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문선명 선생은 나사렛 예수를 모든 종교 창시자 중 최고의 성인으로 간주한다. 문 선생님은 예수님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철저하게 연구했다. 예수님에 관한 그분의 설교가 여러 권의 출판물이 될 만큼 많다. 그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모든 것을 완성했다는 일반적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예수님을 이해하지 않는다.
문선명 선생님이 살아서 지상천국을 건설해야 하는 보다 큰 사명을 지녔다고 인식한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예수님의 열망이 좌절되고 재림 때까지 천국 건설이 지연되었으며, 따라서 인류는 수세기에 걸쳐 고통과 투쟁 등이 공전되는 상황에서 생활해야 했다. 문선명 선생은 성서 구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개인적 성품, 사역의 준비, 예수님의 가족과의 관계, 그의 사역노정, 십자가, 그리고 그의 부활 등을 이러한 렌즈를 통해서 성찰한다.
문선명 선생은 예수를 ‘슬픔의 사람’으로 여긴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삼십년 동안 예수님은 가족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적지 않은 오해와 따돌림을 당했다. 당시 모든 유대 남자는 이십 대에 결혼하는 관습으로 비춰볼 때, 예수님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에게 특별히 성스러운 모습으로 수용되지 않고, 오히려 의심스러운 출생으로 상처입고 결혼할 것 같지 않은 이상한 사람으로 이해되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을 시작할 무렵 특히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보듯이, 자신을 영접하도록 유대 백성을 준비한 하늘의 모든 노력은 이미 수포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전하고 싶었던 천국 건설의 복음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고 모호한 비유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영적 정치적 운동을 주도하고 이 세계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예수님의 의도는 결코 밝힐 수 없었다.
그의 사역에 반대하는 세력이 중대될수록 예수님의 슬픔도 한층 더 커졌으며,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또 다른 대안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에는 자신만 남겨놓은 채 도망가고 흩어지는 제자들의 나약함에 예수님의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예수님은 자신이 본래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채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그 이후의 수많은 세대들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게세마네 동산에서 필사적인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그 때까지 군중들은 그를 계속 거부하였으며, 죽음밖에는 다른 길이 없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류를 향해 온 정성을 기울인 예수님의 사랑은 변할 수 없기에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죽이는 적들까지 용서한 사실은 역사를 바꾼 지축을 흔드는 사건이었다.
1. 죄악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종교경전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 모든 징벌과 모든 아픔을 고쳐 주셨다.
마태복음 4.17.23 (기독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디모데전서 1.15 (기독교)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6 (기독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편히 쉬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멍에는 메기 편하고 내가 너희에게 지우는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28-30(기독교)
예수께서 그 집에서 식사를 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한 식탁에 앉게 되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들의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까?”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들으시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복음 9.10-13 (기독교)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삯군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들을 흩어버린다. 그가 달아나는 것은 삯군이 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내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우리 안으로 인도해야 하겠다. 그리하면 그 양들도 내 음성을 듣고 마침내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10.11-16 (기독교)
말씀선집
예수님의 생활은 전부 자신의 책이모가 사명을 완수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책임을 땅 위에 완수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30여 평생의 생애는 영원불변의 실적, 책임을 다한 실적을 이 땅위에 이루어 놓은 생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믿음의 복음이, 남아 있는 이상 그의 생애도 남아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일대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적인 면에서도 책임을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역사해 오신 뜻에 대해서도 홀로 책임을 졌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의 책임을 대신하여 나서는 이가 이 땅 위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1.37, 1956.05.16)
우주적인 의문을 해명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셔야 했던 것이고, 해결되지 않은 인간들의 죄를 해결해 주기 위해 예수님은 오셔야 했던 것이며,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인류의 이러한 의문과 사망과 죄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4천년 역사과정에 오셨던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위해 진실된 생활을 하신 분입니다. 자기를 초월하여 우주적인 의심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셨고, 자기 일신의 영광을 초월하여 우주의 영광을 위하여 수고하셨으며, 자기의 모든 것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한히 희생하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 일관된 마음과 생활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사를 대표하여 하늘 앞에 제일의 선봉자로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적인 의심의 장벽을 헤치고 나서서 자신 있게 ‘나를 믿으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3.14, 1957.09.08)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버지를 찾아갈 자가 없다’ 이것이 얼마나 당당합니까? 좁은 길입니까, 큰 탄탄대로입니까? 그리고 ‘나는 진리’라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진리입니까? 답답한 진리입니까? 모든 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전부 환영하고, 모든 것이 좋다고 하고, 모든 것의 잼대가 될 수 있다고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이라고 할 때, 죽어서 시들어 가는 생명입니까. 발전하는 생명입니까? 그것을 어떤 곳에서 환영을 해야 됩니까?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106.13, 1979.11.04)
이상세계니 혹은 하나의 통일세계니 하는 것은 미완성한 상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무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성한 분, 완전히 아는 한 분을 이스라엘에 보내어 그 나라 사람들과 접촉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보내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주권 국가 형성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시작해야 되고, 예수님과 그 나라 백성이 완전히 하나 되어야 가능합니다. 즉, 메시아를 모시어 미완성한 개인이 완성되는 수속과 가정이 완성되는 수속과, 민족, 국가가 완성되는 수속을 전부 예수님의 뜻을 받아서 일체화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를 통해서 메시아를 맞은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위해서 보내신 것이기 보다도 메시아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 되게 하여 세계를 구워하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54.41, 1972.03.10)
2. 예수 : 하나님의 아들, 말씀의 실체
종교경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 3.16 (기독교)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한다는 말이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네가 믿지 않느냐?…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6-11, 19-20 (기독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 주신 것을 보았고, 또 그것을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요한일서 4.9, 14-16 (기독교)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셨습니다.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으며,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요한복음 1.1-15 (기독교)
말씀선집
예수님은 이 땅위에 태어나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역사 이래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데는 자신이 아니고는 안 되다는 결정적인 선포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바라는 최고의 기준을 설파했고, 그 자리에 섰다고 자부하고 나선 이는 단 하나 예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하나님은 내 안에 있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너희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며 하나님과 자신과의 일체를 말했습니다.
(53.231, 1972.02.28)
예수님은 독생자입니다. 독생자가 뭐냐?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인 사랑인데 그 사랑을 처음으로 몽땅 받을 수 있는 대표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독생자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구세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가르쳐 줬습니다. 그것은 나를 통하지 않고는 사랑의 인연이 연결 안 되다는 말입니다.
(146.168, 1986.06.15)
예수님이 한 말씀 중에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라고 하신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잘했습니까, 잘못했습니까? 잘했습니다. 이 말이 바로 인간으로서 성공을 거둔 말입니다. 인정을 중심삼고 천정과 천륜에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말씀을 종교적인 문제를 걸고 했습니다. 그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신랑 신부의 관계 이상 가까운 관계가 있습니까? 또, 부자의 관계 이상 가까운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신도들과는 한 형제다’라고 했는데 이 이상 더 가까운 관계가 있습니까? 이 말은 무엇을 중심삼고 말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가정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정서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모든 것을 종합해 가지고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9.41-43, 1971.01.09)
성경 말씀 가운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14: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 인간들 앞에 무엇을 예시시킨 것인가. 이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 말씀이 그대로 하나님의 심령에 돌아가 버리고 말았지만, 말씀을 잃어버린 사람도 역시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이 말씀을 인간들에게 주신다는 것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망하던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3.318-319, 1958.02.02)
예수님은 사탄의 핏줄을 전환시킨 깨끗한 내적 혈통적 터전 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시대에 처음 나오신 분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과 한 몸이다’라고 하셨고,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늘나라, 아버지 앞에 갈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갈 수가 없다’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종교 지도자가 있다 하더라도 역사적인 사탄의 더러운 피를 맑혀서 혈통을 전환시키고 하나님과 인연을 맺고 태어난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석가도 공자도 무함마드도, 그 누구도 이러한 배겨을 받아서 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분이 이 땅 위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인류 앞에 있어서 희망중의 희망이요, 생명의 새로운 기원과 부활을 맞을 수 있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53.205-206, 1972.02.21)
3. 예수 : 참사랑, 원죄 없는 제2 아담
종교경전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음 산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 (기독교)
진실로 하나님에게 예수는 아담과 같으니라.
