있던 자들은 그것이 그들에게 낭송될 때, 겸손하게 부복하고 경배하여 말하였도다. “우리 주님께 영광이 있으소서. 실로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도다!” 그리고 그들은 엎드려 흐느끼니 그들의 겸손함이 증대되도다.
꾸란 17.105-109(이슬람)
법화경을 읽고 외어 깨우치는 이, 그는 부처의 장엄으로 자신을 장엄하게 하는 이요, 여래께서 어깨로 업어주는 이니라.
법화경 10(불교)
나는 너희에게 신뢰를 주노라. 너희가 그것에 집착하는 한 잘못되지 않으리라. 그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린 밧줄이니 바로 꾸란이다.
다리미 하디스 1(이슬람)
경전과 그것의 취지에 온 마음을 전일하라. 이로써 생사의 윤회가 멎으리라.
아차랑가 수트라 5.122(자이나교)
거룩한 말씀이 스승이며, 이에 대한 지극한 명상으로 내가 그의 제자가 되리니,
불가해한 그의 가르침에 침잠함으로써 내가 미망의 사슬에서 벗어나리라.
아디 그란트, 람칼리 싯다 고슈티 M.1, p.943(시크교)
토라에 힘쓰는 자,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나아가 전 세계는 그에게 빚질 것이다. 그는 친구, 사랑받는 이, 만인의 연인, 인류의 연인으로 불릴 것이다. 그는 겸손함과 경건함의 옷을 입기 때문이다. 토라는 그를 정의롭고 경건하며 올곧고 신실한 사람으로 인도한다. 뿐만 아니라 죄를 말리하고 덕에 가깝게 인도해 준다.
미슈나, 아보스 6.1(유대교)
한 무리가 하나님의 집에 모여 하나님의 책을 연구하고 함께 공부할 때, 하나님이 현현하시고자 자비가 그들을 감싸고 천사들이 그들을 둘러싸도다. 하나님은 그분의 것 가운데 그들을 기억하리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 36(이슬람)
두 사람이 함께 앉아 나누는 말이 토라를 따르는 것이면, 쉐키나가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미슈나, 아보스 3.2(유대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마태복음 18.20(기독교)
말씀 선집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먼저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앎이 없이는 생길 수 없다. 우리가 경전을 연구하는 것도 결국은 진리를 알아서 믿음을 세우기 위함이다.
(원리강론, 총서)
그러므로 부활섭리를 하시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책임분담으로서의 섭리를 위한 말씀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타락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으로서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만 그 뜻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원리강론, 부활론 2.1)
요한복음 5장 24절을 보면 ‘내 말을 듣고 도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것은 불에 태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왜 말씀을 믿지 않으면 심판하느냐? 에덴에서 말씀을 믿지 않아 불신의 조상이 되었으니 이것을 제거하고 이 이상 될 수 있는 믿음으로 말씀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능가할 수 있는 믿음이 없어 가지고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구약성경을 믿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될 때 메시아로 선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했던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믿어야 됩니다.
(69.128, 1973.10.23)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는 제일 슬픈 것을 보아야 합니다. 천국에 대한 내용이나 묵시로 같은 것은 빼놓더라도 제일 슬픈 것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의 가까운 친구가 되려면 그 사람의 제일 슬픈 사정을 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리를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내용의 말씀을 여러분이 찾아나가야 됩니다. 그런 말씀이 이 땅 위에 나타나 여러분이 그 말씀을 듣게 될 때는 뱃속에서부터 한없는 설움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뱃속에서부터 통곡이 우러나올 것입니다. 열흘, 백날, 천날 울어도 한없이 울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는 말씀이 이 땅 위에 나와야 하나님의 복장을 들춰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찾아야 됩니다.
