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理本體
가정맹세
1. 천일국 주인 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본향땅을 찾아 본연의 창조이상인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을 창건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2. 천일국 주인 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모시어 천주의 대표적 가정이 되며 중심적 가정이 되어
가정에서는 효자, 국가에서는 충신, 세계에서는 성인, 천주에서는 성자의 가정의 도리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3. 천일국 주인 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4대 심정권과 3대 왕권과 황족권을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4. 천일국 주인 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의 창조이상인 천주 대가족을 형성하여 자유와 평화와 통일과 행복의 세계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5. 천일국 주인 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매일 주체적 천상세계와 대상적 지상세계의 통일을 향해 전진적 발전을 촉진화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6. 천일국 주인 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대신가정으로서 천운을 움직이는 가정이 되어 하늘의 축복을 주변에 연결시키는 가정을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7. 천일국 주인 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본연의 혈통과 연결된 위하는 생활을 통하여 심정문화세계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8. 천일국 주인 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성약시대를 맞이하여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으로 신인애 일체이상을 이루어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의 해방권과 석방권을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머리말
‘원리본체론’은 문선명 선생님께서 밝히신 ‘원리원본’에서
출발합니다.
‘원리원본’은 역사 이래 누구도 밝히지 못한 천비(天秘)를 문선명 선생께서 밝히신 것입니다. 문선명 선생님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마 약속하신 메시아요 구세주요 인류의 참부모이십니다.
참부모님은 1920년 1월 6일 한국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당시 한국은 일본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참부모님은 16세 되던 해인 1935년 4월 17일 부활절 새벽에 하나님의 대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못다 이룬 뜻을
완수할 사명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때부터 참부모님은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본의 통치에서 해방될 때까지 10년 동안 하나님의 원리를
규명하는 일에 몰두하셨습니다.
해방 후 한국은 6·25전쟁으로 또 한 번의 전쟁을 맞게 되었고, 그 전쟁의 와중인 1952년 5월 10일
참부모님은 ‘원리원본’의 정리를 완성하시고 원리 전파를 시작하셨습니다.
‘원리원본’을 해설하신 내용을 정리하여 1957년 8월 15일에
참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원리해설’ 책자가 발간되었습니다. ‘원리원본’ 해설을 정리하는데 5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9년 만에 ‘원리원본’을
세상에 내어 놓았습니다. ‘원리본체론’은 ‘원리강론’이 출간 된지 42년이 걸려서 발표된 것입니다.
‘원리본체론’도 ‘원리해설’이나
‘원리강론’과 마찬가지로 ‘원리원본’을 근본으로 세워졌습니다. 참부모님은 ‘원리해설’은 상징적 원리, ‘원리강론’은 형상적 원리,
‘원리본체론’은 실체적 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때가 되어야 밝힐 수 있는 천도(天道)이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 단계적으로
밝혀왔는데 ‘원리본체론’은 참부모님이 마지막으로 밝히신 원리본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원리본체론’에서 밝힌 핵심 내용은 참하나님과 참부모님,
영계와 인간책임분담의 중요성과 절대성, 죄와 탕감복귀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내용을 확실하게 밝혀주신 원리본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원리본체론’에서는 ‘원리강론’에서 설명하지 않은 내용을 더욱 본질적으로 본석함으로써 원리의 본체되시는 한 분의 하나님을
인류의 참부모로 밝히게 됩니다. 따라서 ‘원리본체론’을 통해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참부모되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고아가 된 인류가 만들어 놓은
현실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종교를 세워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종교의 궁극의
목적은 인간에게 인생과 우주를 창조하신 참하나님을 바로 밝혀 하나님을 참부모로 모시고 사는 창조본연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밝힌
것이 ‘원리본체론’입니다. 따라서 ‘원리본체론’을 밝힘으로써 종교의 사명은 끝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연의 세계는 종교가
필요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1차·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인류는 이제 3차 세계대전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차 세계대전은
사상전입니다. 그 사상전도 원리의 본체되시는 하나님을 확실하게 밝힘으로써 끝이 나게 됩니다.
참부모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인류의 참부모님으로
밝히시고 무형의 하나님 아버지를 실체 참부모님으로 현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인류의 참부모가 되어야 할
아담·해와가 타락으로 모든 자격을 잃고 거짓부모가 되어 하나님의 집에서 쫓겨난 그 때부터 인류는 참부모님을 잃어버린 고아가 되었습니다. 비로소
참부모님이 오셔서 거짓부모가 이루어 놓은 악의 역사를 청산하심으로써 인류는 탕감복귀하는 선천시대(先天時代)를 종결짓고 탕감복귀가 필요 없는
승리하신 참부모님을 따라 하나님의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는 후천시대(後天時代)가 도래했습니다.
참부모님이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이루어진
현실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리본체론’을 밝히시고 8대 교재·교본을 인류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인류는 참부모님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딸로 돌아가 참하나님을 참부모로 모시고 사는 천주 대변혁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참부모님은 본연의 원리본체 되시는 한분의 하나님을
인류의 참부모로 밝히시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기원전과 기원후(BC와 AD)로 갈라진 역사를 청산하고 탕감복귀 승리를 통해 천력(天曆)을
선포하셨습니다.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들이 쓰던 양력과 음력은 천력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참부모님께서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인한
죄악의 세계를 청산함으로써 하나님을 참부모로 모시고 사는 길을 트시고 참아버지의 가정으로 돌아가는 천국문을 여심으로써 인류가 6천년 만에
참아버지의 가정으로 돌아가는 천국문을 여심으로써 인류가 6천년 만에 참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하나님 심정의 품으로 돌아가는 회기시대(回歸時代)를
맞이했습니다.
참부모님을 따라 하나님 심정의 품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모시고 참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류의 참부모 되시는 원리의 본체를
확실히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타락한 후예로 태어난 인류는 사탄세계에서 생기고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사탄세계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 타락한 인간은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지금까지 살던 타락한 세계의 옷을 벗고 하늘의 새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천주의 중심 되신 참부모님을 따라 ‘원리본체론’을 통해 심정복귀 완성과 절대성 원리를 생활화 하는 천일국(天一國)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해방·석방하고 창조 본연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영원히 모시고 참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평화 통일 세계를 이루어 가는
삶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11년 12월 1일
유정옥
머리말5
I. 총서론
원리본체론을 공부하는
이유
1. 현실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34
1) 현실세계의 문제34
2) 왜 문제가 생겼는가?46
3) 타락이
초래한 인생의 문제47
4)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50
2. 문제의 해결 방안52
3. 통일원리의 구조와 중심
내용56
4. 통일원리의 출현의 배경61
[참고] 기도시 ; 영광의 면류관64
II. 전편
제1장 창조원리
서론:
창조원리란 무엇인가?70
1) 잘 사는 법70
2) 잘 사는 인간, 못 사는 인간71
3) 인생의 목적은 언제
결정되는가?72
1. 하나님의 이성성상73
1) 존재의 법칙74
(1) 양성과 본성75
(2) 성상과 형상77
2)
하나님의 실상79
(1) 본성상과 본형상81
(2) 본양성과 본음성83
(3) 이성성상의 통일체84
3) 신상과 신성의
구조(철학의 관점)91
(1) 신상91
(2) 신성93
(3) 신상의 내부99
(4) 하나님의 정체104
[참고]1
개성의 존귀성은 어디서 오는가?110
[참고]2 우주의 본질이 무엇이냐?112
[참고]3 우주의 근본이
무엇이냐?115
[참고]4 유일사상이 무엇이냐?119
2.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121
1) 마음과 몸의 관계121
(1)
종적인 사랑, 횡적인 사랑123
2) 부자의 관계125
(1) 자녀가 생기는 네 가지 원칙)125
(2) 인간 최고의
소망130
3)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려면133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134
4) 참된 교육141
(1)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도록141
(2) 원리를 생활화하도록143
(3) 문화통일을 이루도록145
(4)
애천·애인·애국하도록145
5) 이성성상이 현실세계 문제 해결의 열쇠145
(1) 성상·형상은 만능의 열쇠146
(2)
양성·음성을 통한 현실문제 해결153
(3) 인간의 마지막 혁명153
3.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관계155
1) 하나님의 형상과
상징으로 전개된 인간과 만물155
2) 인간과 만물의 관계157
[참고]1 창조원리로 본 주역과 성서159
[참고]2 동양과
서양의 본체론161
4. 만유원력과 수수작용 및 사위기대164
1) 만유원력164
2) 수수작용165
(1) 모든 존재는
상대적 존재165
(2) 수수작용으로 본 양심작용171
3) 정분합작용에 의한 삼대상목적 및 사위기대173
(1)
정분합작용173
(2) 삼대상목적178
(3) 사위기대181
[참고] 모든 존재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는 이유191
5.
창조목적194
1) 창조의 동기와 목적194
(1) 창조의 동기194
(2) 창조의 목적196
2)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198
(1) 하나님의 운행, 하나님의 기쁨198
(2) 3대축복 중의 축복, 축복결혼202
(3)
이중목족205
3) 4대심정권과 3대왕권208
[참고] 1 결혼은 왜 하는가?216
[참고] 2 참부모와
성약시대221
[참고] 3 천지부모 천주안식권은 영원한 표제다239
[참고] 4 하나님 해방권 완성244
6. 창조본연의 가치
결정과 그 가치의 기준246
1) 가치의 정의246
2) 가치의 결정247
(1) 목적관으로 본 가치 결정247
(2)
창조본연의 가치 결정251
3) 창조본연의 가치기준252
4) 창조본연의 지정의와 진미선254
5) 사랑과 미, 선과 악, 의와
불의255
(1) 사랑과 미256
(2) 선과 악261
(3) 의와 불의262
7. 피조세계의 창조과정과 피조물의
성장기간262
1) 피조세계의 창조과정263
2) 피조물의 성장기간265
(1) 성장기간이 있다는 증거265
3) 피조물의
성장기간과 인간책임분담267
(1) 피조물의 성장기간267
(2) 인간의 책임분담269
(3) 인간에게 책임분담을 주신
이유271
8. 인간을 중심한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273
1) 무형실체세계의 존재 여부273
(1) 창조원리로
보아274
(2) 성서로 보아282
2) 인간의 3단계 생활283
(1) 모태생활284
(2) 지상생활284
(3)
영계생활286
3) 육신과 영인체의 구조 및 상대적 관계290
(1) 육신생활의 중요성293
(2) 영인체의
중요성296
(3) 천국과 지옥의 결정297
(4) 생심과 육심의 관계로 본 인간의 마음298
[참고] 1) 영계에서의 3단계
심판302
2) 인간이 지켜야 할 3대 철칙302
3) 주의할 것303
제 2 장 타락론
서론306
1. 죄의
뿌리306
1)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309
2) 뱀의 정체314
3) 천사의 타락과 인간의 타락316
2.
타락의 동기와 경로325
1) 천사 창조의 목적325
2) 타락의 동기와 경로326
3. 인간은 어떻게 성장기간 중에
타락했는가?328
1) 사랑의 힘과 원리의 힘328
2) 계명을 주신 이유329
3) 계명이 필요한 기간329
4. 타락의
결과330
1) 사탄과 타락인간330
2) 3대 전환과 3대 해방331
3) 인간세계에 대한 사탄의 활동333
4)
목적성으로 본 선과 악334
5) 죄334
(1) 죄의 정의334
(2) 죄의 종류335
6) 타락성336
5.
자유와 타락338
1) 자유의 원리적 의의339
2) 자유를 주신 이유340
3) 욕망341
6.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지않으신 이유341
1) 원리의 절대성과 완전무결성을 위하여341
2) 하나님만이 창조주로 계시기
위하여343
3) 인간을 만물의 주관위에 세우시기 위하여343
[참고] 1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고통345
[참고] 2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347
[참고] 3 사탄이 되는 동기349
[참고] 4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351
제 3 장 인류역사
종말론
서론354
1. 인류역사의 시원과 목적355
1) 말세의 의의359
2) 말세는 여러 차례 있었다361
2.
말세의 징후에 관한 성구364
1) 땅을 멸함364
2) 공중에서 주를 영접함366
3) 불심판366
4)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짐368
3. 현세가 말세다371
1) 삼대축복 복귀현상으로 보아371
(1) 제1축복 복귀
현상372
(2) 제2축복 복귀 현상373
(3) 제3축복 복귀 현상374
2) 사회현상으로 보아375
4. 말세와 우리의
자세376
제 4 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서론380
1. 십자가에 의한 구원섭리381
1) 예수님 강림의
목적382
2)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섭리는 완성되었는가?384
3)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기정사실인가?386
4) 십자가
구원의 한계와 재림의 목적391
(1) 십자가 구원의 한계391
(2) 재림의 목적393
5) 십자가의 양면
예언395
6) 십자가의 죽음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된 성구397
(1) 요한복음 3장 14절397
(2) 요한복음 19장
30절398
(3) 마태복음 16장 22절, 23절403
2. 엘리야의 재림과 세례 요한404
1) 유대 민족의 심적
동향404
2) 세례 요한의 사명410
3) 세례 요한의 불신 이유410
4)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411
5)
세례 요한이 엘리야가 된 이유413
6) 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413
제 5 장 부활론
서론416
1. 부활의
의의417
1) 일반적인 생과 사417
2) 생과 사의 성서적 개념417
3) 부활의 의의420
4) 부활로 인한 인간의
변화421
5) 타락으로 인한 죽음421
2. 부활섭리423
1) 부활섭리의 원칙423
2) 지상인의
부활섭리425
(1) 말세에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428
(2) 첫째 부활430
3) 영인에 대한 부활섭리432
(1)
하나님을 믿고 간 영인들의 부활433
(2) 낙원 이외의 영인들의 재림부활435
(3) 악영인의 재림부활436
4) 재림부활로
본 윤회설437
3. 재림부활에 의한 종교 통일439
제 6 장 예정론
서론442
1. 뜻에 대한 예정444
2. 뜻
성사에 대한 예정445
3. 인간에 대한 예정446
4. 예정설을 세워주는 성구 해명449
1)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449
2) 로마서 9장 15절과 16절450
3) 로마서 9장 11절에서 13절450
제 7 장
기독론
서론454
1.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가치454
1)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의 이성성상적 관계455
2)
창조목적으로 본 인간의 가치456
3) 인간과 피조세계의 관계456
2.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과 예수님457
1) 생명나무
복귀로 본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458
2) 예수님이 곧 하나님인가?459
(1) 요한복음 14장 9절459
(2) 요한복음 1장
10절460
(3) 요한복음 8장 58절461
3. 타락인간과 예수님462
4. 중생론과 삼위일체론463
1)
중생론464
(1) 중생의 사명으로 본 예수님과 성신464
(2)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본 예수님과 성신467
(3) 예수님과
성신에 의한 영적 중생467
2) 삼위일체론469
III. 후편
제 1 장 복귀원리
서론476
1. 복귀섭리와
메시아를 위한 기대476
1) 복귀섭리477
(1) 창조본연의 인간과 타락인간의 위치477
(2) 선악의 모체479
(3)
타락인간의 복귀480
(4) 선악 투쟁의 입체적인 역사481
(5) 섭리역사의 발전 요인481
2)
탕감복귀섭리482
(1) 타락인간은 중간 위치482
(2) 탕감조건483
2. 메시아를 위한 기대492
1) 믿음의
기대492
2) 실체기대494
3. 복귀섭리노정의 시대 구분496
1) 말씀에 의한 섭리시대496
2)
부활섭리시대497
3) 믿음의 기간 탕감복귀 섭리시대497
4) 메시아를 위한 기대의 범위로 본 섭리시대498
5) 책임분담
섭리시대498
6) 섭리적 동시성시대499
4. 복귀섭리역사와 나500
[참고] 1 타락과 복귀섭리503
[참고] 2 종적
8단계 복귀섭리505
[참고] 3 횡적 8단계 복귀섭리510
제 2 장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서론514
1. 메시아를
위한 기대515
1) 믿음의 기대515
2) 실체기대516
(1) 아담이 중심인물이 될 수 없는 이유517
(2) 선악의
분립 역사519
3)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523
4)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524
5) 결과524
2. 아담가정이
보여주는 교훈526
1) 원리적 교훈526
2) 주의해야 할 교훈526
3) 가인·아벨의 법도528
4) 가인과 아벨의
생활 태도529
[참고] 죄의 근원533
제 3 장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서론536
1. 메시아를 위한
기대537
1) 믿음의 기대537
(1) 방주의 뜻538
(2) 40일 홍수심판539
(3) 홍수심판 후
행사540
2) 실체기대543
(1) 중심인물 : 함543
(2) 부끄러움이 죄가 된 이유546
3) 결과548
2.
노아가정이 보여주는 교훈548
제 4 장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서론552
1. 메시아를 위한 기대552
1)
믿음의 기대554
(1) 중심인물 : 아브라함554
(2) 상징헌제558
(3) 아브라함의 이삭 헌제565
2)
실체기대570
(1) 중심인물 : 야곱570
(2) 조건 : 실체헌제583
(3) 결과583
3) 섭리의
연장592
2. 아브라함가정이 보여주는 교훈593
제 5 장 모세 중심한 복귀섭리
서론598
1) 모세와 예수님을 중심한
복귀섭리598
2) 사탄 굴복의 본보기 노정599
(1) 예수님의 전형노정으로 야곱노정과 모세노정을 세우신 이유599
(2)
야곱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님노정599
1. 모세 중심한 복귀섭리의 개관608
1) 이전 섭리사와 다른
점608
2) 모세의 위치610
3) 민족이 모세를 불신한 결과611
2.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613
1) 믿음의
기대613
2) 실체기대613
3) 출발섭리614
3.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615
1) 믿음의
기대615
2) 실체기대615
3) 출발섭리616
(1) 말씀의 대신자617
(2) 모세를 죽이려 함617
(3)
할례618
(4) 3대 기적618
(5) 10재앙622
4) 출애급 노정629
5)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634
(1) 성막의 구조634
(2) 두 석판과 성막의 의의635
(3) 성막을 주신 섭리의 목적636
(4)
성막을 위한 기대636
(5) 시내산 출발 섭리637
4.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638
1) 모세 중심한
섭리638
(1) 믿음의 기대638
(2) 실체기대639
(3) 출발섭리639
(4) 반석이타639
2) 여호수아
중심한 실체기대644
(1) 여리고성 정탐645
(2) 가나안 복귀646
(3) 길갈에 돌담을 세움646
(4) 여리고성
함락647
(5) 31개 왕조를 멸함648
5. 모세노정이 보여준 교훈
제6장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서론652
1. 메시아를 위한 기대652
1)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653
(1) 믿음의
기대654
(2) 실체기대654
2)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655
(1) 믿음의 기대655
(2) 3대
시험656
(3) 실체기대659
3)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659
4) 예수님 중심한 영적 가나안
복귀노정660
(1) 영적 믿음의 기대660
(2) 십자가의 뜻661
(3) 영적 실체기대663
5) 재림주 중심한 실체
가나안 복귀노정663
(1) 믿음의 기대664
(2) 실체기대664
(3)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665
(4)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665
(5) 출발섭리666
2. 예수님노정이 보여준 교훈668
[참고] 1. 예수님은 성인 중의
성인670
2. 예수님의 실체기반 상실678
3. 예수님의 공생애노정680
4. 예수님의 영적 부활690
5. 예수님의
해원성사691
제7장 섭리역사의 각 시대 연수 형성
서론694
1. 섭리적 동시성 시대695
1)
동시성이란?695
2) 동시성이 생기는 이유696
3) 동시성의 형성 요인697
4) 동시성의 종류698
(1) 소생적
동시성698
(2) 장성적 동시성701
(3) 완성적 동시성702
2. 동시성 시대의 연수 형성과 그 시대의 각
연수704
1) 동시성 시대의 연수 형성704
2) 동시성 시대의 각 연수709
(1) 상징적 동시성 섭리시대710
(2)
형상적 동시성 섭리시대715
(3) 실체적 동시성 섭리시대726
3.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
연장시대732
1) 복귀섭리시대732
2) 복귀섭리 연장시대733
3) 복귀섭리시대아 복귀섭리 연장시대의 비교734
(1)
애급 고역시대와 로마제국 박해시대734
(2) 사사시대와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736
(3) 통일왕국시대와
기독왕국시대737
(4) 남북왕조 분립시대와 동서왕조 분립시대738
(5)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742
(6)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와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743
4. 복귀역사에 나타난 하나님 주권과 사탄 주권의
교차745
5. 복귀섭리시대의 역사 발전746
제8장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서론 :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752
1.
종교개혁기753
1) 문예부흥754
2) 종교개혁754
2.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755
1) 개요755
2) 가인형
인생관756
3) 아벨형 인생관757
3. 정치·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759
1) 정치의 성숙기759
(1)
민주주의759
(2) 삼권분립762
2) 경제의 성숙기765
(1) 산업혁명의 의의766
(2) 열국의 강화와 식민지
분할766
(3) 이상세계는 완성인간의 모양과 같다769
4. 문예부흥에 따른 종교·정치 및 산업혁명770
1) 가인적 인생관의
산물 문예부흥771
2) 아벨적 인생관의 산물 종교개혁771
3) 3단계 정치개혁772
4) 산업혁명과
창조이상사회773
5. 세계대전775
1) 탕감복귀섭리로 본 세계대전의 원인775
2) 세계대전의 의의776
(1)
탕감복귀섭리로 본 세계대전의 의의777
(2) 세계대전의 섭리적 의미777
3) 세계대전의 대결 양상778
(1) 제1차
세계대전778
(2) 제2차 세계대전779
(3) 제3차 세계대전781
4) 세계대전의 사탄 편 중심인물783
5)
세계대전의 원인과 결과784
(1) 탕감조건으로 본 제1차 세계대전785
(2) 탕감조건으로 본 제2차 세계대전785
(3)
탕감조건으로 본 제3차 세계대전786
결론 : 세계대전의 귀결787
제9장 재림론
서론790
1. 재림주는 어떻게
오시는가?791
1) 성령의 강림이 재림인가?791
2) 예수님은 영체로 재림하시는가?792
3)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인가?793
(1) 성서의 예언과 예수님의 출현794
(2) 성서적으로 본 재림798
(3) 원리적 근거로 본
재림800
2. 재림주는 언제 오시는가?805
1) 재림의 때는 어떻게 알 수 있나?806
(1) 복귀섭리를
통해서807
(2) 종말현상으로 보아809
3. 재림주는 어디로 오시는가?812
4. 재림주를 맞이하는 국가의
조건822
1) 40수 민족적 탕감복귀822
2) 제물국가824
3) 심정의 대상국가828
(1) 하나님의
심정828
(2) 고난과 슬픔과 한을 지닌 민족829
(3) 한민족은 도의민족831
4) 문명의 결실국가835
(1) 육지
환경을 중심한 문명의 결실835
(2) 해양 환경을 중심한 문명의 결실836
(3) 기후를 중심한 문명의 결실836
5) 종교의
결실국가837
6) 예언의 증거838
5. 결론842
I. 총서론
원리본체론을 공부하는 이유
역사상 인류에게는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각계의 지도자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종교계를 비롯하여 정치·경제·언론계가
동원되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저질러진 사소한 문제가 확산되어 이제는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천주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는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현실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누구나
본성이 소망하는 진정한 자유·평등·평화·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상세계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을 비롯하여 가정·단체·국가·세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세계에는 갈등과 대립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이상세계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1) 현실세계의 문제
현실세계의 문제란, 최근에 일본이나 남미, 동남아 등지에서 발생한
지진과 해일, 지구 온난화 등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종족·국가 간의 분쟁, 기아, 불균등한 분배, 질병 등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포함합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이런 문제는 과거 우리의 조상들이 고통을 당하고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우리 후손들이 겪을 수도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통일원리’는 인류역사상 최대 관심사인 ‘현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가정의
문제
현실의 문제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가정(家庭)의 문제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으로 출발하는 것이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부부의 갈등 때문입니다.
부부의 갈등은 개인에서부터 벌어집니다. 내 마음과 몸이 하나 되지 못하고 싸웁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 되지 못한 채 대립하고 갈등하는 남성이 여성을 만나 같이 살게 될 때, 부부라는 이름을 갖지만 서로는 하나되지 못하고 대립과
갈등이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부부는 갈등과 대립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살게 되고, 거기서 태어난 아들딸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와
자식도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는 갈등하고 대립하는 속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이혼이나 불륜, 가정의 붕괴를 초래합니다. 모두가
가정에서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현재 무질서한 성문화(性文化)는 세계 도처에서 만연하고 있습니다. 성(性)을
상품화하고, 동성애자가 늘어나고, 부부가 다른 배우자와 맞바꾸어 성관계를 갖는 등 무질서한 성행위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근친상간(近親相姦)까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실정입니다. 성을 향략의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한편 그것을 좋지 않게 보고 ‘결혼하지
않겠다.’며 독신주의를 주장하거나 ‘결혼해도 아들딸은 낳지 않겠다.’고 하는 젊은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불건전한 성문화는 가정의 붕괴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건전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까지 가정과 자녀의 가치를 왜곡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부모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나고 자랍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어머니는 그 아기를 안고 젖을 먹여 키웁니다. 아기는 젖만 먹고 크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도 먹고
큽니다. 아기는 그렇게 성장하면서 부모의 사랑을 중심으로 가정에서 자신의 성장과 함께 사랑을 키워갑니다.
사랑의 뿌리가 되는 심정을 키우는
동시에 심정적인 생활을 하도록 하는 훈련장이 가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사랑의 학교라고 하며, 심정의 훈련장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갈등과 대립은 개인에서 끝나지 않고 곧 가정의 갈등과 대립으로 확대되고, 사회·국가·세계로 확대됩니다. 그것은 가정이
국가와 세계의 기본단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실세계에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가장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 가정의
문제입니다.
청소년의 문제
그 다음은 청소년(靑少年)의 문제입니다. 청소년은 가정에서는 사랑받는 자녀이며서 장차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책임질 미래의 희망입니다. 그런 청소년이 바로서지 않으면 그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청소년의
윤락(淪落)이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일부가 윤락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참된 사랑을 도외시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랑을 상품화합니다. 인체에서 가장 거룩하고 귀한 것이 생식기(生殖器)인데, 그것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만든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의 윤락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질서를 바르게 세우지 못해서 나타난 병이 에이즈(AIDS)인데,
에이즈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게 다루는 질병 중의 하나입니다. 에이즈에 걸리면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약도 없습니다. 수혈로 인한
감염도 간혹 있긴 하지만 에이즈에 걸린 사람과 성적 관계를 맺은 사람은 100퍼센트 에이즈 보균자가 됩니다.
유엔의 보고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는 국민의 34퍼센트가 에이즈 보균자라고 합니다. 그대로 놔두면 그 나라는 얼마 못가서 멸망할 것입니다.
한국에도
보균자가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에이즈 문제를 방치한다면 인류는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즈는 오늘날 땅 위의
음란을 정리하기 위해서 내린 하늘의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학원의 문제
그 다음은 학원(學園)의 문제입니다. 학교는
우리 아들딸들을 미래의 지도자로 기르고,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가르치는 신성한 장소입니다. 학교가 지식을 가르치는 장소인지는 모르지만
인성 교육을 하는 학교는 요즘 별로 없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정말 좋은 남자, 정말 좋은 여자, 정말 좋은 신랑감, 정말 좋은 신부감, 정말
좋은 아버지, 정말 좋은 어머니로서 좋은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인간을 중심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합니다.
과거에는 스승을 부모같이
여겼는데 오늘날에는 스승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교수와 싸우려 하고, 연구실 문에 못을 박아 교수가 못 들어가게
하거나 학생들이 연합해서 교수를 구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초등학생조차 선생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선생은 선생대로
교육하고 학생은 학생대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또 초등학생이 칼을 들고 친구를 죽이기도 하고, 거리에 나가서 잔혹한 범죄행위도
벌입니다. 경찰도 그것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청소년 문제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의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교육
받을 수 있는 권리도 행복의 조건에 포함시켜야만 합니다. 머리가 좋고 품행이 단정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젊은이가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고
있다면 사회적으로도 불행한 일입니다. 그 젊은이에게는 반드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놓고 볼 때 오늘날 학교
교육의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사의 문제
다음으로 노사 문제(勞使問題)가 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많은 봉급을
받아 가정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직장인의 소망입니다. 회사의 사정은 사원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려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그 회사 사원들도
사장을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 위하는 마음 없이 자기의 욕망과 이익만 채우려 한다면 노사끼리 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물론
노동자가 자신의 인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합법적인 노동쟁의를 하는 것은 정당한 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법 투쟁이나 불법 파업은
경제적 손실도 크거니와 인명 피해도 날 수 있는 위험한 행위입니다. 노사 갈등이 벌어지면 처음에는 한 회사의 문제에 그치지만 파업이 지속되면
노사 붕괴가 일어나 그 지역의 문제로 변하고, 국가에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끼치기 때문에 결국에는 국가적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법적인 노사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종 차별
그 다음에 인종차별(人種差別)의 문제가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할 동일한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인종이 다르다는 점만으로 경제적 차별뿐만 아니라 인체에 상해를 입히는 등 많은 문제가 벌어지는 것을 볼
때 인종 차별도 대단히 심각한 현실의 문제입니다.
국경의 문제
그 다음에 국경의 문제도 있습니다. 국경선은 그저 막연하게 ‘어느
나라를 구분하기 위한 선이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을 중심한 본연의 세계에서 볼 때 이것은 크게 잘못됐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존재에게는 국경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곤충도 국경이 없고, 새들도 국경이 없고, 짐승도 국경이 없습니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도
국경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국경선을 긋고 그것 때문에 서로 싸우고 상대를 죽이기도 합니다.
평화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심이지만 이러한 현상을 놓고 볼 때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고 봅니다. 왜 이런 세상이 되었는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국경 문제는 현실세계의 또 하나의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종교의 문제
그 다음에
종교(宗敎)의 문제도 있습니다. 종교는 선(善)을 추구하는 인간의 양심을 지도합니다. 선에는 평화도 있고 자유도 있고 행복도 있고 기쁨도
포함됩니다. 진정한 평화의 세계, 진정한 행복의 세계, 진정한 자유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 인류의 꿈이지만, 오늘날 그런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세계 인구가 2011년 말로 70억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 78퍼센트 정도가 종교인입니다.
그들은 차원은 다른지언정 한결같이 양심을 가지고 선(善)을 추구합니다. 인간을 양심대로 살게 만드는 것이 종교라면 그 세계는 행복한 세계가
되고, 평화로운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종교 때문에 싸우고 , 종교 때문에 피 흘리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오늘날 종교는 종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파가 다르고 교파가 달라서 교회가 갈라집니다. 서로 반목하고 갈라지는
것은 종교의 목적이 아닙니다. 종교가 세계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오히려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종교가 추가하는 것은
자유와 평화와 진정한 선(善), 싸움이 없는 행복의 세계인데 그러한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계의 문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영계(靈界)의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영계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영계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먼저 ‘죽으면 가게 된다는 영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영계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지상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2장
17절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남녀노소 모두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인간의 삶이 비정상적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영계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중요하고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현실세계의 문제 중의 하나가 영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상의 문제
그
다음은 사상(思想)의 문제입니다.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좌익이냐, 우익이냐? 유물론이냐, 유신론이냐?’ 이러한 싸움이 사상계에서 비롯된
인류의 마지막 싸움입니다.
이 지구상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따지면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민주주의 편이요, 또 하나는
공산주의 편입니다. 물론 그 중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은 어느쪽으로든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공산주의는 무신론(無神論: 초자연적인 것, 즉 각종 영혼, 선, 내세 등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는 견해)을 주장하고, 민주주의는
유신론(有神論)을 주장하면서 두 편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나간 인간의 역사 속에서 ‘정신이 먼저냐, 물질이
먼저냐?’를 놓고 수많이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는 어떤 철학이나 이론을 중심해서 집대성한 하나의 제도요 조직입니다. 그 중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집단이라 하고 공산주의는 사상의 집단이라 합니다.
제도의 집단은 그 체제가 흔들리면 아무런 힘도 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사상의 집단은 그 체제가 무너지고 제도가 무너지더라도 개개인이 자신의 사상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여간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북한은 공산주의체제요,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체제입니다. 남한은 북한과 통일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남한이 더 문제입니다. 북한은 이미 하나의 사상으로 전 국민이 통일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가 있어서 좋지만 그 자유 때문에 문제가 많아진 것이 민주주의 세계입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방종(放縱)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방종을 자유로 알고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민주주의는 망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본성을 지도할 수 있는
사상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는
모두 철학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보는데, 공산주의는 자기 나름의 확고한 진리라고 주장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그런 확고한 철학이
없습니다.
일부 정치권에서는 어떤 사상을 가지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공산주의처럼 그 나라의 국민 전체가 믿고 따를 만큼 확고한 철학을 지닌
체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집단이고, 공산주의는 사상의 집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공산주의자가 유물사상을 신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민주주의 세계에도 유물사상을 신봉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문제가
심각합니다.
공해의 문제
공해(公害)의 문제도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오늘날의 인류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환경오염(環境汚染), 지구의 온난화 현상(溫暖化現象) 등 공해의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동해에서
잡히던 물고기가 다른 바다로 이동해서 더 이상 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이유는 온난화 현상으로 지구 환경에 변화가
왔기 때문입니다. 수온이 서서히 올라가기 때문에 찬물에서 사는 물고기가 그 자리를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를 연구하고, 물속의 환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것을 심각한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공해 문제 또한 심각하게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대립의 문제
그
다음은 세계적인 대립의 문제입니다. 세계의 문제는 아시아의 문제와 중동(中東)의 문제로 집약됩니다. 아시아에는 한반도(韓半島)의 문제가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조상의 뿌리도 같고 언어도 같은 한민족(韓民族)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냉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질적인 사상으로 분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는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아담·해와의 타락에 대해서는
‘타락론’에서 밝힘).
인간의 조상인 아담·해와는 타락으로 참부모가 되지 못하고 거짓된 부모, 비원리적 존재(非原理的存在)인 선악(善惡)의
모체(母體)가 되었습니다. 선악의 모체로 비원리적인 존재가 된 아담·해와는 선과 악을 분립하여 악을 제거하지 않고는 원리적인 하나님을 직접 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그의 두 아들을 갈라 세웠습니다. 첫아들 가인을 사탄 편에, 둘째아들 아벨을 하나님 편에 각각 분별하여 세운
것입니다.
아담·해와 가정에서 비롯된 분별 사례는 역사와 함께 대립을 초래하는 주류사상을 이루어오다가 현세에 와서 하나는 공산주의로, 또
하나는 민주주의로 양분되었는데, 마지막에는 한반도가 민주체제와 공산체제로 분단된 대립의 축이 되었습니다.
한편 중동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동인들의 조상은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드릴 제물을 제대로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애급(지금의 이집트)으로 들어가 고역을 치르고 400년 만에 그의 후손이 고역을 끝내고 귀환하게 됩니다(출애굽기 15장 9~13장). 그 후손
중에서 예수님이 탄생했는데, 당시의 지배권을 행사하던 유대 민족과 유대교가 그 분을 돌아가시게 했기 때문에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중동은
오늘날까지 종교적 갈등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종교적 갈등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시지 않으면 중동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철학의 문제
그 다음으로는 존재와 관계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철학(哲學)의 문제입니다. 철학은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밝히는 중요한 학문입니다. 오늘날 철학은 우리 존재와 관계의 문제를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보이는 것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은 계신가? 계시다면 하나님은 인간과 어떤 관계인가? 하나님과 만물은 어떤 관계인가? 인간과 만물은 어떤 관계인가? 남자와
여자는 왜 태어났으며 서로 어떤 관계로 살다가 또 어디로 가는가?’ 철학은 이런 근본 문제를 밝혀야 합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철학작들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행복도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정치·경제계는 물론 학계·언론계·예술계 등 모든 방면의 지도자들이 동원되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금방은 해결한 것 같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더 커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관의 문제
그 다음은 인간이 어떻게 올바르게 사느냐 하는 인생관(人生觀)의 문제입니다. 인생관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살려면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눈에 보이는 몸이 공존하는 이중구조(二重構造)로 되어
있습니다. 관계성을 놓고 보면 마음이 주체(主體)이고, 몸은 대상(對象)입니다.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의 구조는 과거나 현재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눈에 보이는 몸이 인간이라는 개체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겉으로는 하나로
통일된 것 같지만 사실은 내부에서 마음과 몸이 서로 갈라져 많은 갈등과 대립과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22~24절)하며 탄식했습니다.
신관의
문제
현실세계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신관(神觀)입니다. 신관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시대마다 자기들이 아록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근원적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 방향이 좌우됩니다. 성경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언 1장 7절)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인생관이 다릅니다. 인생관뿐만 아니라 국가관도 다르고 세계관과 역사관과 우주관도 다릅니다.
좁게는 결혼관과 교육관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한 집에 살고 있는 부모와 자식도 그 관점이 다르고 부부간에도
관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같은 교회에 나가는 신앙인이라도 하나님을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각자의 인생관과 결혼관, 그리고 역사관과
국가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2) 왜 문제가 생겼는가?
문제의 발단은 인간 조상 아담·해와의 타락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현실만이 아니라 역사상에도 크고 작은 문제가 이어졌습니다.
타락으로 인간은 마음과 몸이 갈라져 개체 내에서 갈등과 대립과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살더라도 서로는 갈등과 대립과 투쟁을 벌이고 그것이 가정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도 타락한 아담과 해와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갈등과 대립, 투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을 지닌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래부터 마음은 주체이고 몸은 대상입니다. 몸은 마음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본연의 모습인데, 몸이 그렇게 따라주지를 않아 늘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본심(本心)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본심은
최고의 선(善)입니다. 인간은 본심에 따라 생활할 때 기쁨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간은 그 본심을 잃어버리고 사심(邪心)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담·해와가 사탄과 관계를 맺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사심은 자기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마음인데, 그것이 사탄으로부터 온
악(惡)의 뿌리입니다. 사심을 따라 행동하면 악행이 되고 악행은 슬픔을 초래합니다. 성경에도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장 15절)고 했습니다. 본심의 욕망을 추구하며 행복해지고, 사심의 욕망을 추구하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본심과
사심은 모두 인간의 마음속에서 출발하지만, 이 둘은 서로 동기와 목적과 방향이 다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순된 존재요, 선악의 모체입니다.
바울도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로마서 7장 22~24절)하고 한탄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의 본체이기 때문에 선악의 모체가 된 타락인간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한 주인만 상대하도록 한
원리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으로 두 주인을 상대해야 하는 비원리적(非原理的)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타락성(墮落性)이 생긴
것입니다.
타락성은 인간의 원죄를 만든 사탄의 악성입니다. 시기와 질투·혈기·교만·고집·증오 등이 타락성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성품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3) 타락이 초래한 인생의
문제 47
인간은 타락으로 참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조 당시부터 하나님이 부여한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까지 상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녀를
통해 이루려고 하신 참사랑의 이상가정을 잃어버렸습니다. 먼저 본성을 찾은 인간을 통해 이상가정이 세워질 때, 이상국가가 나오고 이상세계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다음에 인간은 영육(靈肉)의 무지로 떨어졌습니다. 심령(心靈)과
지능(知能)의 무지상태, 즉 영적(靈的)인 무지와 육적(肉的)인 무지를 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놓고 보면 보이지 않는 마음은 영적이고,
보이는 몸은 육적입니다.
영적인 무지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믿고 있는 사람조차도 하나님을 이성적이요 관념적으로 막연히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모릅니다.
또 영적인 무지는 인생에 대한 무지입니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목적으로 창조되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놓고 족보를 들추지만, 근본을 따지다 보면 하나님에게로
올라갑니다. 누구나 존재의 시원(始原)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인간을 창조한 뜻, 즉 창조목적이 있습니다. 창조목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의 가치는 영계에까지 이어집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지상생활은 길어야
100년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영혼은 영계로 가는 것입니다. 영계는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측정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자기의 가치를
상실한 인간에게 선악의 문제도 야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문제들을 바로잡으려고 종교를 세우셨습니다. 타락이 없는 본연의 세계에는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 속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타락으로 본연의 모습을 잃고 무지로 떨어진 인간이 제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도록 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편 육적인 무지는 물질세계의 근본을 모르는 것입니다. 물질은 원자 또는 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자나 분자의
구성요소는 에너지입니다. 그렇다면 에너지의 근본은 무엇인가? 과학자들도 물질세계의 근본을 모르고 있습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도 분석해
보면 에너지체입니다. 물질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마음도 에너지체입니다. 그 에너지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육적인
무지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모르는 것도 육적인 무지에 속합니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이 어떤 힘을 가해도 변경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도 그 법칙에 순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밖에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털옷을 입고 다니더라도 이미 입춘이 지난 절기라면
봄이 오고 있는 중입니다.
땅속에서 새싹들은 대지를 뚫고 나올 준비를 하고 나뭇가지에서도 움을 틔울 준비를 합니다. 봄이 되면 식물들은
어김없이 싹이 트고 여름에는 무성해져 열매도 맺습니다. 또 가을이면 낙엽이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런 법칙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그런 법칙을 세웠는지를 모릅니다. 그것을 육적인 무지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와 같은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와
과학의 두 분야로 나뉘어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를 규명해 왔습니다. 종교는 영적인 세계의 본질을 추구하고, 과학은 물질세계의 본질을 추구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이 통일된 목표를 지향할 때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실현되고 행복의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관을 추구하는 종교와 보이는 목적관을 추구하는 과학이 하나 되어야 우리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와 과학은 통일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는 정신세계를 추구하고 과학은 물질세계를 추구하는데,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하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는 마음의 무지를 깨우치는 역할을 하고 과학은 몸의 무지를 깨우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두 분야는 상충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마음의 명령과 뜻에 몸이 잘 따라줄 때 행복하지만, 몸이 마음의 뜻과 명령에 역행하면 불행해집니다.
종교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바로 알고,
과학이 물질세계의 참모습을 확실히 밝힌다면 서로는 공감하고 일치된 목표를 지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은 주체이고 보이는 몸이
대상인 것처럼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는 주체가 되고 보이는 물질의 세계를 추가하는 과학이 대상이 됩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인 종교와
과학이 통일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4)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 50
역사상 인류에게는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각계의 지도자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종교계를 비롯하여 정치·경제·언론계가
동원되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지엽적으로 대처하다 보니 문제의 근본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해결된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더 커지고 확산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저질러진 사소한 문제가 확산되어
이제는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천주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는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바르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인류는 제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전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인류의 갈등을
집약하여 사상전(思想戰)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갈등이 발생하면 물질을 통해 무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이용되어야 할 첨단과학이 전쟁에 동원되어 인명을 앗아갔습니다. 지구상은 누가 더
성능이 좋은 무기를 가지고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하는 첨단무기의 전시장이 된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전쟁에서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누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가르쳐주느냐 하는 사상의 경쟁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제쳐놓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고 가르치는 성직자가 많지만,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직자는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지식과 생활의 경험을 가지고 자기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인간이 자신의 처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존재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당사자가 문제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인간의 타락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근본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인간에게까지 전수된 타락성(墮落性)입니다. 인간이 그런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문제의 해결 방안 52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통일원리 본체론이 절대 필요합니다. 통일원리 본체론이
출현한 데에는 필연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머무는 성전(聖殿)이 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인간 조상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원리권(原理圈)에서 자라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원칙에 따라 살도록 한 것입니다.
아담·해와는 창조 당시부터 완성된 인간으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소생기(蘇生期)·장성기(長成期)·완성기(完成期)라는 성장기간(成長期間)을 거쳐
완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장기간은 인간 조상이 하나님의 자녀요, 성전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기간입니다. 인간이 완성하여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本質的屬性)인 심정을 닮고 하나님의 절대성 본체(絶對性本體)를 닮으면 그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인간이 자격을 갖추면 하나님과
부자관계가 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장성기 완성급(長成期完成級)에서 타락했습니다. 무원리권(無原理圈)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타락으로 인해 본래의 원리권을 이탈하여 한줌의 흙만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줌의 흙도 하나님의 창조원칙이
적용되어 나타난 결과물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그런 만물보다 못한 자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을 앞세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을 비롯하여 노아와 아브라함까지의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입니다.
성경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담·해와가 타락한 후 1600년 만에 노아를 중심인물로 세우셨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세기 6장 13절)는 말씀과 함께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그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제1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할
때는 순식간에 떨어졌지만 올라갈 때는 타락하기 전의 자리로 바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담부터 노아를 세울 때까지 1600년이라는 기간이
걸렸고, 노아 때에는 방주를 중심한 섭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탄을 중심한 인간은 모두 홍수 심판을 받았고 노아가정의 여덟 식구만 방주에
들어가 심판을 면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정의 여덟 식구만 방주에 들어가 심판을 면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둘째아들 함의 실수로 인해 노아가정의
방주 중심한 복귀섭리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노아 이후 400년 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3대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의 인간들은 노아 때보다 심령이 더 발달했습니다. 또다시 방주를 중심한 섭리를 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제물은 비둘기·양·암소인데 그것을 쪼개서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세 가지
제물은 아담·해와가 완성해야 할 소생·장성·완성의 3단계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것과 노아가정에서 잃어버린 것을
아브라함가정에서 다시 찾는 3단계의 복귀과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가 원점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삭·야곱을 거쳐 비로소 메시아가 올 수 있는 기대를 세웠지만 사탄세계에는 이미 민족적인 기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가정적인 기대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사탄세계는 이미 민족을 중심해서 왕이 세워진 것입니다. 거기에 메시아를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메시아를 보내면 민족의 형태를 갖춘 사탄 편에서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그의 후손들이 애급에서
400년 동안 고역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기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메시아를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급에서 400년 고역을
마치고 난 후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급에서 나오게 됩니다. 애급을 벗어난 모세가 시내산에서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을
받아서 율법을 중심한 새로운 섭리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섭리역사의 시대를 거쳐 하나님이 1600년 만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는데 이번에는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는데 유대인들이 그
복음(福音)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섭리는
2000년을 주기로 반복됩니다.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2000년이 걸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돌아가신 지 2000년이 되는 때입니다. 다시 오겠다고 했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섭리의 때가 되면 반드시 중심인물을 세우고 그 중심인물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시대에 따라 새로이 선포되는 말씀을
따라가면 구원을 얻고 불신하면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새로운 중심인물이 세워지는 때는 지난 역사를 정리하고 새 역사를 출발하는 전환점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시기를 기점으로 인류역사를 기원전(BC : Before Christ ; 그리스도 이전시대)과 기원후 (AD : Anno
Domini, 서기)로 구분합니다.
마찬가지로 재림시대에도 재림주님을 중심으로 인류의 타락 역사가 완전히 정리되고 새 말씀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 섭리의 시대성으로 봐서 반드시 새 말씀이 나와야 합니다. 새 시대에 주어진 새 말씀으로 감춰진 역사의 비밀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서의 예언으로 보아도 새 말씀이 나와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25절에 보면,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했고, 요한복음 16장 12절에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고 싶은 말씀이 많지만 인간이 감당하지 못해서 아직 못 주신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6장 13절을 보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성령이 오시면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보여주신다는 말입니다.
재림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때에 유대교인들이 불신해서 뜻을 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 뜻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재림주님은 하나님의 비밀을 가지고 오셔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말씀하시며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예언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10장 11절을 보면,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새 시대가
오면 땅위에 있는 모든 나라의 백성과 그 나라의 주권자에게 가르쳐준다는 뜻입니다.
그 새로운 말씀이 바로 ‘통일원리(統一原理)’입니다.
통일원리를 더 새롭게 가르쳐 주는 것이 이 ‘원리본체론(原理本體論)’입니다. 누가복음 5장38절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그 맛이 변하거나 부대가 찢어져 다 쏟아지게 됩니다.
더러운 타락의 옷을
벗고 깨끗한 본성으로 말씀을 받아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타락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새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주시는 말씀을 놓고 자기 생각대로 이러쿵저러쿵 비판하면 그 말씀은 자기 것이 못 됩니다.
3. 통일원리의 구조와 중심
내용
‘통일원리(統一原理)’는 참부모님이 밝히신 ‘원리원본(原理原本)’에서 출발합니다. ‘원리원본’을 해설하고 강의하도록 체계화한 것이
‘원리해설(原理解說)’과 ‘원리강론(原理講論)’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원리본체론(原理本體論)’입니다.
‘원리해설’과
‘원리강론’에서 밝히지 못한 내용을 새롭게 가르쳐 주는 것이 ‘원리본체론’입니다. ‘원리본체론’이라 하니까 새로운 이론을 만든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원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통일원리’는 때가 되어야 밝힐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 단계적으로 밝혀왔는데,
‘원리본체론’은 참부모님이 마지막으로 밝힌 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원리해설’과 ‘원리강론’, 그리고 ‘원리본체론’은 모두가
‘원리원본’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들을 통틀어 ‘통일원리’라고 합니다. ‘통일원리’는 모두 같은 체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통일원리’의 구조와 중심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통일원리’는 전편과 후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편의 중심 내용은
창조원리(創造原理)입니다. 창조원리는 하나님이 이 모든 존재세계를 창조하신 설계도입니다. 창조원리에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하나님이 창조이상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를 전개한 정밀한 설계도에 의해 이 세상을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문제부터
다루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으로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인류의 죄의 뿌리가 되는 선악과가 무엇인지, 그 선악과를 따먹도록 꾀었던 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타락에 대한 내용을 밝히는 것이 바로 타락론(墮落論)입니다. 잘못된 채로 살고 있기 때문에 바로 가르치는 이론이 타락론입니다. 그러나 타락론은
원리가 아닙니다. 타락의 원인과 결과를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길잡이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하신 분으로서 그 분이 세우신 원리도 절대·유일·영원·불변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은 타락해서 원리의 실체가 못 되었다 하더라도 그 원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세우신 원리는 없애거나 변경할 수 없습니다. 그런 원리를
중심으로 인간을 본연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구원섭리(救援攝理)입니다.
타락론 다음으로 이어지는 종말론(終末論),
구주론(救主論), 부활론(復活論), 예정론(豫定論), 기독론(基督論)도 구원의 길잡이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세상의 끝날, 말세(末世)가
온다고 합니다. 말세가 되면 이 타락세계는 불로 다 심판해버리고, 땅을 다 깨버려 하늘에 있는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잘 믿는 성도들은 공중으로 들어올려져 주를 만난다고 합니다. 또 주가 땅에 재림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땅을 깨버리고 불로 심판하고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고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진다는 등의 말씀은 비유(譬喩)와
상징(象徵)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지만, 종말론(終末論)에서는 말세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구원섭리는 본연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복귀섭리(復歸攝理)라고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물에 빠지기 전의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병든 자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병이 깨끗이 나아서 건강한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말하며, 죄인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죄 없는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간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救援)을 복귀(復歸)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단어는 똑같이
타락인간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통일원리’에서는 구원섭리는 곧 복귀섭리라고 합니다.
타락한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정리해야 합니다. 잘못된 역사이기 때문에 종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역사는 준비된 메시아가 와야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구주론(救主論)에서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는지, 왜 다시 오실 수밖에 없는지, 재림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메시아가 재림하면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섭리(復活攝理)가 있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고 마지막 재림주가 오실 때 죽었던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서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는 줄 압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활은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통해 접붙여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밝힌 것이 부활론(復活論)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 구원을 받거나 못 받는 문제는 하나님이 다 예정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예정설이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혼돈을 줍니다.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태어날 때부터 이 사람은 지옥으로 갈 사람, 저 사람은 천국으로
갈 사람, 이렇게 다 예정되어 있다면 인간에게 무슨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혼돈을 주는 이런 문제들을 모두 정리한 것이
예정론(豫定論)입니다.
전편의 마지막 결론은 기독론(基督論)입니다. 기독론은 예수님이 누구이고, 예수님의 사명(使命)은 무엇이며,
중생(重生)이 무엇이며,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강령(綱領)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강령이 가장
중요한데, 기독교인들도 기독론을 잘 모릅니다. 중생은 거듭나는 것을 말하는데, 어떻게 거듭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성부(聖父)·성자(聖子)·성신(聖神)의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인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교의(敎義)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부·성자·성신이 왜
있으며, 삼위일체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통일원리’를 알고 있는 식구들도 잘 모릅니다. 지도자들이 이 강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지 잘
안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필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원리강론’에서 해석해 놓았습니다. 기독론이 전편의 결론입니다.
그리고 후편에서는 먼저
복귀원리를 통해 복귀를 하기 위한 공식 노정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섭리를 하시면서 인간이 원리에 따라 복귀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입니다. 복귀섭리를 통해서 마지막에 재림주가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재림주를 보내시기 위해서 400년 간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복귀원리의 핵심 내용입니다.
복귀원리는 재림주가 언제, 어떻게, 어디로 오시는지를 확실하게 가르쳐 줍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을 그저 막연하게 사용해왔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무엇이며,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는데 언제 올 것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어디로
오시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늘을 쳐다보고 구름만 쳐다보다가 결국에 다 지쳐서 이제는 주님을 기다릴 생각도 안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는데 바로 그 때가 지금이라고 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언제 어디로 어떻게 오실 것인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복귀원리의 결론은 실체로 오시는 메시아·구세주·재림주·참부모가 언제, 어떻게, 어디로
오시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일원리’에 대해 기독교의 ‘성경’이나 불교의 ‘불경’처럼 일종의 교리로
여겨왔습니다. 그 때문에 통일교인을 제외한 일반 사람들은 ‘통일원리’는 통일교인이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할 교리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통일원리’에는 온 인류가 고민하고 있는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4. 통일원리 출현의
배경 61
‘통일원리’는 참부모님(이하 단수인 참아버님, 또는 아버님으로 지칭함)이 밝히셨습니다. 참아버님은 1920년
1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탄생했습니다. 참아버님은 16세인 1935년 4월 17일, 부활절 새벽에 기도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명(大命)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이루지 못한 창조이상을 이루시려고 2000년 전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예수님을 통해 이루지 못한 뜻을 완수할 사명자로
참아버님을 세우셨습니다.
참아버님은 그 때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해방을 위해서,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주인을
잃어버리고 탄식하는 만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뜻길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1935년 4월 17일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 만
9년, 햇수로 10년 동안 하나님의 원리를 구명(究明)하는 일에 몰두하셨습니다.
1945년 전까지는 일제치하였기 때문에 원리를 발표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발표하면 사탄이 그냥 두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신앙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마음대로 기도할 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해방되기 전까지 10년 안에 이 말씀을 찾아서 완전히 정리해놓지 않으면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아버님은 원리를 다 찾아놓고 해방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책임분담입니다. 그러니까 원리는 우연히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로 나온 말씀입니다. 어떤 문헌이나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말씀이 아닙니다.
원리를 찾는 일은 태평양 바다에서 모래알을 주워
꿰어 맞추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합니다. 태평양 바다 깊은 곳은 수심 10,000미터가 넘습니다. 그 깊은 곳에 모래알이 흩어져 있습니다.
거기에서 흩어져 있는 모래알을 하나하나 찾아가지고 꿰어 맞추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통일원리’를 찾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찾기
위해서 억만 사탄과 혈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참아버님은 1952년 5월 10일, 부산에서 ‘원리원본’의 정리를 마치고, 부산에서 원리를
전파하기 시작하여 대구를 거쳐 서울에 이른 다음 1954년 5월 1일, 서울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를 창립했습니다.
협회를 창립한 지 40년이 지난 후 통일교회 간판을 떼어내고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을 세웠습니다. 참아버님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면서
“40년이 되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간판을 떼어야 한다. 지금 교회는 개인의 구원을 위해 선교하지만 그때에는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상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957년 8월 15일,
‘원리해설’을 발표한 것입니다. ‘원리원본’을 해설하는 데 5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1960년 5월 1일, 만 9년 만에 ‘원리강론’을
세상에 내어 놓았습니다.
1966년 ‘원리강론’을 쓴 후 42년이 걸려서 ‘원리본체론’을 세웠습니다. 2008년 9월 1일 참아버님께서
“원리본체론 교육을 말씀하시고 10월 10일, 하와이 킹 가든(KING GARDEN)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날짜와 장소까지
정해주셨습니다.
‘원리본체론’은 ‘통일원리’를 근본으로 세워졌습니다. ‘통일사상’과 ‘승공이론’도 ‘통일원리’를 근본으로 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발표 연도나 내용의 구체적인 면에서 볼 때, ‘원리해설’은 상징원리(象徵原理)라 할 수 있고, ‘원리강론’은 형상원리(形象原理)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
영광의 면류관
내가 사람을 의심할 때, 나는 고통을 느낍니다.
내가 사람을 심판할 때, 나는 견딜 수
없어집니다.
내가 사람을 미워할 때, 나는 존재가치를 잃습니다.
그러나 만일 믿으면 나는 속임을 당하고 맙니다.
이 저녁 머리를
손바닥에 두고 고통과 슬픔에 떨고 있습니다.
내가 틀린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틀린 것입니다.
비록 속임을 당할지라도 믿어야
합니다.
비록 배신을 당할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송두리째 사랑하십시오.
눈물을 닦아내고 미소로
맞이하십시오.
남을 속이는 일밖에 모르는 자를, 배신을 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자들까지도···
오, 주여! 사랑하는
아픔이여.
저의 이 고통을 보소서. 불타는 이 가슴에 주의 손을 얹어 주소서.
저의 심장은 깊은 고뇌로 터질 듯만
하옵니다.
그러나 배신한 자들을 사랑했을 때 나는 섭리를 쟁취했습니다.
만일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랑을 한다면 나는
그대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드리오리다.
-1935년 문선명-
‘영광의 면류관’은 참아버님께서 16세 되시는 1935년 하나님의
분부를 받고 이 뜻길을 출발하실 때 기도문 형식의 시입니다. 참아버님께서는 그 때를 회상하시면서 “나는 16세 되는 해 부활절 날, 주일 아침에
하나님을 만났다. 그날로부터 나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뜻길을 걸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는
1950년 대 말, 미국에 파송된 선교사에 의해서 전해졌습니다. 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2001년 미국 식구 한 사람이 이 시를 읽고 은혜를
받아서, 세계에서 가장 명망 있는 국제시인협회에 보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이 시가 최우수작으로서 선정되어 국제시인협회 연보에
소개되었습니다.
2002년 미국 플로리다주 올렌도에서 개최된 국제시인협회 컨퍼런스에서 본 시가 낭송되었고, 컨퍼런스 기간 동안 이 시가
전시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 받은 트로피와 최우수상 메달은 현재 천정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국제시인협회의 심사기준은
아홉가지입니다.
첫째가 창조성입니다. 두 번째는 근원성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보는 것이 문체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주제를
봅니다. 다섯 번째로 언어의 구사와 단어 선정 능력을 봅니다. 또 여섯 번째는 응집성과 결합력이 있는가를 보고, 일곱 번째로 일관성이 있는가,
여덟 번째로 논리성이 있는가를 봅니다. 그 다음에 아홉 번째로 해석력이 있는가를 봅니다.
이 아홉 가지의 엄격한 기준을 놓고 세계의 명망
있는 심사위원들이 심사해서 최우수상을 받은 것입니다.
II. 전편
제1장 창조원리
창조원리는 인간과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창조
설계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생과 우주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창조원리를 제대로 알아야 우리
인생과 더 나아가 우주에 대해서 알 수 있으며,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서론: 창조원리란
무엇인가?
창조원리(創造原理)는 인간과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창조 설계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생과 우주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빌딩을 지을 때 먼저 건축가가 어떤 빌딩을 지을지 구상하고 설계도를 그려서 건축합니다. 설계도에 따라 일정
기간에 기술과 재료를 투입하면 빌딩이 완성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존재세계(存在世界)는 하나님의 설계도에 따라 차아조되었는데, 창조원리가
그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원리를 제대로 알아야 우리 인생과 더 나아가 우주에 대해서 알 수 있으며,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1) 잘 사는 법(設計圖) 70
제품은 반드시 사용법이 있습니다. 최신 기술이 적용된
신제품일수록 사용법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목적과 용도에 어긋나게 사용하면 그 제품은 망가집니다. 예들 들어 100볼트 전압에 맞추어 사용해야
하는 전자제품을 220볼트 전원에 꽂으면 순식간에 망가집니다. 물건은 공장에서 만들어질 때부터 용도에 결정되므로 수천 개가 생산되더라도 사용하는
목적은 똑같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목적에 맞게 사용해야 하듯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은 한국식으로 살고, 아프리카 사람은 아프리카식으로 살고, 미국 사람은 미국식으로
살지만 살아가는 근본은 똑같습니다.
2) 잘 사는 인간, 못 사는 인간
세상에서는 잘 살고 못 살고를 물질을 중심으로 해서
판단합니다. 평가기준은 외모·물질·지식·명예·권력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면에서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을 규정한다면, 창조원리대로
사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고, 창조원리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은 못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호화롭고 윤택한 환경에서 살아도 창조원리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잘못 사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사는 우리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놓고 볼 때는 대부분 잘못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는
기준은 ‘원리대로 살고 있느냐,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있느냐,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존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왕이다, 대통령이다,
수상이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중에는 없습니다.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는 기준에 따라서 생활하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입니다.
내적인 기준이 아니라 외적인 기준에만 매달려 생활하는 사람은 마치 고장 난 인간, 즉 중병 환자와 같습니다. 현실의 인간은
고장 난 상태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고장 난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용법대로 사용하지 않는 전자제품이 고장 나는 것처럼 오늘날 타락한
인간은 창조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지 그 방법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알고 보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만신창이가 된 중환자인 셈입니다.
육신의 병만으로는 중환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병보다 더 무서운 병이 마음의 병입니다. 가치를
잃어버리고 목적 없이 사는 것처럼 무서운 병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육신의 병만이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병을 고쳐야
합니다.
이 중환자를 고쳐야 하는데, 그 분야를 확실히 아는 전문의만이 그 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치유할 약을 처방할 수 있습니다. 전문의가
병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면 환자는 그 처방을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규칙적으로 시간을 맞춰서 약을 복용하고 먹는 약의 순서도 잘 지켜야
합니다. 귀찮다고 자기 방식대로 약을 복용하면 오히려 병이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앞의 예처럼 환자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자기 생각대로 살았는데, 다른 어떤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힘이 듭니다. 그러니 인간이
지금 앓고 있는 중병에서 회복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을 버리고 창조원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창조원리대로 살면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3) 인생의 목적은 언제 결정되는가? 72
인간이 사는 목적은 언제 결정되는가. 인간은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인간의 사는 목적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태어나기 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결정됐습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
때 물건이 생산되어 나오기 전 설계도에 따라 물건은 생산됩니다. 인간도 태어나기 전 하나님이 창조한 원리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원리의 법도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보고 듣고 실천한 경험을 토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현실 문제를 만든 당사자입니다. 그러니 문제의 해결도 인간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으로 무지해서 이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 등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통일원리(統一原理)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어떤 교리가 아니고 만인이 알고 실천해야 할
천도(天道)요, 원리입니다.
1. 하나님의 이성성상
지금까지 종교인과 신앙인을 포함한 많은 지성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이 있다, 없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계시는가?’에 대해 논쟁을 해왔습니다.
성경 출애급기 3장
14절을 보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존(自存)하시는 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로마서 1장 20절을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과 신성으로 지은 피조만물을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는지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사에 따라
전개된 남자와 여자를 잘 관찰하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말씀을 중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존재의 법칙
존재하는 사물에는 존재의 법칙이 있습니다. 존재의 법칙 가운데 하나는 인과법칙(因果法則)이고, 다른
하나는 닮기법칙입니다.
인과법칙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법칙입니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이 인과법칙을 따릅니다. 원인은 보이지 않지만 결과는 눈에 보입니다. 결과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원인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는 보이지 않는 원인에 의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원인이요, 보이는 피조물은 결과입니다.
닮기법칙은 결과는 반드시 원인을 닮는다는 법칙으로서 이것도 중요한 존재의 법칙입니다. 결과는 원인을
닮습니다. 예들 들어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도 닮기법칙에 따른 것입니다.
이처럼 피조물은 인과법칙과 닮기법칙이라는 두 가지 존재의 법칙에
의해 존재합니다. 여기에서 피조물은 원인자인 하나님을 닮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 상반된 모습이
아니라 공통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 로마서 1장 20절에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했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닮았으므로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작가에 비유하면, 작품 활동을 하던 작가가 고인(故人)이 되어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 남겨
놓은 작품이나 행적을 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인 하나님을 알려면 먼저 피조물의 공통점을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은 6일이라는 기간을 놓고 6단계로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첫째 날에는 빛과 어둠을, 둘째 날에는
하늘과 땅과 바다를, 셋째 날에는 온갖 식물을,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을, 다섯째 날에는 새와 물고기 등 온갖 짐승을 창조하시고, 여섯째
날에는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창조한 인간은 제일 차원 높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동물·식물·광물 순으로 점차 차원이
낮아지는데, 광물도 분자(分子)·원자(原子)·소립자(素粒子) 순으로 낮아집니다. 이러한 피조물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공통된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양성과 음성
먼저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인간을 놓고 보면, 사람은 반드시 남자 아니면 여자로 태어납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에 차이가 있고 지역이나 인종은 다를지라도 사람은 반드시 남자나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이 공통의 법칙입니다. 그것이 바로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생식기를 보고 구분합니다.
