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해설
전편
제1장 창조원리
타락으로 인하여 얽히어진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하는 문제를 아는데 있다.
타락이라는 것은 창조본연의 위치를
잃어버렸음으로 창조원리적 본연성을 상실하였음을 의미한다. 창조원리를 아지 못하면 창조본연의 위치와 그 본연성을 알 수 없으며 따라서 타락의
의의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에 관한 명확한 교리를 세우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하나님과 인간과의 창조원리적 관계를 아지 못한데 있는 것이다.
인간을 중심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아지 못하였음으로 인류역사의 목적을 아지못한 것이다. 인간시조가 타락행위를 하는 것을 하나님이 간섭치 못한 이유, 인간을 중심으로한
무형세계와 유형세계와의 관계 등등의 문제도 창조원리를 이해하는데서만 해결될 것이요 삼라만상의 생존과 모든 생명체의 번식과 물질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의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랑과 미와 선과 의는 무엇인가하는 것도 창조원리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명하려 애쓰는 우리에게 있어서 창조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제1절 하나님의 이성성상과 피조세계
자연계의 진리를 찾는 것도 그러하지만 영적인 세계의 진리도 귀납적인 논리로써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피조세계에 나타나 있음으로 우리가 이것들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실존과 그 능력을 부인하는 것은 핑계가 되지않는다고 경계하였다(롬 1/20).
이와같이 우리는 피조세계를 보아
모든 피조물은 주체(+)와 대상(-)의 이성성상의 실체적 전개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원리를 세울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는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그의 대상인 해와를 창조하신 후에야 선하다고 하셨다
(창 1/31,2/18).
첫날에는 빛(+)과 어둠(-)을 창조하셨고 다음날에는
궁창을 창조하시어 상(+) 과 하(-)를 구분하셨고 다음날에는 땅(+)과 물(-)을 갈라세우셨고 그 위에 웅예(+)와 자예(-)로 씨를 맺는
채소와 과목을 창조하셨고 다음날에는 해(+)와 달(-)을 창조하셨고 그 다음날에는 웅(+) 자(-)로 번식하는 동물을 창조하셨다. 이와같이
주체가 대상을 가지지 않고 존재하는 피조물이 없는 것은 이성성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닮아서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닮게하기 위하여 인간을 1남 1녀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으니(창 1/27) 이 말씀을 귀납적으로 추론하면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존재이며 남성격 주체로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남성격이기 때문에 아버지라
불러 그 격위를 표시하는 것이며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고전 11/7) 기록되었고 또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그를
닮아서 창조된 피조물은 이성성상의 실체적 존재로 전개된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세계는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이 창조원리에 의하여 형상적 또는 상징적인 실체로서 전개된 개성진리체로 구성되어있는 실체대상이다.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인 실체대상이 인간이요 상징적인 개성진리체로 구성되어있는 실체대상이 피조세계다.
자연계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핑계가 되지 않는다고 진술한 바울의 증언(롬 1/19)도 그러하지만 흔히 자연계를 불러 제2성서라함도 하나님을 닮아서 생겨난 피조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피조물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개성진리체로서 상대적 존재를 대하여 상대기준을 조성치 않고는 그의 존재기대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형세계(+) 에 대한 유형세계(-)를 창조하셨고 인간도 영인체(+)와 그에 대한 육신(-)이 있으며 또 물질의 분자도 전리되면 반드시 양(+)이온과 음(-)이온의 양성으로 분리되며 원자도 양자(+)를 중심하고 회전하는 전자(-)로써 구성되었고 음파도 밀(+)과 소(-)의 파동으로 생기며 빛도 양음의 상대적 파동으로 생기는 것이다.
동서와 남북, 전후와 우좌, 상하와
고저, 장단과 광협, 강약과 억양, 보편과 특수, 전체와 개체, 정신과 물질 등등으로 보여지는 피조세계는 전부 이러한 이성성상의 상대성
창조원리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동양철학의 위대성을
재인식하게되는 것도 그의 논거가 음양원리에 입각했다는데 있는 것이다. 최근에 오면서 권위를 더해가는 한의학도 음양의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제2절 피조물의 완성과 그의 성장기
I 성장기의 질서적 3단계
피조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시간성을 무시하고는 그의 결과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현상이나 화학적
현상이나 기타 어떠한 현상도 시간의 경과가 있은 후에야 그의 결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과정이 그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즉 피조물은 성장하는 시간적인 과정을 경과한 후에야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거늘 하나님이 빛을 보시니 선한지라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하시고 어둠을 밤이라하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날이러라」(창
1/5)고 기록되었다.
하루의 창조가 끝나고 밤을 지나 이튿날 아침이 되면 둘째날일 것인데 첫째날이라고 기록된 것은 피조물이 완성될 때까지는 성장하는 기간이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창조된
피조물이 그 피조물로서의 실현이 완료된 때가 저녁이다. 말씀이 실체로서의 실현이 완료되었을 뿐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피조물은 성장기간인
밤기간을 경과하여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된 피조물로서 창조의 목적을 향하여 첫출발을 하게 되는 것임으로 이날이 바로 첫째 날이 되는
것이다.
만일 피조물이 성장기간이 없이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과 동시에 완성되었다면 전피조물의 창조가 끝나기까지의 6일이라는 기간조차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창조된 피조물이 완성될 때까지의
자라는 밤 기간도 소생기와 장성기와 완성기의 3기간으로 구분되어 있음으로 이 질서적 3기간을 경과치 않고 완성된 피조물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3수를 채워야 완성의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이 피조세계에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정을
비유하여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을 때에 처음에는 싹이 나며 다음에는 이삭이 되고 그 후에는 이삭에 충실한 열매를 맺는다(막 4/28)고
말씀하셨다. 창조의 전과정을 보더라도 저녁기간과 밤기간과 아침기간이 있으며 구원의 섭리를 완수키 위하여는 하나님도 삼위일체의 신으로
역사하셔야하며 천사장의 위치로 삼위로 정립되어 있으며 인간도 복중의 한 기간과 지상 생활의 한 기간을 거쳐 무형세계에 들어가야만 영원한 천국의
영인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바울이 체험하였던 낙원세계도 3층천이며 노아 방주도 3층으로써 신천지 재창조를 표시했으며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 올 때까지도 7년씩 3차에 걸쳐 노역하였고 모세가 바로궁중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3개월을 숨어 자랐으며 그 바로궁중 40년 미디안 광야 40년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는 때까지의 40년으로 그의 생애를 마치었다.
동방박사도 황금 유향 몰약 3종의 예물을 드림으로써 예수님이 탄생하신 축하의 예를 완전히 표시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사탄의 시험을 세 번 거쳐서 비로소 그를 완전히 굴복시켰고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기도도 세 번으로 마치셨으며 예수께 대한 베드로의 거부도 세 번으로 마쳤고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신 베드로에게 대한 예수님의 질문도 세 번으로 마쳤다.
예수님의 30년 준비기간, 3년 공생애, 십자가 후 어둠의
3시간, 무덤 속의 3일, 요나의 고래 뱃속 3일기간, 야곱이 라반을 속이고 나오던 3일기간, 모세가 바로를 속이고 나오던 3일기간, 아브라함의
이삭헌제 3일기간, 모세로 인한 어둠재앙 3일기간, 모세의 결례 3일기간, 아담을 중심한 가인 아벨 셋의 3자식, 노아를 중심한 셈 함 야벳의
3자식, 아브라함을 중심한 비둘기 양 암소 3종의 제물, 믿음의 조상의 책임을 담당하여 복귀섭리노정에 나타났던 노아를 중심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성전 건축의 책임을 지고 왔던 모세를 중심한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 예수님을 중심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의 3제자 등등이며 지상세계는
고체와 액체와 기체의 3상으로 보여진 흙과 물과 공기로 되어 있고 또 광물 식물 동물의 3형태, 지층 암층 용암층의 3층으로 구성된 지구며
3대영양소, 3원색이며 계급의 상중하, 황 백 흑의 3인종과 국가의 삼권분립이며 군인의 계급과 편성도 전부 3수를 기준하고 되어있는 등등은 다
이러한 창조원리에 기인되는 것이니 이와같은 예는 미처 다 열거키 어려울 정도다.
그리고 피조세계를 6일동안
창조하셨다함은 여섯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섯 기간을 말함이다.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씀(벧후 3/8)과 같이 여기에서
말하는 하루는 어떤 한정된 시간을 표시함이 아니고 단지 성장하는 한 기간이 있다함을 표시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하루라는 기간이 천년이던 그
연수에 계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II 하나님의 직접주관권과 원리에 의한 간접주관권
무릇 피조세계에는 창조원리를 떠나서 창조된 피조물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원리로써 창조된 피조물은 성장기간을 통하여서 비로소 완성되었다함은 이미 위에서 상술한 바이지만 소생기에서부터 장성하여 장성기를 거쳐 완성기를 넘어서 원리를 완성한 피조물이 될 때까지의 장성기간의 과정은 그 원리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하여 성장케 되어있고 하나님은 원리주관격자로 계시어서 원리적 성장의 결과만을 보아서 간접적인 주관을 하시므로 이 기간을 원리결과주관권 혹은 하나님의 간접주관권이라고한다. 마치 원리로 창조된 피조세계의 삼라만상의 운행과 영위는 하나님이 일일이 간섭치 않아도 그 자체의 원리적 주관성과 자율성에 의하여 질서있게 진행되고있는 것과 같다.
만물세계는 인간을 주관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완성된 인간만을 직접 주관하시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만을 직접 주관하심으로 피조세계 전체를 주관하시려하셨으나
인간은 완성기준까지 성장하기 전에 타락되었으므로 인간은 창조시에 허여된 만물주관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대개 하나님이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신지라 만물을 그 아래 둔다 말씀하셨으니 만물을 그 아래 두신 이(하나님)가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고전 15/27~28)고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만물세계는 이미 인간에게 그 주관위를 허여하셨으므로 하나님은 직접 그 중에 계시지 않으심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은 어찌하여
원리결과주관권을 거쳐서야 완성되도록 창조하셨는가. 만물을 주관하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으니(창 1/28) 원리의 주관성에 의하여 스스로
성장하여 완성된 만물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려면 인간자신도 원리의 주관성에 의하여 스스로 성장하여 완성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마치
자라는 아이들의 생활에 관하여 지나친 보호와 간섭을 하면 장성한 후에도 독립적으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질 수없는 것과 같이 스스로
자라야할 성장권내에 있는 아담과 해와를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바라 의지하게 됨으로 스스로 성장해야할 부분이 성장되지
못하여 따라서 스스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을 인간에게 강제로 굴복시키지 않으시는 이유도 인간은 천사까지도 주관토록 창조하셨으므로 천사가 타락하여서 된 사탄도 인간자신이 그것을 굴복시킬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어야 하나님도 비로소 인간을 직접주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까지의 6천년
섭리역사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자격을 갖도록 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원리에 의한 간접주관권을
통과하여 원리를 완성한 인간이 되면 하나님의 직접 주관권내로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관을 받게되는 것이다. 직접주관이라는 것은 완전하신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과 완전한 수수의 관계를 맺어 하나님의 완전한 대상존재로 설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미의 존재로서 완성되지
않으면 완전하신 하나님과 완전한 수수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직접주관내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제3절 수수작용에 의한 만유원력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곳에 생존과 번식과 작용의 힘이 생기며 하나님은 자기의 이성성상)을 닮은 곳에 운행하시며 두 존재가 상대기준을 조성치 않으면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을 수 없는 것이며 상대기준은 두 존재가 서로 잘주고 잘받을 수 있는 회로를 지어 주체와 대상으로 서서 서로 불가분의 일체적인 관계를 맺을 때에 조성되는 것이다.
이렇듯 완전무결한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지않은 것은 하나도 없음으로 하나님이 운행하시지 않는 피조물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실체의 대상으로 창조되었음으로 무소부재하시다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천지창조의 조화는 평면적인
직행선상에는 있을 수 없고 서로 돌아갈 수 있는 입체적인 유기적 관계를 맺는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돌아가는 것은 두 존재 사이에 잘주고 잘받을
수 있는 회로를 조성치 않으면 아니된다.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를 중심하고 돌려면 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힘인 원심력과 구심력이 두 물체 사이에 주고받는 회로를 조성치 않으면 아니 된다.
즉 그 물체가 그 중심체에서 멀리
떨어지려는 주는 힘인 원심력과 그 중심체가 그 물체를 자기편으로 끌어오려는 받는 힘인 구심력이 두 물체 사이에 주고받는 회로를 조성하여야 그
물체는 그 중심체를 중심하고 돌 수 있는 것이다.
이 주고 받는 평면적인 회로가 다시
입체적인 회로를 조성하는데서 창조의 조화는 나타나는 것인데 그 회로의 거리와 모양과 상태와 각도와 방향과 주고 받는 힘의 차와 주고 받는 속도의
차 등등의 요인에 의하여 천태 만상의 조화의 미는 벌어지는 것이다.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단위인
원자의 구조도 양자(+)를 중심하고 전자-)가 돌아 수수작용에 의한 창조원리적 회로를 조성하여 창조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천체의 운행을 보더라도 태양)을
중심하고 돌고있는 지구와 지구를 중심하고 돌고있는 달의 관계는 마치 양이온을 중심하고 돌고있는 음이온과 양자를 중심하고 돌고있는 전자의 관계와
같아서 추리로써만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미소한 분자 속에서도 천체구조와 그 운행의 비밀을 역연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타락인간과의 관계는 태양과 지구와 달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무형의 하나님의 실체 대상임으로 하나님과 잘주고
잘받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일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었으면 하나님과 완전한 수수의 회로를 조성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게 되었을 것이었는데 타락됨으로 인하여 이 회로가 끊어졌음으로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의 생명의 인연이 끊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이 끊어진 생명의 회로를 다시 이어 주시려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분으로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대상임으로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 수 있는 분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에 동하고 정하여 잘받고 잘주는 대상이 되어 그를 중심하고 돌기 위함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고있는 예수님을 중심하고 돌면 결국 타락인간도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게 됨으로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수수의 회로를 맺어 영원한 생명의 인연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가 되어 우리들로 하나님과 원리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종적인 수수의
회로가 끊어졌으므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횡적인 수수의 회로까지도 상실하였으니 이것이 곧 타락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창조원리에 의한
인간 사이의 횡적인 수수의 회로를 회복하여 하나님과의 종적인 수수의 회로까지 복귀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교훈과 행적은
모두가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데서부터 생명까지 인간에게 돌려주시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고 하셨고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대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마
10/41)고 하셨으며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아노라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아노라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아지 못하노라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아지 못하노라 하리라」(마 10/32~33)하셨으며 「남을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도 헤아림을 받으리라」(마 7/2) 하셨으며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마 10/42) 등등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신앙생활도 잘주고 잘받는데서만 유종의 미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고 말씀하신 것도 두
사람이 상대기준을 조성하는데 하나님의 섭리의 힘이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신 것이다.
격언에 가화만사성이라 하였다.
부부가 사랑을 중심하고 잘주고 잘받는데 가화가 있고 가화에서만 만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니 외짝 사랑이 있을 수 없다함은 이러한
원리를 증명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남의 혜택을 받을 때에 마음으로나마 감사의 염을 돌리지 않으면 그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은 반드시
끊어지고 마는 것이다.
폐도 한번 들여쉬면 한번 내쉬어야
그 기능을 발휘할 것이요 육체도 정맥혈과 동맥혈에 의한 신진대사를 잘하여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니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도 하나는 수축케하며
하나는 신장케하여 그 수수의 작용이 조화됨으로써만 혈관신축의 균형을 볼 것이요 육체도 촉진호르몬과 억제호르몬이 서로 원만한 수수의 관계를 맺게될
때 균형된 육체를 보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국가를 흥왕케하는 힘도 정부와
백성 사이에 상의하달의 수수의 관계가 성립되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무릇 공존 공영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러한 수수의 관계를 맺을 때에 생기는
것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학설은 창조원리의 한면만을 파악한데서 제창되었다. 만일 모든 존재물에 인력 즉 받는 힘만이 있다면 피조세계의 전존재물은 서로 충돌하여 전부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받는 힘이 있는 동시에 주는 힘이 있기 때문에
피조세계는 상호 균형의 존재기대를 유지하여 영원에서 영원에까지 존재의 힘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두 존재물이 완전한 수수의 관계를 맺어
각각 주체와 대상의 위치를 결정하면 생존과 번식과 작용의 힘을 발생하는 것이니 이 힘을 만유원력이라고하며 이 원력의 강약의 수자적 표시를
원력계수라고한다. 이 원력계수의 차에 의하여 인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테면 철은 지구와의 원력계수보다 자석과의 원력계수가 크기 때문에 자석에 끌리는 것이다. 원소의 이온화 경향은 바로 각 원소가 다른 원소와의 사이에 갖고 있는 수수작용에 의한 원력계수의 차를 의미한다. 즉 칼륨이 나트륨의 것보다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조세계의 모든 천체도 만유원력의 법칙을 떠나서는 운행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천체의 형상과 그 특이성과 또 그 운행하는 방향과 궤도와 속도는 상호면에 갖고 있는 원력계수에 의한 창조원리적 조화에서 생기는 것이다. 유성이 떨어지며 지층과 광맥과 산맥이 생기며 지각의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 등은 모두 이런 원리에 의하여 벌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또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동일한 법칙이 성립된다.
신앙의 정도의 차는 하나님과의
주고받는 원력계수의 차를 말한다. 인간이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었으면 주체로서의 하나님과 실체대상으로서의 인간과의 사이에 원력계수는 100%이다.
그러므로 이 원력계수를 능가하는 힘이 없음으로 완성된 인간은 절대로 타락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완성 후에 타락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도 창조원리를 떠나서 창조되었을 수 없음으로 성장기간을
통하여서 비로소 완성될 것이었는데 하나님과 100%의 원력계수에 의한 관계가 맺어지기 전에 다른 존재와의 보다더 큰 원력에 끌리어 그와
상대하였음으로 타락된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원력계수가 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은 이
상실된 원력계수를 다시 100%에까지 끌어올리어 하나님과의 창조원리적 관계를 복귀하려는데 있으므로 이것을 복귀섭리라고 한다.
갑과 을이 주체와 대상으로 서서
서로 주고 받게 되면 그 수수작용에 의하여 생기는 힘은 반드시 어떠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며 이 작용에 의한 작용체는 다시 새로운 또 하나의
주체가 되어 이 주체가 된 작용체는 창조목적을 그의 대상위치에 세워놓고 그 목적을 이루려는 방향을 취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갑이라하고 인간을 을이라고 하면 을은 갑에게 미를
돌리고 갑은 을에게 사랑을 주어야 창조목적을 위한 원리적 수수관계를 맺어 진리를 찾게 되는 것임으로 갑과 을 사이에 연결하는 직선은 진리의
기준을 표시함으로 이 선을 진리기준표시선이라고 한다.
갑과 을이 수수작용의 힘에 의하여
새로운 또 하나의 주체가 된 작용체는 진리기준표시선(AB)을 저변으로 하는 이등변삼각형 (ABC)의 정점(C)으로 표시된다. 그런데 갑(A)과
을(B)이 미와 사랑을 주고받으면 그로 인한 힘은 선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작용선을 표시하는 이등변삼각형은 정점(C)은 선을 표시하는 점이
된다. 그러므로 이 점을 선기준표시점이라고한다. 이 이등변삼각형의 정점(C) 즉 선기준표시점은 진리기준표시선(AB)의 중심점(O)에서 그어지는
이 선(AB)의 수직선상(OC)에서 움직이게 된다. 그러므로 이 수직선(OC)을 선기준표시선이라고 한다.
갑과 을의 수수작용의 힘에 의하여
새로운 또 하나의 주체가 되 작용체(C)의 대상인 창조목적(D)은 같은 진리기준표시선(AB)을 저변으로 하고 전자의 이등변삼각형과 반대방향에
그려지는 그의 상대적인 이등변 삼각형(ABD)의 정점(D)으로 표시된다.
그러므로 이 정점(D)을 창조목적표시점이라고
한다.
이 후자의 이등변
삼각형(ABD)들의 정점들(D D1 D2 D3) 즉 창조목적표시점들은 진리기준표시선(AB)의 중심점(O)에서 선기준표시선(OC)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그어지는 수직선(OD) 상에서 움직이게 된다. 그러므로 이 수직선(OD)을 창조목적표시선이라고 한다. 선기준표시선(OD)과
창조목적표시선(OD)은 진리기준표시선상(AB)의 같은 중심점(O)에서 반대방향으로 이 선(AB)의 수직선으로 그어진 선들이기 때문에 이 두 선은
진리기준표시선(AB)과 십자형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터가 되려면 이와 같이 주체와 대상과 작용체와 창조목적이 입체적인 십자형의 유기적 회로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두 이등변 삼각형()의 높이가
점점 적어져서 영이 되면 그 두 정점(CD)은 저변(AB)의 중점(O)에서 합치된다. 이와 같이 진리기준표시선(AB)의 중심점(O)은
선기준표시점(C)과 창조목적표시점(D)이 합치되는 점이므로 진리의 중심은 선의 중심이요 동시에 창조목적의 중심이다.
미의 주체인 갑과 사랑의 대상인
을을 연결하는 진리기준표시선(AB)상에 사랑에도 미에도 편중하지 않는 점은 이 선(AB)의 중심점(O)임으로 이 점은 양심기준표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진리기준표시선(AB)의 같은 중심점(O)으로써 표시된 것으로 보아 진리의 중심이 곧 선의 중심이요 양심의 중심이요 동시에
창조목적의 중심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양심은 항상 각자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그 진리의 기준을 표시하는 선 즉 진리기준표시선(AB)상의 양심기준표시점(O)에서 그 진리기준표시선(AB)상에 그어지는 수직선(OC)을
지향하는 것이므로 이 양심이 지향하는 수직선을 양심기준표시선이라고 한다. 올바른 진리에 입각하면 그 양심이 지향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선을
결실하게 되는 것임으로 양심기준표시선(OC)은 선기준표시선(OC)과 동일 선상에서 합치되어 창조목적표시선(OD)을 대상으로 찾아 세우게되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으면
양심기준표시선(OC)과 선기준표시선(OC)과는 자율적으로 합치되었을 것인데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올바른 진리를 찾지 못함으로 창조본연의
진리기준표시선(AB)과 각도를 달리한 시대성 진리기준표시선(A4B4)상에 서게 됨으로 따라서 그의 양심기준표시선도 창조본연의
진리기준표시선(AB)상에 선 양심기준표시선(OC)과는 같은 점이 아니고 분리된 점(O1)에서 다른 각도(O1C4)로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본연의
진리기준표시선(AB)과 다른 선(A4B4)상의 다른 점(O1)에서 다른 각도로 지향하는 이 시대성 양심기준표시선(O1C4)은 자연히 창조본연의
선기준표시선(OC)과 동일선상에서 합치되지 못함으로 그의 대상으로 찾아 세우는 시대성 창조목적 표시선(O1D4)도 창조본연의
진리기준표시선(AB)상에 선 창조목적표시선(OD)과는 전연 다른 선상에서 다른 각도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성
양심기준표시점(O1)의 위치와 창조본연의 양심기준표시점(O)과의 위치의 다름과 그 각도(C3O5)의 차는 양심의 가책과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 고민과 고통은 그 두점(O.O1)의 위치의 다름과 각도(C3OC5)의 차에 정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른
양심기준표시점(O)을 찾기 위하여 기도에 의하여 이 길을 막고있는 물욕 정욕 등등의 모든 외적인 조건을 벗어버리고 무사의 경지를 찾으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모든 도인들은 이 점(O)을 찾아 양심기준표시선(OC)을 따라나가 창조본연의 선기준표시선(OC)과 합치되는데 이르러
창조본연의 창조목적표시선(OD)을 대상으로 세워 나아가려하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도자들이 눈물로써 이 길을 찾아나온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 에덴이 지상에 이루어지려면 누구에게나 공인될 수 있는 이 근본진리가 나타나서 누구나 동일한 선기준표시선을 따라나아가 누구나
동일한 창조목적을 지향할 수 있어야한다.
