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후편 473
제1장 복귀원리 475
하나님은 창조의
설계도인 창조원리에 따라 피조만물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하나님의 원리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못했고, 원리적인 인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복귀섭리역사입니다.
서론 476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입니다. 복귀섭리는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려는 하나님의 재창조섭리(再創造攝理)인데, 원리에 의하여 섭리하기 때문에 복귀원리(復歸原理)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설계도인 창조원리에 따라 피조만물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하나님의 원리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못했고, 원리적인 인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복귀섭리역사입니다.
복귀원리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발자취이기도 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복귀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복귀원리를 모르고서는
결코 생명의 길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1. 복귀섭리와 메시아를 위한 기대 476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인류역사를 자기 나름대로 규정했습니다. 특히 공산주의 역사학자들은 인류역사를 계급투쟁사(階級鬪爭史)로 보았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Toynbee Arnld Joseph : 1889~1975)는 인류역사는 나선형(螺旋形)의 동시성을 띠고 있는 역사라고
보았습니다.
이와 달리 ‘통일원리’의 역사관은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라고 규정합니다. 복귀섭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무형의 본체이신 하나님은 실체 아들로 지상에 메시아를 보내십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분이 후아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 복귀원리
원래 인간은 소생기·장성기·완성기 3단계를 거쳐서 완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성장기간인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다시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려면 창조원리에 따라 복귀해 가야 합니다.
(1) 창조본연의
인간과 타락인간의 위치 477
완성한 인간의 위치는 하나님과 일체된 자리입니다.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과
절대성을 닮아 하나님과 일체가 되고 하나님의 신성을 닮아서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따라서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과 참사랑을 소유한
하나님의 실체 자녀로서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완성한 인간은 무엇보다 절대성 가치를 지닌
절대성(絶對性)의 인간이 됩니다. 여기에서 ‘절대성’은 상대성(相對性)에 마주하는 개념이 아니라 생식기관을 중심한 성의 개념입니다.
인간은
‘절대성’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면 하나님의 심정과 ‘절대성’을 완성한
인간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도 완성하게 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다.’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을
인해 원리가 없는 무원리권(無原理圈)으로 떨어졌고, 선악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선악의 모체라는 말은 인간 속에 선의 성품과 악의 성품, 둘 다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선한 성품은 하나님을 닮은 선의 바탕입니다. 그 선의 바탕이 성장기를 거쳐서 완성해야 하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타락함으로써 사탄의 요소인 악의 성품이 인간에게 들어갔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사탄과 일체가 되고 사탄의 악성(惡性)을 닮음으로써 사탄의
집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사탄의 자녀가 되어 사탄의 생각을 하고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합니다.
천사장이 타락할 때 우발적으로
생긴 성품이 바로 타락성(墮落性)입니다. 시기·질투·혈기·교만·고집 등이 타락성에 해당되며, 그 타락성이 후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인간이 사탄의 거짓된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 바로 원죄(原罪)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의 뿌리에 해당하는 원죄를 잘라내고
가지도 잘라내고 다시 접붙여서 창조본연의 하나님의 아들딸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있는 한 타락성을 벗기가 쉽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신앙생활을 통해 타락성을 벗거나 사탄과의 관계를 끊을 수는 있지만, 거짓된 혈통을 이어받은 원죄는 스스로 청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사장을 중심하고 아담·해와 속에 원죄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원죄의 청산은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메시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만물보다 더 낮은 위치에 떨어졌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하시는데, 인간이 떨어질 때는 순식간에 떨어졌지만, 복귀할 때는 순식간에 복귀하지 못하고 시간성을 두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복귀의 형태를
갖추어서 되돌아가야 합니다.
‘복귀의 형태를 갖췄다.’는 말은 사탄도 분립하고 타락성도 벗었지만, 원죄는 아직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완전 복귀된 것이 아니라 원죄를 가진 채 장성기 완성급까지 성장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원죄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완성기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원죄를 벗기 위해 반드시 메시아가 필요하며, 메시아를 통해서 중생해야
합니다.
메시아를 통해 중생한 인간은 원리를 통해서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고 그 심정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아무도 그 자리에 가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셔서 소생기와 장성기의 길을 개척해 놓고 인간들을 데리고 가는데, 우리 인간은 메시아를
따라 그 길을 조심스럽게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성기 완성급에서 완성기 이전의 성장기간은 복귀의 길이요, 탕감의 길이요, 찾아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장성기를 가고 있는 사람은 복귀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어서 탕감을 치르고 가야 합니다.
완성기는 원리의 길인데 하나님의
심정을 완성한 심정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메시아를 따라 밟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을 찾고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서 하나님과 일체가 된 생활 속에서 속사람이 성숙하고 완성합니다.
(2) 선악의 모체 479
타락한
인간은 선악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선의 바탕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지만, 악의 바탕은 인간이 타락한 순간에 사탄으로부터 들어왔습니다. 선과 악은
인간 속에서 상반된 작용을 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함께 들어있어 선과 악의 두 요소가 각각 다르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에게는 악의 바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순간 악이 완결적(完結的)·결정적(決定的)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악이 먼저
발동하고 표출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선의 바탕은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본성이지만, 미완성 상태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언제나 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성을 드리면서 선한 바탕을 키우고, 악한 마음을 표출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길입니다.
악은 타락의 완결적·결정적인 요소이므로 언제나 먼저 쉽게 발동하고 쉽게 표출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마음속에서 선의 바탕을
키워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선의 바탕은 미완성한 것이기 때문에 부단히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완숙해 가야 합니다.
(3) 타락인간의
복귀 480
타락하면서 인간에게 사탄이 들어왔습니다. 장성기 완성급까지의 성장기간은 사탄을 분립해야 하는 복귀의 길이요,
탕감의 길이요, 찾아가는 길입니다. 따라서 복귀의 길은 사탄 분립노정(分立路程)입니다.
사탄 분립노정을 통하여 장성기 완성급까지 복귀한
형(形)을 갖춘 터 위에 메시아를 맞아 중생(원죄청산)하여 타락하기 전의 입장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도 분립되고 타락성도 없는
본연의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메시아인 참부모님을 따라(모시고) 더욱 성장·완성(심정완성)하여 완성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복귀노정은 타락성을 벗고 사탄을 분립하여 복귀한 형을 갖춘 다음 메시아를 통해 원죄를 벗고 완성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4) 선악
투쟁의 입체적인 역사 481
타락한 인간은 한 주인만을 섬기지 못하고 두 주인을 섬기게 되어있습니다. 원리적 존재는 한
주인만 상대하는데 타락한 인간은 비원리적 존재가 되어 두 주인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타락인간은 선악의 모체가 됨으로써 하나님도 상대하고 사탄도
상대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두 주인을 상대하게 됨으로써 개인도 하나님 편과 사탄 편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재물도 ‘하나님 편으로 쓸 것이냐, 사탄 편으로 쓸 것이냐?’로 나누어집니다. 땅도 ‘하늘 편으로 쓸 것인가, 사탄편으로 쓸 것인가?’ 또
사람도 ‘하늘 편에서 일할 것이냐, 사탄 편에서 일할 것이냐?’로 갈라집니다. 이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편 이념을 가지고 있느냐, 사탄 편
이념을 가지고 있느냐?’로 갈라집니다.
타락한 인간 때문에 모든 것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타락의 결과, 개인으로부터 천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둘로 갈라진 것입니다. 타락한 세계에서는 이처럼 선과 악으로 갈라져서 선악 투쟁의 입체적인 역사가 전개되었습니다.
(5) 섭리역사의
발전 요인 481
복귀섭리역사는 인간의 타락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뜻을 다시 이루기 위해 연장된 섭리의
발자취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연장되었는가? 그 사유를 알려면 먼저 섭리역사의 발전 요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이 합쳐져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 완성이 100퍼센트라면, 하나님의 책임분담은
95퍼센트이고, 인간의 책임분담은 5퍼센트입니다. 인간이 5퍼센트의 책임분담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의 책임분담 95퍼센트도 완성되고, 하나님의 뜻도
100퍼센트 완성됩니다.
인간이 책임분담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책임분담도 완성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책임분담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면, 부모 되시는 하나님도 완성되고 하나님의 소망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섭리역사의 발전
여부는 인간의 책임분담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이 책임분담을 완성하면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실패하면 사탄의 뜻이 나타나게
됩니다.
2) 탕감복귀섭리 482
(1) 타락인간은 중간 위치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한 창조주이기 때문에
아담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성장기간에 타락하여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사탄의 중간위치에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아담과 상대할 수 있지만, 사탄은 타락한 아담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사탄도 타락한 아담과 관계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따라서 타락한 아담은 하나님도 상대할 수 있고, 사탄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위치에 떨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늘 편으로 가느냐, 사탄 편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도 결정할 수 없고 사탄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잘못해서 그렇게 됐으니 타락한 인간이 어떤 조건을 세우느냐에 따라서 하나님 편도 되고 사탄 편도 됩니다. 선한 생각을 하면 그것이
조건(善條件)이 되어 하나님 편에 서고, 악한 생각을 하면 그것이 조건(惡條件)이 되어 사탄 편에 서는 것입니다. 재물도 하나님 편에 쓰이지
못하면 사탄 편에서 쓰기 때문에 악을 발전시키는 조건이 됩니다.
(2) 탕감조건 483
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상실했을 때, 그 자리로 복귀하기 위하여 치르는 대가를 탕감(蕩減)이라고 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탕감이란 말은 복된 말입니다. 탕감이 없으면
타락한 인간은 창조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본연의 위치와 상태에서 떨어진 인간이 탕감을 치르고 본연의 위치로 복귀하려면 거기에
합당한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타락인간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합당한 조건을 세우는 것을 탕감조건(蕩減條件)이라 합니다. 탕감조건은
탕감복귀(蕩減復歸)를 위해서 세우는 조건을 말합니다.
탕감조건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집니다. 타락한 인간이 탕감조건을 세워서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해 나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탕감복귀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인간이 잘못하면 그냥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에게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탕감조건의 종류 483
탕감조건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동일한 가치의 탕감조건이 있습니다. 구약 출애굽기 21장 23절에서 25절을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눈이 범죄
했으면 눈을 빼고, 손이 잘못했으면 손을 잘랐습니다. 그것이 동일한 가치의 탕감조건입니다.
둘째, 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이 있습니다.
구약시대를 지나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유대 민족은 요단강에서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어느 정도의 신앙과정을 거친 사람을 세워놓고 문답을 한 뒤 머리에 물을 몇 방울 떨어뜨려
세례를 줍니다. 그렇게 해서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과 마찬가지라는 조건을 세워줍니다. 다시 말하면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이것은 내 피와 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피와 살
대신 떡과 포도주를 먹었다고 하는 조건을 세운 것입니다.
오늘날 성당에서는 성만찬식을 하기 위해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예수의 피와 살을
먹었다는 조건을 세웁니다. 그것은 단지 조건일 뿐입니다. 예수의 피와 살을 먹고 나서 사탄의 혈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피와 살을 대신해서 성만찬식 때 떡과 포도주를 먹으면 원죄도 청산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조건일 뿐 원죄가 청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빚을 많이 졌는데, 말로 감동시켜서 빚을 갚는다는 것입니다.
말을 잘해서 천 냥 빚을 탕감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입니다.
셋째, 보다 큰 가치의 탕감조건이 있습니다. 지은
죄보다 큰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입니다. 보다 적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웠다가 실패하면 가중된 보다 큰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우게 됩니다.
그
예가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 번제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비둘기·양·암소 세 제물을 쪼개서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했는데, 아브라함이
소생적 입장에 있는 비둘기를 쪼개지 않음으로써 보다 큰 가치의 탕감을 치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를 쪼개야 하는데 그것을 쪼개지 않음으로써 100세에 얻은 자기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해야
하는 엄청난 탕감조건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후손들이 애급에 가서 400년이나 고역을 겪게 됩니다. 그런 것을
보면, 한번 조건에 걸리면 탕감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고, 거기에서 실수할 때에는 가중해서 탕감을 치러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대에
탕감을 못 치르면 2대, 3대까지 넘어가면서 치러야 합니다.
민수기 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을 탈출하여 시내 산을 거쳐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노정에도 가중된 탕감조건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모세가 종족을 대표한 지파장 열두 명을
40일 동안 여리고성으로 정탐하러 보냅니다.
지파장들이 정탐을 끝내고 돌아와 모세에게 보고할 때, 두 지파장을 빼고 열 지파장이 불신의
보고를 합니다. 열 지파장이 또 불신했기 때문에 유대 민족이 불신했던 노정을 탕감복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해서 40일을
40년으로 광야에서 유리고객하다가 애급에서 나온 1세대는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죽고 신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을 중심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와 같은 내용은 보다 큰 가치의 탕감조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탕감조건을 세우는 방법
탕감조건은 반대
경로(經路)로 세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후아담으로 보낸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심정적 탕감복귀를 위해서 반대의 경로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후아담인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을 보면,‘···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며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도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런 심정적인 잘못을 탕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렸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한번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미워해서
십자가에 내주었습니다. 따라서 탕감복귀는 그 반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십자가를 대신 져야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탕감조건은 반드시 반대
경로로 세웁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담의 후손 된 전 인류는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반대로 행해야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인류는 사탄의 품으로
넘어갔습니다. 사탄의 품에 있는 인류를 찾아서 하나님의 품으로 보내려면 후아담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입장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탕감노정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절대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며, 어느 누구도 원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욥기 2장을 보면, 욥은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 의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욥을 사탄에게 내어주어 핍박을 받고 시련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참소 조건에 걸리게 되면 하나님도 꼼짝없이 내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절대 원망하면 안 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책임을 다하며 원망의 소리는 없어지지만,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결국엔 탕감조건이 그대로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원망하면 안 됩니다. 욥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욥기의
교훈은 만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도 사탄의 참소를 이겨내는 자리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참소 받지
않고 사탄의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탕감을 치르는 길입니다. 형용할 수 없는 어려운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탕감조건을 세워서 가는 길에 어느 누구를 세울지 모르니 우리는 언제, 누구를 만나더라도 원망하면 안
됩니다. 상대가 나를 미워하더라도 나는 그를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싫어하고 내가 가는 길을 가로막더라도 그것을 원망하고
미워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 속에서 배후의 조상들이 지었던 죄를 탕감하는 현상이 벌어진다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내게 기쁨이 오고 영광이 오는 것입니다.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만들어 주면서 나에게 그런 길을 넘게
한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는 타락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이 미워서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지도자가 왜 그런 생각을 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들이 전개되면,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고 ‘아. 저분을 보니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내 속에도 저런 요소가 있겠지.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도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생각을 했겠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게 그 사람의 모습이 비쳐진 것은 내 속에 그런 요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를 세워준 것입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을 보고 비판하고 원망하면 안 됩니다. ‘내 속에는 그런 요소가 없는가, 지금까지 나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심정의 고통을 주지는
않았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탕감조건은 반대의 경로로 세운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원망부터 하면 안 됩니다.
탕감조건을
세우는 인물 488
탕감조건은 타락한 인간 자신이 세우는 것입니다. 탕감조건은 부모가 대신 세워 줄 수 없고, 자식이
부모를 대신해 세워 줄 수도 없습니다. 또 형님이 동생 대신, 동생이 형님 대신 탕감조건을 세워 줄 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려면 네 가지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습니다.
둘째, 탕감조건은 세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동일한 가치의 탕감조건, 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 보다 큰 가치의 탕감조건입니다. 그 가운데서 반드시 하나를 세워야 합니다.
셋째, 탕감조건은 반드시 반대의 경로로 세워야
합니다.
넷째, 탕감조건은 타락인간 자신이 세워야 합니다.
타락인간이 세워야 할 탕감조건 489
타락인간이
세워야 하는 탕감조건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아담과 해와가 세워야 할 원래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탕감조건은 반대 경로로
세우기 때문입니다. 아담·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탕감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탕감조건을 세워 돌아가야 합니다.
원래
아담·해와가 세워야 할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 조건은 종적인 믿음의 기대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믿고
실천해서 말씀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실체가 된 인격 완성자는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심정 완성자입니다. 인격 완성자와 심정 완성자가
되는 조건은 하나님의 ‘따먹지 말라.’는 절대성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실천하여 말씀의 실체, 즉 인격 완성자가 되는
것이 종적인 믿음의 기대입니다.
종적인 절대 믿음의 기대를 세운 다음에 세워야 할 두 번째 조건은 횡적인 실체기대입니다. 믿음의 기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해와는 말씀의 실체가 되고 인격의 완성자가 됩니다. 인격 완성자라는 말은 인격이 참사랑의
실천에 의해서 나타나는 열매이기 때문에 참사랑의 실체라는 뜻이고, 참사랑은 심정의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심정의 완성자라는
뜻입니다.
심정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그래서 절대성 위에 세워진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을 중심해서 부부가 되고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가서 실체를 지닌 사랑을 하면 종인 천사장이 아무리 유혹을 해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짓된
천사장이 들어가서 아담과 해와를 타락시켰습니다. 천사장은 아담을 사랑해야 하고(愛), 아담을 중보로 세워야 하고(仲), 아담에게
순종·굴복하고(屈), 아담을 통해서(通)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순종해야 하는데,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하고 혈기를 부리고 교만해져서 결국 악을
번식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실체기대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여 말씀의 실체가 됨으로써 인격 완성자가
되는 것이 종적인 믿음의 기대라면, 인격 완성자로서 만물과 천사를 주관하고 피조세계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 횡적인 실체기대입니다.
아담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웠더라면, 그는 천주의 중심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지 못했습니다. 원래
아담· 해와가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믿음의 기대를 세우고, 횡적으로 인격 완성자로서 천사와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실체기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장은 아담에게 애중굴통(愛仲屈通)해야 합니다. 그 입장을 세우는 것이 원래 하나님의 질서요,
뜻이요, 이상이었습니다.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 490
타락성은 천사장·아담·해와가 타락할 때 천사장으로부터
우발적으로 인간에게 들어온 악한 성품입니다.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믿음의 기대를 세우고, 실체기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부모이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를 자녀로서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고, 아담과 해와는 그
말씀을 지켜야 했습니다. 아담과 해와의 성장기간 동안에는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책임분담으로 스스로 성장하고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사장은 비록 종의 신분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담과 해와가 성장하고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런데 천사장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담·해와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또 아담을 중보로 세우고 아담 앞에 순종·굴복해야 하는데도 혈기를
부려 자기의 존재 위치를 떠났기 때문에 사탄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천사장은 아담의 주관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역주관(逆主管)을
했습니다. 역주관은 천사장이 해와를 주관하고, 해와가 아담을 주관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천사장에게 교만심이 들어가고 원리적인 하나님은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타락성을 벗기 위해서는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천사장은 아담을 사랑해야 하고, 아담을 중보로 세워야
하고, 아담에게 순종·굴복하고,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받아야 합니다.
아담의 입장에
있는 사람과 천사장 편에 있는 인간이 관계를 맺을 때 반드시 이와 같이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타락성을 벗는 탕감조건은 아담을 사랑하고,
그를 중보로 내세워서 순종·굴복하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갔다는 조건을 세워서 사탄의 요소를 빼내고 사탄을 분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천사장의 입장에 선 인간이 아담 입장에 선 인간에게 애(愛)·중(仲)·굴(屈)·통(通)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메시아를 위한 기대 492
역사상 인간의 소망은 메시아를 모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메시아를 만나야 합니다. 메시아를 만나려면 먼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없으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메시아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타락한 인간은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는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세워져야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실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에는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는 원래 아담이 세워야 할 창조이상을 완성하기 위한 기대입니다. 아담이 그 기대를
세웠더라면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그 두 기대를 세우지 못해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귀의 과정에서는 그 두 기대를 세우지 못해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귀의 과정에서는 그 두 기대를 세워야만 메시아가 오실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와야 하나님은 뜻을 이룰 수 있고,
인간은 원죄를 청산하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입장에서도 메시아가 필요하고, 인간도 메시아가 필요한
것입니다.
1) 믿음의 기대 492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해서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소유권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의 몸, 당신의 아들딸, 당신이 세운 참부모의 이상, 참가정의 이상, 그 다음에 민족·국가·세계·천주의 이상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유권을 잃고 마음 둘 곳, 발붙일 곳이 없는 불쌍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믿음의 기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믿음의 기대가 하나님의 소유권을 결정합니다. 믿음의 기대는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믿음을 세우는 것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소유권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기대는 인간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대를 세우려면 중심인물이
있어야 하고, 조건물(條件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세우는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중심인물은 아버지이고, 조건물은
상징헌제(象徵獻祭)입니다.
원래 아담·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들고 말씀의 실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불신함으로써 말씀을 잃어버리고 만물보다도 못한 입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만물을 앞세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말씀을 대신하여 조건물을 드리는 것이 상징헌제입니다.
아담가정에서 아벨이 양을 제물로 드리고, 노아가정은 방주를
짓고, 아브라함가정은 세 제물을 드렸습니다. 모두가 말씀을 대신한 상징헌제입니다.
모세 때에 비로소 종의 자리까지 갔기 때문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율법으로 구약시대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에는 복음을 세워 신약시대를 이어가고, 재림주님 때에는 원리와
말씀으로 성약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조건물이 상징헌제에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기간이
성장기간입니다.
아담이 1대에 성장을 완성해야 하는데, 1대에 완성하지 못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성장기간이 연장되었습니다. 원래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기간은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따라야 하는 성장기간이었습니다.
성장기간은 12수·4수·21수·40수의 수리적
기간(數理的期間)입니다. 아담·해와 1대는 직접 완성하는 기간이기 때문에 이 수리적 기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담·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하면 성장기간인 12수·4수·21수·40수는 자동적으로 완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담·해와는 타락으로 이러한 수리적 완성실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수는 탕감복귀해야 하는 수(數)가 되었습니다.
2) 실체기대 494
인간은 믿음의 기대를 조성한
다음에는 실체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실체기대는 주관권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실체기대는 악이 선에게 굴복하여 선이 악을 주관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이 소유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담·해와가 완성했으면 천사장과 만물세계를 주관하는 주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선악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선악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에 선악을 분립해야 합니다. 그래서 분립된 선이 분립된 악을 주관해야 하고, 분립된 악이
분립된 선에게 굴복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대는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고, 실체기대는 ‘하나님의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믿음의 기대를 세워서 하나님의 것이 된다면, 실체기대는 인간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고, 아벨은
가인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 되어야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세워집니다.
믿음의 기대에 믿음을 세우는
중심인물과 조건물이 있는 것처럼 실체기대에도 중심인물이 있고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체기대에서는 조건물이 아니고 조건(條件)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직접 타락성을 벗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대를 세울 때에는 중심인물과 조건물, 그리고 수리적 기간이 필요합니다. 실체기대는
중심인물이 있어야 하고, 실체기대에서 원죄와 타락성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것을 분립하고 복귀하기 위해서는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기대에 필요한 조건물과 실체기대의 조건은 다릅니다.
믿음의 기대에서 중심인물은 아버지이고, 실체기대에서 중심인물은
장자가 아니라 그 믿음을 계승한 차자입니다. 이미 타락해서 선악의 모체가 된 아담·해와를 분립하여 장자는 사탄 편에 세우고, 차자를 하나님 편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중심인물인 아버지가 믿음을 세우고 아버지의 믿음을 차자에게 계승해야 믿음의 기대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인 차자는 아버지가 세워놓은 믿음을 그대로 게승해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기대에서 중심인물은 아버지이며, 실체기대에서 중심인물은
차자입니다.
차자는 아버지의 믿음을 계승함으로써 비로소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원리의 길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복귀의
길에서 이 원리가 적용됩니다.
역사를 보면, 아무나 주인이 되고 자기 스스로 어떤 사명을 인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3. 복귀섭리노정의 시대 구분 496
인간조상 아담·해와는 완성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하여 무원리권(無原理圈)에 떨어졌습니다.
타락인간은 복귀섭리에 따라서 심령 기준이 발달해 갑니다.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
동안은 무원리권에서 원리권(原理圈)으로 복귀하는 섭리시대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심령의 기준이 소생급(蘇生級)에 이르는 구약시대입니다.
예수님부터 재림주까지는 심령의 기준이 장성급(長成級)에 이르는 신약시대입니다. 재림주로부터 완성기까지는 심령의 기준이 완성급(完成級)에 이르는
성약시대입니다.
1) 말씀에 의한 섭리시대 496
아담·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말씀으로 지어진 실체 만물보다 못한 위치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다시 말씀을 받기 위해서 기대를 세우는 시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의 구약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인간이 만물을 앞세워서 하나님 앞에 말씀을 찾아 나아가기 때문에 말씀기대
섭리시대라고 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소생구약시대(蘇生舊約時代)입니다. 예수님부터 재림주까지 2000년은
장성신약시대(長成新約時代), 재림주 이후의 섭리시대는 완성성약시대(完成成約時代)입니다.
2) 부활섭리시대
497
부활섭리로 볼 때, 타락한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는 부활기대 섭리시대(復活基臺攝理時代)이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소생부활
섭리시대(蘇生復活攝理時代), 예수님부터 재림주까지는 장성부활 섭리시대(長成復活攝理時代), 재림주부터 완성기까지는 완성부활
섭리시대(完成復活攝理時代)입니다.
3) 믿음의 기간 탕감복귀 섭리시대
믿음의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으로 볼 때, 타락한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은 탕감복귀를 위한 기대를 세우는 탕감복귀 기대섭리시대(蕩減復歸基臺攝理時代)입니다.
아브라함 때에 이르면
기대섭리시대는 끝이 납니다. 집을 짓기 위해 터을 닦아놓으면 그 터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초를 세워서 건물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2000년은 탕감복귀 섭리시대(蕩減復歸攝理時代)이고, 예수님부터 재림주까지 2000년은 탕감복귀섭리
연장시대(蕩減復歸攝理延長時代)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었기 때문에 섭리는 완성되지 못하고 연장되었습니다.
재림주가 오신 이후는
탕감복귀섭리 완성시대(蕩減復歸攝理完成時代)입니다. 그 후로는 탕감복귀라는 말이 없어집니다. 탕감복귀라는 말은 타락한 인간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탕감조건을 세워 복귀해 나가는 것을 이릅니다. 탕감조건을 다 세우면 복귀라는 말도 저절로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탕감복귀시대에서 복귀섭리시대로, 복귀섭리시대에서 마지막 섭리시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때는 탕감복귀라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4) 메시아를
위한 기대의 범위로 본 섭리시대 498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3차에 걸쳐서 가정을 중심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웠는데, 노아가정에서는 함의 실수로 실패했고, 아브라함가정에서는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헌제 실수로 실패했습니다. 마지막에 야곱이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 기대를 세웁니다.
메시아을 위한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범위로 볼 때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 동안은 가정적
기대섭리시대(家庭的基臺攝理時代)이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2000년은 민족적 기대섭리시대(民族的基臺攝理時代)이고, 예수님부터 재림주까지
2000년은 세계적 기대섭리시대(世界的基臺攝理時代)이고, 재림주가 오신 이후는 천주적 기대섭리시대(天宙的基臺攝理時代)입니다.
왜, 모두
기대(基臺)가 들어가느냐 하면, 메시아가 오더라도 그 기대를 세워서 섭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적 기대를 세워서 승리해야 하고 천주적 기대를
세워서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려면 가정적 기대·민족적 기대·세계적 기대·그리고 천주적 기대 이 네
자리를 전부 거쳐 가야 합니다.
5) 책임분담 섭리시대 498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는 책임분담
기대섭리시대(責任分擔基臺攝理時代)입니다. 아담이 책임분담을 못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아브라함 때까지는 책임분담을 다했다는 조건을 세워서 복귀섭리를
전개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하나님 책임분담 섭리시대(責任分擔攝理時代)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타락한 인간 속에 들어가서 죄인의 모습을 쓰고 죄인들의 손을 잡고 본연의 길로 복귀해 가는 수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시아로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성신을 맞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대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때부터는 예수와 성신 책임분담 섭리시대(Jesus 聖神責任分擔攝理時代)입니다.
6) 섭리적
동시성시대 499
역사상에 동시성시대(同時性時代)는 세 번 있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때부터
아브라함까지를 상징적 동시성시대(象徵的同時性時代)라 하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 때까지를 형상적 동시성시대(形象的同時性時代)라 합니다. 또
예수님부터 재림주 때까지를 실체적 동시성시대(實體的同時性時代)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동시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림주를 통해서 뜻을
완성하면 뜻이 연장되지 않기 때문에 전시대(前時代)의 복귀노정은 더 이상 반복되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제 섭리적 동시성시대가 끝날 때가
왔습니다. 인류역사 속에 동시성 시대가 없는 시대가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4. 복귀섭리역사와 나
500
나는 아담의 타락 이후 6000년 역사의 결실체입니다. 비록 나는 지금 태어났지만, 혈통의 뿌리가 타락한 아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담이 타락한 후 6000년 만에 나타나는 역사의 결실체요, 하나님이 이루셔야 할 천국 경기장에 선 마지막 주자입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새역사의 창조자입니다.
올림픽 육상경기에는 국가를 대표해서 네 사람이 각각 100미터씩 뛰는 400미터 계주가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첫 번째 주자가 스타트를 잘 해야 경기를 유리하게 풀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타트를 잘 못해서 조금 부진하더라도 2번 선수가 잘 뛰면 만회할
수 있습니다. 또 3번 선수와 4번 선수가 있는데 그 중에서 4번 선수는 마지막 주자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지막 주자가 들고
있는 바통에는 1번·2번·3번 선수의 정성과 땀과 눈물이 들어 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서 4년 동안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했을 것입니다.
그 한순간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기 때문에 실패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자기 국가를 대표해서 뛰는 네 명의 선수 중에서
마지막 주자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최선을 다해서 뛰는 마지막 주자에게 더 열심히 뛰라고 소리를 지르며
응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놓고 보면 오늘의 우리는 천국 경기장의 마지막 주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지금 너희들이 밤잠을
안자고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며 소리 질러 우리 마음을 일깨우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낡은 역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역사를 창조하는 주인입니다. 인간 복귀를 위한 완성실체가 되도록 역사가 지금 나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귀의 완성실체가 되려면 거기에 합당한 환경을 복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을 실현해야 합니다. 그 세계가 ‘천일국(天一國)’입니다.
천일국은 두 사람이 하나 되어 이루는 나라입니다. 두 사람이 하나되어 있으면 천일국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복귀되면 천일국 백성이
되고, 그 나라가 복귀되면 천일국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가 요구하는 완성실체가 되려면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근본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섭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알려주시는 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재림주입니다. 재림주는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면서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분입니다. 재림주는 그 뜻을 이적기사(異跡奇事)가 아니라 탕감복귀를 통해 이루십니다.
재림주가 절대로 이적기사를 행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절대로 이적기사를 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신앙하면서 기도하고 정성들이다가 어떤 영적 체험을 하고, 어떤
영적인 능력을 봤다고 그것에 의지하면 안 됩니다. 재림주는 절대 그 길을 가지 않습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적기사를 행한 사람은 다
실패했습니다. 모세도,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다 실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능력과 권능을 가졌더라도 그것을 앞세우면 안 됩니다. 반드시
탕감조건을 세우고 가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재림주는 절대 실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재림주가 올 때까지 6000년 동안 많은
중심인물을 세웠습니다. 그 사람들을 선인(先人)이라고 합니다. 먼저 보내준 사람이라는 뜻으로 섭리역사의 중심인물을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선인들이 무엇을 성공했고, 무엇을 실패했는지를 재림주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재림주는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귀원리를
공부할 때 원리에 의해서 섭리를 어떻게 전개해 왔느냐 하는 것도 공부해야 하지만, 거기에 나타난 중심인물이 어떠한 때 실패했고 어떠한 때
성공했느냐 하는 교훈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복귀원리는 중심인물들의 노정을 설명하고 나서 반드시 거기에서 보여주는 교훈을
말합니다. 아담가정에서 보여준 교훈이 있고, 노아가정에서 보여준 교훈이 있고, 아브라함가정에서 보여준 교훈이 있고, 모세노정에서 보여준 교훈이
있고, 예수님노정에서 보여준 교훈이 있습니다.
참고1
타락과 복귀섭리 503
이미 설명한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
정리한다면 원래 아담과 해와는 소생기·장성기·완성기를 거쳐 완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기간에 주신 말씀(창세기 2장 17절)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 믿음의 기대입니다. 아담·해와가 믿음의 기대를 세우면 천사장을 비롯해서 모든 피조물을 주관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아담·해와가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해서 말씀의 실체가 못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믿음의 기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실체기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사탄이 점령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타락성이 들어왔고 원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악의 모체(母體)가 되었습니다.
원죄는
메시아가 오지 않으면 벗을 수가 없습니다. 메시아를 맞으려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믿음의 기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여 하나님과 하나되는 기대요, 실체기대는 타락성을 벗기 위한 기대입니다.
믿음의 기대를 세우려면 중심인물·조건물·기간이 있어야 하고,
실체기대를 세우려면 선 편과 악 편으로 분리하여 선 편은 악 편의 인간을 주관하고, 악편의 인간은 선 편의 인간에게 순종 굴복해야 합니다. 악
편의 인물은 장자이고 선 편의 인물은 차자인데, 장자가 차자에게 애중굴통(愛仲屈通)하는 것이 실체기대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입니다.
타락성을 벗고 원죄를 청산하면 더더욱 메시아를 모시고 섬기며 따라가면서 심정일체가 되어 완성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참부모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신 전체 생애노정은 한마디로 우리에게 주신 교재와 교본입니다. 교재와 교본을 세웠다는 말은
‘참부모님이 뜻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참부모님이 인류가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도록 교재와 교본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길을 닦아주기 위해 일생 동안 피와 땀과 눈물로 승리해 나오신 모든 것을
상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참부모님께서 전수해 주시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서 천지인 참부모님께서 승리하심 같이 승리함으로써
천지인 참부모님의 전통과 혈통을 닮은 참자녀가 되어 천지인 참부모님을 모시고 천일국(天一國)에서 영광과 기쁨을 돌리며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참고 2
종적 8단계 복귀섭리
타락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복귀섭리인데, 복귀섭리는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8단계를 거쳐 이루어집니다.
원래 하나님은 천부(天父), 곧 아버지요, 아담은 천자(天子), 곧 아들입니다. 그리고 천사장은
종입니다.
그런데 아담·해와가 천사장에 의해 타락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만물만도 못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했는데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 없는 종의 종 자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복귀섭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이 타락 이전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복귀입니다.
거기에서 분립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타락으로 인해 아담이 사탄도 대할 수 있고, 하나님도 대할 수 있는 선악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선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을 직접 대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분립하여
장자인 가인은 사탄 편에 세우고, 차자인 아벨은 하나님 편에 세웠습니다. 하나님 편의 아벨이 가인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모시는 절대적 심정과
절대성을 지켜 주관권을 찾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종의 종 자리에 있는 인간이 복귀의 길을 가려면 먼저 만물을 앞세워 천사장의 자리, 곧
종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종의 종에게는 주인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말씀을 받을 수 있지만 종은 주인의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사탄 편 종의 종을 찾아가서 굴복시켜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강제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참사랑으로 자연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에게 종이 생겼기 때문에 종의 자리로 올라갑니다.
참아버님은 원래 탕감의 길을 가지 않으셔도 되는데 탕감의 길을 가게 된
것은 인간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입니다. 참아버님은 종의 종 자리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종의 종 자리는 원래 없는 자리로서 인간의 타락으로
생긴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이고, 아담은 자녀이고, 천사는 종입니다. 어디에도 이 세 관계밖에 없습니다. 그 밑에는 만물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천사에 의해서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이 지어놓은 만물보다 더 못한 위치에 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만물을 앞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종의 종 자리에서 말씀 대신에 만물을 앞세우고 상징적 헌제를 드려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기간이 아담가정부터 아브라함가정까지의 2000년이었습니다. 참아버님은 타락으로 인해 생겨난 종의 종 자리에서부터 출발하여 타락한
인간을 수습하기 위한 섭리를 전개해 오셨습니다.
천사는 원래 종으로 지음 받았는데 아담이 말씀을 불신하여 천사장의 주관하에 떨어졌기 때문에
천사장의 종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타락한 아담은 종의 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을 하나님 편과 사탄 편으로 분립하여 섭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 종의 종 자리에서 사탄 편의 종의 종 자리를 찾아가 승리해서 돌아와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으로 종의 종 자리에
떨어졌기 때문에 참아버님은 그 자리에서부터 수습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참아버님은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종이 섬겨왔던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힘든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길을 닦아 오셨습니다. 참아버님은 마음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흘리셨습니다. 종의 종 자리에까지 내려가서 가인권 사람들을 위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가인권 종의 종 자리에서 그들이 아무리 핍박하고 박해하더라도 참아버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자연
굴복하게 한 다음에 승리해서 나오신 것입니다.
종의 종 자리에서 승리한 참아버님은 다음 단계인 종의 자리로 나갔습니다.
종의 자리는
천사장권입니다. 참아버님은 가인권 종의 자리에 나아가서 또 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조롱을 받고 감옥에 끌려가 사지(死地)에서 죽음의 고문을
받고 죄인 취급을 당했지만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해서 그들을 자연 굴복시켰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미워하고 죽이려
하더라도 참아버님 마음 가운데는 그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저주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종의 자리에서 양자(養子)의 자리로
올라서게 됩니다. 종의 자리는 구약시대요 종에서 양자로 나아가는 때는 신약시대입니다. 양자는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혈통이 다릅니다.
참아버님은 그런 자리를 거쳐서 사탄 편 세계의 양자를 찾아갑니다. 양자가 부모를 모시고 섬기는 충효의 기준보다 더 높은 기준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면서 사탄 편 양자권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셨습니다.
양자의 자리를 복귀한 참아버님은 다시 서자(庶子)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심정적 복귀입니다. 양자는 종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여 올라갔지만 서자는 다릅니다. 서자는 혈통이 같습니다. 어머니만 다를 뿐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원리에는 서자나 양자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타락해서 종의 종 자리에 떨어졌기 때문에 한꺼번에 아들의 자리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징검다리를 놓아서 단계를 밟아 올라가기 때문에 양자와 서자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탄 편 세계의 가인권 서자를 찾아가서 승리한 터전
위에 하나님 편 세계의 아벨권 서자를 되찾습니다. 역시 수많은 고난과 박해와 옥중생활을 하면서 탕감복귀해 가지고 돌아오는데 가면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싸움을 펼치게 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사탄편 세계의 가인권 서자가 부모를 사랑하고 모시는 이상 하나님을 모시고 사랑하는
심정을 가지고 탕감복귀의 원칙을 통해서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도 말씀을 주어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서자의 자리에서 승리한
다음에는 다시 아들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원래 아담이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하고, 하나님의 심정과 참사랑을 닮은 실체가 되려면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절대성의 본체를 닮은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참아버님은 아들의 자리에서 사탄 편의 가인권 아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아들의
자리에 가서 가인권 아들의 모든 것을 상속받기 위해서입니다. 참아버님은 하나님의 아들(메시아)로서 사탄 편 세계, 가인권이 그 부모에게 충효의
도리를 다했던 모든 기준을 합친 기준 이상으로 충성을 다하셨습니다. 그때 사탄 편 아들들이 굴복한 것입니다.
종의 종에서 종으로, 종에서
양자로, 양자에서 서자로, 서자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어머니(신부)를 찾으시고, 어머니에서 아버지로, 아버지 중심한 참부모가 되어 참부모되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되찾는 것이 종적8단계의 복귀섭리입니다. 복귀섭리는 8단계를 찾아 나오면서 하나님의 심정권을 상실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자리에서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아들의 자리를 찾은 다음에는 어머니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을 지었으면 해와를 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머니를 찾으려면 다시 가인권 어머니의 자리에 가서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종적
8단계 중 여섯 번째인 어머니의 단계에서 참아버님은 가인권 어머니 자리에서 탕감복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어머님은 참아버님같이 사탄편
세계에 가서 탕감의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아버님이 승리권을 가지고 참어머님을 세우기 위한 조건을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어머님을 대신하여 그 길을 찾아 세워 참어머님을 내세울 때까지 참아버님이 그런 준비를 해오신 것입니다. 그 때는 참아버님이
선두에 서시고 참어머님은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갔습니다. 참어머님이 탕감을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참아버님이 참어머님을 대신해서 홀로 그 싸움을
해오신 것입니다.
종적 8단계 복귀섭리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원칙을 따라 섭리해 오셨습니다. 종의 종 자리에서 종의
자리를 복귀하고, 종의 자리에서 양자의 자리를 복귀하고, 양자의 자리에서 서자의 자리를 복귀하고, 서자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를 복귀하고 아들의
자리에서 어머니의 자리를 복귀하고, 어머니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심으로써 아버지의 자리를 복귀하고, 참부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복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형의 참부모 되시는 하나님을 천지인 참부모께서 해방·석방하여 창조본연의 참부모로 모시고 사는 것이 복귀섭리의
목적입니다.
참고 3
횡적 8단계 복귀섭리
아담·해와가 참부모가 되어야 하는데 타락으로 거짓 부모가 되었고, 그것이 지상과
천상에서 그대로 전개되었습니다. 지상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지상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입니다(마태복음 18장 18절). 그것이 개인의
자리에서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천주·하나님까지 모두 해당됩니다.
종적인 8단계 노정은 전체를 대표한 개인의 노정입니다. 그 종적인
노정을 거쳐서 횡적인 8단계 노정을 가야 합니다.
개인적인 노정도 가정을 중심으로 가야 합니다. 어떤 자리에 가더라도 사탄에게 하나님의
심정기준을 빼앗기지 않고 절대성을 지킨 가정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종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국가·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에는
천주에서까지 본연의 심정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계를 해방시켜서 하나님이 모든 영계를 거느리고 이 땅 위에 오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부모님이 세계적인 메시아가 되고 하나님이 영계를 거느리고 오시면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완수하고 실체
천일국시대(實體天一國時代)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때를 맞이할 수 있는 한 점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국가입니다. 그래서 참아버님은 ‘섬이라도
하나 사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우리 축복가정들이 종족적 메시아로서 자기의 일족을 모두 축복해서
말씀을 훈독하는 가정교회를 세우고, 그 터전 위에서 조국광복을 실현해야 할 때가 지금입니다. 종적·횡적 8단계 복귀노정을 완수해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제2장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할 사람으로 지음 받았지만, 사탄과 하나가 되어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인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서 타락인간을 구원하려는 복귀섭리의
뜻은 아담 직후부터 세워졌습니다.
서론
‘원리본체론’ 후편에서는 하나님이 중심인물을 세워 복귀섭리를 하시는데 중심인물들은 그 뜻을
어떻게 대했는가, 어떻게 해서 성공하고 어떻게 해서 실패했는가를 고찰해 봅니다. 핵심은 중심인물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 되면 성공하고, 말씀을
소홀히 하면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할 사람으로 지음 받았지만, 사탄과 하나가 되어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인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서 타락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복귀섭리의 뜻은 아담의 타락
직후부터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는 하나님의 섭리도 아담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가정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타락과 복귀가 시작 되었습니다. 아담가정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알 수 있고, 타락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귀섭리를
아담가정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아담가정에는 복귀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복귀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본연의 아담가정을 찾은 것입니다. 이
땅에 메시아가 오시는 목적도 아담가정을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귀원리에서는 아담가정을 확실히 알아야합니다. 아담가정을 알지 못하면
복귀의 길을 갈 수 없고, 복귀섭리는 그만큼 연장됩니다.
아무리 연장되고 반복되더라도 본연이 아담가정을 찾지 않으면 복귀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아담가정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 메시아를 위한 기대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세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메시아를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맞으려면 먼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없으면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죽이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메시아를 맞기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세워지면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냅니다.
아담가정에서 메시아를
맞기 위해서 세워야 할 조건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원래 아담·해와가 세워야 할 조건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탕감복귀는
반대 경로에 의해 조건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아담가정에서는 아담이 하나님 앞에 종적으로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하고, 횡적으로는 실체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믿음의 기대는 아담·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여 믿음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실체기대는 아담·해와가
절대성 위에 하나님을 모신 실체가 되어서 천사장과 모든 피조물을 주관하는 주관주가 되는 것입니다.
1) 믿음의
기대 515
아담가정에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바로 아담입니다. 그런데 아담가정에서는
아담이 중심인물이 되지 못하고 그 둘째아들 아벨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아담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해서 말씀의 실체가 되어야 하는데, 말씀을 불신해서 말씀의 실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아담이 중심인물이
되지 못한 이유입니다. 만일 아담이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절대 믿고 지켰으면, 아담은 절대성 위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담은 만물보다 못한 입장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물을 앞세워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복귀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말씀 대신 조건물(條件物)을 세운 것이 상징헌제입니다. 아담가정에서 조건물은 양입니다.
믿음을 세우는 기간은
소생기·장성기·완성기로 아담의 성장기간입니다. 아담 1대에 완성해야 하는데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1대에 완성하지 못하고 섭리가
연장되었습니다.
그 성장기간 안에는 12수·4수·21수·40수의 ‘수리적인 기간’이 있습니다. 아담이 완성하면 40수의 수리적 실체가
됩니다. 그 말은 12수도, 4수도, 21수도 전부 승리한 실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2) 실체기대
516
믿음의 기대가 세워지면 실체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실체기대는 천사장으로부터 들어온 타락성을 벗는 것입니다.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차자입니다.
실체기대에서 실체적 조건은 조건물이 아니고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 조건입니다. 실체적 조건은 어떤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천사장이 아담에게 애중굴통(愛仲屈通)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인데 아담이 절대성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천사장이 아담에게
애중굴통하지 못하고 사탄이 되어 오히려 아담·해와를 타락시켜 점령해 버렸습니다.
천사장이 아담과 해와를 타락시킨 것이 음란이었습니다.
천사장이 자기 위치를 떠나서 아담·해와를 타락시킬 때 순간적으로 생긴 우발적인 성품이 타락성인데, 그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실체기대에서
세워야 합니다. 즉 천사장 입장에 있는 인물이 아담 입장에 있는 인물에게 애중굴통하여 타락성을 벗는 것입니다.
(1) 아담이 중심인물이 될
수 없는 이유 517
아담가정에서 아담이 중심인물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 아담은 타락한
장본인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을 직접 대하는 중심인물로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원리적
하나님이신데 타락으로 아담은 비원리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원리적 존재는 한 주인만을 상대합니다. 그런데 아담은 타락으로 비원리적인 존재가 되어
두 주인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아담은 하나님도 상대하고, 사탄도 상대하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중심인물로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셋째, 아담은 타락으로 선악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선의 실체만 대할 수 있는데, 타락으로
선악의 모체가 된 아담을 하나님은 직접 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넷째, 아담은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에 중심인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책임을
지는 자는 주인이 되지만, 책임을 전가하면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해와·천사장 루시엘 셋이 모두 타락했습니다. 거기에서
다시 어떤 존재를 창조해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 세 존재 중에서 누군가 하나를 중심해서 복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먼저
불렀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세기 3장 11절)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세기 3장 12절)라고
대답합니다. 아담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해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하나님이 해와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해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세기 3장 12절)라고 대답합니다. 해와도 타락한 책임을 뱀에게
전가했습니다. 결국 뱀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해와의 타락을 아시면서도 물어보신 것은 그들로부터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해와, 둘 중 하나가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했다면 하나님이 복귀섭리는 아담가정에서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가정의 중심인 아담·해와가 책임을 다 전가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종인 천사장이 타락한 세계 전체의
주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당시 아담·해와는 타락만 했을 뿐 아직 자식이 없었고, 나쁜 짓을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었다면 복귀섭리를 위한 탕감조건은 아담가정에서 쉽게 세울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에 그들은 중심 인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2) 선악의 분립 역사 519
아담과 해와가 타락으로 선과 악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위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선과 악의 중간위치에 있는 아담을 쪼개어 선악을
분립(分立)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담을 어떻게 쪼갤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아담을 분립하면 아담은 죽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아들들을 선
편과 악 편으로 쪼개는 것입니다. 아담은 첫째아들 가인과 둘째아들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 두 아들을 아담 대신 분립하게 됩니다.
해와의
타락 경로에 따라 선 편과 악 편이 결정됩니다. 그것은 해와가 타락하여 아담을 타락시켰고, 아담이 타락해서 선악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해와의 타락 경로를 놓고 볼 때, 해와는 먼저 종인 천사장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해와가 사랑했는데 그것이
종과의 사랑입니다. 해와가 첫사랑을 맺은 것은 비원리적상대(非原理的相對)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와를 지은 것은 천사장과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타락은 과분한 욕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천사장은 주인집 딸을 사랑하고 싶은 과분한 욕망을 가졌습니다. 해와는 타락하지
않고 완성하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그런데 때가 되기도 전에 때의 것을 바라는 과분한 해와의 욕망과 절대 가져서는 안
될 천사장의 잘못된 욕망이 하나가 되어 해와가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해와가 타락하고 나서 자신의 원리적인 상대를 알게 되었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해와는 자기 남편 될 사람이 영적인 천사가 아니라, 발로 실체로 있는 아담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아담과 같이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심정으로 아담을 유혹합니다. 해와의 두 번째 사랑은 이처럼 심정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와는 한
존재가 천사장과 아담이라는 두 존재를 동시에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해와의 사랑의 열매입니다.
장자인 가인은
첫사랑의 첫 열매입니다. 해와가 천사장과 첫사랑을 했기 때문에 첫사랑의 표시체인 장자 가인을 사탄 편에 세웠습니다. 둘째아들 아벨은 두 번째
사랑의 표시체로서 하나님 편에 세웠습니다. 첫사랑을 천사장과 했기 때문에 장자를 사탄 편에 세우고, 두 번째 사랑을 원리적 남편인 아담과 했기
때문에 두 번째 사랑의 열매인 아벨을 하나님 편에 세운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가인이 아벨에게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됩니다.
원래 천사장이 아담에게 세워야 할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장자와 차자를 통해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에 장자와 차자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출애굽 때 바로 왕이 이스라엘 민족을 놓아주기로 한 약속을 계속 어기자 하나님께서는 장자와 가축의 처음 난 것(맏것)을
전부 쳐버립니다(출애굽기 12장 29절). 장자와 동물의 맏것을 친 이유는 장자와 맏것이 사탄 편이기 때문입니다. 사탄 편 장자를 치고 나서
비로소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나왔습니다.
또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을 담은 법궤(法櫃)를 메고 갔는데 장자는 법궤를
메지 못하고 하나님 편에 있는 차자 격인 레위 족속이 법궤를 메고 갔습니다(신명기 31장 25절).
그 다음 하나님은 리브가의 복중에 있는
장자 에서는 미워하고 동생 야곱은 사랑했습니다(창세기 25장 23절). 왜 쌍둥이 중에서 형 에서는 미워하고 동생 야곱은 사랑했느냐? 형 에서는
사탄 편에 세우고 동생 야곱은 하나님 편에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탄 편에 세운 에서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에서를 사랑하면 사탄은
야곱을 사랑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한 것은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복귀섭리역사의 프로그램을 맞추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노정은 둘로 쪼개는 사탄분립의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또 이삭이 나이가 많아서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해주려고 불렀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앞에 놓고 축복을 했는데, 그 때 오른손과 왼손을 엇바꾸어 오른손을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얹었습니다(창세기 48장 14절).
동생의 머리에 오른손을 얹고, 형의 머리에 왼손을
얹은 것은 오른손은 하나님 편을 상징하고, 왼손은 사탄 편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벨은 양을 치면서 살았고 가인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그 둘은 각자 자기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립된 차자로서 아담의 입장인 아벨의 제물은 받을 수 있고, 분립된 장자로서 천사장의 입장인 가인의 제물은
직접 받을 수 없습니다. 본래 아들인 아담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지만, 종인 천사장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독교들은 가인은 곡식을 가지고 정성 없이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지 않았고, 아벨은 양을 길러서
털도 뽑고, 쪼개서 피도 내고, 정성을 다해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그 제물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이 분립해 놓은
실체인 장자는 사탄 편에 세웠고, 실체로 분립된 차자인 아벨을 하나님 편에 세웠기 때문에 아벨의 제물만 받은 것입니다.
분립된 사탄 편에
선 장자, 가인은 분립된 하나님 편에 선 차자, 아벨에게 애중굴통해야 합니다. 천사장이 아담에게 애중굴통하지 못했던 것을 가인은 아벨에게
애중굴통함으로써 타락성을 벗는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천사장은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하는데, 천사장이 오히려 아담을
타락시키고 주관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가인과 아벨로 분립돼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가인의 입장에, 마음은 아벨의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사탄 편의 입장에 있는 몸은 하나님 편에 있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세계는 몸이
마음을 끌고 다닙니다. 우리 몸이 마음을 끌고 다니는 것을 탕감복귀하려면 몸이 마음을 따라서 가야 합니다.
