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해설

무지... | 20170702181826


원리해설 

                     - 목차 -

총서 
 

전편


제1장 창조원리 
 제1절 하나님의 이성성상과 피조세계 
 제2절 피조물의 완성과 그의 성장기 
  I 성장기의 질서적 3단계 
  II 하나님의 직접주관과 원리에 의한 간접주관권 
 제3절 수수작용에 의한 만유원력 
 제4절 천주창조의 목적 
  I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II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 
 제5절 인간을 중심한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제6절 영인체와 육신과의 상대적 관계 
 제7절 사랑과 그 목적 


제2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제3장 인류역사의 종말론 


제4장 부활론 
 제1절 부활의 의의 
 제2절 지상인의 부활 
  I 소생 부활섭리
  II 장성 부활섭리 
  III 완성 부활섭리 
 제3절 첫째 부활 
 제4절 재림부활에 의한 영인들의 부활 
 제5절 재림부활로 본 윤회설 
 제6절 재림부활에 의한 종교통일 


제5장 타락론 
 제1절 죄의 뿌리 
 제2절 천사장과 해와의 타락과 아담의 타락 
 제3절 천사장과 인간시조가 원리를 탈선하게 된 원인 
 제4절 자유와 타락 
 제5절 타락성 본성 
  I 하나님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함 
  II 자기의 위치를 떠남 
  III 주관성 전도 
  IIII 범죄행위를 전가함 
 제6절 사탄과 타락인간 
  I 천사장 누시엘과 사탄 
  II 인간세계에 대한 사탄의 활동 
 제7절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의 타락행위를 간섭치 않으신 이유 
  I 창조원리에 그의 절대성과 완전무결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II 하나님만이 창조주로 계시기 위하여 
  III 인간을 만물의 주관위에 세우시기 위하여 


제6장 복귀섭리에서 본 예정론 
 제1절 예정의 의의 
 제2절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분담 
 제3절 예정설에 근거되는 성구 


제7장 엘리야로 재림한 세례요한과 예수의 재림 
 제1절 복귀섭리로 본 엘리야와 세례요한 
  I 엘리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세례요한 
  II 예수를 인간적으로 대한 세례요한 
  III 세례요한이 엘리야 된 이유 
 제2절 복귀섭리로 본 예수의 재림 
  I 재림예수는 어떻게 오실 것인가? 


제8장 기독론 
 제1절 생명나무 복귀로 본 아담과 예수 
 제2절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의의 
 제3절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본 아담과 예수 
 제4절 탕감복귀원리로 본 예수와 성신과 중생의 의의 
 제5절 삼위일체론 


후편


사위기대 복귀를 중심한 인류역사 탕감복귀 섭리노정 


서론  


제1장 복귀기대 섭리시대
 제1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제2절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제3절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 
  I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II 아브라함의 이삭 실체헌제 
  III 야곱과 에서에 의한 사탄 재분립 


제2장 복귀섭리시대 (2000년) 
 제1절 애급고역시대(400년) 
  I 복귀섭리로 본 야곱노정의 의의 
  II 애급고역시대의 의의
  III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
   1. 모세노정의 의의
   2. 예수의 복귀섭리노정으로 표시된 모세의 출애급노정 
   3. 40일 복귀섭리로 본 모세노정 
 제2절 사사시대(400년) 
 제3절 통일왕국시대(120년) 
  I 성전이상을 중심한 복귀섭리 
  II 복귀섭리로 본 성막의 의의 
 제4절 남북왕조 분립시대(400년) 
 제5절 이스라엘민족 포로시대(70년) 
 제6절 이스라엘민족 귀환시대(140년) 
 제7절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400년) 
  I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1. 예수의 40일 금식기도와 3대시험의 의의 
   2. 예수의 십자가의 의의 


제3장 복귀섭리연장시대(예수이후 2000년) 
 제1절 로마제국 박해시대(400년간)
 제2절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400년~800년) 
 제3절 기독교왕국시대(800년~918년) 
 제4절 남북왕조분립시대(919년~1305년) 
 제5절 교황포로시대(1305년~1375년) 
 제6절 교황귀환시대(1375년~1510년) 
 제7절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1517년~1917년) 
  I 종교개혁기(1517년~1648년) 
   1. 복귀섭리로 본 종교개혁의 의의 
   2. 복귀섭리로 본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II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1648년~1800년) 
   1. 가인형의 인생관 
   2. 아벨형의 인생관 
  III 정치와 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1801년~1920년) 
   1. 정치와 경제의 성숙 
    1) 불란서혁명과 영국산업혁명기 (40년) 
    2) 열국의 강화기(40년) 
    3) 열국의 식민지 분할기(40년) 
     (1) 탕감복귀로 본 세계대전의 필연성 
   2. 사상의 성숙 


제4장 복귀섭리 완성시대(1920~) 
 제1절 복귀섭리로 본 역사발전과 제3차대전의 의의 
 제2절 6000년 복귀섭리의 최후의 실마리는 어디서부터 풀릴 것인가 
 제3절 언어혼잡의 원인과 그 통일의 필연성 
 제4절 말세에 처한 한국민족의 사명 