꾸란 3.59 (이슬람)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디모데전서 2.5 (기독교)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세상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고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심을 얻었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히브리서 5.7-9 (기독교)
하나님께서 오, 마리아의 아들, 예수여! 네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아닌 나와 나의 어머니를 두 신으로 섬기라 하고 말하였느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길, 당신께 영광 있으소서, 말할 권리도 없는 제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제가 그런 말을 하였다면 당신은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제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아시지만 저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옵니다. 감추어진 것을 아시는 분은 당신뿐이옵니다.
제가 그들에게 말한 것은 당신께서 저에게 명령하신 대로 나의 주님이자 당신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제가 그들 속에 머물고 있는 동안 저는 그들에 대한 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저를 죽게 하신 후부터는 당신께서 감시자이시며 모든 것에 대한 증인이십니다.
꾸란 5.116-117 (이슬람)
말씀선집 아담과 해와가 창조이상을 완성하여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그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은 원죄가 없는 선한 자녀가 되어 지상천국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인류의 악의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악한 자녀들을 번식하여 지상지옥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대로, 타락한 인간들은 원죄가 없는 자녀로서 거듭나기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를 낳아주는 것은 부모가 아니면 아니 된다. 그러면 타락한 우리들을 원죄가 없는 자녀로 다시 낳아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는 선한 부모는 누구일 것인가? 원죄 있는 악의 부모가 원죄 없는 선의 자녀를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선의 부모가 타락인간들 가운데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모는 하늘로부터 강림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따라서 그는 타락한 자녀들을 원죄가 없는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지상천국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참 버지로 오셨던 분이시다.…예수님은 아담으로서 못 이루셨던 참 아버지로 오셨기 때문에 성경은 그를 후아담이라고 하였고, 영존하신 아버지라 하였다.
(원리강론, 기독론 4.1.1)
예수님도 가치적인 내용을 통해서 보게 될 때 우주와 생명과 바꿀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그 생명에는 사랑이 있고 이상이 통하게 돼 있습니다. 생명과 이상이 자동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생명이 약동하고 이상을 중심삼고 생명이 약동하게 돼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와 위치를 알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높고, 우리 인간은 죄인이고 피조물이니, 가치가 없고, 예수님은 하나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연결됩니까?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사람 편에 서야지 하나님 편에 있으면 어떻게 되냐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한 중보가 있으니 그는 곧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죄인이 어떻게 갑니까?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 뜯어 정리해 놓아야 됩니다. 이론적으로 타당하게 전부 정리해 놔야 합니다. 그는 죄 없는 사람이요, 우리는 죄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교류될 수 있고, 생명과 교류될 수 있고, 이상과 교류될 수 있는 분입니다.
(68.80-81, 1973.10.20)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 혹은 성자들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어떠했을까? 공자나 석가 같은 양반들은 어떠했을까? 공자나 석가 같은 양반들은 어떠했을까? 성인이 뭐냐? 몸과 마음이 우리는 한 시간에 몇 백 바퀴 돌아가는데, 그런 사람들은 한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 물어 보겠습니다. 예수가 남잔가요, 여잔가요? 남자입니다. 그 남자가 여자를 보게 되면 생각이 어땠을까요? 여자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 틀림없이 여자이기 때문에, 자연이치로서 플러스, 마이너스가 만나면 인력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128.78. 1983.06.05)
4. 그리스도 강림 준비와 세계 요한의 책임
종교경전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가 5.2 (유대교)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한 것과 같이, 세계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계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계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고 살았다.
마가복음 1.2-6 (기독교)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 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조차 없고.”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되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 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다’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계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이분 위에 머물렀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6-34 (기독교)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듣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며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요한을 두고 무리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였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러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 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모든 예언자와 율법서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늘나라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 예언을 받아들이고자 하면, 요한 바로 그 사람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복음 11.2-15 (기독교)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서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어 보게 하였을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하고 고백하였다.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엘리야요?”하고 물으니, 그는 “아니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예언자요?”하고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하고 대답하였다.
요한복음 1.19-21 (기독교)
말씀선집
이 사탄세계에 아무 준비도 않고, 기반도 닦지 않고 메시아를 그냥 보내 주면 원수 사탄은 그를 잡아 죽일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역사를 통하여 종교를 세운 것입니다. 그 종교 가운데서도 주류적인 종교를 세워 가지고 하나님 편으로 갈라내어 사탄과 대항해서 이기는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형성하여 그 기반 위에 메시아가 완전히 하나 될 수 있는 국가적 기반을 갖추어 메시아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한 터전이 이 이스라엘, 승리했다는 의미의 이스라엘 나라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74.59-60, 1974.11.12)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 앞에 메시아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수많은 선지자를 연결시켜서 그것을 전달해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바라고 있는 이스라엘민족 앞에 약속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님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메시아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와 하나 되지 못하고 메시아를 잡아 죽였다는 사실, 이것은 수수께끼 중의 수수께끼입니다.
(73.218, 1974.09.18)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이스라엘 선민을 부르시어 저들을 보호 육성하시고, 때로는 그들을 고난과 시련으로써 인도하셨다.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시어 위로하시며 장차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굳게 약속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막과 성전을 지음으로써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게 하시고, 동방박사, 시므온, 안나, 세례 요한 등을 보내시어 메시아의 탄생과 그의 현현을 널리 증거 하셨던 것이다.
특히 세계 요한에 대해서는 그가 잉태될 때 천사가 나타나서 증거 한 사실을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고(눅1:13), 그가 출생할 때 되어진 기사는 당시의 유대 성주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눅1:63-66). 뿐만 아니라 광야에 있어서 그의 수도생활은 모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하고 생각게 할 정도로 놀랄만한 것이었다.(눅3:15), 하나님이 이렇듯 위대한 세례 요한까지 보내시어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 하게 하셨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원리강론,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1.3)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빋고 있는 유대교 신자들이 전부 예수와 하나 되었다면 누가 예수님을 잡아 죽이겠습니까? 누가 잡아 죽이겠느냐 말입니다. 그렇게 됐으면 어떻게 되느냐? 고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도가 되고 제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발바닥과 같은 어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까? 베드로와 같은 무식 장이들과 세리와 창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74.153, 1974.11.28)
하나님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세례 요한에게 직접 교시하셨고, 세례 요한 자신도 도 그렇게 증거 하였으며…. 그러나 그는 무지로 인하여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예수님을 위하여 바쳐야 할 그의 목숨마저 별로 가치도 없는 일에 희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중심이 하늘 편에 있었을 때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증거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영적인 역사가 끊어지고 인간 세례 요한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의 무지는 더욱 더 예수님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게 하였던 것이다.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례 요한은 특히 옥중에 들어가게 된 후부터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인간 세례 요한의 눈에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질 뿐이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도 역시 엘리야가 오기 전에 나타난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하고 질문하여 그 의심을 풀어 보려 하였다. 이러한 세계 요한의 질문을 받게 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3절 내지 19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분개심에 격한 경고의 내용을 가지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눅1:75), 그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고난어린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노정을 출발하실 때, 하늘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또 그것을 증거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늘의 은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세계 요한으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새삼스럽게 자기가 바로 메시아라는 대답을 하시지는 않았다.