지금까지 양(陽 : +)과 음(陰 : -)이라고 했는데 그냥
양과 음이 아니고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입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성(생식기)을 중심으로 해서 남자는 양성, 여자는 음성이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사람은 이 양성과 음성을 통해 번식·발전하고 대(代)를 이어갑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서 창조되었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본으로 해서 만물을 지었습니다. 실제로는 만물을 인간보다 먼저 창조했습니다. 어떻게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을 본으로 한 만물의 창조가 가능한가?
그것은 하나님의 구상이 인간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창조하겠다는 선유조건(先有條件)을 세워놓고 먼저 만물을 창조하여 인간이 태어나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미리 조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종착점은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세계는 인간을 닮도록
창조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동물도 인간의 남자와 여자에 해당하는 수컷과 암컷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컷과 암컷이 없으면 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동물을 놓고 수컷과 암컷이라 한 것도 생식기를 중심으로 규정하는 말입니다.
식물도 마찬가지로 수술과 암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식물도 역시 수술과 암술을 통해서 번식합니다.
광물계(鑛物界)도 양이온과 음이온이 있어 분자(分子)를 이룹니다. 원자(原子)도 양자와
전자로 인해 이루어지고, 소립자(素粒子)도 양성과 음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에서 광물질로 내려갈수록 정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모두가 양성과 음성이라는 두 가지의 성질을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양성과 음성이라는 양면성이 존재를 가능케 합니다. 그러니까 소립자
속에도 양성과 음성의 두 속성이 있습니다.
심지어 병균도 수컷과 암컷을 통해 번식합니다. 몸속에 있는 병균이 환경이 맞아서 그냥 번식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수컷과 암컷의 유언자가 만나 번식이 이루어집니다. 만물세계는 그 등급과 위치는 다를지언정 이처럼 양성과 음성이라는 공통된
법칙 아래 존재합니다. 이처럼 결과의 세계가 양성과 음성으로 되어 있는 것은 원인이 하나님, 즉 제1원인(第一原因)이 양성과 음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성상과 형상 77
만물세계에는 또 다른 측면의 공통점도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마음과 몸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볼 수 없고 몸은 볼 수 있습니다.
100평의 땅에 집을 하나 짓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구상을 합니다. 몇 평으로 지을지, 정문을 어디로 낼지, 방은 몇 개 만들지, 안방을 어디에다가 둘지, 부엌은 어디에 만들고 화장실은 어디에 둘
것인가? 등 필요에 따라 구상을 합니다. 구상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구상한 것은 머릿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상(像)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구상은 내적으로 어떤 꼴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도 일종의 꼴입니다.
구상을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설계도가 됩니다. 머릿속에
있는 상이라는 꼴은 지우지 않고도 수없이 변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계도를 고치려면 지워야 합니다. 구상을 그려놓으면 하나의 설계도가 되고,
설계도에 따라 일정 시간과 기술과 재료를 투입하면 건물로 나타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구상이 보이는 건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도 이처럼
보이지 않는 마음이 몸을 통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마음과 몸이 있는 것처럼 모든 피조만물에도 마음과 같은 내성(內性)이 있고
몸과 같은 외형(外形)이 있습니다. 피조만물은 인간을 본으로 해서 지었기 때문에 인간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인간의 마음과 같은
동물심(動物心)이 있고 그 동물심에 따라 움직이는 몸, 즉 동물체(動物體)가 있습니다.
식물도 식물심(植物心)이 있고 그 식물심에 의해서
움직이는 식물체(植物體)가 있습니다. 식물을 관찰해 보면 주광성(走光性)이나 굴광성(屈光性)에 따라 식물이 추구하는 방향대로 움직입니다.
나팔꽃의 경우 꽃씨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그 조그만 씨 속에 나팔꽃이 줄기로 휘감고, 꽃이 새벽에 피었다가 해가 떠오르면 지는 속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 조그마한 씨 속에 생명이 들어있고 향기도 들어 있습니다. 동물이나 식물도 모두 마음과 몸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광물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자에도 인간의 마음에 해당하는 내명성(內命性)이 있습니다. 양이온과 음이온을 결합하여 분자를
형성하도록 명령하고 감독하는 원인적인 요소가 바로 내명성입니다. 내명성에 따라서 수소(H) 두 분자와 산소(O) 한 분자가 만나서 물
분자(H2O)를 형성합니다. 분자를 쪼갠 원자에도 내명성이 있습니다. 내명성이 전자(電子)에게 양자(陽子)를 중심으로 돌도록 합니다. 원자를
쪼갠 소립자도 양성과 음성이 있으며 그것도 내명성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내명성은 에너지입니다. 인간의 육신이나 마음도 마지막에는 에너지로
존재합니다. 존재세계가 물질로 되어 있다고 규정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신적인 분야라
할 수 있는 파동성(波動性) 에너지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적인 분야라 할 수 있는 입자성(粒子性) 에너지입니다. 파동성 에너지는 입자성 에너지가
물체가 될 수 있도록 명령합니다. ‘통일원리’에서는 이 파동성 에너지와 입자성 에너지의 작용을 내명성이라고 규정합니다. 파동성 에너지는 우주의
근본으로서, 그 근원은 하나님에게로 올라갑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만물세계는 무엇이든지 내성과 외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내성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어떤 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외형은 보이지 않는 내성을 닮았습니다. ‘통일원리’는 보이지 않는 내성을
성상(性相)이라 하고, 보이는 외형을 형상(形狀)이라 합니다. 이처럼 만물세계는 성상과 형상이라는 공통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상과 형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존재의 상대적인 양면의 꼴을 말하는 것이므로 형상을 ‘제2의 성상’이라고도 합니다. 이 성상과 형상은 앞에서
논한 양성·음성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공통된 법칙입니다.
피조세계가 지닌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이라는 법칙은 과거·현재·미래에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법칙입니다. 이처럼 피조세계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양면성, 즉 성상과 형상, 또는 양성과 음성을 각각
‘이성성상(二性性相)’이라고 합니다. 이성성상은 같은 존재의 양면적인 꼴을 말하는 것이므로 성상과 형상도 이성성상이고, 양성과 음성도
이성성상입니다.
이성성상의 성상과 형상, 그리고 양성과 음성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성상과 형상은 서로 주체와 대상 안(내적)과
밖(외적), 원인과 결과, 종(종적)과 횡(횡적), 무형과 유형의 관계를 지니며, 양성과 음성은 서로 주체와 대상, 안(내적)과 밖(외적),
우와 좌의 관계를 지닙니다.
2) 하나님의 실상 79
인간으로부터 소립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이라는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공통된 법칙입니다.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는 피조만물을 보면 하나님이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도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이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모르거든 사람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과인 피조세계가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으로 되어 있으니, 원인인 하나님도 성상과 형상, 음성과 양성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피조만물이
지닌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은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니고 있는 성상·형상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상·형상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은 존재세계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근본 본(本
) 자를 붙여서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양성과 음성에도 근본 본(本) 자를 붙여서 본양성(本陽性)과
본음성(本陰性)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는 않지만 본성상과 본형상, 본양성과 본음성의 이성성상이라는 꼴을 가진 중화적
통일체(中和的統一體)로 계십니다.
결과는 원인에 의해 나타나는 것인데 원인에 원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제1원인(第一原因)이 나옵니다.
제1원인이라는 말은 원인 중의 원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반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1원인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왔느냐? 그것도
원인이 있어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니 그 원인을 추적하면 또 원인이 나올 것이다. 계속 원인을 추적하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니 신(神)도 없고 무(無)다. 존재세계는 보이는 것밖에 없다.’ 이러한 유물사상을 가진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원인을
추구해 가더라도 최종적인 원인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제1원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제1원인을 가리켜서 기독교에서는 창조주, 과학에서는 절대자,
철학에서는 유일자(唯一者)라고 합니다. 이것을 한국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입니다.
제1원인인 하나님이 이성성상을 지녔기 때문에 결과체인 만물도
하나님을 닮아서 이성성상이라는 양면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 본양성과 본음성의 이성성상이 전개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법칙에 따라 결과세계를 있게 한 원리본체(原理本體)입니다.
(1) 본성상과 본형상
81
존재세계의 제1원인자인 하나님을 원리본체로 규정했습니다. 원리본체, 즉 하나님에게는 인간의 마음과 같은 부분이 있고 몸과 같은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성상과 본형상의 이성성상입니다.
본성상은 인간의 마음과 같은 부분이고 본형상은 인간의 몸과 같은 부분입니다.
원리본체는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의 마음과 몸처럼 두 속성(屬性)의 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보다 마음이 중요한 것처럼
하나님도 본형상보다 본성상이 중심입니다. 이 본성상의 근본 속성이 바로 심정(心情)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상은 하나님의 마음인데 마음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심정은 하나님 참사랑의 뿌리가 되고, 하나님 인격(人格)의 핵이 됩니다.
그 심정에서 나온
사랑이 참사랑인데, 참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체를 지니지 않는 한 이런 내용은 실체화되지 않습니다. 또 느껴지지도 않고
체휼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실체를 지니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원리본체는 심정의 근원자로서 사람을 통해
참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에 원리본체를 놓고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입니다. 심정에서 나온 사랑이 참사랑이고, 참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했을 때 나타나는 품격이 인격입니다. 하나님에게 ‘님’자를 붙이는 것도 인격적인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에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심정의 하나님’이라고 규정짓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무한대의 영(靈)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창조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절대자이십니다.
본형상은 본성상의 대상으로서 원리본체의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능력에 해당하는 분야로서 현상세계를 존재케 하는 힘이기 때문에 만유원력(萬有原力)이라고 합니다. 만유원력에는 원리와 법도와 질서가 포함됩니다.
하나님도 이 만유원력의 원리와 법도와 질서 속에 운행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해서 마음대로 사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유원력은 모든 존재를 존재하도록 하는 힘이기 때문에 그 분야는 무한대입니다. 그것을 성서에서는 능력(能力)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신성은 본성상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은 본형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리본체의 본성상과 본형상은 피조만물의 성상·형상과 마찬가지로 주체(主體)와 대상(對象), 원인(原因)과 결과(結果),
상(上)과 하(下), 전(前)과 후(後), 안(內的)과 밖(外的), 종(縱的)과 횡(橫的), 무형(無形)과 유형(有形)이라는 상대적
관계입니다.
본성상과 본형상의 상대적 관계로 보면 본성상이 주체요, 본형상은 대상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주체와 대상은 격위(格位 :
품성의 차이)의 개념입니다. 원인과 결과는 시간의 개념이고, 상·하, 안·밖, 종·횡은 위치의 개념입니다. 또 전·후는 위치와 시간이 복합된
개념이고, 무형과 유형은 시각적인 개념입니다.
성상에 속하는 원인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습니다. 원인에서 결과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있어야
시간이 나오고, 형상이라는 결과가 나와야 형체(有形)가 드러나면서 존재하는 위치, 즉 공간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본성상은 무형이나 유형이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본형상을 통해 형체가 드러났기 때문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무형이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창조가 벌어지기 전에
하나님에게도 완성하기 위한 성장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시각(視覺)이 감지할 수 있는 어느 한계선을 넘으면 그 점을 볼 수는 없지만, 끝없이
가더라도 그 한 점은 존재합니다. 그 핵(核 )이 하나님입니다. 그런 한 점과 같은 작은 점에서부터 하나님은 커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한
점에서부터 커 오셨다는 말은 하나님도 본성상과 본형상을 통해 당신 스스로를 창조하고 성장시켰다는 뜻입니다. 성서 출애굽기 3장 14절에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2) 본양성과 본음성 83
인간으로부터
소립자까지 모든 피조물은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인 양성과 음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도 양성과 음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본양성과 본음성의 이성성상입니다. 양성과 음성은 하나의 성(性 ; 생식기)을 의미합니다. 창조는 본성상과 심정과 본형상의 능력을 동기로 하여
벌어지지만 최종적으로는 본양성과 본음성의 절대성(絶對性: 여기에서는 다른 것과 비교하거나 양립할 수 없는 번식을 위한 절대적인 생식기를 말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본양성의 절대성에서 출발한 정자는 참사랑의 씨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본음성의 절대성에서
출발한 난자는 참생명의 몸입니다. 참사랑의 씨와 참생명의 몸이 하나님 안에 공존하지만, 그 자체는 존재세계의 근원일 뿐 시간과 공간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자체적으로는 창조나 번식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체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실체로 아담·해와(남자·여자)가 나타날
때 절대성 참아버지의 참사랑의 씨와 절대성 참어머니의 참생명의 몸이 하나 되어 번식이 이루어집니다. 실체인 아담과 해와의 생식기를 통해서 혈통이
세워지고 핏줄이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밝힌 본성상과 본형상의 관계처럼 원리본체의 본양성과 본음성도 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는 주체와 대상, 안(內的)과 밖(外的), 우(右)와 좌(左)의 관계로 존재합니다. 본성상과 본형상은 서로 수직적이요 종적인 관계를 이루고
본양성과 본음성은 수평적이요 횡적인 관계를 이룹니다.
또 같은 양성과 음성도 똑같지는 않습니다. 양성도 자세히 살펴보면 양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넓은 데가 있는가 하면, 음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좁은 데가 있습니다. 음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성도 양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넓은 데가
있는가 하면, 음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좁은 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양성에도 양적인 기질과 음적인 기질이 있으며, 음성에도 양적인 기질과
음적인 기질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양성과 음성, 둘로 나누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성과 음성은 상하(上下)의
주종관계(主從關係)가 아니라 좌우(左右)의 평등관계(平等關係)입니다.
(3) 이성성상의 통일체 84
앞에서
원리본체가 본성상과 본형상, 본양성과 본음성의 이성성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렇다고 원리본체를 분립된 다수의 개체로 보면 안
됩니다.
본성상과 본형상의 통일체
본성상은 하나님의 마음이고 본형상은 하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은 본성상과 본형상의 중화적 통일체로
계십니다. 마음과 몸은 개념으로 볼 때는 정신과 물질로 나뉘지만 실제는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에 속하는 마음은 존재하기 위해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다만 물질에 속하는 몸만이 공간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그래서 본성상과 본형상은 공존하는 동일요소입니다.
제1원인자인 하나님의 본체는 마음과 몸, 두 요소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분리할 수 없는 완전한 동일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통일체(統一體)입니다.
물과 수증기와 얼음은 액체·기체·고체라는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지만 그 본질은 H2O입니다. 물도 H2O, 수증기도
H2O, 얼음도 H2O로 되어 있습니다. 액체·기체·고체로 존재하는 물의 형태는 각각 다르지만 그 본질은 수소와 산소라는 동일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성상은 이원론(二元論)이 아니고 일원론(一元論)입니다. 마음과 몸을 이원론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통일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일원론이 맞는 것입니다. 존재세계는 물질과 정신이 따로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정신이
먼저냐, 물질이 먼저냐?’, ‘유물론이냐, 유심론이냐?’ 등의 논쟁은 더 이상 무의미합니다. 본질을 보니 원인적 존재인 하나님도 시차가 없는
정신과 물질의 두 요소로 되어 있으며,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합니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제1원인 되시는 하나님만을
‘창조주요, 절대자요, 유일자’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성상의 속성은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이고 본형상의 속성은 원리와 법도와
질서입니다. 그런데 본성상과 본형상의 중심은 심정입니다. 심정이 있기 때문에 참사랑과 인격도 있고, 원리와 법도와 질서적인 생활이 가능합니다.
심정과 원리와 법도와 질서를 떼어 놓으면 굉장히 삭막합니다. 그래서 원리 안에서 심정이 작용하고, 법도 안에도 심정이 작용하고, 질서 안에도
심정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정이 작용하고 있다는 말은 거기에 참사랑이 있고 인격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심정과 원리도 이질적인
요소라 해서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안 됩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은 제1원인자이시며 본성상과 본형상, 이성성상의 중화적 통일체로
계십니다.
본성상과 본형상은 하나님의 마음과 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이 있고, 하나님의 몸 속에는 원리와
법도와 질서가 있습니다. 원리와 법도와 질서를 떠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도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하나님의 몸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그렇게 될 수 있는 요소를 다 주셨습니다.
벼농사를 예로 들면, 벼는 이삭이 나오면 하얀 꽃이 피고 그
꽃이 떨어지면 벌어졌던 벼 껍질이 오므라들면서 그 속에 젖빛 달콤한 물이 가득찹니다. 그 달콤한 물이 씨가 됩니다. 여물기 전 벼 껍질 속에
들어 있는 달콤한 물을 씨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달콤한 물은 씨가 되는 요소일 뿐입니다. 씨가 되는 요소가 일정 기간을 지나 완숙(完熟)하게
되면 비로소 씨로 완성됩니다. 완성(完成)과 완숙(完熟)은 좀 다른 개념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속에도 하나님이 주신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상이라고 하는 마음의 꼴 속에 하나님 심정의 본질적 속성을 닮을 수 있도록 모든 요소를 다 주셨습니다. 인간은
생활을 통해서 그 요소를 완숙시켜야 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을 온전히 닮아야 하고, 몸으로는 하나님의 몸이 되어 원리와
법도와 질서적인 생활을 해야 완숙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구상에 70억 인류가 살지만 모두가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게
되면 통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본성상인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몸도 본형상인 하나님의 몸을 닮으면 통일이 됩니다.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을 닮은 인간은 원리와 법도와 질서적인 생활을 통하여 인류를 통일체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어디에 살든
오색인종이 하나님을 닮아 원리의 본체 안에서 실체화한다면 서로 갈라지고, 갈등하고, 대립하고, 투쟁하는 요소는 사라집니다. 그때 비로소 인류는
역사상 오랫동안 염원해 온 통일된 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본양성과 본음성의 통일체
하나님은 본성상과 본형상의 중화적 통일체일
뿐만 아니라 본양성과 본음성의 중화적 통일체로 계십니다. 본양성과 본음성이란 하나님의 절대성(絶對性 : 생식기관)에 속한 두 가지 요소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참아버지의 생식기, 즉 절대성의 정자인 참생명의 씨를 가졌고, 참어머니의 생식기, 즉 절대성의 난자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생명의 몸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자가 난자를 만나 새로운 혈통이 나오게 되는 것은 정자와 난자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생식기관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성을 실체로 나타낸 것이 남성과
여성입니다. 하나님의 실체 남성이 아담이고, 실체 여성이 해와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실체로 나타나기 전 하나님 속에 있던 양성과 음성은 하나님의
두 생식기입니다. 하나님이 두 생식기를 가지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분립되어 나올 때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가 따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볼록이, 여자는 오목이를 가졌지만 그 두 생식기의 주인은 상대방입니다. 생식기는 자기 몸에 있지만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두 생식기의 주인을 엇바꿔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생식기를 가지고 계셨지만, 그 생식기는 쓸 데가 없었습니다.
원인적 존재에는 시간과 공간성이 없는데다 하나님은 무형의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두 생식기를 가지고 계시지만 당신 스스로
느끼고 체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분리된 실체를 창조했고 인간은 남자의 생식기, 여자의 생식기 따로따로입니다.
하나님은
남성격 주체(男性格主體)이기 때문에 여자를 선유(先惟)하고 남자를 지었습니다. 여자를 선유했다는 말은 그 여자에 맞게끔 남자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해와의 것이 오목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오목이에 맞게끔 아담을 볼록이로 지은 것입니다. 아담의 볼록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볼록이를 닮았습니다.
본양성과 본음성의 중화적 통일체로 계신 하나님은 격위로 볼 때는 남성격 주체(男性格主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여성격 주체(女性格主體)가 아니고 남성격 주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을 주장하는 남미의 여성 신학자들이 “왜 하나님이 아버지냐?”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하나님은 어머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창세기 1장
27절의 말씀(하나님은 당신의 모양대로 사람을 짓되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지었는데 왜 하나님을 아버지로만
부르느냐, 어머니라고 부르자.”는 주장입니다. 그것은 원리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근본을 따진다면 하나님은 아버지만도 아니고
어머니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성품과 어머니의 성품을 다 지니고 있는 우리의 부모입니다.
하나님은 본양성과 본음성의 중화적
통일체로 계시는 절대성의 본체로서 모든 양성과 음성의 주체이기 때문에 격위로 보면 남성격 주체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에는 절대성의 남성격 주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동시에 나의 아버지, 나의 부모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체라는 말은 대상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마음이 주체라면 몸은 대상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성이 주체라면 여성은
대상입니다. 앞으로 남자와 여자의 질서는 여기에서 세워집니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피조세계는 모두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의 질서와 법칙 속에 운행됩니다.
남자를 먼저 지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종속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를 전제하고 남자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평등합니다. 사랑 때문에 평등한
것입니다.
양성과 음성은 상하관계나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주체와 대상의 횡적인 관계입니다. 아담에게 ‘너의 생식기는 네가 가지고 있지만
해와 것이다.’ 해와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생식기는 네가 주인이 아니라 아담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부모인 하나님으로부터 공인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가정이상은 영원합니다. 깨질 수가 없습니다. 둘이 하나되는 절대성 때문에 본연의 세계에서는 한 번 결혼하면 두 번 다시
결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생식기를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고 나면 부모인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옵니다. ‘너희들 생식기의 주인은 나다.’
그러니 너희들 맘대로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식기의 주인은 횡적으로 볼 때는 상대가 되고, 종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이
됩니다.
모든 피조만물에게는 보다 근본적인 성품이 있습니다. 결과세계가 양성과 음성으로 되어 있는 이 두 생식기의 실체로 나타났다는 말은,
제1원인적 존재가 가지고 있는 본양성과 본음성의 본체이신 하나님도 내적으로 두 생식기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원리강론’에서는
하나님이 본양성과 본음성의 실체로 계시다고 밝혔지만, 하나님이 두 생식기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은 하지 못했습니다.
본성상·본형상과
본양성·본음성의 통일체
하나님의 실상을 설명하려면 본성상과 본형상이라는 이성성상에 본양성과 본음성이라는 또 하나의 이성성상이 거론됩니다.
이것을 보고 이성성상이 아니라 사성성상(四性性相)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성성상에는 본성상과 본형상, 본양성과
본음성이라는 네 가지 성품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성성상이 아니고 이성성상입니다.
왜냐하면 본양성과 본음성은 본성상과 본형상이라는
본성에 포함되는 속성(屬性)이기 때문입니다. 성상인 마음에는 명랑하고 유쾌하고 즐겁고 기쁜 양적인 요소가 있는 반면, 우울하고 짜증스럽고 기분
나쁜 음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두 요소가 마음속에 있다가 나타납니다.
형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상 속에도 양적인 요소와 음적인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성상 속에는 양성만 들어가고 형상 속에는 음성만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제1원인 되시는 하나님은
본성상과 본형상이라는 본성(本性), 그리고 본양성과 본음성이라는 속성(屬性)이 공존하는 이성성상으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원리강론’에
본양성과 본음성의 관계는 본성상과 본형상의 관계와 같다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을 잘못 이해하면 본양성과 본음성의 관계도 본성상과 본형상의
관계와 같다고 규정하기 쉬운데, 본양성과 본음성은 본성상과 본형상에 속한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양성과 음성의 관계가 무조건 성상과 형상의
관계와 같다고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본성상과 본형상, 그리고 그 속성인 본양성과 본음성이 포함된 이성성상의 통일체입니다. 통일체에는 싸움의
개념이 없습니다. 한 분의 원인자에서 태어난 실체들은 모두 상대적인 존재이면서도 내용으로 볼 때는 하나입니다. 모든 존재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싸우고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위한 통일체로 존재합니다.
3) 신상과 신성의 구조(철학의
관점)
하나님에게는 신상(神相)과 신성(神性)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는 않지만 꼴, 다시 말해서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꼴을 신상이라고 합니다. 신성은 그 꼴 속에 있는 하나님의 기능·성질·능력 등을 말합니다. 신상은 외적인 것이고 신성은 내적인
것입니다.
신상과 신성이 관계성을 가지고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사위기대(四位基臺)입니다. 정분합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해야 합니다. 수수작용을 하지 않으면 정분합작용이 일어나지 않고 정분합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위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만유원력(萬有原力)에 의해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잘 주고 잘 받으면, 거기에서 존재를 위한 모든 힘, 즉
생존과 번식과 작용 등을 위한 힘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발생하는 작용을 수수작용이라고 합니다.
수수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원리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원리의 힘이 바로 만유원력입니다. 만유원력은 종적인 힘이고, 수수작용은 횡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수작용과 만유원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설명합니다.
(1) 신상
신상(神相)이란 하나님에 대한 꼴의 측면을 말합니다.
신상에는 보편상(普遍相)과 개별상(個別相)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보편상
보편상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닮아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질을 말합니다. 인간에서부터 소립자에 이르기까지 피조만물은 전부 하나님의 신상을 닮아 지어졌습니다. 신상의 보편상은 성상·형상,
양성·음성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피조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서
보편상이라고 합니다.
개별상
한편 모든 피조물에는 독특한 개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개별상을 닮아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개별상은 저마다 다른 특성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을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합니다. 피조만물은 하나님의 신상을 닮아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닮았습니다.
만물이 종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개별상입니다. 동물은 종 그자체로 개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나
말은 종별로 하나님의 개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각각의 개체가 하나님의 무한한 개별상을 가진 독특한
개별체입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라도 생김새가 다르고 개성도 다르고 취향도 다 다릅니다. 하다못해 쌍둥이도 뱃속에서부터 함께 자라서
태어났지만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이처럼 다른 개성을 가진 것은 하나님의 개별상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보편상이라고 하는 꼴을 닮았으면서도 개성은 전부 다릅니다. 인간은 개체가 개성진리체이지만, 다른 만물은 종별로 개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개별상을 실체로 닮아서 완성해야 하는 인간에게 책임분담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만물 세계에는
책임분담(責任分擔)이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2) 신성 93
신성(神性)이란 하나님에 대한
기능·성질·능력의 측면을 말합니다. 인간은 보편상이든 개별상이든 하나님의 신상을 닮고 있으면서도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신성을 닮았습니다.
심정·로고스·창조성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신성의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그 중에서도 심정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심정
하나님
신성의 첫 번째 요소인 심정(心情)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본성상의 핵입니다. 무한한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가장 근본된 속성이 심정입니다.
심정이 끊어지면 참사랑은 없습니다. 그래서 타락(타락론에서 밝힘)한 아담과 해와를 죽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930세까지 살았지만,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본질적인 관계가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심정은 참사랑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참사랑에서 참생명이 나오고 참생명이 연결된 생식기를 통해서 참혈통이 이어집니다. 심정이 끊어졌기 때문에 참사랑이 없어졌고,
참사랑이 없기 때문에 참생명과 참혈통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심정을 잃어버린 것이 거짓사랑입니다. 거짓사랑은 심정을 뿌리로 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로고스
하나님 신성의 두 번째 요소는 로고스(Logos)입니다. 로고스는 이법(理法)이라는 뜻입니다. 로고스는 헬라어로
이성(理性)과 법칙(法則)을 뜻하는데, 이성은 자율성(自律性)을 말하고 법칙은 필연성(必然性)을 말합니다. 법칙은 인간이 변경할 수 없습니다.
모든 자연계에는 법칙이 있는데 어떤 존재든 그 법칙에 순응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가치법칙(價値法則)도 있습니다.
가치법칙은 우리 인간이 보다 가치 있는 것, 보다 선한 것을 추구하는 법칙입니다. 인간은 본성에 따라 욕망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가치를 이루고자
노력합니다. 본성에 따라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가치추구욕(價値追求欲)이라 하고, 가치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을 가치실현욕(價値實現欲)이라
합니다.
이법(理法) 가운데는 이성(理性)인 자율성이 들어 있습니다. 봄이 오면 산에 꽃이 피고, 땅 속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나뭇가지에
새순이 나오는데 그것은 필연적인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런 자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함과
동시에 이성으로 사물을 판단합니다. 이성은 다른 만물이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성은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으로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자율성은 자기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거나 자기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성질을
말합니다. 인간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을 준수하면서, 이성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생활하는 존재입니다.
창조성
신성의
세 번째 요소는 창조성(創造性)입니다. 인간은 이성과 자율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뭔가를 만들고자 하는 창조성을 갖고 있습니다. 과학자가
과학기술을 통해서 새로운 제품을 발명하는 것만 창조성이 아닙니다.
창조성은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볼펜심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손으로 뜨개질을 해서 예쁜 옷을 만드는
창조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독특한 창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주체사상(主體思想)은
인간이 주체이며, 인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모든 것의 주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에서도
인간의 세 가지 본질을 거론합니다. 인간이 갖추고 있는 3대본질은 자주성(自主性)·의식성(意識性)·창조성(創造性)이라고 합니다.
그런
주체사상만 있으면 안 됩니다. 주체사상이 있다면 대상사상(對象思想)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대상사상을 규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북한을 비판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야 올바른 형제로서 같은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모신 자식으로서 해야 할 도리입니다.
의식성이나 창조성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습니다. 새도 새끼를 낳아서 기를 수 있는 나름의 창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까치는 봄이 되면 집을 짓는데 그 까치집을 보면 그 해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많이 불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도 그 해 바람이 어느 쪽에서 많이 불지 잘 모르는데,
까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까치는 바람이 많이 부는 방향에 절대로 입구를 만들지 않습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방향과 정반대 쪽에 입구를
만듭니다. 까치가 집을 지을 때 입구를 어느 쪽으로 내는 가를 잘 관찰하면 ‘금년에는 동남풍이 많이 불겠구나.’ 혹은 ‘북서풍이 많이
불겠구나.’하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배에 살고 있는 쥐는 그 배가 항해하다가 파선할 것 같으면 출항하기 전에 전부 밧줄을 타고 육지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걸 모르고 항해하다가 죽습니다.
남미에 가면 개미가 많습니다. 개미들이 집을 짓는데, 지상 1미터쯤 되는
개미집도 있습니다. 남미의 개미집은 망치로 깨도 잘 안 부서집니다. 그 지역의 토질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개미들이 지상 1미터 높이의 집을
지었으면 땅 속으로는 얼마만큼 깊이 파들어갔겠습니까? 개미가 그렇게 집을 높이 짓는 이유는 그 지역에는 홍수가 잦기 때문입니다. 1미터 되는
개미집이 물속에 잠겼다면 개미들은 벌써 나무 위로 다 올라 가버리고 난 뒤입니다.
사람은 자연재해가 닥치는 것을 모른 채 살고 있는데,
개미는 벌써 알고 이동합니다. 그래서 개미집으로 올라가면 ‘비가 이 정도 오겠구나.’ 하고, 만일 개미들이 대이동을 해서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면
‘이번엔 대홍수가 나겠구나.’하고 대피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개미가 인간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성은 하나님의 심정이 동기가
됩니다. 사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고 억제할 수 없는 정(情)의 충동심인 심정이 동기가 되어서 창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하나님도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성장해서 심정의 완성자, 참사랑과 인격의 완성자가 될 때 비로소 창조의 동기가 부여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할 대상이 없고, 위하고 싶은데 위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기뻐하고 싶은 마음의 충동으로 창조가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성을 가지고 직접 당신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에게도 심정의 완성기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정의
본체로 계시다.’는 말만으로는 ‘하나님이 커간다,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한다.’는 말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도 자녀의 심정·형제의 심정·부부의 심정·부모의 심정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심정 영역이
4대심정권(四大心情圈)입니다. 하나님이 4대심정권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도 당신 속에 스스로 완전한 창조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완전하게 실체로 느끼고 체휼하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는 사람이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습니까? 형제가 없으면 형제의 심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없는데 자녀의 심정을 어떻게 느끼고, 결혼하지 않아서 배우자가
없는데 부부의 심정을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부부의 심정을 느끼려면 실체로 사랑할 수 있는 부부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 역시 자녀가 있어야
부모의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대심정권에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심정이 다 들어 있습니다.
심정은 바로 참사랑의
뿌리이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심정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닮은 것이 바로 창조성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닮아야만 인간도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창조할 때에도 심정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심정이 동기가 되지 않는 창조물을 놓고 하나님이 기뻐할
수 없습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심정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윤을 얻는 것이 사업의 목적이지만 반드시 심정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동기가 심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정은 하나님의 성상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로고스는 하나님의 형상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로고스는 이법(理法)입니다. 원리와 질서와 법도가 로고스 속에 들어 있습니다. 창조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심정에 대한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것이 절대성(절대적인 성)을 통해 혈통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절대성과 심정은 일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속에
있는 원리는 다 연관성이 있습니다. 본체이신 한 분 속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창조성은 심정이 바탕이 되어 있으며, 심정은 절대성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본연의 혈통과 연결되려면 ‘위하는 생활’이 필수입니다. 위하여 사는 것이 바로 심정문화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혈통 자체는
위하여 살게 되어 있습니다. 혈통은 심정을 바탕으로 한 참사랑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사랑은 위하여 살게 되어 있고 심정은
혈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지었지만, 아담·해와도 책임분담으로 스스로 성장·완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속성을 자기의 책임분담으로 완숙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완숙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몸을 닮고, 하나님의 절대성을 닮아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하나님의 신성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본체 속에 있는 속성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호 관계성은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라는 하나의 구조로 나타납니다. 정분합작용은 온전한 상태인 정(正)에서 분리된 상태인 분(分)이
되었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 즉 합성체인 합(合)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정분합작용은 수수작용을 통해서 벌어집니다.
하나인 정(正)에서
출발한 주체와 대상, 분(分)이 수수작용을 통해 새로운 합성체, 합(合)이 되면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이 이루어지는데 존재위치를 놓고 보면
그것이 사위기대(四位基臺)입니다. 그래서 정분합작용이 없으면 삼대상목적이 이루어지지 않고 삼대상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위기대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수수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면 번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3) 신성의 내부
신성은 하나님의 마음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신성에는 내적 성상(內的性相) 내적 형상(內的形狀)이 있습니다. 내적 성상은 기능적 요소(機能的要素)이고, 내적 형상은 어떤 꼴에 해당하는
요소, 즉 형(形)의 요소(要素)입니다.
내적 성상
내적 성상(內的性狀)인 기능적 요소가 바로 지정의(知情意)입니다. 지정의는 마음의
3대작용요소(三大作用要素)입니다. 하나님은 지정의의 본체로 계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지(知)와 정(情)과 의(意)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 융합되어 있습니다. 융합된 지정의를 갖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격적인 신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지 속에는 정과 의가 있고, 정
속에는 지와 의가 있고, 의 속에는 지와 정이 있는 것입니다.
지(知)는 지적인 기능입니다. ‘지’는 아는 것을 통해서 인식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지에도 이성(理性)·오성(悟性)·감성(感性)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지적인 기능이 고장 나면 인식능력이 마비됩니다.
철학은 인간
속에 이성과 오성과 감성이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런 요소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통일원리’에서는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는 기능이 지·정·의인데, 이는 하나님의 내적 성상을 닮아서 나온
것입니다.
이성(理性)은 보편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능력으로, 냉철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오성(悟性)은 원인과 이유를 논리적으로 묻고
따지며 ‘옳다’ 또는 ‘그르다’고 판단합니다. 감성(感性)은 오감을 통해서 아는 능력인데, 직감적 인식능력입니다. 감성을 가진 사람은 정적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직감이 예민하게 발달한 사람이 있고 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감정들이 모두 감성에 해당합니다.
지적인
기능인 이성·오성·감성을 이해하기 쉽도록 구분해서 따로따로 설명하지만 그것들은 사실상 연합체로 되어 있습니다. 이성 속에는 이성과 감성 둘 다
있지만, 그 중심이 이성이며, 오성 속에도 오성과 감성 둘 다 있지만 오성이 더 강합니다.
정(情)은 정적인 기능, 정감성(情感性)을
말합니다. 정감성은 정적인 기능으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도 기쁠 때는 기뻐하고, 슬플
때는 슬퍼하고, 노여울 때는 한없이 노여워하십니다. 하나님도 기쁠 때는 누구보다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춤을 춘다면 천주가 즐거워 춤을 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계신 것은 정감성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처럼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과 더불어 화동(和同)하고 화목(和睦)하고자 하고, 하나 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노래할 때 자기도 모르게 노래가
나오고, 흥이 겨우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희로애락의 감정인데 그런 감정은 하나님을 닮아서
갖게 된 것입니다.
의(意)는 의적인 기능, 의욕성(意慾性)입니다. 의욕성이 강하면 욕구·결심·결단능력이 강해집니다. 지·정·의의 기능을
조화롭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인격자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지적인 사람도 그것만 가지고는 정과 의를 소화할 수
없습니다. 지적인 사람끼리 만나면 늘 싸움만 합니다. 서로 잘났다고 싸움만 합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적으로 정적인 사람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정으로 지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정적인 사람은 정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정적인 사람은 반드시 어떤 목적과 방향을 설정하고
갈 수 있는 의지적인 면, 지적인 면을 겸해야 합니다. 자신이 지와 정을 겸하면 좋은데 그렇지 못했을 때는 지적인 상대를 만나야 합니다. 한쪽이
불인데 상대방도 불이면 큰일이 납니다. 이쪽이 물인데 저쪽도 물이면 흐리멍덩해집니다. 높은 데가 있으면 낮은 데가 있습니다. 반드시
상대적입니다. 모든 것은 이와 같이 상대적 개념 속에 존재합니다.
제일 어려운 사람이 지적인 사람입니다. 의적인 사람이 바로 행동파인데,
그런 사람이 혁명을 일으킵니다. 지적이거나 정적인 사람은 혁명을 못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절대로 혁명을 못 일으킵니다. 혁명은 모르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은 먼저 계획을 세우더라도 행동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시킵니다. 무지한 사람은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기 마음속에서
결심하면 가서 일을 저질러 버립니다.
의욕성은 욕구와 결심과 결단을 실행할 수 있는 마음과 같은 요소입니다. 의욕성이 매우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의욕성이 강한 사람이 선두에서 끌고 가야 합니다. 조직 세계도 그런 마음의 작용을 알아야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이든 심정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심정을 떠난 사람은 잘못된 행동을 하기 쉽습니다. 자기
욕구를 위해서 남을 미워하기도 하고 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정이 뿌리가 되지 않은 정은 자기를 중심한 정이
되어 버립니다.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이 신성의 근본입니다.
내적 형상 102
하나님에게는 내적
형상(內的形狀)이 있습니다. 형상은 어떤 형태를 가진 꼴을 말합니다. 이는 형(形)의 요소(要素)라고 하며, 관념(觀念)과 개념(槪念)과
원칙(原則)과 수리(數理)가 이에 해당합니다.
관념(觀念)은 구체적 표상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놓고 보면, 하나님은 먼저 구상을 하신 후
모든 것을 창조했습니다. 우리가 집을 지으려면 먼저 머릿속에 구상을 합니다. 하나님도 존재세계를 만들어갈 때 먼저 하나하나 구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인 표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구체적으로 구상해서 창조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모든 기능은 같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생식기입니다. 생식기를 어디에 만들 것인지 구체적으로 구상했습니다. 눈과 코를 어디에 붙일 것인지 구상했습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에 앞에 눈 두 개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코를 한 가운데에 종적으로 세웠습니다. 그 다음에 귀를 양쪽에
달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체 하나 하나를 구상했습니다. 그냥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형상 속에 있는 하나의 꼴,
즉 형상이 구체적인 표상인데, 그것을 관념이라고 합니다.
개념(槪念)은 추상적 표상입니다. 예들 들어 ‘동물이다.’ 하면 그것은 추상적인
표현입니다. ‘개’라는 이름 자체는 추상입니다. 개는 개인데 진돗개인지 삽살개인지, 어떤 종류의 개인지를 밝히는 것은 구체적 표상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추상적이지만 남자 또는 여자라고 하면 좀 더 구체적이 됩니다. 개념은 이러한 구체적인 표상을 갖기 전에 나타나는 추상적인
표상입니다.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했을 때 개념이 관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원칙(原則)은 법칙을 말하는 것인데, 원칙에는
자연법칙(自然法則)과 가치법칙(價値法則),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연법칙은 우주의 모든 질서와 법칙을 말합니다. 예들 들어서 태양계를
보면, 태양을 중심해서 지구가 돌고 있습니다. 지구도 태양 주위를 돌면서 자전을 하고 있습니다. 지구 이외에도 아홉 개의 행성이 태양을 중심해서
돌고 있습니다. 지구 이외에도 아홉 개의 행성이 태양을 중심해서 돌고 있습니다. 또 지구를 중심으로 달이 돌고 있습니다. 수억만 년이 지났어도
태양계가 돌아가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주의 질서와 법도는 어김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의 질서와 법도는 하나님이 지으신 원리와 법도대로
운행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법칙입니다.
우리 인간도 그러한 법칙에 의해 살아갑니다.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식에 대한 생활의 법칙, 규범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규범이 있습니다. 형제 사이에도 규범이 있고, 친구 사이에도 규범이 있습니다. 이웃과 이웃 간에도 규범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같은 외적 환경을 만들어놓으시고 그 존재세계의 주인으로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법도를 무시하고
살도록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도 자연환경의 법칙에 순응해야 할 육신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가치법칙이 있습니다. 상품의 가치를 논하는 것도 가치지만 여기서는 윤리적 가치를 말합니다. 사람이 윤리적 가치를
잃어버리면 가치 없는 인간이 됩니다. “저 사람 쓸모없는 사람이야, 저 사람 형편없어, 쓰레기 같은 사람이야, 가치 없는 사람이니 상대하지
마라.”는 등의 욕설을 듣는 것은 인간으로서 윤리적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윤리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면 비록 휠체어를
타고 다니더라도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저 사람 참 안됐구나, 저 사람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윤리의 토대가
하나님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 원칙을 지키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법칙과 원칙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그 법칙과 원칙에
따라 살면 하나님은 자동적으로 나와 함께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 오십시오. 나를 도와주십시오.”해도 내가 원칙에 따라 생활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은 도와주실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환경이 밀어내버립니다. 우리 인간에게 왜 고통이 오느냐? 창조주의 원칙에 위배되었을 때 그 원칙이
인간을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부터 고통이 옵니다.
하나님은 수리(數理)의 하나님입니다. 나타나는 것은 모두 수리적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고도의 수학자이자 고도의 과학자이며 고도의 예술가입니다. 하나님을 닮아 지어놓은 모든 존재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미(美)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이고,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주선을 만들거나 인공위성을 만드는 기술도 수리적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성상적인 내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만물은 모두 수리적으로 존재합니다.
창조하려면 먼저
구상을 해야 합니다. 구상은 추상적이지만 그것이 점점 구체화되어 나타납니다. 구체화된 것이 실체로 나타날 때는 수리적인 법칙을 따릅니다.
창조에는 반드시 이런 고도의 법칙이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정체(正體) 104
첫째, 하나님은 심정과 참사랑의 본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인 본성상의 본질적 요소가 심정과 참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체를 말하려면 맨 먼저 심정과 참사랑이 나옵니다.
둘째,
하나님은 지정의(知情意)와 진미선(眞美善)의 본체입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3대기능은 지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 안에
지정의가 있습니다. 그 지정의는 하나님의 본성상을 이루는 요소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원리와 법도와 질서의 근원이신 원리(原理)의
본체(本體)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참사랑과 참생명과 참혈통의 근원이신 절대성(絶對性)의 본체로 계십니다. 하나님이 절대성의 본체로 계신
이유는 하나님은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본체요, 근원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참사랑과 참생명은 절대성을 통해서 참혈통으로 이어집니다.
참아버지의 절대성 정자는 참사랑의 씨이고, 참어머니의 절대성 난자는 참생명의 몸입니다. 참생명의 몸인 참어머니의 절대성 난자는 참아버지의 절대성
정자인 참사랑의 씨를 받아서 비로소 혈통을 잇게 되는데, 그 혈통은 참사랑과 참생명이 결합된 곳에서 출발합니다. 그곳이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입니다. 그래서 생식기는 절대성을 가져야 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참사랑과 참생명과 참혈통의 본체요 근원으로 계신 하님을
닮은 자리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으면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을 실체로 번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성 본체를 닮은 절대성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양심(良心)의 주체입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선을 추구하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 양심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서 선으로 작용합니다. 절대적인 양심의 본체가 하나님인 것입니다.
여섯째, 하나님은 생명의 본체요,
근원자(根源者)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과학과 의술이 발달해도 생명을 창조하지 못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줄기세포로 환자를 치료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 자체도 인체의 생명단위인 세포를 증식해서 치료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생명체의 요소를 번식하거나 증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전혀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생명체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본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체인 자녀가 나오지만 그 남자와 여자도 하나님 안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생명의 씨인 정자와
생명의 몸인 난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본체 속에 있던 두 요소가 실체를 통해 나오기 때문에 결국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일곱째, 하나님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하신 자존자(自存者)이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입니다. 절대라는 말은 유일하기
때문에 나왔고, 영원이라는 말은 불변하기 때문에 나왔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유일·불변·영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자요,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입니다.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는 말은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을 놓고 보면 몸은
보이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은 꼴이 있지만 실체가 없습니다. 마음은 꼴을 가진 요소로서 몸 안에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 규정은 못하지만 마음은 있습니다. 마음은 몸 안에서 무소부재한 존재입니다. 마음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언제 언디에서나
작용합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육신 안에만 국한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신을 벗어난 우주 공간 어디서든지 활동할 수 있는 속성이 있습니다.
마음은 육신에서 무소부재하지만 육신을 벗어나서도 어디서든 활동하고 운행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몸 안에서 무소부재하고 몸 밖에 나가서도
원리본체가 지어놓은 우주 공간 어디서든지 작용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요소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천주를 지으신 하나님은
천주의 어디든지 운행하고 작용하십니다. 한곳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 마태복음 6장 9절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했습니다.
하늘이라는 개념은 무형세계를 뜻하고, 땅은 지상세계를 말합니다. 우주 공간과 무형세계를 합쳐서 천주(天宙)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주 가운데 안
계신 곳이 없는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여덟째, 하나님은 밤의 하나님이요, 낮의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또 하나님은 만왕(萬王)의 왕이요,
참부모입니다. 또 하나님은 예수님의 조상이시고, 참부모님의 조상이십니다.
본성상과 본형상을 달리 표현하면 밤의 하나님과 낮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밤에는 보이지 않던 형체가 낮이면 드러나는 것을 비유한 표현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하나님, 몸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되는 성상적인 밤의 하나님을 실체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몸이 되는 형상적인 낮의 하나님을 창조하셨습니다. 스스로 몸의 하나님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동기는 밤의 하나님입니다. 밤의 하나님 속에 정해진 구상, 즉 추상적인 관념이 하나의 원칙과 수리에 의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낮의 하나님입니다.
몸의 하나님도 무형이기 때문에 실체를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몸이 되도록 아담과 해와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몸인 아담과 해와는 계대(繼代)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은 마음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4대심정권을 닮아서,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심정의 자리에 나아가야 하고, 몸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닮아야 합니다. 마음과 몸을 통해서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된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성전, 즉 몸이 됩니다. 낮의 하나님, 몸의 하나님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체인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여 개인적으로 마음과 몸이 통일되고 그런 남자와 여자가 통일체가 되면, 하나님도 두 속성의
본체로 계시기 때문에 마음의 하나님인 밤의 하나님과 몸의 하나님인 낮의 하나님이 통일체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한소(無限小) 또는
무한대(無限大)의 영(靈)으로 계십니다. 힘으로 볼 때도 무한소 또는 무한대의 힘으로 계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천주의 핵이고 모든
존재의 핵입니다. 그 핵은 한점과 같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수천·수만·수억 킬로미터를 가더라도 그 점은 존속합니다. 하나님은
무한대의 영으로 계시지만 무한소의 영으로도 계십니다. 또 무한대의 힘으로 계시지만 무한소의 힘으로도 계십니다. 그만큼 존재의 폭이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폭을 지닌 무한대의 영과 무한대의 힘으로 계십니다. 힘의 본체로 계시고 존재세계의 핵으로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힘의 본체이신데 그 힘이 심정과 참사랑, 지정의와 진미선, 원리와 법도의 질서, 영원·불변·절대·유일·무소부재의
자존성,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뿌리가 되는 절대성 등 하나님의 본성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심의 주체요,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무한대의 힘은 순수한 물질적 요소이지만,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는 영은 마음의 요소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요,
나의 부모입니다. 심정의 아버지요, 참사랑의 아버지요, 인격의 아버지요, 절대성의 본체로 계신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나의 아버지임과
동시에 나의 참된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참자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닮고, 참사랑을 닮고, 인격을 닮고, 절대성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참고1
개성의 존귀성은 어디서 오는가? 110
인간은 ‘존귀하고 신성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이 존귀하고 신성한 존재냐? 그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귀하고 신성한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본성상은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부분인데, 그 본성상에는 내적 성상(機能的 要素)이 있고 내적 형상(形의 要素)이 있습니다.
내적 성상은
하나님 마음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 그것이 지정의입니다. 그리고 내적 형상은 내적 성상인 지정의를 통해서 어떤 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꼴은
다양한 하나님의 내적 성상에 따라 결정된 개성체(個性體)이기 때문에 그것을 닮아난 인간은 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외모나 성격은 저마다
다릅니다. 한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 심지어는 쌍둥이도 서로 다릅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개성을 닮았기 때문에 저마다 절대성을
가졌고 신성하고 존귀한 것입니다.
그런 존재를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신하고 인격적으로 모독하면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고 모독하는
꼴이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무시하고 미워하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미워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자신을 무시하고 미워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내적 형상(꼴) 가운데 개별상(個別相)을 닮아난 실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귀성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저마다의 특성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리는 일도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참고2
우주의 본질이 무엇이냐? 112
지금까지 우주의 본질이 ‘물질이냐, 정신이냐?’를 놓고
많은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여기에 대한 결론은 ‘물질만도 아니고 정신만도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의 관계로 보면
정신과 물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처럼 분리될 수 없는 완전 동일요소인 통일체(統一體)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 예를 들었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해 보겠습니다. 물과 수증기와 얼음은 액체·기체·고체로 각각 다른 특성을 띠지만 동일하게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H2O)인 것처럼
우주의 본질인 하나님도 이성성상의 통일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성성상론은 이원론(二元論)이 아니고 유일론(唯一論)입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우주의 본질이 유심(唯心)이냐, 유물(唯物)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해왔는데, 이성성상론으로 보면 그것은 ‘유심만도 아니고
유물만도 아니라 둘이 하나된 유일이다.’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심론(唯心論)과 유물론(唯物論)을 놓고 벌이는 철학계의
논쟁에서도 ‘유심론만도 아니고 유물론만도 아닌 유일론이다.’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유심사상(唯心思想)과 유물사상(唯物思想)의 논쟁에서도
‘유심사상만도 아니고 유물사상만도 아닌 유일사상이다.’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또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싸움에서도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하나님주의다.’ 하는 결론으로 양대 진영의 싸움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우익(右翼)과 좌익(左翼)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익도 좌익도 아닌 두익(頭翼思想)이 등장해야 모든 사상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좌익과 우익은 논쟁의 대상이 되는 유심론과
유물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등 양분된 사상체제를 각각 조류(鳥類)의 양쪽 날개에 비유한 표현입니다. 우익은 우익대로, 좌익은 좌익대로 각각
자기가 도맡아 전체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지만, 상대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그 역할을 해낼 수는 없습니다. 비록 우익과 좌익 둘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두 날개의 활동을 적절하게 조종하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머리 쪽 두뇌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두익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머리 쪽 날개라는 뜻의 두익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좌익과 우익에서
‘익(翼)’이라는 표현이 실제로 날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쪽’이라는 위치를 강조한 표현임을 감안하여 거기에 대비되는 두익이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익(右翼)이냐, 좌익(左翼)이냐’ 하는 논쟁도 많이 있었습니다만, 우익만 가지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좌익만으로도 안 됩니다.
우익과 좌익은 인간 개체로 볼 때 분신(分身)의 한 분야입니다. 오른손과 왼손은 내 분신의 한 요소입니다.
오른손이 왼손을 보고 ‘오라!’ 한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왼손이 오른손에게 ‘오라!’ 한다고 오른손이 가지 않습니다. 머리에서 명령해야
합니다. 머리에서 ‘왼손아 앞으로 오고 오른손도 오너라!’ 해야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오른쪽 왼쪽이 각기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박수를 치라고 명령해야 두 손이 맞장구를 치며 손뼉을 치는 것입니다. 우익과 좌익의 문제를 정리할 수 있는 사상은 두익사상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우익이나 좌익이 가지고 있는 정책적인 이론으로는 절대로 그들이 하나될 수 없습니다. 인간 중심한 평화운동, 인간 중심한
통일운동으로는 절대로 자신을 넘을 수가 없고 더 나아가서 자기가 살고 있는 국가나 자기가 소속한 정당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정의 본체인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살아갈 때 개인과 가정을 넘고, 종족·민족·국가·세계를 넘어 천주까지 넘을 수 있습니다.
또 종교의 사상도 넘고 모든 체제와 제도도 다 넘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상체제의 논쟁을 두익사상으로 정리하면 언제 전쟁으로 비화할지도
모르는 양분된 대립상황은 종식됩니다. 여기에서 우익과 좌익이 진정한 자기의 역할과 상대편의 역할을 바로 알고 상대를 품을 수 있는 아량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만약 서로가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 하는 고집을 버리지 않은 채 ‘우익은 필요없다.’, 또는 ‘좌익은
필요 없다.’ 하면서 서로를 적대시한다면 자신의 존재 자체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두익사상은 하나님 사상이요, 참부모의 사상이요, 참사랑의
사상입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심정에서 유발되었습니다. 그런 원칙에 따라 정립된 것이 두익사상입니다. 두익사상은 바로
‘하나님주의’입니다. 하나님주의는 유일사상이고, 하나의 논리로 전개한다면 유일론(唯一論)입니다.
우주의 본질을 놓고 철학계에서는
유일자(唯一者)라 하고, 과학에서는 제1원인자(第一原因者)라 하고, 종교계(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저마다 편의에 따라 호칭을
달리하지만, 우주의 본질은 유일입니다. 본질도 돌아가면 대립과 갈등과 투쟁이 없어집니다. 본질이 하나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대립과 갈등과
투쟁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참고3
우주의 근본이 무엇이냐? 115
우주의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정신적 분야인 본성상만도 아니고 물질적 분야인 본형상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성상과 본형상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통일체로 계시며 유일하신
분입니다.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본양성과 본음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통일체로도 계시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속성도 가지고 계십니다. ‘남성의
생식기도 여성의 생식기도 다 가지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양성과 음성도 중화 상태이기 때문에 그대로는 작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요한 성(性)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은 정성(靜性), 고요한 성이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은
본성상에서 유래한 심정이기 때문에 그 심정이 동성(動性), 즉 만유원력(萬有原力)을 유발하여 작용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수수작용(授受作用)입니다. 수수작용은 만유원력에 의해서 벌어지는데, 그 결과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으로 나타납니다. 무형의 통일체가 두
성(兩性)으로 분립되어 나타나고, 그것이 다시 하나의 합성체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할 수 있는 두 생식기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실제로 사랑을 못 하시는 이유는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본체이신 무형의 하나님을 실체화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양성의
실체인 남성(아담)이고, 음성의 실체인 여성(해와)입니다.
그래서 남성 속에는 마음과 몸이 있고, 여성 속에도 마음과 몸이 있는 것입니다.
또 남자에게는 여성성품이 들어있고 여성에게는 남성성품도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구분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생식기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남자의 생식기에서는 양성을 지닌 아기의 씨, 정자(精子)만을 생산하고 여자의 생식기에서는
음성을 지닌 아기의 씨를 기를 난자(卵子)만을 생산합니다.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아담과 해와가 실체를 쓰고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아담과 해와가 하는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에 있는 본양성과 본음성의 생식기가 아담과 해와를 통해서 일체를 이룬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아담·해와의 사랑이 완성되어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생식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상은
아담·해와를 통해서 실체로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체로 사랑하고 실체를 번식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두 생식기를 가진 본체로서 실체를 쓰고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아담·해와는 하나님 본체를 닮은 완성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원리본체의 성상적인 분야인 심정과 사랑과 인격을 닮고, 형상적인 분야인 원리와 질서와 법도를 닮아서 양성과 음성이 수수작용을
하면 원리본체를 닮은 제2의 아담과 해와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원리본체의 이상적 창조성을 닮아 그런 남자·여자가 되는 가장 핵심이 절대성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절대성의 실체가 되어 절대성의 주인 되시는 원리본체와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이 절대성, 절대 생식기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통일과 평화와 이상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양성과 음성의 생식기를 통해서 실체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개념이지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념은 반드시 실체를 통해서 느끼고 체휼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실체 대상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대상이 없는 사랑은 개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심정과 사랑의 본체로 계시지만, 실체
대상이 없이는 심정의 세계도 사랑의 세계도 체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들 들어 성숙한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사랑할 줄도 알고
사랑해서 아들딸 낳을 줄도 압니다. 아들딸을 낳으면 부모로서 그 아들딸을 사랑으로 길러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심정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개념이지 실제가 아닙니다.
실지로 사랑을 해보면 혼자 있을 때 개념적으로만 사랑하는
것과는 전혀 그 가치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느낌이 다르고 체휼이 다르고 그 사랑에 대한 완성의 기준이 다릅니다. 사랑의 완성 기준은
총각·처녀로 혼자 있을 때와 약혼해서 남녀가 만났을 때 다르고, 자녀를 가졌을 때 다르고, 자녀가 성숙했을 때 다릅니다. 심정의 세계는 자녀를
통해 점점 발전하고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십이 넘었다고 해도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부모가 될 수 없고
심정세계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배워도 그것은 실체적인 체험이 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심정세계의 완성은 상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상대와 주고받는 관계에서 자기 속에 있는 본성이 유발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완성과 함께 본성상과 본형상에
내재되어 있는 심정의 본체가 점점 성숙되고 완숙되어가는 것입니다. 당신 속에 아무리 심정과 참사랑을 가지고 계셔도 대상이 없이는 그것이
실체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속에 전체를 가지고 계시지만, 사랑을 실체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대상이 없으면 본체의 성숙도 없고 완숙도
없는 것입니다.
원리본체이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는 혈통의 근원이시고, 인간은 그를 닮아 나타난 아들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연결된 귀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세계에서 사랑만큼은 동등합니다. 거기에는
동거권(同居權)과 동위권(同位權)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속권(相續권)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지고(至高)·지대(至大)하더라도 그 하나님 앞에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일체가 되는 자리에 섰다면, 그는 하나님과 동거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리까지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낮은 자리에 있는 존재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길은 지식도 돈도 권력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참사랑뿐입니다. 그러한 참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데, 그
참사랑의 뿌리는 심정입니다.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는 가정입니다. 가정에는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형님이 있고 동생이 있습니다. 그 가정의 구성원이 하나될 수 있는 요소는 심정을 바탕으로 한 참사랑인데, 그 심정과 참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의 질서가 세워지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이상은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주의 근본은 하나니미다.’는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우주에는 보이는 물질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도 있습니다. 또 양성과
음성으로 구분되는 상대성(相對性 : 양성과 음성을 구분한 상태)의 세계도 있습니다. 이런 구체적인 세계가 원리본체의 이성성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명한 것처럼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그리고 상대성 세계의 근본은 본성상과 본형상, 본양성과 본음성의 이성성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성상과 본형상, 본양성과 본음성의 이성성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성상과 본형상은 기능적 요소와 형(形)의 요소로서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의 근본이라 할 수 있고, 본양성과 본음성은 물질의 생성과 종족의 번식, 혈통의 계승을 가능케 하는, 보이는 물질세계의 근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4
유일사상이 무엇이냐? 119
결론부터 말하면 유일사상(唯一思想)은 부자(父子)의 사상입니다.
우주의 법도는 부자의 관계를 근본으로 합니다. 그런데 북한의 김일성을 중심으로 유일사상이라는 말이 먼저 나왔습니다. 유일사상을
주체사상(主體思想)이라고도 합니다. 유일자요,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유일사상인데 김일성인 주체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이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주체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유일이라는 말도 하나님에게만 붙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모로 믿고 모시고 섬기는 사상이 유일사상입니다. ‘하나님은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부자의 관계로 계시니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의 부모이신 동시에 나의 부모이시다.’ 하는 사상이 유일사상입니다. 유일사상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정립된 사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유일사상은 곧 두익사상입니다. 유일사상이나 두익사상은 결국 하나님주의, 참부모주의로 귀결됩니다. 특히 유일사상의
본질은 심정을 원천으로 한 참사랑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없어져야 합니다. 그들은 만민 평등이라는 형제주의
사상에서 출발했지만, 서로가 반목을 일삼는 반쪽사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 도처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도
하나님주의가 아니면 종결될 수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평화이상을 앞세운 유엔(UN)을 등장시켰습니다. 창설 초기에 유엔은 세계
인류를 전쟁과 기아와 질병에서 구하려고 애쓰는 등 그 이상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활발했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과 함께 그 영향력은 점차
약해지고 있습니다. 한국전쟁만 보더라도 유엔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종식되지 않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만 세계적으로 확산된 채
냉전체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유엔의 세계평화이상은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유엔 가입국가의 대표들은 모두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활동합니다.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활동하는 대표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배제하면, 아무리 형제주의를
부르짖어도 저마다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려 들 뿐 하나 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유엔도 두뇌의 역할을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일의
본체되시는 하나님을 닮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를 낳아 그 자녀와 함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사상이
유일사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이루어드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심정과 참사랑이 내포된 본성상과 원리와 법도와 질서가
내포된 본형상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인격을 바탕으로 한 절대성을 가진 남자와 여자가 나타나야 창조이상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절대성은 하나님의 본양성과 본음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거기서부터 내가 생겨나고 가정이 생기고 종족·민족·국가·세계가 생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절대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121
현실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와 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인간의 삶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미 밝힌 것처럼 하나님은 존재세계의 본체로서 구상과
설계에 따라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과 만물을 포함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피조세계의 창조는 본체 되시는 하나님의
자기전개(自己展開)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과 창조성까지 닮은 걸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참사랑을 실현할 상대를 찾아 세우고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과 만물의 관계, 인간과 만물의 관계가 현실세계의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과 몸의 관계이며, 둘째는 부자의 관계입니다.
1) 마음과 몸의
관계 121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마음과 몸의 관계와 같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무형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몸을 통해서 그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몸은 마음을 닮은
제2의 마음입니다.
마음과 몸을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렇다고 몸 자체가 마음은 아닙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고
몸은 보이는 부분인데, 보이지 않는 마음이 주체요. 보이는 몸이 대상으로서 이 둘은 일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하나님은 마음의 하나님이요, 보이는 실체의 인간은 몸의 하나님입니다. 내 안에서 마음과 몸이 일체가 되어 있듯이 하나님도 인간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일체입니다.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적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적 가치를 지녔으므로
인간이 완성하면, 제2의 하나님이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분신과 같은 존재이므로 하나님이 신성하듯이 인간도 신성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유일·불변·영원한 가치를 지니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인간도 절대·유일·불변·영원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을 하나님같이 보고, 그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듣고, 그 사람의 신성(神性)과 가치(價値)와 존엄성(尊嚴性)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지식이 있어서 가치가 높고 권력이 있어서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없고 권력이 없어 거지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적 가치를 지녔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부족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 가치는 존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은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몸과 같은 인간이 없으면 당신의 뜻과 이상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만물을 통해서도 표현되지만 그것은 상징적이요
추상적인 표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이성성상은 심정과 사랑이 교감되는 대등한 상대를 통해서만 실체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1) 종적인 사랑, 횡적인 사랑 123
하나님은 참사랑을 통해서 모든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데, 하나님의
참사랑은 직단거리(直斷距離)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참사랑이 통할 수 있는 직단거리는 마음과 몸이 일체된 자리입니다.
본래 아담(남성)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적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인 남성은 참사랑을 이루는 직단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종적인 사랑입니다. 종적인 사랑은 부자의 관계, 마음과 몸의 관계에서 이 둘을 하나로 만드는 통일의
축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참사랑은 종적인 사랑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적인 사랑으로는 부자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없고 사랑의
터전을 넓힐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이 나타날 수 없고 절대성의 기반이 확대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유한한 실체의 사멸과 함께 하나님의
참사랑도 종식되고 맙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횡적인 사랑입니다. 아담에게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대상은 여성인
해와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사랑의 대상으로 해와를 찾아줌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본연의 모습으로 성장하여
참사랑으로 하나 되면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 그리고 본양성과 본음석을 닮은 제2의 하나님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구상과
설계에 따른 자기전개가 실현되고, 인간에게는 비로소 하나님적 가치가 부여됩니다. 그래서 아담에게는 참사랑의 대상인 해와가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성서에는 ‘하나님이 아담을 먼저 짓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해와를 지었다.’(창세기 2장 21~23절)고 했습니다. 그것은
해와의 가치가 아담의 다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먼저 해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을 지을 때 벌써 해와의 창조를
선유(先惟)했다 그 말입니다.