총서
역사는 오늘 새 시대를 고하는 유언(遺言)을 하고 있다 막달은 길에서 몸부림치는 인류죄악사를 청산(淸算)하고 새 역사를 꾸며야할 선구자(先驅者)들의 심령(心靈)에는 각일각(刻一刻) 불안과 공포의 압박감(壓迫感)이 짙어가고 있다.
인류역사를 꾸며내려온 선(善)과 악(惡)의 두 주권(主權)의 세계는 이제 한 점(點)에서 교차(交叉)되어 몸서리치는 긴장(緊張)속에 소용돌이치고 있으며 또한 여기에 휩쓸려 혼란에 빠진 인류(人類)는 생명과 사망(死亡)의 접선(接線)에서 방황(彷徨)하고 있다.
어디로부터 어떻게 그리고 왜 오는지도 모르는 이 불안과 공포(恐怖)의 전율(戰慄) 속에서 신음(呻吟)하고 있는 심령(心靈)들이 애처롭게도 한줄기 삶의 빛을 찾아 헤매는 아우성소리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몸에서 몸으로 급속(急速)히 파급(波及)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꺼져가는 생에 굳이 희망의 불꽃을 돋우려다 실망(失望)해버린 심령(心靈)들이면서 오히려 다시 형세(形勢) 이미 기운 옛 심지를 부둥켜안고 밤새워 우는 모습이야말로 숨길 수 없는 현대인의 생태(生態)인 것이다.
새 시대를 담당(擔當)해야할 끝날의 성도(聖徒)들이여
이제는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세로운 역사의 전개를 말하는 낡은 역사의 최후의 유언(遺言)을 들으라.
낡은 역사가 축출(逐出)을 당하는 회오리 바람에 휩쓸려 돌아가고 있는 기독교를 비롯한 오늘의 모든 종교(宗敎)는 갈라질대로 갈라졌고 기진(氣盡)하여 마침내 진퇴유곡(進退維谷)의 막달은 골목에 이르렀다.
여기 역사(歷史)는 체념(諦念)을 토로(吐露)한다. 「이제는 인간으로서 달릴 길은 다 달려보았노라」고.
진실(眞實)로 그러하다 오늘까지 수천년동안 지상(地上)의 모든 성도(聖徒)들은 성서(聖書) 한 권(卷)을 가지고 자기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다. 기도(祈禱)의 호소(呼訴)도, 교리(敎理)의 싸움도, 기독정신(基督情神)을 지향(指向)하는 어떠한 종교운동(宗敎運動)도 그리고 그 밖에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고 믿어지는 어떠한 길도 다 달려 보았다.
교단(敎壇)이 깨지도록 발을 구르며 외쳐온 어떠한 설교(說敎)도 이제는 우리의 영원(永遠)한 생명을 위한 내적 생활의 실천(實踐)에는 아무런 파문(波紋)도 일으켜주지 못한다.
새로운 면(面)을 개척(開拓)하는 듯하면서도 실(實)은 이미 선인(先人)들이 실패(失敗)하고간 그 길을 한번 더 되풀이할 따름이다. 있는 힘이 다하도록 찾아온 인지(人智)의 극한(極限)은 마침내 오늘 궁경(窮境)에 도달(到達)하였으니 이제는 더 이상 땅으로 쫓아오는 어떠한 말에나 글에도 이목(耳目)을 기울이지는 않을 것이다.
창세시(創世時)에 허락(許諾)하신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이루어야할 새 시대(時代)를  해산(解産)하려는 너 신부(新婦)들이여
이제는 진통(陣痛)을 막아 주려는 어떠한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말고 어서바삐 잉태(孕胎)한 새 시대의 왕자(王子)를 해산(解産)하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곳은 하늘이 아니고 땅이었다.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이 땅 위에 흙과 돌과 공기로써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생육(生育)하고 번식(繁殖)하라고 축복(祝福)하신 것이다(창 1/28). 만약 아담과 해와가 타락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대로 죄(罪)없는 자녀들을 생육하고 번식하여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지상세계(地上世界)를 실현(實現)하였더면 이 세계는 다시 무형세계(無形世界)와 영원(永遠)한 일체(一體)적 이상을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永遠)히 깃들 수 있는 에덴동산은 완전(完全)히 실현(實現)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창조(創造)의 첫 목적(目的)은 인간으로 비유(譬喩)하면 몸과 같은 지상의 에덴을 이루려는데 있고 전편(前編) 제3장 참조(參照) 다음으로는 마음과  같은 무형세계(無形世界)의 천국(天國)을 건설(建設)하여 마치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움직이는 마음의 명령(命令)에 의하여 몸이 순응(順應)함으로써 마음과 몸이 일체(一體)를 이루어야 하는 것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동(動)하고 정(靜)하는 천국(天國)에 대응(對應)하는 지상의 에덴을 건설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中心)하고 두 세계가 유기적(有機的)인 일체를 이루어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의 타락(墮落)으로 인(因)하여 지상에서의 이 창조의 첫 목적(目的)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으로 창조의 전체적(全體的)인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은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내가 말하였으매 또한 이루게할 것이요 내가 경영하였으매 또한 행(行)하리라」(사4/11)고 하신 말씀대로 예언(豫言)과 약속(約束)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을 창조하시고 약속하신 그 축복의 말씀을 무시(無視)하시고 말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창조의 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시지 않는 한(限) 창조주(創造主)로서의 위신(威信)을 만우주(萬宇宙) 앞에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창조(創造)의 목적(目的)을 다시 찾아 이루시려면 역시 창조의 첫 목적인 지상의 에덴을 먼저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락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구원(救援)의 역사(歷史)는 지상(地上)에 에덴을 재건(再建)하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노정(路程)을 이루어나온 것이다. (전편(前編) 제3장 참조)
우리는 이제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찾아야 한다. 밭에서 알곡을 거두지 못하면 고간(庫間)에 알곡이 있을 수 없는 것같이 지상에 천국이 이루어지지않고는 하늘에 천국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땅 위에 이 목적(目的)을 완수(完遂)하기 위하여 오셨었고 또 오셔야 하기 때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위하여 기도(祈禱)하라고 하셨다.
지상(地上)에 오고간 수(數)많은 성도(聖徒)들이 피흘려 싸운 목적(目的)도 여기에 있었건만 그들은 이 근본(根本) 뜻을 모르고 다만 싸움의 실적(實蹟)만을 남기고 갔으니 그들이 남긴 유업(遺業)을 이루어야할 것이 또한 끝날의 성도(聖徒)들에게 맡겨진 사명(使命)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독교통일을 표방(標榜)하고 나선 목적도 이 사명(使命)을 완수(完遂)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救援)의 섭리(攝理)라는 것은 타락(墮落)되어 진리를 잃어버린 인간을 다시 진리완성체(眞理完成體)로 이루는 한 방향(方向)으로 인도(引導)하는 그 수단(手段)과 방법(方法)을 말한다. 「진리(眞理)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놓아 주리라」(요 8/32)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를 사탄의 구속(拘束)에서 해방(解放)해주는 섭리(攝理)는 오직 진리(眞理)를 알게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대상(對象)인 인간은 항상(恒常) 역사가 흐름에따라 흐르고 있다. 과학(科學)의 발달(發達)에따라 이지(理智)와 이성(理性)의 발달(發達)이 있고 생활환경(生活環境)의 변천(變遷)이 있으며 그에따라 심령(心靈)의 변화(變化)에도 동일(同一)한 영향(影響)을 받게되는 것이다. 국한(局限)된 시간권내(時間圈內)에서 어떠한 개체(個體)를 두고 생각하면 심령(心靈)이 지향(指向)하는 방향(方向)은 과학(科學)의 발달이나 생활환경의 변화에 호응(呼應)되지 않는 방향을 취(取)하는 것같이도 보여질 때가 있다.
즉(卽) 과학의 발달과 그에 따르는 생활환경의 변화가 역사의 전체적인 목적과 부합(符合)되지 않는 입장(立場)을 취할 때에는 역사의 목적에 순응(順應)하는 개체(個體)에 있어서는 그러한 현상(現象)이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령의 동향(動向)은 역사가 그 전체적인 목적을 향하는 움직임에 순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否認)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시대를 따라 변천(變遷)하고 있는 인간을 진리에로 인도(引導)하는 수단과 방법이 구원(救援)의 섭리(攝理)라 할진대 인간의 변천에 따라 구원의 섭리도 변천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眞理)는 유일(唯一)이며 영원(永遠)하고 불변(不變)해야할 것이지만 인간으로하여금 이 진리에로 인도(引導)하는 구원섭리(救援攝理)는 시대를 따라 그 형태(形態)를 변(變)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전시대(舊約前時代)에 있어서는 자연이외의 것으로는 하나님을 대(對)하는 길을 찾지못하던 인간이었으므로 제물(祭物)을 통(通)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셨고 구약시대에 있어서는 율법(律法)으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조건(條件)을 세워 내려온 것이며 신약시대(新約時代)에는 메시아를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救援)의 섭리(攝理)를 하신 것이다. 같은 시대에 있어서 동일(同一)한 민족(民族)에 대(對)하여 동일한 목적을 위한 예수님의 말씀도 사람에따라 그 각도(角度)를 달리하셨으니 이것은 진리자체인 예수님은 변(變)함이 없으나 진리를 대하는 인간이 각각 다름으로 이 인간을 진리에로 이끌어가는 수단(手段)과 방법(方法)인 말씀도 따라서 달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自己)의 말씀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生命)이라고 하시지않고 자기자신(自己自身)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곧 예수님 자신의 절대성(絶對性)과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위한 말씀의 상대성(相對性)을 의미(意味)하는 것이다.
이른바 성서(聖書)는 촛불과 같은 것이니 방안의 형편(形便)과 보는 사람의 요구(要求)에 따라 크게도 적게도 적응(適應)되어야할 촛불은 아침 햇빛이 완연(宛然)히 비칠 때까지 방(房)안을 밝혀주다가 꺼지면 촛불로서의 사명(使命)은 다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숨은 진리를 캐어내기 위한 도구(道具)로 주신 성서(聖書)가 의미(意味)하는 근본진리는 그 문자(文字)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가 말하고 있는 그 뜻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에 붙들려서 그 뒤에 숨어있는 뜻을 놓치면 구약성서의 문자에 붙들려서 예수님을 살해(殺害)하던 유대인들과 똑 같은 입장(立場)을 되풀이하게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서의 문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범위는 구약성서로는 율법에 의하여 신랑(新郞)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기 위한 외적 신부(新婦)단장(端裝)을 하는데 까지요 신약성서로는  믿음에 의한 내적 신부단장을 하는데까지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主)님 앞에 신부(新婦)로 설 수 있는 정도(程度)에 머물러서는 아니된다. 신부(新婦)는 결혼식상(結婚式上)에서만 불리워지는 이름으로써 거식(擧式) 도중(途中)에서도 갈라질 수 있는 불안(不安)한 운명(運命)에 처(處)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양(羊)의 혼인기약(婚姻期約)이 이르렀으매 그 아내가 벌써 예비(豫備)되었으니」(계 19/7)라고 기록된 말씀대로 우리는 신부의 입장을 거치어 천국생활을 영위(營爲)하는 아내로서의 입장(立場)에까지 들어가야한다.
이와같이 구원(救援)의 목적은 구원 받은 인간으로하여금 아내로서 천국생활을 영위하도록 하려는데 있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이에 관(關)한 아무 말씀도 밝히지 못하시고 돌아가셨으니 (요 3/12) 이것은 인간들이 이 말씀을 감당(勘當)치 못할 것을 염려(念慮)함에서였으며(요 16/12) 또 아내로서의 천국생활은 신약시대(新約時代)의 것이 아니고 신구(新舊) 약속(約束)이 이루어지는 다음시대(時代)에 속(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부단장(新婦端裝)을 하여오던 신약시대(新約時代)는 끝나려하고 있으며 아내로서의 준비를 해야될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가 닥아오고 있다. 오늘의 모든 신도(信徒)들이 자기(自己)도 모르게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새 시대(時代)를 출발(出發)해야할 아내로서의 행장(行裝)을 위(爲)한 새로운 길이다.
마치 신앙으로써 내적(內的)인 신부단장을 하여 예수를 맞어야할 유대인들이 아직도 율법에 의(依)한 외적(外的)인 신부단장을 일삼고 있는 제사장(祭司長)과 교법사(敎法師)들의 말로서는 마음의 안식(安息)을 얻지 못하여 천륜(天倫)의 반역자(反逆者)로 각인(恪印)을 찍은 예수님을 따라 연일연야(連日連夜)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광야(曠野)에서 헤매던 것과 같이 오늘의 독신자(篤信者)들도 이제는 신부단장을 일삼고있는 어떤 지도자(指導者)의 말에도 만족(滿足)을 느끼지 못하고 아내로 서야할 새로운 길을 찾아 산(山)으로 들로 헤매게 되는 것이다.
이 길을 찾는 간절(懇切)한 마음이 심각(深刻)해질수록 그 결과(結果)는 교파분열(敎派分裂)의 현상(現象)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기독교(基督敎)의 분열(分裂)은 지금까지 많은 신도(信徒)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신앙생활의 잘못이나 기도생활(祈禱生活)의 부족(不足)에 그 원인(原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聖書)자체(自體)의 성격(性格)에 의(依)하여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必然的)인 현상(現象)이다.
예수님은 제자(弟子)들에게까지도 감당(勘當)치 못할 것을 염려(念慮)하여 못다 하시고 가신 말씀이 있는 것같이(요 16/12) 하나님도 무지(無知)한 인간에게 직접(直接) 교시(敎示)치 못할 하늘의 비밀(秘密)을 나타내실 때에는 반드시 상징(象徵)이나 비유(譬喩)로써 하셨으니 이것은 때아닌 때에 때의 것을 암시(暗示)하여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대(對)한 시대적(時代的) 요구(要求)를 어느 시대의 어떤 환경(環境)의 사람에게든지 그 지능(知能)과 심령(心靈)의 정도(程度)에 의하여 탐지(探知)할 수 있는 목적(目的)을 달성(達成)케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목적으로 주신 상징과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그 말씀의 본 뜻을 찾고자하는 성심(誠心)이 높아가면 갈수록 찾는 자(者)들이 처(處)한 시대와 환경과 그 지능이나 심령의 명암(明暗)의 차(差)에따라 그들이 찾아 나아가는 각도(角度)가 달라질 것은 필연적인 결과(結果)일 것이다.
어느 누가 성서(聖書)를 떠난 신앙생활을 하려는 신도가 있으랴마는 나날이 교파가 분열되어가는 것은 성서의 말씀이 비유와 상징으로 남아있는 한 불가피(不可避)한 현상이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문자에 집착(執着)된 고루(固陋)한 교리에 속박(束搏)을 받을 때는 반드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그 시대에 있어서 정통(正統)이라고 보여지는 교리(敎理)로써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가 연속적(連續的)인 형태(形態)로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理由)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분열(分裂)은 반드시 두 길로 귀결(歸結)되는 것이니 하나는 멸망(滅亡)이요 하나는 새로운 방향으로 지양(止揚)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서 움직이는 기독교라 할진대 그의 분열로 인하여 소멸(消滅)될 수는 없을 것이니 이는 기독교의 통일(統一)을 위(爲)한 태동적(胎動的) 현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같이 나날이 분열되어 싸우는 교파가 통일이 되려면 마치 구약성서의 숨을 뜻을 밝히기 위한 신약성서가 나온 것같이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된 성서의 근본진리를 밝히기 위하여는 누구에게나 공인(公認)될 수 있는 진리 표현의 또 하나의 새로운 형식(形式)이 나오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니 이 것이 바로 상술(上述)한 바와같이 아내로서의 생활을 어떻게할 것인가를 밝히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때가 이르면 비유가 아니고 밝히 가르쳐 주시마하셨다(요 16/25). 그러면 이러한 근본진리라면 이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해결(解決)해 주어야할 것인가를 알아보기로하자.
이 근본진리는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된 성서의 모든 미지(未知)의 사실(事實)을 명백(明白)히 들어냄으로써 암운(暗雲)에 싸여 진리의 근본을 찾아 헤매는 모든 인간들을 광명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성서를 인간에게 주심은 성서의 근본진리를 인간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이므로 이것을 나타내어 밝히 보여주지않는다면 성서의 목적은 결(決)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국의 비밀을 찾으려고 어둠의 길을 헤치고 또 헤쳐나오던 모든 성도(聖徒)들이 한 줄기 하늘의 빛을 보면 이것이 곧 천국의 전모(全貌)인 것으로 알고 고집(固執)하여 드디어 서로 용납(容納)할 수 없는 분열을 일으키고 있으니 바로 이제는 수학(數學)을 푸는 공식(公式)과 같이 성서의 미지의 부분을 누구에게든지 꼭 같은 방식(方式)으로 동일한 해답(解答)을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원리(原理)가 나오지 않으면 아니된다. 아직도 우리들의 하늘 가는 길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이 있다. 모르는 것을 묻어 두는 것이 신앙이라고 억제(抑制)하는 덕(德)에 그래도 불평(不平)을 품은대로 우울(憂鬱)한 심정을 눌러가면서 그럭저럭 신앙이란 형식만을 버리지못하고 유지(維持)하여왔다.
하나님은 천주(天宙)를 어떻게 창조하셨으며 또 하나님과 예수와 성신(聖神)과 인간과 그리고 만물세계(萬物世界)와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은 무엇이며 이 목적과 타락(墮落)된 인간과는 어떠한 관계(關係)가 있는가.
인간의 타락은 어떻게 된 것이며 타락인간의 부활(復活)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계시록(啓示錄)을 이루어내려오는 인간역사는 지금 계시록의 몇장(章)까지 이루어졌는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역사(歷史)는 무엇을 의미(意味)하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後) 이스라엘 선민(選民)은 어찌하여 그렇게도 비참(悲慘)한 민족이 되었는가 타락행동(墮落行動)을 하는 인간을 어찌하여 모르시는 척 방임(坊任)하셨다가 다 타락된 후에 다시 구원(救援)하려하시는가 삼위일체(三位一體)는 무엇을 의미(意味)하며 예정설(豫定說)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투쟁역사(鬪爭歷史)는 왜 벌어지며 또 그의 목적은 무엇이며 따라서 역사의 종말(終末)은 어떻게 귀결(歸結)될 것인가 하나님은 하필 외아들로 보내신 예수를 십자가(十字架)에 달리게하심으로써 구원(救援)의 역사(役事)를 하셨으며 또 다시 오실 필요(必要)는 어디 있는가 십자가(十字架)로써 완전(完全)한 구원(救援)을 받아 모든 죄(罪)를 벗어버릴 수 있다면 어찌하여 믿지않고는 천국 갈 수 없는 죽은 자식(子息)을 낳으며 또 믿음으로써 구원(救援) 받은 성도들에게 어찌하여 타락성(墮落性)이 그대로 남아있는가 하나님은 어찌하여 가인의 제물(祭物)은 받지 아니하고 아벨의 제물(祭物)만을 받으셨는가 노아가정(家庭)의 여덟식구(食口)를 택(擇)한 이유(理由)는 어디 있으며 방주(方舟)는 무엇을 의미(意味)하며 엘리야가 변화산(變化山)에서 모세와 같이 예수 앞에 나타난 것을 보면 그는 분명(分明)히 영계(靈界)에 있을 것인데(마 17/11)예수께서 세례(洗禮)요한을 엘리야라고 한 이유는 어디 있는가(마 17/12~13). 부끄러워했다는 사실(事實)이 어찌하여 노아심판(審判)의 전(全) 목적(目的)을 전복(顚覆)시켰는가(창 9/20~25) 노아심판(審判) 40일을 위시(爲始)하여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400년, 이스라엘 애급고역 400년, 모세의 바로궁중생활(宮中生活) 40년, 미디안 광야생활(曠野生活) 40년, 가나안 정탐(偵探) 40일, 모세의 두 차례에 걸친 40일 금식기도(禁食祈禱), 사울왕(王) 40년 다윗왕(王) 40년 솔로몬왕(王) 40년, 엘리야 호렙산(山)까지의 40일기간(期間), 예수의 금식기도 40일, 부활기간 40일, 너느웨 멸망(滅亡)에 관한 요나의 40일 예언(豫言), 아담으로부터 예수까지의 4000년 등등(等等) 이 모든 40수(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브라함이 비둘기 쪼기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애급(埃及)에서 400년을 고역(苦役)케하는 결과(結果)를 초래(招來)하였는가 모세가 반석(磐石) 두 번 친 것이 어찌하여 약속(約束)된 가나안복지(福地)까지 못들어가게된 원인(原因)이 되었는가 야곱의 12자식(子息)을 중심한 40가족(家族)과 모세의 12지파(支派)를 중심한 40장로(長老)와 예수의 12제자(弟子)를 중심한 70문도(門徒)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12소선지(小先知)며 12진주문(眞珠門)이며 12개월이며 12시간 등(等)은 다 어떻게된 것인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의 삼위신(三位神)이며 저 나라 삼층천(三層天)이며 노아방주 3층이며 요나의 고래뱃 속 30일기간, 아브라함의 이삭제물(祭物) 드리는 3일기간 야곱이 라반을 속이고 나오는 3일기간, 모세가 바로를 속이고 나오는 3일기간, 모세의 결례(潔禮) 3일기간, 예수의 무덤 3일기간, 아브라함의 세가지 제물이며 예수 앞에 3제물, 삼대시험(三大試驗), 십자가전(十字架前) 3차기도, 십자가후 3시간의 어둠, 30년 준비기간, 3년 공생애(共生涯)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3차거부(拒否), 예수 부활후(復活後) 베드로에 대하여 사랑에 관한 3차의 연속질문 등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어찌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3대(代)의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이와같이 얼마든지 품을 수 있으니 또 당연(當然)히 풀어야할 의문(疑問)들을 적확(適確)히 풀지 못하고 남겨놓은 채 하나님이 바라시는 완전(完全)한 신앙관(信仰觀)을 세울 수는 도저(到底)히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 근본진리가 해결해주어야할 문제는 무형세계(無形世界)(영계(靈界))에서 더욱이 최근(最近)에 맹렬(猛烈)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영적(靈的) 현상(現象)에 상응(相應)하여 지상세계에 벌어지고있는 제반(諸般) 신령역사(神靈役事)를 성서를 중심한 일관(一貫)된 논리(論理)로써 해명(解明)해주지 않으면 아니된다. 올바른 신앙(信仰)을 갖기 위하여 우리의 지성(知性)이 얼마나 필요(必要)한가하는 것은 재론(再論)할 여지(餘地)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과학문명의 발달(發達)에 따라 지성(知性)을 더욱 요구(要求)하게된 현대 문명인들에게 있어서랴. 바른 지성(知性)의 터 위에 바른 신앙(信仰)을 세우기 위하여 우리는 신학(神學)을 연구(硏究)하고 교리(敎理)를 세우며 기독교사(基督敎史)를 통(通)하여 지상(地上)에 벌어지는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연구(硏究)하는데 심혈(心血)을 경주(傾注)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지각(知覺)은 실증적(實證的)이며 또한 논리적(論理的) 형식(形式)으로 세워진 진리를 요구(要求)하고있다. 우리가 기도(祈禱)로써 성령(聖靈)을 받으려는 것도 성령에 의한 영적(靈的) 체휼(體恤)로써 하나님에 대(對)한 지각(知覺)을 높이기 위함이니 이것이 곧 신령(神靈)이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리로 예배(禮拜)하라(요 4/23)하심은 영적(靈的) 육적(肉的) 양면(兩面)으로 하나님께 대(對)한 지각(知覺)을 높이기 위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적육적 양면으로 오는 지각(知覺)의 정도(程度)에 따라 신앙(信仰)의 도(度)는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인간은 시대를 따라 변동(變動)되고 있음으로 2천년 전 인간과 오늘의 인간과는 교육에 의한 이성(理性)과 지능(知能)의 정도 과학의 발달에 의한 생활환경 구원섭리에 의한 심령의 명암(明暗)에 있어서 현격(懸隔)한 차(差)를 가지고있다. 그러므로 뇌성벽력(雷聲霹靂)의 소리만 들어도 이것이 하나님의 노발(怒發)로 알아 자과(自過)를 통회(痛悔)할 정도(程度)로 무지(無知)하던 예수이전시대(以前時代)의 인간에게 주신 구약말씀이나 또 2천년전 예수당시의 인간들로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지각(知覺)을 높이게하기 위하여 주신 신약(新約)말씀 그대로를 가지고 오늘날 20세기 문명인(文明人)들로 하여금 동일한 목적을 완전히 달성케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다.