타락인간으로 하여금 이
양심기준표시점(O)을 찾아 선기준표시선(OC)과 합치될 수 있는 양심기준표시선(OC)을 따라나아가 창조목적표시선(OD)을 대상으로 세우도록하는
사명을 하는 것이 의(O)다.
그러므로 의는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이 원리로써 진(A) 선(C)
미(B)의 창조원리적 관계를 생각하여보자. 진(A)은 미(B)를 요구하고 미(B)는 진(A)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이 주체로 서서 미를
대상으로 세워 원리적 수수의 관계를 맺으면 그로 인한 힘은 선(C)을 결실하며 진미로 결실한 선은 반드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대상으로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 그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도 바로 이러한 원리기대를 조성하라는 말씀이었다.
아담(A2)은 주체로써 사랑의
표시체요 해와(B2)는 그의 대상으로서 미의 표시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 사랑과 미를 완전히 잘주고 잘받으면 반드시 그 힘은 선의
자녀(C2)를 번식하여 창조목적(D2)을 달성했을 것이었다. 개인을 두고 보더라도 마음(A0)은 주체로서 사랑의 표시체요 몸(B0)은 마음의
대상으로서 미의 표시체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이 완전히 주고 받는 입장에 서면 그 수수작용에 의하여 생기는 힘은 반드시 미(C0)의 결과를
맺게되어 그 개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D0)을 달성하게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아담과 해와가 사랑과 미에 의한 입체적 십자형의 유기체를
이루었더라면 이 가정이 다시 하나님 앞에 사랑과 대상으로 서서 미를 돌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터가 되어 하나님이 영원히 계실 수
있는 존재기대가 되었을 것이었으니 이것을 사위기대라고한다. 예수님과 성신의 역사도 아담과 해와가 타락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어야할 사명을
완수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A1)께서는 사랑의
주체로서 미의 대상인 성신(B1)과 완전히 미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일어나는 힘은 신도들을 중생(C1)케하여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지향해온 것이다. 이와같이 갑과 을의 사이에 일어나는 완전한 수수작용은 갑을의 중심점에서 갑을에 수직각으로 그려지는 십자형의
선상에 새로운 두 극(병, 정)을 일으키어 이 두 극 사이에는 새로운 수수작용을 하게된다. 갑과 을 사이에 일어나는 수수작용의 힘과 이
수수작용에 의한 다른 두 극(병, 정) 사이에 일어나는 수수작용에 의한 힘은 갑을의 중심(O)을 중심으로 하고 네 극을 통하는 평면적인
원형운동을 일으키어 이 평면적인 원형운동을 하는 힘은 다시 O을 중심하고 이 평면에 수직각으로 서서 입체형을 그리는 다른 평면상에 동일한
원형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갑을간의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생기는 힘은 이와같이 O를 중심한 전자의 운동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두 존재
사이에 일어나는 수수작용에 의한 힘은 반드시 입체적으로 회전하는 구형운동을 일어키나니 이 운동은 양자를 중심한 전자의 운동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두 존재 사이에 일어나는
수수작용에 의한 힘은 반드시 입체적인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음양의 두 극 갑과 을 사이에 그려지는 자력선이 두 극을 연결하는 직선이 아니고
원형을 그리게 되는 것은 갑을 사이의 자력은 갑을과 십자형을 그리는 다른 선상에 다른 새로운 두 극을 일으켜 그 두 극 사이에 일어나는 다른
방향의 자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모든 피조물의 사이에 일어나는 수수작용에 의한 만유원력은 모두 이렇듯 복잡한
입체운동을 일으키게되어 창조의 조화의 미는 나타나게되는 것이다. 사랑과 미를 표시하는 두 극 사이에서 생기는 만유원력은 이와같이 미와 사랑을
연하는 선의 중심 O를 중심하고 이 두 극을 싸고 도는 구형운동을 하게되는 것임으로 미에도 사랑을 내포하고 사랑에도 미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한 개성이 이성의 성품을 갖게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전기에 관한 모든 원리도 이러한 수수원리에 의하지 않으면 완전히 해명될 수 없을 것이다.
수수작용에 의한 만유원력에 관한 연구는 오늘까지의 과학세계를 보다 고차적인 새 세계로 변모시키게 될 것이다.
마치 완전한 양전이 생기면 완전한
음전이 자연히 생기는 것같이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생긴 작용체가 또하나의 주체로 서서 창조목적을 대상목적으로 지향하여 창조원리를
완성한 하나의 유기체로 서면 이 유기체는 다시 그의 대상목적을 충당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유기체를 대상으로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되어 번식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식도 완전한 수수작용에 의한 만유원력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양심의 작용에 의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보자. 인간은 타락되었을 망정 바른 것을 위하여 살아야한다는 양심의 작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든지 뚜렷이 있는
것임으로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식에게나 제자에게 악하라고 가르치는 부모나 선생은 없을 것이며 아무리 악한 강도라도 영화의 스크린에 나타나는
강도를 볼 때에 그를 미워하는 것이 본성이다.
그러면 이 양심의 뚜렷한 작용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양심자체가 독자적으로 그 작용의 힘을 일으킬 수 있다면 수수작용의 원리는 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도 어떠한 주체에 대한 대상위치에 처하여 그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관계를 맺고있기 때문에 그 작용의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 양심작용의 주체가 곧 하나님이시다.
수수작용의 원리를 인정한다면
양심작용의 원인을 추궁함으로써도 하나님의 실존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되었을망정 하나님의 대상위치를 취하려는 양심의 터가 있기
때문에 이를 터삼아 복귀섭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양심의 힘은 하나님과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에 의하여 강약의 차가 생기는 것이다.
세포의 분열도 각 세포 간에 완전한 수수작용이 성립될 때
일어나는 것이며 수수의 회로가 막히게될 때는 병이 발생하는 것이니 인체를 해하는 균은 이 회로를 막히게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요 약이라는 것은 이
회로를 다시 회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제4절 천주창조의 목적
하나님은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의 두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의 주관자로 인간을 창조하셨다(창 1/1~28). 인간을 중심한 이 두 세계를 천주라고 한다. 이제 천주창조의 목적을 둘로 갈라서 생각하기로 하자.
I 인간을 창조(創造)하신 목적(目的)
모든 기쁨은 마음대로 될 때에 생기는 것이다. 마음은 무형의 주체로서
그것만으로는 기쁨이 생기지 않는다. 이 무형의 주체가 실체로 이루어져서 그것이 무형의 주체에 대한 실체의 대상으로 나타날 때 즉 무형의 주체가
실체의 대상을 대하여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창조원리적 입장을 취할 때 무형의 주체를 실체의 대상으로 느껴볼 수 있음으로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보이지않는 자기의 얼굴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아무 느낌도 가질 수없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이나 사진으로써 보이지 않는 자기의 얼굴을 실체로 보여지는 얼굴로
느껴볼 수 있을 대 비로소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를 예로 들어보면 그들도 보이지 않는 구상만으로는 완전한 기쁨을 느낄 수
없으나 그 구상이 그대로 화폭이나 조각이나 혹은 실연으로 나타나, 보이지 않는 구상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으로 구현하여 그로 인하여 느낄 수
있을때 구상자의 기쁨은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와같은 성품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음으로 하나님에게 없는 성품이 인간에게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성을 제외한 인간의 모든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그를 닮아난 것이요 따라서 무형의
주체의 성상을 실체의 대상으로 인하여 느껴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성품도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무형으로 계시는 자신의 성상에 대한 기쁨은 타각적으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주체적 성상은 실체의 대상으로 세우시고 느껴보시기 위하여 실체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어 실체의 대상으로 세움으로써 주체로서의 자신의 모든 성품을 상대적으로 느끼시고 따라서 사랑과 위로의 자극적인 성품을
타각적으로 느끼시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전형상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거울이 되어야할
것이었으나 타락으로 인하여 깨어진 거울과 같이되어 미을 보려야 볼 길이 없고 사랑을 주려야 줄 대상이 되지 못하였음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탄식하신 것이다(창 6/6). 그러므로 인간이 이와같이 창조목적을 달성한 인간이 되려면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이 잘주고 잘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서야 되며 마음이 주체로 설 때 이에 대하여 몸이 잘주고 잘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서서 하나님을 중심하고 몸과 마음이 완전한
수수관계를 맺어 삼위가 일체적인 불가분의 입장을 취하여 하나님 앞에 미를 돌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서 완성되어야
한다.
인간의 의지력은 마음을 주체로 하고 몸이 그 상대기준을 조성할 때 일어나는
수수작용에 의한 원력계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인데 마음의 주체가 하나님이 될 때는 선의 힘을 발휘하며 마음의 주체가 사탄이 될 때에는 악의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범죄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실체대상으로 대할 수 있는
상대기준을 조성치 못하였음으로 하나님에게 돌리는 미가 끊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이것이 곧
타락이다.
타락된 인간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할 수 있는 마음과 그
마음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일 수 있는 몸을 세워 다시 미를 하나님 앞에 돌림으로써 믿음과 소망을 거치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는
실체대상으로서의 원리적 자아를 복귀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돌리는 미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자연히
돌아오는 것임으로 우리로 하여금 미를 나타내도록 할 수 없다면 기도도 신앙생활도 구원의 섭리에는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II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상징적인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것이 피조세계요 형상적인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것이 인간이라함은 이미 논술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다.
하나님은 장차 창조하실 인간을 표본으로 하여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것이다.
영인체를 표본으로 전개하여 무형실체세계를 창조하셨고 육신을 표본으로 전개하여 유형실체세계를 창조하셨음으로 인간은 이 두 세계의 중간 매개체요
따라서 화동의 중심이 되는 두 세계의 주관주로서 영인체로는 무형실체세계를 육신으로는 유형실체세계를 주관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인간을 지으시되
머리를 하늘로 두고 생활하는 유일한 피조물로 지으신 것은 체형으로도 이 두 세계의 주관자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인간은 전피조세계의 축소형임으로 그 전체의 구조와 요소와 소성이 전부
구비되어 있다. 인간을 소우주라고한 것은 지당한 표현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에 있는 하등동물에서부터 점차적으로 기능을 복잡케하여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창조하시고 최고급의 기능을 가진 동물로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생물계가 진화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도 이와 같이 하등동물에서부터 점차적인
창조과정을 통하여 창조된 동물계를 결과적으로만 관찰하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인 것이다. 갑이라는 생물이 진화되어 을이라는 생물이 되었다고 하면
을은 갑과 전연 별개의 생물이기 때문에 갑의 입장에서 보면 을은 갑을 재료로한 새로운 창조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만일 진화론을
시인한다면 진화는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인데 만일 생물이 진화할 수 있다면 그 진화의 힘 즉 새로운 창조의 힘은 어디로부터 올 것인가
생물자체가 창조의 힘을 창조하면서 진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논할 것이지만 영인체를 소유한 피조물은 인간뿐이다. 원인류가
아무리 인간에 유사한 동물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영인체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인간은 원래 원인류와는 그 기원이 전연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은 최고급의 동물로서 창조되었음으로 인간에게는 어떠한 동물의
구조와 요소와 소성도 모두 구비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이 어떠한 동물의 소리도 다 낼 수 있다는 것은 어떠한
동물(動物)의 발성기의 성능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나체를 완전히 그릴 수 있는 화가라면 그는 다른 어떠한 그림도 완전히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는 그 어떠한 피조물의 형선의 미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의 형도 전부 구비하였다. 인간은 생물의 최고급의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세포도 그러함으로 동물은 물론 식물의 세포의 어떠한 구조와 성능도 다 구비하였다. 인간은 식물의 잎에 해당되는 폐를
갖고있다. 폐는 체형으로 보아도 나무 잎에 표피를 씌운 것같이 되어있지만 기능적으로 보아도 폐로서 무형의 영양소인 산소를 섭취하는 것은 탄소를
섭취하는 잎의 역할과 같고 위는 식물의 뿌리와 같이 유형의 영양소를 섭취하며 심장은 식물의 줄기와 같이 영양소를 전신에 공급하여 생활기능을
유지하는 것이다. 또 인간에게는 식물의 식관과 도관에 해당되는 동맥과 정맥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식물뿐만 아니라 흙과 물과 공기로 되어있음으로 모든 물질의
요소도 갖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형태도 인체구조의 표시체로 되어있다. 지구는 식물 덮이운 지곡이 있고
지층에 지하천이 있고 그 속에 암층과 암층으로 둘러싸인 용암층이 있으니 이것은 바로 솜털이 있는 피부가 있고 근육 속에 혈관이 있고 근육 밑에
골격과 골격으로 둘러싸인 골수가 있는 인체와 같은 것이다.
그러면 이와같이 인간을 형상적으로 전개한 대상으로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어디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앎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은 무형의 주체의 성상을 그의 실체 대상에서 타각적으로 느껴볼 때에
생긴다는 것은 이미 논술한 바이다.
그러므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체가 갖고 있으나
독자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주체적 성상에 대한 모든 느낌을 그 성상의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로 인하여 타각적으로 느끼도록 하여 모든
기쁨과 화평을 갖게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와 삼라만상은 인간의 주체적 성상에 대한 실체로 나타난 거울과
같아서 그것으로 인한 자극이 없으면 자신의 성상에 대한 기쁨은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꽃 한송이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바로 독자적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꽃에 대한 자체의 주체적 성상을 그의 실체대상인 꽃에 의하여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산여수를 찾아보며 기뻐하는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성상을 타각적으로 느껴보고 기뻐하는데서 지나지 않는다. 이와같이 자극적인 대상으로 지어주신 피조세계이언만 인간은 타락성으로
인하여 그를 보아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만물이 탄식하는 원인(롬 8/20)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물과 인간과의 관계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같아서 인간은 만물에게 사랑을
주고 만물은 인간에게 미을 돌려야할 것인데 인간이 타락되어 만물에 주는 사랑이 끊어졌으므로 만상계로부터 오는 미를 인간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만물인들 어찌 탄식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원리로 보더라도 하나의 개성체로써 인간의 주체적 성상에 대한 완전한 실체의 대상으로 설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인간에서보다 더 완전한 기쁨의 대상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만물보다 거짓됨(렘 17/9)으로 많은 수도자들은 인간세계를 피하여 산중으로 들어가 자연과 접하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이 인간을 대하여 무쌍한 기쁨과 화평을 느낄 수 있는 세계가 와야할 것이니 이 세계가 바로 인간 조상이 타락되지 않고 이루어 나왔을 것이었던 것과 같은 창조이상이 이루어진 세계요 동시에 타락인간이 찾아세워야할 세계다.
제5절 인간을 중심한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하나님은 무형실체세계를 창조하시고 그의 실체의 대상으로 유형실체세계를
창조하시었다.
무형이라하는 것은 우리의 오관에 의한 생리적 기능으로는
감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체험에 의하면 이 무형세계도 유형세계와 꼭 같이 감각할 수 있는 실제적이요 또한 실감적인 실존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계를 무형실체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육신을 벗고간 영인들이 생활하는 세계임으로 영인세계라고도
한다.
하나님과 인간,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의 관계는 마음과 몸의 관계로써
이해될 수 있다. 실체로 되어있는 우리의 몸은 무형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마음(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인체)의 실체대상이다. 그러므로 몸으로
나타나는 체형 골격 태도 용자 등등은 모두 그 마음의 표시인 것이다.
혈액의 형으로서도 그 개성의 대개를 판단할 수 있음은 그 혈액은 그의 마음을
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방향으로 과학이 더 발달된다면 혈액만 가지고도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세포의 하나도 그 개성에 따라서
특유하다는 것을 입증할 때가 올 것이다.
사람마다 용모가 다른 것은 마음이 각각 다른 까닭이요 자녀가 부모를 닮는 것은
그 마음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에 있어서 정신에 이상이 있으면 그는 벌써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무위한 존재이나 육신에는 아무리 이상이 있더라도 정신만 완전하면 이는 인격을 갖춘 완전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있어서 몸이 주체가 아니요
마음이 주체요 몸은 그의 실체의 대상이다.
이와같이 몸이 마음을 닮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닮았음으로 몸과 마음이 완전한
수수관계를 맺어야할 것처럼 사람과 하나님은 완전한 수수관계를 맺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갈라졌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된 것이다. 마음이 원하는데로 몸이 행치 못할 때 마음이 서러워하며 행할 때는 기뻐하는 것같이 하나님도 자신이 원하시는대로 인간이 살지 못할
때에는 서러워하시고 뜻대로 살아드릴 때는 기뻐하신다.
구원의 목적은 갈라진 몸과 마음의 수수관계를 복귀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수관계까지 복귀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마음과 몸과의 관계와 같아서 몸과 마음이
일체를 이루어야하는 것같이 하나님과 인간도 일체를 이루어야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어 하나님과 인간과 일체를
이루었더라면 인간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전이 되어(고전 3/6) 인간도 예수님과 같이 신성을 갖게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무너져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는 집이 되어 신성을 잃어버렸음으로 인간은 잃어버렸던 이 신성을 다시 복귀하려는 것이다.
무형세계와 유형세계도 마음과 몸과 같아서 유형세계는 주체인 무형세계를 닮아서
창조된 실체대상의 세계다. 그러므로 유형세계의 것은 모두 무형세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무형세계에 없는 것이 유형세계에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마음과 몸이 그러하듯이 유형세계의 모든 사실은 무형세계와 관련성을
갖고 나타나기 때문에 지상에 얽히어진 모든 것은 반드시 무형세계와 자유로 통할 수 있는 때가 와야만 풀려질 수 있는 것이다.
유형세계는 무형세계나 하나님에 대한 감성을 느끼지 못한다. 만물의 영장된
인간도 타락으로 인하여 무형세계와 하나님의 실존을 인식치 못하도록 되었던 것이어든 하물며 만물이랴.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체세계와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실체의 인간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육신을 만물의 요소인 흙과 물과 공기로써 창조하시어 같은 요소로 되어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유형세계를 주관하도록 하셨고 무형세계와
같은 요소로 된 영인체를 인간에게 부여하시어서 영인체로 하여금 그와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무형세계를 주관하도록 창조하시었다.
그러므로 창조본연의 인간은 전피조세계의 주관자로서 육신이 있음으로 유형세계와
수수의 관계를 맺어 그와 화동할 수 있으며 영인체가 있음으로 무형세계와 수수의 관계를 맺어 그와 화동하여 이 두 세계의 화동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이 두 세계로 하여금 서로 수수의 회로를 조성케함으로써 일체적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하여 서로 화동케하여주는 매개체로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육신이 영인체에 대한 감성을 느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육신과 영인체는 분리상태에 머물게되어 피조세계와 화동의 중심으로 서지 못하게되니 유형세계도 따라서 무형세계와의 수수의 회로를
조성치 못하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도 탄식하여 이 두 세계의 화동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창조본성을 복귀한 인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롬 8/20~22). 인간은 이와같이 두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중심체임으로 무형세계에 관한 모든 것은 영인체를 통하여
육신에 공명되어 이것이 생리적 현상으로 나타나 육신의 오관으로 감지할 수 있도록 창조된 것이었다. 그런고로 인간은 기능적으로 보아 라디오나
텔레비전과 같아서 무형세계의 모든 사실을 그대로 듣고 보고 알도록 창조된 것이었다.
오늘의 많은 신도들은 자기가 아지 못하는 타국방언을 유창히 하며 자기가 습득치
못한 타국문자를 쓰며 자기가 알지 못하는 노래를 아름답게 부를 뿐만 아니라 영계에서 주는 가사와 가곡을 발표하며 아름다운 시를 읊으며 예언을
하며 예수님과 그를 둘러싼 12제자는 물론 구약시대의 영인들과도 회견하며 영계의 광경을 보는 등등의 영적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니라 창조원리로 보아 당연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인간사이에도 서로 정을 통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거든 어찌
자기의 성전으로 창조하신 인간과 통할 수 없으며 자기를 창조하신 아버지를 모르고 살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을 것인가!
사실 에덴동산의 타락전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과 서로 일문일답하던 것이었으므로
그가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었더라면 그의 후손된 오늘의 우리들도 그들과 같이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타락으로
인하여 고장난 수신기와 같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고장난 이 수신기를 수선하는 것과 같음으로 그 수선의 정도에 따라
무형세계와 통하게 되는 것은 의당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창조본연의 세계로 복귀되는 시대를 당하여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되어 가는
인간들이 나옴에 따라 영계에 통하는 신도들이 많아질 것은 이미 성서가 예언한 것이니 「말세에는 내가 내 영을 많이 부어줄 것이니 너희는
장래일을 말할 것이요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행 2/17)고 기록된바와 같다.
영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경시하여 비소하지만 이것은 창조의 원리와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과오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끝날의 한때를 위하여 역군으로 왔다 갔던 옛날의 선지들도
하나님과 통하였거든 그들이 닦아놓은 6천년 복귀섭리역사의 결실로 나타나 다시 오실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어 천국생활로 들어가야할 오늘의 성도들이
신랑과 상통하며 그가 계시는 그 세계의 사실을 보고 듣고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벌써 이러한 실증적인 체험을 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놀랄 정도로 많으며 또 나날이 급속도로 증가되고 있는 사실을 어찌 부인하랴 성서가 이미 선지들을 통한 계시의 말씀인 것을 인정하는
기독신도들이 오늘에도 그때와 다름없이 일어나는 이러한 실증적인 영적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현명한 행위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지상의 모든 인류는 어서 바삐 하나님과 직접 영통하여 하나님의 한 명령에
의하여 동하고 정할 수 있는 때가 와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제6절 영인체와 육신과의 상대적 관계
영인체는 각 인간에게 육신의 주체로서 창조된 무형실체임으로 육감으로는 감각할 수 없으나 영감으로 실감할 수 있는 실존체인 것이다.
영안으로 볼 수 있는 영인체의 모습은 육신의 모습과 같으며 영적인 귀로 들을
수 있는 영인체의 음성도 육신의 음성과 같으며 또 그 촉감도 동일하다.
영인체는 영원존재성을 두고 창조하셨음으로 무형세계에 영원히 거주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계를 통하게 되면 예수님을 중심한 12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구약시대의 모든 영인들과도 지상인들과 꼭같이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변화산상에서 예수님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의 별세에 관한 것을
의논한 것도(눅 9/30~31) 그들의 영인체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면 영인체와 육신과는 어떠한 원리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육신은 영인체가 성장할 수 있는 한 기간의 터로서 요구되는 것이다. 영인체도
육신을 터로하여 생심을 중심하고 창조원리에 의한 질서적 3기간을 거치며 성장하여 완성되는 것인데 소생기의 영인체를 영형체라하고 장성기의 영인체를
생명체라하고 완성기의 영인체를 생령체라고 한다.
