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편 - 사위기대 복귀를 중심한 인류역사 탕감복귀 섭리노정
서론
인류역사는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출발된 비원리세계를 원리세계로 복귀하여 하나님의 천주창조의 이상을 실현코자하는 복귀섭리역사라는 것은 이미 전편에서 상술하였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어떤 시대에 어떤 장소에서 어떠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하는 평면적인 요인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뒤에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고있는 사탄 사이에서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벌어지는 입체적인 사실들이 그대로 인간세계에서 실체로서 구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로써 알려지는 이스라엘역사나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전하여오는 역사는 이 섭리노정에서 일어난 평면적인 사실만을 그대로 기록하였을 뿐이고 하나님과 사탄과의 입체적인 관계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역사는 어떻게 종결될 것이며 따라서 이 역사는 어떠한 공식적인 섭리노정을 이루어 나오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서는 명확한 대답을 하여주지 못하였다.
가인이 아벨을 살륙함으로써 시작된 선과 악의 투쟁역사는 알 수 없는 헝클어진 곡선을 그리면서 유구한 기간을 두고 돌고 또 돌아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다시 찾아 나아가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타락된 인간이 창조본연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려면 이 헝클어진 섭리노정을 찾아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길이 타락된 인간이 걷지 않으면 안 될 길이요 이른 바 인지당행지도이다. 역사노정에 오고간 많은 성현과 선지선열 또 뭇 도인 철학자들이 노심초사하여 찾아 헤매온 길이 바로 이 길이었다.
미로에서 헤매는 인간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종교를 찾으며, 한숨을 지으며 도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원리를 떠나서는 운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미 창조원리에서 해명되었다. 원리로써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재창조역사인 복귀섭리로 원리를 떠나서는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한날의 행사를 거행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있거든 하물며 6천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공식적인 프로젝트를 떠나서 원리적인 복귀섭리를 하실 것인가.
이 헝클어진 역사노정이 공식적인 원리궤도로써 풀려질 때 온 인류는 다같이 한길을 통하여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한 목적을 향하여 한 곳으로 모이어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창조이상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질곡을 벗어나 자유인이 되어 자유의 길을 걸어야한다. 자유인이 되려면 진리를 알아야겠고 자유의 길을 걸으려면 원리의 길을 알아야겠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놓아 주리라고 말씀한 것이다(요 8/32).
역사이래에 오고 간 많은 선인들이 부르짖은 어떠한 종교도 철학도 그는 이 원리의 길의 한토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원리를 중심하고 종교통일을 목표로한 혁명운동의 가능성도 이로써 알려질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류역사는 동일한 환경에 처한 종족 혹은 민족에서 형성되어지는 문화권을 중심하고 발달하여왔다. 그리고 이 문화권을 형성하는 중대한 요인은 그 종족 혹은 민족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며 이 사조의 주류를 형성하는 필수의 요인은 그 종족이나 민족의 사상을 지배하는 종교에 있다.
복귀원리의 의의는 하나님의 주관권내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즉 기원절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한 종교요 기원이후에는 영적 이스라엘인 기독신도를 중심한 종교로써 이루어 내려온 공식적인 복귀섭리노정을 밝히려는데 있다. 타락된 피조세계는 창조전의 질서없는 혼돈세계와 같이 창조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비원리세계다. 그러나 영원을 표준하고 창조하신 원리적 기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계를 도말하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창조하신 원리의 형만을 갖추고 있는 비원리세계를 다시 원리세계로 복귀하려는 섭리를 하신다. 그러나 이 타락된 세계는 사탄도 취할 수 있는 원리형인 조건이 성립되어 있음으로 하나님과 사탄과의 사이에 어떤 조건을 성립시키지 않고는 이를 원리세계로 복귀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단순히 때와 곳을 터로한 인간을 중심하고 일어난 사실로써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실은 반드시 하나님과 사탄과의 사이에서 원리적 관련성을 갖고 벌어지는 섭리의 실체적인 전개로서 현현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하나님과 사탄이 타락된 인간을 중간에 놓고 서로 탕감조건을 세워가면서 싸우는 사람 빼앗기 싸움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역사는 탕감복귀역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탕감복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무엇이든지 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상실하였을 때 그 상태를 회복하려면 반드시 어떠한 조건이 성립되어야한다. 이와같이 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에 해당하는 조건을 세우는 것을 탕감이라고 하며 이 조건을 세워 본연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탕감복귀라고 한다.
탕감조건을 세움에는 두가지 형식이 있다. 첫째는 본연의 위치와 상태에서 상실되었던 것과 동일한 가치의 조건을 세워 원상으로 회복하는 것이니 이런 경우에는 보상이라든가 환상이라는 의미로 통할 것이다. 보상이나 환상을 하는 것은 보상 혹은 환상할 필요가 없었던 본래의 입장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인 것은 데임으로 상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고 기록된 모세의 율법은 곧 이런 의미의 탕감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상실된 본연의 가치보다 훨씬 작은 가치의 조건을 세워 원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십자가의 신앙은 영적복귀를 위한 탕감조건이다. 창조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회복하기 위하여 인간은 인간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그 상실된 본연의 전 가치를 찾아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조그만 가치로써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죽었다는 탕감조건을 세워 영적 복귀의 혜택을 받는 것이다.
세례의 기원도 홍수로써 구원받은 노아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는데 있다. 즉 우리의 몸 전체를 물에 담갔다는 것으로 노아 홍수를 거쳤다는 탕감조건을 세워 40일 홍수심판으로 구원을 받은 노아의 입장을 복귀하려는 것이다(벧전 3/21). 근래에는 머리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동일한 조건을 세우고 있다.
한 조각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로써 예수님의 성체를 먹었다는 가치를 찾아 세울 수 있음도 이것으로써 예수님과의 일체적인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기 때문이며 이스라엘민족이 할례를 하는 것도 아담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양부로 인하여 사망의 피를 받았음으로 그 입장을 복귀하려면 그 양부를 쳐서 사망의 피를 뽑지 않고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탕감조건은 어떻게 세울 수 있을 것인가 하면 본연의 상태를 상실하게 된 경로와 반대의 경로에 의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예수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상에 살해하였음으로 인간이 죄악에 빠졌으니 예수님을 살해하지 않고 이루었을 구원의 입장을 복귀하려면 그와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도 예수 십자가와 같은 죽음의 길을 걸었다는 탕감조건을 세우지않으면 아니된다. 무릇 타락인간이 죄의 대속을 받는 이유는 이와같이 원상복귀를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여 하나님을 서럽게 하였으니 반대로 내가 서러움을 당하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써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을 배반하기 전의 입장으로 복귀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최후의 운명을 마치는 순간에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이유도 이와같이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할 원리적 섭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즉 에덴동산의 아담은 하나님의 품 속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품 속으로 윤락하였음으로 후아담으로서 아담의 저지른 죄를 대신 속죄하러 오신 예수님께 대하여서도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는 입장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하나님이 버리시는 입장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충절을 버리지 않는 탕감조건을 세웠기 때문에 온 인류는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예수님의 영광을 복귀하려면 반대로 우리 자신들도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순교자들은 이렇듯 예수님과 같이 인류의 죄 를 대신 탕감하고 간 사람들이다. 무릇 선인으로서 하늘을 대신하여 왔다간 모든 선인들의 비참한 생애도 예수님과 같이 이러한 탕감조건을 세워 사탄세계를 빨리 하늘세계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대신탕감으로 희생된 모든 성도들은 인류역사가 선의 세계로 완전히 복귀될 때에는 그 가치에 해당하는 은사를 받게되는 것이다.
한 국가에 세워진 형법도 그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원상대로 유지하기 위한 탕감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세워야할 원리적인 탕감조건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이 지켜야할 오직 하나의 조건을 주셨던 것이다. 그 조건은 곧 믿음이라는 조건이었다.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창 3/3)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영생하리라는 계명으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타락론 참조)
타락론에서 이미 상술한 바이지만 이 계명을 주신 것은 아담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시봉하는가 아니하는가를 보시기 위함이 아니요 원리의 힘보다 강한 사랑의 힘으로 하여금 원리궤도를 탈선치 않도록 하시기 위한 절대적이면서도 불가피한 것으로서 아니 세울 수 없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타락인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타락전의 아담에게 있어서도 완성기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필수의 계명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하나님과 일체이상을 이루어 믿음을 완성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믿어야할 아무 조건조차 필요치 않은 것이다.
아담은 이와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기대 위에 서야할 것이었는데 이 믿음의 기대에 사탄이 침범하였기 때문에 그의 실체에까지 침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된 아담이 다시 창조본연의 상태를 복귀하려면 탕감복귀원리에 의하여 먼저 믿음의 기대를 세워가지고 그 기대 위에 후아담을 복귀하여 그를 중심하고 타락인간 전체를 복귀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각론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인간은 후아담된 메시아를 맞기 위한 타죄이후 4천년이란 유구한 시간의 흐름을 요치 않았던 것이다.
가인이 아벨의 제물이 모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 것이 되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일이 없었다면 그 때에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그 기대 위에 후아담(예수)이 복귀되어 에덴복귀는 아담가정에서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살육함으로 이 믿음의 기대에는 다시 사탄이 침범하였음으로 그를 다시 복귀하기 위하여 노아를 세웠던 것이다.
그런고로 함의 타락행위가 없었더라면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를 세워 그 기대 위에 또 메시아는 오셨을 것이었다. 노아의 심판은 이 목적을 위하여 감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가정마저 아담가정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갔음으로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잃어버린 이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키 위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더라면 그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그 기대 위에 메시아는 오셔서 창조이상의 세계는 이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그 기대에는 다시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음으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사탄에게 내어준 기간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는 이삭헌제를 거쳐 야곱에게 만회되었음으로 야곱은 믿음의 조상의 뜻을 완수하지 않으면 아니될 사명을 갖고 사탄세계인 밧단아람과 애급으로 들어가 사탄과 싸우며 하늘의 자녀를 번식하여 다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씨족으로부터 민족 국가에로 넓히어가면서 예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이후 예수님까지의 2천년 기간은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잃어버린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 기간이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2천년 기간을 다시 하늘 것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 있어야할 것이니 이 기간이 곧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이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시대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보면 아담으로부터 2천년 기간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한분을 찾아 세우기 위한 기간으로 되었고 선민을 불러세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민족적인 믿음의 터를 조성키 위한 복귀섭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까지 이르렀음으로 이 시대를 복귀섭리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기간은 아브라함 한 분을 찾아 세움으로써 다음 복귀섭리시대를 출발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음으로 이 시대를 복귀기대섭리시대라고 한다. 그런고로 복귀기대섭리시대로 인하여 복귀섭리시대는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다면 개인적인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에덴복귀의 뜻을 이루었을 것이었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를 믿고 따랐다면 영육 아울러 예수님을 합당한 제물로 바침으로써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에덴 복귀의 뜻은 이 때에 또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제물된 예수님을 살해함으로써 마치 아브라함의 제물에 사탄이 침범한 것같이 제물된 예수님의 몸에 사탄이 침범하게 되어 이 복귀섭리시대도 역시 사탄에게 내어준 결과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을 또 다시 하늘편으로 탕감하여 세우는 예수 이후 2천년 기간이 있어야할 것이니 이 기간을 재탕감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렇듯이 무너진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하기 위한 섭리는 예수 이후 기독신도들을 불러세워 재림기에 이르러 세계적인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하는 섭리연장시대로 옮겨진다. 이와같이 아담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믿음의 기대를 찾아 세우기 위한 역사는 아브라함 개인중심에서 이스라엘민족 중심을 거쳐 기독신도를 중심한 세계에로 확대되어 이 터 위에 예수께서는 재림하셔서 복귀섭리를 완수함으로써 아담 해와가 타락치 않고 이루어나온 것과 같은 세계를 일시에 이루어 맞추고자 하는 것이므로 이 시대를 복귀섭리완성시대라고 부른다.
이로써 복귀섭리는 잃어버렸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논하였다.
그러면 이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하여는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하는가를 알아 보기로 하자.
위에서도 논한 바이지만 인간이 완성될 때는 하나님과 일체의 이상을 이루어 믿어야할 조건조차 필요치 않게되는 때다.
믿어야할 조건이 필요없다함은 믿음의 목적을 다 이루어 믿음을 완성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믿음의 완성이라함은 하나님과의 사이에 미와 사랑의 회로를 완전히 조성함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체휼할 수 있는 미의 기대의 조성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체휼할 수 있는 미의 기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아담이 창조원리의 완성존재가 되어 타락의 혈통을 받지않은 원리적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 아담 해와 자녀 이렇게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창조본연의 부모와 부부와 자녀의 원리적 사랑을 체휼할 수 있는 기대를 말함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주신 축복의(창 1/28) 목적이었으나 타락으로 인하여 아담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하지 못하고 사탄을 중심하여 부부를 이루어 사탄의 혈통을 받은 자녀를 낳았음으로(요 8/44)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는 사탄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된 것이다. 하나의 존재기대가 조성되려면 그를 중심한 동서와 남북의 사위가 확정되지 않으면 안 되므로 4수는 존재기대수다.
그러므로 지상에 하나님의 대상실체적 존재기대가 확립되려면 사탄 중심하고 조성된 이 사위기대를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로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러한 논리로써 믿음의 기대를 조성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중심한 이 사위기대를 조성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도 사탄중심의 사위기대를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로 복귀하려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사위기대를 중심한 인류역사라고한 제목의 의의는 자명해질 것이다. 사위기대를 복귀한 터 위에 믿음의 기대를 조성코자 노아심판 40일로써 믿음의 중심 노아를 세우려 하였으나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이 사위기대에 사탄이 재침범하였음으로 믿음의 기대에도 사탄이 재침범하여 이것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400년 기대를 세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세웠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이 기대에는 사탄이 다시 침범하였음으로 이를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스라엘민족의 애급고역 400년 기간이 남아졌으니 이렇듯이 유구한 역사의 과정을 두고 하나님은 얼마나 사위기대를 세우시려 애쓰셨으며 사탄은 이를 얼마나 침범하였던가. 즉 노아심판 40일을 비롯하여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400년, 이스라엘민족의 애급고역 400년, 모세의 바로 궁중 40년, 미디안 광야생활 40년, 시내산 금식기도 40일, 이스라엘민족의 가나안복귀 광야생활 40년, 여리고 탐정 40일, 사사 400년, 사울왕 40년, 다윗왕 40년 솔로몬왕 40년 엘리야 호렙산까지 기도기간 40일 예수님의 금식기도 40일 부활 40일 요나의 니느웨에 대한 예언 40일 아담부터 예수님까지 4천년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0대(아브라함 제물실수로 인하여 42대가 됨=본문참조=)등등을 보면 사위기대복귀에 애쓰신 하나님의 심정을 역연히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임분담섭리의 입장에서 복귀역사를 개관하기로 하자. 창조이상이 실현된 세계라는 것은 결국 사탄을 완전히 자연굴복시킨 세계다. 하나님은 자유이상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세계를 다시 찾으심도 자유이상이란 원칙에서 하지않으면 아니된다. 피조세계 전체의 주관자로 인간을 창조하셨음으로 인간은 천사도 주관해야 되고 따라서 타락된 천사인 사탄까지도 인간이 주관하는데까지 이르지 못하면 천주의 주관자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원리완성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사탄을 자연굴복시킬 때를 바라시고 섭리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인간자신에 책임이 있지만 하나님은 창조하신 원리적 책임이 있기 때문에 사탄굴복의 제1책임은 하나님 자신이 부담하셨으니 이 시대가 곧 소생 구약시대다. 하나님은 이 시대를 통하여 선지자들을 직접 대하시고 섭리하셨다.
타락의 제2책임은 인간조상 아담과 해와에게 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 대신 복귀사명을 지고 오신 예수님과 성신(기독론 참조)이 사탄굴복 의 제2 책임을 지고 직접 타락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신 시대가 곧 장성 신약시대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성신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워 사탄굴복의 길을 보여주신 제1책임분담노정을 본보기로 신약시대의 제2책임분담노정을 걸음으로써 다음에 성도들이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제3책임분담노정의 본보기를 보여주셨던 것이니 성도들이 이 제3책임분담노정을 걷는 시대가 곧 완성성약시대다. 그러므로 성약시대는 예수님과 성신의 역사는 끝나고 하늘에서 재림하는 성도들과 지상의 성도들이 협력하여 사탄을 굴복시켜야할(부활론 참고) 시대임으로 이 시대는 성도의 시대요 삼위신은 안식하셔야할 시대다.
이제 우리는 이 복귀원리에 맞추어질 수 있는 사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다. 천주창조가 그러하듯이 무엇이든지 중심없이 되어지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이와같이 수많은 종족 혹은 민족을 터로한 역사가 얽히어지면서 인류의 전체적인 역사노정은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대하여 내려오면서 인류역사의 중심적인 노정을 형성하여온 역사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즉 하나님의 선민을 중심하고 이루어진 이스라엘역사다.
그러므로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4천년은 구약성서에 씌어있는 이스라엘민족사가 복귀원리의 사료가 될 것이요 예수이후는 바울이 이른바 영적이스라엘인 기독신도로써 엮어내려온 기독교사가 그 사료가 되어야할 것이다.
원래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의 율법서에 해당되는 복음서와 또 구약성서에 있어서의 예언서와 시문서에 해당되는 계시록과 사도서한이 있으며 특히 이스라엘역사서에 해당되는 사도행전이 있으나 사도행전에는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의 역사만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약성서가 구약성서에 대비되는 기록으로 남아지려면 사도행전가운데는 예수님이후 2천년 간의 기독교사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게되면 신약성서만이 예수님 이후의 복귀원리의 사료가 될 것이다.
복귀원리와 우리와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은 가장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오늘의 나는 나 하나로서의 내가 아니다. 오늘의 나는 인류역사의 결실로써의 나요 오늘의 전인류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나요 지난 역사를 정리하여 내일의 나를 세워야할 나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에게 있어서는 지난 역사의 맥박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이제 확실히 병들었으나 나의 맥박으로 보아 이 무슨 병인지 알려주는 의원은 하나도 없으니 이제는 맥 보기는 그만두고 역사를 들추어 나의 병명을 알아내러 바른 치료를 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내일의 나의 생명은 지난 역사를 들추어 바른 진단을 내리는데만 의존되어있다. 지난 역사를 정리하고 청산하여 새로운 역사를 빚어내야할 나는 역사노정에서 선지선열들을 중심하고 하나의 뜻 가운데서 벌어졌던 그 모든 사실들을 원리적으로 구명하여 그들이 이루지 못한 조건들을 내 한몸에서 승리의 조건으로 세워놓지 않으면 6천년 역사를 탕감복귀한 신부로서의 자격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귀섭리의 프로젝트를 맞추기 위하여 왔다간 모든 선인들의 걸은 길은 모두가 우리가 되풀이하여 걸어야할 길이요 그들이 다 걷지 못하고 남긴 부분의 길까지도 다 걸었다하는 조건을 세워놓아야 예수께서 남기고 가신 유업을 계승완성한 신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과거는 지나가 죽어버린 것이 아니고 지금의 것으로 살아있는 것이요 또한 앞으로 올 것이므로 이것을 아는데서만 오늘의 나를 알아 내일의 나의 생명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알아 그의 원하시는 뜻을 맞추어 뼈저린 감사의 염에 잠기울 때 하나님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으로 각자를 찾아오실 것이다. 복귀원리에 사용된 역사와 연대에 관하여는 이견이 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인류의 기원이 6천년이 훨씬 넘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자들이 고고학적 견지에서 세운 결론이다. 5천년 이상의 역사는 모두 미분명하다. 오직 구약성서에는 6천년 역사가 뚜렷이 연대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부언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는 모두가 표징적이요 암시적이며 또한 시대성을 띠우고 있다는 것이다.
즉 똑같은 내용을 계시한다 하더라도 시대를 따라 또는 계시를 받는 사람의 지능과 심령의 정도에 따라 또 그 환경을 따라 각각 그 받는 형식이 동일치 않다. 이를테면 전도서를 보면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전 1/5)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천동설을 믿고 있는 시대의 인간들에게는 그들의 사상을 그대로 시인하여 해가 어떤 한 곳으로 돋기도하고 지기도하는 것처럼 계시를 주셨다. 우리는 해가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계시가 틀린다고 반박한다면 도리어 어리석은 자가 되고말 것이다.
이와같이 설혹 인류역사의 실제의 연대가 6천년이 훨씬 넘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뜻을 중심하고 생각하면 계시는 계시로써 참이 아닐 수 없다. 계시로써 연대를 밝히었으니 이렇게 밝혀진 연대로써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공식노정을 명시하려하신 것은 명확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밝히기 위하여 계시로써 주신 이 연대에 관하여는 실제와의 부합여부를 막론하고 아무 조건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제1장 복귀기대
섭리시대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으로(요 14/6)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복귀된 에덴 동산으로 들어갈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귀섭리의 중점은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려는데 있다. 이 기대는 일찍이 아담 가정을 중심하고 조성하여 메시아를 맞으려하였으나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이 섭리는 노아 가정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노아가정도 역시 아담의 가정과 같이 이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였음으로 이 섭리는 또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역시 제물실수를 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려던 복귀섭리의 뜻은 다시 모세에게로 옮겨졌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선민을 불러세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재조성키 위한 2천년 기간은 실로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초래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보면 메시아를 맞게하려는 섭리의 출발자로서의 아브라함 한분을 찾아세우는 기간으로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와같이 이 시대는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그 이후에 오는 복귀섭리시대의 기대를 조성한 시대가 되었음으로 이 시대를 복귀기대섭리시대라고 한다. 사탄 분별의 견지에서 보면 이 시대는 원시분별시대로서 자유 유목생활에 의한 원시 공생공의주의의 시대인 것이다.
제1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인간이나 천사가 타락된 책임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마땅히 버려야할 존재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원성을 두고 창조하신 원리적 기준이 있으므로 하나님도 그들을 도말하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찾으시어 원리완성 존재로 복귀케 하심으로써 창조주로서의 원리적 책임을 완수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인간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어 사탄에게도 인간을 대할 수 있는 원리형적 조건이 성립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은 아무 조건도 없이 인간을 자기에로 복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울 수는 없는 것이요 사탄도 역시 인간의 원리적 주인공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으므로 아무 조건없이 인간을 자기가 대할 수 있는 입장에만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아담은 완충지대와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양심적인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할지라도 그는 하나님도 사탄도 대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은 육을 벗은 후 그 영인체도 역시 낙원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중간위치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치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 편으로 복귀하려면 반드시 어떠한 조건이 성립되어야한다. 그리고 인간자신의 과오로 타락되었기 때문에 이 조건도 인간자신이 세우지않으면 아니된다.(예정론 참조)
그러면 인간자신이 세워야할 이 탕감조건은 무엇인가하면 이미 서론에서 상술한 바이지만 사위기대복귀로 인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해야된다는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이 필요하게됨도 아담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타락되었음으로 이 조건을 사탄에게 빼앗겼던 까닭이다.(서론 참조)
이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한 조건물로서 세운 것이 제물이다. 이 제물을 합당하게 바치는가 바치지 못하는가하는 결과에 의하여 믿음기대의 조성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며 이 결정의 여부에 따라 하나님 편이냐 사탄 편이냐하는 문제도 결정되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제물대신으로 율법을 세웠고 신약시대에는 제물대신으로 실체제물된 예수님을 보내시어 그로 말미암아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는 조건을 세우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아담부터 제물을 바치게 하지않고 가인 아벨로부터 바치도록 하셨는가하면 이것도 원리로써 창조된 인간이므로 다시 찾으심도 원리로써 찾기 위함이었다. 창조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한 주인을 대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한 존재를 두 주인을 대하는 입장에 세워놓고는 원리적인 섭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이 아담을 상대로 하면 사탄도 아담과 혈연적 관계를 맺었던 원리형인 조건이 있으므로 사탄도 역시 아담을 대할 수 있게 되어 아담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을 대하는 비원리적인 입장에 서게된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비원리적인 섭리를 할 수 없으므로 선과 악의 두 성품의 모체인 아담을 두 성품으로 갈라세우는 형식을 취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선과 악의 두 표시체로써 분립시킨 것이다. 그리고 선과 악의 이 두 표시체를 하나님과 사탄 각각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놓고 각각 한 주인을 상대로 하는 원리적인 섭리에 의하여 헌제케하여 이 헌제의 여하에 의한 믿음기대 조성의 여부에 따라서 하나님 편이냐 사탄 편이냐를 결정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아담의 자손이므로 누구를 하나님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우며 누구를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울 것인가하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이것을 결정하기 위하여는 두 타락의 자식의 모체인 해와의 타락 경로에 의하여 결정짓지 않으면 아니된다.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은 해와의 타락의 결과인 까닭이다.
해와의 타락은 두 성품의 불륜한 사랑의 행동으로 인하여 성립되었다. 첫 번은 천사장의 유혹에 의하여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지려는 불의한 욕망에서 출발하여 비원리적 상대인 천사장과의 사이에서 맺어진 사랑으로 인한 영적 타락이요 둘째번은 첫 행동이 범죄였다는 것을 깨닫고 원리로 찾아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 의를 세우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원리적 상대인 아담과의 사이에서 맺어진 사랑으로 인한 육적 타락이다. 이 두 타락행위 중에서 어느 것이 보다 원리적이며 보다 용서를 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를 분별해 보면 물론 첫 번 사랑의 타락행위보다도 둘째 번 사랑의 타락행위이다. 왜냐하면 둘째 번 사랑의 행위는 결과적으로는 타락행위가 되어버렸으나 첫 번 타락행위를 회개하고 하나님 편으로 복귀하려는 심정이 그 동기가 되었고 또 아직 때는 되지않았으나 그들이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이 허락하실 사랑이기 때문이다.
가인과 아벨은 사랑의 타락의 열매다. 가인은 사랑의 첫 열매이므로 천사장과의 첫 사랑으로 인한 타락 행동을 표징하는 표시체로서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웠고 아벨은 사랑의 둘째 열매이므로 아담과의 둘째 사랑으로 인한 타락 행동을 표징하는 표시체로서 가인보다 원리적인 편에 설 수 있는 존재이므로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입장에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였으면 어찌하여 낯을 붉히느냐 죄가(사탄이) 문 앞에 엎드려있나니 너는 저를 방비하라」(창 4/7)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사탄(죄)은 가인을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서서 가인에게 침범할 조건만을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장자가 축복을 받지 못하고 차자가 축복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의 출애급 시에 애급의 민족뿐만 아니라 금수에 이르기까지 맏것을 친 일이며(출 12/29) 복중에서부터 장자 에서를 미워하고 차자 야곱을 사랑한 것이며(창 25/23)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에 차자를 축복하기 위하여 손을 바꾸어 축복한 일이며(창 48/14) 이스라엘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복귀할 때에는 아벨의 입장인 레위의 손만이 법궤를 메고갔었다는 것도(신 31/25) 장자는 가인의 입장이요 차자는 아벨의 입장이라는 원리적인 근거에서 되어진 사실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가인과 아벨을 사탄과 하나님이 각각 한 주인으로 대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두고 제물을 바치게 하였을 때 (창 4/3~) 어찌하여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않으셨는가하는 문제는 아직도 미지의 사실로 남아져있다.
가인이 농업을 하고 아벨이 목축을 하게된 이유도 이러한 원리로써만 해명될 수 있다. 창조의 순서로 보면 하나님에 제일 가까운 존재는 사람이요 다음엔 천사요 다음엔 동물이요 다음엔 식물이요 나중은 광물이다. 그러므로 아벨은 식물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운 동물을 양하는 것으로 그 사업을 삼은 것을 보아도 가인보다 아벨이 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가인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자기의 소산인 곡식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목축을 하였기 때문에 동물로 피의 제물을 드린 것뿐이다.
그러므로 아벨이 피의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생각하는 지금까지의 신학적 견해에는 그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아벨은 가인보다 아름다운 제물을 바쳤다(히 11/4)고 기록한 것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다는 결과만을 보고 한 말씀이다. 위에서도 논한 대로 아벨의 제물인 동물은 가인의 제물인 곡식보다 하나님 앞에 가깝기 때문에 아름다운 제물이 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으시지않은 원리적 근거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있었으므로 받았으니 (창 4/4) 이것은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조건만 성립되어 있는 존재라면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 받으신다는 것을 교시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탄을 대하고 있는 가인이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려면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교시하시기 위함이니 무릇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한 존재가 하나님 편으로 옮겨지려면 반드시 탕감조건을 세워야한다는 원리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러면 가인이 세워야할 이 조건은 무엇인가 하면 사탄 편에 서있는 가인은 하늘 편에 선 아벨을 사랑하며 그에게 굴복함으로 그를 중보로 세워 가지고 간접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조건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가인은 아벨을 통하여서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면 그렇게 함으로써만 타락성 본성(타락론 참조)을 해탈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좀더 상술하여 보면
(1) 천사장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사랑하지 못하고 시기하여 타락하였으므로 이 타락성 본성을 벗고 창조본성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그와 반대의 경로를 밟지 않으면 아니된다.(서론 참조) 그러므로 타락된 천사장 즉 사탄을 표징하는 입장에 세워진 가인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의 입장에 세워진 아벨을 사랑하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천사장이 아담을 사랑하지 못한 타락성 본성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2) 천사장은 아담보다 저급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는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할 위치에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이러한 사랑의 위치를 떠나 자기보다 한층 더 고위의 사랑을 받아야될 입장에 있는 아담의 사랑의 위치를 취하려다가 타락이 성립되었으므로 이 타락성본성을 제거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역시 반대의 경로를 밟기 위하여 천사장과 같은 위치에 세워진 가인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과 같은 입장에 세워진 아벨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3) 천사장은 인간의 주관을 받아야하며 해와는 아담의 주관을 받아야 할 것이 창조원리인데 주관이 전도되어 천사장은 해와를 주관하였으며 해와는 아담을 주관하여 타락이 성립되었다. 이 타락성본성을 제거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역시 반대의 경로를 취하여 인간의 주관을 받아야할 천사장의 입장이며 동시에 아담의 주관을 받아야할 해와의 입장에 세워진 가인이 천사장을 주관해야할 인간의 입장이며 해와를 주관해야할 아담의 입장에 세워진 아벨에게 굴복하여 가인이 아벨의 주관을 받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아벨로 하여금 가인을 주관하는 입장을 세우도록 하지않으면 아니된다. 이와같이 함으로써만 인간이 천사장을 주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찾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4) 인간시조는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되었으므로 이 타락성본성을 제거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역시 반대로 타락된 인간의 입장인 가인은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지 않고 그를 버렸다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 아벨의 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아니된다. 아무리 너그러운 부모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자식의 불효로부터 오는 그 아픔이 맺친 것을 원상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그 자식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불효하던 것과 반대행동으로 회개하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같이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세우시어 타락성본성을 형성하던 것과 반대의 경로를 취하여 타락성 본성을 해탈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시려하신 것이다.
이것은 다 끊어졌던 수수의 관계를 복귀하기 위한 원리적 요구로서 필수의 조건으로 복귀섭리에 남아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탄 편에 선 가인적인 존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하늘편에 선 아벨적인 존재를 중보로 세워 그를 통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은 천리의 법도를 통과시키기 위한 원리적 요구이므로 복귀섭리는 이 법도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개체를 두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롬 7/22)은 아벨적인 존재요 죄의 법을 섬기는 몸(롬 7/25)은 가인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 개체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면 마치 가인이 아벨을 통하여야 하듯이 몸은 마음의 명령에 굴복하여 그를 통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도의 생활이라는 것은 몸을 마음의 명령에 굴복시키는 싸움의 생활이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몸은 항상 마음을 죽여 타락성본성을 거듭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이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하는 것도 이 원리적 법도를 통과시키기 위함이다. 창조원리로 보면 인간은 만물보다 하나님 앞에 가까웠지만 인간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만물보다 거짓된 존재가 되니 (렘 17/9) 가인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음으로 아벨적 존재인 만물을 제물로 세워 그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니 제물의 기원에는 이러한 원리적인 근거를 갖고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신앙이 약한 가인적인 사람은 신앙이 강한 아벨적인 사람을 따라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좋은 지도자나 선한 친구를 요구하는 것도 나보다 하늘편에 가까이 선 아벨적인 존재를 찾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개인에서 뿐만 아니라 한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 있어서도 반드시 가인 아벨의 두 형의 인간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섭리의 궤도를 통하지 않고는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끝날의 세계도 가인적 세계인 공산진영과 아벨적 세계인 민주진영과의 두 세계로 분립되었다. 그러므로 공산진영은 민주진영에로 굴복하여야 인류의 평화는 올 것인데 가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도리어 민주진영을 파괴하려하므로 평화는 유지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중보로서 예수님을 보내심도 가인적 입장에 있는 전인류에게 아벨적인 존재를 세워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통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 3/16).
이와같이 크신 섭리를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분립시킨 것인데 그들은 이 뜻을 아지 못하였으므로 도리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고보니 천사장이 아담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었던 타락성본성을 반복하여 재타락의 결과로 돌아갔다.
이와같이 가인 아벨의 분립역사에 의하여 타락성본성을 해탈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려던 뜻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을 중심한 아담 해와가 가인 아벨을 찾아 세워 사위기대를 복귀하려던 섭리노정에는 사탄이 재침범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위기대복귀에 의한 믿음의 기대가 조성되지 않았으므로 메시아를 맞지 못하게되어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가인에게 아벨을 통하여 제물을 바칠 것을 교사하시지 못하였는가하면 타락행위를 하던 아담 해와를 간섭하시지 못한 원리가 있기 때문에 (타락론 참조) 이 원리 탈선의 행위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는 이 행위도 하나님은 간섭하실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저지른 행위이므로 탕감복귀 원리에 의하여 이것을 복귀함도 인간 자신이 그 조건을 찾아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를 사탄의 품에서 복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조건은 타락된 존재를 표징하는 가인 자신이 찾아 세워야할 5%의 책임분담이다.