하나님은 진리에 의하여 우주를 창조하셨음으로 비과학적인 피조물(被造物)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과학에 의한 피조물의 정수(精髓)로서 창조(創造)된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의 언어형식 사고방식 생활양식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학적인 근거(根據)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이요 논리적이요 따라서 실증적(實證的) 체험(體驗)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본론(本論)으로써 밝혀질 문제(問題)이지만 무형세계(無形世界)도 역시 유형세계(有形世界)와같이  원리(原理)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영적(靈的)인 현상(現象)이 육적(肉的)인 인식(認識)에 이르는 과정(過程)도 원리적(原理的)인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무형세계(無形世界)로부터 영적(靈的)인 현상이 원리적 과정을 통하여 생리적(生理的)인 현상(現象)으로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이 신령(神靈)이다. 그러므로 신령(神靈)한 것을 논리적인  진리(眞理)로 정리(整理)하여 체휼(體恤)하지 못하면 과학적인 무형세계를 인식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것은 소위(所謂) 신비주의(神秘主義)로 흘러 나중에는 혼돈(混沌)되어 사탄의 역사(役事)로 돌아가기 쉬우며 또 진리를 신령한 것으로 체험(體驗)하여 이것을 실증(實證)하지 못하면 지적(知的)으로 신앙을 찾으려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심을 높여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리는 열(熱)과 빛과 같이 분리(分離)할 수 없는 하나의 목적을 위한 양면(兩面)의 현상으로서 어느 하나를 결(缺)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령(神靈)한 기도(祈禱)에 의(依)하여 영적기준(靈的基準)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대응(對應)할 수 있는 기준(基準)에 이른 사람들은 비로소 영적으로는 신약섭리의 한계(限界)를 넘어 새 시대의 섭리에 호응(呼應)할 수 있는 단계(段階)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독신자(篤信者)들에게 나타나는 신령역사는 새시대의 섭리에 호응할 수 있는 진리로 정리하여 체휼하여야될 것인데 아직도 진리면에 있어서는 신약섭리의 것에 집착되어 있음으로 신령과 진리에는 시대적인 저어(齟齬)를 일으키게 됨으로 이것은 심신의 고민(苦悶)으로 나타나고 마는 것이다. 내세(來世)가 가까워짐에 따라 기도(祈禱)의 열(熱)이 치열(熾熱)하여 심령의 기준이 높아질수록 성도들의 마음은 점점(漸漸)더 클클하고 안타까워지게되어 심지어는 공포증(恐怖症)과 불안(不安)에 사로잡히게까지 되는 원인(原因)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영계(靈界)를 통(通)하여 무형세계(無形世界)에 관(關)한 것을 발표(發表)한 사람들도 적지 않으나 그들이 체험(體驗)한 영계(靈界)는 그들이 가지고있는 정도(程度)의 심령(心靈)에 반영(反影)될 수 있는 범위(範圍)내에 국한(局限)되어있으며 또 보여지는 그때의 현상(現象)만을 그대로 체험(體驗)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목적(目的)을 지향하여 시대를 따라 민활(敏活)히 움직이고 있는 무형세계(無形世界)가 전체적(全體的)인 현상(現象)의 근본원리에 관하여는 언급(言及)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물론(勿論) 다음 시대의 정리(整理)에 속(屬)하는 것임으로 신약성서로서도 발표할 수 없는 사실(事實)이다. 바울의 삼층천(三層天)에 관한 체험은 그렇게 피상적(皮相的)인 것은 아닐 것이었으나 그 내용에 관하여는 일절(一切) 언급(言及)치 않았을 뿐아니라 그 체험(體驗)조차 남의 것으로 발표(發表)한 것도 이러한 원인(原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豫言)의 말씀대로(행 2/17~21) 지금은 영(靈)을 물부어 주시듯하여 예언과 방언(方言)을 하는 사람 영계(靈界)에 입신(入神)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나 그들에게 보여지는 내용(內容)은 다음 시대에 이루어질 천륜(天倫)의 비밀(秘密)에 관(關)한 것이 표징적(表徵的)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제3자는 물론이어니와 자신(自身)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있다.  영통(靈通)하는 사람들이 가정(家庭)과 교회(敎會)에서 조소(嘲笑)와 비방(誹謗)을 받아 억울(抑欝)한 은퇴(隱退)의 생활(生活)로 떨어지게되는  이유(理由)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영계(靈界)를 통(通)하고 있는 성도(聖徒)들 끼리도 서로 상충(相衝)을 일으키어 대립(對立)되고있다. 시대(時代)를따라 움직이는 굉대무변(宏大無邊)한 영계(靈界)를 대(對)하고 있는 성도(聖徒)들은 그의 심령(心靈)의 형(型)과 명암(明暗)의 심도(深度)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영계(靈界)의 부분적(部分的)인 사상(事象)을 전체(全體)로 오인(誤認)하기 때문에 각기(各己) 자기(自己)의 것을 중심(中心)하고 보면 다른 사람이 체험(體驗)하고있는 것은 전(全)혀 이해(理解)할 수 없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고(故)로 성서(聖書)를 중심한 현교계(現敎界)가 혼란중(混亂中)에 있는 것같이 영계(靈界)를 통(通)하고있는 성도(聖徒)들도 혼돈(混沌)중에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을 모두 하나의 길로 인도(引導)하기 위(爲)하여는 무형세계(無形世界)의 전모(全貌)와 이에 대응(對應)되어 움직이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전모(全貌)를 밝혀주어야 그들이 지향(指向)할 수 있는 공통(共通)한 목표(目標)를 세우고 같은 공식(公式)에 의(依)하여 하나님의 원(願)하시는 섭리노정(攝理路程)을 따라가게될 것이다. 이와같이 오늘의 성도(聖徒)들이 자기(自己)도 모르게 요구(要求)하고있는 것은 하나님의 실존(實存)과, 무형세계(無形世界)와 유형세계(有形世界)에 관(關)한 하나님의 전체적(全體的)인 섭리(攝理)를 성서를 중심(中心)하고 과학적(科學的)인 논리(論理)로써 해명(解明)하여 이것을 다시 체휼(體恤)로써 실증(實證)케하는 진리(眞理)일 것이다.
다음으로 이 근본진리(根本眞理)는 역사이래(歷史以來)에 양심(良心)의 도리(道理)를 세워나온 어떠한 종교(宗敎)라도 전부(全部) 포섭(包攝)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있는 진리(眞理)가 아니면 안된다. 물론(勿論) 참길이요 참진리(眞理)요 참생명(生命)은 오직 한분 예수님뿐임으로 그로 말미암지 않으면 천국(天國)에 들어갈 자(者)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救援)의 전체적(全體的)인 섭리(攝理)를 위(爲)하여 이스라엘 민족이외(民族以外)의 민족(民族)에 있어서는 그 시대(時代)와 그 환경(環境)에 처(處)한 그 민족(民族)에게 적의(適宜)한 종교(宗敎)를 두어 양심(良心)의 터를 넓혀가면서 장차(將次) 메시아의 도(道)를 받을 수 있는  기대(基台(臺))를 조성(造成)하신 것이다. 모든 종교(宗敎)의 목적(目的)은 전인류(全人類)를 그리스도 앞으로 몰아내어 그리스도를 중심(中心)하고 건설(建設)되는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를 실현(實現)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하려는데 있는 까닭이다.
오늘 기독교(基督敎)가 타종교(他宗敎)에 대(對)하여 배타적(背他的)인 입장(立場)을 취(取)하는 한(限) 인류(人類)의 평화(平和)는 영원(永遠)히 오지 않을 것이다. 대양(大洋)으로 흐르는 본류(本流)에서 보면 지류(支流)는 정반대(正反對)의 방향(方向)으로 흐를 수도 있으나 그것은 모두 본류(本流)에로 합(合)하여 대양(大洋)으로 들어가기 위(爲)함인 것과같이 기독교(基督敎)와 다른 종교(宗敎)와의 관계(關係)도 그러한 것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그러나 성서(聖書)를 중심(中心)하고있는 지금까지의 기독(基督)신자(信者)들의 시야(視野)는 그렇게 넓은 범위(範圍)에까지는 미칠 수 없는 것임으로 그들의 시야(視野)를 넓혀줄 수 있는 진리(眞理)가 나와야할 것이다.
기독교(基督敎)는 오늘 명실(名實) 공(共)히 세계적(世界的)인 종교(宗敎)가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基督敎)의 통일(統一)이 없이 어찌 종교(宗敎)통일(統一)이 있을 것이며 종교통일(宗敎統一)이 없이 어찌 인류(人類)를 하나의 뜻 가운데 세울 수있으며, 인류(人類)를 하나의 뜻 앞에 세우지 못하고 어찌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 이루어질 것인가? 그러므로 기독교(基督敎)의 전교파(全敎派)를 통일(統一)할 수 있는 교리(敎理)이면서 바로 다른 종교(宗敎)의 교리(敎理)의 핵심(核心)으로서도 세워질 수 있는 하나의 근본진리(根本眞理)가 나타나지 않으면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다시 찾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人間)이 만일(萬一) 타락(墮落)되지 않았더면 각자(各自)는 하나님과 직접적(直接的)인 종적(縱的) 관계(關係)를 갖게됨으로써 인간사회(人間事會)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동일(同一)한 명령(命令)에 의(依)하여 하나님이 원(願)하시는 뜻대로 횡적(橫的) 관계(關係)를 맺을 수 있는 유기체(有機體)가 될 것이었는데 타락(墮落)으로 인(因)하여 하나님과의 종적(縱的)관계(關係)가 끊어졌으므로 한진리(眞理)로써 맺어져야할 횡적(橫的)관계(關係)에는 전체적(全體的)인 목적(目的)을 지향(指向)하는 통일성(統一性)을 상실(喪失)하게된 것이다. 인간사회(人間事會)의 비애(悲哀)는 이렇게되어 빚어지게되었다. 그러므로 타락(墮落)된  인간을 다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人間)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근본진리(根本眞理)라면 이것은 반드시 신령(神靈)의 역사(役事)를 유발(誘發)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무형세계(無形世界)와 교통(交通)케하여 하나님과  직접적(直接的)인 관계(關係)를 맺을 수 있는 데까지 이끌어 올릴 수있어야하며 따라서 이 진리(眞理)에 의(依)한 신령(神靈)의 역사(役事)는 타락인간(墮落人間)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근본적(根本的)인 인격변화(人格變化)의 힘을 갖추게하여 모든 인간(人間)들을 한 뜻가운데서 얽히어질 수있도록 횡적(橫的)인 관계(關係)를 맺어줄 수있어야한다. 이러한 의식혁명(意識革命)을 일으킬 수 없다면 어떠한 신령(神靈)과 진리(眞理)라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못할 것이다.
오늘에 있어 많은 기독신자(基督信者)들이 불신자(不信者)나 다름없는 생활(生活)을 하게되는 것은 그들의 신앙생활(信仰生活)에는 바른 진리(眞理)에 입각(立脚)한 신령역사(神靈役事)로써 일어나는 인격변화(人格變化)의 힘을 결(缺)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은 원(願)이로되 육신(肉身)이 약(弱)하다(마 26/41)고 하셨으니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 이루어지지않은 이유(理由)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인류(全人類)를 하나의 뜻 앞에 통일(統一)할 수 있는  근본진리(根本眞理)라면 이 진리(眞理)는 전인류(全人類)의 마음을 하나님의 한 명령(命令)에 움직일 수 있는 입장(立場)에 세워줄 수있어야하며 또 그들의 몸으로 하여금 그 마음의 명령에 순응(順應)케하여 몸과 마음이 아울러 하나님의 한뜻을 지향(指向)하여 나아가게할 수 있는 힘을 줄 수있어야한다. 의무(義務)를 실천(實踐)할 수 있는 단순(單純)한 의지(意志)의 힘도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끝까지는믿을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의 목적(目的)을 지향(指向)하여 아니가려야 아니갈 수없이 우리를 몰아내는 위로부터의 다른 힘을 누구에게나 부여(賦與)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면 하나의 세계(世界)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條件)들을 구비(具備)한 근본진리(根本眞理)를 중심하고 일어나는 운동(運動)은 의전(宜傳)이나 조직(組織)이나 어떠한 형식(形式)에도 구애(拘碍)될 바가 아니다. 생명(生命)있는 운동(運動)이라면 조직(組織)없는 조직(組織)과 형식(形式)을 초월(超越)한 형식(形式)에 의(依)하여 명령(命令)도 권유(勸誘)도 요(要)치 않고 자율적(自律的)인 질서(秩序)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정연(整然)하게 잡혀질 수 있어야하며 가슴에서 가슴에로 말없이 흐르는 지극(至極)한 하늘의 사랑 가운데서 움직이는 자연(自然)스러운 생활(生活)의 전개(展開)가 있어야한다. 우리들은 신령(神靈)으로 열(熱)하고 진리(眞理)로 조절(調節)하며 생활(生活)로 실천(實踐)하여 한몸의 지체(肢體)와같이 말없이 화동(和動)할 수 있는 원화(圓和)의 세계(世界)로 옮겨져야(원어에는 옴겨져야로 기록됨 이후로는 표준어로 고침=편집자 주)한다.
곤충(昆蟲; (원문에서는 虫))도 빛을 찾아 모이거던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랴 진정(眞正)한 화평(和平)과 행복(幸福)과 희락(喜樂)과 만족(滿足)의 고갈(枯渴)을 느껴 이를 찾아헤매는 것이 타락(墮落)된 인간(人間)의 모습이어늘 어찌 이렇듯 진리(眞理)로 세워진 위대(偉大)한 사랑의 힘에 감촉(感觸)을 받아 끌리지 않을 것인가.
이와같이 진리(眞理)를 찾아 헤메는 성도(聖徒)들이 마치 강(强)한 자석(磁石)에 끌려들어가는 철분(鐵粉)과같이 한곳으로 모여드는 데서 자율적(自律的)으로 이 운동(運動)은 전개(展開)되어야한다. 주검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하셨으니(눅 17/37) 생명(生命)있는 곳으로 생명(生命)을 찾아 허덕이는 성도(聖徒)들이 아니 모일 것인가.
제물시대(祭物時代)에서 구약시대(舊約時代)로 바꾸어질 때에는  아브라함 한사람을 중심(中心)하고 형태(形態)가 다른 세 시대(時代)로 바뀌었기 때문에 새 언약(言約)을 이루기 위(爲)한 선민(選民)을 불러세우는 역사(役事)는 아브라함 개체(個體)의 사건(事件)으로 멎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구약시대(舊約時代)에서 신약시대(新約時代)로 바뀌어질 때에는 이스라엘의 한 민족(民族)을 중심(中心)하고 섭리(攝理)하시던 시대(時代)가 세계인류(世界人類)를 중심하고 섭리(攝理)하시는 시대(時代)로 옮겨졌기 때문에 모든 변혁(變革)은 민족적(民族的)인 것이었다. 예수 이후(以後) 지금까지의 기독교(基督敎)를 중심(中心)하고 세계적(世界的)인 복음운동(福音運動)의 시대(時代)는 천국건설(天國建設)의 시대(時代)로 옮겨져야하기 때문에 기독교(基督敎)를 중심(中心)한 세계적(世界的)인 변혁(變革)은 복귀섭리(復歸攝理)로 보아 필연적(必然的)인 현상(現象)으로 있어야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時代)는 낡은 시대(時代)가 다 끝나고 오는 것이 아니라 낡은 시대(時代) 속에서 새로운 것이 싹이 터서 그와 더불어 싸우면서 자라 꽃이 피고 열매 맺어야함으로 그 입장(立場)에서 보면 전(全)혀 이것은 이해(理解)할 수 없는 다른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있어서 한 시대가 다른 시대로 전환(轉換)될 때에는 반드시 혁명(革命)의 단계(段階)를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구약시대(舊約時代)로 바뀌어질 때 그러했듯이 이제 신약시대(新約時代)가 종결(終結)되고 신구약속(新舊約束)을 이루어야할 새 시대(時代)가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기 위(爲)하여는 종교(宗敎)의 일대변혁(一大變革)이 있어야한다는 것은 지난 날의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이 말하여주는 필연적(必然的)인 결론(結論)인 것이다. 이러한 섭리(攝理)의 시대적(時代的)인 혁명(革命)을 갖고 이제 6천년죄악사(罪惡史)의 썩은 거름 위에 하나님이 천지창조(天地創造) 시(時)에 인간(人間)에게 축복(祝福)하셨던 약속(約束)을 이루기 위(爲)한 세 시대(時代)를 약속(約束)하는 종교혁명(宗敎革命)의 봉화(烽火)는 들리었다.
이에 하늘과 땅에 사무친 유구(悠久)한 역사(歷史)의 설움을 거두려고 팔방(八方)으로 들어오는 모진 화살을 받아가며 역사상(歷史上)의 모든 선지선열(先知先烈)들이 피흘린 자국을 터삼아 혈혈단신(孑孑單身) 신개지(新開地)를 역보(力步)하시는 열혈청년(熱血靑年)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문선명(文鮮明) 선생(先生)이시다.
하늘의 뜻을 받들고 나선 후(後) 수십성상(數十星霜)을 성서(聖書)의 문자(文字) 뒤에 감추인 숨은 진리(眞理)를 찾으시려고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樂園)의 뭇 영인(靈人)들과 또는 역사이래(歷史以來)에 지상(地上)에 왔다간 모든 성현(聖賢)들과 자유(自由)로 접촉(接觸)하시었고 때로는 하나님과 친(親)히 교통(交通)하시어 하나님의 품 속에 감추인 천륜(天倫)의 비밀(秘密)을 찾아내기에 온갖 심혈(心血)을 경주(傾注)하셨으며 때로는 억만(億萬)의 사탄들과 혈투전(血鬪戰)을 겨루어 나오신 것이다.
극(極)히 부분적(部分的)인 것이나마 이 진리(眞理)를 발표(發表)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解放)이후(以後)의 일이며 더욱이 본서(本書)에 기록(記錄)된 범위(範圍)의 것을 발표(發表)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不過) 3년 전(前)의 일이다.
이에 발표(發表)되는 것은 지금까지 그의 제자들이 듣고 본 범위(範圍)내(內)에서 현재(現在) 그의 제자(弟子)들이 매일(每日) 강의(講義)하고있는 내용(內容)을 그대로 기록(記錄)한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이분이 발표(發表)하시지 못하고 계시는 부분(部分)이 어느 정도(程度)이며 또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는 측량(測量)할 길이 없다.
그러나 기독신도(基督信徒)들이 이 진리(眞理)를 받아들이는 정도(程度)에 따라 앞으로 새로운 말씀이 더 많이 발표(發表)될 것만은 확신(確信)하고 있다.
필자(筆者)의 표현력(表現力)의 부족(不足)으로 이 진리(眞理)의 내의(內意)를 충분(充分)히 들어내지 못했음은 실(實)로 유감(遺憾)된 일이다.
그러나 진리(眞理)는 어디까지나 진리(眞理)로서 표현(表現)의 부족(不足)으로 진리(眞理)의 빛이 어두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같이 새 시대(時代)의 말씀은 이 한민족(韓民族) 가운데 던져져 낡은 역사(歷史)를 청산(淸算)하고 새 세계(世界)의 도래(到來)를 고(告)하며 또 싸워 이루어야할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사건(大事件)은 이 한반도(韓半島) 위에 폭발(爆發)되었다.
우리는 여기 4천년 구약시대(舊約時代)와 2천년 신약시대(新約時代)를 합(合)한 6천년 신앙의 터를 발판으로 하여 천륜(天倫)의 채찍을 받아 선각자(先覺者)로서의 대명(大命)을 받고 일어난 것이다.
믿음에는 반드시 그 목적이 있으므로 우리는 모두 이 목적이 이루어질 때를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목적(目的)이 이루어 질 때까지는 바라보면서 믿고만 있는 입장(立場)을 취(取)해도 좋지만 그 믿음의 목적(目的)이 이루어질 때는 믿고만 있는 입장(立場)을 떠나 그 목적(目的)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民族)의 믿음의 목적(目的)을 이루실 실체(實體)로 오실 메시아가 현현(顯現)하실 때에는 어떠한 예배(禮拜)나 단식기도(斷食祈禱)보다도 광야(曠野)에서 외치는 세례(洗禮)요한의 음성(音聲) 한마디를 듣는 것이 더 귀중(貴重)한 일이었던 것이다. 
메시아를 알아차리는데는 그를 맞기 위하여 머리가 반백이 되도록 성전(聖殿)을 지키며 성경(聖經)을 가르치고 기도(祈禱)하던 제사장(祭司長)이나 교법사(敎法師)가 아니었고 마음의 명령(命令)에 응(應)하였던 세리(稅吏)와 창녀(娼女)와 고기낚던 어부(漁夫)였으며 택(擇)하지도 않은 이방(異邦)의 점성술자(占星術者)였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마음의 명령(命令)은 어떠한 교리(敎理)나 전통(傳統)보다도 앞선다. 교리(敎理)와 전통(傳統)에 붙들렸던 제사장(祭司長)과 교법사(敎法師)들은 메시아를 학살(虐殺)하였으나 이스라엘 선민(選民)의 반역자(反逆者)로 몰려 방랑객(放浪客)이 되어버린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를 순종(順從)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명령(命令)에 순응(順應)한 세리(稅吏)와 창녀(娼女)와 어부(漁夫)들은 예비(豫備)하신 하늘나라를 차지하였다.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나선형(螺旋形)을 되풀이하여 돌고 있는 역사(歷史)는 마침내 오늘 예수 당시(當時)의 시대적(時代的) 환경(環境)을 다시 되풀이하게되는 단계(段階)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메시아를 믿고 바라고만 나가던 2천년 역사(歷史)는 이제 종말(終末)을 지으려하고 있으니 이제는 단식(斷食)의 기도(祈禱)도 필요(必要)할 것이나 보다더 중(重)한 것은 엘리야로 와서 그의 길을 예비(豫備)하고 있는 세례(洗禮)요한의 음성(音聲)이 어디서 들리지 않는가고 찾는 그것이다.
메시아를 맞어야할 이스라엘 선민(選民)이 그러했듯이 메시아의 재림(再臨)을 고대(苦待)하는 오늘의 기독신자(基督信者)에게도 이제는 누구의 말도 들어서는 아니될 때가 왔다. 만일(萬一) 사마리아 여인(女人)이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에 관(關)한 판단(判斷)을 제사장(祭司長)이나 교법사(敎法師)에게 구(救)하였더면 그는 메시아를 맞지 못하였을 것이다. 필사적(必死的)으로 성전(聖殿)을 지키고 밤을 새우며 기도(祈禱)를 올리며 들에 심은 박하(薄荷)와 회향(茴香)과 근채(芹菜)까지도 십일조(十一條)를 바쳐 교회(敎會)를 받들며 주야(晝夜)로 남을 가르치다가 지옥(地獄)에 가버린 제사장(祭司長)이나 교법사(敎法師)가 되지말고 어리석고 무식(無識)하고 못나서 천대(賤待)를 받으며 죄인(罪人)이라고 밝히워 살다가 하늘의 보좌(寶座)를 차지한 어부(漁夫)가 되며 세리(稅吏)가 되며 창녀(娼女)가 되며 죄인(罪人)이 되어보자.
지난 역사(歷史)에 이스라엘 민족(民族)이 그러했듯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새 시대(時代)를 알려줄 수 있는 은사(恩師)는 어떠한 신학자(神學者)도 설교자(說敎者)도 수도자(修道者)도 아닐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에 연(連)해줄 수 있는 사다리는 오직 우리들의 속임없는 바른 마음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淸潔)한 자(者)는 복(福)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였다(마 5/8). 이제 우리는 하늘 앞에 부끄럼없는 정결(淨潔)한 마음을 가졌는가 반성하자. 만일(萬一) 그렇다면 기도(祈禱)로써 하늘을 대(對)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에는 이에 발표(發表)되는 말씀의 진부(眞否)가 알려질 것이다.