마치 과실이 완숙하면 과목에서 따서 창고에 저장하는 것과 같이 아담과 해와도 지상에서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어 지상에 천국을 이루었더라면(전편 제3장 참조) 그들의 영인체들도 완성되어 육신을 벗고 무형세계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치 과목에서 완숙한 과실을 따야 창고에 완숙한 과실이 있을 것과 같이 먼저 지상에서 천국이 이루어져서 지상에 완성한 인간이 생겨나야 그 인간이 완성된 생령체로서 무형세계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었는데 아담과 해와가 타락된 후 지상에서 창조본연의 인간으로서 완성되어 생령체를 이룬 사람이 하나도 없음으로 생령체가 거하도록 창조하신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과목에서 선 과실을 땄는데 창고에 어찌 익은 과실(果實)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은 저희 것이라고 하셨으니
그 천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께서 지상에 오신 목적은 구주로 오셔서 「하늘 아버지 완전하심같이 너희들도
완전하라」(마 5/48)고 친히 말씀하신 그 말씀을 이루어시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들이 예수님을 살해하지않고 이 말씀이 이루어졌더라면 우리들은
모두 아담과 해와가 타락되지 않았던 때와 같은 죄없는 인간들이 되어 우리들은 하나님이 완전하심같이 완전한 자녀들이 되어 지상천국을 이루었을
것이었는데 예수님을 살해함으로 인하여 이 말씀은 다 이루어지지 않은채 다시 오셔서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가셔서 낙원을 건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회개하는 강도에게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신 것이다.(전편 제2장 참조)
그러면 낙원은 무엇인가하면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지상천국을 건설하여 지상에서
생령체를 이루어 완성한 영인들이 천국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지상에서 예수를 믿고간 영인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이와같이 천국에는 들어간 사람이 없으며 뜻하지 않은 낙원이 건설되었고 원치 않는 지옥이 생겨 하늘에
맺히운 사실이 벌어지게된 것은 지상에서 인간이 타락되어 지상에서 맺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맺히운 이 사실을 풀기 위하여 지상에 오셨던 것이었으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분부하시면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6/19). 이것은 천국의 자물쇠도 역시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는
까닭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곳은 하늘이 아니고 땅이다.
예수께서는 땅에서 풀릴 것이 풀리지 않은대로 떠나셔야할 운명이었음으로 승천하시는 그를 보면서 두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행 1/11)고 책망하면서 다시 오셔야 마저 이루실 유업을 지상에 남기고 떠나시는 예수님의 설은 심정을 대신 토로하여 너희들이
염려할 곳은 하늘이 아니고 땅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상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큰 과업이 남아있다는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지상의 일은 등한히 생각하고 사후의 세계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지상에 하늘나라를 이루어야할 것이다. 이 나라만 지상에
이루어지면 저 나라의 천국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영인체(주체)와 육신(대상)의 관계를 논하여 보자! 육신은 다시
육심(주체)과 육체(대상)의 2성으로 분립된다. 육심은 육신으로 하여금 원리적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분담사명을 한다. 즉
생존과 번식과 보호의 지각은 이 육심의 분담사명으로서 동물의 본능성은 육심의 작용부분이다.
이 육신이 원만히 성장하려면 양성인 영양소로서 무형의 공기와 광선을 받고
음성의 영양소로서는 만물로부터 오는 유형의 영양소를 섭취하여 혈액을 중심하고 완전한 수수작용을 하여야한다. 영인체도 생심(주체)과 영체(대상)의
2성으로 분립되며 생심이라는 하나님이 분재하실 수 있는 영소의 부분이 성장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영인체도 원만한 성장을 하려면 육신과 같이 2성의 요소를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소(양성)와 육신으로부터 오는 생력요소를 받아 육신에서의 혈액의 작용과 같은 생심요소의 작용에 의하여 완전히 수수작용을
하여야된다. 육신으로부터 영인체에 좋은 생력요소를 돌려야 영인체는 좋은 생령요소를 육신에 돌려주어 영인체와 육신과는 완전한 수수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생심의 요구대로 육심이 호응하여 생심이 지향하는 목적을 따라서 생심과 육심이
완전한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완전히 수수작용을 계속하는데서만 영인체는 육신으로부터 좋은 생력요소를 받아 미와 자유의 형체를 조성할 수
있다.
만일 이에 반하여 영인체가 타락성의 지배를 받고있는 육신이 요구하는 목적을
지향하게 되면 그 생심이 육신에게 구애되어 그의 자유성장을 장애하게 됨으로 흠이 많은 영인체를 조성케 된다. 우리는 악의 자극을 받아 개전의
생활을 함으로써 선을 성장케할 수 있는 요소를 육신으로부터 받을 수 있음으로 지상생활에서 생심이 지향하는데로 생애를 영위하여야 된다. 이와같이
죄를 지상의 육신생활에서 충분히 청산치 않으면 영인체의 원만한 성장을 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양심은 구태어 그 부위를 말하자면 육심의 최고부요 생심의 최저부에 속한다.
그러므로 양심은 육심으로부터 오는 영향과 생심에서의 영향을 동시에 반영케된다. 양심이 항상 바르게 나가려면 영인체의 육신과는 항상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원만한 수수의 관계를 유지하는 입장에 서게 되어야 한다.
만일
생심이 지향하는 목적과 배치되는 방향으로 육신이 나아가면 양심은 평형선상에 서지 못하고 왜곡하게 되는 것이다.
영인체와 육신과는 이와같은 주체와 대상으로써 완전한 수수관계 가지고 있는 불가분의 일체다. 그런데 무형세계의 모든 사실은 영인체가 느낄 수 있으며 영인체에 느껴지는 모든 사실은 육신에 공명되어 생리적 현상으로 나타남으로 우리는 그 모든 영적 사실들을 육신의 오관으로 알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영인체와 육신과는 수수의 관계가 두절되어 서로 공명되지 못하게 되었음으로 인간은 영계의 사실을 알 수 없는 입장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목적은 이와같이 영인체와 육신 사이에 두절될 수수관계를 다시
맺게하여 영과 육을 아울러 창조본연의 위치에서 다시 복귀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섭리에 의하여 영인체와 육신이 점차로 수수의
관계를 맺게됨에 따라서 인간이 무형세계의 사실을 알게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제7절 사랑과 그 목적
전리된 분자의 음양 두 이온이 각각 양자(양성)와 전자(음성)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이 남성에도
여성성상이 잠재하고 여성에도 남성성상이 잠재한다. 생리학적으로도 한 개성체내에서 이성의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 무형의 이성성상을 2성으로 분립된 실체대상으로서 1남 1녀를
창조하셨다. 이렇게 분립된 2성의 대상실체가 다시 합성일체화하려는 힘을 사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랑의 목적은 이 두 분립된 양성이 합성일체화함으로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하나님의 무형의 이성성상을 닮은 실체의 이성성상으로 된 대상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완전한 수수의 원리적 관계를 맺어 일체이상을 이루려는데
있다.
그러므로 부부일신이라고 하였다(창 2/24). 형제애는 형제가 하나되고자 하는
힘이요 동포애는 동포가 하나되고자 하는 힘이니 이 사랑의 목적도 서로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기대를 유지하려는데
있다.
부부 일신을 이루어 하나님의 실체대상으로 서게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남녀가 창조된
것같이 인간에게도 자녀번식을 보게된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녀를 번식케하려는 목적은 마치 우리가 자녀를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부모의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인간도 자녀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기뻐하시며 사랑하시던 그 하나님의 심정에
대한 실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과 부부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을 총합한 주체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 가지 창조본성의 사랑을 분성적으로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체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육신생활에서 이 세 사랑을 체휼하지 못한 사람은 영인세계에 있어서도 완전한 하나님의 이상사랑을
체휼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된 후 지상에서 이 세 가지 본성의 사랑을 체휼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영인체는 하나도 없고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의 모든 성도들은 천국을 바라보는 낙원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이 세 사랑을 가장 귀한 것으로 창조하신 것인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것은 창조본연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한 사탄적 사랑이 되어 도리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아버리는 사랑이 되었음으로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자기를 더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대로 (창 1/28) 만일 아담과 해와가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부부를 이루어 타락성의 혈통을 받지 않은 창조본연의 자녀를 번식하였더라면 창조본연의 이 세 사랑을 완전히 체휼할 수
있는 가정을 완전히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받을 수 있는 터가 될 것이었다.
인간의 타락은 이 창조본연의 사랑의 터를 지상에 이루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섭리의 목적은 결국 이 창조본연의 사랑을 체휼할 수 있는 기대를
지상에 조성하려는데 있는 것이니 (1) 하나님을 중심하고 (2) 아담과 (3) 해와가 완성되어 (4) 자녀를 번식하면 이것이 곧 그 세 사랑을
체험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할 수 있는 사위기대다. 기독교의 중심이 사랑에 있는 것도 이와같이 잃어버린 사랑을 복귀하기
위함이다.
제2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피조물이 완성되기 위하여는 반드시 성장기간을 통과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은 이미 창조원리에서 밝히었다.
인간도 피조물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인간도 피조물을 창조하기 위하여 세우신 창조원리를 떠나서 창조되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써 인간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짐과 동시각에 완성된 피조물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 같이 성장기간를 통하여 자라서 완성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완성된 후에 타락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바라보고 성장해가는 기간에서 타락된 것이다. 만일 인간이 완성된 후에 타락되었다면 우리는 결국하나님의 전능성을 부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으시어 완성된 피조물에 타락이나 파멸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과목에 맺힌 열매는 완숙할 수 있는
요소를 모두 갖고 있음으로 어느 기간만 지나면 먹을 수 있게 되는 것같이 인간도 완성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전부 구비하여 창조되었음으로 어느
기간만 경과했으면 완전한 미를 갖춘 인간으로 완성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영원히 받을 수 있는 실체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었다.
이와같이 인간이 완성되어 하나님과
완전히 미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면 이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나 권세잡은 자나 지금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은 곳이나 깊은 곳이나 창조함을 받은 다른 어떠한 것이라도 내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들을 능히 끊지 못하리라」롬 8/38~39)고 하신 것이다.
아담과 해와는 이와같이 미완성기에서
타락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미를 완전히 상실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끊어진 입장에 떨어졌음으로 타락된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타락전
아담과 해와의 입장을 다시 찾아 완성기준까지 성장하여 창조본연의 미를 다시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실체대상이 되려는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은 이와같이 타락인간으로하여금 상실된 창조본연의 본성을 복귀하도록 하려는데 있음으로 이
섭리를 복귀섭리라고 하는 것이다.
「하늘아버지의 완전함과 같이
너희들도 완전하라」(마 5/48)고 친히 말씀하셨으니 예수께서도 구원의 표준을 이 완성기준에 두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심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의 실체대상이 되려면 타락으로 인한 모든 요소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완전한 미를 갖추어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지않으면 아니되겠음으로 예수님도 이와같이 교훈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믿음과 소망을 거치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찾으려는데 있다고하는 것은 이미 성서에 기록된 바와같다(고전 13/13)
병을 고쳤다는 것은 발병전의 원상을
회복였음으로 의미하는 것이며 물에 빠진 사람을 건졌다는 것은 빠지기 전 입장으로 다시 돌아오게하였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였다는 것도
죄없는 입장에서 죄있는 입장에 떨어졌으니 이 인간을 죄없는 입장으로 복귀하도록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를 이스라엘나라를 중심하고 복귀하기 위하여 후아담으로 (고전 15/45) 오신 분이었음으로 사도들은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오니까」(행 1/6)하고 질문한 것이다.
메시아를 증거하여 저의 길을
예비하러왔던 분이 엘리야였음으로 예수께서는 「엘리야는 과연 먼저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마 17/11)고 말씀하셨으며 「만물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뭇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나니 ······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고 말씀하셨다.
인간이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었으면
피조세계의 화동의 중심이 되어 만물과 인간 사이에도 미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었을 것인데 인간이 타락되었으므로 만물도 사랑의 주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사랑의 주체인 창조본성을 복귀한 하나님의 뭇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하셨다.
이것은 화동의 중심으로 설 수 있는
창조본연의 인간이 복귀되어야 만물도 창조목적을 달성한 피조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창조본성을 완성한
인간으로서 이 목적을 위하여 오신 분이었기 때문에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이 마땅히 예수를 영접하리라」(행3/21)고 말씀하신
것이다.
원리해설 - 제2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 2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도들은 구원의 명확한 표준을 알지 못하였음으로 죄를 벗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죄를 어느 정도 벗어야 할는지,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같이 완전한 사람은 어느 정도의 인간인지 알지 못하고 천국이라는 막연한 소망을 구원의 표준으로 세우고 암중모색하여내려온 것이다. 아직도 먼 거리에서 바라보면서 가는 노정에 있어서는 이를테면 서울이면 「서울」이라는 막연한 목표를 표방하여도 좋으나 일단 목적지인 서울역에 도착한 후에는 과정에 있을 때와는 달리 서울의 어느 지점이라는 국한된 목표를 알지 못하면 역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같이 아직도 천국까지에는
2000년이란 먼 거리를 두었을 때였음으로 예수께서는 천국이라는 막연한 구원의 혜택을 세워서 신앙의 방향만을 교시하셨으나 이제 인류죄악사가 그
종말을 고하고 천국을 바로 눈 앞에 바라볼 때가 되었으니 지난 날과 같이 천국만을 찾아서는 아니될 때가 되었다.
이제는 천국의 어느 지점이라는 국한된 명확한 표준을 세우고
바라보면서 나아가지않으면 신앙의 혼돈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되었다.
오늘의 신앙계의 혼란은 이와같이
되어 말세의 불가피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예수당시에도 이렇게 되어 말할 수 없는 혼란 가운데서 구약 2000년 역사는 예수님을 살해함으로
인하여 그의 실체적인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구원의 명확한 표준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은 구원의 역사가 끝나려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서광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창조본연의 본성을 복귀하여 구원섭리의
표준선을 넘어선 인간은 바로 아담 해와가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었을 인간과 동일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타락되지 않고 완성된 아담과
해와는 어떠했을 것인가. 마치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으며 물에 빠지지않은 사람에게는 건져줄 사람이 요구되지 않는 것과같이 그들에게는
구주 예수의 구원의 역사는 요구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그의 자녀들도 역시 구주의 공로 없이 천국에 갈 수 있었을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리고 타락전의 인간시조에게
있어서는 기도와 신앙생활도 필요치않았을 것이다. 사탄이 없는 세계에서 사탄과 싸워야할 기도가 무엇에 필요할 것이며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며 사는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찾기 위한 신앙생활이 어찌하여 필요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 기독교신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구원의 세계는 어디까지인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믿음으로써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늘아버지의 완전함과 같이 우리들도 완전하여 구원의 완성을 보았다면 지금 우리도 역시 타락전 아담과 해와와 같이 구주는
물론 기도와 신앙생활도 필요없는 창조본연의 인간이 되었어야할 것이다. 유대 관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세례 요한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먹고 마시는가 할 때에 예수께서는 신부가 신랑과 같이 있는 동안에야 왜 단식을 할 것인가고 대답하셨다(막 2/18~20). 우리는
예수 앞에 신부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아내가 되어 천국생활을 영위하려는 것이 구원의 최후의 목적이라하는 것은 이미 총서에서 상술하였거니와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믿음으로 인하여 완전히 구원을 받아 창조본연의 인간으로서 예수 앞에 아내가 되었다면 천국생활을 하는 아내된 우리에게
있어서는 벌써 죄악세계에 있을 때와같이 구주로서의 예수가 아니고 남편으로서의 예수만이 요구될 것이며 따라서 기도에서 해방된 생활을 할 수
있었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이후에 왔다 간 모든
성도들도 그러했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여전히 구주가 필요하며 사탄과 싸워야할 기도와 신앙노정이 엄연히 남아있다. 그러므로 성도 바울도 「대개 내
속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선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내게 있으나 그대로 이루는 것은 없는지라···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다못 지체 중에 다른 법이 있는 것을 보매 내 마음의 법과 함께 싸워 나를 사로잡아 나의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복종케하니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 그런즉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 을 섬기고 육체로는 죄의 법을
섬기나니라」(롬 7/22~25)고 진술하여 신앙자의 싸움의 생활고를 여실히 폭로하였다. 이와같이 바울은 분명히 육체내에 원죄의 악랄한 활동이
있음을 고백하였다.
이 성구는 바울이 개전전 상태를
고백하는 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이것은 바울에게 대한 지나친 숭경의 념에서 나온 그릇된 견해이다. 기독신도는 그 어느 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이 말씀도 바로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로서의 바울 자신의 고백서임을 알아야한다. 예수님 앞에 서려하면 서려할수록 몸과
마음의 가열한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신앙자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토로한 그 솔직하고도 담백한 성격에 바울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곧 하나님이 거짓말한다하는 자니라」(요일 1/10)고 하여 신자라할지라도 누구든지 죄인이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어찌하여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아직도 죄인으로서 구주를 부르고 있으며 기도와 신앙의 생활은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아무리 잘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예수 믿지않고 천국 갈 수 있는 자식을 낳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자식은 자식대로 믿지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는 죽은 자식을 낳은 것이니 그 이유는 어디 있는가하면 이것은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할지라도 인간시조로부터 받은 죽음의 요소인 원죄를 그 자식에게 유전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독신자라도 십자가의
믿음으로써는 그의 원죄까지는 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었더라면 그 자신들은 물론이어거니와
그의 자녀들도 예수 믿을 필요없이 천국에 갈 수 있었을 것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원죄까지 다 벗을 수 있다면 우리는 벌써 타락전
아담과 해와의 입장으로 돌아갔을 것이요 따라서 죽은 자식을 낳지 않게 되었을 것임으로 우리는 모두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과같이 완전하여 주
예수께서는 재림하실 필요도 없이 벌써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혈통적 원죄는 잘 믿는 성도들에게도 엄연히 잔존하여 항상 성도들을 죄악의 길로 끌어가려하고 있다는 실증적인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설혹 바울의 신앙 고백이 없다하더라도 우리 신앙생활의 체험으로 보아도 마음은 하나님에 속 해 있고 육은 사탄에게 속해 있음을 역연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항상 몸과 마음이 싸우며 아직도 성도와 성도들 사이에는 정욕과 시기와 질투와 혈기에 찬 생활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무리
잘 믿어도 원죄까지는 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도와 현실생활로써 실증하였다. 이에서 우리는 믿음으로써 모든 죄를 벗을 수 있다는 기성의
신앙관념을 용감히 배격치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의 기도를 올리며 한 절의
성구를 읽으며 한 장의 찬송을 부름으로써 원죄까지도 벗었다고 자위하며 스스로 만족하여오던 지난날의 그릇된 신앙생활에서 그 낡은 탈을 벗고 새로운
신앙의 목표를 세워야할 때는 왔다.
마치 율법으로 인한 행의로써 소생적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의 율법생활의 탈을 벗고 신의로써 장성적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는 신약시대를 맞이하여야 될 것이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써 마음으로만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신약시대의 탈을 벗고 몸과 마음을 합하여 실체로서 주 앞에 나아가야할
새로운 시대는 다가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신도들의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인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것이라(계 22/14)고 한
것이다.
이와같이 십자가의 믿음으로써는
원죄를 벗을 수 없다하면 십자가의 구원의 범위는 어느 정도의 것이냐하는 문제를 우리는 추궁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위선
메시아 강림의 의의를 알아야할 것이다. 메시아 강림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명백히 알려져있던 사실이요 메시아 탄생후도 동방박사와 목자와 시몬과
안나 등의 증거자를 세웠으며 특히 그를 세상에 증거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보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입었고 그의 출생의
놀라운 현상은 근처 고을을 떠들게 하였으며 더욱 그 생후의 광야생활은 당시 유대인으로 하여금 저가 메시아가 아닌가고까지 생각하게 하였으며(눅
3/15) 그가 역사이래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는 깊은 인식을 주게하였다는 사실은 제사장들로 그의 앞에 나아가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고까지 질문한
것을 보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요 1/19~20).
원리해설 - 제2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 3
하나님이 이와같이 여러 증거자들과 아울러 누구든지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었던 위대한 인격자 세례 요한을 세워 그의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게한(행 19/4) 목적은 어디 있는 것인가. 이는 실로 이스라엘로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서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도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된다고 하셨다(요 6/29).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택함받은 선민임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할 것이요 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저를 믿도록하는데 있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할 것이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만일 이스라엘 민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믿었다하면 그를 십자가에 달리게하였을 것인가.
로마 제국의 압정과 형식적인 율법주의에 얽매어 정치와 종교의 수난기에 처해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오직 하나의 희망은 언제나 메시아가 강림하여 그들을 그 도탄중에서 구해주시려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이스라엘민족에게 오시리라고 고대하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었다면 누가 저를 살해하였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살해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않은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저를 믿으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데 있는 것이다. 보내실 구주를 믿게할 목적으로 오랫동안 준비해오신 선민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신 섭리로 보아도 그의 죽음의 길은 예정하신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은 제물이 될 것이 아니라 산 제물로서
속죄의 사명을 완수해야할 것이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음으로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들이 하나도 알지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고 기록하여 당시
유대인의 지혜의 결핍으로 인하여 영광의 주를 고난의 주로 만들었으며 달리지 않아야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도록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과오에서 초래된 것임은 재론할 여지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한 구원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하나님의 2차적인 구원섭리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으로 인한 하나님의
제1차적 구원섭리는 무엇이었던가 하면 그것은 완전 구원이니 타락한 인간들을 창조 본성 본연의 인간으로 완전복귀시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케함으로써 하늘아버지의 완전함같이 우리들도 완전케하시려는 것이었다(마 5/48). 그러면 완전 구원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인간타락은 영만도
아니요 육만도 아니요 영적 육적 양면이 아울러서 타락된 것이다.(타락론 참고)
그러므로 구원도 영육 양면의 구원이
아울러 성립되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즉 예수께서 죽지않고 살아서 이루어야할 제1차적인 완전구원섭리인 것이다.
하나님을 닮지않고는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치 못한다.(창조원리 참조)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과 몸이 주체와 대상으로서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일체이상을 이루어 하나님을
닮아야 하나님의 주체적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아울러 사탄이 운행할 수 있는
터를 조성하여 사탄 주관권내에 머물게 되었으므로 다시 몸과 마음을 아울러 원리적 주관권내에로 복귀코자하심이 중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제1차적
구원섭리인 것이다. 여기의 마음은 영인체의 표현이 육신면으로 나타나는 부분을 말함이다.
인간의 영육을 아울러 구원하기
위하여 영육 아우른 인간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룬다는 의미임은 이미 성서가 명시한 바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신도는 그 가지라 하였으며(요 15/5)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라 하였다(고전 6/15).
예수께서 영육 아울러 살아서 뜻
맞는 제물로 하나님 앞에 섰다면 믿음으로써 그와 한몸된 우리로 영육 아울러 완전복귀된 제물이 되어 창조이상을 실현하였을 것이었는데 이스라엘이
그를 믿지못하여 예수님의 몸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으므로 그와 한몸된 성도의 몸도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게되어 육적구원은 미완성으로
돌아가게되었다. 육적구원의 미완성으로 인하여 아담부터 내려오는 혈통적 원죄는 아직도 엄연히 자자손손에로 유전되고 있음으로 아무리 잘 믿는다는
신자의 자식이라할지라도 저는 저대로 또 예수님을 믿어야할 조건이 남아있는 것이다.
원리해설 - 제2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 4
신앙생활은 사탄을 분리키 위한 싸움의 생활이다. 사탄을 분리하려면 육을 쳐야하나니 이는 사탄도 인간의 육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그와 구원의 관계를 맺지않으면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함으로 사탄은 항상 인간의 육을 상대로 하고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사탄의 상대기준을 조성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켜 그의 대상이 됨으로 악의 힘을 발휘하하는 것을 말한다. 금식을 하고 시기와 질투와 욕심과 정욕과 탐심을 버리려하는 것은 사탄의 상대기준을 조성할 수 있는 이러한 조건들을 버림으로써 악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탄침범의 길을 막기 위함이니 이 생활이 곧 기도로 인한 신앙생활이다.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하심은 항상 사탄의 침범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요 사탄이 항상 침범할 수 있음은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요 이 조건은 예수님의 육을
사탄에게 내어줌으로써 그의 신자된 우리의 육도 필연적으로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된 조건이다.
이렇듯이 예수님은 그의 몸을 사탄에
내어줌으로써 육적구원의 목적은 달성치 못했으나 십자가의 피의 대속으로 인한 부활의 승리의 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영적구원의 제2차적인 구원섭리만을
완수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구원의 범위는 영적 구원뿐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육적복귀의
구원섭리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땅에 남아있게 되었음으로 그의 재림은 필연적인 요구조건이 되었다. 예수께서 지상에 오신 목적이 다 이루어졌으면
다시 오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재림하셔서 우리의 원죄까지 완전히 대속할 때에야 우리는 완전히 복귀되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가령 여기 물 속에 빠져 숨을 쉬지
못하고 물만 먹고있는 가련한 사람이 있다하자. 이것이 바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다. 이를 완전히 구원하려면 물에서 건져 빠지기 전 상태인
육지에로 복귀해야될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아담의 후손을 건지기 위하여 완전 구원자로 오신 분이다.