아담 해와가 아직 원리결과주관권내에서 자기의 지혜로써 믿음의 계명을 지켜야할 인간으로서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타락되어 하나님의 책임분담으로 주실 완성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가인은 자기의 지혜로써 이 5%의 책임을 완수하여야 사위기대복귀로 인한 믿음의 기대를 찾아세워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음으로써 95%의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의한 완성의 혜택을 받을 것이었다.
그러면 가인이 아벨을 통하여 제물을 바쳐야할 것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 것인가. 마치 역사 이후에 어느 한 사람도 이와같이 가인이 아벨을 통하여 제물을 바쳐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원리를 몰랐어도 선한 지도자를 찾아 그를 따라야할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던 것과같이 가인도 하나님이 사랑하시어 그의 제물까지 기뻐 받으신 아벨을 죽여서는 아니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를 따르고 사랑해야될 것까지도 그의 양심으로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도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몰랐다할지라도 그 양심의 명을 따라 온유함과 겸손한 심정만 가질 수 있었다면 그 마음의 움직임은 자동적으로 그의 몸을 이끌어 아벨에 굴복하는 입장에까지 나아갔을 것이었다. 온유와 겸손이 기독신도의 강령이 된 것은 이와같이 신앙자들이 가인 아벨의 원리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서라도 맞추어 나아가게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아담가정을 중심하고 이루려던 것과 동일한 섭리는 인간의 불신으로 인하여 거듭거듭 반복되어 상사의 나선형을 돌고 또 돌면서 6천년이란 원형과정을 거쳐서 드디어는 복귀된 에덴동산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제2절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좌절되었으나 뜻을 예정하시고, 뜻을 대하는 사람을 예정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므로(예정론 참조) 하나님의 뜻을 대하여온 아벨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믿음의 기대도 잃어버렸으나 이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키 위하여 아벨대신 셋을 세웠다(창 4/25).
그러나 인간은 원래 사탄과 먼저 맺은 혈연관계로 인하여 하나님보다도 사탄을 따르게 되었음으로 셋의 자손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드리지 못하고 가인의 후손을 따라서 사탄의 뜻을 이루는 생활체계로 흘러 패륜에 빠지게 되었다. 창조원리에 의하여 하나의 존재를 두 주인 상대의 입장에 놓고 섭리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음란으로 인하여 사탄만을 대하고 있는 전인류를 하나님이 또 하나의 주인으로 그들을 상대하여 섭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인류를 도말하시고 하나님의 뜻만을 받드는 가정을 아담가정 대신으로 세우시어 아담가정에서 무너진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함으로써 그 기대 위에 메시아를 보내시사 복귀섭리를 완성하실 목적으로 홍수심판을 단행하시어 노아의 가정을 불러 세우신 것이다(창 6/13). 이와같이 아담으로부터 알파로 시작된 죄악역사를 노아에 이르기까지 1600년을 1기로하여 오메가로 끝마치고 에덴동산을 복귀하시려는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 때도 말세라고 하였고 땅을 다 멸하겠다고 하신 것이다(창 6/13).
이와같이 심판의 위업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불순과 불신의 사탄세계를 용감히 박차고 나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절대로 준수하여 120년이란 기간을 갖은 조롱과 비소를 받아가면서 구원의 방주를 지었다는 위대한 믿음의 조건을 사탄 앞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귀섭리라는 관점에서 고찰하면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에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노아에서 이루어져야할 것이었다. 이와같이 노아는 제1 믿음의 조상인 동시에 아담대신 가정을 세워 아담가정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루어야할 존재이기 때문에 제2 인간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는 생육하고 번식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아담을 창조하시고 주셨던 것과 똑같은 축복의 말씀을 노아에게도 주신 것을(창 9/7) 보더라도 아담으로써 이루려다 못이룬 창조이상을 노아로써 이루려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륜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40주야에 걸친 홍수심판을 하셨으니 40일이란 수는 어디로부터 기인된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사위기대 복귀로 인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는 것이 곧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가 된다는 것은 이미 논하였다.
아담가정에서 세우지 못하였던 이 기대를 다시 세우기 위한 노아가정을 찾기에 1600년을 요함도 사위기대를 복귀하기 위함이다. 즉 16수는 4수의 평방수로서 4수의 완전수를 의미한다. 이 4수를 찾았기 때문에 노아를 소명할 수 있는 탕감조건이 성립되었다.
이제 소명된 노아가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려면 또 사위기대를 복귀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40일이라는 심판기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방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방주는 복귀된 신천주를 상징하는 표시이며 노아의 가정에 있어서는 아벨적인 제물로 세워졌기 때문에 가인적인 입장에 처한 노아가정은 이 방주를 통하여 그것을 합당한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으면 아니된다. 노아는 아담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천주를 다시 찾아야할 존재이므로 신천주를 상징하는 이 방주를 뜻맞게 찾아 세움으로써만 잃어버렸던 천주를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방주를 3층으로 제조한 것도 3단계의 성장과정을 통해 창조된 전천주를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천주를 상징하는 방주 안에 있는 노아는 하나님을, 그 자식들은 전인류를, 또 동물은 만물세계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작은 방주 하나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움으로 천주전체를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운 것같이 방주 속에 있는 동물도 만물세계 전체를 하나님 주관권으로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물로 세웠기 때문에 동물의 전체를 방주 속에 넣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천주를 표시하는 방주를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으로 세우려는 심판 40일 기간은 천지창조의 이상이 실현될 때까지의 혼돈기간(창 1/~)에 해당되는 기간이므로 40일 심판이 끝날 때에 방주에서 보여진 행사는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완료한 이후의 전역사노정을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가 40일 심판기간이 끝날 무렵에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어보내니 까마귀가 땅 위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왕래하는지라」(창 8/6~7)고 기록되었으니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만물만상을 상징으로 하여 어떠한 섭리에 대한 계시를 보여주실 때는 공식적인 법칙이 있는 것이다. 백호, 기린, 백룡, 백학 등은 주님을 상징하고 말, 개, 솔개, 까마귀 등은 사탄을 상징하는 것이다. 빛도 흰빛은 하나님을, 분홍빛은 주님을, 푸른빛은 성신을, 잿빛은 천사장을, 검은 빛과 붉은 빛은 사탄을 표시한는 등등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방주에서 나온 까마귀로써 노아가정에서 분립된 사탄의 현재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모든 힘은 상대를 취하여 수수의 관계를 맺을 때에 비로소 발한다고 원리는 말한다. 사탄도 존재하기 위하여서는 원리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자기와 상대될 수 있는 인간을 대하여 수수의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심판으로 인하여 사탄의 상대가 되어있던 인간은 전부 홍수로써 도말되고 하나님을 상대로하는 노아가정만이 남아있음으로 사탄은 노아의 가정에나 무슨 침범할 조건이 없는가고 엿보고 있다는 상태를 성서에는 까마귀가 어디에 앉을 곳이 있는가고 물 위를 찾아 헤메는 모양으로 표시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인간창조 직후에 천사장이 해와의 사랑을 엿보고 있던 모양을 상징한 것이다.
다음에는 비둘기를 내어보냈는데 그 비둘기는 물 위를 왕래하다가 발붙일 곳이 없어서 다시 방주로 들어가니 노아가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었다(창 8/9).
노아는 어찌하여 이와같이 역사를 하였던가. 성서에는 물이 준 여부를 알기 위하여 비둘기를 내어보냈다고 하였으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이라면 문으로 직접 내다보아서 알 수 있을 것이요 문이 전부 봉해있다 할찌라도 비둘기가 나간 구멍으로도 보고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이 준 것을 알기 위한 것만이 그 목적은 아닐 것이니 이에는 보다더 큰 숨은 하나님의 섭리를 교시하기 위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첫 번 비둘기는 첫 아담을 표징한 것이다.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말씀을 보면 비둘기가 방주를 나간 것은 발붙일 곳을 찾기 위하여 나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와같이 첫아담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나무로 창조되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하여 지상에 창조된 것이었으나 마치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이 없어서 방주로 다시 돌아간 것같이 아담도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생명나무로서 에덴동산에 발을 붙이지 못하였으므로 아담이 완성되어 생명나무가 되게 하시려던 창조이상 즉 말씀은 지상에 이루어지지 않은채 말씀은 말씀대로 남아져 하나님과 같이 계시게 되었다(요 1/~)(기독론 참조).
다음은 7일을 지나 다시 그 비둘기를 내어보내니 감람나무 잎을 따서 물고 방주로 되돌아왔다고 하였다. 다시 보낸 그 비둘기는 다시 그 말씀의 실체인 생명나무로 오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비둘기가 다시 지상에 나간 것은 물이 말랐으면 지상에 앉기 위하여 나간 것과같이 둘째 아담 예수께서 지상에 오신 것도 세상이 저를 받으면 지상에 에덴을 복귀하기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비둘기는 다음에 와서는 앉을 수 있다는 약속의 표시로써 감람나무 잎만을 물고 방주로 다시 들어간 것과같이 예수님도 세상이 저를 믿으면 에덴동산을 복귀하기 위하여 지상에 오셨으나 믿지 않았으므로 다음에 재림하셔서 완성할 수 있다는 약속과 표시로써 십자가의 도리와 말씀을 땅에 세워놓으시고 다시 하나님 품 속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여기에 7일을 지났다는 것은 천지창조의 완전수의 기간을 말함이니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세우시는 역사도 원리적인 기간을 경과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다시 7일을 지나서 비둘기를 내어보냈는데 이는 다시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었다. 이 세쨋번 비둘기는 제3 아담격으로 오실 재림예수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재림하실 예수께서는 반드시 땅에서 재림이상을 완수하여 다시는 초림시와 같이 하나님 품 속으로 되돌아가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반드시 미리 보이시고 섭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그 은밀한 뜻을 그 종 선지자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반드시 행하지 아니하시리라」(암 3/7)고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방주를 지으시고 까마귀와 비둘기에 의한 표시로써 복귀섭리노정의 전모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세쨋번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을 때 노아는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와 신천지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니 이것도 재림이상이 지상에서 완수될 때에 하나님은 비로소 6천년의 원한을 풀으시고 하나님의 장막을 인간에 치시고 인간들과같이 거하시어(계 21/3) 6천년간이나 흘려온 비애의 눈물을 인간의 눈에서 다 씻어주시며 만물을 새롭게하시어 다시 사망이 없는 세계를 지상에 이루실 것이니 이 때가 새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지상에 내려옴으로(계 21/2) 알파로 시작된 죄악사가 오메가로 끝나 생명나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는 때다(계 22/13).
홍수심판에서 구원받은 노아의 식구는 여덟이라고 하였다. 여덟식구를 택하신 이유는 아담가정을 중심하고 복귀섭리를 하시려던 여덟식구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므로 노아 가정의 여덟식구를 탕감복귀하지 않고는 아담가정을 중심하고 이루려던 뜻을 계승하여 이룰 수 있는 대신가정을 세울 수 없는 까닭이었다. 성장기간의 3단계를 표시하는 3수는 하늘수요 4수는 동서남북을 표시하는 땅수요 이 3수와 4수를 합한 7수는 천지창조를 표시하는 하늘 땅 완성수다. 창조7일을 지나고는 8일로써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8수는 재출발수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8일만에 할례를 한 것도 하나님의 자녀로써 재출발하는 날이기 때문이지만 아담이나 노아가정을 여덟 식구로 세우려하신 것도 신천지를 출발하는 새가정임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심판을 40일로 마치게됨은 믿음의 기대를 찾을 수 있는 사위기대를 복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40일 심판으로 여덟 식구를 찾아세운 노아의 가정은 사위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웠음으로 이제 노아가정 자체도 하나님이 간섭할 수 없는 5%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야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의 강림으로 인한 95%의 구원의 섭리는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노아의 가정은 함을 중심하고 넘어야할 이 책임분담의 고개를 넘지못하였으므로 다시 아담가정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가게된 것이다. 그러면 함은 어떻게되어 이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자기의 가정을 윤락케하였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홍수심판후 노아는 포도농사를 지어 스스로 만든 포도주에 취하여 나체로 장막 안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둘째 아들 함은 그 나체를 부끄러워하며 겸연쩍게 생각하여 자기의 형제 셈과 야벳까지 선동하니 두 형제도 동감하여 옷을 취하여 두 어깨에 메고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않으려고 얼굴을 돌이키고 뒷걸음쳐 들어가 덮었다. 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함은 저주를 받아 가나안의 아비가 되어 대대로 형제를 섬기게된 것이다(창 9/25).
함이 이와같이 노아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했다는 행동이 어찌하여 범죄행위가 되었는가하는 것을 아직도 미지의 사실로 남아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먼저 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사탄도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원리적인 입장을 취하지않고는 존재의 능을 발휘치 못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허락하여 그와 상대가 됨으로써 사탄으로서의 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로 나의 몸을 제공할 때 죄를 형성하는 것이다.
함의 행동이 범죄가 된 것도 그로 인하여 사탄이 침범하여 노아가정은 다시 사탄의 활동무대가 되어버린 까닭이다. 그러면 노아의 자식들이 그의 부친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했다는 행동이 어찌하여 사탄이 재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아담과 해와와의 사이에 있어서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의식은 창조본성의 발로는 아니다. 그것은 서로 벗고 있어도 부끄럽지않도록 창조하신 까닭이다(창 2/25).
이 하체를 부끄러워하는 의식은 타락행위로 인하여 생기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체를 부끄러워한다는 의식은 하체로 범죄행위를 하였다는 표시적 행동이 된 것이다. 이와같이 아담과 해와는 부끄러워한다는 의식의 발로로써 하체로 범죄하였다는 것을 암시하였기 때문에 탕감복귀원칙에 의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탕감조건을 세워놓아야 비로소 아담 해와의 타락전 상태를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이 세워지는 것이다. 아담가정 대신 택함을 입어 아담의 지은 죄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될 노아가정은 부끄럽지 않은 입장을 취하여야 부끄러운 입장을 취해 타락된 아담의 죄를 벗을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5%의 시련을 걸어놓고 노아의 가정으로 하여금 이 고개를 넘도록한 것이다.
그러나 함은 자기가 부끄러워했을 뿐 아니라 이 의식을 형제에까지 선동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담 해와의 타락행위를 표징하는 그 부끄러움의 의식을 반복한 결과가 된 것이다. 이 의식을 반복함으로 말미암아 홍수심판에서 구원받은 함도 타락 직후의 아담과 똑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을 자증하였다 이로써 함은 심판으로 인하여 사탄을 분리한 입장에 있지 아니하고 아직도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은 입장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함으로 말미암아 마치 까마귀가 앉을 곳을 찾아 물 위를 헤매듯이 노아의 가정에 침범할 조건만을 엿보고 있던 사탄에게 재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허락하게 되어 노아의 가정은 다시 사탄의 활동무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함의 행동은 이렇듯이 그 가정으로서 세워야할 5%의 책임분담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메시아를 맞아 에덴복귀를 하려던 95%의 복귀섭리는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연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현재 우리에게 있어서도 벗을 것을 부끄러워하면 범죄행위가 되는가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위에서도 상술한 대로 아담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유발된 부끄럽다는 의식은 바로 타락행위를 증거하는 표시적행동이 되었기 때문에 반대로 이런 의식을 느끼지 않는 입장을 취하여 그러한 타락행동을 제거할 수 있는 탕감 조건을 세워야겠기에 아담대신 가정으로 세운 노아가정으로 하여금 이 의식을 취소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은 노아가정이 세워야할 탕감조건으로 남아진 것이다.
이와같이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한 탕감조건들을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그 조건들은 무엇이었던가를 알아보자.
(1) 사위기대 복귀를 위한 40일 심판수
사탄 침범한 사위기대를 복귀하자는 것은 결국 사위기대를 중심한 역사로써 사탄을 분립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위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심판 40수도 사탄을 분립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한 이 40일 심판수를 잃어버렸으므로 다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려면 이 40일 심판수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복귀섭리의 역사노정은 이 40수를 찾아 세우려는 역사를 거듭거듭 반복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 40수는 복귀섭리노정의 프로젝트를 이루는 단위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2) 노아를 찾기 위한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0대
성장기간의 3단계를 표시하는 소생기와 장성기와 완성기의 각 기간도 모두 3단계로 구분되므로 결국 성장기간은 9수로써 표시되는 것이다. 이 9수를 지나야 완성기준에 달하여 하나님의 직접간섭권내로 들어가게되는 것이므로 10수는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귀일수인 것이다. 노아를 찾기에 10대를 요했음도 노아 가정을 중심하고 복귀섭리를 완수하여 하나님의 직접주관의 세계를 이루기 위함이었으나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이 10대를 사탄에게 내어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 10대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3) 믿음의 조상
노아가 방주를 짓는 120년 간의 신앙은 노아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 수 있는데까지 끌어올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노아는 믿음의 조상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므로 이것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4) 함
노아의 가정은 아담 가정대신으로 택함을 입었으므로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은 아담의 둘째아들 아벨 대신이다. 아담가정을 중심한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아벨을 잃었기 때문이었으므로 노아가정을 찾을 수 있었음은 아벨대신 함을 찾아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은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입장에 있는 아들이었으나 사탄이 그를 빼앗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이 함을 다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노아의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한 이상의 네 조건을 사탄에게 내어줌으로 노아는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하였으니 노아와 같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대신 찾아세우려면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이 네가지 조건을 다시 탕감복귀하여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 네가지 조건 중에서 40수와 10대를 동시에 복귀하려면 40년에 10대를 복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최소한 400년의 기간을 요하였던 것이다.
복귀한 노아의 입장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하여서 10대를 복귀하는 400년의 경과가 필요하게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는 1600년에 10대를 복귀하였는데 노아이후 아브라함까지는 400년에 10대를 복귀하게 되었으므로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어찌하여 우상장사 데라의 사랑하는 아들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는가하는 문제를 알아야할 것이다. 위에서도 논하였지만 함은 아벨대신으로 찾아세운 노아의 둘째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 함을 사탄이 빼앗아감으로 노아가 믿음의 조상의 명분을 상실하였으니 다시 그 명분을 복귀하려면 하나님은 그와 반대로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존재를 빼앗아 오지 않으면 탕감복귀의 조건을 세울 수 없는 것이므로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우상장사 데라의 사랑하는 아들을 취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를 수 있었음도 마치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짓는 기간이 있었던 것과같이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명을 받고 정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믿기어려운 것을 믿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이 사탄이 빼앗아간 네 조건을 탕감복귀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노아대신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 입장을 찾아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제3절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
I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제1 믿음의 조상이 되었어야할 노아의 입장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데라의 사랑하는 아들의 입장에서 소명을 받게된 이유는 이미 상술한 바와같다.
전인류의 믿음의 조상이 될 아브라함을 사탄 품에서 부르심은 마치 제1 믿음의 조상 노아를 부르심과 같이 전인류를 사탄세계에서 부르시는 모형이므로 아브라함은 장차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모든 믿음의 자녀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전형적노정을 걸은 존재가 되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뛰어 나오기 곤란한 환경 가운데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과는 가장 대립적 입장인 우상장사 데라의 사랑하는 아들의 입장을 용감히 박차고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만을 받들고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 그 아내 사라와 롯과 하란에서 취한 재물과 사람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갔으니 (창 12/4~5) 이 노정은 장차 야곱과 모세가 사탄세계인 하란과 애급에서 각각 처자를 데리고 재물을 취하여 그 어려운 환경을 박차고 떠나 가나안을 복귀할 노정의 모형이요 또 예수께서 오셔서 사탄 세계의 모든 인간과 만물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완전히 찾아세워 세계 가나안 복귀를 완수할 노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개체에 있어서도 그와같이 사탄 품을 떠나 처자나 모든 재물을 하나님 앞으로 옮겨 놓아야할 전형적인 노정을 아브라함 일신으로써 보여주었으며 한번 사탄세계를 박차고 나왔으니 다시는 그 세계에 미련을 남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을 받들고 나아가야한다는 것을 시범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행하여야할 전형적 노정을 시범한 다른 예를 알아보자. 흉년을 당하여 아브라함이 애급땅으로 가서 머물려할 때에 아브라함은 그의 처 사라와 남매의 입장에 설것을 약속하고 갔다. 바로가 사라의 미모를 탐내어 처를 빼앗아갔으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로써 아브라함은 재물과 함께 처를 복귀한 후 다시 잡혀갔던 롯과 재물과 부녀를 찾은 후에야(창 14/16) 헌제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복귀섭리를 이루어 나아가는 인간들이 밟지 않으면 아니될 섭리노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제2 인간조상 노아의 복귀형이므로 아담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아담가정을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 미완성기에서 성혼전이므로 남매의 입장에 있던 아담에게서 해와를 사탄이 빼앗아감으로 창조본성의 자녀를 잃어버렸고 만물이 타락권내에 처하게 되었으니 이와같이 아담에게 있어서 빼앗겼던 모든 것을 아브라함을 세워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보여주기 위하여 아브라함도 타락전 아담과 같이 남매의 입장에서 빼앗기어 사탄세계인 바로의 손에 들어갔으므로 사탄에게 빼앗겼던 해와와 같은 입장에 처한 처와 또 잃어버린 자녀를 상징하는 롯과 부녀와 또 사탄권내에 있는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재물을 다시 빼앗아오는 역사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노아도 이미 이 전형노정을 걸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찾는 400년 기간은 노아를 찾는 1600년에 해당하는 4수복귀의 기간이요 처 사라와 롯과 재물을 찾아세우는 기간은 노아가 방주로써 처자와 만물을 찾아세우는 기간이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기준을 완성키 위한 제물을 바치는 것은 노아가정이 믿음의 기대를 완성키 위하여 함 중심한 역사를 한 것에 해당한다.
이 전형노정을 본받아 야곱도 사탄세계인 하란에서 처자와 재물을 취해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하며 또 예수님도 사탄세계에 빼앗긴 해와격인 신부된 전인류를 만물과 함께 사탄세계에서 빼앗아 세계적인 가나안복지인 에덴동산을 복귀해야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처 사라를 찾아온 후 잡혀간 롯을 다시 찾아 그 원수를 타파하여 승리한 후에야 약속의 헌제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은 택한 자녀를 전부 사탄 품으로부터 복귀함으로 사탄과 대립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 있는 공고한 기대를 조성하여서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것도 후일 예수께서 오셔서 사탄세계에서 이스라엘민족을 불러세워 사탄세계와 대립하여 하나님만을 믿고 나아가는 기대를 조성하여서만 메시아를 중심한 복귀섭리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이렇듯이 믿음의 조상으로 설 수 있는 입장에 처한 아브라함은 마치 홍수심판에 의하여 처와 자녀와 만물을 찾아 제1 믿음의 조상으로 설 수 있는 입장에 처하였던 노아와 같은 입장에 서게되었으므로 이제는 노아가정과 같이 아브라함에게도 자신이 완수해야하며 따라서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5%의 책임분담이 남아졌으니 이것은 헌제로써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끌고 밖으로 나아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헤아리라. 능히 헤겠는냐 또 가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 의로 여기사 가라사대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갈대아 우르에서 너를 이끌어낸 여호와로다」(창 15/5~7)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얻어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8) 라고 반문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나로서 찾아세워야할 조건이 무엇인가를 질문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네가 나를 위하여 3년된 암소 하나와 3년된 숫양 하나와 산비둘기 하나와 집비둘기 새끼 하나를 드리라」(창 15/9)고 명하시어 아브라함으로서의 완수해야할 책임분담을 지시하셨다.
하나님이 아담가정으로부터 2000년 간 믿음의 중심을 세우시려고 섭리하신 열매가 결실하는가 못하는가하는 것이 이 헌제의 결과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었다.
즉 전 인류를 중심한 전 피조세계에 대한 복귀섭리의 기대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루어지는가 못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은 오직 이 헌제에 의하여 좌우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제단 위에 오른 제물은 온 천주를 표시하는 상징제물이요 또 이것은 뜻맞게 드림으로써 전인류의 후손까지도 하나님 앞으로 찾아 세우려는 예약제물이었다. 그러므로 소생을 표시하는 비둘기와 장성을 표시하는 양과 완성을 표시하는 소를 제물로 드린 것도 소생 장성 완성을 경과하여 창조되지 않은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3종류의 제물로써 피조세계 전체를 대신함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즉 비둘기와 양과 암소는 전 인류와 그 후손과 만물세계 전체를 대신하는 표시체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은 그 제단 위에 전 천주의 표시체를 올려놓고 이것이 하나님 편으로 서느냐 다시 사탄 편을 돌아가느냐를 결정지으려는 것이다. 3단계를 표시하는 3종류의 제물을 바치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환언하면 재창조역사다.
그러므로 이 복귀섭리의 전체적 과정의 전모를 보여주는 이 헌제는 재창조역사의 전모를 상징한다. 따라서 재창조의 과정도 창조원리에 의하여 소생과 장성과 완성의 3단계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 3단계를 표시하는 비둘기와 양과 소를 한 제단 위에 올려놓은 것이 하나님이 전 복귀섭리를 단번에 이루시려 하신다는 뜻을 표시한다. 그러나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둘에 쪼개 좌우에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더니 솔개가 고기 위에 내리거늘 아부람이 쫓으니라. 해질 때에 아부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니 여호와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저희를 섬기매 저희가 400년 동안 괴롭게하리니」(창 15/10~13)라고 기록된 말씀을 보면 쪼개야할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연고로 그 위에 솔개가 내렸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400년 고역이라는 비운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단번에 이루시려던 섭리는 이삭을 거쳐 야곱에까지 연장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비둘기 쪼개지 않은 것이 그렇게도 중한 죄가 되었으며 또 400년 고역이라는 고난기를 어찌하여 이스라엘민족이 당하지 않으면 아니되는가하는 문제는 오늘까지 미해결로 남아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선과 악을 갈라세움으로 악을 멸하고 선을 세우시려는 역사를 반복하여 내려오셨다. 죄없는 인간으로 창조하셨던 아담에게 악이 침범했으므로 이것을 분리섭리하기 위해 가인과 아벨을 이성으로 분립했던 것이며 노아 시에도 사탄을 분리할 목적으로 홍수로써 악을 쳐 선을 갈라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세워 그의 믿음을 중심하고 전 피조세계를 제물로 걸어놓고 헌제하게하는 것도 선과 악을 가르는 상징역사를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제물을 쪼개는 뜻은
(ㄱ) 사탄 주관하에 있는 피조세계를 갈라내어 하나님 편으로 복귀섭리를 한다는 뜻
(ㄴ) 아담 가정에서 못이룬 뜻을 노아 가정에서 이루려다 못이루었고 노아에서 못이론 뜻을 아브라함에서 이루어야함으로 아브라함은 아담가정에서 못이룬 뜻을 이루어야한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분립헌제가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게되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제물을 갈라서 하나는 가인의 입장 하나는 아벨의 입장에 세워놓고 다시 헌제하여야 한다.
(ㄷ)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어 타락되었으므로(참고 타락원리)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를 하듯이 제물을 쪼개어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함으로써 하나님 편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쪼갠다는 행사에는 이런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는데 비둘기는 쪼개지 않았으니 이 비둘기는
1. 사탄 주관권내에서 갈라세우지 않은 사탄물건 그대로요
2. 아벨의 입장 즉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부분을 갈라 세우지 않았으므로 사탄이 취할 수 있는 부분만이 남아있는 제물이요
3. 사탄의 피를 뽑아 성별하지 않은채 놓았으니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성물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성립되어있음으로 가인 아벨의 헌제시나 노아 홍수 후와 같이 침범할 조건만을 찾고 있던 사탄은 자기가 취할 조건만이 남아있는 비둘기 위에 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비둘기 위에 앉은 솔개는 바로 사탄을 상징한다. 소생을 표시하는 제물인 비둘기에 사탄이 침범하였으니 소생의 기대 위에 서야할 장성 완성을 표시하는 양과 암소도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치려던 이 제물은 사탄에게 바친 결과가 되어버렸으니 노아로부터 400년의 섭리역사에는 또 사탄이 침범하였으므로 아브라함을 찾아 세우기 위한 40일 복귀에 의한 4수복귀기대에는 또 사탄이 침범하고 말았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스라엘민족이 애급 400년 고역이란 벌을 받게 되었는가 알아보기로 하자.
함의 타락행위로 말미암아 홍수심판 40일 즉 40일의 사탄분립 기대에서 섭리하시려던 구원의 역사에는 다시 사탄이 침범한 결과가 되었으므로 이 40일은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게된 것이다. 노아의 입장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40일을 다시 찾는 역사가 아브라함까지 400년으로 연장되었다는 것은 이미 논술하였다.(참고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이제 노아로부터 400년의 섭리의 열매로서 택함받은 아브라함의 입장은 심판 40일의 사탄분립기대 위에 선 노아의 입장을 복귀한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함의 타락행위가 없었다면 노아가정으로서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홍수심판의 목적은 완전히 달성되어 메시아 강림에 의한 복귀섭리는 그 때에 완수되었을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그의 책임분담인 헌제에 실수가 없었다면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는 완성되어 에덴복귀의 섭리는 완전히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헌제에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고 보니 아브라함은 400년 전의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초래되었던 노아의 입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함의 타락행위를 하기 전의 노아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하여는 400년이란 사탄분립기간을 통하여서만 아브라함을 세울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아브라함도 자기의 제물실수 전의 입장 즉 400년 전 노아심판 직후 함이 타락행위하기 전의 노아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하여는 다시 400년이란 사탄 분립기간을 통하여 모세를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환언하면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 하늘 편으로 세워놓지 않으면 제물실수 전의 아브라함의 입장이요 따라서 심판 직후의 노아의 입장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애급으로 들어가 사탄세계와 더불어 싸워서 400년을 찾아세우지 않으면 아니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의 3종류의 제물이 소생 장성 완성을 표시하는 성서적 근거를 알아보자.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소생구약시대 장성신약시대 완성성약시대로 갈라서 역사하신다는 것은 이미 논술한 바와 같다.
예수님은 구약섭리 완성자로 오신 분이시므로 소생섭리 완성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전체적 표시인 아브라함 헌제를 중심하고 논하면 예수님은 소생 비둘기 완성자로 오신 분이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나님의 신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임하였다함은(요 1/32)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제물실수로 인하여 사탄에게 빼앗겼던 그 비둘기를 다시 찾아 세우려 오신 분이므로 비둘기 완성자이시고 따라서 소생 구약섭리를 완수하시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비둘기는 소생을 표시하는 상징제물이다.
3년 공생애 노정을 출발한 예수님은 소생 구약섭리 완성자이신 동시에 장성 신약섭리 출발자이시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이 때의 예수님을 보고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고 하였다.
즉 예수님은 장성 신약섭리 출발자이시므로 어린양으로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양을 예수님을 표시하는 동시에 예수님의 사명분야인 장성을 표시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꾀어 삼손의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에 삼손은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않았다면 능히 나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으리라」(삿 14/18)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암소는 아내를 상징한다. 완성기를 암소로 표시한 것은 완성 성약시대는 전인류가 아내로서의 자격을 복귀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즉 신랑된 재림 예수님을 맞아 천국생활을 할 수 있는 아내의 자격을 완성하는 시대가 성약시대이므로 아내를 표시하는 암소로서 완성을 표시한 것이다. 예수님은 장성 신약섭리를 완성하시고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완성 성약섭리의 뜻을 못이루시고 땅에 남겨둔채 너희는 신부요 나는 신랑(계 18/23)이라는 명사를 남기시고 승천하셨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신랑된 재림 예수를 맞을 때에는 신부의 입장을 넘어서 아내 즉 암소의 자격을 완비해야만 주님의 인과 아버지의 인을 맞아(계 14/1~) 완전히 복귀된 144,000무리에 참여될 것이다. (총서 참조) 이와같이 암소는 완성기를 표시하였다. 지금 시대를 소시대라고 계시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한 제단 위에 3종류의 제물을 일시에 바친 것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전과정을 일시에 이루시려는 경륜의 뜻을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제물실수로 인하여 그 섭리는 다시 소생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장성 이삭을 거쳐 완성 야곱에 이르러서야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경륜하신 뜻의 출발을 보게된 것같이 소생 구약, 장성 신약, 완성 성약 이와같이 전 복귀섭리가 연장됨도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함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다는 행동은 비록 미소한 일이었지만 이로 인하여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성립되었으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은 애급고역의 비참한 역사를 빚어냈으며 이 역사는 반복되어 현세에 이르기까지 4천년이란 눈물겨운 역사의 연장을 보게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헌제는 복귀과정에 있는 인간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가를 알아야한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바쳐야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쪼개어 선과 악을 분립치 않으면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제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기도를 드리는 시간은 우리의 몸을 제물로 바치는 시간이므로 죄를 회개하여 내 자체를 가인적인 부분과 아벨적인 부분으로 분립하여 성별된 제물로서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기도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II .아브라함의 이삭 실체헌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가인과 아벨의 헌제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소생역사로 하고 다시 장성역사로서 노아의 심판을 거쳐 아브라함의 완성역사에 이르렀다. 이제 이 완성역사를 담당해야될 아브라함에게는 이 뜻을 완성해야할 원리적 조건이 성립되어있으므로 아브라함의 상징제물은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나 상징제물의 목적인 실체는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 상징제물로써 잃어버린 것을 실체로 찾기 위하여 실체자식 이삭을 번제로 드리게되는 것이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레와 같이 번성하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창 15/5)은 독자 이삭으로 이루어져야할 것인데 이러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하심은 하나님도 예약제물에서 잃어버린 믿음의 중심을 실체로써 세우시기 위한 서러운 심정에서 명하신 것이요 아브라함도 이 이해못할 번제를 서슴지 않고 드리게 되는 것은 첫 번 제물로 인하여 자손들이 이방에서 400년 간 고역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두려운 벌이 임하였던 까닭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 아브라함이 상징헌제로 잃어버린 것을 이삭을 통하여 실체로 다시 찾을 수 있는가하면 사탄이 인간조상 아담과 그 자식을 2대에 걸쳐 빼앗아 갔기 때문에 이를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 2대에 걸쳐 빼앗아올 수 있는 역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도 논한 바와같이 아브라함은 제2 인간조상인 노아 대신존재요 따라서 섭리노정에서 보면 아담 대신존재인 까닭이다.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믿지 못할 것을 믿음으로써 약속으로 받은 이삭을 다시 번제로 드리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은 과연 인류의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찾아 세우기에 족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러한 비참한 시련을 받게됨도 제물실수로 인함이니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작은 것에 실수하면 이것을 만회하기 위하여서는 그에 비할 수 없이 더 큰 탕감조건을 세워야한다는 원리를 보여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들고 아들을 죽이려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불러 가로되 「그 아이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로 내게 드리기를 아끼지 아니하니 이제야 네가 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아노라」(창 22/12)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이 이렇듯 행동으로 나타날 때 즉 몸과 마음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전한 상대기준을 조성할 때 벌써 사탄분리의 능력은 발생한 것이니 사탄이 분리된 이삭은 벌써 하늘적 제물로 남아졌으므로 죽일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제야 네가 나를 두려워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신 중에 「이제야」라는 말씀에는 심중한 의의가 있다.