끝으로 독자(讀者)에게 한말씀 부탁이 있다. 그것은 이 글의 내용(內容)을 중도(中途)에서부터 읽지말고 처음부터 순서(順序)있게 읽으시라는 것이다. 한 단계(段階)씩 오르면 반드시 다 올라갈 수 있는 것을 뛰어오르다가 중도(中途)에서 떨어져 상처(傷處)를 입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부분적(部分的)으로 보아서 일어나는 의문(疑問)은 전체(全體)를 열독(熱讀)함으로써 반드시 해명(解明)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해(理解)되지 않는 문제(問題)가 있으면 기도(祈禱)로써 해결(解決)하시라는 것이다. 시대(時代)는 바뀌어 누구나 영통(靈通)할 수 있는 시대(時代)로 옮겨지고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진정(眞正) 믿는다는 자신(自身)만 있다면 식음(食飮)을 폐(廢)하고 꼭 들어앉어 결사적(決死的)인 최후(最後)의 단식기도(斷食祈禱)를 올려야할 것이다.
사심(私心)을 버린 공정(公正)한 입장(立場)에서 특(特)히 이 원리(原理)에 관(關)한 문제를 걸고 기도(祈禱)하면 반드시 누구에게나 상세(詳細)히 계시(啓示)하여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진리(眞理)의 말씀이라할진대 그에 대(對)한 간곡(懇曲)한 판단(判斷)의 기도(祈禱)에 응답(應答)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벌써 수(數)많은 성도(聖徒)들이 직접(直接) 영계(靈界)와 통(通)하는 가운데서 이 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하고 한곳으로 착착(着着) 모이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萬一) 자신(自身)의 영력(靈力)이 없다면 영통(靈通)하는 사람을 통(通)하여서라도 응답(應答)을 받도록 하는 것이 현명(賢明)한 방책(方策)일 것이다.
이제 새 역사(歷史)를 꾸미는 역군(役軍)들이 부르는 힘찬 음성(音聲)을 뚜렷이 들려온다. 하늘이 찾고있는 양심적(良心的)인 인사(人士)는 일어나 동원(動員)하라 그리고 낡은 역사(歷史)를 청산(淸算)하는 횃불을 들고 선두(先頭)에 서라 하늘의 천군천사(天軍天使)와 천천만(千千萬) 성도(聖徒)들이 응원(應援)의 소리는 드높이 들려온다.
새 시대(時代) 새 뜻의 목메인 외침소리에 남먼저 감응(感應)하고 일어나 정성(精誠)으로 닦아놓은 푸른 대지(大地) 위에 머지않아 심판(審判)의 손길을 들고 영광(榮光)과 권위(權威)로 찾아오실 주(主)님의 영원(永遠)한 나라는 열리리라.
전편(前編)
    제1장 창조원리(創造原理)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얽히어진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關鍵)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創造)하셨는가하는 문제를 아는데 있다.
타락이라는 것은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위치를 잃어버렸음으로 창조원리적 본연성(本然性)을 상실(喪失)하였음을 의미한다. 창조원리를 아지 못하면 창조본연의 위치와 그 본연성을 알 수 없으며 따라서 타락의 의의(意義)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론(基督論)과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에 관한 명확한 교리를 세우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하나님과 인간과의 창조원리적 관계를 아지 못한데 있는 것이다.
인간을 중심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아지 못하였음으로 인류역사의 목적을 아지못한 것이다. 인간시조가 타락행위를 하는 것을 하나님이 간섭치 못한 이유, 인간을 중심으로한 무형세계와 유형세계와의 관계 등등의 문제도 창조원리를 이해하는데서만 해결될 것이요 삼라만상의 생존과 모든 생명체의 번식과 물질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의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랑과 미(美)와 선(善)과 의(義)는 무엇인가하는 것도 창조원리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명하려 애쓰는 우리에게 있어서 창조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지극(至極)히 중대한 일이다.
제1절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과 피조세계(被造世界)
자연계의 진리를 찾는 것도 그러하지만 영적(靈的)인 세계의 진리도 귀납적(歸納的)인 논리(論理)로써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나타나 있음으로 우리가 이것들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실존(實存)과 그 능력(能力)을 부인(否認)하는 것은 핑계가 되지않는다고 경계(警戒)하였다(롬 1/20).
이와같이 우리는 피조세계를 보아 모든 피조물은 주체(+)와 대상(-)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실체적(實體的) 전개(展開)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원리를 세울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는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그의 대상(對象)인 해와를 창조하신 후에야 선(善)하다고 하셨다(창 1/31, 2/18).
첫날에는 빛(+)과 어둠(-)을 창조하셨고 다음날에는 궁창(穹蒼)을 창조하시어 상(+) 과 하(-)를 구분하셨고 다음날에는 땅(+)과 물(-)을 갈라세우셨고 그 위에 웅예(雄蕊)(+)와 자예(雌蕊)(-)로 씨를 맺는 채소(菜蔬)와 과목(果木)을 창조하셨고 다음날에는 해(+)와 달(-)을 창조하셨교 그 다음날에는 웅(雄)(+) 자(雌)(-)로 번식(繁殖)하는 동물(動物)을 창조하셨다. 이와같이 주체(主體)가 대상(對象)을 가지지 않고 존재(存在)하는 피조물(被造物)이 없는 것은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닮아서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성서(聖書)를 보면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形象)을 닮게하기 위하여 인간을 1남(一男) 1녀(一女)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으니(창 1/27) 이 말씀을 귀납적(歸納的)으로 추론(推論)하면 하나님은 남성(男性)과 여성(女性)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중화적(中和的) 존재(存在)이며 남성격(男性格) 주체(主體)로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남성격(男性格)이기 때문에 아버지라 불러 그 격위(格位)를 표시(表示)하는 것이며 남자(男子)는 하나님의 형상(形象)과 영광(榮光)이라고(고전 11/7) 기록(記錄)되었고 또 하나님은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주체(主體)이시기 때문에 그를 닮아서 창조된 피조물은 이성성상의 실체적(實體的) 존재로 전개(展開)된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세계(被造世界)는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주체(主體)로 계시는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象)이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여 형상적(形相的) 또는 상징적(象徵的)인 실체(實體)로서 전개(展開)된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로 구성(構成)되어있는 실체대상(實體對象)이다.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象)인 실체대상(實體對象)이 인간이요 상징적(象徵的)인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로 구성(構成)되어있는 실체대상(實體對象)이 피조세계(世界)다.
자연계(自然界)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부인(否認)하는 것은 핑계가 되지 않는다고 진술(陳述)한 바울의 증언(證言)(롬 1/19)도 그러하지만 흔히 자연계(自然界)를 불러 제2성서(聖書)라함도 하나님을 닮아서 생겨난 피조세계(被造世界)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피조물(被造物)은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닮은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로서 상대적(相對的) 존재를 대(對)하여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造成)치 않고는 그의 존재기대(存在基臺)를 유지(維持)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형세계(無形世界)(+) 에 대(對)한 유형세계(有形世界)(-)를 창조(創造)하셨고 인간도 영인체(靈人體)(+)와 그에 대(對)한 육신(肉身)(-)이 있으며 또 물질(物質)의 분자(分子)도 전리(電離)되면 반드시 양(+)이온과 음(-)이온의 양성(兩性)으로 분리(分離)되며 원자(原子)도 양자(陽子)(+)를 중심(中心)하고 회전(回轉)하는 전자(電子)(-)로써 구성(構成)되었고 음파(音波)도 밀(密)(+)과 소(疏)(-)의 파동(波動)으로 생기며 빛도 양음(陽陰)의 상대적(相對的) 파동(波動)으로 생기는 것이다.
동서(東西)와 남북(南北), 전후(前後)와 좌우(左右), 상하(上下)와 고저(高低), 장단(長短)과 광협(廣狹), 강약(强弱)과 억양(抑揚), 보편(普遍)과 특수(特殊), 전체(全體)와 개체(個體), 정신(情神)과 물질(物質) 등등으로 보여지는 피조세계(被造世界)는 전부(全部) 이러한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상대성(相對性) 창조원리(創造原理)를 떠나서는 이해(理解)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동양철학(東洋哲學)의 위대성(偉大性)을 재인식(再認識)하게되는 것도 그의 논거(論據)가 음양원리(陰陽原理)에 입각(立脚)했다는데 있는 것이다. 최근(最近)에 오면서 권위(權威)를 더해가는 한의학(韓醫學)도 음양(陰陽)의 철학적(哲學的) 근거(根據)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의의(意義)가 있는 것이다.
제2절 피조물(被造物)의 완성(完成)과 그의 성장기(成長期)
I 성장기(成長期)의 질서적(秩序的) 3단계(段階)
피조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現象)은 시간성(時間性)을 무시(無視)하고는 그의 결과(結果)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적(物理的) 현상(現象)이나 화학적(化學的) 현상이나 기타 어떠한 현상도 시간의 경과(經過)가 있은 후에야 그의 결과(結果)를 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천지창조(天地創造)의 과정(過程)이 그러했음을 입증(立證)하는 것이다. 즉 피조물은 성장(成長)하는 시간적(時間的)인 과정을 경과한 후에야 완성(完成)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세기(創世記)의 말씀을 보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거늘 하나님이 빛을 보시니 선한지라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하시고 어둠을 밤이라하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날이러라」(창 1/5)고 기록되었다. 하루의 창조가 끝나고 밤을 지나 이튿날 아침이 되면 둘째날일 것인데 첫째날이라고 기록된 것은 피조물이 완성될 때까지는 성장하는 기간이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창조된 피조물이 그 피조물로서의 실현이 완료(完了)왼 때가 저녁이다. 말씀이 실체(實體)로서의 실현(實現)이 완료되었을 뿐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피조물은 성장기간(成長期間)인 밤기간을 경과하여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된 피조물로서 창조의 목적을 향(向)하여 첫출발을 하게되는 것임으로 이날이 바로 첫째날이 되는 것이다.
만일 피조물이 성장기간이 없이 하나님의 명령(命令)의 말씀과 동시(同時)에 완성되었다면 전피조물의 창조가 끝나기까지의 6일이라는 기간조차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창조돈 피조물이 완성될 때까지의 자라는 밤 기간도 소생기(蘇生期)와 장성기(長成期)와 완성기(完成期)의 3기간(期間)으로 구분(區分)되어 있음으로 이 질서적(秩序的) 3기간을 경과치 않고 완성된 피조물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3수(數)를 채워야 완성의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이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원리(原理)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聖經)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정(過程)을 비유(譬喩)하여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을 때에 처음에는 싹이 나며 다음에는 이삭이 되고 그 후에는 이삭에 충실한 열매를 맺는다(막 4/28)고 말씀하셨다. 창조의 전과정을 보더라도 저녁기간과 밤기간과 아침기간이 있으며 구원의 섭리를 완수(完遂)키 위하여는 하나님도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神)으로 역사(役事)하셔야하며 천사장(天使長)의 위치(位置)로 삼위(三位)로 정립(鼎立)되어 있으며 인간도 복중(腹中)의 한 기간(期間)과 지상(地上) 생활의 한 기간(期間)을 거쳐 무형세계(無形世界)에 들어가야만 영원(永遠)한 천국(天國)의 영인(靈人)으로 완성(完成)되는 것이다. 바울이 체험(體驗)하였던 낙원세계(樂園世界)도 3층천(三層天)이며 노아 방주(方舟)도 3층으로써 신천지(新天地) 재창조(再創造)를 표시(表示)했으며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 올 때까지도 7년씩 3차에 걸쳐 노역(勞役)하였고 모세가 바로궁중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3개월을 숨어 자랐으며 그 바로궁중 40년 미디안 광야(曠野) 40년 가나안 복지(福地)를 바라보는 때까지의 40년으로 그의 생애(生涯)를 마치었다. 동방박사도 황금 유향(油香) 몰약(沒藥) 3종의 예물을 드림으로써 예수님이 탄생하신 축하의 예를 완전히 표시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사탄의 시험을 세 번 거쳐서 비로소 그를 완전히 굴복(屈伏)시켰고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기도도 세 번으로 마치쳤으며 예수께 대한 베드로의 거부도 세 번으로 마쳤고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신 베드로에게 대한 예수님의 질문도 세 번으로 마쳤다.
예수님의 30년 준비기간, 3년 공생애, 십자가 후 어둠의 3시간, 무덤 속의 3일, 요나의 고래 뱃속 3일기간, 야곱이 라반을 속이고 나오던 3일기간, 모세가 바로를 속이고 나오던 3일기간, 아브라함의 이삭헌제(獻祭) 3일기간, 모세로 인(因)한 어둠재앙(災殃) 3일기간, 모세의 결례(潔禮) 3일기간, 아담을 중심한 가인 아벨 셋의 3자식(子息), 노아를 중심한 셈 함 야벳의 3자식, 아브라함을 중심한 비둘기 양 암소 3종의 제물(祭物), 믿음의 조상의 책임을 담당하여 복귀섭리노정에 나타났던 노아를 중심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성전(聖殿) 건축(建築)의 책임을 지고 왔던 모세를 중심한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 예수님을 중심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의 3제자 등등이며 지상세계는 고체와 액체와 기체의 3상(相)으로 보여진 흙과 물과 공기로 되어 있고 또 광물 식물 동물의 3형태(形態), 지층 암층 용암층의 3층으로 구성된 지구며 3대영양소, 3원색이며 계급의 상중하(上中下), 황 백 흑의 3인종(人種)과 국가의 3권분립이며 군인(軍人)의 계급(階級)과 편성(編成)도 전부(全部) 3수(數)를 기준하고 되어있는 등등은 다 이러한 창조원리에 기인(起因)되는 것이니 이와같은 예(例)는 미처 다 열거키 어려울 정도다.
그리고 피조세계를 6일동안 창조하셨다함은 여섯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섯 기간(期間)을 말함이다.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씀(벧후 3/8)과 같이 여기에서 말하는 하루는 어떤 한정(限定)된 시간을 표시함이 아니고 단지 성장하는 한 기간이 있다함을 표시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하루라는 기간이 천년이던 그 년수에 계념(係念)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II 하나님의 직접주관권과 원리에 의한 간접주관권
 무릇 피조세계(被造世界)에는 창조원리(創造原理)를 떠나서 창조된 피조물(被造物)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원리로써 창조된 피조물은 성장기간을 통하여서 비로소 완성되었다함은 이미 위에서 상술(詳述)한 바이지만 소생기(蘇生期)에서부터 장성(長成)하여 장성기(長成期)를 거쳐 완성기(完成期)를 넘어서 원리를 완성한 피조물이 될 때까지의 장성기간(長成期間)의 과정(過程)은 그 원리자체(原理自體)의 주관성(主觀性) 또는 자율성(自律性)에 의하여 성장케 되어있고 하나님은 원리주관격자(原理主管格者)로 계시어서 원리적(原理的) 성장(成長)의 결과(結果)만을 보아서 간접적(間接的)인 주관(主管)을 하시므로 이 기간(期間)을 원리결과주관권(原理結果主管圈) 혹은 하나님의 간접주관권(間接主管圈)이라고한다. 마치 원리(原理)로 창조된 피조세계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운행(運行)과 영위(營爲)는 하나님이 일일이 간섭(干涉)치 않아도 그 자체(自體)의 원리적 주관성(主管性)과 자율성(自律性)에 의하여 질서(秩序)있게 진행(進行)되고있는 것과 같다.
만물세계(萬物世界)는 인간을 주관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완성된 인간만을 직접(直接) 주관하시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만을 직접(直接) 주관(主管)하심으로 피조세계(被造世界) 전체(全體)를 주관하시려하셨으나 인간은 완성기준(完成基準)까지 성장하기 전에 타락(墮落)되었으므로 인간은 창조시(創造時)에 허여(許與)된 만물주관(萬物主管)의 자격(資格)을 상실(喪失)한 것이다. 「대개 하나님이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신지라 만물을 그 아래 둔다 말씀하셨으니 만물을 그 아래 두신 이(하나님)가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 것이 분명(分明)하도다」(고전 15/27~28)고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만물세계는 이미 인간에게 그 주관위(主管位)를 허여(許與)하셨으므로 하나님은 직접(直接) 그 중에 계시지 않으심을 알 수있다.
그러면 인간은 어찌하여 원리결과주관권(原理結果主管圈)을 거쳐서야 완성되도록 창조하셨는가. 만물을 주관하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으니(창 1/28) 원리의 주관성(主管性)에 의하여 스스로 성장하여 완성된 만물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자격(資格)을 갖추려면 인간자신(人間自身)도 원리(原理)의 주관성(主管性)에 의하여 스스로 성장하여 완성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마치 자라는 아이들의 생활에 관하여 지나친 보호와 간섭을 하면 장성한 후에도 독립적으로 역경(逆境)을 극복(克服)할 수 있는 실력(實力)을 가질 수없는 것과 같이 스스로 자라야할 성장권내(成長圈內)에 있는 아담과 해와를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바라 의지(依支)하게 됨으로 스스로 성장해야할 부분이 성장되지 못하여 따라서 스스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을 인간에게 강제(强制)로 굴복(屈伏)시키지 않으시는 이유(理由)도 인간은 천사까지도 주관토록 창조하셨으므로 천사(天使)가 타락하여서 된 사탄도 인간자신(人間自身)이 그것을 굴복(屈伏)시킬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어야 하나님도 비로소 인간을 직접주관(直接主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까지의 6천년 섭리역사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자격을 갖도록 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원리에 의한 간접주관권(間接主管圈)을 통과(通過)하여 원리를 완성한 인간이 되면 하나님의 직접 주관권내(主管圈內)로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직접적(直接的)인 주관을 받게되는 것이다. 직접주관(直接主管)이라는 것은 완전하신 주체(主體)로 계시는 하나님과 완전한 수수(授受)의 관계(關係)를 맺어 하나님의 완전한 대상존재(對象存在)로 설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미(美)의 존재(存在)로서 완성(完成)되지 않으면 완전(完全)하신 하나님과 완전(完全)한 수수(授受)의 관계(關係)를 맺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직접주관내(直接主管內)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제3절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만유원력(萬有原力)                  31
하나님이 운행(運行)하시는 곳에 생존(生存)과 번식(繁殖)과 작용(作用)의 힘이 생기며 하나님은 자기(自己)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닮은 곳에 운행(運行)하시며 두 존재(存在)가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造成)치 않으면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닮을 수 없는 것이며 상대기준(相對基準)은 두 존재(存在)가 서로 잘주고 잘받을 수 있는 회로(廻路)를 지어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으로 서서 서로 불가분(不可分)의 일체적(一體的)인 관계(關係)를 맺을 때에 조성(造成)되는 것이다.
이렇듯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造成)하여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닮지않은 것은 하나도 없음으로 하나님이 운행(運行)하시지 않는 피조물(被造物)은 하나도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모든 피조물(被造物)은 하나님이 운행(運行)하실 수 있는 실체(實體)의 대상(對象)으로 창조(創造)되었음으로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다는 하나님의 편재성(遍在性)을 이해(理解)할 수 있는 것이다.
천지창조(天地創造)의 조화(造化)는 평면적(平面的)인 직행선상(直行線上)에는 있을 수 없고 서로 돌아갈 수 있는 입체적(立體的)인 유기적(有機的) 관계(關係)를 맺는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돌아가는 것은 두 존재(存在) 사이에 잘주고 잘받을 수 있는 회로(廻路)를 조성(造成)치 않으면 아니된다.
어떤 물체(物體)가 다른 물체를 중심하고 돌려면 반대(反對)의 방향(方向)으로 움직이는 두 힘인 원심력(遠心力)과 구심력(求心力)이 두 물체(物體) 사이에 주고받는 회로(廻路)를 조성(造成)치 않으면 아니 된다.
즉 그 물체가 그 중심체에서 멀리 떨어지려는 주는 힘인 원심력(遠心力)과 그 중심체(中心體)가 그 물체(物體)를 자기(自己)편으로 끌어오려는 받는 힘인 구심력(求心力)이 두 물체 사이에 주고받는 회로를 조성하여야 그 물체는 그 중심체를 중심하고 돌 수 있는 것이다.
이 주고 받는 평면적(平面的)인 회로(廻路)가 다시 입체적(立體的)인 회로(廻路)를 조성(造成)하는데서 창조(創造)의 조화(造化)는 나타나는 것인데 그 회로(廻路)의 거리(距離)와 모양(貌樣)과 상태(狀態)와 각도(角度)아 방향(方向)과 주고 받는 힘의 차(差)와 주고 받는 속도(速度)의 차(差) 등등의 요인(要因)에 의하여 천태 만상(千態 萬象)의 조화(造化)의 미(美)는 벌어지는 것이다.