몸을 치고 힘들게 해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신앙길입니다. 올바른 신앙길은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이 고행을 견디면서 수행을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기독교를 보면, 금식이나 철야를 한다든가, 냉수목욕을 하는 등 어려운 길을 가면서 몸을 점점 치고 약하게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 다음에 타락한 인간은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십의일조를 드린다든가, 물질을 드려서 하나님 앞으로 가고자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신앙자들이 제물을 앞세워서 가는 것은 타락으로
인간이 만물보다 못한 입장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모두가 하나님의 것인데, 타락한 인간은 전체가 열이라면 그 중에서 아홉이 사탄의 입장에
떨어졌고, 하나만 하나님에게 남아 있습니다.
신앙길을 가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들은 그냥 왔다갔다하는 것같지만 그 자체가 정성이고
수행입니다. 그런 길을 올바르게 한 번 가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야 합니다. 우리는 가다가 힘들면 ‘쉬었다가 가자.’ 하고 넘기고,
잠도 자고, 그 다음에 ‘건강할 때 좀 하겠다.’ 하는데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비를 넘기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자기의 육신이 고달프고, 힘들다고 해서 그것을 넘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런 모든 것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는 일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결국 메시아를 통해야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은 메시아를 만나 타락성을 벗고,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천사장이 아담에게 하지 못한 일을 하고, 가인편에 있는
존재가 아벨 편에 있는 존재에게 책임을 다하면 복귀를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집니다.
3)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
523
선악을 분립해서 가인과 아벨을 하나님 편과 사탄 편으로 세웠는데, 장자는 사탄 편, 차자는 하나님 편에 세웠습니다.
아벨은
선악이 분립된 차자로서 아담의 입장에 세웠습니다. 원래 아담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입장인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가인은 분립된 장자로서 천사장의 입장에 세웠습니다. 천사장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직접 받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천사장이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하듯이 분립된 가인도 아벨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은 죄인들도 하나님 앞에 뜻 맞게 조건만 세우면 받아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벨도 원죄를
가진 죄인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이 받아주신 것은 뜻 맞게 제물을 드렸다는 조건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뜻 맞게 조건을 세운다는
말은 정성을 다해서 제물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제물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쓰일 수 있도록 마음을 담아서 드린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타락인간이라도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십니다. 이처럼 사탄 편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4)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 524
아담가정의 믿음의 기대에서
중심인물은 아벨이고, 조건물은 양입니다. 그리고 기간은 성장기간입니다. 실체기대에서도 중심인물은 아벨입니다. 조건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입니다.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가인이 아벨에게 애중굴통(愛仲屈通)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이 자기의 제물을 안 받고, 동생의
제물은 받았다고 화가 나서 동생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창세기 4장 8절). 거기에서 인류 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5)
결과
아담가정에서 아벨이 믿음의 기대는 세워 성공했지만,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실체기대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아담가정에서는 메시아를 보낼 수 있는 기대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담가정에서 복귀섭리를 이루지 못하고 아담가정 대신 노아가정을 선택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기대는 아버지가 세운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중심이 되어 믿음을 세우고, 실체기대를 찾아 그 믿음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차자가 중심이 되어 아버지가 세우신 믿음을 찾아 계승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가정에서는 아담이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아벨이 대신 믿음의 기대를 세웠습니다. 따라서 아벨은 아담의 믿음을 계승할
필요도 없고, 계승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아벨이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이자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기 때문에 아담가정에서는 실체기대를 세우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믿음의 기대는 성공했지만, 실체기대는 실패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기
때문에 메시아의 기대가 세워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섭리는 연장됩니다.
아담가정에서부터 선악의 분립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선악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에 선 편과 악 편으로 쪼개서 선 편이 승리할 때까지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타락 이후의 인류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선악의 투쟁사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맞습니다. 사탄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치고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원리와 법도에 따라 다시 찾아오는데, 원금에 이자까지 붙여서 찾아옵니다. 그래서 ‘하늘은 맞고 빼앗아 오고, 사탄은 치고 빼앗긴다.’고 한
것입니다.
악은 항상 선보다 먼저 출발합니다. 하나님 편에는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실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벨이 죽은 다음에는
노아가정이 세워질 때까지 하나님이 대할 실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항상 아벨보다 한발 앞서 출발했습니다.
2. 아담가정이 보여주는
교훈 526
1) 원리적 교훈
아담가정이 보여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뜻 성사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분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절대적으로 예정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뜻 성사 여부는 인간의 책임분담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인간책임분담은 하나님이 절대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아담·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는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으셨고,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에도 하나님은 간섭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중심인물이 뜻을 이루기 위한 책임을 못하면 대신할 중심인물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아벨 대신 셋을 세워서 새로운 섭리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인간책임분담은 5퍼센트이지만 인간이 책임분담을 완성하면 하나님의
책임을 완성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이 소망하는 뜻도 완성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5퍼센트의
책임분담을 완성하면 하나님의 95퍼센트 책임분담도 완성되고, 하나님의 뜻 100퍼센트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2) 주의해야 할
교훈 526
아담가정에서 아벨은 하나님이 자기의 제물만 받았다고 절대 자만하거나 교만하거나 자랑하면 안 됩니다. 절대
온유겸손(溫柔謙遜)한 마음가짐으로 가인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피와 땀과 눈물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형식적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아벨은 가인 앞에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자기의 제물은 받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자
교만해졌습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내 세우게 되고, 자기를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또 가인을 위해서 희생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벨은 가인이 던진 돌에 맞아 죽고 맙니다.
아벨은 교만하지 말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온유겸손하고 희생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벨의 책임은 ‘가인을 절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보(仲保)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가인을 자연 굴복시켜야 합니다.
아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가인에게 중보해 줘야 합니다. 형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했던 정성까지 합해서 형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벨이 가인을 절대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싶어도 참아야 합니다. 아벨을 죽이면 순간적 화풀이는 될지 모르나 천국 가는 길이 막힙니다.
죽이면 그 순간부터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또 언제나 불평불만하거나 사랑의 감소감(減少感)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가인의 책임은 아벨에게
절대 순종굴복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통해서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인내심으로 자아주관(自我主管)을 하면서 동생이 하는 일을 도와야
합니다.
3) 가인·아벨의 법도 528
복귀섭리가 완료되고 하나님의 뜻이 완성될 때까지 가인과 아벨이라는
명칭은 빠질 수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가정의 두 아들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이름이 아담가정에서 끝나지 않고, 타락한 인류역사가 끝날
때까지 따라다니는 이유는 아담가정에서부터 복귀섭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귀섭리가 완결될 때까지는 가인과 아벨의 이름이 꼭
따라다닙니다.
아벨은 하나님과 절대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사랑이라는 말은 마음과 몸과 뜻과
성품과 생명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다 하나님을 사랑한 자기의 사랑을 합쳐서 가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벨이 해야 할 책임입니다. 가인의 천국 가는 통로는 아벨입니다.
아벨이 잘못하면 가인의 천국 가는 길도 막혀 버립니다. 아무리 혼자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벨은 하나님만이 간섭할 수 있습니다. 아벨은
누구도 노터치(No touch)입니다. 가인은 절대적으로 아벨을 노터치해야 합니다. 똑같은 원죄를 가진 형제인데 가인은 사탄 편에 세우고 아벨은
하나님 편에 세운 것은 그들이 선악으로 분립된 장자와 차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벨이 원죄가 없고 선해서 하나님 편에 세운 것이 아니라, 분립된
차자로서 세운 것입니다.
아벨은 아담을 대신한 하나님의 아들 입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상대하는 것입니다. 아벨을 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아벨을 세우셔서 책임을 주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아벨을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어떠한가? 가인에게는 심정이 없습니다. 위하고 싶은 참사랑이 없습니다. 자기를 위하기만 하면 좋아할 뿐입니다.
가인은 자기를 위하는 것은 좋아하는데 남을 위하고 남을 존경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남을 죽이려 하고 미워합니다.
그러니 아벨은
자신이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가인에게 하나님의 심정과 참사랑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심정을 가르쳐서 위하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가인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벨의 책임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따로 분리해서 설명한다면, 나는
복귀섭리역사에서 가인도 되고 아벨도 됩니다. 참부모님 앞에 나는 가인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앞에는 아벨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이 할 일과
아벨이 할 일을 언제나 생각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벨이 주의해야 할 것, 가인이 주의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4) 가인과 아벨의 생활 태도 529
아벨은 가인의 심정을 최대한 헤아리고 배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세우신 것은 아벨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장자에게 상속권이 있는데 장자가 타락을 해서 그 상속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차자를 세워서 장자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아담가정에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섭리하시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아벨과 가인은 똑같이 타락한 후손으로 원죄를 가진 죄인입니다. 그런데 아벨과 가인을 다르게
대한 것은 가인을 사탄 편에, 아벨을 하나님 편에 세워 선악으로 분립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벨은 가인의 심정을 최대한으로 헤아리고 배려해야
합니다. 아벨은 가인을 위해서 자기의 전체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역사에 보면, 악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선한 사람이 희생의 길을
갔습니다. 그것이 성인들이 가는 길이었고, 참부모님도 그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자리에 섰으면 우리를 죽이려고 반대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들은 모르니까 가르쳐줘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통해서 천국에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은 먼저 사탄과 상대적 관계를 끊고 하나님이 세우신 아벨의 말을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벨은 동생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은 아벨을
동생이라고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여기면 안 됩니다. 그것이 사탄의 근성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가려면 먼저 사탄을 분립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아벨과 가인의 관계는 나무뿌리와 같습니다. 나무가 살려면 뿌리가 흙에 묻혀 있어야 합니다. 뿌리가 드러나면 그 나무는 죽습니다. 뿌리가
길게 뻗을수록 흙이 잘 덮여 있어야 합니다.
흙은 영양을 공급합니다. 흙이 깨끗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뿌리가 영양을 섭취하여 나무를 살릴 수
있는 요소가 흙 속에 있으므로 뿌리는 더럽고 냄새가 나더라도 흙을 부둥켜안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뿌리가 저기는 깨끗하니까 냄새나는 흙이 싫다며
흙을 모두 파헤쳐 버리면 제일 먼저 나무가 죽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놓고 ‘내가 지식이 있고, 내가 지도자니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당신은
형편없이 않느냐? 당신 말 들을 수 없다.’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겪은 풍부한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담을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말이라도 귀한 것이 있으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모든 분야를 갖추고 있는데 당신이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내게는 필요 없다.” 하면 안 됩니다. “나는 그 길을 이미
통과했다.”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정말 어렵게 터득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
그를 칭찬해주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람은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어려운 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진정한 지도자이고 신앙자입니다.
총 결론은 모든 것은 순간에 결정되기 때문에 순간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에게는 오늘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순간이 1초라면, 모든 것은
1초에 결정됩니다. 그 순간의 결정이 선한 결실이 되기도 하고, 악으로 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한 점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그 점은 시커멓게 보이지만 그 점 속에는 빛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빛과 어둠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끝나면 어둠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에도 밤이 있고 낮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 순간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순간이 자신의 일생과 연관된 것이라고 한다면, 순간이 잘못되면 자신의 일생이 비참하게 됩니다. 그 순간이 자기의 일생과
연결되어서 좋은 방향으로 출발하면 그 일생은 좋은 결실을 봅니다. 그것은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중심에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섭리에 미치는 영향도 큽니다. 자기가 맡고 있는 교회면 교회, 지역이면 지역의
생명길을 열어줄 수도 있고, 막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중심하고 벌어지는 일들이 순간에 결정된 것 같지만 그것은 오랜 준비를 거쳐
이루어진 일입니다. 아담과 해와도 순간에 타락했지만, 그런 자리에 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단순히
제물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화가 나서 바로 죽인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원한이 있습니다. 아벨도 오랜 시간을 두고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이 순간의 잘못으로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6000년 역사를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옛날 아담가정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생활과 하나님의 섭리가 순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참고
죄의
근원 533
오늘날 인류가 저지르는 죄는 수없이 많습니다. 도둑질에서부터 살인죄·음란죄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죄들이 많습니다. 그런 죄가 바로 아담가정에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부모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불신죄(不信罪)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불신한 것이 불신죄입니다. 불신죄는 역적죄와 같습니다.
과거
전제군주(專制君主) 시절에는 왕의 명령이 바로 하늘의 법이었습니다. 일개 왕의 명령을 하늘의 명령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왕명을 어기면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왕자라도 왕인 아버지의 명을 어기면 역적이라 하여 가차 없이 처벌했습니다. 충신이 아무리 바른말을 하더라도 왕명을 어기면 그 즉시
친족, 외족, 처족까지 3족을 멸한 때가 있었습니다.
인간인 일개 왕의 명령도 어기면 그렇게 무서운 것이 불신죄인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죄를 절대로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또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음란죄(淫亂罪)를 지었습니다. 그의 자녀들을 보면, 형인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이는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그것이 아담가정에서 부자가
저지른 죄입니다.
천사장도 아담과 마찬가지로 불신죄를 지었습니다. 주인인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역시 천사장도 역적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천사장은 해와에게 따먹어도 좋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섭리역사에서 거짓말을 한 첫 번째 존재가 천사장 루시엘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처음에는 잘될 수도 있지만 나중에 비참하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항상 진실한 사람이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천사장도 음란죄를 지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집의 딸을 겁탈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자기 몸으로 만들고, 자기 아들딸을 갖게 하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하나님의 것인 천주를 몽땅
도둑질해갔습니다. 그것을 절도죄라고 합니다.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하나님의 아들딸을 다 도둑질해 간 것입니다. 아담가정에서
이뤄진 모든 범죄가 그대로 역사 속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은 죄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제일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거짓말하지 말라)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십계명의 중심입니다. 이것이 아담가정에서 저지른 잘못을 청산하기 위한 조건으로 주신 열 가지 계명
중의 핵심입니다.
제3장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535
노아가정도 아담가정처럼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메시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론
복귀섭리의 목적은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복귀하기 위해서메시아를 보내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사탄을 쫓아낼 수 없고 원죄도 청산할 수 없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야 인간의 원죄를 청산할 수 있고 사탄을 분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소원은 메시아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맞기 위해서는 메시아를 맞기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창조목적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없는 것이어서
절대적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벨이 하나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의 터전 위에서 아벨 대신 셋을
세우셨습니다(창세기 4장 25절).
하나님은 셋의 후손 가운데 노아를 택하시어 아담가정 대신 세우고 새로운 복귀섭리를 펼치십니다. 사탄이
주관하는 악주권을 멸하고 하나님이 치리하시는 선주권의 새역사를 열기 위한 것입니다. 그 때가 말세입니다.
창세기 6장 13절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홍수심판을 하신 것을 보면, 노아 때도 말세였습니다.
1. 메시아를 위한 기대
노아가정도 아담가정처럼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메시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려면 반드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없으면 타락한 인간이 오신 메시아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기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1) 믿음의 기대
아담이 본연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하고 실체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는 아담·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 아담과 해와가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공식적인 노정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종적인 노정이 믿음의 기대이고, 횡적으로 이루어야 할
노정이 실체기대입니다.
종적인 믿음의 기대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고, 횡적인 실체기대는 천사장과 만물세계를 주관하는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대를 위해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창세기 1장 17절)는 말씀을 주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켜서 절대성을 완성하면 아담과 해와는 종적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고, 횡적으로는 천사장과 만물세계를 주관하게 됩니다.
노아가정에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노아입니다. 조건물은 상징물을 말하는데, 방주가 그 조건물이 됩니다. 기간은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짓고, 40일
동안 홍수심판을 받고 나서 비둘기를 7일 간격으로 세 번 내보내고, 40일이 지난 후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가는 기간, 곧
120년·40일·21일·40일의 기간입니다. 그것으로 믿음의 기대 중심인물로서의 노아를 중심한 섭리가 세워지게 됩니다.
노아는 제1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원래 제1의 믿음의 조상은 아담이 되어야 하는데 타락으로 아담은 제1의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제1의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믿음이야말로 어느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믿음입니다.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가 흘렀습니다. 10수(十數)는 완전수(完全數)이고 귀일수(歸一數)이기 때문에 10대를 거쳤다는 것은
다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담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창조목적이 아담의 타락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10수를 중심하여
섭리하기 때문에 10대째에 타락하지 않은 입장에서 노아를 부른 것입니다. 노아는 그 시대의 의인이었습니다. 노아는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이 아벨을 대신하여 섭리의 중심으로 선택한 아담의 셋째아들 셋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믿음의 기대의 조건물은 방주인데
방주는 신천주(新天宙)를 상징합니다.
(1) 방주의 뜻 538
하나님은 천주(天宙)를 지어놓고 천주의
중심에 아담을 세웠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면 천주도 완성됩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천주가 다 사탄에게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은 발붙일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천주를 축소한 방주를 짓게 했습니다. 방주는 신천주를 상징한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의 주인이듯이
하나님은 신천주의 주인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3층으로 지었습니다. 방주 3층은 아담가정에서 소생·장성·완성의 3단계를 거쳐서 완성해야 할
성장과정을 의미합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 아내와 세 아들과 자부(子婦)들, 여덟 식구만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가정의
여덟 식구는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여덟 식구를 대신하고 전 인류를 상징합니다. 아담가정도 아담·해와와 세 아들 부부, 이렇게 여덟
식구입니다.
그리고 동물을 암수 한 쌍씩 태웠습니다. 그것은 만물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렇게 볼 때 노아가정에서 믿음의 기대의 조건물인
방주는 신천주를 상징합니다.
(2) 40일 홍수심판
노아가정은 40일 동안 홍수심판을 받았는데, 홍수심판은 선악을 분립하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선악의 모체가 된 아담의 두 아들을 놓고 가인과 아벨로 분립한 것처럼 노아 때에도 신천주를 상징하는 방주를 지어놓고 전 인류를 하나님
편과 사탄 편으로 갈랐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여덟 식구는 하나님 편이고, 방주 밖의 인류는 사탄 편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후에 하늘에서 비가 40주야 동안 쏟아졌습니다(창세기 7장 7~12절). 홍수심판이 벌어진 것입니다.
40일 홍수심판 이후, 40수는
탕감복귀섭리 노정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사탄 분립수로 꼭 필요한 수가 되었습니다. 40일 금식을 한다든가, 40일 동안 냉수목욕을
한다든가, 40일 동안 경배를 한다든가, 전부 사탄분립수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홍수심판 40일,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400년, 애급고역
400년, 로마제국 박해시대 400년 등도 사탄을 분립하기 위한 기간입니다. 모세는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하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게서
석판을 받습니다. 또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했는데, 실패하자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냅니다.
사울
왕·다윗 왕·솔로몬 왕 각각 40년씩 120년 동안 통일왕국시대도 있습니다. 엘리야는 40일 동안 금식을 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 가신 뒤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마가의 다락방에서 흩어진 제자들을 모아놓고 재교육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섭리를 출발하기에 앞서 이처럼 사탄을
분립하기 위해 반드시 40수를 세워 섭리하십니다.
홍수심판 40일 기간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직후와 같은 혼돈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첫째 날 혼돈하고 공허한 가운데 빛과 어둠으로 나누었다(창세기 1장 2~4절)고 했는데, 노아가 방주를 지은 후 40일
홍수심판 기간은 천지창조 후의 혼돈 기간을 의미합니다. 첫째 날 혼돈하고 공허한 가운데 빛과 어둠을 갈라 세웠듯이 홍수심판으로 천지가 혼돈한
가운데서 인류가 하나님 편과 사탄 편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3) 홍수심판 후 행사 540
방주를 중심한
홍수심판 후에 벌어진 일들은 천지창조 후 전 역사노정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 13절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노아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무려 120년 간 배(방주)를 지었습니다.
창세기 7장 1절에서 4절을 보면, 노아가 방주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와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라.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노아와 그 식솔들이 방주에 들어간 7일 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여
주야로 40일 동안 쏟아져 내렸습니다(창세기 7장 10~11절).
주야로 40일 홍수심판이 있은 뒤 비가 멎고 방주가 150일 동안
떠다니다가 아라랏산에 멈췄습니다. 그때부터 40일이 지난 다음에 노아는 까마귀를 세상에 내보냅니다. 밖으로 나간 까마귀는 물이 마를 때까지
날아서 방주 주위를 왕래했습니다(창세기 8장 6~8절).
까마귀가 방주를 돈 것은 에덴동산에서 천사장이 해와의 사랑을 노리고, 사탄이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노린 것과 같은 입장입니다. 까마귀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사탄과 상대한 세상이 모두 쓰러졌기 때문에 사탄이 발붙일 곳은
노아가정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홍수심판 후 사탄을 상징하는 까마귀가 노아가정에 들어갈 조건을 찾아 방주를 살펴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천사장이 사탄이 되었기 때문에 천사장을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타락한 천사장을 복귀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을 상징한
까마귀가 방주 주위를 돌더라도 쫓아버리지 못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다음에 노아는 7일 간격으로 비둘기를 세 번 내보냅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 있는 40일 동안 홍수심판이 일어났고, 그 후 방주는 150일을 떠다녔습니다. 또 40일이 지나 까마귀를 내보내고, 세 번에 걸쳐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비둘기를 내보낸 것은 외면상으로는 땅에 물이 말랐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내면에는 천지창조 후에 전개되는 섭리역사가
들어있습니다.
첫 번째 비둘기는 에덴동산의 아담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서 창조이상을 이루려고 했는데, 아담의 타락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아담을 상징한 비둘기는 방주 밖에서 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그 비둘기를 쫓아버리지 않고 다시 방주
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담은 타락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지만 아담을 통해서 이루시려던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 뜻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1차로 내보냈던 비둘기가 돌아왔을 때 받아들인 것은 아담을 통해 이루려던 뜻을 받아들인 것을
의미합니다.
7일 후에 두 번째로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2차 비둘기는 후아담인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2차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을 놓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이미 예정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예수님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은 살아서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노아는 비둘기를 내보낼 때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방주 밖은 아직 비둘기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를 물고 왔다는 말은 지금은 살 수 없으나 다음에는
반드시 살 수 있다는 예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을 예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기 위해서 아브라함부터
2000년 간 준비했습니다. 2000년 간 준비한 터전 위에 유대 민족을 세우고, 유대교를 만들고, 교법사와 율법사를 준비한 뒤, 사가랴
대제사장 가정을 중심으로 세례 요한을 보내고, 요셉가정과 마리아를 중심해서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준비해서 메시아를 보냈는데
그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의 불신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환경을 만들어 놓았지만 인간들이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2차로 비둘기를 내보냈는데 다시 돌아왔다는 말은 환경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것은
다음 번에는 반드시 살 수 있다는 예시였습니다. 2차 비둘기는 예수님이 장차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예시한 것이 아니라 환경이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7일 후에 또다시 세 번째로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세 번째 비둘기는 3차 아담, 곧 재림주님을 상징합니다. 3차로
내보낸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재림주가 오면 반드시 뜻이 지상과 천상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노아는 그런 행사를 치르고
방주를 중심해서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2) 실체기대 543
(1) 중심인물 :
함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노아의 둘째아들 함입니다. 실체기대는 실체헌제를 말하는데, 그 조건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입니다. 조건물이 아니고 조건입니다.
셈은 차자 함의 형이기 때문에 함에게 애중굴통(愛仲屈通)해야 합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애중굴통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듯이 셈도 함을 통해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의 심정과
일체를 이뤄야만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아버지 노아입니다. 아버지가 중심이 되어 믿음을 세우고, 그
믿음을 차자에게 계승해야 합니다. 그래야 노아가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함은 노아가 120년 간 닦았던 믿음을 계승해야 실체기대의 중심인물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아담가정에서 둘째아들 아벨이 아버지를 대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가정에서도 차자인 함이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아담가정에서는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아벨이 아버지의 것을 계승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정은 노아가
믿음의 기대를 세웠기 때문에 함은 아버지인 노아의 믿음을 계승해야 합니다. 노아의 믿음을 계승하는 방법은 노아와 심정적으로 완전히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누워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아비 함이 이 광경을 보고 형 셈과 동생
야벳에게 알려서 셈과 야벳이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을 쳐서 술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있는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었습니다(창세기 9장
20~23절).
인간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대단히 잘한 일로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노아가 술에서 깨어 옷이 덮어진 것을 보고 둘째아들
함을 저주합니다. 창세기 9장 25절에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하는 노아의 저주가
나옵니다. 옷을 벗고 있는 것을 보기가 민망해서 덮어 준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히 잘한 일인데, 그렇게 저주한 데에는 어떤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노아가 벌거벗고 누웠던 것은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지로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이 있어서입니다.
노아가정은
아담가정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가정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벌거벗고 있어도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창세기 2장 25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후에는 부끄러움을 느껴서 무화과 나뭇잎을 따서 하체를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벗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으나 타락한 후에는 벗은 것에 부끄러움을 느껴 하체를 가렸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가렸다는 것은 타락을 반증하는 행위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가린 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타락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벌거벗고 있는 자리에서 함이 하나님 편에 서느냐, 사탄 편에 서느냐가 결정됩니다. 노아가 벗고 있을 때 함은 노아와
심정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노아가 벗고 있을 때 함도 자신이 벗고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아담이 부끄러움을 느껴
하체를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었듯이 함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결국 아버지를 가려줬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타락한 후손입니다.’하는
자증(自證)입니다.
이미 홍수심판으로 사람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노아가정만 남았습니다. 사탄이 노아가정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함이 아버지의 벗을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자 사탄이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는 함의 행동을 보고 저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함이 사탄에게 침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사탄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무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는데, 함이 순식간에 실수함으로써 그 정성의 기반이 모두 무너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함이 노아와 심정일체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실체기대는 실패했습니다.
(2) 부끄러움이 죄가 된 이유 546
죄란 사탄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사탄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사탄과 수수작용을 하여 천법(天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는 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벗은 것을 심히 부끄러워했습니다. 함이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사탄에게 ‘너는 나의 후손이다.’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함의 입장에서는 ‘나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다.’ 하고 고백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함은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되지 못하고, 노아가정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 또한 실패했습니다.
노아 이후부터 인간의 언어가 달라졌습니다. 노아의 자손들은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성읍과 탑을 건설했습니다. 그들은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을 내고 인간의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자 일에 손발이 맞지 않고
혼란을 일으키다가 각각 분열되고 말았습니다(창세기 11장 1~9절).
에덴동산의 아담·해와가 완성했으며 아담이 쓰는 말이 인류의 언어가
되고, 아담이 세운 전통이 인류의 전통이 되고, 아담의 문화가 인류의 문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노아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오색인종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해와밖에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백인·흑인·황인종 등 오색인종이 생긴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의 불통으로 인해 단절된 생활을 하면서 제각각 떨어져 한 곳에만 머물러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살아가는 환경의 일조량에 따라, 태양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인간의 피부 색깔이 달라진 것입니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점은 피부색깔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흑인의 피와 백인의 피가 똑같고, 아기 울음소리도 흑인과 백인이 똑같습니다. 슬플 때 눈물 흘리는 것도 똑같고, 기쁠 때
춤을 추는 것도 똑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똑같은데 피부색만 다를 뿐입니다.
피부색이 다른 것은 환경게 따라서 환경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곤충들이 보호색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외적으로는 변화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똑같습니다.
흑인은 코가 납작하고 콧구멍이 큽니다. 반면에 백인은 코가 높고 콧등이 좁으며 콧구멍이 작습니다. 코는 외부의 공기를 받아들여
폐로 전달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그 구조나 모양이 외기의 온도에 대처하도록 되어있습니다.
흑인이 많이 사는 아프리카는 외기의 온도가 인체의
온도와 비슷합니다. 외기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오랫동안 정착해서 살아온 흑인들은 코가 납작하고 콧구멍이
큽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추운 지방에 사는 백인은 콧등이 높고 그 폭이 좁아서 콧구멍이 작습니다. 추운지방의 사람들은 코가 길어서 터널과
같은 역할을 해 줍니다. 찬 공기가 폐로 들어가면 건강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자기 체온에 맞게끔 공기를 데우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가 사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색인종이 하나 된다는 말은 피부색이 하나된다는 말이 아니라, 타락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혈통이 본래의 혈통으로 돌아가 하나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한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됩니다.
3)
결과 548
노아가정은 믿음의 기대는 성공했으나 실체기대는 함의 실수로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노아가정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 세울 때까지 400년 간 연장됩니다.
2. 노아가정이
보여주는 교훈
노아가정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원리적 교훈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인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책임분담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책임분담은 상대적 예정이기 때문에 인간이 책임을 하지 못하면 또 다시 다른 중심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원리적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책임을 진 사람은 책임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책임을 못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섭리가 연장됩니다.
노아가정이 보여주는 교훈은 ‘절대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말라.’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생각대로 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습니다. 모르면 고민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지 않았으면,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귀섭리의 길을 가는 사람의 태도는 온유겸손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때를 기다려야 하니까 인내하고 언제나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순간에 결정되기 때문에 순간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 순간은 내 일생과 연결되고,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순간적으로 실수하면 내 일생의 소망도,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생활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가 순간을 승리하면 내 일생도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도 승리합니다. 이것이 노아가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제4장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551
아브라함가정은 아담가정이나 노아가정과는 다릅니다.
아담가정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에서 중심인물은 하나님
편에 있는 아담의 둘째아들 아벨이었고, 노아가정에서는 중심인물이 노아였습니다. 아벨은 타락한 아담을 대신하여 하나님 편에 세운 차자이고, 노아는
아담의 셋째아들 셋의 후손으로 하나님 편 혈통입니다.
서론 552
노아가정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실패했기
때문에 복귀섭리는 아브라함가정으로 옮겨갑니다. 아담가정, 노아가정, 아브라함가정까지 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3차에 걸쳐서 완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아담가정이나 노아가정과 다른 면이 있습니다.
함의 타락 행위로 인해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하겠다는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고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하나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의 터전 위에 하나님은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우상 장사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불러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를 다시 하시게 됩니다.
1. 메시아를 위한 기대
아브라함가정은 아담가정이나 노아가정과는 다릅니다.
아담가정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에서 중심인물은 하나님 편에 있는 아담의 둘째아들 아벨이었고, 노아가정에서는 중심인물이 노아였습니다. 아벨은 타락한
아담을 대신하여 하나님 편에 세운 차자이고, 노아는 아담의 셋째아들 셋의 후손으로 하나님 편 혈통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때에 와서
하나님은 이전과는 달리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가정을 택하시고 그 가정에서 장자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상(偶像)을 만들어 파는 데라의 장자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편 혈통이 아니고 사탄 편 장자입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은 모두 차자를 중심한 섭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가정에서는 차자가 아니고 장자를 불렀고,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탄의 실체, 즉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우상 장사 데라의
장남을 부른 것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사랑한 장자 아담을 사탄이 취해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탕감복귀 원칙에 따라서 3대째에
와서 사탄이 사랑하는 장자를 취해 와서 뜻을 이루려고 하신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3수를 거쳐서 완성되기 때문에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전체를 노아가정을 거쳐 아브라함가정에서 모두 찾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 장사 집안에서 차자가 아닌 장자를 중심인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가정에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조건물은 비둘기·양·암소의 3대 제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과 사탄 편을 분립하기 위해 비둘기·양·암소를 둘로 쪼개야 합니다.
아브라함가정에서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이삭 또는 야곱입니다.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차자가 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 낳은 자식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낳지 못해서 언제나 조카 롯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100세 때 부인 사라에게서 이삭을 얻었습니다. 사라는 이삭을 낳기 전 아브라함이 자식을 간절히 원하므로 자기의 몸종
하갈을 남편에게 줍니다.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난 자식이 장자 이스마엘입니다. 나중에 사라가 자식을 낳았는데, 그가 차자
이삭입니다.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마땅히 차자인 이삭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릴 때 비둘기를 둘로 쪼개지 않은 실수를
범하여 이삭은 제물이 되고, 야곱이 가정의 이상을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믿음의 기대는 중심인물은 아브라함이고,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이삭 또는
야곱이 됩니다.
1) 믿음의 기대
(1) 중심인물 : 아브라함 554
아브라함가정에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담가정에서 실패한 것은 노아가정이 탕감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담가정에서 있었던 일을 노아가정에서
재현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 말씀을 절대 믿고 실천하여 완성하여야 하는데 말씀을 불신하고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가정의
불신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노아에게 방주를 산에다 짓도록 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자리에서 믿음을 찾는 섭리를 하신 것입니다. 또 아담이
벌거벗고 있던 것처럼 노아도 벌거벗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노아가정에서 아담가정의 실패를 탕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가정은
노아가정도 탕감복귀하고, 아담가정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가정은 앞의 두 가정을 모두 탕감복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10대를 거쳐서 1600년이 지나 하나님은 노아를 불렀습니다. 당시에는 사람의 수명이 무척 길었습니다. 아담은 930년을
살았습니다. 보통 900년 이상을 살았으니, 10대면 9000년이 넘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수명이 길면 하나님 섭리가 지금도 아담가정권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를 단축하기 위해 조건을 세워 넘어갑니다.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를 거쳤는데, 1대를 160년으로 하여
1600년이 된 것입니다.
160년은 40수를 중심한 사위기대입니다. 아담이 완성하면 40수의 수리적 실체가 됩니다. 거기에 사위기대의
4수가 입체적으로 되면 160수가 나옵니다. 그래서 160년을 1대로 잡은 것입니다. 160년은 실제적인 나이와는 상관없이 사위기대를 모두
완성하는 기간입니다. 1대 160년을 기점으로 10대를 거치니까 1600년이 된 것입니다.
10수는 귀일수(歸一數)입니다. 그러므로
10대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노아는 아담이 이루지 못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고 10대 만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10대 만에 노아를 불러서 40일 홍수심판을 했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실체기대의 중심인물로 차자인 함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함이 실수함으로써 다시 10대를 연장해서 400년 만에 아브라함을
세웁니다.
400년은 40일 홍수심판의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0년이 된 것입니다. 40일 가지고는 1대가 안 되기 때문에 40일이
40년이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1대의 수명도 40년으로 단축됩니다. 하루가 1년으로 바뀌어서 1대가 40년인데, 10대니까
400년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부터 10대를 거쳐 400년 만에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제1의 믿음의 조상 노아부터 10대를 지나
제2의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그때에는 아브라함이 차자가 아니라 장자였습니다. 그것이 아담가정, 노아가정과 다른 점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식해서 땅에 충만하라.’는 삼대축복을 주었습니다. 창세기 9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은 노아에게도
똑같이 삼대축복을 해주었고, 창세기 12장 2절을 보면, 아브라함에게도 똑같이 삼대축복을 주었습니다. 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아담·노아·아브라함
3대에 걸쳐서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중심으로 세우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은 당시
나이가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입장인데 하나님은 그를 불러서 고향을 떠나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젊었을 때는 고향을
떠나지만, 나이가 들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정반대로 고향을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들 아브라함과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이라크)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다가
하란(시리아) 땅에 머물렀습니다(창세기 11장 31절). 그 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조카 롯을 데리고 부인과 함께 정든 땅인 하란을
떠나 마침내 가나안땅으로 들어갑니다(창세기 12장 4~5절).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한 노아와 같은 길을 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간 노정은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것과 같습니다.
아담가정의
입장 556
아브라함가정은 아담가정의 잘못을 탕감합니다. 창세기 12장 10절에서 20절까지를 보면,
아브라함은 기근이 들어 곡식을 구하러 애급에 들어갑니다. 애급 왕을 ‘바로(파라오)’라고 합니다. 과거 왕들이 여자들을 좋아했듯이 바로도 예쁜
여자를 보면 취해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는 미모가 출중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애급 땅으로 가서 부부라고 한다면 바로가 사라의
미모를 보고 남편 아브라함을 죽이고 사라를 취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와 남매간이라고 하자며 약속하고 애급 땅으로 들어갔는데,
바로의 대신들이 사라를 바로 앞으로 데려갑니다. 그러자 바로는 자신의 궁으로 사라를 들여 취하려고 합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은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립니다. 바로는 사라를 취하지 못하고 아침이 되어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창세기 12장 18절) 하고 아브라함을 책망합니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에게 아내와 소유물을 다
돌려주며 보냅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바로에게 가서도 자신의 몸을 지키고 돌아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왕이 가지고 있는
금은보화와 부귀영화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정조를 지킨 것이 귀하다는 말입니다. 보통 여자 같으면 ‘우리 남편은 형편이 없는데, 왕이 가지고
있는 금은보화가 모두 나의 것이 되니 왕비가 되어 아예 왕궁에 눌러 살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금은보화와 왕관이 문제가
아니고, 정조를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왕이 왕권으로 강제로 취하려고 할 때 사라가 스스로 정조를 지켜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행동하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라가 살아서 할 수 있는 인간책임분담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을 다해놓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하나님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상이 아브라함가정의 아담가정을 탕감복귀하는 노정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담을
상징했고, 사라는 해와를 상징했고, 바로는 천사장을 상징했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남매와 같이 컸습니다. 그런데 해와가 남편이 되어야 할 아담이
아니라 종인 천사장에게 끌려가 정조를 빼앗겼고, 그 후에는 아담까지 타락시켰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아브라함의 부인으로서 남매의 입장이 되어 애급
땅에 들어가서 바로에게 정조를 빼앗기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아담가정에서 해와가 하지 못한 사랑의 질서를 복귀하여 돌아온
것입니다.
노아가정의 입장
아브라함가정은 노아가정의 실패도 탕감합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어서 부인과 자녀와 동물을
방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노아가정은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을 떠나 방주로 들어간 것입니다. 땅은 사탄세계를 상징하고, 방주는 하늘세계를
상징합니다. 땅에서 방주로 들어갔다는 말은 사탄세계에서 하늘세계로 옮겨갔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인과 조카 롯을 데리고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애급은 사탄세계를 상징하고, 가나안은 하늘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갔다는 말은 노아가 땅에서
방주 안으로 들어간 것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담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한 데 이어 노아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합니다.
(2) 상징헌제
하나님은 아담가정의 입장과 노아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한 아브라함을 비로소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로
확정하고 3제물로 상징헌제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3제물의 뜻
아브라함이 상징헌제로 드린 3제물은 3단계로 완성하는 천주를
상징합니다. 아담이 소생·장성·완성 3단계를 거쳐 완성해야 하는데, 도중에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노아가정에서도 방주를 3층으로 지었습니다.
방주는 3단계로 완성하는 신천주(新天宙)를 상징합니다.
아브라함가정에서는 비둘기·양·암소 등 3제물을 놓고 제사를 드립니다. 3제물은
3단계로 완성하는 천주를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위에 비둘기·양·암소를 놓고 제사를 지낸 것은 아담·노아·아브라함 3시대의 잘못을 한꺼번에
탕감복귀하기 위해서입니다.
3제물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냐?
비둘기는 소생기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곧 소생구약섭리 완성자로서의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내리는 모습을 비둘기가 내려앉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예수님을
비둘기로 비유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소생구약섭리의 완성자라는 뜻입니다.
아무 동물이나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둘기가 3대제물의 하나가 된 것은 주인과 아주 가깝게 지내고, 평화를 상징하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는 알을 꼭 두 개만
낳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둘기는 특별한 제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양은 장성기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곧 장성신약섭리 출발자로서의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장성신약섭리의 출발자라는 뜻입니다.
비둘기는 소생기의 상징으로 소생구약섭리시대의 완성자를 의미하며,
양은 장성기의 상징으로 장성신약섭리의 출발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생구약섭리시대의 완성자로 와서 장성신약섭리의 출발자로서
장성신약섭리를 걷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양이 3대제물의 하나가 된 것은 온순하고 털도 주인에게 주고, 뼈도 주인이 삶아먹게 하는
순종의 미덕을 갖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양은 잡을 때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죽습니다. 보통 돼지나 개를 잡으면 온통 난리가 나는데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양은 아주 온순하고, 주인의 말을 잘 따릅니다. 양떼를 몰고 다니는 것을 보면 양은 주인이 가는 대로 반항 없이
따라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이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암소는 완성기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곧 완성성약섭리의 주관자인 재림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14장을 보면, 암소와 완성성약섭리 시대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단 지파의 후손 중에 누구도 당할 자가 없을 만큼
힘이 무척 센 삼손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딤나에 사는 블레셋 사람의 딸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반해서 자기의 부모에게 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 부모는 ‘네 형제들의 딸 중에서나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의 딸을 아내로 취하려 하느냐?’(사사기 14장 3절)며 반대했습니다. 당시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지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삼손을 시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했는데 그런 하나님의 뜻을 삼손의 부모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삼손이 부모와 함께 딤나의
포도원에 이르렀을 때 사자 한 마리가 소리를 지르며 앞서가는 삼손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힘이 센 삼손이 맨손으로 그 사자를 죽여서 구렁텅이에
던져놓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사실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말하고 기뻐했습니다.
얼마 후 삼손이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하여
다시 여인의 집으로 가다가 딤나의 포도원에 이르러 사자를 버린 곳에 가보니 사자의 시체를 벌떼가 에워싸고 있어서 자세히 보니 그곳에 꿀이
있었습니다. 삼손이 꿀을 손으로 떠서 먹고 부모에게도 갖가드리면서 사자의 시체에 있는 것을 가져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손이 장가를 갑니다. 그곳의 풍습에 따라 삼손이 거기에서 7일 동안 잔치를 벌이는데 동네에서 30여 명의 청년이 와서 그의 친구가 됩니다. 그
때 삼손이 그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주겠다면서 ‘잔치하는 7일 동안에 이 문제를 풀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고, 풀지
못하면 너희가 나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12~13절). 그러자 그들이 문제를 말하라고 해서 삼손이
문제를 냈습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 그것이 뭐냐?’(14절)하고 수수께끼를 냅니다.
그들이
3일을 생각해도 알 수 없었습니다. 문제를 풀려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할 수 없이 삼손의 아내를 찾아갑니다. ‘네가 우리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우리를 청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면 네 남편을 꾀어 답을 알아낸 다음 우리에게 알려 달라. 그렇지 않으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겠다.’(15절)고 협박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삼손의 아내가 울면서 애원합니다. ‘당신이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그 답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나를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에게 알려 달라.’ 삼손이 그 말을 듣고,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어찌 그대에게 말하겠느냐?’하며 거절합니다(16절). 그러자 그 아내가 잔치하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울면서 애원하는 바람에 마지막 날 삼손이 딤나의 포도원에서 벌어진 자기의 경험을 문제로 낸 것이라고 그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삼손의 아내는
그것을 자기 민족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마지막 날 해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와서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며 답을 맞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삼손이 ‘너희가 내 암소로 밭 갈지 아니했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했으리라.’(18절)고
했습니다.
암소는 삼손의 부인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인간 타락의 문제를 푸는 분은 암소로 상징되는 실체 성신을 맞이한 메시아임을 예시한
것입니다. 마지막 제물 암소는 완성기의 재림주를 상징하고 완성신약섭리를 상징하는데, 성약이라는 말은 축복받는 것을 말합니다. 축복은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잘 7절을 보면,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혼인잔치가 이루어지면 어린양의 시대가 끝나고 암소의 시대, 곧 메시아가 암소로
상징되는 실체 성신을 맞이하여 참부모로 등장하는 완성성약섭리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암소는 신부시대, 즉 아내시대를
상징합니다.
3제물의 의미 562
3제물은 3단계의 성장과정을 통해 완성하는 천주(天宙)를
상징합니다.
또 아담·노아·아브라함 3대에 걸친 복귀섭리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3제물을 드리도록 한 목적은 종적 섭리의 탕감조건을
일시에 횡적으로 복귀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사탄이 침범한 3수(數)로 표시된 모든 조건을 일시에 탕감복귀함으로써 전체의 복귀섭리를 단번에
이루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3제물을 드리는 방법
아브라함은 상징헌제에서 3제물을 각각 둘로 쪼개어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양과 암소는 둘로 쪼갰으나 비둘기는 하찮게 여겨 쪼개지 않았고, 그로 인해 사탄을 상징하는 솔개가 비둘기에게 붙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0절에서 13절로 보면,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게 하리니.’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쪼개는 뜻
제물을 쪼갠다는 것은 선과 악의 분립을 의미합니다. 아담가정에서는 가인과 아벨을 분립했고, 노아가정에서는 방주를
중심해서 세상과 노아가정을 분립했습니다. 또 아브라함가정에서는 3제물을 쪼개서 사탄이 주관하는 세계와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로 분립합니다.
거기에서 사탄과 혈연관계로 들어온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聖別)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아서
선과 악이 분립되지 않았습니다. 선과 악이 분립되지 않았으니 하나님이 제물을 취하지 못하고 사탄이 제물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은 선주권(善主權)을 복귀하는 것인데, 사탄이 주관하는 악주권(惡主權)에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쪼개지
않은 결과
3제물을 완전히 쪼개지 않은 결과 선악이 분립되지 않았고, 여전히 사탄의 주관권에 남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상징헌제
후에 나타난 솔개는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의 헌제에서 침범할 기회를 노리던 사탄과 같고, 노아가정에서 홍수심판 때 방주를 엿보던 사탄과
같습니다. 홍수심판 후 방주 안의 노아가정을 노리던 사탄이 까마귀로 표현됐고, 3제물 상징헌제 후에 아브라함가정을 노리던 사탄이 솔개로 표현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상징헌제를 통해 사탄 주관권에 있는 피조세계를 분립해야 하는데 비둘기를 쪼개지 않음으로써 모두 사탄 주관권에 두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사탄의 주관권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의 아들 이삭도 사탄의 주관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선과 악으로
분립해야 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사탄이 아브라함가정을 주관하게 된 것입니다.
상징헌제 실패의
결과
상징헌제를 실패한 결과 믿음의 기대 복귀가 좌절되었고, 아브라함의 후손은 400년 간 애급 고역을 받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12자식과 70가족이 애급에 가서 400년 간 고역생활을 했습니다. 애급 고역기간은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의 400년을 탕감복귀하는 기간입니다.
애급고역 400년은 형벌을 받는 기간이자 사탄을 분립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상징헌제의 실패로 이스마엘과 이삭을 중심한 실체기대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3) 아브라함의 이삭 헌제 565
아브라함은 상징헌제를 실패한 장본인으로 타락한 아담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원칙은 실패한 인간을 다시 불러서 중심인물로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다시
불러서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 2절을 보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며 하나님은 상징헌제에 실패한 아브라함에게 이삭 번제를 명합니다.
다시 상징헌제를 드릴 수
있는 근거 565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3차에서 완성해야 하는 원리적 조건이 있습니다.
사탄은 아담가정을 아무런 이유 없이 아담과 가인 2대에 걸쳐 침범했습니다. 하나님의 장자인 아담과 아담가정의 장자인 가인을 사탄이 취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도 탕감복귀 원칙에 의해서 2대에 걸쳐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벨과 노아의 상징헌제 성공의 심정적 기대를 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벨이 양을 잘 드렸고, 노아도 방주를 중심으로
상징헌제를 잘 드렸습니다. 거기에서 아벨과 노아의 상징헌제 성공의 심정적 기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한 장본인이지만, 다시 이삭 번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탄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담과 가인 2대를 이유
없이 데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 편에서는 탕감복귀 원칙에 따라 사탄이 사랑하는 아브라함과 이삭 2대를 복귀해 올 수
있습니다.
아담가정·노아가정에 이은 아브라함가정은 3차로 가정섭리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더 이상 가정섭리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
때에는 반드시 가정섭리가 완결되어야 하는데,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둘로 쪼개지 않아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섭리는 연장될
수밖에 없는데, 아브라함가정에서 헌제에 합당한 인물은 이삭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 번제를 명령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삭 헌제를 위한 조건 566
1차 때에는 아브라함이 상징헌제를 드리기 위해서 부인 사라와 함께 애급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 그랄왕국으로 갑니다. 그랄 왕국의 왕은 아비멜렉이었습니다. 거기에서도 아브라함은
아담가정의 입장과 노아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1차 상징헌제 때와 똑같은 조건을
세웁니다.
창세기 20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애급에 갔을 때와 똑같이 다시 남매로 위장하여 그랄 왕국에 갔는데, 아비멜렉 왕도
여자를 좋아해서 사라를 취하려고 합니다. 아비멜렉 왕이 ‘너희들 사이는 어떤 관계냐?’고 묻자 아브라함 부부는 ‘우리는 남매지간이다.’고
했습니다(1~2절).
그 말을 듣고 아비멜렉 왕이 사람을 보내 사라를 데려갔는데,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경고합니다.
창세기 20장 3절에 ‘네가 취한 이 여인으로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하며, 아비멜렉 왕에게 사라를 취하면 죽는다는
경고를 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아비멜렉 왕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부부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돌려보냅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1차
상징헌제 때와 마찬가지로 정조를 지킴으로써 아담가정에서 해와가 잘못해서 종인 천사장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남편을 타락시킨 것을 탕감복귀했다는
조건이 세워집니다.
또 노아가 부인과 자녀와 동물을 데리고 사탄 편 세계를 상징하는
땅에서 하나님 편 세계를 상징하는 방주에 들어간
것처럼 아브라함은 부인과 조카 롯과 재물을 들고 사탄세계인 그랄 왕국에서 하늘세계인 가나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노아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했다는
조건이 세워집니다.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승리의 조건을 세워서 비로소 이삭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모리아 땅으로 갑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번제를 드리기 위해 3일 노정을 갔습니다(창세기 22장 4절).
이삭 헌제 567
창세기 22장
3절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사환과 함께 아들 이삭을 데리고 3일 동안 모리아 산을 찾아갑니다. 3일
동안 새 출발을 위한 사탄분립 노정을 걸은 것입니다.
3일째 되는 날 멀리 목적지가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에서 두 사환을 떼어놓고
번제에 쓸 나무는 아들에게 짊어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부자 두 사람이 동행합니다. 그런데 이삭이 뒤돌아보면서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7절)하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고 대답합니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이 충격을 받아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내가 너를 죽일 수 없다.’고 했다면 사탄이
바라고 원하는 목적은 이루어지고, 하나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인정(人情)을 버리고 천정(天情)을
택했습니다.
이삭은 제물도 없이 가는 데다가 아버지가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하는 것을 보고 제물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것을
이미 알았을 것입니다. 이삭이 뒤돌아서서 ‘아버지! 제물이 어디 있습니까?’하는 말은 ‘아버지 제가 제물인 것을 아니까 한시라도 고민하지 말고
갑시다.’하는 뜻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어서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내리치려고 합니다(9~10절). 사탄을 분립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을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하면서 칼을
거두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이삭 번제를 저지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아브라함이 백 살에 얻은 자기 자식을 차마 죽이겠느냐?’ 생각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내 자식을 번제하라고 하셨는데, 진짜 죽이라는 건 아니겠지?’ 하거나 이삭이 ‘아버지가 설마 나를 죽이겠느냐?’
했다면 사탄분립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절대적인 믿음(충성심)으로 이삭을 번제하고, 이삭은 절대적인 믿음(순종심)으로 제물이 될 것을
결심했습니다. 거기에서 사탄이 분립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분립되는 순간 아브라함에게 칼을 거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당신의 말씀을 절대 믿고 절대 순종하자 이삭을 죽이지 않고 살렸습니다. 사탄이 분립됐기 때문에 죽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할 줄을 아노라.’(12절)고 했습니다. ‘이제야’라는 말에는 상징헌제의 실패에 대한 책망과
지극히 하기 어려운 이삭 헌제의 성공에 대한 기쁨이 들어있습니다.
이삭 헌제 성공의 결과 569
이삭
헌제에 성공했을 때 아브라함은 상징적으로 죽었고, 이삭은 부활한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100세에 얻은 자식을 죽인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하는 것은 자기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또 이삭이 살아난
것은 아브라함의 부활과 같은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애벌레라고 한다면, 잠시 번데기로 변신했다가 허물을 벗고 성충(成蟲)으로 변태 한 것이
이삭입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은 부자(父子)지만 한 몸입니다. 거기에서 사탄이 완전히 분립되었기 때문에 사탄이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로 상징헌제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삭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 569
이삭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이삭입니다. 이삭이 중심인물이지만 사실은 아버지와 같이 협력했습니다.
창세기 22장 13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 부자가 하나 되어 수풀에 뿔이 걸려 허우적거리는 숫양 한 마리를 잡아 아들 대신 번제로 드리고 모리아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상징헌제에 실패했지만 이삭헌제를 통해서 다시 상징헌제를 드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이삭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에서
조건물은 바로 숫양입니다.
원래 믿음의 기대는 아브라함이 중심이 되어 이뤄져야 하는데,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음으로써 이삭까지
연장된 것입니다. 이삭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가 조성됐기 때문에 다음에는 실체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2)
실체기대 570
아담에서 노아를 거치고, 노아로부터 아브라함 대에 이르러 아브라함이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3제물을 상징헌제로 드려서 성공했으면 이스마엘과 이삭이 장자와 차자로서 탕감복귀를 실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헌제에 실수함으로써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사탄이 침범했습니다. 다시 사탄을 분립하기 위해서 이삭번제를 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이삭과
같이 죽음의 자리에 갔다가 사탄을 분립하는데 성공하여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이미 제물이
되었기 때문에 다시 중심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에서 동생 야곱을 중심하여 형 에서를 굴복시킴으로써
실체기대를 세우게 됩니다.