(원리강론,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2.3)
마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했습니다. 한 번은 제일 크다고 하고 한 번은 제일 작다고 하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선지자의 사명은 뭐냐 하면 메시아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선지자들은 보지도 못하고 예언을 통해서 메시아를 증거 했지만 세례 요한은 눈으로 직접 보고 증거 했기 때문에 선지자 중에서는 제일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 있는 제일 작은 옛날의 선지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고 다 모시고 있는데 세례 요한은 모시는 데 있어서 제일 꼴찌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위해서 태어나고 죽어도 메시아를 위해서 죽어야 할 텐데, 시시하게 헤로디아의 연애 사건에 말려들어 목이 베여 죽었습니다. 그게 세례 요한의 갈 길입니까?
12절에 어떻게 돼 있습니까?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암만 부정하려고 해도 미스터 문의 말이 옳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예수님 때까지 천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고 힘쓰는 자가 약탈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수제자가 누가 됐느냐? 틀림없이 세례 요한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열두 제자 70문도가 전부 세례요한의 일당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교와 직렬로 통해서 제사장과 서기관을 다 하나로 묶을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였습니다.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주는 예수님 앞으로 사람들이 다 가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이르니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해야 되고 나는 망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례 요한이 겸손한 것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같이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흥하면 자기도 흥하고 예수님이 망하면 자기도 망해야 될 텐데, 다른 길을 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게 된 것은 세례 요한 때문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믿지 못하겠으면 하나님에게 담판기도를 해보십시오,
(69.139-140, 1973.10.23)
5. 그리스도 강림의 세계적 준비
종교경전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하였다.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당황하였다. 왕은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 놓고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 지를 그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너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통치자들 가운데서 가장 작지 않다. 네게서 통치자가 나올 것이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일 것이다.’” 그 때에 헤롯은 그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서, 별이 나타난 때를 캐어묻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하기를 “가서, 그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하였다. 그들은 왕의 말을 듣고 떠났다. 그런데 마침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인도해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그 위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무척이나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그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마태복음 1.2-11 (기독교)
고대 동방의 아이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지혜를 갖고 있었다. 그 지혜는 아브라함이 첩의 아들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 지혜는 아브라함이 첩의 아들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창세기 25장 6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첩들에게서 얻은 아들들에게도 한 몫씩 나누어 주었는데, 그가 죽기 전에, 첩들에게서 얻은 아들들을 동쪽 곧 동방 땅으로 보내어서, 자기 아들, 이삭과 떨어져서 살게 하였다.” 시간이 흐르며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받은 이 지혜를 많이 따르게 되었다.
조하르 1.100b (유대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마태복음 8.11 (기독교)
말씀선집
인도의 불교권, 중국의 유교권, 조로아스터교권 등 여러 종교 단체가 동양 제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각 종교의 영통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227.81, 1992.02.10)
초림 때에는 하나님이 그의 선민을 위하여, 메시아가 강림하시기 430년 전에 선지자 말라기를 보내시어, 메시아가 강림하실 것을 예언케 하시고, 한편으로는 유대교를 쇄신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선민으로서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셨다. 한편 이방인들 간에 있어서는, 이와 거의 동시대에 인도의 석가모니(565-485 B.C)로 하여금 인도교를 발전시켜 불도의 새로운 터전을 개척케 하셨고, 희랍에서는 소크라테스(470~399 B.C)로 하여금 헬라문화시대를 개척케 하셨으며, 또 동양에서는 공자(552-479 B.C)로 하여금 유교로써 인륜도덕을 세우게 하시는 등, 각각 그 지방과 그 민족에 적응되는 문화와 종교를 세우시어, 장차 오실 메시아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심령적인 준비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와 같이 준비된 터 위에 오셔서, 기독교를 중심하고 유대교를 수습하고 헬라문화 및 불교, 유교 등의 중교를 포섭함으로써, 그 종교와 문화의 전역 하나의 기독교문화권 내에 통합하려 하셨던 것이다.
(원리강론,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연장시대 6)
예수님도 아시아계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걸 탕감복귀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서구문명은 로마를 중심삼고 반대로 온 것입니다. 본래 예수님이 죽지 않았으면, 인도의 불교권, 극동 아시아의 유교 종교권이 기독교를 중심삼고 통일권을 먼저 이루어야 했습니다. 종교권이 통일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종교권에 서 있는 최고의 지도자는 영계와 통하기 때문에, 앞으로 하늘이 가는 방향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라를 수습하여 로마에서 독립해 가지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권이 가나안을 복귀해서 분배된 그 땅이 통일되었다 할 때는 틀림없이 아시아가 흡수됩니다.
(229.174-175, 1992.04.12)
6. 가족의 오해
종교경전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셨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자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은 어디에서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까? 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친척과 가족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다.”
마가복음 6.1-4 (기독교)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갔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를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의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에 돌아와서,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
누가복음 2.41-51 (기독교)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하였다.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였다. “여자여,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1-4 (기독교)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다. 무리가 예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마가복음 3.31-35 (기독교)
말씀선집
처녀가 아기를 배서 낳은 것을 기독교인들은 성신이 잉태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까? 그때는 동생들도 저주했고, 동네에서도 전부 다 손가락질을 했고, 동네 아이들의 마사거리가 되어서 쫓겨 다니고 도망 다니던 그런 예수였을 것입니다. 33살이 될 때가지 장가를 못 간 예수라는 것입니다. 사생아인인데다 전부에게 천대받는 사람이니 누가 딸을 예수의 색시로 주겠다고 그러겠느냐는 것입니다.
(243.42-243, 1993.01.17)
예수가 자신이 사생아인 것을 몰랐을 것 같습니까? 다 알았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싸웠습니다.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 볼 때 대답을 안 하니, 자기가 살려 준 것을 중심삼고 싸운 것입니다. 요셉이 물어 봤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성신으로 잉태했다!’하면, 살려 주었는데 무슨 수작이내?’하며 요셉이 믿었겠느냐 그 말입니다. 예수를 놓고 부처끼리 싸우고, 아들딸을 낳아 가지고도 계속 싸움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어서 예루살렘의 성전에 올라갔을 때, 그 부모가 아들을 버리고 사흘 동안 갔다가 찾아와서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하니.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몰랐느냐?’고 했습니다. 그것이 불평이었습니다. 어미 아비가 사흘 동안 아들을 버려두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내용을 감춰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가 막힌 말입니다. 그것을 전부 다 찬양하고 있으니….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믿고 천국 간다고 하지만,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결혼을 못 한 것은 어머니 때문이요, 세례 요한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235.237-238, 1992.09.20)
목수인 요셉의 일을 협조해 주면서도 편안한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심정은 무한한 곡절의 노정을 거쳐 왔다는 것입니다.
(7.334, 1595.10.18)
마리아까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결혼을 돕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해 버린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여인이여,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 한 것도, 가장 귀한 섭리의 요정인 예수님의 신부 맞는 일에 등한시하고서 먼 친척의 혼인잔치를 도우려는 마리아를 책망한 심정이 표출된 것입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이냐?”(마12:48)하신 말씀도 이런 기준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272.210, 1996.04.16)
18세면 결혼하게 돼 있고, 20세면 결혼하게 돼 있는데 왜 33세까지 결혼 못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7살에 자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아담이 16세에 타락했기 때문에 이걸 복귀하기 위해서 ‘나는 이러이러한 과정을 거쳐 가지고 결혼해야 합니다’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7살, 30살까지 세 번씩 결혼할 것을 말했는데 어머니가 들어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266.193, 1994.12.25)
십자가를 지시게 된 직접적인 동기도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하고 유대교인이 반대할 데에 있다기보다는 요셉의 가정에서 그러한 축복의 한날을 갖지 못한 데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한날을 가졌더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30.173-174, 1970.03.22)
7. 광야에서의 3대 시험
종교경전
그 뒤에 예수께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시러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셨습니다. 밤낮 40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떡이 되라고 해 보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때 악마는 예수를 그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사자들에게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소”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도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다시 악마는 매우 높은 산으로 예수를 이끌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이며 “당신이 내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아, 물러나라! ‘주 너희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드디어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습니다.