물질을 구성(構成)하고 있는 최소단위(最小單位)인 원자(原子)의 구조(構造)도 양자(+)를 중심(中心)하고 전자(電子)(-)가 돌아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창조원리적(創造原理的) 회로(廻路)를 조성(造成)하여 창조(創造)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천체(天體)의 운행(運行)을 보더라도 태양(太陽)을 중심하고 돌고있는 지구(地球)와 지구(地球)를 중심(中心)하고 돌고있는 달의 관계(關係)는 마치 양(陽)이온을 중심하고 돌고있는 음(陰)이온과 양자(陽子)를 중심하고 돌고있는 전자(電子)의 관계(關係)와 같아서 추리(推理)로써만 인식(認識)할 수 있을 정도(程度)로 미소(微少)한 분자(分子) 속에서도 천체구조(天體構造)와 그 운행(運行)의 비밀(秘密)을 역연(歷然)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타락인간과의 관계는 지구와 달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무형(無形)의 하나님의 실체(實體) 대상(對象)임으로 하나님과 잘주고 잘받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일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었으면 하나님과 완전한 수수(授受)의 회로(廻路)를 조성(造成)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게되었을 것이었는데 타락(墮落)됨으로 인(因)하여 이 회로(廻路)가 끊어졌음으로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 수 없는 존재(存在)가 되어 하나님과의 생명(生命)의 인연(因緣)이 끊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이 끊어진 생명의 회로를 다시 이어 주시려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분으로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대상(對象)임으로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 수 있는 분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生命)에 동(動)하고 정(靜)하여 잘받고 잘주는 대상(對象)이 되어 그를 중심하고 돌기 위함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고있는 예수님을 중심하고 돌면 결국(結局) 타락인간(墮落人間)도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게됨으로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수수(授受)의 회로(廻路)를 맺어 영원(永遠)한 생명의 인연(因緣)을 가지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仲保)가 되어 우리들로 하나님과 원리적(原理的)인 관계(關係)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인간(人間)은 하나님과의 종적(縱的)인 수수(授受)의 회로(回路)가 끊어졌으므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횡적(橫的)인 수수(授受)의 회로(廻路)까지도 상실(喪失)하였으니 이것이 곧 타락(墮落)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창조원리에 의한 인간 사이의 횡적인 수수의 회로를 회복(恢復)(회복(回復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임; 편집자 주)하여 하나님과의 종적(縱的)인 수수(授受)의 회로(廻路)까지 복귀(復歸)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교훈(敎訓)과 행적(行跡)은 모두가 이 목적(目的)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친(親)히 제자(弟子)들의 발을 씻어주는 데서부터 생명(生命)까지 인간에게 돌려주시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고 하셨고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待接)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賞)을 받을 것이요 의인(義人)의 이름으로 의인을 대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마 10/41)고 하셨으며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아노라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아노라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아지 못하노라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아지 못하노라 하리라」(마 10/32~33)하셨으며 「남을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도 헤아림을 받으리라」(마 7/2) 하셨으며 「누구든지 제자(弟子)의 이름으로 이 소자(小子) 중(中) 하나에게 냉수(冷水)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決斷)코 상(賞)을 잃지 않으리라」(마 10/42) 등등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신앙생활(信仰生活)도 잘주고 잘받는데서만 유종(有終)의 미(美)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意味)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中)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合心)하여 무엇이든지 구(求)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고 말씀하신 것도 두 사람이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造成)하는데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힘이 미칠 수 있다다는 것을 의미(意味)하신 것이다.
격언(格言)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하였다. 부부(夫婦)가 사랑을 중심(中心)하고 잘주고 잘받는데 가화(家和)가 있고 가화에서만 만사(萬事)가 이루어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니 외짝 사랑이 있을 수 없다함은 이러한 원리(原理)를 증명(證明)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남의 혜택(惠澤)을 받을 때에 마음으로나마 감사(感謝)의 념(念)을 돌리지 않으면 그와의 관계를 유지(維持)할 수 있는 힘은 반드시 끊어지고 마는 것이다.
폐(肺)도 한번 들여쉬면 한번 내쉬어야 그 기능(機能)을 발휘(發揮)할 것이요 육체(肉體)도 정맥혈(靜脈血)과 동맥혈(動脈血)에 의한 신진대사(新陳代謝)를 잘하여야 건강(健康)을 유지(維持)할 수 있으니 교감신경(交感神經)과 부교감신경(副交感神經)도 하나는 수축(收縮)케하며 하나는 신장(伸張)케하여 그 수수(授受)의 작용(作用)이 조화(調和)됨으로써만 혈관신축(血管伸縮)의 균형(均衡)을 볼 것이요 육체(肉體)도 촉진(促進)홀몬과 억제(抑制)홀몬이 서로 원만(圓滿)한 수수(授受)의 관계(關係)를 맺게될 때 균형(均衡)된 육체(肉體)를 보지(保持)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국가(國家)를 흥왕(興旺)케하는 힘도 정부(政府)와 백성(百姓) 사이에 상의하달(上意下達)의 수수(授受)의 관계(關係)가 성립(成立)되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무릇 공존(共存) 공영(共榮)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러한 수수(授受)의 관계(關係)를 맺을 때에 생기는 것이다.
뉴턴의 만유인력(萬有引力)의 학설(學說)은 창조원리(創造原理)의 한면(面)만을 파악(把握)한데서 제창(提唱)되었다. 만일 모든 존재물에 인력(引力) 즉 받는 힘만이 있다면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전존재물은 서로 충돌(衝突)하여 전부(全部) 파괴(破壞)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받는 힘이 있는 동시(同時)에 주는 힘이 있기 때문에 피조세계(被造世界)는 상호(相互) 균형(均衡)의 존재기대(存在基臺)를 유지(維持)하여 영원(永遠)에서 영원(永遠)에까지 존재(存在)의 힘을 유지(維持)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두 존재물이 완전한 수수(授受)의 관계(關係)를 맺어 각각(各各)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의 위치(位置)를 결정(決定)하면 생존(生存)과 번식(繁殖)과 작용(作用)의 힘을 발생(發生)하는 것이니 이 힘을 만유원력이라고하며 이 원력의 강약(强弱)의 숫자적(數字的) 표시(表示)를 원력계수(原力係數)라고한다. 이 원력계수(原力係數)의 차(差)에 의하여 인력(引力)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테면 철(鐵)은 지구(地球)와의 원력계수(原力係數)보다 자석(磁石)과의 원력계수(原力係數)가 크기 때문에 자석(磁石)에 끌리는 것이다. 원소(元素)의 이온화(化) 경향(傾向)은 바로 각 원소(元素)가 다른 원소(元素)와의 사이에 갖고있는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원력계수(原力係數)의 차(差)를 의미한다. 즉 칼륨이 나트륨의 것보다 강(强)하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피조세계(被造世界)의 모든 천체(天體)도 만유원력(萬有原力)의 법칙(法則)을 떠나서는 운행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천체(天體)의 형상(形狀)과 그 특이성(特異性)과 또 그 운행하는 방향(方向)과 궤도(軌道)와 속도(速度)는 상호면(相互面)에 갖고있는 원력계수(原力係數)에 의한 창조원리(創造原理)적 조화(造化)에서 생기는 것이다. 유성(流星)이 떨어지며 지층(地層)과 광맥(鑛脈)과 산맥(山脈)이 생기며 지각(地殼)의 변화(變化)가 일어나는 현상(現象) 등은 모두 이런 원리(原理)에 의하여 벌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또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동일한 법칙(法則)이 성립(成立)된다.
신앙(信仰)의 정도(程度)의 차(差)는 하나님과의 주고받는 원력계수(原力係數)의 차(差)를 말한다. 인간이 타락(墮落)되지 않고 완성(完成)되었으면 주체(主體)로서의 하나님과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서의 인간과의 사이에 원력계수(原力係數)는 100%이다. 그러므로 이 원력계수(原力係數)를 능가(凌駕)하는 힘이 없음으로 완성(完成)된 인간은 절대(絶對)로 타락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완성(完成) 후(後)에 타락(墮落)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全能性)을 부인(否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도 창조원리(創造原理)를 떠나서 창조(創造)되었을 수 없음으로 성장기간(成長期間)을 통하여서 비로소 완성(完成)될 것이었는데 하나님과 100%의 원력계수(原力係數)에 의한 관계(關係)가 맺어지기 전에 다른 존재와의 보다더 큰 원력(原力)에 끌리어 그와 상대(相對)하였음으로 타락된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원력계수(原力係數)가 영(零)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目的)은 이 상실(喪失)된 원력계수(原力係數)를 다시 100%에까지 끌어올리어 하나님과의 창조원리(創造原理)적 관계(關係)를 복귀(復歸)하려는데 있으므로 이것을 복귀섭리(復歸攝理)라고 한다.
갑(甲)과 을(乙)이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으로 서서 서로 주고 받게되면 그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생기는 힘은 반드시 어떠한 작용(作用)을 하게되는 것이며 이 작용(作用)에 의한 작용체(作用體)는 다시 새로운 또하나의 주체(主體)가 되어 이 주체(主體)가 된 작용체(作用體)는 창조목적(創造目的)을 그의 대상위치(對象位置)에 세워놓고 그 목적(目的)을 이루려는 방향(方向)을 취(取)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갑(甲)이라하고 인간을 을(乙)이라고하면 을(乙)은 갑(甲)에게 미(美)를 돌리고 갑(甲)은 을(乙)에게 사랑을 주어야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위한 원리적(原理的) 수수관계를 맺어 진리(眞理)를 찾게되는 것임으로 갑과 을 사이에 연결(連結)하는 직선(直線)은 진리(眞理)의 기준(基準)을 표시(表示)함으로 이 선(線)을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이라고 한다.
갑과 을이 수수작용(授受作用)의 힘에 의하여 새로운 또 하나의 주체(主體)가 된 작용체(作用體)는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을 저변(底邊)으로하는 이등변삼각형(二等邊三角形) (ABC)의 정점(頂點)(C)으로 표시(表示)된다. 그런데 갑(A)과 을(B)이 미(美)와 사랑을 주고받으면 그로 인한 힘은 선(善)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작용선(作用線)을 표시(表示)하는 이등변삼각형(二等邊三角形)은 정점(頂點)(C)은 선(善)을 표시하는 점(點)이 된다. 그러므로 이 점(點)을 선기준표시점(善基準表示點)이라고한다. 이 이등변삼각형(二等邊三角形)의 정점(頂點)(C) 즉 선기준표시점(善基準表示點)은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의 중심점(中心點)(O)에서 그어지는 이 선(線)(AB)의 수직선상(垂直線上)(OC)에서 움직이게된다. 그러므로 이 수직선(垂直線)(OC)을 선기준표시선(善基準表示線)이라고 한다.
갑과 을의 수수작용(授受作用)의 힘에 의하여 새로운 또 하나의 주체(主體)가 되 작용체(作用體)(C)의 대상(對象)인 창조목적(創造目的)(D)은 같은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을 저변(底邊)으로 하고 전자(前者)의 이등변삼각형(二等邊三角形)과 반대(反對)방향에 그려지는 그의 상대적(相對的)인 이등변(二等邊) 삼각형(三角形)(ABD)의 정점(頂點)(D)으로 표시(表示)된다.
그러므로 이 정점(頂點)(D)을 창조목적표시점(創造目的表示點)이라고 한다.
이 후자(後者)의 이등변(二等邊) 삼각형(三角形)(ABD)들의 정점(頂點)들(D D1 D2 D3) 즉 창조목적표시점(創造目的表示點)들은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의 중심점(中心點)(O)에서 선기준표시선(善基準表示線)(OC)과 정반대(正反對)의 방향으로 그어지는 수직선(垂直線)(OD) 상(上)에서 움직이게된다. 그러므로 이 수직선(OD)을 창조목적표시선(創造目的表示線)이라고 한다. 선기준표시선(善基準表示線)(OD)과 창조목적표시선(創造目的表示線)(OD)은 진리기준표시선상(眞理基準表示線上)(AB)의 같은 중심점(中心點)(O)에서 반대(反對)방향으로 이 선(AB)의 수직선(垂直線)으로 그어진 선(線)들이기 때문에 이 두 선(線)은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과 십자형(十字形)을 그리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운행(運行)하실 수 있는 터가 되려면 이와같이 주체(主體)와 대상(對象)과 작용체(作用體)와 창조목적(創造目的)이 입체적(立體的)인 십자형(十字形)의 유기적(有機的) 회로(廻路)의 관계(關係)를 맺어야 한다. 이 두 이등변(二等邊) 삼각형(三角形)()의 높이가 점점(漸漸) 적어져서 영(零)이 되면 그 두 정점(頂點)(CD)은 저변(底邊)(AB)의 중점(中點)(O)에서 합치(合致)된다. 이와같이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의 중심점(中心點)(O)은 선기준표시점(善基準表示點)(C)과 창조목적표시점(創造目的表示點)(D)이 합치(合致)되는 점(點)이므로 진리(眞理)의 중심(中心)은 선(善)의 중심(中心)이요 동시(同時)에 창조목적(創造目的)의 중심(中心)이다.
미(美)의 주체인 갑과 사랑의 대상인 을을 연결하는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상(上)에 사랑에도 미(美)에도 편중(偏重)하지 않는 점(點)은 이 선(線)(AB)의 중심점(中心點)(O)임으로 이 점(點)은 양심기준표시점(良心基準表示點)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의 같은 중심점(O)으로써 표시(表示)된 것으로 보아 진리(眞理)의 중심(中心)이 곧 선(善)의 중심(中心)이요 양심(良心)의 중심(中心)이요 동시(同時)에 창조목적(創造目的)의 중심(中心)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양심(良心)은 항상(恒常) 각자(各自)가 진리(眞理)라고 생각하는 그 진리(眞理)의 기준(基準)을 표시(表示)하는 선(線) 즉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상(上)의 양심기준표시점(良心基準表示點)(O)에서 그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상(上)에 그어지는 수직선(垂直線)(OC)을 지향(指向)하는 것이므로 이 양심(良心)이 지향(指向)하는 수직선(垂直線)을 양심기준표시선(良心基準表示線)이라고 한다. 올바른 진리(眞理)에 입각(立脚)하면 그 양심(良心)이 지향(指向)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선(善)을 결실(結實)하게되는 것임으로 양심기준표시선(良心基準表示線)(OC)은 선기준표시선(善基準表示線)(OC)과 동일(同一) 선상(線上)에서 합치(合致)되어 창조목적표시선(創造目的表示線)(OD)과 선기준표시선(善基準表示線)(OC)과는 자율적(自律的)으로 합치(合致)되었을 것인데 타락(墮落)으로 인(因)하여 인간은 올바른 진리(眞理)를 찾지 못함으로 창조본연의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과 각도를 달리한 시대성(時代性)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4B4)상(上)에 서게됨으로 따라서 그의 양심기준표시선(良心基準表示線)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상(上)에 선 양심기준표시선(良心基準表示線)(OC)과는 같은 점(點)이 아니고 분리(分離)된 점(點)(O1)에서 다른 각도(O1C4)로 지향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과 다른 선(線)(A4B4)상의 다른 점(O1)에서 다른 각도(角度)로 지향(指向)하는 이 시대성(時代性) 양심기준표시선(良心基準表示線)(O1C4)은 자연(自然)히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선기준표시선(善基準表示線)(OC)과 동일선상(同一線上)에서 합치(合致)되지 못함으로 그의 대상(對象)으로 찾아세우는 시대성(時代性) 창조목적(創造目的) 표시선(表示線)(O1D4)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진리기준표시선(眞理基準表示線)(AB)상(上)에 선 창조목적표시선(創造目的表示線)(OD)과는 전연(全然) 다른 선상(線上)에서 다른 각도(角度)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성(時代性) 양심기준표시점(良心基準表示點)(O1)의 위치(位置)와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양심기준표시점(良心基準表示點)(O)과의 위치(位置)의 다름과 그 각도(角度)(C3O5)의 차는 양심의 가책(苛責)과 고통(苦痛)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 고민(苦憫)과 고통(苦痛)은 그 두점(點)(O․O1)의 위치(位置)의 다름과 각도(角度)(C3OC5)의 차(差)에 정비례(正比例)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른 양심기준표시점(良心基準表示點)(O)을 찾기 위하여 기도(祈禱)에 의하여 이 길을 막고있는 물욕(物慾) 정욕(情慾) 등등의 모든 외적(外的)인 조건(條件)을 벗어버리고 무사(無邪)의 경지(境地)를 찾으려하는 것이다. 이와같이하여 모든 도인(道人)들은 이 점(O)을 찾아 양심기준표시선(良心基準表示線)(OC)을 따라나가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선기준표시선(善基準表示線)(OC)과 합치(合致)되는데 이르러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창조목적표시선(創造目的表示線)(OD)을 대상(對象)으로 세워 나가가려하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도자(修道者)들이 눈물로써 이 길을 찾아나온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원(願)하시는 새 에덴이 지상(地上)에 이루어지려면 누구에게나 공인(公認)될 수 있는 이 근본진리(根本眞理)가 나타나서 누구나 동일(同一)한 선기준표시선(善基準表示線)을 따라나아가 누구나 동일(同一)한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지향(指向)할 수 있어야한다.
타락인간(墮落人間)으로 하여금 이 양심기준표시점(良心基準表示點)(O)을 찾아 선기준표시선(OC)과 합치(合致)될 수 있는 양심기준표시선(良心基準表示線)(OC)을 따라나아가 창조목적표시선(創造目的表示線)(OD)을 대상(對象)으로 세우도록하는 사명(使命)을 하는 것이 의(義)(O)다.
그러므로 의(義)는 타락(墮落)으로 인(因)하여 인간에게 요구되는것이다.
이제 이 원리(原理)로써 진(眞)(A) 선(善)(C) 미(美)(B)의 창조원리(創造原理)적 관계를 생각하여보자. 진(眞)(A)은 미(美)(B)를 요구(要求)하고 미(美)(B)는 진(眞)(A)을 요구(要求)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眞)이 주체(主體)로 서서 미(美)를 대상(對象)으로 세워 원리적(原理的) 수수(授受)의 관계(關係)를 맺으면 그로 인(因)한 힘은 선(善)(C)을 결실(結實)하며 진미(眞美)로 결실(結實)한 선(善)은 반드시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대상(對象)으로 지향(指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創造)하시고 그에게 주신 축복(祝福)의 말씀도 바로 이러한 원리기대(原理基臺)를 조성(造成)하라는 말씀이었다.
아담(A2)은 주체(主體)로써 사랑의 표시체(表示體)요 해와(B2)는 그의 대상(對象)으로서 미(美)의 표시체(表示體)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가 완성(完成)되어 사랑과 미(美)를 완전(完全)히 잘주고 잘받으면 반드시 그 힘은 선(善)의 자녀(子女)(C2)를 번식(繁殖)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D2)을 달성(達成)했을 것이었다. 개인(個人)을 두고 보더라도 마음(A0)은 주체(主體)로서 사랑의 표시체(表示體)요 몸(B0)은 마음의 대상(對象)으로서 미(美)의 표시체(表示體)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이 완전(完全)히 주고 받는 입장(立場)에 서면 그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依)하여 생기는 힘은 반드시 미(C0)의 결과(結果)를 맺게되어 그 개체(個體)는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D0)을 달성(達成)하게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아담과 해와가 사랑과 미(美)에 의한 입체적(立體的) 십자형(十字形)의 유기체(有機體)를 이루었더라면 이 가정(家庭)이 다시 하나님 앞에 사랑과 대상(對象)으로 서서 미(美)를 돌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터가 되어 하나님이 영원(永遠)히 계실 수 있는 존재기대(存在基臺)가 되었을 것이었으니 이것을 사위기대(四位基臺)라고한다. 예수님과 성신(聖神)의 역사(役事)도 아담과 해와가 타락(墮落)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어야할 사명(使命)을 완수(完遂)하려는데 그 목적(目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A1)께서는 사랑의 주체(主體)로서 미(美)의 대상(對象)인 성신(聖神)(B1)과 완전(完全)히 미(美)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일어나는 힘은 신도(信徒)들을 중생(重生)(C1)케하여 중생(重生)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지향(指向)해온 것이다. 이와같이 갑과 을의 사이에 일어나는 완전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은 갑을의 중심점(中心點)에서 갑을에 수직각(垂直角)으로 그려지는 십자형(十字形)의 선상(線上)에 새로운 두 극(極)(병(丙), 정(丁))을 일으키어 이 두 극(極) 사이에는 새로운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게된다. 갑과 을 사이에 일어나는 수수작용(授受作用)의 힘과 이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다른 두 극(極)(병, 정) 사이에 일어나는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힘은 갑을의 중심(中心)(O)을 중심(中心)으로 하고 네 극(極)을 통(通)하는 평면적(平面的)인 원형운동(圓形運動)을 일으키어 이 평면적(平面的)인 원형운동(圓形運動)을 하는 힘은 다시 O을 중심(中心)하고 이 평면(平面)에 수직각(垂直角)으로 서서 입체형(立體形)을 그리는 다른 평면상(平面上)에 동일(同一)한 원형운동(圓形運動)을 일으키게된다. 갑을간(甲乙間)의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생기는 힘은 이와같이 O를 중심(中心)한 전자(電子)의 운동(運動)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두 존재(存在) 사이에 일어나는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힘은 반드시 입체적(立體的)으로 회전(廻轉)하는 구형운동(球形運動)을 일어키나니 이 운동(運動)은 양자(陽子)를 중심(中心)한 전자(電子)의 운동(運動)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두 존재(存在) 사이에 일어나는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힘은 반드시 입체적(立體的)인 운동(運動)을 일으키는 것이다. 음양(陰陽)의 두 극(極) 갑과 을 사이에 그려지는 자력선(磁力線)이 두 극(極)을 연결(連結)하는 직선(直線)이 아니고 원형(圓形)을 그리게 되는 것은 갑을 사이의 자력(磁力)은 갑을과 십자형(十字形)을 그리는 다른 선상(線上)에 다른 새로운 두 극(極)을 일으켜 그 두 극(極) 사이에 일어나는 다른 방향(方向)의 자력(磁力)의 영향(影響)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닮은 모든 피조물(被造物)의 사이에 일어나는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만유원력(萬有原力)은 모두 이렇듯 복잡(複雜)한 입체운동(立體運動)을 일으키게되어 창조(創造)의 조화(造化)의 미(美)는 나타나게되는 것이다. 사랑과 미(美)를 표시(表示)하는 두 극(極) 사이에서 생기는 만유원력(萬有原力)은 이와같이 미(美)와 사랑을 연(連)하는 선(線)의 중심 O를 중심하고 이 두 극(極)을 싸고 도는 구형운동(球形運動)을 하게되는 것임으로 미(美)에도 사랑을 내포하고 사랑에도 미(美)을 내포하게되는 것이다. 한 개성(個性)이 이성(異性)의 성품(性品)을 갖게되는 원인(原因)이 여기에 있다. 전기(電氣)에 관(關)한 모든 원리(原理)도 이러한 수수원리(授受原理)에 의하지 않으면 완전(完全)히 해명(解明)될 수 없을 것이다.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만유원력(萬有原力)에 관(關)한 연구(硏究)는 오늘까지의 과학세계(科學世界)를 보다 고차적(高次的)인 새 세계(世界)로 변모(變貌)시키게 될 것이다.
