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인내
어떤 가치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란 단순히 다가올 운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꾸준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일단 결의를 하고 일을 시작하면 그 다음에 포기는 없다. 종종 결과는 아주 마지막 순간까지 가서야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 끈기는 반대나 실패, 연장이 있더라도 초심을 꾸준히 지킴으로써 길고 고통스러운 길을 참는 것이다. 자기가 세운 원칙을 포기하고 지름길을 가거나 방향을 전환하고 싶은 유혹들을 물리치는 인고의 자세가 필요하다. 경전의 말씀은 인내의 덕을 다양한 은유로 설명한다. 땅에 우물을 파거나 나무에 구멍을 뚫는 것, 느리지만 굴하지 않고 바위에 흘러들어 구멍을 내는 물과 같은 것에 인고의 노력을 비유한다.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의 인고 세월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해방하고자 사랑과 희망으로 타락한 자녀들의 죄와 불복종을 참으시며 악과 슬픔으로 점철된 수천 년을 인내해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끈기와 인내를 이야기하는 지금, 하늘의 아들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고 노력을 닮아나야 되겠다. 고난을 참고 이겨낸 욥의 이야기는 제15장 ‘시험’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1. 인내, 감내와 참음
종교 경전
실패하고 또 실패하더라도 낙담하지 말라. 새로이 시작하고 또다시 시작하라. 행운의 여신은 초지를 일관하는 자에게 마침내 미소를 보내리라.
마누법전 9.300 (힌두교)
인내는 하늘도 설득할 수 있다.
탈무드, 산헤드린 105a (유대교)
행운은 만사를 늘 숙명과 타의에서 구하려는 자들을 저버리며, 뜻한 바를 굳게 잡고 끝까지 나아가는 자를 돕는다. 이에 우리는 언제나 능동적이며 깨어 있어야 하느니라.
마트시야 푸라나 221.2 (힌두교)
공자께서 강가에 서서 말씀하셨다. “저렇듯이 모든 것이 밤낮을 쉬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구나!”
논어 9.16 (유교)
고기 잡는 어부와 짐승 잡는 사냥꾼과 밭가는 농부는 다만 자신의 살 궁리를 하여서도 춥고 더운 온갖 고통을 참아내거늘, 세상 모든 이들의 즐거움을 구하여 나선 몸인 내가 어찌 참아 견뎌내지 못할쏘냐.
샨티데바, 보살행의 도 4.40 (불교)
일이 잘되거든 행복을 누려라. 일이 틀려가거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아라. 아무도 한치 앞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라.
전도서 7.14 (기독교)
너희 믿는 자들이여! 인내와 예배로 도움을 구할지니, 실로 하나님은 인내하는 자편에 있느니라. 하나님은 두려움과 배고픔, 그리고 재산을 생명 및 수확의 손실로 너희를 시험하도다. 그러나 인내하는 자들은 재앙이 그들에게 덮칠 때 “오, 주여! 우리는 주님 안에 있으며 주님께로 돌아가나이다!”라고 말하도다. 그들의 기도는 주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은총이 내리리니 그들은 인도 되리라!
꾸란 2.153-157 (이슬람)
나나크여, 고난이 왔을 때 즐거움에 대해 물음이 쓸모없으니, 즐거움과 고난이란 주어질 때 반드시 받아 입어야 하는 의복과 같노라.
따져 물음이 무익하나니, 다만 만족함이 최선이라.
아디 그란트, 바르 마즈, M.1, p.149 (시크교)
우리는 포기자의 삶을 시작하는 때에 지녀야 하는 신념을 조금도 가감없이 지녀야 한다. 우리는 변덕스런 마음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아차랑가 수트라 1.36-37 (자이나교)
40세가 될 때까지 전혀 무학이었던 랍비 아키바가 어느 날 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도에다가 구멍을 내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물이 돌을 닳게 만든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부드러운 물이 돌에 구멍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분명히 딱딱한 철로 뒤덮인 것 같은 율법의 말씀도 인내와 부드러운 마음을 동반한다면 무지를 깨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학업에 열중하였다.