마태복음 4.1-11 (기독교)
말씀선집
광야노정의 3대 시험에서 예수님이 사탄을 굴복시키고 최후의 승리를 한 곳도 높은 산 꼭대기였습니다. 택함 받은 세례 요한과 그 일당에게 배척을 받고 유대민족에게 배반을 당하고 찾아가는 광야노정의 걸음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 땅 위에 어느 누구도 체휼하지 못한 슬픈 심정을 가지고 걸었던 걸음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하늘의 독생자요, 4천년 역사를 해결할자요, 또한 그 시대와 천추만대의 후대 앞에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표적으로서 나타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백성도 뒤로 하고, 교단도 저버리고, 택한 세례 요한도 요셉가정도 남겨 두고 친구도 없이 홀로 광야로 나가던 서글픈 심정을 우리들은 회상치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결심을 하고 나선 예수는 40일 금식을 하면서 그 한 장소에서 무엇을 회상하였던고, 옛날 선조들이 걸어 나온 슬픔의 노정을 자기 일신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누구보다 절절히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 시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뜻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장한 심정을 품고 나선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떠한 역사적인 선조보다도 확고한 각오를 하고서 사탄을 그 작중에 쥐고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광야에 나가셨던 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산장에 홀로 섰던 예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5.194-196, 1959.01.25)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사탄으로부터 몇 가지의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40일 금식기간에 먼저 먹을 것으로 시험받았습니다. 사탄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굶주린 인간들에게는 희소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부정하고 자신이 먹을 것 때문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살아가는 실제 생활권내에 있어서 모든 조건을 사탄 앞에 잃지 않았다는 입장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인간은 물질을 중심삼은 투쟁역사를 거쳐 왔는데, 예수님께서 사탄의 제1차적인 시험에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물질을 중심삼은 투쟁역사를 종결시키게 되었던 것을 여러분을 알야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어떠한 시험을 받게 되었던가,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이끌려 교회의 성전 꼭대기에 서게 되었는데, 거기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4:6)”라는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민족과 유대교를 지도할 수 있는 종교이념을 갖고 나타나신 예수님에게 ‘뛰어 내리라’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유대교적인 습관과 그들의 주장 앞에 굴복하여 그들의 지도자의 입장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다음엔 무슨 시험이 있었습니까? 사탄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꼭대기에 올려놓고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우주적인 이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세워드리기 위해 사탄의 그러한 요구를 일축해 버리셨던 것입니다.
(3.122-123, 1957.10.13)
8. 예수님의 비유적 가르침
종교경전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되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13.31-34 (기독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그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한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마태복음 13.10-13 (기독교)
말씀선집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30여 평생 눈물을 흘리시며 서러운 고난의 길을 가시면서 말씀을 선포하신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첫째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인연을 회복하기 위함이었고, 그 다음엔 인간에게 천국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천국을 소개하실 때 말씀으로 소개하신 것입니다. 즉, 진리로써 천국을 소개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인간과 영원불변의 인연을 맺기 위한 말씀, 이 땅에 천국이념을 건설하기 위한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들에게 내려주신 것입니다.
참다운 진리를 예수님을 통해 나타내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맺어주기 위해 오셨고, 참다운 진리를 인간들에게 증거 하기 위해 진리를 가지고 오셨던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과 온 피조만물이 소망하는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인연을 회복하기 위해 진리를 선포해 주셨지만, 그 진리와 인연을 맺어야 할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님을 불신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 선포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진리의 말씀이 인간들에게 백퍼센트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인간들이 예수님을 불신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와 상징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진리를 소개해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인간들은 역사과정을 거쳐 오면서 많은 지식을 동원하여 감추어진 진리의 관문을 찾아 나왔던 것입니다.
이제 역사의 종말세대가 되면 인간들이 내외적으로 찾아 나오던 신령과 진리가 만날 때가 올 것고, 또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는 참된 신자로 서게 될 것이며, 예수님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던 진리도 완전히 소개될 것입니다.
(2.126-127, 1957.03.17)
9. 제자를 모으고 천국을 가르친 예수
종교경전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 동생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복음 4.18-22 (기독교)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0.37-39 (기독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래하였다. 잔치 시간이 되어, 그는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하고 말했다. 또 다름사람은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오, 그러니 가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그 종이돌아와서 이것을 그대로 자기 주인에게 일렀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저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하였다. 그런 뒤에 종이 말하였다. ‘주인님, 분부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하였다. ‘큰길과 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초대를 받은 사람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누가복음 14.16-24 (기독교)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내버려진 가지처럼 말라버린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아 불에 던져 태운다.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명령을 지키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4-11 (기독교)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진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복음 10.16-20 (기독교)
말씀선집
민족 앞에 저버림을 당한 예수님은 노동자 모양으로 나타나서, 어부의 친구 모양으로, 그들과 사정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고, 심정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고, 소원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시어서 그들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죽기를 각오하고 이루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싸우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심적인 내용과 심적인 이념을 갖고 증거하고 싸우셨던 연고로 베드로와 같은 어부들이 따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식한 제자들을 택해 놓으시고 3년 동안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세우시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수고하며 봉사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세워 놓으시고 봉사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12제자를 택해 놓으신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소망이 크셨습니다. 유대교단을 움직이고, 제사장들과 모든 서기관들을 주관하기 위하여 하늘이 보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의 이념은 컸고, 그가 가진 욕망도 컸고, 그의 심적 기준도 높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실체이념을 갖고 하나의 개척자의 입장으로 나타났던 예수님을 몰라보았던 당시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타락 직후의 아담 해와 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먹을 것이 생겼다 할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제자들을 찾으셨으며, 입을 의복이 있으면 자기가 헐벗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편안한 자리가 있으면 제자들을 그 자리에 두시고 자기는 천한 자리에 계셨습니다.
(5.225, 1959.02.01)
종교를 믿는 것은 구원받겠다는 것이요, 구원받겠다는 것은 완성의 자리에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인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세상 사탄권내의 어떠한 사랑보다도 믿는 종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맹세하고 나서는 길이 종교의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 이상의 사랑의 자리에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인이 가야 할 길입니다. 사탄세계를 이겨야 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사탄세계 이상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이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의 어머니나 혹은 아들딸이나 처자나 남편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누구보다도 자기를 사랑치 않으면 아버지의 아들딸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사랑으로부터 드러나야 거기서 출발하기 때문에, 메시아의 사랑의 인연을 가지고 하늘로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이것이 불가피적인 원리적 조건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93.326, 1977.06.17)
배고픈 사정으로 책임자와 심정적 유대를 맺을 수 있지, 옷 입는 것으로, 사는 것으로, 교제하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핍박을 받고, 쫓겨 다니고, 그러면서 밤낮없이 일을 해야 되고, 책임분량은 많으니까 안 할 수 없고, 밤낮 뛰어다니면서 그저 너도 울고 나도 울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는 일 외에는 심정적 유대를 이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걸 못 하는 날에는 일본이고 한국이고 지구고 뭣이고 없습니다. 선생님과 심정적 유대는 어떻고, 참부모와 심정적 유대는 어떻고 하는데, 그것을 어디서 찾을 것 같습니까? 찾아보십시오, 없습니다.