마치 완전(完全)한 양전(陽電)이 생기면 완전한 음전(陰電)이 자연(自然)히 생기는 것같이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의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생긴 작용체(作用體)가 또하나의 주체(主體)로 서서 창조목적(創造目的)을 대상목적(對象目的)으로 지향(指向)하여 창조원리(創造原理)를 완성(完成)한 하나의 유기체(有機體)로 서면 이 유기체(有機體)는 다시 그의 대상목적(對象目的)을 충당(充當)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유기체(有機體)를 대상(對象)으로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되어 번식(繁殖)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식(繁殖)도 완전(完全)한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만유원력(萬有原力)에 의하여 자동적(自動的)으로 생기는 것이다.
양심(良心)의 작용(作用)에 의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關係)를 생각하여 보자. 인간은 타락(墮落)되었을 망정 바른 것을 위하여 살아야한다는 양심(良心)의 작용(作用)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莫論)하고 누구에게든지 뚜렷이 있는 것임으로 아무리 악(惡)한 사람이라도 자식(子息)에게나 제자(弟子)에게 악(惡)하라고 가르치는 부모(父母)나 선생(先生)은 없을 것이며 아무리 악(惡)한 강도(强盜)라도 영화(映畵)의 스크린에 나타나는 강도(强盜)를 볼 때에 그를 미워하는 것이 본성(本性)이다. 그러면 이 양심(良心)의 뚜렷한 작용(作用)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양심자체(良心自體)가 독자적(獨自的)으로 그 작용(作用)의 힘을 일으킬 수 있다면 수수작용의 원리는 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良心)도 어떠한 주체(主體)에 대한 대상위치(對象位置)에 처(處)하여 그와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관계(授受關係)를 맺고있기 때문에 그 작용의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 양심작용(良心作用)의 주체(主體)가 곧 하나님이시다.
수수작용(授受作用)의 원리(原理)를 인정(認定)한다면 양심작용(良心作用)의 원인(原因)을 추궁(追窮)함으로써도 하나님의 실존(實存)을 인식(認識)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되었을망정 하나님의 대상위치(對象位置)를 취(取)하려는 양심(良心)의 터가 있기 때문에 이를 터삼아 복귀섭리(復歸攝理)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양심(良心)의 힘은 하나님과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程度)에 의하여 강약(强弱)의 차(差)가 생기는 것이다.
세포(細胞)의 분열(分裂)도 각 세포(細胞) 간(間)에 완전(完全)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이 성립(成立)될 때 일어나는 것이며 수수(授受)의 회로(廻路)가 막히게될 때는 병(病)이 발생(發生)하는 것이니 인체(人體)를 해(害)하는 균(菌)은 이 회로(廻路)를 막히게하는 작용(作用)을 하는 것이요 약(藥)이라는 것은 이 회로(廻路)를 다시 회복(恢復)하는 역할(役割)을 하는 것이다.
제4절 천주창조(天宙創造)의 목적(目的)                            44
하나님은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와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의 두 세계(世界)를 창조(創造)하시고 그의 주관자(主管者)로 인간을 창조(創造)하셨다(창 1/1~28). 인간을 중심한 이 두 세계(世界)를 천주(天宙)라고 한다. 이제 천주창조(天宙創造)의 목적(目的)을 둘로 갈라서 생각하기로 하자.
I 인간을 창조(創造)하신 목적(目的)
모든 기쁨은 마음대로 될 때에 생기는 것이다. 마음은 무형(無形)의 주체(主體)로서 그것만으로는 기쁨이 생기지 않는다. 이 무형(無形)의 주체가 실체(實體)로 이루어져서 그것이 무형(無形)의 주체(主體)에 대(對)한 실체(實體)의 대상(對象)으로 나타날 때 즉 무형(無形)의 주체(主體)가 실체(實體)의 대상(對象)을 대(對)하여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造成)하여 창조원리적(創造原理的) 입장(立場)을 취(取)할 때 무형(無形)의 주체(主體)를 실체(實體)의 대상(對象)으로 느껴볼 수 있음으로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보이지않는 자기(自己)의 얼굴이기 때문에 그에 대(對)한 아무 느낌도 가질 수없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이나 사진(寫眞)으로써 보이지 않는 자기(自己)의 얼굴을 실체(實體)로 보여지는 얼굴로 느껴볼 수 있을 대 비로소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藝術家)를 예(例)로 들어보면 그들도 보이지 않는 구상(構想)만으로는 완전(完全)한 기쁨을 느낄 수 없으나 그 구상(構想)이 그대로 화폭(畵幅)이나 조각(彫刻)이나 혹은 실연(實演)으로 나타나, 보이지않는 구상(構想)을 실제(實際)로 볼 수 있는 것으로 구현(具現)하여 그로 인하여 느낄 수 있을때 구상자(構想者)의 기쁨은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가지고있는 이와같은 성품(性品)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하나님은 자기(自己) 형상(形象)대로 인간을 창조(創造)하셨음으로 하나님에게 없는 성품(性品)이 인간에게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성(墮落性)을 제외(除外)한 인간의 모든 성품(性品)은 하나님의 성품(性品)에서 그를 닮아난 것이요 따라서 무형(無形)의 주체(主體)의 성상(性相)을 실체(實體)의 대상(對象)으로 인(因)하여 느껴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성품(性品)도 하나님의 성품(性品)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무형(無形)으로 계시는 자신(自身)의 성상(性相)에 대(對)한 기쁨은 타각적(他覺的)으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자신(自身)의 주체적(主體的) 성상(性相)은 실체(實體)의 대상(對象)으로 세우시고 느껴보시기 위하여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인간을 창조(創造)하신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자기(自己)의 형상(形象)대로 인간을 창조(創造)하시어 실체(實體)의 대상(對象)으로 세움으로써 주체(主體)로서의 자신의 모든 성품(性品)을 상대적(相對的)으로 느끼시고 따라서 사랑과 위로(慰勞)의 자극적(刺戟的)인 성품(性品)을 타각적(他覺的)으로 느끼시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전형상(全形象)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거울이 되어야할 것이었으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깨어진 거울과 같이되어 미(美)을 보려야 볼 길이 없고 사랑을 주려야 줄 대상(對象)이 되지 못하였음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創造)하신 것을 탄식(歎息)하신 것이다(창 6/6). 그러므로 인간이 이와같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달성(達成)한 인간이 되려면 주체(主體)로 계시는 하나님에 대(對)하여 마음이 잘주고 잘받을 수 있는 대상(對象)으로 서야 되며 마음이 주체(主體)로 설 때 이에 대(對)하여 몸이 잘주고 잘받을 수 있는 대상(對象)으로 서서 하나님을 중심(中心)하고 몸과 마음이 완전(完全)한 수수관계(授受關係)를 맺어 삼위(三位)가 일체적(一體的)인 불가분(不可分)의 입장(立場)을 취(取)하여 하나님 앞에 미(美)를 돌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서 완성되어야 한다.
인간의 의지력(意志力)은 마음을 주체(主體)로 하고 몸이 그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造成)할 때 일어나는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依)한 원력계수(原力係數)에 의하여 결정(決定)되는 것인데 마음의 주체(主體)가 하나님이 될 때는 선(善)의 힘을 발휘(發揮)하며 마음의 주체(主體)가 사탄이 될 때에는 악(惡)의 힘을 발휘(發揮)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범죄(犯罪)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대(對)할 수 있는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造成)치 못하였음으로 하나님에게 돌리는 미(美)가 끊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存在)가 되었으니 이것이 곧 타락(墮落)이다.
타락(墮落)된 인간(人間)의 신앙생활(信仰生活)의 목적(目的)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順應)할 수 있는 마음과 그 마음의 명령(命令)에 의하여 움직일 수 있는 몸을 세워 다시 미(美)를 하나님 앞에 돌림으로써 믿음과 소망(所望)을 거치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는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서의 원리적(原理的) 자아(自我)를 복귀(復歸)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돌리는 미(美)의 정도(程度)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자연(自然)히 돌아오는 것임으로 우리로하여금 미(美)를 나타내도록할 수 없다면 기도(祈禱)도 신앙생활(信仰生活)도 구원(救援)의 섭리(攝理)에는 아무 소용(所用)도 없을 것이다.
II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창조하신 목적(目的)              47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주체(主體)로 계시는 하나님의 상징적(象徵的)인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創造)된 것이 피조세계(被造世界)요 형상적(形象的)인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된 것이 인간이라함은 이미 논술(論述)한 바와같다.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다.
하나님은 장차(張次) 창조(創造)하실 인간을 표본(標本)으로 하여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창조(創造)하신 것이다. 영인체(靈人體)를 표본(標本)으로 전개(展開)하여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를 창조(創造)하셨고 육신(肉身)을 표본(標本)으로 전개하여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를 창조하셨음으로 인간(人間)은 이 두 세계(世界)의 중간(中間) 매개체(媒介體)요 따라서 화동(和動)의 중심(中心)이 되는 두 세계(世界)의 주관주(主管主)로서 영인체(靈人體)로는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를 육신(肉身)으로는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를 주관(主管)하도록 창조(創造)된 것이다. 인간을 지으시되 머리를 하늘로 두고 생활(生活)하는 유일(唯一)한 피조물(被造物)로 지으신 것은 체형(體形)으로도 이 두 세계(世界)의 주관자(主管者)임을 표시(表示)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인간은 전피조세계(全被造世界)의 축소형(縮少型)임으로 그 전체(全體)의 구조(構造)와 요소(要素)와 소성(素性)이 전부(全部) 구비(具備)되어 있다.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한 것은 지당(至當)한 표현(表現)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陸地)에 있는 하등동물(下等動物)에서부터 점차적(漸次的)으로 기능(機能)을 복잡(複雜)케하여 고등동물(高等動物)에 이르기까지 창조(創造)하시고 최고급(最高級)의 기능(機能)을 가진 동물(動物)로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생물계(生物界)가 진화(進化)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도 이와같이 하등동물(下等動物)에서부터 점차적(漸次的)인 창조과정(創造過程)을 통(通)하여 창조된 동물계(動物界)를 결과적(結果的)으로만 관찰(觀察)하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錯誤)인 것이다. 갑이라는 생물(生物)이 진화(進化)되어 을이라는 생물(生物)이 되었다고하면 을은 갑과 전연(全然) 별개(別個)의 생물(生物)이기 때문에 갑의 입장(立場)에서 보면 을은 갑을 재료(材料)로한 새로운 창조(創造)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의미(意味)에서 만일 진화론(進化論)을 시인(是認)한다면 진화(進化)는 곧 새로운 창조(創造)를 의미하는 것인데 만일 생물(生物)이 진화(進化)할 수 있다면 그 진화(進化)의 힘 즉 새로운 창조(創造)의 힘은 어디로부터 올 것인가 생물자체(生物自體)가 창조(創造)의 힘을 창조(創造)하면서 진화(進化)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절(節)에서 논(論)할 것이지만 영인체(靈人體)를 소유(所有)한 피조물(被造物)은 인간뿐이다. 원인류(猿人類)가 아무리 인간에 유사(類似)한 동물(動物)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영인체(靈人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점(點)에서 보더라도 인간은 원래(元來) 원인류(猿人類)와는 그 기원(起源)이 전연(全然) 다르다는 것을 짐작(斟酌)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은 최고급(最高級)의 동물(動物)로서 창조되었음으로 인간에게는 어떠한 동물의 구조(構造)와 요소(要素)와 소성(素性)도 모두 구비(具備)되어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이 어떠한 동물(動物)의 소리도 다 낼 수 있다는 것은 어떠한 동물(動物)의 발성기(發聲器)의 성능(性能)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인간의 나체(裸體)를 완전히 그릴 수 있는 화가(畵家)라면 그는 다른 어떠한 그림도 완전(完全)히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肉體)는 그 어떠한 피조물(被造物)의 형선(形線)의 미(美)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意味)하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動物)뿐만 아니라 식물(植物)의 형(形)도 전부(全部) 구비(具備)하였다. 인간은 생물(生物)의 최고급(最高級)의 기능(機能)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세포(細胞)도 그러함으로 동물(動物)은 물론(勿論) 식물(植物)의 세포(細胞)의 어떠한 구조(構造)와 성능(性能)도 다 구비(具備)하였다. 인간은 식물의 잎에 해당(該當)되는 폐(肺)를 갖고있다. 폐(肺)는 체형(體形)으로 보아도 나무 잎에 표피(表皮)를 씌운 것같이 되어있지만 기능적(機能的)으로 보아도 폐(肺)로서 무형(無形)의 영양소(營養素)인 산소(酸素)를 섭취(攝取)하는 것은 탄소(炭素)를 섭취(攝取)하는 잎의 역할(役割)과 같고 위(胃)는 식물(植物)의 뿌리와 같이 유형(有形)의 영양소(營養素)를 섭취(攝取)하며 심장(心臟)은 식물(植物)의 줄기와 같이 영양소(營養素)를 전신(全身)에 공급(供給)하여 생활기능(生活機能)을 유지(維持)하는 것이다. 또 인간에게는 식물(植物)의 식관(飾管)과 도관(導管)에 해당(該當)되는 동맥(動脈)과 정맥(靜脈)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식물뿐만 아니라 흙과 물과 공기(空氣)로 되어있음으로 모든 물질(物質)의 요소(要素)도 갖고 있는 것이다.
지구(地球)의 형태(形態)도 인체구조(人體構造)의 표시체(表示體)로 되어있다. 지구(地球)는 식물(植物)로 덮이운 지곡(地穀)이 있고 지층(地層)에 지하천(地下泉)이 있고 그 속에 암층(岩層)과 암층(岩層)으로 둘러싸인 용암층(溶岩層)이 있으니 이것은 바로 솜털이 있는 피부(皮膚)가 있고 근육(筋肉) 속에 혈관(血管)이 있고 근육(筋肉) 밑에 골격(骨格)과 골격(骨格)으로 둘러싸인 골수(骨髓)가 있는 인체(人體)와 같은 것이다.
그러면 이와같이 인간을 형상적(形象的)으로 전개(展開)한 대상(對象)으로서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창조(創造)하신 목적(目的)은 어디 있는가 하는 문제(問題)는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앎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은 무형(無形)의 주체(主體)의 성상(性相)을 그의 실체(實體) 대상(對象)에서 타각적(他覺的)으로 느껴볼 때에 생긴다는 것은 이미 논술(論述)한 바이다.
그러므로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창조(創造)하신 목적(目的)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체(自體)가 갖고 있으나 독자적(獨自的)으로는 느낄 수 없는 주체적(主體的) 성상(性相)에 대(對)한 모든 느낌을 그 성상(性相)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創造)된 모든 피조물(被造物)로 인(因)하여 타각적(他覺的)으로 느끼도록하여 모든 기쁨과 화평(和平)을 갖게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자연계(自然界)와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인간의 주체적(主體的) 성상(性相)에 대(對)한 실체(實體)로 나타난 거울과 같아서 그것으로 인한 자극(刺戟)이 없으면 자신(自身)의 성상(性相)에 대한 기쁨은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꽃 한송이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바로 독자적(獨自的)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꽃에 대(對)한 자체(自體)의 주체적(主體的) 성상(性相)을 그의 실체대상(實體對象)인 꽃에 의하여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산여수(名山麗水)를 찾아보며 기뻐하는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성상(性相)을 타각적(他覺的)으로 느껴보고 기뻐하는데서 지나지 않는다. 이와같이 자극적(刺戟的)인 대상(對象)으로 지어주신 피조세계(被造世界)이언만  인간은 타락성(墮落性)으로 인하여 그를 보아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만물(萬物)이 탄식(歎息)하는 원인(原因)(롬 8/20)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물(萬物)과 인간과의 관계(關係)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關係)와 같아서 인간은 만물(萬物)에게 사랑을 주고 만물은 인간에게 미(美)을 돌려야할 것인데 인간이 타락(墮落)되어 만물(萬物)에 주는 사랑이 끊어졌으므로 만상계(萬象界)로부터 오는 미(美)를 인간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만물(萬物)인들 어찌 탄식(歎息)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원리(原理)로 보더라도 하나의 개성체(個性體)로써 인간의 주체적(主體的) 성상(性相)에 대(對)한 완전(完全)한 실체(實體)의 대상(對象)으로 설 수 있는 존재(存在)는 인간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인간에서보다 더 완전(完全)한 기쁨의 대상(對象)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인간은 만물(萬物)보다 거짓됨(렘 17/9)으로 많은 수도자(修道者)들은 인간세계(人間世界)를 피(避)하여 산중(山中)으로 들어가 자연(自然)과 접(接)하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이 인간을 대(對)하여 무쌍(無雙)한 기쁨과 화평(和平)을 느낄 수 있는 세계가 와야할 것이니 이 세계가 바로 인간 조상(祖上)이 타락(墮落)되지 않고 이루어 나왔을 것이었던 것과같은 창조이상(創造理想)이 이루어진 세계(世界)요 동시(同時)에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찾아세워야할 세계(世界)다.
제5절 인간을 중심한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와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   53
하나님은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를 창조(創造)하시고 그의 실체(實體)의 대상(對象)으로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를 창조(創造)하시었다.
무형(無形)이라하는 것은 우리의 오관(五官)에 의한 생리적(生理的) 기능(機能)으로는 감각(感覺)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靈的) 체험(體驗)에 의하면 이 무형세계(無形世界)도 유형세계(有形世界)와 꼭 같이 감각(感覺)할 수 있는 실제적(實際的)이요 또한 실감적(實感的)인 실존세계(實存世界)이기 때문에 이 세계를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계(世界)는 육신(肉身)을 벗고간 영인(靈人)들이 생활(生活)하는 세계(世界)임으로 영인세계(靈人世界)라고도 한다.
하나님과 인간,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와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의 관계(關係)는 마음과 몸의 관계(關係)로써 이해(理解)될 수 있다. 실체(實體)로 되어있는 우리의 몸은 무형(無形)으로 존재(存在)하는 우리의 마음(좀더 구체적(具體的)으로 말하면 영인체(靈人體))의 실체대상(實體對象)이다. 그러므로 몸으로 나타나는 체형(體型) 골격(骨格) 태도(態度) 용자(容姿) 등등은 모두 그 마음의 표시(表示)인 것이다.