그러나 현재 후아담을 믿는 첫
아담의 후손은 물 위에 코를 내어놓고 호흡함으로 겨우 죽음은 면하였으나 아직도 그 몸은 물 속에 잠겨 신음하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고통하면서도 이제는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자기를 속여가며 스스로 위로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 오늘까지의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니었던가. 이제 이 아담의 후손의
몸마저 물에서 건져 육지로 다시 끌어올려야할 구원자가 다시 오셔야할 것이니 이 분이 바로 재림예수님이시다.
이렇듯이 십자가에 달리러 오셨던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천륜의
비밀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각도로 복음서를 읽어보기로 하자.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기정적 경륜이었다면 「할만하면 이 잔을 면케 하옵소서」(마 26/39)하고 세 번씩이나 올리신 예수님의 최후의 기도는 미약한 인간성의 발로라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스데반도 그 처참한 최후의 운명을 웃으면서 끝마쳤고 바울 베드로 그 이후의 많은 성도들도 꼭같은 순교의 길을
걸었거든 하물며 인류의 구주로 오신 예수께서 아무래도 걸어야할 십자가를 앞두고 이것을 피하기를 원하는 그러한 기도를 올렸을 것인가 실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길은 천륜을 배역하는 이스라엘의 불신의 행동에서 야기된 억울한 길이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2천년 간이나
준비하여온 민족적인 믿음의 제단 위에 예수님을 산 제물로 합당한 헌제를 하였더라면 4천년 역사의 목적은 실현되어 전 인류는 살아서 영육 합하여
구원을 받아 원죄를 벗고 창조본연의 세계를 복귀하여 사랑과 진리만이 에덴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데 이제 저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본의 아닌
십자가에 달리게되니 사랑하는 제자들은 학살을 당할 것이요 또 재림기까지 십자가를 믿는 많은 신도들이 순교당할 것을 비통히 여기시어 예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올리신 것이었다.
십자가가 기정사실이라면 예수를
내어주는 사람은 어차피 있어야할 것이며 따라서 가룟 유다도 응당 있어야할 존재인데 왜 그는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다(막
14/21)고 말슴하셨을 것인가.
실로 가룟 유다 즉 예수님을 내어줄 사람은 없어야할
것이었다. 내어주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이요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육 아울러 만왕의 왕이 되었을 것이다.
이사야서에 「대개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남이여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그 어깨에 정사를 메임이여 그 이름을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하리로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여 다윗의 위와 그 나라를 굳게 세워 자금 이후 영영토록 공평과 의로움으로 치리하시리니 만군의 영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로다」(사 9/6~7)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다윗왕의 위를 가지고 그 나라를 굳게 세워 이 나라를 공평과 의로써 영원토록 치리하시려는 평강의 왕으로 오셨던 분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고 말씀하시어 저는 무궁히
계속할 지상의 왕으로 오실 것을 명시하였다. 그러기에 헤롯왕이 저를 죽이려하였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하는 빌라도의 질문에는 대담히도 네말이
옳다고 대답하셨다(막 15/2). 저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길래 이를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보고는 그를 조롱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왕」이라고 십자가 상에 써 붙였던 것이다. 영육 아울러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육적 구원은 다음 다시 오셔서 이루실 것으로 남기시고 영적
구원만을 완성하셨음으로 예수님은 오늘까지 영적 만왕의 왕으로만 계시는 것이다.
원리해설 - 제2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 5
예수는 이스라엘의 불신을 얼마나 책하셨으며 그들의 배신행위를 보고 몇 번이나 우셨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을 향하여 올라가실 때도 그 성을 보고 울며 「오늘이라도 네가 평안한 일을 알았더라면 다행하였으려니와 오직 네 눈에 숨겼으니··· 이는 권고하시는 날을 네가 아지못함이라」(눅 19/41~44)고 호소하시며 이스라엘의 불신이 결국 그 백성을 망하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죄없는 성벽에까지 재앙을 미치게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완전구원을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뜻을 아지못하는 까닭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언제까지나 내가 너를 품어야하는가(마 23/37)고 예수님은 자기를 믿어주기를 얼마나 강조했던가. 그러므로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 대답하시되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29)고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소원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더라면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었을 것인가.
꺼지는 불도 끄지않으시며 부러진
갈대도 마저 꺾지않으시는 것이 사랑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어든 어찌 구태어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하시고 그 고난의 예수님을
믿게하여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자들까지 또 십자가의 고난을 겪도록 섭리하실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도들이
당하여온 십자가의 고난은 살아서 이루려 오신 예수님을 살해하였음으로 그 죄의 탕감으로 오는 것이다.
살아서 완전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죽어서라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길을 거쳐 부활하심으로 영적 구원의 섭리를 완수하셨으니 우리도 영적 구원의 혜택권 내에 들어가려면 그리스도가 넘은 십자가를 우리 자신도 넘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의 고난도 하나님의 예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불신의 범죄행위로 말미암아 오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원리해설 - 제2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 6
메시아 탄생하실 때까지의 4천년 복귀섭리역사를
보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하나님은
2천년을 수고하신 것이 아닌가.
이와같이 4천년간 하나님이 하신 일은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기 위하여 밭을 갈듯이 메시아된 예수님 한분을 만왕의 왕으로 세우기 위한 믿음의 터를 닦아온 것이니 이는 곧 이스라엘로하여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만은 잘 믿고 보호하여 살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섭리임에 틀림없었다. 만일 예수께서 죽어야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믿음의 백성을 찾아세우기 위한 2천년의 수고는 하실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이후의 하나님의 선민된 유대인들의 운명은 어찌하여 그렇게도 비참하게 되었는가하는 문제도 십자가의 기정적 해석으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만일 예수님을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민족은 위선 예수님을 중심하고 새 에덴을 복귀하여 이 중심역사는 세계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니 이 백성의 행복이야 누가 감히 측량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일어나 빛을 발하라 대개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비치었음이라···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되 네 아들은 원방에서 오고 네 딸들은
안겨오리라··· 바다의 풍성함이 네가 돌아오고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허다한 약대가 네 경내에 편만하리니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도 올
것이고 스바로부터 사람이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하며···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 왕들이 너를 봉사할
것이니···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기지 아니함은 사람들이 네게로 열방의 재물을 가져오고 그 왕들을 이끌어옴이요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전멸되리라··· 네가 열방과 열왕의 양육을 받기를 어린 아이가 젖 먹듯하여··· 내가 금을 가져 동을
대신하며 은을 가져 철을 대신하며 동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고 의를 세워 간역자를 삼으리니···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칭하며 네 성문을 찬송이라하고··· 오직 여호와 네게 영구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네 해가 다시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함은 여호와 네 영구한 빛이 되실 것이요 네 슬픔의 날이 마침이로다··· 수효 적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지니 때가 되면 나 여호와 속히 이루게 하리라」(사 60장).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의 실체를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하나님의 영광이 뜻이 땅 위에 이루어졌을 것인가.
하늘의 은사는 물론 좋은 것이다.
그러나 끝날에는 자기에게 귀하다는 것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니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감당못할 때는 그 은사로써 심판을 받을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받은 은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들이 이것을 감당치 못하여 예수님을 살해하고나니 그들에게 주셨던 은사는 그들을
호소하여 마침내 민족적인 비운과 싸우면서 오늘까지의 2천년동안 설움의 역사노정을 밟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언은
왜 있었던 것인가를 알아보자. 하나님만을 믿고 살아야할 인간조상이 이미 불신으로 타락되어 사탄권내에 떨어졌음으로 인간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믿고 아니믿는 것은 각자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세우시사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까지 복귀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길이 누리도록하려 하심이 하나님의 예정이었으나(출 3/8)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입장에 설 때에는 사랑으로 택하사 사탄 세계에 내어주시어 영원한 세계의 국민으로서 가져야할 갖은 시련을 다 겪게하시어 길러놓으신 선민이라할지라도 그들을 전멸하시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남기셨던 것이다(민 26/65).
이와같이 뚜렷한 하나님의 예정과 약속이 있을지라도 이를 받드는 백성들이 뜻 가운데 서지 못할 때에는 세워진 예정도 약속도 이루어지지않은 예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섭리로 이 예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신 목적은 물론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창조이상 세계를 복귀코자하심이었으나 백성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십자가를 져야할 것도 예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도 두 방면으로 하신
것이니 첫째는 보내신 메시아를 이스라엘이 믿으면 이사야서 9장과 11장 및 60장에 기록된대로 메시아는 다윗왕의 위를 가지고 공평과 의로움으로
전인류를 인도하여 에덴동산으로 완전 복귀함으로 지금 우리가 성경 말씀에 의하여 바라고 있는대로의 천년왕국은 그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요 둘째는
만일 믿지 아니하면 이사야 53장의 기록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전자의 제1차적 섭리는 이루어지지않고 후자의 십자가에 의한 제2차적인 섭리만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으로 2천년 후에 다시 오셔서 제1차적인 섭리를
완수하시려는 것이다.
원리해설 - 제2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 7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예언하실 때 이것을 만류하는 베드로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마 16/23)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이미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결정된 후인 까닭이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온 이스라엘민족은 예수님을 배반한 후부터는 하나님의 원리적 주관을 받아야할 입장에 다시 비원리적인 사탄주관권내에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와같이 예수님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사탄과 하나된 이스라엘 민족과 그를 둘러싼 전인류를 하나님 품으로 옮겨놓기 위하여는 그의 탕감조건으로서 전인류를 총합한 가치적 존재인 예수님을 대신으로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이 되었다.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참고) 예수님은 이와같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영적면만의 구원섭리도 할 수 없음을 아시고 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는데 베드로는 이 길을 막으려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러한 책망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으니 이것도 구원의 전체적인 섭리의 완수를 말씀하심이 아니요 저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이미 결정하고
지향하여온 십자가의 영적 구원섭리가 다 이루어졌다함을 의미한다.
이로써 십자가의 믿음에 의한 구원은
영적 구원뿐이요 육적 구원은 재림하셔서야 이루어질 다음 시대의 섭리로 남아졌다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체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롬 7/25)고 하심도 십자가의 구원은 영적구원뿐이요 육은 아직도 사탄 주관권내에 있다함을 실증하는 말씀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께서는 그가 완전복귀사명자로 오신 목적을 당시에 공포하시지 못하셨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의 별세를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까지도 제자들이 감당치 못할 것을 염려하여 토로하시지 못하고 남기고 가신 말씀이 여러 가지로 있었다(요 16/12). 그러나 이것은
장래일로 성신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마고 약속하시고 떠나셨다.
예수께서 오셨던 목적도 당시에는
교시하실 수 없는 비밀이었다. 로마 제국 압정과 유대교인들의 핍박 가운데서 싹트기 시작한 기독교가 순복음운동만 가지고도 그러한 비참한 길을
걸어내려온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기독교왕국건설을 표방하셨더라면 유대교인들의 모략과 로마 집정자들의 탄압이 어떠했을 것인가는 족히 추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예수를 중심한 왕국(사
9/6~, 계 12/5~, 눅 1/31~33)은 정치의 힘이나 무력이나 다른 인간적이 어떠한 조건으로도 될 것이 아니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의 능력으로만 될 것은 재론할 여지도 없는 바이지만 당시의 로마 제국으로서는 이것을 용인하고 방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헤롯왕은 왕이 났다는 동방박사의 말만을 듣고도 그를 죽이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유아들을 학살하였거든 어떻게 예수께서 자신이 만왕의 왕으로
오신 뜻을 밝힐 수 있었으랴.
그러므로 이 시대와 환경에 있어서 감당못할 말씀은 제자들에게까지도 밝힐 수 없었던 것이요 제자들도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할지라도 기록으로써 밝힐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역사 이후
오늘까지 하나님의 품 속에 비밀로 감추어졌던 사실을 밝히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섭리와 일면만을 성서의 문자에 의하여 알아왔지만 그 전체적
섭리가 밝혀진 오늘에 있어서는 양면의 사실을 다 알게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께서 지상에 오셨던 목적을 몰랐다. 따라서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목적을 아지못하도록 유대땅으로 편역하시면서 안타까워 외치신 그의 말씀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시던 그의 심정도 십자가 상에서
토로하신 그 애타는 유언의 말씀도 아지못하였다. 이제 예수님은 신랑으로 맞아야할 신부된 우리들이 신랑의 심정도 모르고 어떻게 그를 신랑으로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전통적 고루한 신앙관념에 집착되어 그리스도의 새로운 말씀을 들으려하지도 않는 유대교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눅 5/38)고 외치셨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비유나 상징이
아니면 나타내시지 아니했던 하늘의 비밀이 밝히 나타날 때 그를 받아들일 마음의 터는 되어있는가.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고(마 18/3)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마 11/25) 하나님은 스스로 섰다하는 자 는 넘어질가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가 되자. 스스로 섰다하는 자가 되지말자.
원리해설 - 제3장 인류역사 종말론 - 1
인간시조가 저지른 타락행위로 인하여 죄의 뿌리는 깊이 박혔고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부터 인류역사는 선과 악의 투쟁으로 거듭하여 내려온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가들이 역사란
무엇이며 역사의 궁국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연구하여왔지만 아직까지 이 문제는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 타락의 의의 및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 등의 근본문제를 아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본장에서는 인류역사의 종말에 관한
것만을 취급하고 그 밖의 역사에 관한 문제는 후편에서 논하기로하자.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곧 복귀섭리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죄악인간의 구원을 위한 역사는 복귀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역사가 어떠한 세계에로 복귀하는가를 알려면 하나님이 어떠한
세계를 이루시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는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식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축복하셨다. 그러면 이 축복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담과 해와가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어 이 축복의 말씀대로 자녀를 번식하였더라면 창조본성의 부모의 사랑과 부부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에서 맺어진 한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미의 기대를 조성할 것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미와 사랑을
영원히 변함없이 돌리고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가정이 이루어졌으면 이것은 영원히 타락될 수 없는 사위기대가 될
것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은 번식하되
땅에 충만하도록하라고 하셨으니 창조목적대로 이루어진 이 사위기대가 확장되어 지상에 편만하게 되었더라면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창조이상 세계일 것이다.
사랑과 진리에 얽히어 죄와 상관없이
살 수 있는 세계를 천국이라고 한다면 이 창조이상이 이루어진 에덴동산이 곧 천국일 것이요 이 천국은 지상에 건설된 천국이니 지상천국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원히 임재하실 수 있는 기쁨의 에덴인 지상천국을 이루시려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그러면 에덴동산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1600년 간을 번식한 전인류를 홍수로
도말해버리고 노아의 여덟 식구만을 남기셨고 그 여덟 식구의 손이나마 천재와 전쟁과 질병에 죽고도 오늘에 이와같이 많은 인류가 지상에 편만해
있거던 만약 인간시조가 타락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대로 번식하였으면 노아홍수도 어떠한 천재도 전쟁도 질병도 없었을 것이니 지금에는 현재
인류의 수보다 얼마나 더 많은 인류가 지상에 편만했을 것인가.
그러므로 지금까지 많은 신도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아담가 해와가 창조된 그 협소한 부근만이 에덴동산이 아니라 바로 이 지구가 에덴동산이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는 바로 이 땅에 창조이상을 실현하여 에덴을 이루시고 지상천국을 건설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기 위하여 창조된
아담과 해와는 소생기를 넘어 장성기에 있어서도 다 자란 그 완성급에서 타락되어 비원리세계에로 윤락해버리고 말았으니 이 세계가 곧 지상지옥이다.
만물의 주관자로 창조된 인간이 사탄의 주관권내에 떨어지게 되었음으로 인간을 중심한 만물세계 전부도 사탄의 주관권내에 머물러 탄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로마서에 「대개 창조함을
받은 만물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뭇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나니 창조함을 받은 만물이 헛된 것에게 굴복하는 것이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니 그 바라는 것은 만물이 썩어짐의 종됨을 장차 벗어나 하나님의 뭇 자녀의 영광을 얻어 자주장함에 이를
것이니라」(8/19~21)고 하셨다.
사탄을 일러 어둠을 주관하는 자(엡
6/12)라고한 것은 이와같이 비원리세계를 주관하고있기 때문이다. 이미 창조원리에서 명시한 바이지만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하여서만 장성할 수
있으므로 지상에서 지옥생활을 하다가 육신을 벗고간 영인들은 무형세계에서도 지옥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되어 무형 유형 두 세계의
두 지옥은 생겨난 것이다.
원리해설 - 제3장 인류역사 종말론 - 2
구원의 섭리는 곧 복귀섭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전편 제2장에서 상술한 바이지만 하나님은 이와같이 지옥에 떨어진 인류를 다시 복귀하시어 잃어버렸던 에덴을 다시 찾으시고
지상천국을 건설하시어서 창조의 목적을 다시 이루시려는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지않는
분이시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으로 허락하신 이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주시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내가 말하였으매 과연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으매 과연 행할지니라(사 6/11~)고 말씀하셨다. 인간도 선의 일을 시작하면 그 초지를 관철코자 하거든 하물며 창조주에
있어서랴.
창세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한번도 실현되지 않고 사탄세계만으로 내려오다가 많은 신도들이 믿어오듯이 해와 달이 빛을 발하지 못하며 뭇 별들이 떨어지며 하늘과 땅의
체질이 풀어지고 만다면(벧후 3/10)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요 따라서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니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로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오일 간에 창조된 만물세계는 그
자체로서는 이미 완성되었으므로 이제 인간만을 창조본연의 상태로 복귀케 하면 창조의 목적은 이루어질 것인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천변지이를
일으키실 것인가.
땅은 영원히 멸하지 않을 것이다.
「한 때는 가고 한 때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4)라고 전도서는 말하고 있다.
파멸되어버릴 우려가 있는 피조세계도
아니며 실현되지않을 에덴을 계획하시고 약속하실 하나님도 아니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중생하며 부활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영생할 수
있도록 창조된 인간이 타락되어 생명잃은 자녀들로서 태어나게 되었음으로 생명없는 죽은 우리들을 다시 낳아주시어서 다시 살게 하시려는 것이니 이것이
곧 중생에 의한 복귀섭리다. 예수께서 영육 아울러 구원의 섭리를 완수하시고 가셨더라면 우리들도 영육 아울러 중생할 수 있었을 것인데 예수께서는
영적구원의 섭리만을 완수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중생을 하게될 뿐이요 육적 중생은 재림이후의 섭리로 남아진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이 영육 아울러 완전히
중생되어 완전히 부활할 수 있는 때가 오면 그때가 곧 구원의 섭리는 끝나고 부활섭리는 다 이루어지며 창조이상은 실현되어 지상천국이 다시
이루어지는 때다. 이와같이 지상지옥이 지상천국으로 복귀되어야 지상에서 완성된 인간들이 나타나게되어 생령체로서 완성된 영인들이 비로소 무형세계의
천국문을 열고 들어가게될 것이다. 이에 인류역사는 지상천국을 복귀하기 위한 목적을 지향하는 복귀섭리역사임을 알았다. 그러면 내세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피조세계는 말씀으로 창조되었다(요
1/3). 이와같이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려 말씀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하나님은 창조적 흙과 물과 같이
가치없는 존재로 떨어져버린 인간에게 다시 말씀(성서)을 주시어 이 말씀과 하나됨으로 말씀의 목적을 이루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이루게하시려는 인간재창조역사가 곧 성서의 말씀에 의한 구원섭리의 역사다. 재창조도 창조원리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못할 것임으로 복귀섭리도 질서적
삼단계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인간을 소생기까지
재창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말씀이 구약성서요, 장성기까지 재창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말씀이 신약성서다. 이제 완성기까지 재창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셔야할 말씀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니 이것이 곧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주실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지상일을 말하여도
믿지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대로 예수께서는 자기가 다시 오실 때까지의 타락세계의
섭리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재림하셔서 하실 천국건설에 관한 말씀을 못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말이 많아도
지금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천국건설을 위하여 다시 오실 때에는 반드시 그 감당치 못할 것을
염려하여 다 하시지 못하였던 그 말씀을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태초에 아담을 창조하시고 축복으로 허락하셨던 약속을 이루어야할 말씀임으로
성약서라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 신약시대는 끝나려하고 있으며
성약성서에 의한 성약시대는 다가오고 있다.
그러면 내세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죄악역사가 종말을 짓고 창조이상세계에로 바꾸어지려는 시대를 의미한다. 지금은 신약시대가 성약시대로 바꾸어지는 때임으로 말세라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고 하셨다.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계속해야할
세계의 알파(Α)에서 오메가(Ω)까지의 한 기간이 생기게됨도 타락때문이니 알파로서 시작된 타락세계가 죄악역사의 과정을 다 지나야 이 세계는
오메가로서 종결되고 다시 창조이상세계에로 복귀된 에덴동산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까지 많은 신도들이
믿고 있듯이 내세는 천변지이의 우주적 변혁이 일어날 때를 말함이 아니고 신약시대가 끝나 선과 악의 투쟁역사가 종결될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노아 홍수 시에도 「끝날이
이르렀으니 저희와 땅을 멸하리라」(창 6/13)고 하시어 그때도 말세임을 지적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기점으로 알파로서
시작된 인류죄악사를 1600년을 일기로 하여 오메가로서 끝마치고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노아의 가정을 중심하고 복귀코자 섭리하셨던 것임으로 그때도
말세로서 땅을 멸할 것으로 예언하신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창 9/22) 이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연장되었으므로 다시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써 이 죄악역사를 청산하고 에덴을 복귀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도 말세였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심판주로
오셨고(요 5/22) 그때도 「교만한 자와 행악하는 자는 다 초개와 같아서 이르는 날에 저희를 사뤄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하시리라」(말
4/1)고 말씀하시면서 그 때도 불로써 심판하신다고 하셨으며 또한 자던 성인의 몸이 많이 무덤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마 27/52). 그러나
오늘의 많은 신도들이 성서의 문자대로 되리라고 생각하고있는 것과같은 아무런 심판의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불로써 심판하신 흔적도 없으며
무덤에서 성인들이 일어났다는 아무런 증거도 보이지 않는다.
만약 성서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구약시대의 성현들이 우리와 꼭같이 육신을 쓴 인간들로서 무덤에서 일어났다면 그들은 반드시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했을 것임으로 예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의 제자들은 학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약시대의 모든 영인들이 무덤에서 일어나서 증거하는 말을 누가 믿지 않았을
것인가. 그렇다면 구약시대의 모든 영인들이 무덤에서 일어났다는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것은 부활론에서 논하기로 하자.
원리해설 - 제3장 인류역사 종말론 - 3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도 심판주로 오시며 그날에도 불로써 심판하며 무덤에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리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말의 현상은 이미 예수 초림시에도 있으리라고 예언했던 것이지만 문자 그대로 되지 않았던 것처럼 재림기인 말세에도 그렇게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맞아야할 말세는
예수께서 죽지 않으셨더라면 2천년 전 그 당시에 이미 지나가 버렸을 것이었던 말세임으로 천년왕국도 그 당시에 이루어졌을 것이요 따라서 오늘의
우리는 지상천국인이 되었을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 이 세대가 멸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는 곧 주권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국가의 흥망도 그 주권유지
여하에 달려있는 것같이 이 세상을 멸한다는 것도 사탄주권의 세계가 괴멸되고 하나님주권의 세계가 수립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성도들이 공중으로
들려올라간다는 것도 죄악세계에서 선의 세계에로 비약한 세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성서에서 말씀하는
하늘(공중)이라는 것은 우리가 오관으로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지극히 높고 거룩하시고 참되시어 우리 타락인간과는 말할
수 없이 원격한 거리에 머물러있는 곳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라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시고 거룩하시고 참되신 분으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다음으로 내세의 징조로서 햇빛이
어두워지며 달빛이 변하며 별들이 떨어질 것을 예언하였으니(마 24/29)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구약시대는 율법을 중심한 모세가
빛나던 시대다. 그러나 메시아의 강림으로 인하여 율법주의시대가 끝났음으로 모세는 그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 시대는 신약을 중심으로한
예수와 성신이 빛나는 시대로 바뀌어진 것이다. 이에 해는 예수님을 표징하였고 달은 성신을 표징한 것이다.(창 37/9)
구약시대가 끝나고 신약시대가 오듯이
신약시대는 끝나고 성약시대가 올 것임으로 신약을 중심한 예수님과 성신이 하늘에서 빛나던 시대는 끝나고 재림하셔서 새로운 빛을 땅에서 발할 때가
올 것이다.