앞(1. 하나님의 이성성상)에서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통일체로 계시지만 격위(格位)로 볼 때는 남성격
주체.’라고 했습니다. 남성격 주체인 하나님에게는 그 대상인 여성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해와의 창조를 선유하고 거기에 맞도록 아담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해와의 결혼은 하나님의 결혼인 동시에 하나님이 실체적으로 현현하는 의식입니다. 그때까지는 하나님의 실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만,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여 결혼을 하면 비로소 모든 사람이 영계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무형의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신 제2의 하나님인 아담과 해와의 영인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타락론에서 밝힘)으로 인해 하나님의 몸과 같은
모습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불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출애굽기 3장
2~4절), 우레나 번개나 나팔 소리나 연기가 나타나셨습니다(출애굽기 20장 18절). 인간이 하나님의 실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만물의 형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이 완성해서 결혼할 경우, 남성(아담)은 하나님의 몸과 같고 그 상대인 여성(해와)은
하나님의 아내와 같습니다. 해와는 하나님의 아내가 되는 동시에 아담의 아내도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된 아담과 해와가 사랑을 나누면 그 사랑은
비록 아담과 해와 두 사람이 나누는 것이지만, 내적으로는 실체인 아담의 생식기와 무형인 하나님이 생식기가 일체를 이루어 해와와 사랑을 나누는
격이 됩니다. 그렇게 아담과 해와가 하나 되었을 때, 그 가정의 이상은 하나님의 가정 이상이요, 거기에서 태어난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2) 부자의 관계 125
존재세계에는 많은 법도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근본적인 법도는 부자(父子)의
법도입니다. 천지(天地)의 근본이 부자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서 평생 동안 수고하여 길러주신 이상으로 그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연의 자리에서 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부자의
관계입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는 지체 내에서 벌어지는 내·외적인 관계이고, 부자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 내부의 관계가 보이는 외부의 관계로
전개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심정에서 출발한 참사랑이 참생명으로 전개되고 다시 참혈통으로 연결되는 것이 부자의 관계입니다. 참사랑은
직단거리를 통합니다. 따라서 부모와 자녀는 직단거리를 통해 참사랑을 연결하는 존재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1) 자녀가 생기는 네
가지 원칙 125
첫째, 자녀는 부모의 사랑에 의해서 생겼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동참한 자리에서 자녀가 생깁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리는 누구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자녀도 개입할 수 없고, 부모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절대적인 사랑을 하는
자리에서만 자녀가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없는 자리에서는 자녀가 생기지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이 동참한 자리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생명이 부모의 사랑에서 왔으니 사랑만이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먼저냐, 생명이
먼저냐.’를 따진다면 사랑이 먼저입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랑도 있다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게 된 근원은 사랑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내가 생겼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다르지 않습니다. 근본을 찾아가면 아버지 사랑의 본체도 한 분입니다. 그 분은 존재의
본체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는 아버지·어머니의 요소와 속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
그리고 본양성과 본음성이라는 이성성상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분립해서 실체화한 것이 바로 아버지(남성)와 어머니(여성)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놓고 보면, 하나님의 자녀인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소생적(蘇生的) 사랑이고, 거기서 태어난 아들딸에 대한 사랑은 장성적(長成的) 사랑입니다.
장성적 사랑을 통해 손자와 손녀가 태어났을 때, 그 손자와 손녀에 대한 사랑은 완성적(完成的)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이시지만
혼자서는 사랑의 결실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녀가 있어야 하고, 반드시 그 자녀가 결혼해서 아들딸(손자·손녀)을 낳아야 합니다.
둘째,
자녀는 부모의 것으로 생겼습니다. 나의 것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을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생명의 씨인 0.1퍼센트의 정자를
받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정자를 받아서 99.9퍼센트의 뼈와 살과 피와 성격까지 전부를 투입하면서 열 달 동안 복중(腹中)에서 기릅니다.
모든 생명체는 어머니를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가 위대한 것입니다.
나는 부모로 인해 생기고
태어났습니다. 여기에는 나의 의사(뜻)가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마음이 개입되어 내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부모로 인해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위주로 한 부모주의(父母主義)는 있을 수 있지만, 이기심과 개인을 위주로 한 개인주의(個人主義)는 있을 수 없습니다.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려면 부모주의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부모로부터 탄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부모로부터
생기고 복중(腹中)에서부터 성숙해서 지상생활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태어납니다. 부모가 없다면 생명체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부모를 근본으로 해서 탄생했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온전한 모습을 닮아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셋째, 상대를 위하여 생겼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났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살고,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복중에서 생길 때부터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생겼고,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생겼습니다. 또 자식은 부모를 위하여 생겼고,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 하나님의 창조하신 설계도가 이미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길 때부터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자식은 부모를 위해서 생겼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창조의 설계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나도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한 요한복음 14장 20절의
말씀은 아버지가 내 안으로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상 수많은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그 자리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넷째, 영생을 위하여 생겼습니다. 영생을 위해 산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상생활이 중요하게 느껴지니까 우리는 살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사람들은 하나의 명예를 얻기 위해서도 일생 동안 수고합니다. 아무리
수고해서 명예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100년이 지나면 다 이 지상에 두고 가야 합니다.
영원한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는 존재하다가 없어지지도 않고 그 세계가 싫다고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힘들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피할 수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는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간은 본래
영생을 위해 생겼습니다. 속사람인 영인체(靈人體)는 육신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형성됩니다. 인간은 영생을 위해서 생겼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태어났으나 하나님을 모르니까 영계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고 부정하다가, 신앙에 입문해 정신을 차리고 영계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영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참사랑은 구불구불 가는 것이 아니라 직단거리를 통합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의 본체 속에 있는 사랑인데, 그 사랑이 직단거리를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담도 한 점, 해와도 한
점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남성과 여성의 두 속성이 참아버지와 참어머니로서 실체화하는 자리가 아들딸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참사랑의
직단거리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여 하나님을 닮은 절대성의 실체가 되면, 그 둘은 만나서 참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을 닮은 실체의 재창조가 벌어집니다. 그때부터 한 점에서 두 점으로 연결되어 직선이 됩니다. 두 점만으로 연결된 선은 영원성을 띨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점인 하나님을 중심으로 형성된 두 점은 원을 형성하기 때문에 영원성을 갖게 됩니다.
언제, 어디든 중심이 있는데, 그
중심은 늘 하나입니다. 중심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담의 중심도 하나, 해와의 중심도 하나, 그 둘이 만나도 중심은 하나뿐입니다. 그 한
중심이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입니다. 부자의 관계는 절대적인 종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 관계는 누구도 뗄 수 없고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지는 변하더라도 부모는 변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라는 자리는 천지가 변하더라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참사랑은 횡적으로 보더라도 직단거리를 통합니다. 그래서 참사랑에는 잘못된 사랑이나 거짓된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완성한 아담은
하나님의 몸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완성한 해와는 하나님의 딸이면서 하나님의 부인도 되기 때문에 완성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과 함께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해와의 결혼은 하나님의 결혼이 되고, 아담과 해와가 결혼하는 시간은 실체 하나님이 현현하는 순간입니다.
또 아담·해와의 첫사랑은 하나님의 첫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지금까지 체(體)를 쓰고 실체로 한번도 사랑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정자의 먼 여행길이 시작된 것입니다.
남자가 태어나서 생식기를 통해 씨를 심어 영원히 계대(繼代)를 번식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면 영원히 한을 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당신의 체를 쓰고 정자를 심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딸이라 할 수
있는 실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참부모님이 현현하심으로써 한스러운 역사가 마감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2) 인간 최고의 소망 130
모든 자녀는 부모가 있어야 존재합니다. 부모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편 부모도 자녀가 있어야 존재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소망하는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소망은 좋은 신랑, 또는 좋은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권력을,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기 나름대로 소망할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을 대해 ‘이 아이는 용모가 단정하고, 말을 잘하고,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인품을 갖추었으니 훌륭한 대통령이나 장관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런 소망을 갖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외적인
소망에 불과합니다. 자녀는 먼저 좋은 신랑감, 또는 좋은 신붓감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아들이 태어나면 좋은 신랑감으로 키워야 하고,
딸이 태어나면 좋은 신붓감으로 키워야 합니다. 그 자녀는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은 신랑감이 되어야 하고, 딸로 태어났으면 좋은 신붓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학벌을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좋은 신랑감, 좋은 신붓감으로 자라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렇게 자란 남성과 여성이 만나면 참된 부부가 되고 나중에는 참된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나는 커서 우리 아빠·엄마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푯대가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딸이 ‘아빠 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만나면 나는 평생 행복하겠구나.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 만나서 우리 어머니가 행복하시구나.’하고 또 아들은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내 평생 행복한 가정을 가질 수
있겠구나!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을 만나서 우리 아버지도 행복하시구나.’ 하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길러야 합니다.
사람이 다 컸다고
해서 모두 다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올바른 사람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좋은 신랑감, 좋은 신붓감이
되고, 그 다음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사랑을 하여 아들딸을 낳게 되면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어머니가 됩니다. 그것이 인생길입니다.
대통령도 낮에는 나라의 직무를 보지만 밤이 되면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한 여인 앞에 남편으로
돌아가고, 아들딸 앞에 아버지로 돌아가고, 손자 손녀 앞에 할아버지로 돌아갑니다. 그게 가정입니다. 누구나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성장합니다.
거기에 행복과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인간은 어두워지면 가정으로 돌아가고, 날이 새면 다시 일터로 가서 일하고 밤이 되면 또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터에서 피로가 쌓이더라도 가정에 돌아가면 그 피로가 풀어져 다음날 또 일하러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거기에 심정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성장합니다. 젖만 먹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큽니다. 어머니의 심정,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인격을 아이를 키울 때에는 심정과 사랑과 인격을 주어야 합니다. 아기가 오줌똥을 싸도 좋은
자리 나쁜 자리, 진자리 마른자리 다 가려서 키워야 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충성과 효성과 열성을 다해 아기에게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기들도 부모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합니다. 먼저 보여주고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식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충·효·열로 자식을
심었다면 충·효·열을 실천하는 자식이 나옵니다. 똑같은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부모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 사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자식의 마음속에 부모가 정착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부모에게 충·효·열을 돌리게 됩니다.
충(忠)은 마음(心)의 중심(中)이 부모라는
뜻입니다. ‘내가 부모로부터 생겼고 부모가 희생하면서 나를 길러주었구나, 부모가 나를 위해 봉사하면서 모든 것을 다 바쳐 길러주었구나, 나를
가르쳐 주시고 좋은 아들딸이 되게 하기 위해서 부모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방패가 되어 주었구나.’ 하고 깨달을 때 그 자녀에게는 부모가 마음의
중심이 됩니다.
친구나 스승이 마음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의 중심은 부모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것이
충(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충(孝忠)이라 하지 않고 충을 앞세워 충효(忠孝)라고 합니다.
마음의 중심이 부모인데, 부모를 확실히 알지
못하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천주의 핵이 가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내가 생겼습니다. 가정의 질서가 바로 세계의 질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가 그런 자리에 있지만 사실 그 부모의 근본은 하나님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하나님 대신이므로 자신의 부모를 모시고 섬기면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가 내 마음의 중심이라면 그 중심의 근본은 하나님입니다.
효(孝)는 내 마음과 뜻과 성품과
생명까지 다해서 내 마음의 중심되는 부모를 위해 살겠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횡적으로 연결되면 열(烈)이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체를 투입해서 부모를 섬기려는 마음이 충과 효와 열인데, 그 충·효·열은 부모를 아는 데서부터 본성으로 싹트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알고 모시는 심정적 인간이 됨으로써 비로소 충·효·열을 지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충·효·열을 지녀야 비로소 자녀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자격을 갖추게 되면 부모는 그 자녀를 통해서 부모의 이름을 갖고 부모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자리는 영광의 자리요, 안식의 자리요, 평화의 자리요, 기쁨의 자리요, 행복의 자리입니다. 부모가 그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식이 먼저 자식의 자격을 갖추어 그 부모를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인간이 완성하지 않으면 부모의 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부모의 이상을 지니셨지만, 인간이 본연의 가치를 완성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은
이름만 부모일 뿐 부모의 자리에 들어가서 안식할 수 없습니다.
인간 조상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그런 하나님의 자리에 사탄이 들어갔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게 슬픔의 대상이 되었고, 고통과 눈물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세계에는 하나님이 머무르실 수 없습니다. 타락한
세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서러워하시고, 탄식하시고, 눈물 흘리시고, 괴로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타락론’에서 밝히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려면 133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내성과 외형을 닮고 혈통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몸을 닮음과 동시에 혈통을 닮아야 합니다. 마음과 몸을 닮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는다는 뜻이고, 혈통을 닮는다는 말은 실체로 절대성을 닮는다는 뜻입니다. 참된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체 전부를 닮아야만 합니다.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 134
♣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은 것이 인간의 마음과 몸이고, 하나님의 본양성과 본음성의 두 속성을 실체화한 것이 남자와 여자입니다. 그 남자와 여자가
성장해서 부부가 됩니다. 각자는 먼저 마음과 몸의 통일체가 되어야 하고, 그들이 부부를 이루면 함께 통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속에
있는 본성상과 본형상이 통일체로 되어 있고 본양성과 본음성이 중화적 통일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도 개개인이 마음과 몸의 통일체를 이루어야
하고 그런 개인들이 만나 이루어진 부부도 통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첫째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과 몸이
통일되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부부가 결혼해서 통일체가 되지 않으면 영계에 가서 하나님 앞에 자녀로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연의 세계에 가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은 심정입니다. 따라서 인간도
본질적 속성이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심정은 참사랑의 뿌리입니다. 참사랑이 심정에서 솟아나고, 심정에서 나온 참사랑을 중심해서 참생명과 참혈통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절대성의 본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심정을 중심해서 참사랑·참생명·참혈통 그리고 절대성을 지니신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본질적 속성도 심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창조는 심정을 동기로 이루어졌습니다. 심정이 완성에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심정이 동기가 되어 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심정은 대상을 사랑하면서 기뻐하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정의 충동심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심정의 완성자로 성장해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4대심정권(四大心情圈)을 통해 성숙하여 스스로 창조의
본체가 되시고 이상을 완성해 가시는 것입니다. 자녀의 심정·형제의 심정·부부의 심정·부모의 심정이 관계된 영역이 4대심정권입니다. 하나님은 그
4대심정권을 중심으로 성숙하신 창조의 본체이십니다.
따라서 인간도 생활의 동기가 심정이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루 하루 생활하면서
새로운 상황에 부딪치고 그것을 타계해 나갑니다. 그 자체가 자신을 창조하는 생활입니다. 여기에서도 심정을 동기로 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자기 창조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생활을 통해 매일매일 하나님이 원하는 본연의 인간으로 창조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우리 생활의 동기를 하나님의 심정에서 찾아야 합니다.
♣ 창조는 스스로를 투입하고 전개하는 것입니다. 투입하고 전개하는
기준은 창조원리라는 설계도입니다. 그 설계도에 의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투입하고 전개하시는 것입니다. 창조의 설계도인 원리는 하나님 자체 속에
있는 본체의 구성 요소입니다. 그래서 존재의 본체라고 하지 않고, 원리의 본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존재세계의 본체로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세계를 있게 한 근원적 요소가 심정인데, 심정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창조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를 위한 설계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설계도가 창조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원리의 본체로 계십니다. 원리에 의해서 당신을 투입하고 전개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도
하나님을 닮아서 자신의 인격을 창조해야 합니다. 나의 인격은 누가 대신 완성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내 인격을 창조해 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책임분담으로 자기 인격을 창조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실천해서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모습을 갖추어 가야 합니다.
그것이 ‘따먹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인간책임분담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바로 자기의 인격을 창조해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격을 자신의 책임분담으로 완성하는 것이 인격 창조입니다. 인격 창조는 하나님 말씀을 중심해서 자기를 투입하고 전개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성상적인 요소가 들어와서 가득 차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타락성이 마음속에 차 있기 때문에 타락성이
먼저 발동되고 유발됩니다. 그런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심정과 참사랑, 인격이 가득 차고 넘쳐흘러야
합니다. 그런 본질적 속성인 심정과 참사랑, 인격이 가득 차고 넘쳐흘러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스스로 인격을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자기를 투입한다는 말은 자기의 심정과 참사랑을 투입하고 전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의 창조입니다. 그것은 누가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나의 인격을 대신 만들어 주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인격 창조는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인격 창조는 자기 투입이고 자기 전개입니다.
자기를 투입하여 내면을 표면으로 전개하려면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생활 자체가 위하여 사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본연의 혈통과 연결되면 위하여 사는 생활이 되고, 그 생활은 심정문화세계를 이룹니다.
희생하고 봉사하는 생활, 위하여 사는 생활은 자기의 인격을 창조하는 생활인 동시에 심정문화세계를 완성하는 생활입니다.
♣ 하나님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도 절대·유일·불변·영원한 존재입니다. 절대라는 말은 유일하고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자체가 영원하기 때문에 절대자가 되는 것입니다. 절대라는 기준이 유일·불변·영원하기 때문에 절대자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분이면 상대적인 자리에 있는 그 자녀의 가치도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유일하고 불변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역사 속에 오직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영원해야 합니다.
개인도 그렇고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도 절대적인 부부·유일한 부부·불변한 부부·영원한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가 바뀌는 법도는 없습니다. 부부는 유일한 부부요, 지상과 영계까지 영원한 것입니다. 이 사람과 살다가 저 사람과 사는 것은 원리와
맞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 맺어진 부부는 영원한 부부입니다. 따라서 절대·유일·불변한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본체 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절대성 위에 세워진 아버지다, 그 말입니다. 그 아버지를 닮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도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을 이어받아 절대성을 지닌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본연의 아담이고 해와입니다. 완성한 아담과 해와는 자녀를 낳으면
참부모가 됩니다.
하나님이 무형의 참부모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체인 아담·해와는 실체의 참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무형의 참부모는 마음과
같고, 실체의 참부모는 몸과 같습니다. 그런 부모가 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은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낳는 것입니다. 본체를 닮아 절대·불변·영원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을 지닌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와 혼돈 가운데서 당신
전체를 투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꼭 이루어진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을 뿐,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질까?’ 하는 의심이나 ‘힘이
들어 못하겠다.’ 하는 불평이 없었습니다. 또 그 자체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그 앞에 절대 복종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모든 것을 투입하여 당신을 전개한 창조물을 놓고 누구도 ‘내가
주인이다.’ 하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주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인간이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으로 그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창조할 때 인간에게 만물을 창조한 것 이상의 가치가 부여됩니다. 그로 인해 인간도 하나님과 함께 주인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는 가장 중심이 되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본체인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일입니다. 본체의 속성을 닮는데는 본체와 실체의 각자 구분되는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책임 영역이 있는 동시에 인간의 책임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책임분담(責任分擔)입니다.
하나님의 책임분담은 만물을 재료로
하여 인간을 창조하고 그에게 본체를 닮을 수 있는 요소를 다 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책임분담은 그 요소를 가지고 본체를 닮도록 자신을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리본체의 모든 속성을 닮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심정을 닮은 참사랑과 인격, 질서와
법도를 지키는 원리의 생활화, 그리고 절대성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절대성 위에서 본성상과 본형상의 통일체가 되셨으니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분신체로서 절대성의 남성, 또는 절대성의 여성이 되어 마음은 하나님의 본성상을 닮고 몸은 하나님의 본형상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치는 절대성 위에서 본성상과 본형상을 통해 심정과 사랑과 인격, 그리고 원리와 법도와 질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하나님을 닮아 절대성 위에 선 남성과 여성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과 인격을 닮고 몸으로는 원리와 법도와 질서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절대적인 가치관입니다. 그 핵심이 하나님의 절대성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절대성이 없으면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은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절대성은 ‘원리본체론’이 없으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원리본체를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원리본체의 생식기라고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원리본체라는 말은 보이지 않더라도 체(體)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절대성이
생식기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원리본체를 밝혔을 때에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절대성은 참사랑의 씨와 참생명의 몸이 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절대성 위에 세우는 인간의 책임분담이 중요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세기 2장 17절)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책임분담입니다. 그 책임을 다하면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자에서 보면 그것은 인간이 절대성을
통해 절대신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절대성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도 실체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실체를
갖추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신성의 본체로서 그 품격(品格)을 신격(神格)이라고 표현해야 하지만, 사람을 통해서 실체를 갖춰어야 하기
때문에 인격(人格)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없으면 부모가 될 수 없는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 아버지를 닮아 절대성의
가치를 세우면 내면에 절대신격(絶對神格)을 갖추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인격을 갖추고, 인간은 신격을 갖추면 하나님은 마음이 되고 인간은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책임분담입니다. 따라서 신인책임분담완성(神人責任分擔完成)은 신인애일체이상(神人愛一體理想)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신인애일체이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몸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인애일체이상의 완성 여부는 실체를
지닌 인간에게 달려 있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은 인간의 부모요,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참된 인간이 되려면 하나님을 닮은 심정과
참사랑과 절대성의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참된 교육 141
참된 교육이란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도록 하는 교육에는 인간교육과 지식교육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인간교육은 심정교육(心情敎育)과
규범교육(規範敎育)을 중심으로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지식교육은 지식과 기술을 중심으로 학교에서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도록
창조목적에 합당한 참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상(敎育理想)을 창조이상에서 찾아야 합니다. 창조이상은 바로 창세기
1장 28절의 3대축복(三大祝福)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3대축복입니다. 생육(生育)과
번식(繁殖)과 주관(主管)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이상입니다. 그 이상이 바로 인간의 교육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뜻은 창조목적이고 3대 축복이고 사위기대입니다.
그것이 가정이상(家庭理想)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인데, 그 창조이상이 가정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생육해야 하고, 번성해야 하고, 주관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육이상입니다.
위와 같은 교육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완전성(完全性)과 번식성(繁殖性)과 주관성(主管性)을 닮는 것을
교육이념(敎育理念)으로 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딸로 성장하도록 하는 교육이 우선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완전한 것처럼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개성완성(個性完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아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번식성(繁殖性)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한 사람을 번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선한 인간을 번식하는 것으로 가정완성(家庭完成)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님이 당신의
전체를 투입해서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심정으로 주관하고 사랑으로 다스렸습니다. 우리 인간도 그런 하나님의 주관성을 닮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관성완성(主管性完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기 위해서 개성을 완성해야 하고, 하나님의 번식성을 닮기 위해서
가정을 완성해야 합니다. 개성을 완성한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을 낳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관성을 닮기 위해서
주관성을 완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육이념이 되어야 합니다.
교유이념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는 심정교육(心情敎育)과
번식성에 따른 규범교육(規範敎育), 그리고 주관성을 위한 지식교육 등 구체적인 교육방법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심정교육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심정에서 나온 사랑이 참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참사랑을 실천하고 생활화할 때 인격이
형성됩니다.
심정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고, 참사랑의 뿌리가 되고, 하나님 인격의 핵입니다. 심정교육은 모두가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는
것이고, 각자가 저마다의 개성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몸은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은 마음과 몸이 인간의 개체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닮은 우리 인간은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신성과 심정을 닮고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닮아야 합니다.
자녀의 심정·형제의 심정·부부의 심정·부모의 심정, 즉 4대심정(四大心情)이 우리 마음속에 차고 넘쳐야 하고,
하나님이 찾아올 수 있는 절대성의 실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심정이 중심이 되고, 거기서 참사랑과 인격이 차고 넘쳐서 흘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은 신인일체(神人一體)를 이루는 것이요,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것처럼 인간도 완전한 인간이 됩니다. 그것이 심정교육의 목표입니다. 그런 심정교육은 부모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2) 원리를
생활화하도록 143
규범교육은 질서에 대한 교육입니다. 그것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식단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어머니는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서 먼저 아버지 밥부터 떠서 상 위에 차려놓은 다음에 식구들의 밥을 차려야 합니다. 수저를 놓는 데도 격식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문화생활입니다. 그것이 규범이요, 질서요, 심정문화입니다.
신발을 벗을 때도
가지런하게 놓아야 합니다. 아버지 신발이 오른쪽, 어머니 신발은 왼쪽, 남자 신발은 오른쪽, 여자 신발은 왼쪽, 형님 신발은 오른쪽, 동생
신발은 왼쪽에 놓습니다. 신발 하나 놓는 데에도 질서를 가르쳐야 합니다. 길거리를 갈 때도 형님이 오른쪽 서고 동생은 왼쪽에 서서 걸어야
합니다.
양말을 빨아 널 때에도 형님 것과 동생 것을 구분해야 하며 남자들 것과 여자들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옷을 걸 때에도 구별해서
걸어야 합니다. 거기에도 질서가 있고 규범이 있습니다. 질서와 규범은 어렸을 때부터 습관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생활하는 것이 가정의
규범교육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관하기 위해서는 그 사물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없으면 주관할 수 없습니다. 예들 들어
정원에 나무 한 그루를 심더라도 기르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그 나무를 죽이게 됩니다. 잘못 길러서 죽이는 것보다 차라리 기르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갖다 주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관하는 데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또 아무리 기술과 지식이
있더라도 체력이 약해서 질병에 걸리면 주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력도 향상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3대축복 가운데 첫째
축복인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기 위해서는 심정교육을 통한 개성완성을 이루어야 하고, 둘째 축복인 하나님의 번식성을 닮기 위해서는 규범교육을 통한
질서를 세워 가정완성을 해야 하고, 셋째 축복인 만물을 주관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기술과 체력을 갖춰야 합니다.
따라서 교육의 목표는
심정교육을 통해 인격자(人格者)를 만들고, 규범 교육을 통해 선한 사람(=善民)을 만들고, 지식교육을 통해 천재(天才)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천재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천재성을 갖춘 사람을 지칭합니다.
(3) 문화통일을 이루도록
참된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을 닮은
아들딸로 성장시키는데 하나님과 참부모와 영계와 삼대축복 완성에 대해 확실히 교육해서 원리적인 생활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문화통일을 통한
3대요소인 심정통일(心情統一)·사상통일(思想統一)·생활통일(生活統一)을 이루게 하는 것이 통일교육의 근본입니다.
(4)
애천·애인·애국하도록 145
참된 교육이념은 애천·애인·애국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 참된 교육 이념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생각이 다르고, 교육의 목표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판단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참된 가치관 한 가지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애천·애인·애국 속에 원리본체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생활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5) 이성성상이 현실세계
문제 해결의 열쇠 145
이성성상이 현실세계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통일원리’를 공ㅂ하는 이유는 현실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제일 큰 난관은 신관(神觀)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신관을 해결하면 현실세계의
모든 문제는 바로 해결됩니다.
(1) 성상·형상은 만능의 열쇠 146
하나님은 본성상과 본형상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통일체로 계신데, 그 하나님을 닮아서 그대로 전개해 놓은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실상을 밝히고 보니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이성성상이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성성상인 성상과 형상은 만능의 열쇠입니다.
성상과 형상은 마음과 몸을 중심으로 하고,
양성과 음성은 절대성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상·형상과 절대성의 역할로 존재세계의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호텔에 가면 방마다 키가 있습니다. 한 방에 속해 있는 키는 다른 방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스터키는 모든 방문을 다
열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실세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부정해 버리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로 인해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내면을 알고 외부로 전개된 실상을 알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체에 내재한 속성, 곧 이성성상이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의 열쇠인 것입니다.
본성상은 하나님의 마음이고, 본형상은 하나님의 몸과 같은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본으로 해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본성상의 본질적 속성이 심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심정에 의해 인간에게 본성상을 닮은 마음을 주었고,
본형상을 닮은 몸을 주었습니다. 또 그런 인간을 본으로 해서 삼라만상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만물을 창조했지만, 창조 이전부터
구상은 인간을 선유(先惟)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피조세계를 주관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먼저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피조물
전체의 요소가 총합된 천주(天宙)의 축소체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아담을 먼저 지어 놓고 아담의 갈비뼈를 빼서
해와를 지었습니다(창세기 2장 21~22).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여자부터 시작했습니다. 여자를 선유하고 그 여자에 맞게끔 남자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남자를 지어 놓고 거기에 맞게끔 여자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여자를 선유하고 남자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남성격 주체로 계신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필요한 것은 여자인 어머니입니다. 절대성 씨를 가진 아버지는 그 씨를 심을 밭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해와입니다.
그래서 해와는 하나님 부인의 입장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문제를 확실히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타락의 문제도
해결되고, 나머지 문제도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본으로 삼라만상을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는 반드시 성상과
형상의 균형을 갖추어 그 존재목적과 가치를 달성해야 합니다. 성상과 형상의 균형을 갖추어야만 존재목적과 가치가 달성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의 기본단위는 가정입니다. 가정의 형상적인 부분이 부모와 자녀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살아가는 가정에 있어서도 성상적 부분이
가정윤리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가 살면서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근본적인 가정윤리가 필요합니다.
그 가정윤리는 규범과 질서입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질서가 있고, 자식은 자식으로서 질서가 있고, 형제는 형제로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똑같은 부모이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지켜야 할 질서가 있고 규범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거기에는 규범이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중심 핵은 성상인데, 성상은 심정을 동기로 하여 전개됩니다. 그래서 심정이 동기가 된 가정의 윤리관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이런 법으로 산다, 우리 가정은 이런 가훈으로 산다.’고 써놓고 외치더라도 그 근본은 심정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정은 참사랑을 유발합니다. 참사랑은 위하고 또 위하고, 주고도 또 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사랑입니다. 생활 속에서 참사랑을
실천했을 때 비로소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상이 바로 가정윤리의 근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라서 학교로 가면
학교에서는 더 성숙한 인간이 되도록 길러내야 합니다. 학교는 지식만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학교에는 선생과 제자가 있습니다. 선생이 없는
제자, 제자 없는 선생은 없습니다. 학교에서 선생과 제자는 형상적 요소입니다.
학교에서는 인간과 마음과 같은 성상적인 부분이
교육이념입니다. 교육이념은 누구나 똑같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대로 교육이념이 다르고, 미국은 선진국이니까 자기들 나름대로 교육이념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돌아가는 길은 똑같습니다.
땅 위에 태어난 인간은 어느 나라의 사람이든지 모두 하나님의 아들딸로
태어났습니다. 성장하고 완숙하는 환경은 다를지언정 인간이 가져야 할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교유이념을 세워야 합니다.
교육이념의 이상이 하나님이 주신 3대축복(三大祝福)입니다. 3대축복이라는 이상을 가진 인간이 될 때
비로소 가정이상(家庭理想)과 학교이상(學校理想)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 근본 뿌리는 같습니다. 어디에서나 심정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학생을 지도할 때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심정을 중심으로 지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가
집에서 아들딸에게 심부름시키고 잘못하면 꾸중도 하고 회초리를 들기도 합니다. 그 속에는 사랑이 있고 심정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졸업하고 사회에서 활동하기 위해 기업체에 입사합니다. 기업체에는 노사가 있습니다. 사장이 있고 사원도
있습니다. 그것이 기업체의 형상적인 부분입니다. 그 기업체에도 성상적인 부분인 기업 윤리가 있어야 합니다. 기업윤리는 가정윤리에 기인합니다.
가정을 확대한 것이 기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기본으로 질서와 규범을 세우는 가정윤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남남이 만나서 일하지만 그 일터가 자기 가정과 같아야 합니다. 직장에서 일하지만 자기 가정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일이 생기면 그 일은 아버지의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이 생기면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까지 가족 모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려고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와서 아들딸들에게 “내가 일했으니까 일당을 달라.”고 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또
아들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와서 “내가 일했으니까 아버지 제게 일당을 주십시오.” 하는 아들딸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상속자로서
상속해 주어야 하고 아들딸은 상속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 중심은 부모입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들을 위해서 전체를 희생합니다.
기업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 사장은 사원들을 아들딸같이 보살피고 보호해야 합니다. 사원이
몸이 아파 출근을 못했다면 “당장 그만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사장은 몸이 아픈 사원의 집에 가봐야 합니다. 가서 보고,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가고 누워 있으면 사장은 그 사원을 자기 차에 태우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게 하고 약도 사줘야 합니다.
사장은 사원을 돈
주고 부리는 사람으로 보면 안 됩니다. 아버지로서 자기 자식과 같이 생각하는 회사의 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직원들은 회사의 일을
자기 가정의 일과 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출근을 늦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한 시간보다도 더 빨리 와서 일을 하고 싶어 할 것이고, 퇴근시간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조금 늦더라도 그 일을 끝내고 돌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의식(主人意識)입니다.
기업윤리는
가정윤리에서 기인해야 합니다. 그런 회사가 있다면 사원들이 데모를 하며 사장을 쫓아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으로 아버지·어머니와 같은 사장이
되고, 사원들은 부모의 사랑 속에 살고 있는 자녀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회사가 어려워서 한 달 동안 월급을 못 줬다면 피켓을 들고
쇳덩이를 들고 항의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열심히 해서 회사를 살리자.’, ‘밤을 새우며 연구하고 더 합심해서 이 회사를 살릴 길이 무엇인지
연구해 보자.’,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그런 회사가 있다면 그 회사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회사가 어려울 때 모든 사원들이 합심하여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끌어다가 기업을 살리는 데 쓴다면 그 회사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를 보면 형상적
부분으로 지도자가 있고 국민이 있습니다. 한편 성상적 부분이 국가의 지도이념입니다. 국가의 지도이념이 변하면 안 됩니다. 통상적으로 국가와
국민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임기가 끝나면 한 번씩 바뀝니다. 선거제도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대통령이 바뀌면 과거의 국가
지도이념은 전부 쓸어버리고 새로운 국가이념을 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도 대통령의 코드에 맞지 않으면 전부
인사 조치해 버립니다. 몇 년 동안 다시 노력해서 그 분야를 어느정도 알 만하면 또 선거를 해서 바꿔 버립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국가는
어려움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만 고초를 겪습니다. 국가가 존속하고 그 국민이 존속하는 한 국가이념은 변하면 안 됩니다.
지도자가
바뀌더라도 계속해서 그 바통을 이어갈 국가의 지도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이념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찾아가고 싶어 하시는
국민이 되고, 하나님이 축복하고 싶어 하시는 국가가 되려면 거기에 합당한 국가적 지도이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지도이념이 세워졌다면, 정권이
바뀐다 해도 그 바통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일국 이상(天一國理想)입니다. 천일국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심정교육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훈련하고 참사랑을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세계에는 국가마다 국경선이 있습니다. 그 국경선을 철폐해야 합니다.
가정의 아버지·어머니·아들딸에게는 국경선이 없습니다. 국경선과 같은 경계선이 없습니다. 경계선은 타락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가 살고
있는 국가도 국경선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동물에게는 국경선이 없습니다. 물고기도 국경선이 없습니다. 만물에는 국경선이 없습니다. 식물도
이쪽에 뿌리를 두었지만, 그 가지가 뻗어 나가면 국경선을 넘어 저쪽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물은 전부 국경선이 없는데, 만물의
영장이며 주인인 인간은 왜 국경선을 가지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총칼을 들고 경계를 하고, 국경선을 넘어오면 죽이고 감옥에 가두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는 진정한 자유·평화·평등·행복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국경선을 다 터놓고 어디서든지 살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권한이 있고, 어디든지 가서 태어날 수 있는 세계가 원래 하나님께서 원하신 세계입니다.
인류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계를
이루려면 성상적 부분인 세계 통일과 평화의 이념을 가져야 합니다. 세계가 하나 되고 평화로운 세계가 될 수 있는 이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수많은 국가가 있더라도 그 지도자들이 각자 다른 지도이념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모두가 같은 이념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는 나라마다 지향하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지도이념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가치관이 다르니까 목적관도 다릅니다. 그래서 경계선을
쳐놓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계를 원치 않으십니다.
한 분의 하나님 아래 모든 인류는 한 형제자매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해서
형제자매가 살 수 있는 기본단위가 바로 가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의 한 가족!(One family under
God!)'입니다.
이성성상이 현실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는 말은 성상·형상이 만능의 키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성상적(性相的) 가치관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가치관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가치관을 통일하는 것이 절대선(絶對善)입니다.
절대선은
심정적 생활을 통해 이루어지고, 위하는 생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상과 형상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의 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심정입니다. 심정에 뿌리를 연결해 생활하는 것이 참사랑을 중심으로 한 위하는 생활입니다. 거기에서 인격이 형성됩니다.
이제
사탄의 근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금까지의 모습을 하나하나 청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딸로 돌아갈 수 있는 인격을 닦아 하나님을 닮아가는 생활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심정을 바탕으로 사는 것입니다. 원리본체의 핵심은 전부 심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뼈대입니다.
진리도
심정 안에 있습니다. 심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진리가 있습니다. 심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심정을 실체화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활이 필요합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에게 교육을 하더라도 말씀의 핵은 심정을 동기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지식 전달만으로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2) 양성·음성을 통한
현실문제 해결 153
성상과 형상뿐만 아니라 양성과 음성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선차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성상과 형상의 본체로 계십니다. 인간도 성상과 형상을 닮아 하나님처럼 살면 개성을
완성한 사람, 인격의 완성자가 됩니다. 그것이 곧 동양의 고전인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에서 말하는 개인의 몸을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입니다.
후차적인 것은 양성과 음성입니다. 양성과 음성은 부부가 되어 결합하는 것으로, 그것이 가정 완성입니다. 가정 완성이 곧
‘대학’에서 말하는 집안을 잘 다스려 바로잡는 제가(齊家)입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서로의 관계가 흩어지고 깨졌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닮게 지었는데, 하나님을 부정하니까 통일성이 없어졌습니다.
다시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서 해결하지 않는 한 현실세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상과 형상과 함께 그 속성인 양성과 음성도 현실문제의 해결에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3) 인간의
마지막 혁명 153
지금까지 인간 세계는 수많은 혁명을 통해 발전해 왔습니다. 세계3대 시민혁명은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입니다. 프랑스의 시민혁명은 ‘구제도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낡은 신분제도, 낡은 권력에 대한 프랑스 민중의
저항이었습니다. 혁명을 일으킨 목적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통일을 해보자는 것이며, 평화세계와 행복한 세계를 구현해 보자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가며 혁명을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산업·정치·종교·문화혁명도 했습니다. 역사상 수없이 혁명을 해왔는데, 현실의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평화통일세계, 행복한 세계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환경의 변혁은 가져왔지만 환경의 주인인 인간 자체가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살려면 마지막에는 인간혁명을 해야 합니다. 인간혁명을 하지 않는 한 이 세계는 하나님이 바라는 세계가
되지 못합니다. 과거의 혁명은 총칼을 가지고 권력으로 했습니다. 총칼로 혁명을 하다 보니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습니다. 인간혁명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참된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밝혀야 하기 때문에 원리본체라는 말이 필요한 것입니다. ‘원리해설’,
‘원리강론’을 총합해 놓은 말씀이 ‘원리본체론’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교육할 때도 ‘원리본체론’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냥 원리 교육이 아니고
원리본체와 절대성을 존중하는 교육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원리도 하나님의 본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본체에 대한 견해를 확실히 정리하지 못하면
현실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혁명은 심정을 원천으로 한 참사랑과 원리의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혁명은
심정혁명이고, 심정혁명은 참사랑의 혁명이자 참인격의 혁명입니다. 그것이 절대성 혁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심정혁명은 나무의 뿌리와
같고, 참사랑의 혁명은 꽃이나 향기와 같습니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열매가 참인격의 혁명입니다. 그 열매는 참가정에서
맺힙니다. 그것이 절대성의 혁명입니다. 그래서 원리본체인 하나님을 모르면 절대성의 혁명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절대성의 가치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혁명은 이 같은 절대성의 혁명입니다. 원리본체와 더불어 절대성을 교육해야 합니다. 아담·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잘못되어 천지가 개벽했으니 그것을 다시 원상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바로 모시고 절대성의 가치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3. 하나님과 피조세계의 관계 155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과 몸의 관계이고, 둘째는 부자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피조세계는 어떤 관계이며,
인간과 피조세계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형상과 상징으로 전개된 인간과 만물
본성상·본형상과 그
속성인 본양성·본음성의 본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창조 설계도인 창조원리에 의해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로 전개한 것이 피조만물세계입니다.
피조세계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상으로 나타난 인간과 하나님을 상징하는 만물이 있습니다. 형상은 인간에 해당하고, 상징은 만물에
해당합니다.
국가를 예를 들면 영토를 축소하여 나타낸 지도는 그 나라의 형상이고, 국기는 그 나라의 상징입니다. 하나님 속에서 실체로
나타난 인간과 만물은 모두 하나님을 닮았지만, 만물은 하나님의 몸과 같고,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만물은 하나님의 몸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몸을 보고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인간도 하나님을 닮아서 마음과 몸으로 되어 있고, 인간의 마음에도 양성과 음성의 속성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양성과 음성은 하나님 안에 있는 본양성과 본음성의 절대성이 전개된 실체라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의 양적인 성질을 띤 요소와 음적인 성질을 띤 요소를 말합니다.
적극성을 띤다거나 명랑하고 유쾌한 것은 양적인 마음의 요소입니다.
소극적이고 우울하고 짜증내는 것은 음적인 마음의 요소입니다. 몸도 불룩 튀어나온 부분은 양성을 띤 것이고, 오목 들어간 부분은 음성을 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양성과 음성은 생식기를 중심한 성(性)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어떤 속성에 해당하는 하나의 성질과 특징을
뜻합니다.
만물도 동물·식물·광물의 세 가지로 분류되지만, 모두가 성상과 형상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상 가운데도 양성과 음성이 있고, 형상 가운데도 양성과 음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성질과 특징을 말하는 것이지 생식기를 중심한 절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피조세계의 관계는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의 관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인(原因)이라면,
피조세계는 결과(結果)입니다. 하나님이 내적(內的)이라면, 피조세계는 외적(外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적(縱的)이라면, 피조세계는
횡적(橫的)입니다. 하나님이 무형(無形)이라면, 나타난 피조세계는 유형(有形)입니다. 하나님이 남성격 주체(男性格主體)라면, 피조세계는 여성격
대상(女性格主體)입니다.
하나님은 남성격 주체이기 때문에 피조세계를 짓지 않았을 때는 결혼하지 않은 남성과 같습니다. 당신 속에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 없으니까 사랑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을 동기로 사랑을 주고받을 때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창조한 것입니다.
2) 인간과 만물의 관계
인간과 만물의 관계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모두 주관(主管)하면서 살라고 축복했습니다. 만물을 주관하려면 만물에 대한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대상이
가진 속성과 요소와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을 때 그 대상을 주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요소·성질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만물의 소리를 흉내낼 수 있는 성대를 가지고 있어서 온갖 동물의 소리를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는
개소리밖에 못 내고 닭은 닭소리밖에 못 냅니다.
지구는 5대양6대주로 되어 있습니다. 5대양6대주가 인간에게는 오장육부(五臟六腑)입니다.
지구의 4분의 3이 물로 되어 있는데, 인체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분이 모자라면 탈수상태에 빠져 죽게 됩니다. 혈액 안에도 물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어 놓은 우주의 축소체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스스로 몸을 관리하고 지키고 보호하지 않으면 하나님
몸으로 살아갈 자격을 잃게 됩니다.
1년은 12달과 24절기로 되어 있습니다. 인체에는 좌우로 각각 열두 개의 갈비뼈가 있는데, 양쪽을
합치면 모두 24개가 됩니다. 그 안에 오장육부의 기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소우주(小宇宙) 또는 소천주(小天宙)로 불립니다. 또
영계에는 열두 대문이 있고, 지상세계에는 열두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많더라도 열두 가지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동차 보닛을 열어보면 복잡한 부품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인체의 구조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배터리·엔진·냉각기·변속기·점화플러그 등 인체의 장기에 해당하는 구조가 들어 있습니다. 그 기계 중 어느 하나가 잘못되어도 자동차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자기 몸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지구에는 식물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체를 보면 모발이 있습니다. 지구의 지표(地表)에 해당하는 피부가 있고, 지층(地層)과 같은 근육이 있고, 그
다음에 지하수가 있듯이 혈액이 있고, 암층(岩層)이 있듯이 골격이 있고, 암층 속에 마그마인 용암(鎔岩)이 있듯이 골격 속에 골수가
있습니다.
지구 자체가 6단계의 구조로 형성되었듯이 인간의 구조도 6단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만물을 총합한 축소체로 나타난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고, 인간을 본으로 해서 만물을 지었습니다. 그에 따라 인간은 만물세계를 주관하는 주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고1
창조원리로 본 주역과 성서 159
주역(周易)은 동양철학의
핵심입니다. 성서(聖書)는 서양철학의 근본 사상입니다. 동양의 철학서인 ‘주역’에서는 만물이 생성·전개되는 근원을 태극(太極)이라고 했습니다.
태극은 음양(陰陽)으로 되어 있고, 음양은 오행(五行)으로 되어 있습니다.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오행에 의해서 천지만물이 생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오행에는 하나님이 지어놓은 피조세계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쇠붙이도 들어 있고, 나무도 들어 있고, 물도 들어 있고, 불도 들어
있고, 흙도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일주일이 구성되는데, 일요일부터 월·화·수·목금·토요일입니다. 일주일로 형성되어 있는
요일에는 우주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해가 들어 있고 달이 들어 있는데, 유일하게 하나 빠진 것이 있다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진
모든 피조세계는 일주일의 매 요일에 다 나와 있지만 유일하게 하나님은 빠졌습니다.
‘주역(周易)’에 보면 ‘음양은 도(道)를
말한다(一陰一陽之謂道)’했고 ‘도는 곧 말씀이라(道也者言也)’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곧 말씀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와 있는 말씀과
주역에서 말하는 언(言 : 말씀)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주역의 근본이 되는 태극과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동일한 존재입니다.
성서는
인격적인 신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지만, 태극은 하나의 철학적인 용어일 뿐 하나님을 인격적인 신으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과 성성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같은 의미입니다.
‘통일원리’에서 하나님은 본성상과 본형상의 이성성상으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속성으로 본양성과 본음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주역에서는 만물의 근원이 태극이라고 하지만, 태극 안에는 성상과
형상이 없습니다. 양과 음만 있습니다. ‘통일원리’로 볼 때 성상 가운데도 양과 음이 있고, 형상 가운데도 양과 음이 있는데,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의 음과 양은 형상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주역은 양과 음을 밝히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인격적인 부분인 성상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격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타락으로 횡적인 질서가 바뀌었습니다. 종적으로는 상하(上下), 전후(前後)의
질서가 그대로지만, 횡적으로는 양음(陽陰)이 음양(陰陽)으로, 우좌(右左)가 좌우(左右)로 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주역에서 양음이 아니라 음양으로
순위가 바뀐 것도 인간의 타락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원리적으로 볼 때 성서는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양성과 음성도
밝히지 못했습니다. 성서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인격적 신(神)으로 지칭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니신 속성은 하나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은 성상의 분야를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격적인 신으로 규정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주역과 성서가 지닌 한계는 ‘원리본체론’으로 명쾌하게 해명됩니다. ‘원리본체론’은 이로써 동·서양의 철학사상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원리본체론’을 통해 양대(兩大) 핵심철학(核心哲學)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동·서양의 철학을 통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참고2
동양과 서양의 본체론 161
본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양의
본체론에서는 본체가 형상(形相 : 가능태)과 질료(質料 : 현실태)로 되어 있다고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그리스 철학자·과학자)는 일체의 존재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인식했습니다(편집자주 : 제1질료와 형상은 스스로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변화와 운동의 원인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부동[不動]의 동자[動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는 신적인 개념이지만, 순수하게
인간이 이성의 세계에서 만들어낸 신이므로 인간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종교의 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그의 부동의 동자 개념은 운동과
변화의 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대단히 중요한 이론으로 이용되었다.). 모든 존재는 형상과
질료로 되어 있는데, 그 형상과 질료를 궁극적으로 추구하면 형상은 순수형상(純粹形相)이고, 질료는 제1질료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은 순수형상이기 때문에 그 형상 자체를 하나님(神)으로 보았습니다. 질료는 물질적인 것인데, 형상과는 상관없다고 본
것입니다.
‘통일원리’에서 보면 성상은 정신적인 부분이고, 형상은 물질적인 부분입니다. 그것이 마음과 몸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서양의
본체론은 둘 다 형상으로 설명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Platon, BC 348/428/427. 그리스 철학자)은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세계를 경험으로 파악되는 가상의 세계인 현상계(假想世界)와 이성으로 파악되는 참된 실재의 세계인
이데아(idea)의 세계로 나누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모든 각각의 개물(個物 : 存在者)에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세계가 중시하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수형상이란 말은 순수하다는 말
그대로 물질적 요소가 개입되지 않은 형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했고, 그 다음에 질료는 제1질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일원론(一元論)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서양의 본체론은 형상과 질료를 설명했지만, ‘통일원리’에서 볼 때는 성상과 형상이라는 말입니다. 성상은
마음이고 형상은 몸인데, 이 두 요소가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통일체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동양의 본체론은 양(陽)과 음(陰)으로
설명했습니다. 양과 음은 원리에서 볼 때 양성과 음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양성과 음성은 ‘원리본체론’에서 밝히는 성상과 형상의 속성으로서 모두
통일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양의 본체론과 동양의 본체론은 반드시 통일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서양문화와 동양문화가 통일을 이루는 것이
통일문화인데, 그 문화는 심정문화세계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심정문화는 위하여 사는 문화이고, 위하여 사는 문화는 혈통을 중심해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실문제 가운데 ‘원리본체론’으로 설명하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리의 본체로 계시기 때문에 존재세계는
모두 원리본체의 형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질서가 있고 법도가 있습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들어 있고 참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위하여 존재합니다.
만물의 주인된 인간도 위하여 존재하고 위하여 살아야 하는데,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렇게 못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를 회복해야 합니다.
인간의 복귀는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닮은 아들딸이 되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핏줄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아버지의 핏줄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연의 혈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4.
만유원력과 수수작용 및 사위기대 164
모든 존재는 반드시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고민해온 것이 존재와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모든 존재는 무형이든 유형이든 간에 관계성을 갖고 존재합니다. 관계성을 정리해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에너지로부터 나오는 힘도 관계성에 의해 존재합니다.
1) 만유원력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창조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절대자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존재로 계시기 위한 근본적인 힘도 절대적입니다. 그 힘은 모든 피조만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그러한 근본된 힘을 만유원력(萬有原力)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유원력은 원리의 본체되시는 하나님의 형상에 속합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만유원력은 하나님이 존재하기
위한 근본된 힘입니다. 하나님이 지어 놓은 피조만물도 존재하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피조만물은 자기 스스로 힘을 갖지 못하므로 힘을
발생케 하는 원인적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이 바로 만유원력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만유원력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인간의 마음과
몸은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성상적인 부분이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이며 신성(神性)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적인 부분이
만유원력이며 능력(能力)입니다. 따라서 만유원력은 낮의 하나님, 즉 창조주인 하나님의 몸에 해당하고, 만유원력의 근본적인 힘인 심정은 밤의
하나님, 즉 하나님의 마음에 해당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인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을 닮고 하나님의 몸인 원리와 법도와 질서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나님이 찾아올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살고 있습니다. 햇빛도,
공기도, 비도 하나님에 의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사는 인간인데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는 자체가 인간의
비극입니다.
만유원력은 하나님이 존재하기 위한 근본된 힘인 동시에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기 위한 힘을 발생케 하는 원인적인 힘입니다.
결론적으로 만유원력이 없으면 하나님이 존재할 수 없고, 피조물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2) 수수작용 165
주고받는
작용을 수수작용(授受作用)이라고 합니다. 수수작용은 잘 주고 잘 받는 작용입니다. 수수작용은 만유원력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앞에 쓰는
‘授(수)’자는 줄 수(授)자 입니다. 그리고 뒤에 쓰는 ‘受(수)’자는 받을 수(受)자 입니다. 먼저 받고 나중에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먼저 주어야 합니다. 주고받는 것이지 받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고받는 작용을 하려면
그렇게 만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는 힘의 근원이 만유원력입니다. 만유원력이 작용하려면 상대기준(相對基準)이 세워져야
합니다. 상대기준이란 말은 두 존재가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기대를 조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기준이 조성되고 만유원력이 작용하면,
성상·형상과 양성·음성이 실체화하기 위해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당신 속에 있는 본성상과 본형상이라는 두 요소가 상대기준을 조성한
다음 만유원력에 의해 주고받아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상과 형상이 수수작용을 하는 데는 만유원력이 중심이 됩니다.
상대기준이 조성되면
수수작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존재가 셋이 있을 때는 삼대상(三對象)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그것을
삼대상기준(三對象基準)이라고 합니다. 존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존재기대를 세우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둘이 있을 때는 간단한데, 셋이 있을 때는
셋이 맞아야 합니다.
상대기준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동기가 되고 목적이 되지만, 주고받는 힘은 만유원력입니다. 하나님
속에 있는 두 요소가 상대기준을 조성해서 만유원력에 의해서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분립되어 나옵니다. 그것이 주체와 대상입니다. 하나님 안의
성상이 주체라면, 형상은 대상입니다. 하나님 안의 양성이 주체라면, 음성은 대상입니다.
본체 속에 있는 두 요소가 만유원력에 의해서
분립되어 나온 실체가 주체와 대상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다시 만유원력에 의해서 상대기준을 세워 수수작용을 하면 거기에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합성체가 생깁니다. 그 힘에 의해서 모든 존재는 생존하고 번식하고 작용하는 것입니다. 수수작용을 하지 않는 생존·번식·작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활동도 없습니다.
수수작용의 힘은 만유원력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만유원력이고, 하나는 만유원력에 의해서
나오는 수수작용의 힘입니다. 서로 하나 되기 위해 잘 주고 잘 받는 작용을 하면서 발전과 번식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만유원력과 수수작용의 힘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 주체와 대상, 내적(內的)과 외적(外的)인 관계입니다.
(1) 모든 존재는 상대적 존재(상응적 존재)
167
모든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 수수작용에 의해서 번식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들은 전부 수수작용을 하지 않고서는 생존도,
번식도, 작용도, 활동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수작용이 중요합니다. 모든 존재는 상응적(相應的) 또는 상대적(相對的)으로 존재하며 이
세계에 상극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모든 존재가 상대적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수수작용을 하기 위해서이며, 수수작용을 하는 이유는 발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주고받지 않으면 절대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인 것만이 아니라 상극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위(上)가 있으면 아래(下)도 있고, 우(右)가 있으면 좌(左)도 있고, 전(前)이 있으면 후(後)도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도 있고, 부모가
있으면 자식이 있고, 전부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죽 설명해 놓고, 악이 있으니까 선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악이 있기 때문에 선이란 개념을 쓸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은 틀렸습니다. 선과 악은 상대적 개념이 아니고 상극적인 개념입니다. 상극이란, 한 점에서 출발하더라도
동기와 목적과 방향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상대란 말은 한 점에서 출발하되 동기와 목적과 방향이 같은 것을 뜻합니다. 일본 여자와 한국
남자는 문화가 다르고 국적도 다르지만, 사랑을 중심해서 가정을 이룬다는 하나의 목적과 이상을 가졌기 때문에 결혼해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극적이기 때문에 서로 만나면 부딪치고 깨지고 파괴됩니다. 한 점에서 출발했지만 동기가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서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상대적 존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요소도 상대적 존재입니다. 상극적인 개념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상극적인 요소 자체가 없습니다. 상대적 존재란 서로 응하는,
상응적 존재라는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수수작용을 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존재합니다. 상극적 존재는 수수작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나면
싸움만 벌어집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사랑(愛)과 미(美)를 주고받습니다. 예들 들어 냉수 한 그릇을 상대에게 준다면, 보이는 것은
냉수지만 거기에는 사랑과 미가 들어 있습니다. 냉수 한 그릇에는 주는 사랑과 받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습니다. 물건을 선물했다면 보이는 것은
물건이지만, 그 속에는 주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과 미가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존재는 수수작용을 통해 사랑과
미를 주고받습니다. 주체는 대상에게 사랑을 주고, 대상은 그 주체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고 주체에게 정적인 힘인 미를 돌립니다. 사랑과 미를
주고받으면 기쁨이 나옵니다. 사랑 속에도 미가 있고, 미 속에도 사랑이 있기 때문에 주는 자도 기쁘고 받는 자도 기쁩니다. 주체와 대상이 이처럼
수수작용을 통해 사랑과 미를 주고받으면 기쁨이 오고 그 결과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기쁨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상대적으로 존재하고 수수작용을 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인간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는 주체고 자녀는 대상입니다.
부모도 아버지가 주체이고 어머니는 대상입니다. 형님이 주체이고 동생은 대상입니다. 남편이 주체면 아내는 대상이고, 스승이 주체면 제자는
대상입니다. 상관(上官)이 주체면 부하(部下)는 대상이 됩니다. 자신이 아무리 똑똑해도 상관 아래 있을 때는 부하로서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부하가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상관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이상이 전체 앞에 플러스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것처럼 나서서 드러내면
안 됩니다. 대상은 반드시 주체를 동기로 삼아 나타나야 합니다. 대상이 동기가 되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고용주가 있고 고용인이
있습니다. 또 정부가 있고 국민이 있습니다. 국가는 가정의 이상이 확대된 것이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가정의 체제가 그대로 확대 적용됩니다. 그래서
대통령은 가정의 아버지와 같습니다. 대통령의 부인은 가정의 어머니와 같습니다.
장관들이 부모를 모시고 가정의 살림을 책임지는 가정의
형님들과 같습니다. 모든 국가의 일은 가정의 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민들이 기아에 허덕이거나 공부를 못하거나 질병으로 고생하는 것은
자기의 아들딸이 굶고 있다든가, 공부를 하고 싶은데 못 한다든가, 질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는 것과 똑같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국가의
주권자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국민을 돌봐야 합니다. 가정의 부모가 자식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나라의 주권자는 국민에게 심정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실천하는 지도자라면 국민이 그 지도자를 쫓아내거나 그가 하는 말을 싫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가정의
자식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가정을 보다 더 발전시키려는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있는 지도자입니다.
대통령이 주체라면 국민은 자녀와 같은 자리, 대상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동물도 수컷과 암컷, 식물도 수술과 암술, 광물도
양과 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어 놓은 존재세계는 소립자부터 최고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극적인 존재가 없고 전부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체 없는 대상도 없고, 대상 없는 주체도 없습니다.
천체에도 주체와 대상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해서 아홉 개의 행성이 돌고 있는데 그 궤도와 질서는 영원합니다. 만일 수십 년이 지나서 우주의 질서와 궤도가 변경된다면
지구는 대변화가 일어납니다. 존재성에 대변형이 옵니다. 수억 년이 지났어도 태양계의 행성들도 변함없이 자기의 궤도를 돌고 있습니다.
지구는
자전도 하고 공전도 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면 1년이 되고, 자전을 하면 하루 24시간이 됩니다. 달은 지구를 중심해서 돌고
있습니다. 달의 자전과 공전에 따라서 바닷물, 조수(潮水)가 하루에 두 번씩 들어왔다 나갔다 합니다. 거대한 바닷물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만조가 되었다가 썰물이 됩니다. 여자들은 달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월경(月經)을 합니다.
위의 예처럼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되어 주고받습니다. 그 작용을 수수작용이라고 합니다. 우주도 수수작용을 하면서 질서를 유지하고 존재합니다. 동물과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꽃은 자기 위치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씨를 맺고 결실하기 위해서는 꽃가루받이를 해야 합니다. 식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꽃은 향기를 퍼뜨립니다. 꽃이 향기를 풍기면 벌과 나비는 향기를 따라 깊은 산속 바위틈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를 찾아갑니다. 꽃은
꿀을 주고, 나비는 꿀을 빨고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꽃가루받이를 해줍니다. 그것이 수수작용입니다.
인간도 동맥과 정맥이 있어서 서로
수수작용을 합니다. 심장에서 동맥을 통해 기능성 혈액을 조직으로 공급하고, 조직에서는 정맥을 통해 기능을 마친 혈액을 심장으로 보냅니다. 그
과정에서 혈액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피가 맑고 깨끗하면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수수작용이 잘 안 되면 피가 탁하고 병이 나는 것입니다. 식물도
물관과 체관이 있습니다. 물관과 체관을 통해서 서로 영양분과 수분을 주고받습니다.
성서를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받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태복음 7장 1~2절)고
했습니다. 내가 행한 대로 돌아온다는 말입니다. 또 마태복음 7장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했습니다.
주지도 않고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영원히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2장
8절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또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들이 모두 수수작용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것도 수수작용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공책에 글씨를 쓰고 있다면 볼펜과 나의 두뇌가 수수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수수작용에 의해서 존재하고, 번식하고, 활동하고, 자기
의사도 표출합니다. 수수작용은 바꾸어주는 작용이 아니라 잘 주고 잘 받는 작용입니다.
수수작용은 이와 같이 존재의 발전 법칙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계급투쟁으로 발전한다고 하는데, 계급투쟁은 발전 법칙이 아닙니다. 서로 만나서 싸우면 없어지고 깨지게 됩니다. 투쟁에는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 이론은 잘못된 이론입니다. 심정을 바탕으로 한 진리가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혁명을 하기 위한
이론이지, 인류가 그토록 염원한 진리를 추구하고 실현하기 위한 이론이 아닙니다.
(2) 수수작용으로 본 양심작용
양심의 힘은
수수작용에 의해서 생깁니다. 양심은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고 있으며 사람을 선(善)으로 인도합니다. 본연의 양심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의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선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 양심이 주고받는 주체는 선의 본체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곧
진리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3절에 ‘말씀이 곧 하나님이고 만물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했으며, ‘하나님은 곧
말씀으로 계시고 말씀으로 모든 만물이 생성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리와 하나 되어 있습니다. 말씀 자체가 곧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통해서 원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성경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양심은 진리와 주고받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주고받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 주고받을 때 양심의 힘은 선으로 향하게 됩니다. 양심이 진리와 주고받으면서 우리의 본심은 성장합니다. 본심은 양심을 통해서
진리와 하나 되어 성장하고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완성하면 본심이 완성되고, 그때 하나님이 인간의 본심 속으로 들어가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심을 주체라고 한다면 양심은 대상입니다. 본심이 성상이라면 양심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본연의 자리에서
진리와 수수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진리는 하나님과 일체가 되었지만,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거짓을 진리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진리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을 양심은 진리인 줄 알고 대하다 보면 양심이 지향하는 선도 때로는 방향이 삐뚫어지게
됩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양심대로 살고 있으니 선한 사람이다.’하는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으로 온전히 선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진리의 근본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연의 인간의 양심작용과 타락한 인간의 양심작용은 다릅니다. 원리본체 안에 들어가면
진리의 본체를 알게 됩니다.
3) 정분합작용에 의한 삼대상목적 및 사위기대
원리본체 속에 중화적 통일체로 존재하는 본양성과 본음성이
만유원력에 의해 수수작용을 하면, 양성과 음성으로 분립되어 남자와 여자라는 상대적 실체가 나오는데, 그 상대적 실체가 다시 수수작용을 하면
하나의 새로운 실체로 아들 또는 딸이 나옵니다. 다시 합성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전개, 즉 창조의 과정과 피조세계의 발전
단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피조세계의 발전은 만유원력과 수수작용을 비롯하여 정분합작용과 삼대상목적, 그리고
사위기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1) 정분합작용
하나님을 정(正)으로 하여 그로부터 분립(分立)했다가 다시 합성일체화(合成一體化)하는
작용을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만유원력에 의해서 당신 자체 속에서 상대기준을 조성해 수수작용을 하면
양성과 음성의 분립이 일어납니다. 양성을 지닌 남자와 음성을 지닌 여자로 분립되는 것입니다.
분립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유원력에 의해서 상대기준을 조성해 수수작용을 하듯이 그들도 만유원력에 의해서 상대기준을 조성해 수수작용을 합니다.
그러면 다시 합성체인 자녀가 태어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분립된 남자와 여자, 그리고 합성체인 자녀, 이렇게 발전된 3단계의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가 3단계에 의해서 발전하는 것을 정분합(正分合)이라고 하고, 그 작용을 정분합작용이라고 합니다. 이 원리가
하나님이 원래 세운 창조의 설계도입니다. 타락한 세계에는 이 정분합과 정반대되는 이론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타락으로 인해 생긴
이론으로, 사탄이 세운 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공산주의 세계에서 발전법칙으로 사용하는 정반합(正反合)이라는 이론입니다. 정반합은
공산주의 발전법칙 가운데 가장 핵심 되는 내용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주의 근본을 물질로 봤습니다. 영계도 부정해 버리고 신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정반합은 변증법(辨證法)의 논리 전개에서 나온 말입니다.
변증법의 기본 전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속적인 반복, 끊임없는
모순의 생성과 지양을 통해 변화·발전한다는 논리입니다. 헤겔이 주장했던 정반합에 의해서 변화·발전한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정반합이론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이론을 취하게 되면 혁명적인 인간이 됩니다.
물론 정반합이
나오기까지 그 배후에 산업혁명 초기의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부작용을 급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정반합이라는 이론은 혁명을 위한
이론으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성성상으로 계시듯이 모든 존재는 하나님을 닮아서 나왔기 때문에 전부 이성성상으로
나타납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사물 속에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사물 속에는 두 요소가 어느 기간 동안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 있다가 일정 시기가 지나면 그 자체 속에서 두 요소가 대립·투쟁해서 정(正)도 아니고 반(反)도 아닌 새로운 합(合)이 나온다고 본
것입니다.
그들은 달걀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달걀을 보면 달걀껍질이 있고 껍질 안에 노른자와 흰자가 있습니다. 노른자에 병아리가 될 수
있는 생명의 요소인 씨눈(胚子)이 있습니다. 씨눈은 조그마한 점과 같습니다. 그것이 병아리가 될 수 있는 생명의 요소입니다.
그들은 달걀을
정반합에 대입해 설명하는데, 달걀껍질은 자본가로, 달걀노른자에 있는 씨눈은 노동자·농민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일정 기간 동안 달걀껍질 속에
있는 씨눈을 억압된 존재로 봤습니다. 달걀껍질이 씨눈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체는 껍질이 아니고 씨눈인데, 씨눈이 일정 기간 동안은
조화와 통일을 이룬다고 보았습니다. 그 상태에서 씨눈은 싸울 힘도 없고, 껍질과 싸우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씨눈이 노른자와 흰자를
전부 영양분으로 섭취해서 병아리가 되면 껍질과 대립 투쟁한다는 것입니다. 껍질을 깨고 나오면 달걀 껍질이 아니고 씨눈도 아닌 새로운 생명체인
병아리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혁명을 거치지 않고서는 새로운 유토피아가 오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론 자체를
혁명하기 위한 동기로서 세웠습니다.