(10.137, 1960.09.18)
하나님이 원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어느 세계를 가든지 훈독회를 해야 합니다. 마을에 찾아가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훈독회입니다. 훈독회를 좋아하면 천국 갑니다. 훈독회를 열심히 하면 영계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훈독하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영계에 있는 신령이 재림하고 영인 재림협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훈독은 영계를 동원하는 길이 됩니다. 성령의 역사도 가정을 바로 세우고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훈독회를 해야 합니다. 훈독회하는 목적이 말씀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닮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훈독회를 통하여 참가정이 하나 되는 것처럼 우리도 훈독회를 통하여 참가정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321.32, 2000.02.14)
3. 영혼의 통로에 불과한 경전의 문자에 집착하지 말자
종교 경전
주 마하비라께서 가우타마에게 말했다. “다르마가 현자들에 의해 직접 현시되지 않을 때, 그것은 말이라는 쇠 그물을 통해 나타난다. 추측은 그 창문을 덮는 쇠 그물이다. 다양한 종파와 학파는 그와 같은 간접적인 통찰에서 나온다. 기우타마여, 그대에게 제시된 길은 현자의 직접적인 길이다. 부지런히 정진하여 다르마를 보는 현자가 되어라.”
웃타라디야야나 수트라 10.31(자이나교)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고린도후서 3.6(기독교)
마하마티여,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나 딸이 언어에 집착하지 않도록 잘 유념하게 하여라. 언어란 그 의미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는 문자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가락 끝을 쳐다보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여라. 어떤 사람이 손가락 끝으로 어떤 것을 가리킬 때, 그 손가락 끝이 곧 가리켜지는 대상이라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말이라는 그 손가락 끝에 바로 그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며, 손가락 끝에 불과한 말에 집착하는 성향 때문에 궁극적 실재를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 손가락 끝을 보면서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대는 스스로 열심히 정진하여 의미 자체를 파악하도록 하여라.
능가경 76(불교)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있으면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게 된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해 있으며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를 잊게 된다. 말은 생각을 전하기 위해 있으며 뜻을 알고 나면 말을 잊게 된다. 나도 어찌하면 말을 잊은 사람을 만나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까?
장자 26(도교)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여행 중이었다. 그는 큰 물결이 넘실대는 강을 만났다. 이쪽 언덕은 위험하지만, 건너편 언덕은 안전하고 위험이 없다. 건너편 언덕으로 가는 나룻배도 없었고 다리도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 강은 폭이 넓고 수량이 엄청나게 많은데, 이쪽 언덕은 위험으로 가득하지만, 저쪽 언덕은 안전하고 전혀 위험이 없다. 건너편으로 가는 배도 없고 또한 다리도 없다. 만일 내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을 모아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열심히 노력하여 저 언덕으로 건너가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을 모아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열심히 저어 안전하게 건너편 언덕으로 건너갔다.
건너편 언덕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생각했다.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뗏목의 도움으로 나는 두 손과 두 발로 열심히 노력하여 안전하게 이쪽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 내가 이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간다면 좋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가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가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건너편으로 건너가 언덕에 닿았을 때, 만이 그가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뗏목의 도움으로 나는 두 손과 두 발로 열심히 노력하여 안전하게 이쪽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이 뗏목을 뭍에 끌어올려 놓거나 정박시켜놓고 어디든 가는 것이 좋겠다.’ 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뗏목과 유사한 가르침을 설했다. 나의 가르침은 건너기 위한 것이며, 결코 짊어지고 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들은 그 가르침이 뗏목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설사 선법이 대해서조차도 집착을 버려야 한다. 선법에 대해서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악한 일들에 대해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맛지마 니카야 1.134-35(불교)
말씀 선집
타락된 인간은 신령에 대한 감성이 극히 둔하기 때문에, 대개 진리 면에 치중하여 복귀섭리 노정을 따라 나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들은 흔히 낡은 시대의 진리 관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복귀섭리가 새로운 섭리의 시대에로 전환하고 있어도 그들은 이 새 시대의 섭리에 쉽게 감응하여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집착되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신약시대의 섭리에 호응할 수 없었던 역사적인 사실은 이것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러나 기도로써 신령한 것을 감득할 수 있는 성도들은 새 시대의 섭리를 심령적으로 알게 되므로, 낡은 시대의 진리 면에서는 상충적인 입장에 서면서도 신령을 따라 새 시대의 섭리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중에는 구약성서에 집착된 인물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 마음에 느껴지는 심령을 따라간 사람들뿐이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말세에 있어서 극심한 심령적인 초조감을 면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막연하나마 신령을 감득하여서 마음으로는 새 시대의 섭리를 따르려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에 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령 적으로 이러한 상태에 처한 신도들이 그들을 새 시대의 섭리에로 이끌어주는 새 진리를 듣기만 하면, 신령과 진리가 동시에 그들의 심령과 지능을 깨우쳐서 새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요구를 완전히 인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마론 5.2)
4. 경전은 하늘 진리의 한정된 부분을 교시
종교 경전
만일 땅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펜이고 바다와 일곱 대양을 더하여 그것을 돕는다 하더라도 (잉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할 수 없으리라. 실로 하나님께서는 강하시고 현명하시니라.