그저 쫓겨나고, 부모한테 납치를 당하고, 매를 맞고 그저 이래야 되는 것입니다. 책임자들이 다 그렇게 해 나왔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 여기서 새로운 연결이 이루어지고 세계가 반대해도 끊을 수 없는 유대가 벌어지고, 심정적 가치의 기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런 놀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94.233, 1977.10.01)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계시나, 재림하셔서 주실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초림 때와 똑같은 양상이 나타나게 된다. 초림 때에 있어 하나님은 메시아가 오셨다는 소식을 제사장이나 교법사들에게는 주시지 않고 이방의 점성술자와 순진한 목사들에게 주셨던 것이니, 마치 친 자식이 무지하기 때문에 의붓자식에게 뜻을 준 것과 같은 격이다. 또한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소식도 진부한 신앙태도를 묵수(墨守)하고 있는 오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보다는 도리어 평신도들이나 그들이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이교도 혹은 양심적으로 사는 불신자들에게 먼저 계시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초림 때에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이 선민인 유대교의 지도층이 아니고 그 하민(下民)이나 이방인들이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의 재림 시에도 선민 된 기독교의 지도층들보다 평신도나 비기독교인들이 먼저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예비한 잔체에 참석할 자는 미리 청함 받은 손님들이 아니고, 한길에서 만나는 대로 불러들여진 사람들일 것이라고 개탄하셨던 이유는 바로 여기게 있었다.(마22:8~10)
(원리강론, 재림론 4)
10. 이적기사에도 불신을 받음
종교경전
사도들이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따로 조용한 곳으로 가서 잠시 쉬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거기에 오고 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식사할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배를 타고 조용한 곳으로 향하여 떠났갔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육로를 돌아 그곳에 먼저 이르렀습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큰 무리를 보시니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날이 저물어감으로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여기는 빈들이요, 날도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헤쳐 보내어 근처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가서 저마다 무엇을 사먹도록 하시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반문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떡 이백 데나라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이 먹도록 줄까요?” “너희에게 떡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라.”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알아본 후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사람들을 떼를 지어 푸른 풀밭 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백명씩 혹은 오십명씩 떼로 줄지어 앉았습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린 후에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만족하게 먹고도 떡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은 것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떡을 먹은 사람은 남자만 오천명이었습니다.
마가복음 6:30-40(기독교)
제자들이 말하기를, 오 마리아의 아들 예수여! 당신의 주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식탁을(음식이 차려진_ 내려주실 수 있습니까? 하였을 때 그가 말하기를 너희가 믿는 자라면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들이 말하기를, 그것을 먹기 바라며 우리의 가슴이 만족하기를 바라고 당신이 우리에게 한 진리의 말씀을 알기를 바라며 우리가 그것을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말하길, 우리의 주이신 하나님이시여! 우리들에게 하늘에서 식탁을 내려주셔서 우리들에게 최초이며 최후의 축제일로 하여 당신으로부터의 증거로 해주시옵고 우리에게 생계를 지원해 주시옵소서. 당신께서는 최고의 후원자 이십니다.
꾸란5.112 - 114(이슬람)
그들이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를 만나서 말하였다.“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여라. 그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은 먹지 않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속에는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을 것이요, 마지막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너희가 인자가 전에 있던 것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이 누구이며, 자기를 넘겨 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업삳고 말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그를 따르지 않았다.
요한복음 6:25 - 67(기독교)
말씀선집
하나님 앞에 예수님은 어떠한 변명도 조작도 없이 자기 자체를 잊어버리고 아버지를 대신한 뜻이라면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의 발자취를 인계 받는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30여년의 생애를 거치면서 복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다가 굶주린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즉석에서 5병2어로써 5천여 무리를 먹이는 기적도 베풀었습니다. 생명도 소개하였고, 사랑도 소개하였고,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전체를 다 소개해 주었던 것입니다.
(4.83. 1958.03.09)
복귀의 노정을 걸어가신 예수님께서 이적 기사를 행하신 것은, 기뻐서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쁘고 편안하여서 이적 기사를 행하신 줄 안다면 큰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동정을 안해줄 수 없는 서글픈 사정에 처하여 손을 들어, 아버지시여! 하고 부르게 될 때 여기서 이적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극히 슬픈, 뼈살이 녹아지는 슬픈 장면에서 외치는 그 한 사정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이 이적 기사였습니다.
이적 기사를 예수님이 태만해서 혹은 좋아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벳세다 들에서 5천여 무리가 ‘예수여!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여, 택한 이스라엘의 지도자 이십니다.’라고 손에 손을 흔들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이처럼 이익이 될 수 있는 입장일 때는 찾아왔으나, 시일이 지나 예수가 자기들과 심적 기준이 달라지고, 사정이 달라지고, 표준이 다른 경지에로 한발자국 더 나아가니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걸어온 실천노정에 있었던 현상입니다.
(5.227~228, 1959.02.01)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가 5병2어의 기적을 보여줄 때에는 자신의 메시아요, 민족을 구해주는 구세주로 믿었는데, 정작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는 다 버리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가 하늘을 대한 예수님의 내적인 심정, 즉 하나님에 대해 사무친 심정을 지니신 분이요, 전체의 섭리역사를 책임지고 오실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예수님의 사정을 깨달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또 먼저 따르던 무리들을 따라 민족 전체가 예수님의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3.291. 1958.01.19)
11. 인류를 위해 흘린 예수의 눈물과 불신에 대한 애통, 믿음이 약한 수제자
종교경전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아래 엎드려서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 예수께서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은 “주님, 와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 보시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였는가!” 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 11:32 - 36 (기독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잔과 접시와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눈 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가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마태복음 23:23 - 28(기독교)
그들은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시며 괴로워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그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서,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 비껴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께서 다시 떠나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예수께서 세 번째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그 정도면 넉넉하다. 때가 왔다. 보아라,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마가복음 14:32 - 41(기독교)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대제사장의 하녀 가운데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빤히 노려보고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 그러자 베드로는 부인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다.” 하였다. 그리고 그는 바깥뜰로 나갔다. 그 하녀가 그를 보고서, 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예수와 한패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인하였다.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 당신이 갈릴리 사람이니까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일 거요.”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새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나서 엎드려 울었다.
마가복음 14.66 - 72(기독교)
말씀선집
자기를 위하는 하나님이 참사랑을 가졌다고 말 할 수 있겠느냐? 자기를 없애 버리고 전체를 위하는 하나님이 참사랑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오늘날 타락한 인간을 대해 가지고 울면서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좋아도 눈물이 나고 슬퍼도 눈물이 나지요? 그럼 ‘엉엉’ 울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다 할 때 ‘하하’ 하겠습니까, 어떻겠습니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찾으면서도 울고, 찾고 나서도 둘이 붙들고 ‘엉엉’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겠습니까? 눈물을 흘리고, 콧물을 흘리고, 입물 흘리는 자리에서 눈물만 흘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침이 나오고 코가 나오고 눈물이 나와야 됩니다. 그렇게 한번 울어 봤습니까? 진짜 슬프게 울면 눈물 나오고 콧물 나오고 입물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땀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울어보지 않았으면 참사랑을 찾지 못합니다.
(102.163-164, 1978.12.17)
하나님의 섭리는 이 사탄세계에서 전쟁하는 섭리입니다. 싸움하는 섭리입니다. 예수님도 가만히 잘 사는 유대교인들에게 와서 전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이니 ‘외식하는 사람’이니 했습니다. 전부 전쟁입니다. 아, 유대인들 잘 한다, 교법사들 잘 한다, 율법사들 잘한다고 칭찬해주고, 제사장들 다 훌륭하다. 그랬으면(예수님을) 죽었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무함마드나 공자 같은 사람들이 전부 그렇게 했으면 달라졌을 것입니다.
(95.276 - 277 1977.12.11)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예비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반대하는 것이 슬픔이 아니요, 유대교 교인들이 반대하는 것이 슬픔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3년동안이나 따랐던 제자, 그 사랑하는 제자들이 믿어야 할 때에 믿지 못하고, 증거 해야 할 때에 증거하지 못하고,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하고, 죽어야 할 때에 죽지 못했던 그 한 사실이 예수님에게 가장 큰 서러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3.142, 1957.10.18)
예수님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고 따른 자가 누구였던가. 예수님의 열두 사도가 아닙니다. 그 열두 사도 가운데 세 제자도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따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인간들에게 소개했고,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셨던 예수님 이었지만 인간들과 사랑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천륜의 사랑의 말씀을 전하였고 사랑에 불타는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 이었지만, 붙잡고 ‘내 아들아, 내 아버지!’ 하며 부자의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자들은 졸고 있었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세워가며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그 심정과 사정을 여러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의 말씀이 좋다고 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2000년 전에 예수님은 사랑하려야 사랑할 데가 없었습니다.