그러나 달걀껍질과 달걀의 씨눈은 싸우기 위한 두 요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합목적성(合目的性)이라고 합니다. 달걀껍질은 씨눈이 병아리가 될 수 있도록 보호할 책임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껍질
속에 있는 씨눈은 껍질에 억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병아리가 될 때까지 껍질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즉 껍질은 씨눈이 병아리가 될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하고, 씨눈은 병아리가 될 때까지 껍질의 보호를 절대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둘은 상호 협력하는 합목적성을 띠고 있습니다.
21일이 지나면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옵니다.
만일 그 순간에 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하면 생명체가 죽기 때문에 달걀 끝에 얇은 공기막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생명체가 대립·투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체로 나오기까지 필요한 모든 준비를 그 안에다 해둔 것입니다. 그것이
달걀이 병아리로 발전되어 나오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병아리의 부화 과정을 자본가와 노동자에 대입하려고 했습니다. 숫자는
적지만 자본가를 달걀껍질에 비유했습니다. 노동자 농민들은 숫자는 많고 생명체를 가졌지만 힘이 없다고 봤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일정 기간 동안
조화와 통일을 이루면서 연합하고 연대하고 단합해 자본가와 대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본가는 숫자가 적은데 노동자들이
이기지 못하는 것은 자본가의 배후에 국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본가를 타도할 수 있을 때까지는
노동자·농민들이 아무리 감옥에 가고 죽어가더라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강력한 동기가 필요했습니다. 혁명하다가 죽어가면서도
목적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는 이론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그 철학이 유물론(唯物論)이고, 그
자체의 발전단계가 변증법이며, 그것을 역사에 대입한 것이 유물사관(唯物史觀)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논리로 보면
자본론(資本論)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이 출현한 당시에는 그 이론이 세계를 제패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5, 60년 전만 해도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보다 강력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 속에는 공산주의와 같은 체계적인 이론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성인이나 젊은 청년들이 한때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이 그동안 세상을 어렵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 실현을 방해한 잘못된 이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원리본체론’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된 것입니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독일의 철학자·경제학자)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의 철학자)과 협력하지만 나중에
하나님도 부정하고 종교도 부정했습니다. 당시 산업혁명 초기에는 여덟 살 먹은 어린아이까지도 14시간 정도 중노동을 해야 겨우 하루를 버틸 수
있었습니다. 자본가들이 그렇게 노동자들을 혹사시켰습니다.
그것을 보고 마르크스는 분개했습니다. 자본가들을 움직이고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주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워주어야 하는 사람이 당시 관념론 철학자들이고 종교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현실문제를 해결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자본가와 결탁했습니다.
당시의 종교관은 예정론이 중심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동자로 일을 하다가 죽게 되어 있고, 자본가들은
자본가로서 예정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해결해
준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마르크스는 결국 종교를 부정하고 신을 부정해 버리고 영계까지 부정해 버렸습니다.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신앙하던 그가 신을 부정하게 된 이유는 그런 사회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편에 서서 그들을 구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변증법은 대립·투쟁을 내세우는데 대립·투쟁은 증오와 미움에 의해서 나옵니다. 증오와 미움이 있지 않고서는 대립·투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인간이 타락해서 생긴 이론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을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 또는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이라고 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포이에르바하의 유물관과 헤겔의 변증법을 조합해 만든 이론입니다. 그 이론에 대해 비판하고
대안을 세운 것이 ‘통일원리’의 정분합이론입니다.
정분합이론은 주고받는 수수작용의 수수법(授受法)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공산주의는 미움과 증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중심이지만, ‘통일원리’는 사랑과 미를 주고받는 수수법적 유일론(授受法的唯一論)이
중심입니다.
우주의 본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하나님에는 두 요소가 있지만 그것은 싸우기 위한 요소가 아니라 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통일체로 계십니다. 모든 존재는 수수작용에 의해서 발전하는데 발전단계는 정분합(正分合)의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정분합에서는 모두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분합작용이란 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신상과 신성으로
계시고, 당신 속에 있는 모든 요소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관계성을 맺기 위한 것이 수수작용이고,
수수작용에 의해서 나타난 작용이 정분합작용입니다. 수수작용을 하는 것은 정분합에 의해서 결국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완성하자는 것입니다.
삼대상목적을 완성하는 것이 곧 사위기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2) 삼대상목적 178
하나님·남자·여자·자녀 네
존재가 각각 주체 위치에 설 때, 나머지 세 존재는 대상의 위치에 섭니다. 네 존재 가운데 한 존재가 주체가 되면 나머지 세 존재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삼대상(三對象)이라고 합니다.
두 존재가 관계를 맺을 때 상대기준을 조성한다고 말합니다. 상대기준은 둘이 잘 주고 잘
받을 수 있도록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둘이 있더라도 서로 상대기준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둘이 관계성을 맺는 것과 같이 세 존재가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관계성을 맺는 것이 삼대상기준(三對象基準)입니다.
삼대상기준을 세우고 네 존재가 수수작용을 하면 삼대상목적이
완성됩니다. 가정을 놓고 보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남자(주체)와 여자(대상)가 있고 그 자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주체가 되면 나머지는
제1대상(남자), 제2대상(여자), 제3대상(자녀)입니다.
그 다음에 남자가 주체가 되면 제1대상이 하나님이고, 제2대상이 여자,
제3대상이 자녀가 됩니다. 여자가 주체가 된다면 제1대상이 하나님, 제2대상이 남자, 제3대상이 자녀가 됩니다. 자녀(합성체)가 주체가 된다면
제1대상이 하나님이고, 제2대상이 아버지, 제3대상이 어머니가 됩니다. 네 존재(四者)가 각각 주체의 위치에 설 때에 나머지 세 존재(三者)는
삼대상(三對象)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네 존재가 수수작용을 하면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이 완성됩니다.
번식으로 하나가 분립되더라도 네 존재가 서로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이때 관계성을 맺는 이유는 수수작용을 통해 하나되기 위해서입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한 분 속에서 나온 모든 존재가 원리의 본체를 닮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 두 요소가 있지만 당신 스스로도 수수작용을 해서
분립합니다. 나온 네 존재는 반드시 수수작용을 해야 합니다.
아담의 목적도 하나님 안에서, 해와의 목적도 하나님 안에서, 자녀의 목적도
하나님 안에서 나옵니다. 존재하는 위치는 서로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입니다. 모두가 한 분의 하나님에 의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네 존재가
삼대상기준을 조성해서 수수작용을 하면 삼대상목적을 완수하게 됩니다. 목적이 하나니까 한 점에서 출발해 동기(動機)도 같고, 방향도
같습니다.
그런데 동기가 다르고 방향이 다르면 목적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목적이 다르다는 말은 동기도 다르고 방향도 다르다는
말입니다.
네 존재의 중심은 반드시 하나님입니다. 모든 존재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모든 동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동기는 인간이
아닙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녀도 아닙니다. 동기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동기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동기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직에서 위치가 높아질수록 자기가 주인노릇 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가 소속한 단체는 어려워지고, 그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작과 과정과 끝이 동일해야 합니다. 그 근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중심한 동기가 되게 하고, 언제나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과 활동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느냐가 우리가 언제나 생각하고 살아야 할 과제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을 망각하는 데서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이 나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동기여야 합니다.
성경 요한복음 16장
13절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이 오시면 하실 일들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오신 메시아는 당신 고집만으로 사시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분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이러쿵저러쿵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아버지의 뜻을 가지고 오셔서 이루려고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변 사람들 얘기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는 동서남북으로 열어 놓되 그 내용이 뜻을 이루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냐를 곰곰이 따져야 합니다. 반대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만일 그것이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같이 협력해야
합니다.
(3) 사위기대 181
정분합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 네 존재의 근본기대를 사위기대(四位基臺)라고 합니다. 네
존재가 삼대상기준을 조성한 터전에서 수수작용하여 삼대상목적을 완성하면 사위기대가 이루어집니다. 수수작용을 하면 삼대상 자체가 모두 합목적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삼대상목적이 완성되면 사위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위기대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된 주체가 수수작용을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된 대상이 수수작용을 합니다. 또 하나님에서 분립된 주체와
대상이 서로 수수작용을 하며, 주체와 대상 사이에 태어난 아들딸들도 주체인 아버지와 주고받고, 대상인 어머니와 주고받습니다. 그러므로 종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과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위기대의 의의
181
♣ 사위기대는 하나님의 창조목적 완성기대입니다. 하나님의 이상이 비로소 이 땅 위에 실현되는 기대입니다. 사위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 사위기대는 곧 존재기대(存在基臺)이기도 합니다. 사위기대는 동서남북, 사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동서남북이 세워지면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한밤중에 깊은 산골이나 태평양처럼 넓은 바다나 허허벌판과 같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나침반만 있으면 동서남북 방향을 잡게 되고 내 위치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동서남북이라는 사위기대 속에서 존재위치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입장에 있느냐, 주체의 입장에 있느냐, 대상의 입장에 있느냐, 아니면 합성체의 입장에 있느냐?’를
알고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존재기대가 확실해야 합니다.
♣ 사위기대는 사랑의 근본기대(根本基臺)입니다. 사랑의 본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존재가 탄생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사랑에서 생겼고 사랑에 의해서 나왔는데, 사랑의 본체가 부모입니다.
사랑의 근본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소생적(蘇生的)인 사랑입니다. 분립된 아담과 해와는 아버지의 사랑을 실체처럼 느끼고 체휼할 수 있게끔
해주는 대상이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의 사랑은 장성적(長成的)인 사랑에 해당합니다. 아담과 해와가 아들딸을 낳으면 그 자녀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는
손자손녀가 됩니다.
하나님이 1대라고 한다면 아담과 해와가 2대가 되고, 그 자녀가 3대가 됩니다. 3대인 손자손녀의 사랑은
완성적(完成的) 사랑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소생적 사랑, 부부의 사랑은 장성적 사랑, 자녀의 사랑은 완성적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사랑의 근본기대가 형성됩니다.
아담·해와가 타락했다는 말은 하나님은 자녀인 2대는 가졌지만 손자인 3대를 갖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원성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기대도 세울 수가 없었고, 따라서 창조목적도 완성할 수 없었습니다.
♣
사위기대는 선(善)의 근본기대입니다. 하나님은 선의 본체입니다. 선의 뜻은 하나님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분립된 아담과 해와를 통해서, 또
아담과 해와가 낳은 아들딸을 통해서 이루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선한 뜻의 실체이고 해와도 선한 뜻의 실체입니다. 그 둘이 선의
실체이기 때문에 수수작용을 통해 태어난 자녀도 선의 실체가 됩니다. 실체인 그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선의 대상이 됩니다. 사위기대는 선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이 선한 뜻을 이루는 자리이기 때문에 선의 근본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선의 근본기대는 본래 아담과 해와가 세워야 하는
자리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처음으로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인간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아담은 장자 중의 장자요, 해와는
장녀 중의 장녀입니다. 그 둘이 완성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면, 그로부터 태어난 아들딸들은 아담·해와의 자녀가
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나를 낳아준 부모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내가 내 부모를 잘
섬기고 모시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것입니다. 내 부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낳아서 기르지만 그 부모도 스스로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것이 중심입니다. 내가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그 부모를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것입니다.
♣ 사위기대는 힘의 근본기대입니다. 힘이라는 것은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대를 세워서 힘이 작용하는데, 그것을
사위기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힘의 본체입니다. 그 하나님의 힘 자체도 사위기대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사위기대를
세워 역사해야 모든 힘이 발동하고, 선의 실체로 사랑과 존재기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마음과 몸이 하나 되어
실체적으로 찾으려고 한 대상이 후(後)해와입니다. 후해와를 찾기 위해서 기대를 세운 것이 요셉가정과 사가랴 가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후해와를
찾지 못했습니다. 능력의 기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 사위기대는 또 3단계의 근본기대입니다. 정분합은 소생·장성·완성 3단계
발전법칙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발전단계입니다. 거기에서 다시 분립하고 주고받으면 합성체가 됩니다. 그래서 사위기대는 3단계의 근본기대임과
동시에 정분합이 나오는 발전단계입니다.
♣ 그 다음에 사위기대는 4수(四數)·3수(三數)·12수(十二數)의 근본기대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4수가 제일 좋은 수입니다. 4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타락해서 4수를 사탄이 취해
갔습니다. 사탄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와야 합니다. 4수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자 존재기대이고, 사랑의 근본기대요,
선의 근본기대요, 힘의 근본기대요, 3단계의 근본기대입니다. 그러니까 4수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3수(三數)도 하나님 안에 있는
숫자입니다. 오늘날 기독론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신(三位神)을 거론합니다. 그러나 ‘통일원리’에서는 하나님 본체와 그 본체에서 분립된
아담과 해와를 일체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아담·해와를 삼위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엄연한 개체이지만 뜻으로 볼 때는 삼위일체가 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위기대는 3수의 근본단계입니다. 사위기대가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3수는 12수의 근본기대입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될 때 그 대상은 아담·해와, 그 자녀 이렇게 셋입니다. 아담이 주체가 될 때는 하나님이 제1대상, 해와가 제2대상, 그 자녀가
제3대상입니다. 네 존재 중에서 한 존재가 주체에 위치했을 때 나머지 세 존재는 대상이 됩니다. 네 존재가 마주하는 3대상을 모두 합치면
12수가 나옵니다. 그 12수는 완성수(完成數)임과 동시에 완전수(完全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도 12제자가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유능하고 훌륭한 능력을 가졌더라도 열두 사람 이상을 직접 주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도 열두 제자 이상을 직접 거느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4수·3수·12수의 근본기대가 사위기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위기대의 종류
185
사위기대는 개인적 사위기대와 가정적 사위기대, 그리고 주관적 사위기대 이렇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해 3대축복을
이루는 것입니다.
3대축복을 이루는 첫 번째 사위기대는 개인적 사위기대입니다. 개인적 사위기대를 통해 개성이 완성됩니다. 개성의 완성은
인격의 완성을 뜻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분립되어 나온 마음과 몸이 있습니다. 마음과 몸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는 본성상과
본형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상적인 부분은 하나님 마음인데, 그것이 인간의 마음으로 창조되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몸인데, 거기에서 실체로 나온 것이 인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고, 몸은 하나님 몸을 닮아야 합니다.
벼
껍질 속에 있는 달콤한 물이 장차 쌀이 되고 볍씨가 되듯이, 우리 몸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벼 껍질 같은 형태로 주어졌습니다. 그 안에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심정과 참사랑으로 차고 넘쳐서 흐르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그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을 닮아서 하나님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리와 법도와 질서를 지닌 절대적인 아버지이듯이 우리의 몸도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심정을 닮아서 하나님 앞에 아들딸의 자격을 갖추려면 절대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인일체(神人一體)가 되고, 비로소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실체를 갖추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마음이나 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마음과 몸이 하나 되어야 하지만, 남성 또는 여성으로서 스스로 절대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성 아버지의 씨를 남자가 상속받아 실체화하고, 여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절대성 어머니의 난자를 지니고 태어났으니 그 절대성 난자가
아버지의 것으로 쓰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남자와 여자가 완성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개성완성(個性完成)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개성완성은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이 전체를
완성시키는 일입니다. 그 말씀을 지켜야 개인도 완성하고, 하나님도 완성하고, 하나님의 뜻도 영원히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책임분담입니다.
개성을 완성한다는 말은 마음과 몸이 하나님을 닮아서 절대성 남자가 되고 절대성 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성 남자가
되고 절대성 여자가 되는 것이 바로 개성완성이고 인격완성(人格完成)입니다. 그런 남자와 여자가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남자)의
생식기는 이 여자가 주인이고, 너(여자)의 생식기는 이 남자가 주인이다.’ 하는 허락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타락한 세계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하나님도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것, 생각하는 것 전체가 사탄을
동기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이 타락 인간들의 문제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온 세상에 밝히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사는 동안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어떤 일보다도 시급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사는 것이 개성을 완성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두 번째 사위기대는 가정적 사위기대입니다. 가정적 사위기대를 통해 가정이 완성됩니다. 이상가정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가정적 사위기대를 완성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이상을 실현하는 이상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천주의 핵심이고 천주의
축소체입니다. 가정을 확대해 놓은 것이 종족·민족·국가·세계·천주입니다. 영계와 육계는 바로 가정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통일원리’에서
천주대가족(天宙大家族)을 편성한다고 한 것입니다.
세 번째 사위기대는 주관적 사위기대입니다. 주관적 사위기대를 통해서는 주관성이
완성됩니다. 인간의 주관성이 완성되어야 이상세계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만물세계를 지으실 때의 어려움을 우리는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탁자 하나도 쉽게 만들지 못합니다. 쓰이는 목적에 따라 설계도 달라야 하고, 기술도 있어야 하고, 재료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허하고 혼돈한 가운데서 존재세계를 창조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조 당시 하나님의 심정을 안다면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밟고 다닐 수 없습니다. 지나가는 개미도 그냥 발로 밟아서 죽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창조 당시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이 정성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이고 전체를 투입해서 지어 놓은 만물세계입니다. 인간에게 주인이 되어 그 만물세계를 주관하라고 했으니 얼마나 복된 일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지니지 않는 한 만물을 주관할 자격이 없습니다. 심정으로 만물을 주관하고 참사랑으로 만물을 다스려야
하는데, 심정과 참사랑이 완성되지 않은 자리에서는 주관성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 로마서 8장 19절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주인, 창조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목적과 가치를 잊어버리고 사는
인간들에게는 만물도 주관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동기와 목적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주관성이
완성됩니다. 그런 세상이 이상세계입니다. 그 세계에는 절대 싸움이 없습니다.
사위기대의 존재양상 188
사위기대의
존재양상은 원형운동(圓形運動)을 통해 결정됩니다. 한 점과 한 점은 연결해도 직선밖에 안 됩니다. 직선은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합니다. 영원성이
없습니다. 원을 형성해야 영원성을 띠게 됩니다.
두 점을 이어 놓은 것이 선인데 원을 이루려면 그 선이 수수작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둘만 가지고는 수수작용이 안 됩니다. 중심이 세워져야 비로소 상하(上下)가 주고받게 됩니다. 그래서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좌(右左)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심이 있어야 우(右)와 좌(左)가 주고받습니다. 전(前)과 후(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심이 없으면 한 점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심축이 생기면 돌게 되어 있습니다. 상하도 돌고 우좌도 돌고 전후도 돕니다. 모든 존재는 원형운동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그 각도를 달리하면 구형운동(球形運動)이 됩니다. 그 자체는 원형이지만, 한 중심을 통해서 상하·우좌·전후가 각도와 위치를 달리하면서 수수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입체성을 띤 구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공은 둥급니다. 중심을 세우지 않으면 공은 굴러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이
중요합니다. 타락한 세계는 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 존재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절대가치(絶對價値)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언제나 동기가
원리본체이고, 중심도 원리본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내가 어디를 가려고 해도 가고자 하는 동기가 있습니다. 동기는 반드시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동기 자체는 목적이고,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 가치입니다. 가치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 가치는 절대 변하면 안
됩니다.
절대가치는 참사랑·참생명·참혈통입니다. 절대가치는 절대성 위에서 세워집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절대가치를 세울 수 없습니다.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본체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절대가치의 기준은 하나님이고, 절대가치는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 요소인
참사랑·참생명·참혈통입니다. 절대가치의 기준은 한마디로 절대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절대성이 세워지면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랑이 먼저냐, 생명이 먼저냐?’에서 사랑이 먼저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이 있으니까 사랑도 있지.’ 혹은 ‘내가 태어났으니까
사랑할 수 있는 대상도 있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본을 보면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이 없는데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생명은 나중입니다. 그래서 사랑 때문에 생명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두 사람이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반대하면 죽기를 각오하면서 사랑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것은 생명보다 사랑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생명이 결합된 것이 혈통입니다. 사랑이나 생명이 없으면 혈통도
없습니다. 하나님 본체 안에 있는 참아버지의 절대성 정자는 참사랑의 씨고, 참어머니의 절대성 난자는 참생명의 몸입니다. 참사랑의 씨와 참생명의
몸이 하나 될 수 있는 자리는 생식기관밖에 없습니다. 그게 어머니의 자궁(子宮)입니다. 거기서 아버지를 만나 거기에다가 사랑을 동기로 하여 씨를
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성을 갖지 않은 생식기는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을 상속할 수 없습니다.
참사랑의 특권은 동등한 위치에 서는
동위권(同位圈), 같이 산다는 동거권(同居圈), 어디든지 동참할 수 있는 동참권(同參圈)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전체를 상속받을 수 있는 상속권(相續圈)을 갖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부부가 맺어지면 남자가 있는 곳에 여자가 있고, 여자가 있는 곳에
남자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동참합니다.
남자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여자의 것이 되고, 여자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남자의
것이 되어야 사로 상속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상속권은 집이나 재산만을 상속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상속권은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성 생식기를 인간에게 상속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이
가정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참고
모든 존재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는 이유 191
모든 존재가 왜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을까요?
첫 번째는 존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원력에 의해서 존재하십니다. 만유원력에 의해서 하나님 속에 있는 이성성상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면 분립체가 되어 나옵니다. 그것이 주체와 대상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다시 주고받으면 새로운 합성체가 되는데 그
자체가 생존·번식 작용입니다.
다시 말해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며, 그 힘은 수수작용에 의해서 나오고, 수수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영원성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한
점만으로는 영원성을 갖지 못합니다. 두 점을 연결하면 선이 되는데 선도 한 점과 마찬가지로 영원성이 없습니다. 영원성을 가지려면 두 점과 함께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중심이 있으면 수수작용을 통해 원을 형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분립된 모든 존재는 하나님을 닮아서 이성성상으로
분립되어 나오는데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있습니다. 상하도 중심이 있고, 우좌도 중심이 있고, 전후도 중심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중심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원이 형성되지 않는 한 영원성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영원성을 갖기 위해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의 존재법칙(存在法則), 곧 천도(天道)입니다.
창조주인 하나님도 이성성상으로 존재하십니다. 이성성상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상대적존재(相對的存在), 또는 상응적존재(相應的存在)라는 말입니다. 상대적 관계가 아닌 것을 상극적 관계(相剋的關係)라고
하는데, 상극은 하나님의 창조이상과 전혀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상극 이론은 타락에 의해서 나타난 잘못된 이론입니다. 한 점에서 출발한 한
존재라도 동기와 목적과 방향이 다를 때는 상극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동기와 목적과 방향이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상극적이
아니고 상대적입니다.
상대는 사랑 때문에 존재합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계시고, 그 사랑 때문에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일체가 되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어 수수작용을 해야 합니다. 수수작용을 통해 일체가 되면 기쁨이 생깁니다.
수수작용은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필요합니다. 상대라는 말은 주고받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주체와 대상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는 질서가 있고, 윤리가 있고, 규범이 세워집니다. 그래서 가치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개념이 없는 곳에서는 질서도·윤리도·가치도 세울 수 없습니다. 상극적 자리에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상극(相剋)이 아니라 상대적(相對的)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상극과 상대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극적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선(善)과 악(惡)이 상대적인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위가 있으니 아래가 있고, 앞이 있으니까
뒤가 있고, 남자가 있으니까 여자가 있다.’하고 상대적인 개념을 쭉 설명해 놓고, 상극적인 요소인 산과 악도 상대적인 개념으로 끌고 나갑니다.
‘악이 있으니 선도 있지 않느냐.’는 논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잘 들어봐야 합니다. 잘못 하다가는 방향이 바뀌어버립니다.
언제든지
진리 앞에는 비진리가 있게 되는데 빛이 비치면 어둠은 자동적으로 감추어집니다. 어둠이 판치다가 빛만 나타나면 어둠은 그대로 사라집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진리의 빛이 없습니다. 빛을 밝히는 진리가 ‘통일원리’입니다. 이 진리의 등불을 높이 들면 들수록 비추는 빛의 범위가 넓어져 어둠의
세력은 없어집니다. 거기에서 자유와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5. 창조목적 194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알아야 인간이
삶의 목표를 올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는 먼저 목적을 두고 구상하시고 그 구상에 따라 설계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설계도에는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이 들어 있고, 거기에는 전개된 상대적 관계와 사위기대 등 존재의
정적(정적(靜的)인 측면이 들어 있고, 수수작용·정분합작용 등 동적(動的)인 측면이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원리본체의
자기전개(自己展開)인 동시에 완성을 향한 피조물의 표준입니다.
1) 창조의 동기와 목적 194
창조의 동기와
목적을 구분해야 합니다. 동기가 없이는 목적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또 목적이 있다는 말은 동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도 동기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무조건 만들다 보니까 피조세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피조세계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1) 창조의
동기
하나님의 창조의 동기는 심정입니다. 심정을 동기로 해서 창조가 이루어졌습니다. ‘원리강론’에서는 심정이 동기화 되었다고 창조의 동기를
설명합니다. 심정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가장 근본 되고 본질적인 속성이 심정입니다. 심정은 하나님의 참사랑의
뿌리이며, 인격의 핵입니다.
심정이란 대상을 사랑하면서 기뻐하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정(情)의 충동심입니다. 정의 충동심은 주고 싶고,
위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정의 충동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대상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실체 대상이 나타나면 사랑도 실체적으로 영원하게, 기쁨도 영원하게 나타납니다. 실체는 영원성을 갖지만 무형은 순간밖에 없습니다. 만일 꿈속에서
한 여인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그 순간을 황홀할지 모르지만 꿈을 깨고 나면 즉시 사라집니다. 죽도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꿈속에서 만날 때는
무척 반갑고 좋은데, 꿈을 깨고 나면 허전해집니다. 그 원인은 대상 자체가 무형이고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랑하고 싶고
기쁘고 싶은 억제할 수 없는 정의 충동심이 있는데, 그것을 실현하려고 반드시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실체가 없으면 하나님도 사랑과 기쁨을 실감할
수가 없습니다. 실체가 있어야 하나님은 사랑하면서 기쁘고, 대상은 사랑받으면서 기쁘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는 주체는 사랑하면서 기쁘고,
사랑을 받는 대상은 사랑받으면서 기쁩니다. 사랑을 했을 때 주체에게 돌아가는 것은 대상이 주는 기쁨입니다. 심정은 사랑하면서 기뻐하고자 하는
정의 충동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억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창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심정이라고 한 단어로 표현하지만, 심정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자녀의 심정·형제의 심정·부부의 심정입니다. 그 심정들이 성숙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있을 때 부모가 되는데, 자녀를 낳기
위해서는 먼저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아들딸 자리를 거쳐야 하고, 형제의 과정도 거쳐야 합니다. 자녀가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하면 다시 부부의 자리, 부모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장과정은 그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리본체 자체가 그런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인간도 그런 과정을 닮아서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2) 창조의 목적 196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기쁘기 위해서 대상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한 주체는 피조된 대상을 사랑하고 그 대상은 주체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기쁨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요, 피조물의 존재목적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창조한 대상을 통해서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대상을 통해 기쁨을 느낄까요?
그 첫째가 닮은 대상입니다. 기쁨을 느끼려면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주체가 기쁨을 느끼려면 그 대상이 주체를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닮은 대상을 통해 기쁨을 느끼십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세기 1장 27절)고 한 성서에도, 닮은 대상을 통해 기쁨을 느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둘째는 선(善)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선의 본체이기 때문에 그 대상은 반드시 선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 ‘그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뜯어보면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했으니,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려면
‘하나님도 내 안에 있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체성의 문제를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자신은
아들로서 아버지 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아버지가 온전한 인간의 실체를 지니기 위해서는 남자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실체로 지어놓은 아담·해와가 완성했을 때 하나님의 실체도 완성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완성한 실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일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창조이상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완전(完全)한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니 대상도 완전해야 기쁨을 느낍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심정의 대상입니다. 심정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기 때문에 그 대상도 같은 심정을 지녀야 합니다. 그 심정이 창조의
동기입니다. 심정은 사랑하고 싶고 기뻐하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정의 충동심이기 때문에 창조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 대상도 같은 심정으로
창조성을 지녀야 합니다. 심정의 대상이 되면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3대축복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을 닮은 대상·선의 대상·완전한 대상·심정의 대상 이 네 가지의
조건을 갖추지 않는 한 그 대상은 창조주인 하나님 앞에 온전한 기쁨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또 자녀로서 부모 앞에서도 기쁨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도 그렇습니다.
모든 관계가 하나님의 질서적인 법도에서 이루어진 실체이기 때문에 그 실체는 이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 주체인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 198
하나님은 창조된 대상을
통해 기쁨을 느끼기 위해 인간을 포함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은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려야 합니다. 창조된 대상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고, 하나님에게 기쁨을 드리는 것이 피조물의 존재목적입니다.
(1) 하나님의 운행, 하나님의
기쁨 198
하나님은 사위기대 위에 운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곳에 기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善)의 대상도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사위기대에서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인간에게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만물을 주관하라는
3대축복을 주셨습니다. 3대축복이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7장 21절에는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했는데 지금까지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저 십자가를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다 천국에 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사위기대(四位基臺)입니다.
사위기대를 통해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3대축복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3대축복은 생육하고(제1축복), 번성하고(제2축복), 만물을 주관하는
것(제3축복)입니다. 3대축복은 성경 창세기 1장 28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제1축복(生育) 199
제1축복은
‘생육(生育)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육은 개성완성(個性完成)을 뜻하는데, 개성완성은 인격 완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상을 닮아난 것이 마음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난 것이 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마음과 몸을 지니고 나왔으니 마음도 몸도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리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상 가운데 있는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을 닮은 마음이 되어야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그런
마음은 없고, 시기·질투하고 남을 미워하고 원수시하고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만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기쁨을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곧 본성상의 본질이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입니다. 그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이
우리 마음속에 차고 넘쳐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몸은 원리와 법도와 질서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과 몸을 가졌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온전히 하나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와서 사실 수 있도록 하려면 나 자신이 절대성(絶對性=絶對生殖器)을
지켜야 합니다. 심정도 절대성과 관계되어 있고, 몸도 절대성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 마음 자체가 절대성 위에
세워져야 하고, 내 몸도 절대성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 신인일체(神人一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서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함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장 48절)는 말씀은 인간의 완전성을 의미하고, ‘너희가 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 3장 16절)라는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일깨워줍니다. 또 ‘그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장 20절) 하는 말씀은 신인일체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온전히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갖추면 하나님이 들어가 살 수 있는 거룩한 성전이 된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신인일체를 의미합니다.
제1축복인 개성완성은 인간이
신성(神性), 하나님의 심정을 지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지닌 사람이 곧 천국인입니다. 그러므로 심정교육은 개성을 완성한 천국인을
만듭니다. 개성을 완성하는 첫 번째 단계인 생육은 천국사람, 하나님이 백성이 되는 것인데, 그 백성의 가장 근본적인 교육은
심정교육입니다.
심정의 완성은 절대성 위에 세워집니다. 절대성을 지키고 심정과 원리와 법도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천국생활을 하게 됩니다.
개성완성을 통해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는다는 말은 성장기간에 책임분담을 통해 마음과 몸이 완성해가는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의 제1축복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창세기 1장 28절)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분담의 핵심은 제1축복에 있습니다.
제2축복(繁殖)
제2축복은 ‘번성(繁盛)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자손의 번식을
통한 가정완성(家庭完成), 곧 이상가정(理想家庭)을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이상가정은 생육해서 절대성의 본체를 닮은 실체 남자와 절대성의
본체를 닮은 실체 여자가 되어 하나님에 의해 축복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축복은 생식기의 주인을 허락받는 것입니다.
횡적인 생식기의
주인은 상대이지만, 종적인 생식기의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절대성 생식기를 통해서 비로소 남녀가 하나 될 수 있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인일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축복을 받고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사랑이고, 그 둘의 결혼은 하나님의 결혼이고, 그 둘이 사랑해서 태어난 아들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둘이 사랑해서 태어난
아들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둘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본질도 하나님이고, 그 요소도 하나님과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이
가지고 있는 정자의 씨도 결국에 하나님의 생식기와 일체가 된 정자의 씨가 되고, 해와도 절대성 어머니의 난자를 가졌지만, 하나님 안의 절대성과
하나된 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개성을 완성한 남자와 여자입니다.
개성을 완성한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어 번식한 자녀를
선민(善民)이라고 합니다. 선민은 선의 세계, 즉 천국의 구성원입니다. 선민이 천국생활을 하려면 거기에 합당한 규범교육(規範敎育)이
필요합니다.
제3축복(萬物主管) 201
제3축복은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입니다. 그것은 만물주관(萬物主管), 곧 주관성완성(主管性完成)을 의미합니다. 주관성을 완성한 선민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이상세계(理想世界)입니다.
인간이 만물을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대하면서 사랑하고 주관할 때, 비로소 제3축복이 이루어집니다. 제1축복,
제2축복과 함께 제3축복이 완성되면 선의 세계가 이루어집니다.
가정이 종족·민족·국가를 거쳐 확대된 것이 세계입니다. 선의 세계는 선민으로
구성된 가정이 확대되어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지상에서 이루어진 선의 세계가 그대로 천상까지 옮겨지면 비로소 이상세계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이루어진 선의 세계만으로는 진정한 이상세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상세계라 부르려면 천상과 지상세계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영역은 지상세계만이 아니라 천상세계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세계는 곧 천국(天國)입니다. 천국도 지상과 천상을
포함하기 때문에 지상천상천국(地上天上天國)입니다. 그 세계를 ‘천일국(天一國)’이라고 합니다. 천일국은 두 사람이 하나된 가정을 단위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한 가정의 구성원이 확대된 것이 세계와 천주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고 의지하고, 자식이 부모를 믿고 의지하고, 형님과 동생이
서로 믿고 의지하는 모델 가정이 천주의 중심이고 핵이 됩니다. 그런 가정을 확대하면 곧 이상세계가 되고 천일국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구성원이 그런 것처럼 단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든지 그 자체에 규범이 있고, 질서가 있어서 그 규범과 질서를 지켜야 온전히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기술도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하고 체력도 필요합니다. 규범교육과 함께 기술교육·지식교육·체육교육도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3대축복 중의 축복, 축복결혼
3대축복 중에서 가장 중요한 축복은 축복결혼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절대성
위에서 하나님을 닮은 마음과 몸을 지닌 실체가 되면, 그들 스스로 생식기의 주인을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생식기의 주인을 허락하게 됩니다.
“아담이 지닌 생식기의 주인은 해와다. 해와가 지닌 생식기의 주인은 아담이다.” 이렇게 생식기의 주인을 원주인(原主人)인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축복을 받고 나면 비로소 하나님이 “나는 너희가 지닌 생식기의 주인이니 내가 너희 안에 들어가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복 중에서 크고 귀한 복이 세 가지인데, 그 세 가지 복을 모두 인간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3대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축복은 육신을 주신 것입니다. 육신은 하나님이 찾아올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속에
들어가서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 큰 복이 없습니다. 내가 보는 것이 하나님이 보는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곳이 곧 하나님이 가시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절대성의 사랑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고 싶은데 육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육신을 지닌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무리 못났더라도 당신이 허락해준
남자와 여자의 육신을 통해 사랑을 체휼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실체의 사랑을 하고 아들딸을 낳는 것입니다. 그것이 3대축복 가운데
두 번째 축복입니다.
세 번째는 만물 주관권(萬物主管圈)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절대성 위에서 책임분담을 완성하면 하나님도 인간도 함께
해방권(解放圈)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절대성을 중심한 책임분담해방권완성(責任分擔解放圈完成)입니다. 하나님도 책임분담에서 해방되고, 인간도
책임분담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책임분담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해방권이라고 한 것입니다. 절대성 위에서 책임분담 해방권을 완성해야
합니다.
요약하면, 첫 번째 축복은 하나님이 인간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이 일체화하는 것이고, 두 번째 축복은 인간에게
절대성을 허락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사랑과 기쁨을 느끼고 인간을 통해서 당신의 아들딸들을 번식하는 것이고, 세 번째 축복은 당신이 지어 놓은
만물세계를 인간이 대신 주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제2의 창조주로서 만물을 주관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대축복
중에서 가장 귀한 축복이 축복결혼(祝福結婚)입니다. 결혼축복이 아니라 축복결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 되는 일은
3대축복을 이루면 실현됩니다. 그런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험도 많이 받습니다. 완성이 안 된 상태에서는 언제나 사탄이 가로막기 때문에
마음은 복을 받고 싶고 더 사랑하고 싶고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은데, 사탄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사탄이
허락지 않는 것을 주면 그것은 참소의 대상이 됩니다.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시면 안 됩니다.” 하고 참소하면서 사탄이 그것을
가져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험하고 그 시험에 합격한 만큼 주고, 성장하면 성장한 만큼 더 주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다 자라는 나무는
없습니다. 그래도 대나무는 싹이 나면 순식간에 자랍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쑥 커서 며칠 사이에 다 커버립니다. 그런데도 대나무는 마디가 있기
때문에 부러지지 않습니다. 대나무는 커가면서 마디를 짓고 큽니다. 만약 대나무에 마디가 없다면 바람에 쉽게 부러질 것입니다.
신앙노정도
대나무와 같습니다. 대나무과 같이 마디를 짓고 가야 합니다. 마디를 지어 놓으면 거기에다 물을 부어도 물이 아래 칸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장할 때마다 마디를 짓고 가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탄이 아무리 뒤흔들고 시험하더라도 ‘나는 더 이상은 내려가지 않는다.’는
기준을 세워 놓고 가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3) 이중목적 205
모든 존재는 존재목적이 있는데, 그
존재목적에는 성상적 목적(性相的目的)과 형상적 목적(形象的目的)이 있습니다. 창조원리에 의해서 한 분의 하나님 안에서 피조세계가 실체로 전개되어
나왔는데, 하나님의 성상적 부분과 형상적 부분을 닮아서 나타난 실체가 인간입니다.
그 인간을 본으로 해서 삼라만상을 창조했습니다.
삼라만상도 성상과 형상을 지니고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본체인 하나님이 이성성상의 중화적 통일체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재목적에는
성상적인 부문이 지향하는 성상적 목적이 있고, 형상적인 부문이 추구하는 형상적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성상적 목적은 전체목적(全體目的)을
뜻하는 것으로서 공적(公的)이며, 형상적 목적은 개체목적(個體目的)을 뜻하는 것으로서 사적(私的)입니다.
개체목적은 개체가 존재하기 위한
목적이지만 전체를 위한 목적이 있고, 개체가 존재함으로써 전체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한편 전체목적은 개체를 보호하고
육성해서 그 개체로 하여금 전체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하며, 직접 전체가 지향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음과
몸을 놓고 볼 때, 마음은 자체를 따라오도록 몸을 이끕니다. 마음은 몸을 움직이는 동기이면서 몸에게 목적지도 제시합니다. 방향도 목적도 그 안에
있습니다. 몸은 마음이 부여한 동기에 따라 마음이 제시하는 목적과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목적은 성상적 목적이며,
개체목적은 형상적인 목적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밥을 먹습니다.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기에
먹습니다.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은 개체목적이고, 보다 큰 목적을 위해서 사는 것은 전체목적입니다. 개체목적이 자기를 중심한 사적(私的)인
목적이라면, 전체목적은 공적(公的)인 목적입니다. 반드시 공(公)과 사(私)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공적인지, 사적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것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또 공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은 에너지입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본체이자 힘의 본체로 계십니다. 그 힘이 힘으로 존재하는 목적은 소립자를 형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소립자가
소립자로서 존재하는 목적은 소립자로 존재하면서 원자를 형성하기 위해서이고, 원자가 원자로서 존재하는 목적은 원자로 존재하면서 분자를 형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분자는 분자로서 존재하지만 그 분자들이 모여서 식물을 형성하고, 식물은 동물의 환경이 되고 먹이가 됩니다. 그 다음에 동물과
모든 환경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인간은 피조만물 전체의 요소가 총합된 실체상(實體相)입니다. 따라서 인간 하나가 완성되면
소립자에서부터 원자·분자·식물·동물에 이르기까지 피조세계 전체가 완성되고, 하나님도 완성됩니다. 인간이 완성되지 못하면 그 전체가 완성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힘의 본체이기 때문에 그 힘은 소립자를 비롯하여 원자·분자·식물·동물·인간에게까지 순환하면서 수수작용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개인은 개인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가정을 위해서 존재하고, 가정은 가정을 위해서 존재하는 동시에 아들딸을 낳아 번식하면서 그
씨족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씨족은 씨족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민족을 형성하고, 민족은 민족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사라지면 민족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민족의 울타리가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국가로서 존재하면서
모여서 세계를 이룹니다. 한 국가가 경제위기에 처하면 세계의 여러 국가가 고통을 겪습니다. 세계는 또 천주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인류가 존재하는 목적은 세계 인류로 존재하면서 천주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천주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가정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안에 거하시며, 부부가 가정을 이루면 가정에도 거하시게 됩니다.
씨족·민족·국가·세계·천주의 중심도 하나님입니다. 모든 존재세계는 한 분의 하나님을 닮아서 실체로 전개된 세계이기 때문에 그들은 연체(聯體)를
이루고 있습니다. 모두가 유기체(有機體)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눈은 상대를 보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대상이 없고 눈만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 보이는 대상도 눈이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모두
연체적 관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존재를 유기체라고 합니다.
인체를 보면 60조 개에 달하는 세포가 있지만 그 세포가 전부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 하나를 핀으로 찌르면 그 손가락만 아픈 것이 아니라 전신에서 고통을 느낍니다. 전부 연체적 관계인
유기체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더 확대해 보면 천주도 그런 입장입니다. 그래서 인간 한 사람의 행동에 따라 전체가 같이 움직입니다.
지구상의 인류가 개체의 세포조직과 같다면, 그 하나의 세포조직이 고통을 당하면 전신의 고통이 되듯이 지구상의 한 사람이 잘못되어 고통을 당하면
천주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가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입니다. 모든 존재는 이중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반드시 전체목적인 공적인
목적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인간 생활의 제1원칙은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고, 타락으로 생긴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공적인 생활입니다.
공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되기 쉽습니다. 공금을
주고 관리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여렵게 벌어서 돈을 모았다면 그 돈을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금은 자기가
벌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쓰기 쉽습니다.
재벌 2세들은 대개 자기 부모가 어렵게 증식해 놓은 재산을 방탕하게 함부로 씁니다. 자기가 직접
돈을 버는 어려움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모은 돈을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방탕하고 잘못되면 가는 길이 비뚤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에게 물질적인 것을 상속해 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이 바르게 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3) 4대심정권과
3대왕권 208
4대심정권(四大心情圈)과 3대왕권(三大王權)은 본래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심정의 속성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심정은 본성상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그 안에는 자녀의 심정·형제의 심정·부부의 심정·부모의 심정이 들어 있습니다. 심정은
참사랑의 뿌리이고 인격의 핵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가장 높은 산꼭대기이든 가장 낮은 골짜기이든 간에 직단거리로 통합니다. 심정의 세계는
지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권력이나 돈으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심정과 심정을 뿌리로 하는 참사랑만이 그 세계를 직단거리로 오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대상을 통해서 기뻐하고 싶은 것인데 그 심정은 직단거리를 통합니다. 그 심정이 통하는 자리가 자녀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로 아담과 해와를 창조했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선 것입니다.
아담은 절대성의
본체되시는 아버지를 닮은 실체의 생식기, 볼록이를 가지고 태어났고, 해와는 어머니 안에 있는 절대성 난자를 지닌 생식기, 오목이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 안에 그 요소가 있습니다. 양성이란 말은 양적인 생식기를 뜻하고, 음성은 음적인 생식기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직단거리를 통해서 아담과 해와를 창조했습니다. 무형의 본양성이 아담이라는 실체로 나타나고, 본음성이 해와를 통해 실체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양성이 직단으로 통할 수 있는 곳은 한 점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아담입니다. 또 하나님 안에 있는 음성이
직단으로 통할 수 있는 곳은 한 점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해와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각각 본양성 또는 본음성이 통할 수 있는 직단거리에
있지만, 독자적으로는 번식이 불가능합니다. 각자는 한 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공간성이 없기 때문에 횡적인 범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해와 두 사람이 하나되어 횡적인 세계를 창조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실체를 지니고 완성한 다음 실체를 지니고 사랑해서 아들딸을 낳아야만
횡적으로 번식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어 놓고 완성한 남성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해와를 지어놓고 완성한 여성이
되기를 소망하고 기다렸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종적으로 지음 받았지만, 그들이 종적인 관계만 가지고 한꺼번에 완성하지 못합니다. 횡적인 번식을
통해 발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아담과 해와가 완성한 다음 부부를 이루어 자녀를 낳았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는 자녀의 심정권이
설정되고, 결혼하기 전 당사자끼리는 형제자매의 심정권이 설정됩니다. 또 그들이 부부를 이루면 부부의 심정권이 형성되고, 그 자녀에 대해서는
부모의 심정권이 설정됩니다. 그것이 4대심정권(四大心情圈)입니다. 4대심정권은 번식과 성장과 발전의 기반입니다.
4대심정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처음부터 완성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성장의 단계를 거칩니다. 하나님도 4대심정권을 통해 성장합니다.
하나님은 중심된 핵의 자리에서 종적으로 성장한 참아버지이시지만, 종적인 아버지도 자녀의 심정·형제의 심정·부부의 심정·부모의 심정을 거쳐
성숙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자리에 계셔서 당신이 생각한 대로 창조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왔는데, 하나님께도 성장 과정이
있었습니다. 중심에 핵을 가진 자리에서 종적으로 성장하여 아버지가 되고 참된 부모의 자리에 나갔습니다.
본성상·본형상을 지닌 동시에 그
속성으로 본양성과 본음성이라는 참아버지의 절대성 생식기와 참어머니의 절대성 생식기를 지니신 본체가 바로 참부모이신 하나님입니다. 그 모습을
전개한 실체가 있어야 참사랑이 직단거리를 통합니다. 하나님이 그 실체의 자리에 심은 것이 아담·해와입니다. 아담·해와는 자녀의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하면 자녀의 심정권에서 참된 자녀의 사랑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커가면서 형제애를 느낍니다. 즉
형제의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자라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지으신 분이요,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 본질이 하나님의 심정 속에 있던 아담·해와의 자녀의 심정입니다. 그들은 이어서 형제의 심정을 느끼게 되고, 그 다음에 성장하여 부부의 심정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이고, 그것이 인간에게 가장 귀한 목적이고 삶의 가치입니다. 창조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시던 심정의 대도(大道)를 아담과 해와도 걸어가야 합니다. 인간이 심정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심정적으로 닮은 실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장기간에 아담과 해와가 해야 할 책임분담입니다.
자녀의 마음에는 부모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심정적인 분야의 중심이 되고, 자녀들도 부모의 가르침을 본받아서 부모와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자녀의 과정, 형제의 과정을 거칠 때 의심되고
모르는 내용이 있더라도 그것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못 가르쳐줍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은 원리를 세워
창조했습니다. 아담·해와는 인간책임분담에 의해 성장기간 동안 원리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간접주관권(間接主管圈)입니다.
간접주관권을 거쳐 4대심정권을 갖추고 하나님의 신성과 인격을 갖춘 자리에 나아갔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아담·해와에게 생식기의 주인이 엇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너희가 지닌 생식기는 상대가 주인인데, 종적인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다.’ 하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결혼이 벌어집니다. 그 결혼이 바로 하나님의 결혼입니다. 그 첫날밤 첫사랑은 하나님의 첫사랑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아들딸을 낳으면 그
아들딸은 아담·해와의 아들딸이면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욕망의 본성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 교재가 삼라만상, 만물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어릴 때는 성에 대해 몰랐습니다. 봄이 되어 토끼들이
나와서 암놈과 수놈이 교미를 해도 관심이 없습니다. 겨울에 사슴들이 뛰어다니다가 봄이 되면 암놈과 수놈이 사랑을 합니다. 어릴 때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지만, 사춘기가 다가오면 자기도 모르게 호기심이 생기고 몸속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느낌이 온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토끼나 사슴들이 사랑을 하더니 암놈의 배가 조금씩 불러오은 것을 봅니다. 조금 있으니까 어미로부터
새끼가 나옵니다. 어미는 그 새끼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혀로 핥아 주고 음식을 갖다 먹이고 적이 나타나면 생명을 걸고 자식들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해와는 그것을 보면서 암놈과 수놈이 사랑하면 새끼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고,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기른다는 사실을 알고 배웁니다. 그래서 부부에 대한 심정을 느끼고, 부모의 심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연만물은 사랑의 교과서요,
박물관입니다. 오늘날처럼 학·박사 과정을 통해서 아담·해와가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으로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찾아서 이루고, 스스로 절대성의 가치를 찾아서 완성하는 것입니다.
남자에게 천주를 다
주는 것보다도 큰 최고의 축복은 여자를 주는 것입니다. 여자에게는 천주를 다주는 것보다도 남자를 주는 것이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에게는 여자인 해와를 주고, 해와에게는 남자인 아담을 주는 것이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축복은 얼굴 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의
진정한 가치는 생식기의 주인을 허락하는 데 있습니다. 축복을 통해 온전하신 하나님의 절대성 생식기가 그 실체로 완성된 아담과 해와의 체를 쓰게
됩니다. 무형의 아버지의 절대성 생식기가 아담의 생식기와 일체가 되고, 어머니의 절대성 생식기가 해와의 생식기와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무형의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횡적인 주인을 허락하고 ‘내가 너희 몸속에 들어가 종적인 주인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4대심정권 완성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면 동시에 자기의 자녀도 완성하고,
자녀가 완성하면 부모도 완성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해와의 완성으로 인해 하나님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때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 속에 있는
4대심정권을 완성하게 됩니다.
4대심정권은 원래 하나님 심정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속의 4대심정권이 실체를 통해서 느끼고 체휼하고
완성하게 되는데, 실체가 없을 때에는 하나님 속에 있는 4대심정권을 그냥 심정이라고 합니다. 심정의 표현이 창조입니다. 그 창조의 결과물이
아버지 속에 있는 심정권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면 하나님의 4대심정권을 완성한 실체가 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에게는 실체가 되지만 자기의 실체(=自己展開體)가 없습니다. 아담에게는 대상인 해와밖에 없고, 해와에게는 아담밖에 없습니다. 대상만
가지고는 4대심정권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성장기를 거쳐서 4대심정권을 완성한 자녀가 될 때 하나님이 부모의 심정을
완성하는 것처럼 아담과 해와도 그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해와도 부부를 이루어 아들딸을 낳아야 합니다.
아담과 해와는 아들딸이
없어도 하나님에게는 부모의 심정을 완성시켜 드릴 수 있지만, 자기들의 부모의 심정은 완성하지 못합니다. 자체 속에 있는 부모의 심정이라는 요소가
아들딸이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도 하나님의 축복결혼을 통해서 아들딸을 낳아야 합니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을 모신 실체로 완성하면 하나님이 완성하는 동시에 아담·해와도 책임분담권에서 해방됩니다. 거기에서 참부모의 자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부모이시지만 마음의 하나님, 몸의 하나님, 또는 참아버지의 하나님, 참어머니의 하나님이신 무형의 본체이십니다.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마음의 하나님과 몸의 하나님이 갈라졌습니다. 그것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할 아담·해와의 마음과 몸이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완성한 아담·해와가 하나님을 완성하고 해방시킨다는 것은 곧 마음의 하나님, 몸의 하나님을 통일시켜 참부모로 만들어 드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 하나님, 무형의 참부모입니다. 그런데 그 참부모는 실체적으로 모시는 아들딸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담과 해와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면 실체의 참부모가 됩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 아담·해와는 동시에 책임분담권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참부모는 영원히 한분밖에 없습니다. 참부모는 최초로 책임분담권에서 해방되어 완성한 분이 얻는 영광스러운 칭호입니다. 그것은
아담·해와가 완성하고 얻어야 할 이름입니다.
아담·해와는 완성하면 참부모가 되고, 실체의 하나님이 되고, 인간의 조상이 됩니다. 그러나
아담·해와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참부모의 칭호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 혈통을 바꾸는 분이 참부모의 호칭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어느 누구도 혈통을 바꿀 수 없었지만, 참부모만은 혈통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해방할 수 있는 분은
참부모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참부모의 특권입니다. 그 특권을 만민에게 나누어주고 싶으신 것이 참부모입니다. 참부모는 하나님을 완성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완성시키고, 무형으로 계신 하나님의 실체가 되어 하나님의 혈통을 번식할 수 있는 분입니다.
4대심정권을 완성하면 하나님의
혈통을 중심으로 3대왕권(三大王權)이 이루어집니다. 4대심정권을 혈통적 직계로 보면, 하나님은 조부모이면서 과거에 해당하고, 존재세계
전체(=天宙)를 대표합니다.
완성한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부부는 부모이면서 현재에 해당하고 인류를 대표합니다. 또 하나님과 부자관계를
이룬 아담·해와가 자녀를 번식하면 그 자녀는 미래를 대표하는 미래의 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혈통으로 이어지는
3대왕권입니다.
3대왕권은 모든 가정을 대표하고 존재세계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왕권(王權)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3대왕권을 중심으로
황족권(皇族圈)이 이루어집니다. 4대심정권을 완성한 사람은 황족권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 1
결혼은 왜
하는가? 216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이루기 위한 기본 단위가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남성인 아담과 한 여성인 해와를
창조하신 것도 바로 결혼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4대심정권과 3대왕권을 중시하는 것도 결국 결혼을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통해 하나님의 이상이 완성됩니다. 끝날이 될수록 사람들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을 즐기고, 결혼하더라도 ‘싫으면 헤어진다.’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남자와 여자는 태어나면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지성인도 많고 학·박사들도 많은데 지식수준이 높고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시집·장가를 안 가려고 합니다. 또 자기의 생활이 안정된 사람일수록 결혼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욕망 중의 하나인 욕정은 누구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정도를 벗어나 그 욕정을 충족하려니까 바람을 피우고 남을 함부로
대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지도층에서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사람들이 그 지도자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지도자가 자신의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타인에게 잘못을 고치라고 한다면 그 말을 듣고 잘못을 고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도자가
성범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대성(絶對性) 교육을 하자고 아무리 주중해도 지도자 자신이 가치관을 바로 세우지 않는 한 그런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왜 결혼해야 하느냐.’하는 문제도 ‘원리본체론’에서 다루게 된 것입니다.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완전하기 위해서 결혼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마태목음 5장 48절에
기록된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반쪽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분신입니다. 남자가 하나님의 오른쪽이라면,
여자는 하나님의 왼쪽입니다. 각 반쪽이 온전하게 하나되기 위해서는 결혼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완전하기 위해서 하는데, 완전하려면
온전한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온전하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닮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점령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심정과 참사랑을 동기로 하여 인간을 지었기 때문에 사람도 사랑 때문에 배우자를 만나고 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닮으려니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심정을 뿌리로 한 참사랑을 점령해야 합니다. 참사랑을 점령한다는 말은 자신이
사랑을 완성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자기완성입니다. 그러니까 사랑 완성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식기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상대자(相對者)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통해서 체휼하고 느끼고 완성됩니다. 사랑은 혼자서는 느끼고 체휼할 수 없고 완성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식기를 본인이 아닌 상대에게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완성시키고 사랑의 해방권(解放圈) 완성을 위해서 결혼합니다.
완성한 남자와 여자는 결혼으로 하나님을 완성시킵니다. 사랑의 본체되시는 하나님에게 사랑의 해방권을 완성시켜 드리는 것이 결혼입니다. 축복받은
가정들이 하나님을 완성시켰느냐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해방권을 완성해 드렸느냐?’ 하고 점검해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생활의 과정이요, 목적을 향한 올바른 길입니다.
하나님을 완성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의 해방권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면 사랑의 완성자가 됩니다. 그것이 자기완성입니다. 아담과 해와의 결혼은 하나님의 결혼이고, 하나님이 실체로 현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무형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누구도 볼 수가 없습니다.
아담·해와가 결혼한 첫날밤의 첫사랑은 하나님의 첫사랑이고, 그
순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한 점에서 만나는 일치점이 바로
생식기입니다.
종적인 절대적 참사랑과 횡적인 절대적 참사랑이 서로 교차할 수 있는 90각도의 한 지점이 하나님과 아담과 해와,
삼자(三者)가 만나는 자리로서 그곳이 바로 생식기입니다. 그래서 첫날밤 첫사랑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엄청난 사실을
모르면서도 첫날밤을 대단히 귀하게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살다가 헤어지면 하나님을 이혼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이혼이라는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원래 하나님에게는 그런 요소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라면 생각할 수조차 없는 말이 이혼입니다.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 길을 가게 만듭니다.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순수한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지켜갈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부부는 하나님을 완성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해방시켜 주는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을 번식하기 위해서 결혼합니다. 하나님이
지니고 계신 영원한 절대성 정자의 씨를 심어서 하나님의 아들딸을 지구상과 천상에 차고 넘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과
참생명과 참혈통의 번식을 위해서 결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상대성(相對性=상대가 되는
생식기)을 지닌 여자를 소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아버님은 이 땅에서 아담이 이루지 못한 개성완성을 종결한 다음 해와를 찾은 것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여성은 해와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담의 상대와 같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의 여성 전체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찾아
세우신 분이 참어머님입니다. 참어머님이 선택되면 나머지 여성들은 참아버님의 누이동생입니다. 그런 가치관을 세워 하나님이 소망하는 이상세계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간 창조목적이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인간을 하나님의 몸으로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실체를
지니기 위해서 인간에게 몸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대상으로 지었습니다. 부모에게 사랑의 대상은 자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실체를 지니고 사랑하겠다는 말입니다. 본체가 되는 참아버지의 절대성 정자와 참어머니의 절대성 난자를 실체로 지닌 아담과
해와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절대성이 완숙하면 그들을 통해 실체로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의 실체적 사랑으로 태어난 자녀는 곧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실체 자녀를 번식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가치는 대단히 귀하고 소중합니다. 그 원칙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토록 지구상과 천상세계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받은 1세가 세운 전통을 2세, 3세에게 보여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참부모님의 말씀에 따르면 축복가정은 꼭 남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전통을 남겨야 합니다. 그 전통은 정통(正統)에 입각한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전통을 세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세워 놓은 것이 정통입니다. 그 정통을 전통으로 남기고 후손에게 전수해야 합니다. 교육도 그것을 위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교육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살도록 본향에 대해 교육하고 그것을 전통으로 남겨
놓는 것이 통일교회의 이상입니다.
거기에 합당한 교육이 절대성 교육입니다. 전통은 절대성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이상 귀한 것이 없습니다.
통일교회의 교육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근본 핵심은 절대성입니다. 전통도 절대성의 정통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인류에게 영원토록 남겨 놓는
것입니다.
참부모님도 그 전통을 세우기 위해 수고하시는 것입니다. 그 전통을 가정에서 종족으로 상속하고, 인류에게 그 길을 개척해 주어야
할 사명이 축복가정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축복가정을 종족적 메시아라고합니다. 영원한 혈통과 절대성을 지키기 위해서 축복해주고 성주식(聖酒式)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훈독해서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원리적 결혼관 220
원리적
결혼관이라는 것은 상대를 위한 결혼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위하여 생기고, 위하여 태어나고, 위하여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혼도
상대를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 다음에도 위하여 살면서 서로 상대를 완성시킵니다.
결국 위하는 세계로 가는 것이 인생길입니다.
위함을 통하여 완성된 사람들이 참사랑을 중심하고 위하여 사는 세계가 이상세계요,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기본단위는 가정입니다.
참고
2
참부모와 성약시대 221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참부모와 성약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아담과 해와를 지으신 목적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아버지와 참된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담·해와의 소망 중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참부모가 되는 것을 창조이상으로 세워놓고 아담·해와를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도 참부모가 되는 것이고, 아담·해와의 소망도 참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참부모가 되면 하나님도 아담·해와의 실체를 지닌 참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망과 아담·해와의
소망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 221
참부모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상인 동시에 아담·해와의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상을 이룰 수 있도록 아담·해와에게 3대축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고 만물을
주관하라.’는 말씀이 바로 3대축복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성완성·가정완성·주관성완성이 3대축복입니다.
3대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해와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약속은 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지켜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먼저 약속하셨더라면 아담·해와가 그 조건을 지켜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과 해와의
책임분담(責任分擔)입니다.
아담·해와가 참부모가 되는 이상은 책임분담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아담과 해와는 책임분담을 통해서 3대축복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그 책임분담을 완성하면 참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해와가 참부모가 된다는 말은 말씀으로 약속했던 3대축복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아담·해와가 참부모가 되면 무형의 참부모이신 하나님이 아담·해와의 실체를 입게 됩니다. 아담과 해와가 일체가 되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3대축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입니다. 그것은 말씀으로만 주어진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담·해와에게 3대축복이라는 언약을 주시면서 조건으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창세기 2장 17절)는 계명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것이
아담·해와의 책임분담입니다. 아담·해와가 3대축복을 이루려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합니다.
아담·해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성장하면
참부모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소망인 참부모의 이상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약속(3대축복)을 이루는 때가 바로
성약시대(成約時代)입니다. 성약(成約)이라는 말은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이상을 이루기 위해 에덴동산에서 아담·해와에게
3대축복을 주셨는데 그 축복을 이루는 것이 성약입니다.
구약
아담·해와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3대축복)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성약의
때를 맞지 못하고 하나님은 새로운 약속의 말씀(=구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舊約時代)가 출발한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유대교(Judea敎)를 세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도록 한 시대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물헌제(祭物獻祭)에서 비둘기를 쪼갰으면
아담·노아·아브라함 3대를 거쳐 가정을 중심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완성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아서 그 후손이 애급에 가서
400년 간 고역을 치러야 했고,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까지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애급고역 400년을 거친
후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애급에서 나오게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세워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한
것입니다.
신약 223
구약을 이루기 위해 오신 메시아가 예수입니다. 아담 이후 2000년 만에 구약
역사를 종결하고 하나님의 3대축복을 완성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구약시대는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율법을 중심으로 율법대로
사는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율법에 따라 살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됩니다. 율법에는 안식일을 절대적으로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안식일에 전도를 다니고 시장하면 밀 이삭을 꺾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율법 위반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신 분이지 율법에 매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섭리의 역사를 종결짓고 새로운 역사를 출발하기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인들에게는 그 말씀이 귀에 거슬렸고, 그로 인해
예수님을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한복음 14장
9절)고 하신 말씀이나,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장 3절)고 하신 말씀도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말씀들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자로
보았습니다. 율법에 없는 얘기를 하고 다닌다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성을 모독했다며 예수님을 정죄하고 결국에는 민족의 반역자로
몰아서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구약의 역사가 종결되고 하나님이 아담·해와에게 주신 본연의 약속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써 본연의 약속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다시 세운 약속이
신약(新約)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는데 유대인들이 믿고 모시지 못함으로써 결국에 기독교를 중심한 신약시대(新約時代)가 출발한 것입니다.
신약은 약속을 한 번 더 했다는 뜻입니다.
신약의 핵심은 예수님이 ‘다시 오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바로 재림주(再臨主)의
강림입니다. 많은 종교가 끝날에는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기 종교의 창시자가 다시 온다는 재림사상(再臨思想)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오시고, 유교는 공자가, 불교는 석가모니가, 유대교는 자기들이 믿고 신봉하는 교주가 다시 와서 난세를 수습하고 이상세계를 이룬다고
합니다.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를 수습하고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하실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분이 재림주라는 이름을 가진 메시아입니다. 재림주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2000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다시 육신을 지니고 살아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하는 것은 아담의 육신을 지닌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이 이루지 못하고 남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던 후아담입니다. 마찬가지로 재림주님의
역할도 아담과 예수님이 남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재림주님은 구세주(救世主)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사탄이 이루어 놓은 악의 세계를 수습하기 때문에 구세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이 가정인데 사탄은 그 가정을 사탄을 중심한 가정으로
만들어 악의 세계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세주는 그 가정을 수습하고 그 가정을 구원해야 합니다.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사탄의
핏줄을 이어받은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가정을 구원하려면 축복을 통해서 새로운 가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자면 구세주는 참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구세주가 참된 부모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이 이루어놓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는 대표자, 왕이 있는데 그 분은 그 주권을 중심한
모든 체제를 수습하는 왕 중의 왕으로 오십니다. 그 분은 왕 중의 왕, 실체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탕감복귀
225
참부모님은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수난의 길을 거치십니다. 그것이 통일교회 40년의 역사입니다.