별들이 떨어진다는 것은 성도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시아를 열망하여 오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오신 메시아를 알지 못하고 반대하다가 전부 떨어진 것같이 재림 예수님을
열망하던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전편 제7장 참조)
그러므로 인자가 이를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하셨고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 능력을 행하는 자 사귀를 쫓던 자들을 보시고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여 내게서 물러가라고(마 7/22~23)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불심판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혀는 곧 불이라(약 3/6)고 하였으니 불심판은 곧 혀의 심판이요 혀의 심판은 곧 말씀심판을 의미한다.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이리라」(사 11/4)고 하셨으니 입의 막대기와 입술은 곧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죽이고···」(살후 2/8~)라고 기록된 것도 말씀으로 심판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천지를 또한 그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벧후 3/7)라고 하셨고 「나를 버리고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정죄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하던 말씀이
마지막날에 정죄하리라」(요 12/48)고 하신 것을 보아도 끝날의 심판도 말씀으로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어찌하여 말씀으로
심판하셔야하는가 하나님은 타락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려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인간을 재창조하시기 위하여 다시 말씀(성서)을 주셔서
복귀섭리를 하신 것이다.
말씀 완성자이신 주님은 다시 오셔서
모든 인류가 어느 정도 말씀의 목적을 이루었는가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님 자신과 같이 이 말씀을 완성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요 그 말씀의
기준에 부합되지않는 자는 그 정도에 따라서 심판이 결정될 것이다.
이와같이 지금은 신약시대가 끝날
때가 되었기 때문에 독신자들은 영적으로는 장성기 완성급까지 성장하게되어 아담과 해와가 타락 직전에 하나님과 일문일답하던 단계의 심령기준에 이르게
됨으로 오늘의 독신자들도 역시 영계에 통하게 되는 것이다.
말세에는 하나님의 영을 많이
부어주시어 장래일을 말하게 하시마고(행 2/17) 약속하신 말씀대로 현대에는 유사이래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영통하는 사람들이
우후죽순같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도 말세임을 헤아릴 수 있으며 따라서 전인류는 타락전 아담과 해와가 성장하였던 그 기준을 향하여 복귀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말세에 처한 성도들의 유일한 희망은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것이라고(계 22/14) 하였으니 이것은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원리해설 - 제3장 인류역사 종말론 - 4
에덴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창 2/9).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었더라면 이 나무에로 나아갈 것이었는데 타락됨으로 인하여 「그 사람을 쫓아낸 후에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돌며 번쩍이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고 말씀하신대로 그들은 그 생명나무에로 나아갈 수 없게된 것이다.
이와같이 아담과 해와는 생명나무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비원리세계에로 떨어졌음으로 그 후손은 유구한 죄악사의 과정을 거친 후 이 이 죄악사가 종말을 지음에따라 새로이 에덴을 복귀하여
인간 시조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그 생명나무를 다시 찾아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기독론 참조)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다시 찾아 세우려는 복귀섭리 역사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서의 알파인 창세기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를 성서의 오메가인
묵시록에서 복귀하려는 것이 성서 66권을 세워 섭리하신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21장은 바로 이
새로운 에덴 건설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18절)라고 기록되었다. 하늘이 헐고 땅이 낡아질 수는 없을 것이다. 사탄의 침범으로 인하여 잠기었던 천국문이
열리는 하늘과 땅임으로 새 하늘 새 땅이요 타락으로 인하여 사탄에게 빼앗겼던 피조세계의 주권이 다시 오시는 주님을 중심한 하나님 주권으로 바뀌어
새로운 주인이 새로운 주권으로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게 됨으로 새 하늘 새 땅이라고한 것이다.
「내가 또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로 좇아 내려오니···」라고 제2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땅이 들리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 좇아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사도요한이 본 것과 같은 이러한 장면은 오늘의 많은 영통한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3절에는 「볼지어다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에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라고 기록되었다. 인간들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에 있게 되어 인간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친히 모시고 생활할 수 있는 곳이 곧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하던
에덴동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고 계속하여 기록되었다.
기나긴 역사의 기간을 두고 흘러온
우리들의 눈물을 하나님이 친히 씻어주실 때 사망과 애통이 없어질 것이니 이것은 처음일 즉 알파로서 시작된 죄악역사가 다 끝난 연고다. 다시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불지어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하노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되 다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여러 것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계 21/5~7)고 기록되었다. 만약 만물이
불로써 소멸된다면 어찌하여 만물이 창조본연의 주인공을 잃어버린 후 창조목적이 달성된 한 시간의 기쁨도 가져보지 못한 채 소멸될 끝날을 고대하고
있을 것인가(롬 8/19). 그러기에 만물도 새 주인을 맞아 새 에덴을 이루어 새롭게 될 때 그때에야 하나님도 다 이루었다고 기뻐하시면서 알파로
시작된 죄악사 가 오메가로서 끝났으니 새 에덴을 차지하는 새날이 새로운 자녀들에게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막았던 그
길을 열어놓으시고 생명나무에로 인도하시사 그들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역사가 그 종말기에 가까워옴에 따라
인류는 더욱 자유와 인권옹호와 남여평등권과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강열히 부르짖고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인류역사는 창조본연의 세계에로 전환되는
전단계에 머물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원리적인
자유를 상실하고 사탄의 주관권내에 머물게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유에 사탄의 구속을 받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흐름에 따라서
인류심령의 본성을 찾아나아가려는 경향이 농후하여질수록 사탄의 구속을 벗어나 원리적 자유를 찾으려는 심정이 점점 높아가는
것이다.
어떠한 희생을 하고라도 자유를
찾으려는 사상이 최고조로 팽창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벌써 자유를 구속하는 악주권의 역사가 종말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리해설 - 제3장 인류역사 종말론 - 5
하나님의 완전한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말할 수 없이 가치있는 존재였다. 아무리 미미한 자체라 할지라도 나와같은 존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하여 영원히 둘도 있을 수 없는 유일한 존재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나로 인하여 타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과 위로의 자극적인 감성은 나라는 대상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떠한 존재에 의하여서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천하를 얻어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바로 이 인간의 가치성을 그대로 드러내신 말씀이다.
이와같이 지고지대한 가치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언만 타락으로 인하여 금수와 같은 취급을 받은 시대가 있을 정도로 영락해버린 것이다. 역사가 흐름에 따라 인간은 이 상실되었던 인간성의 가치를 찾아나오고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는 자유와 아울러 인권옹호를 부르짖음이 더욱 치열하게 됨도 인간사회가 창조본연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이상세계의 인간사회에로 접근되어오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해와는 원래 한
몸으로서 동등한 가치로 창조되었으나 해와가 타락의 모체가 된 후로는 그 죄의 탕감으로 인하여 여성은 남성에게 인격의 유린을
당하여왔다.
그러나 인류역사는
남녀가 다시 창조본연의 동등의 가치를 찾아세울 수 있는 새시대로 전환하고 있으므로 사조의 흐름도 남녀평등권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 사랑을 찾으려는 영적동향은 날로 우심하여지고 있으니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이 끊어졌던 인간임으로 이 사랑을 복귀할
수 있는 새 시대를 지향하는 역사적 추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와같이 역사의 발전과정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고찰하더라도 역사는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복귀하려는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원시시대형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관도 이러한 탕감복귀역사를 잘 관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원리해설 - 제3장 인류역사 종말론 - 6
가인이 아벨을 살륙한 이래 역사는 투쟁으로 엮어내려오고 있는데 그 투쟁은 단지 선과 악이 공존되고 있는 실정에서 벌어지는 결과라고밖에는 생각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미 원리를 통하여 역사의 궁국의 목적은 창조이상세계를 회복하려는데 있다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았다. 그리고 인간은 완성기준을 향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타락되었으므로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직접주관을 받는 선의 세계로서 출발하지 못하고 사탄의 주관에서 이루어지는 악의 세계가 먼저 출발되었다는 것도 알고있다.
악으로 출발한 인류역사의 목적은 선의 세계를 복귀하려는 것인데 악의 세계를 그대로 방임하면 선의 세계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선을 세우시어 악을 멸하는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이와같이 인류역사는 이미 먼저 출발한 악주권의 판도를 선주권의 판도로 빼앗아 넘기려는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어 내려오고있음으로 전쟁은 필연적인 역사적 현상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사 그로써
선민 이스라엘을 부르셨고 이 선민을 기르시기 위하여 애급의 마수에서 빼앗아 내었고 그의 앞에 선 아말렉족과 가나안 칠족을 멸하게한 것은 모두
이스라엘민족을 중심한 선의 판도를 넓히려는 섭리를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하늘편에 선 국가민족이
사탄편에 선 국가민족을 멸하는 것은 선의 세계를 찾는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됨으로 선이다. 그러나 마치 함 한 사람의 실수로
인하여 노아가정 전부가 홍수심판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같이 선을 지향하는 국가 또는 민족 그 자체에서 서로 싸우는 것은 선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 됨으로 그것은 악이다.
역사는 마치 흐르는 흙물과 같다.
이 흙물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흙은 침전되고 맑은 물만이 남아지는 것같이 역사도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악의 주권은 땅에 떨어지며
땅에 밟히었던 선의 주권은 하늘을 향하여 세워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늘편과 같은 모양으로 출발하였으나 점점 땅으로 떨어져 내려오는 악주권의
향선과 서로 교차되는 때가 말세다.
그러므로 말세는 선과 악의 방향이 분별할 수 없이 같은 교차점에서 혼돈상태에 빠지는 때며 어디에다 중심을 두어야 할는지 중심을 잃고 헤매는 때다. 선과 악은 같은 점에서 좌우로 분리되어 시작되었다.(타락론 참조) 이렇게 되어 좌우의 반대 방향을 취하여 내려온 선과 악의 두 주권도 그 투쟁 역사가 종말에는 역시 돌아가고 선은 영원한 것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 교차점에 처한
인간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이 세우신 중심과 그 중심을 기점으로한 세로운 섭리의 방향성이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은밀한 뜻은 반드시
그 종에게 나타내시고야 섭리하신다고 하셨다(암 3/7).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니 노아 때도 방주를 세워 구원의
중심과 그 방향을 보이셨고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보내시어 구원의 중심과 그 중심에서 시작되는 섭리의 방향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 중심과
방향은 그 시대를 이끌고 나오던 재래의 이념이나 사상이나 종교와 타협하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는 새로운 중심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섭리의 방향은 낡은 시대의 환경 속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탈을 쓰고는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서 출발한 새로운 중심인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신 복음주의를 이끌고 가는 신약시대의 발족은 모세를 중심한 율법주의시대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하심은 바로 낡은 탈을 쓰고는 새로운 시대의 건설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 심판시에도 그러했지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그 시대의 환경에 집착된 입장에서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사탄의 왕 바알세불을
접한 사람으로 몰렸었고(마 12/24) 바울자신이 자칭 이단자의 괴수(행 24/5~14)라고 한 것을 보아도 새로운 역사는 이단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사람에 의하여 출발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단자를 두려워하여 보수적인 입장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벌써 왔다가신지 2000년이나
지난 구주를 아직도 고대하고 있는 유대교인들과 같은 입장에 서게될 것이다.
이와같이 선주권과 악주권과의
투쟁역사는 오늘까지 쉬임 없이 사탄세계에서 하늘 것으로 분립시키며 내려왔다. 땅을 빼앗어 갈라세웠고 재물과 사람을 빼앗어 하늘편과 사탄편으로
갈라세웠으니 하늘편으로 세워진 것이 민주세계요 사탄편으로 갈라 놓인 것이 공산세계다.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복귀섭리역사는 이제 두 세계로
갈라세우는데까지 이르러 벌써 외적으로는 산양과 면양 이 두 세계형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제 한편의 세계가 붕괴되면 하나의 세계형은 이루어질 것이요 이 세계는 다시 새로운 기독교의 혁명으로 시작되어 종교 통일을 거쳐 하나의 진리에 융합된 인류 사회가 건설될 것이니 그 때에 재림 예수는 홀연히 현현하시어 재림역사는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가정에서 사회로 국가에서 세계에 걸쳐 산양과 면양의 내적분립 역사는 착착 진행될 것이다.
원리해설 - 제3장 인류역사 종말론 - 7
복귀역사도 두 면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첫째는 타락된 인간자신의 복귀요 둘째는 이와같이 복귀된 인간들이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의 복귀다.
아담이 타락되지 않았더라면
창조이후의 인류는 지극히 짧은 기간 내에 오늘 타락인간이 6천년 간 과학의 발달에 의하여 건설해 놓은 정도의 생활환경을 건설했을 것이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음으로 이러한 생활환경까지도 이루지못하고 잃어버리게되었음으로 인류역사는 인간
자신에 대한 복귀섭리와 아울러 과학의 발달에 의하여 앞으로 이루어질 이상세계의 인간들의 생활환경까지도 건설해 가는 것이다. 역사가 흐름에 따라
과학이 더욱 발달되어가는 원인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좋은 시대적인 혜택을 입고 있는가 위에서도 상술하였지만 전쟁은 전쟁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선의 세계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임으로 이제 하늘왕권과 사탄왕권의 마지막 판가리 싸움만 끝나면 다시는 전쟁이 없는 이상세계가 될 것이다.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고있는 이 때에 우리는 한 민족 한 국가의 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하늘과 땅에 자유로운 인간이 되자. 그렇게함으로써만 전쟁없는 시대는 오게될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상중하의 모든
계급은 전부 출세했고 또 잘 살아보았다. 실로 눌려 살던 농민 노동자까지도 머리를 들 수 있는 주의와 제도는 세워졌다. 그러나 역사 이래에
오직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양심적인 아들 딸만이 한번도 잘 살아보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왔다.
피조세계는 누구를 위하여
창조하셨던가 타락하지 않은 아담과 해와 그리고 그의 후손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이 살아계실진대 그 사랑하시는 아들 딸에게 이 세계를
다시 찾아 주시지 않을 것인가 인간은 타락하였을망정 이러한 이상향에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창조된 본성의 흐름이 있음으로 이루어지더라도 생각도
되지 않는 그 본향의 세계를 아득한 꿈나라에다 둔채 길도 방향도 모르고 방황하는 역려의 과객과 같이 떨어버릴 수 없는 비애와 겨루어가면서 순간도
쉬임없이 이 고향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앞에 새로운
등대의 빛이 나타났으니 어떠한 풍파라도 다 헤치고 나면 영원한 안식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4장
부활론
제1절 부활의 의의
부활이라는 것은 「다시 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시 산다는 뜻을 알려면 죽었다는 뜻을 알아야할 것이다.
타죄 전에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
하신 말씀은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하셨으니 이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늙어서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 묻히게되는
것이 타락의 결과로부터 오는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창조의 원리를 모르는데서 오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노쇠하면 흙으로 된
육신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고 무형실체의 존재인 영인체는 무형실체세계로 돌아가도록 창조하신 까닭이다.
물질로 된 생명체로서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다. 생물이 어느 하나도 영생하는 것이 없다면 인간의 육신도 이 창조원칙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육신이 영원불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인체와 육신을 중심으로 한 무형세계와 창조원리적 관련성을 아지 못함으로 다만 육신생활에 대한 애착에서
빚어진 착오인 것이다.
만일 인간이 지상에서 영원히
생존한다면 영인체의 세계인 무형세계의 창조는 필요없을 것이며 육신인간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무변한 우주를 인간을 위하여 지었다는
창조의 이상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흙 속에 묻혀있는 독충이도 흙 속의
생활에만 애착을 느껴 죽지않으려할 것이니 이것은 일단 죽음으로써 변화되며 향화감밀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나비로서의 넓은 무대의 세계를 모르는
까닭일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이 항상 육신생활에
애착을 가지고 지상에서 영생하기를 희망하는 것은 영인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무한대의 아름다운 무형세계가 있음을 아지 못하는 까닭이다. 인간이
만일 타락되지 않았다면 육신인간은 지상인간들끼리와 꼭같이 육신을 벗은 영인들과도 수시로 영교할 수 있음으로 육신을 벗고 떠나는 사람도
영원이별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영인체의 옷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임으로 육신의 옷이 더러워지면 벗어버리는 것같이 영인체의 옷된 육신도
노쇠하면 벗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었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있는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돌려야할 미를
돌리지 못하게되었음으로 인간의 영원한 생명요소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어 원리주관권에서 사탄주관권으로 영락하여 비원리적 존재가
되어버렸음을 의미한다.(창조원리 참고)
그러면 다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타락인간이 사탄주관권내에서 원리주관권내에로 다시 돌아감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는 완전한 미의 존재로 복귀하여
창조본연의 인간성을 완전히 복귀할 수 있는 기준을 향하여 그것을 다시 찾아 세워 나아가는 과정의 현상을 의미한다.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된 직후의
아담은 벌써 죽은 것이었다. 그러나 따먹기 전 살았을 때의 아담과 따먹은 후 죽었을 때의 아담과의 사이에는 그 육체에 외형적인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만일 있었다면 공포와 불안에 의하여 안색이 변화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이와같이 타락권내에서 따먹은 후의 아담과같이 죽은 입장에
처한 인간과 그 인간이 부활되어 따먹기 전 살았을 때의 아담과 같이 창조본성을 복귀한 후의 인간과의 사이에도 그들의 육체에는 외형적인 아무런
변화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역시 있다면 희락과 화평으로부터 오는 안색의 빛을 볼 수 있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성신으로 중생한 사람과 강도와는 천국과 지옥의 차가 있지만 외형으로 보아서는 구별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타락인간과 부활된 인간과의 사이도 그러하다. 다만 다른 것은 사탄의 주관을 받는 죄악의 세계에서 벗어나 창조본연의 선의 세계에로 옮겨져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다시 받게되어 죄와 상관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점뿐이다.
마치 예수님은 완전히 죄없고 흠과 티가 없는 완성된 아담격으로 오신 분이었으나 그 동복의 동생들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인간과의 외형적 차이를 몰랐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창조본연의 본성을 완전히 갖춘 완성된 인간으로서 부활된 인간들의 모형으로 오신 분이시다. 복귀섭리의 결과는 부활완성의 현상으로 나타날 것임으로 복귀섭리의 완성은 곧 부활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락된 후 재림기까지의 복귀섭리의 기간은 곧 부활섭리의 기간인 것이다.
복귀섭리는 재창조 역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역사도 창조원리에 의하여 질서적 삼단계를 통하여 역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제2절 지상인의 부활
이미 창조원리에서 상술한 바이지만 인간은 지상에서 완성되어 그 완성된 인간이 육신을 벗고 완성된 영인체로서 타계함으로써 무형세계에도 완성된 영인들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곳이 곧 천국이다. 고로 부활의 섭리도 먼저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완전한 영인체로서 있는 영인들의 부활섭리도 이루어지지않는 것이다. 그러면 지상인의 부활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I. 소생 부활섭리
아담으로부터 2천년 기간은
복귀섭리의 기대를 섭리하신 시대요 (후편 참조) 따라서 부활역사를 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던 시대다. 부활섭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세우심으로부터 시작되며 따라서 지상인의 부활의 역사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까지 구약시대는 행의에 의한
소생부활의 섭리시대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준수함으로 타락인간은 소생부활의 역사에 의하여 그 영인체는 지상에서 영형체급까지 성장된다.
(창조원리 참조)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잘 믿고 간 영인들은 영형체급을 완성한 영인체로서 메시아 강림하실 때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II. 장성 부활섭리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에 의하여
영적구원의 기대만을 조성하셨음으로 예수 이후 재림기까지 2천년 신약시대는 신의에 의한 장성부활의 섭리시대로 남아지게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타락인간은 장성 부활섭리의 역사에 의하여 그 영인체는 성장되어 지상에서 생명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신약시대에 처하여
지상에서 예수님을 잘 믿고 간 영인들은 생명체급을 완성한 영인체로서 낙원에 머물러 예수님 재림하실 때만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면 낙원은 생명체급 영인들이
모여있는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을 말세라고 하는 것은 신약시대의 종말을 말함이요
따라서 장성기완성급에서 타락되었던 인간이 다시 이 급까지 부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섭리역사는 부활역사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말세엔 아버지의 영을 많이
부어주시마고 약속하셨음도 (행 2/17) 아담 해와가 타락 직전 하나님과 일문일답하던 심령기준까지 타락인간들이 부활되어 다시 하나님과 영통하게
되는 까닭이다. 타락된 인간이 이 급까지 성장하면 공식적으로 「너는 주라」는 계시를 받는 것인데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할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고는 천지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그들에게 부여한 것인데 (창 1/28) 타락으로 인하여 이 자격을 상실하였던 인간이 믿음으로
성장하여 타락전 인간의 심령기준까지 올라가면 이 상실했던 주관자격을 재부여하시게 된다.
그러므로 「주라」는 계시를 주심은 상실했던 주관격을
회복했다는 말씀이지 재림주라는 것을 의미하심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는 주라」는 계시를
내리시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예수님의 재림기에 있어서 그 영위가 장성 부활섭리의 최고
기준까지 오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 당시에 있어서 세례 요한과 같이 재림의 길을 예비하여 그를 증거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례요한은 완성된 아담격으로 아담
대신으로 인류의 죄를 청산키 위한 사탄 분립의 역사를 함으로써 예수께서 구원의 섭리를 하실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후 그 기대 위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그를 증거할 사명을 가지고왔던 분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서 그의 사명은 바로 예수께서 하셔야할 사명을 대신 지고 왔던 사람이었다.
이제 예수님의 재림기에 처한 오늘의
영통하는 독신자들은 재림예수 앞에 옛날의 세례요한과 꼭같은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특별히 주님의 대신사명자로 택함받은 성도들이다. 그런데 이 대신사명도 소생적 대신사명과 장성적 대신사명과 완성적 대신사명으로 분담되는
것인데 각자는 이 사명분야에 있어서 재림주 대신사명자로 세워진 사람들이므로 「너는 주라」는 계시를 본인에게 또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원리를 모르면 자기가 재림주인 줄 알고 그러한 행로를 취하다가는 반드시 조락하고 말아버린다.
지금까지의 많은 신령한 성도들이
이러한 원리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기준에서 혼돈되어 모처럼 애써서 얻은 하나님의 크신 은사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은 실로 유감된
일이다.
끝날에는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오게되는 이유도 이러한 원리적 섭리를 모르는 영통인들이 스스로 재림주로 자처하는 까닭이다.
현재에도 많은 영통인들이 이러한
계시를 받고 스스로 재림주를 자처하고 있는 신자들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원리를 깨닫고 이러한 비참한 말로를 걷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와같이 아담 해와의 타락 직전의
심령기준까지 성장한 영통인들도 역시 아담 해와와 같이 타락되기 쉬운 입장에 처해 있다. 아담 해와가 지혜로 넘지 못한 이 기준임으로 이 기준까지
부활된 영통인들도 지혜로써 아담 해와가 넘지못한 이 기준을 스스로 넘지않으면 다시 아담과 같이 타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같은 성서를 통하여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신도들도 각자가 보는 성서관이 다르기 때문에 교파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분열되는 것같이 하늘의 12 진주문을 향해 나아가는 교파도
역시 12지파형으로 분리되어있고 각지파에 속한 모든 영통인들도 그렇게 분리되어있으므로 각자가 문 안에 들어서서 본다면 결국은 동일한 목적을 향해
나아왔다는 것을 서로 알 수 있게 될 것이지만 이 문을 중심삼고 동서남북에 널려서 바라 보고만 나아갈 때는 각자가 바라보고있는 환경과 위치와
각자의 본성, 심령정도, 지능 등등이 동일하지 않음으로써 각자에게 보여지고 알려지는 이 진주문은 각각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다같이
천국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영통인들이라 할지라도 서로 상충적인 입장에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이와같이 섭리하심도
각자로하여금 빨리 이 문까지 끌어올리기 위함이 그 목적임으로 이러한 각개성을 대하시는 각도도 각각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끝날의 영통인들은
하나님과의 부분적인 종의 관계만을 맺고 있으므로 각자들 사이에의 횡의 관계는 모르고 있다.