(3.58, 1957.09.22)
예수님은 슬픈 30여년의 생애를 보냈사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3년의 공생애가 있었으나 누가 그의 심정을 알았사오며, 누가 그의 사정을 알았사옵니까?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희로애락을 같이하고 슬플 때 같이 슬퍼하고 외로울 때 같이 외로워하며 스승이라고 모시던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스승이 죽음의 길을 갈 것을 염려하여 간곡한 심정으로 하늘을 붙들고 호소해야 할 제자들이 도리어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고 반문하는 처지에 있었으니.
(7.45 1959. 07.12)
이 땅 위에 어느 누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사옵니까? 수심에 잠긴 그 모습을 보고 마음깊이 사무쳐 오는 하늘의 슬픔을 체휼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하늘은 이러한 인간들을 놓고 탄식할 수 밖에 없었음을 아옵니다. 하늘의 심정을 알아 ‘주여!’ 하고 부르는 제자 하나도 갖지 못한 예수님께서 의심으로 점철된 생애노정을 가셔야 했고, 또한 의심을 받으며 그 서글픈 생애의 종말을 맞아야 했던 슬픔을 이 시간 저희들이 마음으로 동정할 수 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간곡한 하늘의 심정을 품고, 하늘 전체의 위업을 품고 인간을 찾아오셨으나 인간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자기들 멋대로 대하였고 배척할 대로 배척하였사옵니다. 외로운 자리로 몰아넣을 대로 몰아넣었사옵니다. 그러나 슬픔에 잠기고 탄식의 자리를 여지없이 밟아나오시면서도, 예수님은 그러한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생명의 동산을 향한 한길을 개척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끌고 겟세마네동산을 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처참한 가슴 앞에, 믿음직한 제자 하나 없었던 서글픈 사정을 저희들이 알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이 사신 것을 알지 못하였던 제자들, 이런 제자들을 남겨 두고 한 생애를 종결지어야 할 입장에 있던 예수님의 심정, 생애의 전부를 인간을 위하여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생애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처절한 심정에 잠기어 하늘을 염려하시던 예순의 마음을, 저희들이 이 시간 동정할 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5.137 - 138, 1959.01.11)
12. 그리스도의 열정과 십자가의 고뇌
종교경전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번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하면서 예수께 항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셨다.
마태복음 16.21-23 (기독교)
예수께서 늘 하시던 대로 밖으로 나가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 그 곳에 이르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들에게 돌을 던져 닿을 만 한 거리에 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 오면 내게서 이 잔을 걷어 가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무리 한 떼가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는 자를 앞장세우고 나타났습니다. 그가 예수께 와서 입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인자를 넘겨주려 하느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지는 사태를 보고 “주님, 우리가 검을 쓸까요?”하고 말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대세사장의 종의 오른편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예수께서 “그만 두어라”하고 말씀하시고 그 사람의 귀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들과 장로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검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으니 나를 강도로 보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서 너희와 함께 있었으나 너희가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의 때요 어두움이 지체하는 때가 되었다” 그 때에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를 모욕하고 때리며 눈을 가리고 물었습니다. “자, 그대를 치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시오” 그들은 계속하여 예수께 무례한 짓을 했습니다.
새벽에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여 예수를 그들의 의회로 끌고 가서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요, 내가 물을지라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인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게 될 것이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라는 것은 너희가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직접 그의 입으로 나오는 말을 들었으니 이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소?”하고 말했습니다.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 앞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고소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 백성을 그릇되게 하여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하고 증언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하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하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네가 말한 대로다”하고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끌고 나가다가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들어 억지로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따르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 여자들은 그를 생각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예수께서는 여자들을 돌아다보시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자녀를 위하여 울어라. 보아라. 사람들이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과,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한 태와 멎을 먹여 본 적이 없는 가슴이 복되다’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산에다 대고 ‘우리를 덮어 버려라’하고 말할 것이다. 나무가 푸른 계절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하거늘 하물며 나무가 마른 계절에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냐?”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사형장으로 예수와 함께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함께 끌려간 죄수도 하나는 그의 오른편에, 하나는 그의 왼편에 달았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그들은 예수의 옷을 제비뽑아 자기들끼리 나누었습니다. 군중은 서서 쳐다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조롱하며 “이 사람이 남을 구원했으니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자기도 구원하게 하라”하고 말했습니다. 군인도 또한 예수를 희롱하면서 가까이 가서 신 포도주를 드리고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거든 자기 자신을 구원하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머리 위에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쓴 패가 있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달린 죄수 중의 하나는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당신 자신을 구원하고 또 우리를 구원하시오”하고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죄수는 날카롭게 반박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낮 열두시쯤 되었을 때에 어두움이 온 땅을 덮어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해가 빛을 잃고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누가복음 22.39-23.46 (기독교)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시기를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하셨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는 뜻이다.
마태복음 27.46 (기독교)
말씀선집
예수께서 죽으러 왔다는 것이 본래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되어진 것이냐, 돌변지사냐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돌변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의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알아봅시다. 누가복음 9장 30절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말씀할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결정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2절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돌아가실 것을 말하니 베드로가 예수께 ‘주여 그러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할 때,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예수가 죽으러 온 거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 말이 죽으러 온 메시아의 말인데 죽지 말라고 하니, 베드로에게 그렇게 지적한 것이 아니냐며 죽으로 왔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이미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십자가의에 돌아갈 것을 결정한 후의 말씀인 것을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죽으러 왔다면 가룟 유다를 두둔했어야지, 너는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그런 말은 모순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죽으러 왔다면 그런 기도를 할 수가 없다 이겁니다. 만일 죽으로 왔다면 왜 하나님 4천 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그렇게 고생시킨 터전 위에 보냈을까요? 강도들한테 보내 주면 대번에 잡아 죽일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육과 영을 중심삼고 영적 세계는 물론이지만 실체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의 발판이 없어지고 유대교의 발판이 없어져, 예수님 혼자 할 수 없으니 십자가에 죽어서라도 제2차의 소망의 길을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라가 반대하고 교회가 반대하니 십자가에 가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불가피하게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걸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73.218-220, 1974.09.18)
예수님의 길은 한결같이 찢기고 몰리고 쓰러지는, 십자가를 진 처참한 걸음이었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까? 무모한 악당들이 채찍을 들어 내모는 처지에 몰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만일 예수가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었다면, 그도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제자를 뒤에 놓고 기도할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한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자기의 사정도 딱 하나, 자기 일신은 민족의 제물이요, 인류의 제물이요, 천륜의 제물인 것을 알았던 것이빈다.
이런 것을 아신 예수님은 자신의 슬픔도 슬픔이거니와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염려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 나타났으나 민족 앞에 배반 받은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것을 더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황태자요, 만 우주의 주인공이요, 메시아였습니다. 그런 예수가 ‘처참한 십자가의 운명이 웬일입니까? 하고 탄식하려면 이 우주를 동원하여 탄식할 수도 있었으나 탄식할 수 없는 자기 자신임이 느껴졌기 때문에, 몰리는 자리에 세게 된 것을 오히려 하늘 앞에 면목 없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교단을 규합하고 민족을 규합시켜 하늘의 왕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아버지 품에 안겨드려야 할 책임을 짊어졌던 예수님은, 그 사명을 뒤로 미루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때 원망할 어떤 무엇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잔을 피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신 것도 자기 일신이 죽는 것이 서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일신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민족의 서러움과 하늘의 서러움이 가중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쓰러지면 후대의 세계 인류 앞에 가중될 십자가가 남아지고, 그로 인해 슬름의 역사가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골고다의 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죽음의 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골고다의 길을 가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골고다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뿐만 아니라 더 어려운 길이 남아질 것을 아신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양손 양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자리, 가시 면류관을 쓰는 자리에 선다하더라도 이것이 자기에게 그쳐지지 않을 것을 아신 예수님은 하늘을 향하여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십자가의 길이 다 끝났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위하여 울며 염려하는 마음의 호소와 하늘과 통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수 많은 선지선열들이 하늘 앞에 저질렀던 모든 잘못을 짊어지고, 하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자기자신을 산 제물로서 하늘 앞에 바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죽어가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장에 노아 때 이상의 심판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예수님이 민족을 붙들고 죽고, 교단을 붙들고 죽고, 십자가를 붙들고 죽는 연고로, 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어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시적인 인연이 후대의 인간, 남아진 이스라엘 민족과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배반하는 후대의 교단과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고 붙들어 나오고 계십니다.