통일교회는 1954년
5월1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라는 이름을 갖고 출범했습니다. 그것은 그저 한 교회를 만들고, 어느 교파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많은 종교를 세워서 선을 추구해 오셨는데, 그 중에서 중심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모든 종교가 신을
믿고 또 그 창시자를 믿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하는 귀한 가치를 설정하고 세우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인간의 불신으로 이 땅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다시 오리라.’하는 말을 남기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신부가 되어 신랑으로 오시는 그 분을 모셔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그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기독교가 책임을 다했다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간판도 필요 없고, 기독교인들이 붙여놓은 통일교회라는 약칭도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책임을 다했다면 기독교도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이미 종교가 필요 없는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참부모님도 종교가 필요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을 중심으로 하나되면 모두가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나의 부모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하는 귀한 가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어오던 관념적인 생각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믿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통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면서 반대하는 것도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믿고 있는 이념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몰라서 그렇지 참부모님이 세우신 이 원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출발했지만, 참부모님은 예수님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중심하고 예수님도 못 이루신 하나님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원리본체로부터 출발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세계의 기독교, 세계적 기독교를 통일하고 그 기대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그 ‘세계기독교’라는 말을 빼라고 합니다. 그 말만 없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교·유교와 같은 기도교와 상관없는 종단이 되어서 자기의 교권을 주장하는 교파를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참부모님은 그 말을 뺄 수가 없습니다. 참부모님은 메시아로 오셨기 때문에 세계기독교라는 말을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 섭리의 중심사상을 가지고
오셨으니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명칭을 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2000년의 터전 위에서 비로소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출발하게 됩니다.
통일교회는 40년 기간 동안에 탕감복귀섭리역사(蕩減復歸攝理歷史)를 거치는데, 그것은 신약시대를 탕감복귀하고, 구약시대를
탕감복귀하고, 아담·해와가 타락한 이후부터 구약시대 이전의 전체 역사도 탕감복귀하는 기간입니다. 타락과 불신의 역사를 모두 탕감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역사입니다.
아담부터 2000년을 지나 아브라함가정에서 3대째인 야곱으로부터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2000년 동안 준비한 터전 위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역사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으로서 아담의 타락 이후 4000년의
역사를 종결짓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참부모님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 2000년 동안의 역사, 더 나아가서는 아브라함가정에서 메시아의 기대를
성공한 때부터 4000년 동안의 타락역사를 탕감하고 복귀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타락 이후 구약·신약시대를 통한 탕감복귀역사를 마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부모님 당대에 탕감복귀역사를 청산하려면 구약시대 4000년을 40년으로 탕감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기간을 더 단축하여 4년
동안에 이루면 좋겠지만, 4년은 너무나 짧은 기간입니다. 그렇다고 400년 동안에 이룰 수도 없습니다. 참부모님이 400년 동안 이 땅에 계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완성·완결 227
참부모님이 치를 수 있는 탕감기간은 최소한 40년입니다. 그리고 신약
2000년을 탕감하는 최소한의 기간이 20년입니다. 그래서 6000년 전체를 탕감하는 기간이 참부모님의 생애 60년이었습니다. 그 기간을 거쳐
참부모님은 비로소 성약시대(成約時代)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약시대가 되었다는 말은 통일교회를 중심해서 40년 탕감복귀섭리역사를 마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탕감복귀라는 말은 대가를 치르고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탕감에는 합당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탕감조건을 세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1954년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창설되었고,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95년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世界平和統一家庭聯合)’이 출범했습니다. 그때 참부모님은 성약시대를 선포했습니다.
아담에게 주신 언약(言約)이
이루어지는 때가 성약시대입니다. 그것은 참부모가 현현했다는 말입니다. 참부모가 현현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소망인 창조이상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이루지 못한 창조의 이상을 참부모가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을 중심한 새 역사가
출발합니다.
1954년부터 1995년까지는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즉 교회를 중심한 섭리를 한 때입니다. 교회는 개인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 구원을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개인을 구원하고 나서 가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을 찾는 활동에서 가정을
찾는 활동으로 넘어갈 때는 교회를 중심한 섭리는 끝이 납니다. 섭리역사가 교회를 중심으로 한 탕감노정을 거쳐 가정을 중심한 탕감노정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 때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간판을 내리고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라는 간판을 달게 됩니다. 축복가정들이 자기 가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연합해서 하나님의 창조이상인 세계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노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메시아는 이 땅에 하나님의 참사랑의 씨를 가지고
오시고, 창조 당시 본연의 말씀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 말씀이 원리입니다. 그 원리를 통해서 ‘원리해설(原理解說)’이 나오고
‘원리강론(原理講論)’이 나오고 ‘이 ’원리본체론(原理本體論)‘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종교가 추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바로 가르쳐 주는
것인데, ’원리본체론‘의 핵심도 하나님을 바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참부모님은 하나님을 바로 가르쳐 주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축복의 길을 여는 일을 해오셨습니다. 타락세계의 인간들에게 바로 축복해줄 수가 없기 때문에 원리 말씀을 가지고 제자들을 기르셨습니다. 메시아와
같은 생각, 메시아와 같은 사상, 메시아와 같은 이념을 가지고 메시아가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고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할 수 있는,
동고동락(同苦同樂)할 수 있는 제자들로 훈련시킨 것입니다. 제자들이 축복을 해주는 것입니다.
축복은 참부모에 의해 타락의 핏줄을 바꾸고
하나님의 혈통을 상속하는 것입니다.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본체가 되시고 절대성의 본체가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실체로 오시는 참부모님이 비로소
그 이상을 실현하고 상속해 주는 일이 축복입니다. 그로 인해 참부모는 천지참부모가 됩니다. 하늘 참부모와 땅의 참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평화통일가정당(天宙平和統一家庭堂)’을 세웠습니다. 이 가정당의 당 자는 오늘날 정치하는 집단을 의미하는 무리
당(黨)이 아니고 집 당(堂)입니다. 집을 다스리고 집을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천주평화통일가정당’입니다. 가정은 천주의 축소체요, 천주의 핵입니다. 그 가정의 구성원이 모두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 성자(聖子)의 도리를
완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천일국시대(天一國時代)가 도래합니다.
해방·석방 229
천일국시대가 도래하면
가정연합시대의 모든 섭리를 완성·완결짓게 됩니다. 원래는 메시아 되시는 참부모가 오셔서 탕감을 치르지 않아도 됩니다. 탕감의 길은 그 분이
가셔야 할 길이 아닙니다. 참부모는 오시자마자 영광의 왕관을 쓰고 만민을 치리하고 본연의 세계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주인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2000년 동안 준비했던 기독교가 참부모를 불신했습니다. 기독교는 구약시대의 열매인데 거기에 사탄이 침범했습니다. 그것을
전부 탕감지어 복귀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대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원래 아담·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아담·해와가 직접 성약시대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아담·해와는 그때 벌써 참부모가 되고 창조이상을 에덴동산에서 완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그 약속이
지금까지 미루어졌다가 성약시대가 되면서 참부모가 다 탕감하고 가정을 중심해서 완성하고 완결짓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참사랑과 원리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원리와 말씀을 가지고 사탄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교육해서 세상의 사람들을 분별해냈습니다. 그것이 전도였습니다. 그때는 개인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교회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선별해서 원리 말씀과 참사랑을 교육해서 비로소 축복가정이 세워진 것입니다.
축복가정이
세워졌다는 말은 참부모가 현현했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없이는 자녀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녀가 없으면 가정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가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은 아들딸을 축복해 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부모가 현현했다는 말은 아들딸을 가졌다는 말이고,
아들딸을 가졌다는 말은 결혼시켜 줄 수가 있다는 말이고, 결혼시켜 주었기 때문에 가정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축복가정이 세워졌으니 축복가정
왕권즉위식(祝福家庭王權卽位式)도 가능해졌습니다. 가정은 국가의 기본단위이기 때문에 드디어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일국
이상(天一國理想)을 선포한 것입니다. 천일국 이상은 천일국 시대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천일국시대는 참부모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책임분담권에서
해방(解放)하고 만 인류를 죄악세계에서 석방(釋放)하는 시대입니다. 참부모님은 온전히 해방과 석방시대를 완결짓고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한 주관주로 현현하게 됩니다. 그 시대가 천일국시대입니다.
천일국시대(天一國時代)는 천주개벽시대(天宙開闢時代)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심정의 자리로 회귀(回歸)하는 시대입니다. 지금까지 탕감복귀시대와 복귀시대를 거쳐 하나님 안에서 밤의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기 전 하나님의 심정권으로 돌아가는 회귀시대입니다. 회귀시대는 천일국 이상의 문을 여는 때로 천주개벽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2000년을 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아브라함까지 가정 중심한 섭리가 2000년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물드리는
일을 실수하여 종적으로 이어 나온 아담·노아·아브라함을 통한 섭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상징하는 제물, 노아를 상징하는
제물, 아브라함을 상징하는 제물, 이렇게 3제물(三祭物)을 승리하면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3대 전체를 승리했다고 하는 조건을 세워서
메시아를 보내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3제물을 드리면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다시 섭리의 주기에 따라 아브라함 때부터 예수님이
올 때까지 20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부터 재림주가 올 때까지 2000년입니다. 모두 6000년입니다. 그것이 성서적으로
본 하나님의 섭리역사입니다. 예수님 이후 2000년이 지나 비로소 하나님의 왕권을 수립하게 됩니다.
참부모님은 1999년도에
‘초종교초국가연합(超宗敎超國家聯合)’을 창설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종교를 통해서 섭리하신 역사를 초월하고, 사탄세계가 국가르
이루었으니 그 사탄이 이루어놓은 기반을 초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종교를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해서 본연의 창조이상을 향하는 출발점입니다.
그 터전 위에서 2001년 1월 13일, 하나님 왕권 즉위식(王權卽位式)을 봉헌합니다. 이로써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타락으로 창조이상을 잃어버리고
탄식하시는 하나님께 비로소 창조주의 위치를 찾아드리고 왕권을 찾아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2003년 2월 6일, 참부모님 성탄일에
참부모님이 두 가지 의미 있는 행사를 치르셨습니다. 그 날은 참어머님의 회갑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아침 7시에 천주평화(天宙平和)의 왕(王)
천지(天地) 참부모(참父母) 천일국(天一國) 개문(開門) 축복성혼식(祝福聖婚式)을 하셨습니다. 하늘 부모와 땅 부모가 실체를 지니시고 참부모가
되셔서 천일국의 문을 여는 축복성혼식(祝福聖婚式)을 하셨습니다. 하늘 부모와 땅 부모가 실체를 지니시고 참부모가 되셔서 천일국의 문을 여는
축복성혼식(祝福聖婚式)입니다. 참부모님이 천일국의 문입니다. 부모님이 문을 열지 않으면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그 문은 좁은문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19장 24절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부모님이 천일국의 문인데, 거기에는 사탄이 일체 끼어들 수가 없고 공기도 들어갈 수 없도록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시간
후인 아침 9시에 천주평화(天宙平和)의 왕(王) 천지(天地) 참부모(참父母) 평화통일(平和統一) 축복가정왕(祝福家庭王) 즉위식(卽位式)을
치르셨습니다. 비로소 가정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셨던 하나님을 중심한 왕권이 세워진 것입니다. 비로소 가정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셨던 하나님을
중심한 왕권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 두 의식을 치르고 나서 참부모님은 비로소 축복가정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두 분이 가정에 있으면 가정의
왕이고, 종족에 있으면 종족의 왕입니다. 타락의 역사를 청산짓고 하나님의 왕권을 세우셨으니, 참부모님 가정을 중심해서 비로소 천주평화의 왕 천지
참부모 평화통일 축복가정 왕 즉위식을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가정왕권(家庭王權)이 서게 된 것입니다.
가정왕권을 세운 터전 위에서
2004년 8월 20일, 국가왕권(國家王權) 즉위식(卽位式)을 한국 국회에서 치렀습니다. 국가왕권 즉위식을 하려면 종족왕권이 있어야 합니다.
이미 참부모님은 “국가왕권을 세우기 전에 종족왕권을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이루고 나서 민족을 대표해서 국가적 축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성씨들이 자기 종족을 대표해서 왕권을 복귀해 드림으로써 민족이 바로 섰다고 하는 조건이 되어 민족을 중심한 국가왕권을
수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맨 먼저 강릉 유씨의 대표들이 종족왕권(宗族王權)을 세우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국가왕권을 세우기에 앞서
종족왕권을 수립했다는 조건을 세운 것입니다. 그것이 2004년 8월 18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3일 만에 국회에서 국가왕권 즉위식을
치렀습니다.
그 후 2004년 12월에 미국 워싱턴에서 세계적 기준으로 세계왕권(世界王權)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세계적 수준에서 왕권을
수립하게 된 것입니다.
그 터전 위에서 2006년 6월 13일, 천주평화(天宙平和)의 왕(王) 천지(天地) 참부모(참父母) 천정궁(天正宮)
입궁(入宮) 대관식(戴冠式)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왕권을 세웠으니 실제 왕궁을 준비하고 그 왕궁에 하나님을 모시는 의식을 봉행하게 된
것입니다.
2008년 12월, 참부모님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점심을 잡수시다가 간부들을 불러 모으시고 만왕(萬王)의 왕(王) 하나님
해방권(解放權) 대관식(戴冠式)을 봉헌할 것을 결의하시고, 2009년 1월 31일에 행사를 한국에서 치르겠다고 하셨습니다. 2009년 1월
31일은 참부모님 성탄일입니다.
그때까지는 하나님이 사탄세계의 모든 왕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발표가 있고 난 다음부터는
사탄세계의 어느 왕(주권자)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참부모님은 미국 대통령의 취임일인 1월 20일보다 5일 앞당겨서 2009년 1월
15일 오전 11시부터 한국의 천정궁에서 만왕(萬王)의 왕(王) 하나님 해방권(解放權) 대관식(戴冠式)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날(2009년 1월 15일) 오후 4시에 북한에서 갑자기 김정일 위원장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선포하는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참부모님이 그 시간을
맞추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이 3대왕권(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선포했다면 하나님이 사탄세계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인간이 장성기 완성급(長成期完成級)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2대까지는 인정하지만 3대 왕권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참부모님께서는 원래 예정대로 성탄일인 2009년 1월 31일 오전 5시에 천정궁에서 만왕의 왕 하나님 해방권 대관식을 다시 한 번 봉행하시고,
8시에 비행기를 타고 미국 뉴욕으로 가셔서 2009년 1월 31일 오후 4시에 만왕의 왕 하나님 해방권 대관식을 한국에서 하신 것처럼 똑같이
봉행하셨습니다. 한국에서 31일에 행사하시고 미국에서도 31일에 행사를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창세기
1장 5절)고 한 말씀처럼 이루어진 것이다.
만왕의 왕 하나님 해방권 대관식을 봉행한 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하나님의 조국과 고향은
대한민국’이라는 말씀을 선포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천지인(天地人) 참부모(참父母) 정착(定着) 실체(實體) 말씀
선포(宣布)’도 라스베이거스에서 결정하시고 먼저 한국에서 개최하신 다음에 제2 이스라엘인 미국을 거쳐 제1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순으로 행사를
진행하셨습니다. 과거에는 제1 이스라엘에서 제2 이스라엘로, 제2 이스라엘에서 제3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했지만, 이제는 제3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제2 이스라엘을 거쳐 제1 이스라엘에서 종결하게 된 것입니다.
‘천지인 참부모 정착 실체 말씀 선포대회’도 사탄세계의 실체상이
결집되어 있는 라스베이거스에서 결정하고 출발한 것입니다. 2011년 4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의 조국과 고향인 대한민국에서 그 말씀을
선포하시고, 기독교 문화권이 출발한 유럽과 구라파에 가서 그 모든 대회를 마치고 사탄세계에 승리의 깃발을 꽂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가셨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섭리권이 참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드러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지인 참부모가 정착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천지인의 인(人)은 하늘 부모와 땅의 부모가 사람의 몸을 지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사람인(人)자가 들어가지 않은 천지 참부모였는데, 이제는
사람인 자가 들어간 천지인 참부모가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실체 참부모와 무형의 참부모가 한 몸을 가지고 정착하셔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천지인 참부모 정착 실체 말씀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조국과 고향이 대한민국으로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정착을 하고 그 실체가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참부모(참父母) 양위분(兩位분) 최종(最終) 일체(一體) 완성(完成) 완결(完結) 완료(完了)’의 시대가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체(全體)·전반(全般)·전권(全權)·전능(全能)이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앞으로 참부모님이 이루셔야 할
목표입니다.
참아버님은 “참어머니가 해방될 날이 남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참어머님을 누가 해방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참아버님이
해방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해와가 잘못해서 참하나님 부모를 잃어버리고 참된 남편을 잃어버리고 참된 아들딸을 잃어버리고, 참가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참부모 양위분이 일체를 이루어 최종적으로 그 일을 완성해야 하고, 완결해야 하고, 완료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부모 양위분 최종
일체 완성 완결 완료’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전체·전반·전권·전능이 참부모님 양위분의 실체를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인류가 바라고 하나님이
소망했던 자유·평화·평등·행복의 이상세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참부모 양위분 최종 일체 완성 완결 완료’로 인해 비로소 참어머님을
해방해드리고 그 터전 위에 하나님의 결혼식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에덴동산에서 타락하지 않았으면 해와는 하나님의 신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결혼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결혼입니다. 해와는 하나님의 영원한 참사랑의 씨(精子)를 받을 수 있는 참된 어머니가 되고 여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해와가 타락으로 그런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반드시 그 한날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1960년대 참부모님의 성혼이 소생적
축복이고, 2003년의 축복성혼이 장성적 축복이라면,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성혼은 완성적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성혼해 드리는 날이
와야 하나님의 해방권이 완성됩니다. 그에 따라 인류는 하나님이 보내신 참부모님으로부터 타락의 혈통을 바꾸고 영원토록 원죄 없이 사는 새로운
섭리의 때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탕감과 축복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라는 교회를 통해서 종교권을 중심한
섭리를 탕감복귀하고, 그 터전 위에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世界平和統一家庭聯合)’을 선포함으로써 탕감의 시대를 마감하고 가정을 중심한 새 섭리가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터전 위에 ‘천주평화통일가정당(天宙平和統一家庭堂)’을 세웠습니다.
가정당의 당은 정치인이 말하는 무리
당(黨)이 아니라 집 당(堂)입니다. 속된 정치집단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주평화통일가정당’은 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육하는
집입니다. 천일국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교육하는 곳입니다.
천일국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축복가정들이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축복가정들이 종족적 메시아의 사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족적 메시아의 사명은 자기 종족의 축복을 완료하는 것입니다. 축복가정들이 종족적
메시아의 사명을 완료하면 국가 메시아와 분봉왕(分封王)으로 택함 받습니다.
국가 메시아와 분봉왕은 다시 그 국가에서 종족 축복을 완료하고
그 종족들에게 말씀을 주어 훈독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축복의 말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혈통을 복귀한 다음에 훈독함으로써 말씀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지금까지 타락한 세계에서 인간을 구원해 온 교회가 아니라 아버지 앞에 효도하는 방법을 가르치(敎)는 가정의
교회입니다. 모이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가정입니다.
가정교회는 지금까지의 개념이 아니라, 전도의 개념도 원리적으로 바로 세우고, 교회의
개념도 바꾸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전도는 세상 사람들을 자기의 종교권에 세우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전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보더라도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2000년 동안 피를 흘리면서 수많은 사람을 전도했지만, 그 중에서 천국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도 천국에 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장 43절)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낙원을 천국으로 보고 있지만, 낙원과 천국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천국으로 가려면 하나님의 핏줄을 지니고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사랑의 이상을 이루고 심정의 이상을 완성해야 합니다. 그런
가정을 단위로 하여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원죄가 없고 완성한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완성한 사람이라도 가정을 이루지 못하면 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성한 아들로 오셨고, 원죄 없는 분으로서 타락 인간을 속죄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였지만,
그 분은 가정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했습니다.
천국은 사랑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실체 인간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가정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서 아들딸을 낳아보지 못했고, 아들딸을 사랑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 전에 한
여성을 만나서 사랑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고, 형제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택함 받은 선민, 유대
민족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가지고 오셔서 이 세상에 가르쳐주고 싶었는데, 그 사랑을 해보지도
못했고,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가장 힘들게 했습니다. 천국은 사랑의 세계인데,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사랑을 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제일 힘들었다, 그 말입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셔야 했고, 그 길을 이어서
재림주이신 참부모가 오시게 되었습니다. 참부모가 오시면 축복을 통해 가정이상을 세워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부모가 역대 성인을 축복해준
것도 그 분들의 소원이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영계의 지도자들도 축복의 가치를 알고 소원하는데, 그 분들을 믿고 따르는 이 땅의 인간들은 참부모를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래서 종족을 축복하여 핏줄을 바꾸어 놓고 그 다음에 그들에게 말씀을 주어서
가정에서 말씀을 훈독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 터전 위에서 하나님의 조국광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기다리신
조국광복입니다. 하나님의 조국이 없어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예수님도 조국이 없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참부모님이 억울하고
분한 일생을 걸으신 것도 조국이 없어서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더라도 수많은 선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조국이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고 싶어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사탄이 세계의 주권, 나라의 왕권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울타리, 가정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울타리가 국가인데, 하나님은 그 국가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한(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조국입니다. 하나님의
조국이 없으면 저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조국이 실체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복음 18장 18절)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조국을 세우지 않으면 영계에서도 하나님의
조국이 실체로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참고 3
천지부모 천주안식권은 영원한 표제다 239
1997년 7월 7일
아침 7시 7분 7초에 참아버님은 ‘천지부모(天地父母)천주안식권(天宙安息圈)’을 표제로 주셨습니다.
1997년 참아버님의 연세가 77세로,
그날 그 시각은 7수가 8개 들어가는 뜻 깊은 날입니다. 인류역사상 그런 뜻 깊은 날은 딱 그날 하루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날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참부모가 오시지 않았고, 미래에는 참부모가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날을 7·8절이라고 합니다. 세계
축복가정이 참부모님이 계획하신 기준을 달성한 후 7·8절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참부모요, 인간의 마음과 같습니다.
참부모님은 실체 참부모로서 인간의 몸과 같습니다. 여기서 참부모는 참아버지와 참어머니를 말하는 것이지만, 내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참부모입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참부모인 것입니다.
무형의 참부모 본체를 닮아서 실체로 오시는 참부모님은 하나님 안에 있는 참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그 참아버님은 전체로 볼 때 참부모이십니다. 참부모는 하나님을 직접 모시고 한 아들로서 현현하셨습니다. 참부모님은 하나님의 실체,
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같고, 참부모님은 몸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참부모님은 ‘천지부모(天地父母) 통일안착(統一安着)의 날’을
선포하셨습니다. 통일안착은 생활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주신 표어가 ‘천지부모(天地父母) 천주안식권(天宙安息圈)’입니다. 여기서
‘권’자는 ‘둘레 권(圈)’을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한 점에서 시작해 범위를 넓혀간다는 의미에서 둘레 권자를 쓰신 것입니다..
그때
참아버님은 말씀을 통해 ‘전체(全體)·전반(全般)·전권(全權)·전능(全能)’이라는 하나님의 이상을 발표하시면서 “만왕의 왕 하나님 해방권
대관식을 승리한 터전 위에서 전체·전반·전권·전능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하셨습니다. 참아버님은 그 말씀을 12년 동안 혼자 생각하시면서 많은
정성을 들이셨습니다.
참부모님은 ‘천지부모(天地父母) 천주안식권(天宙安息圈)’을 선포한 지 12년 만인 2009년에 비로소 그 말씀에 대한
결론을 지었습니다.2009년 연두표어에서 ‘천지부모(天地父母) 천주(天宙) 안식권(安息權)은 절대성(絶對性) 위에서
참사랑·참생명·참혈통권(참血統權)의 승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때 안식권의 ‘권’자와 참혈통권자의 ‘권’자가 ‘둘레 권(圈)’에서
‘권세 권(權)’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절대성 위에서 천지부모 천주안식권이 세워지고, 그 터전 위에서 참사랑·참생명·참혈통권이 승리하면
하나님의 모든 뜻이 혈통을 중심하고 영원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천지부모 천주안식권은 절대성 위에서 이루어진다
240
1997년으로부터 12년 만인 2009년 초에 참아버님은 ‘천지부모 천주 안식권은 절대성 위에서 참사랑 참생명 참승리선포시대’라는
연두표어를 주셨습니다.
2009년에 절대성(絶對性)이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참아버님은 이 말을 ‘원리본체론’에 기록하고 교육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전 교재인 ‘원리해설’이나 ‘원리강론’에는 절대성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참아버지의 절대성 정자는 참사랑의 씨요,
참어머니의 절대성 난자는 참생명의 몸입니다.’ 물론 절대성 정자를 가진 참아버지는 참부모 되시는 하나님 안에 있는 참아버지이고, 절대성 난자를
가진 참어머니는 참부모 되시는 하나님 안에 있는 참어머니입니다. 그 정자와 난자가 참사랑의 씨와 참생명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 두 요소를
가지고 계신 분은 본체 되시는 하나님이지만, 그 요소를 실체로 이 땅위에 혈통권(血統權)으로 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지었습니다.
아들로 오신 참아버지와 딸로 오신 참어머니가 절대성 정자와 절대성 난자의 두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두 요소가 결합할 수
있는 곳이 자궁(子宮)입니다.
참부모의 절대성 생식기를 통해서 참사랑의 씨가 참생명의 몸을 만나서 영원히 혈통을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혈통권의 권자를 ‘둘레 권(圈)’으로 쓰지 않고 ‘권세 권(權)’을 쓴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권세는 어느 기간이면 다 끝납니다. 대통령도,
수상도 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혈통권은 영원하기 때문에 ‘권세 권’자를 쓰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타락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혈통권을 막을 자도 없습니다. 그 승리권이 2009년의 연두표어에서 선포되었습니다. 모두가 절대성 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참어머니의
난자는 참아버지의 보자기와 같고 참어머니는 참아버지의 옷과 같다 241
‘참어머니의 난자는 참아버지의
보자기와 같고, 참어머니는 참아버지의 옷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어머니의 난자는 참아버지의 정자, 참생명의 씨를 받는 보자기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참어머니는 참아버지의 옷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참아버지의 옷이지만 입지 않고 걸어놓으면 참아버지의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어머니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체의 아버지로 오셨지만 대상인 어머니, 한 여성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대상은 실체가 없었기 때문에 성신(聖神)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신은 하나님의 본체 속에 있는 참어머니의 속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타락한 세계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연의 참어머니 실체 표상이 없습니다. 참어머니의 실체 표상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참어머니는 참아버지 안에서 참아버지에 의해 참아버지를 닮은 참어머니로 재창조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터전 위에서 참아버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듯이 참아버님은 밤의 하나님이 품고 길러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참아버님이 이 땅위에 준비한 대상을 택하셔서
재창조하셔야 합니다.
그러자면 하나의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타락세계에는 참어머니의 실체가 없습니다. 참어머니의 실체 표상은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성신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아버지로 계시기 때문에 여성을 소망하셨습니다.(창조의 선유 조건). 해와를 전제하고
아담을 당신의 몸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아담을 지어 놓고 아담의 갈비뼈로 해와를 지었다.’(창세기 2장 21~22절)고
했습니다. 아담이 해와를 창조하는 요소가 된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참아버님은 원리의 본체되시는 무형의 참부모님, 즉 하나님 실체로
오셨기 때문에 참부모님으로 현현하셨지만 참아버님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남성격 주체이기 때문에 아버지라 부르지만 본체로 볼 때는
참부모인 것입니다. 참하나님은 참아버지, 참어머니의 두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원리의 본체되시는 하나님의 실체를 쓰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참부모님이기 때문에 참부모님은 실체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참아버님이 실체 참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준비된 어머님을 택하셔서 참아버님을 닮은
참어머님으로 재창조하심으로써 실체 참부모님이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로서 세울 수 있는 기준은 참아버지 안에만 있습니다.
참아버지는 원리의
본체인 참하나님 안에서 오셨기 때문에 참아버님만이 어머님을 찾으셔서 본연의 참어머님으로 재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하나님
안에서 실체를 갖추고 나타난 참아버님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참어머님은 참아버님 안에서 참아버님에 의해 참아버님을 닮은
참어머님으로 재창조되어야 합니다.
참아버님은 그 사명을 완성·완결·완료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지인(天地人) 참부모님 실체를 통해 하나님의
성혼식을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해방권과 석방권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전체·전반·전권·전능의 시대를 맞아 하나님이 천주를 직접 치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시점이 기원절입니다. 그래서 기원절은 천일국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 4
하나님 해방권 완성
245
하나님은 무형의 참부모요 마음이고, 실체 참부모는 몸입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몸입니다. 해와는
하나님의 딸이면서 신부요, 아담의 신부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면 참부모가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타락으로
완성하지 못하고 창조이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참부모의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상실한 참부모의 자격을 회복하기 위해 오신 분이
참아버님입니다. 참아버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서 사셨습니다. 임의로 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래서
‘천지참부모(天地참父母) 통일안착(統一安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오정착(正午定着)입니다.
정오정착은 그림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참부모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완전 일체입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인 것처럼 하나님이자 참부모이고 참부모이자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성서의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장
20절)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경지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듯이 하나님도 내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 자리는 아담 혼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그 자리에 갔듯이 해와도 그 자리에 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실체를 지니는 것입니다.
아담·해와가
절대성을 완성한 실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체(體)를 쓰시고, 아담·해와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聖殿)이 됩니다.
참아버님은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참아버님은 마음과 같은 자리에 있고, 참어머님은 몸과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참아버님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절대 복종하듯이 참어머님도 참아버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참아버님이 당신 마음대로 사시지 않은 것처럼
참어머님도 당신 마음대로 사시지 않고 참아버님을 닮아서 참어머님의 마음이 곧 참아버님의 마음이 되어 사셔야 합니다. 거기에서 ‘천지인 참부모
정착 실체 말씀 선포’가 실현됩니다. 그것은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의 정오정착을 말합니다.
참부모가 마음과 같다면 참부모님으로부터 축복 받은
가정은 몸과 같습니다. 그래서 축복가정은 참부모님의 마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참부모님이 마음이 되고 축복가정이 몸이 되어서 완전한 통일과
정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부모와 축복가정의 정오정착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해방권(解放權)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참부모 양위분 최종 일체 완성 완결 완료’가 이루어집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전체·전반·전권·전능의 시대가 시작되고 진정한
자유·평등·평화·통일의 태평성대가 오는 것입니다. 태평성대 위에 ‘참부모 억만세시대(億萬歲時代)’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태평성대는 종적으로
된 하나님의 이상을 한 점에서 횡적으로 전개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6. 창조본연의 가치 결정과 그 가치의 기준
246
목적은 반드시 가치를 동반합니다. 목적이 실현되는 것은 가치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것과 같습니다. 목적을 하나의 꽃이라고
한다면, 가치는 그 꽃 속에서 풍기는 향기나 그 꽃의 열매와 같습니다.
목적이 성취되지 않으면 가치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창조본연의 가치는
창조목적을 성취했을 때에만 실현되는 것입니다.
1) 가치의 정의 246
가치는 절대 혼자 결정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상대적으로
결정됩니다. 목적 자체도 혼자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상대적인 자리에서 목적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창조이상의 본체요 주체이지만,
하나님 혼자서는 창조이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혼자서는 당신이 지니신 거룩한 가치를 드러낼 수 없고 목적도 이룰 수 없습니다. 반드시
대상인 인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창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위해서 전체를 투입하고 또 투입하셨습니다. 그것은 목적이
실현되어야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가치는 절대로 혼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치가 결정되려면 주체가 욕구(慾求)하는 것을 대상이
충족(充足)해 주어야 합니다. 대상은 자기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내용과 성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창조본연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타락한 세계에서는 창조본연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가치를 추구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한 분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된 하나님의 대상이기 때문에 주체인 하나님이 어떤 이상을 추구하면 그 대상인
인간도 같은 이상을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지니신 목적이 있다면 대상인 인간도 같은 목적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대상은 주체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합니다. 가치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결정되는데, 그것은 주체가 욕구하고 대상이 충족시켜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2) 가치의 결정 247
가치의 결정은 여러 측면에서 정의(定義)할 수 있지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목적관으로 본 가치 결정입니다.
(1) 목적관으로 본 가치 결정
예들 들어 한 자루의 칼이 있습니다. 그 칼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집니다. 만일 강도가 칼을 들었다면 살인하는 칼이 되고, 의사가 칼을 들었다면 환자를 수술해서 생명을 구하는 칼이
됩니다. 한 자루의 칼이지만 그 칼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가치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으로 가치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종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끗한 종이가 있더라도 휴지로 쓰면 그것은 쓰레기통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낡고 너덜너덜한
새카만 종이라도 가문의 귀중한 문서를 작성한 종이라면 그 종이는 고이 간직됩니다. 종이가 깨끗하다,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종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그 종이 한 장의 가치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리석으로 지은 집도
있고, 흙으로 지은 토담집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대리석으로 지은 집이 토담집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
집을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집니다. 국가를 망치기 위해서 역적들이 모이는 장소로 대리석 집이 쓰인다면 외견상으로는 가치가 있어 보이지만,
국가적인 목적으로 볼 때는 가치가 없습니다. 조국이 바로 서려면 그 집을 헐어야 합니다.
토담집이라도 기울어져 가는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고
독립투사들이 생명을 걸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여서 회의하는 장소라면 그 집은 지극히 귀하고 가치 있는 집입니다. 그런 집은 보존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자기가 동기가 되고 자기가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참부모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적관이 중요합니다. 목적관은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체와 대상이 그 목적을 결정하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개체에는 주체적인 마음과 대상적인 몸이 있습니다. 나의 마음과 몸이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왔지만, 사실 나의 마음과 몸은 본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부모이신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나왔고, 또 할아버지 할머니, 또 할아버지 할머니, 이렇게
계속 가면 부모의 뿌리는 한 분, 하나님입니다. 인류는 아무리 많이 번식하더라도 뿌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나무의 뿌리에서 빨아올린 영양분은 가지를 수없이 많은 잎에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수없이 번창하고 영계까지
영인들이 가득 차 있어도 그 뿌리는 단 한 분인 하나님입니다. 내가 한 분의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내 마음과 몸도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그 부모를 중심한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가정은 천주의 핵이자 천주의
축소체입니다. 가정의 기본은 부모·부부·자녀 여섯 명입니다. 그 가정의 구성원들은 한 분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으로 해서 참사랑으로 얽혀 살아야
합니다. 가정을 확대한 것이 국가요, 세계입니다. 사람은 가정이 확대된 세계에서 살다가 영계로 가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하는 생활을 하지
못한 사람은 가정이 확대된 세계의 인류를 사랑할 수 없고, 영계에서도 다른 영인들을 사랑하면서 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영계에 가면 즉시 걸립니다. 사랑의 세계는 어디든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구성원은 서로 참사랑에 감응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참사랑은 누구든지 좋아하기 때문에 참사랑이 있는 곳에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가정의 중심이 부모이듯이 내 마음의 중심도 부모여야
합니다. 내가 부모 안에서 생겼고 부모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중심은 부모입니다. 심정과 사랑과 인격도 부모로부터 온
것입니다.
가정을 확대한 것이 국가입니다. 국가를 위해서 사는 사람을 충신(忠臣)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임금만을 위해 산 사람을
충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만 임금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은 국가의 중심이고 그 나라의 주권자입니다. 임금은 가정으로 볼 때
부모와 같고 백성은 자녀와 같습니다. 나라의 주권자는 백성을 자기 자식같이 사랑하고 돌봐야 합니다.
부모라면 자식이 배고플 때 돈을
빌려서라도 먹이고 돌보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라의 주권자라면 백성이 추워서 떨고 있을 때 자기 옷을 벗어서 입혀 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안 굶기고 따뜻한 옷을 입혀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부모가 자식들을 돌보듯 그 백성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백성은 그 지도자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충성은 가정의 효도와 같습니다. 효의 도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라에서 충신이 되지
못합니다.
국가가 확대된 것이 세계입니다. 가정에서 효도하고 국가에서 충성을 다하듯이 세계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성인(聖人)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자(聖子)가 있습니다. 성자는 하나님의 혈통을 잇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타락한 사람이 사는 세계에는 성인은 있었지만, 성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핏줄을 가진 아들딸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성자는 하늘나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치리하는 궁(宮)에서 지켜야 하는 궁법(宮法)이 있고, 일반적인 법이 있습니다. 지상에도 하늘나라(天國)이 있고, 하늘나라의 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상과 천상에서 하늘나라의 법을 지킬 줄 알고, 그 두 세계에 있는 궁의 법을 따르고 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성자입니다.
가치는 목적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 중심은 효(孝)입니다. 효의 근본은 하나님을 모시는 것인데,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피와 살과 뼈를 만들어주신 나의 부모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명을 주시고 영원성까지 주신 나의 부모입니다.
보이는 하나님의
실체가 되어 우리 앞에 부모로 현현하신 분이 참부모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에서 참부모님을 모시고 경배하고 기도하고, 집을 나가고 들어오면서
부모님의 용안을 보고 ‘내가 오늘 부모님 말씀대로 이렇게 살겠다.’고 하는 굳은 의지와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자녀들도 나가고 들어오면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가정제단(家庭祭壇)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가치의 결정은 바로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2) 창조본연이 가치
결정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해서 목적이 실현되었을 때 그 대상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것이 창조본연의 가치입니다.
주체가
추구하는 욕구가 있으면 그 욕구를 대상이 충족시켜 주어야 합니다. 주체이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대상의 존재 목적입니다. 주체가 이상을
이루기 위한 가치를 추구할 때, 그 욕구를 충족해 주는 것이 대상의 존재 목적입니다. 주체의 입장에서 창조이상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욕구를 대상의
자리에서 충족해 드리는 것이 인간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주체의 욕구가 충족될 때 창조본연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어떤 대상의 존재하는 목적과 인간 주체의 가치 추구욕(追求欲)이 상대적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창조본연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창조본연의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이 인간 주체와 수수작용하여 합성일체화(合成一體化)함으로써 하나님의 제3대상이 되어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루려면, 먼저 하나님을 중심으로 욕구를 지닌 인간 주체와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상, 그리고 주체와 대상의 합성체, 이렇게 3대상(三對象)이 설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3대상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3대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곧 창조목적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한 인간 주체가
대상과 수수작용을 해서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제3대상이 이뤄지게 되는데, 그것이 창조본연의 사위기대가 됩니다. 창조본연의 사위기대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창조본연의 가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3) 창조본연의 가치기준 252
사위기대의 중심이 절대자
하나님이므로 그 가치의 기준도 절대자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자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어떤 대상의 가치도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주인이라면 거기에서 나타난 대상도 절대가치의 주체 앞에 대상의 자리에 서게
되므로 비록 대상이지만 가치로 볼 때는 절대적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창조본연의 가치가 바로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창조본연의
가치기준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합니다. 절대라는 말은 유일하기 때문에 쓸 수 있습니다. 유일하지 않은 것은 절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불변하기 때문에 절대가 되는 것입니다.
변하는 것은 절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자체는 영원하기 때문에 절대가 되는 것입니다. 절대라는 말
자체가 유일하고 불변하고 영원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고 절대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 자체는 절대·유일·불변·영원한 가치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합니다.
조변석개(朝變夕改)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한 번 먹은 마음을 3일 넘기기가 쉽지 않다는 뜻의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게 변하는 마음을 가진 인간은 창조본연의 가치를 결정짓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변하고, 영원성을 갖지 못하고, 유일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가치평가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학·박사 지식인도 마찬가지이고 양심을 지키고 사는 선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평가할 때 할 쪽에서는 의로운 사람으로 보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쪽에서는 충신으로 보고, 다른 한쪽에서는 역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에 정몽주라는 충신이 있었습니다.
정몽주는 고려에서는 충신이지만, 조선에서는 역적입니다. 해전사(海戰史)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은 한국에서는 충신이지만, 일본에서 볼
때는 원수입니다. 히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에서는 충신이지만, 한국에서 볼 때는 원수입니다. 한 사람을 놓고 한쪽에서는 충신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역적으로 보는 것은 평가하는 가치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창조본연의 가치기준은 변하면 안 되기 때문에
절대·유일·불변·영원성을 가지는 하나님만이 그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형으로 계시므로 하나님의 실체로 오시는
참부모님만이 실체세계에서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있는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현실세계는 어느 누구도 옳다,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오직 참부모님에 의해서 ‘이 세계는 잘못된 세계다, 이 국가는 이렇게 가면 안된다. 오늘날 세계는 이렇게 가면 안 된다.’라고
정리하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유일·불변·영원한 가치의 자리에 선 절대자이기 때문에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실체로 오신
참부모님만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창조본연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4) 창조본연의 지정의와 진미선 254
인간의 마음은 지(知)·정(情)·의(意)의 세 가지 기능을
발휘합니다. 인간의 육신은 그 마음 곧 지·정·의의 감응체(感應體)로서 진(眞)·미(美)·선(善)의 가치를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마음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지·정·의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본연의 가치 실현욕(實現欲)에 의해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정·의에 감응하고 그것이 몸에서 행동을 통해 창조본연의 진·미·선의 가치로 나타나게 됩니다.
‘지’가 먼저냐? ‘정’이 먼저냐? 를
놓고 논란이 있을 수 있는데, 본체에는 ‘지’와 ‘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 안에도 ‘정’과 ‘의’가 있으며 그 중심이
‘지’입니다. ‘정’ 안에도 ‘지’와 ‘의’가 들어 있으며 그 중심이 ‘정’입니다. ‘의’ 안에도 ‘지’와 ‘정’이 들어 있는데 그 중심이
‘의’입니다.
이처럼 구분해서 설명하지만 하나님 본체 안에는 ‘지·정·의’가 통일체로서 모두 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는
‘지·정·의’에 감응되어 인간의 마음에 ‘지·정·의’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지적’인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지적’인 요소가 중심이지만, 그 가운데는 ‘정적’인 요소도 있고 ‘의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이 많고, 어떤 사람은
‘지적’이라서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의적’이라서 행동하기를 좋아하지만, ‘정적’인 면에서는 나약한 면을 보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그런 면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중심 요소가 강하냐에 따라서 지적인 사람, 정적인 사람, 의적인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그런 마음이 몸을 통해서 행동으로 나타날 때 그 가치가 ‘진·미·선’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지’는 참(=眞)을
추구하고, ‘정’은 미(美)를 추구하고, ‘의’는 선(善)을 추구하는데 그 중심은 심정입니다. 심정을 뿌리로 한 ‘지적’인 분야는 참을 추구하되
심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지’는 그 자체가 거짓된 이론이 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그 이론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진리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혁명을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심정을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정권에서 일체가 되지 않는 인간은 거짓된 인간이고, 거짓된 인간이 세운 이론은 거짓된 이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삶의 동기가 심정이어야 하고, 모든 창작의 동기도 심정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정·의’가 사랑에 의해서 감응되어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데 우리 마음에 ‘지·정·의’가 사랑을 통해서 감응되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진·미·선’입니다. 그래서 ‘진·미·선’에 대한 가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5) 사랑과 미, 선과 악, 의와 불의
‘사랑과 미’, ‘선과 악’, ‘의와 불의’는 모두가 어떤 가치 평가에
대한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미다.’하고 ‘사랑’과 ‘미’를 따로 구분해서 평가합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도
‘미’가 있고, ‘미’ 안에도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선과 악’의 경우는 ‘사랑과 미’와 같지 않습니다. ‘사랑과 미’가 동질성을 지닌
것과 달리 ‘선과 악’은 지향하는 방향과 목적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선과 악을 다루는 것은 타락세계의 인간들이 악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선으로 잘못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정확히 규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하는 것을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가치 평가입니다.
‘의와 불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이 의로운 것이고 어떤 것이
불의한 것인지, 어떤 사람이 의인이고, 어떤 사람이 불의의 인간인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에 들면 좋은 사람이라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옳은 말을 하더라도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 말이 옳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창조본연의 가치를 놓고 볼 때 그런 평가 기준은 모두
정리되어야 합니다.
(1) 사랑과 미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된 이성(二性)의 실체가 성상과 형상, 또는 양성과 음성입니다. 그것이 각각
주체와 대상이 됩니다. 그 주체와 대상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면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 하나님의 제3대상(第三對象)이 나타나는데,
그때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四位基臺)가 이루어집니다. 3대상(三對象)이 나타나지 않으면 사위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위기대를
이루기 전에 하나님의 제3대상으로 합성일체화하기 위하여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을 사랑이라고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돌리는 정적인
힘을 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수수작용은 주체와 대상이 사랑과 미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은 동적(動的)이고, 미의 자극은
정적(靜的입니다. 남자가 주체이고 여자가 대상일 경우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사랑은 동적입니다. 그때 여자가 나타내는 반응은 미가
되는데 그 반응은 정적입니다. 남자의 사랑 표현은 적극적인 반면에 여자의 사랑 표현은 소극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때에 따라서
여자가 남자보다 더 적극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속에도 미가 있고, 미 속에도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쪽만 고집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랑과 미는 수수작용을 하기 위한 요소로서 두 요소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한 사랑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부부의 사랑·자녀의 사랑이 그것입니다. 그 세 가지 사랑을 3대(三大) 사랑이라고 표현하지만, 자녀의 사랑에는
형제의 사랑이 포함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4대(四大)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부부의 사랑·형제의 사랑·자녀의 사랑, 이렇게 4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뿌리가 바로 심정입니다. 4대 사랑이 하나님 안에 있는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4대심정권(四大心情圈)에서 참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체 속에 4대심정권을 가지고 있지만, 실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참사랑을 실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4대심정권의 본체로 성장해 왔고, 그 심정을 실감하기 위해서 직접 아담과 해와를 창조했습니다.
아담·해와가 완성한다는 말은 곧 4대심정권의
완성을 뜻합니다. 아담·해와가 4대심정권을 완성하면 하나님도 완성한 자리에 서게 됩니다. 4대심정권을 이루기 위한 것이 ‘따먹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고, 그 말씀은 절대성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절대성의 사랑은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부부의 사랑·자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기대가 사위기대, 곧 가정입니다. 가정의 구성원은 부모·부부·자녀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여섯 사람을
기본으로 하여 구성됩니다.
맨 처음 자녀는 부모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그 자녀가 부부의 자리를 거쳐 자녀를 낳으면 맨 처음의 부모는
할아버지·할머니도 없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의 자리를 거쳐서 부모가 되는 것이지, 부부의 자리를 거치지 않고 부모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자리를 거쳐서 부부가 되는 것이지, 자녀의 자리를 거치지 않고서는 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부모가 있어야 자녀가 있고, 자녀가 있어야 부모도 완성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미(美)로 귀결되는 수수작용의 관계입니다. 수수작용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으면 완성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창조이상의 완성을 위해서는 수수작용이 필수 요건입니다.
수수작용의 결과, 대상이
주체에게 돌리는 ‘미’가 나타나는데, 미는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충(忠)', '효(孝)’, ‘열(烈)’이 그것입니다. 이미 밝힌
대로 ‘충’은 마음에 중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바로 부모입니다.
나는 부모에서 출발했습니다. 부모에 의해서 태어났고, 부모에
의해서 심정과 사랑과 인격을 느끼고 배웁니다. 거기서부터 사회·국가·세계로 더 높은 차원을 향해 심정의 생활환경을 넗혀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중심은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중심은 부모인데, 그 부모의 뿌리는 심정의 본체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이 바로 충(忠)입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라는 신념으로 사는 것이
충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는 비록 두 분이지만, 그 부모에서 부모로 올라가면 결국 인류는 최초의 조상인 한 남자, 한 여자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조상은 뿌리가 하나입니다. 최초의 조상은 내 육신의 뿌리가 되지만, 하나님은 내 영원한 영인체의 뿌리가
되는 분입니다. 만민 공통의 부모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참부모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의 중심이 부모인데, 그 부모의
근원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충은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하나님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
됩니다.
넓은 의미에서 충이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이라면, ‘효(孝)’는 나를 낳아준 부모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듯이 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부모를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 효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부모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한복음 14장 10절)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부모의 중심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충’은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이고,
‘효’는 부모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烈)’은 상대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충과 효는 종적인 관계이고, 열은 횡적인 관계입니다.
열은 상대적 개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열남·열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자녀로서 종적인 관계이지만, 그
남자와 여자는 횡적인 관계입니다. 상대적인 관계로서 ‘열’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횡적으로 볼 때 절대성의 본체인 아버지 앞에 실체적인
절대성 중심한 생식기의 주인은 상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상대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경우 부인을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면 열남(烈男)이 되고, 여자의 경우 남편을 믿고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했을 때 열녀(烈女)가 되는 것입니다. 그 열남·열녀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절대성을 중심해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실체로 나타난 상대권에 있는 남자나 여자는 절대성을 중심한 열남·열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세계에는 충신(忠臣)은
있지만 충녀(忠女)는 없습니다. 여자가 하나님을 중심한 나라의 이상을 갖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효와 열’도 마찬가지입니다. 효자·효녀가 있고
열녀가 있으면 열남은 없습니다.
본연의 세계에서는 충·효·열의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충신이 있듯이 충녀도 있어야 하고, 효자·효녀가
있고, 열녀가 있듯이 열남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가치는 절대성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절대성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충’도 없어지고, ‘효’도 없어지고, ‘열’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해서 분립된 주체와 대상은 서로
주고받는데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인 힘을 사랑이라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돌려주는 정적인 힘을 미라고 했습니다. 또 사랑 안에도 ‘미’가
들어 있고, ‘미’안에도 사랑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과 미는 주고받으면 주고받을수록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체의 사랑이 없으면
대상에게서도 미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상이 지닌 ‘미’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의 가치는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못생겼다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이 있습니다. 저마다의 개별상(個別相)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놓고 ‘마음에 안 든다, 밉다, 싫다.’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밉고 싫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절대적입니다.
그것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가 됩니다. 결국 미의 가치는 사랑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것이 충·효·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선과 악 261
주체와 대상이 사랑과 미를 잘 주고받아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삼대상이 되어 사위기대를 조성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삼대상이 되지 않으면 사위기대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삼대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속에서 분립된 주체와 대상이 잘 주고 잘 받아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해서
합성일체화하면 하나님의 삼대상으로 나타납니다. 그 삼대상이 서로 수수작용하면 사위기대가 조성되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성취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선(善)이라고 합니다.
반면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사탄의 목적을
성취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악(惡)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하면 선이 되고, 사탄을 중심하면 악이 된다, 그 말입니다.
앞으로
타락론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원래는 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악이 생겨났습니다. 악의 주체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시종(侍從)인 동시에 인간의 종이었습니다. 그 종이 하나님의 자녀를 타락시켜 자기 자녀로 만들었습니다. 자기의 존재위치를 떠났기 때문에 사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을 놓고 볼 때 그것은 원리가 무시된 것입니다. 그것이 악입니다.
선과 악의 개념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선이 있으니까 악이 있고 악이 있으니까 선이 있다.’는 상대개념(相對槪念)이 아니라 상반적 개념(相反的槪念)이 아니라 상반적
개념(相反的槪念)입니다. 선과 악은 한 점에서 출발했지만, 둘은 동기와 목적이 다르고 방향도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이 만나면 갈등하고
투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3) 의와 불의 262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선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의(義)라고
하며, 악의 목적, 다시 말하면 사탄의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 악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불의(不義)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선을 위한 생활은
의가 되고, 악을 위한 생활은 악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의로운 자리에 있느냐, 의롭지 못한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도 역시 ‘나
자신이 하나님을 중심해서 살고 있느냐, 하나님을 중심해서 살고 있지 않느냐?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한 선의 목적과 방향을 따르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의와 불의는 어떤 학문적 단어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생활적으로 표현되는 실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중심이 하나님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따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동기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일체가 됩니다.
생활을 통해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7. 피조세계의 창조과정과
피조물의 성장기간 262
피조물들은 창조되자마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을 거쳐서 완성됩니다. 완성이라는 말에는
완숙해 간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어린아이로 태어나서 사춘기를 거쳐 성인이 됩니다. 외적으로는 성장해 가는 것이고, 내적으로는
성장하면서 완숙할 수 있는 내용을 채워 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을 닮아서 완숙하고, 몸은 하나님의 원리와
법도와 질서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내외적으로 완숙해 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책임분담이고, 그
책임분담을 완성하는 기간이 성장기간입니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에게는 성장기간이 있습니다.
1) 피조세계의 창조과정
창세기 1장
1절부터 31절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과정(創造科程)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갈라 세웠습니다. 그때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로 운행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었습니다.
둘째 날에는 궁창에서 윗물과 아랫물로 갈라 세웠고, 셋째 날에는 바다와 육지 그리고 육지의 식물을 창조했습니다.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을 창조했습니다.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를 창조했고, 여섯째 날에는 포유류와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6일 동안
피조세계를 창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해와 달과 별이 왜 나타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빛은 하나님 속에 있는 어둠과 같은 한
점에서부터 점점 드러나게 됩니다. 해와 달과 별은 빛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보면 네 번째 날에 해와 달과 별을
창조했습니다.
과학계에서도 우주가 여섯 단계로 생성됐다고 봅니다. 맨 처음은 무수시대(無水時代)인데, 그때에는 우주가 가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물이 생겨 유수시대(有水時代)가 됐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궁창(穹蒼: 창공)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 나눴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바다와 육지가 생겼다고 하는데, 성경에서처럼 위로
솟아오른 곳은 육지가 되고 가라앉은 곳은 바다가 됐습니다. 그때 식물이 타났습니다. 빛이 있었기 때문에 식물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경에서 말한 물고기와 새가 창조되었듯이 동물도 나타났고, 여섯 번째 단계에 마지막으로 인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지질학계에서 밝힌
지질시대의 구분도 여섯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생명이 없는 무생대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에 생명이 시작되는 시생대, 단세포 동물이
나타난 원생대, 육상 식물이 나타난 고생대, 조류와 포유류 등이 나타난 중생대, 인류가 나타난 신생대로 구분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6일 동안 지었다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루는 우리가 생각하는 24시간을
기준으로 한 하루가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는 내용을 보아도 성경에서 말하는 하루는 우리가 알고 있는 24시간을 기준으로 한 하루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구상이 실체로 나타날 때까지의 기간을 하루라고 본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장미꽃을 만들려고 했다면, 구상하는 데만 수천년, 수
만년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미꽃이 핀 결과를 놓고 하루 아침에 장미꽃 한 송이가 나타났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구상에서부터 실체가
나타날 때까지 전체 기간을 성경에서는 하루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6일이라는 개념은 24시간을 기준으로 한 6일이 아니라 창조과정의
6단계를 뜻합니다.
2) 피조물의 성장기간 265
어느 것이든 창조에는 시작이 있고 완성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
완성되는 과정이 성장기간(成長期間)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도 성장기간을 거쳐서 창조하신 목적이 완성됩니다.
(1) 성장기간이 있다는
증거
첫째,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보면 성장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장기간이 없다면 하나님의 창조가 6일이나 걸릴 필요가
없습니다.
피조물이 완성될 때까지는 반드시 어떤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물을 전기분해할 때도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물(H2O)이 수소(H)와 산소(O)로 분해되기까지는 반드시 시간을 요하게 됩니다.
땅에 식물의 씨를 뿌리면 뿌리자마자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씨가 땅 속에서 발아하는 기간이 있고, 떡잎이 나와 성장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성장하여 꽃이 피더라도 그 꽃잎이
떨어지고 꽃잎 속에 들어 있는 작은 씨방이 커서 열매를 맺고 완숙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이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장기간이
필요합니다.
둘째, 타락으로 보아서 성장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창조되자마자 완성했다면 타락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완성하고 난 다음에는 타락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완성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미완성 단계에서
타락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인간에게 책임분담을 주신 것으로 보아서 성장기간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장기간은 인간 스스로 성숙해가야
할 완숙의 기간입니다.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창세기 2장 17)는 말씀을 주신 것은 인간이 아직 완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을 지켜
완성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인간 책임분담(責任分擔)입니다.
책임분담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완숙입니다. 완숙은 절대성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도 절대성 남자가 되어야 하고, 해와도 절대성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 완성의 기준입니다. 인간이 완성하면 하나님이 그
자리에 들어가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성은 하나님이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책임분담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넷째, 성서적으로 보아도 성장기간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5절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녁을 지나 아침이 된 것을 둘째 날이라 하지 않고 첫째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의 과정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녁과 아침 사이에는 밤이라는 기간이 있습니다. 저녁이 되었다면 반드시 밤을 거쳐야 아침이 옵니다. 밤이라는 것은
실체가 보이지 않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창조이상을 세워 구상하고 설계하신 기간은 밤에 해당합니다. 그 구상과 설계가
실체로 드러나는 때가 저녁입니다.
그리고 그 구상과 설계에 따라 나타난 실체가 밤이라는 성장기간을 지나면서 성장하여 완성함으로써 창조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첫출발을 하기 때문에 첫째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피조물의 성장기간과 인간책임분담
267
저녁이 되어 실체가 드러났다고 해서 바로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어나 것에 불과합니다. 태어났으면 성장해야 합니다.
인간의 경우 육체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육체적인 성장은 물질(음식물 등)을 섭취하면 되지만, 정신적으로 성장하려면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만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물도 성장기간을 지나 씨가 생기고 그 씨를 심으면 거기에서 다시 실체가 나올 만큼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1) 피조물의 성장기간 267
창세기 1장 5절의 말씀처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기 위해서’는
밤이라는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 밤이라는 기간이 성장기간입니다.
성장기간은 3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적으로 보면 이성성상이지만 그 이성성상의 통일체로 계신 한 분입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보면 1수이지만 내적으로 볼 때는
3수로 되어 있습니다. 정분합(正分合)이라는 3단계 창조 법칙도 그 3수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도 원리에 의해서 지어졌기
때문에 3단계를 거쳐 성장합니다. 그 3단계 성장기간이 소생기(蘇生期)·장성기(長成期)·완성기(完成期)입니다.
소생기도 3급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소생기 소생급(蘇生級)· 소생기 장성급(長成級)·소생기 완성급(完成級)으로 세분되는 것입니다. 장성기도 장성기 소생급(蘇生級)·장성기
장성급(長成級)·장성기 완성급(完成級)이 있습니다. 완성기도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기에도 완성기 소생급·완성기 장성급·완성기
완성급이 있습니다.
성장의 단계를 모두 합치면 9단계가 됩니다. 9단계를 거쳐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9수가 완성수입니다. 이
완성수인 9수에 하나님 수 1을 더하면 10수가 됩니다. 그것이 귀일수(歸一數)입니다. 9단계의 성장을 마치면 하나님을 닮은 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10수가 됩니다. 그래서 10수를 귀일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10은 첫 번째 숫자인 1과 같은 것입니다. 1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출발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첫째 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러한 창조원리에 따라 성장합니다. 만물도 이 원칙을
따라서 성장하고 인간도 이 원칙을 따라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리적(生理的)인 성장입니다. 생리적인 성장이란 몸의 성장을 말합니다. 몸은
원리의 자율성(自律性)과 주관성(主管性)에 의해서 성장하고 완성합니다.
만물은 몸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성장기간을 지나면 자동적으로
완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몸은 생리적인 성장으로 완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체에 자율성과 주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이 경우
몸을 만들 영양소가 풍부한 토양에 뿌려지기만 하면 거기에서 싹이 터서 필요한 성분을 흡수하여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율성입니다. 한편 씨 속에는 장차 나무가 될 설계도가 들어 있어서 그 설계도대로 몸을 키웁니다.
은행은 은행나무만을 키우고, 상수리는 상수리나무만을 키웁니다. 그것이 주관성입니다.
인간도 몸은 만물과 같은 원리의 길을 거쳐서
완성합니다. 생리적 인간의 완성은 자율성과 주관성에 따라 완성하는 것입니다. 자율성과 주관성에 의한 성장기간을 간접주관권(間接主管圈)이라
합니다. 간접주관권은 전적으로 원리의 힘에 의해서 성장하고, 원리의 힘에 의해서 주관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것을
원리결과주관권(原理結果主管圈)이라고도 합니다.
(2) 인간의 책임분담 269
간접주관권에서 아담과 해와가 지켜야 하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창세기 2장 17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지켜서 책임을 완수하면 아담·해와는 하나님의 완전한 대상이
됩니다. 완전한 대상이란 완전한 주체인 하나님 앞에 완전한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창조와 동시에 첫째 날을 맞는 만물과 달리 본심을
통해 4대심정권(四大心情圈)을 완성함으로써 심정의 본체되시는 하나님을 닮습니다. 하나님과 본질이 같아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자녀의
심정·형제의 심정·부부의 심정·부모의 심정이라는 4대심정권을 통해 성장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심정의 본체로 계시다는 말에는 4대심정권이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도 성장하면서 내적으로는 4대심정권을 완성한 심정의 본체를 닮은 실체가 되어야 하고, 외적으로는 몸을
통해서 절대성을 지켜서 절대성 본체를 닮은 절대성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갖출 때 하나님께서는 천주를 대표해서 아담에게 해와를
주고, 해와에게는 아담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식기의 주인을 허락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생식기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상대라고
하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아담·해와를 지은 설계의 법도입니다. 그래서 주인인 하나님이 생식기의 주인으로 상대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주인의 본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해와 안으로 들어가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아담·해와가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절대성을 지켜서 하나님의 절대성과 일체가 되는 그 자리가 성전입니다.
거기에서
신인일체(神人一體)가 되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심정적으로 일체가 되는 것이 신인일체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완전한 주체가 되고, 인간은
완전한 대상이 됩니다.
완전한 대상은 완전한 주체의 직접주관권(直接主管圈)에 들어가게 됩니다. 직접주관권은 원리에 의해서 주관하지 않고
참사랑으로 주관하는 영역입니다. 참사랑의 주관권은 그저 사랑으로 대하고 사랑으로 다스린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아담·해와의 몸 안에
들어가서 아담·해와의 체를 쓰고 사랑하고, 체를 쓰고 주관하는 실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때부터 아담·해와가 모든 피조물을 주관하게
됩니다. 천사까지도 주관하게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천사가 아무리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미 아담·해와가 하나님의 실체가 되고,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격 창조 270
인간은 생리적인 면과 인격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장도 생리적인 면과 인격적인 면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생리적인 면에서 인간은 만물과 마찬가지로 원리의 자율성과 주관성을 통해
성장하여 완성한 몸을 이룹니다. 원리 안에 자율성과 주관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포함한 만물은 원리의 자율성과 주관성에 의해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식물의 경우 씨를 심으면 자동적으로 싹이 터서 성장해 갑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완숙해서 다시 심으면 또 그런
성장과정을 반복하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식물은 완성하기 위해서 질서적인 성장기간을 원리적으로 거쳐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씨 속에 모든 설계도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설계도는 바로 하나님이 구상하신 설계도입니다. 인간에게 몸과 마음이 있듯이 만물에 몸과 마음이 있는 것도 그 설계도에
따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육신을 지니고 태어나면, 때를 맞추어 음식물을 먹고 계절의 환경에 따라 추위와 더위에 대처하는 등 주위
환경에 적응하면서 성장하고 완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물이 원리의 자율성과 주관성에 의해 성장하고 완성하는 것처럼, 인간의 육신도 그렇게
성장·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면은 다릅니다. 인간에게는 만물에 없는 영인체가 있습니다. 인격적 인간이라는 말은 영인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만물이 가지고 있지 않은 영인체를 완성해야 합니다. 영인체의 완성은 인간책임분담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만물은 원리의
자율성과 주관성으로 완성하지만, 인간은 원리의 자율성과 주관성으로 성장하는 생리적 존재인 동시에 영인체를 완성해야 하는 인격적
존재입니다.
영인체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책임분담입니다. 또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책임분담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거쳐야 할 가장 중요한 책임분담입니다. 인간책임분담은 인격을 창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3) 인간에게 책임분담을 주신 이유
271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창조주로서 인간을 주관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만물을 주관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과 만물을 주관할 자격을 얻으려면 만물을 창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만물을 창조하지 않았고 창조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책임분담을 주어 만물을 창조하는 대신 하나님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창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과 만물을 주관할 자격을 주시려는
배려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인격을 창조하려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말씀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95퍼센트
책임분담이고,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5퍼센트 책임분담입니다.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을 정확한 수치로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역할은 그만큼 크고, 거기에 비해 인간의 역할은 작다는 뜻으로 그렇게 가정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책임분담이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따지자면 그것은 100퍼센트에 해당합니다. 인간의 몫 100퍼센트가
인간책임분담입니다.
인간이 책임분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여 절대성 자아주관(=自己主管)을 성취할 때 인격이 창조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책임분담으로 자신의 인격을 창조함으로써 창조성을 갖게 되어 제2의 창조주가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위업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은 창조 위업을 완성하게 됩니다. 인간 완성은 곧 하나님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부모(하나님)가 세운 창조이상도
자녀(=人間)의 완성으로 성취됩니다. 자녀의 완성은 ‘절대성(絶對性)’ 위에서 책임분담 해방권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절대성을 완성하지 못하면
책임분담 해방권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절대성을 완성해야 하나님의 책임분담도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책임분담을 주신 이유는
인격을 창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95퍼센트 책임분담으로 주신 말씀을 인간이 5퍼센트 책임분담으로 실천하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서 말씀의
완성자가 되면 하나님의 뜻이 100퍼센트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담·해와의 책임분담 완성으로 아담·해와의 완성은 물론 부모 되시는 하나님의
완성도 실현됩니다. 인간이 창조 위업에 가담함으로써 하나님의 뜻도 완성되는 것입니다. 창조 위업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완성하는
것입니다.
8. 인간을 중심한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273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는 형체도 있고 실체도
있기 때문에 손으로 만져볼 수도 있고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는 육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무형실체세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는 인간을 중심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인간을 중심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없으면 두 세계는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인간을 중심한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라고
했습니다.
1) 무형실체세계의 존재 여부273
무형세계(無形世界)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대단히 궁금한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무형세계의 존재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형세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무형실체세계라고 한 것입니다.