탈무드, 어보스 드 랍비 나단 7 (유대교)
배우지 않을지언정, 한번 배우면 능해지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을지언정, 한번 물으면 알지 않고는 그만 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한번 생각하면 얻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한번 분별하면 밝히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할 바엔 독실하게 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한 번에 해낼 수 있는 일을 나 자신은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해낼 수 있는 일은 나 자신은 천 번에 한다. 과감하게 도를 따르고 행할 수 있다면,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고 유약해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중용 20 (유교)
여호와께서는 너희에게 은혜 베푸실 날을 기다리신다. 너희를 불쌍하게 여기시어 도우러 일어나신다. 여호와는 공평무사하신 하나님, 복되어라, 그분을 기다리는 자여!
이사야 30.18 (기독교)
말씀 선집
참을 인(忍)이라는 한자를 보면, 참는다는 말은 마음에 칼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큰 짐을 지고 큰일을 하려면 참는 것이 몇 백, 몇 천, 몇 만, 몇 백만 무한이어야 합니다.
(124.155-156, 1983.02.06)
동양에서 참는다는 말은 마음에다 칼을 들이대더라도 참는다는 뜻입니다. 마음에다 칼을 꽂으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천 번 참는 사람은 천 번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93.320, 1977.06.12)
이것을 찾아 나가는 데는 무한한 원수들이 가로막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과 싸우고 또 싸워야겠고, 나아가고 나아가며, 부딪치고 부딪쳐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인내의 제단을 내 어깨로 고이고, 발로 고이고, 손으로 고이고, 몸으로 고이고, 머리로 고이고, 인내의 고개를 넘기를 각오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6.92, 1959.03.29)
쓴 약을 먹으면서도 좋아한다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쓴 약은 그 쓴맛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쓴맛이 난 후에는 이게···. 쓴 약을 먹어 보십시오. 진짜 맛을 보십시오. 쓴맛을 진짜 보게 되면 그 후에는 단맛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쓴 약을 마시고 나면 향기가 있습니다. 향기로운 맛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곰의 쓸개를 알죠? 곰의 쓸개를 먹어 보면 처음에는 쓰지만 맨 나중에는 단맛이 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쓴맛보다도 그 단맛과 향기로운 맛을 알게 될 때 쓴 약도 통째로, 바가지로 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은 쓴맛 가운데 숨어 있는 단맛과 향기로운 맛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주고받는 이치입니다. 달면 쓰고 쓰면 달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98.205-206, 1978.08.01)
선생님은 아무리 피곤할 때라도 해야 할 책임을 생각하면 모든 피곤이 일시에 달아나 버린다.
(뜻길, p.120)
오래 참는 길이 종교의 길이고, 오래 참고 희생하는 것이 종교의 길입니다. 인내와 희생으로 찾아진 위대한 사랑의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할 때, 그 이면에는 희생이 깃들어 있고 인내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112.51, 1981.03.29)
선한 편이 어떤 것이냐? 오래 기다리고, 오래 참고, 오래 소망을 두려고 하는 것이 선한 편이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악한 편은 그게 없습니다. 내게 불리하면 주먹이 가고, 대번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신입니까, 악신입니까? 하나님은 선신입니다. 사탄이 악신입니까, 선신입니까? 악신입니다. 그 이블 갓이니 굿 갓이니 하는 것은 누가 정하는 겁니까? 무것 갖고 정하는 겁니까?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저 고난 가운데서도 참고 분해도 참는 것입니다. 참을 뿐만 아니라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서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갖고 나가야 됩니다. 그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걸 못 참게 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못 견디게 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절망적인 그 사람을 위해서 그런 놀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93.112, 1977.03.21)
예수님이 죽어서 승리한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참고 가는 길, 위하여 사는 원칙을 세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 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왜 그렇게 안합니까?’ 했다면 다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랬기 때문에, 참고 넘어갔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그게 훌륭한 것입니다.