꾸란 31.27(이슬람)
통찰력 있는 바라문에게 모든 경전들이란 사방에 홍수가 났을 때 물탱크 정도에 불과하다.
바가바드기타 2.45-46(힌두교)
항아리에 담긴 바닷물은 바다라고 부를 수도 없고 바다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다만 바다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절대 진리에서 나온 하나의 교의는 진리라고 부를 수도 없고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비디야난디, 탓트바르타슬로카바르티카 116(자이나교)
말은 네 방면에서 가늠된다.
지혜로운 자는 이 네 구분을 아는 통찰을 지닌다.
비밀 속에 감추어진 세 방면은 아무런 움직임도 야기하지 않는다.
네 번째 방면은 사람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
리그 베다 1.164.45(힌두교)
우리가 가진 토라는 하늘 지혜의 불완전한 형태이다.
창세기 랍바 17.5(유대교)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16.12-13(기독교)
모든 시대에 성서가 있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삭제하시며 원하시는 대로 확정지으시니 성서의 근원이 그분에게 있노라. 우리(하나님)가 그들에게 약속한 것의 일부를 너에게 보여준다거나 또는 우리(하나님)가 너를 불러들인다고 해도 너는 오직 메시지를 전 달할 뿐이며 계산은 우리가 할 것이니라.
꾸란 13.38-40(이슬람)
홀로 명상 중에 있던 존자 말룽키야풋타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은 견해들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제쳐두고 배척하셨다. 즉 세계는 영원하다든가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계는 무한하다든가 세계는 무한하지 않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육체는 육체고 영혼은 영혼이라든가, 성자는 사후에 존재한다든가 성자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세존께서는 이에 대해 내게 말씀하지 않았다. 세존께서 이에 대해 나에게 소상하게 일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마땅하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말룽키야풋타야, 만일 어떤 사람이 독이 진하게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나 친척들이 와서 그를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런데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이 전사계급인지 바라문계급인지 평민인지 아니면 천민인지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또는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의 이름과 성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또는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 중간인지 알기 전까지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하자. 또는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의 피부색이 검은지 거무튀튀한지 노란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또는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이 어떤 마을이나 읍내 또는 도시에서 왔는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말룽키야풋타야, 그러면 이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알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말룽키야풋타야,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세존께서 세상이 영원하다든지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든지 하는 등에 대해 나에게 설명해 주기 전에는 세존 밑에서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래로부터 그 설명을 얻기 전에 죽을 것이다.
종교적인 삶은 세계가 영원하다든가 세계가 영원하다는 교의에 의지하지 않는다. 세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교의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가 영원하다든지 세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교의를 가지든 아니든 태어남, 늙음, 족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있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지금 여기서 파괴할 것을 가르친다... 그와 같은 견해들에 대해 답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고, 종교의 본질과도 무관하며, 욕정에 대한 혐오나 억제, 지멸, 적정, 초세간적 능력, 궁극적 지혜, 그리고 열반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에 대해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맛지마 니카야 1.426-431(불교)
말씀 선집
신령과 진리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지만, 무지한 상태로부터 점차적으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인간에게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나 방법은 시대를 따라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이 아직도 몽매하여 진리를 직접 받을 수 없었던 구약 전 시대에는 지닐 대신으로 제물을 드리게 하셨고,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짐에 따라 모세 때는 율법을, 예수님 때는 복음을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지 않고, 그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 14:6).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진리 되신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어서 그 말씀을 받는 대상에 따라서 그 범위와 정도와 방법을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의 문자는 진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요, 진리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입각해 볼 때, 신약성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있어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대단히 저급하였을 대의 인간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해 주셨던 하나의 과정적인 교과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사람들은 깨우치기에 알맞도록 주셨던,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비유 또는 상징적인 표현 방법 그대로를 가지고 현대과학 문명인들의 진리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날의 지성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고차적인 내용과 과학적인 표현 방법에 의한 것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