(1) 중심인물 : 야곱 570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의 실체기대에서
중심인물은 야곱입니다.
아담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 중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고, 노아가정에서는 함이 실수했기 때문에 실체기대를 이루지 못한
채 다시 10대를 거쳐서 아브라함 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이 책임을 다했으면 이스마엘과 이삭이 실체기대를 세웠을 것인데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이삭이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되어 믿음의 기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이미 제물이
되었기 때문에 실체기대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을 중심해서 실체기대를 세웁니다.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 10대,
노아부터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쳐 야곱까지가 12대입니다. 야곱은 열 두 아들을 중심하여 노아부터 야곱까지의 종적인 12대를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차자인 야곱이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야곱은 중심인물이 되기 위해서 먼저 아담가정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삼대축복을 찾아와야 합니다.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장자기업(長子基業)의 복귀입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 두 사람을 놓고 아담가정이 잘못한
전체 역사를 탕감복귀하려고 했습니다.
개인 복귀 571
야곱은 쌍둥이인데 에서가 형님이고, 야곱은
동생입니다. 에서는 몸이 건강하고, 목소리도 우렁차고, 몸에 털도 많고, 사나이다웠습니다. 그는 활을 가지고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몸이 연약하지만 지혜로웠습니다. 그는 언제나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 리브가를 도왔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에서를 사랑했고, 리브가는 자기를 도와주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창세기 25장 29절에서 34절을 보면, 에서와 야곱은
장자기업을 놓고 싸웁니다. 어느 날 야곱이 팥죽을 쑤었는데, 들에서 돌아온 에서가 몹시 배가 고파서 야곱에게 팥죽을 달라고 합니다. 그때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면 팥죽을 주겠다고.’고 합니다. 에서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배고픔을 면하는 것보다 중요하겠느냐?’하고
야곱의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진지했습니다. 그것을 맹세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농담 같지만 천지가 개벽할 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동생 야곱의 요구대로 맹세하고 떡과 팥죽을 얻어먹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떡과 팥죽이지만 그것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동생 야곱이 형 에서에게 형이라는 소리를 듣는 바람에 사탄이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동생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개인적으로 장자기업을 복귀해 왔습니다.
가정복귀 572
개인적으로 장자기업을
복귀한 야곱은 이제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창세기 27장을 보면, 나이가 든 아버지 이삭은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이삭이 장자 에서를 불러놓고 속삭이는 소리를 어머니 리브가가 들었습니다. ‘내가 이제 늙어 언제 죽을 지 모르니 네가
나를 위하여 사냥을 해다가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오면 내가 마음껏 먹고 너에게 축복을 해주마.’(2~4절)하는 얘기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에서는 신이 나서 활을 들고 사냥을 하러 들로 갔습니다.
한편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너는
염소떼에 가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잡아오면 내가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갖다드려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해 잡수시게 하라.’(6~10절)고 했습니다.
야곱은 그 말을 듣고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워졌습니다. 에서는 앞을 잘 못
보지만 음성은 구분할 수 있고 손을 만져보면 에서는 털이 있고, 야곱은 털이 없으니까 에서가 아닌 줄 압니다. 그래서 야곱이 리브가에게 ‘내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 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찐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찌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11~12절)하고 근심을 털어놨습니다.
리브가가 그 말을 듣고 ‘저주를 받으면 그것을 내게로 돌려라. 너는 걱정 말고 내 말만
따라 염소새끼를 잡아오라.’고 이릅니다. 야곱이 염소새끼를 잡아오자 리브가는 이삭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습니다.
야곱이 음식을 가지고
이삭을 찾아가기 전에, 리브가는 염소새끼의 가죽으로 야곱의 매끈매끈 손과 목을 감싸고, 맏아들의 옷을 찾아 야곱에게
입혀주었습니다(15~16절).
야곱이 음식을 들고 이삭에게 가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19절)하고 음식을 드렸습니다. 이삭이 들으니 야곱의 목소리였습니다. 이삭이 이상해서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하고 묻자, 야곱이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順適)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20절)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삭이
그 말을 듣고 야곱을 가까이 불러 목도 만져보고 손도 만져보았습니다. 이삭이 만져 보니 몸에 온통 털이 있었습니다. 이삭이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하며 야곱을 축복해 줍니다(22~23절).
이삭이 정말로 염소 털과 자기 아들의 털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냐? 이삭은 알았지만 야곱이 축복을 받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이삭은 둘째아들 야곱이 하나님
편인 것을 알면서도 사탄이 있기 때문에 곧바로 축복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축복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아버지보다 더 간절하다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축복을 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복을 주어도 그 복을 간직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주면 오히려 사탄이 침범하기 더 쉬워집니다. 야곱은
그것을 알았고, 아버지보다 더 간절하게 축복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을 다 해준 다음에 에서가 집으로 돌아와 사냥한 고기를
잡아서 요리를 해왔습니다. 에서가 이삭에게 ‘아버지! 고기를 잡수시고 축복해주십시오.’ 하니까 이삭은 에서에게 ‘야! 이놈아! 너는 복을 몇
번이나 받으러 다니느냐?’고 책망합니다.
에서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얼마 전에는 동생 야곱이 떡과 팥죽으로 형의 자리를 빼앗아간 일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또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아간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에서는 몇날 며칠이 지나도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찾아 죽이려고 했습니다(30~41절).
에서가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안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숨겨놓고 있다가 결국에는 친정집으로 피신을 보냈습니다. ‘형이 아무리 봐도 너를 만나면 죽일 것 같으니 형이 화가 풀릴 때까지 외삼촌 집에
피신하라.’(42~45절)고 했습니다.
야곱이 어머니의 말을 따라서 하란에 사는 외삼촌 라반에게로 갔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도로가 있고
자동차가 있지만, 그 때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야곱은 산길, 오솔길을 가다가 밤이 되면 돌베개를 베고 누워서 찬송하며 잠을 잤습니다(창세기
28장 11절).
창세기 29장을 보면, 야곱이 외삼촌댁에 도착하여 한 달이 되도록 외삼촌 라반에게 무엇 때문에 왔는지, 언제까지 있을
것인지, 말을 안 하니까 외삼촌이 답답하여 야곱을 불러 물었습니다. ‘네가 비록 나의 생질이나 어찌 공으로 내 일만 하겠느냐? 무엇이 네
보수겠느냐? 네게 고하라.’(15절)고 말입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두 딸 레아와 라헬 가운데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합니다. 그를 위하여
7년을 봉사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외삼촌이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하면서 허락했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7년 간 종살이를 하면서 착실하게 약속을 지켰습니다(16~24절).
드디어 7년이 되어 야곱은 라반에게 가서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네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라반은 두말 않고 잔치를 베풀어 결혼식을 올려주고 첫날밤을
치르게 해주었습니다(21~23절).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신부는 둘째 딸 라헬이 아니라 첫째 딸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을
찾아가서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하고 따졌습니다. 라반이 말했습니다.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니라. 이를 위하여 7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7년을 내게 봉사할찌니라.’(23~27절)고 약속했습니다.
7일이 지나 라반이
둘째딸 라헬을 야곱에게 주었고, 그 대가로 야곱은 다시 7년 동안 라반에게 봉사했습니다.(28~30절).
레아는 첫째부터 넷째 아들까지
아들 넷을 낳고 생산을 멈추게 됩니다(32~35절).
창세기 30장을 보면,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자기의 몸종 빌하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었습니다. 빌하가 야곱에게서 단과 납달리를 낳았습니다(3~8절).
그러자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 갓과 아셀을 낳았습니다(9~14절).
그 후 하나님은 생산을 멈추었던 레아에게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게 하십니다(16~21절). 라헬은 하나님이 뒤늦게 태를 열어주셔서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낳고(22~24절), 임종이
가까워져 산고를 겪은 다음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을 낳고 죽습니다(창세기 35장 16~18절).
그러다 보니 야곱에게 부인이 모두 네
명이나 생겼습니다. 야곱은 레아(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블론), 라헬(요셉, 베냐민), 실바(갓, 아셀), 빌하(단,
납달리)와의 사이에 총 12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야곱은 하란 땅에 가서 가정을
찾았습니다.
만물주관 576
창세기 30장 25절과 26절을 보면, 야곱이
라헬에게서 마침내 아들 요셉을 얻자 외삼촌 라반에게 가서 처자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합니다.
라반이 그에게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그리고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27~28절)고 말합니다.
야곱은 외삼촌에게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었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29~30절)하고 묻습니다.
라반이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하고 되묻습니다. 야곱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나의 가정이 독립하는 것만 허락해주신다면 다시 외삼촌의 양떼를 먹이고 지키겠습니다. 오늘 내가 두루 다니면서
그 양 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리어 내리니 그것들을 나의 품삯으로
주십시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혹시 아롱지지 아니하거나 점이 없는 염소, 또는 검지 않은 염소가 있으면 다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십시오’말하고, 라반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31~34절).
라반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려내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려내고 양 중에서 검은 것을 가려내어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 야곱과 사흘 길을
뜨게 했습니다. 그 후에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떼를 쳤습니다(35~36절).
야곱은 튼튼한 양이 새끼를 밸 때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산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를 향하게
해서 그 무리가 물을 먹으러 올 때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게 해서 재산을 불려갔습니다(41~43절).
이윽고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1장을 보면,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야곱이 눈치를 살피니 외삼촌 라반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1~2절).
야곱은 외삼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마침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과 네 족속에게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명하셨습니다(3절).
야곱이 라헬과 레아를 양떼가 있는 들로 불러 자기의 뜻을 알립니다.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 안색을 보니 나를 대하는
것이 전과 같지 않다. 그렇지만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너희들도 아는 것처럼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지만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變易)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하나님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 하나님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나타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자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4~13절)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라헬과 레아가,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시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14~16절)며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부인들의 말에 힘을 얻은 야곱이 자식과 아내들을 낙타에 태우고 모든 가축과 소유물을 끌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떠날 때 야곱은 외삼촌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출발했습니다. 특히 야곱 일행은 야반도주할 때 외삼촌이 가장 좋아하는 우상을
가져갔습니다. 둘째 부인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신(神)인 드라빔을 훔쳐서 낙타 안장에 숨겼습니다(17~21절).
3일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을 알게 된 라반이 그의 형제들을 거느리고 7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야곱 일행을 따라잡았는데, 밤에 하나님이 라반에게 현몽하여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22~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산에 장막을 쳤는데 라반도 근처에 장막을 쳐놓고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어째서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내 딸들을 끌고 도망쳤느냐? 네가 떠나는 것을 알렸다면 내가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즐겁게 하여
너를 보내주었을 터인데 네가 나를 속이고 도망쳐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느냐? 네 소위가 실로 어리석도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25~30절) 하면서 자기가 아끼는 우상을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야곱은 라헬이 라반의 우상을 훔친 줄을 모르고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31~32절) 하고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라반이 야곱의 장막과 레아의 장막을 모두 뒤졌으나 드라빔을 찾지 못했습니다. 둘째 딸
라헬에게 이르자 라헬은 드라빔을 숨긴 낙타 안장 위에 있다가 ‘나는 경도(經度)가 있어 못 내려갑니다.’ 하고 버티자, 라반을 결국 드라빔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33~35절).
야곱이, ‘나의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나를 불같이 급히 쫓나이까?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가장집물(家藏什物) 중에 무엇을 찾았나이까? 여기 나의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두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였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36~42절) 하고 화를
냈습니다. 결국 라반이 외손자들과 딸들에게 입 맞추고 그들에게 축복하고 돌아갔습니다(55절).
라반의 둘째딸 라헬이 하체(下體)에 우상을
숨긴 것은 에덴동산에서 해와의 하체로 사탄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자신의 하체에 우상을 숨기고 3일 노정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분립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을 분립한 터전에서 야곱 일행은 얍복 강을 건넜습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얍복 강을 건너기
전에 사자들을 보내어 그것을 형 에서에게 알렸는데, 그들이 돌아와 야곱에게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다가온다고
알려주었습니다(1~6절).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해서 자기가 가지고 온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에서가 한 떼를 치더라도
한 떼는 남을 것이라 하고, 하나님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강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나를
건져주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7~12절)하고 기도합니다.
야곱이 거기에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암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젖 나는 낙타 30마리와 그 새끼,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와 그 새끼 10마리를 세 때로 나누어 에서에게 보냈습니다(13~16절).
야곱이 예물을
보내면서 첫째 떼를 맡은 사람에게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에 것은 뉘 것이냐 묻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 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부탁하고, 둘째와 셋째 떼를 맡은 사람들에게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와 같이 그에게 고하고 또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부탁합니다. 야곱이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17~20절).
야곱이 에서에게 줄 예물을 앞서 보내고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도 그 소유와 함께 얍복 강을 건너게 하고 혼자 남아 있는데 밤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야곱이 천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자 천사는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알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천사는 날이 새려하니
나를 가게 하라고 야곱에게 부탁하지만,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4~26절) 하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네 이름이 뭐냐?’고 묻고, ‘이제부터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라고
축복해주었습니다(27~28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얍복 강에서 천사와 싸워 승리한 것은 단순히
씨름에서 승리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 땅에 가서
네 부인과 열 한 자식을 얻고 재물을 취하고, 종을 준비하고, 천사를 굴복시키고, 사탄을 분립하는 전체 노정을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얍복 강에서 천사와의 씨름을 통해 야곱은 아담가정에서 실패한 모든 것을 탕감복귀하여 승리한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 강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승리한 것을 두고 단순히 씨름을 해서 승리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장자기업,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가정
이상, 만물 주관권 등 천사에게 빼앗긴 모든 것을 복귀해서 승리했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드디어 형 에서를 만납니다.
창세기 33장을
보면,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 맞기고 그와 입 맞춘 뒤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야곱에게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고 대답하고 여종들이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가 에서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레아도 자식과 더불어 나아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함께 나아가 절을
했습니다(1~7절).
에서는 야곱에서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하고 물으니, 야곱은 형에게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야곱에게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8~10절)하며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형님을 깍듯이 모셨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그토록 극진히
대하니 에서도 동생을 죽이고 싶었던 마음이 점차 누그러져 서로 화해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가서 21년 간 종살이해서 얻은 많은 재물을
형 에서에게 갖다주고 형님의 마음을 빼앗아 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실체기대의 중심인물 야곱은 개인적으로는 형 에서로부터 장자기업을
복귀하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가정적으로는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에 가서 가정을 복귀하고, 재물 복귀와 천사장 굴복을 통해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입니다.
(2) 조건 : 실체헌제 583
아브라함가정에서 실체기대의
조건물은 실체헌제입니다. 에서도 야곱과의 상봉(창세기 33장 1절~12절)을 통해 야곱에게 애중굴통(愛仲屈通)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완전히 세웠습니다. 야곱가정을 통해 메시아가 오게 되었고, 야곱가정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된 것입니다.
(3)
결과 583
종적인 탕감복귀역사를 횡적으로 탕감복귀함
아담가정에서부터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해
나온 종적 역사노정을 야곱 가정에서 횡적으로 탕감복귀했습니다. 아담가정에서는 아담·해와가 음란죄를 지었고, 가인·아벨은 살인죄를 지었고,
천사장은 거짓말 죄· 역적죄·절도죄를 지었습니다. 아담가정에서 잘못한 모든 것을 아브라함 가정에서 탕감복귀한 것입니다.
특히 아브라함과
이삭을 음란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해와의 범죄를 탕감복귀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부인 사라는 애급과 그랄 왕국에 가서 왕들에게 바쳐졌으나 절대성을
지켜서 타락하지 않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해와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야곱과 요셉은 음란죄를 지을 수 있는 자리에서
음란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본연의 아담 입장을 복귀했습니다. 요셉은 야곱과 그의 둘째 부인 라헬 사이에서 태어난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요셉과 함께 아담의 입장을 복귀했다는 말은 음란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에서 음란죄를 안 지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 가서 네 명의 부인을 얻습니다. 아담가정에서는 사탄이 여자를 중심으로 해와를 점령하고 아담까지 점령했는데,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음란죄를 짓지 않고 여자를 중심으로 여자를 점령함으로써 아담의 타락을 탕감복귀한 것입니다.
야곱이 찾아간 외삼촌 집은 사탄의 실체 가정이고
외삼촌 라반은 실체 사탄을 상징합니다. 하란 땅이 사탄세계를 상징하는데다 라반은 우상을 숭배하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사탄세계인
외삼촌 집에 가서 외삼촌의 두 딸 레아와 라헬, 그리고 두 딸의 몸종 실바와 빌하를 모두 찾아옴으로써 사탄이 절대 참소할 수 없는 조건을
세웠습니다. 야곱은 전체를 탕감복귀하기 위해서 모든 여자를 주관하고 여자를 점령한 것입니다.
야곱이 외삼촌의 두 딸과 두 딸의 몸종을 모두
찾아온 것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거기에서 승리함으로써 메시아가 올 수 있는 혈통이
생겨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인간들이 이해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요, 역사노정입니다.
창세기 37장을 보면, 야곱의 둘째 부인 라헬이 낳은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끔찍이 사랑을 받은데다 꿈도 잘 꾸고, 열 명이나 되는 의붓형의
과실(過失)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기를 잘해 형제들 사이에서 미움을 받게 됩니다.
열 형제들이 볼 때 동생 요셉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동생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고 형제들끼리 모의했습니다. 그때
첫째형인 르우벤이 요셉의 생명은 상하게 하지 말자고 하고, 넷째 형인 유다는 요셉도 우리와 같은 핏줄이니 죽이지 말고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자고
제안했습니다.
요셉의 의붓형 열 명은 유다의 말대로 요셉을 애급의 장사꾼에게 팔아먹고는 그의 옷을 벗기고 찢어서 양의 피를 발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형제 열 명은 돌아왔는데, 야곱의 심부름을 간 열 한 번째 아들 요셉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요셉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아버지에게 ‘집으로 돌아오던 중 동생 요셉의 옷 같아서 들고 왔는데 옷이 다 찢기고 피가 묻은
것을 보니 동생이 이리 떼를 만나서 죽은 것 같다.’(32절)고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 야곱은 수심에 잠겼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9장을 보면, 애급으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갔습니다. 보디발
대장은 늘 바로 궁에 가서 살기 때문에 그의 부인은 언제나 외로웠습니다. 보디발 대장은 늘 바로 궁에 가서 살기 때문에 그의 부인은 언제나
외로웠습니다. 보디발 대장의 처는 집에서 종살이하는 히브리 청년이 처음에는 어린아이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해지자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고 정조를 지켰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대장의 처의 유혹을 계속 거절하자 나중에는 그
부인이 자기 안방으로까지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요셉은 종이니까 주인이 부르면 당연히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방에 들어가니 주인 여자는
요셉에게 동침을 하자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이 강하게 거부하자 나중에는 부인이 강제로 옷을 벗기고 달려드는데 요셉은 옷을 버리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부인은 급히 집 사람을 불러서 요셉이 자기를 희롱하고 겁간(劫姦)하려 한다며 오히려 역공을 펼쳤습니다. 요셉의 옷을
자기 곁에 두고 보디발 대장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기로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17~18절)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보디발 대장은 아내의 말을 듣고 크게 화가
나서 요셉을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사랑하여 감옥의 우두머리 전옥(典獄)에게 은혜를 받게 하고 나서 그가
요셉에게 옥중의 제반 사무를 처리하게 했습니다(20~23절).
창세기 40장을 보면, 요셉은 감옥에서 바로의 술을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관원장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고 얼굴에 근심의 빛이 가득했습니다. 요셉이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관원장에게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술을 맡은 관원장은 요셉에게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1~11절)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에 요셉은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의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12~13절)하고 꿈을 해몽해주었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도 ‘나도 꿈을 보니 흰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16~17절)고 요셉에게 꿈 이야기를 해 주며 꿈
해몽을 부탁했습니다.
요셉은 그 관원장에게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18~19절)하며 삼일 후에 죽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사흘이 지난 후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되고, 떡 굽는 관원장은 사형을
당했습니다(20~22절).
어느 날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애급의 술객과 박사를 불러서 물어보아도 해석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창세기 41장을 보면,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하숫가에 섰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하숫가에 섰더니 그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 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세악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세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 즉 꿈이라. 아침에 그 마음이
번민하여 보내어 애급의 술객과 박사를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 꿈을 고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1~8절)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해몽할 사람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술 맡은 관원장이 자기와 함께 감방에 있던 요셉을 바로에게 추천했습니다.
바로가
감옥에 있는 요셉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자 요셉은 바로에게 하나님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미리 보여준
것이라고 해몽을 해 주었습니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이라.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소는 칠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온 애급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 것이므로 애급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기근으로 멸망되리니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15~31절)라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을 오늘날의 국무총리와 같은 총리대신 자리에 앉히고 자신을
대리하여 애급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요셉은 의붓 형들에게 쫓겨 애급에 팔려가서 종살이를 하던 중 아무 이유 없이 감옥에 갇혔다가 갑자기 총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총리로서 7년 동안 풍년이 들었을 때 곡물을 거두어 성에 비축했습니다. 그런데 7년이 지나자
풍년이 그치고 흉년이 들기 시작하는데, 나라마다 풍년이 들었을 때 흥청망청 쓴 대가로 기근 때문에 난리였습니다. 요셉이 다스리는 애급은 창고에
가득히 쌓인 곡식을 방출해 기근을 면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곡식을 구하기 위해 애급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창세기 42장을 보면, 요셉의 열
형제도 어깨에 자루를 메고 곡식을 구하러 애급으로 가서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곧바로 알아보지만,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너희가 어디에서 왔느냐?(7절)고 물었습니다. 형들이 곡식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요셉은 옛날에 꾼 꿈을 떠올리며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요셉을 더 나아가 막냇동생을 데려오지 않으면 애급에서 못나갈 것이라고 협박하고 3일 동안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3일 후 요셉은 시므온을 제외한 나머지 형들은 풀어주고 곡식을 자루에 가득 채우고, 곡식 판돈을 받지 않고 도로 자루에 넣어서
집으로 보냈습니다.
집에 도착한 형들은 자루를 쏟아 보니 돈뭉치가 자루 속에 그대로 있어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인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 아비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5~36절) 하며
아들들을 꾸짖었습니다.
창세기 43장을 보면, 기근이 심하여 애급에서 가져온 곡식이 다 떨어지자 아버지 야곱은 아들들에게 다시 가서 곡식을
사오라고 채근했습니다. 아들들은 막냇동생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곡식을 구하지 못할 것이라며 아버지에게 막내를 데려가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애금에 인질로 잡혀 있는 시므온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막냇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애급에 가서 요셉 앞에 섰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기쁜 나머지 짐승을 잡고 잔치를 준비한 후 형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형들은 예전에 자루에 든 돈을 가져간 것을 빌미로 자신들을 억류하여 노예로 삼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집무실에서 돌아온 요셉은 집에 도착하자
형들은 그에게 예물을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을 올렸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너무나 반가워 몰래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음식을 차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원래는 히브리 사람과 애급 사람은 부정을 탄다고 하여 같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애급 사람인 그의 형제들이 나이 순서대로 요셉 앞에 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함께 마시며
즐거워했습니다.
창세기 44장을 보면, 요셉은 양식을 자루에 실을 수 있을 만큼 가득 채우고 돈을 그 자루에 넣고, 자신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몰래 넣고 양식 값으로 받은 돈을 함께 자루에 넣으라고 청지기에게 명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성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은
청지기에게 명하여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미칠 때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면 마시며 늘
점치는데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4~5절)고 지시했습니다.
청지기는 요셉의 형제들을 쫓아가 요셉이 시킨
대로 말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우리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이런 일은 종들이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적질하리이까? 종들 중 뉘게서 발견되듡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우리주의 종이 되리이다.’(6~9절) 하며 각자의 자루를 풀었는데, 베냐민의 자루에서 그 잔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가서 요셉을 만났습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우리가 다 노예가 되겠다고 하자, 요셉은 베냐민만
자신의 종으로 삼고 나머지는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다가 막냇동생을 아버지께서 지극히 사랑하니 막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며 자기가 베냐민 대신 종이 되어 남겠으니 베냐민은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창세기 45장을 보면, 요셉이
모든 사람을 물러가라 하고 형제들에게 자기가 요셉이라고 알렸습니다.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급 사람들에게 들리고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렸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하고 물으니 형들이 놀라서 대답을 못했습니다(3절).
요셉이 ‘옛날 형님들이 나를 팔아먹어서 오늘 이 자리까지 왔지만 근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살아서 내 부모를 섬기고, 모셔야 하는데 내가 하지
못한 일을 형님들이 했기 때문에 지극히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애급 땅으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야곱과
그의 70가족이 애급으로 내려오자 고센 땅을 내어주고,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천사장이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해갔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한 것입니다. 또 야곱과 요셉은 아담이 음란죄를 지어서 타락했던 것을
탕감복귀했습니다.
야곱을 보면 한집에 살면서 결혼할 때까지 7년 동안 부인의 손 한 번 잡아보지 않고 정조를 지켰습니다. 요셉도 바로의
신하 보디발 대장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부인이 유혹했을 때 감옥까지 가면서도 말없이 정조를 지켰습니다.
아담가정에서 해와가 잘못했던 것,
가인·아벨의 삶 전체를 탕감복귀한 것입니다. 게다가 요셉은 살인죄를 탕감복귀했습니다. 형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외국에 팔아넘긴 원수인데도 그들을
사랑하고, 오히려 재물까지 줌으로써 살인죄를 탕감복귀한 것입니다.
야곱의 승리로 이루어진 것
591
아브라함가정에서 야곱이 아담가정에서 저지른 음란죄·살인죄·거짓말 죄 등 잘못한 죄 전체를 탕감복귀하고 만물까지 찾아 승리했기 때문에
야곱의 승리는 선민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승리로 이스라엘 민족은 장차 메시아가 올 수 있는 선민(選民)이 된 것입니다. 야곱이
승리함으로써 선민의 기원이 생겼고, 그 후손에게서 메시아가 오게 됩니다.
야곱은 섭리 역사상 처음으로 사탄 편 가인을 굴복시킨 하나님 편
아벨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야곱노정은 사탄 편을 굴복시키는 전형노정(典型路程)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승리로 이스라엘 민족사가
복귀섭리역사의 중심사가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 입장으로 볼 때는 자기 민족이 걸어가는 역사이지만, 한 나라의 역사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의 중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보내준 예수님을 불신하여 십자가에 내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하나님의 섭리를 거두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거두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복귀섭리가
예수님 이후 서양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서에 3대 하나님으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장 6절을 보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즉 3대
하나님으로 섭리해 나오는데, 대수(代數)로 볼 때는 3대이지만 뜻으로 볼 때는 1대와 같습니다.
모든 탕감노정을 중심적으로 걸어야 할
인물은 실체헌제의 중심인 아벨형 인물입니다. 아벨·함·이삭·야곱·요셉이 아벨형 인물입니다.
3) 섭리의 연장
야곱의 승리로 메시아의
기대는 세워졌으나 사탄 편은 이미 민족을 형성하여 민족적 기대가 이루어진 상태였습니다. 하나님 편은 야곱가정에서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
기대를 세웠지만,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민족적 기대가 세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사탄세계는 이미 하나님 편에 앞서 민족을
형성했기 때문에 가정을 중심해서 메시아를 보내면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낼 때는 적어도 사탄 편과 동등하게 민족적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 터전에서 메시아를 보내야만 합니다. 사탄 편이 민족을 형성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가정적 기대 위에 메시아를 보내면
메시아도 애급에 가서 종살이를 해야만 합니다. 또 아브라함이 상징헌제를 실패함으로써 400년 애급고역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가정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성공했으나 메시아가 오실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여금 애급에 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게 하여 그들을 데리고 나온 후에 메시아를 보내게 됩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그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를
맞이할 때까지 필요한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상봉함으로써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가 세워져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처음으로 마련됐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상봉으로 성공한 실체기대는 메시아가 올 때까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12자식과 70가족은 애급에 들어갔지만,
에서의 가족은 한 사람도 못 들어갔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형제 상봉은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급에 들어가면서 다시 갈라졌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형제 상봉으로 믿음의 기대 위에 실체기대가 세워져서 400년 후 메시아를 만날 때까지 유지되어야 하는데 형님 에서가 그렇게 못했습니다. 사탄이
다시 형님 편에 서서 역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편은 애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번식해 오는데 장정들이 60만 명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까지 포함하면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만일 에서가정까지 함께 애급에 갔으면 적어도 몇 백만 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굳이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탈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애급에서 바로를 굴복시키고 애급 왕을 중심으로 그 왕국에서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는
기대를 세울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가정이 한 사람도 못 들어갔기 때문에 사탄은 에서가정을 하나님 편과 분립해서 또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올 때까지 수없는 사탄의 역사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서와 야곱의 상봉에 이어 실체기대는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특별한 민족이 세워져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가정이
보여주는 교훈 593
뜻 성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책임분담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가정이 보여주는 교훈은 ‘작은
것을 실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둘기 한 마리쯤 쪼개지 않으면 어떨까 했는데, 그 결과는 보다 큰 탕감조건을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했고, 그의 후손은 애급에 가서 400년 간 고역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작은 것을
실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나 자신을 놓고 항상 선악을 분립해야 합니다. 나는 선악의 모체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선과 악을 분립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모자협조(母子協助)를 해야 합니다. 아담가정에서 해와가 모자 협조를 못해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부인의 협조를 받지 않으면 뜻길을 가기 어렵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협조를 받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뜻길을 가도록 유도해도 자녀는 어머니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어머니가 반대하면 뜻길을 가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또 결혼하면 부인이 어머니의 입자에서 그 책임을 하게 됩니다. 부인의 협조가 있으면 그 가정의 신앙생활은 평탄하지만, 부인의
신앙이 없으면 그 가정은 신앙을 지키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이 실수를 부르게 되므로 작은 것을 언제나 주의해야
합니다.
뜻길을 가는 태도 594
야곱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온갖 정성을 다해 에서를 위하여 21년간
외삼촌 집에서 고역을 치렀습니다. 게다가 거기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형님에게 갖다 주려고 한 것입니다. 만일 야곱이 좋은 것은 모두 숨겨놓고,
나쁜 것만 짊어지고 형님을 찾아갔다면 형님한테 맞아죽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온갖 정성을 다해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형님에게 몽땅 갖다
바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형님의 마음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가장 좋은 것을 형님에게 바친 결과 21년 동안 동생을
죽이기 위해 칼을 갈았던 에서의 마음을 완전히 봄눈 녹듯이 녹이게 됩니다.
가인의 입장에 있는 에서는 언제나 순종·굴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것은 순간에 결정되기 때문에 순간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야곱은 인간 최초로 사탄을 굴복시키는 본보기 노정을
걸었습니다. 인류는 노정을 따라서 사탄을 굴복시키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세도, 예수도 야곱의 노정을 따라가야 하고, 우리도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5장 모세 중심한 복귀섭리 597
하나님이 성서에 숨겨 놓은 구원섭리의 비밀은
타락한 인간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을 알면 사탄을 굴복시키는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사탄을 굴복시키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선지자로 하여금 먼저 그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서론
1) 모세와 예수님을 중심한 복귀섭리
성서에는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관한 수많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탄이 먼저 알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만이 아시고 사탄이나 인간은 모르도록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거나 지혜 있는 자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서에 숨겨 놓은 구원섭리의 비밀은 타락한 인간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을
알면 사탄을 굴복시키는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사탄을 굴복시키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선지자로 하여금 먼저 그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아모스 3장 7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하나님 편 야곱이 사탄 편 에서를 굴복시킴으로써 야곱은 가정적으로 사탄 굴복의 본보기 노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야곱노정은 상징노정(象徵路程)에 해당합니다.
사도행전 3장 22절을 보면,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야곱노정을 따라
민족적인 사탄 굴복의 노정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세노정은 형상노정(形象路程)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모세노정을 따라 사탄을 실체적으로
굴복시키는 길을 개척합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했듯이, 예수님은 사탄을 실체적으로 굴복시키는
노정을 걸어가심으로써 만민이 그 길을 가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노정은 실체노정(實體路程)에 해당합니다.
2) 사탄 굴복의 본보기
노정 599
(1) 예수님이 전형노정으로 야곱노정과 모세노정을 세우신 이유
하나님은 아버지(=天父)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子女)이며, 천사는 종입니다. 그런데 종인 천사가 자기 존재 위치를 떠나서 사탄이 되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 앞에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굴복하지 않는 사탄이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에게 굴복할 리 없고, 성도들 앞에는 더더욱 굴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적 책임을 지시고 사탄 굴복의 전형노정(典型路程)인 야곱노정과 모세노정을 하나님 책임분담으로 부모의 입장에서
보여주십니다.
(2) 야곱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님노정 599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사탄의 침범을 받았습니다. 사탄 굴복의 본보기 노정은 아담의 타락 경로에 따라서 야곱노정·모세노정·예수노정을 거치면서
사탄을 분립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정적으로 상징적인 사탄 굴복의 본보기 노정을 걸었고, 모세는 상징적으로 형상적인 사탄 굴복의 본보기
노정을 걸었고, 예수님은 국가적으로 실체적인 사탄을 굴복시키는 본보기 노정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야곱을 세워서 사탄 굴복의 본보기
노정을 보여주었는데, 모세는 야곱이 간 길을 그대로 가고, 예수님은 모세가 간 길을 보여주었는데, 모세는 야곱이 간 길을 그대로 가고, 예수님은
모세가 간 길을 그대로 가고, 우리 인류는 예수님께서 걸어간 길을 그대로 감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침범한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한 야곱의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와 예수의 노정을 성서의 기록에 따라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험 600
에덴동산에서 천사장이 아담과 해와를 타락시키기 위해 시험을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어도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때 아담과 해와는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기를 각오하고 지킴으로써 그 시험에서 이겨야 했는데
지키지 못하고 그만 타락해 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사탄의 시험에 걸려든 아담과 해와가 사탄에게 굴복한 것입니다.
창세기 32장 24절과
25절을 보면,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날이 새도록 씨름을 했는데, 천사가 야곱을 이기지 못하자 야곱의 환도뼈를 칩니다. 환도뼈는 아담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타락한 다음에 가렸던 하체를 의미합니다. 야곱이 환도뼈에 손상을 입고도 천사에게 굴하지 않고 승리함으로써 아담의
타락을 상징적으로 탕감복귀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야곱은 천사에게 축복을 받고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야곱이 천사를 굴복시키고
승리했다는 증표(證票)를 받아낸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을 통해 가정적인 사탄 굴복노정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민족적으로,
형상적으로 사탄 굴복노정을 걷는 모세도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당합니다. 출애굽기 4장 24절에서 26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미디안에서
애급으로 돌아가라고 해놓고 아침에 길이 숙소(장막)에서 갑자기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모세의 부인 십보라가 보니 아들이 할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십보라가 날카로운 차돌로 아들의 양피를 베어 할례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십보라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모세를 살렸고, 모세는 아내
십보라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시험에서 승리했습니다.
모세를 사탄에게 맡기면 사탄이 더 혹독한 시험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미리
시험을 거치도록 하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굴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를 사탄에게 내주지 않고 직접 모세에게 채찍을 가하신
것입니다. 그 후 모세는 애급으로 돌아가서 바로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급시킵니다.
실체적으로 사탄 굴복노정을 걷는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는 도중에 사탄의 3대 시험을 받게 됩니다(마태복음 4장 1~11절). 그리고 사탄의 3대 시험에 승리하게
됩니다.
영과 육 601
하나님은 아담의 영과 육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의 영과 육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으로 사탄의 것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영육(靈肉)이 사탄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가정에서 창세기
25장 34절을 보면, 야곱이 떡과 팥죽으로 형님 에서로부터 장자의 자리를 빼앗습니다. 영과 육을 상징하는 떡과 팥죽으로 사탄 편에 있는 에서의
육신을 살리고, 장자의 명분을 하나님 편으로 찾아와 야곱의 영을 살린 것입니다.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민족은 신 광야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 때문에 늘 모세를 불신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민족을 살려냅니다.
출애굽기 16장 13절에서 15절을
보면, 모세가 출애급해서 신 광야로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어 이스라엘 민족을 데려가도록 합니다. 만나는 장차 오실
예수의 육신이고, 메추라기는 영인체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영과 육을 다 바쳤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에서 28절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건네면서 ‘이것은 내 몸이요, 이것은 내 피다.’고
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육신과 영인체를 의미합니다.
시체 602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시체까지도 사탄에게 넘어갔습니다. 원래 아담이 완성했으면 그의 몸과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아담은 영적·육적으로 다 사탄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사탄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승리한 야곱의 시체는 사탄에게 내주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0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야곱이 죽자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재료를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야곱은 죽은 후에 시체를 놓고 40일 동안 사탄을 분립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서 1장 9절에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하지 못하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 신명기 34장 5절에서 8절을 보면,
모세는 모압 땅에서 120세로 생을 마감하여 모압땅 골짜기에 장사되었는데, 그 묘를 아는자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시체를 놓고도
사탄과 싸웠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2절과 13절을 보면, 예수님의 시체를 놓고 둘러싸고도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수의 복귀(3수 12수 7수) 603
아담은 소생기·장성기·완성기 3단계를 거쳐서 완성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하여 3단계의 완성기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잃어버린 완성기간은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에 거쳐 복귀할 수 있는
기대를 마련하고,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10대를 거쳐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이삭과 야곱까지 2대가 연장되어
12대에 걸친 탕감복귀의 기간을 거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제6일, 6수에서 인간을 창조했는데, 인간이 성장해서 완성하면 7일을 통해
창조이상이 완성됩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3수·12수·7수를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잃어버린 수들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야곱은
아담의 잃어버린 3단계 완성기간을 탕감하기 위하여 3일 간의 사탄분립 노정을 걷습니다. 창세기 31장 22절을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네 명의 부인과 열한 명의 자식들과 재물을 챙겨서 아버지 이삭에게 가려고 가만히 길을 떠났는데 외삼촌에게 3일 만에 도망한 것이
들통납니다.
모세도 3일 노정을 걷습니다. 출애굽기 5장 3절을 보면, 모세는 바로에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하며 간청합니다. 모세는 그 3일 노정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애급을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3절을 보면, 예수님도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 활동하십니다. 40수는 사탄분립 수이고, 3일 노정은 사탄분립기간입니다.
그다음에 12수와
70수를 찾아야 합니다. 야곱은 열두 자식(창세기 35장 22절)과 70가족(창세기 46장 27절)을 데리고 애급에 갔습니다. 모세는
12지파장(출애굽기 24장 4절)과 70장로(출애굽기 24장 1절)를 데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출애급했습니다. 예수님 때는 12제자(마태복음
10장 1절)과 70문도(누가복음 10장 1절)가 예수님을 모시고 실체 제물을 드리지 못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로마 박해를 당하게
됩니다.
지팡이 604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싸우다가 환도뼈가 부러져 지팡이를 짚고 얍복 강을
건넙니다. 창세기 32장 10절을 보면, 야곱은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라고
합니다.
모세는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와 홍해를 건너기 전 바로의 군사들에게 쫓깁니다. 출애급기 14장 16절을 보면,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홍해를 갈라지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도록 합니다.
또 예수님은 고해(苦海)를 건너는데
요한계시록 12장 5절과 요한계시록 2장 27절에 나오는 철장(鐵杖)으로 인도합니다.
야곱과 모세와 예수가 든 지팡이는 메시아를
상징합니다. 지팡이는 사람을 인도하고, 힘없는 사람이 의지하고, 불의가 나타나면 그것을 치는 사명도 합니다. 그런 사명을 지닌 사람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이 땅에 지팡이의 사명을 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야곱도, 모세도, 예수님도 실체로 오신 당시의 메시아이기 때문에 사막에서
인류를 데리고 고해(苦海)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모자 협조 605
창세기 27장을 보면,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협조를 얻어 형 에서로부터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빼앗고, 어머니의 친정인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합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협조가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장자권과 축복을 빼앗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자협조(母子協助)가 필요합니다.
모세도 어머니의
협조로 구사일생합니다. 모세가 태어날 무렵, 애급의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것에 겁을 먹고, 칙령을 내려 히브리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아이를 낳으면 산파들로 하여금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애급 민족은 인구가 적은데 반해 이스라엘 민족은 인구가 급속도로
불어났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1장 18~22절).
출애굽기 2장을 보면, 레위 족속의 한 여자가 아기를 낳았는데 그 준수함을 보고 차마
죽일 수가 없어 석 달 동안 몰래 숨겨놓고 키웁니다. 아기가 자라 울음소리도 커지고 더 이상 아기를 숨겨 키울 수 없게 되자 아기의 어머니는
갈대를 잘라 상자를 만들고 물이 새어들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진을 칠한 다음 하수 건너편에 바로의 공주가 나와서 목욕하는 것을 보고 갈대상자에
아기를 담아서 물길을 따라 공주 앞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합니다(1~4절).
목욕하러 왔던 공주 일행은 예쁜 상자를 보고 건졌는데, 그 안에
아기가 들어 있습니다. 갈대상자에 담긴 아기가 참 잘생겼고, 아기를 싼 보자기를 보니 아기가 애급 백성이 아니고 히브리 백성인 것을 알았습니다.
공주는 ‘이 아기는 히브리 사람이 낳아서 이곳으로 보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5~6절).
애급의 공주는 잘생긴 아기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을 지켜본 아기의 누이가 공중에게 유모가 필요하지 않으냐면서 산모를 천거했습니다. 그때부터 그 아이의 진짜 어머니가 궁중에
유모로 들어가서 아이를 키웁니다(7~9절).
어머니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서 ‘너는 바로 궁중에 살지만 바로의 왕자가 아니라 히브리
족속이다.’고 교육시킵니다. 만일 그것이 발각되면 어머니와 아들 둘 다 죽게 됩니다. 아이는 지혜로운 어머니 덕분에 바로 궁전에서 잘
성장했습니다.
그 아이가 성장하여 공주에게로 데려갔는데 공주가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이름을 모세라 지었습니다(10절). 모세는 40세가
될 때까지 궁중에서 지냈습니다. 모세도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어머니의 협조로 살아났습니다.
모세는 장성한 후에 궁중을 나가서 이스라엘
사람과 애급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애급 사람을 돌로 쳐 죽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를 믿게 하여 데리고 가려고 그랬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오히려 모세를 믿지 않고 배신합니다(11~14절). 그로 인해 가나안 1차 복귀노정은 출발도 못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동방박사 셋이 별의 움직임을 따라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절)고 말합니다.
헤롯 왕은 자기가
왕인데 유대 나라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깜짝 놀랍니다. 헤롯 왕은 동방박사에게 ‘왕으로 태어난 아이를 찾거든 돌아갈 때 자기에게 알려주고
가라.’(8절)고 부탁합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는데,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12절)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헤롯 왕은 동방박사를 기다려도 안 오니까 두 살 이하의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는
칙령을 내립니다. 예수님도 모세와 마찬가지로 죽을 운명에 놓였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그 아기를 업고 애급으로 피난을 떠납니다. 보통 인간
같으면 다 죽었을 텐데, 어머니의 협조에 의해서 예수님도 살아남은 것입니다.
가나안 복귀 607
창세기 33장
18절을 보면, 야곱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고, 출애굽기 3장 8절을 보면, 모세는 애급에서 가나안을 향해 진군합니다. 또 예수님은
낳자마자 죽이려 하는 헤롯을 피하여 애급으로 갔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옵니다(마태복음 2장 21절). 야곱·모세·예수님 모두 가나안 복귀노정을
걸은 것입니다.
사탄 괴멸 607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아담가정에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그 사탄을 괴멸해야
합니다. 야곱은 사탄을 괴멸하기 위해 외삼촌 집을 나오면서 사탄을 상징하는 우상을 가지고 나옵니다. 야곱의 둘째 부인 라헬이 우상을 숨기고
나왔는데 그것을 야곱이 다른 이방의 신상과 함께 세겜 근처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창세기 35장 4절).
모세도
사탄 괴멸의 길을 걸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서 돌아와 보니 이스라엘 민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자기들을
애급에서 인도한 신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화가 나서 두 석판을 던져 깨뜨리고 금송아지를 불살라 가루로 만들었습니다(출애굽기 32장
16~20절). 모세는 그 가루를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여 희생시키고 다시 시내 산에 올라가 처음과 같은 반석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면 말씀과 권능(權能)으로 사탄을 괴멸할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사탄 굴복의
본보기 노정을 걷게 하고, 모세와 예수에게 그 노정을 따라 걷게 하셨습니다.
1. 모세 중심한 복귀섭리이 개관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우는 복귀섭리의 원칙은 이전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복귀섭리의 원칙은 동일하지만,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전 섭리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1) 이전 섭리와 다른 점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이전의 섭리와 다른 점은 첫째, 아담·노아·아브라함 때에는
가정적인 섭리를 펼쳤는데, 모세부터는 민족적인 섭리를 펼치기 때문에 섭리의 범위가 가정에서 민족으로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애급에서 고역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400년 만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7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했으니 어린이까지 합치면 백만 명이 넘는 민족을 이룬
것입니다.
둘째,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가 가정을 중심한 복귀기대 섭리시대였다면, 모세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복귀섭리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귀기대라는 말은 집을 짓기 위해서 터를 닦는 것이고, 복귀섭리라는 말은 닦아놓은 터전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복귀기대 섭리시대는 가정적 시대이지만, 복귀섭리시대는 민족적 시대로 발전했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함으로써 가정적 섭리시대에는 말씀 대신 상징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담가정에서는 아벨이 양이라는 상징물로 제사를 드렸고,
노아가정에서는 방주라는 상징물로, 아브라함가정에서는 3제물로 헌제(獻祭)했고, 이삭도 양이라는 상징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셋째,
탕감조건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모세 때에 이르러서는 가정적 섭리에서 민족적 섭리로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에 상징헌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탕감조건을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에게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그 십계명을 중심으로 구약의 말씀, 곧
구약성서가 세워지고, 그 터전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신약성서가 세워집니다. 모세노정부터는 양을 잡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사탄분립 기대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만 되면 섭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모세의 위치 610
모세는 하나님의
대신자입니다.
출애굽기 4장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님 같이 되리라.’했고, 출애굽기 7장 1절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찌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代言者)가 되리니.’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또 모세는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입니다.
모세는 출생 때부터 예수님의 모의자로서의 단편을 보입니다. 모세는 바로 정권에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나 죽임을
당할 처지에서 모친의 협조로 살아납니다(출애굽기 2장 2절). 예수님도 죽이려 하는 헤롯 왕을 피하여 그를 데리고 애급으로 간 모친의 협조로
죽임을 면합니다(마태복음 2장 13절).
출애굽기 3장 8절을 보면, 모세는 애급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걷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출생하자마자 애급으로 떠났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십니다(마태복음 2장 19~21절).
사도행전 3장
22절에는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고 한 것도 예수님이 모세와 같은 입장의 지도자임을 뜻합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주변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모세 때에
12지파가 있었고(출애굽기 24장 4절), 예수의 노정에도 12제자가 있었습니다(요한복음 20장 24절). 또 모세 때 70장로(민수기 11장
16절)가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 때에도 70문도가 그 노정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누가복음 10장 1절).
모세와 예수님의 시체를
놓고도 같은 양상을 보입니다. 유다서 1장 9절을 보면, ‘모세의 시체를 놓고 마귀와 다투었다.’고 했고, 마태복음 28장 12절과 13절을
보면, 예수님의 시체를 둘러싸고도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모세 노정은 예수님의 전형적인 노정입니다.
모세는 육신을 쓴 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입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태어난 환경이 유사하며 성장하고 서거한 상황도 비슷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양자와 같은
입장에서 자라 사탄 세계인 바로 궁에서 살게 됩니다. 모세는 120세가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바림
산꼭대기에서 가나안 땅을 두루 둘러보게 하시지만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낸 것으로 인해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죽어 조상에게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민수기 27장 12~14절).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사생아로 태어났고, 성장과정이 대단히 비참합니다. 마가복음
14장 36절을 보면,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에도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눈물로 통곡합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밟고 싶었듯이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면하고 하나님의 창조이상인 영육(靈肉)을 아우른 인간 구원을 소망했던 것입니다.
모세노정은 예수님의 전형적 노정으로, 모세가
형상적(形象的) 노정을 걸었다면, 예수님은 실체적(實體的)노정을 걸으신 것입니다.
3) 민족이 모세를 불신한
결과 611
애급은 사탄 편 세계요, 가나안은 하나님 편 세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노정은 전 인류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복귀노정과 같습니다.
모세는 3차에 걸쳐 가나안 복귀노정을 걸었습니다.
1차 노정에서 모세가
40년 동안 바로 궁중 노정을 거친 기대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 되었으면 21일 노정을 거친 다음 블레셋을 통해서 바로 가나안으로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불신함으로써 가나안 복귀노정은 출발도 못하고 좌절되었습니다. 모세는 바로 궁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배신한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가지 못하기 때문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나옵니다.
2차 노정에서는 미디안 광야로 쫓겨나온 모세가
거기에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합니다. 그 후 다시 바로 궁을 찾아가 바로를 굴복시킨 다음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애급을 나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하나가 되었다면 21개월 만에 가나안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던 도중에 또 불신함으로써 시내 광야에서
40년 간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에 모세는 시내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다음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가데스 바네아에 가서 반석
샘물을 먹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줘 제3차 출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이번에도 불신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야에서 독수리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2세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감으로써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승리의 기대를 세우게 됩니다. 이처럼 민족이 한 번 불신하면 3차에 걸쳐서 섭리가
연장됩니다.
2.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613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모세입니다.
원래는 아버지가 중심인데 아버지 격인 애급의 왕 바로(투트모세 3세)가 그 책임을
못했습니다. 바로가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출애굽을 하지 않아도 되고, 애급이 메시아를 모시는 왕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아버지 노릇을 못했습니다.
아담가정에서 아벨이 아담 대신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이 되었듯이 모세가 아벨과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바로에게는 장자가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차자 입장입니다.
믿음의 기대의 조건물은 40년
궁중생활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어머니로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충과 효의 도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 애급
사람을 치고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오려 했습니다.
2) 실체기대
613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믿음의 기대와 마찬가지로 모세입니다.
조건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인데,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 앞에 애중굴통(愛仲屈通)함으로써 모세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불신했기 때문에 출발섭리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습니다.
3) 출발섭리 614
모세의 출발섭리는 애급인을 쳐 죽이고 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장성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고역(苦役)하는 현장에 나가서 애급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애급인을 쳐
죽이고 모래에 감추었습니다. 모세가 다음날 그곳에 가보니 히브리 백성, 즉 이스라엘 민족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애국심을
보고 모세와 하나 되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에게 ‘어제는 애급인을 죽이더니, 오늘은 우리를 죽이러 왔느냐’며 불신했습니다(출애굽기
2장 11~14절).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국심을 보여줘 모세를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모세가 40년 동안 생활했던
바로 궁중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애급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려면 지금까지 호화롭게 살던 바로 궁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야 합니다.
셋째, 장자의 입장에 있는 사탄 편을 쳐서 탕감복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불신했기 때문에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출발도 못해보고 끝났습니다. 1차가 실패하면 섭리는
2차·3차까지 연장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21일 만에 입성할 수 있는 가나안 복귀노정은 제2차에서 21일을 21개월로 연장해서 출발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13장 17절과 18절을 보면,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급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3.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615
1)
믿음의 기대 615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도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모세입니다.
그 때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에게 아버지의 사명이 있었는데, 이드로가 그 사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기대의 조건물은 미디안 광야
40년입니다.
2) 실체기대 615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모세입니다.
조건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인데,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 앞에 애중굴통(愛仲屈通)하여 모세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3)
출발섭리 616
모세는 3대기적과 10대재앙의 권능(權能)으로 바로를 굴복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급을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출발섭리입니다. 모세노정에서는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가 이루어지면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데리고 나오기 때문에 출발섭리라는 말이 꼭 따라다닙니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하나 되었다면
21일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블레셋의 곧은길을 통해서 가나안으로 직행했을 것인데, 불신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를 불신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하나님의 분부도 듣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내가 이제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장 10절)하시는 하나님을 대해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애굽기 3장 11절)하며 거절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말씀으로 모세를 달랬지만 모세는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사양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에게 3대 기적과
10재앙(十災殃)의 권능으로 바로를 굴복시키고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도록 합니다.
