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세계경전 - 제3부 인생의 여정 - 제11장 성장, 책임, 그리고 운명)

무지... | 20180531062843

결단
   
도덕적 삶은 목적 있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단을 필요로 하는 삶이다. 자연적으로 선하게 되는 사람은 없다. 목적 없이 삶을 따라 흘러가는 사람은 악한 세류 속에 빠져 익사하기 쉽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갈림길에 서게 되는데, 더 선한 길과 더 악한 길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의 책임이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삶과 죽음, 좁은 문과 넓은 문, 두 주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우리의 결단력이라고 한다.
  
문선명 선생은 인간은 중간적 존재여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선과 악의 힘에 의해서 어느 방향으로도 끌려갈 수 있다고 하신다. 이것은 양심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과, 자기 중심의 욕망을 추구하라고 자극하는 사탄 사이의 갈등이요 싸움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지켜나가는 것은 각 개인의 책임이다.
  
종교 경전 
  
선과 즐거움 둘 모두가 사람에게 주어진다. 고요한 영혼의 사람은 그 둘을 잘 검토하고 분별한다. 참으로 그는 즐거움보다 선을 좋아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탐욕에서 즐거움을 선택한다. 카타 우파니샤드 1.2.2 (힌두교)

인간은 항상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서 있다.
처세훈 18 (피엘교단)
   
진실로 두 길이 있으니, 하나는 세간의 유익에 이르는 길이요, 하나는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부처의 제자인 비구는 이를 깨달아 세간의 찬사에 즐거워하지 말라. 다만 무집착을 닦으라. 
법구경 75 (불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제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24 (기독교)
    
하나님께서 비유하신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여러 주인에 속한 사람과 한 주인에게만 속한 사람이 있을 때, 이 둘을 비교하면 같을 수 있겠느냐?
꾸란 39.29 (이슬람)
  
보라, 오늘 내[모세]가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어 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에 복종하여 복을 받겠느냐? 아니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에 불복하여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알지도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저주를 받겠느냐?  
신명기 11.26-28 (기독교)
  
어느 쪽이 지고의 선인지 두 귀로 들으라.
사람마다 스스로 선택해야 할 두 편을 명철한 마음으로 보라.
큰 시험이 우리의 관심 속에 수행되도록 미리 경계하라.
처음에 그 쌍둥이 영들이 그들의 본성을 나타냈으니,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선과 악이 그들의 본성이라.
지혜로운 사람은 그 두 본성 중에서 바른 선택을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 두 본성 중에서 바른 선택을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베스타, 야스나 30.2-3 (조로아스터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가게 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 길로 가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에 이르는 문은 작고, 그 길이 좁아 그길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마태복음 7.13-14 (기독교) 

말하라(오, 무함마드). 설사 많은 악이 그대를 놀라게 해도 악과 선은 같지 않노라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라. 오, 현명한 자들아! 그러면 너희가 번성하리라.
꾸란 5.100 (이슬람)

하나님가 그에게 두 눈을 만들어 주지 않았느냐. 
혀와 두 입술도 하나님는 두 갈래의 길로 인도해 주었느니라.
그러나 그는 험한 길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노라.
험한 길이 무엇인지 네게 알려주랴?
그것은 노예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며
또는 굶주림에 허덕일 때 음식을 주는 일과 같으니라.
가까운 친척의 고아 또는 엎드려 있는 가난한 자 
그리고 믿으면서 서로 인내를 권하고 서로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꾸란 90.8-17 (이슬람)

 
사소한 쾌락을 버림으로써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지혜로운 자는 보다 큰 기쁨을 위해
사소한 쾌락을 기꺼이 버려야 한다.   
법구경 290 (불교)
    
하늘나라는 마치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다시 산다. 또한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마태복음 13.44-46 (기독교)
   
말씀 선집 
  
선과 악이 대립하고 있는 세계에 우리가 있습니다. 마음과 몸을 갈라놓고 선과 악이 서로 끌어당기는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악은 악대로 끌어당기고 선은 선대로 끌어당깁니다. 이처럼 대립된 환경 가운데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 경계선을 어느 쪽으로 넘느냐에 따라서 악이 되기도 하고 선이 되기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경계선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36.55, 1970.11.15)
  
나는 선악의 분기점입니다.  
(109.268, 1980.11.02)
  
원래 인간 시조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되어서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루었다면 그들은 하나님만을 대하고 사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서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사탄도 대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따라서 타락 직후 아직 원죄만이 있었을 뿐 다른 어떠한 선행이나 악행도 하지 않았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의 후손들도 역시 이와 같은 중간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타락사회에 있어서 예수는 믿지 않았어도 양심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면 그는 이렇듯 중간 위치에 있는 것이므로 사탄이 그를 지옥으로 끌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양심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예수를 믿지 않은 한 하나님도 그를 낙원으로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인은 영계에 가서도 낙원도 지옥도 아닌 중간 영계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중간 위치에 있는 타락인간을 하나님은 어떻게 사탄으로부터 분립하시는가? 사탄은 원래 혈통적인 인연을 가지고서 타락한 인간을 대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자신이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무조건 그를 하늘 편으로 복귀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사탄도 역시 인간의 창조주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타락인간 자신에게 다시 그가 침범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한 이러한 인간을 무조건 취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그 자신이 선한 조건을 세울 때에는 하나님 편으로, 악한 조건을 세울 때에는 사탄 편으로 분립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후편 서론 1.1)
  
몸이 하자는 대로 하면 지옥과 통하는 것이요,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면 천국과 통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분기선이 나입니다.  
(214.283, 1991.02.03)
   
영적인 밥을 먹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배고플 때 육적인 밥과 영적인 밥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맛있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살아남고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영적인 밥맛이 육적인 밥맛보다도 더 좋아야 하고, 영적인 힘을 중심삼고 사는 맛이 육적인 힘을 갖고 사는 맛보다도 더 맛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131.211, 1984.05.04)
  
과거지사를 전부 돌아볼 때 지금에 있어서는 이것이 추억의 한 말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때에 있어서는 참 심각했습니다. 자기 생애의 미래를 걸어놓고 어떻게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담판하는 시기였습니다. 이것이 인간만의 결정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인간들의 생각을 넘어 결정적 노정을 취할 수 있는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211.135, 1990.12.30)
   
내가 왜 이런 놀음을 했느냐?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세상 사람으로서 당당히 오늘날 어느 사회에 가든지 똑똑한 사람으로서, 장(長)으로서 넉넉히 한 나라를 움직일 수 있는 이런 자리까지 나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머리가 있고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내가 가만히 생각하면, 내 일생 동안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그것이 누구 때문이냐? 하나님, 하나님을 알고부터입니다. 또 지금까지 고생했다 이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받고, 이런 것이 전부 레버런 문이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희망이 없고 욕망이 없었겠습니까? 청춘시대에 그 귀한 것을 안 가졌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무자비하게 한 번 잘라 버린 이후에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레버런 문이 되었습니다. 
(93.67, 1977.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