따라서 똑같은 목적을 위한 하늘의
역사를 하면서도 영통인들 사이에 서로 사탄시하며 날로 가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이유는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하나의 부서진 시계를 다시
만들자는 것이 6천년 복귀섭리역사의 목적이라면 각 신도들 특히 영통인들은 이 시계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부속품 하나를 만드는 것만이 전체의
목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바늘을 만드는 것만이
하나님의 전체적 섭리라고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판을 만들고 잇는 사람이 하는 일을 하늘것이 아니고 사탄것이라고 비난하고 공박한다. 그리고
자기제일주의로 계시를 주시는 것도 각자의 심령을 빨리 끌어올리기 위함이요 또 그 사람이 맡은 그 일만을 중심하고 보면 그 사람이 그 일에는 실상
제일임으로 그렇게 계시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계시를 받을 때는
가장 겸손한 위치에 서지 않으면 사탄이 침범하게되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가 제일이라고 배타적인
입장에 선 영통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전체적인 분야가 아니고 자기에게 맡겨진 부분적인 분야에서 제일이라는 원칙을 알고 보면 언제든지
겸비한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재림주는 어떠한 분이신가하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만들어 놓은 부속품을 전부 모아서 하나의 시계를 꾸며놓는 분이시다.
이 분이 나타나기 전에 반드시 각
부속품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대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시계를 만들기 위한 부분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인물이 나올 것이니 그때에야
비로소 영통인들의 싸움은 끝날 것이다. 이러한 선구자가 바로 끝날에 하나의 진리를 선포하는 세례요한적인 사명자일 것이니 이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준비한 부속품을 가지고 그 앞으로 나와 겸손하게 제공하는 사람은 그가 만든 것으로 시계의 한 부분을 찾아 맞추어 그가 애쓴 공에 열매를 맺을
것이요 자기것만을 끝까지 붙들고 고집하게되면 다른 사람을 대신 세워 그것을 이루어 맞출 것이니 그때에는 그가 애써 만든 것은 하등의 소용없는
골동품으로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뜻을 중심하고 생각하면
끝날에는 분열된 모든 교파에게 타당성이 있으며 또 영계를 통하는 모든 신도들에게 각자가 안에 들어서서 서로 보고 공명하듯이 공인할 수 있는
하나의 진리가 나오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III. 완성 부활섭리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지않고 영육
아울러 부활섭리를 완수할 수 있었더라면 타락인간의 부활도 완성되었을 것이었는데 영적 구원섭리만을 이루셨으므로 완성부활의 섭리는 재림 이후 성약
시의시대의 사명으로 남아졌다.
예수 이후 2천년 간의 장성부활의
섭리에 의한 기대 위에 선 말세의 인간들은 영육 아울러서 오시는 재림예수를 믿고 모시고 따름으로 인하여 원죄를 벗고 그 영인체는 성장되어
지상에서 생령체를 이루게 된다. 타락이후 오늘까지 생령체급 영인체를 완성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생령체급 영인체들이 살 수 있도록
창조된 천국에는 어떠한 영인들도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결론이 성립된다.
제3절 첫째 부활
기독신자들의 최대의 희망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면 첫째 부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부활이라는 것은 인류역사
이후의 모든 타락인간들 중에서 재림역사에 의하여 맨처음으로 원죄를 벗어버리고 창조본성의 자아를 복귀하여 창조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의 완성은 재림주에 의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재림주 강림하실 때에 먼저
주를 믿고 모시고 따름으로 영육 아울러 완전히 복귀할 수 있는 혜택을 입어 제일착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생령체급 영인체를 완성하는 사람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다.
「내가 또 보매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는데 같이 있는 자가 십사만사천이니 그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그 이마에 쓴 것이 있더라 이 노래는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사천밖에는
능히 배울 자가 없으니 저희가 사람 가운데서 구속함을 얻어 처음 익은 열매가 되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드린 바 되니」(계 14/1~4)라고
하셨고 또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중에 인맞은 수가 십사만사천이니」(계 7/4)라고 기록된 십사만사천은 하늘수
삼에 땅수 사를 승하여 되는 12수 곧 12수의 평방수를 말함이니 이것은 첫째 부활에 참여할 어떤 한정된 완전수를 말함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자손이라함은 이미
바울이 밝힌 바와같이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인 육적이스라엘을 말함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한 영적 이스라엘인 기독신자를
말함이다.
그러면 영적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12지파형이 벌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각 지파에서도 마치 야곱에게 12자식이 있었으며 모세를 중심한 12지파 남북조시대에는 12소선지 예수님에게는
12제자가 있었던 것과같은 12수를 찾게되니 총수는 144의 수가 되는 것이다.
모세노정의 표시노정을 걸은 야곱도
12자식을 중심한 70가족이 애급으로 출발하였고 예수노정의 본보기노정을 출발한 모세도 12지파를 중심한 70장로로써 출발하였고 예수님의 노정을
재림하셔서 되풀이해야하는 재림예수도 이러한 국한된 수를 찾아세운 기대 위에서 전체적인 복귀섭리를 하시게되는 것이니 이 수가 곧 첫째부활에 참여할
자들의 수다. 이는 영원히 주님과 더불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만왕의 왕을 중심한 하늘의 황족들이다.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도들이 바라는 유일한 소망은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는 실로 역사이후 처음으로 천국의 황족으로 설 수 있는 존재들로서 인류역사의
전체적인 결실임으로 하나님의 전체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말할 수 없이 귀한 존재들이다.
제4절 재림부활에 의한 영인들의 부활
창조원리에서 이미 상술한 바이지만
인간의 영인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소와 육신으로부터 공급되는 생력요소와의 양성의 영양소에 의하여서만 성장되도록 창조되었음으로 영인체는 육신을
떠나서는 성장할 수 없는 것이다. (창조원리 참조)
그러므로 이미 지상육신생활에서
완성되지 못하고 육신을 벗고 타계한 영인들은 재림하여 자기들이 지상육신생활에서 이루지못하고 간 부분을 지상성도들을 협조함으로 그를 통하여 대신
이루어 맞추지 않으면 아니된다.
「볼지어다 주께서 그 성인 여러
만명과 함께 임하여······」(유 1/14)라고 하신 말씀대로 끝날에 모든 성도들이 재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형체급 영인으로서 메시아 강림하실
때까지 무형세계에 머물러있던 영인들은 메시아 강림후 전부 지상에 재림하여 지상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체급 영인체를 완성할 수 있는 지상의
성도들을 협조함으로써 이 지상성도들이 육신을 벗고 낙원으로 들어갈 때에 그 성도를 협조한 영인도 동일한 혜택을 받아서 그 성도와 같이 낙원으로
들어가게된 것이다.
예수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며 자던 성인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께서 살아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여러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1~53)고 기록된 것은 구약시대의 선지선열들이 흙으로 된 무덤을 뚫고
다시 육신을 쓰고 부활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육신은 모태에서 나서 공기와
물과 흙에서 나온 영양소로써만 성장하도록 창조된 까닭이다. 만일 이 말씀의 문자대로 육신을 쓴 인간들이 무덤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들에 관한 그
후의 기록이 성서에 없을 리가 없으며 또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상에 돌아갔지만 그 후의 제자들을 중심한 기독신도들에게 오는 박해는 없었을 것이다.
죽었던 선지선열들이 문자 그대로 많이 무덤에서 일어났으면 저들은 함구무언하고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은 메시아였다는 것을
증거했을 것이니 그들의 증언을 유대인들이 아니 믿었을 리도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기독신도들에 대한 핍박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구약시대에 왔다간 선지선열들의 영인체가 지상의 성도들을 협조하기 위하여 재림한 것을 보고 기록한 말씀이다.
생명체급 영인들이 세계 즉 낙원에서
본다면 영형체급 영인들이 머물러있는 세계는 확실히 그 형으로 보아 무덤과 같은 것이다. 그 영인들은 이 무덤에서 일어나 지상에 재림하여
지상성도의 협조를 받아서 그들도 생명체급영인체로 부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인들을 본 사람들은
지상에서 잘 믿음으로 영통할 수 있는 성도들만이 본 것이지 누구나 다 본 것은 아니다.
이와같이 부활하신 예수님도 누구나가
다 본 것이 아니라 영안이 열린 사람들만이 보았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존재였다면 승천하시기 전에 또 잡아 십자가에
달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생명체급 영인들로서
낙원에 머물러있는 영인들은 어떻게 생령체로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도 역시 재림하여 재림주로
인하여 지상에서 완성할 수 있는 지상의 성도들을 협조함으로 그 지상 성도가 생령체급 영인으로서 천국으로 들어갈 때 그 성도를 협조한 영인들도
동일한 혜택을 받아 생령체급 영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게되는 것이다.
말세에 모든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낙원도 천국에서 본다면 그 형으로
보아 무덤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역사가 태동기로 들어가면 이 무덤에 있던 영인들이 전부 재림하여 지상성도들의 협조를 받아야한다. 그러므로
지상성도의 육신은 재림하여 그를 협조하는 영인의 육신 대신역할을 하게됨으로 그 지상성도는 무덤에서 일어난 그 영인의 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엘리야의 재림은 이 재림부활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예다. 메시아 강림하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재림한다고하신 말씀은 이미 말라기 선지를
통하여 예언되었다(말 4/5).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재림한 엘리야는 바로 세례요한이라고 지적하셨다(마 11/14, 17/13).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은 전편 제7장에서 논한 바이지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사탄 분립의 사명을 지상에서 완수치못한 엘리야는 세례요한에게 재림하여 그를 협조함으로써 그 사명을 대신 이루어 맞추려했기 때문에 이 뜻을 중심하고 보면 세례요한은 엘리야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영인들의 협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오늘의 지상성도들이 방언과 예언을 하며 계시를 받으며 불을 던지며 여러 가지 능력의 역사를 하는 것은 대부분이 낙원에 머물고있던 영인들이 재림하여서 협조하는 역사임을 알아야한다. 말세에는 성신의 역사는 점점 거두시고 하늘의 성도들과 지상성도들이 서로 협조하여 가면서 복귀섭리의 목적을 향하여 역사하는 때임을 알아야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최고급의 영위에 처한 지상성도들은 이 모든 영인들과 서로 만나 서로 앞날의 뜻 성사를 위하여 의논할 수 있는 것도 의당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찬함을 얻었으나 허락하신 것을 얻지 못하였으니 대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욱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만일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하여금
온전함을 이루지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39~40)고 기록한 것은 지상의 성도의 협조없이는 영인들의 완성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로 너희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마 18/18)고 하신 말씀은 지상에서
완성치 못하고 간 영인들의 미완성부분은 지상성도들에 의하여 풀지않으면 아니된다는 뜻이다. 그런고로 무형세계의 뭇 영인들은 지상에서 속히 뜻이
이루어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협조할 수 있는 대상을 찾기에 간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제5절 재림부활로 본 윤회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전체적인 목적을
완수키 위하여 각 개체를 부르시어서 그 개성에 적합한 사명을 분담시켜 이 사명을 그와 동일한 형의 개체에로 계승하여 내려오면서 유구한 역사를
두고 그 분담한 사명분야를 점차적으로 완수하여 내려오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부분적인 사명을
전세계에 널려있는 각 개체에게 맡겨서 섭리하시다가 끝날에 이르러서는 전부 통합하여 하나의 전체적인 목적을 이루어 맞추시려는 경륜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담된 부분적인 사명이라
할지라도 그 형은 개인형에서 민족형으로 민족형은 다시 세계형으로 그 형의 범위를 넓혀내려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믿음의 중심을 세우는
개인형이 아브라함이요 이 사명의 민족형으로 나타난 분이 모세요 세계형으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이에 관한 상세한 것은 후편으로 미루겠지만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행 3/22)라고 기록된 말씀을
보아도 나같은 선지자 하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킴이니 즉 예수님은 모세형임을 알 수 있었다.(후편 모세노정 참조) 위에서도 간단히 논술한 바이지만
세례요한이 엘리야된 이유도 세례요한은 엘리야적 사명을 완수해야될 책임을 가지고 있으므로 개체는 다를지라도 사명은 동일하기 때문에 사명을 중심하고
보면 엘리야와 세례요한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오늘날 영통인들이 「나는
바울이라」「나는 베드로라」「나는 감람나무라」「나는 생명나무라」등등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그 개체 개체는 영인으로서 낙원에
있는 바울이나 베드로나 혹은 감람나무 혹은 생명나무와 같은 사명을 갖고 지상에 태어났으므로 그 영인들과 동일한 형의 사명을 완수해야될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 사명을 중심하고 보면 그 영인들과 동일한 인간으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윤회설을 중심하고 이 현상을 보면 결과적으로는 그 개체 개체가 전생에 혹은 바울 혹은 베드로였던 사람들이 윤회환생한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복귀섭리 원칙에 입각해 본다면 이것은 재림부활의 목적을 달성키 위한 영인 재림의 현상임을 알 수 있다.
말세에 있어서 하늘적인 어떠한
사명을 띠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분담된 사명분야에 있어서는 세계형인 것을 분담하고 있으므로 과거에 그와 동형의 사명을 띠고 왔다간 모든
영인들의 사명을 계승완수해야될 존재이기 때문에 사명적인 면에서 보아 곧 그들의 재림자요 따라서 그 모든 영인들은 그 사람에게 재림하여
협조하게됨으로 결과적으로 본다면 그 모든 영인들이 환생한 것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말세에 처한 오늘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 있어서도 나는 미륵불이다 공자다 최수운이다 혹은 서산대사다 등등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도 역시 이러한 영인들이 그 개체를
협조하기 위하여 재림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이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치 못하면 그 개체가 몰락됨은 물론이어니와 그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사명완수와 완성부활을 위하여 오랜 역사를 두고 간곡히 바라고
있는 영인들의 소망까지도 좌절시키는 역사적인 범죄를 하게되는 것이다.
말세에 처한 모든 성도 혹은 도인들은 모두가 이런 중대한
역사적인 책임을 지고 있음으로 실로 복될 수 있는 입장인 동시에 영원토록 원한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입장이기도함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제6절 재림부활로 본 잡영들의 현상
인간역사는 복귀역사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인간은 역사가 흐름에 따라 전체적으로 그의 심령은 본성을 복귀하는 방향으로 밝아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특별한
노력의 없더라도 인류전체는 시대적인 혜택을 이어서 받아오게되는 까닭이다.
마치 과학세계에 처한 모든 학자들이 시대가 흐를수록 과거의 학자들이 연구한 문헌으로 인하여 시대적인 혜택을 입는 것같이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도 시대가 흐를수록 후대의 사람들은 과거에 왔다간 선지선열들이 쌓아놓은 심령기준의 혜택을 받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령 백년 전 사람과 백년
후의 인간을 비교해 본다면 비록 똑같은 바탕을 타고난 사람이라할지라도 전자보다 후자는 훨씬 더 높을 수 있는 심령의 혜택을 받게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시대적인 차에 따라
심령혜택의 차가 있음으로 육신을 벗고간 모든 영인들은 낙원에 있는 선영인에서 비롯하여 유리하는 악영인(이것은 사탄이 조종한다)에 이르기까지
전부는 지상인을 붙들어 그의 시대적인 혜택을 받으려하는 것이다. 다만 선영인들과 통하는 것은 신앙기준이 높아야함으로 용이한 일이 아니지만 반대로
악영인들과 접하는 것은 대단히 용이한 것이다.
정신에 이상이 오는 것은 잡영인들이
모두 시대적인 영적 혜택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지상인에게 접하여 자행하는, 곧 잡영인들의 재림부활에 의한 현상이다. 예수께서 이 악영인들을
내어쫓음으로 정신병자를 치료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 의학계에서는 이러한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생리적 현상만으로 집중하여 치료하는 것이다. 물론 영인들의 접촉에 의한 지상인의 영적 변동은 육신의 생리적 변동으로
나타나는 것임으로 (창조원리 참조) 육신의 생리적인 기능을 조종하여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육신적인 조건을 제거함으로서 악영인을 추방하는 것도
일리가 있지만 영위가 높은 사람이 기도로써 악영인을 추방하면 즉석에서 치료되는 것이다.
영위가 높은 사람은 마치 우리가
사람을 보듯이 그 개체에 접하고 있는 악영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아니라 지상에서 무엇하다가 죽은 영인인가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지상인이 영인들과 접하게 되는 것도
서로 상대기준을 조성하는 지경까지 들어가야한다.
진리를 중심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지극한 정성을 쌓게되면
같은 기준으로 낙원에 있는 동형의 영인들과 교통하게 되는 것이고 불교의 교리를 중심하고 그런 지경에 들어가면 지상에서 불교를 신봉하다가 간
영인들과 통하게되며 또 악인은 악영인과 접하게 되는 것이다.
때가 점점 끝날을 고하게 됨에 따라 정신병 등 신경계통의 병을 비롯하여 정체 모를 병이 많이 일어나게되는 것도 사탄의 최후발악으로 움직이는 악영인체 들의 활동이 맹렬하게 되는 까닭이다.
제7절 재림부활에 의한 종교통일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하여 하나님도 아브라함으로부터 선민을
불러 하나님의 뜻만을 받들 수 있는 민족적 신앙기준을 조성하셨고 이 기준 위에 다시 세례요한을 보내어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님 이후에도 선민된
기독신자를 부르시사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저를 잘 받들 수 있는 세계적인 신앙의 기준을 조성해 오셨으니 이제는 다시 이 터 위에 석일의
세례요한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하는 사명자를 보내시사 새로운 시대의 준비를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타나시기 전에
세례요한을 중심하고 신약시대를 맞을 수 있는 성도들이 모인 것같이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이 세례요한적인 사명자를 중심하고 성약시대를 맞을 수
있는 성도들이 한곳으로 모일 것이니 이 모임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이미 위에서 상술한 대로 낙원에 있는 모든 영인들은
재림하여 지상의 영통한 성도들로하여금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곳으로 가도록 교시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날에는 영인들의 교시에
의하여 최고영위를 가진 성도들이 모이는 한 곳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바리새교인들이 예수에게 「주여 어디오니까」하고 재림하실 장소를
물어봤을 때에 「주검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느니라」(눅 17/37)하고 예수님은 비꼬아서 대답하셨다.
이 말씀은 주검있는 곳에 독수리가
아니 모일 수 없는 것같이 생명있는 곳으로 주님이 오실 것이 아닌가고 강조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생명있는 곳이 어디일
것인가하면 바로 영인들의 협조를 받아 영통하는 가장 독실한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 아닐 수 없다.
영인들도 자기의 협조를 받는 지상의
성도가 주를 만나 완전히 부활되어야 자기도 그와 동일한 혜택을 받을 터임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원리가 허락하는 한계내에서 지상인들을
협조하여 주를 만나게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지상의 모든 신령한
성도들의 협조에 의하여 주님을 맞을 수 있는 한 곳으로 모이게 될 것임으로 기독교의 통일은 이렇게 복귀섭리의 필연적인 노정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창조이상의 실현을 목표로 섭리하시는
복귀섭리역사에 나타나는 종교로서 양심이 지향하는 방향을 따라나아가는 종교는 어느 것이나 하나님의 뜻가운데서 세워지지않는 것이 없다. (총서
참조)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중심역사는 물론
이스라엘민족을 택하여 그를 중심하고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선민 이외의 이방인들은 그 민족성을 이끌어서 양심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가장 빨리 인도할
수 있는 종교를 세워 그 민족을 도야하여 내려온 것이다. 동양을 두고보더라도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유교와 불교가 있어서 그것으로써 인륜도덕을
세워 양심의 기준을 높이고 그의 터를 넓힘으로써 후일에 기독교를 받들 수 있는 양심의 기대를 조성하여온 것이다. 기독신자들이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사상을 청산하기 전에는 인류의 평화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선한 생활을 위하여
육신생활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하여가면서 일생을 비참하게 수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그들을 전부 지옥으로 보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복귀섭리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걷는 길도 역시 길임에는 틀림없다. 본길이 보이지 않는 한 그
길이나마 걷지 않았다면 인륜은 어떠한 상태에 빠졌을 것인가.
곁길을 걷는 것은 본길로 들어서기
위함인데 지금에는 본길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곁길에서만 주저하고 있으니까 잘못이라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으니 기독신도에게는 모든 종교인들을 곁길에서 본길로 인도해야할 사명이 남아져 있다는 것은 이미
논술하였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어떤 종교생활을 거쳐서 간 영인들일지라도 시기적 차는 있을망정 자기가 거친 종교의 지상신도에게 재림하여 낙원의 영인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맞을
수 있는 한곳으로 가도록 계시하여 주게되는 것이다.
같은 기독신자의 영통인들사이에도 이
한 곳으로 가도록 계시를 받는 시기에는 그 개체의 여러 가지 영적인 조건에 따라 조만의 차가 있는 것이다.
위에서도 상술한 바와같이 끝날에
이러한 성도들이 분담한 신약시대의 종말의 사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성약시대를 이루어나아가는 새 시대의 사명자들이 모이는 이 곳으로 그를
보내기 위한 계시는 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통한 사람이라도 이 중심역사를 하는 곳으로 못가도록 계시를 내리는 일이 있게되는 것은 그 사람으로서의 시기가 아직 오지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영계에서의 계시와 상관 없이라도 그 중심역사하는 곳에서 말하는 내용이라든가 또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아 자기 지혜로 판단하여 그곳으로 가게 되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일대 행복의 문이 열리게되는 것이니 끝날에는 오직 지혜있는 자가 깨달으리라(단 12/10)고 말씀하셨음은 곧 이것을 뜻한다.
이와같이 중심역사하는 곳으로 오게되면 그 사람이 그때까지 받아온 계시의 범위도 비약하여 장성섭리의 한계를 넘어서 완성섭리에 관한 놀라운 계시를 많이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각종교에 있어서도 그 종교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정도에 따라서 그가 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에는 조만의 차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영계의 전영인들이 지상에 재림하여 지상인으로하여금 한 곳으로 모이도록 역사를 할 것만은 틀림없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께서 사귀를 쫓으려할 때 그 사귀는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마 8/29)하고 사탄도 예수님을 증거한 것같이 끝날에도 재림역사를 위하여 세워진 곳이라면 이곳에 관하여는 잡영인들까지도 어떠한 곳이라는 것을 증거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도 제사장이나
교법사들이 아니었고 동방의 점성술자였으니 끝날에도 영계를 모르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아무것도 몰라도 도리어 복술들이 이것을 위하여 놀라운 증거를
할 것이니 오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옛날의 유대교 지도자들의 입장에 서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종교의 통일은 이렇게 되어 필연적인
역사노정으로 남아있고 종교통일은 전인류의 통일로 전인류의 통일은 하늘과 땅을 통일하는데까지 이끌어갈 것이니 이 때가 곧 새 에덴을 복귀한 때요
하나님이 친히 운행하실 수 있는 창조이상이 실현되는 때다.
이 한날의 기쁨을 보시려고 하나님은
6천년이란 유구한 고난의 역사를 섭리해 오신 것이다.
제5장
타락론
제1절 죄의 뿌리
타락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죄를 어떻게 청산하는가하는 문제일 것이며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궁국의 목적도 타락인간으로 하여금 죄의 탈을 벗어버리게하고 죄없는 창조본성의
인간으로 회복케하시려는데 있는 것이다.