3대 기적과 10재앙을 보여준 것은
모세가 우선 사탄이 침범한 장자의 입장을 탕감복귀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모세가 하나님이 보내주신 중심인물인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400년 간 고역살이를 하고 30년이 더 보태져 430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2장 40절에서 4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급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급 땅에서 나왔은즉 이 밤은 그들을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의 탄식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출애굽기 2장 23절),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오도록
3대 기적과 10가지 재앙을 준 것입니다.
(1) 말씀의 대신자 617
출애굽기 4장 10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하니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의 대신자로 아론과 미리암을 내세우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말씀의 실체로 예수님과 성신을 보낼 것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2) 모세를
죽이려 함 617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갑자기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급히 차돌로 아들의
양피를 베어 할례를 함으로써 모세가 살아납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을 심정적으로 탕감복귀하고, 모세 스스로 애급에 갔다는 조건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세를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부인 십보라의 협조를 받아 죽을 자리에서 살아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복귀할 수
있는 중심인물이 됩니다. 그것은 모자협조(母子協助)를 통해 죽임을 면하게 될 예수님노정에 대한 예시(豫示)입니다.
(3)
할례 618
이스라엘 민족의 할례는 사망의 피를 뽑았다는 표시입니다. 할례는 남자의 주관성을
복귀했다는 표시이자 본성의 자녀로 복귀했다는 표시입니다.
아담이 양부 끝을 잘못 놀려 사망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사망의 피를 뽑아 버리로
잃어버린 남자의 주관성과 본성의 자녀를 복귀하기 위해서 남자아이를 낳으면 8일 만에 양부의 끝을 쳐서 할례를 했습니다.
할례의 종류에는
마음의 할례(신명기 10장 16절 : 너희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육신의 할례(창세기 17장 10절 :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만물의 할례(레위기 19장 23절 :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등 세 가지 할례가 있습니다.
(4) 3대
기적 618
3대 기적은 이스라엘 민족을 모세의 휘하에 집결시켜 애급을 떠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이 돌아선 모세가 이번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를 따르지 않을 것을 염려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세 가지 기적을 보이며 그 권능을 백성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4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이니이다.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어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如常)하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하수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3~9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적을 체험하고 자기에게 그 권능을 주신 것을 알면서도
모세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한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10절)라고 하나님에게 고합니다.
하나님이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는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1~12절)하고 모세를 격려하십니다.
그래도
모세는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13절)하고 사양합니다.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이 노하셨습니다.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느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늘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14~17절)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은 모세가 힘을 얻어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그 아들이 할례를 하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차돌로 아들의 양피(陽皮)를 베어 할례를 하자 하나님이 모세를 놓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한 것은 규범을 지키는 이스라엘 민족이 되도록 함이고 시험을 통해 모세의 마음을 다잡기 위함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은
아론에게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27절)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아론을 대변인으로 삼아,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들을 모으고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에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29~31절)고 했습니다. 3대 기적을 보고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첫째 기적 620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지팡이를 땅에 던졌는데 뱀이 되었고, 그
뱀의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출애굽기 4장 3~4절).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는
것은 아담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여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에 의해 타락한 것입니다.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는 것은 아담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아담이 뱀으로 표시된 사탄에게 타락했기 때문에 후아담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사탄을
굴복시키고 말씀을 찾아 세워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에게도 지팡이의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출애굽기 7장 10절에서 12절을
보면, 모세가 바로 앞에 지팡이를 던졌는데 그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본 바로가 애급의 술객을 불러왔습니다. 술객이 지팡이를 던지니
그 지팡이도 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뱀이 싸우더니 모세가 던진 지팡이의 뱀이 술객이 던진 지팡이의 뱀을 삼켜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바로의
술객의 지팡이는 뱀으로 표시되는 사탄의 지혜(말)를 의미합니다.
또 모세가 든 지팡이는 메시아를 상징하며 의지·보고·길잡이를 뜻합니다.
타락으로 사망의 인간이 된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인간으로 되살림, 곧 자녀 복귀를 예시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애급 왕 바로를 찾아가서
그런 역사를 한 것은 술객과 싸움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삼대축복을 되찾아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했고, 마태복음 10장 16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바로 앞에서 3대 기적을 행한 것은 사위기대 복귀, 다시 말해 삼대축복을 복귀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기적
621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손을 한 번 품었더니 문둥병에 걸렸다가 두 번 품었더니 깨끗이 완치되었습니다(출애굽기 4장 6~7절).
그것은 해와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해와가 타락으로 불치병인 원죄를 가지게 되었고, 성신을 통해서 그 불치병이 깨끗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문둥병의 완치는 타락인간의 완전 복귀를 상징합니다. 해와가 성신으로 복귀함으로써 속죄의 역사를 하고, 그로 인해 전 인류가
속죄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딸로 돌아갈 것을 예시하신 것이다.
셋째 기적 622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수(강물)를 조금 취하여 육지에 부으면 하수가 피로 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출애굽기 4장 9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그런 이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수는 무기물(無機物)이고 타락한 인간을 상징하는데, 물이 피가 되었다는 말은 무기물이 유기물(有機物)로 변했다는 것이고,
생명을 지닌 인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강물은 성도를 상징합니다. 강물이 피로 변했다는 것은 성도가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복귀됨을
뜻합니다.
3대 기적의 결론 622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것은 아담의 타락을 상징하고, 뱀이 다시
지팡이로 변한 것은 아담의 복귀를 상징합니다. 또 성한 손이 문둥병을 앓게 된 것은 해와의 타락을 상징하고, 문둥병을 앓던 손이 성한 손으로
변한 것은 해와의 복귀를 상징합니다. 하수가 피가 된 것은 자녀의 복귀를 상징합니다. 결국 3대 기적은 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루어 3대축복을
복귀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5) 10 재앙 622
10재앙은 바로를 굴복시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급을
허락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입니다. 바로는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이 문둥병에 걸리고, 하수가 피가 되는 3대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7장 14절을 보면,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모세가 일으킨 하나님의 3대 기적을 보고도 이스라엘 백성
보내주기를 거부하자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내린 열 가지 재앙은 앞으로 예수님이 이적과 권능으로 선민을
구원할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린 이유는 야곱이 하란에서 외삼촌 라반에게 열 번이나 속아 재산을 받지 못하였고, 모세 때
애급인이 이스라엘 민족을 열번이나 속임으로써 30년 간 종살이를 더 시켜 430년 만에 보내주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그동안 하나님 편을 속였기
때문에 하나님도 탕감복귀원칙에 따라 그것을 되찾아오는 것입니다.
바로에게 내린 10재앙 623
첫 번째
재앙은 지팡이로 하수를 치니 피로 변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7장 14절에서 22절을 보면, 바로가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는 기적을 보고도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주지 않자,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바로에게 뱀이 되었던 지팡이로 하수를 쳐서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은 모세가 아론과 함께 바로에게 가서 지팡이로 하수를 치니 그 물이 피로 변했습니다.
물에서 악취가 나니 애급 사람들은 물을
마시지 못해 살 길이 없습니다. 거기에다 애급의 술객들도 그것을 흉내 내어 그같이 하니 바로는 마음이 강퍅해져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재앙은 강과 운하와 못에서 개구리들이 땅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출애굽기 8장 1절에서 15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바로 옆에서 수많은 개구리가 하수에서 올라오는 재앙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아론을 데리고 바로에게 가서 지팡이 잡은 팔을
물 위에 펴니 개구리가 올라와서 애급 땅을 덮었습니다. 바로는 개구리를 거두어주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개구리를 모두 죽게 했습니다. 그래도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재앙은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니
모두 이가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8장 16절에서 1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아론으로 하여금 지팡이로 티끌을 치도록 하여 바로에게
티끌이 이로 변하는 재앙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아론을 데리고 바로 앞에 가서 지팡이로 티끌을 치니 애급 땅의 모든 티끌이 이로
변했습니다. 애급의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해보았지만 이는 사람과 짐승에게 옮겨갔습니다. 그것을 보고 술객이 바로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하고 말하지만 바로는 이번에도 마음이 강퍅해져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재앙은 하나님 애급
사람이 집집마다 파리 떼가 들끓도록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8장 20절에서 32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바로를 찾아가서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백성과 네 집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급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이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그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고 하십니다. 그날 아침부터 애급 사람의 집집마다 파리 떼가 가득하니 정신이 없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너희가 하나님께 기도드려 이 재앙을 면케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다시는 거짓을 행하지 말라고 다짐하고 물러가
하나님께 기도드리니 파리 떼가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져 그 백성들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다섯 번째 재앙은 하나님이
애급의 모든 말과 나귀와 약대와 우양 등 생축(生畜)에 심한 악질이 생기도록 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9장 1절부터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를 만나서 나의 말을 전하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그들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생축 곧 말과 나귀와 약대와 우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악질이 있을
것이며,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생축과 애급의 생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이튿날에
그렇게 하십니다. 바로가 애급의 짐승은 다 죽었는데 이스라엘의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않은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여섯 번째 재앙은 애급의 모든 사람과 짐승이 독종에 걸린 것입니다.
출애굽기 9장 8절에서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풀무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모세가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그 재가 애급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급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독종을 발하리라.’ 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이 풀무의 재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그것이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독종을 일으켰습니다. 독종이 애급의 모든 사람에게 번지고 술객까지 독종에 걸리자 바로의 마음이 악독해져서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일곱 번째 재앙은 애급 전국에 우박이 내린 것입니다.
출애굽기 9장 18절부터 3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급 전국에 우박이 애급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모든 채소에 내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드니 하나님께서 뇌성과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우박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맹렬하게 내렸는데, 애급의 개국 이래로 그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박이 애급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은 물론 밭에 있는 채소와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지만,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고센 땅에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번에는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약하도다. 여호와께 구하여 이 뇌성과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하고 애원합니다. 모세가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 것입니다.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하는 말을 남기고 바로의 성을 떠나서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펴니 뇌성과 우박이 거치고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예상한 대로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여덟 번째 재앙은 메뚜기가 우박 피해를 입지 않은 모든 식물을 뜯어 먹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10장 12절부터 20절을 보면, ‘네 손을 애급 땅 위에 들어 메뚜기로 애급 땅에 올라와서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모든 채소를 먹게 하라.’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모세가 애급 땅 위에 지팡이를 드니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밤낮으로 불게 하셨습니다.
그 바람이 메뚜기를 불러들여 애급 땅이 온통 메뚜기로 뒤덮였고 애급 전역에서 우박에 상하지 않은 밭의 채소와 나무의 열매를 먹어치웠습니다.
그리하여 푸른 것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그 피해는 전부후무한 것이었습니다.
다급해진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득죄하였으니 청컨대 나의 죄를 이번만 용서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을 내게서 떠나게 하라.’고 애원합니다.
모세가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니 이번에는 하나님이 서풍을 강하게 불게 하셔서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넣었습니다. 애급에 메뚜기가 한 마리도 남지
않았는데도 바로는 다시 하나님에 대한 반감이 생기면서 마음이 강퍅해져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홉 번째 재앙은 애급 땅을
캄캄한 흑암으로 만든 것입니다.
출애굽기 10장 21절에서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 애급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말씀을 따라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드니 삼일 동안 애급의 온 땅이 사람도
알아볼 수 없는 흑암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 이제 떠나서 여호와를 섬기도록
하겠으니 너희 양과 소는 놔두고 아이들만 데리고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세가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기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반발했습니다. 바로가 또 마음이 강퍅해져
모세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다시 내게 얼굴을 보이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모세를 쫓아냈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애급 족속의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죽인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11장 1절부터 10절을 보면, 하나님이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급에게 내린 후에
모세에게 바로가 너희를 여기서 쫓아낼 것이니 그때를 대비하여 백성들에게 금과 은으로 된 패물을 구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시고 그 백성들에게 애급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한편 모세는 바로에게 경고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급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급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위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애급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급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하고 통고했지만, 바로는 마음만 강퍅해져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3절) 하시면서 이스라엘 회중은 양을
잡고, 그 양을 먹을 사람의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引枋)에 양피를 발라놓으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와 아론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급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쳤습니다. 양피를 발라놓은 집은 재앙을 면하지만, 그렇지 않은 집은 장자가 죽어나가고 처음 난 것이 모두 죽어나갑니다.
열 번째
재앙으로 애급 왕 바로의 장자도 죽습니다. 바로가 아들을 자기가 믿는 신전에 데려다 놓고,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살아나지를 않습니다. 드디어
굴복하게 된 바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합니다.
10재앙을 당하는 바로의 태도
629
10가지 재앙을 당할 때마다 바로의 마음은 이스라엘 자손을 죽이고 싶도록 강퍅해졌습니다. 바로는 그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부렸지만, 10재앙 앞에서는 무기력하고 미련해서 자연히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애급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도록 하기 위해 바로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고 바로에게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던 것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여 자신의 무능함을 알고 자중(自重)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급에 10재앙을
내려 이스라엘 민족을 내놓지 않으면 아 되게 만드셨습니다. 10재앙을 통한 바로와 모세의 싸움에서는 사탄 편은 언제나 망하고, 하나님 편은
반드시 승리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4) 출애급 노정 629
아브라함이
3제물 헌제에 실수를 함으로써 그의 후손인 야곱의 열두 자식과 70가족이 애급의 라암셋에 가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로의 궁에서
살고 있던 모세가 40세가 되어 어느 날 궁 밖으로 나와 이스라엘 백성과 애급 백성이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모세는
애급 공주의 아들로서 왕자의 신분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애급 백성이 싸우는 것을 보고 쫓아가서 애급인을 쳐 죽이고 모래에
감추었습니다(출애급기 2장 11~12절).
그 때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인을 죽이고 자기 민족을 보호하는 것을 보고 모세를 믿어야 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믿고 모세와 하나 되었다면 21일 만에 라암셋에서 블레셋의 곧은길을 통해 곧바로 가나안에 입성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불신했습니다. 모세가 그 다음 날, 나가서 보니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네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말이 ‘어제는
애급인을 죽이더니 오늘은 우리를 죽이러 왔느냐?’고 모세를 불신했습니다(출애굽기 2장 14절).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편에 서지도
못하고, 궁중에도 못 돌아갑니다. 그 사건을 듣고 바로 왕도 모세가 궁중으로 돌아오면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나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내면서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부인으로 맞이합니다.
궁중생활 40년과 미디안 광야생활
40년을 합치니 모세의 나이 80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다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을 때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하도 이상해서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야,
모세야!’하고 불렀습니다. 모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대답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출애굽기 3장 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가 신발을 벗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과 8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애급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憂苦)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급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헷 족속·아모리 족속·브리스 족속·히위 족속·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고 거부하자, 하나님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애급기 3장 11절과
12절)하면서 늘 모세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거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다음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하나님이 갑자기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모세가 조금만 어려워도 항상 하나님에게 의지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가 스스로 갔다고 하는 기준을 세워주기 위해서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앞으로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한 것입니다.
모세가 앞으로 가는 길은 어려운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찾으면 모세는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에 입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한 것은 모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3대 권능과 10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찾아가 결국 그를 굴복시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출애굽기 8장 27절)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바로는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말라.’(출애굽기 8장 28절)고 합니다.
사실은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이 아니고 애급을 도망쳐 나오려고 한 것입니다. 그때 3일노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3일노정은 사탄분립 기간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다시 2차 노정을 출발합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을 보면, 낮에는 더우니까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캄캄하니까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은 주야로 도망가서 숙곳에 이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숙곳까지 갔을 때 쫓아오는
애급 병정들이 보입니다.
앞은 홍해로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애급 병사들이 쫓아오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입니다. 앞으로 가자니
홍해이고, 뒤로 돌아가자니 애급 병사들한테 죽게 생겼다고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합니다. ‘우리를 차라리 애급에 놔두었으면 고생을 하다가 죽더라도
애급에서 죽을텐데 어째서 데리고 나와서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가게 만들었느냐.’고 원망했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며 모세에게 불평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가 들고 있는 지팡이로 홍해를 쳐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쳤더니
홍해가 윗물과 아랫물로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갈라진 홍해를 건넜는데 애급 병정들이 말을 타고 계속 쫓아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한 번 더 치라고 합니다. 모세가 말씀대로 하니 홍해의 윗물과 아랫물이 다시 합쳐져서 애급 병정들은 모두 수장되었습니다.
홍해를
무사히 건너고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는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만나를 주어라.’고 하십니다.
밤에 장막을 치고 자고 나면 장막에 떡가루 같은 만나가 소복이 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욕심내지 않고 자기 식구의 수만큼
가져가면 굶주림이 해결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해결하고 나니 이번에는 고기를 먹고 싶어 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날마다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작지만 살이 포동포동한 메추라기를 매일 먹게 해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죽이지 않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한 것입니다.
숙곳에서 홍해를 거쳐 3개월 만에 르비딤에 도착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과 불평은 거기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물이 없다며 불평하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가 들고 있는 지팡이로
르비딤의 반석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 반석이 갈라지면서 60만 대군이 먹을 수 있는 물을 얻게 됩니다. 그것을 먹고 다시 또
행진을 계속합니다.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데 아마멜족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모세의 명에 따라 여호수아가 나서서
아말렉족과 싸웠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족이 이겼습니다. 모세가 하루 종일 손을 들고 있을 수 없어서
아론과 홀이 쫓아와서 양 어깨에 모세의 팔을 걸치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마침내 아말렉족을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아말렉에서 시내
산에 이르기까지 열두 달이 걸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나 반대하고 불신하다 보니 많은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그나마 모세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바로 서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그곳까지 데리고 갈 수 있었습니다.
5)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634
출애굽기 19장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도착합니다. 원래는 가장 가까운 길을 통해 21일이면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해서 21일이 21개월 노정으로 연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광야에서 1년 동안
성막(聖幕)을 짓게 합니다.
성막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성막을 짓게 한 이유는 사람은 변하더라도 영원히 변치 않는
신앙의 푯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1) 성막의 구조 634
성막의 구조를 살펴보면 성막은 하늘(=天)과
영(靈)을 상징하는 지성소(至聖所)와 땅(=地)과 육(肉)을 상징하는 성소(聖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곳이고,
성소는 일반 백성들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정성 드리는 곳입니다.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 또는 증거궤로 불리는 법궤(法櫃)가 있습니다. 법궤는
크게는 천주(天宙)를 상징하고, 작게는 성막의 축소체입니다.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두 석판,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모셔놓았습니다.
법궤 위에는 속죄소(贖罪所)가 덮여 있습니다. 또 속죄소 좌우에는 금으로 만든 두 그룹이 날개를 높이 펴서
속죄소를 덮은 채 얼굴을 마주 대하고 서 있습니다. 두 그룹(K'rũb, 히브리어.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천사)이 속죄소의 좌우에서 날개를
높이 펴서 서 있고 대제사장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두 그룹 사이에 나타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명할 모든 일을 말씀으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고 나서 그룹으로 하여금 생명나무로 나가는 길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속죄소 좌우로 갈라져 서 있는 이 그룹은 누가든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 하나님 말씀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2) 두 석판과 성막의 의의
635
두 석판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고, 하늘과 땅을 상징합니다. 또 만나는 민족의 양식이자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며, 금항아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던 것입니다.
지성소와 성소로 이루어진
성막(聖幕)은 상징적인 메시아입니다. 메시아가 오기 위해서는 기대(基臺)를 세워야 합니다. 성막은 메시아를 상징하기 때문에 성막을 지을 때에도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여기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가나안에 입성할 때까지 필요한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실체 메시아인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너무나 불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메시아를 상징적으로 보내주신 것이
성막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실제 성전을 짓습니다. 미디안 광야의 성막이 상징적으로 성전이라면, 가나안의 성전은
형상적인 성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체 성전입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들어가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1절을 보면, 예수님이 운명할 때 성막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집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성막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비로소 예수님의 영과 육을 통해서 하늘과 땅이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3) 성막을 주신 섭리의
목적 636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복귀를 완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입성을 위해
가는 도중에 계속 모세를 불신했습니다. 모세는 지도자로서 불신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달래면서 시내 광야까지 데려갔지만, 모세도 인간인지라 계속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 앞에 그들을 불신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일 모세가 불신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갈 사람이
없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설사 사람이 변하더라도 영원히 변치 않는 신앙의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사람이라도 그
대상을 믿으면 신앙의 대상을 바통같이 인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파탄시키지 않고 성취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4) 성막을 위한
기대 636
성막을 지었다는 것은 메시아를 상징적으로 정립했다는 뜻입니다. 상징적 메시아도
메시아이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가 세워져야 합니다.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모세이고, 조건물은 40일 금식의 정성을 토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두 석판(石板)을 받아오는 것입니다.
또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모세이고, 조건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애중굴통(愛仲屈通)함으로써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가 석판을 받아올 때까지 기도하고 정성을 드려야 함에도,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 금송아지가 지금까지 자기들을 인도해 왔다며 모세를 불신해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모세는 화가 나서 두 석판을 깨뜨리고
금송아지를 깨서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서 60만 대군을 먹이고 회개시킨 후 다시 석판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갑니다.
제1차 성막을 위한
기대가 깨졌고, 두 석판도 없어졌습니다. 모세는 다시 40일 금식을 하고 두 석판을 다듬어 시내산으로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두 석판에 글을 받아서
내려옵니다.
모세가 두 번째 석판을 받으러 간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으로 모세를 기다리고 있어서 제2차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가 조성됩니다. 그래서 영원히 변치 않을 신앙의 대상으로 성막을 짓게 되는데, 성막을 지은 것은 시내산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5) 시내산 출발섭리 637
석판이 든 법궤를 메고 시내 광야를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가서 예수님을 맞이할 때까지 영원히 그 믿음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가는 도중에 또다시 먹을
것이 없다고(생선이 없고 수박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으며 수없이 불신했습니다.
이미 두 석판으로 성막을 지었지만 제3차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40수에 사탄이 침범했습니다. 그리하여 제3차 성막을 복귀하기 위해 모세는 가나안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12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아서 가나안 땅으로 40일 정탐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열 지파장은
현실적인 보고를 합니다. 가나안으로 정탐가서 보니까 여리고성은 견고하고 병사들은 키가 장대 같고 창과 칼을 들었는데 어떻게 그들과 싸워서 이기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겠느냐는 불신의 보고를 했습니다. 그와 달리 두 지파장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긴다는 믿음의 보고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돌을 들어 믿음의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래도 여호수아와 갈렙과 하나 되지 못하고 불신하여 제2차 가나안 복귀 노정을 새롭게 출발하지 못하고 가데스 바네아로
내려갑니다.
40수는 사탄분립수라고 했는데, 40일 가나안 정탐에 사탄이 침범했습니다. 그러나 두 석판을 중심한 성막은 남아 있기 때문에
40년 광야생활로 섭리는 연장됩니다. 하루가 일년으로 바뀌어서 40일이 40년이 된 것입니다.
애급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 1세대는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살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독수리 밥이 되어 다 죽었습니다. 애급을 탈출한 후 태어난 이스라엘 민족 2세들이 40대가
되었습니다. 40년 광야노정은 2세들을 중심으로 새로 출발하게 됩니다.
4.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모세 중심한
섭리
(1) 믿음의 기대 638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모세입니다. 중심인물은 조건물을 세워야 하는데, 그것이 성막을 모신 시내 광야 40년(출애굽기 3장 7~10절)입니다. 모세는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을 모셨기 때문에 믿음의 기댈를 세웠습니다.
(2) 실체기대 639
믿음의 기대에 이어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모세입니다.
조건은 이스라엘 민족이 중심인물인 모세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모세와
함께 애급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 1세는 구세대이고, 광야에서 태어난 2세는 신세대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중심인물 모세와 하나
되어야 하는데 불신하여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습니다. 결국 2세들만 여호수아·갈렙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게 됩니다.
(3) 출발섭리 639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 노정의 출발섭리는 반석 샘물을 중심하고
출발하는 노정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그것이 죄가 되어 모세는 그토록 소망하던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120세에 모압
땅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죽습니다.
(4) 반석2타 639
민수기 20장을 보면, 모세와 아론을
따르는 이스라엘 자손이 신 광야에 이르렀는데,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합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급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3~5절)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떠나 회막 문 앞에서 엎드렸는데 하나님이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서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올찌니라.’(8절)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 모세와 아론이 반석 앞에 총회를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라?’(10절)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 그 물을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12절) 하시며 꾸짖으셨습니다. 반석2타(磐石二打)로 물을 내 먹였으나 그것이 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석이타가 죄가 된 이유 640
모세의 반석이타가 죄가 된 이유는 첫째,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하여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입니다.
반석의 실체는 원래 아담이었습니다. 아담은 생명수 샘물을 내어 먹일
수 있는 반석, 즉 완성자가 되어야 하는데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생면수 샘물을 내어 먹일 수 있는 아담을 사탄이 한 번 쳐서 죽은 아담으로
만들었습니다.
죽은 아담은 생명수 샘물을 낼 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반석을 한 번 쳐서(一打) 죽은 아담을 생명의
아담으로 만들어야 함에도 혈기를 참지 못해 반석을 두 번 내려친 것입니다.
둘째, 죽은 아담이 산 아담이 되었다는 것은 복귀된 아담, 즉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반석이타는 실체 반석(實體磐石)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칠 수 있다는 표시적 행동이 되기 때문에 반석이타는 죄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는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2장 17절에는 예수님을 흰 돌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반석이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원인(遠因 : 간접적인 이유)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불신한 것이 가까운
원인(原因)이지만, 모세의 반석이타가 예수님을 칠 수 있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불신해서 반석을 깬 것은
십자가 죽음의 가능성을 예시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실체 반석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불신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됨을 예시한
것입니다.
이처럼 실체 반석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사탄이 칠 수 있는 조건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 앞에 엘리야 선지자의 실체인
세례 요한을 보내서 주님의 길을 곧게 합니다. 사탄이 침범할 수 없도록 그 길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불신하니까 사탄이
바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0일 금식을 하면서 사탄과 싸우게 됩니다.
반석이타를 복귀할 수 없는 이유
모세는 우상을
만든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을 깨버립니다. 그리고 석판을 다시 만들어 가지고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서
찾아옵니다. 이처럼 모세는 두 석판을 깨뜨린 후에도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실패한 반석이타는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반석이타를 복귀할 수
없는 이유는 반석이 석판의 뿌리이자 예수님의 뿌리인 하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두 석판을 깼을 때는 반석의 뿌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되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반석은 두 석판의 뿌리입니다. 만일 모세가 반석 실체라고 한다면 아론과 미리암은 두 석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반석의 뿌리가 되고, 예수와 성신은 두 석판입니다. 그러므로 두 석판이 깨졌을 때는 하나님이 살릴 수가 있지만, 석판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을
쳐버리고 나니 하나님은 복귀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반석이타가 죄임에도 샘물이 나온 이유 642
반석을 두 번
내려친 반석이타가 분명히 죄임에도 불구하고 샘물이 나온 이유는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르비딤 반석 샘물을 내서 먹였던 내적인 터전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외적인 불신행동(不信行動)에 사탄이 침범했지만, 모세의 내적인 마음에는 변하지 않는 심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성막이상(聖幕理想)을 절대 믿고 법궤를 모신 정성의 터전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쳐서 죄는 지었지만, 반석 샘물을 내어 먹일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반석이타의 결과 642
반석이타의
결과 내적인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입성하고, 외적인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석판은 사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반석은 예수님의 실체를 상징합니다. 실체 반석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탄으로부터 3대 시험을 받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노정에서는 40일 금식을 하고 나니 사탄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하라.’(마태복음
4장 3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종인 천사장 사탄이 와서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했습니다. 사탄이 시험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돌을 가지고 시험을 한 이유는 시내 광야에서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사탄에게 돌을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돌은
예수님을 상징하므로 실체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탄이 돌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게 딘 것입니다.
신명기 34장 4절과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결과 모세의 육신은 땅에서 죽고, 영적으로만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전형노정(典型路程)을 걸었기 때문에 반석
실체로 오시는 예수님도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하면 육신은 십자가에 돌아가고 영적으로 부활해서 영적 구원의 길을 열어줄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불뱀이
불신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물어 죽일 때 하나님의 명에 따라 모세가 지팡이에 매단 구리뱀을 쳐다보고 낫게 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회개시키고 구원을
얻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불신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의미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모시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민수기 20장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신명기 3장 25절).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혈기가 돋아 반석을 두 번 내리침으로써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 장사하여 모압 땅에 묻었지만,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신명기 34장
6절).
예수님도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해서 십자가에 달리게 되고, 십자가상에서 이 자리를 면케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을 보면,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예수님은 하나님께 애통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2) 여호수아
중심한 실체기대 644
모세가 죽은 후에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 사명을 인계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 1절과 2절을 보면,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1) 여리고성 정탐
645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사명을 인계받은 후 두 사람을 뽑아 여리고성 정탐을 보냅니다. 여호수아 2장을 보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 보냈는데,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2절) 하고
여리고 왕에게 고발합니다.
여리고 왕이 라합이라는 기생에게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3절)라고 말합니다. 라합은 그들을 숨겨주고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4~5절)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라합의 도움으로 두 사람은 정탐에 성공합니다.
모세 때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12지파장을 가나안으로 정탐을 보냈지만, 두 지파장을 제외한
열 지파장이 불신의 보고를 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 명의 믿음의 보고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하나 되어서 가나안에 입성합니다.
모세는 120세에 육적으로는 이미 죽었고, 영적으로 가나안 복귀를 이룹니다. 모세가 영육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를 따르던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영적으로만 가나안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노정을 탕감복귀하기 때문에 모세 대신 영육을 지니고 실체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걸었습니다. 재림주님도 예수님노정을
탕감복귀하기 때문에 예수님 대신 영과 육을 지니고 실체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걷게 될 것을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가나안
복귀 646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 모세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 1세대는 3일 노정을
거쳐서 홍해를 건넜습니다. 모세의 가나안 복귀노정에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고(출애굽기 13장 21절), 그들은 지팡이로 홍해를
갈라서 건넜습니다(출애굽기 14장 21~22절).
여호수아와 갈렙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 2세는 싯딤에서 요단까지 3일 노정을 거쳐서
요단강을 건넙니다(여호수아 3장 1~6절). 그것은 모세노정을 실체적으로 탕감복귀한 것입니다. 또 언약궤(법궤)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했고(여호수아 3장 3~8절), 언약궤가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만들었습니다(여호수아 3장 7~17절). 그들의 믿음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1세들이 불신할 때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지만(출애굽기 14장 21~23절),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넌 것이 다른 점입니다.
(3) 길갈에 돌단을 세움 646
여호수아는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로 길갈에 돌단을 세웠습니다.
여호수아 4장 20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라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서자 물이 그친 곳에서 돌 열두 개를 가져다가 단을 쌓은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가는 곳마다 돌단을
쌓아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의 제단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그 후손인 12지파들도 돌 열 두 개를 합해서 성전을 건축할 것을
보여준 것이고, 예수님의 12제자들이 힘을 합해 예수님을 성전으로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의
소산(所産)을 먹기 시작할 때까지 만나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광야노정에서 주시던 만나를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땅에 곡식을 심어서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그침 없이 내려주셨습니다. 곡식을 심어 소출을 얻게 되니 만나가 그쳤습니다.
(4) 여리고성
함락 647
여호수아 6장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요단
건너편 여리고성을 향해 진군합니다. 제사장 일곱 명이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면서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법궤)는 그 뒤를 따랐습니다.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법궤 뒤를 따랐습니다(8~11절).
그들은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 번씩 6일 간
돌고 7일 째 되는 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곱 바퀴를 돌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마침내 그 견고한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12~21절).
그것은 장차 예수님의 권능(權能)과 성도들의 믿음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사탄의 장벽을 무너뜨릴 것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5)
31개 왕조를 멸함 647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31개 왕조를
멸망시킵니다. 이스라엘의 터를 넓혀서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이 땅에 모든 왕족들을 굴복시키고,
통일된 지상천국을 건설하실 것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5. 모세노정이 보여준 교훈
모세노정은 우리에게 구약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물론, 성경을 읽는 사람은 모세노정을 단지 모세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 정도로 인식합니다. 이제 모세노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귀섭리에는 비밀이 있다는 사실과 그 비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모세에 대하여 암시만 했을 뿐 모세노정의 근본 문제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모세노정은 예수님의 전형적인
노정임을 그대로 예시했고, 하나님이 하나의 절대적인 목적을 향해 인류역사를 이끌어나가심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세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걸어오신 섭리역사를 모세를 통해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또 인간책임분담의 수행
여부에 따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뜻 성사가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은 연장됩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 실수하면 가중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한다는 것도 확실하게
보여줬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40일 정탐을 나갔지만, 불신으로 인해 실패하자 하루가 1년으로 바뀌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머물게 되고, 애급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 1세들은 모두 광야의 독수리 밥이 되었습니다.
모세노정을 볼 때 큰 사명자(司命者)일수록 시련도 크고, 시험도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순간에 결정되기 때문에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가는 길에 은사가 있으면 시험이 있고, 시험이 있으면
은사가 있다는 것이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의 총 결론입니다.
은사 전후의 시험 649
모세는 바로 궁에서
보낸 40년 세월로 제1차 출애급노정을 출발했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1차 출애급노정은 실패하고 맙니다.
그 다음에는 미디안 광야
40년 생활로 제2차 애급을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부인 십보라가 아들을 할례해 줌으로써 모세를 살려냅니다.
모세는 3대 기적과 10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급을 탈출합니다. 거기에서는 시련과 축복이 함께합니다. 3일 노정을 걷고 나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은혜가 찾아왔습니다.
홍해를 건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끼니를 해결했고, 아멜렉과 싸워 승리한 후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을 받고,
성막을 지어 법궤를 안치합니다.
그리고 40년 광야생활이 끝났을 때 반석샘물을 먹이고, 불뱀이 나타나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에 구리뱀을 달도록 해서 민족을 살리는 은사를 베풉니다.
은혜가 있으면 반드시 시련이 따르고, 시련이 오면 반드시 축복이 뒤
따라옵니다. 축복이 크면 자랑하지 말고 반드시 시련이 오는 것에 대비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제6장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651
야곱은 사탄을 굴복시키는 상징적인 노정을 걸었고 모세는 사탄을 굴복시키는 형상적인 노정을 걸었으며, 예수님은 실체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걸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사탄을 굴복시켜 나갔던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사탄을
굴복시킴으로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완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론 652
천사를 주관해야
할 아담(고린도전서 6장 3절)이 타락으로 인하여 도리어 사탄의 주관을 받아서 지옥을 이루었습니다.
후아담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몸소 사탄을
굴복시켜 타락한 아담의 입장을 탕감복귀함으로써 천국을 복귀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사탄이 예수님과 성도들에게
순종·굴복할 리가 없으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적 책임을 지고 부모의 입장에서 야곱과 모세를 세워 장차 예수님이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도록 본보기 노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야곱은 사탄을 굴복시키는 상징적인 노정을 걸었고 모세는 사탄을 굴복시키는 형상적인 노정을 걸었으며,
예수님은 실체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사탄을 굴복시켜 나갔던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사탄을 굴복시킴으로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완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1. 메시아를 위한 기대
652
타락인간은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메시아를 만나야 합니다. 메시아를 만나려면 먼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없으면 타락인간은 오시는 메시아를 죽이게 됩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에는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대 653
예수님노정에서도 메시아를 위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가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님노정에서는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이 예수님이 아니라 세례 요한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메시아가 직접
세우는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간이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므로 예수님이 직접 중심인물이 되어 조건을 세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노정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세례 요한이 세워야 합니다. 조건물은 말씀이고, 기간은 메시아 강림준비시대 400년입니다. 메시아
강림준비시대 400년 후에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인 세례 요한이 믿음의 기대를 세우게
됩니다.
실체기대 653
실체기대의 중심인물 또한 세례 요한입니다. 조건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세례 요한 앞에 애중굴통(愛仲屈通)함으로써 하나 되면 바로 실체기대가 세워져서 메시아가 현현하게
됩니다.
1)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653
메시아를 위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의 원칙에
따라서 예수님은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걷습니다.
(1) 믿음의 기대 654
예수님을
중심한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세례 요한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2절과 13절을 보면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장 23절에서 세례 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인 이유는 첫째, 세례 요한은 선지자 엘리야의
재림자이고(마태복음 17장 13절), 둘째, 주님의 길을 복귀하기 위해서 준비된 자이고(요한복음 1장 23절), 셋째, 광야에서 빛나는 수도
생활을 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조건물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40수 기대 위에 성막(聖幕)과 일체가 되고, 민족적으로 볼 때는 400년 간 메시아 강림준비시대를 뜻 맞게 세우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기대 위에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이 되어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성막은 성전실체(聖殿實體)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2) 실체기대 654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세례 요한입니다. 조건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세례 요한 앞에 애중굴통(愛仲屈通)하면 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 15절을 보면, 유대 지도자들이
광야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세례 요한을 찾아가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가 혹시 당신이 아닙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정도로
이스라엘 민족이 존경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웠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기대 위에 예수님을 모시면 되는데,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고 불신함으로써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실패합니다.
2)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655
(1) 믿음의 기대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예수님이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메시아의 자격으로서 중심인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셨지만 메시아의 자리가 아니라 세례 요한의 사명을 대신한 자리에 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불신했기 때문에 그 사명을
대신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하며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줍니다. 원래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줄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사명을 인계받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간
것입니다.
결국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사명을 인계받고, 조건물로 40일 금식과 3대 시험을 승리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우게 됩니다.
(2) 3대 시험 656
3대 시험을 받은
이유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3대 시험을 받은 원인(遠因)은 모세가 광야에서 반석을 두 번 쳤고 시내 산에서
석판을 깼기 때문입니다. 반석의 실체이자 석판의 실체가 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사탄의 참소를 받고 침범을 당할 수 있는 조건이 세워졌기
때문에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게 된 것입니다. 또 근인(近因)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불신함으로써, 다시 말해 엘리야의 사명을 가진 중심인물의
실수로 인해 사탄이 직접 예수님 앞에 나와서 시험하게 된 것입니다.
3대 시험을 한 목적
656
사탄이 예수님에게 3대 시험을 한 목적은 메시아의 강림목적을 파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메시아의 강림목적은 창조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며, 창조목적은 삼대축복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으로 삼대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후아담의 사명은 3대 시험을 통해서
사탄으로부터 삼대축복을 되찾아오는 것입니다.
시험의 주체는 사탄입니다. 모세가 석판을 깼고 또 반석이타로 인해 사탄이 반석, 다시 말해서
돌을 취해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석판과 반석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을 시험하게 됩니다.
3대 시험의 뜻
656
1차 시험은 광야에서 합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갔습니다. 예수님은 40수 사탄을 분립하기 위하여 40일 금식을
했는데, 사탄이 예수님에게 돌을 들고 가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마태복음 4장 3절). 이에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태복음 4장 4절)고 대답합니다. 말씀은 바로 말씀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을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의 실체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는 말은 메시아를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완성하지 못하고 타락함으로써 사탄의 주관 아래 떨어져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도
메시아를 포기하라는 의미로 사탄이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답하시며 말씀의 실체로 오신 당신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1차 시험에서 승리함에 따라 제1축복
복귀를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되고 메시아의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한 기대가 조성됩니다.
사탄은 2차 시험을 위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갑니다. 마태복음 4장 6절을 보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라고 사탄이 시험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실체로 오셨기 때문에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예수님의 발에 흙이 묻지 않도록 천사가 안아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복음 4장 7절)고 대답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무형의 주인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실체의 주인이다. 천사장, 너는
원래 종인데, 종이 감히 어떻게 주인을 시험하느냐?’는 대답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2차 시험에서 승리함에 따라 제2축복 복귀를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되고, 자녀복귀를 위한 기대가 조성됩니다.
사탄은 3차 시험을 위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꼭대기로 데려갑니다. 산꼭대기로 데려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 4장 9절)고 시험합니다. 그 말은 아담이 타락해서
사탄에게 경배했으니 ‘예수님 당신도 타락한 아담처럼 나에게 경배하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장 10절)고 대답합니다. 만물은 주관해야 하는 것이 삼대축복이므로 사탄은
만물이 보이는 산꼭대기로 데려가서 자기에게 경배하면 다 주겠다고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에 승리하는 대답을 함으로써
제3축복 복귀를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되고, 만물을 주관하기 위한 기대가 조성됩니다.
사탄의 3대 시험에서 승리한 예수님은 섭리노정에서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해 찾아 세우려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하고 하나님의 삼대축복을 이루어 사위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웁니다. 원래
세례 요한이 책임을 다했으면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실체의 신부를 맞아 사위기대를 이루고 모든 인류를 축복함으로써 하나님 가정으로 돌아가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세례 요한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불신함으로써 예수님은 다시 삼대축복을 찾아오는 시험을 사탄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3대 시험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삼대축복을 이루어 사위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셨습니다. 비로소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출발할 수도 있고, 가정을 가질 수도 있고, 만물을 주관할 수도 있는 조건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3)
실체기대 659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예수님입니다. 조건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 또는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애중굴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불신하고, 제자들도 불신했습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도 실패했습니다.
3)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659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는
성막(聖幕)과 성전(聖殿)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을 유대 민족이 배반하고 제자들까지도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육신을 십자가에
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 민족은 영육(靈肉) 아울러 신앙의 대상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실체노정(實體路程)으로 출발하지 못하고,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가 부활한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세워 먼저 영적노정(靈的路程)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원래 십자가에 돌아가면 안 되는 상황에서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중심해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영육 아울러 출발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출발의 기대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4) 예수님 중심한 영적 가나안 복귀노정 660
(1) 영적 믿음의 기대
예수님을 중심한
영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영적 믿음의 기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육신을 잃어버려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영적으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메시아를 위한 영적 기대이므로 영적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을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증거해 놓고도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에서 부인해버렸으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운명하기 전에 오른편 강도로부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라고 증거 받아야 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장 30절)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메시아라는 증거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영적 메시아의 기대를 세워, 영적 중심인물로 부활한 예수님의 실체노정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메시아의 입장이 아니라 영적 세례 요한의 입장입니다.
메시아는 스스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기대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영적 믿음의 기대에서 부활한 예수님은 영적 세례 요한의 입장에 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지 3일
만에 부활해 영적 부모의 입장에 복귀합니다.
영적 믿음의 기대의 조건물은 40일 만에 부활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흩어진 제자들과
120문도는 3일 만에 부활한 예수님을 모시고 40일 동안 정성을 드리면서 뜻을 성취할 것을 결의합니다. 그로부터 40일이 지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합니다. 또 영적 믿음의 기대의 기간은 부활 후 예수님의 40일 노정입니다.
(2) 십자가의
뜻 661
사탄은 타락한 인간을 영육으로 주관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타락한 인간을
예수님과 영육으로 접붙여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과 관계를 끊고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불신함으로써 예수님은 육신을 사탄에게 내주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육신을 예수님의
육신과 접붙여야 하는데 예수님의 육신을 사탄에게 내주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의 육신은 사탄의 주관 아래에 다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간의 육신을 사탄에게 내준 결과가 되었고, 부활한 예수님은 영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가셨으니, 인간의 영인체도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영적 기대를 세웠기 때문에 인간들이 십자가를 믿고
예수님을 맞이하면 영적으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영적 구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3대 시험에 승리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3대 시험에 실패한 사탄은 불신한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패배한 후 잠시 물러났지만 언제라도 불신하는
민족과 불신하는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다시 도전하고 공격할 준비를 합니다. 사탄은 3대 시험에서 패배했으므로 예수님에게 직접 도전하거나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한 이스라엘 민족과 불신한 제자들을 앞세워 다시 예수님 앞에 도전할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가룟 유다이고,
그 실체가 베드로였습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낸 목적은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대로 사탄이 원하는 목적은 자기 편 인류
모두를 하나님에게 내주더라도 예수님을 살해하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었으며 사탄이 요구하는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함으로써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과 짝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의 죄 값으로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자기 최대의 실권행사로 예수님을 살해하여 육적 구원의 길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영적 구원의
길은 사탄이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탕감복귀 원칙에 의해서 최대의 실권행사로 예수님을 부활시켜 영적 구원의 길을 완성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 때문에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한 분을 놓고 불신한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탄이 거래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사탄과 하나님 예수님을 놓고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며 거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냈는데 인간이 불신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를
찾아야 했고, 사탄은 인류를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메시아를 살해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고 인류를 하나님 편으로
데리고 오는 조건을 세우고, 탕감복귀 원칙에 의해서 하나님의 최대 실권행사로 예수님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적 구원의 길을 개척해
놓으신 것입니다.
(3) 영적 실체기대 663
영적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부활한
예수님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영적 믿음의 기대에서와 마찬가지로 메시아가 아니고, 영적 세례 요한의 입장입니다.
조건은 이스라엘 민족과
제자들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으로 부활한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애중굴통(愛仲屈通)을 실천함으로써 하나 되어 실체기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40일 후에 맞은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게 됩니다. 출발 섭리는 성령이 강림해서 제자들에게 이적과 권능을
주심으로써 영적 메시아의 기대를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적 메시아가 되었고, 영적 가나안 복귀만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적과 권능을 가지고 로마로 가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하며 기독교 섭리를 펼쳐 나갑니다. 제자들이 전도하다가 로마 관원에게
붙잡혀 죽으면서도 말씀을 전파하여 오늘날의 기독교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성공함으로써 영적 가나안 복귀만을
완성했습니다. 따라서 재림주가 오시면 실체 가나안을 복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재림주 중심한 실체 가나안 복귀노정
663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다른 사람이 세워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세례 요한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 놓고 예수님을 불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사명을 인계받아서 그 길을 다시 가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영적인 구원의 길만을 개척했습니다. 예수님이 영적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다시 세워서 영적으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완성했습니다.
(1) 믿음의 기대
664
영적으로 출발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섭리는 2000년을 지나서 오늘날 영적으로 세계적 판도를 이루었습니다. 다시 오시기로
약속한 재림주님을 중심으로 영육 아울러 실체 가나안 복귀노정을 완성해야 합니다.
실체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신(新)
세례 요한입니다. 다시 말해 재림주가 실체로 오시기 때문에 재림주 앞에 새로 세워진 신 세례 요한이 그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만일 신 세례
요한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사명을 대신한 것처럼 재림주가 신 세례 요한의 사명을 대신하면서 재림주로서의 사명을 완성하는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조건물은 40수 믿음의 조건입니다.
(2) 실체기대
664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신 세례 요한입니다. 신 세례 요한이 실체기대의 중심인물로서 책임을 다하면 재림주님은 그 기대 위에서 탕감을
치르지 않고 곧바로 실체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 세례 요한이 재림주를 불신하면 재림주는 신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다시 탕감의 길을 치르면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조건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으로 제1
이스라엘 민족과 제2 이스라엘 민족이 새로 세워진 신 세례 요한 앞에 애중굴통하든지, 재림 주 앞에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제1
이스라엘 민족과 제2 이스라엘 민족은 신 세례 요한 앞에서도 하나가 되지 못했고, 재림주 앞에서도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3)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
하나님은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모세를 통해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반석이타(磐石二打)로 영적으로만
가나안에 들어가고, 육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사명을 인계받아서 신 광야에서 출생한 2세를 중심으로 영육 아울러
실체 민족적 가나안을 복귀했습니다.
모세노정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걸어야 할 전형노정(典型路程)이므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도
마찬가지입니다.
(4)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 665
유대 민족이 불신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영적인 구원의 길만 열어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재림주님이 오셔서 영육 아울러 실체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거쳐 지상천국을 창건하게
되어 있습니다.
재림주님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영육 아울러 실체로 가나안에 입성한 것과 같은 입장입니다. 제1 이스라엘 민족은
유대교를 통해서 예수님을 모시는 신부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데, 막상 예수님이 오시니까 불신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은
제2 이스라엘 민족으로 기독교를 세웁니다. 기독교는 그 기대 위에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재림주를 2000년 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신부의
사명을 가진 기독교의 터전 위에 재림주를 보내십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유대교처럼 재림주를 불신함으로써 하나님은 제3 이스라엘 민족인
한민족(韓民族)을 중심삼고 기독교를 대신한 통일교회를 세워서 재림주를 모시고 탕감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제3 이스라엘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이요, 세워진 종교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입니다.
(5)
출발섭리 666
모세는 반석을 중심으로 외적인 섭리를 했고, 여호수아는 반석 샘물을 중심으로 내적인 섭리를
했습니다. 모세는 이적(異跡)과 권능(權能)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영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고 육신은 못 들어갔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적인 반석 샘물을 먹여 영육을 지니고 2세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모세노정은 예수님의 전형노정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외적으로 이적기사(異跡奇事)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가려 했는데 결국 그들이 불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게 되고
영적 구원의 길만 열어놓았습니다.
재림주님은 모세의 사명을 이어받은 여호수아와 같이 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삼고 마지막 실체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완성하게 됩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입장이고, 여호수아는 재림주님의 입장입니다. 예수님의 노정은 바로 재림주님이 걸어야 할
전형노정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예수님의 노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실체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선지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불신함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려다가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제자들이 불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영적인 구원의 길을 열었는데, 육적 구원의 길은 막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기반을 닦아 놓은 기독교의 영적 토대 위에 재림주가 오셔서 영육 아울러 실체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가고자 한
것입니다.
2000년 동안 준비했던 신부 입장의 기독교가 책임을 다하면 바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가 세워져서 거기서부터 재림주님의 역사가
출발하게 됩니다. 2000년 전 예수님 때 세례 요한이 그 책임을 다해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완성했다면, 그 기대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예수님을 모시고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실현하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가 세계의 중심
국가였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세계는 로마로.’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 나라의 왕이 되고 메시아로서 당당히 서면 로마의
문명과 문화를 타고 순식간에 세계적인 복귀를 이룰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은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복귀하려다 육신은 사탄에게 내주고, 영적인 구원의 길만 개척했습니다.
다시 오시는 재림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적으로 닦아 놓은 기독교의 영적 기반 위에 재림주님이 오시게 됩니다. 기독교는 책임을 다해야 하는 신 세례 요한의
입장입니다. 기독교는 종교적인 면에서, 정치적인 면에서, 경제적인 면에서, 그리고 문화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신 세례 요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재림주님은 신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다시 탕감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메시아라고 하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재림주님은 재림주이면서도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신 세례 요한의
사명을 해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움으로써 당신 스스로 재림주로 현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노정이 보여준 교훈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이고, 인간에 대한 예정은 상대적입니다. 예수님노정에서도 인간이 실수하면 다른 사람을 세워서 반드시 뜻을 이룬다는 교훈을
줍니다.
큰 사명자는 시련도 큽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해서 하나님께 버림 받았으니 그것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버렸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버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야 탕감복귀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하나님을 위하고 뜻을 위했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더라도 하나님을 배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길을 가더라도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고, 하나님과 뜻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장 42절)라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내 뜻대로 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의 길도 기쁜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십자가상에서도
하나님을 위해, 뜻을 위해 가신 예수님처럼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있더라도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위로하면서 가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모든 것은 순간에 결정되기 때문에 순간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순간이 일생을 결정합니다.
참고
1. 예수님은 성인
중의 성인
세계 4대성인은 예수·공자·석가·마호메트입니다. 4대성인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입장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인 중의 성인이자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란 아담이 타락한 이후 가지게 된 인류의 원죄를 청산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되돌리기 위해서 보낸
중심인물입니다.
공자·석가·마호메트는 예수님과 달리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인이지만 성자가 못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죄를
청산해주기 위해서 오신 성인이며 성자입니다.
‘예수님은 성인 중의 성인이다.’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인간의 원죄를 청산지어 본연의
아들딸로 되돌리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복귀섭리를 보면, 에덴동산에서 여자인 해와가 잘못하여 아담까지 타락합니다. 그 때 인간에게
원죄가 들어왔습니다.
원죄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원죄를 청산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석가·마호메트도 예수님의 축복을 통해서
원죄를 청산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세례 요한의 불신으로 그 책임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다시 오시는 재림주님은 모든 성인의 중심이 되는 참부모로 오셔서 세계 4대성인들까지도 축복해 줘야
합니다.