(378.314, 2002.05.21)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면서 심히 지쳤을 때, 그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간 구레네 시몬 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이스라엘민족 가운데에도 이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방사람인 구레네 시몬만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종교가 되지 못하고, 이방의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아 나가겠다는 여러분은 꿈에서라도 구레네 시몬과 같은 행동을 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어야 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변명할 수도 있었고 반박할 수도 있었으나 묵묵히 순응하여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3년 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한 사도들은 온데간데 없고, 생각지 않았던 이방의 구레네 시몬이 당신을 대신하여 처참한 입장에 서게 될 때, 이를 바라보는 예수의 마음은 민망함이 컸을 것이고, 슬픔에 슬픔을 더했을 것입니다.
만일 12사도 중에 어느 누구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사람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며 죽음의 고난도 잊고 도리어 그를 동정하면서 당신의 아픔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여 예수님은 슬픔에 슬픔을 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2740275, 1957.06.16)
예수님은 로마 병정이 창으로 자기의 옆구리를 찔렀어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저들 대신해 죽어 갑니다. 저들 대신해 희생하겠습니다.’ 하는 정신을 가지고 완전히 참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없던 새로운 세계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역사를 보더라도 역사상에 모든 원수는 원수로 갚으라고 가르쳐 주었지,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라고 선언한 것은 단 한 분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 하나님이 바라는 세계가 거기서부터 샘솟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거기서부터 샘솟기 시작한 것입니다.
(130.232-233, 1984.01.29)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갔을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원수의 아들딸이 자기의 독생자를 잡아 죽이는 판국인데도 그들을 원수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잡아 죽이는 입장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넘어가야 하는 하나님의 심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님도 하나님과 아담의 기준을 넘어가려니, 하나님이 사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 자신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병정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패스했기 때문에 사탄이 분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사탄을 사랑했다는 전통적인 정신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참소하지 못하고 분리된 것입니다. 이럼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를 중심삼고 사탄분립 역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언제나 개인적, 가정적으로 사탄 편을 사랑했다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안 됩니다. 죽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따라서 기도해 줄 수 있는 놀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귀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순교하는 그 자리에서 예수와 같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저와 같은 자들을, 하나님이여, 구해 주십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천사장을 사랑해야 할 원칙이 있기 때문에, 그 원리 원칙 기반을 완전히 복귀하기 위해서는 타락한 사탄을 본래 천사장과 같은 자리에서 사랑했다는 입장, 그런 자격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244.154-155, 1993.02.01)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세계에서 가장 몰리는 입장에 서셨던가? 또 하나님이 모른다 하는 입장에 서셨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셨던가? 이것은 인간이 천륜을 배반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 아담이 배반한 것을 탕감복귀 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개인적으로 버림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버림받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라고 하였습니다. 자신 앞에 어떠한 죽음과 고생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을 소화시키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원수들도 그를 지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배척하고 민족이 배척하여 죽음의 자리까지 나아가서도 변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부활의 문이 열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하늘이 여러분을 배척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아버지를 붙들고 섬길 수 있는 각오를 지녀야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부활의 은사권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4.114-145, 1958.03.30)
13.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 예수
종교경전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별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나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이사야 53.3-6 (기독교)
율법을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람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조물은 이런 의식으로 깨끗해져야 할 필요가 있지만,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보다 나은 희생제사로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성소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십니다.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셔야 하였다고 하면 그는 창세 이래로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애시려고 시대의 종말에 오직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히브리서 9.22-26 (기독교)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자기르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 올리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어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11 (기독교)
말씀선집
(예수님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이스라엘의 장래를 책임지고 몰고 나가려고 하다가, 아니 갈래야 아니 갈수 없는 운명의 길을 갔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뿔뿔이 흩어질 때, 예수님은 자기 일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때까지 하나님을 위해 충성해 온 어떤 사람보다도 더 지극한 정성과 강한 책임감과 뚜렸한 목적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간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그 길을 간 것입니다.
(35.23, 1970.09.27)
형제나 혹은 누가 사탄의 꾐에 빠졌을 때, 그 타락한 형제를 되찾아 오려고 하면, 사탄은 그를 아무런 조건 없이 가게 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형제를 되찾기 위해서는 사탄이 그 형제를 되돌려 주는 것보다 더 좋다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을 사탄에게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되찾아 오는 것보다 사탄이 더 좋다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을 사탄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형제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그 형제를 대신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한 형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희생적인 형제가 제2의 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타락한 형제는 그런 조건에 의해서만 해방될 수 있습니다.
(52.20, 1971.12.14)
제물은 반드시 피를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를 보기 좋아 하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조건을 세우게 하지 않는 한, 즉 죽었다는 입장에 세우지 않고는 살려낼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물을 희생시켜 피를 흘리게 해 가지고 지금까지 역사시대를 연결해 나온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를 제물로 탕감조건을 세워 용서해 주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키워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그 위에 메시아를 보냄으로써 신약시대를 맞고 메시아를 중심삼은 승리적 국가를 만들려고 했는데, 이 메시아를 믿지 낳게 되니 메시아가 대신 실체의 제물이 되어 죽은 것입니다. 양은 상징적인 것이고, 양을 잡아 제물을 바친 터전으로써 만들어 놓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구약시대의 열매와 마찬가지이므로 그러한 구약시대의 열매들이 예수와 하나 되었어야 될 것인데 그것이 안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실체 제물로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54.252-253, 1972.03.25)
사탄의 본질은 교만과 혈기입니다. 이런 성질로 세상 사람을 대하는 사탄이었으나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나서 온유 겸손한 입장에 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최고로 높을 수 있고 영광을 누릴 수 있었느나. 예수님은 이것을 다 버리고 온유 겸손한 입장에 서신 것입니다. 사탄이 이런 예수 그리스도와 대결하여 싸우려 했으나 사탄에게는 하나님 앞에 굴복해야 할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끝까지 온유 겸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본질이 교만과 혈기에 반대되는 온유 겸손을 갖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또 엄연히 천리법도가 있는 것을 아는 사탄이기 때문에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온유와 겸손을 들고 나서게 되면 사탄세계도 자연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을 아시는 예수님은 사탄이 하지 못한, 사탄이 할 수 없는 온유 겸손의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온유 겸손한 입장에 서야 중심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 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무엇을 보여주셨는가 하면, 순종과 복종입니다. 순종은 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명령에 따르는 것이고, 복종은 응할 수 없는 환경에서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신하는 인가들에게 이런 순종과 복종의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 역시 사탄의 본질, 사탄의 모든 생활적인 요소를 가로막기 위한 것입니다.
(3.187-188, 1957.10.27)
예수님이 어떠한 심정으로 사탄을 굴복시킨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불쌍하시고 만민도 불쌍하고 만물도 불쌍하다는 심정입니다. ‘아들딸을 잃어버린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셨으며, 주인을 잃어버린 만물이 얼마나 불쌍하겠으며, 자기의 가치와 목적과 위치를 잃어버린 인간이 얼마나 불쌍하겠는가!’하는 폭발적인 심정이 있었기에 사탄이 물러갔던 것입니다.