즉 첫 번 예약제물 헌제시에는 네가 하나님이 두려운 줄 모르고 합당치 못한 헌제를 하더니 지금은 내가 이것을 깨닫고 이삭을 뜻맞게 헌제하니 이제야 네가 나를 두려워하는 줄을 아노라 하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제야」라는 어구에는 첫 번 제물실수에 대한 경고와 이삭제물의 성공에 대한 기쁨의 감정이 충분히 내포된 것이다. 상징제물로 잃어버린 것을 이삭 실체제물로써 다시 찾았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실체세계 전체를 실체 이삭을 세워 다시 찾을 수 있는 조건을 세웠다는 것을 전형으로 하여 야곱도 모세도 예수님도 같은 노정으로 출발하여야 된다.
아브라함은 그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사탄이 침범할 조건이 성립된 이삭을 모리아 산상에서 번제로 드려 그를 다시 하늘편으로 분립하기 위하여 3일기간을 소비하였으므로 이 3일기간은 섭리노정을 출발하기 위한 사탄분립기간으로서 남아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야곱도 사탄세계인 하란에서 자녀와 재물을 취하여 하나님 편으로 분리하는 노정을 출발키 위해서는 3일기간을 라반을 속이고 자유행동을 취하여 나왔고 (창 31/19~22) 모세도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재물을 취하여 사탄세계인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분리할 때에는 3일동안을 바로를 속이고 나왔으며 (출 8/27~29) 예수께서도 어둠과 싸워 영적복귀와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는 3일기간을 무덤에 머물러 계시었다. 그러므로 사탄분립의 기간에 있어서도 소생 장성 완성에 기인된 3일기간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III .야곱과 에서에 의한 사탄 재분립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실체로써 찾아세운 이삭이지만 이 이삭에는 아직도 사탄의 미련이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전 천주를 상징함으로 이삭도 표징되어 있는 상징제물을 사탄이 침범하였던 조건이 있는 까닭이다. 이와같이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상징적 조건이 남아있는 이삭을 중심하고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제물실수한 후에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그의 후손이 이방에서 400년 간 고역하리라고 하신 말씀에 의하면 후손의 애급노정 출발은 이삭부터 해야될 것인데 이삭부터 하지못한 이유는 이와같이 이삭에게는 아직 사탄의 미련이 남아있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에서 사탄분립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노정을 출발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삭에서 다시 사탄을 분립하는 역사를 하시지 않으면 아니된다. 아브라함은 제물실수로 인하여 그의 아담대신의 입장은 이삭에게로 옮겨진다.
하나님은 아담을 두 주인 상대로 세워서 사탄을 분립하는 역사를 할 수 없으므로 가인과 아벨로 갈라세워 역사하신 것과 같이 (참고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이삭도 역시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 상대로 섭리하시는 것이 비원리적이므로 그를 쌍태 에서와 야곱으로 갈라세워 가인과 아벨같은 두 입장의 표시적 위치에 세워놓고 사탄분립 역사를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두 성품의 제물 즉 예약 상징제물과 이삭 실체제물로서 야기된 사탄과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것이 두 입장의 쌍태를 주신 목적이다.
그러므로 에서는 첫 자식으로서 첫 번 사탄이 취한 상징제물을 표시하므로 가인의 입장이요 둘째 자식 야곱은 둘쨋번 하나님이 취한 실체제물을 표시하므로 아벨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에서와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싸우게 된다. 창세기 25장 22절 이하를 보면 에서와 야곱이 두 민족과 두 나라의 입장에서 서로 싸우리라는 것과 에서가 야곱을 섬겨야한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것은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으로써 사탄 분립을 위한 두 성품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태중에서부터 상충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신(말 1/2~3) 이유도 이러한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담으로부터 사탄을 분립하기 위하여 가인과 아벨을 세워 역사하시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그와 동일한 입장인 에서와 야곱을 세워 역사하시어 이삭에게 남아있는 사탄침범의 미련을 완전히 끊어버리려는 것이다. 야곱이 에서대신 장자의 축복을 받게되는 것도 (창 27/29)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팥죽과 떡을 받고 팔아먹은(창 25/34)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형 에서가 죽이려하므로 모친의 권고에 의하여 가나안을 떠나 사탄 세계인 하란으로 들어가(창 27/43) 거기서 처를 취하고 자녀를 번식하고 많은 재물을 취하여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복귀함으로 복귀섭리의 믿음의 기대를 점점 넓혀가는 것이다.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에 그 형 에서를 심히 두려워했으나 (창 32/7) 야곱은 예물로서 형 에서를 꾀었으므로 (창 32/13) 에서는 야곱을 환영하게 되었다(창 33/4). 만일 이 때에 에서가 야곱을 죽였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전개되었던 것과같은 비참한 역사를 또 되풀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에서가 야곱을 사랑하여 환영함으로써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고 질투하여 죽임으로 잃어버린 하늘적인 장자의 기업을 차자 야곱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란에서 20년을 고역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만 에서는 단지 야곱을 환영하여 사랑함으로 축복을 받아 가나안에서 복락을 누린 것이다. 이것은 사탄 편에 선 가인이 하늘 편에 선 아벨을 사랑하여 그를 통하여 헌제하였다면 사탄 편에게 빼앗긴 장자의 기업은 하늘 편으로 옮겨짐으로 가인도 축복을 받았을 것임을 교시하며 또 후일에 사탄편에 선 모든 인류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굴복하여 그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헌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와같이 아브라함 1대에서 이루시려던 뜻은 이삭을 거쳐 야곱에서 그 성사의 출발을 보게 되었다. 이스라엘을 아브라함이 족속이라 하지않고 야곱의 족속이라함도 (출 19/3) 야곱은 아브라함 뜻 성사의 출발자이기 때문이다. 생육하고 번식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아담에게 주신 것과 같은 축복을 그 대신사명자인 노아에게 주셨으므로 (창 9/1) 노아 대신사명자인 아브라함에게도 주셨고(창 15/5) 또 야곱에게도 같은 축복의 말씀을 주신 것(창 35/11)을 보더라도 야곱은 아브라함의 뜻을 위한 대신사명자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제물실수했을 때 「너의 자녀가 이방에서 객이 되어 400년 간 유리하리라」(창 15/13)고 하셨으나 이삭부터 애급에 들어가지 못하고 야곱부터 들어간 이유도 이와같이 야곱은 이삭에서 사탄을 분립하여 그의 제물실수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이라고 기록된 것같이 3대의 하나님이 된 것도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그 뜻이 3대에서 이루어진 것을 표시함이니 이는 바로 아브라함을 중심한 섭리노정에 남겨진 그의 중대한 과오를 의미하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서러움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이렇듯이 아담 가정으로부터 복귀섭리의 기대를 조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는데 그의 헌제의 실수로 인하여 이삭을 거쳐 야곱에서 그 기대조성의 출발을 하게된 것이니 아브라함의 한 제단에 오른 세가지의 제물로써 표시된 이 뜻 성사의 노정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대한 역사적 표시의 전모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아담을 상징함이니 마치 아브라함 1대에서 이루시려던 뜻이 이삭을 거쳐 야곱으로 연장된 것같이 아담에서 이루시려던 창조목적은 예수님을 거쳐 재림주로 연장이 되어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도 바쳤던 이삭은 전인류의 제물된 예수님을 상징함이요 이삭에서 완전 분기하지 못한 사탄의 미련을 야곱에서 청산하여 장자 기업의 기대를 조성한 것같이 예수님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은 사탄세계는 재림예수의 심판을 통하여 청산되어 복귀섭리를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출발의 기대는 야곱에서 조성되었으나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한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고역 400년이 남아 있으므로 야곱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고역기간을 지난 후에야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는 모세를 중심하고 조성될 것이었다.
제2장 복귀섭리시대(2000년)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받은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다면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고 그 기대 위에 메시아를 맞아 창조이상의 세계는 완전히 복귀되었을 것이므로 아브라함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4000년의 복귀섭리역사는 필요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는 인류를 다시 죄악역사를 이루어 나아가는 방향으로 내몰았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섭리해 오시던 아담으로부터의 2000년 기간은 전부 사탄에게 내어주어 사탄의 뜻을 이루어나온 결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을 다시 하늘 편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 있어야할 것이니 이것이 곧 아브라함 이후 예수님까지 2000년 기간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시대라고도 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출발의 기대는 야곱의 장자복귀로 인하여 조성되었으나 아직 야곱의 앞에는 제물실수로 인한 애급고역의 노정이 남아 있으므로 이 노정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걷지 않으면 아브라함이 제물실수없이 설 수 있었던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찾아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노정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민을 불러 세우는 것으로 출발하여 이 선민을 번성케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조성치 않으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한 모세의 반석이타로 말미암아 이 노정은 다시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여 2000년에 이르러서야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는 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이후 2000년 기간은 메시아를 맞아 복귀섭리를 종결지어야할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일러 복귀섭리시대라고 부른다.
인간 자신의 불신에 의하여 타락된 인간이므로 타락의 전체적인 책임은 인간자신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도 피조물로서 타락된 것이므로 하나님도 창조주로서의 원리적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제1 책임분담노정을 담당하시고 선지자를 직접 대하시어 계명과 율법을 주심으로 사탄을 굴복시키는 섭리를 하셨으니 이 시대를 소생구약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는 다시 7기간으로 구분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구분되는가하면 하나님은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찾아세울 때까지를 7기간으로 구분하여 섭리하셨으므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탕감복귀시대도 역시 7기간으로 구분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복귀섭리시대가 7기간으로 구분되어있는 것도 원리적인 프로젝트를 맞추기 위함이다. 6일째 되는날 창조된 인간이 타락되었으므로 6수는 사탄이 침범한 수로서 불길수 요 따라서 하나님이 찾아야할 수다. 하나님은 6수를 사탄에게 내어 주었으므로 7일 안식수를 채우지 못한 것이다. 6000년으로 죄악역사를 마치고 1000년 왕국의 1000년을 채워 7000년으로 천국이상을 이루시려는 섭리는 바로 잃어버린 6수를 찾고 7수를 채워 원리적 섭리의 프로젝트를 이루어 맞추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섭리시대가 7기간으로 구분된 것은 이 기간으로 메시아를 맞아 에덴복귀를 완성키 위한 7수를 찾아 세우시기 위함이다.
이와같이 아담으로부터 2000년 간이나 사탄만을 대하고 있는 암흑세계에서 뛰쳐 나온 아브라함을 불러 그의 후손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세우시고 악의 판도를 물리치며 선의 판도를 넓히어 민족적인 복귀섭리의 기대를 조성하면서 예수님에까지 이른 것이다.
제1절 애급고역시대 (400년)
I .복귀섭리로 본 야곱노정의 의의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400년 간 고역을 당하게된 이유는 이미 상술하였다.
노아와 같은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하여 찾아 세웠던 400년 기대에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다시 분립하기 위하여 이스라엘민족이 사탄세계인 애급에 들어가 400년 간 사탄과 다시 싸우지 않으면 아브라함으로 찾아 세우려던 믿음의 조상의 입장은 다시 찾아세울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민족의 애급고역기간은 사탄과 싸워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기간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의 출발은 사탄의 미련이 남아있는 이삭부터 할 수 없으므로 장자의 기업을 복귀한 야곱부터 하게된 것이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찾아 세우기 위한 애급고역출발자로서의 자격은 야곱에게 부여된 것이다.
이와같이 야곱은 하늘뜻을 받들고 복귀섭리시대를 이루어 나아가는 첫 출발자로서 다음 시대에 하늘 뜻을 받들고 나아가는 중심인물들이 걸어야할 본보기 노정을 걸은 것이다. 그러므로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복귀한 야곱이 사탄세계를 표시하는 하란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그 노정은 다음에 모세와 예수님이 걸어야할 표시적 노정인 동시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걸어야할 전형노정이기도하며 또 끝날에 주를 따르는 각 성도들이 걸어야할 상징노정이 될 것이다.
즉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의 기업을 빼앗은 후 하란에서 하늘적인 처자와 아울러 재물을 취하여 4수복귀의 탕감조건을 세운 후 1대로서의 복귀를 완성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다음에 모세도 애급에서 장자를 전부 침으로 차자의 입장에 있는 존재를 장자의 입장에 세워줌으로 장자기업을 빼앗는 탕감조건을 세운 후 이스라엘선민과 아울러 그 재물까지도 빼앗아 야곱과 같이 4수복귀의 탕감조건을 세워서 민족적인 가나안복귀를 완성해야된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 예수님도 인류역사를 먼저 장자의 입장에서 이루어 나오는 사탄세계를 쳐 차자의 입장에 있는 신부와 자녀와 만물을 복귀하여 장자의 입장에 세워줌으로 장자기업을 세계적으로 복귀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또 야곱이 죽과 떡으로써 장자의 기업을 빼앗은 것(창 25/34)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예수님도 야곱의 입장에서 팥죽으로 표시된 피와, 떡으로 표시된 살로써 잃어버렸던 장자의 기업을 완전히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자녀와 아울러 만물세계를 사탄세계에서 에덴으로 복귀하여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성하여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1대에서 하늘적인 가정과 만물을 취하여 가나안으로 돌아와 하늘적인 장자의 기업을 1대로써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웠기 때문에 1대 가나안복귀 완성자요 모세는 야곱의 이러한 노정을 민족적으로 완성해야할 사명자이었으므로 민족 가나안 복귀 완성자로 왔었고 예수님은 이것을 세계적으로 완성하여야되므로 세계가나안 복귀 완성자로 오셨었다.
야곱이 부친을 기만한 것도 그가 간교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천륜의 섭리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죄가 되지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행위가 된 것이다.
구약성서에는 이와같이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선지자들이 감행한 사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것도 원리를 모르고는 해명되지 않을 것이다. 야곱이 이와같이 장자의 축복을 에서대신 받음도 그 모친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모자협조에 의해서만 야곱의 축복이 이루어졌으니 이것도 다음에 오실 모세와 예수님의 전형적 노정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모세도 그 모친이 3개월 간을 숨겨 키웠고(출 2/2) 바로궁중에서 그 유모에 의하여 숨은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출 2/9)모세의 위인은 볼 것이 없었을 것이다. 또 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됨도 바로궁중으로 들어가는 도중에서 하나님이 죽이려할 때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자식 즉 모자의 협조에 의하여 모세가 살아났기 때문이었다(출 4/20~26). 이와같이 예수님도 헤롯왕이 그를 죽이려할 때 그 모친 마리아가 그를 데리고 애급으로 피난갔던 것 등등 모자의 협조없이 구원의 섭리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모자협조란 조건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알아보자. 인류의 타락은 해와로부터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않았다면 이에서 구원의 섭리는 이루어졌을 것인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류죄악사는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뿌리는 모친 해와에 있고 죄악사의 열매는 자식 가인에서 결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인류의 죄악사는 모자로 인하여 시작된 것이므로 이것을 탕감복귀하는 것도 모자가 협조하여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야곱은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얍복강을 넘기 전에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여 승리한 후 환도뼈를 치고 나서야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게 된 것이다(창 32/22~28). 복귀섭리로 보면 아브라함이 아담대신 입장이라는 것은 위에서 이미 논하였다. 이제 아브라함 뜻은 연장되어 야곱으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니 야곱도 아담 대신입장으로서 아담으로 이루시려던 뜻을 야곱으로 계승해야할 것이므로 야곱은 아담이 지은 죄를 탕감복귀해야할 사명을 가졌다. 즉 아담이 환도뼈를 잘못 쓴 죄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야곱의 환도뼈를 대신 친 것이다.
이로써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는 사실은 아담이 성문제로 타락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것은 그를 1대복귀 완성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시련이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내기 위하여 바로궁중으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는 시련을 넘은 후에야(출 4/24) 민족복귀 완성자의 자격을 얻었고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의 시련을 이긴 후에야 비로소 인류구원의 공생애 노정을 출발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나서는 사람은 반드시 큰 시련을 거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은 야곱에게 12자식이 있게된 원리적근거를 알아보자.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잃어버린 10대와 40일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10대에 400년을 요하였다는 것은 이미 논한 바이다. (참고 노아가정 중심한 복귀섭리)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다면 이와같이 노아로부터 400년과 10대를 찾아세운 40일 복귀의 기대 위에서 아브라함을 중심한 섭리는 이루어졌을 것이었지만 제물실수로 인하여 이 섭리는 이삭 야곱 2대로 연장되어 12대가 된 것이다. 즉 12대로써 10대를 탕감복귀하는 결과가 되었으므로 복귀섭리의 뜻으로 보면 12대는 10대에 해당된다. 복귀섭리시대의 뜻 중심한 출발자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도 40대로 종결되어야할 것인데 이삭 야곱의 2대의 연장으로 인하여 42대가 되었다. 이것도 뜻 중심하고 보면 42대는 40대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부터 4000년 아브라함부터 40대로서 예수는 복귀섭리를 완수해야할 것이었다.
이와같이 노아로부터 야곱까지의 12대는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제2차로 사탄에게 내어준 것이므로 이것을 복귀할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야곱의 12자식을 세워서 복귀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1대 복귀완성자 야곱이 12자식 중심으로 섭리노정을 출발했으니 민족복귀 완성자 모세도 그 전형노정을 본받아 12지파 중심으로 섭리해야되며 세계복귀 완성자 예수님은 12제자 중심으로 역사하셔야된다. 이스라엘 역사에 삼손을 중심한 12사사와 12소선지의 역사가 있는 것은 이러한 원리로서만이 해명될 것이다. 천성에서 12진주문이 중심이며 땅에서 12개월을 중심한 24절계며 12시간을 중심한 24시간 등은 모두 이런 원리 가운데서 되어졌다.
끝날에 하늘적 큰 사명을 띤 대한민국이 12부를 중심하고 조직된 정부로서 출발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야곱을 중심한 70 식구가 애급으로 들어갔으니 (창 46/27) 모세도 70 장로를 중심하고 사탄세계와 싸워야하며 예수님도 70 문도를 중심하고 사탄세계와 싸워야 한다. 야곱이 지팡이를 가지고 얍복강을 넘어 1대에 가나안으로 복귀했으니 (창 32/22) 모세도 지팡이로 홍해를 건너서 민족적으로 가나안에 복귀해야 되며(출 14/16) 예수님은 철장으로 고해와 같은 이 세상을 심판함으로써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성해야한다(시 2/9, 계 2/27). 야곱이 하란에서 우상을 도둑하여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으니 (창 35/4) 모세는 우상을 갈아서 물에 띄워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하였고 (출 32/20) 예수님은 모든 사탄을 불사르려 오셨다(말 4/1). 야곱은 그 시체까지도 사탄과 싸워 분별된 40일 기대 위에 서야할 것이므로 그 시체에 40일동안 방부제를 발랐다(창 50/3). 그러므로 모세도 그 시체를 놓고 사탄과 싸웠으며 (유 1/9) 예수님도 그 시체를 놓고 서로 취하려고 싸운 것이다.
야곱의 본보기 노정은 이미 아브라함으로 보이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이삭헌제를 놓고 사탄과 독자적으로 싸우던 3일기간을 본보기로 걷기 위하여 야곱도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 사탄과 스스로 싸우는 자유허여의 3일기간이 있었고 모세도 민족을 인도하여 가나안복지로 향할때 하늘의 협조없이 독자적으로 바로를 속이고 출발해야될 3일기간이 있었고 예수님도 영적복귀의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 무덤 속에 3일기간을 계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흉년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애급땅에 갔다온 것같이(창 12/10) 야곱도 흉년의 간난으로 인하여 애급으로 갔었고 모세도 바로의 살해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애급 바로궁중으로 갔었고 예수님도 헤롯왕의 살해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애급땅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노아홍수가 끝날 무렵에 까마귀와 비둘기로써도 그렇게 보여주셨지만 은밀한 뜻을 보여주시고야 섭리하시는 하나님(암 3/7)은 이렇듯이 타락한 인간이 걸어야할 구원의 길을 이모 저모로 상징과 암시와 비유로써 교시하신 것이니 이것이 즉 성서요, 구원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본원리를 알지 못하면 성서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니 그러고야 어찌 바른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으리요. 예수께서 오시면서부터 그의 행적은 구약시대의 기성관념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각도로 전개된 것같이 예수께서 재림하신 후의 성약역사도 지금까지의 신약역사로서는 상상도 못하였던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지자라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II .애급고역시대의 의의
애급고역이라는 눈물겨운 노정이 어찌하여 이스라엘 선민에게 남아졌는가하는 문제는 이미 여러차례 거듭하여 논술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 뜻을 받들어야할 사명이 큰 만큼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에 오는 그에 대한 탕감도 큰 것이다.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시려는 하나님의 예정의 뜻은 변함 없으므로 이 뜻을 대하는 인간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 대신 사명자를 세워 기어코 이 뜻을 성취하시고야 마는 것이다. 아담을 중심하고 이루시려던 뜻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 좌절되니 아벨대신 셋을 세우셨고 셋의 후손에서 노아를 아담 대신으로 택하시어 아담으로 이루시려던 뜻을 노아로써 이루려하셨다.
그러나 노아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지 못하였으므로 노아대신 아브라함을 택하셨으나 아브라함 마저 노아의 입장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러나 아브라함에서는 기어코 뜻을 이루어야할 원리적 조건이 있으므로 이삭을 거쳐 야곱을 세움으로써 그로부터 선민의 터를 넓혀 가면서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400년을 다시 찾아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할 애급고역의 노정을 출발치 않으면 아니된다. 애급고역 400년이 있게된 원인은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기간인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을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요 또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기간이 생긴 원인은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기간인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600년을 탕감복귀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애급고역시대가 남아지게된 원인은 결국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600년을 탕감복귀하기 위함이라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복귀기대섭리시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복귀섭리시대가 나오게된 것인데 복귀기대섭리시대 가운데서도 인간시조로부터 노아까지 1600년 기간을 탕감복귀키 위한 기간이 애급고역 400년이다. 이와같이 뜻 성사의 중심은 옮겨져 야곱이 아담의 입장에 서게 되었으므로 뜻 성사를 위한 애급노정을 출발하려면 아담이 이루지 못한 것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 야곱은 하늘 편의 처와 자녀를 찾아 가정을 세우며 재물을 취하여 잃어버린 아담가정과 만물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4수복귀의 탕감조건을 세워야하며 또 얍복강의 시련을 거쳐야 1대복귀완성자의 자격을 가지고 애급고역의 노정을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말할 수 없는 수난기인 동시에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여 에덴복귀의 영광을 어느 민족보다도 먼저 누리도록 이끌어주는 중요한 시대다.
야곱의 애급노정은 요셉을 길잡이로하여 출발한 것이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째 만득자로서 그 모든 형들에게 있어서는 아벨의 입장이었으므로 야곱은 그를 특별히 총애하고 있었으며 가인의 입장인 그 형들은 모두 요셉을 증오하였다. 요셉은 자기가 형들과 같이 추수할 때에 형들의 곡식단이 자기의 곡식단에 절하였고 또 열한개의 별이 자기에게 절하였다(창 37/5~11)는 몽시를 발표하여 그 형들의 자기에 대한 증오감을 더욱 깊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형들에게 있어서 차자의 입장에 있는 요셉을 이 노정의 선봉으로 세우기 위하여는 그 형들이 전부 그에게 굴복하여 가인이 아벨에게 굴복한 입장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야한다는 것을 교시하기 위함이었다. 과연 그 형들이 아무리 요셉을 미워하여 이스마엘상대에 팔아먹었으나(창 37/27) 후일에 요셉이 애급의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는 그 몽시로써 교시하신대로 그 형들은 동생에게 와서 완전히 굴복한 후에야 다시 본향으로 돌아가 그 부친 야곱을 비롯한 그의 70가족을 인솔하여 가지고 애급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에서 400년 간 고역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으나(창 15/13) 그들이 애급을 떠난 것은 430년이 끝나는 그날이었다(출 12/41). 이와같이 하나님의 섭리가 30년이 연장된 것도 역시 이스라엘민족 자체가 애급을 떠날 수 있는 기대를 세우지 못한 까닭이다.
6000년 역사의 노정도 이와같이 공식적인 섭리노정이라 할찌라도 그 뜻을 대하는 인간의 책임완수 여하에 따라 원리적 연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야곱 이후 모세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민족에는 한 사람의 예언자도 출현함이 없이 애급민족들에게 처참한 학살과 학대를 받아가면서 단지 할례(출 4/24~26)와 제사(출 8/25~28)와 안식일(출 16/23)을 지키는 것으로 그들이 신앙생활을 유지해온 것이다.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바로궁중에 준비해두었던 모세를 불러세우시사 「여호와 가라사대 내가 애급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급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햇족속 아모리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브스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급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하는 학대로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내게 하리라」(출 3/7~10)고 명령하시어 어둠에서 헤매던 이스라엘민족에게 새로운 서광이 비친 것이다.
III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
一 모세노정의 의의
인간시조가 타락된 후에 하나님은 한탄하시고 후회하셨다(창 6/6). 하나님은 자기의 몸으로 지으신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서러움이 곧 하나님의 서러움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로서의 원리적 책임을 다하시기 위하여 복귀섭리의 제1책임을 하나님이 친히 져주신 것이다. 탕감복귀의 원칙에 의하여 인간이 타락했으니 인간으로 복귀해야되는 것이 원리이므로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탄생하시어 역사하셔야 될 것은 필연적인데 이미 하나님 앞에서도 순종 굴복하지 않았던 사탄이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를 순종 굴복시키는 전형적 노정을 친히 보여주시기 위하여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과 모세를 세우시어 하나님적 제1 책임분담 역사를 하여 내려오신 것이다.
이미 위에서도 논술한 바이지만 모세는 야곱이 1대로서 복귀의 기준을 찾아세운 터 위에서 야곱의 근본 목적을 완수하여야한다. 모세는 이 목적을 위하여 야곱의 노정을 본보기로 민족적 복귀섭리노정을 명시함으로써 후일에 예수께서 오셔서 완수해야할 세계적 가나안 복귀 섭리노정을 그대로 예시한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모세노정을 본보기로하여 그대로 걷지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로 오셨던 사람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말씀을 보더라도 「모세가 말하대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다.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사람은 다 멸망시키리라」(행 3/22~23)고 하셨으니 이 선지자는 곧 예수님을 가리킴이다. 요한복음 5장 19절 이하를 보면 「······아들이 아버지의 행하신 일을 본 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신 것을 다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해 여기게 하시리라」고 기록하여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 이미 모세를 통하여 보여 주셨고 또 그대로 보여주시고 있는 노정을 따라 역사하심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심도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사탄 품에서 스스로 뛰어 나왔기 때문이다. 즉 모세는 바로궁중의 영화를 진개와 같이 생각하고 이스라엘민족된 하늘의 혈통적 지조와 충절을 변하지 않고 있었던 까닭이다(히 11/24~26). 모세의 민족애는 이스라엘민족을 학대하는 애급인을 살해(출 2/11~12)함으로 폭발되었으니 이렇듯이 모세의 애급사람에게 대한 적개심의 발로는 모세로하여금 그들과 타협할 수 없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민족의 인도자로서의 택함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 대신존재요(출 4/16) 사탄상징인 바로 앞에 신으로서 (출 7/1) 역사하여 하나님적 책임섭리 노정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모세가 애급에서 기사와 이적으로써 이스라엘민족을 빼앗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복지로 복귀하여야될 것같이 예수님도 타락인간을 원수 사탄 품에서 기사와 이적으로써 빼앗아 하나님의 창조이상 세계로 복귀하여야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로 인한 이 본보기노정은 예수께서 걸어야할 노정인 동시에 그를 따르는 성도들도 걷지 않으면 아니될 노정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二 예수의 복귀섭리노정으로 표시된 모세의 출애급노정
이제 우리는 모세노정은 어떻게 예수의 노정을 상징하였는가를 알아보기로하자.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여 애급에서 이스라엘민족을 구출할 것을 명하시니 모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인도자인 것을 무엇으로 알게할 것인가고 반문하였다(출 4/1). 하나님은 이 증거로서 모세에게 세가지 기사의 능을 부여하셨으니 (출 4/1~9) 첫째는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하는 기적이다. 하나님 대신 신으로서(출 4/16, 출 7/1) 이스라엘민족을 대표하여 사탄의 실체적 대표형인 바로 앞에 서게될 모세의 손에 쥐어있는 지팡이는 하나님 앞에 설 다음에 오실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팡이로 사명자로 오신 분이다. 지팡이는 대신 의지자요 대신 보호자며 불의한 것을 쳐 의로 세우며 바른 길잡이의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지팡이로 오신 예수님은 바로 이와같은 사명을 가지고 인류 앞에 나타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가 던진 그 지팡이로 나타난 예수님은 하늘뱀적 사명자로 오셔서 인간시조를 타락시킨 사탄뱀을 멸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상징역사다. 다시 말하면 뱀이 인간을 타락시켰으니 복귀하는 것도 뱀으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고 자기를 뱀으로 상징하셨다.
예수께서 전도를 나가는 제자들을 보시고 「지혜는 뱀과 같이 하고 순하기는 비둘기같이 하라」(마 10/16)고 말씀하신 것도 뱀이 죄없는 인간을 꾀어 타락시킨 것같이 너희들도 타락된 인간을 꾀어서 하나님 편으로 인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으로 보여주신 이 기사는 후아담된 예수님을 (고전 15/45) 찾아세운다는 뜻이니 즉 인간시조 아담복귀를 상징한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모세가 첫 번 품어서 문둥병이 된 그 손이 둘째번 품을 때 깨끗이 나아버리게함으로써 치병의 능을 보여주셨다. 첫 번 손을 품어 인간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렸다함은 처음으로 천사장이 해와를 품음으로써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입장으로 인간이 타락해버렸다는 것을 표시함이요 그 손을 다시 품어 이 병이 깨끗해졌다함은 예수께서 오셔서 신부된 전 인류를 다시 품음으로써 완전복귀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三 40일 복귀섭리로 본 모세노정
노아의 가정은 40일 심판으로 사탄을 분립하여 복귀섭리의 기대를 조성할 수 있는 40일 사탄 분립기준선상에 처하게 된 것이었으나 함의 타락행위로 말미암아 이 40일에는 사탄이 재침범하게되어 이것은 사탄에게 내어준 40일로 돌아갔으므로 노아의 입장과 같은 섭리의 기대를 다시 조성하려면 잃어버렸던 40일을 탕감복귀하여 하늘 40일로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참고 노아가정 중심한 복귀섭리)
복귀섭리노정으로 보아 심판 40일로 인하여 제2 인간 조상이요 제1 믿음의 조상의 입장에 처했던 노아의 입장을 복귀한 아브라함을 찾아세우기 위하여 400년을 요한 것도 함으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재분립키 위한 40일을 하늘 편으로 다시 찾아세우려는 것이 그 목적이 었다.(참고 아브라함 중심한 복귀섭리)
아브라함은 제물 실수로 인하여 함의 실수로 인한 노아가정과 같이 40일 기대를 사탄에게 내어준 입장에 다시 서게되어 노아로부터의 400년 기대를 파하였으므로 함 실수전 노아의 입장을 다시 복귀하려면 40일을 찾기 위한 400년 기대를 다시 조성치 않으면 아니되게되었다.