무형실체세계를 놓고 ‘무형세계’라고 하거나 ‘천상세계(天上世界)’ 또는 ‘영계(靈界)’라고 하는 등 저마다 달리 표현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유형실체세계를 놓고도 ‘유형세계’, ‘지상세계’ 또는 ‘육계(肉界)’로 저마다 달리 표현하지만 그것도 같은
말입니다.
흔히 영계는 죽어서 가는 세계, 즉 ‘사후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영계를 사후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영계는 죽어서 가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현재 그 세계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영계는 육계와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계는
보이고, 영계는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영계와 육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손을 바로 놓았을 때는 손등만 보입니다. 그렇다고 손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손바닥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손등과 손바닥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손등과 손바닥 둘을 합해서 손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피조세계에는 보이는 육계가 있고 보이지 않는 영계가 있는데, 그 두 세계는 하나입니다. 두 세계를 합해서 천주(天宙)라고
합니다.
영계는 존재하지만 육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세계를 없다고 부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질리라면 있는 것은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해야 합니다.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영계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영계가 있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1) 창조원리로
보아
하나님의 창조를 볼 때 무형실체세계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창조원리에 따르면 피조세계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본성상과
본형상의 중화적 통일체로 계신 하나님이 당신을 닮은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에 앞서 하나님은 당신을 닮은 인간을 본으로 해서 삼라만상을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확대해 놓은 것이 우주입니다.
인간의 보이는 몸을 확대해 놓은 것이 유형실체세계입니다.
유형실체세계는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져 볼 수 있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유형이고 실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세계를 자연계, 또는 지상계라고 합니다.
한편 인간에게는 몸의 주체가 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의 세계를 확대해 놓은 것이 무형실체세계입니다. 마음이 보이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듯이 무형실체세계도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실체로 존재합니다.
마음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습니다. 무한히 커질 수도 있고 무한히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의 세계를 무형실체세계, 곧 영계라고 합니다. 영계는 하나님이 창조한 천주 전체를 대표하는 자리도 됩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본(本)으로 해서 지어 놓은 유형실체세계와 무형실체세계의 두 세계로 구분되지만 그것은 하나입니다. 인간이 구조적으로는 마음과 몸으로
구분되지만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형실체세계와 무형실체세계도 두 세계로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를 묶어서 천주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창공을 하늘이라
하고 두 발을 딛고 사는 곳을 땅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천지는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天)은 영계를 뜻하고 지(地)는
육계, 곧 자연계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은 영계와 육계, 곧 천주를 창조했다는 뜻입니다.
영계와 육계의 관계성을
볼 때 영계는 무한한 세계이고, 지상세계는 유한한 세계입니다. 영계는 영원성을 가졌고, 지상세계는 순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지상세계에서
100년을 산다면 100년은 영원한 세계인 영계에 비해 수억만 분의 1초도 안 됩니다. 영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육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원인의 세계는 시공(時空)이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의 세계는 그것이 실체로 전개되어 나왔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형실체세계는 한계가 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그런데 주체인 무형실체세계는 한계가 없습니다. 거기는 무한하고
영원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무형의 실체로 계시고, 기뻐하시기 위해서 모든 존재를 지었습니다. 실체를 가진
하나님이시지만 무형의 실체로 계시기 때문에 그 대상으로 유형의 실체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육신이라는 실체는 한계성을 갖기 때문에 영원성을 지닌
영인체를 인간에게 부여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성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지상에서 영인체 하나를 완성시켜 놓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지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며 산 사람은 영계에 가서도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기쁨과 미를 돌리는 효자와 효녀로 사는 것입니다. 그 세계가 지상천국이고 천상천국입니다. 천국이라는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중심은 부자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근본 요소는 참사랑인데 거기에서 효도가 나옵니다. 효도는 심정을 뿌리로 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끝이 없습니다. 효도 자체가 한계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고도 더 주고 싶고 효도를 하면서도 더 기뻐하고 효성스러운
마음이 끊임없이 솟구쳐 오를 수 있는 동기가 심정입니다. 기쁨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영원한 분이기 때문에 그 기쁨도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중구조로 지었고, 그 인간을 확대해서 전개시킨 세계가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입니다. 두 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천주(天宙)입니다. 지금까지는 우주라는 개념밖에 없어서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표현했습니다. 우주라는 말은 원리로 볼 때 보이는
세계만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주와 똑같은 무형의 우주인 무형실체세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소천주(小天宙)라고 해야 하나님이
지으신 본연의 가치를 제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8장 5절에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모형과 그림자가 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형실체세계도 보이지는 않지만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체가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림자는 실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닙니다. 실체와 그림자가 하나 되는 자리가 정오정착(正午定着)입니다.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의 두 세계를 천주라고 했을 때 인간은 천주의 중심 존재입니다. 인간이 제외되면 천주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가치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중심으로 두 세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천주에서 인간의 위치는 절대적입니다.
첫째로 인간은 천주총합실체상(天宙總合實體相)입니다. 육신은
유형실체세계를 총합·축소한 실체상이고, 영인체는 무형실체세계의 모든 요소와 속성을 총합한 실체상입니다. 인간 개체는 영인체와 육신으로 되어
있으니 인간은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인 것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두 세계를 화동시키는 중간매개체(中間媒介體)요, 화동(和動)의
중심체(中心體)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제외하면 두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영인체는 무형실체세계와 주고받고, 육신은 유형실체세계와
주고받으면서 인간 자체의 영인체와 육신이 주고받으니 결국 인간은 두 세계를 화동시키고 매개하는 존재입니다.
무심코 보면 공간 자체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구 주변에는 공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체가 존재합니다. 공기가 없으면
생명체는 하나도 존속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공기는 있습니다. 공기뿐만 아니라 각종 전자기파도 가득 차 있습니다.
지구상의 크고
작은 나라는 다 방송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TV방송국도 있고 라디오 방송국도 있습니다. 각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뉴스나 어떤 가수의 노래가 전파로
바뀌어 우주 공간을 떠돌고 있습니다.
한국의 KBS·MBC, 일본의 NHK, 미국의 CNN 등 방송 매체들은 쉬지 않고 그런 전파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에서 라디오나 TV가 그 전파를 소리나 화상으로 바꾸어 시청자의 귀나 눈으로 전달하는 중간매개체의 역할을 합니다. 주파수를
맞추면 영상과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두 세계를 화동시키고 연결시켜 주는 중간매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주파수를
맞춰서 TV를 시청하는 것처럼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를 맞춰서 볼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 세계를 총합하는 실체상도
되지만, 두 세계를 화동시키는 매개체입니다.
셋째로 인간의 위치는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두 세계의 주관주(主管主)입니다. 따라서
천주에서 인간의 위치는 천주총합실체상이자 중간매개체이고 두 세계를 주관하는 주관주입니다.
유형실체세계는 육신을 확대한 세계이기 때문에
육신은 유형실체세계를 주관하고, 무형실체세계는 영인체를 확대한 세계이기 때문에 영인체는 무형실체세계를 주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는 육적오관(肉的五官)이 있습니다. 영적오관이 있기 때문에 영인체가 성장해서 완성하면 무형실체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계에서도 볼 수가 있고,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맛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세게를 감지할
수도 있습니다. 영인체는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합니다. 육신을 벗고 영계에 가면 영인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 안에 있을 때는 그 존재를
잘 모릅니다.
지상에서 육신을 지니고도 가끔 자기의 영인체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언제나 영인체가 자기 자신보다
앞서 간다고 합니다. 영인체는 선하고 의로운 것을 찾아가려고 하지 나쁜 것을 찾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 악령들이
있으면 벌써 영인체가 느끼는 것입니다. 육신에 소름이 돋는다든가 무엇에 깜짝 놀라는 자극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인체가 육신의 주체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영계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사랑은 지상에서 육신을 쓰고 훈련을 통해 완성해야 합니다. 영인체가 가서 살 수 있는
천국은 선한 세계요 사랑의 세계이니, 육신 쓴 지상의 가정에서 사랑을 완성하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천주의 핵심입니다. 가정에서 사랑과
심정의 훈련을 받지 못하고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영계에 가서 생활할 수 없습니다. 영인체가 사는 곳은 사랑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를 위해서
지상생활이 중요합니다.
나무로 말하면, 육신은 줄기와 가지 또는 잎과 같고, 영인체는 가지에 달려 있는 열매와 같습니다. 열매는 나무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서 완숙해야 떨어집니다. 육신은 노쇠하면 흙으로 가고 열매와 같은 영인체는 하나님 앞으로 가서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19절과 마태복음 18장 18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사랑에 의해 태어나서 사랑으로 성장하고, 사랑으로 완성해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결혼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한 것처럼 온전하기 위해서 결혼하여 온전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참사랑의 완성자입니다. 참사랑의 완성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해야 합니다. 참사랑의 완성자가 되었을 때 그
영인체가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습니다.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가 완숙하지 못하고 떨어지면 그 열매는 창고에 저장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상품가치가 없습니다. 완숙하지 못하고 떨어진 과일은 쓰레기통에 버려집니다. 인간이 타락으로 육신을 지니고 영인체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영인체는 하나님이 원래 소망했던 세계, 천국에 못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쓰레기통으로 간 것입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원리대로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치가 없습니다.
자녀가 본연의 자리에 서지 않는 한 하나님도 부모의 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자녀의 자리로 끌어올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복귀섭리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부가 만나 사랑하며 사는 곳에서는 사랑이 꽃피고
열매를 맺어서 완숙해야 합니다. 사과를 보면,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 속에 있는 작은 씨방이 점점 자라서 커집니다. 조그마한 씨방이 꽃잎 속에
있다가 자라나 큰 사과가 됩니다. 그 사과가 다 컸다고 해서 완숙한 것이 아닙니다. 따먹어 보고 맛이 없으면 쓰레기통에 버리게
됩니다.
겉모습은 갖추었더라도 사과의 맛이 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성장했더라도 하나님이 지으신 본연의 아들딸의
맛이 들어야 합니다. 그 맛이 사랑의 인간입니다. 사랑의 인간은 아버지 앞에 효도를 다하는 것입니다. 효도는 사랑의 향기입니다.
가정은
천주의 핵심체이고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가정을 중심한 삶은 사회와 연결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확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
천국에 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 대기소로 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완숙한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열매가 다 커서
완숙한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쭉정이는 못 들어갑니다. 열매가 다 컸다고 해서 쭉정이가 아니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 컸더라도 완숙하지 못한 열매는
쭉정이입니다.
벼껍질 속에 달콤한 물이 들어 있지만, 그 달콤한 물이 완숙하지 못하면 벼껍질은 말라서 쭉정이가 됩니다. 바람결에
날아갑니다. 열매가 될 요소는 다 마련하고 있더라도 벼껍질의 운명은 그 요소를 완숙시켰느냐 완숙시키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
속에는 영인체가 있습니다. 그 영인체를 완숙시켰느냐, 완숙시키지 못했느냐의 문제는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의 생활이 결정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명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영계에 가면 지옥의 맨 밑창에는 음란한 사람이 갑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생식기를 자기 마음대로 굴렸기
때문에 지옥의 맨 밑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명을 함부로 취급한 사람이 갑니다. 자살한 사람, 남의 생명을 죽인 사람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생명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기가 견디기 어렵다고 해서 자살하면 안 됩니다.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생명은 이 땅에서 육신을 지니고 완성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인체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발도 붙일 수 없습니다.
(2) 성서로 보아 282
성서로 봐도 영계가
있습니다. 영계가 없다면 영인체를 창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인체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육의 몸이
있고 신령한 몸이 있으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육은 보이는 육신을 말하고, 신령한 몸은 원리로 말하면
영인체입니다.
육신의 생활은 전부 영인체에 그대로 기록됩니다. 육신의 생활 전체가 그대로 속사람 영인체에 심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영인체에 대한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지 신령한 몸은 바로 영인체입니다. 앞에서 지상생활이 영계를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육의 몸에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하는 말은 육신과 영인체의 삶이 일체가 되는 생활을 뜻합니다.
전도서 12장 7절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흙의 요소이기 때문에 노쇠하면 흙으로 가지만, 속사람인
영인체는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완성해 가지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절에서 10절에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보다 약 1600년 전에 죽은 사람이고, 엘리야는 예수님보다 900년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900년 전, 1600년 전 사람과 예수님이 지상에서 대화했다는 것은 육신은 없어졌지만 엘리야와 모세의 영인체가 있다는
뜻입니다.
또 사도행전 9장 4절에 보면 사울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시는 예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는 예수님이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셔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영계의 예수님이 실체를 지닌 요한과 영적으로 나눈 대화입니다.
모두가 영계의 실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인간의 3단계
생활 283
인간은 모태에서 태어나서 지상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영계에 가서 영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3단게로
되었고, 3단계로 완성합니다.
(1) 모태생활 284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 의해서 자녀가 생깁니다. 아버지의
생명의 씨가 어머니의 난자와 만나서 성장합니다. 태아는 열 달 동안에 복중에서 지상생활을 준비합니다. 태아가 지상에 나와서 살 수 있도록
복중에서 모든 기능을 갖추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열 달입니다. 그 기간 동안 태아는 태반을 통하여 모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고
노폐물을 배출합니다. 거기에서 태아가 주체이고 태반은 대상입니다.
뱃속의 태아는 양수(羊水)라는 물속에서 성장합니다. 양수가 부족하면
아기는 살길이 없습니다. 복중에 있는 아기는 물속에서 완성됩니다. 태내의 생활은 수중생활입니다. 태아는 수중생활에서 10개월 동안 지상생활을
준비합니다.
(2) 지상생활 284
태아가 완성되면 양수가 먼저 터집니다. 양수가 터지면 아기가 나옵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도 하나님이 지으신 설계도와 원리를 따른 것입니다. 뱃속에 있던 태아가 완성되어 밖으로 나오면 아기를 키운 태반은 흙으로
돌아가고 지상에서는 아기만 성장하게 됩니다. 아기가 뱃속에서 나오면서 지상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육신과 영인체를
지닙니다. 육신이 생기는 그 시간에 영인체도 같이 형성되어 출발하는 것입니다. 육신에는 육심(肉心)이 있고 영인체에는 생심(生心)이 있는데,
육심과 생심의 수수작용으로 육신과 영인체는 성장합니다. 인간이 육신을 지니고 지상에서 생활하는 기간을 100년으로 잡는다면,
공기환경(空氣環境)에서 이루어지는 지상생활 100년은 영계생활의 준비기간입니다.
그 기간 동안에 아기로 태어나서 부모의 슬하에서 사춘기를
거치면서 개성을 완성하고 결혼하여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계가 사랑의 세계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참사랑을 완성하고 사대심정권을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개성완성은 절대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함축해서 말하면 절대성을 지켜서 완성했을 때 비로소 인간은 개성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먼저 인격을 완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책임분담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을 완성한 다음에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는
것입니다.
반쪽이 또 하나의 반쪽을 만나 온전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완성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해방해 드리기 위해서 결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번식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한 것처럼 온전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같이 온전한 영인체를 가지고 돌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두 사람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온전한 영인체가 되어 영계로 들어가려면 여자를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의 양성과 음성, 그리고 성상과 형상이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되어 나온 남자와 여자도 하나님
안으로 돌아갈 때는 부부가 되어 통일체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본연의 가치를 놓고 볼 때 결혼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완성하면 자기도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완성되겠다는 생각으로 상대를 만난다면 상대가 그 자리에 서 주지를 않습니다.
상대가
없으면 자기도 완성이 안 되고 상대도 완성이 안 됩니다. ‘상대를 위해서 내가 결혼한다, 상대를 완성시키려고 내가 이 자리에 섰다.’는 생각으로
상대를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도 완성하고 나도 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것을 역설적으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4장 11절)고 했습니다.
지상생활 100년은 육신을 쓰고 영인체를 완성하는 기간입니다.
복중에서 태반을 통해 아기가 완성해 나오는 것처럼 지상생활은 참사랑과 4대심정권을 완성하여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기 위한 영계 생활의 준비
기간입니다. 완성하려면 성장기간에 완숙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완성 속에는 완숙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3)
영계생활 286
지상에서 참사랑과 4대심정권을 완성한 다음 육신을 벗고 영계에 가면 그 영인체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 세계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영계에 가서도 사랑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사랑을 그끼고 체휼하며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영계에
가서 자기의 기준에 맞는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모습이 되어 영계로 갈 때 치르는 의식을
장례식(葬禮式)이라 하지 않고 성화예식(聖和禮式)이라고 합니다. 장례식과 성화예식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산 자가 산 자를 생명의 주인에게
보내는 의식이 성화예식이고,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사망의 주인에게 보내는 의식이 장례식입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에서 22절까지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예수님에게 청하자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죽음의 개념을 두 가지로
분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죽은 자’는 제자 아버지의 시체를 말합니다. 그 다음에 친척이나 동네 사람도 죽은 자로 보았습니다.
이처럼 제자 아버지의 시체도 죽은 자라 했고, 동네 사람도 죽은 자라 했습니다. 죽음의 개념을 두 종류로 분류한 것입니다.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사망의 주인 앞으로 보내는 의식이 장례식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사망의 주인은 사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던 사람이 죽었다면
그 사람은 육신은 죽었지만 영인체는 살아 있습니다. 그 영인체는 영원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를 영계로 보내고 육신은 땅에
묻어야 하는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축복가정이라면 그건 산 자가 산 자를 생명의 주인에게 보내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성화예식은 산 자가 산 자를
생명의 주인에게 보내는 의식이고, 장례식은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사망의 주인에게 보내는 의식입니다.
성화예식이란 영계에 갈 때의 예식만이
아닙니다. 기원절부터는 참부님은 승리권의 은사로 말미암아 복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참생명의 인간으로 생기고 태어나고 성장하고 참부부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전체의 과정을 총정리하는 예식을 성화예식이라 합니다.
성화예식이 끝나면 그 다음부터는 열 달이나 백
년이 아니라 영생하게 됩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히 기뻐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영원히 감사하면서 사는 천국입니다. 천국에서는
상충과 고통이 없습니다. 상충과 고통이 있는 곳은 지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 사는 동안 상충과 고통을 다 씻어내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모시고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양수 속과 공기 속의 삶을 마치고 완성한 모습으로 영계에 가면 사랑 가운데(=愛中)서 살게
됩니다. 사람은 수중(水中)·기중(氣中)·애중(愛中)에서 생활합니다. 사랑으로 생기고, 사랑으로 성장하고, 사랑을 완성해서 사랑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길입니다.
인간이 태어난 목적은 잘 죽기 위해서입니다.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죽음을 전제한다는 의미합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태어났다는 자체가 죽음을 전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잘
살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만, 잘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잘 죽을 수 있는 자리를
택해 놓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자리에서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인생을 잘 살다가도 끝맺음을 잘못하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시작이 중요하지만 끝맺음과 결과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상의 생활은 시작과 과정과 끝이 똑같아야 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화예식은 죽었을 때 했습니다. 참부모님은 이제 성화예식은 죽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타락해서 죽은 자가 되었고 원죄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중생(重生)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복중에 생길 때부터 사탄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주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혈통을 되찾아 지상에서
무형의 참부모님과 실체의 참부모님을 생활의 주인으로 모셨다면 영계에도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지상생활이 곧 영계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 살다가 죽을 때 성화예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 중생하고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
부활하고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 성화예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영계에 들어갈 때 자동적으로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혈통을
하나님의 혈통으로 바꾸어야 성화예식을 할 수 있습니다. 혈통을 바꾸는 것이 성주식이고 축복식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 육신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됩니다. 축복가정들은 육신을 화장해서 강물에 뿌리지 않습니다. 완성하지 못하고 영계에 갔을 때는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열매가
나무에서 완숙해야 하는데 완숙하지 못하고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나무에 붙어서 완숙해야 하는데 나무가 없으면 붙을 수가 없습니다.
영인체가 육신에 미련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 육신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당을 잡아서 묻어줘야 합니다.
풍수설에는
음택(陰宅)과 양택(陽宅)이 있습니다. 양택은 육신을 지니고 사는 집을 말하고, 음택은 죽은 후에 육신이 묻히는 곳을 말합니다. 동양에서는 좋은
음택을 골라서 조상을 모셨습니다. 조상의 묘를 좋은 곳에 잘 쓰면 후손이 잘 되고 조상의 묘를 잘못 쓰면 후손이 망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세계, 자연과 만물세계를 지을 때 모두 서로의 형상을 닮게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산이나 들도 그 지형이 어떤 것은 닭을 닮았고,
어떤 것은 소를 닮았으며 어떤 것은 토끼를 닮았고, 어떤 것은 봉황을 닮았습니다. 그 지형 가운데 제일 좋은 자리를 명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100점짜리 명당에 50점밖에 안 되는 사람이 들어간다면 그 후손은 망합니다. 주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준비된 자리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육신과 영인체의 구조 및 상대적 관계 290
육신(肉身)은 육심(肉心)과 육체(肉體)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데, 육심은 육신의 마음에 해당하고, 육체는 육신의 몸에 해당합니다.
영인체도 생심(生心)과 영체(靈體)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생심은 영인체의 마음에 해당하고 영체는 영인체의 몸에 해당합니다.
육신은 외부에서 무형의 공기나 빛을 통해 양적(+)인 영양소를
받고, 유형의 음식물을 통해 음적(-)인 영양소를 섭취하는 동시에 자체에서는 육심과 육체가 수수작용을 하면서 성장합니다.
영인체도 육신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양적인 영양소와 음적인 영양소를 받고, 자체에서 생심과 영체가 수수작용을 하면서 성장합니다. 생심과 영체가 수수작용을 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생소(生素)라는 양적인 요소를 받고, 육신으로부터 생력요소(生力要素)라는 음적인 요소를 받아 성장하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생소는 원리와 사랑이고, 생력요소는 육신이 조성한 생명의 힘 곧 원리를 생활화한 인격입니다.
영인체와 육신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입니다.
영인체가 주체이고, 육신은 대상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영인체는 육신이 주는 생력요소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생소를 받으면서 성장하는데,
성장하면서 육신에게 다시 생령요소(生靈要素)를 돌려줍니다. 생령요소는 육신을 통해 인격을 생활화하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생령요소는 양적인
요소가 되고 생력요소는 음적인 요소가 됩니다. 영인체와 육신이 생령요소와 생력요소를 주고받음으로써 인간은 육신을 쓰고 영인체를
성장시킵니다.
모든 존재의 성장과 완성은 소생기·장성기·완성기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육신을 지니고 자라는 초기, 즉 소생기의 영인체는
영형체(靈形體)라 합니다. 영형체는 영형체급 영계에 갑니다. 그 다음에 장성기의 영인체는 생명체(生命體)라 합니다. 생명체가 가는 곳은
낙원입니다. 그 다음에 완성기에 영인체인 생령체(生靈體)가 되면 천국에 갑니다.
낙원과 천국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주님이 계신 곳은 초막이든 궁궐이든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천국을 보기 때문에 낙원과 천국은 다릅니다. 낙원은 원죄를
가지고도 갈 수 있고, 미완성해도 갈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원죄가 없어야 갈 수 있고, 영인체가 완성해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또 천국의 기본단위가 가정이기 때문에 가정을 이루어야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천국으로 갈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오른편 강도에게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장 43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됐지만 천국 생활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천국은 사랑이 완성된
세계, 심정이 완성된 세계인데 사랑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은 사랑을 해보지도 못했고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형제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했고, 선민이라는 유대 민족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만나서 사랑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과 심정의 세계인 천국에 입성하지 못하고 오른편 강도에게 “나와 같이 낙원에 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천국이라는 개념은 원리적 개념과 전혀 다르게 쓰이고 있습니다. 원리적으로 본 천국은 원죄를 갖고는 갈 수가 없으며,
가정단위로 가는데 완성한 영인체가 가는 곳입니다.
인간의 영인체는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에만 성장하고 완성합니다. 만약 영인체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육신을 잃었다면, 그 영인체는 지상의 후손이라든가 자기의 성품과 소질이 맞는 사람의 육신을 빌려 그의 영인체와 함께 성장하고 완성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 육신을 지닌 시간이 대단히 귀중합니다. 육신을 지니고 모든 것을 느끼고 체휼하고 완성하고 나서 영계로
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원래 하나님이 구상하신 인간 창조의 설계도입니다.
인간의 완성은 영인체의 완성입니다. 영인체의 완성은 하나님이
찾아올 수 있는 생심의 완성이요, 생심의 완성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심정의 완성입니다. 심정의 완성은 참사랑의 완성이요, 하나님의 소망이신
인격 완성입니다. 심정의 완성은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고 절대성을 완성한 터전에서 오는 것입니다. 절대성을 지켜 참혈통의
전수(傳受)가 완성되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육신을 쓰고 생령체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 완성은 심정 완성과 절대성 완성 두 가지입니다.
여기서부터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이 전수되고 상속됩니다. 영인체의 완성은 바로 인간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육신생활을 통해서 영인체 하나를 완성하는
것이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목적을 달성하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인체가 영계에 가서 영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상에서 영인체를 완성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육신에서 영인체로 가는 요소가 생력요소인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원리와
말씀을 육신을 통해서 생활화한 인격의 요소가 생령요소입니다.
늙어서 죽을 날이 가까이 오더라도 죽는 순간까지는 육신을 통해서 영인체를
성장·완성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생활이 중요합니다. 영인체를 완성시킨다는 말은 사랑의 완숙, 심정의 완숙을 말합니다. 완숙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고 느끼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 완성의 최종 목적은 4대심정권의 완성입니다. 4대심정권의 완성은
절대성 위에서 세워집니다. 아무리 심정 완성의 길을 가더라도 절대성을 지키지 않고 타락해 버리면 그 순간에 끝납니다. 그 다음부터는 절망입니다.
희망이 없어지고 자기 속에서 생소가 솟아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쁨이 넘치지 않습니다.
(1) 육신생활의 중요성
293
육신을 지니고 영인체의 성장을 완성해야 합니다. 완성은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육신이 있어야 영인체가 생기고 영인체가
성장하고 완성합니다. 육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지상생활을 통해서 4대심정권을 완성해야 합니다. 참사랑을 체휼하고 참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지상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지상에 살면서 죄를 지었다면 반드시 지상에서 속죄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속죄할 때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야 죄가 청산되는데, 영계에서는 탕감법(蕩減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만 속죄할 수 있습니다.
육신
쓰고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를 다 벗지 못하고 영계에 가면 영계에서 죄를 벗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 재림해서 육신을 지닌
인간을 통해서 그 죄의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2000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영계에서 그 정도로 고통을 당하기
전에 지상에서 단 1분이라도 소중히 여기면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육신생활은 영인체를
탄생시키고 영인체를 번식시킵니다. 육신이 없으면 영인체의 번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인체에 지극히 필요한 것이 육신입니다. 영인체를 성장시켜야
할 육신인데도 불구하고 육신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에 생활 자체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지상생활은 영계를 결정합니다. 지상생활을 어떻게
했느냐가 영계생활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회개하고 가겠다.’고 하면 이미 늦습니다. 열매가 상처를 입고
쭉정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상에서 절대 잘못되지 않게 살고 영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육신을 지니고 선한 생활을 하면 영인체의
선화(善化)가 이루어져 천국에 가고, 악한 생활을 하면 영인체의 악화(惡化)가 이루어져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
주관권(主管圈)으로 가고, 악한 사람은 사탄 주관권으로 가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리대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영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원리대로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누가 뭐라고 하든지 자기의 본심에 따라서 양심의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합니다. 영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양심을 주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을 대신한 것입니다.
양심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터전이 본심입니다. 본심은 성상적인 분야의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양심을
통해서 본심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심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어떤 말도 듣지 않습니다. 지극히 독자적이고 지극히 중심의
자리에 있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속성입니다.
양심은 하나님보다 앞서 있고, 부모보다도 앞서 있고,
스승보다도 앞서 있습니다. 부모는 나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속에 있는 양심은 밤이나 낮이나 자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스승은
언제나 나와 함께할 수 없지만, 내가 나쁜 짓을 하면 양심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하면서 내 안에서 참스승의 노릇을 합니다. 나를 언제나
올바르게 기르는 부모는 나와 영원히 함께할 수 없지만 양심은 부모보다 더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나를 지도하면서 선한 영인체를 만들도록
노력합니다.
영인체는 지상에 살면서 만드는 인간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어떤 작가가 자기의 일생을 투입해서 작품 하나를 만들어 놓고
죽었다면, 그 작품은 그 사람의 일생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귀한 영인체 하나를 완성시켜 놓고
가야 합니다. 어떤 작품보다도 영인체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귀중한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중한 생명력을
지닌 작가로서 이 세상에서 영인체라는 작품 하나를 완성시켜 놓고 돌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길입니다.
육신을 중심하고 영인체가 번식하고
탄생합니다. 그래서 지상생활은 영계를 결정합니다. 누가 지옥이나 천국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생활 그 자체가 영계를 결정합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내가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은 내가 예수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참되게
살아야 하고, 보람되고 가치 있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영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2) 영인체의 중요성
296
영인체는 영계의 주인입니다. 육신을 지니고 지상에서 사는 동안 영인체가 영계에 가서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영계는 사랑의 세계이고 심정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영인체가 사랑을 완성하고 심정을 완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영인체는 육신의 주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영교(靈交)합니다. 영교는 영적인 교제를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영교는 영인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영교는 영인체 속에 있는 생심이 심정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영인체는 하나님과 영교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원하듯이 영인체도 영생합니다.
영인체는
육신과 모양이 동일합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인체는 육신을 통해서 생기고 육신을 통해서 성장 완성합니다.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영인체는 아름다워지기도 하고 추한 모습이 되기도 합니다. 잘못된 생각을 하면서 산 사람은 영인체가 흉측하게 생긴다는
것입니다. 몸은 똑같은 사람인데 얼굴 자체가 아주 흉측한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반면에 지상에서 볼 때는 형편없는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못생겼다고 손가락질 받은 사람도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영인체가 완성되면 영계에서는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거룩하게 보입니다.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영인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영인체 속에는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의 일생이 자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것까지 기록됩니다. 생각뿐만이 아니라 말하는 것도 한 치의 오차 없이 기록됩니다.
과거에는 각종 경기에서 선수들이 조그마한 오차를
놓고 심판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에는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녹화 기술이 발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카메라가 동원되어 입체적으로 촬영합니다.
한 방향이 아니라 전후·우좌·상하에서 촬영합니다. 그것을 분석하면 금방 판정이 납니다. 느린 동작으로 보면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경기에 영향을 주는 말을 했다면 그것까지 기록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생각한 것도 영인체에 기록됩니다.
(3)
천국과 지옥의 결정 297
영계에 가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다 왔는지를 금방 압니다. 그러니까 누가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가 행한 대로 가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희생하고, 고통스럽더라도 남을 위해서 산 사람은 천국에 갑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타아적 자각(他我的自覺)’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의 체험을 남을 위한 실천력으로 만드는 것이 타아적 자각입니다. 그것이 곧 이타(利他)요, 위타(爲他)입니다.
반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고, 남을 희생시키면서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자아적
자각(自我的自覺)’이라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깨달은 것을 자기를 위해서 결실을 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이기(利己)요,
위기(爲己)로서 사탄의 요소입니다.
천사장은 아담과 해와가 완성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아담·해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이 부모라는 것에 중점을 두어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장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가 하나님 행세를 했습니다.
그것이 천사장의 타락입니다. 그때부터 천사장은 사탄이 되었습니다.
타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닙니다. 많은 시간 동안 그런 요소가 작용해서 결정된 것입니다. 타락도 자아적 자각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타적이 되어야지 이기적이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언제나 타아적 자각이
필요합니다.
본연의 인간은 마음속에 타아적 자각을 지니고, 타락한 인간은 마음속에 자아적 자각을 지닙니다. 본연의 인간과 타락한 인간에게는
그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자기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과 행동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한 점에서
목적과 동기가 달라지고 방향이 달라집니다. 지옥과 천국으로 갈라지는 것은 자신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4) 생심과 육심의 관계로 본 인간의
마음 298
영인체의 마음인 생심은 육신의 마음인 육심을 통해서 완성하는데 생심의 완성은 곧 영인체의 완성입니다. 생심과
육심의 관계는 성상과 형상의 관계와 같습니다. 성상은 주체고 형상은 대상입니다.
인간의 마음 298
하나님을
중심해서 생심과 육심이 성상과 형상의 관계로 상대기준을 조성해서 주고받으면 마음이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은 생심과 육심의 수수작용으로
합성일체화한 하나의 작용체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본심이 있고 양심이 있습니다.
창조목적을 놓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심과 육심이 상대기준을 조성해서 수수작용을 하면 합성일체화한 마음이 되는데 그 마음을 본심이라고 합니다. 본심은 육심이나 생심 둘 중
하나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둘이 하나 되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할 때 본심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본심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생심과 육심이 있어야 합니다. 본심의 성장과 완성은 생심과 영체, 그리고 육심과 육체의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육심은 육신이 살아있을 때에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생심은 본심과 함께 영원히 영인체 속에 남습니다. 육신이 노쇠하여 흙으로 가게
될 때 육심도 같이 없어지지만 생심은 본심과 함께 영원히 영인체 속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진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중심해서 상대기준을 조성한 생심과 육심의 수수작용으로 합성일체화한 마음이 양심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상대기준을
조성한 생심과 육심이 수수작용하면 합성일체화한 작용체를 이루게 되는데, 그 작용체가 바로 마음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생심과 육심이 수수작용해서 합성일체화한 마음이 본심이고, 진리를 중심해서 생심과 육심이 수수작용해서 합성일체화한 마음이 양심입니다.
인간은
선하게 살고자 하는 본심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해서 절대 진리의 기준은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중심하고 양심기준도 달라집니다. 이념과 사상이 다르면 양심의 지향성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양심을 통해서 믿고 있는 진리라는 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도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연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일체 된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을 원리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래서 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원리는 근본입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진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통해 진리의 내용을 우리에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그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고 거짓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짓된 것을 진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양심을 통해서
나타난 진리관도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본심과 양심의 관계 300
본심과 양심은 성상과 형상의
관계입니다. 본심은 안과 같고 양심은 밖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상대기준을 조성한 본심과 양심의 수수작용으로 본연의 마음이
이루어집니다.
본심과 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지향하고 그 뜻을 따르게 합니다. 본심과 양심은 하나님의 뜻과 방향을 달리한
사심(邪心)에 반발하고 선을 지향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타락인간의 생심과 사심
타락인간의 생심과 육심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생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미숙한 상태로 사탄의 영향권에 머물게 됩니다. 이러한 생심은 육심을 대해서
주체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고 오히려 육심의 주관을 받습니다. 성숙하지 못해서 육심의 주관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미숙한 생심이 사탄의
주관권에 있는 육심과 수수작용하여 합성일체화한 마음을 사심이라고 합니다. 생심이 성숙해야 되는데,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서 완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성숙상태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육심과 일체가 되면 그 영향으로 육심이 더 성숙하기 때문에 육심이 주체가 되고, 생심은 그
육심의 주관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의 생심과 육심이 주고받아 합성일체화한 마음이 사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리적인
모습을 흉내내서 먼저 이루어 놓는 것이 사탄의 세계입니다.
참고
1) 영계에서의 3단계 심판
302
영계에 가면 3단계 심판을 받습니다. 원래는 열두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도 최소한 세 과정의 심판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인격심판(人格審判)이고, 두 번째가 공로심판(功勞審判)이며, 세 번째가 공금심판(公金審判)입니다.
그것이 지상생활에
대한 3대 심판입니다. 인격심판을 통과하려면 사랑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참사랑은 부부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참사랑을 지상에서 완성해서 영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공로심판을 통과하려면 공적인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인간은 공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공금심판을 통과하려면 모든 재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식의 정립이 필요합니다.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고 생명도 내 것이 아닙니다.
2) 인간이 지켜야 할 3대 철칙 302
참아버님이 2006년 6월 13일,
천정궁 입궁 대관식 때 천일국 백성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인간이 지켜야 할 3대 철칙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혈통 보존, 둘째가 인권 유린
금지, 셋째가 공금 약취 금지입니다.
혈통 보존은 순결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혈통을 절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권을 유린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함부로 인사 조치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외면을 볼 때는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그 배후에는 그 사람이 그 자리로 갈 때까지 조상들의 수많은 피 흘린 공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자기가 걸립니다. 그래서 남의 인권을 유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금을 약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공금은
아무렇게나 쓰면 안 됩니다. 이런 내용들이 우리가 지상에서 육신을 지니고 살면서 지키고 책임져야 할 과제들입니다.
3) 주의할
것 303
원리 말씀은 내 영인체의 양식입니다. 음식은 육신의 양식이지만, 내 영원한 영인체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과
원리입니다. 말씀과 원리 속에는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리를 듣고 잊어버리면 마음속에는 사탄의 생각과 사탄의 말만
남습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용서받고 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을 새롭게 가다듬고 출발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 기도는 내 영인체를 살리는 공기와 같습니다. 매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공기가 없어서 죽은 자와 같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으면 사탄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언제나 불평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불평불만은 영인체에게 독약이 됩니다. 가다가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져도 불평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가르쳐 줍니다.
심판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말씀심판입니다. 말씀을 불신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느냐 하는 말씀심판이 있습니다. 둘째가 그 말씀을 실천했느냐 하는
인격심판이 있고, 셋째가 그 말씀대로 사랑했느냐 하는 심정심판이 있습니다. 말씀심판·인격심판·심정심판은 자기가 하는 자기
심판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인간을 사랑했느냐, 만물을 사랑했느냐, 원수까지 사랑했느냐,’하는 사랑의 심판, 즉 심정의
심판이 있습니다.
‘원리본체론’의 결론은 ‘위하여 살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위해서 사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도 위하여 살아야 하고 만물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제2장 타락론
봄 동산에 돋아나는 풀은 잎을 다 뜯어버려도
뿌리가 살아 있는 한 새싹이 계속 돋아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죄를 싫어해서 없애려고 하지만, 죄는 돋아나고 또 돋아납니다.
그것은 죄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애려면 그 뿌리를 뽑아버려야 합니다.
서론
인간은 누구나 악(惡)을 버리고
선(善)을 따르려는 본심의 지향성(指向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악의 세력에 몰려 본심이 원하지도 않는 악을 행하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그 악의 주인을 사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된 인간은 뱀으로 표현된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께서 “따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한 선악과(善惡果)를 따먹고 원죄(原罪)를 가진 사탄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사탄의 주관하에서 살게 되었으며,
사탄은 세상의 거짓된 신이 되고 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타락론에서는 죄의 뿌리(原罪), 사탄의 정체, 타락의 동기와 경로, 타락의 결과,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행위를 갆섭하지 않으신 이유 등 타락과 죄의 근본문제를 구명할 것이다.
1. 죄의 뿌리
봄
동산에 돋아나는 풀은 잎을 다 뜯어버려도 뿌리가 살아 있는 한 새싹이 계속 돋아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죄를 싫어해서 없애려고 하지만,
죄는 돋아나고 또 돋아납니다. 그것은 죄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애려면 그 뿌리를 뽑아버려야 합니다.
인류 최초의 죄를 거론한
것은 성서입니다. 성서의 창세기 2장과 3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선악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고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그 성구대로라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이 죄의 뿌리,
곧 원죄(原罪)입니다.
죄의 뿌리를 뽑으려면 먼저 선악과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선악과를 놓고 많은 사람(기독교인)이 문자 그대로
과실이라고 주장합니다. ‘선악과’의 ‘과’자가 열매 ‘과(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분명히 선악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을 잘 분석해 보면, 선악과가 문자 그대로의 과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에덴동산에는 아담과
해와 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하나님이 따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신 계명을 어기고 굳이 그것을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을 지경에 있는 것도 아닌데, 죽음을 무릅쓰고 따먹은 것이 과일이라면 그것은 납득이 안
됩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지, 죽기 위해서 먹지 않습니다. 따먹으면 죽는 줄 알면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면, 그것은 자기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어떤 것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9장 25절에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목숨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귀한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 지구상의 어떤 과일도 천하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생명 이상의 가치를 지닌 어떤 것으로
봐야 합니다.
마가복음 7장 15절의 예수님 말씀을 보면,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5장 11절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성서에는 아담과 해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렸다(창세기 3장 6~7절)고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만일 선악과가 나무의 열매였다면, 틀림없이 손으로 따서 입으로 먹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죄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선악과가 먹는 과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선악과는 문자 그대로 복숭아나 포도나 사과와 같은 열매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해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주셨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물론 부모가 자식의 성숙 여부를 시험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걸고 자식을 시험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꺼지
아니하고···.’(이사야 42장 1~3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놓고 하신 말씀이지만, 그가 그렇게 자애로운 것은
하나님의 신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아도 하나님은 목숨을 걸고 무자비하게 인간을 시험할 분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 자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죽었다면 그 책임은 부모가 져야 합니다.
성경의 중요한 부분은 모두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의 뿌리가 된 선악과도 비유나 상징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신학계에서는 선악과가 과일이냐, 아니냐를 놓고 관심이 큽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죄에 대한 문제는 어떤 한 종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역사 속의 갈등과 대립을 야기한 근원적
문제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죄의 근본 문제를 알고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종교적인 차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악과에 대한 문제가 확실히 밝혀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하시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해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후, 용서는 커녕 에덴동산에서 곧바로 추방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1)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과일은 나무에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열리고, 배는 배나무에서 열립니다. 따라서 선악과는 선악나무에서 열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 2장 9절을 보면,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에덴동산에 아담과 해와가 있고 또 간교한 뱀이 있었는데 뱀이 해와를 꾀어 아름답고 보기에도 좋고 탐스러운 선악과를 따먹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정체를 밝혀야 선악과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구약 성서 66권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창세기 2장 9절에 단 한번 나옵니다. 그 방대한 말씀 속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언급은 그 한
구절밖에 없습니다.
범인을 잘을 때 단서가 많으면 범인을 쉽게 빨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용의자라 하더라도 본인이 범행을
부정하고 단서가 없으면 무혐의로 처리됩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죄를 입증할 수 있는 단서 확보가 필요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죄의
근원자(根源者)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딱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데, 그 나무에 대해서는 정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주변까지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가 동산 가운데 있었고, 거기에 남자인 아담과 여자인 해와가 같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정체를 모른다면 그곳에 같이 있던 생명나무를 통해 그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던 생명나무가 무엇인지를 알면, 그 곁에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정체가 무엇인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신·구약 성서에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담이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기를 소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잘 커서 훌륭한 모습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소망에 부합해서 커야 합니다. 부모의
소망과 자식의 소망이 같아야 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 가운데에 있는 생명나무로 가는 것이 소망이라면, 하나님의 소망도 아담이 생명나무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잠언 13장 12절에도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맞이하는 것이 소망이면서도 생명나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소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아들을
보내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을 보면,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소망이 생명나무였고, 구약시대 성도들의 소망도 생명나무였고, 신약시대 성도들의 소망도 모두 생명나무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을
보면,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과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날
에덴동산의 아담이 소망하던 생명나무와 지금 우리가 소망하는 생명나무는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은 아담을 비롯하여
신·구약 성도들이 그토록 소망한 생명나무의 정체를 밝히는 단서가 됩니다.
잠언 11장 30절을 보면,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했고, 요한복음 15장 5절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 로마서 11장 17절에는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은 자 되었은즉···’이라고 했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볼 때 생명나무는 예수님을 비유한 포도나무나 감람나무처럼 사람을 비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기록된
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의 소원이 생명나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으니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는 타락하지 않은 아담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 곧 아담을 비유했습니다. 그렇다면 같이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여성, 곧 해와를 비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가 선악과라면, 그 선악과는
해와의 어떤 열매일 것입니다. 열매는 사랑의 결과를 말하므로 선악과는 해와의 사랑, 즉 해와의 정조입니다.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는 정조가
생명보다 귀합니다. 과거 한국의 여성들은 정조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여자들은 사춘기가 지나면 은장도를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되었을 때, 자기의 몸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정조는 여자에게 있어 생명보다 더
귀합니다.
나무는 열매를 통해서 결실하고 열매를 통해서 번식합니다. 마차가지로 사람도 사랑의 열매인 자식을 통해서 혈통이 계승되고, 사랑을
통해서 결실을 이룹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 있었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완성한 해와이고, 그 나무에 달린 선악과는 해와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은 해와의 사랑을 유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새 젊은 처녀 총각들이 만나서 “너 요새 여자 친구 만나던데
따먹었느냐?” 라는 말을 하고 다닙니다. 세상에서 따먹었다는 말은 여자의 정조를 유린했다는 말입니다. 따먹었다는 말은 6000년 전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은 사탄이 해와의 사랑을 유린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따먹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때가 되면 따먹을 수 있지만, 때가 되기 전에는 따먹으면 안 됩니다.
해와는 자기
책임분담에 의해서 사랑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하신 말씀을 믿고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면, 해와가 사춘기를 지나 성숙했을 때
하나님에 의해서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 축복의 대상이 아담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몸입니다. 성숙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해와는 선한 나무가
됩니다. 선한 나무에서는 선한 열매가 열립니다. 그것이 영원한 선입니다.
해와는 자기의 행동 여하에 따라 선한 나무도 될 수 있고, 악한
나무도 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중심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남자는 모두 생명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생명나무로 비유됩니다.
여자는 원래 선한 나무로 태어나지만 성장 과정에서 잘못되면 악한 나무가 됩니다.
남자는 생명나무입니다. 이 생명나무가 아기 때부터
생명나무의 사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춘기가 지나야만 생명나무로서의 사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따먹으면 안 됩니다. 흔히
말하기를 여자는 밭이라고 합니다. 해와가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의 씨를 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를 탄생시켰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의
공주가 있는데, 그 공주가 다른 나라의 왕자와 관계를 맺으면 그 공주는 왕자의 신부가 되고, 왕자의 자녀를 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주가 어느 날 강도에게 몸을 빼앗겼다면 강도의 부인이 되고 그 씨를 받으면 강도의 자식을 낳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해와는 자기 자신의 책임분담
수행 여부에 따라서 선의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악의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남자는 생명의 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은
성장하면 하나님의 몸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를 번식해야 하는데, 사탄의 몸이 되어 사탄의 자녀를 번식했습니다. 왜냐하면 해와가 먼저 타락해서
나중에 아담까지 타락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역사는 죄악을 번식하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결론은 생명나무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아담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해와이고, 선악과는 해와의 사랑, 즉 해와의 정조를 비유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은 해와의 정조를 유린했다는 뜻입니다.
2) 뱀의 정체 314
창세기 3장에는 뱀이 해와를
유혹해서 선악과를 따먹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뱀은 파충류에 불과합니다. 그런 뱀이 인간을 유혹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유혹하려면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해와를 꾀었다는 뱀은 파충류가 아니라 다른 무엇을 비유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뱀은 혀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혀는 말을 하는 기관입니다. 혀가 둘이라는 것은 한 입으로 두말 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 뱀은 먹을 것을 보면 그냥 먹지
않고 반드시 꼬아서 먹습니다. 그래서 뱀은 유혹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에는 지식이 발달하고 지능이 성숙함에 따라서 파충료가 인간을 유혹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해와를 유혹한 뱀은 비유일 뿐 파충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에덴동산의 뱀은 영물인 인간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영물과 대화를 나누려면 그 상대도 영물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뱀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 4절과 5절에는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처럼 뱀은 하나님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입니다. 무형의 존재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뱀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세 번째, 뱀이 인간을 유혹해서 타락시켰습니다. 그것은 뱀이 인간보다 지혜가 높았음을 의미합니다.
유치원생이 대학생을 유혹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대학생이 유치원생을 유혹했다면 그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뱀과 인간은 지혜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혜도 없는,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파충류인 뱀이 인간을 유혹할 수는 없습니다.
네 번째, 그 뱀의 소재지가 하늘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8절과 9절에는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고 했습니다. 뱀이 쫓겨나기 전에는 하늘에 소재한 큰
용이었습니다.
그런 정황을 놓고 볼 때 아담과 해와를 타락시킨 뱀은 하등동물이 아닌 영적 존재라고 봐야 합니다. 에덴동산에는 타락한
장본인인 아담과 해와를 빼놓고 제3자는 하나님과 천사장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셨으니 그 분이
아담과 해와를 타락시켰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타락시킨 존재는 천사장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말을 듣고 “거룩한 천사가
인간을 타락시키다니 무슨 소리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적으로, 실증적으로 딱 들어 맞는 말입니다. 기독교인은 성경을 믿고 성경을
공부하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증거해 주어야 납득합니다.
범죄사건의 수사는 제일 가까운 곳부터 시작합니다. 먼저 주변사람을 놓고 피해자와
어떤 관계인가, 어떤 원한이 있는가를 먼저 조사합니다. 해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했던 에덴동산의 범죄자는 먼 곳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존재인 천사였습니다.
3) 천사의 타락과 인간의 타락 316
요한계시록 12장 9절을 보면,
천사를 큰 용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큰 용이 쫓겨났습니다. 그 용을 옛 뱀이라 하고 마귀, 사탄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사탄이 천하를 꾀고
하나님의 뜻을 파괴했습니다. 하늘에서 쫓겨나기 전 그 용의 정체는 천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짓기 전에 천사세계를 먼저
지었습니다. 천사세계를 지은 데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종, 즉 심부름꾼으로 부리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송영(誦詠)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사세계는 세 부류의 조직이 있고 조직마다 천사장이라는 관리자가 있었는데, 그 관리자는 각각
루시엘·가브리엘·미가엘입니다.
루시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천사세계에 중보(仲保)하는 사랑의 천사장이고, 가브리엘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장이고,
미가엘은 군대를 관장하는 힘의 천사장입니다. 세 천사장 중에서 루시엘 천사장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루시엘 천사장이
타락했습니다.
이사야 14장 12절을 보면, 루시엘 천사장에게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침의 아들 계명성은 루시엘을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4잘을 보면, ‘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천사가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무슨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무슨 죄를 범했다는 것인가? 유다서 1장 6절과 7절을 보면,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음란도시는 역사상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셨습니다. 음란의 도시였던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천사와 같이 색을 좇고 간음을 행하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천사장 루시엘이 바로 음란죄, 간음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간음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천사장 루시엘이 어떤
존재였느냐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어를 보면 ‘엘’자는 전부 남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루시엘·가브리엘·미가엘·이스라엘 모두가 남성을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루시엘도 남성적 존재입니다. 루시엘이 남성적 존재라면 간음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담이 아니라 해와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타락은 어떻게 되었느냐? 창세기 2장 25절을 보면,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아담과 해와가 벌거벗고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7절에는 아담과 해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즉 범죄한 후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좋은 것은 드러내고 싶고, 나쁜 것은 가리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만일 선악과가 나무 열매였다면, 손으로 따서 입으로 먹었으니 손과 입을 가려야 하는데, 왜 하체를 가렸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무화과 나무 잎으로 하체를 가렸다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지금도 존재하는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없는 이유는 아담과
해와를 비유한 상징물이기 때문입니다.
욥기 31장 33절을 보면, 욥이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욥은 다른 사람(아담)처럼 죄악을
가리거나 숨기면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아담과 해와는 하체를 가렸다고 했으니 하체가 허물이요, 범죄한 부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체로 저지를 수 있는 죄는 간음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간음죄를 저질렀다는 말인데, 여기서 그 상대로
간음죄라는 같은 죄목을 가진 루시엘 천사장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하면서 꾸짖으셨습니다. 유대 백성을 향해 마귀의 자식, 사탄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3장 7절과 23장 33절에도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하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보고 외쳤습니다. 또 로마서 8장 23절을 보면,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속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되기를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양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은 타락으로 양자보다 못한 상태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핏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사탄의 자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사탄은 원래 천사장 루시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부모의 종은 아들딸의 종도 됩니다. 그런데 종인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아들딸을 타락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식이 아닌 사탄의 자식이 되어버렸고,
그에 따라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창조주로서의 권위와 위치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1절에서는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하며 세상의 임금들을 보고 마귀·사탄이라고 했습니다. 무형의 천사장 루시엘이 사탄이 되어 땅
위의 인간들을 모두 주관하고 있으니 그가 나라의 주권자와 지도자들을 붙들고 왕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말씀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장 13~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협착해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길에 잡초가
나고, 길이 다 막혀버렸습니다. 악으로 가는 길은 많은 사람이 가기 때문에 길이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악의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고, 선의
길은 영생의 길입니다. 그런데 선의 길은 찾는 이가 없어서 길이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뱀이란 말은 사탄을 상징하는데, 타락한
천사장 루시엘을 뱀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인간을 타락시켜 주인의 자리에 섰기 때문에 세상의 신이 되고,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해왔습니다. 세상의
임금, 세상의 신이 쫓겨나고 거기에 하나님이 들어가면 비로소 세상은 평화의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는 타락한 천사장과 해와의
불륜한 사랑 관계를 말합니다. 음란한 성관계가 바로 죄의 뿌리입니다. 타락한 천사장은 종으로서 주인집 딸을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해와의 정조는
때가 되면 상대인 아담에게 허락해야 하는데 때가 되기도 전에 종과 불륜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음란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뿌리는 바로
‘음란죄’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상대인 아담이 아니라 종으로부터 종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 음란죄입니다. 종의 거짓된 사랑·거짓된
생명·거짓된 혈통을 이어받은 것은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사탄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절대성의 가치를 세우지
못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사탄의 자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려면 절대성의 가치를 세우고, 절대성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음란으로 타락했다는 증거 321
인간이 음란으로 타락했다는 증거는
많습니다. 종교마다 음란을 최고의 죄로 꼽습니다. 살인죄·강도죄·음란죄 등 각종 죄 가운데 종교마다 음란죄를 제일 무거운 죄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의 뿌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지만, 성을 통해 혈통이 이어지기 때문에 순결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은 남자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8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아담이 생식기를 잘못 사용해서 사망의 피, 천사장의 피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증표로 할례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이스라엘 민족 600만 명을 학살하면서 남자들의 팬티를 벗겨
할례 자국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말세에는 음란으로 멸망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인이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밤사이에 원수가 몰래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하인들이 주인에게 가서 ‘가라지가 생겼는데 뽑아버릴까요?’ 하고 묻습니다. 그때 주인은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을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태복음 13장 24~30절)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타락한 세계를 지켜보고 그것을 인정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느 것이 가라지이고,
어느 것이 곡식인지 누구나 다 구별할 수 있는 때가 된 것입니다. 처음에 싹이 날 때는 전문가가 아니면 잘 모릅니다.
벼농사를 지어 본
사람은 벼와 피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전문가가 아니면 벼를 두고 피만 뽑기가 어렵습니다. 얼핏 보면 똑같아 보이기 때문에 피를 뽑으려고 하다가
자칫 벼를 뽑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벼와 피를 완전히 구분할 수 있을 때까지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사회적 현실로 볼
때 문명의 발달로 인해 성범죄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성범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지고, 더
악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성을 상품화하여 돈 몇 푼을 벌기 위해서 자기의 귀한 정조를 내다 팔고 있습니다. 어린 소녀들이 성인
남자에게 향락을 제공하고 돈을 번다는 원조교제가 그것입니다.
성인 남자는 “내가 용돈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같이 놀고 나서 용돈을 좀 줬다.
그것이 무슨 죄냐?”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지도자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지도자들이 거기에 빠져 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근본적인 가치관을 들고 나서서 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지도자·어떤 학자·어떤 종교·어떤 경제인 할 것
없이 그 원칙 앞에는 다 굴복해야 합니다.
이제 원리의 본체와 더불어서 절대성 가치를 들고 나서야 합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고는 이 세상의 음란문제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원리의 본체가 절대성 가치의 중심입니다.
결론적으로 천사장의 타락과 인간의
타락은 음란의 타락이요, 불륜의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천사장은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딸을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데도 과분한 욕망 때문에 해와와
음란한 관계를 맺은 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유전죄는 혈통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입니다. 과일을 따먹는다고 해서 죄가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국가의 흥망성쇠도 음란에 좌우됩니다. 역사를 보면 통일왕국시대, 기독교왕국시대가 있었습니다. 통일왕국시대에는 사울 왕·다윗 왕·솔로몬 왕이 각각
40년으로 120년 동안 유대나라를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망했느냐? 바로 음란 때문에 망했습니다.
솔로몬 왕은 지혜의
왕이었지만, 그도 음란으로 하나님의 성전 이상(聖殿理想)에 사탄이 들어감으로써 통일왕국시대는 120년 만에 끝났습니다. 솔로몬 왕은 정식 부인이
700명, 첩이 300명에 달했습니다(열왕기상 11장 3절). 당시 왕들이 얼마나 음란죄를 많이 지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 왕궁은
사탄의 궁이었습니다. 거기서 살인도 하고, 음모도 꾸미고, 음란행위가 벌어졌습니다. 사극에서 옛 양반들이 허세를 부리고 왕족들이 음탕한 생활을
하는 것을 자주 보는데, 그런 세상이 바로 사탄세계입니다. 오늘 어떤 국가의 경제가 잘 나갈지라도 지도자가 음란하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도 처음에 출발할 때는 목이 메도록 기도하며 정성을 들여 신령한 능력을 받습니다. 열심히 해서 교회가 부흥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여성 신도와 잘못된 관계를 맺으면 그 다음부터는 초기의 신령한 능력이 사라집니다. 그 교회는 결국 끝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든지 간에 음란에 빠지면 멸망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종족도 그렇고, 단체도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청소년들의 타락, 십대들의 가출, 가정윤리의 붕괴 등은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타락
당시 아담·해와는 십대였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께 반항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 앞에 아주 고분고분 말 잘 듣던 십대 청소년들이
전환기에 이르면 이유 없이 반항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반항하던 아담과 해와와 똑같습니다.
그들은 윤락의 길을 걷고 음란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은 본연의 기준을 잊어버립니다. 가정 이상을 잊어버리고, 정상적인 가정도 꾸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을
가진 부모도 부끄러운 모습이 되고, 자기 자식을 사람들 앞에 내놓고 자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가정의 윤리도 붕괴되고, 가정의
가치관도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해와·천사장 이 세 존재가 음란죄를 지었습니다. 그때 천사장은 비록 종이었지만 지능이
아담·해와보다 높았습니다. 아담·해와는 천사장을 부모처럼 따르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에게 물어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천사장은
종으로서 주인집 자녀에게 공손한 마음으로 정확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그들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천사장이 딸과 같은
해와를 꾀어 불륜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때 해와는 천사장의 지혜를 받습니다. 이성에 눈을 뜬 것입니다. 해와는 이성에 눈을 뜨고 나서
어머니와 같은 입장에서 아담을 이성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남매였지만 해와가 먼저 이성에 눈을 떴기 때문에 어머니와 같았고,
아담은 아들과 같이 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해와는 결국 아들과 같은 아담을 타락시키고 맙니다. 천사장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아담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해와가 두 남자를 대하는 불륜을 저지르면서 본연의 가정 이상까지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해와가 저지른 불륜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어머니 같은 사람이 아들 같은 사람을 데리고 살고, 할머니 같은 사람이 손자 같은 사람을 데리고 놀아나고,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손녀 같은 사람을, 아저씨 같은 사람이 조카 같은 사람을, 아버지 같은 사람이 딸과 같은 사람을 유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종교는 어느 종교이든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금욕을 강조합니다. 출가하는 이유도 가정을 갖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종교가 금욕을 강조하는 것은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과 모순됩니다.
금욕하면 번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교에서 금욕을 강조하는 이유는 타락으로 사탄의 자식을 번식했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오셔서 참부모로서 축복을
해줄 때 그 축복의 자리에 나가게 하기 위해서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의미입니다.
2. 타락의 동기와 경로
1) 천사 창조의
목적
인간은 천사에 의해서 타락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천사를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창조한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종의 사명이고, 다른 하나는 송영의 사명입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과 요한계시록 22장 9절을 보면,
천사를 종의 사명을 하도록 지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8장 10절에는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
천사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여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0절과 누가복음 1장 31절을
보면, 천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와서 ‘성령으로 잉태했으니 고민하지 말라.’고 가르쳐줍니다. 사도행전 12장 7절에서 10절에는 베드로가
전도하다가 옥중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 쇠사슬을 풀어주고 베드로를 석방시킵니다. 그런 사명을 천사가 했습니다.
또 다른
천사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 송영과 기쁨을 돌리는 사명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12절을 보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는 예수님에 대한 천사의 송영이 있으며, 요한계시록 7장 12절을
보면,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하는 천사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송영이
나옵니다. 천사를 하나님께 송영을 드리는 대상으로 지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천사장은 종의 사명과 송영의 사명, 두 가지 다 실패했습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모두가 천사장의 주관권에 들어가는 타락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2)
타락의 동기와 경로 326
하나님은 천사를 지어놓고 만물세계를 지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딸인 아담과 해와를
지었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아들딸이고 천사는 종입니다.
천사장은 아담과 해와가 존재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가 창조되고 보니 천사장은 자기에게 오는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아담·해와에게 가는 사랑이 더 크다고
느꼈습니다.
천사장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지혜를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비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천사는 또 욕망을 가졌기 때문에
사랑을 더 받고 싶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존재의 속성입니다. 천사장은 인간이 받고 있는 사랑이 자기가 받는 사랑보다 더 크다고
느꼈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을 오히려 빼앗기는 것 같은 사랑에 대한 감소감(減少感)을 느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천사에 대한 사랑의 기준은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감소감을 느낀 것이 아주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사랑의 감소감을 느껴 해와와 관계를 맺게 되고, 영적
타락(靈的墮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영적 타락의 동기는 사랑의 감소감이고, 타락의 경로는 영적 타락에서 육적 타락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천사와 해와가 영적 타락을 했을 때 해와는 양심의 가책과 함께 불안과 공포를 느끼면서 천사의 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해와가 이성에
눈을 뜨고 보니, 자기 남편될 사람은 천사가 아니라 자기 옆에 있는 아담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해와는 아담 앞에 다시 서고 싶은 심정으로
아담을 꾀었습니다. 그래서 해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적 타락(肉的墮落)입니다.
육적 타락은 해와가 하나님
앞에 다시 서고자 하는 심정이 동기가 되어 아담을 상대한 것입니다. 아담은 아직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해와는
타락했으므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해와는 아담과 하나 되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육적 타락의 동기는 하나님 앞에 다시 서고자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아담까지 타락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담·해와는 영적·육적으로 모두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타락의 결과 천사가 타락할 때의 성품을 해와가 전수하고, 해와가 그것을 아담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까지 타락한 천사장의 성품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담과 해와는 사탄의 자식이 되어버렸고, 사탄은 세상의 신이
되었습니다.
정리해 보면, 타락의 동기는 사랑의 감소감과 다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심정, 두 가지였습니다. 천사장과 해와의 타락은
영적 타락이었고, 해와가 아담과 다시 관계를 맺은 것이 육적 타락이었습니다.
해와는 영적 타락을 하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동시에 천사장의 지혜를 받았습니다. 해와가 천사장의 지혜를 받고나서, 자기 남편 될 사람이 아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타락시키고 보니 결국 하나님의 아들까지 타락시킨 결과가 되었고, 그 때문에 천사장의 타락성을 아담과 해와가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인류는 타락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3. 인간은 어떻게 성장기간 중에 타락했는가?
328
1) 사랑의 힘과 원리 힘
하나님은 원리로 창조했고, 원리로 창조한 그 세계를 사랑으로 주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힘이 원리의 힘보다 강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천사장을 중심으로 한 비원리적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의 힘은 원리의 힘보다
강합니다.
성장기간에 있는 미완성한 아담과 해와는 천사장의 비원리적 사랑의 힘에 의해 언제나 타락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원리의 힘이 사랑의 힘보다 약하지만 원리의 힘에 믿음이 보태지면 사랑의
힘보다 더 강해집니다. 천사장이 비원리적인 사랑으로 유혹하더라도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아담과 해와는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기관차도 이상이 없고 철길도 이상이 없다면, 기관차는 순조롭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관차가
철길 위를 달리다가 기관차의 반대쪽에서 외부의 힘이 부딪혀 오면 그 기관차는 탈선합니다. 그러니까 아담·해와가 원리의 궤도를 타고 가는데
천사장이 비원리적인 사랑으로 유혹을 하면 그 궤도를 탈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입니다.
2) 계명을 주신
이유 329
하나님이 아담·해와에게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이유는 성장기간에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랑의 주관을 받을 수 없었던 미완성기에는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이 발동하면 타락하게 되므로 타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계명을
주셨습니다.
3) 계명이 필요한 기간 329
‘따먹지 말라.’는 말씀은 성장기간에만 필요합니다. 완성하면
따먹어도 되는 것입니다.
성장기간은 아담·해와의 책임분담을 완성하는 기간이기 때문에 그 기간에 하나님은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해와는 소생기(蘇生期)·장성기(長成期)·완성기(完成期)를 거치는 성장기간에는 하나님의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성장기간이라는 간접주관권을 거쳐서 직접주관권으로 나아가는데, 간접주관권에서는 계명이 필요하고, 직접주관권에서는 계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4. 타락의 결과
1) 사탄과 타락인간 330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아담을 통해서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완성한 아담·해와가 참된 부모가 되고, 참된 자녀·참된 가정을 갖게 되면 그의 후손들은 모두 하나님의 왕권을
형성합니다. 그에 따라 선한 가정·선한 종족·선한 국가·선한 세계 즉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지상천국입니다. 지상천국에서 생활한 사람이
영계로 가면 그대로 천상천국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이 본래 하나님이 소망했던 아담·해와를 창조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창세기 1장 17절)을 불신함으로써 타락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간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해와는 악의 열매가 되었고,
그들로부터 출발한 가정·사회·민족·국가·세계는 악의 세계, 지옥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상지옥입니다. 지상지옥에서 악하게 살다가 가는 곳이
천상지옥입니다.