리브가를 통한 외적 복귀 671
타락한 인간은 원죄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가정에서 이삭의 아들 야곱이 비로소 사탄을 굴복시키고,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삼대축복을 찾아옵니다. 야곱은 잃어버린 장자권을 되찾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 사탄 세계인 외삼촌 집에 가서 네 부인을 찾아옵니다. 부인을 찾아왔다는 것은 사탄이 해와 한 사람을 차지하고 천주를
점령했듯이 야곱은 섭리의 중심에 있는 여자들을 모두 복귀했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그들을 전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부인으로 삼았다는 것은
사랑으로 정복했다는 말입니다. 천사장은 해와 한 사람을 차지함으로써 천주를 점령했습니다. 사랑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사랑 이외의 것으로는
세계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야곱은 부인·자녀들과 함께 종과 모든 재물을 구해서 자기 외삼촌 집에서 탈출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삼대축복을 복귀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삼대축복 모두를 찾아온
덕분에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이 되고, 그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오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해와 복귀를 이루고, 야곱과 요셉은 아담
복귀를 이루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요셉이 아담가정을 복귀했습니다. 애급에 팔려갔던 요셉은 원수를 사랑하고 재물을 취해서 형님들을 다
구해주게 되었습니다. 애급에 팔려갔던 요셉은 원수를 사랑하고 재물을 취해서 형님들을 다 구해주게 되었습니다.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것을
아브라함·이삭·야곱 가정을 중심하여 비로소 완성했기 때문에 그들은 승리자가 되어서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선민이 되고, 절대성을 지켜 승리했기
때문에 그 혈통에서 메시아가 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백 살에 얻은 아들 이삭의 부인이 리브가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사이에서 에서와 야곱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싸웠습니다. 이삭은 고민이 되어 하나님께 물었더니 하나님은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세기 25장 23절)고
하셨습니다. 아담가정에서 사탄분립을 위해 가인과 아벨을 세웠듯이 에서는 가인 편이고, 야곱은 아벨 편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나온 쌍둥이 동생 야곱이 형님 에서를 자연 굴복시킵니다.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의 협조를 얻어 떡과 팥죽으로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고, 염소를 잡아서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남편을 속이고 장자를 속여서 첫째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계승해준 것입니다.
그것은 해와가 책임하지 못한 어머니의 사명을 리브가가 다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해와가 책임하지 못한 어머니의
사명을 리브가가 다 했다는 말입니다. 그 일을 계기로 야곱은 사탄 세계인 하란의 외삼촌 집에 가서 외삼촌의 두 딸과 그들의 몸종까지 모두
차지합니다.
야곱은 21년 동안 종살이를 마치고 네 명의 부인과 열한 아들과 노비를 거느리고 재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형 에서를
만나서 하나가 됩니다.
외삼촌 집을 나올 때 라반이 가장 좋아하는 우상을 가지고 나와 사탄을 분립하는 3일 노정을 지나 상수리나무 밑에
파묻습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은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삼대축복을 모두 복귀하게 됩니다. 형님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에게 축복을 받고,
사탄세계에 가서 외삼촌의 두 딸들과 그들의 몸종까지 모두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얍복 강변에서 천사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전체
노정을 승리합니다. 그러한 승리의 기대 위에서 실체 사탄인 형님을 찾아가서 자연 굴복시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이 야곱을 중심해서 참소할
조건이 없어졌습니다. 야곱은 외적으로 사탄이 참소할 수 없도록 모든 조건을 세움으로써 외적 복귀를 이룬 것입니다.
다말을 통한 내적
복귀 672
그 다음에 유다와 다말이 하나님의 섭리를 잇게 됩니다. 유다는 야곱의 열 두 자식
가운데 첫 번째 부인 레아가 낳은 넷째아들입니다. 첫 번째 부인에게서 장자인 르우벤, 두 번째 시므온, 세 번째 레위, 네 번째 유다가
태어났습니다.
유다에게는 아들이 세 명 있었습니다. 첫째가 엘, 둘째가 오난, 셋째가 셀라입니다.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다말을 며느리로
데려옵니다. 그런데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해서 여호와께서 그를 죽입니다(창세기 38장 6~7절).
당시 유대의
풍습은 형님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데리고 살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둘째아들 오난이 다말을 데리고 삽니다. 그런데 오난은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씨를 주지 않으려고 땅에 사정(射程)합니다.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둘째아들도 죽입니다(창세기 38장
8~10).
유다는 셋째아들 셀라에게 자기 며느리 다말을 줘야 하는데 유다는 다말 때문에 셀라도 두 형들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다말에게 친정에 가서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말이 친정에 가 있었습니다(창세기 38장 11절). 다말은 창녀로
가장해 목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시아버지 유다를 만나 유혹합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의 씨를 받아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다말은 욕정이
넘쳐서 창녀로까지 가장하여 시아버지를 유혹하고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다말은 그런 음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다말은 야곱가정에서
승리해서 선민이 됐고, 그 혈통에서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다말은 어떻게 하든지 야곱가정에서 유다를 통해 하나님의 혈통을
이어받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 유다가 셋째아들을 안 주니까 혈통을 이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부인이 죽은 후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사람에게로 갑니다(창세기 38장 12절). 그 때 다말은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시아버지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창녀로 가장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마침 부인이 죽어 적적하던 차에 길가에 있던 창녀를 보았습니다.
다말은 그 때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고 유다에게 물었습니다. 유다가 염소 새끼를 주겠다고 하니 다말은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이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창세기 38장 18절)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그 세 가지를 약조물(約條物)로 주고, 자기 며느리인 줄도 모른
채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유다는 친구 숀에게 그 여인을 만나서 염소 새끼를 갖다 주고 세 가지 약조물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친구가 아무리
찾아봐도 그 동네에는 창녀가 살지 않는다고 해서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석달쯤 후에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고 유다에게 알려왔습니다.
당시에는 과부가 임신하면 불로 태워죽이든지,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을 가했습니다. 유다는 당장 며느리 다말을 데리고 가서 불로 태워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말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보라고 내밀었습니다(창세기 38장 25절). 유다가 그것을
알아보고 ‘나보다 옳도다.’하고는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창세기 38장 26절).
다말이 아기를 낳게 되었는데 산파가 보니까
머리가 나오지 않고 손이 먼저 나와서 ‘아! 이놈이 장자구나!’하고 손에다 빨간 끈을 묶어서 표시해 놓았는데 그 손이 도로 들어가고 빨간 끈이
없은 아기가 먼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복중에서 형님과 동생이 뒤바뀌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빨간 끈을 매어서 복중에서부터 장자와 차자가 바뀌어
태어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났습니다.
복중에서 장자와 차자가 바뀌어서 태어났는데
베레스라는 말은 ‘터트리고 나왔다.’는 뜻입니다. 손이 먼저 나와 산파가 손에 홍사(붉은 색 실)로 매어 준 아기(세라)가 뒤따라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복중에서 형님과 동생이 뒤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태 밖에서는 쌍둥이 형제 중에서 동생인 야곱이 형 에서를 굴복시켜 외적인 탕감복귀를
이루었고, 복중에서는 유다와 다말이 낳은 베레스와 세라를 통해 내적인 탕감복귀를 이루었습니다. 이로써 사탄이 참소할 외적·내적 조건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마리아를 통한 실체 복귀 675
리브가와 다말을 중심한 외적·내적 복귀의 기대
위에 새로운 여인이 나타나면 거기에다 하나님의 씨를 심을 수 있고, 그로 인해 메시아가 올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는 성전을 청소하면서 아주 정성을 많이 드린 여인입니다. 안나는 언제나 ‘내 복중에 아기가 생기면,
그를 성전에 바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안나가 어렵게 아기를 잉태하여 딸을 낳았습니다. 그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성전에 바쳐져
성전에서 성장했습니다. 마리아가 열두 살 되던 해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약혼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신랑감을 구하는 통에다 자기 것을
표시해서 넣었다고 합니다. 그 안에 있는 표시를 하나 뽑으면 그가 자기 신랑이 됩니다. 마리아가 그 통에서 이름 하나를 뽑았는데 그가
요셉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을 했는데 요셉은 천사장의 입장이고, 마리아는 해와의 입장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해와는 천사장에게
끌려가서 정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했다 할지라도 관계를 맺으면 안 됩니다. 마리아의 복중에 메시아를 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소중한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후 대제사장 사가랴의 집으로 갔습니다. 마리아는 사가랴의 부인 엘리사벳과는
친척관계였습니다.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예수가 태어날 것을 예고 받은 후에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러 가니, 엘리사벳이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누가복음 1장 43절)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메시아가 온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신령한 엘리사벳이
증언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 집에 석 달 쯤 있다가 돌아갑니다(누가복음 1장 56절). 석 달 동안에 마리아는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아기를 가진 마리아를 사가랴 가정에서 보호해야 합니다. 사가랴와 부인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가랴가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러 성소에 들어가자 천사가 나타나서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누가복음 1장 13절)고 일러줍니다. 그렇게 세례 요한이 태어났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으므로
형님의 입장입니다. 마리아는 사가랴 대제사장의 집에 가서 아기를 갖게 되는데, 성령에 의해 아기가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사가랴
대제사장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사가랴에 의해서 잉태하게 되는데 거기서 아기가
생겼으니 사가랴 가정에서 보호하고 길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한 형제같이 사가랴의 집에서 길러졌으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엔 사가랴 가정에서 마리아를 쫓아냈습니다.
갈 곳이 없는 마리아는 약혼자인 요셉을 찾아갑니다. 요셉은 약혼녀와
손도 한번 잡아보지 못했는데 아기를 임신해가지고 왔으니 충격이 컸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뱃속의 아기가 누구의 아기인지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 정황이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 2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또 누가복음 1장 28절에서 33절을 보면, 마리아에게도 사자가 나타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 마리아여 무서워 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게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서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사가랴가정을 중심한 사가랴
종족과 요셉가정을 중심한 요셉 종족, 이 두 종족을 기반으로 준비를 해서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사가랴가정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요셉가정에서
예수님을 잘 모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준비된 사가랴가정에서 예수님을 낳지
못하고, 요셉가정에서도 핍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를 통해서 세례 요한이 태어나고, 사가랴와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가 잉태한 예수님을 통해 실체복귀(實體復歸)를 이루기에 앞서 이삭과 리브가가 낳은 에서와 야곱을 통해
외적복귀(外的復歸)를 이루고, 유다와 다말이 낳은 복중의 베레스와 세라를 통해 내적복귀(內的復歸)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장자권을
야곱을 통해 외적으로 찾아왔고, 베레스를 통해 내적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사탄은 외적·내적으로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이 없어졌습니다. 그 같은 기대
위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통해 실체 복귀를 이룬 것입니다.
리브가는 죽기를 각오하고 남편 이삭과 장자 에서를 속이며 외적 복귀를
이루었습니다. 또 다말은 창녀로 가장해서 시아버지인 유다와 자기 일족을 속이며 내적 복귀를 이루었습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는
이미 정혼한 남자(요셉)를 두고 사가랴의 집에 가서 아기를 잉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못 하는 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해와가 잘못한 것을 하나님은 그렇게 여성을 통해 탕감복귀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따라 리브가와 다말과 마리아를 거쳐 예수님이
오시게 됩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사탄이 참소할 조건이 없고 원죄가 없는 상태에서 태어났습니다. 원죄를 갖지 않은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의
원죄를 청산해 줄 수 있는 메시아요,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인 중의 성인입니다.
2. 예수님의 실체기반
상실 678
만일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에서 마리아를 추방하지 않고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잘 보호하고 그러한
환경에서 아기를 낳았으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형제로 길러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도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과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배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자기 집으로 가서 문안할 때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오니 그
어찌된 일인가?’(누가복음 1장 43절)라고 말했습니다. 장차 자기들이 모셔야 할 메시아의 어머니가 왔다고 증언했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복중의 아기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정자의 씨를 사가랴를 통해서 마리아의 복중에 잉태하게 했다는 말을 성경에서는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아담의 체를 쓰고 하나님의 절대성 정자의 씨를 해와에게 심으려고 했습니다. 아담이
내부에 하나님의 절대성 정자의 씨를 지니고 그것을 해와에게 심은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해와는 하나님의 부인이 되는 것이
에덴동산의 창조이상입니다.
에덴동산의 창조이상을 이루어야 할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아서 예수님이 성혼할 때까지 절대로 요셉과 관계를 맺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요셉에게 정조를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유혹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오직 마리아는 예수님 한 분을 잘 성장하도록 키워야 하고, 요셉은 그 일을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사가랴가정이 불신하고,
요셉가정이 불심함으로써 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요셉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부부관계를 맺다보니 예수님의 동생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요셉가정에서 의붓자식 취급을 받았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편에 서지 못하자 결국 예수님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관계를 맺지 않고 예수님 한 분만을 키워야 합니다. 요셉도 그런 마리아를 도와 예수님이 다 성장하면 먼저 마리아와
요셉과 가족이 하나 되어 예수님을 결혼시켜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마리아와 요셉 두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축복을 받으면 참부모가 됩니다. 예수가 참부모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마리아와 요셉은 해와와 천사장의 자리에서 복귀하여
예수님에게 축복을 받는 것이 원리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두 사람이 절대로 관계를 맺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육 중심한 실체기대를
상실했습니다. 엘리사벳이 배신하고, 사가랴가 배신하고, 세례 요한이 배신하고, 요셉이 배신했습니다. 결국에는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까지도 예수님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3. 예수님의 공생애 노정 680
요셉가정에서 30년 동안 축복의 기대를 세우려고
했는데,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남편 요셉이 협조하지 않아 예수님에게 신부를 얻는 길이 막혔습니다. 사가랴가정이 협조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영적 기반을 찾기 위해서 공생애 노정을 출발 합니다.
예수님의 출가
680
예수님은 30세에 집을 나와 말씀을 전파합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을 보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했지만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반대하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누가복음 9장 58절)라고 탄식했습니다.
예수님은 집에 있을 때에도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사가랴를 찾아가도, 엘리사벳을 찾아가도, 세례 요한을 찾아가도 하나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셉과 마리아를 찾아가도 같은
입장이므로 예수님은 어느 곳 하나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집을 나온 예수님은 더더욱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고되고 힘든 개척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친척이 가나에서 혼인잔치를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시골의 경우 결혼하면 친척들이 모두 가서 도와줍니다. 그런 풍습에 따라 마리아도 친척의 혼인잔치를 도우러 갔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아서(요한복음 2장 2절) 잔칫집에 갑니다. 예수님이 그 곳에 간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머니의 마음을 자극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머니의 친척이 결혼하므로 어머니가 일하면서 아들 예수를 장가보낼 생각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예수님의 결혼 문제는 아랑곳없이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요한복음 2장 3절)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한복음 2장 4절)라고 대꾸했습니다.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한복음 2장 5절)고 일렀습니다. 예수님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해서 하인들이 돌 항아리
여섯 개에 아귀까지 물을 채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 하여 하인들이 갖다 주니 손님들이 이전에 먹었던 포도주보다
훨씬 좋은 포도주라며 좋아했습니다(요한복음 2장 6~10절).
둘째는 예수님이 집을 나와서 돌아다니니 배가 고파서 제자들과 잔칫집에 가서
한번 먹기 위해서입니다. 친척 집인데다 어머니도 일을 도와주고 계시므로 마음껏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입장을 생각할 볼 때, 예수님이 얼마나 비참한 길을 걸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가갈 수 있도록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혼인잔칫집에 가서 뭐라도 얻어먹기 위해서 갔는데 그 뜻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인이라고 부르며 책망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동생들과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마태복음 12장 47절)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며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태복음 12장
48~5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한은 더 깊어지고 가슴에는 씻을 수 없는 사연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682
사마리아는 북조 이스라엘의 수도였고, 예루살렘은 남조 유대의 수도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가려면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는 게 제일 빠른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마리아 땅에 발을 내디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고 멀리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다 피곤해서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여섯 시쯤
되었습니다(6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오자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7절). 다음의 성구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당신은 유대인으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9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의 물음에 예수님이 ‘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고 말씀했습니다. 여자가 또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주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냐고 물었습니다(12절). 그러자 예수님이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15절)라고 하자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고 하셨습니다.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왜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또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라.’(25절)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그이라고 하자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왔다고 알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며 이틀 동안 사마리아에
머물렀습니다(40절).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로 보면 사마리아 여인은 창녀와 같은 여자입니다. 예수님이 창녀를 붙들고 남성으로서
하소연한 자리가 사마리아 여인과의 우물가 대화였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
683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절)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이니까.’(22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2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파는 가룟 유다가 ‘랍비여 내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도다.’(25절)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릇에 손을 넣은 자가 예수님을 판다고 했는데, 가룟 유다가 자기가 그
사람인가, 하고 묻자 예수님은 ‘그렇다.’고 확답을 한 것입니다.
옆에 있는 제자들은 ‘접니까? 제가 팝니까? 저는 안팝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으니 지켜봐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사람으로
지목됐기 때문에 가룟 유다를 데려가서 회개를 시키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팔지 못하도록 가룟 유다를 가두어 두든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파는 길을 막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담판 기도
684
마지막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담판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제자인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면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태복음 26장 36~38절)고 말씀했습니다. 죽게 되어서 심히
괴로우니까 깨어서 같이 기도하자고 제자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 기도가 겟세마네 동산의 담판기도입니다. 누가복음 22장 39절에서
46절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놓고 상황이 너무 심각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다 데리고 가지 않고 세 제자만 데리고 간 이유는 사위기대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사위기대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완성기대(完成基臺)이고, 존재기대(存在基臺)이고, 힘의 근본기대(根本基臺)이고, 사랑의 근본기대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중심해서 세 제자는 실체 사위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사위기대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찾아오고 거기에서 모든 영계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담판기도를 할 때 제자들은 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기도를 마치고 와서
자고 있는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태복음 26장 40~41절)고 책망하시고 다시 두 번째로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복음 26장 42절)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고 있는 제자들을 두고 세 번째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26장 44~4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담판기도를 한 후 하나님의 소망을 다 이루지 못하여 이제 죽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세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해서 영육의 기반을 다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만일 세 제자가 깨어서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눈물의 기도를 했더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한마음이 되어 기도를 했더라면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이 그 자리에서 무릅을 꿇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예수님을 잡으러 온 그들이 선두에 서서 예수님을 증거함으로써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판 및
체포 685
예수님은 체포되어 두 가지 재판을 받습니다.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심문을 받습니다.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가야바에게 공개재판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재판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7절에서 66절을 보면,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가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고
고발당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베드로가 따라갑니다. 마태복음 26장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담판기도를 하기 전에 베드로에게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망을 간 가운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말합니다(요한복음 21장 15절).
갈릴리 호숫가에 가면 베드로가 처가살이를 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호숫가에 조그마한 집이 있는데
베드로는 거기에서 물고기를 잡아 그날그날 먹고 사는 가장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결심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됩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이미 죽기를 각오한 사람입니다. 물고기를 안 잡으면 자기 일족이 비참하게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언제나 주를 위해서 죽겠다.’ 하는 마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베드로는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에 앞서 예수님은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한복음 13장 38절)라고
예고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기준에서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지만, 이미 베드로
속에는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불평불만을 하고 의심할 때 사탄이 들어간 것입니다.
다른 제자는 다 집으로 돌아갔는데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했다면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자기 마음을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합니다.
법정에 들어섰을 때 가야바 대제사장이 나와서 ‘네가 유대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라고 말합니다(누가복음 23장 3절). 두 번, 세 번 물어도 답은 똑같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해야 하는 사명자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죽기를 각오하고 가야바 법정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종들이 ‘바로 저 사람도 예수당이다, 예수 제자다, 예수 따라 다니는 것을 봤다.’고
하자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닭이 세 번 울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합니다. 베드로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사탄이 나갑니다. 사탄은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떠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자기의 책임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제자들로부터 메시아임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마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부인하는 바람에 사탄에게 모든 섭리적 기반을 넘겨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나중에 십자가상에서 오른편 강도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함으로써 영적 구원의 길이라도 열어놓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법정에 끌려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합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로부터
종교재판을 받고, 빌라도 법정에서 정치재판을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줍니다(1~2절). 총독이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이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한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자 총독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11~14절).
당시 유대에는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15절). 그
때 바라바라고 하는 죄수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그것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넘겨준 무리를 의식한 말이었습니다(16~18절).
빌라도가 법정에 앉아있는데 빌라도의 부인이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19절)라고
전했습니다.
빌라도는 내심에 예수님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찾고 있는데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이 정반대로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외쳤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무리가
바라바라고 대답했습니다(20~21절).
빌라도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어떻게 하랴?’ 무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고 대답합니다. 빌라도가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으니 무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고 더더욱
소리칩니다(22~23절).
빌라도가 자기의 변호가 아무 효험도 없고 오히려 민란만 부채질한다는 생각에 물을 가져다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하면서 체념합니다. 그러자 백성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24~26절).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갖다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도록 해놓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면서 희롱했습니다. 희롱을 마친 후에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갔습니다(27~31절).
예수님이 형장으로 가다가 구레네 사람 시몬을 만나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함께 골고다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을 박혔습니다(31~35절).
십자가상의 예수님 689
누가복음
23장 27절에서 28절을 보면, 예수님이 골고다로 가는 것을 보고 유대 여인들이 슬피 울면서 따랐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그 후손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을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장 6절)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길이니 그분의 길을
제자가 따라가고 이스라엘 민족이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을 알았던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못이 박히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고 조롱당하는 고통이 컸지만, 예수님에게는 당하는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괴로움을 당하실 하나님에 대한 걱정이 더 컸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4000년 간 하나님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종인 사탄에게 조롱을
받으면서도 입을 열 수 없었던 창조주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의 걱정은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을 위로하고 뜻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쳤는데,
내가 죽으면 누가 하나님의 사정을 알 것이며, 누가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 기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자신이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2000년이 지나 재림할 때까지 홀대를 받고 억울하고 분한 자리에서 해방 받지 못할 아버지를 생각하니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고통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량하고 불쌍한 하나님을 놓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라고 마지막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장 46절) 하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6절에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는 말씀을 마친 후에
운명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토록 비참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십자가상의 운명(殞命)으로 부활섭리를 이루게 됩니다.
4.
예수님의 영적 부활 690
예수님의 영적 부활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고(사도행전 2장 1~4절), 기독교가
출발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해야 할 사명은 성혼축복을 받고 참부모가 되어서 인류를 축복하고 원죄를 청산해 주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혼을 하지 못한 것이 예수님의 한이었습니다.
참가정을 이루어야 창조목적이 완성됩니다. 참가정의 터전에서 하나님이
그토록 소원하셨던 조국 광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의 슬픔 중의 슬픔은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결혼의 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성혼축복을 받도록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슬픔은 혈통을 남기지 못하고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혈통을 남기기 위해서 4000년 동안 수고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냈는데, 예수님은 혈통을 한 점 남기지 못하고 원통하고 불쌍하게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슬픔은 영육 아울러
인간을 구원하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통한 심정으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5. 예수님의 해원성사 691
예수님의 원통한 죽음을 해원할 사람은 오직 참부모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참부모님만이 예수님의 사정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지니고 오신 참부모님은 예수님의 억울하고 분한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그렇게 한이 맺혀 있으니 그를 보낸 아버지 하나님도 한이 맺혀 있습니다. 참부모님은 그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눈물로써 예수님을 증거하고 애통한 사정을 붙들고 몸부림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로하시고 예수님의 사정을 밝히신
참부모님은 지난 2003년 12월 22일 예루살렘 성에서 예수님의 사정을 밝히신 참부모님은 지난 2003년 12월 22일 예루살렘 성에서
예수님의 사정을 밝히신 참부모님은 지난 2003년 12월 22일 예루살렘 성에서 예수님의 왕권 즉위식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왔는데, 왕이란 누명을 쓰고 죽었습니다.
참부모님은 당신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이들 속으로 들어가서 기독교·이슬람교·가톨릭 등 여러 종교
대표들과 3000여 명의 세계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예수님의 왕권 즉위식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또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어서 로마의 의회에 나가 당당하게 메시아를 선포하고 로마를 통해서 세계를 수습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했기 때문에 참부모님은 2004년 2월
4일 제2 로마와 같은 미국 워싱턴에서 예수님의 왕권 즉위식을 해드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생각을 할 엄두를 못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고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하기 위해서는 두 종족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사가랴 종족은 가인의 종족이고, 요셉 종족은 아벨의
종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 위에 이 두 종족을 세워서 메시아를 보내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 입장인 사가랴가정과 아벨
입장인 요셉가정에서 예수님을 모시게 했던 것입니다. 이 두 종족이 사생결단 전력투구로 예수님을 모셨더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가랴와 요셉이 종족적 메시아가 되고, 세례 요한은 분봉왕(分封王)이 됩니다. 분봉왕은 나라의 왕과 같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수도 생활을 할 때 유대 백성들이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로 존경 받는 인물이었습니다(누가복음 3장 15절).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분봉왕으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요셉 종족과 사가랴
종족이 하나 되어 예수님을 모셨으면 세례 요한이 분봉왕이 되어 그 기대 위에서 예수님은 당당하게 메시아를 모셨으면 세례 요한이 분봉왕이 되어 그
기대 위에서 예수님은 당당하게 메시아를 선포하고 왕으로서 출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은 나라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무리들이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통곡했습니다. 스데반이 제일 먼저
순교당했습니다. 그도 마지막에 죽을 때 하나님을 붙들고 통곡했습니다. 수 없이 죽어가는 무리들이 하나님을 붙들고 통곡하다
죽었습니다.
그들이 소리 지르며 기도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불러도 하나님은 나라가 없으니까 그들을 붙들어 주지를 못했습니다. 나라의 권세는
사탄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이 거짓말을 하여 하나님의 아들딸을 죽이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붙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한입니다.
대한민국은 역사 속에 수없이 나라를 빼앗겼다가 되찾아오고 나라 때문에 피를 흘렸습니다. 메시아가 왔을 때,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쳐주기 위한 사연이 이 민족의 역사에 깃들어 있습니다. 조국 광복, 하나님의 조국, 하나님의 고향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책임입니다.
제7장 섭리역사의 각 시대 연수 형성 693
‘동시성’이란 후시대의 역사가 전시대의
역사노정과 유사한 모습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복귀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후시대의 역사가 범위만 넓혀졌을 뿐 전시대의
역사노정과 유사한 모습으로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론 694
복귀섭리는 타락한 인간을
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기 위해서 수고해 오신 하나님의 발자취입니다. 복귀섭리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고, 우리와 우리 가정을 찾아 세우기
위해 6000년 간 수고해 오신 하나님의 피와 땀과 눈물이 들어 있습니다.
또 역사상 수많은 선열이 흘렸던 피는 바로 하나님을 대신해서
흘린 것이므로 복귀섭리노정을 모르면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한 직후부터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섭리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입니다.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데는 중심인물이 있고, 믿음을 세우는
조건물이 있고, 믿음을 세우는 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은 원래 아담·해와가 지켜야 하는 성장기간입니다.
‘섭리역사의 각 시대 연수
형성’에서는 ‘역사 속에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어떤 원칙에 의해서
하시는가?’를 알아봅니다.
1. 섭리적 동시성 시대 695
1)동시성이란?
‘동시성(同時性)’이란
후시대(後時代)의 역사가 전시대(前時代)의 역사노정과 유사한 모습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복귀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후시대의
역사가 범위만 넓어졌을 뿐 전시대의 역사노정과 유사한 모습으로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성이란 말은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제일 먼저 썼습니다. 그러나 토인비는 동시성이라는 말은 언급했지만, 왜 역사가 동시성으로 나타나는지 그 원인은 밝히지 못했습니다.
토인비의
역사관은 ‘역사는 나선형(螺旋形)으로 반복되어 동시성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토인비는 역사가 한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 자리로
되돌아가고 또 돌아서 그 자리로 되돌아가는 나선형 구조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전시대와 같은 유사한 모습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고 주장했습니다.
‘통일원리’에서는 섭리적으로 본 전체의 역사가 동시성의 역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섭리적 동시성은 섭리사의
중심인물인 개인이 가정으로, 가정이 민족으로, 민족이 국가로, 국가가 세계로, 세계가 천주로 역사의 범위가 점점 확대되지만, 탕감복귀라는
공식으로 인해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발전해 온 역사를 말합니다.
2) 동시성이 생기는 이유 696
역사가 동시성을 띠고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이 하지 못한 책임분담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유일·불변·영원하듯이 하나님이 세운 뜻도
절대·유일·불변·영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이 합쳐져야 합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책임분담은 95퍼센트이고, 인간의 책임분담은 5퍼센트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종교인들은 하나님이 모든 뜻을 다 이루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책임분담으로 완성됩니다. 인간책임 분담은 5퍼센트이지만, 이 5퍼센트는 100퍼센트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5퍼센트의 책임분담을 완수하면 하나님의 책임분담 95퍼센트도 완성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이 5퍼센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책임도 완성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책임분담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개인시대에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경우 섭리가 개인시대에서 가정시대로 확대되고 연장되어도 인간이 져야 할 책임분담은 그대로 남습니다. 범위는 개인시대에서
가정시대·민족시대·국가시대·세계시대로 넓어지지만, 인간이 담당해야 할 책임분담 5퍼센트는 그대로입니다.
다시 말해 섭리의 범위가 넓어져도
가장 중요한 인간책임분담은 전시대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시대나, 민족시대나, 국가시내나 세계시대나, 천주시대나 인간책임분담
5퍼센트와 하나님 책임분담 95퍼센트라는 공식은 똑같습니다.
인간책임분담을 완수하면 뜻이 이루어지고, 인간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섭리가 반복되면서 연장됩니다. 이처럼 역사가 동시성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책임분담 때문입니다.
3) 동시성의 형성
요인 697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것이 바로 동시성의 형성 요인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직후부터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시작하셨는데 복귀섭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메시아를 보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원죄를 가졌고, 메시아가 오지 않고서는
인간 스스로 원죄를 청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순수한 혈통을 상속함으로써 사탄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복귀섭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가정부터 노아가정·아브라함가정·모세가정, 예수님까지 전체 역사노정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 복귀노정입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실패하면 섭리가 연장되면서 또 복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는 것이
동시성의 형성 요인입니다.
메시아를 위한 믿음의 기대는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고, 실체기대는 천사장과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횡적 기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기대에는 중심인물이 있고, 조건물이 있고, 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이 아담가정에서는 1대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3단계 성장기간이고 내적으로 볼 때는 수리적 기간입니다.
실체기대에도 중심인물이 있는데, 조건물 대신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가인이 아벨에게 애중굴통(愛仲屈通)함으로써 아벨과 하나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역사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를 위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우는 것이 동시성이 형성되는 요인입니다.
4)
동시성의 종류 698
원리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소생·장성·완성의 3단계 성장기간을 거쳐서 성장·완성합니다. 그에 따라 동시성도
소생·장성·완성의 3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소생기를 거쳐 완성급에서 타락했습니다. 복귀의 길도 이 원칙을 가지고 걸어야
합니다.
동시성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소생적 동시성(蘇生的同時性)으로서 역사적으로 볼 때는 상징적 동시성
시대(象徵的同時性時代)입니다.
둘째는 장성적 동시성(長成的同時性)으로서 역사적으로 볼 때는 형상적 동시성
시대(形象的同時性時代)입니다.
셋째는 완성적 동시성(完成的同時性)으로서 역사적으로 볼 때는 실체적 동시성
시대(實體的同時性時代)입니다.
모두가 소생·장성·완성이라는 3시대의 동시성을 띠고 있지만, 내용으로 볼 때는 상징적·형상적·실체적 동시성
시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1) 소생적 동시성 698
타락한 장본인인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 노정은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 기대(家庭的基臺)를 세우는 기간입니다.
인류역사는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서 인류를 구원하는 섭리역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워야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기대는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요, 실체기대는 횡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종적인 관계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절대 믿고 실천해서 말씀의 실체가 되어 인격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완성한 인간이
천사와 만물세계를 주관하고 다스려야 하는데, 타락함으로써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종인 천사장이 아담과 해와를 주관하는 역주관
현상(逆主管現像)이 벌어졌습니다.
복귀섭리가 시작된 후 아담가정에서 아벨은 믿음의 기대는 세웠지만,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인 아벨이 가인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실체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아 메시아가 올 수 없었습니다. 다시 메시아를 맞을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600년이 지나서 노아가정을
세웠는데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어서 믿음의 기대를 세웠지만, 둘째 아들 함이 실수함으로써 실체기대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또
메시아가 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부터 10대 1600년 만에 노아가정을 세운데 이어 다시 10대 400년 만에 아브라함가정을
세웠습니다. 아브라함가정에서는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믿음의 기대인 상징헌제를 실패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둘기·양·암소를 둘로 쪼개서 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비둘기를 쪼개지 않아서 결국에 전체가 다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헌제하여 이삭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를
세우고, 야곱이 에서와 하나 되어서 실체기대를 세웠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장자의 자리를 빼앗아 장자권(長子權)을 복귀하고, 부모로부터
축복을 받고 나서 사탄세계인 외삼촌 집에 가서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가정을 찾아오는 조건을 세우게 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아담가정에서는
여자 한 사람을 잃어서 천주를 잃어버렸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외삼촌 집에 가서 외삼촌의 두 딸과 두 딸의 몸종까지 모두 사랑으로 주관해서
잃어버린 해와를 복귀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들과 재물을 취하여 만물을 복귀하고,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우상을 가지고 나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습니다.
그리고 얍복 강에서 영적 사탄인 천사와의 씨름에서 천사를 자연 굴복시켜 승리자라는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와 같이 야곱은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전체를 탕감복귀합니다.
인간조상 아담과 해와가 음란으로 타락한 것을 탕감복귀한 것이 아브라함가정의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 아브라함의 뒤를 이은 이삭의 아들 야곱은 해와를 복귀하고, 야곱의 아들 요셉은 아담을 복귀합니다. 그들은 음란한 환경에
들어가서도 음란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절대성을 지켜서 복귀해 옵니다.
그 다음엔 요셉이 사탄 편 세계인 애급에 가서 재물을 모아 찾아온
형님들에게 축복해주고 형님들을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우게 됩니다. 이로써 아브라함가정에서 비로소 야곱을 중심한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 기대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야곱을 중심해서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 기대를 세웠지만, 이미 사탄 세계는 민족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로
메시아를 보낼 수 없습니다. 사탄은 민족을 중심으로 국가를 세웠기 때문에 가정적 기대의 환경에 메시아를 보내면 죽인다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하나되어 세운 메시아를 위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는 장차 예수님을 맞이할 때까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애급에서
고역살이를 하기 위해 야곱의 12자식과 70가족이 애급으로 갑니다. 그런데 에서가정이 야곱가정과 같이 애급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또다시 사탄은
에서가정을 중심으로 악의 역사를 펼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나올 때 바로가 수없이 반대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에서 나와
그토록 소망하던 가나안으로 가면서도 수없이 불평하고 불신합니다.
이상과 같이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는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 기대를 마련하는
기간입니다. 그 시대를 복귀기대 섭리시대 또는 상징적 동시성시대라고 합니다.
(2) 장성적 동시성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2000년
노정은 메시아를 위한 국가적 기대(國家的基臺)를 마련하는 기간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본격적인 복귀섭리시대가 펼쳐지는데 그 시대를 형상적
동시성 시대라고 합니다.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가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복귀기대 섭리시대라면,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복귀를 위한 기대가
닦은 터전 위에 하나님이 하고자하는 섭리를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복귀섭리시대입니다. 그때부터는 동시성이 일정한 형상을 가지고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나므로 형상적 동시성 시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낼 때 사탄이 공격할 것을 알고 미리 엘리야 선지자를 보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믿는 850명의 선지자들과 싸워서 승리했지만 사탄은 굴복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 여왕을
피해서 도망갑니다. 엘리야는 40일 낮과 밤(四十晝夜)을 호렙 산 토굴 속에서 지냅니다.(열왕기상 19장 8절), 그런데 선지자 엘리야를
반대하고 죽이려 하기 때문에 하늘에서 불수레와 불말이 내려와서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합니다.(열왕기하 2장
11절).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메시아를 위한 국가적 기대를 마련하는 기간입니다. 그 시대를 복귀섭리시대 또는 형상적 동시성 시대라고
합니다.
(3) 완성적 동시성
메시아를 보내기 위한 섭리노정에서 사탄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에 앞서 엘리야의 사명을 띤
세례 요한을 보냈지만 그는 사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를 수 있도록 세례 요한을
세웠습니다. 세례 요한은 대제사장 사가랴가정에서 화려하게 태어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가 메시아인 줄 착각할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한 사람을 그렇게 키워서 그가 예수님을 바로 증거하고, 예수님을 모시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한꺼번에 따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들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예수님을 이단자, 민족의 반역자로 몰아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사탄이 그런 전체의 역사를 다
가져갔습니다.
세례 요한이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을 하면서 사탄의 시험에서
승리했지만, 잠시 떠났던 사탄이 또다시 불신하는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 되어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배신하고, 오랫동안 준비했던
이스라엘 민족도 배신하고, 사가랴가정과 요셉가정도 모두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불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에게 많은 은사도 주고 영광도
보여주었습니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고 세례 요한이 고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줍니다(13~15절).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서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16~17절)고 했습니다.
그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늘의 음성까지 들었는데도
돌아가서는 부정해 버립니다. 예수님의 성장 과정과 자기를 비교해보고 ‘어째서 그 분은 메시아이고 나는 엘리야인가’ 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례 요한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해 사탄에게 예수님을 공격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하고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떠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서양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시대부터 시작해서 재림주가 올 때까지 2000년 노정은 메시아를 위한 세계적 기대(世界的基臺)를 마련하는 기간입니다. 따라서
그 시대를 복귀섭리연장시대라고 합니다. 예수님 때에 이루어야 하는데 못 이루었기 때문에 섭리가 연장되었다는 뜻입니다. 동시성으로는 그때가 실체적
동시성 시대입니다. 실체적으로 이루는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뜻이 특정한 국가나 민족에게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모든 노정을 2000년 간 준비해서 마지막
재림주님이 오시면 재림주를 중심해서 인류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가정에서 이삭과 야곱을 거쳐서 메시아가 올 수 있는 기대를
세우는데 그 기간이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2000년입니다. 그 기간은 메시아를 위한 국가적 기대를 마련하는 기간입니다. 적어도 민족과 국가를
형성한 터전 위에 메시아가 와야 그 메시아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개인을 보호하고, 민족이나 국가는 가정을 보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은 국가의 기본 단위이고, 사회의 기본 단위입니다. 국가가 없으면 가정을 보호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가정을 지키고
하나님의 아들딸을 보호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 수없이 기도하고 죽어간 선지자들, 또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죽어간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붙들고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그 생명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한 이유는 하나니의 나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말을 하고
강제로 죄인을 만들어서라도 하나님의 아들딸을 죽입니다. 그 이유는 사탄이 국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국가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소원은 사랑하는 아들딸과 하나님의 가정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를 세우는 것입니다.
2. 동시성 시대의 연수
형성과 그 시대의 각 연수
1) 동시성 시대의 연수 형성 704
모든 존재는 성장기간으 갖고 완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데는 믿음의 중심인물이 있어야 하고 그 중심인물이 세우는 조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또 조건물을 세우고 정성을
드리며 믿음을 세우는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아담·해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믿고 실천하면서 소생·장성·완성 3단계를 거쳐
완성해야 합니다. 아담 자신은 성장기간을 거쳐 완성해야 합니다. 아담 자신은 성장기간을 거쳐 1대를 스스로 완성해야 하는데, 그 1대의
성장기간이 바로 연수가 형성되는 요인입니다.
동시성을 띠고 나타난 각 시대의 연수는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기간입니다. 아담가정에서는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기간이 바로 성장기간으로, 수리적 기간이기도 합니다. 수리적 기간으로는 12수·4수·21수·40수가 있습니다.
수리적 기간은
책임을 다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내적 성상이 있고 내적 형상이 있습니다. 내적 성상은 하나님 마음속에 중심이 되는 지·정·의이고, 내적인
형상은 개념과 관념과 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수리적인 본체이기 때문에 수리적인 원칙을 세워 섭리하십니다.
수리적인 원칙이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기간에도 적용됩니다. 그것이 성장기간인데, 성장기간 속에 12수·4수·21수·40수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12수는 사위기대의 수에다 성장기간을 곱한 수입니다.
개인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해서 마음과 몸이 하나 되어 성상과 형상의
합성체를 이룬 개인적 사위기대로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몸과 마음이 하나 된 개인, 곧 사위기대를 이룬 개인이 소생기·장성기·완성기의
3단계를 거쳐 완성하는 것입니다.
아담·해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해서 마음과 몸이 하나되는 사우기대의 으로 개인이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중심해서 마음과 몸이 하나 되어서 소생기를 거쳐 다음 단계인 장성기로 나아갑니다. 그 다음 장성기에서도 하나님을
중심해서 마음과 몸이 하나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가 되어 완성하는 것입니다.
성장기간은 개인이 완성을 향해 성장해 가는 기간입니다.
완성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다는 것은 마음과 몸이 하나님을 중심해서 하나 된다는 말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절대성(絶對性)위에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성의 본체로 계시는데, 양성과 음성의 통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속에는
양성적으로 참아버지의 절대성 정자가 있고, 음성적으로 참어머니의 절대성 난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실체로소 태어난 아담·해와에게
이 땅에서 절대성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몸이 하나님과 닮아가고, 해와도 마음과 몸이 하나님과 닮아가는데, 하나님을 닮는 근본이 하나님의
심정과 절대성입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성장기간 동안 절대성의 본체인 하나님의 마음과 몸을 닮지 않으면 절대성 정자와 절대성 난자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타락의 순간에는 간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성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소생기·장성기·완성기의 3단계에서 모두 사위기대를 통해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12수는 사위기대의 4수에 3단계 성장기간의
3수를 곱한 수입니다. 그래서 완성을 위해서는 12수가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4수는 사위기대에서 나온 수입니다.
사위기대는
네 개의 위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개인적인 사위기대를 이룬 아담과 해와가 성장기간을 거쳐 완성하면 중심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성상과 형상을 중심하고 절대성을 완수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생식기의 주인이 상대라는 것을 허락 받고,
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신인일체를 이룸으로써 참된 부부가 되어 이상가정을 출발하는 시점이 첫째 날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는 것입니다.
개인이 3단계의 성장기간을 거치는 목적은 남성과 여성이 만나 하나되기
위해서입니다. 남녀가 완성되어 하나 되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 생식기를 통해서 사랑을 정복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이 비로소 사위기대를 이룬 인간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세 번째로 21수는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수에 성장기간의 수를 곱한 수입니다.
아담은 하늘을 상징하고, 해와는 땅을
상징합니다. 하늘은 3수이고, 땅은 4수입니다. 아담과 해와 둘이 만나면 하늘 수와 땅 수가 합쳐져 7수가 됩니다. 하늘과 땅이 합하여진 7수는
천지배합수(天地配合數)로서 이 수보다 더 좋은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행운의 수입니다. 그리고 아담·해와는 성장기간인
소생기와 장성기와 완성기 3단계에서도 하늘 수와 땅 수가 만난 7수로 성장합니다. 하늘 수와 땅 수를 합친 7수에다 3단계의 성장기간을 곱하면
21수가 됩니다. 하늘 수 3수와 땅 수 4수가 합해서 7수가 완성되고, 소생·장성·완성 3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21수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40수는 3급으로 되 있는 3단계 성장기간 9수를 완성하면 실체 하나님과 하나되므로 하나님 수 1과 만나 10수가
되는데 거기에 4위기대의 수 4를 곱한 수입니다.
성장기간은 소생기·장성기·완성기 3단계로 되어 있는데, 하나의 성장기간은 다시 3급으로
나누어집니다. 아담의 마음과 몸이 하나 되는 기간인 소생기의 경우 소생기 소생급·소생기 장성급·소생기 완성급의 3급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장기간
1단계가 각각 3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소생기 3급·장성기 3급·완성기 3급으로서 모두 합치면 9수가 나옵니다.
따라서 아담·해와가
완성한다는 것은 9수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숫자 가운데 제일 큰 수는 9수입니다. 얼핏 보면 10이 9보다 큰 것 같지만, 10은 1과 0이
합해져 나온 수이기 때문에 9수가 가장 큰 수입니다. 특히 숫자 0은 다른 수를 동반할 때 가치가 생기며, 10은 다시 열 하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10수를 우리는 귀일수(歸一數)라 하고, 완전수(完全數)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9수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9수를 완성했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원리에서 밝혔듯이 내적으로 보면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의
통일체로 계십니다. 하나님은 외적으로는 한 분이고, 내적으로 보면 성상과 형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전체로 볼 때는
3수이고, 실체로 볼 때는 1수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1수, 내적으로 볼 때 3수가 하나님 수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완성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기 때문에 완성한 9수와 하나님의 1수가 합쳐져 10수가 됩니다. 10수는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을 모시고 실체적인 가정이상을 출발하는
수입니다. 그때부터는 따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도 됩니다.
사위기대가 10단계를 거쳐서 나오기 때문에 사위기대의
수 4에 10단계의 10을 곱하면 40수가 됩니다. 따라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인간책임분담을 다했다면 40수의 수리적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40수의 수리적 실체가 된다는 말은 21수도, 4수도, 12수도 다 완성하여 승리한 실체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성장기간을 거치면서 12수·4수·21수·40수를 완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타락으로 40수의 수리적 실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탄으로 인해 40수·21수·4수·21수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사탄에게 잃어버린 수를 찾아가는 것이 복귀섭리사의
주류(主流)입니다.
2) 동시성 시대의 각 연수 709
하나님은 동시성 시대의 역사를 어림짐작으로 대충 형성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원칙을 따라 형성해 오셨습니다.
동시성이라는 말은 지난 시대의 역사적 사연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내용적으로 분류하면 상징적 동시성이거나 형상적 동시성이거나 실체적 동시성이 되지만, 외면적으로는 모두가 수리적으로 나타납니다. 수리적
동시성입니다.
아담부터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아들 요셉을 만날 때까지의 기간을 상징적 동시성 시대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의 기간을 형상적 동시성 시대라고 합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부터 재림주님이 오실
때까지를 실체적 동시성 시대라고 합니다.
(1) 상징적 동시성 섭리시대 710
창조의 단계는 6단계입니다. 하나님은
6일이라는 기간을 거쳐 유형세계를 창조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24시간을 단위로 한 하루가 아니고, 창조의 일정한 기간을 하루라고 합니다.
여섯 단계를 거쳐서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창조 6단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다시 복귀하려면 잃어버린 6단계를 통해서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아담부터 노아까지 1단계, 노아부터 아브라함·이삭·야곱까지 2단계, 아브라함부터 야곱의 장자권 복귀까지 3단계, 야곱의
장자권 복귀부터 야곱이 하란으로 피신하기까지 4단계, 야곱이 하란으로 피신할 대부터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가기까지 5단계,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간 이후부터 야곱이 아들 요셉을 만날 때까지 6단계를 찾아서 복귀해야 합니다.
아담은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특히
믿음의 기대에는 반드시 믿음을 세우는 기간이 있습니다. 소생기·장성기·완성기의 3단계 성장기간이 아담이 세워야 하는 믿음의 기간입니다. 그
기간이 12수·4수·21수·40수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하여 그 수를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후 10대 만에 노아를
부르셨습니다. 타락한 아담을 중심해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타락하지 않은 아담을 중심해서 출발한다는 기준에서 노아를 불렀기 때문에 10대를
거칩니다.
10대를 지나는 이유는 10수가 완전수이고 귀일수이기 때문입니다. 아담부터 10대를 거쳐서 노아 때에는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입장에서 다시 출발하는 노정이 남아 있으므로 10수를 중심한 섭리역사가 전개됩니다.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를 거치다 보니 1600년이
지났습니다.
1600년이 지난 이유는 원래 아담가정을 중심한 후손들의 나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930년을 살았고, 에녹은
960년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오래 살았으므로 10대를 거치다 보면 약 9000년이 지나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도 메시아가 올 수
없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었습니다. 탕감의 역사가 다 끝난 다음부터는 인간의 수명이 길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지연하는 섭리를 하실 수 없으므로 10대를 지나 1600년을 찾아 섭리를 하게 됩니다. 1600년은 사탄에게 잃어버린 40수를 입체적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40수 곱하기 4위기대는 160입니다. 하나님은 1대를 160년으로 계산해서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를 거쳐서 1600년을 찾아오는
섭리를 하신 것입니다. 복귀섭리역사에서 16수가 아주 중요한 노정이 됩니다. 그것은 아담·해와가 16세에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아담이 잃어버린 12수를 탕감하기 때문에 방주를 120년 간 지었습니다. 90년도 있고, 70년도 있고, 30년도 있는데 왜 하필 방주를
120년 동안 지었느냐? 그 이유는 아담가정에서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할 12수를 탕감복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다음에 40일간의
홍수심판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7장 12절에 사십 주야에 걸쳐 비가 쏟아졌다고 했습니다. 40일 홍수심판은 4수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것입니다.
40일 홍수심판이 끝난 다음에 비둘기를 7일 간격으로 세 번 내보냈습니다. 그것은 하늘 수 3과 땅 수 4를 합한 7수에
3단계의 성장기간을 곱한 21수를 탕감복귀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둘기를 내보내기 전까지 방주가 150일간 떠다니다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나서 까마귀를 내보내고, 그 후에 비둘기를 7일 간격을 3차에 걸쳐 내보냅니다. 그리고 방주의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40일이 걸립니다. 그렇게 해서 노아는 믿음의 기대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함의 실수로 인해 까마귀로 상징되는 사탄이 침범했기
때문에 실체기대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노아가정에 실체기대가 세워지지 못해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 또 10대를 거칩니다.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10대를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는 10대 400년이 걸립니다. 400년은 40수를 10배한 것입니다. 40일은 아기가 태어나 눈도 잘 가누지 못할 만큼 아주 짧은
기간으로, 40일로 1대를 탕감할 수 없고 적어도 40년이 넘어야 1대를 넘어갑니다. 그래서 1대를 40년으로 하여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
10대이니 400년이 된 것입니다.
아담·노아·아브라함 3시대를 한꺼번에 탕감복귀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비둘기·양·암소 3제물을
헌제(獻祭)하게 됩니다. 아담가정과 노아가정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서 아브라함가정에서 3제물을 놓고 탕감복귀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습니다. 소생기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쪼개지 않아서 장성기에 완성기까지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찾아야 할 믿음의 기대 12수·4수·21수·40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이삭·야곱을 거치는 종적인
3대를 횡적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종으로 된 횡적 탕감복귀’라고 합니다. 아담·노아·아브라함이 다같이 종적으로 찾아야 할
것을 아브라함이 실수하여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횡적으로 전개하면서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난
때부터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찾아올 때까지의 기간이 120년인데 이 기간이 120수를 탕감복귀하는 기간입니다.
장자권을 빼앗긴 데
이어 아버지로부터 축복까지 빼앗긴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숨겨놓고 형 에서의 화가 풀리기를 바랐는데, 안
풀리니까 외삼촌이 있는 하란 땅에서 피신을 보냈습니다. 야곱의 장자권 복귀부터 야곱이 하란으로 피신하기까지의 기간이 40년, 40수입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21년 간 고역을 살면서 모든 것을 탕감복귀합니다. 그것이 21수입니다. 첫 번째 7년 동안 종살이를 해서 부인을
얻습니다. 애초에 야곱이 라반의 둘째딸을 원해서 라반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는데 첫째딸을 줘서 또 7년 종살이를 하고 둘째딸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7년 동안 더 종살이를 해서 가족이 살 수 있을 만큼 재산을 갖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7년, 7년, 7년 모두 21년 동안 외삼촌 집에
머물며 가정과 재물 그리고 노비를 복귀하여 고향인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동안 외삼촌 집에서 모시던
우상을 가져와 3일 노정을 지나 땅에 묻습니다. 그것은 사탄을 괴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상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또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고 그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것은 사탄을 굴복시켰다는 뜻이며,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될 메시아를
맞이할 선민임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하란 땅에서 21년 만에 가나안으로 돌아가 장자인 에서와 하나가 됩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서 엎드려
일곱 번씩 절을 하면서 형님을 보니 하나님을 본 것 같다고 합니다. 21년 동안 원수와 같이 갈라졌다가 동생이 가진 많은 재산을 형님에게 갖다
바치고 비로소 형님과 동생이 하나 되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21수를 거쳐 하나됨으로써 비로소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 형제가 타락으로 갈라진
역사를 탕감복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가서 애급으로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만나러 가기까지 40년 역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애급에서는 바로가 꿈을 꾸고서 그 꿈을 해몽할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요셉이 감옥에서 꿈을 해몽해준 덕분에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때
요셉의 나이가 30세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30세가 되면 유대 나라의 왕으로 세워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동시성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된 후 가나안에 심한 가뭄이 들어서 요셉의 형님들이 애급으로 곡식을 구하러 갔다가 요셉을 만나 결국 요셉이
마련해 준 곡식을 얻습니다. 그리고 땅을 분배해 주어서 형님들이 애급 땅에 머물게 됩니다.
요셉도 재물을 가지고 찾아오는 형님들에게
축복해주고 형님들을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움으로써 아브라함가정에서 야곱을 중심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가정을 중심한
메시아기대가 세워졌다고 해서 거기에 바로 메시아를 보낼 수가 없습니다. 당시 사탄세계는 민족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족을 이루고 국가를
가지고 있는 사탄이 메시아를 쉽게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다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인한 400년 애급 고역기간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세웠지만, 가정적인 기대밖에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복귀기대 섭리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복귀하기
위한 기대를 마련한 것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무조건 짓는 것이 아니라 먼저 터를 닦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복귀하기 위한 기대를
마련한 것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무조건 짓는 것이 아니라 먼저 터를 닦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려고 하는데, 최종적으로
아브라함·이삭·야곱 3대에 걸쳐 터를 닦았다는 말입니다.