항상 기도해야되는 것도 항상 죄를
짓기 때문이니 마치 뜯어도 뜯어도 다시 돋아나는 봄동산의 풀잎과 같이 날마다 시간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회개하지만 회개하는 보람도 없이
어디선지 죄는 돋아나고 또 돋아난다.
기도의 쓴 멍애를 벗고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는 창조본성의 인간이 되려면 죄의 잎을 뜯고있는 생활을 거듭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겨우 영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 신약시대를 거치어 죄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영과 육을 합하여 실체로 재림예수 앞으로 나아가 성약시대를 맞이해야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이래로 죄의 뿌리는 인간에게 알려져있지 않다. 따라서 아지 못하는 뿌리를 뽑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 역사이래의 미지의 사실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하늘의 비밀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하는 것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는 바이지만 필자로 하여금 대답하게 한다면
이것은 인간의 두뇌나 지상에 기록되어있는 어떠한 서적에서 귀납적으로 세워진 결론이 아니요 이 말씀은 말씀대로 하늘로부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지상에 내려온 것이다.
이 말씀을 필자는 성서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맞추어보는데 지나지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새 시대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심령기준까지 올라간 사람은 이 말씀의
정부를 명확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에 쓰여있는 술어까지도 그대로 계시로써 알려주시는 까닭이다.
이 말씀을 듣고 감명하는데 이르면 대부분의 신도들은 자기로써 감당못할 정도의 불을 받으며 영계와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하늘에서 공인하는 말씀이라면 그 말씀에 완전히 공명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은사를 주셔야 이 말씀을 하늘 것으로 체휼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체휼적인 신앙을 가지게되어야 한 말씀을 중심하고 모든 인류가 하나되어 한 뜻을 향하여 나아가 하나의 세계를 이루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타락론도 이러한 전제밑에 읽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죄의
뿌리라(창 3/6)고 성서는 말해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선악과는 과실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구주가 요구되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면 인간시조로부터의 원죄는 자자손손으로 계승되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편 제2장 참조)
그렇다면 혈통적으로만 가능한 유전적
요인이 물질에서 기인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원죄는 혈통적인 것으로 시작되었음을 추상할 수 있다. 인간은 허물있는 곳을 가리려는 것이 그
본성이다. 만약 아담 해와가 과실을 따먹는 것이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면 입이나 손을 가리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하체를 잎으로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었을 것인가(창 3/8~8).
벗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도록 창조된 아담 해와(창
2/25)가 어찌하여 범죄행위 직후에 하체에 대한 부끄럼을 느끼게 되었는가(창 3/10). 욥기에는 「내가 언제 아담처럼 허물을 가리거나 내
죄악을 가슴에 숨겼더뇨」(욥 31/33~34)라고 기록되었다. 아담이 허물을 가리었다했으니 아담이 가린 곳이 허물이 되었다는 말이며 따라서
하체가 허물이 되어서 부끄럼을 느껴 가리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타락직후의 이러한 아담
해와의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죄의 뿌리는 따먹은데 있으며 따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치 않은 기간에서 불륜한
정조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식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하셨다. 하나님의 축복은 아담과 해와가 부부로서 완성되어 번식하는데서 이루어질 것이요 번식은 사랑을 거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어야할
사랑이 어찌하여 부끄러운 것 더러운 것 천한 것이 되었는가 더구나 벗고있어도 부끄럽지 않도록 창조된 아담 해와에게 있어서랴.
이는 곧 비원리적인 사랑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문화와 예술도 그의 주요한 원동력은 사랑에 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랑을 이처럼 부끄러운 것
천한 것으로 생각하게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사랑이 타락의 기원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일 것이다.
가장 귀한 것으로 주신 것을 사탄이
악용하여 죄악세계를 이루어나오고 있음으로 이것이 가장 귀한 것으로도 보이고 동시에 가장 천한 것으로도 생각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아이들이 성장하면 하체부터 가리게되는 것도 타락된 인간이지만 천륜을 대하는 양심의 움직임은 부지불식간에 인간은 하체로써 타락되었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할례가 실시되었던 것도 이 죄의 뿌리를 아지못하고는 풀리지 않는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고 하신 말씀대로 율법에 의한 구약시대는 이렇게 수리적인 탕감조건을 세워서 복귀섭리를
하셨다.
고로 아담이 하나님의 뜻대로 양부를 쓰지 못하여 타락되었음으로 그 부분을 찢어 사망의 피를 뽑아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설 수 없음으로 할례를 하는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을 넘을 때에 환도뼈를 친 일이며(창 32/25) 이스라엘 민족이 깊은 맹세를 할 때에는 환도뼈에 손을 대고 행한 일(창24/2)들은 모두 죄의 뿌리가 성문제에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있어서 가장 큰 범죄는
음란이다. 많은 영웅 열사가 음란으로 망하였고 소돔 고모라와 같이 국가사회도 음란으로 흐를 때 하나님은 저를 멸하였으니 이 모든 역사적 사실도
인간의 타락은 성문제에서 출발되었음을 말하고있다.
인간의 타락도 그러하지만 인체에 일어나는 제반질병의 대부분의 원인도 비정상적인 성관계에 의한 생식기 계통의 생리적 기능장애에 있다는 것은 한의학은 물론 서양의학계에서도 점점 인식하게 되었으니 이것도 인간타락의 뿌리가 어디 있는가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유력한 증거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고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두 길을 보여주셨는데 사망도 개의치않고 나아가도록 아담 해와를 몰아낸 원인은 사랑문제 이외에 아무것도 있을 수 없으며
더구나 먹는 것이 그 원인이 되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해와로하여금 따먹도록하게된 존재는 무엇이었는가하면 그것은 뱀이라(창 3/1~4)고
기록되었다.
창조원리로써 밝혀진 바이지만 인간을
제외한 유형실체세계의 모든 존재물은 영인체를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뱀도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비영적인 존재가 하나님의 뜻을 알며 인간을
타락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시조를 타락케한 뱀은 실제의 뱀이 아니라 그것은 천사를 상징한 것이다. 계시록 12장을 보면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이라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니」(9절)라고 기록되어 있다. 옛 뱀 마귀요 혹은 사탄이라고 하였으니 마귀나 사탄은 곧
타락된 천사를 표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천사가 타락되었다는
성서적인 근거를 찾아보면 「하나님은 죄를 범한 천사를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렁이에 두어 심판할 때까지 지키게하셨으니」(벧후
2/4)라고 기록되었으니 이 말씀을 보더라도 천사가 범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천사는 어떠한 범죄를 하였는가하는 문제는 유다서에서
밝혀질 것이다.
「또 제 지위를 지키지아니하고 그
처소를 떠난 천사를 주께서 영원한 결박으로 어두운 가운데 가두사 큰날의 심판을 기다리게 하셨거늘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고을이 그 모양 (천사의
모양)을 본받아 간음을 행하고 괴이한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아 표가 되었나니라」(유 6/7)고 기록된대로 천사도 역시 아담과
해와와 같이 간음으로 인하여 타락된 것이 분명하다.
이와같이 인간조상은 하나님이 허락치않은 기간에 있어서 뱀의 유혹에 의하여 불륜한 성적관계를 맺음으로 타락되었음을 알았고 천사도 간음으로 범죄하였다는 사실도 알았으며 인간조상을 유혹한 뱀이 바로 천사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면 타락된 아담과 해와와 타락된
천사인 사탄은 어떠한 관계를 갖게 되었는가하는 것은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인 「너희들은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나니라」(요 8/44)하는 기록을 보아서 그들은 서로 혈연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해와는 천사와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은 마귀의 자식이 된 것이요 또 세례요한도 이스라엘선민들을 향하여 독사의 종류라고 외치어 그들도 역시 뱀으로 표시된
사탄의 후손임을 명시한 것이다.
사신을 음란의 신이라 (레
20/5)하신 말씀을 보아도 천사의 타락의 기원이 성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또 「해와가 뱀의 궤휼에 유혹된 것같이 너희 마음이
변하여 그리스도를 향하는 정성과 정결한 마음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고 기록된 것을 보더라도 인간의 타락은 마음이 변한 것과
정결한 마음 즉 정조를 잃어버린 것이 타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아담과 해와는 어떻게
천사장과 혈연관계를 맺게되었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제2절 천사장과 해와의 타락과 아담의 타락
사탄은 욥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듯이(욥 1/9) 항상
인간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여 지옥으로 끌어가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도「대개 우리 형제를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으니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라」(계 12/10)고 기록하여 우리를 참소하는 사탄이 있음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인류역사 이래로 지상에 있는 어느 한사람도
사탄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여 그를 추방하려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남의 죄상을 확실히
아지못하면 그 사람이 범죄인인줄 알면서도 법정에 고소하여 형벌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사탄이 악한 것은 알고 있지만 사탄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범죄를 하였는지 그 진상을 아지 못하였음으로 그를 하나님 앞에 참소할 조건을 세우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의 죄상을 아는 사람이 없을
때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떳떳이 살아갈 수 있는 것같이 사탄이 피조세계를 떳떳이 주관하여온 것도 사탄이 사탄된 원인과 유래를 알아 그의 죄상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는 사람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상세계라는 것은 사탄을 완전히 추방한 세계임으로 인간이
피조세계 전체를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복귀하여 이상세계를 건설하려면 사탄까지도 자연 굴복시키어 그를 주관하는데 이르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새에덴을 찾을 수 있는
끝날의 성도들은 모두 사탄이 사탄된 비밀을 알아가지고 이것을 하나님 앞에 참소조건으로 세워서 각자가 사탄을 자연 굴복시킬 수 있는 자격자가 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밝힐 수 없는
하늘의 비밀을 상징과 비유로써 성서를 통하여 먼 거리를 두고 명시하셨고 생활과 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실증으로 보여주셨으나 인간은 무지하여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유구한 역사를 경과하였다. 하나님 품 속에 감추어있던 이 비밀을 오늘에 이르러 뭇 인간에게 폭로시킬 수 있는 원리를 한국에서
찾아세움으로 사탄의 정체를 밝히어 우리들이 손으로 사탄을 추방할 수 있는 서막을 올리게 되었으니 하늘땅의 기쁨이야 얼마나 클 것이며 사탄의
슬픔이야 얼마나 심할 것인가.
사탄도 이제는 궁지에 이르러 최후의
발악을 할 때는 온 것이다. 그러면 이제 천사와 해와와의 타락에서 아담의 타락에 이르기까지의 전말을 기록키로하자.
태초에는 하나님 한 분만이시오 그
밖의 모든 존재물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하여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다. 사탄도 창세전부터 존재하였다는 이원론적인
학설을 세우는 학자들도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원리에 대한 인식부족에서 오는 착오인 것이다.
하나님은 최초에 천지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천사를 창조하신 목적은 첫째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사환으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중대한 축복을
전하였고(창 18/10) 그리스도의 잉태의 보를 전달하였고(마 1/20, 눅 1/31) 기타 천사의 봉사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는 것이다(왕상
19/5, 눅 16/22, 행 12/7~). 그러므로 천사는 「부리는 영」이라하였다(히 1/14).
둘째로 천사는 하나님에게 송영을
드리는 송영자로서 창조되었다(계 5/11~12, 7/11~12). 이와 같이 천사세계를 창조하신 후에는 마치 이스라엘 민족의 복의 기관으로
아브라함을 세우듯이 천사세계에 대한 사랑의 기관으로 천사장 누시엘을 세웠다. 그러므로 누시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독점하는 것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창조된 천사는 인간보다 저급에 속한 위치에 처해 있음으로 성도들은 천사들까지 심판한다고 하였다(고전
6/3).
하나님은 천사세계를 창조하신 후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의 주관주로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창조원리로써 해명된 바와같이 인간은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실 수 있는 성전이요(고전
3/16)천사는 인간의 주관을 받아야 할 존재임으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천사보다 더 가까운 사랑의 위치에 두셨던 것이다.
천사장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이나 후나 변함없는 것이었지만 아담과 해와가 자기보다 더 하나님 앞에 가까운 사랑의 위치에 있는 것을 볼 때 천사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에 대한 감소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누시엘은 아담과 해와에게 가는 사랑에 있어서도 자기가 천사세계에서 가졌던
것과 동일한 위치를 취하려하였다. 천사장 누시엘이 해와를 유인하게 된 동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누시엘이 해와와 더불어 대화를 할
때 해와는 누시엘에게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으로 보여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의 생명의
근본이요 행복과 이상의 요소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존재일수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같은 인간들 사이에 있어서도 하나님에게 가까운
신령한 사람일수록 아름답게 보이거든 하물며 자기보다 높은 사랑의 급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을 바라보는 천사장에게 있어서랴. 그러므로 아담 해와는
천사장에게 극히 아름다운 존재로 보였다. 더구나 해와가 천사장의 말에 끌리우는 경향을 보이게 될 때 천사장에 대하여 그는 말할 수 없이 사랑의
자극적인 충동감을 일으켜주는 대상으로 나타났다.
이에서 누시엘은 죽을 것을 무릅쓰고
해와와 영적으로 불륜한 정조관계를 맺게되었으니 이것이 곧 영적타락이다. 천사가 간음으로 타락되었다는 기사는 바로 이러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적인 존재와 유형실체의 존재가 이러한 성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하는 문제는 영적인 체험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시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영적인 존재와의 모든 감성은
어떤 점에 있어서나 실체적 존재와의 감성과 추호도 다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더 강하게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번번히 인간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지만 영인과 결혼생활까지도 하는 지상인이 있는 것이다.
천사가 얍복강을 넘기 전에 야곱과
밤새도록 싸워 그의 환도뼈를 꺾은 사실이며 (창 32/25) 아브라함의 처에게 그 잉태를 예고하러왔던 천사가 고기를 먹었다는 것(창
18/7~8)과 소돔성을 멸하기 위하여 롯의 집에 간 두 천사를 가리켜 그 성 백성들이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고
외친 사실 등을 미루어본다면 이 문제는 쉽사리 이해될 것이다. 이와같이 사탄이란 존재가 먼저 있어서 해와를 타락시킨 것이 아니라 누시엘의 타락은
해와의 타락과 동시에 성립되어 사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도 논 한 바이지만
사신을 음란의 신이라하였고 전인류가 이렇게 사탄의 혈통을 받았음으로 원죄는 대대로 혈통적인 죄로서 유전되는 것이요 예수님도 이스라엘민족을 보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요 8/44)고 하시어 그들을 마귀의 혈통적인 후손이라 하셨고 세례요한도 「이 독사의 자식들아···」(마
3/7)고 외침으로써 인간은 사탄의 혈통적 후손임을 명시하였으며 바울도 「성신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들도 또한 자기 마음에 탄식하며
양자됨을 기다리나니」(롬 8/23)라고 진술하여 타락권내에 있는 사람들은 혈통이 다름으로 하나님 앞에는 양자가 되어야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사랑에 의하여 일체를 이루면 그
대상에서 그의 요소를 받을 수 있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해와도 누시엘과 일체를 이룸으로써 천사장의 요소를 받았으니 첫째는 천사장의 공포심을
받았다. 누시엘은 하나님이 허락치않은 비원리적 행동을 감행할 때에 창조목적을 지향하는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오는 공포심을 갖게 되었음으로 이
후천적인 성품이 그대로 해와에게 전해진 것이다. 인간에게 사신이 들 때는 반드시 공포심을 통해서 발작되는 것인데 그 원인은 이런 후천적인
성품에서 오는 것이다. 다음으로 해와가 받은 요소는 천사장의 지혜였다. 해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위에 있어서는 천사장보다 고급위에 있었으나
아직 미완성기에 있었기 때문에 (창조원리 참조) 지혜에 있어서는 이미 완성단계에 처한 천사장만 못한 급위에 처해 있었던
까닭이다.
이와같이 해와가 천사장의 지혜를
받고 보니 천사장은 자기의 원리적 상대자가 아니요 아담이 자기의 남편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아직 성장과정에 처했던 아담과 해와는 남매와
같은 입장에서 부부란 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제 범행을 하고난 해와는 이제라도 자기의 원리적 상대자를 찾아세움으로써 다시 원리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입장을 회복코자하여 아직 이성을 모르는 아담에게 「따먹으라」고 사랑을 강요하였다.
아담도 해와의 요구에 처함으로써
육적 타락이 성립되어 해와가 천사장에게서 전수한 공포와 지혜를 아담도 그대로 받게되니 이에서 그들은 부끄럼을 느껴 무화과잎으로 하체를 가리고
숨게 되었다.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축복대로
완성되었더라면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의 일체를 이루어 생육하고 번식하여 하나님의 축복대로의 타락없는 자녀가 땅에 충만케되어 지상천국을 이루었을
것이었는데 (창 1/28) 미완성기에서 사탄을 중심하고 사랑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사탄혈통의 자녀를 번식케되어 모든 인류는 사탄이 주관하는
지옥이란 비원리세계에 머물게된 것이다.
제3절 천사장과 인간시조가 원리를 탈선하게된 원인
원리로써 창조되어 원리궤도에 의하여
생존하는 피조물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시조나 천사장의 타락이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은 그
궤도에 의하여 생존을 영위하도록 몰아내는 원리의 힘보다 더 강한 힘이 부닥칠 때는 그 피조물도 원리궤도에서 탈선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철로나
기관에 고장이 없는 한 기차는 탈선될 수 없으나 기차가 달리는 힘보다 더 강한 힘에 부닥칠 때에는 탈선케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원리의 어떤
힘보다도 강한 것이 사랑의 힘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힘은 원리의 어떤 힘도 그를 주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의 힘만이
천사장과 인간시조로 하여금 원리궤도를 탈선케할 가능성이 있음으로 「따먹지 말라」하는 조건을 준수케하여 이 원리탈선을 방지하려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사랑의 힘을 이렇듯
원리의 힘도 그를 주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하셨는가 하면 그것은 사랑을 사랑답게하기 위함이다. 원래 인간은 완성되면 하나님의 품 속에서
어떠한 힘에도 끌려가지않을 정도로 강한 사랑에 품겨 생활하도록 창조하셨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으로써 인간을 주관하려하신
것이다.
만일 이 사랑의 힘이 원리의 힘보다
고차적이 아니라면 그런 감성이 약한 사랑은 차라리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주시되 끝에서도 끝의 사랑을 주시려하여 끝에
세워놓으니 떨어질 염려가 있어서 「말라」는 주의를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말라는 조건을 주신 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도들이 믿고 오듯이 자유의사로 지키는가 아니지키는가를 보기 위한 법으로서 세운 것이 아니라 극단에 세워놓은 사랑이니 떨어질 염려가 있음으로 떨어지지 않게하기 위한 필수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따먹지 말라」하는 조건은 언제까지든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완성할 때까지의 성장과정에서만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원리적 부부을 이루었더라면 따먹는 것은 원리적인 것으로 허락될 것이었던 까닭이다. 이와같이 그들이 원리적인 부부를 이루어 그 절대적인 사랑의 힘으로 결합되었더라면 그들을 그 절대적인 사랑에서 끊을 자 는 없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사랑의 힘을 절대적인 것으로 세웠기 때문에 성장기간에 있어서는 타락될 염려가 있어서 말라하는 조건이 필요했지만 그들이 일단 완성된 후에는 도리어 사랑의 힘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끊을 자는 없는 것이다. 완성기준이란 것은 사랑을 중심한 이성을 의식하게될 때를 의미하는 것임으로 아직 남매의 입장에서 이성을 느끼지 못하는 성장과정에 처한 아담 해와에게 있어서는 따먹지 말라는 조건은 불필요한 것이며 또 이것을 준수하는 것도 하등 곤란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직 천사장 때문에 이런 조건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조건은 인간이 영원히 지켜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옆에 천사장이란 위험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완전한 본성의 사랑에 결합될 때까지의 기간에서만 지키기를 요구한 것이다.
인간이 완성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부부를 이룰 때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기 때문에 천사장의 지혜를 받아 눈이 밝아져서 하체를 가리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따먹으면 눈이 밝아지리라」는 천사장의 유혹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요 눈이 밝아지기를 바랐던 해와의 욕망도 악은 아니다. 다만 아직도 미완성기에 있는 인간으로서 완성된 후의 것을 달성하려는 욕망 즉 때 아닌 때에 때의 것을 바라는 욕망과 천사장의 해와에게 대한 과분한 욕망이 상대기준을 조성할 때 그 수수작용에 의한 힘은 그들로 하여금 창조목적을 지향하는 궤도를 탈선케한 것이다.
일광의 온기를 받기 위해 문을 열어놓으니 찬 바람이 들어온다. 그러나 이것은 원리적이다. 바람은 유동하기 때문에 바람다운 것이요 유동하기 때문에 고저, 기압에 의하여 비 오고 눈이 오며 유동하기 때문에 폐는 공기로써 산소의 공급을 받아 생활기능을 유지한다. 공기는 이러한 본성에 의하여 문을 열면 그를 통해 실내로 유입하는 것은 원리적이다. 그러므로 일광도 제대로 받고 바람도 막으려면 여기에는 반드시 유리문을 달아야한다는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같이 절대적인 사랑도 향유하고 타락도 되지않으려면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필연적인 조건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조건은 자유의지로서 하나님을 섬기는가 아니섬기는가를 보기 위한 이자택일(양자택일)의 조건은 아니다. 하나님은 타락된 인간과 같이 시험을 즐기는 하나님이 아니신 까닭이다. 다만 아담 해와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부여하기 위하여는 하나님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필수의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이 조건을 지켜야하는 것은 바로 아담 해와가 걷지 않으면 아니될 원리궤도였던 것이다.
제4절 자유와 타락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큰 은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자유로 인하여 인간이 타락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자들도 많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에게 있어서는 생명과 사망의 두 길이 명시되어 있었음으로
자유의지로써 생명의 길을 버리고 사망의 길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자유로 인하여 타락되었다면 아무리 큰 특전으로 부여된
자유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자유가 있는 한 인간은 완성된 후에도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을 것임으로 우리가 완전구원을 바라고 나아갈 소망조차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타락될
가능성있는 불완전한 인간을 지으셨다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완전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이 성립될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찾으려는 목적은
이상을 실현하려는데 있고 이상을 실현하려는 궁극은 창조본연의 자아를 다시 찾을 수 있는 에덴동산을 복귀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타락인간이 찾지
않으면 아니될 필수적인 조건으로 남아진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은 모두 사탄의 억세인 구속에 의하여 본연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자유를 잃었기 때문에 그 자유를 찾음으로써만 본성의 자아를 복귀할 수 있을 것임으로 육신의 생명을 각오하고라도 그 자유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자유 때문에 타락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타락으로 인하여 자유를 잃어버렸음으로 그 자유를 다시 찾기 위해 죽는 것이니까
자유때문에 죽는 것같이 보여지는 것이지만 자유 그 자체가 사망의 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류역사가 창조이상세계를 찾아나아감에 따라 자유를
찾아 부르짖는 인류의 소리가 더욱 높아가게되는 것도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자유를 잃어버렸던 것임을 증거하는 사실이다.
원리를 떠난 자유가 있을 수 없는
것임으로 책임없는 자유나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리는 실적이 없는 자유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자유로 인하여 하나님의 설움을 자아내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주의 신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나니라」(고후 3/17)고 하셨으니 신이 계신 곳에만 있을 수 있는 자유로 인하여 인간이 사망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따먹지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보면 따먹을 수도 있고 아니 따먹을 수도 있는 행동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타락전 아담과 해와에게 있어서는 위에서도 말한 바와같이 이 행동의 자유로서는 타락되지 않는다. 따먹는 것도 아니
따먹는 것도 모두 아담과 해와에게 있어서는 완성된 후에는 허락될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범죄행위가 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완성될 때까지의 자라는
기간에 있어서는 천사장과의 범행을 염려하시어서 말라는 조건을 세웠던 것뿐이다.