타락한 아담과 해와는 사탄의 자식이 되었고, 사탄은 타락한 인간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고 타락성(墮落性)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사탄은 세상의 임금이 되고 세상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참된 주인으로 현현할 때
사탄은 쫓겨납니다. 하나님은 사탄까지도 모두 용서해서 본연의 천사장 자리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탄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때는 지옥으로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무저갱(無底坑)에 가둬서 심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욕망·사랑·행위가 선이냐, 악이냐?’ 하는 결론은 동기와 방향과 목적에 따라 각각 다릅니다. ‘하고자 하는 욕망의 동기, 또 사랑의 동기가
뭐냐, 행위의 동기가 뭐냐, 그 욕망의 목적과 방향과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열매를 맺기도 하고, 사탄을 중심한 악의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타락의 결과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인간이 책임분담을 하지 못해서 사탄을 중심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2) 3대 전환과 3대 해방
우리 인간은 3대 전환(三大轉換)을 해야 합니다.
첫째는 사탄의 주관을 받던 사탄의
혈통으로부터 혈통 전환(血統轉煥)을 해야 하고, 둘째로 소유권 전환(所有權轉換)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몸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자식이 되어서 사탄이 들어와 사는 악한 집이 되어버렸으니, 그것을 전부 하나님의 것으로 되찾아 와야 합니다. 내 몸도 복귀해야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도 하나님의 것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총생축헌납(總生畜獻納)을 통해 내 몸을 먼저 하나님의 소유로 돌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심정권도 찾아와야 합니다. 타락으로 소유권도 잃어버리고 핏줄도 잃어버렸으므로 심정권도 사탄 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심정권 전환(心情圈轉煥)을 해야 합니다. 본성으로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3대 해방(三大解放)을
이루어야 합니다.
첫째는 사탄 혈통에서 해방해야 합니다. 사탄의 혈통을 근절하는 것이 축복운동이며 성주식(聖酒式)입니다. 통일교회의
성주식과 축복운동은 통일교회만의 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만민이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기 위해 혈통을 전환하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둘째는
사탄 주관(主管)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사탄 주관 하에 들어감으로써 타락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적인 생활을 통해서
시기·질투·혈기·교만·고집 등과 같은 타락성을 벗어야 합니다.
셋째는 사탄 생활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죄를 벗고 타락성을 벗었다
할지라도 우리 환경은 아직 이상적인 생활환경으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집에 가면 부모가 반대하고 친척과 친구들이 이상하게 봅니다.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환경이 아직 천일국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탄주관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3대 해방은
사탄 혈통에서 해방하고, 사탄 주관의 타락성을 벗고, 그 다음에 사탄 환경에서 해방하는 것입니다. 사탄 혈통에서 해방하기 위해서는 축복을 받아야
하고, 타락성을 벗기 위해서는 원리적인 생활로 돌아가야 하고, 사탄 생활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환경을 복귀해서 천일국이상을 이루어야
합니다.
천일국은 축복가정들이 종족적 메시아의 사명을 다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종족적 메시아의 사명을 다해야 참가정이 실현되고 이상세계가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조국 창건이 이루어지고, 비로소
천주평화통일국(天宙平和統一國)의 이상이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천일국의 이상은 3대 해방을 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3)
인간세계에 대한 사탄의 활동 333
인간은 육신은 자연계와 관련이 있지만 속사람인 영인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육신의 사고나 행동은 영인체에 영향을 줍니다. 만일 육신이 악의 요소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그 영인체도 악영인체가 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악영인체가 형성되면 바로 영계의 악령들과 연결됩니다.
악의 세계를 주관하는 사탄은 영계에 있는 악한 영인들을 사주하여 지상의 악영인체와
상대기준을 조성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지상인의 영인체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이 차단됩니다.
성경 누가복음 22장 3절을 보면,
사탄이 예수의 12제자 중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 예수를 은 30냥에 팔도록 합니다. 또 사탄이 베드로에게 들어가자 베드로가 예수를 불신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3절에 예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도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탄은 자기의 욕망을 다 채우고 나면 그 사람에게서 나갑니다. 사탄이 빠져나가고 나서 베드로의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유다도
사탄이 자기 목적을 이루고 떠나니 정신이 돌아와서 은 30냥을 들고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와 다시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합니다(마태복음
27장 3~4절).
인간에게 육신이 있고 영인체가 있기 때문에 사탄이 인간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실체가 없으면 역사하지
못합니다.
4) 목적성으로 본 선과 악 334
하나님을 중심한 행위의 결과는 선이고, 사탄을 중심한 행위의
결과는 악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조성하면 선의 세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가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악의 세계를 이루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외형을 갖추고 있더라도 지향하는 목적이 다르면 선 또는 악이라는
상반된 결과로 나타납니다.
5) 죄 334
(1) 죄의 정의
사탄과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킴으로써 천법(天法)을 위반한 것이 죄입니다.
유대 민족은 여자가 음란죄를 지으면 현장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과부가 음란죄를 짓거나 임신하면 돌로 쳐 죽이거나 불로 태워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장 2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는 실제로 죄를 지어야 죄로 인정했지만, 예수님 때에는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오늘날 참부모님은 ‘사탄과 상대기준을 조성해서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는 것도
천법을 위반하는 죄’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사탄과 주고받을 수 있는 조건만 성립되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이 좋아하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했다면 빨리 탕감조건을 세워서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합니다. 원리적인 자리로 돌아갈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2) 죄의 종류 335
죄의 종류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자범죄(自犯罪)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스스로 짓는 죄를 말합니다. 자범죄는 나무의 가지에 붙은 잎과 같습니다. 잎이 잘못되었을 때
그 잎을 따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범죄의 경우 당사자가 벌을 받게 됩니다.
그 다음에 나무의 가지에 해당하는 연대죄(連帶罪)가 있습니다.
연대죄는 자신이 직접 지은 죄는 아니지만, 한 사람이 잘못하면 단체기합을 받는 것을 연상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교인들이 십자가에 내줌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인류가 2000년 간 고난을
겪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해주실 메시아를 십자가에 내어준 책임을 인류 전체가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혈통죄(血統罪)가 있습니다.
혈통죄는 나무의 줄기와 같습니다. 조상의 죄가 혈통을 타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조상이 죄를 많이 짓게 되면 후손들이 괴롭습니다.
나는
살아있는 조상이고 후손들은 나를 따라옵니다. 내가 살아있는 조상인데, 내가 뜻길을 잘못 가면 후손들의 가는 길이 어려워집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고 탕감을 치르더라도 그 길을 개척해 놓으면, 후손들에게는 축복의 길이요, 편안한 길이 됩니다.
나무의 뿌리에 해당하는 것이
원죄입니다. 거기에는 사탄의 핏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원죄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생긴 죄의 뿌리입니다. 죄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잘라버린 나무라도 뿌리가 살아 있으면 또 싹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원죄도 혈통을 타고 내려갑니다. 그래서 죄의 뿌리를 통째로 뽑고
사탄의 혈통을 정리하는 것이 우리의 축복운동입니다.
6) 타락성 336
타락성(墮落性)은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해와와 혈연 관계를 맺을 때, 해와에게 전수한 사탄의 성품입니다. 그것이 아담에게 계승되었습니다. 타락성은 모든 죄를 유발하는
악성(惡性)의 근본입니다.
원래 하나님과 아담·해와, 천사장은 부모와 자녀, 그리고 종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은 부모이고 아담·해와는
자녀이며 천사장은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해와가 성장해서 완성하기 전까지는 직접 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주었습니다. 아담·해와를 사랑하시지만 직접 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은 종인 천사장에게 당신을 대신한 입장에서 기르도록 아담·해와를
맡겼습니다. 따라서 천사장은 종의 신분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담과 해와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천사장은 아담과 해와를 사랑하기는커녕
사랑의 감소감(減少感)을 느껴서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존재위치를 떠나 사탄이 되었습니다.
천사장의 본성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딸인 아담·해와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타락성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랑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한 것입니다.
천사장의 존재위치는
아담을 중보(仲保)로 삼아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종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존재위치를 떠나서 혈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담·해와의
주관을 받아야 하는데, 자기의 존재위치를 떠난 사탄은 악의 실체가 되어서 아담·해와를 주관하고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타락성으로 주관성이
전도되었기 때문에 교만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다음에 천사장은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감과 동시에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어받아
선을 번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천사장은 종의 자리에서 오히려 사탄이 되어 악을 아담·해와에게 전수했습니다. 그래서 악을 번식하고 악을 이루도록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러니까 해서는 안 되는 것,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있도록 한 고집이 생겼습니다.
본성은 사랑하고 아담을 중보로
세우고 그 앞에 순종하고 그를 통해서 뜻을 받들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인데 그것을 못해서 타락성을 나왔습니다. 따라서 타락 인간은
시기·질투·교만·고집을 뽑아내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축복을 받아서 원죄를 청산하지만, 사탄이 언제나
노리고 있는 것은 우리의 타락성입니다. 타락성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통해 정리해야 합니다. 원리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원리생활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사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복귀하기 위해서는 사랑하고, 중보(仲保)로 세우고, 순종·굴복하고,
희생·봉사해야 합니다. 그것을 애중굴통(愛仲屈通)이라고 합니다.
천사장은 아담을 사랑하고, 아담을 중보로 세우고, 아담 앞에
순종·굴복하고, 아담 앞에 희생·봉사함으로써 아담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애중굴통을 못하고 반대로 했기 때문에 타락했는데,
복귀하기 위해서는 사랑하고, 중보로 세우고, 순종 굴복하고, 희생·봉사하는 애중굴통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5. 자유와 타락
인간이
자유 때문에 타락했다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유가 없었으면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따먹을 수
있는 자유를 주어서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인간은 자유 때문에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1) 자유의 원리적
의의 339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자유에는 원리적 의의(原理的意義)가 있습니다.
첫째는
원리를 벗어난 자유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자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생각하고 뜻을 세우는 의지의 자유가 있고, 그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는 행동의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행동은 자유의지에 의해서, 자유의지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인간의 마음은 원리의 본체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마음의 중심이 원리이고 그 마음의 발로에 의해서 의지가 생기며, 그 의지에 의해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리를 벗어난 자유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는 책임 없는 자유는 없습니다. 어떤 행동을 했으면 반드시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의지에 의하여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완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放縱)입니다.
셋째는 실적 없는 자유는 없습니다. 인간이 자유 의지에 의하여 행한 자유행동이 선한 결과를 가져올 때 하나님은
기쁨이라는 실적을 얻습니다. 따라서 원리를 벗어난 자유는 없고, 책임이 없는 자유는 없고, 실적이 없는 자유는 없습니다.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자유 때문에 인간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 타락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은 본연의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담·해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아담·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 것을 알면서도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비원리적 사랑에
넘어간 것이지 하나님이 주신 자유 때문에 아닙니다. 죽는 줄 알면서도 사랑 때문에 사선을 넘어간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비원리적 사랑입니다. 해와가 종인 천사장과 맺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생명나무가 되어야 할 아담이 죽은 인간이 되었습니다.
죽은
인간을 다시 찾아오신 분이 참부모입니다. 참부모님은 사탄의 정체를 밝히셨습니다.
또 인간이 사탄과 관계를 끊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셨습니다. 아담이 죽기를 각오하고 비원리적 사랑을 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려면 죽기를 각오하고 참사랑을 통해서
넘어가야 합니다.
2) 자유를 주신 이유 340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이유는 스스로 창조원리적인
책임을 지며, 자유 의지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실적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은 완성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유
의지에 따른 행동이 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3) 욕망
341
창조목적은 피조물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기쁨은 욕망을 이룰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누구나 욕망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욕망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창조본성(創造本性)입니다.
어린아이는 먹고 싶은 과자를 안 사주면 그 자리에 앉아
울면서 떼를 쓰다가도 어머니가 과자를 사주면 금세 방긋 웃으며 기뻐합니다. 이처럼 자기가 추구하는 욕망이 충족될 때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하신 창조본성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욕망이 없다면 하나님의 창조목적도 복귀섭리도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인간사회의 유지와 발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욕망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는 악한 성품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입니다.
6.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지 않으신 이유
1) 원리의 절대성과 완전무결성을 위하여 341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지 않으신 이유는 첫째, 원리의 절대성(絶對性)과 완전무결성(完全無缺性)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원리는
절대성을 갖추고 완전무결해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과 인간은 소생기·장성기·완성기의 성장기간을 거쳐서 성장하고 완성합니다.
인간의 경우
육신은 원리의 자율성과 주관성으로 성장하지만, 속사람인 영인체는 인격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영인체가 인격적 성장을 통해 완성하려면
인간책임분담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책임분담을 통해 완성하기까지의 성장기간을 간접주관권(間接主管圈) 또는 원리결과주관권(原理結果主管圈)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인간 책임분담을 통해서 완성하면, 하나님의 말씀 95퍼센트와 인간책임분담 5퍼센트로 인해 100퍼센트의 인격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인격이 완성되면 하나님의 뜻도 완성됩니다. 절대성 위에 세워진 완성한 인간은 완전 주체인 하나님 앞에 완전
대상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받아 제2창조주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사와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주관주(主管主)가
됩니다.
완성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몸입니다. 아담·해와가 결혼해서 부부가 되면 하나님이 결혼해서 부부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참사랑을 통해 부부를 이루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참사랑으로 직접 주관할 수 있는 직접주관권이 형성됩니다.
직접주관권인 참사랑권에 들어가면
아담·해와는 하나님의 실체가 되어 사랑하기 때문에 천사장이 아무리 유혹하더라도 그 사랑권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영원히 타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간접주관권은 원리적으로 성장하는 영역인 데 반해, 직접주관권은 하나님을 중심한 참사랑만이 관여하는 영역입니다.
만일 인간의
성장기간인 소생기나 장성기, 또는 완성기에 인간의 타락행위를 간섭하면 하나님이 원리의 절대성과 완전무결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행위를 알면서도 원리의 절대성과 완전무결성을 위해 간섭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행위를 간섭하면 하나님 스스로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원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거기에서는 타락한 인간을 복귀시킬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립니다. 원리도 없어지고 원리의 본체되시는 하나님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행위 자체는 기가 막힌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지켜보면서 간섭하지 않으셨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2) 하나님만이 창조주로 계시기 위하여
343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것만 주관하고 간섭하십니다. 그런데 타락과 죄악은 사탄에 의해서 초래되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것을
간섭하신다면 타락행위에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하는 것이 됩니다. 타락을 하게 만든 제2창조주로 인정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사탄은 종이므로
제2창조주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만이 창조주로 계시기 위해서 인간 타락행위를 간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3) 인간을 만물의
주관위에 세우시기 위하여
인간은 책임분담으로 성장해서 완성한 인간이 됩니다. 완성한 인간이 천사장과 만물을 주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간접주관권의 인간을 주관하고 간섭하면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해서 주관할 자격이 없는 아담·해와에게 만물을 주관하도록 하는 것이
됩니다.
만물은 주관할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천사장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만물은 원리적으로 성장해 왔는데, 원리적으로
성장하고 책임분담을 통해서 완성해야 할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면 만물이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고
간접주관권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직접주관하면 인간은 창조성을 갖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또 만물을 주관할 자격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물의 주관주로 세우려면 인간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지 않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타락하기 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락론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타락론은 원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없어질
이론입니다.
참고 1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고통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는 순간 심정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참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에게 그와 같은 심정의 고통을 느끼게 한 사탄은 사랑의 간부(姦夫)요, 사랑의 원수입니다.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고통은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4대심정권을 유린하는 원수 중의 원수 사탄을 대하는 고통입니다.
예를 들어 강도가 집에 들어와서
아버지를 밧줄로 기둥에 묶어 놓고 보는 자리에서 딸을 겁탈했다고 합시다. 그리고 자기 누이동생을 겁탈하고, 자기 부인을 겁탈하고, 어머니를
겁탈하고, 할머니까지 겁탈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자기 딸을 겁탈하는 것만 봐도 강도를 찢어서 녹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터인데, 딸과 누이동생,
부인, 어머니, 할머니(4대심정권)까지 전부 겁탈했다면 어떠한 심정이겠습니까? 그 보다도 더 비참한 것이 사탄에 의해 타락하는 아담·해와를
지켜보는 하나님의 심정적 고통이었습니다.
둘째, 사랑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고통입니다.
원래 해와는 장차 하나님의 부인이 될
사람입니다. 얼마 있으면 당신의 부인될 사람을 종놈이 유혹해서 겁탈한 후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또 부인이 되었어야 할 해와가 원수의 자식을
낳아서 데리고 다시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쫓아내지 못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하나님은 본성 속에 원수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과거에 첫사랑을 준비했던 그 마음을 가지고 사랑의 원수가 된 그 여인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원수의 자식을 자기
자식 이상으로 사랑해야 하는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원수의 자식까지 당신 자식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원통한 심정을 안고 계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심정 속에 원수라는 관념이 있다면 절대적 창조주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원통하고 억울해도 하나님은 사랑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원수의 자식을 당신 자식 이상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6000년 동안 하나님은 그런 고통 속에 계셨습니다. 그 누구도 그 같은 내용을 몰랐습니다. 참부모님은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실체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내용들을 모두 밝히시게 된 것입니다.
참부모님은 하나님을 해방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하나님을 고통에서 해방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해방하는 것만이 죄악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길입니다. 죄악에서 해방한다는 말은 절대성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참고 2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347
원수를 사랑하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랑의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창조의 동기가 심정이기 때문 347
창조의 동기가 심정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저는 비록 잘못되어 원수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참소합니다. 천사장을 비록 종으로 지었지만 창조의 동기가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잘못 되어서 원수·마귀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에 절대 사랑해야지, 미워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탄을 저주하고 미워하면 사탄이 하나님을 보고 창조주가 아니라고
참소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성장기간에 천사의 도움을 받아서 성장하고 완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천사의 도움을 받아서
완성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모두 “사탄, 마귀! 사탄, 마귀!”하면서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탄이 “하나님! 저들이 그래도
당신의 자식입니까?”하고 참소합니다. 하나님은 그 두 가지에 걸려 꼼짝을 못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동기가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의 부모이기 때문 348
하나님은 심정의 부모이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원수를 치면 순간적인 화풀이는 될지 모르지만, 그 원수의 부모가 당하는 심정의 고통, 상대가 당하는 심정의 고통,
자녀가 당하는 심정의 고통, 형제와 친척이 당하는 심정의 고통이 더 큰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칠 수가 없습니다.
원수를 치면
원수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 348
원수를 치면 원수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에는 원수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원수라고 해서 사탄을 치면 하나님 속에 원수라는 개념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에게는 원수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만일 사탄을 치면 원수를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을 치지 않고 자연 굴복시키는 섭리를 해 오셨습니다. 그 기간이 6000년이나 걸렸습니다.
참고 3
사탄이 되는 동기
천사장
루시엘이 사탄이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하거나 사랑의 소외감이나 사랑의 감소감, 또는 어떤 섭섭함을 느낄 때 사탄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든지 사랑의 소외감, 사랑의
감소감, 섭섭함을 느끼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감소감을 느낀다든가, 섭섭함을 느끼면
바로 사탄의 주관을 받는 동기가 됩니다. 악령들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일할 수 없게 만듭니다.
둘째, 자기의 존재위치를
떠난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절대 자기의 존재위치를 떠나면 안 됩니다.
천사장은 사랑의 감소감을 느껴서 자기의 존재위치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불평하고 불만을 갖게 되면 바로 그 자체가 존재위치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리에서는
우리가 모를 때는 의심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때가 되면 가르쳐 주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때가 되었기 때문에
‘원리본체론’도 밝혀서 이렇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30년, 40년 전, 당시에는 ‘원리본체론’을 내놓을 수 있는 환경이 안 되었기 때문에
‘원리해설’이나 ‘원리강론’을 세워 교육했습니다. 이제는 ‘원리본체론’을 교육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원리의 본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원리본체이신 하나님도 절대생식기를 가지고 계시고 절대생식기의 본체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입니다.
셋째, 역주관(逆主管)하려고 한 것입니다. 역주관이라는 말은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리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를 누가 세우느냐? 하나님이 세웁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후임자로 오더라도 하나님이 세웠으니 그 사람을 존경하고 깍듯이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세운 목회자가 부족하다면 가르쳐주고 그를 도와서 자신보다 더 성숙한 목회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받들 수 있도록
길러줘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를 했던 사람이 가져야 할 진정한 목회자상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자기 마음대로 무시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아직도 사탄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유출하고 발동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절대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참고 4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351
결론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자기 식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한 번 믿어보자.”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내 고통, 내 사정을 하나님 앞에 고했습니다. “저의 사정이 이렇습니다. 저를 좀 구해주십시오. 제 심정이 이렇습니다. 저희
가정이 이렇습니다.” 이것을 붙들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에게 역사성을 지닌 고통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당신의 심정 속에 사무친 고통이 뭔가를 알았으니 제가 아버지의 한 맺힌 심정을 해원하겠습니다.”하고 기도했는데 알고 보니 인간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구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참부모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근본
신앙입니다.
제3장
인류역사 종말론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말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의
문자 그대로 종말이 실제로 일어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중요한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이 이 말씀도 무엇을 비유한 것인지를 해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서론
인류역사의 종말에 관한 문제를 알려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역사를 확실하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류역사 종말론’에서는 인간 구원의 역사를 펼쳐 오신
하나님의 섭리를 성경을 중심으로 알아봅니다.
성경의 말세에 대한 예언을 보면,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베드로후서 3장 12절)라는 기록이 있고,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마태복음 24장 29절)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말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의 문자 그대로 종말이 실제로 일어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중요한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이 이 말씀도 무엇을
비유한 것인지를 해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1. 인류역사의 시원과 목적
말세의 의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류역사의
시원(始源)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말세가 되면 하늘과 땅이 녹아서 없어지고, 불로 심판한다(베드로후서 3장
12절)고 했습니다. 또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지며(마태복음 24장 29절), 성도들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현상들이
일어난다(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고 했습니다.
말세가 되면 이와 같은 현상들이 왜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서 먼저 인류역사는 어떤
역사였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연의 인류역사는 선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에 인류역사는 죄악의 역사로 귀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세우신 뜻도 절대·유일·불변·영원합니다.
인간은 비록 타락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뜻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직후부터 구원섭리역사를 전개해
나오셨습니다.
지금까지 종교인들은 인류역사가 구원의 역사라고 믿어왔지만,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모릅니다. 구원은 타락하기 전의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물에 빠진 사람은 물에 빠지기 전의 상태로, 병든 사람은 병들기 전의 건강한 상태로, 또 죄 지은
사람은 죄짓지 않은 원래의 선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본연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복귀섭리이고, 그
역사를 구원섭리역사 또는 복귀섭리역사라고 합니다.
인류역사가 복귀섭리역사인 것을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문화권
발전사로 볼 때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는 21~26개의 크고 작은 문화권이 지구상에 있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강한 문화권이 약한 문화권을 흡수하여 지금은
극동문화권(極東文化圈)·인도문화권(印度文化圈)·회회교문화권(回回敎文化圈)·기독교문화권(基督敎文化圈)의 4개 문화권만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이
4개 문화권도 마지막에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귀결되며 그 하나의 문화권이 기독교문화권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화권 발전사로 보았을 때
타락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인간들이 점차 하나님을 찾아가서 하나님과 부자(父子)의 관계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는
발전하고 있습니다.
인류역사는 하나님께서 소망하시는 본연의 단일 문화권, 선의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기독교도 필요 없는
하나님을 중심한 본연의 아들딸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세계는 종교가 필요 없는 본연의 창조이상세계입니다. 문화권 발전사로 볼 때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임에 틀림없습니다.
둘째, 종교와 과학의 동향으로 보아서 우리는 인류역사가 복귀섭리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총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타락으로 무지(無知)에 떨어졌습니다. 무지에는 마음의 무지와 몸의 무지가 있는데, 마음의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질세계를 규명해온 것이 종교요, 몸의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질세계를 개척해온 것이 과학입니다.
오늘날 종교와 과학의 동향은 결국
통일의 세계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종교가 무지한 마음을 개척해가고, 과학이 무지한 몸의 세계를 개척하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중심하고 하나의
세계로 통일하는 역사(役事)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종교가 생겼는데, 그런 것들이 점점 수습되어가는 역사적 귀추로 보아서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요, 구원섭리역사입니다.
셋째, 투쟁역사의 귀추로 보아서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입니다. 만일 타락하지 않았으면 아담은
참부모가 되고 인류의 조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담은 악의 조상이 되고 비원리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원리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원리적인 것만 주관하시고, 원리적인 곳에만 운행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선만 간섭하고
주관하시는데 타락한 아담이 선악의 모체가 됨으로써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직접 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분립해 나오는
역사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아담을 선과 악으로 분립해야 하는데 아담을 쪼갤 수 없기 때문에, 그 아들들을 선과 악으로 분립한 것이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사탄 편에 세우고, 아벨은 하나님 편에 세웠습니다. 그로 인해 가인적 인생관과 아벨적 인생관이 생겨났습니다.
가인적
인생관은 사람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보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이자 헬레니즘(Hellenism)입니다. 반면에 아벨적 인생관은 하나님을 근본으로
해서 결정하고 판단하는 신본주의(神本主義)이자 헤브라이즘(Hebraism)입니다. 이 두 주류 사상이 마지막에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갈라졌습니다.
그 중에서 공산주의는 ‘우주의 근본은 물질’이라는 물질 중심의 유물론(唯物論)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생명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로 이루어진 것이라며 무신론(無神論)을 주장합니다. 거기에 반해 우주의 근본은 정신이고 신이 존재하며 생명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
창조된 것이라는 유신론(有神論)을 바탕으로 민주주의가 나왔습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인간 타락의 결과로 분열된 사상이기 때문에, 인류의
구세주인 참부모가 오시면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될 것입니다. 사실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형제주의와 같습니다. 부모가 오실 때 이 두 사상은
하나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역사는 메시아를 통해 본연의 역사로 돌아가야 할 복귀의 역사입니다.
넷째, 성경을 중심하고 볼 때
인류역사의 목적은 생명나무를 중심한 에덴동산을 복귀하는 데 있습니다. 창세기 2장 9절에 아담은 생명나무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완성한 아담은 참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아담은 참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거짓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에는 처음 에덴동산의 생명나무가 나오고,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생명나무가 나옵니다.
마지막 생명나무가 무엇이냐? 앞의 ‘타락론’에서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의 생명나무는 다시 오실
재림주님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완성한 아담을 의미하고,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는 재림주님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완성했으면 참아버지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재림주님은 참아버지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볼 때 인류역사의 목적은
에덴동산 복귀요, 에덴동산 복귀는 생명나무 복귀입니다. 인류역사는 생명나무를 복귀하기 위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1) 말세의 의의 359
원래 하나님의 소망은 아담·해와의 완성을 통해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창조목적은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만물을 주관하라.’는 3대축복(三大祝福)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면 개인완성체(個性完成體)가 됩니다. 인간은 원리의 본체되시는 하나님의 심정과 절대성을 닮고,
하나님의 신성을 닮아서 원리와 법도와 질서적인 생활을 할 때 개성을 완성하게 됩니다. 개성을 완성한 인간이 신인일체(神人一體)를 이루어 하나님과
하나되고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聖殿)이 되는 것입니다.
개성을 완성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두 번째 축복인 자녀를 번식할 수 있는 부부가
됩니다. 아담과 해와가 부부가 됨으로써 하나님은 아담·해와의 체를 직접 쓰시고 아담·해와를 통해서 사랑하고, 아담·해와를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성
생식기를 중심한 하나님의 아들딸을 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상이고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가정을 중심한
사위기대입니다.
가정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이루어지면 바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가 출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로 확대되는데, 그 세계는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사는 선한 세계입니다. 그러한 세계를 지상천국(地上天國)이라 하며,
지상천국에 살다가 육신을 벗고 가는 세계가 천상천국(天上天國)입니다. 그 세계에는 원죄(原罪)가 없습니다. 원죄가 없기 때문에 속죄할 필요가
없고 기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연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고, 하나님이 인간 안에 들어가 살기 때문에 인간도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나 신앙이 필요 없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구세주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종말이라는 말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그런 소망을 두고 인간을 창조했는데, 인간 조상이 아담과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그러한 이상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다면 이상세계가 실현되었을 텐데, 말씀을 불신함으로써 정반대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종으로 지음받은 천사장이 하나님의 아들딸을 타락시킴으로써 핏줄이 달라져서 하나님은 인간의 부모로서 주인의 자리에 서지 못하고 종인 천사장
누시엘이 사탄이 되어 주인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부모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고, 악마의 핏줄 속에서
억울하고 분한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사람 그런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지금까지 사탄을 중심한 악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이루고자 하는 이상세계에서 그 중심이 사탄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가정에서 종족·민족·국가·세계로
확대되면 될수록 악한 세력이 확산되었습니다. 타락한 세계에는 악의 역사가 펼쳐졌습니다. 그 세계를 지상지옥(地上地獄)이라고 합니다. 지상지옥에서
살다가 영계에 가서 생활하는 곳이 천상지옥(天上地獄)입니다.
인간 조상인 아담과 해와가 거짓된 조상이 됨으로써 아담·해와의 후손은 모두
원죄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회개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죄에서 구원해 줄 구세주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세계가 되었기 때문에 이 세계를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세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본연의 창조목적의 세계가 이뤄지지 않고,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악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 세계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소망하신 세계로 돌아가는 전환기가 말세입니다. 말세는 사탄을
중심한 죄악의 세계가 끝나고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세계가 시작되는 교차점을 의미합니다.
2) 말세는 여러 차례 있었다.
361
인류역사상 말세는 세 번 있었습니다. 노아 때 말세가 한 번 있었고, 예수님 때가 말세였고, 재림주가 오시는 지금 이 때도 바로
말세입니다.
창세기 6장 13절을 보면, 노아 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했습니다. 말라기에도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하고 말세를 예고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종말을 알린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29절에도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세 현상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6절을 보면,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원래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통해 소망하신 것은 그들이
소생기·장성기·완성기를 거쳐서 하나님의 심정을 완성하고 절대성 위에서 부부가 되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가
소생기를 지나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했습니다. 타락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지으신 원리의 궤도를 이탈했다는 뜻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본래의
궤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때가 바로 말세입니다. 출발을 잘못해서 궤도를 이탈했으니 다시 그 출발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 때가 바로 말세입니다. 말세는 글자 그대로 끝날이 아니라 죄악의 역사가 끝나고 선의 역사가 시작되는 때를 말합니다.
아담 이후
1600년이 지난 노아 때가 말세였습니다. 아담이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하여 출발된 죄악의 역사를 청산하고 본연의 궤도로 돌아가려고 했던
시기입니다.
노아 때는 홍수심판을 통해서 사탄과 짝지은 모든 인간을 심판했습니다. 홍수심판을 거쳐 하나님과 하나 되었던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새출발해야 하는데,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또다시 실수함으로써 죄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죄악의 역사는 반복됩니다.
그 후 예수님이 올
때까지 기다린 역사가 2000년이었습니다. 2000년이 지나 비로소 예수님을 중심해서 죄악의 역사를 청산하고 하나님을 중심한 새로운 원리의
궤도에 진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불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갔기 때문에 그 뜻을 또 이루지 못하고 섭리는 연장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했고, 인류는 또다시 재림주가 올 때까지 200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타락의 장본인이 되었기 때문에 아담 이후 4000년 만에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아들의 자리에 섰지만 가정을 갖지 못했습니다. 창조이상을 이루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재림주님은 세 번째 아담으로서 창조이상을 완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3수를 통해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말세는
섭리적으로 볼 때 세 차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을 놓고 볼 때 말세는 여덟 번 있습니다.
첫 번째가 개인적인 말세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넘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가정을 중심한 말세가 있습니다. ‘내 가정이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이냐,
사탄 편에 설 것이냐?’로 교차되는 때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종족을 중심해서 넘어가야 할 때가 있고, 네 번째는 민족을 중심해서 넘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국가를 중심해서 넘어가야 할 때가 있고, 여섯 번째는 세계적으로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일곱 번째는 영계와
육계를 중심하고 천주적으로 넘어가야 할 때가 있고,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는 나를 말미암아 조상이 구원을 받고 후손까지 연결해서 다시는 사탄세계와
관계를 맺지 않고 하나님을 중심한 영원한 혈통을 가진 본연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말세에는 세계 도처에서 전쟁이 나고,
지진이 나고, 기근이 든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24장 29절).
실제로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수습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정황들을 볼 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야 할 섭리노정에서 여덟 번의 말세가 있다고 했습니다. 끝날에 인류는 ‘하나님 편에 설 것이냐, 아니면 자기를
중심해서 죄악의 역사 속에 흘러갈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인류는 승리하신 참부모님을 모시고 하나님이 소망하신 참자녀가 되어 창조본연의
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2. 말세의 징후에 관한 성구 364
말세는 사탄을 중심한 죄악의 역사, 즉 사탄
주관권에서 하나님 주관권으로 되돌아가는 교차점입니다. 성경에는 말세에 나타날 여러 가지 징후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1) 땅을
멸함 364
성경에는 말세에 땅을 멸한다는 예고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을 보면,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했습니다. 말세를 두렵게 만드는 예고입니다. 그러나 이 성구는 문자 그대로의 불심판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노아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혈육있는 자의 횡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세기 6장 1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홍수심판을 했지만 땅은 멸하지 않았습니다.
말라기 4장 1절에는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하였는데 예수님 때에도 문자 그대로 불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재림주님 때에도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베드로후서 3장 12절) 그렇게 심판을 한다고 했지만, 예수님 때에 문자
그대로 불심판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자 그대로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땅은 영원합니다. 이사야 66장 22절에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항상 있을 것 같이···.’라고 했고, 전도서 1장 4절을 보면,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뿐 죄없는 땅을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멸한다고 한
것은 어떤 비유와 상징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6장 9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하늘은
거룩하고 지극히 높고,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참된 곳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탄생했는데,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아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과 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하늘과 땅과는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공을 하늘이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지극히 높고 거룩하고 선하고 참된 곳을 가리켜 하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땅은
지극히 악하고 지극히 낮고 지극히 천하고 지극히 거짓된 곳을 비유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선주권(善主權)을 상징하고 땅은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惡主權)을 상징합니다. 땅을 멸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주관하고 있는 이 악주권의
세계를 멸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했습니다. 일본이 패망했다는 것은 일본 천황의 주권이 패망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원래 하늘 땅 모두 하나님이 주인인데, 타락으로 이 땅은 사탄이 주인 노릇을 하는 악주권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말세가 되거 이 땅을 깨버린다는 것은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의 세계를 깨뜨리고, 하나님을 중심한 선주권의 세계를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공중에서 주를 영접함 366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을 보면,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며 성도들을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고 했습니다. 땅을 다 심판하고 불로 태워버린 후 성도들은 공중으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은 지극히 선하고 높고 거룩한 하나님을 중심한 선주권의 세계입니다. 땅은 지극히 악하고 낮고 천한 악주권의 세계입니다.
공중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악에서 선으로, 지극히 낮은 곳에서 지극히 높은 곳으로, 지극히 천한 곳에서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거짓된 생활에서 참된
생활로,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에서 하나님을 중심한 선주권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공중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생활이념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불심판 366
성경에는 말세에 불심판을 한다고 했는데, 그 불심판도 문자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라기 4장 1절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심판 날에 악을 행하는 자는 모두 베어서 가지와 뿌리까지도 없애버린다는 내용입니다. 말라기는 구약성경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불심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문자 그대로 불심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 재림주 때에도 그와 같이 불심판을
한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때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재림 때에도 문자 그대로 불심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야고보서 3장 6절을 보면 ‘혀는 곧 불이요.’라고 했습니다. 혀는 말을 하는 기관입니다.
혀로 심판한다는 것은 말씀심판을 의미합니다. 말씀심판은 진리심판(眞理審判)입니다. 따라서 불심판은 곧 혀 심판이요, 혀 심판은 말씀심판이요,
말씀 심판은 진리심판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으면 부활하고,
불신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8절에는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1장 4절을 보면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입의 막대기가 무엇입니까? 혀입니다. 혀가 없으면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라고 한 것은 불의를 보면 막대기로 치듯이 말씀으로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에서 입술의 기운은
무엇입니까? 말씀의 기운, 말씀의 능력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9절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는 예수님의 결정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불을 던진다고 했습니다. 불을 던지는 목적은 불이 붙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이 타다가 꺼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던진 불은 진리의 불이었습니다. 진리 중의 진리,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였습니다. 그 말씀을 믿었으면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인데, 유대 민족이 예수님이 말씀을 불신하여
실족하고 만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불심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말씀심판이요, 진리심판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해서 타락했습니다. 말씀을 불신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다시 주시는데, 인간은 그 말씀을 믿고 말씀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4)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짐
마태복음 24장 29절에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진다고 했으니,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지구는 그대로 멸망할 것입니다.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면 생명체가 살 수 없습니다. 우주 공간에는 지구보다도 훨씬 큰
별이 많은데, 그 별들이 떨어진다면 지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불심판이 말씀심판이듯이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씀도 비유와 상징일 것입니다.
창세기 37장 9절과 10절을 보면,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은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많이 샀습니다. 꿈 얘기를 하면 형제들로부터 책망을 받았는데, 어느 날 또다시 꿈을 꾸고 너무나 이상해서 가족들에게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와서 절하더이다.’하고 꿈 얘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인 야곱이 ‘그럼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라며 꾸중했습니다. 여기서 해와 달은 부모를 상징하며, 열 한 별은
형제를 상징합니다.
요셉은 30세에 애급에서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때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어 야곱이 아들들을 애급에 보내 곡식을
사오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애급에 가서 총리대신인 요셉에게 절을 했습니다. 결국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가 부모의
입장에서 빛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출애굽해서 가나안으로 향합니다. 신 광야의 시내(Sinai)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말씀이 십계명입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중심해서 구약의 율법을 세웁니다. 율법은 촛불과 같습니다. 유대교인들은 타락으로
진리가 없는 세계에서 촛불과 같은 율법을 중심해서 이 땅에 메시아가 올 것을 기다렸습니다.
구약의 끝날에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셨고,
성신이 후해와의 자리에 오셨습니다. 성신은 실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실체로 오셨듯이 후해와도 실체로 와야 하는데, 예수님이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후해와를 실체로 맞이하지를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서 영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영적으로 맞이한 여자가 성신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땅에서는 성신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땅위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성신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성신은 예수님의 상대적 자리에 있는 분이기 때문에 땅위의 성도들은 성신을 받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성신을 받아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예수님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는 강한 의지와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신은 부모의 입장에서 복음을 가지고 만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노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 민족이 볼 때
사생아인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니 예수님은 이단 중의 이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귀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것이 복음 중의 복음인데,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촛불과 같고 신약의 복음은 전깃불과
같습니다. 캄캄한 밤에 촛불을 켜놓고 책을 보는데 갑자기 촛불 대신 전깃불이 켜졌습니다. 촛불은 전깃불보다 약해서 빛을 잃어버립니다. 사람들은
촛불 밑에서 책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깃불 밑에서 책을 보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유대교가 율법을 중심해서 신앙을 하다가 이 땅에
예수님을 중심한 복음이라는 전깃불이 켜지면 그 밑으로 가야 하는데, 율법을 고집하다가 유대인들은 실족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별들이 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끝날에 다시 오겠다고 한 재림주와 다시 오시는 재림성신이 가지고 오시는 말씀이 성약 말씀입니다. 성약 말씀은 태양과
같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전깃불은 빛의 사명을 잃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태양 아래에 와서 일하지 전깃불 밑에서 일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끝날이 되어 재림주와 재림성신이 성약의 말씀을 가지고 오시면, 마치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밝은 대낮과 같은 시대가 전개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율법과 복음을 중심으로 신앙하다가 재림주와 재림성신이 오셔서 새 말씀을 선포하게 되면 그 말씀을 반대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교가 실족했던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그 노정을 그대로 답습하다가 결국 성약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실족할 것을 염려하여
예시(豫示)한 것이 바로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이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빛을 잃는다는 말은 사명이 끝나는 것을 의미하고, 별이 떨어진다는 말은
책임을 못해 실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현세가 말세다. 371
마태복음 24장 32절에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이
무성해지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라고 한것은 말세의 징조가 이 지구성의 도처에 나타나면 바로 그때가 말세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세가 바로
말세입니다.
1) 3대 축복 복귀 현상으로 보아 371
3대축복 복귀 현상으로 보아서 현세는
말세입니다.
(1) 제1축복 복귀 현상 372
제1축복 복귀는 개성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개성 완성을 위해서는 먼저 심령의 복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개성완성은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하나가 되어 일문일답을 하고,
하나님과 일체가 되고, 인간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하나님과 심정적인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개성 완성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일문일답을 하고 일체가 되는 때가 돌아오기 때문에 현세에는 영통한 사람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령이
복귀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음에는 본심의 자유 복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원래 인간은 본연의 세계에서 본심의 자유를 가지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간의 본심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간을 놓고 본심의 자유를 복귀해왔는데, 현세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본심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자유혁명을 외치고 있습니다. 본심의 자유를 복귀할 마지막 때가 지금입니다.
다음에는 본연의 가치성 복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존귀하고 천주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타락으로 인해 가치없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므로
끝날에 본연의 가치성을 회복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상이 꽃을 피우면서 개성과 인간 본연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특히
인권해방운동을 보면 인간이 본연의 세계로 점점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본연의 사랑 복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이 횡적으로 얽힌 세계, 즉 지상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 본연의 참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타락으로 비록 참된 사랑을 잃어버렸지만, 본연의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현세에는 박애주의를 내세우거나
본연의 사랑을 찾아가는 현상이 지구상 도처에서 보입니다. 이러한 제1축복 복귀현상으로 봐서 지금이 말세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제2축복 복귀 현상 373
제2축복 복귀는 하나님을 중심한 대가족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인간세계는 타락으로 인해 소통의
길이 막혀 분열되었는데, 이제는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문화권 발전사를 볼 때 이미 말씀드린 대로 21개에서 26개 정도의
문화권이 있다가 이제는 4개의 문화권이 남았고, 그 4개의 문화권도 기독교를 중심한 단일문화권으로 흡수되고 있습니다.
한 분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선의 역사가 출발했지만, 타락으로 죄악의 역사가 펼쳐졌기 때문에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하나님을 중심한 기독교 문화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권은 결국에는 종교가 필요 없는 하나님을 중심한 원리본체로 돌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나의
부모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다.’, ‘내 가정은 하나님의 가정이요, 참부모님의 가정이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따라 하나의 본연의
동산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국가 흥망사를 볼 때도 제2축복 복귀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타락으로
인해 사탄 편 악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선의 본체요 원리적인 하나님은 그런 아담을 대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사탄 편과 하나님 편으로 분립해서 인류가 하나님을 대할 수 있도록 복귀의 길을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선악의 분립
역사는 오늘날에 와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세계로 갈라졌습니다. 민주주의 세계는 아벨적 인생관이 열매 맺은 것이고, 공산주의 세계는 가인적
인생관이 열매 맺은 것입니다.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로 분립된 것은 바로 선과 악을 세계적으로 쪼개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이 두
세계를 수습해서 하나의 세계를 이루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망인 가정을 중심한 이상세계의 완성입니다. 여기에서 제2축복인 대가족세계의
복귀가 완료되는 것입니다.
(3) 제3축복 복귀 현상 374
제3축복 복귀는 주관성
복귀입니다.
내적으로 보면, 종교와 철학과 윤리는 인간의 심령을 복귀하고 인간이 본성대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인간성
회복운동을 넘어 자연을 보호하는 환경운동에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셨듯이 인간이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은 인간의 몸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의 모든 요소가 인간의 몸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이 별들면 인간의
몸이 병든 것과 같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고, 인간이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은 모든 분야가 하나로 묶이고 있습니다. 이념과 사상도 하나로 묶이고, 경제적인 분야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내·외적인 주관성을 회복함으로써 세계는 시공을 초월하고 환경을 초월해서 일일생활권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원래 이 세계는 분단되거나
국경이 있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해서 모두 하나 되는 세계입니다. 하나의 세계는 주관성 복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발달된
현실세계를 보면 제3축복 복귀, 곧 주관성 복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1축복 복귀·제2축복 복귀·제3축복
복귀와 같은 3대 축복 복귀 현상으로 보아서 현세가 말세입니다.
2) 사회현상으로 보아 375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구마를 심어놓고 옥수수를 따려는 사람은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해와는 불륜으로 타락했고 악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천사장·아담·해와 세 존재가 타락했습니다. 타락한 천사장은 아저씨와 같은 입장이고, 해와는 딸과 같고, 아담은 아들과 같은데
해와는 나이 많은 아저씨와 같은 종에게 유혹되어 타락했습니다.
해와는 타락으로 이성에 눈을 뜨면서 어머니의 입장이 되었고, 아담은 철없는
아들의 입장이 되었습니다. 해와는 철이 없는 아담을 천사장이 유혹한 그대로 타락시켰습니다. 여기에 아담이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해서
타락했습니다. 아담이 상대기준을 조성하지 않았으면 절대 타락하지 않습니다.
결론은 아담의 타락으로 에덴동산 전체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아저씨 같은 사람은 어린 딸과 같은 사람과 어머니 같은 사람은 아들·손자 같은 사람과 놀아나는 것입니다.
불륜을 저지르면서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호모·레즈비언·프리섹스·스와핑 등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끼리 사랑하면서 심은 대로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상을 망치는 짓이요, 가장 귀한 사랑을 몽땅 파괴하는
짓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해와는 남매였고 천사장은 아담·해와의 종이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성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가정 전체가 음란에
빠졌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날 가족끼리, 가까운 친척끼리 근친상간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까운 곳에서 타락이 일어납니다. 아버지가
딸을 타락시키고, 오빠가 동생을 타락시키고, 삼촌이 조카를 타락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현상으로 보아 현시대가 말세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말세와 우리의 자세 376
본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완성을 보는 첫째 날을 맞이해서
하나님이 인간 안에 들어가서 실체를 지니고 사랑하면서 이상세계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은 종 취급을 받는
자리로 떨어지고, 종인 천사장은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천국의 주인인 하나님이 천국을 사탄에게 내어주고 지옥으로
떨어진 것과 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심령이 발달함에 따라서 사탄을 중심한 악의 세계는 점점 내려가고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세계는 점점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서로의 위치가 바뀌는 교차점이 생깁니다. 선과 악이 만나고 하나님과 사탄이 만나는 교차점이 바로
말세입니다.
둘이 갈라져 있을 때에는 위치가 뚜렷하기 때문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세에 이르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악을 중심해서 살다가도 방향을 바꾸어 선을 지향하면
천국과 낙원으로 가지만, 하나님을 중심하고 살다가도 방향을 바꾸어 악을 지향하면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말세에는 그런 혼돈을 수습하기
위해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중심인물을 내세웁니다. 하나님은 노아 때에도 중심인물로 노아를 세웠습니다. 노아에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세기 6장 13절)하시면서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에도 제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모세 때는 모세를 세워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메시아 강림 시기를 맞아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복음을 줬습니다.
재림기에는 재림주가 오셔서 새 말씀을 선포하게 됩니다. 새 말씀으로 하나님을 바로 가르쳐 주고 절대성의
가치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종말기(終末期)의 혼돈이 수습되어 창조 이상세계가 실현됩니다.
낡은 시대가 청산되고 새로운 섭리가
출발하는 때가 종말기입니다. 거기에서 낡은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의 상충이 벌어집니다. 내적으로는 불안·공포·혼돈이 벌어지고, 외적으로는 알력과
투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도 선악의 교차점에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교차점에서 유대인들에게 방향을 제시했는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불신하고 죽였기 때문에 전부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서기관과 율법사 등 독실한 신앙인들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그들이 천하게
취급한 죄인이나 창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낙원으로 갔습니다.
바로 지금 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말씀을 따라서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말세를 맞는 우리는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신령을 감득(感得)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
인습적인 관념에 집착하지 말고 신령에 호응하면서 새 시대·새 섭리에 따른 새 진리를 찾지 않으면 실족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4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379
2000년 전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 오셨는데, 33세에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흩어진 제자들을
모아서 40일 만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길을 일으켰습니다.
오순절(五旬節) 성령 강림 이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새로운 신앙의 길을 개척한 것이 기독교입니다.
서론 380
메시아는 히브리말로소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인데, 특히 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무엘상 10장 1절을 보면,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뽑힌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장면입니다.
또 사무엘상 16장 13절을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悖逆)하므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세울 때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울이나 다윗처럼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삼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이 훗날 메시아의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세주를 보낸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있었으니, 그것이 곧 메시아 사상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로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기독교도들이 메시아를 크리스토스(christos)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도’가 나온 것입니니다.
1. 십자가에 의한 구원섭리 381
2000년 전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 오셨는데, 33세에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흩어진 제자들을 모아서 40일 만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길을
일으켰습니다. 오순절(五旬節) 성령 강림 이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새로운 신앙의 길을 개척한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가
출발할 때 유대교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거짓을 말하는 참칭자(僭稱者)라며 처형했습니다. 기독교를 믿다가 붙잡히면
옥에 갇히고, 사자의 밥으로 던져지고, 불과 기름에 타죽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기독교가
출발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간을 대신해서 고난의 길을 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인간이 죄를 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그 보혈로 인간의 죄를 대속해줬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죄 없이 태어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에게 영원히 사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구원은
없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관입니다.
그러나 ‘통일원리’의 관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주로 오셨는데,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고난의 주가 되었다는 입장입니다. 사도 바울의 십자가를 내세운 신앙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이 ‘난의 주’에 초점을 맞추고 신앙을
정립한 것이 그대로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신약성서 27권 가운데 13권을 사도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신학이 아니라 바울의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은 ‘십자가가 없었으면 구원이 없다. 십자기에 매달려 흘린 예수의 피는
인간들의 죄를 대속해주는 것.’이라고 굳게 믿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지난 2000년 간 이어져온 기독교의 신앙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 8절을 보면,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統治者)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유대 민족이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았더라면 만왕의
왕인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 강림의 목적 382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담을 통해 이루려던 창조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창조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조목적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고, 만물을 주관하라.’(창세기 1장 28절)고 하신 3대축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생육은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 곧 신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요한복음 14장 20절),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고린도전서 3장 16절),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마태복음 5장 48절)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그렇게 신성을
지닌 다음 부부를 이루어 땅에 충만하도록 자손을 번식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또 땅위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3대축복이 이루어진 세계에는 원죄가 없습니다. 따라서 속죄가 필요 없고, 기도와 신앙이 필요 없고, 구세주도 필요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가
지상천국이며 천상천국입니다.
그런데 아담·해와가 하나님 말씀을 불신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런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담·해와는
3대축복을 잃어버리고 사탄의 성품, 곧 악성(惡性)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아담·해와는 사탄과 일체를 이루고, 사탄이 거하는 전(殿)이 되었고,
완전성을 잃은 타락인간이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사탄을 중심으로 거짓된 개인·거짓된 부부·거짓된 부모가 되어 거짓된 자식을
낳았습니다. 아담·해와의 가정은 사탄의 거짓된 사랑·거짓된 생명·거짓된 혈통을 이어받았고 그 가정의 중심에는 사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가정은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이 되지 못했습니다.
타락한 세계는 사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하는 곳입니다. 사탄은
세상의 신이 되고 인간은 사탄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이 탄식하시고, 인간도 탄식하고, 만물도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과 6절에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貫盈)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으로 자녀를 잃어버린 것을 탄식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는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성구에는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지 못하고 하나님의 양자라도 되고 싶어 하는 성도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로마서 8장
19절에서 22절에는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완성한 인간의 주관을 받고 싶어 하는 만물이
주인을 잃고 탄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담·해와의 타락이 초래한 비극적인 상황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인간에게
원죄가 생겼고, 회개와 기도의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구세주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개인으로 이루어진 가정이 사회·민족·국가·세계로
확대된 것이 지상지옥과 천상지옥입니다. 그런 세계는 하나님이 생각지도 않았던 세계입니다. 지상지옥과 천상지옥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본연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목적은 아담을 통해 이루시려고 했던 창조 이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2)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섭리는 완성되었는가?
384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서 오셨고,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심으로써 인간이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원리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목적을 다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원섭리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야 했습니다.
로마서 7장 23절에서 24절을 보면,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또 요한1서 1장 8절에서 10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섭리의 목적이 이루어졌다면 몸과 마음의 갈등이 생겨날 수 없고, 타락으로 생겨난 원죄가 청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섭리의 목적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아직도 다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도 ‘죄가 없다고 하면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창조본연의 세상으로 돌아가면 기도가 필요 없고, 신앙이 필요 없고, 메시아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을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섭리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도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을 보면,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후손에게도 신앙생활과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섭리의 목적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기정사실인가?
386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임신을 하면 아무리 가난하고 못살더라도 미리 출산 준비를 합니다. 누더기를 잘라서라도 아기 옷을 만들고 아기 이불을 만들면서
어머니는 아기를 위한 준비를 합니다.
하나님도 4000년 간 타락한 세계를 수습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인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서 준비한 것은 죽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서 개인·가정·종족·민족을 준비했습니다.
모세에게 애급에서 고역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오도록 했습니다. 그런 준비를 거쳐서 형성한 민족이 유대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선민으로 택하셨습니다. 유대 민족을 중심해서 유대교를 세우고, 유대교의 지도자로 제사장·율법사·서기관을 세웠습니다. 메시아를 보낼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기 위하여 대제사장 사가랴 가정과 요셉 가정을 택했습니다. 레위 지파인 사가랴의 종족에는 세례
요한을 보내고, 다윗 지파인 요셉 종족에는 마리아를 통해 예수를 보냈습니다.
이 두 종족이 하나 되어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모셨다면,
유대 민족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배척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 민족을 잘 믿고, 잘 받들어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준비시켜서 메시아를 보냈습니다. 이 세상은 사탄 세계이기 때문에 준비하지 않고 메시아를 보내면 그를 죽입니다.
유대인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한복음 6장 28절)라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한복음 6장 2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말씀마다 반대하고 핍박하고 이단으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 할지라도 그 일을 믿어라.’(요한복음 10장 37~38절)고 호소합니다.
예수님은 믿게 하려고 많은
이적(異跡)을 행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뜨고, 꼽추가 허리를 펴고, 죽은 나사로가 되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역사를
하며 유대인들이 믿어주기를 바랐는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정죄(定罪)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듣고 이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異跡)과 기사(奇事)를 보고
더러운 귀신이 붙어서 저런 역사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권능(權能)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주어도 유대인들이 믿지
않고, 권능을 베풀어도 믿지 않으니 예수님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성경에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38절까지에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에서 44절까지를 보면, 예수님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라며 분노를 토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성경을 암송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장 39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메시아에 대해 많이 예언했지만, 오신 메시아를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이
한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한복음 5장 43절)는 말씀을 했고,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한복음 5장 46~47절)는 말씀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나 엘리야의 이름으로 왔으면
존경하고 믿었을 텐데, 하나님의 아들로 왔다고 하니까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속 반대하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예언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않았으리라.’(마태복음 23장 29~3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마태복음 24장 2절)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이 멸망하고 유대
민족이 비참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열매가
있을까 하여 나무에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잎사귀만 무성한 것을 보고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 그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다고 마태복음 21장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궁화가 한국을
상징하듯이 무화과나무는 유대 나라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었다는 것은 유대 나라가 멸망할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왔다면 예수님을 빨리 죽도록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은
30냥에 팔았는데,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칭찬하기는 커녕 저주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는 것이 뜻이라면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한 가룟 유다가
가장 사랑받고 가장 먼저 천국에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번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장 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왔다는 색안경을 끼고 보기 때문에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읽으면서도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노와 예수님의 언행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일 먼저 순교한 제자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거하다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죽기 직전에 성령이 충만해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사도행전 7장 60절).
또 사도행전에서는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가 전하는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사도행전 7장 52~53절)고 한 구절이 있습니다. 유대 민족의 조상들이 오리라 예고된 의인을 잡아 죽였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를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 자리에 있었고 그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바울은 유대 베냐민 지파에 속했고 율법에 능통하며,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절과 2절에 따르면,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을 멈추지 않았고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데려가려고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했습니다. 그가 공문을 가지고 가다가 다메섹 가까이에 이르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쳤습니다.
그리고
‘사울아(후에 바울로 개명)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사도행전 9장 4절)하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바울이 영적으로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바로 마음을 돌이켜 먹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8절에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통치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한탄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이
말씀으로 신앙을 정립해야 옳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무지와 불신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기정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불신했고, 사가랴 가정에서 불신하고, 요셉의 가정과 종족이 불신했습니다. 메시아를 맞도록 준비했던 단체와 종교,
그리고 준비했던 지도자가 모두 불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발붙일 곳 없는 외롭고 슬픈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4) 십자가 구원의
한계와 재림의 목적 391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인간은 사탄 주관권에 떨어졌습니다. 인간은 영육(靈肉)으로 타락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과 일체(요한복음 14장 20절)를 이룬 영육을 지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에는
예수님을 놓고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 십자가 구원의 한계 391
타락한
인간은 예수님을 맞아 영육으로 접붙여야 합니다. 육신은 예수님의 육신과 하나 되고, 영인체는 예수님의 영인체와 하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은 사탄주관권의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 주관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불신으로 예수님의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사탄 편에 내주고, 예수님의 영은 하나님 편으로 갔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데, 예수님의
육신을 사탄 편에 내주었기 때문에 아무리 십자가를 믿어도 타락한 인간의 육신은 사탄의 주관권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장 6절)고 했습니다. 육신을 사탄에게 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사망과
죄악에 사무쳐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갔듯이 타락한 인간도 십자가를 믿으면 영적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간 십자가의 길은 영적 구원의 길입니다. 육신을 사탄에게 침범당해서 육적 구원의 길은 실패했습니다. 다만 영적으로 기반을 조성했기
때문에 영적 구원의 길은 완성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이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 구원의 길은 열리지만, 영육 아울러 완성된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목적은 영과 육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영적 구원의 길은
열렸지만, 육적 구원의 길은 막혔습니다. 육적 구원은 영적 구원보다 더 중요합니다. 인간은 지상에 육신을 쓰고 태어났고, 육신이 생길 때
영인체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육신을 쓰고 성장·완성하지 않으면 육신 속에 있는 영인체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할
일을 마쳤다면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뜻을 완성하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준비했던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불신했고, 따르는 무리들도 배신했습니다. 사가랴 가정과 요셉 가정은 뜻을 알면서도 그 뜻을 받들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뜻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을 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재림의
목적 393
이 땅에 본연의 창조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뜻도 절대, 유일, 불변, 영원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뜻이 절대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완성할
때까지 하나님은 수고하시고, 섭리를 연장하시면서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3차까지 섭리하시고 더 이상 연장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원리관입니다. 재림주를 중심한 섭리가 아담에서 예수님을 거쳐 3차로 이어지는 마지막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이 오늘 이
땅위에 인류의 소망으로 남아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 땅에서 사탄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으로 창조되었는데 사탄은
인간의 영인체와 육신을 다 점령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전으로 지은 인간의 실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마음 둘 곳도 없고, 발붙일 곳도 없는
외롭고 고독한 처지가 되셨습니다. 잃어버린 인간을 다시 찾아 세워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탄의 정체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인간에게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당신과 인간이 하나 되기를 바랐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사탄과 관계를 끊고 예수님의
영인체와 접붙이고 예수님의 육신과 일체가 되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래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기 때문에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내주었다는 말은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사탄에게 있지만, 예수님의 영은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믿고
십자가를 열심히 믿으면 타락한 인간의 영도 예수님의 영과 일체가 되어 역시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에서 어떤 신앙을 하더라도 죄를 온전히 벗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사탄에게
침범을 당하여 예수님의 육적 구원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 23절과 24절에서 바울도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면서 사망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인간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써 참된 부모를
잃어버렸고, 우리에게 접붙여줄 수 있는 생명나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들은 예수님을 2000년 동안 믿어 왔지만 아직도 죄를 벗지
못했고, 사망권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6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을 사탄에게 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사망과 죄악에 사무쳐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요한1서 1장 8절과
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가지고
있고,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예수님의 육신과 일체가 되어 영육을 지닌 실체로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하는데 예수님의 육신을 사탄에게 내줬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믿더라도 그의 육신은 사탄에게 내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영광의 주가 못 되고 고난의 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영적 구원의 길은
열렸지만, 육적 구원의 길은 막혀 있습니다. 인간은 지상에 육신을 쓰고 태어났고, 육신이 생길 때 영인체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육신을 쓰고 성장·완성하지 않으면 육신 속에 있는 영인체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적 승리의 기대를 조성했기 때문에 이제
인간들에게는 육적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재림주님은 영과 육을 지닌 실체로서 영과 육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재림주님은 예수님께서 이루시지 못하고 남겨놓은 사명을 완수하러 오시기 때문에 재림의 목적은 바로 영육 아울러 구원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5) 십자가의 양면 예언 395
성서에서 고난의 주와 영과의 주에 대한 양면의 예언을 한 것은 인간이 책임분담을
수행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구원섭리의 완성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인간책임분담은 인간이 자신의 인격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창조성을 가짐으로써 제2의 창조주가 되는 동시에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격과 만물을 주관할 자격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격
완성을 통해 제2창조주로서의 가치를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위업에 가담했다는 명분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5퍼센트 책임분담을 완수하면
95퍼센트 창조주 하나님의 책임도 완성하게 되고, 하나님의 창조이상도 100퍼센트 완성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위업에 가담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책임분담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책임분담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모시면 예수님은 영광의 주가
되고 만왕의 왕이 되는데, 예수님을 불신함으로써 십자가를 진 고난의 주가 되셨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에 대해서 영광의 주와 고난의
주에 대해서 양면으로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9장·11장·60장에 보면, 예수님을 놓고 영광의 주로서 만왕의 왕이 되어 다윗의 가정에서 영원토록
왕노릇 한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53장을 보면, 고난의 주로 오신다는 예언도 있습니다. 바로 인간책임분담 때문에 양면의 예언을
해놓은 것입니다.
인간책임분담은 에덴동산에서도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해와에게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믿고 지키면 생명나무가 되고, 믿지 않고 따먹으면 죽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하나님의
절대성 생식기의 실체로 하나님의 첫 절대성 정자의 씨를 심을 수 있는 나무를 상징합니다.
모세도 가나안으로 갈 때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믿으면 그들은 가나안에 무사히 갈 수 있지만, 불신하면 광야에서 독수리의 밥이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역사 속에는 반드시
인간책임분담이 따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으로 메시아 신앙을 정립했습니다. 그런 잘못된
메시아관이 오늘날까지 2000년 간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시 오시는 재림주까지 고난과 핍박을 받게 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양면 예언은 인간책임분담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6) 십자가의 죽음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된 성구
397
성서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필연적인 것처럼 믿도록 하는
성구로는 마태복음 3장 14절, 요한복음 19장 30절, 마태복음 16장 23절 등이 있습니다.
(1) 요한복음 3장
14절 397
요한복음 3장 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사람들이 그 십자가를 보는 것으로 구원을 얻게 됨을 예시한 말씀입니다.
유대
민족이 광야에서 모세를 불신하니까 불뱀이 나와서 백성을 물어 죽였습니다. 그때 유대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야, 네가 들고 있는
장대 끝에 구리뱀을 달아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뱀을 만들어 달았는데, 유대 민족이 모세의 말을 믿고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불뱀에게
물리지 않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든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유대 민족이 구리뱀을 쳐다봄으로써 불뱀한테 물리지 않고 살아난 것처럼 유대 민족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봄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모세가 장대 끝에 구리뱀을 단 이유는 유대 민족의 불신 때문입니다. 유대 민족이 모세를 불신했기
때문에 불뱀이 나와서 그들을 물어 죽인 것입니다. 불신하지 않았으면 불뱀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뱀이 나오지 않으면 모세가 구리뱀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모세는 불신으로 인해 불뱀에게 물린 유대 민족을 살리려고 구리뱀을 장대 끝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유대 민족이 불신하지 않았으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었고, 실제로 영과 육의 구원을 바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유대 민족이 불신하지 않고 예수님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면 십자가는 필요 없습니다. 그런 사연도 모르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다 보니,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구절을 놓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 오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민족이 불신해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열었는데, 그 구원은 영적 구원일
뿐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뜻을 읽어야 합니다. 즉 성경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요한복음
19장 30절 398
요한복음 19장 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하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으니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이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왔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선민으로 세운 유대
민족 중에서 사가랴 대제사장 종족과 요셉 종족, 이 두 종족을 세우고 그 종족의 울타리 안에 메시아인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0세가 될 때까지 가정을 중심하고 종족을 붙들고 하나님이 준비한 터전에서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종족이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그 뜻을 세우지 못하고 30세에 집을 나오시게 됩니다.