(76.227, 1975.05.21)
세상 그 어떤 고문과 형벌도 본인의 하늘 길을 좌절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여섯 번에 걸친 감옥살이도 자식들을 찾아 나선 참부모의 길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싸늘한 감방에 앉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보면서 ‘저 물방울이 언젠가는 바위를 뚫듯이 내 눈에서 떨어지는 이 뜨거운 눈물이 기필코 얼어붙은 하나님의 한서린 가슴을 녹이고 해방 석방시킬 그날이 오리라.’고 다짐하고 맹세하며 살아온 사나이의 생애입니다.
(447.168, 2004.05.01)
하나님은 사탄세계와 지옥세계까지 품을 수 있고 또 거기에서도 참고 견딜 수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사탄들까지도 그 앞에는 머리를 숙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최후의 승리자, 최후의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고자 원한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으심을 여러분의 참음으로, 하나님의 견디심을 여러분의 견딤으로 여러분의 마음 몸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243, 1958.05.18)
아버지가 그러하시기에 아들딸 된 저희들도 그러하고, 아버지가 그러한 길을 가시기에 저희도 그러한 운명의 길을 가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 이 도상에서 지치지 말고 백절불굴의 심정을 가지고 최후의 승리자로 결정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젠 승리했다고 할 수 있는 안식의 한날, 너희는 내 것이요, 이 천하는 나의 아들딸인 너희들의 것이라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 한 날까지 참고 견디어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날을 맞이하기까지 고난에 동참하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3.236, 1964.03.22)
2. 결코 포기하지 마라, 끝까지 견뎌라
종교 경전
성서는 임무를 시작하는 자에게가 아니라 임무를 완수한 자에게 공적을 치하한다.
탈무드, 소타 13b (유대교)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가복음 13.13 (기독교)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다.
창세기 19.26 (기독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꾸준히 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9 (기독교)
그대는 큰 강을 건넜다. 어찌하여 그대는 강가에서 꾸물거리고 있는가? 가우타마여, 서둘러서 피안에 닿아야 한다. 항상 주의하라!
웃타라디야야나 수트라 10.34 (자이나교)
인의의 도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을 우물 파는 사람에게 비유할 수가 있다. 우물을 구인까지 팠어도 물이 안 나온다고 도중에 그만두면, 이는 마치 우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맹자 VII. A.29 (유교)
가령 어떤 이가 나무 속 깊은 곳에 자라나는 고갱이를 구하려 숲으로 갔는데, 다만 죽은 나뭇가지와 가랑잎을 한 짐 지고 나와서는 그가 구하는 바를 얻었다고 즐거워한다면, 그가 어리석지 않는가?
모든 슬픔에서 벗어날 길을 구하여 나선 이가 다만 조금밖에 나아갈 수 없는 길을 따라가 곧 그 끝에 닿고는 이로써 뽐내고 자부심을 지닌다면, 그는 고갱이를 구하려 숲에 들어간 이가 죽은 나뭇가지와 가랑잎 한 짐에 만족하여 돌아오는 바와 다르지 않다.
또 어떤 이는 나무 속의 고갱이를 구하러 숲으로 들어가, 다만 나뭇가지 한 바리를 싣고 돌아와 만족한다. 자신의 마음이 차츰 맑아지고 생각이 고요해지기 시작하는 이가 곧장 자신의 노력을 늦추고 뽐내며 자만하는 이는 바로 이와 같다.
또 어떤 이는 나무 속의 고갱이를 구하러 숲으로 들어가 그 대신에 장작을 한 바리 싣고 나와 이로써 만족한다. 자신의 마음이 차츰 맑아지고 생각이 고요해지기 시작하는 이가 곧장 자신의 노력을 늦추고 뽐내며 자만하는 이는 바로 이와 같다. 또 어떤 이는 나무 속의 고갱이를 구하러 숲으로 들어가 그 대신에 장작을 한 바리 싣고 나와 이로써 만족한다.