혈액(血液)의 형(型)으로서도 그 개성(個性)의 대개(大槪)를 판단(判斷)할 수 있음은 그 혈액(血液)은 그의 마음을 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방향(方向)으로 과학(科學)이 더 발달(發達)된다면 혈액(血液)만 가지고도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세포(細胞)의 하나도 그 개성(個性)에 따라서 특유(特有)하다는 것을 입증(立證)할 때가 올 것이다.
사람마다 용모(容貌)가 다른 것은 마음이 각각(各各) 다른 까닭이요 자녀(子女)가 부모(父母)를 닮는 것은 그 마음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에 있어서 정신(精神)에 이상(異常)이 있으면 그는 벌써 인격(人格)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무위(無爲)한 존재(存在)이나 육신(肉身)에는 아무리 이상(異常)이 있더라도 정신(精神)만 완전(完全)하면 이는 인격(人格)을 갖춘 완전(完全)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있어서 몸이 주체(主體)가 아니요 마음이 주체(主體)요 몸은 그의 실체(實體)의 대상(對象)이다.
이와같이 몸이 마음을 닮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닮았음으로 몸과 마음이 완전(完全)한 수수관계(授受關係)를 맺어야할 것처럼 사람과 하나님은 완전(完全)한 수수관계(授受關係)를 맺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갈라졌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分離)된 것이다. 마음이 원(願)하는데로 몸이 행(行)치 못할 때 마음이 설어하며 행(行)할 때는 기뻐하는 것같이 하나님도 자신(自身)이 원(願)하시는대로 인간이 살지 못할 때에는 설어하시고 뜻대로 살아드릴 때는 기뻐하신다.
구원(救援)의 목적(目的)은 갈라진 몸과 마음의 수수관계(授受關係)를 복귀(復歸)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수관계(授受關係)까지 복귀(復歸)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關係)는 마음과 몸과의 관계(關係)와 같아서 몸과 마음이 일체(一體)를 이루어야하는 것같이 하나님과 인간도 일체(一體)를 이루어야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락(墮落)되지 않고 완성(完成)되어 하나님과 인간과 일체(一體)를 이루었더라면 인간은 하나님이 거(居)하실 수 있는 성전(聖殿)이 되어(고전 3/6) 인간도 예수님과 같이 신성(神性)을 갖게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무너져 하나님이 거(居)하실 수 없는 집이 되어 신성(神性)을 잃어버렸음으로 인간은 잃어버렸던 이 신성(神性)을 다시 복귀(復歸)하려는 것이다.
무형세계(無形世界)와 유형세계(有形世界)도 마음과 몸과 같아서 유형세계(有形世界)는 주체(主體)인 무형세계(無形世界)를 닮아서 창조(創造)된 실체대상(實體對象)의 세계(世界)다. 그러므로 유형세계(有形世界)의 것은 모두 무형세계(無形世界)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무형세계(無形世界)에 없는 것이 유형세계(有形世界)에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마음과 몸이 그러하듯이 유형세계(有形世界)의 모든 사실(事實)은 무형세계(無形世界)와 관련성(關聯性)을 갖고 나타나기 때문에 지상(地上)에 얽히어진 모든 것은 반드시 무형세계(無形世界)와 자유(自由)로 통(通)할 수 있는 때가 와야만 풀려질 수 있는 것이다.
유형세계(有形世界)는 무형세계(無形世界)나 하나님에 대(對)한 감성(感性)을 느끼지 못한다. 만물(萬物)의 영장(靈長)된 인간도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무형세계(無形世界)와 하나님의 실존(實存)을 인식(認識)치 못하도록 되었던 것이어든 하물며 만물(萬物)이랴.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체세계(實體世界)와 감성(感性)을 느낄 수 있는 실체(實體)의 인간을 창조(創造)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육신(肉身)을 만물(萬物)의 요소(要素)인 흙과 물과 공기(空氣)로써 창조하시어 같은 요소(要素)로 되어 감성(感性)을 느낄 수 있는 유형세계(有形世界)를 주관(主管)하도록 하셨고 무형세계(無形世界)와 같은 요소(要素)로 된 영인체(靈人體)를 인간에게 부여(賦與)하시어서 영인체(靈人體)로 하여금 그와 감성(感性)을 느낄 수 있는 무형세계(無形世界)를 주관(主管)하도록 창조(創造)하시었다.
그러므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은 전피조세계(全被造世界)의 주관자(主管者)로서 육신(肉身)이 있음으로 유형세계(有形世界)와 수수(授受)의 관계(關係)를 맺어 그와 화동(和動)할 수 있으며 영인체(靈人體)가 있음으로 무형세계(無形世界)와 수수(授受)의 관계(關係)를 맺어 그와 화동(和動)하여 이 두 세계(世界)의 화동(和動)의 중심(中心)이 되는 동시(同時)에 이 두 세계(世界)로 하여금 서로 수수(授受)의 회로(廻路)를 조성(造成)케함으로써 일체적(一體的) 불가분(不可分)의 관계(關係)를 맺게하여 서로 화동(和動)케하여주는 매개체(媒介體)로서 인간을 창조(創造)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육신(肉身)이 영인체(靈人體)에 대(對)한 감성(感性)을 느낄 수 없는 존재(存在)가 되었으므로 육신(肉身)과 영인체(靈人體)는 분리상태(分離狀態)에 머물게되어 피조세계(被造世界)와 화동(和動)의 중심(中心)으로 서지 못하게되니 유형세계(有形世界)도 따라서 무형세계(無形世界)와의 수수(授受)의 회로(廻路)를 조성(造成)치 못하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萬物)도 탄식(歎息)하여 이 두 세계(世界)의 화동(和動)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復歸)한 인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苦待)하는 이유(理由)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롬 8/20~22). 인간은 이와같이 두 세계(世界)를 주관(主管)할 수 있는 중심체(中心體)임으로 무형세계(無形世界)에 관(關)한 모든 것은 영인체(靈人體)를 통(通)하여 육신(肉身)에 공명(共鳴)되어 이것이 생리적(生理的) 현상(現象)으로 나타나 육신(肉身)의 오관(五官)으로 감지(感知)할 수 있도록 창조(創造)된 것이었다. 그런고로  인간은 기능적(機能的)으로 보아 라디오나 텔레비전과 같아서 무형세계의 모든 사실을 그대로 듣고 보고 알도록 창조(創造)된 것이었다.
오늘의 많은 신도(信徒)들은 자기(自己)가 아지 못하는 타국(他國)방언(方言)을 유창(流暢)히 하며 자기(自己)가 습득(習得)치 못한 타국(他國)문자(文字)를 쓰며 자기(自己)가 아지못하는 노래를 아름답게 부를 뿐만 아니라 영계(靈界)에서 주는 가사(歌詞)와 가곡(歌曲)을 발표(發表)하며 아름다운 시(詩)를 읊으며 예언(豫言)을 하며 예수님과 그를 둘러싼 12제자(弟子)는 물론(勿論)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영인(靈人)들과도 회견(會見)하며 영계(靈界)의 광경(光景)을 보는 등등의 영적(靈的) 현상(現象)이 일어나는 것은 하등(何等) 이상(異常)한 것이 아니라 창조원리(創造原理)로 보아 당연(當然)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인간사이에도 서로 정(情)을 통(通)할 수 있도록 창조(創造)하셨거든 어찌 자기(自己)의 성전(聖殿)으로 창조(創造)하신 인간과 통(通)할 수 없으며 자기(自己)를 창조(創造)하신 아버지를 모르고 살도록 인간을 창조(創造)하셨을 것인가!
사실(事實) 에덴동산의 타락(墮落)전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과 서로 일문일답(一問一答)하던 것이었으므로 그가 타락(墮落)되지 않고 완성(完成)되었더라면 그의 후손(後孫)된 오늘의 우리들도 그들과 같이 하나님과 직접(直接) 통(通)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고장(故障)난 수신기(受信機)와 같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信仰生活)이라는 것은 고장(故障)난 이 수신기(受信機)를 수선(修繕)하는 것과 같음으로 그 수선(修繕)의 정도(程度)에 따라 무형세계(無形世界)와 통(通)하게 되는 것은 의당(宜當)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世界)로 복귀(復歸)되는 시대(時代)를 당(當)하여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復歸)되어 가는 인간들이 나옴에 따라 영계(靈界)에 통(通)하는 신도(信徒)들이 많아질 것은 이미 성서(聖書)가 예언(豫言)한 것이니 「말세(末世)에는  내가 내 영(靈)을 많이 부어줄 것이니 너희는 장래(將來)일을 말할 것이요 젊은이들은 환상(幻像)을 볼 것이요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행 2/17)고 기록(記錄)된바와 같다.
영적(靈的)인 체험(體驗)이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경시(輕視)하여 비소(鼻笑)하지만 이것은 창조(創造)의 원리(原理)와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目的)을 이해(理解)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과오(過誤)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끝날의 한때를 위하여 역군(役軍)으로 왔다 갔던 옛날의 선지(先知)들도 하나님과 통(通)하였거든 그들이 닦아놓은 6천년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결실(結實)로 나타나 다시 오실 주(主)님을 신랑(新郞)으로 모시어 천국생활(天國生活)로 들어가야할 오늘의 성도(聖徒)들이 신랑(新郞)과 상통(相通)하며 그가 계시는 그 세계(世界)의 사실(事實)을 보고 듣고하는 것은 지당(至當)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벌써 이러한 실증적(實證的)인 체험(體驗)을 하고있는 사람의 수(數)가 놀랄 정도(程度)로 많으며 또 나날이 급속도(急速度)로 증가(增加)되고 있는 사실(事實)을 어찌 부인(否認)하랴 성서(聖書)가 이미 선지(先知)들을 통(通)한 계시(啓示)의 말씀인 것을 인정(認定)하는 기독신도(基督信徒)들이 오늘에도 그때와 다름없이 일어나는 이러한 실증적(實證的)인 영적(靈的) 사실(事實)을 부인(否認)하는 것은 현명(賢明)한 행위(行爲)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지상(地上)의 모든 인류(人類)는 어서 바삐 하나님과 직접(直接) 영통(靈通)하여 하나님의 한 명령(命令)에 의(依)하여 동(動)하고 정(靜)할 수 있는 때가 와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제6절 영인체(靈人體)와 육신(肉身)과의 상대적(相對的) 관계
영인체(靈人體)는 각(各) 인간에게 육신(肉身)의 주체(主體)로서 창조(創造)된 무형실체(無形實體)임으로 육감(肉感)으로는 감각(感覺)할 수 없으나 영감(靈感)으로 실감(實感)할 수 있는 실존체(實存體)인 것이다.
영안(靈眼)으로 볼 수 있는 영인체(靈人體)의 모습은 육신(肉身)의 모습과 같으며 영적(靈的)인 귀로 들을 수 있는 영인체(靈人體)의 음성(音聲)도 육신(肉身)의 음성(音聲)과 같으며 또 그 촉감(觸感)도 동일(同一)하다.
영인체(靈人體)는 영원존재성(永遠存在性)을 두고 창조(創造)하셨음으로 무형세계(無形世界)에 영원(永遠)히 거주(居住)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계(靈界)를 통(通)하게 되면 예수님을 중심한 12제자(弟子)들은 물론이거니와 구약시대(舊約時代)의 모든 영인(靈人)들과도 지상인(地上人)들과 꼭같이 대(對)할 수 있는 것이다. 변화산상(變化山上)에서 예수님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의 별세(別世)에 관(關)한 것을 의논(議論)한 것도(눅 9/30~31) 그들의 영인체(靈人體)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면 영인체(靈人體)와 육신(肉身)과는 어떠한 원리적(原理的) 관계(關係)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육신(肉身)은 영인체(靈人體)가 성장(成長)할 수 있는 한 기간(期間)의 터로서 요구(要求)되는 것이다. 영인체(靈人體)도 육신(肉身)을 터로하여 생심(生心)을 중심(中心)하고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한 질서적(秩序的) 3기간(期間)을 거치며 성장(成長)하여 완성(完成)되는 것인데 소생기(蘇生期)의 영인체(靈人體)를 영형체(靈形體)라하고 장성기(長成期)의 영인체(靈人體)를 생명체(生命體)라하고 완성기(完成期)의 영인체(靈人體)를 생령체(生靈體)라고 한다. 마치 과실(果實)이 완숙(完熟)하면 과목(果木)에서 따서 창고(倉庫)에 저장(貯藏)하는 것과 같이 아담과 해와도 지상(地上)에서 타락(墮落)되지 않고 완성(完成)되어 지상(地上)에 천국(天國)을 이루었더라면(전편 제3장 참조) 그들의 영인체(靈人體)들도 완성(完成)되어 육신(肉身)을 벗고 무형세계(無形世界)의 천국(天國)에 들어갈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치 과목(果木)에서 완숙(完熟)한 과실(果實)을 따야 창고(倉庫)에 완숙(完熟)한 과실(果實)이 있을 것과같이 먼저 지상(地上)에서 천국(天國)이 이루어져서 지상(地上)에 완성(完成)한 인간이 생겨나야 그 인간이 완성(完成)된 생령체(生靈體)로서 무형세계(無形世界)의 천국(天國)에 들어갈 것이었는데 아담과 해와가 타락(墮落)된 후(後) 지상(地上)에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서 완성(完成)되어 생령체(生靈體)를 이룬 사람이 하도 없음으로 생령체(生靈體)가 거(居)하도록 창조(創造)하신 천국(天國)에 들어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과목(果木)에서 선 과실(果實)을 땄는데 창고(倉庫)에 어찌 익은 과실(果實)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者)는 복(福)이 있나니 천국(天國)은 저희 것이라고 하셨으니 그 천국(天國)은 무엇을 의미(意味)하는가.
예수께서 지상(地上)에 오신 목적(目的)은 구주(救主)로 오셔서 「하늘 아버지 완전(完全)하심같이 너희들도 완전(完全)하라」(마 5/48)고 친(親)히 말씀하신 그 말씀을 이루어시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民族)들이 예수님을 살해(殺害)하지않고 이 말씀이 이루어졌더라면 우리들은 모두 아담과 해와가 타락(墮落)되지 않았던 때와 같은 죄(罪)없는 인간(人間)들이 되어 우리들은 하나님이 완전(完全)하심같이 완전(完全)한 자녀(子女)들이 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었을 것이었는데 예수님을 살해(殺害)함으로 인하여 이 말씀은 다 이루어지지 않은채 다시 오셔서 이루시겠다는 약속(約束)을 남기고 가셔서 낙원(樂園)을 건설(建設)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상(十字架上)에서 회개(悔改)하는 강도(强盜)에게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신 것이다.(전편 제2장 참조)
그러면 낙원(樂園)은 무엇인가하면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建設)하여 지상(地上)에서 생령체(生靈體)를 이루어 완성(完成)한 영인(靈人)들이 천국문(天國門)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지상(地上)에서 예수를 믿고간 영인(靈人)들이 대기(待期)하는 곳이다.
이와같이 천국(天國)에는 들어간 사람이 없으며 뜻하지않은 낙원(樂園)이 건설(建設)되었고 원(願)치않는 지옥(地獄)이 생겨 하늘에 맺히운 사실(事實)이 벌어지게된 것은 지상(地上)에서 인간이 타락(墮落)되어 지상(地上)에서 맺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맺히운 이 사실(事實)을 풀기 위하여 지상(地上)에 오셨던 것이었으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祈禱)하라고 분부(吩咐)하시면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6/19). 이것은 천국의 자물쇠 도 역시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는 까닭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곳은 하늘이 아니고 땅이다. 예수께서는 땅에서 풀릴 것이 풀리지 않은대로 떠나셔야할 운명(運命)이었음으로 승천(昇天)하시는 그를 보면서 두 천사(天使)가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행 1/11)고 책망하면서 다시 오셔야 마저 이루실 유업(遺業)을 지상(地上)에 남기고 떠나시는 예수님의 설은 심정(心情)을 대신(代身) 토로(吐露)하여 너희들이 염려(念慮)할 곳은 하늘이 아니고 땅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强調)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상(地上)의 성도(聖徒)들에게 이렇게 큰 과업(課業)이 남아있다는 원리(原理)를 몰랐기 때문에 지상(地上)의 일은 등한(等閑)히 생각하고 사후(死後)의 세계(世界)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지상(地上)에 하늘나라를 이루어야할 것이다. 이 나라만 지상(地上)에 이루어지면 저 나라의 천국(天國)은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靈人體(主體)와 肉身(對象)의 관계를 논(論)하여 보자! 육신(肉身)은 다시 肉心(主體)과 肉體(對象)의 2성(二性)으로 분립(分立)된다. 육심(肉心)은 육신(肉身)으로 하여금 원리적(原理的) 생존(生存)을 유지(維持)할 수 있는 방향(方向)으로 이끌어주는 분담사명(分擔使命)을 한다. 즉 생존(生存)과 번식(繁殖)과 보호(保護)의 지각(知覺)은 이 육심(肉心)의 분담사명(分擔使命)으로서 동물(動物)의 본능성(本能性)은 육심(肉心)의 작용부분(作用部分)이다.
이 육신(肉身)이 원만(圓滿)히 성장(成長)하려면 양성(陽性)인 영양소(營養素)로서 무형(無形)의 공기(空氣)와 광선(光線)을 받고 음성(陰性)의 영양소(營養素)로서는 만물(萬物)로부터 오는 유형(有形)의 영양소(營養素)를 섭취(攝取)하여 혈액(血液)을 중심(中心)하고 완전(完全)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여야한다. 영인체(靈人體)도 生心(主體)과 靈體(對象)의 2성(二性)으로 분립(分立)되며 생심(生心)이라는 하나님이 분재(分在)하실 수 있는 영소(靈素)의 부분(部分)이 성장(成長)하여 형성(形成)되는 것이다.
영인체(靈人體)도 원만(圓滿)한 성장(成長)을 하려면 육신(肉身)과 같이 2성(二性)의 요소(要素)를 받아야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生素(陽性)와 육신(肉身)으로부터 오는 생력요소(生力要素)를 받아 육신(肉身)에서의 혈액(血液)의 작용(作用)과 같은 생심요소(生心要素)의 작용(作用)에 의하여 완전(完全)히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여야된다. 육신(肉身)으로부터 영인체(靈人體)에 좋은 생력요소(生力要素)를 돌려야 영인체(靈人體)는 좋은 생령요소(生靈要素)를 육신(肉身)에 돌려주어 영인체(靈人體)와 육신(肉身)과는 완전(完全)한 수수(授受)의 관계(關係)를 맺게되는 것이다.
생심(生心)의 요구(要求)대로 육심(肉心)이 호응(呼應)하여 생심(生心)이 지향(指向)하는 목적(目的)을 따라서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완전(完全)한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造成)하여 완전(完全)히 수수작용(授受作用)을 계속(繼續)하는데서만 영인체(靈人體)는 육신(肉身)으로부터 좋은 생력요소(生力要素)를 받아 미(美)와 자유(自由)의 형체(形體)를 조성(造成)할 수 있다.
만일 이에 반(反)하여 영인체(靈人體)가 타락성(墮落性)의 지배(支配)를 받고있는 육신(肉身)이 요구(要求)하는 목적(目的)을 지향(指向)하게 되면 그 생심(生心)이 육신(肉身)에게 구애(拘碍)되어 그의 자유성장(自由成長)을 장애(障碍)하게됨으로 흠이 많은 영인체(靈人體)를 조성(造成)케 된다. 우리는 악(惡)의 자극(刺戟)을 받아 개전(改悛)의 생활(生活)을 함으로써 선(善)을 성장(成長)케할 수 있는 요소(要素)를 육신(肉身)으로부터 받을 수 있음으로 지상생활(地上生活)에서 생심(生心)이 지향(指向)하는데로 생애(生涯)를 영위(營爲)하여야 된다. 이와같이 죄(罪)를 지상(地上)의 육신생활(肉身生活)에서 충분(充分)히 청산(淸算)치 않으면 영인체(靈人體)의 원만(圓滿)한 성장(成長)을 기(期)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양심(良心)은 구태어 그 부위(部位)를 말하자면 육심(肉心)의 최고부(最高部)요 생심의 최저부(最低部)에 속(屬)한다. 그러므로 양심(良心)은 육심(肉心)으로부터 오는 영향(影響)과 생심(生心)에서의 영향(影響)을 동시(同時)에 반영(反影)케된다. 양심(良心)이 항상(恒常) 바르게 나가려면 영인체(靈人體)의 육신(肉身)과는 항상(恒常)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造成)하여 원만(圓滿)한 수수(授受)의 관계(關係)를 유지(維持)하는 입장(立場)에 서게되어야 한다.
만일 생심(生心)이 지향(指向)하는 목적(目的)과 배치(背馳)되는 방향(方向)으로 육신(肉身)이 나아가면 양심(良心)은 평형선상(平衡線上)에 서지 못하고 왜곡(歪曲)하게 되는 것이다.
영인체(靈人體)와 육신(肉身)과는 이와같은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으로써 완전(完全)한 수수관계(授受關係)를 가지고 있는 불가분(不可分)의 일체(一體)다. 그런데 무형세계(無形世界)의 모든 사실(事實)은 영인체(靈人體)가 느낄 수 있으며 영인체(靈人體)에 느껴지는 모든 사실(事實)은 육신(肉身)에 공명(共鳴)되어 생리적(生理的) 현상(現象)으로 나타남으로 우리는 그 모든 영적(靈的) 사실(事實)들을 육신(肉身)의 오관(五官)으로 알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영인체(靈人體)와 육신(肉身)과는 수수(授受)의 관계(關係)가 두절(杜絶)되어 서로 공명(共鳴)되지 못하게 되었음으로 인간은 영계(靈界)의 사실(事實)을 알 수 없는 입장(立場)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救援)의 목적(目的)은 이와같이 영인체(靈人體)와 육신(肉身) 사이에 두절(杜絶)될 수수관계(授受關係)를 다시 맺게하여 영(靈)과 육(肉)을 아울러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위치(位置)에서 다시 복귀(復歸)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救援)의 섭리(攝理)에 의하여 영인체(靈人體)와 육신(肉身)이 점차(漸次)로 수수(授受)의 관계(關係)를 맺게됨에 따라서 인간이 무형세계(無形世界)의 사실(事實)을 알게되는 것은 당연(當然)한 것이다.
제7절 사랑과 그 목적                         64
전리(電離)된 분자(分子)의 음양(陰陽) 두 이온이 각각(各各) 陽子(陽性)와 電子(陰性)로 구성(構成)되어 있는 것과 같이 남성(男性)에도 여성성상(女性性相)이 잠재(潛在)하고 여성(女性)에도 남성성상(男性性相)이 잠재(潛在)한다. 생리학적(生理學的)으로도 한 개성체내(個性體內)에서 이성(異性)의 호르몬이 분비(分泌)된다는 사실(事實)이 증명(證明)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 무형(無形)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2성(二性)으로 분립(分立)된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서 1남 1녀를 창조하셨다. 이렇게 분립(分立)된 2성(二性)의 대상실체(對象實體)가 다시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려는 힘을 사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랑의 목적(目的)은 이 두 분립(分立)된 양성(兩性)이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함으로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造成)하여 하나님의 무형(無形)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닮은 실체(實體)의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 된 대상존재(對象存在)가 되어 하나님과 완전(完全)한 수수(授受)의 원리적 관계(原理的關係)를 맺어 일체이상(一體理想)을 이루려는데 있다.
그러므로 부부일신(夫婦一身)이라고 하였다(창 2/24). 형제애(兄弟愛)는 형제(兄弟)가 하나되고자 하는 힘이요 동포애(同胞愛)는 동포(同胞)가 하나되고자하는 힘이니 이 사랑의 목적(目的)도 서로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造成)함으로 하나님이 운행(運行)하실 수 있는 기대(基臺)를 유지(維持)하려는데 있다.