아담에서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에 이르는 시대를 상징적 동시성 섭리시대라고 합니다.
실제로 어떤 형상을 띠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동시성을 띠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2) 형상적 동시성 섭리시대
715
애급 고역시대
원래는 아담·노아·아브라함의 3대를 거쳐서 상징적 동시성 섭리시대를 종결해야 하는데 아브라함이 헌제에
실수함으로써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종(縱)으로 된 탕감복귀기대를 횡(橫)으로 찾아 세워야 했습니다. 결국에는 야곱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워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마련합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야곱과 에서가 하나 되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움으로써 마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애급으로 갈 때 자기의 열두 아들과 70가족만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에서와 에서의 가족도 데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가족만
갔기 때문에 사탄이 침범할 여지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중심한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기대가 다시 출발되어 예수님이 올 때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이 세웠던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는 그대로 유용합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헌제에 실수함으로써 치러야 했던 이삭 헌제와 애급
고역 400년 기간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창세기 15장 13절), 결국은 아브라함가정에서 그 노정을 다시 밟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종적인
기대를 횡적으로 확대해서 120년·40년·21년·40년을 찾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까지 400년 동안을 애급 고역시대라고
합니다. 애급 고역시대는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사탄에게 내어준 400년의 기대를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하여 사탄을 재분립(再分立)하는 시대로서
상징적 동시성 시대 중,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600년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사사시대 716
아브라함을 중심한 애급 고역시대 400년이 지난 후에 모세를 중심해서 그
120수·40수·21수·40수를 다시 찾아 세웁니다.
먼저 모세는 120년 만에 가나안으로 갈 준비를 끝냅니다. 1차 40년은 바로
궁중에서, 2차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3차 40년은 시내 광야에서, 모두 120년을 지낸 것입니다(신명기 34장 7절).
모세는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40일 동안 금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두 석판을 받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40일 동안(출애굽기 24장 18절)
시내 산으로 간 사이에 이스라엘 민족은 아론을 중심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모세가 크게 노하여
하나님이 주신 석판을 산 아래에 던져서 석판이 깨져버렸습니다(출애굽기 32장 19절).
모세는 다시 두 번째 석판을 하나님께
받습니다(출애굽기 34장 1~28절). 원래는 모세가 1차 가나안 복귀노정은 21일이면 가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만 되었으면 21일
만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3차 40일 노정이 끝난 후 가데스 바네아에 가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준 것이 반석을 쳐서
샘물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불신하여 아우성을 치는 것을 보고 모세가 화가 나서 한 번 쳐야 할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민수기
20장 11~12절). 두 번 쳤다는 것은 혈기를 부렸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속성인 혈기로 반석을 쳤으므로 하나님이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반석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원래는 아담이 반석이 되어 샘물을 먹여야 하는데,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샘물을 내어 먹일 수
없는, 죽은 아담이 되어버렸습니다. 모세는 반석을 한 번 쳐서 죽은 아담을 산 아담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타락해서 반석 샘물을 내어 먹일 수
없는 아담이 반석 샘물을 내어 먹일 수 있는 산 아담으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데 또 쳤다는 말은 죽은 아담을
한 번 쳐서 살려놓았다가 다시 사탄을 불러들여 죽은 아담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 즉 부활한 아담으로서의
예수님을 또 친 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 앞에 사탄이 침범할 조건이 되었습니다. 반석을 두 번 친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장차 예수님에게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 것입니다.
모세는 120세에 모압 땅에서 요단강을 앞에 놓고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신명기 3장 25절)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명기 3장 27절)고 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수없이 많은 불신이 벌어졌던 것은 에서와 야곱이 하나 되어 사탄을 분립해야 했는데, 야곱이 에서와 함께
애급에 가지 못하고 자기 가족만 애급으로 데려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탄이 거기에 남아서 역사 속에서 그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21일 노정이 있습니다. 원래는 이스라엘 민족이 말씀을 믿었으면 라암셋에서 블레셋으로 통하는 곧은길을 통해 21일이면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해서 21일 노정을 못 가고 2차 노정은 21개월로 연장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21일이면 가도록 되어 있는 길을 21개월 동안이나 가야 하는 복잡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시내산에 도착한 모세는
불신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해서 시내산에 들어가 40일 금식을 하고 두 석판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여전히 불신했습니다.
아론을 중심하고 우상인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을 본 모세가 대노하여 석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버리고
금송아지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서 백성에게 먹였습니다.
그후 모세는 2차 40일 금식을 하고 시내산에서 다시 두 석판을 받아
가지고 내려와 회개하면서 기다린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됨으로써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위한 메시아 기대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출애급한
이스라엘 민족은 시내산에서 법궤를 중심하고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짓게된 것입니다.
시내 광야의 출발은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중심하고
이루어집니다.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은 가나안에 가서 실체 메시아를 만날 때까지 절대 필요한 메시아의 기대입니다.
그런데 성막을 중심하고
시내산을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은 먹을 것 때문에 또다시 불신했기 때문에 메시아 기대인 40수에 사탄이 침범하고 맙니다.
민수기 13장과
14장을 보면, 모세는 민족 전체를 대표하여 12지파에서 지휘관 한 사람씩을 뽑아 12명을 40일 가나안 땅으로 정탐을 보냈습니다.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10지파장은 불신의 보고를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지파장만 믿음의 보고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열두 지파가 하나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시내 광야에서 40년 간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1세들은 다 죽고 2세가 태어나 40세가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40년을 광야에서 유리(遊離)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 되지 못함으로써 가중된 탕감조건을 치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0일 정탐에 실패하여 40일을 40년으로 가중된 탕감조건을 치르고 나서 모세와 그 1세들이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하여 반석을 중심하고 3차 노정을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것이 죄가 되어 모세를 중심한 1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중심하고
2세를 데리고 가나안에 입성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돌아간 때부터 사울 왕이 즉위할 때까지를 사사시대(士師時代)라고
합니다. 사사시대는 상징적 동시성시대 중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통일왕국시대 719
이스라엘 민족은 사사시대 400년을 거쳐 처음으로 사울을 왕위에 세우게
됩니다. 열왕기상 6장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급 땅에서 나온지 사백 팔십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년 시브월 곧 이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울 왕의 재위 40년과 다윗 왕의 재위 40년을 지난 후 솔로몬
왕 4년이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급 땅에서 나온 지 480년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이후 사울 왕이
즉위할 때까지가 약 400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한 사울 역시 아브라함 대와 같이 모세 때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수리적인 탕감기간인 120년(모세의 궁중생활 40년, 미디안 광야 40년, 시내 광야 40년), 40일(금식기간),
21일(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40년(제2차 민족적 가나안복귀 광야기간)에 걸쳐 성전을 지음으로써 그를 중심하고 횡적으로 탕감복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도 역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사무엘상 15장 11~23절)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종으로 된 횡적 탕감기간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왕을 요구하사(사무엘상 8장 10절)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주고(사무엘상 10장 1절)길갈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았습니다(사무엘상 11절 14~15절). 하나님은 사울 왕을 통해서 통일왕국시대를 세워 하나님의 영원한 성전 이상을 세우려
했습니다.
사울 왕은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믿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 자기 판단대로 행동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와 하나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하는데 그의 말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사울 왕이 아말렉 족속을 칠 때에도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그들의 모든 소유를 다 진멸하라고 명하지만, 사울 왕은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을 진멸하고 좋은 것은 남겨두고는 사무엘에게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사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20~21절)하고 변명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무엘이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잃어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22~23절)라고 말합니다. 이후로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의 충고를 듣지
않고 계속 엇나가 하나님의 뜻과 멀어집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이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자 이새의 아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사울
왕의 뒤를 잇게 합니다.(사무엘상 16장 11~13절).
이스라엘 다윗 왕은 대단히 용맹스럽고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40년 간 왕 위에 올라 잘 다스렸지만 나중에 타락하고 맙니다.
사무엘하 11장을 보면, 당시 다윗의 백성은 아람과 암몬 자손과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 왕의 부하 중에 우리아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적진에 나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잠을 자고 나서
아침에 루각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 보고 목욕하는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다윗이 성적인 충동을 일으켜서 부하를 보고 그 여인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 여인은 다윗의 군인 중 한 사람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국가가 전쟁을 하고 있는 판국에 다윗 왕은 부하의 아내를 데려다가
겁탈했습니다. 그 후에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기별을 다윗 왕에게 전했습니다(2~5절).
그러자 다윗은 우리아를 불러들여 집에 내려가서 자라고
합니다. 자기의 죄를 은폐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지금 전쟁 중에 부하들이 바깥 들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어찌 집에 내려고 먹고
마시고 처와 같이 자겠느냐며 왕궁 문에서 부하들과 함께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에도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왕은
편지를 써서 심복 장군 요압에게 보냅니다. 편지의 내용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서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6~15절).
다윗은 우리아가 죽자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와 아내로 삼았습니다. 밧세바가 그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다윗이
행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했습니다(27절).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을 보내서 잘못을 지적하고 밧세바가 낳은 그의 아들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사무엘하 12장 1~14절). 이에 다윗이 금식하고 기도했으나 아이는 죽었습니다. 밧세바가 그 후에 낳은 아기가
솔로몬입니다.
다윗의 또 다른 아들 암논은 자기 누이를 겁탈합니다(사무엘하 13장 7~14절). 2년 후에 암논은 동생에게
살해됩니다(사무엘하 13장 29절). 가족이 엉망진창 되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 왕을 중심해서 성전 건축 이상(聖殿建築理想)을 실현할 수 없어서
그 이상이 솔로몬 왕으로 넘어갑니다.
솔로몬 왕은 대단히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상 3장 16절 이하를 보면, 솔로몬 왕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말래줍니다.
두 여인이 솔로몬에게 와서 아이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가 친어머니라고 싸웁니다. 아무리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도
친어머니를 가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솔로몬이 부하에게 아기를 둘로 쪼개서 나눠주겠으니 칼을 가져 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진짜
어머니는 펄쩍 뛰면서 ‘아기를 죽이면 안 된다.’고 하는데 가짜 어머니는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기의 친어머니를 찾아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솔로몬 왕의 지혜로움을 기록한 것이 성경의 잠언입니다. 솔로몬 왕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불렀던 노래가 약 1050곡이나
됩니다. 그것이 잠언·전도서·아가입니다.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지은 것입니다.
솔로몬 왕도 나중에 이방 여인을 궁중에 들이면서 이방의
신상(神像)을 모시게 됩니다. 솔로몬 왕이 음란해져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인 성전 건축 이상에 사탄이 침범합니다. 솔로몬 왕에게는 정식 부인이
700명, 첩이 300명이 있었습니다. 1000명이 넘는 여자를 데리고 산 것입니다. 그처럼 음란을 조장한 것이 옛날 궁에 있는
왕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3차에 걸쳐서 믿음의 기대를 세웠던 120년을 탕감복귀하는 기간을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라고 합니다. 그 시대는 상징적 동시성 시대의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다음 야곱이 에서에게 장자권을 빼앗을 때까지
120년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남북왕조 분립시대 723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시대가
사울 왕·다윗 왕·솔로몬 왕 3대 만에 끝이 나고 솔로몬 왕 이후에 이스라엘은 남조 유다와 북조 이스라엘로 갈라집니다. 북조 이스라엘은 열
지파, 남조 유다는 두 지파로 갈라져 가인가 아벨 편을 형성합니다.
성전 건축 이상을 이루려 했던 모세가 석판(말씀)을 받기 위해 정성드린
40일 금식기간을 횡적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 사울 왕·다윗 왕·솔로몬 왕으로 이어지는 통일왕국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세 왕조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기 때문에 통일왕국을 국가적인 단위로 분립하여 가인과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는 400년 기간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때가 남북왕조 분립시대(南北王朝分立時代)입니다.
남북왕조 분립시대는 상징적 동시성 시대 중 야곱이 에서로부터 떡과 팥죽으로
장자권을 빼앗았다는 조건을 세운 뒤 다시 이삭의 축복을 받고 하란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기간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유대 민족 바빌론 포로 및 귀환시대
북조 이스라엘의 왕이 19명이었는데 모두가 마음이 강퍅하고 악하여 궁전에서 수없이
싸웠습니다. 남조 유다는 20명의 왕이 통치하였는데 그들은 대부분 착하고 하나님을 잘 받들었습니다.
그 때 남조 유다에서 북조 이스라엘을
회개시키려고 4대 선지자를 보냅니다. 그 다음에 12소선지자를 보내고, 특별선지자 엘리야까지 보냅니다. 그 때마다 북조 이스라엘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결과 북조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나중에는 남조 유다 왕들도 북조 이스라엘 왕들의
악습을 이어받아서 나쁜 짓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조 유다 왕도 그 백성과 함께 바빌론의 포로가 됩니다(열왕기하 25장 1~25절,
역대하 36장 17~20절).
그들은 바빌론에서 70년 동안 포로로 있다가(역대하 36장 21절) 바빌론이 바사국(페르시아)에게 패망한
다음 바사 왕 고레스(키루스 2세)의 조서에 의해 해방되었습니다(역대하 36장 22~23절, 에스라 1장 1~4절).
그 후 유대 민족은
3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1차로 스룹 바벨이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2차로 에스라가 귀환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영적으로
복귀시키고, 3차로 느헤미야가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했습니다.
그 후 선지자 말라기를 중심으로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합니다. 바빌론
치하에서 해방되어 말라기를 맞기까지 약 140년이 걸렸습니다. 포로 생활을 시작한 지 210년 만의 일입니다. 그 시대를 유대 민족 바빌론 포로
및 귀환시대라고 합니다.
모세가 1차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가나안 복귀를 마치려고 했던 21일 기간을 성전 건축 이상을 이룸으로써
탕감복귀해야 하는 것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을 불신함으로써 뜻이 이루지 못했습니다. 종적인 그 기간을 다시 횡적으로 찾아 세운
것이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입니다.
그 시대는 상징적 동시성 시대 중 야곱이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인정하는 축복을 받고 나서
그를 죽이려고 하는 에서를 피하여 사탄 편 인물인 라반의 집으로 가서, 레아를 맞이하기 위한 7년, 라헬을 맞이하기 위한 7년, 그리고 재물을
취하여 가나안으로 돌아가기까지 7년, 모두 21년 기간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 725
구약시대 마지막에 말라기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당시 왕들이 모두 포로로 잡혀갔다 왔으니 궁전도 못
쓰게 되고, 성전도 다 허물어졌습니다. 유대 민족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 말라기의 예언에 따라 제2성전을 세워서 메시아 강림을 준비합니다. 그
시대를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라고 합니다.
다윗은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 제2차 복귀노정에서 허비한 광야 40년 기간을 횡적으로
탕감복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을 불신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종으로 된 그 기간을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찾아 세운
기간이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 400년입니다.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는 상징적 동시성의 시대 중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한 다음 요셉을
찾아 애급으로 들어가기까지의 40년 간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에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웁니다.
애급 고역시대, 사사시대, 통일왕국시대 120년, 남북왕조 분립시대 400년, 이스라엘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
메시아 강림준비시대 400년을 찾아 세워서 마침내 메시아를 맞이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성전도 마련하고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시면 그를 지도자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 그 터전에 예수님이 오시게 됩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동시성 시대를
형상적 동시성 섭리시대라고 합니다. 형상적 동시성 시대는 상징적 동시성 시대를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3) 실체적 동시성
섭리시대 726
로마제국 박해시대
예수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노정을 완성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함으로써 이루지 못한 믿음의 기대를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으로 치러야 했던 애급 고역
400년의 사탄분립기간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이 불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12제자와 70문도가 로마에
가서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야곱의 12자녀와 70가족이 애급에 가서 애급 고역을 겪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12제자와 70문도가 로마제국 박해시대입니다. 로마제국 박해시대는 형상적 동시성 시대의 애급 고역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
로마제국 박해시대 400년을 거쳐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 그리스토교 주교·신학자)이 나옵니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을 쓰고 그 기대 위해 ‘신약성서’를 다시 세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인데도 성경에 생일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로인해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없어졌습니다. 얼마나 천대를
받았으면 그랬겠습니까? 돌아가시고 나서 40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모시는 안식일을 정했습니다.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는 안식일은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에 앞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Creat, 272-337.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392)로 정합니다. 그런 기반 위에서 어거스틴이 기독교 신앙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거기에서
가톨릭(기독교)이 출발합니다.
나중에 그 기반이 무너지니까 신앙인들이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갔습니다. 영국에서도 구교와 신교가 싸움을
합니다. 결국에는 영국의 신교도(청교도)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대서양을 건너갑니다. 그들이 미국에 가서 기독교를 건국이념으로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5월에 유럽을 출발해서 12월에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항해 중에 병들고 배가 고파서, 혹은 추위에
못 이겨 죽었습니다.
그런데 청교도들은 가지고 간 곡식의 씨앗을 절대 먹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죽어가는 데도 미래를 위해서 씨를
남겨놓았습니다. 그들은 추운데도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을 먼저 짓고, 미래 세계의 인류를 지도할 인재 양성을 위해 학교를 세운 후에 자기 집을
지었습니다.
그것을 본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비록 쫓겨나온 신세였지만 그 삶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민족에게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대가 다 깨져버렸습니다. 사탄이 들어가서 교회도 무너져 버리고, 학교 이상도 가정 이상도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준법정신밖에 없습니다.
그런 미국의 역사가 있기 전에 로마시대를 거쳐서 어거스틴이 나옵니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을 쓰고 신약성서를 정리해서 신학을 바로 세웠습니다.
서기 392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후 서기 800년
카알(카롤루스) 대제(Charles the Great, 742경~814.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즉위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 사사에
해당하는 교구장에 의해 국가를 지도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를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라고 합니다.
그 시대는 형상적 동시성 시대의
사사시대 400년을 실체적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기독왕국시대 728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 400년이 지난 다음, 역사 이래 처음으로 교황의 승인을 받은 카알 대제가 나옵니다. 서기 800년 교황 레오 3세(Leo III,
?~816. 교황)가 카알 대제에게 금관을 씌워주고 로마제국 황제라는 호칭을 수여합니다. 그 때부터 동프랑크 국왕이 이탈리아 왕을 겸하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카알 대제가 즉위한 때로부터 나중에 그 왕통이 끊어지고 선거왕제가 되어 919년 하인리히 1세(Heinrichi I,
876경~936. 작센왕조를 창시한 독일 왕)가 독일 왕위에 오를 때까지 120년 동안을 기독왕국시대라고 합니다.
기독왕국시대는 형상적
동시성 시대의 사울 왕을 중심으로 처음으로 왕국을 세운 뒤, 다윗 왕을 거쳐 솔로몬 왕까지 120년에 이르는 통일왕국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동서왕조 분립시대 729
기독왕국시대가 지나고 서기 1309년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옮길 때까지 400년 동안 기독왕국은 동서왕조로 분립되었습니다.
교황 카알 대제에게는 손자가 셋이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기독왕국은 동 프랑크와 서 프랑크, 이탈리아로 각각 갈라집니다. 이탈리아는 사실상 동 프랑크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벨형인 동프랑크와 가인형인 서프랑크로 양분된 셈입니다. 그 시대를 동서왕조 분립시대라고 합니다.
동서왕조 분립시대는 형상적 동시성 시대
중 사울 왕에 의해 시작된 통일왕국시대가 사울 왕과 다윗 왕을 거친 다음 솔로몬 왕에 이르러 3대 만에 남북왕조로 분립되었던 남북왕조 분립시대
400년을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729
카알 대제에 의해 시작된 기독왕국시대는 3대에
마감하고, 동서왕조 분립시대를 거쳐 서기 1309년 남프랑크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긴 뒤 교황들이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온
후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 기간이 약 210년입니다. 그 시대를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라고 합니다.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는 형상적 동시성 시대 중 통일왕국시대에서 가인 입장인 북조 이스라엘과 아벨 입장인 남조유다로 분립되는 시대를 거쳐 유대 민족이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21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730
교황이 포로에서 풀려나 로마로 돌아와 보니 성전도 허물어지고 신앙도 없어져 기독교인들이 다 흩어졌습니다. 메시아가 다시 올 때가
되었는데, 그런 신앙을 가지고는 메시아를 맞을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교황이나 성직자들만 성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Leo X, 1475~1521. 교황)가 베드로 성당을 지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청은
많은 비난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의 신학대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의 성직자·종교개혁자)가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했습니다. 루터의 박박문이 유럽에 불길처럼 번져나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루터를 중심으로 개신교회가 세워집니다. 또한 라틴어로 쓰여져 일부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었던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신앙할 수 있고, 누구나 성서를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만민이 성서를 공부할 수 있도록
훈련된 터전에서 재림주가 오셔야 합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나와서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를 선언하고 예수님이 오셨듯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를 출발하고 난 400년 이후에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가 바로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입니다.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는 형상적 동시성 시대의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 400년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예수님부터
재림주님까지의 동시성 시대를 실체적 동시성 섭리시대라고 합니다. 실체적 동시성 시대는 형상적 동시성 시대를 탕감복귀하는 시대입니다.
애급
고역시대 400년과 로마 박해시대 400년, 사사시대 400년과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 400년, 통일왕국시대 120년과 기독왕국시대 120년,
남북왕조 분립시대 400년과 동서왕조 분립시대 400년,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과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 400년과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400년은 모두 수리적으로 동시성을 이룹니다.
그것은 아담가정에서 믿음의 기대를 세워서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기간을 그대로 탕감복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시성은 수리적으로 나타납니다. 또 믿음의 중심인물로 본 동시성도 같습니다.
조건물을 놓고도 동시성이고, 조건물의 내용도 같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아담 이후의 잘못된 역사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해 온 살아 계신 하나님의
발자취입니다.
인간은 번번이 책임을 못하고 실수했기 때문에 섭리가 연장되고 또다시 연장되어 왔지만 그 내용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만
가정시대·국가시대·세계시대로 범위가 넓어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동시성인데, 그것이 가정시대에는 상징적으로 나타났고, 국가시대에는
형상적으로 나타났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실체적인 국가 형태를 갖추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실체를
잃어버렸으므로 다시 실체적 동시성 시대를 세계적으로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림주가 오셔서 이 모든 역사를 완결지어야
합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거쳐서 실패했던 것을 다시 재림주님을 통해서 종결지어야 하는 것이 인류역사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재림주 한 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재림주님이 인류의 희망입니다.
모든 사람, 모든 종교인들이 어떤 입장이든지 마지막 희망은 오시는
재림주님에게 있습니다. 오시는 그분을 통해서 모든 것을 재편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해서
본연의 타락하지 않은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구약 역사를 버려야 하고, 유대 민족사를 버려야 하고,
오늘날 서양사를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서양사, 유대 민족사, 구약 역사는 그대로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아담·해와를 통해 이루려던 창조이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역사를 다시 찾아오시는 섭리가 6000년 걸렸습니다.
3.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
연장시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이고, 아브라함 이전 시대는 복귀기대 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입니다.
복귀섭리시대에 예수님이 오셔서 복귀섭리를 완성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섭리가 다시 연장된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재림주까지의
복귀섭리 연장시대(復歸攝理延長時代)입니다.
1) 복귀섭리시대 732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 연장시대를 살펴보면, 아브라함 이후 애급 고역시대(400년)의 중심인물은 모세이고, 조건물은 성막입니다. 모세 이후 사울 왕 전까지
사사시대(400년)는 중심인물이 사사가 되고, 조건물은 성막이 됩니다.
사울 왕·다윗 왕·솔로몬 왕 때인 통일왕국시대(120년)의
중심인물은 예언자·제사장·국왕이고, 조건물은 성전입니다. 그 중심인물 가운데 가장 높은 신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예언자이고, 그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있고, 그 아래에 국가의 통치자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남북왕조 분립시대(400년)에는
예언자·제사장·국왕이 중심인물이 되고, 성전이 조건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심인물들이 잘못해서 전부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210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심인물도 없고, 조건물도 없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중심해서 해방되어 나와 보니, 이미 성전은
다 무너지고 암흑천지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제2성전을 개축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까지의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400년)에는 말라기
선지자가 중심인물이 됩니다.
2) 복귀섭리 연장시대 733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님부터 어거스틴
이전까지 로마제국 박해시대(400년)에는 중심인물이 어거스틴이고, 조건물이 초대교회입니다. 초대교회시대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 다음 어거스틴부터 카알 대제 이전까지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400년)의 중심인물은 교구장이 되고, 조건물은 천주교가
됩니다.
카알 대제부터 120년 동안 기독왕국시대에는 중심인물이 수도사·교황·국왕이 되며, 조건물은 천주교가 됩니다.
기독왕국시대에
이어 동서왕조 분립시대(400년)의 중심인물은 수도사·교황·국왕이고, 조건물은 천주교가 됩니다. 천주교가 중심인물을 보필했습니다.
결국
교황들이 남프랑스의 아비뇽에 포로로 잡혀가는 교황포로 및 귀환시대(210년)에는 중심인물도 없고, 조건물도 없습니다. 형상적 동시성 시대인
남북왕조에 이어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처럼 성전이 폐허가 되고 전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부터 재림주까지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400년)의 중심인물은 마르틴 루터가 되고, 조건물은 신교(新敎)가 됩니다. 이때부터 장로교·성결교·감리교 등 개신교회가 생겨서
지구상에 어느 나라든지 교회가 들어감으로써 누구나 성경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재림주가 오실 수 있도록 메시아 재강림을 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 연장시대의 비교
(1) 애급 고역시대와 로마제국 박해시대
734
애급 고역시대 400년은 로마제국 박해시대 400년과 동시성으로 나타납니다.
애급 고역시대는, ① 아브라함이 헌제 실수로
사탄이 침범했습니다. ② 그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 야곱의 12자식과 70가족이 400년 동안 애급에서 고역을 치르게 됩니다. 애급 고역
400년은 믿음을 세우는 형벌기간입니다. ③ 제1 이스라엘은 할례와 희생,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면서 사탄분립 생활을 하게 됩니다. ④ 모세의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바로를 굴복시키며 출애급을 하게 되고, ⑤ 애급 고역시대와 시대만 달랐지, 그 내용은 고스란히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
유대 민족과 예수님이 하나되어 산 제사(祭祀)를 드려야 하는데,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처럼
사탄이 침범했습니다. Ⓑ 이를 탕감복귀하기 위해 예수님의 12제자와 70문도는 야곱의 12자식과 70가족이 애급에서 고역을 살았듯이 로마에서
박해를 받게 됩니다. 로마 박해시대 400년은 믿음을 세우는 형벌기간입니다. Ⓒ 제2 이스라엘은 세레와 순교와 안식일과 성만찬으로 사탄분립
생활을 하게 됩니다. Ⓓ 서기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영적 기사(奇事)와 권능(權能)에 의해 기독교를 승인하며, 서기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고, Ⓔ 로마 박해 후 복음과 신약 중심으로 성전을 이루어 초대교회를 형성하고 메시아 재강림을
준비합니다.
로마 박해시대 400년 동안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박해를 받습니다. 그 때는 성도라는 말조차 못 썼는데,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이르러 기독교가 승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애급 고역시대에는 모세가 3대 기적과 10가지의 재앙으로
바로를 굴복시키고 출애급을 이루었듯이, 로마 박해시대에도 영적 기사와 권능으로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승인한 것은 시대만
다를 뿐 동시성을 이룹니다.
당시 로마는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망해가는 로마의 대권을 놓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막센티우스
황제(Marcus Aurelius Valerius Maxentius, ?~312. 로마 황제)가 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서 그의 부하들이 게양해 놓은 깃발을 내리고 십자가를 걸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박해하다가 예수님의 은사에 의해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기독교를 승인합니다. 그것이 영적 기사와 권능입니다. 애급에서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주지 않자, 모세가
3가지 권능과 10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굴복시켰습니다.
그 다음에 애급 고역 후에 재앙으로 바로를 굴복시켰습니다.
그 다음에 애급
고역 후에 십계명을 통해서 구약이 중심이 되고, 성막을 이루어 메시아를 모실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로마 박해 후에 복음을 통해서
신약을 중심한 성전이상(聖殿理想)을 이루게 됩니다. 그로 인해 초대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재림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2) 사사시대와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 736
사사시대 400년과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
400년도 시대만 달라졌지 내용은 유사한 동시성 역사로 나타납니다.
사사시대에는, ① 사사(士師)의 사명이 예언자·제사장·국왕에게 있었고,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에는, Ⓐ 교구장의 사명이 수도원·교황·국왕에게 있었습니다.
또 사사시대에는, ②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입성한 후
각 사사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했듯이,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에는, Ⓑ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게르만 민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합니다.
사사시대에는, ③ 새 땅에서 사사를 준비하고 새로운 선민(選民)을 형성하여 유대교 봉건사회의 기틀을 형성하였는데,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에는, Ⓒ 서구의 새 땅에 게르만 민족을 새로운 선민으로 세워 기독교 봉건사회의 기틀을 형성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사시대에는,
④ 이스라엘 민족이 사사의 지도에 따라 성막의 뜻을 받들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으로서 가나안 민족을 멸망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악습을 이어받아 우상을 섬김으로써 신앙에 큰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에는, Ⓓ 기독교 신도가
교구장의 지도에 따라 성전을 받들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도들이 게르만 민족의 잡교(雜敎)에 영향을 받아 신앙에 큰 혼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사시대와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는 시대만 달리했지 내용상으로는 거의 반복되어 나타나는 동시성 시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3) 통일왕국시대와 기독왕국시대 737
통일왕국시대 120년과 기독왕국시대 120년도 동시성
역사를 이룹니다.
통일왕국시대에는, ①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기름을 부어 아브라함 이후 800년 만에 처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됩니다(사무엘상 8절 19~20절, 10장 1~24절). 기독왕국시대에는, Ⓐ 교황 레오 3세가 카알 대제에게 대관식을 함으로써 800년
만에 처음으로 교황이 승인한 왕이 탄생합니다.
또 통일왕국시대에, ② 모세의 성막이상(聖幕理想)이 솔로몬 왕의 성전이상(聖殿理想)으로
옮겨지듯이 기독왕국시대에도 Ⓑ 성 어거스틴의 신국론 이상으로 기독교왕국을 형성하게 됩니다.
통일왕국시대에는 ③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국왕입니다. 제사장이 영적 왕국의 중심인물이라면, 국왕은 실체 왕국의 중심인물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왕국시대에도, Ⓒ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국왕입니다. 교황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않았습니다.
또 통일왕국시대에, ④ 아벨의 입장에 있던 사울 왕의 실수로 실체기대가 실패했습니다.
사울 왕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음란에 빠져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기독왕국시대에도, Ⓓ 아벨의 입장에 있던 국왕이
아벨의 위치를 떠나 실체기대를 세우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국왕이 아벨의 위치를 떠나 실체기대를 세우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국왕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통일왕국시대, ⑤ 사울 왕과 다윗 왕을 이은 3대 솔로몬왕이 말년에 이방(異邦)
왕비들의 사악한 신인 아스다롯·밀곰·금오스·몰록을 섬기고 남북왕조로 분립되었듯이 기독왕국시대에도, Ⓔ 카알 대제로부터 샤를 2세(Charles
II, 823~877. 서프랑크 왕,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를 거쳐 루이 2세(Louis II, 846~879. 서프랑크의 왕)때에 이르른 3대
만에 왕국이 3분(서프랑크·동프랑크·이탈리아)되어 동서 프랑크로 분립됩니다. 이탈리아는 사실상 동프랑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로 양분된 것입니다.
(4) 남북왕조 분립시대와 동서왕조 분립시대 738
남북왕조 분립시대 400년과
동서왕국 분립시대 400년도 역시 동시성 역사로 전개됩니다.
남북왕조 분립시대에는, ① 통일왕국시대를 열었지만 3대 만에 분열되었습니다.
통일왕국이 가인 편에 아벨 편으로 쪼개진 것입니다. ② 가인 편 나라는 10지파로 북조(北朝) 이스라엘이 되고 260년 동안 19명의 왕이
재위했습니다. 아벨 편 나라는 2지파로 남조(南朝) 유다가 되고, 394년 동안 20명의 왕이 나옵니다. 북조 이스라엘의 왕은 가인 편이기
때문에 선한 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2지파를 중심한 남조유다는 아벨 편이기 때문에 모두 선한 왕이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북조 이스라엘 왕들의
악습을 받아서 나쁜 왕들이 나오고 포로로 가게 됩니다.
북조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조의 망명객이었던 여로보암이 중심이 되어 창건한
왕국입니다. 왕조가 존립한 260년 간 열아홉의 왕이 경질되고, 왕실이 아홉 차례나 전복됩니다. 왕권이 아홉 차례나 바뀌었지만 19명의 왕
가운데 선한 왕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남조유다에서 악한 왕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엘리야 선지자를 파송했는데,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의 선지자를 만나 제단에 송아지를 올려놓고 누가 먼저 불을 붙이는지 대결을
벌입니다.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믿는 선지자와 하나님을 믿는 엘리야 선지자 중에서 어느 신이 더 강한지 내기를 한 것입니다. 850명의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믿는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해도 제단에 불이 붙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 선지자가 나서서 제단 주변에 도랑을
치고 물을 붓고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에 붙였습니다. 그러니까 850명의 아세라신과 바알신을 믿는 선지자들이 지게 되고, 엘리야
선지자는 그 850명을 전부 몰살합니다(열왕기상 18장 19~40절).
그런데 이세벨 여왕이 그에 굴복하지 않고 엘리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토굴로 도망가서 40일 동안 살았는데, 결국에는 하늘에서 불수레와 불말이 내려와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합니다(열왕기하 2장 11절).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 선지자를 보낸다고 했기 때문에 구름 타고 간 엘리야가 구름 타고 올 줄 알고
유대 민족이 그를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외에 엘리사·요나·호세아·아모스 등의 선지자들을 보내서 회개를 시키는데 한 사람도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9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앗수르로 끌어갑니다(열왕기하 17장 6절). 그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영원히 선민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남조 유다인들은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이 중심이 됩니다.
다윗
왕에서부터 시드기아 왕까지 하나의 핏줄로 정통을 이어갔습니다. 394년 동안 통일왕국시대를 유지하게 되는데, 그 기간 동안 20명의 왕들이
재위했습니다. 선한 왕들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요시아 왕 이후에는 북조 이스라엘의 나쁜 왕들의 영향을 받아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그로 인해 남조 유다의 왕과 백성들이 마지막에는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③ 신앙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4대 선지자와
12소선지자를 파송해 내적 쇄신운동을 펼치지만, 유대인들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④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자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異邦)에 붙여 외적인 확청운동(廓淸運動)을 벌이도록 했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서 깨우쳐주어도 안 들으니까 그들을 모두
애급·갈대아·시리아·앗시리아·바벨로니아 등 다른 나라에 붙여 종살이하면서 회개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⑤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깨닫고 회개하지
못하여 이스라엘 군주사회는 모두 붕괴됩니다.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의 왕과 백성이 이방의 포로가 되어 포로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북왕조 분립시대와 마찬가지로 동서왕조 분립시대도 시대만 달리할 뿐 그 내용은 동시성으로 나타납니다. Ⓐ 기독교왕국 3대 만에
동프랑크, 서프랑크, 이탈리아로 3분됩니다. Ⓑ 가인 편은 서프랑크, 아벨 편은 동프랑크 이렇게 동서왕조 분립시대로 갈라집니다. 이탈리아는 오토
1세(Otto I, 912~973). 독일의 왕·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의 공헌으로 신성로마제국에 들어감으로써 두 왕조가 동서로
나누어집니다.
Ⓒ 교황청이 부패하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guinas, 1224~1274. 이탈리아 신학자·철학자), 성
프란체스코(San Francisco d'Assis, 1182~1226. 로마 가톨릭의 수도사) 등 수도원의 인물들이 나서서 내적 쇄신운동을
펼칩니다. Ⓓ 수도원에서 쇄신운동을 해야 한다고 권고를 함에도 교황청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권고를 듣지 않고 계속 타락하고 부패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황청을 이방인에 붙여 외적 확청운동을 벌이도록 했습니다. 거기에서 십자군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1세기 후반 예루살렘 성지가
칼리프 제국에 속해 있을 때만 해도 이슬람 칼리프들은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하는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나중에
셀죽터키(셀주크제국)가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한 이후부터는 기독교 순례자를 핍박하고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분노한 역대 교황들은 성지를
회복하려고 십자군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1096년에 시작해서 200년 간 일곱 번이나 원정했으나 패전을 거듭하고 한 번도 이기지
못합니다.
Ⓔ 하나님이 원치 않는 전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기독교 군주사회는 붕괴됩니다. 교황은 정신적 지주인데 십자군전쟁의
실패로 권위와 신앙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또 봉건사회를 유지했던 영주와 기사들이 십자군전쟁에서 많이 전사했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정치적
기반을 잃어버렸습니다. 거듭된 패전으로 막대한 경비가 소모되었기 때문에 경제적 빈곤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정신적 지주의 지위를
잃어버렸고, 정치적인 기반도 잃어버렸고, 거듭된 패전으로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함으로써 결국에 기독교 군주사회가 붕괴되었습니다.
(5)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742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과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도
동시성 역사로 반복됩니다.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에는, ① 여호야긴 왕과 그 백성이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 왕에게 잡혀가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습니다(열왕기하 24장 10~17절, 역대하 36장 10~21절). 유대 민족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역대하 36장 22~23절, 에스라 1장 1~4절). 그 후 유대 민족은 3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② 포로생활 70년 만에 귀환한 다음 140년이 걸려 210년 만에 신앙기반을 정립합니다.
한편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에는,
Ⓐ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V, 1206경~1314. 교황)가 1308년 남프랑스로 가고 1309년에 아비뇽에 거처를 정합니다. 그후
1377년까지 약 70년 간 프랑스 아비뇽에 교황들이 머문것을 고대 유대인이 바빌론에 강제 이주된 것에 빗대어 ‘아비뇽 유수’라고 합니다. Ⓑ
교황들이 약 70년 간 아비뇽에 머물면서 교체되었는데,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 1329~1378. 프랑스
출신 마지막 교황)가 로마로 귀환합니다.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죽고 1378년 추기경들은 이탈리아 바리 감독을 우르바누스
6세(Urbanus VI, 1318경~1389. 교황)를 그 다음 교황으로 세웠습니다. 그러자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이 불만을 품고 4개월 후에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1342~1394. 대립교황)를 교황으로 선출하고 우르바누스 6세와 대립하여 또 하나의 교황청을 남프랑스
아비뇽에 세웁니다. 그때부터 서방교회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 두 교황이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결국 추기경들이 두 교황을 폐위하고, 알렉산더
5세(Alexander V, 1339경~1410. 대립교황)를 교황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클레멘스 7세와 우르바누스 6세, 두 교황이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이 셋이나 되자 감독·대감독·신학자·왕후·사절단들이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세 교황을 전부 폐위하고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 1368~1431. 교황)를 정식 교황으로 선출했습니다. 세 교황이 분열하고 대립한 문제가 비로소
정리됩니다.
교황이 70년 만에 아비뇽의 유배에서 돌아온 후 교황전정(敎皇專政) 복귀와 신앙기반을 정립하는 데 140년이 걸렸습니다.
그것은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 동시성을 이룹니다.
(6)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와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743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 400년과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400년도 동시성 역사의 한 예입니다.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에서, ① 40일 사탄분립섭리를 하여 마지막 탕감복귀한 것이 4000년의 역사입니다. 아담부터 예수님이 오기까지 4000년이 걸렸습니다.
그중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조성된 아브라함 가정부터 예수님이 오기까지 2000년이 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은 아담부터
4000년의 역사를 탕감해야 합니다.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에서도, Ⓐ 40일 사탄분립섭리를 하여 마지막에 4000년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재림주가 올 때까지가 4000년인데, 예수부터 재림주가 올 때까지가 2000년입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재림주는
4000년의 역사를 탕감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에서, ② 이스라엘 민족은 성전을 건축한 뒤 회개하고 율법을
공부하면서 신앙쇄신운동을 일으켜 믿음의 기대를 복귀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파괴된 성전을 건축하고, 말라기 선지자가 사악한 신을 숭배하던
과거를 회개시키고 율법을 공부시켜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시아가 강림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기독교인들을 회개시켜 복음을 공부시키고, 신앙의 길을 개척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합니다. 교황이 로마로 귀환한 후 중세
기독교인들은 루터를 중심해서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중세 암흑시대의 신앙인들을 회개시켜서 복음의 빛을 따라 신앙 개척운동을 벌이도록
합니다.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에서, ③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페르시아·희랍·애급 등 다른 나라에 의해 외적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야곱가정이 요셉을 만나러 갈 때까지 고난을 겪은 것을 탕감복귀한 것입니다.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에도, Ⓒ 재림 메시아를
만날 때까지 많은 내적 수난의 길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인본주의·계몽주의사상·공산주의 이론들이 나타나 재림주가 올 때까지 수많은 인간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에는, ④ 말라기 선지자가 유대교를 쇄신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합니다(BC
430년경). 동시대 이민족에게도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데, 인도에서 석가모니(釋迦牟尼, BC 623경~543경. 불교의
창시자)가 나와 불교를 창설하고, 희랍에서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경~399. 그리스 철학자)가 헬라문화를 개척합니다. 또
동양에서 공자(孔子, BC 551~479. 유교의 개조[開祖])가 유교를 통해 인륜 도덕을 세웁니다. 그런 시대적 준비를 토대로 예수님이 오시면
양심을 지도했던 종교를 기반으로 해서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들고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에도, Ⓓ 인본주의와 계몽사조의 터전 위에서 문예부흥을 일으켜 정치·경제·문화·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재림주를 맞이할 환경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그 다음에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에는, ⑤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을 중심하고 로마를 통해 실체적으로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이루려고 했듯이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에도, Ⓔ 재림주가 오셔서 제3 이스라엘을 중심하고 미국 기반을 중심해서 세계적으로 복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을 ‘제2의 로마’라고 합니다.
4. 복귀역사에 나타난 하나님 주권과 사탄 주권의 교차
745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인해 아담가정에서 가인형 인생관과 아벨형 인생관이 생겼습니다. 인간들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주권이냐 사탄 주권이냐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 때에도 가인형과 아벨형으로 갈라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12제자와
70문도가 로마에 가서 박해를 받을 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사탄은 세상에서 왕 노릇을 했습니다.
예수님과 카알 대제
사이의 어거스틴을 중심으로 하나님 편과 사탄 편이 나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부터 어거스틴이 나오기까지 로마박해 400년은 사탄
주권이 하나님 주권보다 위에 있던 시기로, 가인형 인생관인 인본주의, 즉 헬레니즘이 아벨형 인생관이 신본주의, 즉 헤브라이즘을
압도했습니다.
로마박해 400년이 끝나고 어거스틴이 출현하면서 교구장제 기독시대가 열리는데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400년),
기독왕국시대(120), 동서왕조 분립시대(400년)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 가운데 초반 70년까지는 하나님 주권이 사탄 주권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아벨형 인생관인 헤브라이즘이 헬레니즘을 압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초반 70년이 지나고부터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부르짖기까지 사탄 주권이 하나님 주권보다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사탄 주권이 하나님 주권보다 우위를 차지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지옥밑창에서 백성들과 함께 종살이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루터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하나님 주권은 다시 사탄 주권의 위로
올라가고, 사탄주권은 내려가게 됩니다. 특히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400년을 지나 재림주를 모심으로써 드디어 하나님 주권이 이 땅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5. 복귀섭리시대의 역사 발전 746
복귀섭리시대의 역사 발전을 보면, 가인이 먼저 출발하여 사탄을
중심한 유무상통(有無相通) 원시공동사회가 시작됩니다. 내 것, 네 것이 없는 시대로 공산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역사는
원시공동사회에서 출발해서 씨족사회, 봉건사회를 거쳐 애급 왕국, 바빌로니아 왕국, 힛타이트 왕국 등 군주사회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
가인형 사회를 뒤따라서 하나님을 중심한 공생공영공의사회(共生共榮公義社會)가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을 중심한 선(善)의 씨족사회, 사사(士師)를
중심한 선의 봉건사회, 그리고 사울 왕을 중심으로 한 선의 통일왕국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사울 왕·다윗 왕·솔로몬 왕은 가인형의 군주사회와
아벨형의 통일왕국을 동방제국(東邦帝國)으로 통일하려고 했지만 사울 왕·다윗 왕·솔로몬 왕 모두 동방제국 통일에 실패합니다.
솔로몬 왕에
의한 동방제국 통일의 실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다시 가인형 북조 이스라엘과 아벨형 남조 유다로 갈라집니다.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는 마지막에
민주주의형의 사회로 수정되어서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지상천국으로 복귀함으로써 통일국시대가 도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가 재림주를 중심한
마지막 섭리시대입니다.
예수님은 영육을 지니고 오셨지만 육신이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에 육적 구원은 실패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영적인
예수님을 모시고 출발합니다. 로마를 중심해서 출발한 소생형 영적 기독교(蘇生形靈的基督敎)에 이어 장성형 영적 기독교(長成形靈的基督敎)가 나와
영국을 중심해서 기독교를 세계화하고,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환경을 개척해 나갑니다. 신구교의 싸움이 일어나고 산업혁명, 식민지 정책, 기독교
전파, 식민지 해방 등이 영국을 중심해서 일어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영국을 중심으로 재림주를 모실 수 있는 세계적 기반을 닦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영적 기독교가 완성되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영국이 어머니 국가라면, 미국은 영국이 낳은 아들과 같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에 영국이 이끌면 미국은 따라가고, 미국이 하자면 영국도 따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모자국가(母子國家)로 서로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영국에서 청교도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게 됩니다. 그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고 마침내 12월에 신대륙에 도착합니다. 청교도들은 신대륙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교회를 짓고, 두
번째에는 앞으로 2세를 길러서 세계를 지도하기 위한 학교를 짓고, 그 다음에 자기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그것이 미국의
건국이념입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부터 400년이 지난 이후에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가 시작되고, 그 터전 위에 재림주가 오십니다.
구약시대에 말라기 선지자가 나와서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를 선언하고 예수님이 오셨듯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킴으로써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를 연
지 400년 만에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수리적(數理的)으로 동시성을 띱니다. 동시성 시대는 타락한 아담 이후의 잘못된
역사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해 온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적 발자취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때마다 번번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실수했기 때문에
섭리가 또다시 연장되어 왔지만 그 내용은 같습니다.
다만 가정시대·국가시대·세계시대로 범위가 넓혀졌을 뿐입니다. 역사는 동시성을 띠는데,
가정시대는 상징적으로 나타났고, 국가시대는 형상적으로 나타났으며 그 다음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실체적인 국가 형태를 갖추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그 실체를 잃어버렸으므로 다시 실체적 동시성 시대를 세계적으로 걸어야 합니다. 재림주가 오셔서 그 모든
역사를 완성하고 완결지어야 합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예수님을 거쳐서 실패했던 모든 것을 재림주님을 통해서 종결지어야 하는 것이
섭리역사입니다.
인간의 타락 역사는 재림주 한 분을 맞음으로써 마감됩니다. 재림주를 만나는 것이 인류의 소망입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종교들이 어떤 입장에 있든지 간에 마지막 희망은 오시는 재림주님에게 있습니다. 오시는 그 분을 통해서 모든 것이 재현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해서 본연의 타락하지 않은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역사를 지금까지 준비해서 이제
선포하고 새 시대를 출발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구약 역사를 버려야 하고, 유대 민족사를 버려야 하고, 오늘날
서양사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서양사·유대 민족사·구약 역사는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아담과 해와를 통해 이루시려던
창조이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역사를 다시 찾아오신 것이 6000년의 섭리역사입니다.
제8장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751
서론: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아담이 타락한 이후 아담가정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인류역사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지 않으면 인류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기 위한 섭리를 하시고, 인간은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기대를 세워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인간이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는 시대를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라고
합니다.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 400년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를 중심해서 400년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듯이 신약시대에는 루터를 중심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후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가 시작되어 400년 만에 재림주가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루터 이후 재림주가 오시기 위한 400년을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라고 합니다.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는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부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하며, 종교개혁기, 종교·사상의 투쟁기, 정치·경제·사상의
성숙기 등 세 기간으로 구분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때부터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에 의해서
신·구교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가 종교개혁기이고, 종교개혁기가 끝난 때부터 프랑스 정치혁명이 일어날 때까지가 종교·사상의 투쟁기이며, 프랑스
정치혁명이 일어난 때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가 정치·경제·사상의 성숙기입니다.
1. 종교개혁기
753
1517년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기의 기치를 든 때부터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구교(가톨릭)와 신교(개신교)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130년 동안을 종교개혁기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나타났는데, 그 이전 중세 유럽에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만
있었습니다.
중세사회에는 교황이나 성직자 등 일부 특권층만 성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이 일부 특권 계층의 종교로서 일반 신도들을
지배한다면 재림주가 오셔서 세계를 수습하고 인류를 구원할 길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예배하고 교통할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설(萬人祭司長說)'을 주장하며 종교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자국어로 성서를 번역하여 귀족이나 성직자뿐만 아니라 누구나 성경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130년 간 신·구교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 싸움이 끝날 때까지 130년 기간을 종교개혁기라고 합니다.
그
기간에 중세 봉건사회의 소산인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이 잇따라 일어납니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이 발생한 이유는 중세 봉건제도와 로마 가톨릭의
세속화로 인간의 본성이 억압된 데 대한 반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세 봉건제도와 로마 가톨릭의 세속화로 말미암아 인간이 본성을 억압한 데 대한
반발로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 보성의 욕구는 외적으로는 헬라문명 복고운동으로 시작되어 문예부흥으로 발전하였고,
내적으로는 히브리문명 복고운동으로 시작되어 종교개혁으로 나타났습니다. 종교개혁은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1)
문예부흥 754
문예부흥(文藝復興 : Renaissance)은 14세기경 이탈리아에서 태동했습니다.
헬라사상에 관한 고전 연구의 본산지가 바로 이탈리아입니다.
고전문화 재생운동으로 출발한 문예부흥은 후에 중세 사회생활 전반의 개혁으로
확대됩니다. 문예부흥은 문화적인 면뿐남 아니라 정치·경제 종교 등 사회적 혁신운동으로 퍼져나가 근대사회 형성의 외적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문예부흥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없었을 것입니다.
2) 종교개혁
754
문예부흥에 뒤따라 나온 것이 종교개혁(宗敎改革)입니다. 종교개혁이 문예부흥보다 나중에 일어난 이유는 아담가정에서 사탄 편에 선
가인이 하나님 편에 선 아벨을 죽이고 먼저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외적인 것이 먼저 나오고, 내적인 것이 뒤따라
나옵니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이 원인이었습니다. 교황들이 축첩(蓄妾)을 하거나 아이를 낳는 등 타락한데다 성직
매매와 면죄부 판매 등 교권의 세속화로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형식적인 종교의식과 부패한 교회에 반항하는 신앙인들이 외적으로
문예부흥에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초대 기독교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운동을 시작했는데, 1517년 교황 레오 10세가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에
반대하는 루터를 중심으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이 폭바랍합니다.
그로 인해 신·구교 간의 종교분쟁이 100여 년
간 계속되다가 마침내 독일을 무대로 일어난 신·구교 간의 30년 전쟁(1618~1648)이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결됨으로써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 제1기에 해당하는 종교개혁기가 끝납니다.
종교개혁은 성서의 권위, 하나님의 은총과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기독교를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했던 운동입니다. 종교개혁의 결과, 개신교와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2.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 755
1) 개요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신교운동이 성공한 후,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140년의 기간을 말합니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은 인간의 본성에 내적·외적으로 자유를 부여했습니다.
중세인들은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으로 본성의 자유를 획득하고 신앙의 자유를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념 투쟁과 분열과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계몽주의 출현으로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자유롭게 논쟁을 벌였습니다. 당시에 신학적으로는 많은 논쟁을 벌이다 보니 새로운
종파가 생겨났습니다. 교파 분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만 성서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신도들은 교황을 중심으로 신앙하고 그것을 따라갔습니다. 그것에 반발하여 인간 본성의 자유를 얻고 보니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에 신학적인 교리 논쟁이 벌어지면서 교회도 분열되고 철학적인 싸움도 일어났습니다.
복귀섭리는 오랜 역사를 두고 가인형과
아벨형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분립된 세계에서 이루어져 나왔습니다. 역사의 종말에도 두 세계로 분립되는데, 그 두 세계가 가인형 세계와 아벨형
세계로 나타나게 됩니다.
2) 가인형 인생관 756
가인이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 편 아벨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가인 편 역사가 먼저 출발합니다.