정진하여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얻은 이가 다만 이로써 만족하여 뽐내고 자만하는 이는 바로 그와 같다. 이와 같이 흡족하지 못한 노력을 하고도 쉽게 만족하여 자신의 노력을 늦추고 뽐내며 으스대는 이들은 쉽게 나태와 방종에 빠지리니, 필경 이들은 다시 고통과 슬픔을 만나게 되고 만다.
맛지마 니카야 I.192-193 (불교)
증자(曾子)가 말하였다.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짐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어짊(仁)으로써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라야 끝나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
논어 8.7 (유교)
말씀 선집
성경(마 24:1-14) 말씀 가운데 끝 날의 징조에 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끝 날에는 신앙을 중심삼고 살아나가기가 어렵다는 사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혼란기를 극복하여 승리자가 되려면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4.237-238, 1958.05.18)
어디까지 참고 견뎌야 되느냐 하면 끝까지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참고 견뎌 나오신 분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의 천품과 피와 살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 아버지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44.28, 1971.05.04)
신앙생활은 하루아침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생 동안···. 신앙생활 가운데 있어서, 내가 죽더라도 영원을 중심삼고 신앙해 나가는 길에 있어서, 내가 그 절개를 지켜야 할 것이 문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중심 되는 골자가 있어야 됩니다. 영원히 믿고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나라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59.234-235, 1972.07.23)
여러분에게 참음이 있다 하지만 그 참음이 역사적인 참음의 종착점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인연된 사람들이 지쳐서 못 가겠다고 합니다. 통일교회는 좋지만 어려워서 못 가겠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땅을 두고 보면 행복한 자일지 모르나 하늘을 두고 보면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과연 가기가 어렵습니다.
가는 길은 눈물의 길입니다. 보고 울고, 느끼고 울고, 싸우면서 우는 눈물의 길입니다. 눈물이 더 연속되어야 하는, 즉, 더 참음의 눈물을 고대하시는 하늘의 심정이 있는 것을 알고 하늘이 처량한 모습들인 우리를 기다리는 것을 알게 될 때, 내가 참았다는 그 사실도 하늘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해방 이후 오늘까지 나왔으나 아직까지 내 참음의 한계를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또 끝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끝나기를 바라는 그 시간서부터 자기를 살필 것이며, 그 시간서부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느껴봐야 됩니다.
(6.89, 1959.03.29)
하나님은 한번 딱 정하면 억 천 만 년이 가더라도 변하지 않고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마음을 보게 되면 하루에도 몇 번 변합니다. 아침에는 ‘이렇게 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했다가는 저녁에 가서는 ‘아이쿠···’ 한다는 것입니다. 수련을 받을 때, 말씀을 듣게 될 때 ‘그렇게 해야 되겠다’ 하고 결심을 하지만 돌아서게 되면, 며칠도 안 가서 사회에 부딪치게 되면서 다 흘려버립니다.
하나님은 한번 결심하면 그것을 몇 천 년이고 문제삼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분입니다. 가다가 이러고저러고 하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내가 뜻을 위해 간다’ 하지만 금년 말, 혹은 내후년, 혹은 십 년, 이십 년, 일생을 그렇게 갈 겁니까? 이것이 내려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는데는 ‘내가 좋아야 가지 나쁘면 못 가겠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참이라는 것은 내가 죽든지 살든지 참입니다. 그것은 죽음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이요 변하지 않는 불변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나, 죽음 위에 있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극복해야 되고, 변치 않는 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틀립니다.
이것들이 부딪치게 되면 변하는 것은 깨져 나가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완연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이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때 죽음을 극복하고 삶으로 남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넘어서야만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두고 볼 때 참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때는 언제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다음에는 죽음과 삶이 여기에 나타나는 때입니다. 그래서 둘이 대결하는 때입니다.
(66.43-44, 1973.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