이스라엘민족의 애급 400년 고역은 이렇듯이 필연적 노정으로 남아진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다면 노아 중심하고 경륜하시려던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이루어졌을 것인데 제물실수로 인하여 사탄 재침입을 보게되니 부득기 이스라엘백성은 400년이란 기간을 다시 사탄과 싸워 그를 완전히 분립하지 않으면 400년 전 노아의 입장을 복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애급 400년의 고역기간을 경과한 이스라엘민족을 중심한 모세의 입장은 바로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 전의 입장이요 따라서 40일 심판기대 위에 섰던 함의 실수 전의 노아의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노아의 가정적 입장을 민족적으로 복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아가정은 노아를 중심하고 하나되어 지혜로 찾아 세워야할 자기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될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백성들로 모세를 중심하고 하나되어 그들의 지혜로 찾아세워야할 책임분담을 완수해야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이 우상을 받들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동을 취했으며 모세 역시 반석 2타라는 중대한 범행을 하게되어 이 백성은 함의 실수로 인한 노아가정과 같은 입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즉 모세를 중심한 12지파의 이스라엘 백성은 함실수 전 노아의 입장을 복귀한 기대였던 애급고역 400년을 다시 사탄에게 내어준 결과로 돌아갔으므로 이 입장을 다시 복귀키 위해서는 삼손을 중심한 12사사를 세워 40일의 기대를 재조성하기 위한 사사 400년의 사탄 재분립기간이 또 필요하게된 것이다.
40일을 중심하고 모세 한 사람을 찾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어떠했는가를 알아보자. 1대 복귀노정을 출발하기 위한 야곱이나 민족복귀노정을 출발키 위한 모세나 부활하여 영적 세계복귀노정을 출발한 예수님은 마치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상에서 이삭헌제로서 사탄을 분립키 위한 3일 기간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으로 사탄과 싸우는 3일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모세 역시 이 3수를 찾기 위한 3개월 기간을 모친이 사탄 바로의 눈을 속여 양육하는데서 그 생애는 시작되었다. 즉 사탄과 싸우는 이 기간을 경과한 후에야 모세는 바로궁중으로 들어가 이스라엘민족의 가나안복귀 완성자로서의 생애가 시작된다. 모세가 바로궁중에서 40년 간 자라게되는 것도 모세는 아브라함이나 노아를 세워 아루시려다 못이룬 하나님의 뜻을 완성해야할 존재이므로 모세를 사탄에게 내어주어서 잃어버렸던 아브라함이나 노아의 입장에 모세를 세워놓고 그를 다시 찾아오는 복귀노정을 걷게함으로써 잃어버렸던 노아나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40일을 복귀한 기대 위에 섰던 아브라함이나 노아의 입장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모세도 40년 간 사탄 바로와 싸워 사탄을 분립하는 기간을 탕감복귀치 않고는 바로궁중을 박차고 나올 수 있는 기대가 조성되지 않는다(행 7/21~23).
그러므로 모세는 40세에 애급에 대한 증오감이 극도로 비등하여 애급인을 쳐 죽이고 미디안 광야 40년 생애로 들어가 40년 바로궁중에서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사탄 40일 기대를 미디안 광야에서 하늘 40일 기대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80세에 출애급하게 된다(출 7/5~7). 애급에서 사탄과 싸워 400년 고역을 마친 이스라엘백성과 40년 바로궁중 생활을 거쳐 40년 미디안 광야생활을 마친 모세는 400년 기대 위에 섰던 아브라함이나 40일 심판기대 위에 섰던 노아와 같은 입장에 처 하게 되었던 것이므로 가나안복귀의 출애급노정을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기사로써 홍해를 건넘으로 바로의 병차를 완전히 괴멸한 이스라엘민족은 홍해를 분기선으로 하여 사탄을 완전 분리한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백성은 모세를 중심하고 하나님 뜻만을 완전히 받들어 사탄이 침범할 조건을 만들어서는 아니될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비난하여 정탐 40일의 결과를 믿음으로 넘지 못하였다.
12지파의 대표로 선출된 12인의 정탐보고를 듣도 놀란 이 백성의 태도는 하나님의 심정을 더욱 아프게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 가호의 은총을 입어 오직 기사와 이적으로 인도된 이 백성이 가나안족을 두려워하거나 여리고성의 견고함에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정탐보고를 듣고는 대성통곡하여 「어찌하여 여호와는 우리를 이 땅에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힐진대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으리오」(민 14/1~4)하면서 한 두령을 세워 애급으로 돌아갈 의논을 한 것이다.
이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한 20세 이상의 백성들을 전멸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에 강하고 담대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모세의 뜻을 계승하여 후손을 이끌고 허락된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 백성은 불신으로 말미암아 정탐 40일을 믿고 넘지못한 결과로 돌아가 사탄침범의 조건이 생겼으므로 하나님은 정탐 40일의 1일을 1년으로 계산하여 그 후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케하고 40년 간 유리고객시킴으로써 그들의 광야의 고난은 하나님을 싫어 버린 죄값임을 알게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민 14/29~34).
이와같이 이스라엘민족이 야곱 가나안복귀 21년의 수를 맞추기 위한 21일이면 넘을 수 있었던 광야를 40년이나 유리한 것도 불신으로 잃어버린 정탐 40수를 탕감복귀키 위함이었다.
다음으로 모세의 금식 기도 40일의 원리적 근거를 알아 보기로 하자. 말씀의 실체인 아담 해와가 타락됨으로 인간은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복귀원리란 인간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말씀의 목적을 복귀키 위한 재창조 역사인 것이다. 모세가 40일 금식기도로써 받은 말씀은 재창조의 말씀이다. 말씀이 두 석판에 기록되었음은 말씀의 실체인 아담과 해와를 상징키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잃어버렸던 아담과 해와를 복귀섭리로써 재창조한다는 상징으로서 두 석판의 말씀의 기록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반드시 사탄 분립의 40일 기대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원리이므로 재창조의 말씀도 이 기대를 조성치 않고는 부여될 수 없는 것이다. 40일 금식기도 후에서만 말씀(계명)을 받을 수 있다는 원리적 근거는 여기에 있다(출 24/18).
그러므로 모세가 받은 석판을 파함과 동시에 이 40일 기대수가 무너져 사탄을 내어준 결과가 되었으므로 다시 석판을 받기 위하여서는 재차 40일 금식기도를 반복함으로써 이 40일을 탕감복귀치 않으면 아니된다(출 34/27~28).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도 이러한 원리로서 불가피한 것이다.
즉 모세가 40일 금식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찾았다함은 이것도 다음 오실 예수께서 40일 금식으로 말미암아서 말씀의 실체된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함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것도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바로궁중에서의 열 번의 기사와 이적으로 세워야할 기준을 상실하였음으로 이 기준을 복귀하는 탕감조건으로 십계명을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다시 사탄과 짝하지 않았으면 십계명은 필요없는 것이다. 사탄이 재침범하였기 때문에 이 사탄을 재분립하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을 주신 것이다.
세례요한을 중심한 이스라엘민족들이 찾아 세워야할 40일 기대가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조성되지 못하였으므로 이 기대를 예수님 자신이 조성하기 위해 40일 금식을 단행하신 것이다. (후편 제7장 참조)
예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죄인들을 품었다고 말씀하셨다(마 23/37). 그러므로 이 기적은 신랑으로 오실 예수님으로 인한 신부성복귀를 표시함이니 즉 신부의 신이시오 해와의 신성이신 성신복귀에 의한 전인류의 신부성복귀를 상징하는 것이다. 다음엔 강수를 던져 피가 되는 기적을 보여주셨으니 이것은 생명없는 무기물(물)과 같은 존재가 생명있는 유기물(혈; 피)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물은 타락되어 생명을 잃은 세상사람을 표시하므로 (계 17/15) 이 기적은 생명을 잃어버린 세상사람을 예수께서 오셔서 생명의 자녀로 복귀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므로 자녀복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3종의 기적의 능을 보여주심은 이스라엘민족과 바로 앞에 설 수 있는 조건을 세우기 위함인 동시에 다음 예수 오셔서 행사하실 수 있는 기대의 조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성되어 신부된 해와를 맞아 하나님의 축복대로(창 1/23) 죄없는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 아담 해와 자녀 이렇게 사위기대를 조성해야할 것이었는데 타죄로 인하여 이것을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므로 이것을 복귀하는 탕감조건으로 모세를 중심한 이 세가지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으로 모세는 자기는 말씀을 할 줄 모른다고 말씀 대신존재를 요구했으니 이것은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 타락이므로 말씀완성자 예수님을 세워 말씀으로 창조된 대상실체 전부를 복귀한다는 뜻이다.
말씀의 대상실체는 곧 예수님과 성신을 이름이니 모세에게 말씀대신 아론과 (출 4/14) 여선지 미리암(출 15/20)을 주셨다함은 구약시대에 있어서의 구원의 말씀의 상징체인 두 석비와 그의 실체인 예수님과 성신을 보내실 것을 형상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뜻을 받들어 이스라엘 대신 속죄사명을 한 것은 다음 예수님과 성신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스라엘의 대신 속죄사명을 할 것을 표시한 것이다.
모세는 이러한 조건들을 찾아 세운 기대가 있으므로(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은 나의 장자라 내가 너더러 내 아들을 놓아 보내어 나를 섬기게하라 하여도 네가 놓아 보내지 아니하니 내가 네 장자를 죽이리라」(출 4/22~23)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처자를 데리고 길을 갈 때에 여호와 나타나 모세를 죽이려하니 처 십보라가 자식을 할례함으로 모세가 살아났다(출 4/24~26). 이것도 역시 할례로 인하여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이 살 수 있었던 것같이 다음에 할례의 근본목적 완수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이스라엘민족도 할례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근본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한다.
예수님으로 인한 할례라함은 물론 율법시대의 그 형식을 말함은 아니다. 이제 할례의 의의를 알아보자. 해와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음으로 영적 타락을 보았고 아담까지 주관함으로써 원리를 위반하여 내적타락까지 성립되었기 때문에 할례가 요구된다. 즉 양부를 통하여서 어둠의 피를 받아 타락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을 복귀하려면 양부를 쳐서 어둠의 피를 뽑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할례는 아브라함의 영원한 규례로 되어있어 이것으로 말미암아 남자의 주관성을 복귀하는 조건을 세운 것이다. 할례에는 마음할례(신 10/16)가 있고 육적할례(창 17/10) 만물할례(레 19/23)가 있다. 더럽힌 피조물로 하여금 그 창조본성을 복귀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니 그의 근본의의는 다음과 같다.
(1) 사망의 피를 빼는 표
(2) 남자의 주관성을 다시 찾는 표
(3) 근본 뜻의 자녀의 길을 다시 찾는 약속의 표
바로를 대하여 싸울 수 있는 이러한 제조건을 찾아 세운 모세는 바로와 대립하여 그를 굴복시키는 역사를 시작하였다. 라반이 열 번이나 야곱을 속여 괴롭게 하였으니(창 31/7) 야곱노정을 본보기로 걸어가는 모세도 열 번이나 이적을 행해도 바로는 점점 더 강퍅하여 열 번이나 모세를 속여 괴롭게 하였다(출 7~12). 그러면 하나님도 어찌하여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는가하면
(1) 택한 백성에 대한 사탄(바로)의 침략의 의사를 근절키 위함
(2) 사탄(바로)으로 하여금 자기의 무력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순종굴복할 것을 자각케하기 위함
(3) 원수의 모든 것을 멸하기 위함
(4)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는 망한다는 것을 자각케 하기 위함
바로를 강퍅케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주려는 것은
(1) 사탄(바로)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게하기 위함
(2) 바로 편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
(3) 이스라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같이하심을 알리기 위함
(4) 애급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미련을 끊게하기 위함
(5) 이스라엘백성으로 하여금 애급사람과 정을 통하는 자 없게하기 위함
(6) 하나님이 애급을 증오하는 정도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올라오게하기 위함
이렇듯이 바로를 승리한 이스라엘백성은 소망하던 이상이 이루어지는 곳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하였으니 이 노정은 세계적인 가나안을 바라고 나아가는 오늘날의 우리 신앙생활 노정을 표시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애급 편에 3일 간의 흑암이 있었고 이스라엘민족에게 3일 간의 광명이 있었음은 후일 예수께서 오시면 사탄편은 흑암이요 하늘편은 광명으로 분기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애급의 장자가 육축의 맏것을 쳤으나 이스라엘은 양피로 이것을 면하였다.
사탄편에 있어서는 장자는 가인이나 에서나 세라(태중장자)의 입장이므로 이를 쳐서 아벨이나 야곱이나 베레스(태중차자)의 입장에 있는 차자로 하여금 장자의 입장을 복귀케하기 위함이다. 이 재앙도 예수 오셔서 장자의 입장으로 섭리노정을 먼저 출발한 사탄 편은 멸하고 차자의 입장인 하늘 편은 예수님의 피의 대속으로 구함을 받는다는 것을 표시한다. 모세가 많은 재물을 취하여 온 것도 예수 오셔서 만물까지 복귀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바로를 굴복시킨 모세는 바로에게 3일기간노정의 거리에 가서 헌제를 한다고 속여서 (출 8/27)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하여가지고 나온 것이니 이 3일기간은 이스라엘민족에게 있어서 생사의 분기를 결하는 기간인 것이다.
이 자유허여의 기간이 없으면 이스라엘의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버린다. 이것은 야곱의 가나안 복귀섭리 노정에로 허여된 것이지만 예수 오셔서도 이 3일의 사탄 분립기간이 있어야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이 기간을 살아서 넘지 못하고 십자가로 인하여 무덤에서 3일기간을 지남으로 부활하여 영적세계와 가나안복귀만을 완성하였다. 애급을 떠나 3일기간을 잘넘은 후 의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는 생활로 들어갔으니 우리 신앙자들도 자기가 넘어야할 3일기간을 잘 넘고나면 이와같이 하나님이 친히 원리에 의한 간섭을 해주시는 권내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도피하였음을 알게된 바로는 병차를 동원하여 이스라엘민족을 따라갔다. 이 소식을 안 이스라엘민족은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이고 뒤에는 바로의 추병차가 따르니 크게 소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출 14/5~10). 모세는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지팡이로 홍해를 쳐 갈라세움으로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고 추격하던 애급병차는 전부 수장되었으니 (출 14/21~23) 이것도 예수님을 중심한 신앙생활의 노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앙자가 사탄 품을 떠나 예수 품으로 들어올 때에는 모세가 바로궁중의 영화와 인연을 끊듯이 우리도 우리의 모든 환경과 인연을 끊어야 하지만 끊어버린 다음에도 사탄은 마치 바로가 병차로 이스라엘을 추적한 것같이 신앙자를 추격하여오는 것이다. 그러나 지팡이된 예수님으로 그를 칠 때 우리 앞에 홍해와 같이 가로놓인 고해는 평탄한 길로 갈라짐으로 갈길이 열리고 따라오던 사탄은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에 호렙산 반석 생수까지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무조건으로 주어서 먹었으니 (출 16/13) 이것도 다음 예수 오셔서 인간의 생명의 요소인 예수님의 살(만나) (요 6/51)과 피(메추라기)를 무조건으로 주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시험을 거치면 이스라엘민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무조건으로 주시듯이 우리에게도 무조건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이렇듯이 무조건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백성 앞에는 아말렉족속의 공격이 있었던 것과같이 예수님의 생명 소생의 요소를 받은 신앙자에게도 그러한 시험이 또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심이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아말렉을 멸하여 사탄의 공격을 승리하여 사탄 굴복 자격자가 된 후에는 또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시내 광야까지 인도하신 것같이 (민 14/14) 신앙자들도 사탄시험을 승리하여 사탄까지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 후에야 근본 자녀의 입장을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은사가 부여되는 것이다. 모세노정에서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한 낮(+)의 구름기둥은 다음에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할 예수(+)를 표시함이요 밤(-)의 불기둥은 성신(-)을 말한다.
이스라엘이 르비듬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에 모세는 여호수아를 시켜 출전케하고 자기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아론과 훌과 같이 산꼭대기에 섰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승리하였다. 모세의 손이 피곤하여 아론과 훌이 돌을 쌓고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저희가 좌우에서 그 손을 붙들어 해가 지도록 흔들리지 않케하였더니 여호수아가 칼로 아말렉왕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였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아닛시(나의 기)라 하고 가라대 「손을 들어 여호와의 보좌(기)를 대적함이 있으니 여호와 아말렉을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출 17/15~16)고 하셨다. 하나님을 대신한 인도자로 나선 모세가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이 품으신다는 뜻이요 아론과 훌이 두 손을 붙든 것은 하나님의 품에 품길 수 있도록 협조한다는 뜻이다. 이 사실도 예수 오신 이후의 섭리의 경로를 상징하신 것이다.
여호수아는 신앙자를 대표함이요 여호수아 앞에 있는 아말렉은 신앙자 앞에 있는 사탄세계를 표시하는 것이며 아론과 훌은 예수와 성신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섰는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멸하였다는 것은 예수님과 성신의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품에 품기울 수 있는 은총을 받고 있는 신앙자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신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예수 오셔서 우리 인간에게 무조건으로 사랑을 세워주셨으니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산 자로 하여금 원수 사탄과 대립케하여 그 자체는 다시는 원수와 합하지 않게하려하심이 그 목적이다. 후일에 제1차 하나님적 책임분담 섭리의 기대 위에 제2차 책임분담 사명자로 오시는 예수와 성신이 신앙자와 하나되어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복귀하여야 아담 해와로 인하여 못이루신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복귀섭리를 완성한다는 것을 모세를 중심한 아론과 훌 또 그 앞에서 역사한 여호수아로써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이렇듯이 하나님이 직접 품으심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은 이스라엘민족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새 언약을 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열방 중에서 너희로 나의 보배를 삼아 제사장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게하리라」(출 19/5~6)고 하셨으니 이 말씀도 다음 예수 오셔서 대제사장으로 서실 때에 그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다윗왕의 위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군림하여 공평과 의로움으로 영영세세토록 통치하실 약속을 (사 9/6~7) 모세로써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는 장로 70인을 거느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보이셨다(출 24/9).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상에 부르시사 석판에 기록한 십계명을 받도록 명하시었다.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타락되었으니 이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뜻이 모세에서 민족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게 되었으므로 여기에 십계명의 말씀을 주셔서 재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기간인 6일동안을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이 시내산 위를 덮었고 안식일에 해당하는 제7일에 여호와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었으니 산 위에 나타난 여호와의 광영의 형상이 이스라엘백성의 눈에 불꽃같이 보이더니 모세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 40주야를 금식하였다.(출 24/15~18) 모세에게 주신 이 계명의 말씀은 타락인간에게 처음으로 주시는 재창조의 말씀이다. 인간 재창조의 역사는 노아 홍수심판과 같이 사탄을 분립시킨 기대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심판 40수의 사탄 분립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가장 인내를 요하는 기간이었으나 이스라엘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하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이루어지는 때는 그만치 사탄의 역사도 큰 것이다. 가인 아벨의 헌제 시에도 사탄이 문 앞에서 그들을 침범할 틈만을 엿보고 있었고(창 4/7) 노아 홍수 때도 물 위를 왕래하는 까마귀같이 사탄은 노아의 가정에 무슨 침범할 조건이 있는가고 찾고 있다가 함이 타락행위를 하자 곧 침범하였고 아브라함 헌제시에도 대기하고 있던 사탄은 제물을 쪼개지 않을 때 곧 침범하였으니 이와같이 사탄의 태도는 항상 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선이자 사탄 일선임을 알아야 한다. 잘 믿는 성도들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선에서 항상 사탄과 싸워야하므로 고난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새로운 섭리의 역사를 시작할 때에도 사탄은 더욱 이스라엘백성의 불신과 불순종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민족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모세가 금식 기도하는 기간 지도자 모세를 잃었다고 소동하면서 아론을 사주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로다」(출 32/4)하며 그렇게까지 기사와 이적의 권능으로 나타나 보호하셨고 사랑으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들은 또다시 사탄 품으로 들어간 것이니 무릇 인간이라는 것은 사탄에게 이끌리게 되면 이와같이 교활해지고 배은망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렇게까지 애쓰시어 불러세우신 세례요한이 이 이스라엘민족과 같은 입장에 서게되었다함도 가히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은 지도자 모세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 자신이 지혜로 찾아 나아가야할 5%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않으면 아니될 기간이었다.
그러므로 그렇게도 기사와 이적과 교시로써 소상히 가르치시고 인도하신 여호와이시지만 이 기간만은 마치 아담 해와의 타락행위를 간섭 못하신 것같이 이 민족의 타락행위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지혜를 찾아 맞추어야할 책임을 못할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에게 벌을 주시게되었으니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지라 너는 잠잠하라 내가 진노하여 저희를 멸하고 너로 큰 족속이 되게하리라」(출 32/9)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 때에 모세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춤추는 백성들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 가진 두 석판을 던져 파하였으므로 (출 32/19) 이스라엘을 중심한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는 다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된 것이다. 말씀으로 받은 두 석판은 말씀완성의 실체로 창조된 아담과 해와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말씀을 다시 모세가 두 석판으로 찾았다는 것은 잃어버린 아담 해와를 다시 실체로 찾을 수 있다는 표시이니 다시 찾은 이 두 석판은 곧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말씀이 기록된 두 석판을 믿어 구원을 얻었지만 신약시대에는 두 석판의 실체로 오신 예수와 성신을 믿어야 사는 것이다. (참고 중생의 의의)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는 두 석판을 파했다는 것은 다음에 오실 예수와 성신의 역사도 이스라엘이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보내신 본래의 뜻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다시 40일을 금식함으로 준비한 두 석판에 다시 말씀을 받았으니 (출 34/4, 27~28) 이것은 예수 이후에 저를 믿는 성도들에 의하여 메시아를 다시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한 터 위에 말씀의 실체적 완성자이신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구원의 섭리를 하신다는 것을 예시하신 것이다.
두 석판을 복귀한 모세는 다시 그 광채도 복귀하여 그 얼굴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이 이미 우상을 만들어 사탄 품으로 들어갔던 조건이 있으므로 사탄은 항상 미련을 갖고 이 백성의 뒤를 따르게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백성은 모세를 반역하여 애급에서 나온 것을 한탄하게 되었다.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할 새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다면 좋을 번하였도다 너희는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인도하여 이 광야에 이르러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하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를 애급에서 나오게하여 이 악한 곳에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종자나 무화과나 포도나 석류가 다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2~5) 하고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할 때에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떠나 회막 내에 이르러 엎드리니 여화와의 광채가 저희에게 나타나 형 아론과 더불어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회중과 짐승들을 먹이라고 명하시었다(민 20/7~8). 모세는 명대로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두 번 쳐 물을 내어 먹였는데 여호와는 곧 이르기를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를 거룩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인도하여 내가 너희에게 준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민 20/12)고 모세의 실수로 인하여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다른 성구를 인용하면 「아론이 그 열조에게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라」(민 20/24)고 하셨고 또 「여호와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산에 올라가 내가 이스라엘자손에게 준 땅을 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이 조상에게로 돌아감과 같이 너도 돌아가리니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하매 물 가에서 저희 목전에 나를 거룩케할 것이어늘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함이라 이 물은 신광야에 있는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라」(민 27/12~14)고 기록한 것을 보면 므리바물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사실을 분명히 밝히었다.
그러면 이 실수는 무엇인가하면 한번 쳐야할 반석을 두 번 친 연고다. 반석을 두 번 친 행위가 왜 그다지도 중대한 범죄행위가 되었는가하는 것도 모세의 행사는 탕감복귀섭리의 전체적 표시로 된 중심역사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명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을 보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고 그리스도는 제2 아담으로 오신 분이시다(고전 15/45, 롬 5/14). 그러므로 반석은 제2의 아담을 상징하는 동시에 제1 아담도 표시한다.
그러면 어찌하여 아담된 반석을 한번 치는 것은 허락하셨는가하면 사탄은 반석된 아담을 쳐서 타락시켰기 때문에 하나님도 타락한 아담을 표시하는 반석을 한번 쳐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으므로 한번 치는 것은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모세가 치기 전 샘물 내지못하는 반석은 타락한 아담을 표시하는 것이요 이것을 하늘 편에서 한번 친 후의 샘물 나는 반석은 복귀한 아담 즉 제2 아담된 예수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반석을 두 번 쳤다는 것은 샘물 나는 반석을 또 한번 쳤다는 것이니 즉 생명수 샘물을 내는 반석으로 오신 복귀한 아담된 예수님을 다시 쳤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한 이 모세의 행동은 곧 다음 오실 예수님도 이스라엘이 불신의 입장에 서게 되면 그를 다시 칠 수 있다는 표시적 행동이 된 것이다. 이렇듯이 잃었던 반석을 다시 찾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한번 칠 것을 허락하신 것인데 한번 침으로 찾아진 반석을 다시 침으로써 다음에 반석의 실체로 오시는 예수님 앞에까지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허락한 바가 되어 아브라함의 제물실수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모세는 반석을 한번 쳐도 샘물이 나온다는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두 번 친 것은 이스라엘의 원망으로 인하여 그의 혈기로써 하나님의 뜻을 반하여 친 것이므로 모세가 친 행동이지만 결국 그것은 사탄이 친 것과 같은 결과가 되어버렸다.
이렇게되어 돌은 사탄이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스라엘이 불신의 입장에 서게 될 때 예수님은 이 돌을 찾으려고 광야로 나가신 것이다. 사탄은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돌은 찾지말고 돌로 떡이나 되게해 먹으라는 시험을 예수님에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받은 광야의 시험은 이와같이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볼 수 있는 몸으로 나타나신 분이므로 그리스도를 표시하는 석판은 하나님의 볼 수 있는 몸을 표시하는 것이요 석판의 뿌리되는 반석은 그리스도에게 현현된 하나님의 내적성상과 형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두 석판은 다시 찾을 수 있으나 석판의 뿌리되는 반석을 치는 행동은 하나님 자신을 침범하는 표시적 행동이 되어 만회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행동은 사탄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으로 남아진 것이다.
모세노정은 예수님의 표시적 노정이므로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반석을 쳐야할 입장에 놓여 반석을 두 번 치는 결과가 초래된 것같이 반석된 예수님도 이스라엘이 불신하면 사탄이 그를 쳐 십자가에 돌아간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의 원인은 모세노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행한 열 재앙을 비롯하여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하였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의 기아를 멈추었으며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갈길을 인도하신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상히 지도해주신 하나님이셨지만 모세가 반석을 치는 일에 관하여서만은 간섭치 않으셨으니 이것은 모세 자신이 지혜로 넘어야할 책임분담이었기 때문이다. 모세 자신이 이 5%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복귀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을 것이었으나 이제 모세가 이 책임분담을 완수치 못하여 사탄이 재침범케되니 400년 애급고역의 사탄분립 기대 위에서 이루어 나오던 이스라엘의 가나안 복귀노정에도 사탄이 재침범하고만 것이다(민 20/12). 그러므로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백성의 이러한 불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불뱀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하셨다」(민 21/6)고 말씀하셨으니 이 뱀은 해와를 타락시킨 옛 뱀(계 12/9)을 말한다. 아무리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라 하더라도 인간에게 사탄이 침범할 조건만 성립되면 사탄에게 내어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뱀을 보내어 백성을 물게하심이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본의는 아니지만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어있으므로 하나님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뱀으로 말미암아 죽었으나 모세의 말을 믿고 그가 장대 끝에 단 구리뱀을 바라본 사람은 누구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으니 이것도 역시 앞으로 예수께서 오실 때에 저를 믿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에는 다시 사탄뱀이 침범할 것이요 이 백성이 다시 살려면 십자가에 달린 하늘뱀된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이렇듯이 불순종의 백성들은 전부 광야에서 쓸어지고 애급에서 나온 사람 중에는 믿고 따른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후손을 인도해 가지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그런고로 이 사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믿고 순종하는 자만이 기업으로 받을 곳이라는 것을 표시하며 또 우리 이상천국도 믿고 따른 자만의 소유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에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은 사랑이상의 행복이 넘친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여 기업을 받게된 것은 가나안족속을 멸한 후에야 완성된 것이니 이것 역시 예수 오셔서 하늘나라를 건설함에도 그렇게 원수와 싸워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모세노정이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표시적노정이라 했으니 모세는 예수님의 전형이다(행 7/37). 모세는 그의 출생부터 벌써 예수님의 출생의 본보기로써 예시하신 것이다. 모세는 출생하자 바로왕의 손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그 모친이 그를 숨겨 3개월을 키운 후에야 바로궁중에 들어와 원수의 손에서도 완전히 성장한 것이다. 모세의 출생부터 그의 출애급노정 전체가 그러했지만 모세의 말로도 역시 예수님의 말로를 표시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심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복귀를 완성케 하기 위한 것이 예정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못하므로 모세와 그 백성은 전멸되어 영적으로만 복귀하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영육 아울러 실체로서 모세의 뜻을 계승하여 이스라엘의 후손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복귀했으니 이것도 다음 예수 오실 때 될 일을 예고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심은 모세와 같이 예수로 하여금 전인류를 영육 아울러 복귀케함으로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수코자함이 예정이었으나 이스라엘백성들이 저를 믿지 아니하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가시어 모세와 같이 영적 복귀만을 완수하고 육적 복귀사명은 다하지 못하게 되므로 마치 모세의 뜻을 여호수아와 갈렙이 계승하여 가나안복귀를 완성한 것같이 예수께서도 재림하셔서 초림시의 뜻을 신부와 더불어 계승하여 영육구원을 완수함으로 후손된 인류의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수한다는 것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모세의 뜻을 계승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예수님의 뜻을 계승완성할 재림주와 신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노정을 보아서도 아무리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라할지라도 그 뜻을 받드는 인간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정사실이 아니라는 것과 재림 예수는 육신 쓰고 땅으로 탄생하셔야된다는 논거가 확실하여지는 것이다.
제2절 사사시대(400년)
이스라엘민족이 애급에서 400년간 고역하여 민족적으로 심판 40일 기대를 탕감복귀하였으므로 이 기대 위에 선 모세는 노아로부터 400년 기간을 탕감복귀하여 개인적인 40일 탕감복귀기대 위에 선 아브라함과 동일한 입장에 처하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애급고역 400년의 재탕감기간이 남아진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불신과 모세 반석 2타로 인하여 사사 400년의 재탕감기간이 또 남아지게 된 것이다.
복귀기대섭리시대의 2000년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시대가 복귀섭리시대의 2000년 기간이므로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600년을 탕감복귀키 위하여 애급고역시대가 있었으므로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기간을 탕감복귀키 위하여 사사400년 기간이 오게되는 것이다.
모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민족들이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여 그들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였다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들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 곧 성전을 건설하였을 것이었으며 이와같이 조성된 믿음의 기대 위에 메시아는 오셔서 창조이상의 세계는 그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의 뜻이 이삭을 거쳐 야곱에서 이루어져 요셉으로부터 애급고역시대가 시작된 것과 같이 모세로부터 이루려던 뜻이 좌절되었으므로 이 뜻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거쳐 웃니엘로부터 사사시대는 시작되는 것이다.
가나안복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모세를 대신하여 나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너는 이제 일어나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요단강을 건너 내가 네 조상에게 허락한 땅을 얻으라는 격려로써 인도하시었다(수 10장).
마치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 앞에 홍해가 갈라지듯이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 앞에 요단강은 갈라졌다. 이 때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이스라엘자손 중 매지파에서 한사람씩 예비한 12인을 불러 매 지파를 대신하는 돌 하나씩을 세우게 하시고 이것은 언약궤 앞에서 요단강이 갈라진 것을 후손에게 알리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수 4/1~9).
여기에 언약궤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말씀이요 돌은 그리스도요(고전 10/4) 강수는 타락세상(계 17/15)을 이름이니 강수가 갈라졌다는 것은 심판에 의하여 죄악세상이 산양과 면양으로 갈리운다는 뜻이요 이러한 기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돌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행사로 앞날의 섭리를 암시한 것으로서 12지파를 중심하고 돌로써 성전을 건설할 것을 보여줌이요 따라서 실체성전된 예수께서 오셔서 될 일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언약궤)앞에 전개될 심판은(강수가 갈라짐) 12지파를 대신하여 세운 12제자를 중심한 그리스도(돌)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후손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선 이스라엘민족들은 성문을 견고하게 닫고 있는 여리고의 사탄성벽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이제는 40년이나 내리시던 만나도 그쳤으므로 인간의 땀으로 된 곡식으로 생활해야될 것이며 최후의 관문을 돌기 위하여는 인간으로서 할 책임을 다해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4만의 병사가 선두에 진군하고 그 뒤를 따라 제사장 7인이 나팔을 불면서 행진하고 그 뒤에 언약궤가 따르고 최후선에는 이스라엘 전군이 행진하였다(수 6/1~9).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하루에 한번씩 매일 나팔을 불면서 6일인 성을 돌아도 아무 변동이 없었다.
이스라엘민족은 이제 끝까지 믿고 복종해야할 입장에 선 것이다. 6일째 창조된 인간을 사탄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6수는 잃어버린 불길수다.
6일을 찾아야겠기에 6000년을 걸려 여기에 여섯 번이나 돌았으니 6수를 찾았으므로 7일째 되는 날 나팔 부는 7인의 제사장을 위시한 이스라엘민족이 성벽을 7회를 돌면서 7회의 나팔소리를 끝내자 「부르라 여호와 너희들에게 이 성을 주셨나니라」고 부르는 호령에 의하여 전 여리고성은 붕괴된 것이다. 이 기사는 하늘과 땅 사이에 막혔던 장벽이 무너졌음을 표시하는 기사이므로 이 성벽은 다시 쌓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시 건축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 정초할 때에 장자가 죽고 입문할 때에는 그 차자가 죽으리라고하셨다(수 6/26).