가인 편 역사는 가인형 인생관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가인형 인생관의 중심사상은
인본주의(人本主義 : Humanism)입니다. 인본주의는 사람을 위주로 하여 모든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이론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외적으로
추구한 결과 헬라사상 복고운동을 일으켜 인본주의를 낳았습니다.
중세인들은 인생의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판단했습니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과학자·철학자)는 이성을 중심한 합리주의를 주장했고, 베이컨(Roger
Bacon. 1220~1292. 영국 철학자)은 인간의 이성도 중요하지만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주류 사상인
데카르트의 이성론(理性論)과 베이컨의 경험론(經驗論)으로 인해 인간의 내·외적인 성향에 따라서 인간의 갈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이 내적인 성향을 따라 하나님 편으로 가는 길을 막고, 외적인 성향을 따라 사탄 편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인생관을 낳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성이냐 경험이냐의 두 사조가 내적으로는 하나님 편으로 가는 길을 막고, 외적으로는 사탄 편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인생관을 낳은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과 자연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해 버렸습니다.
가인형 인생관은 중세인들을 하나님과
신앙으로부터 분리 혹은 독립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왔습니다. 대개 유무론자와 공산주의자는 가인형 인생관을 추구합니다. 슈트라우스(Davi
Friedrich Strasuss, 1808~1874. 독일 철학자)·포이어 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1872. 독이 철학자)·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독일 철학자·마르크스주의
창시자)·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독일 사회주의 철학자)·레인(Vladimir Ilich Lenin,
1870~1924. 소련 국가원수·러시아의 급진적 마르크스 주의자)·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 소련
정치가)·마오쩌둥(毛澤東: Mao Tsetung, 1893~1976. 중국 정치가)· 김일성(金日成, 1912~1994. 북한주석)등은 모두
가인형 인생관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예부흥에서 시작하여 계몽사상으로 발전해 온 무신론과 유물론을 집대성한 가인형 인생과는 더욱 성숙하여
오늘날의 공산주의로 이어집니다.
3) 아벨형 인생관 757
가인형 인생관에 뒤따라서 아벨형 인생관이
출현했습니다. 아벨형 인생관의 중심사상은 신본주의(神本主義 : Hebraism)입니다. 아벨형 인생관은 하나님을 본(本)으로 삼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출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중세인들의 본성적인 추구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보다 더 내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본성의
내적 추구가 히브리사상 복고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벨형 인생관은 더욱 고차적으로 하나님을 지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아벨형 인생관에 해당하는 인물은 칸트(Imanuel Kant, 1724~1804, 독일 철학자)·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독일 철학자)·셀링(Friedrich Wilhelm Scheling, 1775~1854. 독일
철학자)·헤겔(Georg Wihelm Fricdrich Hegel, 1770~1831. 독일 철학자) 등이 있습니다. 민주사상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모두 아벨형 인생관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가인형 인생관은 공산주의로, 아벨형 인생관은 민주주의로 발전했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그 근본을 따져보면 아담가정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실체인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하나의 사상,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 하나의 전통이 아담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의 선악의 모체가 되고, 비원리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타락의 장본인인 아담을 둘로 쪼갤 수 없기 때문에 자녀인 가인과 아벨을 나누어서 사탄 편과 하나님 편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언제나 악한 사탄 편이 선두에 서고, 선한 하나님 편은 뒤따라가는 역사가 이어졌습니다. 공산주의는 아담가정에서부터
시작한 가인형 인생관이, 또 민주주의는 아담가정에서부터 시작한 아벨형 인생관이 근대에 와서 마지막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남자 아니면 여자로 태어나 각계각층에서 활동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모두 두 주류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는 가인형 인생관, 또 하나는
아벨형 인생관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저마다 가인형 인생관 또는 아벨형 인생관 가운데 하나의 인생관을 갖고 있습니다.
3. 정치·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 759
정치·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는 프랑스 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130년 기간을 말합니다.
1) 정치의 성숙기
759
본연의 세계에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아담가정에서 분립의 역사가 벌어져 인간이ㅡ
역사에서 가인형 인생관과 아벨형 인생관이 출발되었습니다.
가인형 인생관의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하여 출현한 것이 공산주의이고, 아벨형
인생관의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하여 이루어진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1) 민주주의
759
민주주의(民主主義)는 국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중세 봉건사회에는 봉건주의 제도가 있었습니다. 봉건주의는
상위(上位)에 있는 자가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하위(下位)에 있는 자를 종속시켜 다스리는 방식입니다. 봉건사회에서 왕이 절대권력을 가진
절대군주사회로 넘어갑니다.
절대군주사회에서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나자 시민계급이 혁명을 일으켜 민주사회로 바뀝니다. 절대군주사회에서는 왕의
말 한 마디가 곧 법입니다. 또 백성들이 모두 군주에게 속하게 된다면 메시아가 오셨을 때 서로 뜻이 안 맞을 경우 왕이 메시아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메시아는 유대 나라의 왕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이미 왕이 있는데 다른 왕이 나타난다면 살려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민주사회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민주사회는 다시 가인형 민주주의와 아벨형 민주주의로 나누어집니다.
가인형
민주주의는 프랑스 혁명을 거쳐 공산주의로 발전합니다. 프랑스 혁명은 무신론자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이 절대군주제도에 반대해서 절대왕정을 타파한
시민혁명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프랑스
정치가·철학자)·볼테르(Voltaire, 1694~1778. 프랑스 사상가)·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프랑스 철학자)·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 프랑스 문필가·철학자) 등에 의해 약 반세기에 걸쳐 배양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루소의 문명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인민주권론(人民主權論)이 혁명사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왕권은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 프랑스 왕)가 완성한 절대주의 체제에 의해서 여전히 국왕 친정과 신권이론(神權理論)을 받들고 국가와
인민 위에 군림했습니다. 국민의 10퍼센트에 달하는 귀족과 성직자 계층이 국민 90퍼센트가 내는 세금과 근로에 기생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시민계급이 반발하여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타파되고 공화정권이 나타나게 됩니다.
무신론자들이 프랑스 혁명을
통해 왕정을 무너뜨리고 주권을 잡고 보니 그들 나름대로 사상의 정립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무신론(無神論)과 유물론 사상(唯物論思想)이 중심이
되어서 신을 부정하고, 우주의 근본은 인간이라고 한 것입니다. 신을 부정했기 때문에 창조론(創造論)을 말할 수 없어서 결국 진화론(進化論)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무신론과 유물론 추종자들의 철학과 사상을 이론으로 집대성한 것이 오늘날의 공산주의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물질을 근본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질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발전한다는 것이 유물론적 변증법(唯物論的辨證法)입니다. 유물론에 따르면 신도 없고,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공산주의는 그런 억지 이론을 세워서 그 이론을 따르라고 강요하고 그 이론을 믿지 않으면 숙청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자유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뒤따라 나온 것이 아벨형
민주주의입니다. 아벨형 민주주의는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민주혁명을 거쳐 자유 민주주의로 발전합니다. 영국과 미국의 민주혁명은 청교도들이 신교의
자유를 찾아 절대주의와 싸워서 승리한 혁명입니다.
자유를 찾아 시작된 민주주의는 오늘날 방종의 세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너무 팽배해졌기 때문에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공산주의 세계에도 자유가 없고, 돈이 있어서 상거래가 시행되지만
거기에는 개인의 소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도 망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물질 때문에 성공했다가 물질 때문에 망합니다.
그런데
민주주의 세계는 물질은 풍요로운데 정신이 다 부패했습니다. 반면에 공산주의 세계는 물질은 빈곤한데 정신은 건강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한
새로운 세계는 오지 않습니다.
(2) 삼권분립 762
입법·행정·사법을 3권이라고 하는데, 왕국시대에는
왕 한 사람에게 삼권을 모두 부여해주었습니다.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돼 있어 왕이 실패하지 않으면 주권을 빨리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이 하나님을 섬기면 온 국민이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하나님을 불신하며 왕 한 사람이 잘못했는데도 전체를 다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이 잘못하더라도 나머지 두 사람을 남겨두기 위해 3권을 분립시켰습니다. 그것이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발단입니다.
입법·행정·사법 3권은 인간 한 사람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사람은 뇌를 중심해서 위장·심장·폐가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위에서 소화하고, 영양소가 심장을 통해 전신을 거친 후에 정맥을 거쳐 다시 폐로 돌아갑니다. 수수작용을 통해 혈액에
영양분과 공기를 싣고 가는 것입니다.
나무로 말하면 뿌리에서 빨아들인 영양분이 줄기에서 잎으로 가고, 거기에서 다시 광합성을 통해서
생명활동에 적합한 성분으로 재가공되어 줄기를 거쳐 뿌리로 가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처럼 정치도 입법·행정·사법이
그대로 연결됩니다. 국회에서 법을 제정(=立法)하면, 행정부에서는 법을 집행(=行政)하여 다스리고, 사법부에서는 법을 적용(=司法)하여
재판합니다. 입법부의 책임자는 국회의장이고, 행정부의 수반은 대통령이며, 사법부의 책임자는 대법원장입니다. 입법이 잘못될 경우를 견제하기 위해
행정과 사법을 분리시켰습니다.
입법·행정·사법이 모두 유기적으로 원활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각각 나누어져 갈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탄 편은 원리의 형을 비원리적으로 먼저 이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원리로 인간을 창조해서
데려갈 수 있지만, 천사장은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을 타락시켰어도 인간을 데리고 갈 비전이 없습니다. 사탄 세계는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원리의 형을 비원리적으로 먼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이상사회는 정치하는 시대가 아니라 관리하는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다스리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주관하고 관리합니다.
경제 체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연의 이상사회의 경제
체제는 생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놓은 것을 어떻게 백성에게 골고루 분배해줄것인가 하는 분배 정의(分配正義)가 핵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갖고 어떤 사람은 없어서 굶어죽는 일이 없도록 골고루 분배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수수작용입니다. 쓰고 남을 정도로 충분히 생산해야 하고,
분배는 누구나 필요한 만큼 가질 수 있도록 적절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쓰고 남으면 저축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체와 같습니다.
위장에서 영양을 섭취해서 심장과 폐를 다 거치고 남은 영양분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간에 저장했다가 영양이 부족하면 그것을 인체에 필요한 성분으로
바꿔 사용합니다. 우리가 돈을 쓰고 남으면 은행에 저축하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정치·경제의 모든 체제가 완성된
인간의 모양을 닮아야 합니다. 정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당도 자기 정당만을 위한 정당이 되면 망합니다. 국가 전체를 위한 정당이 되어야 합니다.
국가도 국가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하나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이상을 따르는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 국가가 미래의 세계에서도
존속할 수 있습니다.
창조원리에 의하면, 피조세계는 완성한 인간 한 명의 구조를 본으로 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이상사회의 구조가 인체의
구조처럼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인체는 뇌(腦)에서 어떤 신호를 보내면 척추(脊椎)를 거쳐서 말초신경(末梢神經)을 지나 사지백체(四肢百體)로
전달됩니다. 마찬가지로 본연의 인간 한 명의 모습을 닮은 것이 이상세계이기 때문에 이상사회에서는 하나님이 바로 뇌와 같고, 재림주는 척추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신도들은 위장과 심장·폐 같은 사명을 해야 합니다. 그 영향이 사회에 미쳐 경제구조를 이루면 이상사회로
이어집니다.
두뇌와 종적 관계를 맺어서 횡적 관계로 연결하는 것이 바로 사지백체입니다. 그 원칙을 따라서 인간도 하나님과 종적 관계를
맺고, 그것을 횡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이상사회입니다.
그런 이상사회의 복귀 과정에서 하나님은 국왕을 세웠습니다. 그 국왕은 혼자서 3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삼권정당(三權政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 정책을 정당이 이끌어가는 오늘날의 정치체제를
비유하여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정당은 두뇌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 두뇌격인 국왕을 중심한 3권이, 척추와 같은 교회가 세워지면
교회로 이어져 교회정당(敎會政黨)을 이루면, 위장·심장·폐와 같은 신도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생명체를 이룹니다. 그래서
3권분립정당(三權分立政黨)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3권분립정당을 통해서 말씀을 중심한 복귀를 이루어 가는데, 3단계 발전 법칙에 의해
이상사회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입법·사법·행정으로 3권이 분립되었지만, 앞으로 천일국 이상은 3권 분립에서 5권
분립(五權分立)으로 체제를 바꾸는 것입니다. 5권 분립은 입법·행정·사법의 3권에다 은행권(=財政權)과 언론권(言論權)을 추가한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고 집권층들이 법을 제정하고 다스리고 집행하는 것을 언론에 공개하고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입법·행정·사법·은행·언론이 포함된 5권으로 분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계는 3권만 주장하다 보니 결국 부정을 저질러 부패하고, 많은
문제를 가지고 싸움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연의 세계인 천일국 이상을 이룰 때에는 입법·행정·사법뿐만 아니라 재정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국민에게 가르치고 알리는 언론이 있어야 합니다. 본연의 이상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5권 분립과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필요합니다.
2) 경제의 성숙기 765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단지 죄 없는 사회를 이루는 것만으로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피조세계에 숨어 있는 원리를 찾아 과학을 발달시킴으로써 행복한 사회 환경까지 이루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만물을
주관하라.’(창세기 1장 28절)고 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집니다.
타락으로 인한 영육 양면의 무지를 극복하고 이상사회를 복귀하는
사명을 종교와 과학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 재림시대에는 내적으로 영적인 무지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말씀이 나와야 하고,
외적으로 육적인 무지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도록 과학이 발달하여 이상사회의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1) 산업혁명의
의의 766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두 가지입니다. 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과 싸움이 없고 평화로운 행복한 생활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성완성·가정완성·만물주관완성의 삼대축복입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産業革命 : Industrial
Revolution)은 이상사회의 생활환경을 복귀하기 위한 것입니다. 산업혁명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상사회를 위한 외적인
생활환경을 복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서 내적인 복귀를 이루는 것입니다.
중세 유럽을 정신적으로 하나로 묶어주었던
가톨릭은 로마에서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가톨릭은 성공회(聖公會 : Anglican Communion)라는 이름으로 정착하는데, 이미
영국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번영을 누리며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2) 열국의 강화와 식민지
분할 766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제체제가 세워집니다. 산업혁명은 과학의 발달로 기계를 이용한 상품의 대량생산을
가능케하고, 천연자원의 사용을 급속도로 증가시켰습니다. 과학의 발달은 제품생산의 단계를 수공업으로 소량 생산하던 가내공업 체제에서 기계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공업 체제로 변모시켰습니다.
영국은 기술은 발달되어 있지만 원자재가 부족하여 물건을 많이 만들 수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나라는 반대로 원자재는 많은데 기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약소국을 점령해서 원료를 공급받는
식민지 정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서양의 강대국들은 대부분 과잉생산된 제품의 판로와 원료의 획득을 위해서 식민지
정책을 폈습니다.
식민지 정책은 자국의 기술로 만든 상품을 약소국에 팔고, 약소국의 원자재를 본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시행된 정책입니다.
그것은 환경을 복귀하기 위한 정책입니다. 재림주가 오셨을 때 굶어서 죽는 사람이 있거나 가난하다면 이상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생활환경을 복귀해서 모든 나라의 사람이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어느 한 나라만 잘살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양 강대국들은 식민지 정책을 펼치면서 반드시 선교사를 동반했습니다.
식민지는 하나같이 가난했습니다. 식민지가 가난하니까 밀가루를 가져가고, 헌 옷을 가져가고, 학교를 지어주고, 선교사업을 했습니다.
교회를
세워놓고 밀가루·분말우유·헌옷 등을 나누어주면 그것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갔습니다. 선교사들이 그런 식으로 식민지 국민을 상대로 선교운동을
했습니다. 식민지 국가의 국민들은 핍박도 받았지만, 그로부터 오늘날 세계 기독교의 기반이 조성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해서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식민지 정책을 추구하는 나라가 서구에서 동남아시아로 옮겨졌습니다. 섬나라 일본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 정책을 썼는데 한반도가 그 대상이었습니다.
일본은 1905년에 조선과 을사조약(乙巳條約)을 맺었습니다. 을사조약은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맺은 조약입니다. 일본은 1910년에 ‘조선은 자체 보호할 능력이 없으니 일본과 합방하자.’고
하면서 한반도에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1945년까지 35년 간 본격적으로 한국을 지배했습니다.
한편 산업혁명을 통해서는 경제적이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창조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개성완성·가정완성·만물주관완성이라는 3대축복을 통해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생활환경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인간 타락으로 잃어버린 이상사회의 생활환경을 복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은 해와
국가이고, 어머니 국가입니다. 해와가 잘못해서 타락한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해와 국가에서부터 내적·외적으로 복귀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 가내수공업 시절에는 하루에 10개 정도밖에 못 만드는 제품을 공장을 차리고 기계를 돌리니까 하루에 1000개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으로 공급 과잉이 초래되었고, 과잉 생산된 물건을 자국에서 완전히 소비할 수 없었습니다. 과잉 생산된 제품의
판로가 필요해져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잉 생산된 제품을 식민지에 팔고 원자재를 본국으로 가져갔습니다.
원래는 기술을 통해서
얻어진 제품들을 기술이 부족한 나라에 나눠줘서 그들도 동일한 환경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신 원자재를 함부로
남용하지 말고 기술개발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인간을 위해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열국을 중심한 강화정책, 식민지 정책은 원래는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림주가 오시면, 강대국들만 잘살고 나머지는 모두 미개하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용한 정책입니다.
환경을
개척하려면 엄청나게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열강을 앞세워 기술을 개발하고, 미개발국과 선진국이 동일한 환경을 갖게 하는 것이 원래 하나님이
바라는 식민지 정책입니다. 이상적인 환경을 개척하기 위해서 세웠는데 인간이 그것을 남용해서 나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식민지 정책을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림주가 오시면 기술평준화 지식평준화로 인류가 공유하여 기근과 질병이 없는 창조 본연의 행복한 이상세계인 3대 축복을 완성해야
합니다.
(3) 이상세계는 완성인간의 모양과 같다 769
이상세계는 곧 완성한 인간 한 사람의 모양과
같습니다. 인간을 보면, 뇌를 중심해서 위장·심장·폐가 있어서 서로 영양분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체는 영양분을 소모하는
체제로 되어 있지만, 때로는 영양분이 남아돌기도 합니다. 그때 남은 영양분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간에 저장해 놓았다가 필요할 때 다시 활동에
적당한 성분으로 전환하여 조직에 공급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정치도 입법·행정·사법으로 나뉘어 있고, 경제도 생산·분배·소비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생산은 필요한 사람들이 모두 쓰고 남을 만큼 충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공평하고도 과부족이 없이 분배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많이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주는 등 분배 자체가 잘못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소비는 전체 목적을 위해 쓰되, 합리적으로 써야
합니다. 쓰고 남으면 저축했다가 써야합니다.
그 다음 식물을 보면 뿌리·줄기·잎으로 되어 있습니다. 뿌리에서 흡수한 수분이나 영양분이
줄기로 가고, 줄기에서 잎으로 전해지며, 잎에서 광합성작용이 일어나면 탄수화물을 생산해서 다시 저장합니다. 그것이 수수작용입니다.
자연은
모두 하나를 중심한 체제로 되어 있지만, 오늘날 인간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이상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 수수작용에
의해 위하여 사는 정신과 투입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몸은 종의 몸을 쓰고 땀은 땅을 위해서,
눈물은 인류를 위해서, 피는 하늘을 위해서 뿌릴 수 있는 정신이 바로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정신입니다. 정치인·경제인·교육자들도 모두
그런 정신을 가지고 일해야만 이상사회가 오는 것입니다.
4. 문예부흥에 따른 종교·정치 및 산업혁명 770
가인
편 사탄 세계는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원리형의 세계를 비원리적으로 먼저 만들어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 편에서 먼저 문예부흥이
일어나고, 뒤따라 아벨 편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한편 시대적인 추세에 따라 정치계와 경제계에도 거기에 상응하는 개혁과정이 있게
됩니다.
1) 가인적 인생관의 산물 문예부흥 771
문예부흥은 가인형 인생관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3단계에 걸쳐서 완성되듯이 문예부흥(文藝復興)도 3차에 걸쳐서 일어납니다. 제1차 문예부흥은 문학이 중심으로,
문학복고운동(文學復古運動)이었습니다. 제2차 문예부흥운동은 계몽사상(啓蒙思想), 즉 자연과학(自然科學)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계몽사상을
과학적 사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다시 제3차 문예부흥으로 이어지는데, 그때는 유물사상(唯物思想)이 중심이 됩니다. 계몽사상은 자연과학이
중심이었으므로 제3차 문예부흥은 과학적 사고가 유물사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3차 문예부흥은 유물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회과학(社會科學)이 중심이 됩니다.
2) 아벨적 인생관의 산물 종교개혁 771
3차에 걸쳐서 일어난
문예부흥에 뒤따라 아벨적 인생관의 산물인 종교개혁이 이어집니다. 종교개혁의 과정을 보면, 제1차 문예부흥에 이어 루터와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로교를 창시한 프랑스 신학자)을 중심으로 제1차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제2차 문예부흥에 이어 종교계에서는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잉글랜드 목사·영국교회에서 감리교 운동을 창시한 인물)·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 잉글랜드 선교사·퀘이커교 창설자)·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68~1772. 스웨덴 신학자) 등이
세계를 순회하면서 종교부흥운동을 전개합니다. 그것이 제2차 종교개혁입니다.
제2차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나니 가인 편 문예부흥운동은 벌써
제3차로 넘어갔습니다. 역사 발전 과정에 따라 아벨 편에서도 제3차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러나 제2차 종교개혁으로
종교가 부흥되었지만, 제3차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할 새 종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는 가인적 인생관을 따라왔지만 오히려 종교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졌습니다. 그래서 여러 종교를 통일하는 새로운 종교개혁이 남아 있습니다.
3) 3단계 정치
개혁 772
문예부흥·종교개혁과 함께 정치계에서도 3단계 개혁과정이 있었습니다.
제1차 문예부흥과 제1차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처럼 정치계에도 변혁이 벌어집니다. 중세 봉건사회가 붕괴된 것입니다. 중세 봉건사회는 장원제도(莊園制度)에 따라
봉토(封土)를 기반으로 한 영주(領主)와 기사(騎士)와 농노(農奴)가 중심이었습니다. 중세 봉건사회가 붕괴되면서 장원제도도 붕괴됩니다. 그 후
유럽사회는 전제군주사회로 복귀합니다.
제2차 문예부흥과 제2차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에는 다시 전제군주 사회가 붕괴되고 제국주의 시대가 그
뒤를 잇습니다.
제3차 문예부흥으로 유물사조가 생겼을 때에는 제3차 종교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정치계에서 제국주의만 붕괴되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가 존속되면 메시아가 와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국주의를 붕괴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제군주사회가 붕괴되었는데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창조이상사회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제군주사회가 붕괴되고 3차 문예부흥의 기대
위에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면, 바로 하나님이 소망하는 통일된 창조이상세계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인적
인생관의 산물인 사회주의와 아벨적 인생관의 산물인 자본주의의 두 세계로 갈라집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증기기관에 의한 제1차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일어났고, 이어서 전기와 가솔린에 의해 제2차 산업혁명이 선진 제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종교개혁운동과 함께 창조이상사회가 구현되면 경제계에도 제3차 산업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종교 통일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창조이상세계가 이루어집니다. 그 때에는 자본주의 세계와 사회주의 세계라는 벽을 넘어 통일세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재림주가 오시면 이상세계가
실현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상이 열매를 맺고, 정치와 산업도 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4) 산업혁명과
창조이상사회 773
창조이상사회 곧 천일국(天一國)은 하나님주의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주의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주와 공산을 아우르는 두익사상(頭翼思想)입니다. 그 세계는 공생·공영·공의주의를 실현하는 세계입니다. 공동으로 생산하자는
공산(共産)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공산이 아니고 같이 사는 공생(共生)을 해야합니다. 공생 다음에는 같이 영화를 누리는 공영(共榮)을
해야 합니다. 공생과 공영 다음에는 같이 의로운 생활을 하는 공의(共義)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공생·공영·공의주의가 창조이상사회의
근본이념입니다.
공생은 수요에 충분한 제품을 생산하고, 공정하게 분배하고,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필요한데도 충분히 생산하지
않거나 권력있는 사람에게 많이 주고 힘없는 사람에게 적게 주거나, 합리적인 소비를 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이상사회가 아닙니다. 공정하게 분배하고
합리적으로 소비한 다음에 쓰고 남으면 저축해야 합니다.
이상세계에서 공생은 경제적 공동체로서 분배가 중심입니다. 본연의 경제적 공동체는
생산이 중심이 아니고 분배가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공영은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인권과 기회를 보장하고, 권력과 명예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권력 있는 사람만 나타나고, 권력 없는 사람은 비참하거나 명예 있는 사람은 드러나고 명예 없는 사람은 이름도 못 붙이고 사는 사회는
이상사회가 아닙니다.
인간은 저마다 동등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개인주의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인권과
공평한 기회를 보장하고, 권력과 명예를 공유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치적 공동체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정치적 공동체는 치리(治理)가 아니라
관리(管理)가 중심입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아들딸을 권력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합니다. 부모가 어떻게 자식들을 올바로 키울 것인가를
고민하여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공의란 절대가치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할 절대성윤리(絶對性倫理)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주관하는 세계에는 절대가치의 기준이 없습니다. 절대가치의 기준은 하나님을 중심한 절대성입니다.
절대가치의 기준이 세워지면 절대성의 토대
위에 윤리·도덕사회와 심정문화세계(心情文化世界)가 창건됩니다. 함께 의로움을 느끼는 공의의 이상사회란 윤리적 공동체를 말합니다. 윤리적 공동체의
근본은 심정이며, 절대성이 그 바탕입니다.
결론적으로 창조이상사회인 천일국은 공생·공영·공의주의 사회이며, 분배·관리가 공정한 심정의
사회입니다.
5. 세계대전 775
지금까지 2차에 걸친 세계대전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의 뜻으로 볼 때 세계대전은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3차에 걸쳐 벌어지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지나갔지만, 이제 마지막 제3차 세계대전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와 같은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인가? 그리고 세계대전은 어떻게 종결될 것인가를 알아보겠습니다.
1)
탕감복귀섭리로 본 세계대전의 원인 775
전쟁은 언제나 정치·경제·사상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원인에 불과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내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행동에 내외 양면의 원인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당면한 현실에 대응하려는 외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되지만, 한편으로는 복귀섭리의 목적을 지향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려는 내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외적인 원인만을 보고 인간의 행동은 선 또는 악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세계대전도 인간과 인간의 의지에 따라 일어나는 세계적인 충돌이기 때문에 거기에도 내적인 원인과 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세계대전에는 선악을 분립했다가 다시 통일해야 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내적 원인이 있고, 정치·경제·사상의 갈등에 의한 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세계대전은 첫째는 주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사탄의 최후 발악이고, 둘째는 삼대축복 복귀의 세계적 탕감조건이고, 셋째는 예수님의
3대 시험을 세계적으로 넘는 것이고, 넷째는 주권 복귀를 위한 세계적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삼대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린 삼대축복의 복귀와 주권 복귀(主權復歸)를 위한 세계적 탕감조건을 세우려는 것이 세계대전의 내적 원인입니다.
2)
세계대전의 의의 776
제1차 세계대전은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그것이 식민지 정책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사람을 빼앗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제3차 세계대전은 이념 대립에 따른 사상전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강대국이 전쟁에
패한 나라와 약소국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승전국이 패전국들을 독립시켰습니다. 승전국이 패전국을 독립시킨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 편 사람들이 땅을 찾아서 독립시켜 주었던 복귀섭리 과정이 있습니다.
그다음 제3차 세계대전은 사상전입니다. ‘하나님편이냐,
사탄편이냐? 유물론이냐, 유신론이냐?’에서 ‘하나님을 누가 찾느냐, 누가 하나님을 바로 가르쳐 주느냐?’가 사상전의 핵심
과제입니다.
(1) 탕감복귀섭리로 본 세계대전의 의의 777
탕감복귀섭리로 본 세계대전의 의의를 살펴보면,
정치적으로는 사상적 대결이었고, 경제적으로는 땅을 빼앗기 위한 대결이었고, 섭리적으로는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으로서 선과 악의 투쟁이었습니다.
히브리서 8장 5절을 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고 했습니다. 실체(實體)는 무형(無形)의
그림자입니다. 무형의 존재는 실체가 없으면 활동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사탄은 무형의 존재이므로 직접 활동을 할 수 없기에 실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이상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복귀섭리에 합당한 선한 사람이 필요하고, 사탄은 주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악한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 편과 사탄 편은 선악의 투쟁을 벌이게 되었으며, 그것은 세계적으로 전개한 것이 세계대전입니다.
(2)
세계대전의 섭리적 의미 777
3차에 걸친 세계대전의 섭리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삼대축복을 복귀하기 위한 것입니다.
삼대축복은 개성완성·가정완성·주관성완성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사탄은 삼대축복을 취해갔으며,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사탄과의 3대 시험을
승리함으로써 잃어버린 삼대축복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는 주님, 재림주님은 제3차 세계대전을 통해 하나님 편과 사탄 편으로 갈라놓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편의 승리를 이끄시게 됩니다.
3) 세계대전의 대결 양상 778
세계대전에서는 하나님 편
3국과 사탄 편 3국이 주축이 되어 대결합니다. 3국을 중심으로 대결도구를 펼치는 것은 아담가정에서 아담·해와·천사장이 하나님을 부정함으로써
셋으로 갈라진 것이 발단이 됩니다. 그래서 사탄 편과 하나님 편에서 각각 아담 국가·해와 국가·천사장 국가를 상징하는 3국이 연합하거나 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1) 제1차 세계대전 778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 편 3국과 사탄 편 3국이 각각 연합하여 대결구도를 이루었습니다.
전쟁은 사탄편이 먼저 시작합니다.
아담·해와가 성장하는 과정에 천사장의 개입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언제나 사탄 편에서 먼저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의 초반부와 중반부까지는 사탄
편이 승리하지만, 마지막 완성의 길은 사탄이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 편이 승리하게 됩니다.
사탄 편은 기독교를 반대한 국가로서
제국주의이고, 하나님 편은 기독교국가이거나 기독교 보호국가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독일(아담국가)의 빌헬름 2세(Wihelm II · 통칭
‘카이저’, 1859~1941. 독일 황제)를 중심해서 오스트리아(해와 국가)와 터키(천사장 국가)가 동맹국(同盟國)이 되어 전쟁을 일으킵니다.
초·중반전은 동맹국이 이겼습니다. 마지막에 미국(아담 국가)·영국(해와 국가)과 프랑스(천사장 국가)가 협상해서 하나님 편이
승리합니다.
1920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영국·프랑스의 연합국(聯合國, 또는 협상국)을 주축으로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경제적·사회적 국제협력을 증진시킨다는 목적으로 국제연합의 전신인 국제연맹(國際聯盟 : League of Nations)이
설립되었습니다.
(2) 제2차 세계대전 779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1년 후인 1939년에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나치 독일의 정치가)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년 동안 제2차
세계대전을 치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탄 편 국가는 독일(아담 국가)·일본(해와 국가)·이탈리아(천사장 국가)의
추축국(樞軸國)으로서, 이번에는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오스트리아를 대신해서 일본이 참전합니다. 반면에 하나님 편은 미국(아담 국가)·영국(해와
국가)·프랑스(천사장 국가)가 연합국(聯合國)으로 참전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 히틀러를 중심한 추축국이
초반전과 중반전까지는 승리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를 때 미국은 원자폭탄을 개발했습니다. 일본은 막강한 힘으로 중국 대륙을 향해
전진했고, 미국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서 하와이를 침공했습니다. 일본의 세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미국은 추축국인 독일·일본·이탈리아를 저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만일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천황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그 다음날인 16일에는 엄청난 피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일본 나가노에 가보면 산 속에 일본 행정부가 들어갈 수 있는 굴을 파놓고, 천황이 굴속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일본은 지하에 그런 기반 시설을 갖추어 놓고 본격적인 전쟁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발생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했습니다.
마침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더 이상 지연시키지 않고 종결짓기 결정했습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지연되면 인류에게 더 많은 피해가 생기니까 빨리 전쟁을 마무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미국은 혼자 전쟁을 종결할 자신이 없어서 소련을
찾아갔습니다. 미국은 소련에게 함께 일본을 저지하고 일본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때 소련은 ‘일·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서 다시 소련을 찾아갔습니다. 미국은 새로운 협상카드를 들고 소련을 찾아간 것입니다.
소련은 추운
지방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언제나 얼지 않는 항구를 얻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소련은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북한에게 남한 침략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이 남쪽을 점령하면 중국은 갈 길이 없어집니다. 중국도 남쪽 길을 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소련과 중국은 한반도로
진출할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소련에게 ‘만일 미·소가 하나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회면 한반도에서 일본 군대의 무장을 해제해야
하는데 38선 이북은 소련이 맡고, 38선 이남은 미국이 맡는다.’는 카드를 제시했습니다. 거기에 소련은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미·소
협상 후에 미국은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때마침 완성한 원자폭탄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했습니다. 소련은 일·소 불가침조약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가 종전 6일 전에 미국이 다시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소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고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소련은 미국 측에 약속한 대로 북한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소련군이 북한에 진군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감독했습니다.
미국군은 배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한 달이 걸려서 남한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이북은 벌써 소련이
무장해제를 다해버렸는데, 남한은 그때부터 정리하려니 대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수많은 투쟁을 하다가 결국은 1948년에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 남쪽은 남쪽대로 정부를 세우고, 북한은 북한대로 정부를 세우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남한과 북한은 강대국의 정치적인 부산물로
분단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1945년 10월 24일 미국·영국·프랑스 등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연합국을 중심으로
국제연합(國際聯合: UN)이 창설됩니다. 국제연합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창설된 국제연맹의 후신(後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제3차 세계대전 781
제1차 세계대전은 땅을 뺏기 위한 싸움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은 사람 뺏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제3차 세계대전은 사상전에 될 것입니다. 땅을 뺏고, 사람을 뺏고, 사상을 뺏기 위한 것이 3차에 걸친
세계대전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21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에 제3차 세계대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21년이 지나서 일어날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21수의 관계를 갖고 연결해왔기 때문입니다.
또 제3차
세계대전에서는 하나님 편의 승리로 세계 통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월남전이 그런 형태로 1966년부터 1978년까지 12년 동안 아시아에서
일어났습니다.
원래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반도는 재림주가 와서 기반을 닦아놓았기 때문에 피를 흘리면 안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아시아권의 월남전쟁 때 한국의 젊은이들이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제3차 세계대전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역시 하나님 편과 사탄 편이 싸우는데, 세계적인 기준에서 아시아권에서 갈라져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은 아벨형, 사탄 편은
가인형을 말하는데 편의상 하나님 편, 사탄 편이라고 하겠습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사탄 편은 북한이 아담의 입장이고, 중국은 해와의 입장이고,
소련은 천사장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은 한국이 아담의 입장이고, 일본은 해와의 입장이고, 미국은 천사장의 입장입니다.
한편
아시아를 보면, 한국도 남북으로 갈라졌고, 중국도 대만과 본토로 갈라졌고, 일본도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사탄 편은
북한·일본의 조총련·중국입니다. 하나님 편은 한국·일본의 민단·대만입니다. 이처럼 아시아는 나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싸움에서는
무력으로 하나 될 것이냐, 사상으로 하나 될 것이냐? 무력으로 싸우면 인류는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제3차 세계대전은 사상전으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사상전은 어떻게 치를 것이냐? 진리와 사랑을 무기로 삼아야만 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편이 반드시 승리합니다. 아담이
잃어버린 삼대축복을 예수님이 3대 시험에 이겨서 사탄에게서 찾아왔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은 제3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이 삼대축복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이 승리하면 세계평화연합본부(世界平和聯合本部)라고 하는 세계를 치리할 세계정부(世界政府 :
World Government)가 수립될 것입니다.
4) 세계대전의 사탄 편 중심인물 783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의 빌헬름 2세(별칭 카이저)가 개성완성(個性完成)의 자리에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카이저는 1차로 등장한 세계적 사탄 편
중심인물입니다. 그는 자녀 번식형(子女繁殖型)으로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웠고, 만물 주관형(萬物主管型)으로 세계 제패정책을 세웠습니다.
범게르만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전 당시 독일의 주도하에 모든 게르만족을 규합하여 세계 지배를 실현하려고 내세운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범게르만주의도 막을 내리고 맙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카이저가 아니고 히틀러(=個性完成型)를 중심으로 전쟁을 했습니다.
히틀러는 2차로 등장한 세계적 사탄 편 중심인물입니다.
카이저는 에덴동산의 타락한 아담 입장이고, 히틀러는 장성기의 예수님 입장입니다.
히틀러의 일생은 예수님의 생애와 비슷합니다. 히틀러도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혼 대상이 바로 게르만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게르만 민족화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수습해서 하나님의 아들딸을 만들려고 하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히틀러도
범게르만주의(=子女繁殖型)를 내세우면 세계제패정책(=萬物主管型)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사탄의 근성입니다.
3차로 등장한 세계적 사탄 편
중심인물은 소련의 스탈린9=個性完成型)입니다. 스탈린은 “노동자여! 농민들이여! 대동단결하라!”고 외쳤습니다. 노동자·농민 대동단결은
자녀번식형(子女繁殖型)입니다. 스탈린은 세계적화 정책(=萬物主管型)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도
패했습니다.
5) 세계대전의 원인과 결과 784
탕감복귀섭리로 본 세계대전의 내적인 원인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탄의 최후 발악으로 인해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3대 축복을 이룬
형태의 세계를 사탄이 앞서 비원리적으로 이루어 왔으므로 그것을 복귀하는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셋째,
예수님의 3대 시험을 세계적으로 넘기 위하여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넷째, 주권 복귀를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3차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하나님 편이 승리하여 복귀섭리의 모든 기대를 완전히 탕감복귀함으로써 아담·해와의 타락 이후
유구한 역사를 거쳐 하나님이 이루려 했던 창조본연의 이상세계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1) 탕감조건으로 본 제1차
세계대전 785
제1차 세계대전은 삼대축복 복귀의 소생적 탕감조건을 세계적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름으로써 예수님의 1차 시험에 승리한 입장을 복귀하고, 주권 복귀의 소생적 기대를 조성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에
끝났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하나님 편이 승리함으로써 제1차 축복 복귀의 소생적 재림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재림주가 어느 여인의 복중에
잉태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된 것입니다.
(2) 탕감조건으로 본 제2차 세계대전 785
제2차 세계대전은 삼대축복을
복귀하는 장성적 탕감조건을 세계적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름으로써 예수님의 2차 시험에 승리한 입장을 탕감복귀하고, 주권
복귀의 장성적 기대를 조성합니다.
당시 사탄 편에서 예수형 인물인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그 체제가 붕괴하고, 사탄 편 재림주형 인물인
스탈린을 중심으로 공산주의가 세계적 기반을 지니고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중심하고 영적인 왕국을 건설하는 시대가 지나가고,
재림주님을 중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룰 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장성기는 재림역사의 출발기이므로 그때 많은 성도들이 예수
재림에 관한 계시를 받아 신령역사(神靈役事)가 일어납니다. 따라서 기성종교는 더욱 혼돈되고 세속화함으로써 종교의 사명을 잃고 분열하게 됩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모든 종교를 통일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하나의 말세현상(末世現像)입니다.
(3) 탕감조건으로 본 제3차
세계대전 786
제3차 세계대전은 삼대축복을 복귀하는 완성적 탕감조건을 세계적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제3차
세계대전을 치름으로써 예수님의 3차 시험에 승리한 입장을 탕감복귀하고, 주권 복귀의 완성적 기대를 조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조상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세계를 주관하라(창세기 1장 28절)고 축복하셨기 때문에 사탄이 먼저 타락인간을 앞세워 그 축복을 완성한 형태의
비원리세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뒤따라 사탄이 이루어놓은 세계를 하나님 편으로 복귀해 나가는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므로 복귀섭리역사의 종말에는 하나님 편과 사탄 편이 모두 세계를 주관하는 데까지 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세계로 양립되었습니다. 그러한 두 세계의 최종적인 통합을 위하여 세계적인 전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3차
세계대전입니다.
제3차 세계대전은 최종적으로 민주세계로 하여금 공산세계를 굴복시키도록 함으로써 복귀섭리를 종결하고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전쟁입니다.
복귀섭리로 보면, 제1차 세계대전까지 하나님 편에서 식민지를 세계적으로 확보함으로써 복귀섭리를 위한 정치와
경제의 판도를 넓혀 민주주의의 소생적인 기대를 세웠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주주의 장성적인 기대를 세웠습니다.
이제 제3차
세계대전에서는 재림주님의 새로운 말씀에 따라 완전한 아벨형 인생관을 세움으로써 민주주의의 완성적인 기대를 조성하고 그 기대 위에서 온 인류를
하나의 세계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제3차 세계대전은 복귀섭리역사에서 3단계까지 연장하면서 사탄에게 내주었던 모든 기반을 되찾으려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전쟁입니다. 타락으로 야기한 모든 죄악역사를 하나님 편에서 횡적으로 탕감복귀하는 최종적인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 세계대전의 귀결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를 선악으로 분립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는 하나님 편과 사탄편으로 분립되었습니다. 쪼개지 않으면 하나님도 상대할 수 없고, 사탄도 상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쪼개고, 비둘기를 쪼갰듯이 세계를 하나님 편과 사탄 편으로 쪼갰습니다.
그러나 제3차 세계대전에서는 쪼개놓은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야 합니다. 분립된 세계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입니다. 분립되기 전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릅니다. 어떻게
가야 옳은 것인지는 분립되어야 보입니다. 제3차 세계대전은 분립된 세계를 구분하여 하나님 편으로 통일하기 위한 전쟁입니다.
전쟁을 통해 두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데, 무력전(武力戰)은 인류를 멸망으로 모는 무모한 짓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3차 세계대전을
이념전(理念戰)·사상전(思想戰)으로 유도하실 것입니다.
사상전은 하나로 가는 몸부림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갈라졌으니 사상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시는 자가 승리합니다.
3차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하나님 편이 승리하고 복귀섭리의 모든 기대를 완전히 탕감복귀함으로써 타락 이후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하나님이 이루시려던 창조본연의 이상세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책임분담 수행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제9장 재림론
한국은 메시아가 오실 수 있는 동양 3국 가운데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조건만 가지고는
한국에 주님이 오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한국만을 위한 주님이 아니고 세계 인류와 역사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만민이 확인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공식적인 조건을 갖춘 나라에 찾아오십니다.
서론 790
인간 조상 아담과 해와를 창조한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창조이상을 완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다 잃어버렸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직후부터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서 창조이상을 완성하기 위한 섭리를 하신 것이 인류역사이고 복귀섭리역사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창조이상을
이루지 못한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후아담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예수님은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시 오시는 주님 만나는 것을 소망해 왔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세
번째 아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3차로 완성되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세 번째 아담을 중심으로 반드시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자유와
평화와 통일과 행복의 세계가 지상과 천상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 곧 재림주는 기독교에서만 기다리는 분이 아닙니다. 불교에도
미륵불(彌勒佛) 신앙이 있어서 나름의 준비를 하며 미륵불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미륵불은 불교의 재림부처입니다. 유교에서도 공자를 존경하고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신앙자들이 신공자(新孔子)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신공자는 재림공자일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마다
재림을 소망하고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재림주와 미륵불과 신공자가 각각 따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모든 재림의 신앙이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는 하나님의 아들 한 분에게 귀결됩니다. 그 분을 중심해서 새로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편성하기 때문에 인류는 모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재림주를 기다린다는 것은 모든 종교를 통일할 수 있고, 모든 사상을 통일할 수 있는 중심된 지도자를 기다리는
것이며, 인류의 참된 부모가 되는 소망의 중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재림주님은 어떻게·언제·어디로 오실 것인가를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1. 재림주는 어떻게 오시는가 791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왔습니다.
첫째는 성령 강림이 곧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생각이고, 둘째는 영체(靈體)로 재림할 것이라는 생각이며, 셋째는 구름을 타고 재림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이견은 결국 ‘예수님의 직접적인 재림이냐, 사명적인 재림 곧 제3 아담의 출현이냐?’ 하는 문제로
압축됩니다.
1) 성령의 강림이 재림인가?
성령의 강림을 예수님의 재림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사도행전 8장
15~19절). 그런데 예수님과 성령은 같은 분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절까지를 보면, ‘오순절 날이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이미 그때 예수님이 재림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후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었지만, 이후에도 성도들이 줄곧 주님의 재림을 고대해 온 것으로 보아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가운데 예수님의 영적 지도를 받거나 성령의 은사를 풍성히 받는 사람은 ‘내게 주님이 오셨구나.’라고
느끼며 그것이 재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원래 하나님이 뜻하시는 재림이 아닙니다.
2) 예수님은 영체로
재림하시는가? 792
두 번째는 예수님의 영체(靈體)가 성도와 함께하고 성도를 지도하는 것을 재림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영체가 이 땅의 인간에게 임하는 것이 재림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 역시 재림의 근본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 영체로 수없이 나타났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 있던 사람은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갔을 때도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자,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장 20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영체가 나타난 것을 재림이라고
한다면 여러 차례 나타났던 예수님은 이미 재림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속히 오리니.’하셨고, 또 사도
요한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한 것을 볼 때 영체로 재림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3)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인가? 793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재림주는 구름을 타고 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는 예언이 있고, 육체로 오신다는 예언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0절을
보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장 7절에는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오신다면 누구든지 주님이 오시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2서 1장 7절을 보면,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2장 5절을 보면,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장차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지려면, 주님은 반드시 여인을 통해 태어나야 합니다.
성서에 기록된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예언과 육체로 오신다는 양면의 예언에
대한 현명한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성서관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 성서의 예언과 예수님의
출현 794
서로 다른 성서관은 기독교인들에게 갈등과 분쟁의 실마리가 되고, 교파의 분열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서 말하는 참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참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종래와 다른 관점에서 성서의 면밀한
관찰과 함께 역사적인 통찰이 필요합니다.
말라기 4장 5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크고 두려운 날은 메시아가 오시는 날을 말하는데, 그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먼저 보낸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엘리야 선지자는 남북왕조 분립시대에 남조 유다에서 태어난 유명한 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을
보면,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 초림(初臨) 당시에 서기관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0절부터 13절을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비로소 예수님의 엘리야에 대한 말씀이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대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난 세례 요한이 엘리야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11절부터 13절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에 앞서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시켜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마태복음 11장 2~3절), 예수님은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태복음 11장 14절)고
대답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과 예수님의 사명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세례 요한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외형을 가지고 두 사람을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이종간(姨從間)인 세례 요한은 대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훌륭한
신앙자였고,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형님의 입장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려서부터 훌륭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유대 민족은 그런 세례
요한을 얼마나 위대하게 봤는지 누가복음 3장 15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인가 심중에 의논하니···’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 한마디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믿고 따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초라한 예수님 앞에 그렇게 위대한 엘리야를
세워 그가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전체를 하나 되도록 하고 민족을 한꺼번에 수습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고 하더라고 전합니다. 그 말을 듣고 유대 민족은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이에 신앙의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대제사장 사가랴 집안의 아들로 광야에서 수도생활을 한 위대한 신앙인이었고, 예수님은 이적과 기적을 보여주니 두 사람 다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게 가서 ‘네가 누구냐?’(요한복음 1장 19절)고 물었습니다.
그때 만일 세례 요한이 자신이
엘리야하고 고백했으면 다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예수님은 유대의 왕이 되고 인류의 메시아로 출발했을 것인데, 세례 요한은 그만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요한복음 1장 21절)하고 부정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네가 그 선지자냐.’(요한복음 1장 21절)고 묻자 세례
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요한복음 1장 23절)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또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요한복음 1장 25절)고
물었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로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요한복음 1장 26~27절)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며 예수님을 부정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비교해 볼 때 유대 민족에게는 예수님보다 세례 요한이 훨씬 훌륭하게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했지만, 세례 요한은 자신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유대 민족은 세례 요한의 말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이 배신하고 대제사장·서기관·율법사들이 배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처럼 엘리야의 재림을 놓고 유대교인과 예수님의 해석이 달랐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엘리야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다시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엘리야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사명을 가진 어떤 새로운
인물이 한 여인을 통해 탄생했다고 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엘리야가 다시 온다고 했으므로 구약의 엘리야와 다시오는 엘리야를 동일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 한 여인을 통해 태어난 새로운 인물이 엘리야의 사명을 하러 온다고 보았습니다.
유대교인들은 문자 그대로 엘리야가 구름을 타고 온다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이를 다른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유대교인과 예수님의 엘리야 재림에
대한 성서 해석법이 달랐는데, 오늘 우리 시대의 재림을 놓고 볼 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주 큽니다.
사도행전 1장 9절 이하를 보면,
십자가 죽음 이후 예수님이 부활하여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이르고,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장 11절)고 하면서 책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구름을 타고 승천한 예수님처럼 재림주가 다시 구름을 타고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구름을 타고 오실 줄 알고 있던 유대교인들과 똑같이 성서를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구약에도 메시아에 대한 두 가지 예언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서 7장 13절에는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7장 14절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며 예수님이 오실 때 여인을 통해 육신을 쓰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와 이사야 선지자는 구약시대의 유명한 예언가요 대선지자입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온다고 예언했고, 이사야 선지자는 육신을 쓰고 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마리아를 통해 육신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2)
성서적으로 본 재림 798
요한계시록 1장 7절을 보면,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의미하고, 다시
오실 재림주님을 뜻합니다.
반면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같은 요한계시록인데도
이 두 구절은 완전히 상반됩니다. 재림주에 대한 양면의 예언은 예수님 때인 2000년 전과 똑같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문자 그대로
구름을 타고 오지 않고 육신을 쓰고 왔듯이 재림주도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쓰고 오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라는 구절은 재림주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면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는 성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말은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또 누가복음 17장 21절에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고, 누가복음 17장 23절에는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아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셨다면 가지 말라고 해도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던 사람들도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들리고, 메시아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면 누구나 다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구름을 문자 그대로 본다면 해석이 안
되는 구절입니다. 재림주님은 육신을 쓰고 오시므로 누가 주님인지 모른다는 말을 비유한 것입니다. 또 말세에는 영통을 하여 자기가 주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대혼란이 벌어지기 때문에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고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5절을 보면, 메시아가 먼저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으리라 했고, 그 다음 26절에는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그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서의 많은 부분이 문자 그대로 구름을 타고 온다면 해석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천국에 가지 주님만 부르면서 쫓아다닌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세상에는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독실한 신앙인 중에는 아예 그 날을 위해서 성전에서 자고, 먹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믿는
사람이 많은데, 끝날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은 구름을 타고 온다고 믿는 성도들은 많지만 육신을 쓰고 온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3) 원리적 근거로 본 재림 800
메시아가 구름을 타고 와야 하는지,
육신을 쓰고 와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리를 통해 규명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영인체(靈人體)와 육신(肉身)으로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영(靈)과 육(肉) 양면으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영육으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아 예수님을
후아담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영과 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을 영육으로 구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영적으로 부활하셔서 영적인 구원의 길만 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써
영적 구원의 길은 개척했지만, 육적 구원의 길은 남겨놓은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아담을 통해 이루려던 창조이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육신을 쓰고 하나님이 주신 수명을 다했다면 하나님의 뜻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시고 뜻을 이루라고 유대 민족을 선민으로 택해서 길렀는데, 그들이 몰라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메시아가 구름 타고 오신다는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름 타고 오시지 않고, 육신 쓰고 오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예수님께서 남겨놓으신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에 육신을 쓰고 오시는 것입니다.
구름의 의미 801
요한계시록 1장 7절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놓고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구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면 성서에서 양면으로 예언한 재림의 실상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볼 때 물이 증발하면 구름이 됩니다. 구름은 물보다 더 깨끗합니다.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되고, 수증기가 모여
구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물을 타락한 인간에 비유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5절에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물은 타락한 인간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다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믿으면
성도가 됩니다. 깨끗하지 못한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되고, 그 수증기가 모여서 깨끗한 구름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더러운 물이 증발해서
생긴 깨끗한 구름과 타락하여 더러운 세상으로 추락했다가 구원을 받아 선한 본성을 되찾은 성도는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구름을
많은 사람이 모인 것에 비유합니다.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비유할 때 ‘사람이 구름같이 무였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한 곳에
많이 모인 사람들을 구름에 자주 비유했습니다.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뜻은 준비된 성도들을 통해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아무데나 보낼 수 없습니다.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워서 그 기대가 이루어지면
메시아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우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성도들을 통해서 메시아가 온다고 하는
말을 성경에서는 구름을 타고 온다고 비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 사람들이냐?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놓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따라서 구름 타고 오신다는 말은 준비된 성도들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신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의
의미 802
사도행전 1장 9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후 부활하셨다가 하늘로
승천할 때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어찌하여’는 책망하는 말입니다. 또 ‘너희 가운데 들려 올라 가신 예수는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앞 내용은 쏙 빼버리고 뒤의 구절만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늘로
승천하시는 그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구름 타고 온다고 믿어왔습니다.