사실 천사장이라고 하는 염려되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말라하는 명령은 세울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남매와 같은 입장에서 서로 부부라는 것을 모르는 성장기간에 있어서는 이런 행위는
할 수도 없을 것이요 그들이 서로 부부라는 것을 알게될 때에 벌써 완성된 존재임으로 하나님도 이 행위를 허락치 않을 수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따먹지 말라 하신 것은 완성되면 하나님을 중심하고 일체를 이루어야할 존재니 성장과정에 있어서 천사를 중심하고 그런 관계를 맺지말라는
것을 직접 교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다.
이와같이 아담과 해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앞에까지 나아간 것은 행동의 자유에 의한 행위였음으로 범죄가 될 수 없으나 이 타락선을 넘어 따먹도록 해와를 이끌어낸 것은 자유가
아니라 원리의 힘보다 강한 사랑의 힘이었다. 행동의 자유를 취하도록 이끌어주는 원리의 힘보다 사랑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인간은 사망의 길로
끌리어 들어가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행동의 자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타락선을 넘게하는 계기는 되어도 그 선을 넘게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되지않는
것이다. 인간이 다 자라서 성년이되면 어련히 자유로 가서 마음대로 물을 퍼먹을 수 있도록 파놓은 우물이언만 이 우물 옆에 가지말라고 어린
아이들에게 타이르는 것은 거기에 간다는 행동의 자유가 죄가 되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린 아이들임으로 우물 옆에 가는 것을 허락함으로
말미암아 빠질 수 있는 계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아담 해와도 성년이 되면
의당히 행동의 자유로써 따먹을 수 있도록 창조하신 것이지만 따먹지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 자체가 죄가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미성년임으로
말미암아 따먹는 것을 허락하면 천사장과 그런 결과를 맺을 수 있는 계기가 성립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키지 못할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행동의 자유로써 하등의 어려움없이 준수할 수 있는 계명이었는데 다만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천사장과 상대하게 되니 이로써 불의의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고로 결과적으로 보면 타락선까지 나아가게한 자유행동에 의하여 그 선을 넘은 것같이 보여지나 실상 그 선을 넘게한
것은 행동의 자유가 아니라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이다. 그들이 완성되었으면 이 선까지 나아간다 하여도 그들은 보다 더 큰 부부의 원리적인 사랑에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천사장과의 사랑에 끌리어 이 선을 넘을 수는 없는 것이다.
행동의 자유라는 창조본성은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에게도 엄연히 남아있음으로 마치 타락전 아담 해와가 행동의 자유로써 타락선까지 나왔었고 이 선을 넘게한 것은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이었던 것과 같이 타락인간도 행동의 자유로써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생명선까지는 나올 수 있고 이 생명선을 넘는 것은 원리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다. 이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생명선까지 나오는 것이 타락인간에 남아진 5%의 책임분담이요 이 생명선을 넘겨 원리주관권으로
이끌어주시는 것이 95%의 하나님의 책임분담이다. 행동의 자유로 인하여 타락선까지 나온 인간을 타락시켰으니 반대로 행동의 자유로 인하여
생명선까지 나온 인간을 복귀하는 것도 탕감복귀원칙으로 성립될 수 있는 사실이다. (후편 서론 참조) 그러면 타락전 인간을 이 사망의 선까지
이끌어낸 불신으로 인한 자유행동을 하나님은 간섭치 않았음으로 생명의 선까지 타락인간을 이끌어내는 믿음으로 인한 자유행동도 사탄이 간섭치
못한다.
하나님이 타락인간을 두고 복귀섭리를
하실 수 있는 것은 이와같이 사탄도 간섭할 수 없는 양심에 의한 행동의 자유란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말세에 처한 모든 신도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혼돈상태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것은 이와같이 하나님 편과 사탄 편이 갈라지는 교차점에서 하나님도 사탄도 간섭할 수 없는 행동의 자유로써
좌우를 판단하여 자기 지혜로 찾아 나아가야할 입장에 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락인간의 구원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도 인간의 행동의 자유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제5절 타락성본성
I .하나님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함
천사장이 타락하게된 동기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사랑치 못하고 시기하여 해와와의 사랑을 유린한데 있다.
부모가 사랑하는 동생을 부모와 같은
입장에서 사랑하지 못하고 질투하는 마음,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그 사람과 같은 입장에서 기뻐하지 못하고 훼상하려는 마음 등은 다 이 천사장의
타락성본성으로부터 계승된 것이다.
II .자기의 존재위치를 떠남
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타락전의 죄없는 천사가 어떻게
해와를 꾀이는 입장에 설 수 있었던 것인가하는 문제를 먼저 해명해야될 것이다.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을
중심하고 우행해야할 인간이 사탄을 중심하고 좌행한 것이 타락이다. 이렇듯이 선과 악은 하나의 사랑에서 시작되어 정반대의 방향을 취하여 성립된
것이므로 구원의 섭리는 결국 이 악의 방향을 완전히 선의 방향으로 돌리려는데 있나니 이 전향의 중축지점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원래 선에서 악으로 반전된 지점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영적지점이요 하나는 육적지점이다. 전자는 천사장과 해와를 반전시킨 중축지점이요 후자는 아담과 해와를 반전시킨 중축지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두 지점을 하나의 중축지점에 모아놓고 한번에 180도의 전환을 감행하러오신 분이었는데 십자가로 인하여 예수 자신의 육적 지점을 잃고보니 영적 전환만을 완수하고 육적 전환은 재림시의 사명으로 남기고 가신 것이다.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참조)
욕망이라는 것도 같은 점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을 중심하고 우행하면 선이요 사탄을 중심하고 좌행하면 악이다. 그러므로 욕망 그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본성이다. 다만 이것을
사탄의 뜻을 위한 방향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했으니 이 소망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 편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을 의미한다. 욕망이 있길래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려고 보다 더한 선, 보다 더한 의를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닌가. 바울이 남의 쌓은
터에 전도하지 않겠다고 황무지를 찾아다니며 누구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던 그 커다란 욕망은 마침내 그같은 선과 의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한 것이다.
이와같이 타락세계에서 악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행동은 방향이 사탄세계를 조장하는 곳으로 흘렀기 때문에 악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법도를 중심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한
방향을 취하게 되면 모두가 선이 된다. 그러므로 천사장에게 있어서도 욕망은 창조본성으로 부여되었던 성품이다. 또 인간과 천사장에게는 지혜를
주셨던 것이다.
지혜가 있는 한 비교의 능력이 있을 것이고 비교의 능력이 있는 한 인간에게 가는 사랑이 자기가 받는 사랑보다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자기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아담 해와인 것을 아는 천사장이 욕망이란 창조본성이 있는 한 아담과 해와가 받는 사랑과 같은 사랑을 자기도 받고자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악이 아니라 창조본성의 발로임을 알 수 있다. 타락치 않은 천사장에게 악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이 선을 넘어서 아담과
해와에게 가는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독점하려는데서 타락이 성립된 것이다. 이 선을 넘도록한 것이 곧 사랑의 힘이다. 굶주린 사람이 먹고 싶다는
식욕을 가지는 것은 창조본성이다. 이는 육신의 보존을 위한 생리적 현상이다. 예수께서도 목마르실 때 물을 마시려하셨고 피곤하실 때 쉬려하신
생리현상은 피하지 못하셨다(요 4/6~7). 다만 먹고싶다는 선을 넘어서 훔쳐서라도 먹어야한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 비로소 범죄행위는 시작되는
것이다.
「또 제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처소를 떠난 천사···」(유 1/6~)라고 기록된 말씀과 같이 선을 넘어서 제 지위를 떠날 때 범죄행위는 시작되는 것이다. 원리로 창조된
피조물은 반드시 그 존재위치를 떠나서는 존재기대를 유지하지 못한다. 하나의 존재위치는 좌우와 전후 또 상하의 유기적 관련성에서
결정된다.
이제 천사는 하나님의 자기에 대한
사랑의 위치를 떠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위치를 취하려고 하여 그 존재위치를 떠난 것이 타락의 원인이다. 이 존재위치를 유지하케하는 원리의 힘을
능가하는 것은 오직 사랑의 힘뿐이라는 것은 상술한 바와같다. 이와같이 벌써 사랑의 자극적인 충동감에 의하여 탈선하려는 천사장을 상대로하여 그와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 비원리적인 힘을 발생케한 대상자가 해와요 타락한 해와의 대상위치를 취한 것이 아담이다. 원죄를 계승한 인간들이 자기의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분에 넘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타락성본성의 발로인 것이다.
모든 혈기는 자기의 존재위치를
떠나는데서 나온다. 천사장이 해와를 타락시켰고 해와는 아담을 타락시킨 것도 그러했지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자기의 존재위치를 떠난
까닭이다.
III .주관성 전도
천사도 인간의 주관을 받아야할 존재라함은 이미 상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반대로 천사장은 아직 미완성기에 처한 해와를 주관하였고 해와는 그의 주관을 받은데서 타락은 성립되었다.
창조원리에 의하면 아담은 하나님 대신격인 남성이기 때문에 해와의 주체임으로 아담은 해와를 주관하고 해와는 아담에게 주관을 받아야 창조원리적인 입장을 취하여 타락되지 않았을 것인데 거꾸로 되어 해와가 아담을 주관하여 따먹기를 강요했고 아담은 해와의 주관을 받아서 타락케된 것이다. 모든 교만은 남을 주관하려는 주관성 전도의 타락성본성에서 나오는 것이요 하나님까지도 주관하려는 타락인간의 본성도 천사장으로부터 계승한 것이다.
IV .범죄행위를
전가함
생명과 번식은 주체가 대상을 취하여 완전한 수수의 관계를
맺는데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범죄행위를 중심한 해와와 천사장과의 완전한 수수작용에 의한 비원리적인 힘은 아담을 번식하였다. 만일 해와가 타락된
후 자기범죄를 아담에게 전가시키지 않았더라면 아담은 타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악인들도 동료를 번식하려는 원리를 바로 해와에게서 받은 이러한
타락성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제6절 사탄과 타락인간
I .천사장 누시엘과
사탄
타락된 천사장 누시엘을 사탄 혹은
마귀라고한다는 것은 상술한 바와 같다. 피조세계의 주인공으로 창조된 아담과 해와를 소유하였으므로 사탄은 비원리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원리형으로써
인간대신 피조세계의 주인공의 행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탄을 이 세상의 임금(요 12/31)이라고 하였고 또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라고 하였으며 모든 인간도 사탄의 후손이라하였고(요 8/44)「만물도 헛된 것에게 굴복하여 탄식한다」(롬 8/20)고 기록되었다.
하나님이 사탄을 강제로 굴복시키지 아니하시는 것은 자유이상의 원리로 창조된 천사와 인간임으로 다시 찾으시는 재창조의 역사로 자유이상의 원리로 창조된 천사와 인간임으로 다시 찾으시는 재창조의 역사로 자유이상의 원리를 두고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탄이 만물세계의 주인공의 행사를 하는데로 두고 원리적인 섭리노정을 취하면서 사탄을 몰아내는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나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으로만 관찰한다면 하나님과 사탄은 이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도 이런 원리적 관계가 있는 까닭이다.
II .인간세계에 대한 사탄의 활동
사탄도 상대를 취하여 상대기준을 달성치 않으면 사탄적인
생명과 사탄적인 번식과 사탄적인 작용의 힘을 발휘치 못한다. 사탄의 상대기준을 달성할 수 있는 상대는 사탄 주관하에 있는 악영인체요 이
악영인체는 또 악한 지상인의 영인체와 상대기준을 조성하는 것임으로 그 악영인의 역할은 그대로 육체생활을 하는 지상인의 생활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통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본인들은 그것을 악영인들의 활동임을 의식치 못함으로 그것을 자기자신의 의식의 변화로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사실로 보더라도 악인을 품은 가룟 유다의 영인체는 곧 사탄이 구사하는 악영인체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자기도 억제할 수 없는 힘에 끌리어 예수를 팔았다.
그러므로 「사탄이 가룟 유다라하는 자에게 들어가니」(눅 22/3)라고 기록되었다. 사탄의 사주를 받는 악영인체는 베드로의 마음 속에 들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막았음으로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마 16/23) 책하신 것이다. 이러한 악한 역사는 전부 이렇게 사탄이 주관하는 악영인체로 인한 역사인 것이다. 광야에 계신 예수님에게도 이와같이 실체의 영인체가 나타나서 실제로 시험한 것이다.
하늘과 교통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과 같이 악영인체의 무서운 시험을 받는 체험을 가지게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실체로 나타난 사탄과
싸워볼 정도의 기도생활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은 광야에서 시험받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 길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사탄이 무엇인 것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체휼적인 신앙을 가졌다 할 수 있으리오.
그뿐 아니라 영통하는 사람은 그
악영인체는 지상 육신생활에서 무엇하다가 죽어간 영인체인가 하는 것까지 상세히 알 수 있다.
「마귀와 그 사자」(마
25/41)라 하였으니 그 사자란 것은 곧 사탄(마귀)의 뜻에 의하여 활동하는 악영인체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내어쫓을 때에 「네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으셨으니 그것은 그 환자의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환자의 영인체에 상대기준이 되어있는 악영인의 이름을 물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지상인들은 생심의
요구에 따라 선의 생활을 하면 무형세계의 선한 영인체가 우리의 영인체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선한 방향으로 우리를 나아가도록 협조함으로 선인이
되고 악한 생활을 하면 악영인의 협조를 받아 악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잘 믿으면 그의 심령기준에 상대될 수 있는 낙원의 영인들과 교통하게되며
최고의 위에 올라가면 예수님과 직접 면접하여 예수께서 지상에 오셨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대화하게되는 것이니 오늘날 그 수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이렇듯이 불교인은 석가 혹은 불교를
믿고간 영인들과 접하여 또 유교인들은 공자 혹은 유교를 믿고간 영인들과 영통하게되는 등등의 현상은 오늘 점점 더 그 기세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영계를 모르면서 영통하는 사실을 경멸히 여기는 사람은 마땅히 경성해야 될 때는 왔다. 하늘의 일은 하늘로써 해결을 짓지않으면 아니된다.
여기에 여러 가지 하늘의 비밀을 발표하였으니 각자의 지능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람은 부득기 자신이 기도로써 해결하든지 자신이 기도로써 해결할 능력이 없으면 남이 받은 계시를 믿든지 어느 편의 하나를 결정해야될 것이요 자신도 기도로써 해결하려 하지않고 남이 기도로써 해결한 것을 믿지도 않으려는 사람을 향하여 주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마 11/17)고 책망하실 것이다.
제7절 하나님의 아담과 해와의 타락행위를 간섭치 않으신 이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심으로 아담과
해와의 타락행위를 모르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타락행위를 아시고 그러지않도록 간섭하셨으면
타락되지 않았을 것인데 타락된 결과를 보면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을 간섭치 않으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타락행위를
아시면서도 간섭치 않으시고 방임하셔서 타락되고 말았는가하는 문제는 지극히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가 타락행위를 하는 것을
간섭치 않으신 데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이유가 있다.
I .창조원리에 그의 절대성과 완전무결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창조원리에 의하면 인간이 완성기준을
향하여 자라나는 기간인 원리결과주관권내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관을 받을 수 없고 완성된 후에야 하나님이 그들을 직접 주관하시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는 완성 후가 아니고 아직도 그들이 원리결과주관권내에 있을 때에 그 자라는 과정에서 타락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만약 그들을 직접 주관할
수 없는 그 성장 기간에 있어서의 그들의 타락행위를 주관하고 간섭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들이 완성된 후에야 직접주관한다는 창조원리를 스스로
무시하는 입장에 서게된다.
원리가 무시를 당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면 그 원리의 절대성과 완전무결성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원리에 그의 절대성과 완전무결성을 부여하기 위하여는 하나님은 그들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실 수 없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창조원리도 절대적이요 완전무결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II .하나님만이 창조주로 계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타락인간이나 범죄행위나 지옥이나 사탄 등등의
비원리적인 존재나 행동은 창조하시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하시지 않은 비원리적인 존재나 행동에 대하여는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간섭하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원리적인 존재와 행동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이 어떤 존재물이나 행동에 대하여
간섭하시게 되면 그 간섭을 받는 존재물이나 행위에는 벌써 창조의 가치를 부여하게 되어 그것은 원리적인 것으로 되어버린다는 결과에
이르게된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의 타락행위는
하나님이 창조하시지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약 그 행동을 간섭하시게 되면 상술한 논법에 의하여 이 타락행위에 대하여도 창조의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비원리적인 그 타락행동을 하나님이 간섭함으로 인하여 그 범죄행위까지도 원리적인 행위로 인정한다는 새로운 원리를 세우는 결과에 이른다. 즉 하나님은 타락행위도 창조하셨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사탄 때문임으로 사탄도 또 하나의 원리를 창조한 창조주의 입장에 서게 된다. 아담과 해와의 타락행동을 하나님이 간섭하면 이와같이 사탄도 또 하나의 창조주의 입장에 서게 됨으로 하나님 한분만이 창조주로 계시기 위하여는 그들의 타락행위를 간섭할 수 없었던 것이다.
III .인간을 만물의 주관위에 세우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셨음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그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육성해주실 책임이 있는 것이다.
창조된 만물세계는 그 자체로서는
벌써 완성기에 처한 피조물로서 인간이 완성되어 주관주로 설 때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피조세계를 주관하려면 인간도 피조세계가 통과한
원리과정을 다 통과하여 원리를 완성했다는 그 격위에 있어서도 만물보다 못한 위치에 있어서는 아니된 것이다. 미완성자로서는 완성자를 주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완성되어야 미와 사랑을 하나님과 돌리고 받아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관을 받을 수 있고 그러한 기준까지 완성되어야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만일 아직도 미완성기에 처한 인간을 하나님이 직접주관하시어 간섭하시게 되면 미완성인간을 완성된 인간과 동일한 취급을 하는 결과에 이르게되고 마침내는 미완성 인간에게 피조세계의 주관자격을 허락하는 결과가 되어 인간은 만물도 원치 않는 불완전한 주관자로서 만물 앞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됨으로 자연히 원리적인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만물의 완전한 주관자로 세우기 위하여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랄 기간을 다 지나 완성될 때까지 간섭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상술한 바이지만 인간은 천사세계까지도 주관해야할
존재인데 만일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천사의 유혹에 대한 경고나 주의를 하신다면 천사를 그들보다도 높은 위에 세워주는 결과가 됨으로 인간에게
천사까지도 주관할 수 있는 주관자로서의 자격과 위신을 세워주시기 위하여는 천사들에 대한 경고도 할 수 없고 직접적인 간섭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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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복귀섭리에서 본 예정론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책임분담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인간의 책임분담을 가르쳐주셨으니 이것이 곧 「따먹지 말라」하는 계명이요 이 계명을 인간자신이 지키면서 자라야 하는 기간이 바로 원리결과주관권 내에 있을 때의 기간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는 그 창조의 이상을 실현하시려는 뜻을 예정하셨으므로 이 뜻은 영원불변이다. 그러나 이 뜻을 이루어 맞추기 위한 허락권내의 존재로써 아담 해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는 이 계명을 자신이 지킴으로써 이 원리결과주관권을 자기의 책임분담노정으로 다 걸어야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었다.
제2절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분담
제3절 예정설에 근거되는 성구
복귀섭리의 역사노정에는 반드시 참것이 오기 전에 거짓것이 참것 모양으로 먼저 나타난다고 하였다. (후편 참조) 끝날에 주께서 지상에서 현현될 때도 그리스도보다도 적그리스도가 먼저 나타날 것이니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현혹될 것임으로 그것을 염려하여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여도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23절)고 기록되었다.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을 고대하던 신도들에게 지상에서 나타나신 주님이야 어찌 이단으로 보이지 아니할 것인가. 더구나 새 시대를 이루시려고 새로운 말씀을 던지러 오신 분임에서랴.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그러했던 것같이 그들에게 이단자로 보여지는 재림예수를 주로 믿고 따르려면 생명을 각오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다시 말씀을 이어 「무릇 누구든지 그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오직 그 목숨을 잃고자 하는 자는 보전하리라」(마 10/39)고 말씀하셨다.
제8장 기독론
제7장 엘리야로 재림한 세례요한과 예수의 재림
더구나 민중에서 제사장에 이르기까지 저를 메시아로 신빙할 정도로 위대하게 보였던 세례요한 자신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거부하는데 어떻게 그를 엘리야로 믿을 수 있었을 것인가. 예수님을 망설자로 만든 사람은 누구였으며 예수님을 맹해하려는 유대인들에게 또 하나의 핍박의 조건을 던져주었던 자는 누구였던가.
그러므로 「그는 흥해야겠고 나는 쇠하여야겠다」(요 3/30)는 말은 곧 그와 운명을 같이 아니함을 스스로 증거하는 말이다. 메시아의 복음을 누가 먼저 전해야될 것이었으며 메시아를 위해 먼저 죽어야할 사람이 누구였던가. 이는 바로 그를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부름받았던 세례요한이어야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를 시봉치않은 세례요한은 한마디의 복음도 전해보지 못하고 뜻하지 않은 가치없는 죽음으로 비참한 생애를 마친 것이다.
II .예수를 인간적으로 대한 세례요한
더구나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다 붓고 머리털로 씻고있는 여인의 태도를 제자들조차 분개하는데 그것을 도리어 칭찬하고 있는(마 26/6~13)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일개의 반역자로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는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증오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남녀의 동등권을 부르짖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도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비난의 대상이 되겠거든 하물며 음란한 여인을 돌로 쳐 죽여도 말 못하던 2000년 전 그 시대의 그 환경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면 천국에서도 가장 큰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지상에서 가장 큰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만도 못할 것인가. 과거에 왔다간 수많은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먼 역사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간접적으로 증거하였으나 세례요한은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증거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이라면 증거적 입장에서 보아 메시아에 대한 시봉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는 가장 작은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벌써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시봉하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이 시봉을 위해 부름받은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분리되어 천국의 지극히 작은 자만치도 예수님을 시봉치 못한 까닭이다. 다시 다음 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올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힘씀으로 얻나니 힘쓰는 자는 빼앗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III .세례요한이 엘리야된 이유
제2절 복귀섭리로 본 예수의 재림
제2절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의의
제3절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본 아담과 예수
예수께서 만일 우리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의 동복동생조차 그를 몰라보았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한 중보가 계시매 그는 사람이니 곧 그리스도라」(딤전 2/5)고 하신 말씀도 있거니와 「한 사람의(예수)
순종하심으로 뭇 사람이 의인이 되었느니라」(롬 5/19~)고도 말씀하셨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부활도 생겼도다」(고전
15/21)라고하신 등등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예수님은 사람이라는 것이 성서에도 강조되어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자신을 인자라고
자칭하지 않았던가.
제4절 탕감복귀원리로 본 예수와 성신과 중생의 의의
많은 사람들이 성신은 여성신이라는 계시를 받고 있지만 이러한 원리적 근거는 알지 못하고 있다. 해와가 죄의 뿌리가 되었음으로 탕감복귀원리에 의하여 해와의 신성으로 오신 성신은 인류의 죄를 씻는 역사를 해야 되며 성신은 여성신이므로 감동의 신이요 또 신부의 신이므로 성신을 받지 않으며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설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남성이므로 하늘(양)에서 역사하시며 성신은 여성이시므로 땅(음)에서 역사하셔야된다. 생존과 번식과 작용의 힘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의 작용이 성립되는 데서만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구원의 힘도 예수(주체)는 성신(대상)과 수수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중생의 힘을 발생하는 것이다. 즉 번식은 사랑에서 시작되는데 성신의 감동에 의하여 예수님을 믿게되면 영적 참아버지된 예수님과 영적 참 어머니된 성신과의 수수관계에 의하여 맺어지는 영적 참 부모의 사랑에 의한 새 생명이 주입되면 새로운 영적 자아를 중생하게 되는 것이다.
제5절 삼위일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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