제사장의 나팔소리에 여리고성이 무너졌다함은 끝날에 천사장의 나팔소리에 사탄세계가 멸망한다는 뜻이요 천사장의 나팔소리는 끝날에 선포되는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표시하는 것이니 나팔소리로 여리고성이 붕괴된다는 것은 말씀심판에 의하여 사탄세계가 괴멸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끝날의 불심판은 곧 말씀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전편 제3장 참조)
이와같이 파죽지세로 사탄세계를 멸하는 여호수아는 벳호론 싸움에서 19왕을 멸하고 메롬격전에서 12왕을 멸하였으니 (수 10~12) 이것도 끝날에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실 때에 이방의 왕들이 전부 폐하게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민족은 점령한 땅의 만물할례를 행하고 이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였으니 이것도 끝날에 이루어질 것을 그대로 부여주신 것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갈렙을 중심하고 이스라엘민족은 가나안의 잔족을 토평하기에 힘썼다. 갈렙이 드빔을 공격할 때에 그 딸 악사를 현상으로 걸어놓고 독전하였는데 웃니엘이 역전하여 득승하매 악사를 취하여 갈렙의 사위가 되었으니 이가 첫 사사가 된 것이다.
애급을 나선 이스라엘민족은 홍해를 분기점으로 하여 사탄과는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불신은 또다시 사탄 침입을 초래하여 사탄은 이스라엘민족을 따라서 가나안 복지까지 들어온 것이다.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가나안땅에 있는 이방인들을 전멸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일 너희가 그 땅의 주민을 축출하지 않으면 잔존한 자가 반드시 너희 눈 가운데 가시와 옆을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할 것이요 또 내가 저에게 행하려한 것과 같이 너희에게도 행하리라」(민 33/55)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그들을 용납하였으므로 사탄의 무대는 점점 더 넓어져서 이 싸움은 사사를 중심하고 400년간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하여금 애급에서 나오게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에 들어가게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약속을 영원히 위반하지 아니하리니 오직 너희는 이 땅 거민으로 더불어 약속을 세우지말며 그 제단을 헐라하나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그런고로 내가 전에 말하기를 반드시 이 백성을 너희 앞에서 축출하지 아니하리니 저희가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되며 저희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도다」(삿 2/1~3)라고 말씀하시어 그들의 불신을 책하셨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자손이 남겨준 가나안 헷 아모리 브레스 히위 여브스족과 동주할 새 그들로부터 악습관이 전염되어 바알과 아세라우상을 섬기며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순수한 선민으로서의 신앙과 혈통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인들에게 붙여 다시 애급고역과 같은 탕감기간을 주신 것이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사가 나와 마치 모세와 같이 그들을 인도해내는 것이다. 이런 것을 반복하는 약 400년 기간을 사사시대라고 한다.
야곱을 중심하고 12자식이 있고 모세를 중심하고 12지파가 있고 성전을 중심하고 12소선지가 있고 예수님을 중심하고 12제자가 있듯이 사사로 삼손을 중심하고 12사사가 있어야할 것인데 삼손으로 종결되지 못한 뜻은 다시 엘리와 사무엘로 연장되어 결국은 15사사가 되었으니 마치 아브라함 뜻이 이삭과 야곱으로 모세의 뜻이 여호수아와 갈렙으로 사울왕의 성전건설의 뜻이 다윗왕과 솔로몬왕으로 아담의 뜻이 예수와 재림주로 연장된 것과 같다.
이와같이 삼손은 12사사의 결실로 출생했기 때문에 그는 야곱이나 모세나 솔로몬왕이나 예수와같이 모태로부터 성별되었으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처에게 나타나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마땅히 너는 포도주와 독주를 삼가 마시지말다가 아들을 낳거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말라 이 아이는 모태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자니 장차 「이스라엘」을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삿 13장 2~5)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마치 아담이 해와에게 꼬임을 받듯이 삼손이 그 처의 꾀임에 빠져 머리를 깎이우고 눈알이 뽑히워 12사사의 목적을 완수해야될 택함을 받은 삼손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제3절 통일왕국시대(120년)
사울왕조와 솔로몬왕조로써 복귀섭리의 한 기간을 담당한 시대가 통일왕국시대다.
사사시대의 말엽 삼손이후는 정치가 점차로 정돈되었는데 특히 사무엘의 지혜로운 통치는 이스라엘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게하였다. 사무엘이 연로함에 이스라엘민족이 사무엘에게 청하여 왕을 세워 자기들을 다스리게하여주기를 원하니 사무엘이 이 뜻을 여호와께 고하여 명을 받고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 사람이 이스라엘민족의 초대의 왕이 되었다(삼상 8/19~22, 10/1~24).
사울은 하나님이 특히 불러 기름부은 왕이었으나 그는 번번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않았다. 특히 아말렉 사람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큰 승리를 얻었을 때 하나님은 당시의 제사장이요 또한 선지자인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을 쳐서 그의 전 소유를 몰수하고 남녀노유와 우양태려를 용서없이 전멸하라고 하셨으나 사울왕은 포로된 아말렉왕 아각도 죽이지 않고 우양의 살찐 놈은 아껴 감추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사무엘에게 임하여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 왕삼은 것을 후회하셨다고 하였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며 거역하는 것이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이 사신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으니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하는 고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거절하여 왕이 되지못하게 하셨다(삼상 15/9~23)고 말씀하셨다. 사울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의 용장 다윗을 죽이려고 무쌍의 노력을 하였고 다윗으로 인하여 대제사장과 제제사장을 살해하였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거역하였으므로 사울왕은 드디어 불레셋 사람들의 살에 맞고 발금자살하였으니 재위 40년에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뜻을 이루지 못하고 향수 70년을 일기로 가련한 생애를 마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울왕을 세우신 원리적 의의는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애급고역시대를 탕감복귀하는 기간이 사사시대요 애급고역시대를 거쳐 이스라엘민족 광야40년의 사탄침범기간을 하늘 편으로 찾아 세우려는 기간이 사사시대를 거친 후의 사울왕 40년 기간이다.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가 되었다면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광야40년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을 하늘 편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사울왕 40년 기간이 있어야할 것인데 사울왕이 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이 기간은 다시 사탄에게 내어준 결과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 하여 믿음복귀의 뜻이 이삭을 거쳐 야곱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사울왕의 반역행위로 인하여 성전이상복귀의 뜻은 다윗왕을 거쳐 솔로몬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가 가나안복지로 들어와 성전을 건설하려던 뜻은 그의 불신으로 인하여 사사시대와 통일왕국시대를 거쳐서야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왕국시대는 광야 40년, 시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있어야할 기간이므로 탕감복귀의 뜻을 중심하고 생각하면 통일왕국 120년은 광야40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사울 왕 40년을 재탕감키 위한 사명자로서 다윗왕은 부름받았던 것이다.
사울왕이 아말렉 싸움에서 불순종한 후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시켜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의 계자 다윗에게 왕으로서의 기름을 붓게하셨다.
다윗은 쌍모도 형연한 홍안의 미남으로 유시로부터 담략과 용맹이 비범하고 적막한 광야의 목자생활에서 길리운 경건한 심정에서 울어나오는 시상과 낙상이 넘치는 호협남아였다.
그 유명한 시편은 그의 천품의 묘사요 성서의 금과옥조인 것이다. 다윗이 자기는 백향목궁에 거하나 하나님의 법궤는 장막에 있음을 황송하게 생각하여 금은동철과 각종 재목을 예비해놓고 성전을 건축할 뜻을 선지자 나단에게 상의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많은 전쟁에 유혈이 심하였다 하여 이것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네 살 날이 다 차서 네가 너의 조상들로 더불어 같이 잘 때에 네게서 나서 네 뒤를 이을 자손을 내가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니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지을 것이다」삼하 7/1~1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같이 성전건설의 뜻은 그의 아들 솔로몬왕에게로 연장된 것이다.
하나님이 다윗왕에게 약속하신대로 솔로몬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더불어 즉위의 대전을 행하였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정교의 숙청을 을 단행하고 신내각을 조직하여 국정에 내우외환을 없이 함으로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황금으로 된 방패가 500개요 그의 사용하는 모든 기구는 금과 은으로 되었고 정사당을 세우고 보좌를 만들되 6층대요 그 위에 놓인 침상은 상아로 꾸미고 금으로 쌌으며 6층대 좌우에 있는 12사자와 침상 좌우에 있는 사자 둘은 금으로 만들었으니 이로써 솔로몬이 축복받은 부귀의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3왕조에 걸친 120년 기간은 광야 40년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있었는데 복귀기대섭리시대에 있어서의 어떠한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 시대가 있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기간을 탕감복귀키 위하여 애급고역시대가 있었고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기간을 탕감복귀키 위하여 사사 400년 시대가 있었고 다음엔 주전 1928년에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난 후 이삭을 거쳐 주전 1811년에 야곱이 떡과 팥죽으로 에서에게서 장자의 기업을 빼앗을 때까지의 약 120년 기간이 있었는데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통일왕국시대가 생기게된 것이다. 사울왕은 아브라함을 다윗왕은 이삭을 솔로몬왕은 야곱을 상징하며 아브라함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뜻이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이루어진 것같이 사울왕 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성전건설의 뜻이 다윗왕을 거치어 솔로몬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함은 이미 상술한 바와 같다.
I .성전이상을 중심한 복귀섭리
솔로몬왕은 드디어 이스라엘자손이 애급땅에서 나온지 480년만에 성전건축을 시작하였으니 (왕상 6/1) 이것은 그들이 애급에서 떠난 후 광야 40년과 사사 400년과 뜻으로 본 통일왕국시대 40년을 경과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노아로부터 세우려던 믿음의 조상의 뜻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이루어진 것같이 모세로써 이루려던 성전 건설의 이상은 사울왕과 다윗왕을 거쳐 솔로몬왕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이것도 사위기대를 복귀키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함이 그 목적이다. 왕을 세우시어 성전을 건설하심은 다음에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키 위함이다.
사울왕을 세우심은 제1차 왕격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며 사울왕에서 이루려던 성전이상을 완성한 솔로몬왕은 아담이 이루려던 창조이상을 완성할 왕으로 오실 재림주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다윗왕은 예수님의 상징자이므로 예수님은 다윗왕의 위를 가지고 오시는 평강의 왕이라하였고(사 9/6~7) 「볼지어다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하라 저가 크게되고 지극히 높은 자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주시리니 세세로 야곱의 집에 왕이 되사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고 하셨다.
다윗이 30세에 왕이 된 것같이 예수님도 30세에 만왕의 왕으로 출발했으며 다윗왕이 성전을 건설하려다가 건설할 수 있는 모든 준비만 하여놓고 죽은 것같이 예수님도 창조이상을 완성하려다가 다음에 완성할 수 있는 영적구원의 기대만을 조성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재림주는 솔로몬왕격으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영광의 왕으로 오시는 분이시다. 성전을 건설한 이후 솔로몬왕이 또 타락되었으므로 성전이상의 기대에는 또 사탄이 침범하게 되어 다시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사탄재분립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 오실 때까지는 이 성전이상을 복귀하려는 섭리노정이 공식적인 프로젝트에 의하여 전개되는 것이다.
II .복귀섭리로 본 성막의 의의
시내산 40일 금식 기도기간에 모세는 계명을 받음과 동시에 성막 건설의 명을 받았다(출 25/1~). 이것은 장차 실체성전인 예수께서 오실 것을 상징역사로써 보여주신 것이요 솔로몬이 그 기대 위에 성전을 지은 것은 오실 예수님의 형상역사로써 보여주신 것이고 이 성전역사의 열매로 오신 분이 바로 실체성전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기를 성전으로 비유하셨다(요 2/21). 성전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와 보통 제사 때에 들어가는 성소의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지성소는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영인체를 상징함이고 성소는 예수님의 몸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지성소는 하늘 무형세계를 성소는 지상 실체세계를 상징한 것이므로 성소와 지성소가 일체를 이룬 성전은 하늘과 땅의 일체 이상을 완성한 존재를 나타나신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는데 그 위에는 속죄소도 덮었고 속죄소 좌우에는 두 그룹을 금으로 쳐 만들어 속죄소를 덮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두 석판을 법궤 속에 넣으면 두 그룹 사이 속죄소에서 여호와 나타나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 모든 명령을 교시하시겠다고 하셨다(출 25/16~22).
이 법궤도 장차 오실 예수와 성신을 중심한 복귀섭리와 모형을 보여주신 것이니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은 복귀한 아담 해와 격으로 오신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는 것이며 성신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게되면 거기에 속죄가 성립되고 하나님은 속죄한 곳 즉 속죄소에 나타나시므로 인간 시조의 타락 후에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길을 막았던 그룹을(창 3/24) 좌우로 갈라헤치고 생명나무(예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즉 복귀 섭리를 완성함으로써 하나님은 자기의 몸으로 나타나신 예수와 성신을 통하여 각 사람의 죄를 속하신 후에 성전된 각 사람의 마음에까지 찾아와 계시고자 하시는 뜻을 알려주시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이러한 기대를 조성하시는 존재로 오실 것과 누구든지 성전된 예수님과 일체를 이루면 그도 또한 하나님을 모시어 하늘(지성소)과 땅(성소)의 일체적 이상을 완성한 본성의 성전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둘로 갈라졌다함은(마 27/51) 지성소와 성소가 하나됨으로써 하늘과 땅이 하나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니 이것은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화동의 중심으로서 성전이상을 완성한 실체 성전으로 오셨음을 형상 성전으로써 보여주신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아말렉을 쳐 승리한 후에야 성전 건설의 시작을 명하셨으니 이것은 후일의 신앙자들도 원수 사탄을 승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 후에야 각자가 성전으로서 설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고전 3/16).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나무된 예수님에게 접붙임으로써 각자도 생명나무가 되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성전으로 완성되는 것이 최후의 목적인 것이다.
제4절 남북왕조 분립시대(400년)
이와같이 모세에게 이루려하셨던 성전건설은 솔로몬 왕에서 이루어졌으므로 하나님적 책임분담의 사명은 제1단계를 짓게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민족에게 남아진 유일한 과업은 성전을 중심하고 그들이 하나되는 것이다. 성전이 요구하는 뜻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뜻대로 사는 것이 이스라엘 전생명의 기본이 되며 그 이상완성의 첩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백성이 성전의 뜻을 높이며 그것을 중심하고 하나되어 각자가 분성전으로 세워져 다음에 실체성전된 예수께서 오시면 그와 접하여 한 몸을 이룸으로 각자도 실체성전으로 조성되어 메시아의 이상을 완수토록 하려는 것이 구약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 반면으로 사탄은 기묘한 수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수를 뻗쳐 그들을 불신과 불순의 길로 몰아넣어 그들의 분열을 조장시킨 것이다. 인간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음란의 신을 봉사하는 방향으로 흘러 성전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이 정경을 보시는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이야 누가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인가.
성전이상을 완수하기 위하여 부름받은 솔로몬왕이었으나 일찍이 역사상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강을 이루게되니 다시 타락의 일로를 걷게된 것이다. 그가 애급왕 바로의 공주 외에도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등으로부터 여인들을 취하니 왕비가 700이요 빈궁이 300이었다. 솔로몬 왕이 그들에게 유혹되어 시몬의 신 암몬의 신 모압의 신 등을 따라 그들의 신당을 짓고 이에 분향하였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은 진노하여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아사 네 신하에게 주리라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왕상 11/1~13)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솔로몬왕국은 10지파와 2지파로 분열되어 10지파는 애급에 망명해있던 여로보암을 세워 북조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하고 2지파는 솔로몬왕의 아들 르호보암을 세워 남조 유대왕국을 건설하였다. 즉 예언의 말씀대로 솔로몬 왕국을 열분하여 하나는 신하에 내어주어 가인적인 왕국을 세웠다.
그러므로 북조는 260년 간에 19왕이 있었고 살륙에 의하여 왕실이 9차나 변혁되었고 열왕중에는 한사람도 선한 왕이 없어 어느 왕이나 거의 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는 자란 이름을 마치 익호와 같이 받았던 것이다.
이 열왕들은 국민을 유혹하여 우상을 숭배케 하였으므로 전국민은 사도로 흘러 그의 비참한 상태는 어느 사기에서도 그 유례를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남조는 솔로몬왕의 아들 르호보암으로부터 시드기아에 이르기까지 다윗으로부터 정통1계이며 394년 간에 긍하여 20인의 왕중에는 선군이 많이 났으며 그 중에도 특히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등 4인의 유명한 선군이 있었다. 마치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가인과 아벨로 분립하였고 이삭에게 사탄의 미련이 남아있으므로 에서와 야곱으로 갈라서 사탄을 분립시키려고 하셨던 것과 같이 솔로몬왕이 범죄하므로 이 왕국을 남북으로 갈라세웠으니 이제는 가인의 입장에 있는 북조 이스라엘은 아벨의 입장에 있는 남조 유대에 굴복하지 않으면 장자기업을 복귀한 에서와 야곱의 입장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대로부터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제단이 갈라지는 이적을 보여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듣지않고 도리어 그를 잡아죽이려하였고(왕상 13장) 엘리야와 같은 선지를 보내어 제단에 불을 내리우며 850의 바알선지자를 멸하여 그들을 회개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그를 체포하여 살해하려 하였고 (왕상 18/19~40) 엘니사 요나 호세아같은 선지자들도 보내었으며 유대의 아모스같은 선지도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중심지인 벳엘로 보내어 목숨을 내어놓고 전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을 중심한 전국민이 그들을 바로의 강폭한 손에서 구출하사 가나안 복지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잊고 이방인의 규례를 따라 우상들에게 분향하며 그를 숭배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지 않고 선지자들을 주시어 권고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금송아지 일월성신 아세라 바알을 여전히 숭배하고 자녀를 분헌하며 사술과 복술을 일삼아 회개치 아니하므로 하나님은 그를 진노하시어 종시 앗수르에 포로로 내어주어 이방인과 교혼까지 하게되니 그들은 영원히 선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왕하 17/17~23). 이와같이 북조 이스라엘은 야곱에게 굴복한 에서의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아벨을 죽인 가인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남조유대도 요시야왕 이후에는 악한 왕들이 속출하여 북조의 악감화를 받아 우상숭배에 빠지게되니 남조 역시 북조와 같은 노정을 취하여 바벨론에 포로를 당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남조유대도 장자기업을 복귀한 야곱의 입장에 서지못하고 가인에게 살해된 아벨의 입장에 서게되어 성전이상을 완수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다시 이것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그들은 사탄세계인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가서 사탄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남북왕조 분립시대가 오게되는 것은 솔로몬의 타죄에 연유한 것이지만 또 한편 이 시대는 복귀기대 섭리시대의 어떠한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있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후 야곱이 팥죽과 떡으로 에서에게서 장자기업을 빼앗을 때까지 120년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통일왕국시대 120년 기간이 있었다. 이삭에서 사탄의 미련을 청산키 위하여 야곱이 에서로부터 장자기업을 빼앗은 후 에서와 야곱이 서로 분리되어 40년 간을 싸우다가 드디어 야곱은 1대복귀의 하늘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란 광야로 출발하였으므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솔로몬왕조가 400년 동안 남북조로 분리되어 서로 싸우는 남북왕조 분립시대가 오게된 것이다.
다음으로 4대선지와 12소선지가 이 시대에 오게되는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사위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탕감복귀섭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상술한 바와같다. 그러므로 아담가정도 아담과 그 세 자식을 세워 사위중심으로 역사하셨고 노아를 비롯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렇게 사위중심이요 성전이상을 완수하시는 것도 모세를 비롯하여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 이렇게 사위중심으로써 이루려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사위중심으로 이루려하셨던 성전이상이 왕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 뜻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4대선지가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중심한 3제자로써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모든 구원의 역사를 일으킨 원인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12소선지가 오지않으면 아니될 원리적 근거를 알아야할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0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노아로부터 10대를 경과하여 아브라함을 찾았으나 아브라함이 제물실수로 인하여 이삭 야곱으로 연장되어 12대가 된 것이다.
그 제물실수는 12대를 사탄에게 내어주게하였으므로 이 12대는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야곱의 12자식이 나오게하였다. 이제 12지파를 중심한 성전이상의 모세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삼손을 중심한 12사사가 있었으며 이 뜻이 다시 솔로몬 왕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 성전이상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12소선지가 나와서 사탄을 분립시켜 우상숭배를 타파하려한 것이다.
제5절 이스라엘민족 포로시대(70년)
위에서도 이미 상술한 바이지만 아담으로 침입된 사탄을 분립키 위하여 가인 아벨로 갈라세우고 역사하신 것같이 솔로몬왕의 타락행위로 말미암아 침입된 사탄을 분립키 위하여 남조와 북조를 갈라 세우고 모든 선지들을 보내시어 예언과 경고로써 남조를 하나님의 뜻가운데 세워놓고 북조는 남조의 뜻을 따르라고 권고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지않으면 가인과 아벨의 본연의 입장을 복귀한 에서와 야곱의 민족적인 입장을 탕감복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조의 열왕은 모두 우상숭배로써 멸망하여 선민으로서의 자취를 완전히 감추어 버렸고 따라서 남조 유대로 요시야왕의 므깃도전에서 죽은 후의 열왕들은 모두 혼암하여 우상숭배에 더러워지고 인민들도 공공연하게 범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와같이 솔로몬왕의 타죄로 인하여 이루어 지지않은 성전이상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남북왕조 분립시대의 400년 간의 섭리도 또한 사탄에게 내어주게 되었다.
솔로몬왕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그 나라는 열분하였지만 다윗과 이스라엘선민을 위하여 한 지파를 남겨두시마고 하신 약속에 의하여 세워진 이 남조유대도 다시 사탄세계에로 내어주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이와같이 유대의 불신으로 인하여 성전은 파괴되고 유대는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가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에레미아는 담대하게 예루살렘의 함몰과 파멸은 면치못할 것이니 속히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권고하였으니 이것은 새로운 탕감복귀섭리시대의 노정을 걷지 않을 수 없는 이스라엘민족의 운명을 예언한 말씀이다.
그러나 예레미아는 도리어 국적으로 몰리어 투옥을 당하게까지 된 것이었다(렘 37/1~15). 이와같이 유대인들은 기원전 605년에 제1회 포로로서 여호야김왕을 비롯하여 다니엘과 기타 왕족과 귀인의 자질들이 잡혀갔으며 성전기명도 노략하여갔다. 제2회 포로로서는 기원전 604년에 여호야김왕을 비롯하여 태후와 정부대신과 방백과 관리와 용사 7000과 공장 1000 등을 포로로 잡아갔고 제3차 포로로서 시드기아왕을 체포하여 눈알을 뽑아 바벨론으로 압송하였고 바벨론 군대로써 예루살렘성을 파훼하고 성전을 위시하여 많은 건물을 소각하고 귀족과 청년과 공장들을 전부 압송하였으니 이 때가 기원절 593년이었다.
이와같이 솔로몬왕에 의하여 건설된 성전이 무너졌으므로 성전복귀를 위한 재탕감기간으로 전에 이스라엘민족 앞에 있었던 애급고역시대와 같은 포로시대가 남아지게된 것이다.
또 한편 이 시대는 복귀기대섭리시대에 있어서의 어떠한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시대인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야곱이 에서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빼앗은 후 하란 광야로 출발할 때까지 에서와 싸우던 40년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남북왕조 분립시대 400년이 있었다.
그러므로 야곱이 광야로 간 후 라반이 집에서 레아를 취하게 되는 것으로 사탄상징자인 라반으 요구를 채우기 위하여 고역하게 된 7년기간을 탕감복귀하는 70년 포로기간이 복귀섭리노정에 남아지게된 것이다.
그 다음에 야곱은 라헬을 취하고 자녀를 번식하여 재물을 취하여 가나안으로 돌아오기 위한 준비를 라반의 집에서 13년간을 고역하고 14년만에야 사위기대를 조성키 위한 노아 가정과 같이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가정을 이루어 1대 가나안복귀 완성자로서 가나안으로 돌아온(창 31/41) 기간이 있었으므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여 성전복귀의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키 위한 140년 간의 귀환시대가 이스라엘민족 앞에 남아지게된 것이다.
제6절 이스라엘민족 귀환시대(140년)
선지자 하박국은 타락한 예루살렘이 갈대아인에게 정복 당할 것을 예고하는 동시에(합 1/6~11)의 갈대아인도 미구에 멸망할 것을 예언한 것이다(합 2/8).
이와같이 이스라엘민족으로 하여금 원리적인 탕감노정을 걷게하기 위하여 그들을 바벨론에 내어주었지만 이 바벨론도 파사와 고레스왕에게 멸망하여 이스라엘민족의 해방의 길은 열리게 되었으니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바벨론과 갈대아인의 땅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라 너희는 열방중에 광고하라 공포하라 기를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여 므로닥이 부서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서진다 하라 이는 한 나라가 북방에서 나와서 그를 쳐서 그 땅으로 황폐하게하며 그 중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함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그와함께 유다 자손들이 돌아오되······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앗수르왕을 벌한 것같이 바벨론왕과 그 땅을 벌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그 목장으로 돌아오게 하리니······」(렘 50/1~20) 라고 하신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와같이 파사왕 고레스는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고국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유대인은 자유로 귀환하여 성전을 건축할 것을 허락하였으며 원치않는 유대인은 금은을 기뻐 헌납하여 성전건축의 경비에 충용하게 하였으며 왕궁사고에 명하여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에서 약취한 성전기명 전부를 유대 방백에게 교부하였다.
이스라엘민족들은 바벨론에 의하여 폐허된 성전을 모세의 율법에 비추어 신축하니 이것이 제2성전이었다. 이와같이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사 44/28)고 하신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진 것이다. 포로를 당할 때도 3차에 걸쳐서 하였지만 귀환할 때도 3차에 걸쳐 귀환하였다.
귀환한 유대인들도 범죄를 행하므로 성전이 준공될 때까지 원수의 모략과 방해는 쉬지않아 일시는 절망 상태에까지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는 인민의 범죄상태를 조사하여 누구든지 이방인을 취하여 자녀를 생산한 자는 그 여인과 그 자녀를 축출하였고 기원전 445년 느헤미아가 제3차 귀환의 유대인을 영솔하고 귀국하여 방백이 되고 성을 수축한 후에는 모든 규율을 세우고 성전의 뜻을 높이며 7월 24일에는 전이스라엘이 모여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먼지를 쓰고 매일 3시간의 율법 강의를 들으며 각자의 죄와 열조의 죄를 자복하며 아브라함을 소명하신 이후 때를 따라 이적과 기사로서 풍성하신 은혜를 베푸셨으나 선조들이 완고하고 우매하여 범죄하였으므로 이방의 열왕들에게 붙이셨다가 또다시 주의 자비하심으로 구출하신 지금에도 이방인과 잡혼함으로 범죄하였음을 회개하고 방백과 레위인과 제사장이 날인하여 굳은 언약을 세웠으니 「······내가 앗수르왕을 벌한 것같이 바벨론왕과 그 땅을 벌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그 목장으로 돌아오게 하리니······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구할 것임이니라」(렘 50/18~20)고 하신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민족들은 솔로몬왕이 성전을 건설한 때를 복귀한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전절에서 이미 논술한 바이지만 이스라엘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70년 기간은 사탄 세계인 바벨론의 뜻에 응하기 위한 시대였으므로 이것은 야곱이 라반의 뜻에 응하여 레아를 취하기 위한 7년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기간이요 다음 귀환시대 140년간은 이스라엘민족이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한 성전건설을 목적하고 나아가던 시대이므로 이 시대는 야곱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의 뜻을 세우기 위한 1대 가나안 복귀를 목적하고 라헬과 재물을 취하던 14년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시대인 것이다.
제7절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400년)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다시 찾아세우기 위하여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고역한 후 재물을 취하고 택한 가정을 이루어 21년만에 다시 가나안으로 귀환함으로 1대가나안 복귀를 완성한 것같이 솔로몬왕의 타죄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성전이상을 복귀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야곱과 같은 입장에서 바벨론에 포로되었다가 210년만에 재물을 취하여가지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므로 성전의 재건을 완성하였다함은 이미 상술한 바와같다.
이제 1대가나안 복귀를 완성한 야곱 가정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이후 애급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40년 준비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시대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앞에 남아졌으니 이 시대가 곧 메시아 강림준비시대의 400년 기간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있어서는 마치 야곱 가정이 요셉을 잃어버린 후 그를 찾기 위하여 갖은 파란과 고난을 당하였듯이 유대인들은 사탄세계에 속방을 당하면서 잃어버린 아담대신 후아담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기 위하여 갖은 파란과 고난의 노정을 취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처음에는 파사에 속방되었고 (397~333 BC) 다음에는 헬라에(333~320 BC) 다음에는 애급에 (320~200 BC) 다음에는 수리아 (200~165 BC)에 속방되었고 다음에는 마카피어스 왕국을 건설하였다가 (165~32 BC) 나중에는 나마 (63 BC~)에 속방되어 유대의 역사는 1대비극으로 막 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애급 고역시대를 거친 후에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를 완수해야할 것이었던 것과 같이 유대인들도 이 눈물겨운 역사를 거친 후에 메시아를 맞아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수해야할 역사적 사명을 가졌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말라기선지의 명백한 예언에 의한 메시아의 강림이었다. 선지자 말라기는 기원전 428년대의 인물로서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그리운 고향을 찾기는 하였지만 폐허를 찾아온 그들은 황막한 광야에 선 것같았다.
양곡의 궁핍으로 인하여 인민들의 의기는 소침되어 하나님께 향하는 열심은 식어 버렸고 의심의 암운은 다시 그들을 덮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헛된 일이요 그의 명령을 준수한 대로 유익함이 없다고 생각하게되었으며 불평 불만과 의심과 자포자기의 번뇌는 제사장 등 지도층에게까지도 엄습하여 성전봉사도 만홀히 여기어 멸시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었다.
이러한 암흑시대에 선지자 말라기는 분기하여 두려운 심판이 임할 것과 메시아가 강림하실 것을 예언하면서(말 4/1~6) 인민들의 종교적 정열을 회복케한 것이다. 말라기는 메시아의 강림 전에 엘리야가 재림한다고 명시하여(말 4/5) 메시아 강림의 한계를 지었기 때문에 그 후에는 선지자도 없이 오로지 성경에만 의지하여 엘리야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사탄세계와 싸우며 나아가던 시대다.
인간 시조가 타락된 후 사위기대를 위한 40일을 복귀하려는 섭리는 사탄의 침범에 의하여 반복을 거듭하여 내려왔으나 그 40일 복귀의 기대는 한번도 조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사위기대를 반드시 조성해야되므로 과거에 복귀섭리의 중심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부름받았던 사람들이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그 모든 사위기대를 동시에 하늘 편으로 찾아 세워야한다.
그러면 이 시대에 있어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시대적인 배경은 어떻게 조성되어 있었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로마제국의 발흥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탄생 당시의 로마의 정치적 판도는 지중해를 둘러싼 원형의 광대한 범위를 포함하고 있었고 사통팔달한 도로는 교통되어 편을 주었으며 문화적으로는 당시대에 가장 완비된 헬라어를 중심하고 모든 문명국가의 문화를 통일소화하였으므로 그리스도를 중심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중심한 로마, 로마를 중심한 세계에로 메시아의 사상이 확장될 수 있는 평면적 기대는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
선진 문명국의 언어인 희랍어를 지식계급에서 사용했다함도 그렇지만 충군애국의 정신이 강한 로마인들이 이스라엘민족을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함도 장차 부자의 관계로 충효의 도를 맺기 위한(말 4/6) 사명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이상이 통일된 언어와 준비된 이 민족성을 통하여 빨리 이루어지게하기 위함이다.
충효의 도가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도요 애국의 정신이 바로 하늘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의 표징인 까닭이다. 이 시대에 있어서 로마의 정치와 무력은 그 통치하에 있는 각 민족의 풍속과 제도를 타파하지 않고 도리어 그 방언과 자치권과 종교 의식을 존중히 여겼던 것도 이스라엘민족에 의한 섭리의 촉진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막연하나마 로마인들의 마음 속에는 그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초인적인 힘이 있다고 믿고있었으므로 의식과 제사로써 이 힘과 관계를 지으려는 원시 종교가 있었다. 로마인들이 로마제국을 신국화하였으며 국가와 황제를 위하여 신당을 각도에 세우고 그를 숭배한 것도 이러한 나 아닌 다른 힘에 의탁하려는 종교적 심정의 소산이었으니 이것도 장차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사 9/6)에게 대하여 이스라엘민족과 전 인류가 취해야할 태도를 사탄 세계를 통하여 예시하신 예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방인국가가 이러한 영적 움직임의 경향을 보여준 것은 이스라엘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복귀되어 오는 이스라엘민족의 심령의 빛의 여파가 이방인들에게도 미쳐온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창조주되신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로부터 이루어지는 섭리와 선행과 악행에 관한 천국과 지옥의 응보와 타락인간의 타죄의 진리 등을 교시하는 종교를 요구하게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욕망으로 남아진 것이다. 이와같이 이방에도 그 판도로나 정치로나 언어로나 종교적 의식으로나 기타 각 방면으로 메시아 탄생을 위하여 준비하는 섭리를 하신 것이다.