이 말씀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첫 번째는 하늘을 쳐다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 가운데 들려 올라가신 예수님이 본 그대로 오리라는 말은 지금 구름 타고 올라가는
현재진행을 보지 말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의 전생애노정을 보라는 것입니다.
전 생애를 보면, 예수님의 일생은 비참했습니다.
말구유에서 탄생하고, 아기 때 애급으로 피난을 가고, 열두 살 때 복음을 전파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합니다.
30세가 될 때까지
뜻을 펴지 못하고 꽃다운 젊은 청년 기간을 목수인 아버지 요셉의 조수 노릇을 했습니다. 그리고 30세에 집을 나와 3년 동안 복음을 전파하다가
33세의 나이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성령이 강림해서 그들의 신앙이
뜨거워졌습니다. 제자들이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 역사의 열기를 가지고 로마로 전도를 나갔습니다. 전도하다가 붙잡히면 사자의 밥이 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때 만일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내가 2000년 이후에 어느 여인의 몸을 통해서 다시 온다.”고 했다면
누가 그 고난의 길을 가면서 예수님을 증거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랬다면 오늘날 이 땅 위에 기독교의 역사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이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이요, 인류가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구름 타고 오신다고 한 이유
803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전도하다가 붙잡히면 로마 광장으로 끌려가 며칠씩 굶주린 사자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고난의 길을 가면서도 ‘살아 계실 때 주님을
불신했지만 주님이 오늘이라도 구름을 타고 오실지 모르니 주님을 배신하지 말고 기다리자.’는 믿음을 더욱 굳세게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을 가지고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구름을 타고 온다는 말은 성도들의 신앙을 격려하기 위해서 필요했습니다.
또
하나는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구름타고 온다고 했는데도 영계를 알고 신령해지면 자기가 주님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 자기가 주님이라고 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한국만 봐도 한 달에 몇 명씩 자기가 주님이라고 적은 전단을 전봇대에 붙여놓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데 적그리스도(敵Christ)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대혼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저기
가보고, 왔다갔다 하다가 자기의 일생과 가문을 망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영을 물 붓듯 부어준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고 했듯이 남녀노소 모두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6000년에 걸쳐 지상에 왔다 간 영계의 모든 영인들이 지상에 총출동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이
벌어지겠습니까?
영적으로 벌어진 혼란은 오직 영적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진리와 영적 지도자만이 막을 수 있습니다. 그 권세를 가지고 오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어떤 신령한 사람이 죽은 사람을 살려놓더라도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을 따라갈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세우신 법도를
따라갈 것이냐를 놓고 고민해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을 가지고 죽은 사람을 살렸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능력은 인정하되, 하나님을 향해가는 길을 포기하고 따라다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계를 통하는 사람은 대개 말로가 좋지 않습니다.
영계를 통할 때는 정성을 들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한 영계가 동원됩니다.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사람들이 따르면 그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교만해지면 선한 영인들이 역사하지 않고, 악한 영인들이 역사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 줄 알고 믿다가 멸망의 길로 가기
쉽습니다.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을 타고 온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서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재림주는 언제 오시는가? 805
마태복음 24장 36절에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부터 2절에는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을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고 했습니다. 앞에
열거한 두 성구는 재림의 시기를 알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한편 아모스 3장 7절에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먼저 선지자들에게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노아 때에도 홍수심판이 임하리라고 알려주고 나서 홍수심판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홍수심판을 하겠으니 방주를 지으라고 미리 알려주셨습니다(창세기 6장 13~14절).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할 때에도 하나님은
가르쳐주었고(창세기 19장 12~13절),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도 니느웨 성의 멸망을 예고했습니다(요나 3장 4절).
예수님의 탄생도 미리
가르쳐주었습니다. 마리아·요셉·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이 탄생하는 것을 알았습니다(마태복음 1장 18~23절, 2장 1~6절). 그러나
제사장·율법사·서기관 등은 지도자였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그들이 무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를 자기 방식대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판단하고 자기 관념으로 보았습니다.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동방박사들은 이 땅에 구세주가 왔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준비된 유대 관원들은 메시아가 탄생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고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다가 몰랐다는
것입니다.
1) 재림의 때는 어떻게 알 수 있나? 806
데살로니가전서 5장 4절에는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3장 3절에는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도적같이
아무도 모르게 오시더라도 지혜롭고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도적같이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천국을 맞을 수 있는 사람을
놓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했습니다. 열 처녀 중에서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신랑을 맞으러 나섰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도 없이 등만 가지고 갔고, 슬기있는 처녀들은 기름과 등을 함께 가져갔는데,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거나 잠을
잤습니다.
밤중에 신랑을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에 불을 켰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꺼져갔습니다. 다급해진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8절)면서 사정합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처녀들이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라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9절)면서 거절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할 수
없이 기름을 사러 갔습니다. 그 동안에 신랑이 왔습니다. 기름을 사러 갔던 처녀들이 돌아와 보니 예비한 처녀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이
닫혔습니다. 남은 처녀들이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11절) 하고 애원했지만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그런즉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2~13절)
지혜로운 사람과 깨어 준비하는
사람은 신랑 되시는 주님을 맞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하고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하기 때문에 가르쳐주어도
모릅니다.
(1) 복귀섭리를 통해서 807
주님이 오시는 때는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복귀섭리는 메시아를 보내는 섭리이기 때문에 복귀섭리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어떻게 보내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아브라함 때까지 모든 탕감복귀섭리를 완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노아·아브라함 3대에 걸쳐서 완성해야 할 탕감복귀섭리를
아브라함이 헌제를 실수함으로써 아브라함가정에서 다시 3대를 거쳐 종적인 탕감조건을 횡적으로 찾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 탕감복귀 원칙에
따라 아브라함에서 이삭을 거쳐 야곱에 이르러 3대 만에 처음으로 에서와 야곱, 곧 가인 편과 아벨 편이 하나 되어서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는
기대를 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과 야곱 대(代)에 메시아가 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메시아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이 얍복 강에서 천사와 싸워 승리한
후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 민족을 택함 받은 민족, 즉 선민(選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준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민족이
형성되어야 메시아가 오시기 때문에 애급에서 자손을 번식하여 데리고 나와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고 그 기반을 통해 예수님을 보낸 것입니다.
아브라함가정에서 비로소 메시아를 맞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애급고역 400년, 모세를 중심해서 출애급한 뒤에 사사시대 400년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다윗 왕·솔로몬 왕의 통일왕국시대까지 210년, 말라기 선지자를 중심해서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 400년을 거쳐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후부터 예수님까지는 1930년입니다. 400년, 400년, 120년, 400년, 210년, 400년을
더하면 1930년입니다. 예수님이 30세가 되어서 메시아를 선포했으니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1930년 만의 일입니다. 복귀역사는 예수님 한 분을
통해서 전시대와 후시대로 갈라집니다. 그것을 기원전, 기원후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복귀섭리역사를 완성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다시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야곱의 12자식과 70가족이 애급에 가서 고역을 산 것처럼, 예수님의
12제자와 70문도가 로마제국으로부터 400년 간 박해를 받습니다.
그 후에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 400년, 기독왕국시대 120년이
잘못되었으므로 그 시대를 탕감복귀하는 동서왕국 분립시대 400년,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를 탕감복귀하는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을
거쳐 루터가 나와서 종교개혁을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후 400년 동안 메시아 제강림을 준비해서 재림주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의 잘못으로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유대 민족사는 다시 오시는 재림주의 섭리사에서 제외됩니다. 그래서 섭리는 서양사로 옮겨집니다.
재림주가 오기까지 동시성 연도를 전부 합치면 1930년입니다.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기 때문에 1517년에다 400년을 더하면
1917년이 나옵니다.
그래서 1917년부터 1930년 사이에 재림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1920년경에 오셔서 40세가 될 때까지
메시아의 길을 걸어 승리하시고 1960년에 참부모 선포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 이후부터 예수님까지의 1930년에다 예수님이
30세가 되어 메시아를 선포한 해를 합친 1960년과도 일치합니다.
(2) 종말현상으로 보아 809
재림주님이
오시는 때는 종말현상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2절에서 33절을 보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3대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담이 잃어버린 3대축복을 3대 시험을 통해서 사탄으로부터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됨으로써 사탄에게 그것을 또 내어주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재림주가 오실 때는 사탄 편과 하나님 편으로 갈라져서
싸워야 하기 때문에 선과 악으로 분립된 세계적인 전쟁이 있게 됩니다. 세계적인 전쟁도 결국엔 제3차 세계대전으로 마지막을 종결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때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때까지라고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땅 빼앗기 싸움입니다. 강대국이 약소국가를 침략해서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하나님 편이 승리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3대 축복 가운데 제1차 축복 복귀의 기대를 세웠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메시아의 잉태가 결정된 때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한국이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은 그때 일제치하에 있었습니다. 나라도 없고, 주권도 없고, 백성도 없는데 메시아가 올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메시아가 찾아오실 수 있는 나라가 되려면 잠시나마 조국이 있어야 하고, 민족이 있어야 하고,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는 한국 유학생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을
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독립운동이 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1919년 3월 1일 천사장권에서 예수님의 33년 생애를 대표하는 33인의
민족대표가 서울 파고다공원에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음력 3월 1일(양력 1919년 4월 1일)에 해와의 입장에서
16세인 유관순을 통해서 독립운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음력·양력으로 3월 1일을 중심으로 남자들은 천사장의 입장에서, 유관순은 해와의
입장에서 독립운동을 함으로써 메시아를 잉태할 수 있는 기대가 조성된 것입니다.
그렇게 3월 1일을 기점으로 어느 여인의 복중에서 메시아의
잉태가 결정되면 그 때부터 열 달을 지나 1920년 1월 중에는 반드시 재림주가 이 땅 위에 탄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수리적인 하나님으로서
구체적인 섭리를 해오셨는데, 메시아를 보내는 섭리에서도 주먹구구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된 터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사람을
빼앗기 위한 싸움입니다. 6수는 여섯 째날 인간을 창조한 수입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메시아의 섭리가 본격적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그 때 한국은 해방되었지만, 어디로 갈지를 모르고 방황했습니다. 일본도 패망했지만 어디로 갈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미국·프랑스 등 승전 3개국도 승리는 했지만 세계를 어디로 이끌고 가야할지 몰랐습니다. 아시는 분은 오직 메시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그런 준비를 다 해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때가 1945년이니까 1920년에 탄생하신 메시아는 26세의 젊은
청년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준비를 이미 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 간 준비했던 기독교가 배신하고, 영적 단체들이 다 배신하고,
승리한 영국·미국·프랑스가 배신했으므로 메시아는 그 기반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홀로 옥중에서 개척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40년의 역사를 다시 40년으로 탕감해서 40세에 출발하려고 했던 그 나라를 잃어버리고, 80세가 되어서 모든 것을 다시 펴나가는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제3차 세계대전은 하나님 편과 사탄 편이 마지막으로 사상전을 전개하는데, 반드시 하나님 편이 승리하여
평화통일시대가 도래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 없고, 만민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사는 만민평등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그 중심은 반드시 하나님이
되어야만 합니다.
3. 재림주는 어디로 오시는가? 812
마태복음 10장 23절에는 이스라엘을 다 돌기 전에 주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28절을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로 오시지만 유대 민족이 사는 이스라엘로 오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민족은 예수님을 살해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민족은 2000년 간 나라 없는 설움의 벌을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600만 명이 처참하게 학살당하는 탕감의 고역을 치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떤 민족을 세워서 실패하면 그 민족을 다시 중심에
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림주님은 유대 민족이 사는 이스라엘로 오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장자
기업을 빼앗은 뒤 하란 땅에 가서 가족을 찾고 재물을 취해서 얍복 강에 왔을 때 천사와 싸워서 승리합니다. 그 때 천사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세기 32장 28절)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입니다. 또 야곱은 영적 사탄을 굴복시킨 다음 실체 사탄 편에 있는 형님 에서를 자연
굴복시키고 나서야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믿음의 승리를 뜻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생긴 사탄의 핏줄을 정리하는 혈통의 승리는 믿음의 기대 위에 메시아가 오셔야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세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믿음의 승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개인도 믿음의 승리를 세우면 이스라엘이 될 수 있습니다. 민족도, 국가도 그렇습니다.
유대 민족만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어떤 가정이든지 어떤 나라든지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승리적 기대만 세우면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11절을 보면,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나게 하기 위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이미 다른 민족으로 옮겨갔습니다.
유대 민족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도 않고, 재림주가
오시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믿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교리에 집착하여 살다 보니
섭리의 때도, 섭리역사의 내용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로 오신다고 하는 말씀은 유대 땅에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메시아를
보내주시면 잘 모시고 잘 받들 수 있는 믿음을 세워 승리한 민족에게 메시아를 보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가 어느 나라일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3절부터 43절을 보면, 주인이 포도원을 경영하다가 그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타국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가을이 되어서 수확한 과일을 받아오라고 종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고, 종들을 때려 쫓아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고, 종들을 때려 쫓아보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다른 똑똑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보낸 종들을 죽이고 과일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자기 외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아들은 장차 자기가 경영하는 포도원의 상속자가 될 것이니 죽여 버리면 포도원이 자기들 것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성 밖으로 데려가서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 후에 주인은 포도원을 악한 농부들에게 주지 않고 뺏은 뒤 열매를 수확하여 잘 갖다 줄 다른 농부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선민권(選民圈)을 말합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빼앗아 다른 농부에게 준다는 것은
선민권이 옮겨진다는 뜻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을 비유했습니다. 농부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4대 선지자와 12소선지자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냈는데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 악한 농부들은 멸하고
포도원을 빼앗아 다른 농부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선민권을 빼앗아 타국민에게 옮겨준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것처럼 로마서
11장 11절에 ‘저희가 넘어짐으로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넘어져서 구원이 이방으로
옮겨졌으니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2000년 전에 보내주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믿었더라면 오늘날 이스라엘은 세계의
중심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새로 선민권을 받게 될 나라는 요한계시록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2절과 3절을 보면,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린 양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말합니다. 어린 양인 재림주가 해 돋는 곳, 즉 동방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동쪽에서 해가 돋지만 지구 전체를 놓고 볼 때 동방은 아시아입니다. 아시아에도 중동이 있고, 동남아시아가 있고, 극동아시아가
있습니다. 동방은 극동을 말하는데, 중국·일본·한국 3국 가운데 한 나라입니다. 이 세 나라는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동방 3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세 나라 가운데 한 나라로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일본·한국 세 나라 중 한 나라에 주님이 오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중에서 중국은 인구가 많고 땅은 넓지만 공산주의 국가이고, 종교 박해 국가이기 때문에 주님이 오실 수 없습니다. 중국에 메시아를
보내면 죽이고 될 것입니다.
일본도 침략국가였고 종교 박해 국가였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당시 세계 제패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종교를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 편이 아니고 사탄 편입니다. 그러므로 일본에도 메시아가 오실 수 없습니다.
메시아는 한 민족만을
위한 분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역사노정을 놓고 인류의 문제를 수습해야 할 분이요, 참된 부모이기 때문에 그 분은 어떤
민족이나 어떤 국가만을 위해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대해 검토해보겠습니다. 한국은 과거부터 선한 민족이 사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한국 속담 가운데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한민족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민족에게는 여섯 가지 중요한 민족적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경천애인사상(敬天愛人思想)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상이 한민족의 중심사상입니다. 경천애인사상은 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며, 예수님의 중심사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장 37~4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천애인사상은 평화의 사상입니다. 한민족은 먼저 전쟁을 도발하지 않았습니다.
싸움을 먼저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민족의 역사를 보면, 외적으로 과학기술과 군사기술이 발달되어 있을 때에도 그것을 자랑하거나 이용해서
약소국가를 침략한 적이 없습니다. 반만년 역사 가운데 93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침범을 받고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없어지지 않고 남은 민족은
지구상에 오직 한민족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민족은 평화를 주장하고 평화사상을 주도했습니다.
한민족의 교육이념은
홍익인간(弘益人間)입니다. 자기 민족만을 위하는 인간이 아니라 세계를 위하고, 하늘땅을 위하고, 넓게 두루 쓰일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홍익인간의 정신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킨다든지, 자기 민족을 위해서 타국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전체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홍익인간의 정신이고 대한민국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런 사상이 바로 하나님의
사상입니다.
둘째로 한민족은 도(道)를 추구하는 도의민족(道義民族)입니다. 한민족의 사상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왜 도의민족이고 선한
민족이며,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생활은 바로 효(孝)의 생활로 나타납니다.
효는 부모와 자식 간에 세워지는
도리입니다. 천지의 근본 법도는 부자(父子)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하고 고귀한 부모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의 근본 법도인 부자의 법을 세울 수 있는 사상이 효의 사상입니다.
한민족은 어떤 민족보다도 효의 사상이 강한
민족입니다. 한국의 시골 마을에 가보면 마을마다 동구 밖에 효자·효녀비가 없는 마을이 거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것 이상으로,
자식도 부모를 위해서 살려고 일생을 노력한 흔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를 위해서 일생을 살고, 부모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 부모를
어떻게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묘 옆에 초막을 짓고 부모가 주신 머리카락, 부모가 주신 수염
하나까지도 귀하게 여기면서 머리도 깎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살아 계실 동안 효를 다하지 못했던 것을 속죄하는 심정으로 3년 간
시묘(侍墓)살이를 했습니다.
색다르거나 귀한 음식이 있으면 살아 계실 때처럼 부모님께 드렸고, 날마다 목욕을 하고, 하루에 세 끼니 밥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며 속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곡식이 없어서 밥상을 차리지 못하면 정갈한 물을 떠다놓고 절을 했습니다.
지구상의 어떤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효의 정신이 한민족 가운데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민족은 다른 어느 민족·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부모와 자식
간의 근본 법도의 중심인 효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민족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효의 정신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셋째,
한민족은 장자권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장자에게 계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차자에게 장자권이
넘어갔습니다. 대한민국은 장자권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해마다 부모님의 기일(忌日)이 되면 제사를 지내는데, 5대가 지나면 후손이 많이 번성해서
어느 집에서 제사를 모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산소에 가서 1년에 한 번씩 시제(時祭)라고 하는 제사를 지냅니다. 그 날은 보통 음력으로
10월 15일입니다.
그 때는 후손들이 전국에서 모입니다. 후손들이 모두 정성으로 들여 제삿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기 위해서 일렬로 섭니다.
그 때 중앙 선두에 장손이 서는 것입니다. 비록 장손이 여섯 살 먹은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선두에 섭니다.
일흔이 된 할아버지라도 장손이
아니면 뒤에 서야 합니다. 그들이 만나서 인사할 때는 어린 장손 앞에 겸손하게 인사합니다. 장자를 중심한 이런 질서와 예절이 지구상에는
없습니다. 반면에 장자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을 한민족은 가지고 있습니다.
넷째, 한민족은 가정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오늘날은 대부분
핵가족이 되어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만, 옛날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대개 한 집에서 3~4개가 모여 같이 살았습니다. 대가족이 같이
살았지만 행복했습니다.
왜 대가족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가정의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조부모가 계시고, 부모가
계시고, 아들딸, 손자, 조카 모두가 모여 삽니다. 그로 인해 가끔 싸움도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마음이 넓습니다. 그 부모 또한
마음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모두가 자기 가정을 중심한 생활만을 합니다. 아기도 하나만 낳자고 합니다. 자식을 한 명만 낳으면
키우기는 쉽지만 자식이 하나뿐이니 부모는 자식에게만 매달립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는 마음이 좁아지고 자식은 독불장군(獨不將軍)이 됩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런 자녀는 나중에 결혼하면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오늘날 세계의 이혼율이 어디서 높게 나타나는지 통계를 내본 결과,
홀로 자란 사람에게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과 부딪쳐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형님·언니·동생들과 함께 자란 사람은 어려서부터 같이
잠도 자고 뒹굴면서 많은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아들 하나 혹은 딸 하나를 낳아 키우다 보니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만듭니다.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심리학자들은 남자아이 하나만 낳아서 키울 때는 장난감을 줄 때 남자아이 장난감뿐만 아니라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상대적 장난감을 주고 길러야 한다고 합니다. 또 여자 아이 하나만 키울 때는 남자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주고 키워야 상대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 자꾸 작아지게 됩니다. 결국은 결혼을 해도 부부가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에서는 가정이 위기에 처했다고 봅니다.
한국인의 민족성을 연구해 보면, 다른 민족은 이해하기 힘든 보이지 않는 심정(心情)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한민족은 여러 형제들이 모여서 대가족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심정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 있으므로 거기에
재림주가 오실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한민족은 혈통을 소중히 여깁니다. 타락으로 인해 핏줄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역사적 한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핏줄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메시아를 보내주는데 메시아는 핏줄을 더럽히거나 마음대로 하는 민족에게는
오실 수 없습니다.
한민족은 어느 민족보다도 핏줄을 소중히 여기는 민족입니다. 한국 민족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족보를 갖고 있습니다. 일본은
명치시대(明治時代)까지 성(姓)도 없었습니다. 성이 없으니까 질서가 없습니다. 사촌과 부부가 되기도하고, 가까운 친척끼리도 부부가 되었습니다.
근친상간으로 문제가 많이 생긴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8촌까지 결혼하지 않는 것은 물론, 동성동본도 결혼하지 않습니다. 한민족은 족보를
가지고 핏줄을 소중히 여겼는데, 다른 나라에는 족보를 가지고 있는 종족이 없습니다. 나라마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개는 족보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족보가 없습니다. 한민족이 유일하게 족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진돗개도 족보가 있습니다. 좋은 혈통을 가진 진돗개는
족보에 올려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한 족보를 가진 개 주인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집니다. 핏줄이 섞일까봐 조심하는 것입니다. 개를 놓고도
그러는데 사람이 핏줄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사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정말 소중히 지켜야 할 혈통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족보와 혈통을 소중히 여겨온 것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가 인류의 핏줄을 바로잡는 새 가정 이상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한민족은 단일민족(單一民族)입니다. 탕감복귀섭리는 복잡하면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중국은 56개의 소수민족이 있어서
민족마다 언어가 다릅니다. 만일 거기에 메시아가 오신다면 소수민족을 수습하다가 일생을 다 보내버릴 것입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심정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오실 민족은 단일민족이어야 합니다.
한반도에서는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하다가 붙잡혀서 최초로 순교를 당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돌더미에 묻혀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운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사도행전 7장 60절)라고 기도하며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나라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지만 당신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주권이 없었습니다.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를 전부 사탄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나라가 있어야 당신의 자녀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한민족의 제일 큰 한이 나라를 갖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한민족은 외부로부터 930여 차례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한 민족은 나라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애급에 가서 400년 간 고역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없는 서러움 속에서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자유로운 조국을 원했습니다. 조국을 찾기 위해서 400년 간 고역살이를 하고 가나안 땅에 가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설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그 나라는 사막 한 가운데 나무도 심을 수 없는 돌덩이 같은 산뿐입니다. 풀도 제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발달했는데도 그 정도인데 지금부터 3500년 전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째서 그런 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고
하면서 그 곳에서 살기를 소망하고 이스라엘인들을 애급에서 데리고 나왔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할 수 있는 땅이 있어야 하는데, 좋은 곳은
전부 사탄이 차지하고 있으니까 사탄이 관심도 없고 생각지도 않는 사막지대, 돌무덤 같은 곳으로 데려가서 그곳에다 메시아를 보낼 준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하나님의 소망은 조국 광복입니다. 앞으로 세계는 하나님의 조국으로 화합할 수 있는 소망의 때가 옵니다. 그래서
한민족은 단일민족으로서 조국에 소망을 두고, 조국이 필요하다는 것을 수없이 느끼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4.
재림주를 맞이하는 국가의 조건 822
한국은 메시아가 오실 수 있는 동양 3국 가운데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조건만 가지고는 한국에 주님이 오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한국만을 위한 주님이 아니고 세계 인류와 역사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만민이 확인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공식적인 조건을 갖춘 나라에 찾아오십니다. 주님이 오실 수 있는 나라가 되려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첫번째는 40수의 민족적 탕감복귀가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제물국가(祭物國家)로서 가인과 아벨로 쪼개 피를 흘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물된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심정의 대상국가(對象國家)가 되어야 하고, 네 번째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새로운 문명의 결실국가(結實國家)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메시아가 온다는 예언이 많은 예언국가(豫言國家)라야
합니다. 세계 도처에서 그 나라에 주님이 온다고 예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40수 민족적 탕감복귀
822
재림주님이 오실 국가의 첫 번째 조건은 민족적 탕감복귀입니다.
아담이 완성하면 40수의 완성실체가 됩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40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40수 탕감복귀노정이 역사 속에서 여러 분 반복됩니다. 또 아담이 완성하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이루게 되는데
그것은 사위기대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수가 섭리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냅니다.
제1 이스라엘인 유대 민족은 애급 고역을 400년
간 겪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을 지나서 메시아로 예수님을 보냈는데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몰라보고 죽였습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
박해시대 400년을 지나서 세계적 종교로 출발할 수 있는 제2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제1 이스라엘인 유대 민족은 나라가 있었지만,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평초 같은 신세였습니다. 세계적으로 기독교는 확장되었지만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수없이 박해를 받고 피를 흘렸습니다.
제3 이스라엘이라면 40수를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일제치하 40년의 박해 기간이 있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을 시작으로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의 40년이 바로 민족적으로 40년
탕감복귀노정을 걷는 기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가 되었기 때문에 일제치하 기간은 36년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은 외교관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그 40년 기간은 섭리적인 탕감기간이었습니다.
일제식민통치 40년 간 일본은 한국을 혹독하게 박해하고 핍박했습니다. 심지어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 조상이 물려준 성조차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했고, 언어까지 빼앗겨 강제로 일본어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
고역 400년을 겪은 것을 한국은 일제식민통치 40년 만에 전부 탕감할 정도로 엄청난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한민족은 일본의 침략으로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는 탕감복귀의 계기가 되어 섭리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한민족은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40년 기간이 있었습니다. 1905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한국박해시대는 40년 만인 1945년에 끝이
납니다. 그 때 재림주님을 모셨으면 7년을 거쳐서 1952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반대하여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선악을 분립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로 인해 1948년에 남한과 북한이 각자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결국
남북한은 분단되었습니다.
그래서 1950년에 민족끼리 전쟁을 했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후 1953년에 체결한 휴전 상태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휴전선을 없애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휴전은 전쟁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상태입니다. 언제 다시 전쟁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한반도는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2) 제물국가 824
재림주님이 오실
국가의 두 번째 조건은 제물국가(祭物國家)입니다.
한국은 남북으로 갈라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일본이 미국과 소련에
패망하면서 한반도의 이북은 소련이 맡고, 이남은 미국이 맡아 무장해제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하나의 핏줄인 남북은 둘로 나누어진
분단국가가 되었습니다. 남북을 가르는 38선은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에 그은 것이지만, 그 근원은 아담가정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들로서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참부모요, 아담은 하나님의 몸이므로 실체 참부모가 되어야 하는데,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선과 악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에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을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천사는 인간이 부리는 종이라고 했는데 천사장 루시엘이 아담을 타락시켜서 아담에게 악의 요소가
들어갔습니다. 그로 인해 아담은 선과 악의 모체가 된 것입니다.
아담에게서 사탄의 요소인 악성을 제거하려면 아담을 쪼개어 선과 악을
분립해야 하는데, 아담을 직접 쪼개면 죽기 때문에 아담의 아들들을 사탄 편과 하나님 편으로 분립했습니다. 아담을 쪼갤 수 없으므로 자식들을
하나님 편과 사탄 편으로 갈라놓은 것입니다. 첫 아들 가인은 첫사랑의 표시체로서 사탄 편에 세웠고, 두 번째 아들 아벨은 두 번째 사랑의
표시체로서 하나님 편에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원리의 하나님인데 아담은 타락하여 두 주인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두 주인을 상대하는
비원리적인 존재는 원래 주인된 하나님을 직접 대할 수 없으니 분립해서 각각 자기 주인을 대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둘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분립된 아벨은 아담의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직접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분립된 장자인 가인은 천사장 입장에 세웠으므로 직접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아벨을 통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았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가인이 미워서 제사를 안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이 동생의 제물만 받고 자기 것은 안 받았다고 동생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비롯된 형제의 싸움이 오늘날 인류의 싸움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것이 세계에서 국가 간의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이어지 것입니다. 전쟁의 기원은 형제간의 싸움이었습니다.
가인적 인생관과
아벨적 인생관은 후에 가인적 민주주의와 아벨적 민주주의로 발전합니다. 유럽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중심해서 절대왕정(絶對王政)을
무너뜨렸습니다.
또 산업혁명 이후 근대사회로 발전하는 가운데 유물론·무신론의 사상에 진화론을 받아들여서 공산주의 사상으로
집대성됩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 국가인 미국·영국을 중심한 민주주의, 이 두 사조가 한국에 들어와 충돌했습니다. 하나는 중국 대륙을
통해서, 하나는 태평양을 건너서 한국에서 만났습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이 갈라졌던
형제주의가 이와 같은 체제를 가지고 세계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38선 이북은 김일성이 북한의 중심이 되고, 참부모님은 북쪽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내려오셔서 남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형제주의인데, 김일성은 가인형 아버지이고 참부모님은 아벨형
아버지입니다. 참부모님은 이제 만민의 어버이가 되어서, 천부주의(天父主義)를 세우고 아담이 잃어버린 전체를 통일하게 됩니다.
북한의
중심사상은 인간 중심한 주체사상(主體思想)이고, 남한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을 중심한 두익사상(頭翼思想)인데, 38선을 중심으로 두 사상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주체사상과 두익사상은 일체 양보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6·25 동란을 통해 북에서 남을 쳐서 피를
흘리게 한 것은 에덴동산 사건의 탕감복귀입니다. 그러나 야곱노정에서 야곱은 21년 간 고역을 끝내고 제물을 가지고 형 에서를 찾아가서 하나
되었습니다. 따라서 남한도 모든 것을 준비해서 북한을 찾아가 북한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 때문에 1991년에 참부모님께서는 북한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 때가 참아버님이 미국으로 가셔서 21년의 노정을 마친 후였습니다. 그 때 남북이 하나 되어야 하는데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남북 문제가 여러 가지 꼬이게 되었습니다.
여러 문제를 놓고 볼 때 남북 문제는 싸워서는 결코 해결이 안 됩니다. 역사 속에서 가인이
아벨을 한 번 쳤습니다. 그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 야곱이 에서를 찾아가 하나 되었는데 재물을 빼앗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모은 재물을 갖다
주고 하나 되었습니다.
판문점(板門店)은 한자로 쓰면 각각 획수가 8획입니다. 판(板)자도, 문(門)자도, 점(店)자도 모두 8획입니다.
그래서 38선은 재출발을 의미합니다. 3은 하늘수이고, 8은 재출발수입니다. 섭리역사가 재출발할 수 있는 기점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38선이 그어진 판문점에서는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휴전선을 중심으로 북방 2킬로미터, 남방 2킬로미터에는
풀 한포기도 없는 빨간 황토 흙입니다. 남북으로 2킬로미터씩 정해놓고 그곳에 지뢰를 묻고, 철조망을 치고, 순찰견을 데리고 다니며 경계하고,
형제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가 60년 동안 계속되어 왔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체사상을 세웠고, 남쪽에서는 하나님을
중심한 두익사상을 세웠습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참된 부모가 되지 못해서 갈라졌기 때문에 남북한은 참부모가 오셔야만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통일되지 않습니다. 원리가 그렇습니다. 참부모가 와야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 가지고는 절대 하나가 안
됩니다. 참부모가 남북한 양쪽을 모두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부모사상이 천부주의(天父主義), 즉 하늘부모주의요, 형제주의라는 것입니다. 이
사상을 가지고 하나 되어야만 합니다.
한반도는 하나님의 일선이자 사탄의 일선입니다. 쪼개고 나니 피를 흘리고, 제물을 드리는 제물국가라는
것입니다. 한민족이 지금까지 허리가 잘려 서로 오고 가지 못한 이유는 이러한 역사적 탕감노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다
끝나면 해방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북한이 자기 체제를 지키겠다고 아무리 발버둥질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끼리
살겠다고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동족끼리 싸울 때, 유엔이 동원된 나라가 없습니다. 세계대전 이후에 가장
큰 전쟁은 6·25 동란입니다. 한국전에는 세계에서 16개국이 참전했습니다. 미군만 해도 3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16개국이 한국전에서 피를
흘렸고, 5개국은 의사들이 와서 도움을 주었고, 그 다음에 20여 개국은 물자를 지원해주는 등 한국을 도왔습니다. 한국 전쟁에 적어도 40여
개국이 동원되었습니다. 북한에도 공산권 국가들이 모두 동원되었습니다. 그것은 유엔을 만든 후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입니다.
3) 심정의
대상국가 828
하나님이 한민족에 메시아를 보내시는 이유는 한국이 심정의 대상국가(對象國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민족에게만 메시아가 올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심정
828
하나님은 심정의 하나님입니다. 원래 창조의 심정은 기쁨과 소망의 심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짓기 전에 당신의
아들딸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물을 먼저 지었습니다. 만물을 창조할 때마다 기쁨과 소망에 넘쳤던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지으신 자녀가 타락했을
때, 크게 탄식하며 슬픔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인간은 타락했지만 인간을 위해 지어놓은 삼라만상은 타락하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은 목적은 자녀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자녀가 타락해 버렸으니 만물세계를 볼 때마다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모이므로 그런 인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고 복귀해주십니다.
그러나 복귀의 심정은 고통스럽고 한스러운
것입니다. 아버지를 두고도 아버지가 없다 하고, 자녀를 보면서 내 자녀라고 할 수 없는 불쌍하고도 처참한 광경들이 역사 속에 있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이 없다고 도망갔던 그 자녀를 놓고 고통스럽고 원통한 심정을 가졌던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슬픔의 하나님이요, 고통의
하나님이요, 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잃어버리고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그 자녀를 찾아왔습니다.
(2) 고난과 슬픔과 한을
지닌 민족 829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하나님의 심정의 대상국가이므로 고난의 민족이요, 슬픔의 민족이요, 한을 가진
민족입니다.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보더라도 그 바탕에는 슬픔과 한이 깔려 있습니다.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피와 땀과 눈물은
하나님의 피와 땀과 눈물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과거 한국에는 조혼풍습이 있었습니다. 일찍 결혼하여 자식이라도 한 명 남겨놓고 가야 죽더라도
혈통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기 때문에 결혼을 빨리 시켰습니다. 열세 살에 시집 간 여자도 있습니다.
일제식민지 통치기간 동안 일본은 한국
남자들을 징용하여 전쟁터로 보내거나 강제노동을 시켰고, 여자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일본 군인들의 위안부로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여인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고, 노동자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한민족이 나라 잃은 슬픔이자 한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해와를 잃어버린 슬픔이자 한이었습니다.
남편이 일본군에게 붙들려가더라도 붙잡을 수 없었고, 딸과 며느리가
위안부로 끌려가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끌려가면서 “아버지, 나를 좀 잡아주십시오.” 하면서 외쳐도 그 아들을 붙잡아 줄 수 없는 것이
나라 없는 설움이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민족이기에, 한국 사람들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슬픈 영화를 보면 잘 만들어졌다고
칭찬합니다. 극장에 가서 눈물을 흘리고 나면 그 영화 좋은 영화니까 한번 가서 보라고 추천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전쟁영화나 갱영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싸우는 민족이 아니라 정(情)의 민족이기 때문에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충(忠)·효(孝)·열(烈)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대단히 좋아합니다. 대표적인 영화로 심청전·춘향전·사육신·이순신이라는 영화들이 있는데, 그런
영화는 몇 번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고 감동을 줍니다. 인간의 본성을 움직일 수 있는 자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어에는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 참 많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뼛골에 사무치도록 마음이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뼛골에 사무친다는 말은 다른 나라의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됩니다. 그처럼 한국말은 의미가 아주 깊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이 한국어입니다. 다른 언어로는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것을 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새가 노래한다고 하지만, 한국 사람은 새가 운다고 말합니다. 우는 것도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슬피 운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 사정과 같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감정은 다른 민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서들입니다. 한민족은
마음속에 감추어진 정을 유발시켜서 부모를 위할 줄 알고, 형제를 위할 줄 알고, 나라를 위할 줄 아는, 충효의 도리가 중심이 된, 하나님이
준비한 천손민족(天孫民族)입니다.
(3) 한민족은 도의민족 831
민족사상
한민족은 도의민족(道義民族)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敬天愛人),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광명사상(光明思想),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세상에 있으면서 널리 교화시킨다는 재세이화(在世理化), 도(道)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이도여치(以道與治)가 고대부터 내려온
민족사상입니다.
예의범절
예로부터 한국을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민족은 충·효·열의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는 충신이 많고, 효자와 효녀가 많고, 열남과 열녀가 많았습니다.
고전문학에도 그런 사상이 배어 있습니다. 고전문학이 그린 효녀로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인당수에 자기 몸을 던졌던 효녀 심청이가 있고, 열녀로는 이 도령과 약속 한마디로 그를 기다리면서 옥중에서 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한 열녀 춘향이 있습니다. 그런 사연들이 한민족에게는 살아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왕으로, 아버지로, 신랑으로
오셨습니다. 왕에게는 신하가 있어서 충신의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아버지에게는 자녀가 있어서 효자의 도리를 다해야 하고, 신랑에게는 신부가
있고, 신부에게는 신랑이 있어서 서로에게 열녀(烈女)·열부(烈夫)의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런 신하도, 자녀도, 신부도
없었습니다.
한민족에는 충신이 있고, 효자·효녀가 있고, 열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민족에게 그런 정신을 훈련시켰습니다. 한민족 속에
살아 있는 충과 효와 열은 재림주를 맞기 위해 준비된 예의범절입니다.
이제 한국에 재림주가 오신다면 한민족은 예수님 때와 같이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표(師表)가 되는 사상 832
한민족이 세계에 보여주고 가르쳐 줄
사상으로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를 모시는 자녀의 도리, 곧 효도(孝道)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참부모이기
때문에 효도를 알아야 하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충·효·열의 사상이고, 세 번째는 하나님이 없다는 공산주의와 싸워서 승리한
승공사상(勝共思想)이고, 네 번째는 어른을 모시는 시의사상(侍義思想)이고, 다섯 번째는 하나님의 절대성 가치를 가르쳐주는 절대성
사상(絶對性思想)입니다.
원리본체론을 통해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살수 있도록 교육하고, 절대성(絶對性)의 가치를
교육해야 하는 것이 한민족의 사명입니다.
위대함을 표현하는 접두사 한- 833
‘한’은 원래 크고 넓고 높고 밝다는
뜻의 순수한 한국말입니다.
한민족은 위대한 국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약칭하면 한국(韓國)이지만, 원래는
대한민국(大韓民國)입니다.
역사상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 모두가 국호 앞에 큰 대(大)자를 붙였습니다. 옛날 일본도 세계를 제패하기 위해
나섰을 때는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이라고 했고, 영국도 세계를 제패할 때는 대영제국(大英帝國)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의 크고 작은 나라
237개국 가운데 현재까지 국호에 큰 대(大)자가 붙은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사실 한민족의 조상이 살던 땅은 좁은 한반도가
아닙니다. 한민족은 대륙 기질의 민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식민지통치하에서 한민족이 살던 대륙을 반도라고 축소해버린 것입니다.
중국의 요동반도(遼東半島)는 옛날 한민족이 살던 곳입니다.
한국 사람의 전통의상인 한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한복은 제사드릴 때 입는
도복(道服)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전통의복인 양복은 일본 사람이나 한국 사람들이 보면 작업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모두가
서양화되었습니다.
옛날 한국 사람들이 외출할 때는 한복을 입고, 대님을 매고,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나갔습니다. 그게
양반이었습니다. 요즘은 갓 쓰고 한복 입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머리에 쓴 갓은 하나님(GOD)을 상징합니다.
‘한글’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 배우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글이 한글입니다. 한국어에는 계시적인 말이 많습니다.
한국어가 앞으로 세계 최고의 언어가 될 것입니다.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참부모가 쓰는 말이 앞으로 세계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한식은 풍성한 상차림이 특징입니다. 일본 식당에 가면 음식을 한 가지씩 갖다 줍니다. 일본문화는 보고 먹는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조금씩
갖다놓습니다. 서양 사람들도 코스별 요리가 나오기 때문에 갖다 놓은 음식을 다 먹고 나면 다음 음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한국은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차려놓습니다. 그것도 조금 갖다놓는 것이 아니라 먹고 남을 정도로 풍성하게 차립니다. 그것이 한민족의 민족성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과소비가 되므로 나쁜 풍속도 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 마음 가운데 너무나 배가 고팠던 기어기 있기 때문에 먹고 남을 정도로 풍족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손님에게 음식을 잘 대접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사고방식
834
한민족은 머리가 우수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한 번에 한가지 일밖에 못하는 대신에 일을 정확하게 해냅니다. 일본 사람은 동양에 살고
있지만 의식은 서양의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도 일을 시키면 한 가지밖에 못합니다. 두 가지를 같이 시키면 이것도 저것도 못
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일이더라도 순서 있게, 질서 있게 처리해냅니다. 한민족은 한식처럼 종합적인
두뇌를 지닌 민족입니다. 거기에서 한민족의 우수성이 나타납니다.
특히 한민족의 사고방식은 서양 사람과 크게 다릅니다. 서양 사람은 변증법에
기초한 사고를 합니다. 서양 레스토랑에 가보면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자르고 찌르는 것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민족은
숟가락과 젓가락, 즉 수저를 사용합니다. 숟가락은 하늘을 상징하고 부모를 상징하며, 두 개로 된 젓가락은 형제들을 상징합니다. 숟가락으로 국물도
떠먹고, 밥도 먹고, 반찬도 먹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젓가락은 한 짝 가지고 못 먹으니까 두 짝이 하나 되어 수수작용과 상대작용을
해서 음식을 하나씩 갖다 먹습니다. 한민족은 수수법적(授受法的)인 식단과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4) 문명의 결실
국가 835
재림주님이 오실 국가는 모든 문명의 결실 국가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명의 발달 과정을
보고도 주님의 재림지(再臨地)를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이 문명은 지구의 환경을 중심으로 발달해왔습니다. 그 환경을 육지 환경·해양
환경·기후 환경의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1) 육지 환경을 중심한 문명의 결실 835
인류의 4대 문명은
모두 하천에서 시작했습니다. 중국의 황하 강을 중심으로 세워진 황하문명, 인도의 인더스 강을 중심한 인더스문명,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중심한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의 나일 강을 중심한 이집트문명이 세계 4대 문명입니다.
하천을 중심으로 발생한 문명이 대륙문명을 이루고,
대륙문명에서 크레타 섬을 중심한 도서문명(미노아문명)을 거쳐 로마를 중심한 이탈리아의 반도문명으로, 반도문명에서 영국의 도서문명으로,
도서문명에서 다시 미국의 대륙문명으로 넘어갔습니다. 그 대륙문명은 태평양을 중심한 일본의 도서문명을 이루고, 도서문명에서 다시 한국의
반도문명으로 돌아갑니다.
(2) 해양 환경을 중심한 문명의 결실 836
하천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륙문명이
지중해를 중심한 반도문화를 이룹니다. 대륙에서 지중해를 거쳐 반도로 넘어갈 때 도서문명을 꽃피운 크레타 섬을 거칩니다.
지중해 주변에는
로마를 중심해서 그리스가 있고 이탈리아가 있습니다. 지중해에서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서문명은 지중해 주변의 그리스와 이탈리아로 옮겨져
반도문명을 이루는데, 반도문명은 다시 프랑스와 독일 등을 거쳐 영국으로 가서 대서양을 중심으로 도서문화의 꽃을 피웁니다.
영국의 도서문명은
미국으로 건너가 대서양과 태평양을 환경으로 한 대륙문명권을 이룹니다. 그것은 대서양 시대의 마감과 함께 태평양 시대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미국의 대륙문명은 다시 일본의 도서문명으로, 도서문명은 다시 한국의 반도문명으로 돌아와서 환태평양 문화권의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3) 기후를 중심한 문명의 결실 836
한반도는 기후적으로 볼 때에도 문명의 결실국가입니다. 1년을
놓고 보면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절이 있고, 하루도 아침·낮·저녁·밤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도 유년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가 있습니다.
기후를 중심한 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대·아열대·한대·온대문명이 연결된 문화가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섭리는 온대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중심섭리는 열대문명(애급대륙)으로부터 시작하여 아열대 문명(반도와 도서)과 한대문명(러시아)을 거쳐서
온대문명(한반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새 섭리의 봄 절기를 맞이하는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앞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모든 문명이 결실될
것입니다.
5) 종교의 결실국가 837
한국은 사상과 종교의 결실을 보는 나라입니다.
한반도에는 삼국시대에
불교(佛敎)가 들어왔습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와 꽃을 피웠습니다.
또 중국에서 시작된 유교(儒敎)는
500년 동안 조선의 통치이념이었습니다. 조선 땅에서 유교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다음에 20세기에는 서양에서
기독교(基督敎)가 들어왔습니다. 한국에 기독교 사상이 들어와 국민의 다수가 기독교 신자입니다.
21세기는 한국에서 출발한
통일교회(統一敎會)가 세계를 움직일 것입니다. 그 때는 교회라는 이름이 아니라 참부모님이 가지고 오신 말씀이 중심이 되어서 세계를 움직일
것입니다.
6) 예언의 증거 838
제1 이스라엘 선민인 예언자들의 증언에 따라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왕국을 세우고 자기들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으며, 제2 이스라엘 선민인 기독교인들이 메시아의 재림을 소망하고 어려운 신앙의 길을 걸어온
것과 같이, 한반도도 의(義)의 왕이 나타나서 천년왕국을 건설하고 세계만방의 조공을 받게 된다고 하는 예언을 믿고 고난의 역사를
참아왔습니다.
한민족의 예언서 정감록비결 838
‘정감록비결(鄭鑑錄秘訣)’은 한민족에게 메시아사상을 심어준
예언서입니다.
한민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메시아사상의 핵심은 한국에서 정도령(正道令 :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가지고온 지도자의 뜻)이라는
새로운 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의 집권자들은 그 사상의 확산을 막았습니다.
특히 일제시대의 권력자들은 그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
예언서들을 불태우는 등 탄압을 가했고,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그 사상은 미신으로 몰렸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사상은 한민족의 심령 속에 깊이 박힌
메시아사상이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한민족이 고대해 온 정도령은 재림주님의 한국식 명칭입니다. 하나님은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
메시아가 한국으로 재림하실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정감록의 여러 예언이 성서의 예언과 일치된다는 사실을 학자들이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서방박사의 증거 839
한국에 있는 각 종교계에는 영계에 간 자기들의 교조(敎祖)가
한국으로 재림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는 신도가 많습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문화권 발달사를 놓고 보더라도 기독교는 모든 종교의 목적을 완성해주는
최종적인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으로 재림하시는 메시아는 모든 종교의 교조들이 지상에서 이루려 한 목적을 일괄하여 완성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에 사명으로 볼 때 모든 교조들의 대신자가 됩니다. 따라서 각 종교에서 한국으로 재림하실 것으로 믿고 있는 교조는 다른 분이 아니라 재림주님
한 분입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의 한민족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한국을 주시하도록 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는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재림주가 한국으로 오시면 서방박사들이 예물을 준비해 가지고 찾아가서 증거해야 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앞으로
세계의 정치·경제 문제는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이 해결해야 하지만, 세계의 사상 문제는 동양에서 새로운 종교가 나와서 해결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의 대예언자로 불리는 진 딕슨(Jeane Dixon : 1928~1997) 여사는 문선명 선생님을 보고
하나님이 보내신 위대한 분으로 21세기에는 그 명성이 드러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진 딕슨 여사는 루스벨트 대통령, 하마슐드 유엔
사무총장의 죽음을 예언하고, 소련 수상 말렌코프의 실각 예언 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특히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예언하여 더욱
유명해진 그녀는 워싱턴의 외교가에서 각국의 외교관들이 대통령보다 더 만나보고 싶어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타고르의 시
인도의 시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 1861~1941)는 ‘기탄잘리(Gitanjali : 1912)'라는 시를 발표하여 1913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기탄잘리’는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뜻의 총 103편에 달하는 시로서 거기에는 타고르의 신을
사모하는 감정이 배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제35번째 시에는 하나님의 뜻을 조명하는 듯 영감적인 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곳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이여
깨어나소서.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은 소망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또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이 구절에는 통일의 염원을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진실의 깊은 곳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은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진리가 나올 것임을 예언한 것이고,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은 인류구원 섭리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은 영원성을 의미하며, ‘내 마음의 조국이여 깨어나소서’라는 말은 천국이 나의 조국이요, 모든 인류의
조국이 된다는 말입니다.
타고르는 뛰어난 영감으로 재림주가 오심으로써 펼쳐질 하나님의 섭리를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타고르는 한국이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있을 때 한국을 등불에 비유하여 ‘동방의 등불(The Lamp of the East)'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동방의 등불‘은
1929년 그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국 기자가 한국 방문을 요청했는데 그에 응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의 표시로 써 준 작품입니다.
그
시는 4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당시 한국은 일제치하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고, 아무런 희망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타고르는
영감을 통해서 한국이 동방의 빛이 된다는 예언적인 시를 썼습니다.
5. 결론 842
문선명 선생님이 밝히신
원리원본은 천주를 관통하고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관통하는 천비(天秘), 밝혀지지 않은 하늘의 비밀)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밝히신 문선명
선생님은 메시아요 재림주요 구세주요 인류의 참부모로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따라서 참부모님이 탄생하신 한국은 하나님의 조국이요,
고향입니다. 세계인류에게 있어서 한국은 신앙의 조국이요, 한국어는 모국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먼저 남북통일을
이루고, 세계통일(동서남북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참부모님이 밝히신 원리원본을 중심하고 ‘원리본체론’을 통해 인류가 하나님의 심정복귀와
절대성복귀를 완성함으로써 창조이상인 참자녀가 되어 참가정과 참하나님이 소망하신 평화통일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 인류에게
하나님은 인류의 참부모임을 교육하고, 언제나 나라와 부모 형제 배우자를 생각하면서 애천(愛天)·애인(愛人)·애국(愛國)을 행동으로 나타내도록
하는 충효열(忠孝烈)의 교육, 원리본체로에 입각하여 공산주의 이론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그 오류를 바로잡도록 하는 승공운동을 비롯한 모든
사상(가치관)의 통일운동,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을 모시는 시의생활(侍義生活)을 실천하고 원리본체를 닮은 절대인격을 갖춤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성(絶對性) 가치를 알도록 하는 교육을 하는 동시에 위하여 사는 참사랑의 교육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세계인류는 새마을운동은 했지만
새마음운동과 새사랑운동, 절대성운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새마음운동과 함께 새사랑운동, 절대성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새사랑운동은 곧
참사랑운동이며 절대성 운동입니다. 참사랑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새사랑운동입니다. 참사랑이 없으면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음란의 세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성 운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소망입니다.
세계통일은 쉬우나 심정통일은 어렵습니다. 세계통일은 권력을 동원해서 할 수 있지만 심정통일은 무력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심정통일은 절대성을 중심한 ‘원리본체론’ 교육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원리본체론’을 통한 심정과 절대서의 교육에 의해서
새사람을 만들어 놓는 것이 참부모님이 전개하시는 세계적 평화통일운동입니다.
한국은 하나님의 조국이요 고향이기 때문에 세계 인류는 하나님이ㅡ
조국에 입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인류는 하나님이 보내신 참부모님을 따라 창조본연의 이상세계인 참가정을 이루어 천일국(天一國)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정옥 회장
1946년 2월 4일(음)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출생. 1964년 12월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입교, 1966년
한국에서 목회자 생활 시작. 1968년 2월 430가정 축복. 1977년 2월 통일신학교 졸업. 1979년 2월 경희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 경영학
수료. 1991년 2월 선문대학교 통일신학과 수료. 1995년 5월 남미·우루과이 국가 메시아 임명됨. 1998년 1월 일본전국축복가정총연합
총회장 취임. 2003년 10월 선문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 취득. 2003년 11월 초종교초국가평화협의회 상임고문 취임. 2004년 7월
평화통일연합 상임고문 취임. 2007년 3월 환태평양 회장 취임. 2009년 중앙수련원 회장 취임. 2010년 선문대학교 부총장
취임.
초판 1쇄 인쇄 2012년 3월 30일
초판 1쇄 발행 2012년 4월 5일
펴낸곳 현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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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