(9.181, 1960.03.08)
14. 예수를 배척한 인류의 비극
종교경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23.37 (기독교)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9.41-44 (기독교)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안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8 (기독교)
“다른 비유 하나를 들어 보아라. 어떤 집주인이 있었는데 그가 포도원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멀리 떠났다. 열매를 거두어들일 철이 가까이 왔을 때, 그는 그 소출을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의 종들을 잡아서,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또 하나는 돌로 쳤다. 주인이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종들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마침내 그는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똑같이 하였다. 마침내 그는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하였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 그들끼리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포도원 바깥으로 쫓아내어 죽었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올 때, 저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가차 없이 죽이고, 제 때에 그에게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마태복음 21.33-41 (기독교)
말씀선집
2천년 동안의 역사를 통하여 위대하고 영광된 자리에 올려놓은 예수님은 누구나 다 믿을 수 있지만 몰려다니고 조롱받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온 목사라든가 기독교 신자들이 믿을 수 있습니까? 그때의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여러분만 못해서 예수를 잡아 죽인 줄 압니까?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는데 한 사람도, 유대교인 가운데 한 사라도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이 지금 기독교 교인들만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지독한데….
(69.100, 1973.10.21)
예수께서는 하늘의 서글픈 심정을 갖고 쓰러져가는 민족을 찾아 주셨사옵고, 그들이 불쌍히 여기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그들을 찾아 주셨사오나, 택한 민족이라 자칭했던 이스라엘민족은 하늘이 보내신 메시아와 준비하신 세례 요한을 자기들 멋대로 대접하여 역사적인 슬픔의 그늘에 숨겨버렸다는 사실을 오늘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여기 모임 당신의 아들딸들로 하여금 그 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희들보다 못해서 하늘을 배반한 것이 아니었고, 하늘을 위하는 심정이 저희들만 못해서 하늘의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 시대에 대한 소망이 부족하였고, 새로운 메시아의 이념을 갖고 오실 주님의 모습이 클 것으로 알았는데 정작 나타난 메시아가 너무도 초초하고 불쌍하고 형편없이 작은 모습이기에 그들이 배척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 한 자체가 어떠한 자리에 처해 있는가를 살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오늘 저희들은 흔히 역사적이 이스라엘민족을 비방하고, 역사적인 당신의 사정을 비판하기 좋아하나 그때의 사정이나 오늘날의 사정이 차이가 없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그때에 있었으면 그들과 같은 무리였을 것이며, 저희들이 그 시대에 있었으며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었을 것을 자인하는 마음을 각게 해주시고…
(284-285, 1959.02.220)
이스라엘 민족 앞에 메시아가 온 목적은 사탄권을 때려 부수고 인류를 하나님 앞에 찾아오기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탄주권을 그대로 남겨놓고 인류를 남기고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나서는 예수님은 겟셋마네 동산에서 피어린 투쟁의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의로 십자가에 가는 날에는 4천년 동안 준비했던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고, 유대교인이 망하고, 세례 요한과 그의 사도들이 하늘에 빚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담판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육과 영을 중심삼아 가지고 영적 세계는 물론이지만 실체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의 발판이 없어지고 유대교의 발판이 없어져, 예수님 혼자 할 수 없으니 십자가에 죽어서라도 제2차의 소망의 길을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라가 반대하고 교회가 반대하니 십자가에 가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불가피하게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걸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4천 년의 기반 위에 보냈던 메시아의 십자가에 돌아간 것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끌려가서 십자가에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다 잃어버린 자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교회도 잃어버리고, 세례 요한도 잃어버린 자리입니다. 거기에는 12사도도 전부 배반한 자리요, 나중에 오른편 강도까지도 죽어간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도 예수님 된 사람이나 하늘 편 된 사람이 없는, 다 잃어버린 자리였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십자가의 자리에는 기독교도 없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독교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부활하신 뒤 오순절 이후 출발한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승리가 아니라 사탄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요, 부활은 사탄의 승리가 아니라 영적 하나님의 승리를 말한 것임을 여러 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73.220-221, 1974. 09.28)
15. 예수의 부활
종교 경전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는냐?”
요한복음11.25-26(기독교)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걸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이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이니다.
고린도린서 15.14-22(기독교)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여인들은 무덤을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예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그 때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여인들이 두려워 엎드려져서 얼글을 땅에 대고 있는데 빛나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왜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고 있는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낳고 다시 살아 나셨다. 갈릴리에 계셨을 때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인자가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달렸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여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일을 낱낱이 알렸습니다. 그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인들도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그 말이 정신없는 말로 들려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날 그들 중의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로 걸어가면서 이즈음에 일어난 모든 사검에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걸으면서 서로 주고 받은 이야기가 무었이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 때 글로바라는 사람이 “당신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면서 최근 며칠 사이에 거기서 된 일을 당시만이 모른단 말이요?”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무슨 일이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일이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행위나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고,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달았소,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요.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어떤 여인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고, 그 여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으나 그의 시체를 찾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오, 그래서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이 몇이 무덤에 가보니 역시 그 여인들이 말한 것과 같았으나 그분을 보지는 못했다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미련하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구나! 그리스도가 마땅히 그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영광에 들어가서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서 전체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때에 그들은 그들이 가려던 동네에 거의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행을 더 계속하시려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를 만류하여 말했습니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머무르도록 하십시다.” 예수께서 그들과 같이 머무르려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하실 때에 떡을 들어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때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설명해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았던가?” 그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길을 떠나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또 함께 하던 사람들이 모여 주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길에서 된일과 떡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 그렇게 불안해하며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 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하시면서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믿을 수가 없어 어리둥절해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좀 없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운 생선 한 조각을 드리니 예수께서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을 예루살렘에서 비롯되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을 베다니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 손을 들어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을 축복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들리어 올라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항상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 했습니다.
누가복음 24.1-53 (기독교)
말씀선집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민족을 위해 기도하셨고, 자신은 죽어서라도 책임을 완수하겠다는 마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셨으므로 하나님은 그러한 예수님을 부활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사탄은 감히 참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여러분들도 그와 같은 내용의 가치를 지닌 인격체가 되면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2.141, 1957.03.17)
사탄은 자기의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그가 4천년 역사노정을 두고 목적해 왔던 바를 달성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신 하나님은 그 대가로써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시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여서 죄악인간들을 구원하실 수 있게 되었는가? 사탄이 이미 그의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탕감복귀 원칙에 의하여 하나님에게도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입장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사탄이 최대 실권행사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최대 실권행사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여기서 사탄이 그의 최대 실권행사로서 예수님을 죽인 것에 대한 탕감조건으로 하나님도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시어 죽은 예수님을 부활시키고, 온 인류로 하여금 그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접붙이어(로마서 11잘 24절)중생케 하심으로써 구원을 받도록 하신 것이었다.
(원리강론, 모세와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3.3.1.1)
예수님은 죽어서도 흩어진 제자들을 염려했고, 무덤의 3일 동안에도 이 제자들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해변가로 제자들을 찾아다니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책임감이 없었던 그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어려운 자리에서 배척한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은 부호라 수에 먼저 갈릴리로 찾아가셔서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의 고개를 넘을 때 변하지 않는 제자들로 세워 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인격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당시의 제자들과 그 이후의 수많은 성도들, 2천년이 경과한 오늘날 우리들까지 책임지셨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전체의 역사였습니다. 하늘의 뜻은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므로 예수님은 전 인류까지 책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38, 1956.05.16)
주님에게는 유대 나라를 중심삼고 사탄나라를 빼앗아 오고 사탄을 굴복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데, 4천년 닦아온 터전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나라를 잃고 교회를 잃고 택한 사람을 다 잃고 혼자서는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제2 방안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반을 잃지 않고 죽지 않았으면 영과 육을 중심삼고 나라와 세계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사탄세계와 사탄주권을 빼앗아 가지고 하늘나라로 돌아갈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기반이 없어졌으니 할 수 없이 하나님은 제2차적인 방안인 영적 구원만이라도 성립시킬 수 있는 길을 닦지 낳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영적 구원의 길을 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74.153, 1974.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