I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一 예수의 40일 금식기도와 3대 시험의 의의
이미 상술한 바이지만 구약시대는 하나님적 제1 책임분담 노정으로서 이 기대 위에 이루어져야할 예수님의 제2 책임분담 노정의 전형적 표시노정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서 보여진 모든 사실은 장차 예수 오셔서 행하여야할 노정을 예시하는 복귀섭리의 지침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복귀 노정에서 모세를 중심한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말씀인 두 석판을 깨뜨린 것이며 또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바로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의 믿지 않으면 제2 아담 즉 복귀한 아담될 예수님의 몸도 칠 수 있다는 조건을 사탄에게 허락하는 표시적 행동이었다함은 이미 논하였다. (모세노정 참조) 그러므로 이 조건을 피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해야할 오직 하나의 사명은 성전 뜻을 중심하고 믿고 따르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이런 근본원리를 모르고 다시 불신의 길을 밟음으로 사탄 침범의 조건을 허여하게 되니 다시 이 조건을 제거하기 위해 세례 요한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완전히 사탄을 재분립하여 40일 복귀에 의한 사위 기대를 완전히 조성한 터 위에 메시아를 모시어서 마치 40일 기대 위에 섰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솔로몬 성전과 동일한 기대를 예수 앞에 조성해야될 것이었는데 세례요한이 이러한 천부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 자신이 사탄과 싸워서 이 기대를 조성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예수께서 광야 40일 금식 기도에서 사탄과 싸워 승리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될 원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죄없는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예수님에게 광야 40일이라는 설음의 노정이 있었음도 세례 요한을 둘러싼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초래된 결과인 것이다. (전편 제7장 참고)
그러므로 모세노정에 있어서 장차 뜻 성사에 관한 표시적 약속물에 침범하였던 사탄은 다시 그와 동일한 조건이 세례 요한으로 인하여 성립되었으므로 이제는 실제로 침범할 조건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출현하는 것을 예수께서 실체로써 방지하여야할 근본 터를 찾아 세우고자 하는 기간이 이 40일 금식 기간이었다. 사탄은 하나님의 실체로서 나타나신 예수님을 굴복시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뜻을 파하기 위하여 대립하게 된 것이다.
사탄이 시험 주인격으로 설 수 있었기 때문에 다시 그 때와 같은 불순과 불신의 조건이 성립되었으므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사탄은 예수께서 강림하신 목적을 깨뜨리기 위한 가장 중대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걸어놓은 시험에 승리하지 못하면 메시아의 전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근본적인 중요한 시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첫 번 시험은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범죄로 인하여 상징적으로 잃어버렸던 두 석판과 반석을 예수께서 실체로써 찾아세우기 위한 시험이다.
모세 40일 금식 기도를 찾았던 석판을 다시 찾으려니 예수께서도 40일 금식기도로써 찾지 않으면 아니된다. 다시 말하면 모세가 40일 사탄 분립기대 위에 선 석판을 깨뜨린 것과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벌써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행동이므로 결과적으로 보면 모세가 친 것이 아니고 사탄이 친 것이 되며 따라서 그 둘은 사탄의 소유가 된 것이다. 예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신 후에 이와같이 사탄을 따라다니신 것은 모세로 인하여 이미 사탄이 소유한 돌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 사탄의 입장이다. 돌을 떡이 되게하라는 시험은 모세의 표시 노정을 실체로 이루려 오신 예수님이시므로 마치 이스라엘민족이 광야에서 굶주림으로 인하여 불신으로 흘러 모세로 하여금 석판을 깨뜨리게하며 반석을 두 번 치게하여 돌을 사탄이 가지게 되었던 것과 같이 지금 광야에서 굶주린 예수님도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은 입장이니 불신으로 돌아가서 돌을 찾으려 하지 말고 돌을 떡이나 되게하여 주림을 채우고 그 돌을 영원히 사탄이 가지고 있겠다는 뜻이다.
이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하셨다. 즉 떡이 아니라 말씀을 찾아야 살 것이라는 대답이다. 말씀의 실체는 도성인신하신 즉 말씀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를 말함이요(요 1/14) 그리스도는 곧 반석(고전 10/4)이니 이 「말씀」은 곧 돌을 의미하므로 이 대답은 결국 먹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탄이 쥐고 있는 돌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찾아야겠다하심은 돌을 찾아야겠다는 것을 의미함이요 따라서 돌을 찾아야겠다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찾아야겠다는 의미다. 즉 사탄 손에 쥐어 있는 돌을 현재 사탄의 시험을 받고 있는 예수 자신을 표시함이니 먹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구주로 온 내 자신이 지금은 너의 손에 쥐어 있는 돌로써 너에게 시험을 받아야할 입장에 있지만 여기에서 뛰어나와 승리의 기대를 조성해야만 전 인류가 살아난다는 뜻이다.
모세가 금식 40일로써 말씀이 기록된 두 석판을 찾았기 때문에 예수님도 금식 40일로써 말씀의 실체된 자신을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첫 번 시험에 승리하여 실체 성전으로서의 개성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셨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하나님의 뜻은 성사될 것이니 이와같이 잃어버렸던 반석과 석판의 터도 예수님 한 분으로써 기반을 지었으므로 다음에는 뜻의 실천성사가 남아졌다.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공으로 오셔서 모든 백성들을 분성전으로 세워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창조본연의 본성성전으로 복귀코자하심이 그 목적이었다. 사탄도 원리는 원리대로 증거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므로 성전의 머리로 오신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것은 지당한 일이다. 그리고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만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뛰라고 하였다(마 4/5~6).
내려뛰라는 것은 주인공의 위치를 버리고 타락한 인간의 입장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요 그렇게되면 자기가 성전 주관자의 위치를 점령하겠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비원리 존재인 사탄은 원리 세계의 주인공으로 설 수 없는 것이므로 오직 원리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몸으로 나타나신 예수 자신만이 태초부터 원리세계의 주인공이니 너는 시험하지 말고 물러가라는 뜻이다. 즉 예수께서는 일차 시험의 승리로써 복귀된 실체성전의 기대 위에 선 성전 주인공이니 더 시험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이 시험에 승리함으로 신랑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분성전으로 세워 신부의 입장을 취하게하여 자녀로서 복귀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였다. 즉 둘째 시험을 승리함으로 신부성 복귀기대를 조성하였다.
아담은 타락함으로 만물세계의 주인공의 자격을 상실하였다(창 1/28). 그러므로 아담을 주관하는 사탄이 대신 주인공으로 서게된 것이다(롬 8/20). 이제 완성한 아담격자로 오신 예수님이 비로소 피조세계의 주관자로 오신 것이다(고전 15/27).
그러므로 사탄도 예수께서 오신 그 목적을 알고 있으므로 높은 산 위에 세워놓고 그의 목적물을 보여주면서 「엎디어 절하면 이것을 다 주겠다」고 시험한 것이니 예수님을 높은 산 위에 인도한 것은 그는 피조세계의 주관자로 오심을 사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태초에 아담이 사탄에게 굴복하듯이 제2 아담도 사탄에게 굴복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홀로 그를 섬기라」고 하시어 섬겨야할 분은 오직 창조주 한 분이시니 너도 그에게 경배하는 것이 원리요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의 몸으로 나타난 나에게 굴복하는 것이 원리적이라고 하여 셋째 시험에도 원리로써 승리함으로 피조세계의 주관성 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신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40일 금식 기도의 열매로 사탄을 승리함으로 40일 기대를 복귀하여 아담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찾아 세웠기 때문에 표시적 역사노정에 나타나 40일 기대 위에 섰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솔로몬 성전의 입장을 복귀하였다.
이 시험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것이었다는 이유는 메시아의 목적이 이 세가지 조건을 이루려는데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 주신 축복의 말씀은 첫째로 그 개성이 완성될 것과 둘째는 자녀를 번식할 것과 셋째는 천지만물을 주관할 것(창 1/28)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타락으로 인하여 이 세가지 축복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은 후아담으로 오셔서 첫아담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 축복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사탄은 이 세가지 조건을 가지고 시험을 하게된 것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는 우리 신도들도 이 세가지 조건을 복귀하지 못하면 타락전 아담의 입장에 설 수는 없는 것이다.
二 예수의 십자가의 의의
40일 금식으로 사탄을 승리한 기대 위에 선 예수님을 중심한 이스라엘의 할 의무는 무엇인가하면 그들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모세의 표시적 역사노정에서 실패한 것을 예수께서 실체로서 복귀할 수 있도록 각자의 책임 분담을 완수하는 것이다. 이 성사를 위하여 모세가 12지파를 중심한 70 장로를 택하여 역사한 것같이 예수님도 12 제자를 중심한 70 문도를 세워 제2 책임분담 노정을 출발하셨다.
예수님 앞에 참패를 당한 사탄은 예수님 앞을 얼마동안 떠났다고 하였다(눅 4/13). 이 말씀은 사탄이 아주 떠나버렸다는 말이 아니요 따라서 다시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즉 사탄은 예수님 자신에게는 패하였지만 다시 예수님의 구원의 대상인 민족을 통하여 대립할 길이 있다함을 의미한다.
과연 사탄은 제사장 교법사 등을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과 심지어는 사랑하시는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를 통하여 예수님 앞에 다시 대립하여 나섰던 것이다.
이런 우매한 백성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던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되 너희가 우리의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이 세상일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너희가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밖에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으니 이는 하늘에 있는 인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또 들려야 하리니」(요 3/11~14)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하늘 일을 말씀하실 수 없는 것이며 마치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불 뱀이 들어왔으므로 모세가 구리 뱀을 든 것같이 너희들도 불신으로 흘러 다시 예수님의 금식 40일 기대에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으므로 부득이 인자도 십자가에 들려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도 모세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야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광야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 본래 하나님이 모세를 세우신 목적이 아니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본래 하나님이 예수님을 땅에 보내신 목적이 아니요 세례요한과 유다와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초래된 결과였다. (참고 전편 제2장) 광야 금식 기도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40일의 기대 위에 섰으므로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완수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지만 이스라엘민족은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완전히 사탄 편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나서 아비의 욕심을 너희들도 행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으며 (요 8/44) 또 그들을 향하여 7화의 말씀을 퍼부어 그 조상들이 원수 사탄과 합할 수 있는 터를 잡아서 지금까지 내려옴으로 예수님을 대하여서까지 사탄의 역사를 자행케하여 그들의 조상의 악의 양을 채우려 한다고 책망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은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어주고라도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셨으며 사탄은 자기 편에 입각한 전 인류보다도 더 긴요한 목적은 메시아된 예수님 한 분을 죽이려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하면 4천년 복귀섭리의 목적은 하나님 편으로 보면 메시아를 보내심으로 전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하려는 것이므로 오직 그를 죽이려는 것만이 사탄의 유일한 요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반대하여 사탄 편에 서게된 전 인류를 하나님이 구원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우기 위하여 그 탕감조건으로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어주셨다.
사탄은 자기의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자기의 전 요구의 목적을 달성하여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영적 참소의 조건을 완전히 청산하였다. 그러므로 인류는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적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4000년 간 사탄이 요구하던 모든 참소의 조건을 완전히 청산한 십자가의 승리의 기대 위에 이루어진 부활권내에는 사탄의 미련은 완전히 근절되었으므로 여기는 사탄이 다시는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권으로 된 것이다. 사탄이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였으니 하나님도 최대의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탕감복귀의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사탄의 최대실권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지요 하나님의 최대의 실권은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시는 데까지인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같이 탕감복귀 원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부활하신 예수 앞에는 사탄은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 그와 하나되면 사탄이 분리되는 것도 이런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40일 금식기도로써 영육 합하여 40일의 사탄분립 기대 위에 섰던 예수와 이스라엘민족이 하나 되었다면 그들도 영육 합하여 예수님과 동일한 기대 위에 서게되므로 영육 합한 복귀섭리를 완수하였을 것인데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십자가로 그 육신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으므로 그를 믿는 우리들도 육신은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영육 합하여 찾아 세웠던 40일의 기대에는 다시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으므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영적구원 섭리를 출발하려면 다시 이 40일을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40일 기간이 있어야하는 것은 바로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부활 40일로써 다시 사탄 분립 기간을 찾아세워 40일 기대를 조성하셨기 때문에 부활권은 사탄 불가침권이다.
부활한 예수님과 하나되어 그와함께 이 사탄 분립의 40일 기대 위에 서게되면 사탄은 자연분리되어 영적구원의 섭리는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리를 세우시어 성신과 합하여 전 세계를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선의 것으로 복귀하기 위한 섭리를 시작하셨다.
십자가를 예수님 앞에 허락하여 사탄 뜻 완성의 양을 채워 악의 영적 부활의 종국을 짓게하기 위하여 타락한 인류 대신 탕감조건으로서 세워진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노정이었다. 이와같이 죄의 뿌리의 영적 근절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시작되므로 선과 악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분수령으로 하고 신앙과 불신을 조건삼아 좌우로 분기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지금까지 예수님 앞에 공격태세를 취하여온 사탄은 십자가로 인하여 보수적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반대로 예수님은 공격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모세가 바로를 대한 3일 기간을 찾아 세웠음으로 가나안 복귀 노정을 출발한 것같이 예수께서도 영적 가나안 복귀 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는 사탄과 싸우는 무덤 3일 기간을 넘어 다시 부활 40일로써 사탄 대한 영적 분립기간을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 예수님은 모세가 반석 두 번 침과 석판을 깨뜨렸음으로 침범할 조건을 갖고 나온 사탄들이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실체로써 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넘어 부활하심으로 영적으로만 그의 미련을 전부 청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육 합한 세계가나안 복귀노정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지 못하고 다만 영적 생명요소를 온 인류앞에 부여하는 영적 세계가나안 복귀노정만을 개척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광야에서 죽음으로 영적 가나안 복귀만을 완수하고 실체의 가나안 복귀노정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대신한 것같이 영적 세계 가나안 복귀노정만을 완수할 예수님의 실체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재림하셔서 재림예수와 신부가 합하여 계승 완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육신을 쓰고 지상에 탄생해야되는 원리적 근거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고 전편 제7장)
그런고로 예수 이후 2000년은 예수와 성신을 중심한 영적 부활섭리를 완수하는 기간이요 따라서 재림하셔서 완수할 영육 합한 실체적 세계가나안 복귀노정의 기대를 조성하는 기간이다.
이와같이 예수 이후의 2000년은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의 범죄로써 초래된 기간이므로 예수님의 재림 역사는 그 초림 당시에 완수했어야할 노정을 되풀이하는 역사인 것이다. 예수께서 본대로 오시마하신 것도 이와같이 초림시의 것을 되풀이하게되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참으로 예수 재림을 앞둔 현시대는 초림예수의 강림시대를 그 얼마나 방불케하는가는 누구나 잘 이해하고 있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의 육신을 사탄에게 내어주어 영적 탕감복귀의 조건을 세웠으므로 누구든지 그의 부활권내에 참여할 수 있는 입장을 복귀하였다.
이제 이러한 은사의 권내에 처한 사람들이 예수부활의 생명요소를 향유하는가 못하는가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각자가 세워야할 책임분담으로 남아져 있으므로 이것을 완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혜택은 하등 관계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도 각자가 완수해야할 신앙이라는 이 책임분담을 조건으로 하여서만 구원의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계시는 부활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조건으로 영적 구원을 받는 것같이 육신 쓰고 지상에서 나타나는 재림예수를 실체로 믿고 모셨다는 조건으로 육적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말씀인 성서의 목적은 믿음과 소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복귀케 하려는데 있다(고전 13/13). 이제 하나님은 사탄 불가침의 부활권을 수립하여 놓고 이 권내에 참여할 수 있는 첫째 조건으로 믿음을 세우셨다. 아담의 타락은 믿음을 잃은데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아담의 타락 전의 입장을 복귀하러 오신 제2 아담된 예수님은 아담이 잃어버렸던 이 믿음을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창조원리적 입장을 찾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님을 중심하고 사탄 편이냐 하나님 편이냐의 이자택일의 유일한 조건으로 세우신 것이다.
둘째 조건은 소망이다. 이것도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 너희는 완성하여 죄없는 자녀를 땅 위에 편만토록 번식하여 천지 만물을 주관하라는 (창 1/28) 축복을 바라보고 성장하는 도중에서 타락하였으므로 이 축복은 타락인간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소망이 되어 이것도 복귀해야할 조건으로 남아진 것이다.
셋째 조건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타락이라함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사랑의 인연이 끊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복귀하는 것이 타락인간에게 남아진 최후의 목적이므로 기독교의 중심은 사랑으로 되어있다. 이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각기 외적으로 표시한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믿음을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요 소망을 잃었기 때문에 진리를 찾지 못하였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잃었기 때문에 생명을 잃어버렸으니 내적으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지만 외적으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아야 하겠기에 내적인 하나님의 외적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은 길이었고 진리였고 또한 생명이었으므로 그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앞으로 갈 자가 없는 것이다(요 14/6). 이렇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써 길을 찾고 진리를 찾고 생명을 찾은 인간은 영적 구원의 완성을 보나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천사장 누시엘과 혈연관계를 맺어 영적 사망을 가져온 것을 예수님은 실체로써 사망의 혈연을 끊어 하나님과 영적 생명의 혈연 관계를 맺음으로 사탄 권에서 하늘 권내로 옮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뜻하지 않은 고난의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승리의 영광을 얻었으니 신앙자들도 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고난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지 않으면 아니된다. 기독교가 수난의 종교된 원인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난은 인간 자신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제3장 복귀섭리연장시대(예수이후 2000년)
복귀섭리시대의 목적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부터 믿음의 자녀를 불러세워 씨족에서 부족으로 민족에 이르기까지 선민의 터를 넓히어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여 그 기대 위에 메시아를 맞아 복귀섭리를 완성하려는데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적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믿음의 제단을 쌓고 예수님을 이 제단의 제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헌제를 드려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살해하였으므로 아브라함 이후 2000년간 준비하여온 이 제단은 무너지게되어 복귀섭리시대의 2000년 간을 다시 사탄에게 내어준 결과로 돌아갔음으로 이 기간을 다시 하늘 편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한 예수 이후 2000년 기간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니 이 기간을 곧 재탕감복귀시대라고 한다.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좌절되었으므로 그의 후손에서 선민을 불러세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려는 섭리를 하신 것과같이 이 시대는 예수님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않았으므로 기독신도를 불러세워 새로이 세계적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여 재림하시는 메시아를 중심하고 복귀섭리를 완성하기 위하여 연장된 시대임으로 이 시대를 복귀섭리 연장시대라고도 한다.
타락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제1차적 책임을 지시고 하나님이 섭리하신 시대가 소생구약시대엿고 아담과 해와 대신 사명자로 오신 예수와 성신(기독론 참조)이 제2차적 책임을 분담하시고 섭리하시는 시대가 곧 장성 신약시대다.
그리고 이 시대의 프로젝트에 적응될 사료에 관하여는 이미 서론에서 상술되어있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살해함으로써 아브라함이 혈통에서 불리운 선민은 벌써 선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음으로 예수님에게 부름받은 영적 이스라엘인 기독신도로써 이루어진 기독교사가 이 시대의 복귀섭리의 원리적 노정을 이루어 나온 역사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복귀섭리의 원리적 프로젝트에 적응될 사료는 기독교사인 것이다. 이 시대도 7기간으로 구분하여 섭리하셨다. 그 이유는 7기간으로 구분하여 섭리하셨던 복귀섭리시대의 2000년을 그대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인 까닭이다.
제1절 로마제국 박해시대(400년간)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상실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스라엘민족의 애급고역시대 400년간이 있었음으로 민족적인 제단 위에 예수님을 산 제물로 바치는 헌제의 실수로 인하여 상실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기독신도들 앞에도 애급고역시대와 같은 로마제국박해시대 400년간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와같이 이 시대는 애급고역시대를 탕감복귀하는 시대임으로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급에서 당하던 것과 같은 고난을 기독신도들은 로마제국에서 당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야곱이 12자식을 중심한 70가족이 사탄 세계인 애급에 들어가 400년 간 그들의 박해와 학살을 당하던 것과같이 예수님의 12제자를 중심한 70문도는 사탄세계인 로마제국에서 400년 간 그들의 박해와 학살을 당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스라엘민족은 애급에서 400년을 고역한 후에 애급왕 바로를 굴복시키고 해방을 당한 것과 같이 기독신도들도 로마제국에서 4세기간의 수난기를 거친 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에 의하여 기독교의 공인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그의 기반에서 해방을 당한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모세는 비로소 십계명과 성서를 받고 그를 중심하여 성막을 건설한 것같이 기독신도들도 기독교 공인에 의하여 해방된 후 니케야회의를 비롯한 수차에 걸친 종교대회에서 어거스틴 등을 중심하고 사도신경과 신약성서는 결정되어 이 위에 그때까지 혼란상태에 처한 교회는 복귀되어 새로운 기초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되어 이스라엘이 성막을 중심하고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온 것같이 기독신도들도 교회를 중심하고 재림예수를 맞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받들어 나온 것이다.
제2절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400년~800년)
이 시대는 복귀섭리시대에 있어서 사사를 중심하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영도하여 나아가던 사사 400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교구장 (Patriarch)을 중심하고 기독교를 영도하던 시대다.
이스라엘민족이 사탄세계인 애급에서 가나안복지로 들어가 12지파로 분배된 새 땅에 새로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일으킨 것과 같이 기독교도 역시 사탄세계인 로마제국에서 해방을 당한 후 4세기에 몽고족의 일파인 훈족(Hun)의 서침에 의하여 서구로 이동된 게르만 민족에게 기독교리를 전파하여 4세기 이후에는 서구의 새 땅에 게르만민족을 중심한 새로운 선민인 기독신도들을 불러 세우시어 12지파형의 교회를 중심하고 발전한 것이다.
가나안 복지로 들어간 이스라엘선민은 민족적인 가나안화운동을 일으킨 것같이 게르만 민족을 중심하고 서구에서 부름받은 기독신도들은 세계적인 가나안화운동을 전개시킨 것이다.
사사시대에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영도자는 사사였으니 이 사사는 다음 시대에 분립되어 예언자와 제사장과 국왕의 사명을 겸임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 시대에 있어서의 기독교국의 영도의 중심은 교구장이었는데 교구장도 다음 시대에 분립되는 수도원과 교황과 국왕의 사명을 겸임하여 통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구장은 사사와 동일한 천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민족은 가나안땅에 들어간 후 잡신을 신봉하는 가나안의 선주민의 영향으로 그들의 신앙에 혼란을 일으킨 것과 같이 서구에 확산된 기독교에도 잡도의 영향으로 인하여 신조의 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제3절 기독왕국시대(800년~918년)
이 시대는 사울왕으로 시작된 통일왕국시대를 찰스대제로 시작된 기독왕국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다. 아브라함으로부터 800년 되던 때에 이스라엘민족을 통치할 사울왕이 즉위하였음으로 기원 800년 되던 해 크리스마스날에 기독신도를 통치할 찰스대제가 즉위한 것은 탕감복귀원리로 보아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제 모세에 의한 성막이상이 통일왕국시대의 이상인 성막이상으로 나타난 것같이 어거스틴에 의한 기독교이상은 기독왕국건설의 이상으로 나타나 신정정치의 프랑크왕국을 재건하였다.
사사시대에 있어서의 사사의 사명은 통일왕국시대로 들어오면서 셋을 분립되었으니 첫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받는 선지자의 사명이요 둘째는 이스라엘의 성막을 받드는 제사장의 사명이요 셋째는 백성을 통치하는 국왕의 사명이었다. 이것을 탕감하기 위한 기독왕국시대에 있어서도 역시 그 전시대의 교구장의 사명은 셋으로 분립되었으니 첫째는 선지자에 해당되는 수도원의 사명이요, 둘째는 제사장에 해당되는 교황의 사명이요 셋째는 백성을 통치하는 국왕의 사명이다.
이 두 시대에 있어서의 주도권은 제사장과 교황에 있었다. 그러므로 사울왕의 즉위의 주고를 선지자 사무엘이 한 것같이 찰스대제 즉위의 금관은 교황 레오 제3세가 씌워준 것이다. 통일왕국시대가 120년 간 계속된 것같이 기독왕국의 왕조도 119년만에 끊어지고 말았다.
제4절 동서분립시대(918년~1305년)
통일왕국시대의 성전이상이 좌절되면서 이 왕국은 남조와 북조로 분리되어 남북조분립시대가 400년간 계속되었으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하는 동서분립시대가 오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왕국도 분립되어 처음에는 동서 프랑크와 이태리로 분열되었다가 동프랑크는 신성 로마제국을 계승하여 이태리왕을 겸임하였으므로 사실상 동서로 분립된 것과 같으며 이스라엘의 중심이 남조에 있었던 것과같이 이 분립된 왕조의 중심도 신성로마제국인 동프랑크에 있었다.
통일왕국시대에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국왕은 제사장의 명을 받아 성전이상을 이루어야할 것이었던 것같이 이 시대에 있어서의 왕은 교황의 명령에 의하여 기독왕국의 이념을 실현해야될 것이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사실상 제국의 실권은 교황에게 있었음으로 교황 그레고리7세는 독일황제 헨리4세를 파문할 수 있었으며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불국왕 필립2세를 굴복시켰고 영국왕 존을 파문하는 등 교황권은 이 시대에 그 절정에 달하여 기독왕국 전성시대를 이루었던 것이다. 남북조분립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민족들이 이 성전이상에 배치되는 입장에 서게될 때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내적 확청운동을 일으키시었다. 선지자 엘리야를 중심한 4대선지와 12소선지를 보내신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동서분립시대에 있어서도 교황청이 부패함에 따라 그 내적 확청운동은 수도원에서 일어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프랑시스 교단 등이 나타난 것은 모두 이러한 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민족이 선지자들에 의한 내적 확청운동에도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애급 갈대아 수리아 앗수리아 바벨로니아 등 이방들에게 붙여 외적확청운동을 일으켰던 것과 같이 교황청이 수도원에 의한 내적확청운동에도 회개하지 않고 타락과 부패가 우심하여지매 그들도 이방인들에게 붙여 외적확청운동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곧 십자군전쟁이다. 예루살렘 성지가 카리프제국에 속하여 있을 때는 그들은 기독교인의 순례자들을 후대하였는데 카리프제국이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s)에게 망하여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점령을 당한 후에는 그들은 순례자들을 학대하였다. 이에 분개한 교황은 이 성지를 회복하려고 십자군을 일으킨 것이다.
십자군전쟁은 1096년에 시작되어 약 200년 간에 7회의 원정을 하였으나 패전을 거듭하였고 설상가상으로 몽고제국의 서침에 의하여 동서로 분립된 기독왕국은 붕괴되어 하나님의 섭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지못한 기독왕국을 확청키 위한 것이 그 목적이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섭리에서 이루어진다고 믿고있던 기독왕국이 이교도에 의하여 패전을 거듭함에 따라 교황권은 그 권위와 신망을 완전히 잃게되자 또한 국민정신의 중심을 잃어버렸다. 한편 봉건사회를 유지하던 영주들과 기사의 전사로 인하여 정치적인 기반을 잃고 말았으며 또 장기간에 걸친 전비의 의하여 경제적인 곤궁에 빠지게되어 봉건사회는 붕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5절 교황포로시대(1305~1375)
솔로몬왕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않은 성전이상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남북조 분립시대를 통하여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으며 또 이방인에 붙이기도하여 내적 외적으로 확청운동을 일으켰으나 회개치 않은 결과로 파괴된 성전을 재건설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새로운 기대를 조성키 위하여 이스라엘민족은 다시 사탄세계인 바벨론으로 포로되어갔던 70년 기간이 있었음으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교황포로시대다.
그러므로 교황청의 부패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기독왕국이상을 복귀하기 위하여 동서분립시대를 통하여 많은 수도자들을 보내었으며 또 십자군전쟁에 붙이기도하여 내적 외적으로 확청운동을 일으켰으나 교황이 회개치 않은 결과로 좌절된 이 이상을 다시 세워 재림주를 맞을 수 있는 새로운 기대를 조성키 위하여 역대의 교황이 70년간 포로를 당하는 시대가 오게되는 것이다.
십자군전쟁의 영향으로 인한 봉건제도의 몰락과 근대국가의 성립에 따라 왕권이 신장되었고 한편 신앙열이 냉각하여 교황과 승려가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교황과 불국왕이 충돌하자 국민이 왕을 지지하게 되어 교황 보니후아키우쓰 8세가 남불 아비뇽에 금고된 후 1대를 지나서 기원 1305년에 구레멘스5세로부터 역대의 교황은 70년간 불왕의 구속을 받으면서 남불 아비뇽에서 포로생활을 하게된 것이다.
제6절 교황귀환시대(1375~1517)
이스라엘 민족을 포로로 잡아갔던 바벨론이 파사에게 망한 후 그들이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140년 기간이 있었음으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교황이 남불 아비뇽으로부터 로마로 귀환하는 140년 기간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되어 이방의 잡신교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멀리하게된 것같이 이 중세인 가운데도 하나님을 반역하는 인생관이 나왔으니 이것이 곧 문예부흥운동을 타고 나온 인본주의사상이다.
이스라엘민족 귀환시대의 목적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민족이 새로이 성전을 건축하고 죄를 회개하며 율법을 공부하여 쇄신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데 있었던 것과 같이 이 시대에도 교황이 로마로 귀환한 후에는 중세의 기독교계에는 일대혁신운동이 일어나 암운 가운데 신음하던 중세의 기독신자들에게 신앙의 새로운 서광을 비춰주어 재림예수를 맞을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의 기대를 조성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귀환시대는 선지자 말라기를 중심한 성전건설과 신앙쇄신운동으로 다음 시대를 출발한 것이다.
제7절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1517~1917)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민족이 메시아 강림준비시대를 지나고 나서 예수님을 맞았음으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시대가 포로되었던 교황이 귀환한 후의 중세 기독신도들의 앞에도 남아졌으니 이 시대가 곧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다.
사위기대를 조성키 위한 복귀섭리가 사탄의 침범으로 인하여 연장을 거듭하여 내려왔던 아담이후의 4000년 역사노정에서 거듭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그 40일 복귀섭리의 기대를 동시에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메시아강림 준비시대가 있었던 것과같이 아담으로부터 6000년 역사노정에서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40일 복귀섭리의 그 모든 기대를 동시에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가 있어야할 것이다.
전절에 기록된 바와같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이 느부갓네살왕에 의하여 파괴된 성전을 신축하고 말라기의 영도에 의하여 사신을 숭배하던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율법을 공부하여 신앙의 혁신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던 것과 같이 교황이 로마로 귀환한 이후의 중세 기독교인들은 루터를 중심하고 종교의 개혁운동을 전개시켜 중세 암흑시대의 암운을 뚫고 새로운 복음의 빛을 따라 신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재림예수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여온 것이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귀환하여 애급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40년 준비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메시아강림준비시대요 이 시대를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한 시대가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임으로 이 시대의 모든 기독신도들은 마치 야곱가정이나 이스라엘민족들과 같이 갖은 파란과 고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아니된다. 구약시대는 외적조건 즉 율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워 내려오던 시대임으로 메시아강림준비시대는 외적고역을 당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파사 희랍 애급 수리아 로마 등 이방에 속방되었던 것과 같이 신약시대는 내적 조건 즉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워 나아가는 시대임으로 내적인 수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문예부흥에 의한 인문주의와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르는 계몽사조 및 유물사상과 또 종교개혁에 의한 신앙의 자유 및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절규 등등의 영향으로 종교와 사상에 일대 혼란을 일으켜 기독신도들은 말할 수 없는 내적 고민을 당하는 시대다.
이 시대는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신앙의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심령만을 부흥시킬 뿐아니라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사회환경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라 생활환경이 장족의 발달을 하게되는 것도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상세계의 과학적인 생활환경을 복귀하기 위한 섭리에서 보여지는 필연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 시대는 다시 다음의 3기간으로 구분된다.
I .종교개혁기(1517~1648)
중세는 그 봉건제도로부터 오는 사회적환경으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을 발휘할 수 없는 시대였다. 예언자의 사명을 다해야할 수도원도 가끔 도덕적으로 타락하였고 국민의 신앙과 안녕질서를 보장해야될 교황권은 착취계급을 옹호하는 기관으로 되어버린 때도 있었으며 교황의 과세와 교회의 간섭은 인민의 생활에 대한 압박과 개성의 자유에 대한 구속을 가중하였고 상하교직은 윤락해버렸음으로 경건된 신앙자들은 눈물과 피로써 개혁운동을 갈망치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십자군전쟁에 의하여 교황권의 권위가 상실된 후 14세기부터 이미 영국의 승려들 사이에도 태동되었었고 15세기 말에는 교황세력이 강한 이태리에서도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여 처형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교황포로는 이 운동에 박차를 가하여 마침내 마틴 루터에 이르러 비로소 무르익은 사회적 정세하에서 폭발되어 혁혁히 전개되어 마침내 신교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된 것이다. 이 혁명운동의 세력은 점차로 확대되어 불란서의 칼빈, 서서의 츠빙글리 등이 일어났고 뒤미쳐 화란 영국 스코틀랜드 등 제국으로 퍼지게된 것이다.
이리하여 이 신교운동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국제 간의 싸움은 백여년간이나 계속하여 오다가 마침내 독일을 무대로 하고 일어났던 30년전쟁이 1648년 베스트팔렌(Westphalia) 조약으로 종식되면서 신구종파의 싸움은 일단락을 지은 것이다.
이렇듯이 북구의 게르만족은 프로테스탄트로 승리하였고 나전민족의 남구는 구교의 영토로 남아지게된 것이다.
一 .복귀섭리로 본 종교개혁의 의의
로마를 중심으로한 가톨릭구교의 교황은 그 판도내의 모든 권력을 홀로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정신과 사상까지도 구속하고 있었음으로 인간의 모든 자유는 완전히 교권에 예속되고 말았다.
