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노아는 성서에 나타난 첫 번째 믿음의 조상이다. 홍수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믿으면서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은 어느 누구에 비견할 수 없는 탁월한 믿음을 보여준 것이다. 문선명 선생은 아내나 가족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해낸 노아의 놀라운 신앙을 무척 강조한다. 머지않아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아는 노아가 일반사람들에의 연민을 가진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리를 조롱하고 박해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방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노아의 홍수심판은 아주 오래된 역사적 기록으로 소급된다. 여러 변형이 있는 노아의 홍수심판은 고대 수메르와 바빌론 때까지 약 50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약 7500년 전 흑해지역에 대규모 홍수가 나서 전 문명을 휩쓸었다는 인류학적 증거로 보아 노아의 홍수 심판설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믿는다.
성서의 노아 이야기는 노아의 아들 함의 실수로 끝난다. 문선명 선생은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후퇴시킨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한다. 항상 역사를 가정의 관점에서 다루는 문선명 선생은 함의 실수가 노아가정의 일치를 좌저시켰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치명상을 노정하였다고 밝힌다.
1. 노아 홍수
종교경전
여호와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한느 것을 보시고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지어낸 사람이지만, 땅 위에서 쓸어버리리라.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당 위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없애버리리라. 공연히 만들었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은 이제 막판에 이르렀다. 땅 위는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저것들을 땅에서 다 쓸어버리기로 하였다. 너는 전나무로 배 한 척을 만들어라. 배 안에 방을 여러 칸 만들고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하여라. 그 배는 이렇게 만들도록 하여라. 길이는 삼백 자, 너비는 오십자, 높이는 삼십 자로 하고, 또 배에 지붕을 만들어 한 자 치켜 올려 덮고 옆에는 출입문을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만들어라.”
창세기 6.5-8, 13-16 (기독교)
노아에게 계시가 내렸다. 너의 백성들 중에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 이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하는 것에 대해 슬퍼하지 말지어다.
하나님께서 계시한 대로 우리의 눈앞에서 방주를 만들어라. 그리고 죄지은 자들을 위해 나를 부르지 말거라. 그들은 물에 빠져죽으리라.
그리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있었으며 그의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그의 곁을 지나갈 때마다 그를 조롱하였노라. 그가 말하기를 너희가 지금 나를 조롱하더라도 너희가 지금 조롱하는 만큼 우리가 너희를 조롱할 것이니라.
그리고 너희는 굴욕의 징벌을 받는 자가 누구이며 영원의 징벌이 누구에게 내리는지 알게 되리라.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져 땅의 샘들이 물을 품어 낼 때 하나님께서 말하기를 그 안으로 각 종류 두 마리씩 암수와, 이미 말씀을 그르친 자들을 제외 한 너희의 가족과 믿는 자들을 태워라 하였으며 그리고 소수를 제외하고는 믿으로 그와 함께 사는 자들이 없었노라.
그가 말하길, 이 안으로 타시오, 출범하는 것도 정박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관대하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그것(방주)은 산과 같은 파도 속을 항해했다. 노아는 그와 떨어져있는 그의 아들에게 소리쳤다. 오! 나의 아들아 우리와 함께 타자, 불신자와 함께 있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나는 산으로 피난 가겠습니다. 그곳은 물에서 나를 지켜 줄 것입니다. 그(노아)가 말하길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자 이외에 오늘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안전할 자는 없으니라고 하였노라. 그리고 그들 사이에 파도가 몰려와 그는 익사자의 한 명이 되었노라.
꾸란 11.36-43 (이슬람)
그분은 또 옛 세계를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덮으셨습니다. 그 때에 그분께서는 정의를 부르짓던 사람 노아와 그의 가족 일곱 사람만을 살려 주셨습니다.
베드로후서 2.5 (기독교)
진실로 하나님께서 노아를 그의 백성들에게 보내어 가혹한 징벌이 그들에게 오기 전에 너희 백성들에게 경고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말하길, 오, 나의 백성들이여, 진실로 나는 너희들에게 경고자이니라.
하나님을 숭배하고 경외하며 나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정해진 기간까지 너희들에게 유예해 주시니라. 진실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이 오면 유예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들이 알았더라면.
그가 말하길 나의 주님이시여,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의 백성들에게 호소해 왔습니다.
저의 호소로 그들의 도망(진리로부터) 외에 늘어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당신께서 그들을 용서할 것이라고 호소할 때마다 그들은 손으로 귀를 막고 옷을 뒤집어쓰고 (그들의 거부에 대한) 고집을 부리고 오만한 태도를 취합니다.
꾸란 71.1-7 (이슬람)
말씀선집
하나님은 명령을 하실 때, 믿을 자리에서 믿게끔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게끔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노아에게는 120년 후에 이 세계를 심판할 테니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방주를 바닷가에나 강가에 지으라고 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저 높은 산꼭대기에다 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배를 지으려면 강가에다 지어야 할 터인데 산꼭대기에다 지으라고 하니, 그걸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인류시조가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믿는 입장에 세우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믿는 자를 세우려니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명령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53.93, 1972.02.10)
노아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까? 노아는 산꼭대기에서 배를 지었습니다. 평지면 몰라도 산꼭대기에서 배를 지었다는 것은 상식을 넘어선, 상식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도가 넘어도 형편없이 넘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게 될 때, 정상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노아는 미친 사람에 가까운 행동을 한 것입니다. 배를 지으려면 강가에 지어야지. 산에서 배를 지었으니 그것은 상식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것을 명령한 하나님은 농담으로 했겠느냐? 아닙니다. 참기 어려운 길을 생애를 바쳐서 가야 하는 것이 노아의 노정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수난 길보다 평탄한 내용을 가지고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건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을 바라시는 마음을 가지고 노아에게 120년 동안 수난의 길을 가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말할 수 없이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노아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하는 긴장된 순간에 있어서 노아가 순응하는 입장을 취할 때, 노아보다 더 기뻐하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노아보다 더 슬퍼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렇듯 기븜과 슬픔을 책임질 수 있는 주인의 자리가 아니고는 하나님의 자리가 못 되는 것입니다.