출가하신 예수님은 비로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장 15절)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30세에 공생애를 출발하신 후 처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에서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지으면 음부의 권세가 그 집을 헐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실체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이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메시아로서 굳건히 서겠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누구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지 않고 메시아라고 인정하지 않는데, 베드로 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한 사람 위에
섰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신앙의 기반을 확대해 나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에서 보낸 총독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서 두 가지 재판을 받습니다.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하는 심문을 받고 나서, 유대 총독 빌라도 법정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을 놓고 심문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7절에서 66절을 보면,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가서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고 고발당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7장 11절을 보면
유대총독 빌라도에게 끌려가서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심문을 당합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종교재판을 받고, 빌라도 법정에서 정치재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태복음 26장
31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 26장 33절)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태복음 26장 3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 26장 35절)하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뜻길을 출발한 뒤로
그때까지 주님을 배신하거나 주님을 싫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지적은 예수님이
보시기에 베드로에게 이미 사탄이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재판정에 선 예수님을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증거했다면 재판정의 분위기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 속에 들어가서 증언하지 못하도록 한 것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그에게서 사탄을 분립해주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주었지만, 베드로는 자기 생각만 믿고, 예수님을 따라 법정에
들어갔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9절에서 75절까지를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심문받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바깥 뜰에 앉아 있었는데 한
여종이 나와서 베드로도 같은 무리라고 고발합니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부인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있던 사람이 베드로에게 너도 그 도당이고 네 말소리가 그것을 증명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탄이 베드로에게 들어가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의도를 다 이룬 뒤였습니다.
사탄이 베드로에게서 떠나자 베드로는 자기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만일 그때 베드로가 당당히 나서서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보낸다고 약속했던 그 메시아가 바로 오늘 이 법정에 선 저
예수라고 당당하게 증언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가는 길이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려운 길이 앞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갈
길을 가야지, 외면하고 자기 생각대로 살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통해서 메시아로 서겠다고 하는 축복은 이미 다 깨져버렸습니다. 메시아를 증거하는 기반이 없어져서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9절부터 43절까지를 보면, 예수님께서 해골이라는 뜻의 골고다에 도착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한 강도는
예수님 오른편에, 한 강도는 왼편에 못 박혔습니다. 그런데 왼편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오른편 강도는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메시아라고 대답한 유일한 사람이
베드로였는데, 그가 배신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메시아의 기대(基臺)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음 직전이지만 이 땅에서 유일하게 오른편 강도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는 비록 강도로 살았지만 마지막 운명하기 전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했습니다. 오른편 강도가
그런 기대를 세웠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증거를 받아 영적으로 이룰 수 있는 구원의 기대를 조성했다는 뜻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33세의
생애 노정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데리고 낙원에 간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오른편 강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른편 강도는 나쁜 짓을 하고도
죽을 때 예수를 증거하니까 낙원에 가지 않느냐, 오른편 강도처럼 마음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뜻을 따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마지막 할 수 있는 기대까지는 이루어 놓았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말이지, 당신이 오신 목적을 다 이루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따라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메시아로 증거 받음과 동시에 영적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기대를 세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기정사실이
아닙니다.
(3) 마태복음 16장 22절, 23절 403
마태복음 16장 22절과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항변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신 것은 이미 육적 구원의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유대 민족이 불신하고 세례 요한도 기대를 세워주지 못했기 때문에 준비했던 섭리적 기대가 다 무너졌습니다.
3년 간
예수님의 공생애 노정을 따라다닌 제자 베드로마저 부인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아먹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 둘 곳도 없고, 발붙일 곳도
없고, 의논할 대상도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변화산에 가서 모세와 엘리야 등 영계의 지도자들과 의논했습니다. 거기에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을 의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되, 영적 구원의 길을 열어놓고 재림할 것을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베드로에게 들어가서 그 영적 구원의 길까지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태복음 16장 23절)라며 베드로를 책망했던 것입니다.
결론은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2. 엘리야의 재림과 세례
요한
1) 유대 민족의 심적 동향 404
말라기 4장 5절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고 두려운 날은 바로 메시아가 오시는 날입니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 선지자를 먼저 보낸다고 했기 때문에 유대 민족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만큼 엘리야를 기다렸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약 900년 전의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 민족은 우상 숭배에 빠져서 많은 고초를 겪고 있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맞아 싸우는데, 엘리야가 승리해서 850명을 다 멸합니다(열왕기상 18장 19~40절). 그런데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믿는 이세벨 여왕이 엘리야 앞에 굴복하지 않고 엘리야를 죽이려 합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도망가서 토굴 속에서
살았습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을 보면, 하늘에서 불수레와 불말이 내려와서 엘리야와 엘리사를 갈라놓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말라기 4장 5절에서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그 엘리야가 온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민족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하늘로
승천했던 엘리야가 다시 구름 타고 오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여러 도시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옥중에서 그 소식을 듣고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예수님은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우회적으로 대답하고 나서, ‘만일 너희가 즐겨
받는다면 말하겠다. 오리라 한 엘리야가 이 사람이니라.’ 하면서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했습니다(마태복음 11장 1~14절). 그래도
예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얼굴이 변하여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처럼 희어져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하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신다면 내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고 말하는데 홀연히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비로소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 요한인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1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이 드러내놓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또 물었습니다. ‘네가 그 선지자냐?’ 세례 요한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 때 ‘그렇다. 예수님은 메시아고, 나는 선지자 세례 요한이다.’라고 대답했더라면 유대 민족은 자동적으로 세례 요한과 함께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 민족 전체가 하나님을 모시고 로마 의회에 가서 당당하게 메시아를 선포하고 로마의 세계적인 기반을 타고 하나님의 뜻을
순식간에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불신해 버렸습니다. 유대 민족은 심정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이냐, 세례 요한의 말을 믿을 것이냐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난 과정은 비참했지만, 그의 행적을 보면
놀라웠습니다. 전에 들어보지 못한 권능이 있는 말씀을 전했고, 놀라운 이적과 기살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유대 민족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 두 사람을 비교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문제, 엘리야와
메시아이신 예수님과의 관계 등이 유대 민족 앞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 민족의 심적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세례 요한이 있었고, 보잘 것 없는 목수의 아들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유대 민족은 ‘누구를
믿고 따를 것이냐?’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 배우지도 못했고 안식일을 범했습니다. 율법에
안식일은 생명과 같이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토요일에 모든 것을 다 준비해놓고 일요일엔 밥도 안 하고 동물의 먹이도 밖에 나가서 먹이지
않았습니다. 동물을 전부 집안의 우리 안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전도하러 다녔고, 배가 고플
때는 밀밭에 가서 밀을 비벼서 먹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기도 했습니다.
유대 민족은 예수님의 그런 행위를 율법을 거역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태복음
5장 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0절에서 13절을 보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이 있자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양을 치는 유대 민족의 피부에 와 닿는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보고 율법을
어겼다며 안식일을 범한 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세리·몸 파는 창기·죄인들이 예수님의 친구였습니다. 세리는 세금을 걷는 사람인데,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유대 민족이 세금을 걷어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미워했겠습니까?
또 요한복음 14장 8절과 9절을 보면,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했습니다. 유대 민족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 세우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성모독(神聖冒瀆)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 세례 요한은 대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또 출생 시에 기적을 보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막과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막은 일반인들이 들어가 정성을 드리는
곳이고,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차례가 되면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백성들에게 가서 알려줍니다. 사가랴도 순번이 되어서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사가랴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하늘의
천사가 나타나서 ‘사라갸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누가복음 1장 13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사가랴가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누가복음 1장 18절)하며 천사를 통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천사는 ‘보라 이 일이 되는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누가복음 1장 20절)고
했습니다. 사가랴가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며 의심하고 불신하므로 그때부터 벙어리가 되었다가(누가복음 1장 18~23절)아이가
태어나고 이름을 지어야 할 때쯤 혀가 풀립니다(누가복음 1장 60~66절).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그런 광경을 다 지켜봤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려서부터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광야에서 빛나는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마태복음 3장 4절).
그것을 본 유대 민족은 ‘세례 요한이 혹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15절을
보면,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세례 요한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누가복음 3장 16절)하며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유대 민족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비교하여 예수님보다 세례 요한을 더 위대하게 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을 따르다 보니
예수님은 결국 거짓말쟁이가 된 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메시아가 되기 위해서 위대한 사가랴 대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난 세례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라고 말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유대 민족은 세례 요한을 메시아라고 생각할 정도로 존경했는데,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불신함으로써
유대 민족도 예수님을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2) 세례 요한의 사명
410
세례 요한의 사명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메시아 증언(證言)의 사명이고, 또 하나는 모심의 사명입니다. 증언의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한복음 1장 23절)며 자신의
사명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나올 때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요한복음 1장 33~34절)고 증거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75절에는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
부친 사가랴의 예언이 나옵니다. 대제사장 사가랴는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라고 자기 아들
세례 요한의 사명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모심의 사명을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불신으로 유대 민족 전체가 예수님을 불신했고,
그로 인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세례 요한의 불신 이유 410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불신하게 된 이유는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세례 요한은 신령했지만, 하나님의 뜻과 섭리의 뜻에는
무지했습니다.
둘째, 자기를 중심하고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셋째, 그릇된 메시아 관을 가지는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가
구름타고 온다고 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육신을 지니고 아기를 태어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했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언행을
불신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세례 요한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위대한 복음의 말씀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다섯째, 자신의 사회적 위신과 체면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더더욱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는 구약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었습니다.
4)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411
마태복음 11장 11절을 보면,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고 세례 요한을 책망했습니다.
지상에서 큰 자로 태어났으면 영계에 가서도 당연히 큰 자가 되어야 하는데, 지상에서 제일 큰 자로 태어났으면서도 당연히 큰 자가 되어야 하는데,
지상에서 제일 큰 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영계에 가서는 지극히 작은 자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한 것은 세례 요한이 책임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지만, 그 후에는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을 세례 요한이 따라가지를 못했습니다. 또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요한복음 3장 22절에서 30절을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는다고 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세례
요한이 얼마나 겸손하고 위대하냐?’고 하는데, 그것은 성서를 잘못 보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주님이 흥하면 자기도 같이 흥해야
합니다. 주님을 모시는 제자라면 주님이 쇠하면 자기도 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흥하여야 하고, 자기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은
같은 길을 안 가겠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혀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을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에서 6절을
보면,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태복음 11장 2~3절)하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복음 11장
4~5절)고 말씀하시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덧붙입니다.
마가복음 6장 17절에서 29절에는
세례요한의 마지막 행적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헤롯 왕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것을 보고,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마가복음 6장 18절)라고 말했습니다. 그로 인해 헤롯은 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했으나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겨 두려워했기 때문에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헤롯의 생일날
대신들과 천부장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헤로디아의 딸의 춤을 추어 좌중을 크게 기쁘게 했습니다. 헤롯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며 소원을 말하라고
하자 딸이 어머니에게 가서 무엇을 구할까? 물어보자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고 알려줍니다. 헤롯은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좌중의 체면을
볼 때 거절할 수 없어서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소반에 담아다가 헤로디아에게 주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괜히 여자 문제로 시비하다가 아무 의미도
없이 죽게 된 것입니다.
5) 세례 요한이 엘리야가 된 이유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세례 요한의 탄생에 대한 예고와 그의 삶에 대한
예언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1장 11절부터 17절까지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성전에서 분향하는 대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나을 것이니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며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고 예언합니다. 이 구절을 볼 때 세례 요한은 바로 엘리야의
사명을 하기 위해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6) 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413
성서에는 하늘의 비밀이
숨겨있습니다. 천적(天的)인 비밀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영계의 천사도 모르고, 땅위의 어떤 선지자도 성도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을 이 땅위의 선지자들에게 그때그때마다 가르쳐줘서 알게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라고 단정하는 성경 구절만 보고
믿어왔기 때문에 무조건 세례 요한을 위대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야기된 문제입니다.
성서는 시대마다 달리
해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춰진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인습적인 신앙 관념과 구태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리로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신령하다고 해서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진리만 가지고 신령한 부분을 배척해서도 안
됩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 인류가 갈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입니다. 만민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오시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에 제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셔서는 안 될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해놓고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온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누구보다 성직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십자가를
모두 떼어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며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알고 민족의 반역자로 죽였는데, 기독교인들은 2000년 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얻었다고
믿었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한을 풀고 뜻을 바로 세워가야 합니다.
제5장
부활론 415
성서에 나오는 부활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 먼저 죽음과 삶의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본 죽음과 삶에 대한 개념과 성서적으로 본 죽음과 삶에 대한 개념이 다릅니다.
서론
부활(復活)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죽음과 삶이라는 개념은 육신을 전제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말하는 죽음과 삶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생사의 뜻과는 전혀 다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생(生)과 사(死)의 의미를 확실히 알면 부활에 대한 많은 의문들이 풀릴
것입니다.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에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27장 52절에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 나오는 부활에 대한 예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는 이미
흙 속에 묻혀 썩어 없어진 성도들의 육신이 다시 원상태로 살아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성구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큰일입니다. 지구 환경은 수용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상에 왔다 간 수많은 영인들이 다 살아난다면
땅과 식량뿐만 아니라 모든 자원이 부족해질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문자 그대로 부활이 일어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원래 사람은 죽지 않게 창조했는데,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면 그때부터는
죽지 않고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한 성서의 많은 부분이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 믿으면
신앙생활을 하는데 큰 혼란을 초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으므로 올바른 성서관에 따라 재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부활의 의의
1) 일반적인 생과 사 417
성서에 나오는 부활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과 삶의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본 죽음과 삶에 대한 개념과 성서적으로 본 죽음과 삶에 대한
개념이 다릅니다. 일반적으로는 몸져 누워 있더라도 육신의 기능이 이루어져 활동하고 호흡한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고, 육신의 기능이
정지되고 호흡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입니다.
2) 생과 사의 성서적 개념 417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비록 육신은 죽지만, 영인체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살아서 믿는 자는
죽어서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요한복음 5장 24절을 보면,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절을 볼 때 성경에서 말하는 살아있는 인간은 육신의 죽음과 관계없이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일체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참사랑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반면 죽음은 하나님과 심정적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참사랑권을 떠나 사탄의 주관권에 있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죽은 자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절에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구절과 요한1서 3장 14절에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사망이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로마서 8장 6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고, 육신의 생각도 사망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생사의 개념은 육신의 삶과 죽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살아있는 인간은 하나님이 이상하신 본연의 인간이고, 죽은 인간은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성서에서 살았다는 개념은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일체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정과 참사랑 안에서 사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죽은 자의 개념이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60절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의 부친이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가서 부친의 장례를 지내고 오겠다고 허락을 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죽은 자’는
제자의 부친을 말하고 ‘죽은 자들’은 제자의 친인척이나 동네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은 자’도 죽었다고 말했고, ‘살아있는
사람’도 죽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성경에는 육신이 죽은 사람과 하나님과 거리가 먼 사람까지 모두 ‘죽은 자’로 보았습니다.
죽음의
개념은 하나님과 심정적 관계가 끊어져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비록 살아서 활동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과 심정적 관계가 끊어져버렸다면 그 사람은
죽은 상태입니다. 심정은 참사랑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권에서 살지 못하고 사탄 주관권에 살고 있는 사람을 결국 ‘죽은 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살았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 심정적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참사랑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심정적
관계가 끊어진 사람, 하나님의 사랑권에서 살지 못하는 사람은 숨을 쉬고 활동하더라도 ‘죽은 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살아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심정적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며, 죽은 자는 ‘하나님과 심정적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하나님과 참사랑의 인연을 갖고 살지 못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3) 부활의 의의 420
부활은 사람이 타락으로 인해 사탄의 주관권에 떨어진
상태에서 복귀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주관권으로 복귀되어 가는 과정적 현상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귀섭리의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데, 그 말씀을 믿고 따르면 점진적으로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죄를 회개하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좀
더 선하게 되었다면 그만큼 더 부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그만큼 더 부활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활은 일반적인 개념의 부활과 다릅니다. 죽은 시체가 정말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에스겔
37장에 골짜기에 있는 모든 죽은 뼈가 다시 살이 붙고 힘줄이 생겨서 전부 살아난다고 했는데 그것은 비유입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바른 뼈들은
곧 이스라엘 민족을 말합니다. 에스겔 37장 11절에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벗어나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무리가 마치 마른 뼈와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 앞으로 회복된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뼈와 뼈가 붙고 힘줄이 생겨 살아난다고
표현했습니다.
부활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은 상태인 죽은 자의 부활이 있고, 생명이 없는 죽은 자의
부활이 있습니다. 먼저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있는 죽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심령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죽은 자는 영인체의 부활로 거듭나야 합니다.
4) 부활로 인한 인간의 변화 421
부활은 인간에게 외적인 변화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심령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곧 사탄의 집으로부터 하나님의 집으로 바뀌는 내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로 든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과 제자가 된 후에도 외형적인 면에서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전에는 사탄의 주관권에서 살았지만, 예수님이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주관권으로 들어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는 죽은
자였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죽은 자에서 산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내적인 것이지 외적인 변화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접하기 전의 모습과 이 말씀을 접한 지금의 모습은 외적인 면에서는 하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마음은 하나님 앞에
더 사랑받을 수 있게 나아갔기 때문에 내적인 변화는 일어났지만, 외적인 변화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이 붙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5) 타락으로 인한 죽음 421
부활이 필요한 것은 인간이 타락으로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초래된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
창세기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도 900년 이상 살았습니다.
타락으로 초래된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단절된 영적 죽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죽게 된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원래부터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으로 맞이한 죽음은 하나님과 심정적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심정은 참사랑의 뿌리이고 하나님의 인격의
핵인데, 하나님과 심정적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 하나님의 참사랑이 인간에게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에 거짓된 사랑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창조원리에 따르면, 물질로 된 생명체는 어떤 것도 영원성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형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육신으로
영생한다면 무형세계를 처음부터 창조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늙으면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전도서 12장 7절).
타락으로 인한 죽음은 하나님의 선주관권으로부터 사탄의 악주관권으로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사탄의 주관권에서 하나님의 주관권으로 복귀되어 가는 과정적인 현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은 하나님과 심정적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 하나님과 심정적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심정적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 되었을 때, 온전히
살아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하나님의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인 참사랑권에 머물지 못하고 사탄의 거짓된 사랑·거짓된 생명·거짓된
혈통권에 있는 사람이 죽은 자입니다.
2. 부활섭리 423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이 역사의 배후에서 구원섭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을 말하는데, 다시 사는 섭리를 부활섭리(復活攝理)라고 합니다.
부활섭리는 복귀섭리(復歸攝理)요, 복귀섭리는
재창조섭리(再創造攝理)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 창조원리를 세웠는데, 복귀섭리에서 재창조할 때는 원리를 다시 세우지 않습니다. 타락으로 원리를
잃어버렸으므로 그것을 다시 찾는 것이 복귀섭리입니다.
부활섭리는 복귀섭리입니다. 복귀란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세우신 뜻도 절대·유일·불변·영원하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그 뜻을 완성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뜻은 절대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복귀하기 위한 섭리가 바로 복귀섭리입니다. 그런데 복귀섭리는 다시 창조하는
재창조섭리입니다. 재창조는 원리를 새로 만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세우셨던 설계도인 창조원리에 따라서 합니다.
1)
부활섭리의 원칙 423
부활섭리의 원칙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이 완성하려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책임분담이 하나 되어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딸로 성장함으로써 만물을 창조했다는 명분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책임분담은 말씀이고, 인간책임분담은 믿음과 실천입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은 책임분담을 못했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도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부활섭리의 완성은 하나님의 책임분담(말씀)과 인간의 책임분담(믿음과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육신을 터로 해서 영인체는 성장하고 완성합니다. 창조원리에 따르면 인간은 육신을 터로 해서 영인체가 성장하고 완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장성기 완성급에서 죽은 인간이 되었으므로, 다시 육신을 터로 해서 영인체가 성장하고 완성해야 합니다.
셋째, 시대적인 혜택을
받아야 합니다. 아담은 1대에 완성할 수 있는 원리권에 있었지만,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 모두가 비원리권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역사를
순식간에 청산하지 못합니다. 타락은 순식간에 일어났지만, 복귀는 순식간에 청산하지 못합니다. 타락은 순식간에 일어났지만, 복귀는 순식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발전해 왔고 그에 따라 인간의 심령과 지능도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시대적인
혜택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100년 전 사람보다 오늘날의 우리가 더 많은 시대적인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넷째, 질서적인 3단계를
거쳐서 완성해야 합니다. 창조원리에 따르면 인간은 소생기·장성기·완성기의 질서적인 3단계를 거쳐서 완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섭리도 그와 같은
원리에 따라 질서적인 3단계를 거쳐 완성해야 합니다.
2) 지상인의 부활섭리 425
하나님의 부활섭리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갑니다. 병원에 가면 번호표를 뽑아서 진료를 받기 위해 순서를 기다립니다. 자기 차례가
와야 의사에게 가서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응급환자는 번호표를 뽑지 않아도 됩니다. 응급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하면 전문의가 모두
동원되어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달라붙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섭리를 하는 데도 하나님께서는 응급환자와 같은 지상인을 먼저 구하기 위해
섭리하십니다.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해서 생기고 성장하고 완성합니다. 육신이 없으면 생길 수도 없고 성장하고 완성할 수 없습니다. 열매가
나무에 달려서 자라고 익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영인체도 육신을 쓰고 성장·완성합니다. 그래서 육신을 쓰고 있는 지상인의 부활섭리가 제일
시급한 것입니다.
물론 영계에 간 영인들의 부활도 급합니다. 대부분의 영인들이 오래 전에 영계에 가서 지옥에서 고통 받으며 해방의 한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시급한 것은 지상의 육신을 쓴 사람입니다.
육신을 쓰고 있는 사람은 단시일에 이
지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축복을 받고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루에라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영계에 간 영인들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짧은 시간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영인들이 고통에서 해방받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지상에 있는 사람이 더 시급하기 때문에 지상인의 부활섭리를 먼저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부활기대(復活基臺)를 먼저 세워야 합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집터를 닦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섭리하실 때에도 먼저 기대(基臺)를 세워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한 직후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의 구약 이전 역사는 부활하기 위한
부활기대섭리시대(復活基臺攝理時代)입니다.
부활기대섭리시대에는 말씀을 대신해서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만물보다 못한 자리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인간을 지었는데, 타락한 인간은 만물보다 못한 소생기 이전의 기준선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원리가 없는 무원리권(無原理圈)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원리가 없는 무원리권에서 하나님이 창조하던
당시의 기준까지 올라가는 데 무려 20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 기간이 아담에게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까지의
2000년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2000년의 구약시대를 소생부활섭리시대(蘇生復活攝理時代)라 합니다.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해서
성장하고 완성하는데, 소생부활섭리시대에 율법을 믿고 산 사람의 영인체는 영형체(靈形體)를 이루게 됩니다. 영형체를 이룬 사람이 육신을 벗고
영계로 가면 영형체급영계(靈形體級靈界)에 머붑니다.
소생부활섭리시대를 행의시대(行義時代)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믿고 행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행하면서 의로움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2000년의 신약시대를 장성부활섭리시대(長成復活攝理時代)라 합니다. 장성부활섭리시대에 신약을 믿고
성장한 사람의 영인체는 생명체를 이루게 되고, 영계로 가면 낙원에 머물게 됩니다.
장성부활섭리시대를 신의시대(信義時代)라 합니다.
정성부활섭리시대에 신약을 믿고 성장한 사람의 영인체는 생명체를 이루게 되고, 영계로 가면 낙원에 머물게 됩니다.
장성부활섭리시대를
신의시대(信義時代)라고도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신의시대에는 유대 민족처럼 율법으로 훈련된 터전에서 행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의롭게 됩니다.
신의시대의 복음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다.’ 하는 부자의 관계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말씀이 신·구약성서의 핵심입니다. 그 말씀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만왕의 왕으로 섬겼다면 당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땅위에 창건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은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림주 이후 하나님의 뜻을 모두 완성하는 성약시대를 완성부활섭리시대(完成復活攝理時代)라 합니다. 완성부활섭리시대에
재림주를 모시고 섬기면 그 사람의 영인체는 생령체(生靈體)를 이루게 되고, 영계로 가면 천국(天國)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완성부활섭리시대를
시의시대(侍義時代)라고도 합니다. 모심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시의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과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전체 말씀을 행하고 믿는
기대 위에서 재림주를 잘 모셔야 의롭게 됩니다.
행의시대와 신의시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행의시대에 아무리 잘 행해도 장성부활섭리시대와
같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신의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잘 믿어도 완성부활섭리시대와 같은 혜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장 4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낙원과 천국이 동일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낙원과 천국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낙원은 원죄가 있고 미완성되어도 개인적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가정단위로 가는 곳이고, 원죄가 없고 완성되어야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원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류의 원죄를 청산하기
위해 오셨는데 왜 천국이 아니라 낙원에 가셨느냐? 예수님은 개인완성을 실현했지만 가정을 갖지 못했습니다. 가정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한 심정적 인연을 가지고 참사랑을 실체적으로 느끼고 체험하고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부의 사랑을 가지고 왔지만 실제로 그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고,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왔지만 자녀를 낳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사랑도 받지 못했습니다. 또 유대 민족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천국은 사랑의 세계이고, 심정의 세계인데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셨지만 이 땅에서 그런 생활을 해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에 가지를 못하고, 낙원에서 천국에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말세에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 428
말세에는 영적인 현상이 많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에서 선지자 요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서 신약시대에도 구약시대처럼 영적인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는
예언입니다(요엘 2장 28절 참조).
말세에는 인간 조상이 타락하기 직전 하나님과 일문일답하던 때를 세계적으로 복귀하는 시대이므로 ‘너는
주다.’하는 계시를 많이 받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장성기완성급에서 타락하여 만물을 주관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심령과 지능이 발전해서 타락하기 직전의 상태에 이르면 ‘너에게는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의 자리에 섰다고 해서
‘너는 주다.’ 하는 계시를 주는 것입니다.
또 재림주님이 오시면 그 분 앞에서 세례 요한의 사명을 하는 시대적 사명자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너는 그 분야에서 주다.’하는 계시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재림주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도
비참해지고, 자기 가족도 패가망신하고, 영계에 간 자기 일족까지 전부 비참해집니다. ‘너는 주다.’하는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자기를 재림주로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네가 제일이다.’하는 계시도 있습니다. 각자의 심령 기준에 따라서 통하는 영계는 각각 다릅니다. 영계는
방대합니다. 그 방대한 영계를 모두 통한 사람은 없습니다. 영계를 모두 통한 분은 오직 참부모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원리의
본체이시고, 참부모님은 그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참부모님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지상의 인간들은 복귀섭리의 혜택에 따라 심령과 지능이 발달했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면 그런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계를 자기가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아는 것은 하나님과 일대 일의 종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횡적인 관계는 모릅니다. 그래서
‘네가 제일이다.’하는 계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분야에서는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사명 분야에서 제일이라는 뜻이지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네가 제일이다.’하는 계시를 받으면 독선적이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통인끼리 종종 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영통한 사람끼리 싸움이 벌어지면 심각합니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영통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영통인들끼리 자기가 최고라며 혼란이 벌어지고 많은 시련이 있는 것도 지금이 말세이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한 분야만 놓고 보면 제일인 것 같지만 횡적으로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만나면 서로 싸우고 부딪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말씀과 원리가 있습니다. 그 속에는 신령도 있고 진리도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심정적인 분야도 지니시고, 원리적인
분야도 지니고 계십니다. 원리는 원리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리 속에는 창조의 동기인 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정을 떠난 원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심정을 떠난 규범도 없습니다. 심정을 떠난 질서도 없습니다. 그래서 원리 안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그 안에 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2) 첫째 부활
성경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14만 4천인은 ‘사람 가운데
구속(救贖)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로서 그 입에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라.’(요한계시록 14장 4절과
5절)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그 무리가 첫째 부활에 참여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14만 4천인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첫째
부활에 참여할 14만 4천 명에 해당한다면, 그 숫자는 이미 다 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만 해도 목사의 수가 4만 명이 넘습니다.
정목사만 4만 명이니, 부목사까지 합치면 10만 명이 넘습니다. 미국은 교회가 33만개이고, 목사만 33만 명이 넘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성직자들은 전부 합치면 이 지구상에 수억 명이 넘는 기독교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14만 4천인은 첫째 부활에 들어가는 문자 그대로의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복귀섭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은 재림주를 만나서 처음으로 원죄를 청산하고 창조본연의 자아를
복귀하여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14만 4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하나님은 먼저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노아까지 10대를 거치면서 탕감복귀의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둘째아들 함이 실수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또다시 10대를
거쳐서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거기에서 10대를 거쳐서 소생(아담)·장성(노아)·완성(아브라함)의 모든 섭리를 완성해야 하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서 실수로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이삭을 거쳐 야곱까지 섭리가
연장됩니다.
12대만에 비로소 야곱의 가정에서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믿음의 기대오 실체기대를 완성합니다. 이스라엘 선민이 거기에서부터
시작되고 메시아가 아브라함가정의 후손에서 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아들 열둘을 낳습니다. 12명의 아들은 종적인 12대를 횡적으로
전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144는 종적인 12수와 횡적인 12수를 입체적으로 나타낸 수입니다(12x12=144). 144수를 통해서 메시아가
올 수 있는 기대가 비로소 형성되는 것입니다. 뒤에 붙은 000은 소생·장성·완성기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부활에 들어갈 사람은
14만 4000무리는 수리적인 숫자가 아니라 섭리의 뜻이 담긴 숫자라고 보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에 들어갈 사람은 가장 먼저 재림주를
만나서 원죄를 청산하고 보다 성숙된 자리에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한 사람일지라도 첫째 부활에 참여할 14만
4000무리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재림주를 만나서 원죄를 청산하고,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해서 완성한 인간이 있다면 그는 첫째 부활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3) 영인에 대한 부활섭리 432
영인체는 육신을 통해서 성장·완성합니다. 영인체는 육신을
터전으로 하지 않고서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영계에 간 육신이 없는 영인은 지상인의 영적 활동을 통해서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지상인의
영인체가 성장하고 완성할 때 같이 성장하여 완성하여 부활합니다. 지상인이 정성을 들임으로써 심령이 부활해 어떤 심령의 기준에 도달하면 영인은 그
사람과 일체가 되어 상대기준을 조성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지상에서 50이라는 정성을 들이고 영계에 간 영인이 있을 때, 그 영인은
지상에서 50이라는 정성의 기준에 있는 사람과 상대기준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인체 등급에 따라 상대기준을 조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급이 낮은 영계의 영인은 급이 낮은 지상인과 상대기준을 조성하기가 쉽습니다. 반면에 급이 높은 영계의 영인은 지상의 인간과
상대기준을 조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왔다가도 오래 역사하지 못합니다.
영인들의 부활섭리는 지상인의 활동을 통해서 영인이 그
사람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인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고 간 영인도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단지 선하게 살다가 간
영인도 있습니다. 선하게 살다 간 영인들은 비록 선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데려갈 수 없고, 사탄도 데려갈 수
없습니다. 그런 영인은 중간영계(中間靈界)로 갑니다. 중간영계에 있는 영인을 낙원 이외의 영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지상에서 악하게 산
영인들이 가는 영계도 있습니다.
영계에 가 있는 영인은 세 부류로 나누어 부활섭리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고 간 영인, 그 다음
선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고 간 중간영계의 영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하게 살다가 간 악한 영인으로 구분해서 영인들의 부활섭리가
일어납니다.
(1) 하나님을 믿고 간 영인들의 부활 433
하나님을 믿고 간 영인들의 부활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말씀을 행함으로써 영형체급 영인체가 되어서 영형체급 영계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신약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을 중심한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말씀, 즉 복음을 믿음으로써 영인체가 생명체급까지 성장합니다. 그 때 영형체급 영계의
소생기 영인들은 지상에 재림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뜻을 위해서 더 열심히 살도록 협조합니다.
마태복음 17장 3절에 엘리야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구약시대 사람이므로 영형체급 영계에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7장 13절 이하를 보면,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재림했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영인체가 육신을 쓰고 성장·완성할 때 엘리야의 영인체도 성장·완성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생명체급
영계에 가면, 그 제자들도 생명체급 영계에 가게 되고 그때 협조했던 영인들도 생명체급 영계에 갑니다.
재림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림주가 오시면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과 함께 구약시대에 왔다 간 영인들 중에서 예수님 때 재림하여 육신을 쓴 지상인에게 협조함으로써 낙원에
갔던 영인들도 재림하여 지상인과 상대기준을 조성하게 됩니다. 그들이 지상인을 협조해서 지상인이 성장하고 완성하면 함께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들 들면 어떤 영인이 열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에게 재림했다고 가정합시다. 만일 그가 여든 살이 되어 죽는다면, 그 영인은
열다섯 살 먹은 아이를 65년 동안 따라다녀야 합니다. 자기의 육신을 가지고 살기도 어려운데 남의 육신을 빌려서 65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성장하고 완성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의 생활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 히브리서 11장 39절과
40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였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영계의 영인들은 지상의 인간을 통하지 않고서는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땅 위에서 맺히면 하늘에서도 맺히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마태복음 18장
18절)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천국 문의 열쇠를 지상의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마태복음 16장 19절). 영계의 문제는 모두 땅에서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낙원 이외의 영인들의 재림부활 435
낙원 이외의 영인들의 재림부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땅에서 양심을 지키며 선하게 살았다면 지옥으로 가지 않고 중간 영계에 머물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데려 갈 수 없고, 악한 생활을 별로 안 했기 때문에 사탄도 데려갈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선하게 산 B라는 사람이 죽어서
육신을 벗고 영계에 갔는데, 영계에 들어가서 자기 영인체를 보니 아직 가야 할 곳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영인체를 완성해
줄 육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 육신 쓰고 있는 A라고 하는 지상인에게 재림하여 협조합니다. B라는 영인체는 A라고 하는 지상인에게 재림하여
A의 영인체가 성장·완성하도록 도와줌으로써 A가 육신을 벗고 하나님 앞으로 갈 때 B도 함께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됩니다..
영계의 영인체는
소질과 개성과 능력 등 모든 면에서 자기와 상대기준이 맞는 사람을 만날 때 지상에 와서 협조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제일 가까운 사람은 같은
혈통을 지닌 사람입니다. 혈통이 같으면 닮은 유전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혈통을 찾아갑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은 사람은 자기와 같은 사명을
하는 사람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그가 하지 못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지상의 세례 요한에게 재림한 경우과 같습니다.
낙원
이외의 영계에 있는 영인들은 반드시 육신을 지닌 지상의 인간에게 협조해야 합니다. 계시를 준다든가, 신령한 감동을 받게 한다든가, 꿈을 통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준다든가, 그 다음에 불의 역사를 한다든가, 해원의 역사를 한다든가,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줘서 그런 권세를 가지고
살게 함으로써 지상인으로 하여금 ‘더 열심히 일해야 하겠구나. 하나님이 뜻을 위해 더 힘써야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여 뜻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3) 악영인의 재림부활 436
악인들은 죄를 짓고 영계에 갔기 때문에 선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직접 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악영인(惡靈人)마저도 모두 구원해야 합니다. 영계에는 악영인들이 지상에서 지은 죄를
면하게 하는 탕감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탕감조건을 세워서 그 죄를 벗게 합니다.
지상인이 지은 죄에 대한 벌로서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바로 지상 인간이 볼 때는 벌이 됩니다. 지상인이 지은 죄를 청산할 수 있는 어떤 탕감조건을 세웠을 때 그들도 비로소
그 자리에서 해방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나님이 직접 하시지를 않고 악영인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역사를 합니다. 악영인이
역사하여 지상인이 죄를 탕감했다는 조건이 세워졌을 때 비로소 그 악영인은 혜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고자하는 일을 악영인이 대신
조건을 세워서 처리한 결과가 되기 때문에 악영인이 부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악영인의 재림부활역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직접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지상인을 직접 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놔두면 그 지상인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지은 그 지상인을 벌주고 회개시켜서 지옥에 가지 않도록 하려는데 직접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영인이 지상의 실체 악인에게 직접 재림해 역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지상의 악인이 대가를 치르고 죄를 탕감했다는 조건이 세워집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대신한 결과가 되기 때문에 악영인은 구원의 혜택을 받습니다.
또 하나는 간접적인 방법입니다.
간접재림(間接再臨) 방법은 악영인이 실체 지상인에게 재림하여 그 지상인으로 하여금 다시 다른 악한 인간에게 역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3자를
거쳐서 죄를 탕감하기 때문에 그것을 간접재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한 벌로 탕감조건이 세워질 때 비록 악인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탕감조건이 세워졌으므로 결국 그 악영인도 혜택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입장이든 간에 의심하고 불평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미워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 사람을 통해서 배후의 조상들이 잘못한 것까지도 탕감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야 그것이 정리됩니다.
불평불만하면 정리되지 않습니다. 불평하고 불만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하거나 불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위하는 생활’만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4) 재림부활로 본 윤회설 437
지금까지 불교에서는 윤회설(輪回說)을 놓고, 지상에서 선하게 살면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고, 잘못 살면 동물로 환생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고,
영인체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 살다가 죽었다고 해서 그 영인체가 사람이 아닌 원숭이나 동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계는 빛의
세계입니다. 어둠의 세계인 지옥은 가장 밑에 있고, 빛의 세계인 천국은 위에 있습니다. 지옥에 있는 영인들은 형체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태에 따라서 동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놓고 인간이 동물로 윤회한다고 본 것입니다.
원리로 볼 때 윤회는 재림부활과 같은
말입니다.
지상에서 자기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간 영인들은 각각 지상에서 자기들이 맡았던 것과 같은 사명을 가진 지상인에게 재림해서 그
뜻이 이뤄지도록 협조합니다. 그 때 협조를 받는 지상인은 자기 자신의 사명도 이루어 나가야 하는 동시에 자신을 협조하는 영인의 사명까지도 대신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사명을 중심으로 보면 그 지상인의 육신은 그를 협조하는 영인의 육신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재림부활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다른 동물로 환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생각이나 행동이 이미 죽은 지인과 흡사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환생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지상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 육신을 지닌 사람에게 협조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세례 요한에게 재림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본인의 사명을 다하고 재림한 엘리야도 역시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맡은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재림주가 오실 때에도 그들은 지상에 재림해서 육신을 쓴 인간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3. 재림부활에 의한 종교 통일 439
영계에서는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한 종교인들이 각자 자기가 신앙하던
종교의 교조(敎祖)나 도주(道主)밑에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영계에 가게 됩니다. 그들은 영계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낙원에
머물다가 재림주가 오시면 예수님을 따라 땅위의 기독교인들에게 재림하여 재림주를 찾아가도록 협조합니다.
영계에 있는 불교 신자들도 석가모니와
함께 불자들에게 재림하여 이 땅의 불자들을 재림주 앞으로 안내합니다.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계에 있는 유생들의 영인체도 공자와 함께
재림하여 지상의 유생들이 재림주를 따르도록 협조합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로 영계에서 자기가 신봉하는 교주 또는 도주를 중심으로 각가
자기에게 해당하는 등급의 영계에 머물다가 이 땅에 재림주가 오시면 재림하여 자기와 신앙의 등급을 같이하는 사람을 차자가 재림주를 찾아가도록
협조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영계에 간 영인들도 각자 자기와 상대기준이 조성되는 지상인을 찾아 재림합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선한
영인이 재림하고,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양심을 따라 살다 간 영인이 재림하여 재림주를 찾아가도록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재림주의
지상 강림에 맞추어 모든 등급의 영계에서 지도자와 개개의 영인들을 교육해서 지상의 재림을 준비하도록 하십니다. 영계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서
영인들이 지상 섭리에 협조하도록 교육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계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계가 통일되면 하나님은 영계를 거느리고
지상에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계를 통일해서 영계를 거느리시고 영광 가운데 이 땅에 등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주관권을 넓히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종교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영계의 활동으로 종교의 통일은 물론 재림주를 중심한
지상과 영계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6장 예정론 441
예정론은 인간 개개인의 운명이나 국가의
흥망성쇠는 인간의 행위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지로 미리 정해진다는 학설입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예정론을 두고
‘타락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미리 정해져 있다. 그렇지 않다.’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에 큰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서론 442
예정론(豫定論)은 인간 개개인의 운명이나 국가의 흥망성쇠는 인간의 행위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지로 미리 정해진다는 학설입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예정론을 두고 ‘타락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미리
정해져 있다. 그렇지 않다.’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에 큰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 논란은 성서를 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온 것입니다. 성서에는 예정론을 긍정하는 측면과 부정하는 측면의 상반된 예언이 나옵니다.
긍정적인 예언을 보면,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5절과 16절을 보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불쌍히 여길 사람, 긍휼히 여길 사람을 이미 다 정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9장 21절에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사람의 귀천을 예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11절에서 13절을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습니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한 것은 예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예정설을 부정하는 성구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을 보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구하고
찾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책임입니다. 인간의 노력에 따라 뜻 성사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을 보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병중에
있는 형제가 있거든 교회에 가서 믿음이 있는 장로를 데려다가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그가 아픈 것이 예정되었다면 왜 교회에 가서
장로를 데려다가 기도를 하라고 했겠습니까? 그것은 예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이루어지기도 하고, 안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고, 따먹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선악과를 따먹고 따먹지 않는 것은 예정된 것이 아니라
아담·해와의 행동(책임)여하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6장 6절에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는 성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들이 많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담의 타락은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이상을 두고 인간을 선하게 지었는데, 인간이 타락하여 많은 죄를 짓고 원죄를
가진 후손을 번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탄식하신 것이지, 탄식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 여하에
따라 타락할 수도 있고 타락하지 않고 완성할 수도 있는데, 책임을 못해서 타락했고 죄를 지은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절대 예정을
뒷받침하는 성서의 기록도 있고, 그것을 부정하는 식구도 있습니다.
1. 뜻에 대한 예정 444
통일원리에서는
하나님이 예정을 하기는 하시되, 뜻에 대해서만 절대 예정하시는 것으로 봅니다. 뜻을 이루는 데는 예정된 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예언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안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뜻은 유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하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뜻도 절대·유일·불변·영원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이 죽고 살고, 지옥 가고 천국 가고
그런 예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입니다. 복귀섭리의 목적이 창조목적을 반드시 이루는 것이듯이 하나님의
절대·유일·불변·영원한 그 뜻을 완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입니다.
2. 뜻 성사에 대한
예정 445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인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성사에 대한 예정, 즉 뜻을 이루기 위한 예정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인데 그것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해 오신 것도 절대적인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창조목적을 이루는 뜻 성사는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인간책임분담을 더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책임분담 95퍼센트는 이미 있는 것이므로 인간책임분담 5퍼센트만 이루면 100퍼센트의 절대적인 뜻이 이루어 지지만, 인간책임분담
5퍼센트가 없으면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책임분담이 중요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아담·해와가 완성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완성됩니다. 완성한 자녀는 부모를 완성시킵니다. 부모가 완성되면 애당초 계획했던 하나님의 뜻이 성사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뜻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의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하는 말씀은 인간이 해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이지만, 뜻 성사에 대한 예정은 상대적입니다.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하면 뜻이 성사되지만,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면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책임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뜻이 이루어지느냐, 안 이루어지느냐가
달려 있기 때문에 뜻 성사는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입니다. 뜻 자체는 절대적이지만 뜻을 성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예정했다는 말입니다.
3.
인간에 대한 예정 446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뜻 성사를 위해
어떻게 인간에 대한 예정을 하셨는가?
하나님의 뜻은 구원섭리 전체를 이루는 것인데, 그 전체의 구원섭리는 하나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하나로부터 시작해서 전체를 완성·완결지어야 합니다.
전체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하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하나가
중요합니다. 구원섭리가 출발할 수 있는 하나라는 것은 중심인물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의 중심인물을 세웁니다. 그 중심인물을 택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중심인물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중심인물은 반드시 선민(選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택한 민족 가운데서 중심인물을 고른다는 것입니다.
둘째, 조상의 선한 공적(功績)이 많아야 합니다. 선민 중에서도 조상의 공적이
많은 사람을 우선으로 선택합니다.
셋째, 개인의 선천적 성품, 곧 천품(天稟)이 좋아야 합니다.
조상의 공적이 많더라도 뜻을 이룰 수
있는 개인의 천품이 좋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뜻을 이루기 위한 후천적 조건이 좋아야 합니다. 주변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상의 공적도 많고 천품도 좋은데, 주변의 환경이 나빠서 뜻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 사람을 중심인물로 세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심인물은 천품이 좋아야 하지만 후천적 조건도 좋아야 합니다.
다섯째, 반드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시기와 장소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앞에서 열거한 조건을 다 갖추었다 하더라도 만일 다른 곳에서 태어났거나 적기에 태어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중심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열거한 중심인물이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은 하나님이 불렀다 할지라도 그가 세우신 뜻을 감당하지 못하면 예정된
인물로서 사명을 할 수 없게 되고, 뜻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완수하면 예정된 사명도 완성하고, 하나님의 뜻도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건을 모두 갖추고 중심인물이 세워졌다 하더라도 그가 책임을 못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27장 3절에서
10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대제사장에게 팔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시기와
장소에 태어났습니다. 아마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개인의 천품이 좋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결국 그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된 인물로서 부름을 받았지만 예정된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책임을 못하고
열두 제자 가운데서 탈락함으로써 하나님은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택했습니다(사도행전 1장 15~26절). 이처럼 뜻은 절대적으로 예정하지만
뜻 성사는 상대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책임을 하면 뜻이 이뤄지고, 책임을 못하면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 어떤 인물이 뜻을
이루지 못해서 대신 다른 인물을 세울 때 그 사람을 어떻게 정하느냐? 위의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세
가지입니다. 다섯 가지 중에 세 가지만 충족하면 하나님이 세우셔서 일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이 됩니다. 다만 메시아는 위의 다섯 가지 조건을 다
갖춰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이지만, 인간은 상대적으로 예정합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다 예정했다고 하는
것은 뜻도, 뜻 성사도, 인간에 대한 예정도 100퍼센트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통일원리에서는 뜻은 절대적으로 예정하지만, 뜻 성사와 뜻을
이루기 위한 인간은 상대적으로 예정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4. 예정설을 세워주는 성구 해명 449
예정설을 뒷받침하는
성구로는 다음의 네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미리 인물을 예정하시고 부르시지만, 하나님의 책임분담인 부르시는 것만으로 그가 의롭다 함을 얻고 영화롭게까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할 때 의롭다 함을 얻고 그 후에야 하나님도 그에게 영화를 누리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화도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함으로써만 누릴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예정하셨지만, 인간이 책임분담을 감당함에 따라 예정된 모든
절차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2) 로마서 9장 15절과 16절 450
로마서 9장 15절과 16절에는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9장 21절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했습니다. 토기 만드는 사람이 진흙 한 덩이로 귀한 도자기와 같은 그릇도 만들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3) 로마서 9장 11절에서 13절 450
로마서 9장
11절에서 13절에는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이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은 복중에서부터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복중에서부터 이미
예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복귀섭리노정의 절차에 맞추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사연은 ‘후편 복귀원리’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아담은
타락함으로써 선과 악이 공존하는 중간 위치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선과 악으로 쪼개야 할 아담이지만, 사람을 쪼개면 죽기 때문에 실체 아들인
가인과 아벨을 선 편과 악 편으로 나눴습니다.
또 아브라함가정에서는 이삭을 중심해서 에서와 야곱을 선 편과 악 편으로 나눴습니다.
아담가정에서 가인은 사탄 편에 세우고, 아벨은 하늘 편에 세웠던 것처럼 아브라함가정에서도 장자인 에서는 사탄 편에 세웠고, 차자인 야곱은 하나님
편에 세운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복중에 있었지만, 에서를 미워한 이유는 장자인 에서를 야곱과 분립하여 사탄 편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분립된 차자로서 하늘 편에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했습니다. 예정되었기 때문에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에서는 비록 복중에서는 미움을 받았지만, 태어나서는 책임을 완수해서 모든 일을 하나님 뜻에 맞게 실천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복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지상에 태어나서 책임을 못하면 하나님은 그를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중에서부터 미움을 받거나 사랑을 받았던 것은 섭리의 절차에 맞추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복중에서 이미 예정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통일원리’에서는 하나님이 예정을 하시되, 뜻은 절대적으로 예정하시고, 그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인간에 대한 예정은 상대적으로
예정하신다고 봅니다.
제7장 기독론 453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이론을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기독론은 기독교의 강령입니다.
정치인들이 속한 각 정당에도 강령이 있습니다.
어느 단체든 강령이 있어서 그것을
중요시합니다.
서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이론을 기독론(基督論)이라고 합니다. 기독론은 기독교의 강령입니다. 정치인들이 속한 각
정당에도 강령이 있습니다. 어느 단체든 강령이 있어서 그것을 중요시합니다.
기독론은 기독교의 강령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 가운데 기독론을
확실히 알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기독교의 교리 연구와 신앙생활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켜
왔습니다.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님과 성신의 관계,
예수님과 성신과 타락한 인간과의 관계, 중생과 삼위일체 등게 관한 것입니다. 그것들이 기독론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들입니다.
1.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가치 454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냐, 아니면 인간이냐? 또 예수님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등을 먼저
규명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성신의 관계, 예수님과 성신과 중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가치를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1)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의 이성성상적 관계 455
인간
조상인 아담은 타락하지 않았으면 창조이상을 완성한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목적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신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가치를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치는 한 줌의 흙만도 못한 존재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본성상과 본형상의 이성성상으로 계십니다. 인간을 놓고 보면, 본성상은 마음과 같고 본형상은 몸과 같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주체의 자리에, 몸은 보이지만 대상의 자리에 있습니다. 보이는 몸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닮은 제2의
마음입니다.
수상(手相)이나 관상(觀相)·골상(骨相)등 외모를 보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를 예측하고 측량하듯이 몸은 바로 보이지 않는
마음을 전개한 실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몸을 마음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몸은 마음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완성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마치 몸과 마음의 관계와 같습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처럼 인간도 완성하면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완성하면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닮아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됩니다. 신인일체(神人一體)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인간은 하나님적 가치를 지니게
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곧 하나님은 아닙니다.
2) 창조목적으로 본 인간의 가치
456
하나님의 성상 가운데는 내적 성상이 있고, 내적 형상이 있습니다. 내적 형상은 하나님의 다양한 개별상입니다. 그 개별상 가운데
독특한 하나의 개별상을 가지고 나타난 실체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개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속에 있는
A라고 하는 개별상을 나타내고 어떤 사람은 B라고 하는 하나님의 개별상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각각 하나님의 앞에 유일한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입니다.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무수한 속성 중에서 독특한 하나의 개별상을 가지고 태어난 유일한
개성체입니다.
그래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가치를 지닙니다. 개인은 과거에도 없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없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개성진리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속에 있는 유일한 개성체를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3) 인간과 피조세계의
관계 456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본으로 해서 모든 피조물을
창조했습니다.
인간은 본성상과 본형상의 이성성상으로 계신 하나님을 닮아서 영인체와 육신을 지니고 있는데, 영인체는 보이지 않고 육신은
보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영인체는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와 관계를 맺고, 보이는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와 관계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이 두 세계를 천주라고 합니다.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는 인간을 중심해서 서로 화동하며, 인간이
중심이 되어 두 세계를 주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천주의 총합실체상(總合實體相)으로서, 완성한 인간은 천주적(天宙的)인 가치를
지닙니다.
2.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과 예수님 457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분립되어 나온
마음과 몸이 완성되어 하나님과 일체가 된 인간이며, 그 인간은 하나님적인 가치·영원한 가치·유일무이(唯一無二)한 가치·천주적(天宙的)인 가치를
지닙니다. 그것이 바로 완성한 인간의 가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분립된 마음과 몸을 지닌,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적인 가치·영원한 가치·유일무이한 가치·천주적인 가치를 지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토록 소망하시던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가치를 지닌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지만, 가치로 볼 때는 위 타락한 인간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서 후아담으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완성해야 했던 그 기준을 이루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이 소원하던 생명나무요,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입니다.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적 가치·영원한
가치·유일 무이한 가치·천주적인 가치 이 네 가지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가치를 부여하더라도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가치 이상 가치의
기준을 높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무리 높여도 하나님적인 가치·영원한 가치·유일무이한 가치·천주적인 가치 이상으로 높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치로 볼 때 하나님적인 가치를 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냐, 아니면 인간이냐? 하는 논쟁은 끝납니다. 예수님은 바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적인 가치를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 생명나무 복귀로 본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
‘생명나무’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데 맨 먼저 구약 창세기
2장 9절에 나오고 마지막으로 신약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 나옵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창조원리’에서 말씀드린 대로 완성한 아담을
상징합니다.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을 가리켜서 생명나무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타락해서 생명나무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후아담이 오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후아담이자 생명나무의 실체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으로 오신 것입니다.
생명나무 복귀로 볼 때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의 가치는 같습니다.
2) 예수님이 곧 하나님인가?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볼 수밖에 없는 기록이 있습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지,
그렇게 믿도록 하는 성경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요한복음 14장 9절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8절)라고 요청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인간의 마음과 몸의
관계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주체이고 제1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 대상인 몸은 마음을 닮아난 제2의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이 마음 그 자체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놓고 볼 때 하나님은 제1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적인 가치를 지닌 제2창조주입니다. 예수님이 책임분담으로 자신의 인격을 창조해냄으로써 하나님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로마서 8장 34절을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신
분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을 보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니라.’고 십자가 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7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하는
예수님의 기도 장면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말은 하나님은 아버지요, 예수님은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을 한 후 사탄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기독교인들을 믿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었다면 하나님이 40일 금식을 하시면서 사탄에게 시험받았다는 얘기가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본다면 신(神)이 죽었다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런즉 예수님은 하나님적인 가치를
지녔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2) 요한복음 1장 10절 460
요한복음 1장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을 보면,
말씀에 의해서 피조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과 함께 계셨고 말씀에 의해서 세상이 지음 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고,
말씀의 수육자(受肉者)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말씀이 수육(受肉)된
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분이요, 천주의 총합실체상(總合實體相)이요, 창조성을 지니고 모든
것을 관장하고 주관할 수 있는 창조주의 입장에 계신 분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만물도 본연의 주인을 잃어버려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서
8장 22절). 예수님은 아담이 완성하지 못한 본연의 뜻을 완성한 후아담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피조물은 본연의 창조가치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에 의해서 피조물이 지음 받았다고 표현된 것입니다. 완성한 인간으로 인해 창조의 가치가
실현된다고 볼 때 예수님은 창조주의 자격을 지닌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곧 하나님은 아닙니다.
(3) 요한복음 8장
58절 461
요한복음 8장 5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복귀섭리역사로 볼 때는 인간의
조상입니다.
예수님은 전 인류의 원죄를 청산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인간 조상 아담까지도 원죄를 청산해서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복귀섭리로 볼 때는 아브라함의 조상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신 것이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결론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1축복을 완성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3. 타락인간과 예수님 462
예수님은
완성한 인간으로서 피조세계의 주관주(主管主)이고 원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또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신 분이요, 참사랑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구하는 구세주로 오신 분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완성한 인간의 가치를 상실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피조세계를 주관할 자격을
상실하고 오히려 악의 주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물도 탄식하는 인간이 되었고, 원죄를 지닌 인간이 되었습니다. 참사랑의 실체도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과 예수님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할 구세주이고, 타락한 인간은 예수님에게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예수님을 통해
중생(重生)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중생하면 복귀한 인간이 됩니다.
예수님과 복귀된 인간은 어떻게 다른가?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입니다. 복귀된 인간은 몸이고 지체입니다. 히브리서 1장 6절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본성전(本聖殿)이라면, 복귀된 인간은 분성전(分聖殿)입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복귀된 인간은 그 가지입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달려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익은 열매라면, 복귀된 인간은 다음에 익은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참부모이면, 복귀된
인간은 참자녀입니다.
4. 중생론과 삼위일체론 463
타락한 인간이 중생을 얻으면 비로소 본연의 모습으로
복귀한 인간이 됩니다. 본 기독론에서 말하는 중생은 메시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타락인간의 복귀를 말합니다.
기독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중생과 함께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1) 중생론 464
중생은 다른
말로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원죄 때문에 죽었던 영(靈)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기독교 용어로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통해서 구원받아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1) 중생의 사명으로 본 예수님과
성신 464
타락한 인간을 거듭나도록 하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후아담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혼자
이 타락한 인간을 거듭나게 해 줄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혼자서는 자식을 낳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있어야 자식을 낳을 수
있습니다. 타락인간의 중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후아담이 왔으면 후해와가 와야 합니다. 중생의 사명으로 본 예수님과 성신(聖神)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해서 예수님과 성신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체로 오신 후아담입니다. 그러면 후해와의 실체로 와야 하는데
예수님은 후해와의 실체를 차지 못했습니다.
전도서 7장 28절을 보면,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일천 남자 중에서 한 남자를 찾았으되 일천 여인 중에서 한
여인을 찾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설움이고 탄식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찾았지만 예수님의 실체 상대를 찾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한
성신은 참어머요, 후해와입니다. 성신은 하나님 안에 있는 절대성, 곧 참어머니의 성(性)을 그대로 가지고 나온 분입니다. 성신은 위로(慰勞)의
신이고, 감동의 역사(役事)를 펼치는 신입니다. 또 땅에서 죄를 씻어주는 역사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신의 역사를 받지 않으면 감동의 눈물도
없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강력한 사랑의 힘도 유발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영계에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성신을 실체로 모시지 못하고 영계에 가셔서 영적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어머니로 맞이하게 된 분이 성신입니다. 예수님은
영계에서 참아버지로 역사하시고, 성신은 비록 실체는 찾지 못했지만 하나님 안에 있던 여성 실체로서 땅에서 영적 참어머니의 역사를
하십니다.
‘통일원리’에서는 성신을 예수님의 신부로 봅니다. 신부는 신랑을 위해서 삽니다. 또 신랑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신랑을
존경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신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모든 생명까지 바치면서 감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역사합니다. 성신은 땅에서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려던 마음을 성도들이 갖고 살 수 있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지도자가 성신의
역사를 갖지 않으면 성도들을 올바로 지도할 수 없고, 성도들은 올바른 신앙길을 가기가 어렵습니다. 성신은 위로와 감동의 역사와 함께 눈물의
역사, 죄를 씻는 역사를 말합니다. 성신의 역사는 땅에서 일어나는 어머니의 역사이기 때문에 포근합니다. 성신의 역사를 받으면 감동이 커져서
주님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성도가 되고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의미를 알려면 먼저 하나님의 절대성을 알고, 예수님과 성신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양성이라는 참아버지의 절대성과 본음성이라는 참어머니의 절대성 본체로 계십니다. 절대성 본체로 계신 하나님
안에서 참아버지의 절대성 정자를 가지고 오신 분이 바로 참사랑의 씨를 가진 실체 참아버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성 본체를 닮아서 참어머니의
절대성 난자인 생명의 몸을 가지고 현현하신 분이 실체 참어머니입니다.
참아버지와 참어머니의 실체가 되기 위하여 맨 먼저 이 땅에 온 사람이
아담과 해와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가 타락해서 그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서 실체를 지니고 후아담으로
왔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아담의 갈비뼈로 해와를 창조했던 것처럼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도 예수님을 닮은 그런 여성을 찾아서
완성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그 여성을 찾이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주셨지만 환경이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자리에 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체의 참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영적인 참어머니를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신으로 오시는 참어머니의 난자는 아기씨를 받아서 씨를 완성시킬 보자기와 같습니다. 그 씨는 완성되면 아버지와 같은 실체를
이룹니다. 실체는 아버지의 정자, 씨 속에 있습니다. 그 씨를 보자기와 같은 난자로 보호해서 길러내야 하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성신은 실체 몸을 갖지 못한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성신, 곧 영적 아버지와 영적 어머니의 역사를 받아 중생하면 원죄가 벗겨지고
실체적인 아들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구원만을 받은 성도가 됩니다. 영적 구원은 일종의 양자가 되기 위한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자에게는 육적 구원이 남아 있습니다.
실체적인 아들딸이 되려면 실체의 참아버지와 참어머니를 통해서 거듭나야 합니다. 실체를 통해야 영적
중생뿐만 아니라 여육을 아우르는 중생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후예수님으로 세 번째 아담인 재림주님을 보내주십니다. 재림주님은
영육을 지니고 오셔서 이 땅에서 재림성신으로 영육을 지닌 여성을 준비하십니다. 그 두 분이 어린 양 잔치를 하여 부부를 이루면, 영적으로
중생했던 양자가 그 부부의 실체 사랑에 감화·감동하여 영육 아우른 중생을 하게 됩니다. 비로소 원죄를 벗은 실체적인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양자에서 자녀가 되는 것이 영육 아우른 중생입니다.
(2)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본 예수님과 성신 467
하나님
안에서 로고스(logos: 말씀)의 실체로 오신 분이 아담과 해와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여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다시 낳기 위하여 후아담, 인류의 참아버지로 오셨습니다.
여기에는 마땅히 후해와 곧 인류의 참어머니가 계셔야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성신입니다. 후아담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참아버지이고, 후해와로 오시는 성신은 참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신을 맞지 못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성신은 실체가 없는 신이 되었습니다. 실체가 없는 신이기 때문에 성신이라고 합니다.
(3) 예수님과 성신에 의한
영적 중생 467
원래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가 개성을 완성한 다음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아 사위기대를 이루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담과 해와는 참조상이 되고, 참부부가 되고, 참부모가 됩니다. 또 아담·해와의 조상이 되고, 참부부가 되고,
참부모가 됩니다. 또 아담·해와의 아들딸은 참자녀가 됩니다. 아담과 해와는 영육을 완성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정에서 자녀를 번식하면
참가정의 혈통을 그대로 종족·민족·국가·세계로 확대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사탄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거짓된
조상이 되고, 거짓된 부부가 되고, 거짓된 부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핏줄을 이어받은 거짓된 자식을 낳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거짓된 혈통을 이어갔기 때문에 구원섭리로 혈통을 정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자식을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 복귀시키기 위해 구원섭리를
해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 가운데는 타락이 없습니다. 인간을 타락하지 않은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는 것이 구원섭리요,
복귀섭리입니다.
구원섭리, 곧 복귀섭리를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해서 후아담이 있고, 후해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후아담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실체 후해와를 맞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 ‘일천 남자 중에 한 남자를
찾았지만, 일천 여자 중에 한 여자를 찾지 못했다.’(전도서 7장 28절)고 한 것입니다.
성신은 실체를 갖지 않은 어머니 신입니다.
예수님과 성신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영적으로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의 감동에 의해서 이 땅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이
성도(聖徒)요, 중생한 영적 자녀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만 중생했기 때문에 양자(養子)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이 없으므로 아직 육적으로 중생을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자식인데 핏줄이 다른 영적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양자는 핏줄은 다르지만 법적으로 인정을 해주는 자녀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양자권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되기를 소원한다.’(로마서 8장 23절)고
했습니다.
적자(嫡子)가 되지 못하고 영적인 양자만 되어서는 원죄를 벗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아직 원죄가 남아 있다면 육적인 중생을
이루어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재림주님과 재림성신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재림주님은 재림아버지가 되고,
재림성신은 재림어머니가 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과 21장 9절을 보면 어린 양 잔치를 한다고 했습니다. 21장 9절에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신부를 네게 보이리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재림주님이
여인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어린 양 잔치입니다. 재림주와 재림성신의 사랑에 감동·감화하면 영육으로 부활·중생한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과
성신에 의한 중생은 영적(靈的) 중생이며, 참아버님고 다시 오시는 참어머님을 중심한 중생은 영육 아우른 중생입니다. 영육의 중생은 실체 자녀,
곧 영육이 완성한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재림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 구원섭리가 완성되는데, 그 때 타락권의 인간들과 양자권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재림주님 안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인간들은 영육실체(靈肉實體)를 지닌 참부모님의 혈육안에 들어갔다 나올 때 영육이
중생하여 실체 자녀가 됩니다. 사탄권에 있는 인간이 참아버지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 하나님의 선주관권으로 복귀되는 것입니다.
2)
삼위일체론
중생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과 성신(聖神)은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일체가 됩니다. 그것이 곧 삼위일체(三位一體)입니다.
삼위일체는 세 위치에 있는 존재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부·성자·성신의 삼위신(三位神)을 지금까지는 삼위일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개체는 어디까지나 개체요,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성신은 예수님의 부인입니다.
또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해와는 하나님의 딸이자 장차 아담의 부인 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아담·해와, 하나님·예수님·성신, 이들은 각자가 어디까지나 개체입니다. 그러나 뜻으로 볼 때 이 세 존재는
일체입니다.
뜻으로 본 삼위일체
‘통일원리’에서 보는 삼위일체는 개체로 보는 삼위일체가 아니고, 뜻으로 본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성성상의 실체로 아담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몸으로 지었습니다. 또 아담의 갈비뼈로 해와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해와가 아담과 일체를 이루면, 하나님 속에서 아담이 나왔으니 결국
해와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 존재는 뜻으로 볼 때 일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담의 뜻이요, 아담의 뜻이 해와의 뜻이요,
해와의 뜻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연이 삼위일체는 하나님을 중심한 아담과 해와의 영육으로서의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삼위일체는
사탄을 중심한 아담과 해와의 삼위일체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영과 육으로 타락했습니다. 따라서 복귀된 삼위일체는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와
성신의 영적인 삼위일체 또는 재림예수님과 재림성신의 영육을 갖춘 삼위일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실체로 찾아오신 참아버지와 참어머니의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아버지·어머니는 개체로 볼 때는 다르지만, 뜻으로 볼 때는 하나입니다.
절대적인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아담은
참아버지이고, 해와는 참어머니입니다. 그래서 ‘통일원리’에서는 개체로 본 삼위일체가 아니고 뜻으로 본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하나님·아담·해와가 본연의 삼위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타락으로 인해 타락한 삼위일체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