II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1648~1800)
이 기간은 웨스트파리아(Westphalia) 강화로써 30년 전쟁이 종결된 후 불란서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약 150년 기간을 말한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교권의 기반을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얻게된 근세인들은 종교와 사상의 자유에 의한 혼란과 투쟁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같이 이 기간은 끊일 사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은 종교와 사상과의 관련성을 갖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종교 및 사상이 혼효한 중에서 인생의 제반 문제가 얽히어졌던 시대다.
그러나 복귀원리적인 견해로 보면 이 사조는 두 갈래로 지향되어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인간세계를 가인과 아벨의 두 형의 세계로 분립키 위한 탕감복귀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필연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一 .가인형의 인생관
문예부흥에 의한 인문주의는 자연성과 인간성의 평면적인 존엄성을 고조하였으며 이 사조는 유물주의와 합리주의에 따르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아울러 평면적인 인생관을 자아내었으니 이것이 곧 가인형의 우주관과 인생관이다.
연역법에 의한 합리주의자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와 귀납법에 의한 경험론자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홉스(Hobbes 1588~1679) 록크(Locke 1632~1704) 버클리(Berkeley 1685~1753) 흄(Hume 1711~1776) 등의 사상은 신을 떠난 이성을 존중하고 경험에 기인한 인간 중심의 철학사상이 되었다.
이 사상의 영향으로 영국에서는 초월신교가 생기고 이것이 다시 불국에서 초보적인 유물론이 되고 독일에서 계몽사상이 되었다. 이 계몽사상의 대표자들은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볼테르(voltaire 1694~1778) 루소(Rousseau 1712~1778)이며 권위와 전통과 관습을 부정하고나선 그들의 반종교적 사상은 기독교와 대척적인 입장을 취하여 가인형의 인생관을 수립한 것이다.
二 .아벨형의 인생관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정당한 유신론적인 우주관에 입각한 자연성과 인간성의 입체적인 존엄성을 고조하여 창조본연성을 지향하는 입체적인 인생관은 아벨형의 인생관을 수립하였다.
인간의 정신면을 깊이 파고 들어 하나님의 면모를 찾아 볼 수 있는 양심의 윤리성을 강조하는 철학자들이 나왔으니 칸트(Kant 1724~1804) 피히테(Fichte 1762~1814) 쉘링(Schelling 1775~1854) 헤겔(Hegel 1770~1831) 등이다.
이와같이 철학자들이 종교적 또는 사상적 논쟁을 하는 중에 프로테스탄트교회도 일종 중세적인 스콜라 신학과 같은 경향으로 흐를 때에 이에 반항하여 종교적 정열과 내적 생명을 중요시하여 교리와 형식보다도 신비적 체험에 치중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스페너(Philip Jakob Spener 1635~1705)를 중심하고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Pietism)의 운동이다. 이 경건파의 영향이 영국에 파급되어 영국민의 생활 속에 젖은 종교심과 융화하여 종교도덕이 심히 소침상태에 빠졌던 당시에 복음파로서의 새로운 종교적 경종을 울린 교파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웨슬레(John Wesley)의 형제를 중심한 메소디스트 교파였다.
이러한 아벨형인 내적 종교사조의 주동역할을 한 사람은 폭스(George Fox 1624~1690)와 스웨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이다. 폭스는 성경을 받아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내적 광명을 체휼할 때 비로소 성서의 진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퀘이커(Quaker) 파로서 알려져 있는 이 신비파는 영국뿐만 아니라 미대륙에 있어서까지 박해를 받으면서 포교한 것이다. 저명한 과학자 스웨덴보리의 영안을 열어 그 일생을 통하여 천계의 신비의 일부를 지상에 발표하신 것은 벌써 자연과학의 세계와 종교세계와의 불가분한 연관성을 보여주시기 위한 섭리에서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같이 가인형의 인생관이 뚜렷한 방향을 취함에 따라서 아벨형의 인생관도 뚜렷이 성숙하여 왔다. 이러한 사상의 동향에 따라서 그 위에 건설되는 사회도 뚜렷이 두 형의 사회를 건설하게 되어 끝날에는 가인형과 아벨형의 두 세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2차대전이 종결되면서 공산과 민주의 두 세계는 완연히 분립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가인형과 아벨형의 두 인생관에서 맺어진 결실인 것이다. 우리가 현세를 말세라고 부르게된 이유도 이와같이 하나의 세계로 귀일하는 역사적 추이로 보아서 능히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III .정치와 경제 급 사상의 성숙기(1801~1920)
전시기에 있어서 사상의 투쟁은 가인과 아벨의 두 형의 인생관을 수립하였고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이 두 형의 인생관은 각자의 방향대로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두 갈래의 인생관이 성숙하여감에 따라서 사회의 기구도 이 두 인생관에 입각한 사회형태로 정리되어 가면서 정치와 경제도 이상사회에로 전환될 수 있는 전단계의 것으로 성숙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불란서 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시작되어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一 .정치와 경제의 성숙
이 시대에 있어서의 정치 경제가 어떻게 앞날의 새 세계의 것을 지향하여 성숙되어가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 기간은 정치와 경제의 면에서 보아 3기간으로 구분하여 고찰할 수 있다.
1 .불란서혁명과 영국산업혁명기(40년)
피조세계 전체는 사람 하나를 표본으로 하여 그를 닮도록 창조되었지만 인간시조가 타락되지 않고 이루어야할 인간사회도 완성된 하나의 유기적인 형태와 구조와 기능을 닮도록 건설하시려는 것이었다.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다면 아담의 후손은 이러한 사회를 건설하였을 것이고 아담이후 극히 단시일 내에 6천년의 인류역사가 이루어놓은 오늘의 과학세계를 건설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이러한 사회를 잃어버리고 이러한 과학세계를 잃어버렸음으로 복귀섭리의 목적은 창조본연의 인간과 이 본성의 인간으로 조직된 사람 하나의 모양인 사회구조와 과학의 발달에 의한 생활환경을 복귀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과학문명의 세계를 복귀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인간의 형태와 구조와 기능을 닮은 사회는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인체의 모든 기관이 두뇌의 절대적인 명령에 의하여 기동하는 것과같이 이상사회의 모든 기관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에 의하여 영위되어야하며 두뇌로부터의 명령이 중추신경을 중심한 신경계통을 통하여 사지백체에 전달되는 것과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은 중추신경에 해당되는 그리스도와 그를 중심한 신경계통과 같은 성도들을 통하여 사회 전체에 유루없이 미쳐져야한다. 그러므로 인체에 있어서의 신경계통에 해당되는 국가의 정당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성도들로써 구성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폐장과 심장과 위장은 신경계통을 통하여 전달되는 두뇌의 명령에 의하여 서로 상충과 당착이 없는 원만한 수수의 작용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이 삼장기에 해당되는 입법과 사법과 행정의 삼권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완전한 수수의 원리적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사지는 인간의 생활목적을 위한 두뇌의 명령에 의하여 활동해야되는 것처럼 사지에 해당되는 경제기대는 이상사회의 목적을 달성키 위한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여야한다.
인류역사가 흐름에 따라서 사회의 발전과정은 이와같이 사람 하나의 형태와 구조와 기능을 닮기위한 노정을 밟아온 것이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과 정당과 정책의 전체적 역할을 국왕 한 사람이 전담하여오던 시대는 변천하여 국왕이 삼권 장악하고 교황을 중심한 사회가 정당과 같은 사명을 하고 정책적 사명을 수도원이 하던 시대로 바뀌어졌고 다시 이 시대의 정치제도는 불란서의 정치혁명에 의하여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으로 분립되었고 정당이 뚜렷한 정치적 사명을 갖게됨으로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완성하게 되었으니 이와같이 정치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사람 하나를 닮게하기 위한 섭리에서 이루어지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이와같이 완성된 이상사회에 있어서의 개체는 인체에 있어서의 각 세포에 해당될 것이다. 각 세포는 각각 성품이 다른 독립된 생리적 개성체이지만 서로 분리되어 다른 세포와의 유기적 관계가 끊어질 때 죽어버리는 것과 같이 이상사회에 있어서의 인간도 이 세포와 같은 관련성을 가지고 서로 맺어지게되는 것이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것도 자연과학의 고도적 발달에 따라 기계화한 다량생산에 의하여 이상사회의 경제적기대를 조성키 위함이다. 창조이상으로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종적으로 각자에게 부여된 창조본연의 가치에는 서로 추호의 차이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횡적인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서로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임으로 누구에게나 균등한 환경과 평등한 생활조건이 부여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창조이상이 실현된 세계에 있어서는 어느 한 개인이나 한 민족이나 한 국가에만 유복한 생활조건이 부여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웃의 희로와 애락이 바로 나의 것으로 반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생명있는 유기체로서 이루어진 이상사회라 할진대 이 사회의 경제기구도 각 개체의 균등한 행복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면 아니될 것이다. 이와같이 생산과 분배와 소비도 각각 그에 해당되는 인체에 있어서의 위장과 심장과 폐장이 서로 그러하듯이 과부족이 없는 유기적인 수수의 관계를 가져야할 것임으로 생산과잉에 의한 판로전쟁이나 편파적인 분배로부터 일어나는 전체적인 생활목적을 떠난 축적이나 소비가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필요하고도 충분한 생산과 공평하고도 과부족없는 분배와 전체적인 목적을 위한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으며 인체에 있어서의 간장과 같이 전체적인 기능의 활동을 위한 저축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러한 경제기대를 조성키 위한 섭리에서 영국의 산업혁명은 일어나게된 것이다. 산업혁명에 의한 다량생산은 영국으로하여금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하여 세계적인 복음전파의 사명을 달성케 한 것이다.
2. 열국의 강화기(40년)
혼란된 인생관도 두 갈래로 갈라져 성숙되어가며 불란서 정치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에 의하여 정치와 경제의 제도에 일대변혁을 일으켰으므로 이에 새로운 영향을 받은 열국도 각각 통일강화되어간 것이다. 이태리와 독일이 각각 통일강화되었고 영국은 구주 제일강국으로 강화되었고 기타 오스트리아 미국 노서아 토이기 등도 각각 강화되었다.
불란서 정치혁명의 영향으로 인하여 계급은 타파되어가며 따라서 사회조직에 격변을 일으켜 평민의 노력은 현저하게 증진되었으며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음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민주사회의 기대는 더 공고하여졌다.
3. 열국의 식민지 분할기(40년)
산업혁명에 의하여 경제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날로 신기계는 발명되어 공업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되니 과잉한 생산품의 판로와 공업원료를 획득할 수 있는 신지역을 개척하기 위하여 열국 간에 식민지 쟁탈전은 일증월가하여 자본주의시대에 따르는 제국주의시대는 초래되었다.
상술한 바와같이 기계공업의 비약적인 발달과 인구의 격증은 이 시대의 부산물로서 실업자를 범람케 하였으나 이러한 시대적인 현상은 식민지 개척에 의한 세계제패의 열로 화하였으며 이러한 시대적 추세는 세계적인 복음 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특히 기독교 국가인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획득하여 세계적으로 급격한 복음운동을 전개시켰다는 것은 복귀원리에 지대한 의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나 자본주의가 초래되는 것도 하늘의 판도를 넓히기 위한 섭리에서 오는 시대적인 필연적 산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후편 제4장 제1절 참조)
십자군 전쟁에 의한 동서세계의 접촉은 지리에 관한 많은 지식을 넓혀 주었으며 나침반 사용으로 항해와 탐험이 성행하여 지구상에 숨겨진 땅을 모조리 들추어내게된 것이다.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숨기고 간직하여 두었던 미주대륙이 독실한 기독신도들의 피와 땀으로 개척되어 세계적인 복음운동의 온상이 되었다는 것도 복귀섭리로 보아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이상의 실현을 위한 미국인민들의 끝날의 사명은 지극히 큰 것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이와같이 각자의 판도를 넓히기 위한 식민지 개척운동은 교통기관의 발달에 의하여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니 이것도 가인과 아벨 두 형의 세계적인 판도를 조성키 위한 섭리에서 이루어진 현상이다. 이와같이 교통기관의 발달에 의하여 지구의 표면이 축소성을 띰에따라서 일어나는 정치 경제 군사를 비롯한 모든 면에 있어서의 혁신으로 인하여 열국의 식민지 분할정책은 더욱 활발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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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감복귀섭리로 본 세계대전의 필연성
세계대전의 원인으로서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등등의 제조건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외적인 원인은 이미 많은 사가들이 연구하여왔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원인은 외적인 어떠한 천륜에서 빚어지는가는 아지 못하였다. 그러면 대전의 필연성을 탕감복귀섭리의 입장에서 알아보기로 하자.
인류역사는 악으로 출발하게 되었음으로 원리적 창조세계는 비원리세계로 전개되어왔다. 이와같이 사탄 편은 원리적 역사 프로젝트를 앞질러 원리형으로 전개시켜 나오며 하나님은 그 뒤를 따라 이 비원리적인 역사의 전개를 하나님 편으로 빼앗아 원리적인 역사의 전개로 전환시키면서 창조본연의 세계를 지향하여 내려온다. 참것이 오기 전에 거짓것이 먼저 참것을 흉내내어 역사노정에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원리적 근거가 있는 까닭이다. 한 진리가 나타날 때에는 그 시대의 환경은 비원리세계임으로 핍박을 당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시대가 바뀌어 원리적 역사 노정으로 전환될 때는 그것은 반드시 진리로써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적그리스도가 먼저 온다 한 것도 이러한 원리로서만 해명될 것이다.
속담에 죄 지은 자가 먼저 죄없는 양으로 발뺌한다는 말도 이러한 원리를 설명해 주는 말이다. 사탄 편을 중심한 악주권 역사의 프로젝트는 재림주의 현현에 의하여 종말을 짓고 하나님을 중심한 선주권 역사로 전환되어 새로운 역사의 전개가 시작될 것임으로 사탄은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되어 사탄편의 세계에서 하늘편의 세계에 대한 최후의 발악은 세계대전으로 유도하게 되는 것이다.
재림주의 사명은 6000년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사탄에게 내어 주었던 악주권의 전체적 역사노정을 하늘 편으로 탕감복귀하는 것임으로 1차대전으로 인한 하늘 편의 승리의 기대 위에서 세계 가나안 복귀 40년 노정은 출발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를 축복하여 죄와 상관없는 자녀를 지상에 편만하게하려하심이 그 창조 이상이었다(창 1/27). 그러나 아담의 타죄로 말미암아 아담을 중심한 이 세계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음으로 이 세계를 탕감 복귀하기 위하여 사탄 편의 아담 상징존재인 카이젤을 중심한 독일을 중추로서 사탄 편 세계형을 허락해 놓고 이것을 타도하여 하늘 편으로 탕감복귀하는 전쟁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니 이것이 제1차 대전이다. 이와같이 카이젤은 사탄 편 아담의 상징존재로서 범게르만 정책을 세워 세계를 제패할 왕위의 야망을 가지고 출현하였으므로 그가 패망한 것은 탕감복귀원리에 의하면 카이젤과 같은 하늘 편 세계의 왕으로 오실 아담이 출현함을 표시한다.
하늘적인 역사프로젝트를 사탄이 먼저 흉내내어 이루어 나오는 것이 탕감복귀 역사임으로 노서아에 공산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메시아의 재강림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중심한 그러한 세계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으로 사탄편의 재림주 상징자인 스탈린을 중심한 공산세계를 사탄이 먼저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노서아가 1차대전 말엽에 공산혁명으로 인하여 사탄국화한 것은 하늘 편 국가인 미국을 세워 1차대전이 하늘 편 승리로 돌아가게 하였음으로 그의 탕감으로 노서아를 사탄에게 내어주어 가인형의 세계를 이루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탕감복귀의 원리에 의하여 고찰하면 카이젤은 패망하면서 동시에 공산혁명이 일어나는 시기에 1차대전의 승리로 인한 복귀섭리의 기대를 조성한 터 위에 메시아 재강림역사는 태동하여 40년 세계가나안 복귀노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제2 아담된 예수님을 보내시어 첫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않은 세계를 복귀하시려다가 다시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어주었음으로 그 세계까지 사탄에게 다시 내어주었으니 이것을 다시 하늘편 세계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사탄편의 예수님 상징존재인 히틀러를 중심한 독일을 중추로 하고 형성된 세계형을 허락해 놓고 이것을 타도하여 하늘편으로 탕감 복귀하는 전쟁이 있어야할 것이니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독일이 1차대전 후 수십년 내에 세계를 제패할 야망을 가질 정도로 발전된 것도 재림역사를 시작 할 수 있는 원리적 조건이 성숙하게 되었음으로 이러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과 해와와 천사장의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세계임으로 이것을 탕감 복귀하기 위하여 제2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과 해와신성이며 따라서 어머니신성인 성신과 천사장이 합하여 역사하였으나 이 세계를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었음으로 이 세계를 다시 복귀하려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한 제2차대전은 이것들을 상징하는 하늘편과 사탄편의 국가진으로서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 편의 아담과 해와와 천사장을 상징하는 국가인 미국과 영국과 불국으로 구성된 연합국과 사탄 편의 아담과 해와와 천사장을 상징하는 국가인 독일과 일본과 이태리로 구성된 사탄 편 추축국가가 대립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1912년 11월 루덴도르프가 요구한 3군단 증설안이 독일의 제국의회에서 용납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독일도 전쟁의 절박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2차대전은 독일도 예기하지 않았던 때에 발발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이것도 신부를 맞을 수 있는 재림역사의 시기가 성숙되어 있음으로 이러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즉 초림예수의 역사가 끝난 기대 위에서 출발하여야할 재림역사 시기가 절박하여 예수님을 중심하고 이루어졌어야할 세계를 상징하는 사탄세계를 조속히 괴멸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겠음으로 2차대전이 이렇게 뜻하지 않은 때에 발발된 것이다.
사탄 편인 소련이 미영의 하늘 편에 가담하게된 이유도 하나님의 섭리로 보면 사탄 편으로 본 예수 상징인 히틀러를 중심한 세계를 괴멸하여 사탄 편으로 본 재림주 상징인 스탈린을 중심한 가인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와같이 사탄세계를 이루어주는 조건은 도리어 하늘 편을 도와 예수 상징인 하늘 편 국가진에 가담하는 결과가 되어 재림 역사를 시작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2차대전이 종료된 후부터는 재림역사는 현저한 움직임을 보여주어야하며 말세라는 의식은 점점 더 높아지고 신자의 신앙은 날로 혼돈되어 중심을 잃고 은혜를 갈망하여 헤매게 된다. 그러므로 이 때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세례요한을 따라서 산으로 광야로 찾아 헤매던 때와 같은 시대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3대시험으로 본 세계대전의 필연성을 고찰하기로 하자.
인류역사는 탕감복귀 원칙에 의하여 하늘 편과 사탄 편을 분립하시려는 섭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구한 역사를 두시고 아담과 해와로 인하여 뿌려진 선과 악의 씨를 싹트고 자라나게하여 각각 하늘 편과 사탄 편의 세계형인 열매로 결실케하시는 분립의 섭리를 하시어 세계대전에까지 이르렀다. 모세가 가나안 복귀하던 노정을 예수께서 걸어야하며 예수께서 걸어야할 세계가나안복귀노정을 전인류가 걸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로써 3차의 시험에 승리하여 세계가나안 복귀노정의 출발의 기대를 잡던 것같이 하늘편 세계에서도 재림주를 중심한 세계가나안 복귀 40년 기간에 있어서 세계를 걸어놓고 세계적으로 넘어야할 3차의 시련인 3차의 세계대전에 승리하여야 그 기대 위에서 복귀섭리를 완성하여 천주창조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1차 시험에서 개성복귀의 기대를 조성한 것같이(참고 예수 3대시험의 의의) 하늘 편에서는 제1차 대전으로 인하여 사탄 편을 분리할 수 있는 소생적 기대를 조성하였고 예수께서 제2차 시험의 승리로서 성전 주인공의 위치를 복귀한 것같이 하늘편 세계에서도 제2차 대전의 승리로 인하여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수할 수 있는 장성적 기대를 조성하였다. 이제 예수께서는 세 번째인 최후의 시험에 승리하여 사탄을 완전히 물리침으로 피조세계의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것같이 하늘편 세계에서도 제3차 대전의 승리로 인하여 사탄편 세계를 완전히 괴멸하고 천주의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게될 것이다.
복귀섭리의 종말기에 있어서는 문예부흥도 3차를 거듭하게된 것이다. 문예부흥은 복귀섭리의 평면적인 발전과정을 취해나온 것이라함은 이미 논한 바이지만 이 문예부흥은 더 평면적으로 육성되어 계몽시대를 초래하였으니 이것이 곧 제2 문예부흥이요 이것이 더 평면적인 노정으로 육성을 완성하여 유물사관에 입각한 공산세계를 초래한 것이니 이것은 제3 문예부흥이다.
중세 봉건사회를 붕괴하는 내적인 역할을 제1 문예부흥이 한 것같이 불란서 혁명을 일으켜 전제군주사회를 붕괴한 내적 역할을 한 것은 제2 문예부흥에 의한 계몽사상이었고 민주사회의 일부를 유도하여 공산독재사회를 건설한 내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제3 문예부흥에 의한 유물사관이다. 문예부흥에 의한 평면적인 발전과정은 반드시 종교개혁에 의한 입체적인 발전과정을 취하게되는 것임으로 종교개혁도 3차에 걸쳐 일어나지않으면 아니된다.
제1 문예부흥에 뒤이어 루터를 중심한 제1 종교개혁이 있었으며 제2 문예부흥인 계몽시대에 뒤이어 웨슬레 폭스 스웨덴보리를 중심한 새로운 복음과 영적 운동이 말할 수 없는 박해 가운데서 발흥된 것이니 이것이 제2 종교개혁이요 이제 제3 문예부흥에 뒤이어 또 한번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니될 단계에 머물러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기독교에 새로운 개혁운동이 일어나지않을 수 없다는 현실이 더 긴절하게 요망되고 있는 것이지만 복귀원리로 보아도 필연적인 노정으로 남아진 것이다.
이제 정치적인 면에서 일어난 변혁을 보더라도 3단계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봉건사회는 제1 문예부흥과 제1 종교개혁의 내적인 역할로 붕괴되었고 전제군주사회는 제2 문예부흥과 제2 종교개혁의 내적 원인에 의하여 완전한 하늘나라로 바꾸어지지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이제 종교와 정치의 변혁에 따르는 경제개혁도 3단계의 과정을 거치어 발전되어온 것이니 증기에 의한 제1 산업혁명이 있었고 전기와 가솔린에 의한 제2 산업혁명이 있었으며 이제 원자력을 이용한 제3 산업혁명은 오늘 우리의 당면 과업으로 남아진 것이다.
이제 제3 문예부흥에 의한 공산세계는 괴멸될 것이며 제3 종교개혁에 따르는 신정시대는 올 것이요 이 시대에는 제3 산업혁명에 의하여 고도로 발달된 원자력에 의한 경제사회가 건설될 것이니 이것이 곧 하나님이 6천년 동안 바라시고 이루시려던 에덴동산인 것이다.
二 .사상의 성숙
지금까지는 이 기간에 있어서의 정치와 경제가 한날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전단계의 것으로 어떻게 성숙하여왔는가를 설명하였다. 다음으로는 전시대에 있어서 가인과 아벨의 두 갈래의 인생관으로 갈라진 사상계는 어떻게 성숙하여왔는가를 알아보기로하자.
어떠한 피조물이든지 원리를 떠나서 창조된 것이 없다함은 이미 상술한 바와같다. 그러므로 유형실체세계와 그의 총합실체상으로 된 육신은 물론이어니와 무형실체세계의 그의 총합실체상으로 된 영인체도 원리를 떠나서 창조되었을 수는 없다. 유형실체세계의 원리를 캐어 그 본연의 성상을 찾아나아가는 방법을 자연과학이라하고 무형실체세계의 원리를 찾아서 그 본연의 성상을 찾아 나아가는 방법을 초자연과학이라한다.
그러면 유형실체세계는 자연과학의 원리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무형실체세계는 초자연과학의 원리에 의하여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세계는 완전한 수수의 관련성을 갖고 있는 화동의 세계이므로 이 두 세계의 자연과학과 초자연과학도 완전한 수수의 관련성을 갖고 완전히 조화되어 어떠한 상충적인 면도 없는 입체적인 과학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이 두 세계는 두 세계의 총합실체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중심하고 화동되는 것이므로 이 두 세계의 과학은 하나의 인간에서 조화되어 전체적인 창조의 목적을 향하여 동하고 정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육신과 영인체가 분리된 입장에 서게되었으므로 유형실체세계와 무형실체세계가 서로 화동하여 조화될 수 있는 입장을 취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자연과학과 초자연과학도 또한 그렇게 되어 창조목적을 지향하는 입체적인 과학을 찾지 못한 것이다. 자연과학도 그 자체만으로써 해명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복귀섭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 두 과학에 의한 두 세계의 원리를 찾아 육신과 영인체로 하여금 창조본연의 원리적인 상대기준을 조성케 하여 창조의 목적을 달성케 하려는 섭리를 말하는 것이다.
종교는 이 목적을 달성케 하려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임으로 종교와 과학이 상충적인 입장을 취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반드시 이 두 과학이 유기적인 입체적 연관성을 갖고 요구하는 목적을 지향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영인체와 육신이 완전한 수수관계로써 조화융합하는 것이 본연의 인간이어늘 이 두 면의 존재를 지배하고 있는 두 면의 과학을 조화시키는 방향을 떠나서 어떻게 본연의 인간을 찾으려는 종교의 목적이 달성될 것인가.
그러면 과학이 발달되어 인지가 밝아짐에 따라서 종교혁명이 반복되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알아야할 것이다.
종교는 두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과학과 초자연과학이 유기적인 입체적 연관성을 갖고 요구하는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므로 이 두 과학의 발달에 따라서 종교도 발전성을 갖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한 시대에 있어서의 교리는 과학이 발달된 다음 시대의 인간을 영도할 수 있는 종교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민족과 종족에 따라 각각 다른 종교를 갖게되며 같은 종교에 있어서도 시대를 따라서 많은 개혁을 하게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며 말세가 다가옴에 따라 종교가 분열되면서도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로 귀일되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총서 참조)
문예부흥 이후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라서 흐르는 평면적인 사상은 가인적인 인생관을 수립하였으며 이에 초자연과학의 발전과정을 따라 흐르는 입체적인 사상은 아벨적인 인생관을 수립한 것이다. 그리고 계몽사상기의 가인적인 인생관이 성숙하여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상체계가 나타났다. 경험론자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 실증주의 콩트(Comte 1798~1857) 진화론자 다윈(Darwin 1809~1882) 등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상을 전개시키는 동시에 포이어바흐(Feuer Bach 1804~1872)의 유물론을 채택하고 이에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성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가인적인 최종의 우주관 인생관을 만들어냈다.
이에 따라서 아벨적 인생관도 성숙하여 신칸트 학파의 빈델반트(Windelband 1848~1915) 릭케르트(Rickert 1863~1936)를 위시하여 실존주의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 키에르케고르(Kierkegoard 1813~1855) 등등의 인물이 나왔으며 영계의 사실을 지상에 잘 드러낸 인도의 성자 싼다씽이 나와서 가인적인 인생관과 대결하게된 것이다.
인류역사의 종말기로 들어오면서 이 두 인생관은 이와같이 각각 성숙되어온 것이니 여기에 천륜의 신비가 그 면목을 드러내면 이 두 인생관도 하나로 통일되고 모든 종교도 하나의 진리로 통일되며 따라서 모든 철학과 윤리 역시 하나의 완전한 진리 밑에 귀착될 것이다.
제4장 복귀섭리 완성시대(1920~)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당한 첫째 시험과 같은 시험을 세계적으로 넘어야할 복귀노정이 인류 앞에 남아진 것이 바로 제1차 대전이 발발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의 하나라는 것은 이미 상술한 바이다.
예수께서 첫째 시험에서 승리함으로써 사탄의 손에 쥐어져있던 돌 즉 말씀의 실체된 자신을 복귀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것과 같이 1차 대전의 승리에 의하여 하늘적 세계에서 사탄 편 세계를 괴멸함으로 말씀의 실체로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탕감복귀의 기대가 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1차 대전의 패전에 의하여 사탄 편 아담표시의 존재인 카이젤이 망했다는 것은 1차 대전의 승리에 의하여 하늘 편의 제3 아담을 중심한 섭리가 시작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짓것이 참것과 같은 모양으로 먼저 나타나는 것이 복귀섭리노정에서 보여지는 원리적 현상임으로 1차 대전이 종료되어감에 따라서 스탈린을 중심한 공산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은 재림주를 중심한 창조이상 세계가 이루어질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예수 이후의 사탄분립의 섭리는 이 세계를 두 형으로 갈라세우는데 이르렀고 제1차 대전이 하늘 편 세계의 승리로 돌아감에 따라 예수재림의 기대는 조성되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은 이러한 탕감복귀의 섭리로 보아서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과 성신을 중심하고 조성하여온 세계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 메시아는 재강림하셔서 복귀섭리 완성시대는 시작되는 것이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이루시는 시대임으로 완성 성약시대라고 한다.
피조세계는 원리로써 창조되었음으로 잃어버렸던 이 세계를 다시 찾으심도 원리를 떠나서는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탄까지도 강제로 굴복시키지 않으시고 원리에 의하여 자연굴복할 때를 바라서 나오시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피조세계의 주관자로 창조되었음으로 천사까지도 주관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며 따라서 사탄까지도 주관할 수 있는 기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직접주관할 수 있는 완성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기준까지 올라오게하기 위한 섭리를 하여오신 것이다. 소생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세우시어 사탄굴복의 길을 보여주셨고 장성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과 성신이 합하여 이 길을 실천함으로써 사탄 굴복의 길을 보여주셨고 완성 성약시대에는 성도들 각자가 이 길을 실천함으로써 성도들 자신이 사탄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책임이 있기 때문에 타락인간에 대한 복귀섭리도 그 제1 책임분담을 하나님 자신이 지시기 위하여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어 계시로써 인도하셨고 다음에는 타락의 책임이 아담과 해와에게 있으므로 제2 책임분담으로서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과 성신이 인간조상 대신으로 오시어서 계시로써 인도하셨고 다음에는 제3 책임분담으로서 성약시대에는 영계에 있는 전 성도들이 재림하여 지상의 성도와 합하여 사탄을 굴복시켜야한다. 그러므로 성약시대는 성도들의 시대로서 삼위신은 안식하여야할 시대다.
특히 1차대전 이후 약 40년 간은 영계와 지상의 모든 성도들이 합하여 사탄과 최후의 판가리싸움을 하지않으면 아니될 시대다.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걸은 민족적 가나안 복귀의 40년 광야노정을 예수게서 재림하셔서 되풀이하여 걷는 기간이 바로 1차대전 이후 40년 기간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 간을 민족적으로 당한 그 모든 고난을 전인류가 세계적으로 당해야할 기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광야시대」라고 하는 계시를 받고있는 것은 이러한 원리적 노정을 세계적으로 걷고있는 때인 까닭이다.
제1절 복귀섭리로 본 역사발전과 제3차대전의 의의
선으로 창조된 인간시조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음으로 그는 선과 악의 두 성품의 모체가 되었다. 이 두 성품이 분립된 표시적 존재로서 가인과 아벨 두 자식이 있었는데 가안이 아벨을 살륙함으로 아담과 해와가 뿌린 악의 터 위에 악의 열매를 맺게되어 인류역사는 선으로 출발해야할 원리노정을 악으로써 먼저 출발하여 인류 죄악사를 이루어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개체에 있어서도 아벨적인 존재인 마음과 가인적인 존재인 몸이 있어서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여 하나님께 귀일하려하나 마치 가인이 아벨을 살육하듯이 몸은 마음의 명령을 거역하여 그의 지향하는 길을 막고 방해하여 마음과 몸의 싸움은 날마다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목적은 몸을 마음에 굴복시켜 원리적 자아의 미를 복귀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과 악의 싸움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또는 국가와 국가와의 사이에도 벌어지는 것이니 이와같이 인류역사는 선의 목적을 지향하는 선주권과 이를 방해하는 악주권 간의 투쟁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탄을 중심한 비원리세계는 먼저 이루어 나오고 있는데 인류역사의 목적은 창조이상이 실현된 선의 세계를 복귀하려는데 있음으로 사탄 편 중심인 악주권을 하늘 편 중심인 선주권으로 바꾸기 위한 투쟁은 불가피한 섭리로서 역사노정에 남아진다.
그러므로 역사상에서 전개되는 모든 전쟁과 투쟁은 먼저 출발한 악의 판도를 빼앗아 넘겨 선의 판도를 확장하기 위한 섭리에서 벌어지는 필연적 현상이다. 즉 인류역사는 사탄분리의 역사임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사탄을 분립하여 내려온 것이다. 혹은 노아심판이나 소돔과 고모라를 멸한 것과 같은 천재로써 혹은 전쟁으로 혹은 질병으로 이 목적을 수행하여 오셨다. 근시안적 견해로 보면 이 모든 비참상은 불행으로만 그쳐지는 것같이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전체적 역사 섭리로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하여 사탄을 분립하여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도 결국은 선을 목표로 하는 종교국가의 승리로 돌아갔고 종교국가가 타락하면 다른 세력으로 이것을 쳐서 경성시켜 내려왔다. 악세력이 일시 승리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도 선주권을 세우기 위한 탕감적 섭리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소유권 제도가 발달되는 것도 승리는 결국 하늘 편의 것임으로 한번 취한 것에 대하여는 사탄이 재침범치 않도록 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유물사관적 인류역사의 발전단계를 보면 이것도 사탄분별의 복귀역사와 상사의 형선으로 전개된 것을 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이 지적한 발전단계는 (一)원시공산주의시대 (二)씨족사회주의시대 (三)노예주의시대 (四)봉건주의시대 (五)자본주의시대 (六)제국주의시대 (七)사회주의시대 (八)공산주의시대로 구별하고 있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런 발전과정을 형성하였는가하는 것은 복귀섭리의 원리를 모르면 해명되지 않을 것이다.