(48.69, 1971.09.05)
만일 여기에 오신 부인들이 노아 할아버지의 부인이었다면 그런 노아를 환영하겠습니까? 아마 그럴 수 있는 부인이 없을 성 싶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매일같이 산에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점심을 싸 줘야 되고 그 다음에 거기에 대한 준비와 치다꺼리를 틀림없이 해야 될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못 이겨서 며칠 해줄는지 모르지만 한 달도 못 가서 문제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일 년 열두 달도 아니고, 12년도 아니고 120년간 그래야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할머니는 틀림없이 미쳤다고 할 것이며, 영감이 정신 나가도 이만저만 나간 것이 아니라고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정상적인 환경을 따라서 하늘의 뜻을 가려갈 수 있도록 명령을 못 했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은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이렇게탄다고 가면 하나님은 180도 반대로 가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탄세계의 사람들이 믿어 주는 것조차 싫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탄과 짝했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인정하는 것도 더러움 탄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에서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원수가 있으면 그 원수가 하는 것이면 모든 것을 다 싫어 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까지도, 그러나 절대적인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에서 좋다고 찬양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예 믿지 못하게끔, 아예 바라보지도 못하게끔 역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69.94-95, 1973.10.21)
노아 때를 돌이켜 보면, 1600년 동안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애달픈 심정이 복받쳤지만 참으심의 길을 걸어 나오셨습니다. 어느 한 시간, 한 순간도 잊어버릴 수 없는 인간 대한 서러움이 북받쳤기만, 그것을 다 참고 자신의 슬픔을 대신 만민 앞에 또는 만물 앞에 온전히 나타내기 위하여 노아를 택해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노아를 당시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입장에 세우셨던가, 1600년 동안 인간들이 하나님을 서러움에 사무치도록 했던 것을 노아 한 사람을 세우시어 그가 인간을 대표하여 천적인 서러움과 슬픔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환경에 세워 놓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이나 자기를 불신하고 반대하며 조소하는 인간들 앞에 묵묵히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또 120년 후에 이 땅에 심판하겠다는 하늘의 예고를 받게 되었을 때도 그는 하늘 대한 믿음의 도리를 다했던 것입니다. 그를 보고 당시의 의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이었던 연고로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당시의 사회가 패역하면 할수록 더욱 그 사회를 위해 염려하며 슬퍼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안일을 취하기 위해 허덕이고 있을 때 노아만은 홀로 공의의 법도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으며, 천륜을 염려하였으며, 남이 원치 않는 환경에서 슬퍼하였다는 것입니다.
(3.169-170, 1957.10.25)
2. 함의 실수
종교경전
한편, 노아는 포도원을 가꾸는 첫 농군이 되었는데, 하루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마침 가나안의 조상, 함이 아버지가 벗은 것을 보고 밖에 나가 형과 아우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집어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았다. 노아는 술이 깨어 작은 아들이 한 일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에게 천대받는 종이 되어라.”
창세기 9.20-25 (기독교)
말씀선집
40일 심판이 끝난 직후의 노아의 입장은 천지창조 후의 아담의 입장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창조된 아담과 해와가 서로 얼마나 가깝고 허물한 것이 없는 사이였으며, 또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었던가 하는 것은, 창세기 2장 25절에 그들이 서로 나체로 있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한 후에 스스로 하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나뭇잎으로 가렸었고, 도 하나님이 보실 것을 두려워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었다(창3:7). 그러므로 그들이 하체를 부끄러워했던 행위는 하체로 범죄하여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다는 정념의 표시오, 하체를 가리고 숨었던 행동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범죄의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40일 심판으로 사탄을 분립한 입장에 있었던 노아는 천지창조 직후의 아담의 입장에 섰어야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나체로 있어도 그 가족들이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 숨으려 하지도 않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으로써, 일찍이 죄를 짓기 전 어디로 가린 데 없이 들어낸 나체 그대로의 인간을 보시면서 기뻐하셨던 그 심정을 탕감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노아로 하여금 나체로 누워 있게 하셨다. 따랏 함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아무 부끄러움 없이 노아를 대했어야 노아와 일체불가분의 뜻 가운데서 죄짓기 전 부끄러움을 몰랐던 아담가정의 입장으로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
(원리강론, 복귀기대섭리시대 2.2)
노아 할아버지는 혼자 외로웠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데, 절대 신앙을 가졌지만 가정이 절대 심정일체가 안 됐기 때문에 다 깨져 나간 것입니다. 함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사랑으로 일체가 되었으면 왜 그것을 부끄러워합니까? 심정이 일체 되었으면 벌거벗고 해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벌거벗고 그 옆에 가서 낮잠을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부끄러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 안 된 것입니다. 심정 일체가 안 됐다는 것입니다. 노아 할아버지 옆에 벌거벗고 같이 자고 있으면, 할아버지가 일어나서 그걸 보고는 ‘야, 이놈의 아들, 나를 닮았구나!’하고 축복하겠습니까, 안하겠습니까?
(268.294, 1995.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