원시 공산주의시대에서 시작된 인류역사가 다시 원시시대형으로 돌아가서 공산주의시대를 재현한다고 보는 것은 인류역사라는 것을 의미함이요 원시 공산주의시대에서 씨족사회주의시대로 떨어지는 것은 사탄편 세계를 분기하여 씨족단위로 분립케한 후 선과 악의 상통의 길을 막음으로써 선의 터를 넓히기 위함이다.
다음으로 노예주의시대가 연하여 오는 것도 분립된 소유를 보지하여 하늘 편과 사탄 편의 판도를 갈라세우기 위함이요 다음으로 자본주의시대로 전환되는 것도 사람과 재물을 취하여 각자의 판도를 넓히고 강화함으로써 서로 세계를 정복하기 위함이다.
자본주의는 일찍이 노예주의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봉건주의시대를 거쳐 그 이후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발달하여 왔다. 각국은 자본을 중심하고 서로 융흥하여 그 세력은 점차로 제국주의시대를 초래하여 세계제패의 추세를 갖게 된다.
다음으로 오는 것은 사회주의시대로서 현세를 이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논하여 공산주의시대에로의 전환기임을 지적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형태의 하늘 편 세계의 전개를 사탄 편이 먼저 흉내내어 출발함으로써 원리형인 비원리 세계를 앞서서 이루어 내려오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민족으로하여금 아말렉족을 정복하게한 것이며 여리고성을 파멸하고 가나안 7족을 패망케한 것도 사탄을 갈라세워 하늘 편의 판도를 넓히기 위함이었다. 무릇 전쟁이란 것은 이와같이 사탄 분립을 위한 섭리로서 수행되는 필연적인 현상임으로 하늘 편을 대신하여 사탄 편 세계를 괴멸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정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신자로서 사탄형의 공산주의국가를 타도하는 전쟁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는 행위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살륙행위는 마치 함 개인의 타락행위에 의하여 노아의 가정에 사탄이 침범한 것과 같이 선 자체에 사탄 침범의 조건을 성립시켜 하늘 편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불의가 되지만 사탄 편의 세계를 괴멸하기 위한 전쟁의 살륙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목적을 달성키 위한 사탄 분립의 목적을 이루는 행동임으로 정의로 세워지는 것이다.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셨으니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인가. 개체를 두고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본성본연의 자아를 복귀하는 것이요 전체성을 두고 논하자면 창조본연의 이상세계인 에덴을 빨리 복귀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훈도 결국은 타락성본성을 벗어버리고 창조본성의 자아를 복귀하기 위한 사탄 분립의 방법을 교시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야곱과 모세가 각각 하란과 애급을 떠날 때에 그들의 재물을 절취하여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온 것도 인간 도덕으로만 생각하면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복귀섭리의 원리노정을 맞추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는 행동임으로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 뜻에는 의로운 것이 되었다. 구약성서를 보면 이와같이 인간 도덕면으로 생각하여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 하나님 앞에 의로 세워진 예가 많이 있는데 그 이유도 그 모든 행동들은 바로 탕감복귀의 원리적 섭리를 맞춰야할 하나님의 뜻을 위한 행동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가인적인 존재와 아벨적인 존재를 둘러싼 탕감복귀를 목적한 싸움은 개체에서 비롯하여 가정으로 사회로 국가로 결국에는 세계와 하늘 땅으로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도 명시한 바이지만 피조세계의 주관성은 인간에게 허락한 약속임으로 가인적인 존재에게도 이 약속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하늘 편의 세계와 사탄 편의 세계를 둘 다 같이 이루어가는 노정을 취해온 것이니 제1차 제2차 대전으로 인하여 가인적 세계형으로 공산주의 세계와 아벨적 세계형인 민주주의 세계는 완전히 분립하게된 것이다. 하늘 편 세계를 대표한 미국과 사탄편을 대표한 소련이 합류되었다가 2차대전이 끝나자 완전히 대립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사탄 분립의 섭리에서 되어진 결과인 것이다. 이와같이 인류역사 이래의 선과 악의 투쟁은 공존 공영할 수 없는 두 세계의 분립으로 정리되었다. 이제 한편만 패망하면 하나의 세계의 형태는 이루어질 것이다. 세계대전은 외적으로는 유형세계를 쟁탈하기 위하여 비행기와 잠수정으로써 공중과 지상과 수중에 벌어졌던 지상세계에 있어서의 입체적인 전쟁이지만 내적으로는 무형세계를 쟁탈하기 위하여 하늘 편과 땅 편이 갈라져 싸우는 영적세계에 있어서의 입체적인 투쟁이다.
한편 가인이 아벨을 살륙함으로 인하여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파탄되어 아담을 완전히 사탄세계에로 내어주었고 따라서 에덴을 완전히 사탄주관세계에로 내어주었음으로 이것을 완전히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아벨적인 세계형인 민주주의세계에서 가인적 세계형인 공산주의세계를 타도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렇게하여서만 가인이 아벨에게 굴복한 입장을 세계적으로 탕감복귀할 수 있으며 따라서 복귀한 아담 즉 제3차 아담격자로 오시는 재림주를 맞아 잃어버렸던 에덴을 다시 찾아 인간시조가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나온 것과 같은 세계를 일시에 이루어 맞출 수 있는 것이다. 1차대전이 종료됨에 따라서 메시아의 재강림에 의하여 이루어질 하늘적인 세계를 사탄이 먼저 흉내내어 스탈린을 중심하고 이루어 나오는 것이 공산세계라는 것은 이미 논한 바이다.
그러므로 탕감복귀원리에 의하여 공산주의세계는 반드시 괴멸되어야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공생공영 공의주의세계가 도래할 것이므로 사탄편인 공산세계에서 하늘 편인 민주세계에 자연굴복하여 가인이 아벨에게 굴복한 세계적인 입장을 찾아세우지않는 한 제3차 대전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제3차 시험을 승리한 후에야 개성 복귀에서 신부성 복귀를 거치어 우주주관성을 복귀하신 것과 같이 전 인류도 이 3차에 걸친 사탄과의 세계적인 싸움에 승리한 후에야 천주복귀의 이상을 실현하게될 것이다.
제2절 6000년 복귀섭리의 최후의 실마리는 어디서부터 풀릴 것인가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여 6000년의 유구한 복귀섭리노정을 굴러 내려온 인류역사는 드디어 두 세계를 빚어 놓았다.
하나는 하늘 편이요 하나는 사탄편이다. 이제 대주재 하나님은 눈물과 피로써 엮어진 복귀섭리를 통하여 벌써 산양과 면양의 두 진영의 세계로 갈라 놓으셨다. 이제 다시 한번 능력의 팔을 드시어 산양을 멸하시면 이 때에 면양의 목자는 개가도 높이 영광 중에 현현하시리니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노랫소리와 아울러 게으른 다섯 처녀의 울음소리 이를 가는 소리 가슴을 치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케할 것이다.
이제 다시 분별의 손길은 면양에게 옮겨질 것이다. 어진 목자, 저는 바로 언젠지도 모르게 구름을 타고 오셨고 도적같이 임하신 분이시니 음성도 새로워 혹 기라하고 혹 아니라하며 하나는 따르고 하나는 배척하리니 맷돌 가는 두 여인이 서로 갈리고 한 자리에 누운 부부가 서로 떠나며 부자의 혈연이 끊기고 형제자매의 사랑이 서로 갈리며 친구의 의분이 멀어지며 사제의 관계가 끊어져 혈육의 알력과 동족의 상극 동신도 간의 핍박은 날로 심하여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종말관 그대로(마 10/34~36)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병기를 일으키게될 것이며 한 집안에서 원수가 생기에 서로 네어주게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말세의 현상은 어디로부터 시작될 것인가? 하나님은 아담으로부터 2000년을 애쓰시어서 비로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한분을 세우셨고 그로부터 번식된 이스라엘민족을 선민으로 세우심은 하나님의 뜻만을 잘 받들 수 있는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여 그 기대 위에 오신 메시아를 신종하고 순종함으로 4000년 간 섭리하신 열매를 저들로 하여금 거두게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천륜을 배역하는 것을 보시고 그리스도는 무어라고 말씀하셨나. 그들은 농장을 맡은 불의한 농부에 비유하면서 그 나라를 빼앗아 열매맺는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하시었으니 (마 21/33~44) 이것은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를 살해함으로 하늘나라를 이루어야할 사명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열매 맺는 다른 나라에게 주시겠다는 뜻이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자기를 살해할 그 백성에게는 재림하시지 않을 것을 이미 분명히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논술한 복귀섭리로써 잘 이해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자기를 배반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존재를 중심하고는 아무 섭리도 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민족에게 재림하실 것으로 말씀하심은 어떠한 이유에서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스라엘이란 명사는 얍복강에서 야곱이 천사와의 씨름에서 승리하였음으로 승리하였다는 뜻으로 받은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승리한 민족을 칭함이요 그 혈통적인 민족을 말함은 아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마음에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하지말라 내가 너희게 말하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하시리라」(마 3/9)고 말하여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계승한 자손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명시하였고 바울도 육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요 영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하였다(롬 9/6~8).
애급에서 400년 고역을 마치고난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약속한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으로 예정되었던 것이나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애급을 출발한 사람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민족은 전멸하였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치 못하였음으로 야곱의 손이면서도 이스라엘이 아니었고 여호수아와 갈렙과 그 후손만이 이스라엘의 후예로서 그의 사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왕 직후 여러보암을 중심하고 10지파로 구성된 북조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배신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멸하고 2지파를 중심한 남조 유대국만이 선민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선민 중에서도 선민으로 불리운 유대나라이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 인하여 그들도 역시 선민 이스라엘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합당하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음으로 구원의 은사는 이방인에게 돌아갔다(행 13/46, 롬 11/11). 이와같이 선민의 자격은 예수를 잘믿는 이방인에게로 옮겨졌음으로 예수재림의 영광의 혜택을 누릴 민족도 팔레스타인에서 육성되어 그리스도를 살해함으로 천륜을 반역한 아브라함의 혈통을 계승한 민족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앙을 계승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리스도의 복음의 열매를 맺음으로 영적 이스라엘된 다른 민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 날의 영광을 위한 영적 이스라엘은 어디서 부름을 받을 것인가. 사도요한은 구원의 역사는 동방에서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다(계 7/2). 계시록 6장 12절에서 여섯째 인봉의 개봉을 마치고 최후의 봉인을 풀기 전에 중간 삽경으로서 제7장을 기록하였는데 최후의 하나님의 구원의 뿔(각)이 들리울 곳은 동방임을 표시하였다. 즉 최후의 심판에서 택함을 입을 14000무리에게 찍을 인은 동방 해돋는 나라에서 천사가 가지고 나온다는 것을 명백히 표시하였다.
그러면 동방의 어느 민족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여 재림주님을 맞을 수 있는 영적 이스라엘된 혜택을 입을 것인가. 하나님은 스스로의 몸으로 창조된 인간이 타락된 후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한탄하였다(창 6/6). 그리고 이 탄식은 창조이상이 완전히 실현될 때까지 연면히 지속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뜻을 이루기 위한 뜻의 대신사명을 갖고 땅위에 태어난 어느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도 고난과 핍박의 비애를 면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신음하는 부모를 옆에 두고 단잠을 자고 있을 효자가 있을 것인가. 그러면 동방에서 오랜 역사를 두고 가장 비참한 역사를 꾸며내려온 민족은 어느 민족일 것인가. 선과 악은 하나의 사랑을 중심하고 방향을 달리한 것임으로 선과 악은 동일점에서 되어짐으로 이 점상에 입각하게 될 때 바른 방향을 취하지 못하면 선악을 분별할 수 없는 혼돈상태에 빠지게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악의 주권을 선의 주권으로 빼앗아 뒤넘겨야할 복귀섭리의 최종의 사명을 담당한 민족에게는 반드시 이러한 교차점 상에 서서 방황할 때가 올 것이다. 즉 중심을 어디다가 두어야 할는지 혼돈하여 지금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외의 그 어떤 다른 것을 자기도 모르게 찾아서 헤매게될 것이다.
그러면 동방에서 가장 혼돈상태에 빠져 중심을 잃고 침식을 잊어가면서 산으로 들로 헤매는 민족은 어느 민족일 것인가. 재강림하시는 주를 맞아 에덴 복귀의 중심이 되어야할 사명을 띠고 난 민족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민족임으로 사탄이 가장 증오하는 민족이요 하나님이 제사장 국가로 세우시려는 국가임으로 사탄이 최대의 역량을 발휘하여 파괴하려는 국가요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의 역사가 하늘 편 중심한 선주권의 역사로 교체되는 지역이요 국가요 또 민족임으로 6천년 섭리역사의 가인적인 결실과 아벨적인 결실이 이 지역에서 이 국가의 민족을 중심하고 동시에 맺혀져 하늘 편과 사탄 편이 서로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게될 것이요 따라서 인류역사 이래 미증유의 쟁탈전이 벌어져 온갖 신산고초 속에 비애의 탄식을 면할 수 없게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사탄의 증오, 하나님의 건설과 사탄의 최후적인 파괴공작이 벌어지는 곳 이곳의 분쟁이 곧 세계분쟁의 출발점이요 이곳의 평화가 곧 세계 평화의 초점이 될 것이니 전 인류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자석에 끌리는 철분같이 이 지점을 향하여 끌리워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마음이라 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으로 그 마음이 끌리지 않을 것인가. 그러면 동방의 어떤 지역의 어느 국가민족을 중심하고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바리새교인들이 주께서 어디로 다시 오시겠는가고 묻는 말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은 「주검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눅 17/37)고 하시었다. 선과 악이 하나에서 출발했으니 생명과 사망도 기쁨과 설음도 웃음과 한숨도 하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 것인가. 이제 악은 동일한 초점에서 선으로 바뀔 터이니 사망도 동일한 접촉면에서 기쁨과 웃음으로 뒤넘어갈 것이다. 이와같이 주검있는 곳에 산 사람이 있을 것이요 주검있는 곳에 모이는 독수리는 산 사람 있는 곳에 모이는 천사와 동일한 지점에서 뒤넘이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찾아오는 사탄은 바로 산 사람을 찾아오는 주님과 동일한 선에서 접촉될 것이다. 그러면 주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는 말씀은 무엇인가하면 이와같이 도탄 중에서 사망과 더불어 싸우는 민족으로써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서 그 곳으로 다시 오시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동방의 어떤 지역의 민족을 중심한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가. 몸 굽여 땅에 엎드려 비운의 민족으로 태어났음을 한탄하고 있는 사랑하는 동포들이여 이제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고 들으라 기쁜 소식을 전하겠노라. 눈물어린 눈을 닦고 보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드리겠노라. 이 땅을 바로 에덴을 지으셨거늘 당신의 눈에 보이는 땅과 하늘이 바로 그 에덴의 그 땅과 그 하늘이러니 벌써 어느 사이엔가 낡은 햇빛과 달빛은 다 어두워지고 별도 또한 간 곳 없고 천사장의 나팔소리조차 들린지도 오래거늘 구름 타고 오시마 하신 주님은 목수의 가정에 30년을 감추셨던 그 몸을 어디로 다시 오사 감추시기 몇몇해런가.
하늘도 좇아 내려온 새 예루살렘이 바로 이 땅이어니 오랜 탄식에 백발된 백두산도 눈물지어 천지요 두만강 압록수로 흘러 동해와 황해를 이루더니 금강산 보석을 등에 지고 내리지도 못한채 꿇어앉아 손모아 합장하며 신랑 맞는 기도를 올리기 6000년, 삼천리 강산 위에 삼천만 민족이 손길을 모우고 3천교단을 제물로 드리는 3·1정신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하사 몸소 계오실 장막을 한 나라 한 민족으로 하여금 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세세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리로다(계 21/3).
이제 6000년을 흘러온 눈물을 우리 눈에서 다 씻어 주시고 알파로 시작된 인류죄악사는 이 땅에서 오메가로 끝날 것이니 이제 우리는 빨리 죄악의 피묻은 옷을 빨아입고 에덴의 생명나무에로 나아가야 하리로다(계 22/14, 계 22/19). 유대 백성이 제단국가를 우리들의 손으로 다시 일으켜 다시 오시는 주님을 합당한 제물로 다시 바쳐 사망에 허덕이는 인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제단국가이길래 이 국가를 삼팔선으로 쪼개어 하나는 가인상징으로 사탄 편에 세웠고 하나는 아벨상징으로 하늘 편에 세워 놓았으니 이제 우리는 뜻맞는 헌제를 드려야 가인과 아벨의 입장을 세계적으로 탕감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 삼팔선은 인류역사 이래에 혼동되어 뒤넘이쳐 오던 선과 악을 분립하여 생명과 사망을 가르며 빛과 어둠을 분립하여 섭리노정에 맺혔던 설음과 탄식 모든 눈물과 온갖 불행을 기쁨과 웃음으로 뒤집어 넘겨야할 하나님과 사탄의 최후의 결전선인 것이다.
6000년의 투쟁역사는 이 전선에서 종지부를 찍을 것이니 이 최후의 결전에 하늘 편과 사탄편의 민족들이 총궐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삼팔전선에 모든 국가들이 참전하게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니 영원한 조국의 광복에 면목을 세우기 위하여는 이 땅에 정의의 피를 흘리고 의의 뼈를 묻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그러면 이 전선에 하늘을 대신하여 역사적인 죄악을 탕감하기 위한 정의의 피를 어느 민족이 가장 많이 흘렸는가. 아벨이 흘린 정의의 피가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듯이(창 4/10) 이 민족이 흘린 정의의 피의 호소가 가장 많이 이 전선에서 들려지고 있으니 이것은 이 민족이 바로 앞날의 영광을 누리기 위한 제물된 민족인 까닭이다.
애급에서 발단된 고대의 대륙문명은 희랍 이태리의 반도문명으로 옮겨졌고 이 반도문명은 다시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영국의 도서문명으로 종결지어야할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님 당시에 이태리 반도를 중심하고 종결지어야 할 문명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다시 대륙을 거치어 되돌아와서 한반도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는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도 그렇지만 산수의 경색과 기후의 명랑성을 보더라도 과연 동방에 오시는 주님은 이곳을 떠나 다른 지역에 없으리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기후와 바탕는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 이 땅이 하도 탐이 나서 모든 강국이 먹었다가는 토하곤하는 바람에 그 본래의 바탕은 이리저리로 찢기고 흐려졌다.
더구나 가인형과 아벨형을 열매맺어야할 역사적 사명을 띤 민족이므로 오늘의 한민족은 가장 악한 형도 가장 선한 형도 다 갖추어있다.
이제 나타난 가인형의 부분을 걷어치우고 숨어있는 아벨형의 동포들을 찾아세워 주님이 친히 나타나서 이 뜻을 이룰 수 있는 터를 닦아야할 것이다.
한민족은 선천적으로 종교심의 천품을 타고났으므로 앞날의 메시아를 대망하면서 살아온 민족이다. 그러므로 의의 왕이 배달민족에서 나와 평화의 세계를 이루리라는 신앙은 이조500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적인 고난이 심하여질수록 점점 더 깊이 이 민족의 가슴 속에 사무쳐온 것이다.
제3절 언어혼잡의 원인과 그 통일의 필연성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노아의 가정은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세우지 못하였음으로 심판 전 인간의 타락상태에로 다시 돌아갔다함은 이미 논술한 바이다.
특히 함의 후손인 가나안족들은 사탄의 뜻을 높이려고 바벨탑을 높이 쌓았는데 셈과 야벳족속들도 이 공사를 협조하여 모두 사탄의 뜻을 이루어주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음으로 하나님은 이들을 저주받은 가나안 족속에게서 분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하셨다(창 11/7). 이것은 언어를 각각 다르게함으로 상호간의 의사를 통할 수 없도록하여 사탄 편으로 가담하는 인간들을 막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사랑의 섭리다. 복귀섭리가 점점 종말기를 바라봄에 따라서 선진국가의 언어를 학습하여 과정적인 통일의 현상을 보여주고있다. 그러나 복귀섭리가 완성할 때에는 언어도 완전히 통일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사탄의 뜻을 높이려는 바벨탑으로 언어가 혼잡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높이려는 탑으로 인하여 이 언어도 복귀되어 한 나라의 한 말로 통일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주님이 사용하시는 조국의 말로 언어는 통일되어 뜻도 하나요 민족도 한 민족이요 나라도 한 나라요 말도 한 나라말로써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이 일찍이 현군 세종대왕을 세우시사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과학적인 문자를 창작케하셨으니 이 민족을 애호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
제4절 말세에 처한 한국민족의 사명
믿기 어려운 꿈과 같은 사실을 발표하고 보니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두렵다함은 필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이 발표를 보고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러하다. 과연 이 말씀이 나가서 각자의 가슴에 부딪힐 때 어떻게 결실될 것인가는 실로 생명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복귀섭리의 노정은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환경을 오늘날 우리 앞에도 그대로 되풀이하여 전개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메시아를 맞아야할 기독신도들은 옛날에 예수님을 받들어야할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입장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경성하여 그들이 걸었던 범죄의 길을 되밟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스라엘민족들은 예수께서 현현하시기 전까지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믿음과 소망으로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약역사의 열매요 이스라엘의 신앙의 목적체인 예수께서 현현될 때에는 이미 바라보고 믿고만 있을 때는 지나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목적체인 예수님을 찾아야할 때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 때를 헤아리지 못하고 옛날의 그 태도를 고집하였음으로 메시아를 보아도 보지 못하였으며 그 음성을 들어도 듣지 못하여 드디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까지 내어주어 자신이 지옥의 길을 걸은 것은 물론 천추만대에 원한의 터를 후손에게 남겼던 것이다. 보라 때는 왔으니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라 그를 본받음으로 구원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의 열매요 기독신자의 신앙의 목적체인 재림예수께서 현현하실 때가 되니 이미 바라보고 믿고만 있을 때는 지났다. 주 여호와는 그 은밀한 뜻을 그 모든 종에게 보이시지 아니하시고는 반드시 행하지 아니하시는 것이다(암 3/7).
그러므로 노아홍수도 120년 전부터 노아를 세워 알려주셨고 소돔 고모라를 멸하실 때도 그러했고 예수오실 때도 동방박사 목자 시몬 안나 세례요한 등등의 증거자들을 세우시어 메시아 강생을 알려 주셨던 것이다. 자녀를 구하시려는 것이 아버지의 심정이어든 신랑이 오실 때를 신부에게 알려 주시지 않을 것인가. 도적같이 임하신다고 하셨으나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게 임하지 못하리라」(살전 5/4)고도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은 즉 빛 가운데 있는 자녀에게는 반드시 그날을 알려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메시아 강생의 소리를 듣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마 2/2~3)고 하였으나 아기 예수를 찾아모시어 그를 옹호한 사람은 하나도 없지 않았던가.
오늘에도 만약 재림주 현현의 소동이 일어나며 동방박사의 증언이 들리게된다고 한들 우러러 하늘만을 쳐다보던 머리를 돌리고 발길을 돌려 그를 찾아 모실 자 가 몇이나 될 것인가? 우리는 재림주 현현의 소동이 어디서 들려오는가 조심하여 들어보자. 동방박사의 걸은 자국이 어디나 남아지지 않았나하고 살펴보자. 양치는 목자의 간 길은 어딘가고 찾아보자. 세례요한 의 음성은 어디서 들리지 않는가고 귀를 기울이자. 하늘로 구름타고 오리라고 믿던 엘리야 어찌 뜻하였으랴 인간 세례요한으로 재림할 때 2000년을 길러온 이스라엘민족은 다 넘어졌다.
그들은 육신을 벗고 보니 갈 곳은 지옥이라 생애를 두고 하나님을 봉사하던 그들의 말로가 왜이러했던고. 하늘만을 쳐다보며 재림예수를 고대하고있는 오늘의 기독신도들이여 만일 예수께서 지상에서 여인의 몸을 빌어 강생하시면 이를 믿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되었는가.
그러므로 「믿는 것을 보겠는가」(눅 18/8)고 주는 탄식하신 것이다. 그들의 받은 은사가 혹은 선지자며 혹은 병고치는 능이며 혹은 사귀를 쫓는 능을 받았으리만치 크더라(마 7/22) 주께서 다시 인간으로 지상에 태어나 오실 때 저를 반대하면 그 순간부터 그대는 지옥의 나그네될 것임을 옛날의 이스라엘민족의 말로를 보아 알아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는 이런 사람들을 보시고 「그때 내가 저희더러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아지 못하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23)고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로 그를 찌른 그 손 바로 그를 흘려본 그 눈 바로 그를 욕설한 그 입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후일에 그 분이 만민 앞에 공의로 영광 중에 나타나는 것을 볼 것이니 그때에야 어떻게 이를 갈며 애곡하는 가련한 자가 됨을 면할 것인가.
다시 오시는 주님은 새로운 말씀을 가지고 오셔야할 것이다. 재림주는 첫 번 오셔서 다 이루시지 못한 유업을 다시 오셔서 계승완성하시려고 오시는 분이시니 먼저 오셨을 때 말씀하시려다가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다하지못하고 가신 말씀(요 16/12)을 다시 오셔서 하실 것이다.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하거든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고 하시면서 믿지못할 것을 염려하시어 감추어 두신채 승천하신 주님이심으로 다시 오시면 이 하늘의 말씀을 선포하실 터이니 이런 새로운 하늘의 말씀을 전하시는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분을 주로서 믿고 따를 수 있을 것인가. 겸손한 자 중에도 가장 겸손한 자가 되어야하며 어린아이 중에도 가장 어린 아이와 같은 성품을 가져야할 때는 왔다.
인습적인 신앙관념의 탈을 쓰고 전통적인 고루한 교리에 집착되어 있음을 볼 때 주는 다시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라」고 책망하실 것이 아닌가. 형제들이여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마음의 가냘픈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새로운 구원의 음성은 형제의 가슴 속 어느 부분에 공명되어 마음의 명령으로 들려질 것이다. 옛날 제사장 교법사 바리새교인들은 이 마음의 음성을 그 지위와 명예와 권세와 전통으로써 말살해 버렸던 탓으로 메시아를 살해한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울린 숨은 신앙의 흐름은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서 토로한 고백으로 표현되었으니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려는 신앙은 역시 마음의 가냘픈 명령으로써 그들에게도 들려왔던 것이다.
말세에 하나님은 영을 많이 부어주시마고 약속하셨다(행 2/17). 그 목적은 자녀와 젊은이와 늙은이들로 하여금 장래일을 예언하며 혹은 환상으로 혹은 꿈으로 앞날일을 계시하시기 위함이다.
지금 신약의 완성시대에 처한 신앙인들 시대적 혜택을 입어 타락 직전 아담 해와의 심령기준까지 도달할 수 있는 때임으로 영계에 통하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됨은 복귀원리의 타당성을 증거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미 창조원리에서 상술한 바이지만 무형세계까지도 주관하도록 창조된 인간임으로 타락으로 인하여 그를 주관할 수 없는 입장에로 떨어졌지만 복귀섭리에 의하여 다시 복귀되어 타락전 인간의 심령기준까지 올라오면 영계를 통하게 되는 것은 자연원리로서 하등 신기한 것은 아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옛날 종의 사명으로 왔다간 선지들이 하나님과 대화한 사실을 믿으면서도 현재 예수님 앞에 신부된 우리들에게 보여지는 그 엄연한 영통의 사실은 방관시하려하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지도급에 속하는 신자들이 자기들로서는 전연 아지도 못하는 세계에서 되어지는 사실을 일소에 붙여버리려는 태도는 실로 통탄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시대의 영통인들은 현기독교인으로서는 이해못할 사실을 많이 발표하고 있다.
이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가지고 오실 새로운 말씀의 편편을 상징적으로 계시하시는 까닭이다. 우리가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이라면 새로이 영을 부어주시어 계시로써 알려주시마고 약속하실 하등의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영통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아니될 때가 왔다. 이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심혈을 경주하여 기도한 선물로서 받은 은사임을 안다면 어찌 이를 소홀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가 이제 모든 영통인들에게 권고하고 싶은 것은 이 발표의 내용의 진부에 관한 응답기도를 올려보라는 것이다.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자녀라 할진대 끝날의 생명에 관한 최후의 문제를 걸어놓고 올리는 결사적인 단판의 기도에는 반드시 응답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져야할 것이다. 만일 기도로써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영통인에게 대신 기도를 부탁하여 해결하기를 바란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기도로써 완전히 해결한 바이지만 지능만으로 그 진부를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은 하루 바삐 영적으로 해결하여 이 진리로 무장한 하늘의 정병으로 나서서 부패한 현하 기독교 혁명의 선봉의 대열에 참가하자.
기독교의 통일이 없이 종교의 통일은 기할 수 없는 것이요 종교의 통일이 없이 하나의 세계는 올 수 없는 것이다.
와서 보라. 이 진리로 무장한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성신의 역사는 옛날 마가의 다락방 120명에게 나타난 성신의 불의 역사에 비할 바 아니다. 벌써 우리는 2000년 전 그 시기에 비하여 말할 수 없이 영계에 가까워진 시대적인 혜택권내에 들어와있는 것이다. 「나를 믿지못하거든 내가 행하는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원리가 믿어지지 아니하거던 이 원리를 중심하고 일어나는 성신의 놀라운 역사와 그 결과를 보라.
설교자의 교훈은 너무도 많이 들었다. 이제는 제목만 들어도 그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들었다. 이제는 설교자의 말로는 심령의 고갈을 채울 수 없게 되었다. 사랑은 점점 더 식어가고 마음은 점점 더 클클하여 은혜의 결핍을 느껴 그 무엇으로 채워주기를 요구하여 산으로 들로 침식을 잊고 허덕이며 헤매고 있지 않는가. 바울이 이른 바 체휼적인 신앙의 갈망은 날로 심하여진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찌하여 사마리아로 갔던가. 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만을 받았을뿐 아직 성신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음으로 그들에게 성신을 받도록 기도하기 위함이었다(행 8/15).
예언도 좋거니와 환상도 방언도 성신의 불도 하늘의 노래도 좋다. 아무런 체휼적인 신앙도 없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형식적인 세례를 받는 것으로만 안심할 수 없는 때는 왔다. 때는 바로 천지가 개벽하여 뒤집혀지는 때다.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남의 아버지를 부르는 이부자식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내가 또 보매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는데 같이있는 자가 144000이니 그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그 이마에 쓴 것이 있더라(계 14/1)고 하였다. 144000무리의 하나되기를 기도하는 성도의 이마에는 주님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어서는 아니된다.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야한다. 내가 주를 알았다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안심할 시대는 지났다. 성소에 엎드려 기도만 하다가 메시아를 선포하는 세례요한의 말을 거부한 제사장 학자 교법사는 모두 지옥으로 들어갔고 그들에게 약속하였던 은사는 사마리아의 창녀와 세리와 죄인과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에게로 돌아간 것이니 지금도 바로 그 때다.
보라 지금은 바로 아버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 「이제는 내가 너를 아노라」하고 친히 아버지의 이름을 우리 이마에 기록하여 주실 것을 바랄 때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형제들이여 이제는 기도하던 머리를 들고 방방곡곡에서 들려오는 세례요한의 끝날을 최촉하는 음성을 들으라.
하나님은 이 민족이 나아갈 오직 하나의 문만을 남겨 놓았으니 이는 정치의 문도 아니요 경제의 문도 문화나 어떤 다른 문도 아니다. 오직 하늘가는 진리의 문만을 남겨 놓으시고 이 문을 지향하여 이 민족을 몰아내는 것이다. 더욱이 6·25의 동란을 거친 한민족은 육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 남은 길은 굻어앉아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는 것뿐이다.
아니갈래야 아니갈 수 없는 험한 이 길을 통하여 천국의 좁은 문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배달의 민족은 이런 돌작밭 가시길을 이리저리 쓰러지면서 갈래갈래 찢어진 피투성이 옷을 벗지 못 한 채 반만년의 길 저문 나그네의 설음의 길을 걷고 또 걸어 이제는 바로 천국문의 턱까지 당도하였다.
보라! 이제 6천년이나 굳게 닫혔던 이 문이 한반도로부터 열릴 것이니 우리는 최후의 한숨을 줄기차게 들여쉬고 이 문을 향하여 돌진함으로써 이스라엘민족이 다하지못한 사명을 우리 한민족이 기필코 이루어 드리자.
지축을 울리는 할렐루야의 찬송소리에 아울러 지극히 높은 곳에서도 천군천사 천천만성도들이 응원의 소리를 맞춰 호산나라 하리로다. 너 배달 백의의 겨레야 이제는 머리를 들고 흰 옷을 다시 갈아 입으라 눈물도 거두고 한숨도 그치라.
바야흐로 신랑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준비한 등에 불을 붙이고 다시 보라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품 속에서 포근한 잠을 자던 에덴이 예 아닌가 무화과잎도 무성한 그 사이로 보이는 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바로 그 앞길을 지키던 그룹들도 간 데 없고 무섭게 휘두르던 화염검도 이제는 걷히었다.
새 날을 약속하는 여명은 솟아나는 서광을 바라보며 어둠의 지난날을 회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