부부(夫婦) 일신(一身)을 이루어 하나님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서게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남녀(男女)가 창조(創造)된 것같이 인간에게도 자녀번식(子女繁殖)을 보게된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녀(子女)를 번식(繁殖)케하려는 목적(目的)은 마치 우리가 자녀(子女)를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부모(父母)의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인간도 자녀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기뻐하시며 사랑하시던 그 하나님의 심정(心情)에 대(對)한 실감(實感)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父母)의 사랑과 부부(夫婦)의 사랑과 자녀(子女)의 사랑을 총합(總合)한 주체(主體)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가지 창조본성(創造本性)의 사랑을 분성적(分性的)으로 체험(體驗)함으로써 하나님의 완전(完全)한 사랑을 체휼(體恤)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육신생활(肉身生活)에서 이 세 사랑을 체휼(體恤)하지 못한 사람은 영인세계(靈人世界)에 있어서도 완전(完全)한 하나님의 이상(理想)사랑을 체휼(體恤)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墮落)된 후(後) 지상(地上)에서  이 세 가지 본성(本性)의 사랑을 체휼(體恤)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완전(完全)한 사랑을 받아 천국(天國)에 들어갈 수 있는 영인체(靈人體)는 하나도 없고 예수님 이후(以後) 지금까지의 모든 성도(聖徒)들은 천국(天國)을 바라보는 낙원(樂園)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이 세 사랑을 가장 귀(貴)한 것으로 창조(創造)하신 것인데 인간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이것은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價値)를 완전(完全)히 상실(喪失)한 사탄적(的) 사랑이 되어 도리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아버리는 사랑이 되었음으로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자기(自己)를 더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祝福)의 말씀대로 (창 1/28) 만일 아담과 해와가 타락(墮落)되지 않고 완성(完成)되어 하나님이 허락(許諾)하시는 부부(夫婦)를 이루어 타락성(墮落性)의 혈통(血統)을 받지 않은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자녀(子女)를 번식(繁殖)하였더라면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이 세 사랑을 완전(完全)히 체휼(體恤)할 수 있는 가정(家庭)을 완전(完全)히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永遠)히 받을 수 있는 터가 될 것이었다.
인간의 타락(墮落)은 이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사랑의 터를 지상(地上)에 이루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目的)은 결국(結局) 이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사랑을 체휼(體恤)할 수 있는 기대(基臺)를 지상(地上)에 조성(造成)하려는데 있는 것이니 (1) 하나님을 중심(中心)하고  (2) 아담과 (3) 해와가 완성(完成)되어 (4) 자녀를 번식(繁殖)하면 이것이 곧 그 세 사랑을 체험(體驗)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體恤)할 수 있는 사위기대(四位基臺)다. 기독교(基督敎)의 중심(中心)이 사랑에 있는 것도 이와같이 잃어버린 사랑을 복귀(復歸)하기 위함이다.
제2장 메시아의 강림(降臨)과 그 재림(再臨)의 목적(目的)                67
피조물이 완성되기 위하여는 반드시 성장기간(成長期間)을 통과(通過)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은 이미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밝히었다.
인간도 피조물(被造物)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인간도 피조물(被造物)을 창조(創造)하기 위하여 세우신 창조원리(創造原理)를 떠나서 창조(創造)되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나 논리(論理)로써 인간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짐과 동시각(同時刻)에 완성(完成)된 피조물(被造物)로서 창조(創造)된 것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被造物)과 같이 성장기간(成長期間)를 통하여 자라서 완성(完成)되도록 창조(創造)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완성된 후에 타락(墮落)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바라보고 성장(成長)해가는 기간(期間)에서 타락(墮落)된 것이다. 만일 인간이 완성된 후에 타락되었다면 우리는 결국(結局)하나님의 전능성(全能性)을 부인(否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이 지으시어 완성(完成)된 피조물에 타락(墮落)이나 파멸(破滅)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과목(果木)에 맺힌 열매는 완숙(完熟)할 수 있는 요소(要素)를 모두 갖고 있음으로 어느 기간(期間)만 지나면 먹을 수 있게되는 것같이 인간도 완성(完成)될 수 있는 모든 요소(要素)를 전부(全部) 구비(具備)하여 창조(創造)되었음으로 어느 기간(期間)만 경과(經過)했으면 완전(完全)한 미(美)를 갖춘 인간으로 완성(完成)되어 하나님의 완전(完全)한 사랑을 영원(永遠)히 받을 수 있는 실체(實體)의 대상(對象)이 되었을 것이었다.
이와같이 인간이 완성(完成)되어 하나님과 완전(完全)히 미(美)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存在)가 되었으면 이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者)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망(死亡)이나 생명(生命)이나 천사(天使)나 권세(權勢)잡은 자(者)나 지금 일이나 장래(將來) 일이나 능력(能力)이나 높은 곳이나 깊은 곳이나 창조(創造)함을 받은 다른 어떠한 것이라도 내 주(主)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들을 능(能)히 끊지 못하리라」롬 8/38~39)고 하신 것이다.
아담과 해와는 이와같이 미완성기(未完成期)에서 타락(墮落)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對象)인 미(美)를 완전(完全)히 상실(喪失)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끊어진 입장(立場)에 떨어졌음으로  타락(墮落)된 인간의 유일(唯一)한 희망(希望)은 타락전(墮落前) 아담과 해와의 입장(立場)을 다시 찾아 완성기준(完成基準)까지 성장(成長)하여 창조본연(創造本然)의 미(美)를 다시 회복(恢復)함으로 하나님의 영원(永遠)한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완전(完全)한 실체대상(實體對象)이 되려는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目的)은 이와같이 타락인간(墮落人間)으로하여금 상실(喪失)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본성(本性)을 복귀(復歸)하도록 하려는데 있음으로 이 섭리(攝理)를 복귀섭리(復歸攝理)라고 하는 것이다.
「하늘아버지의 완전(完全)함과 같이 너희들도 완전하라」(마 5/48)고 친(親)히 말씀하셨으니 예수께서도 구원(救援)의 표준(標準)을 이 완성기준(完成基準)에 두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完全)하심으로 완전(完全)하신 하나님의 실체대상(實體對象)이 되려면 타락(墮落)으로 인(因)한 모든 요소(要素)를 완전(完全)히 벗어버리고 완전(完全)한 미(美)를 갖추어 완전(完全)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存在)가 되지않으면 아니되겠음으로 예수님도 이와같이 교훈(敎訓)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믿음과 소망(所望)을 거치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찾으려는데 있다고하는 것은 이미 성서(聖書)에 기록(記錄)된 바와같다(고전 13/13)
병(病)을 고쳤다는 것은 발병전(發病前)의 원상(原狀)을 회복(恢復)였음으로 의미(意味)하는 것이며 물에 빠진 사람을 건졌다는 것은 빠지기 전(前) 입장(立場)으로 다시 돌아오게하였다는 의미(意味)이며 따라서 인간을 구원(救援)하였다는 것도 죄(罪)없는 입장(立場)에서 죄(罪)있는 입장(立場)에 떨어졌으니 이 인간을 죄(罪)없는 입장(立場)으로 복귀(復歸)하도록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아담과 해와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않은 세계를 이스라엘나라를 중심(中心)하고 복귀(復歸)하기 위하여 후(後)아담으로 (고전 15/45) 오신 분이었음으로 사도(使徒)들은 「이스라엘나라를 회복(恢復)하심이 이때오니까」(행 1/6)하고 질문(質問)한 것이다.
메시아를 증거(證據)하여 저의 길을 예비(豫備)하러왔던 분이 엘리야였음으로 예수께서는 「엘리야는 과연(果然) 먼저와서 모든 것을 회복(恢復)하리라」(마 17/11)고 말씀하셨으며 「만물(萬物)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뭇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나니 ······ 피조물(被造物)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解放)되어 하나님의 자녀(子女)들의 영광(榮光)의 자유(自由)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고 말씀하셨다.
인간이 타락(墮落)되지 않고 완성(完成)되었으면 피조세계(被造世界)의 화동(和動)의 중심이 되어 만물(萬物)과 인간 사이에도 미(美)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었을 것인데 인간이 타락(墮落)되었으므로 만물(萬物)도 사랑의 주체(主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사랑의 주체(主體)인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復歸)한 하나님의 뭇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苦待)한다고 하셨다.
이것은 화동(和動)의 중심(中心)으로 설 수 있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이 복귀(復歸)되어야 만물(萬物)도 창조목적(創造目的)을 달성(達成)한 피조물(被造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창조본성(創造本性)을 완성(完成)한 인간으로서 이 목적(目的)을 위하여 오신 분이었기 때문에 「만물(萬物)을 회복(恢復)하실 때까지 하늘이 마땅히 예수를 영접(迎接)하리라」(행3/21)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도(信徒)들은 구원(救援)의 명확(明確)한 표준(標準)을 아지 못하였음으로 죄(罪)를 벗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죄(罪)를 어느 정도(程度) 벗어야 할는지, 하늘 아버지의 완전(完全)함같이 완전(完全)한 사람은 어느 정도(程度)의 인간인지 알지 못하고 천국(天國)이라는 막연(漠然)한 소망(所望)을 구원(救援)의 표준(標準)으로 세우고 암중모색(暗中摸索)하여내려온 것이다. 아직도 먼 거리(距離)에서 바라보면서 가는 노정(路程)에 있어서는 이를테면 서울이면 「서울」이라는 막연(漠然)한 목표(目標)를 표방(標榜)하여도 좋으나 일단(一旦) 목적지(目的地)인 서울역(驛)에 도착(倒着)한 후(後)에는 과정(過程)에 있을 때와는 달리 서울의 어느 지점(地點)이라는 국한(局限)된 목표(目標)를 알지 못하면 역(驛)에서 방황(彷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같이 아직도 까지에는 2000년이란 먼 를 두었을 때였음으로 예수께서는 이라는 한 의 혜택을 세워서 의 만을 하셨으나 이제 가 그 을 하고 을 바로 눈 앞에 바라볼 때가 되었으니 지난 날과 같이 만을 찾아서는 아니될 때가 되었다.
이제는 의 어느 이라는 된 한 을 세우고 바라보면서 나아가지않으면 의 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되었다.
오늘의 의 은 이와같이 되어 의 한 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예수에도 이렇게 되어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2000년 는 예수님을 함으로 하여 그의 인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의 한 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의 가 끝나려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의 을 하여 의 을 넘어선 은 바로 아담 해와가 되지 않고 완성되었을 과 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되지 않고 된 아담과 해와는 어떠했을 것인가. 마치 한 사람에게는 가 없으며 물에 빠지지않은 사람에게는 건져줄 사람이 되지 않는 것과같이 그들에게는  예수의 의 는 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그의 들도 역시 의  없이 에 갈 수 있었을 것은 한 이다.
그리고 의 에게 있어서는 와 도 치않았을 것이다. 사탄이 없는 에서 사탄과 싸워야할 가 무엇에 할 것이며 하나님과  하며 사는 에 있어서 하나님을 찾기 한 이 어찌하여 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 들이 할 수 있는 의 는 어디까지인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우리가 의 믿음으로써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늘아버지의 함과 같이 우리들도 하여 의 을 보았다면 지금 우리도 역시  아담과 해와와 같이 는  와 도 없는 의 이 되었어야할 것이다. 유대 관원들이 예수님을 하여  요한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데 당신의 들은 왜 먹고 마시는가 할 때에 예수께서는 가 과 같이 있는 동안에야 왜 을 할 것인가고 하셨다(막 2/18~20). 우리는 예수 앞에 가 되는 가 아니라 그의 아내가 되어 을 하려는 것이 의 의 이라하는 것은 이미 에서 하였거니와  우리가 의 믿음으로 하여 히 을 받아 의 으로서 예수 앞에 아내가 되었다면 을 하는 아내된 우리에게 있어서는 벌써 에 있을 때와같이 로서의 예수가 아니고 으로서의 예수만이 될 것이며 따라서 에서 된 을 할 수 있었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 왔다 간 모든 들도 그러했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히 가 하며 사탄과 싸워야할 와 이 히 남아있다. 그러므로  바울도 「 내 속 곧 내  속에는 한 것이 하나도 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하기를 하는 마음은 내게 있으나 그대로 이루는 것은 없는지라···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을 즐거워하되 다못  중에 다른 이 있는 것을 보매 내 마음의 과 함께 싸워 나를 사로잡아 나의 에 있는 의 에 케하니 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 그런즉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을 섬기고 로는 의 을 섬기나니라」(롬 7/22~25)고 하여 의 싸움의 를 히 하였다. 이와같이 바울은 히 에 의 한 이 있음을 하였다.
이 는 바울이  를 고백하는 말이라고 하는 들도 있으나 이것은 바울에게 한 지나친 의 에서 나온 그릇된 이다. 는 그 어느 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이 말씀도 바로 그리스도를 하는 로서의 바울 의 임을 알아야한다. 예수님 앞에 서려하면 서려할수록 몸과 마음의 한 싸움을 할 수 없는 의 을 하게 한 그 하고도 한 에 바울의 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도 「 우리가 를 하지 않았다면 곧 하나님이 거짓말한다하는 니라」(요일 1/10)고 하여 라할지라도 누구든지 이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것을 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어찌하여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아직도 으로서 를 부르고 있으며 와 의 은 더욱 히 되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아무리 잘믿는 라 할지라도 예수 믿지않고  갈 수 있는 을 낳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은 대로 믿지않으면  받을 수 없는 죽은 을 낳은 것이니 그 는 어디 있는가하면 이것은 아무리 잘 믿는 라할지라도 로부터 받은 죽음의 인 를 그 에게 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라도 의 믿음으로써는 그의 까지는 벗을 수 없다는 을 으로 보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담과 해와가 되었더라면 그 들은 이어거니와 그의 들도  예수 믿을 없이 에 갈 수 있었을 것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까지 다 벗을 수 있다면 우리는 벌써  아담과 해와의 으로 돌아갔을 것이요 따라서 죽은 자식을 낳지 않게 되었을 것임으로 우리는 모두 하늘 아버지의 함과같이 하여  예수께서는 하실 도 없이 벌써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으로부터 되는  는 잘 믿는 들에게도 히 하여  들을 의 길로 끌어가려하고 있다는 인 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바울의  이 없다하더라도 우리 의 으로 보아도 마음은 하나님에  해 있고 은 사탄에게 해 있음을 히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음은 이로되 이 약하여  몸과 마음이 싸우며 아직도 와 들 사이에는 과 와 와 에 찬 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무리 잘 믿어도 까지는 벗을 수 없다는 을 와 로써 하였다. 이에서 우리는 믿음으로써 모든 죄를 벗을 수 있다는 의 을 히 치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의 를 올리며 한 의 를 읽으며 한 의 을 부름으로써 까지도 벗었다고 하며 스스로 하여오던 지난날의 그릇된 에서 그 낡은 탈을 벗고 새로운 의 를 세워야할 때는 왔다.
마치 으로 한 로써  을 받을 수 있었던 의 유대들의 의 탈을 벗고 로써  의 를 시작하는 를 맞이하여야 될 것이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써 마음으로만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의 탈을 벗고 몸과 마음을 하여 로서   앞에 나아가야할 새로운 는 다가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들의 한 은 그리스도인 나무로 나아가는 것이라(계 22/14)고 한 것이다.
이와같이 의 믿음으로써는 를 벗을 수 없다하면 의 의 는 어느 의 것이냐하는 를 우리는 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를 하기 에  메시아 의 를 알아야할 것이다. 메시아 은 이미 들을 하여 히 알려져있던 이요 메시아 도 와 와 시몬과 안나 의 를 세웠으며 히 그를 에 하기 하여  요한을 보냈던 것이다.  요한은 에서부터 함을 입었고 그의 의 놀라운 은  고을을 떠들게 하였으며 더욱 그 의 은  유대으로 하여금 저가 메시아가 아닌가고까지 생각하게 하였으며(눅 3/15) 그가  가장 한 라는 깊은 을 주게하였다는 은 들로 그의 앞에 나아가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고까지 한 것을 보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요 1/19~20).
하나님이 이와같이 여러 들과 아울러 누구든지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었던 한   요한을 세워 그의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게한(행 19/4) 은 어디 있는 것인가. 이는 로 이스라엘로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하기 한 하나님의 에서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예수님 도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된다고 하셨다(요 6/29).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하여 함받은 임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할 것이요 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저를 믿도록하는데 있음으로 이스라엘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할 것이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 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믿었다하면 그를 에 달리게하였을 것인가. 로마 의 과 인 에 얽매어 와 의 에 해있던 이스라엘 들이  오직 하나의 은 언제나 메시아가 하여 그들을 그 에서 해주시려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을 키 하여 이스라엘에게 오시리라고 하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었다면 누가 저를 하였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않은데 그 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들이 예수님을 에 달리게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저를 믿으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한데 있는 것이다. 보내실 를 믿게할 으로 오랫동안 해오신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신 로 보아도 그의 죽음의 길은 하신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은 이 될 것이 아니라 산 로서 의 을 해야할 것이었다.
바울은 이 을 알았음으로 「이 는 이 의 들이 하나도 알지못하였나니  알았더라면 의 를 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고 하여  유대의 의 으로 하여 의 를 의 로 만들었으며 달리지 않아야할 에 달리셨다는 것을 하였다.
로 그리스도의 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 의  에서 된 것임은 할 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 죽음으로 한 은 이스라엘의 으로 말미암아 된 하나님의 2인 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으로 한 하나님의 1 는 무엇이었던가 하면 그것은  이니 한 들을   의 으로 시켜 하나님의 을 케함으로써 하늘아버지의 함같이 우리들도 케하시려는 것이었다(마 5/48). 그러면  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은 만도 아니요 만도 아니요   이 아울러서 된 것이다.( )
그러므로 도  의 이 아울러 되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예수께서 죽지않고 살아서 이루어야할 1인 인 것이다.
하나님을 닮지않고는 하나님을 할 수 있는 를 치 못한다.( ) 그러므로 은 마음과 몸이 와 으로서 을 하여 을 이루어 하나님을 닮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의 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은 으로 하여 몸과 마음이 아울러 사탄이 할 수 있는 터를 하여 사탄 에 머물게 되었으므로 다시 몸과 마음을 아울러  에로 코자하심이  예수님을 한 하나님의 1 인 것이다. 여기의 마음은 의 이 으로 나타나는 을 말함이다.
의 을 아울러 하기 위하여  아우른 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룬다는 임은 이미 가 한 바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무요 는 그 가지라 하였으며(요 15/5) 우리는 그리스도의 라 하였다(고전 6/15).
예수께서  아울러 살아서 뜻 맞는 로 하나님 앞에 섰다면 믿음으로써 그와 한몸된 우리로  아울러 된 이 되어 을 하였을 것이었는데 이스라엘이 그를 믿지못하여 예수님의 몸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으므로 그와 한몸된 의 몸도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게되어 은 으로 돌아가게되었다. 의 으로 하여 아담부터 내려오는  는 아직도 히 에로 되고 있음으로 아무리 잘 믿는다는 의 이라할지라도 저는 저대로 또 예수님을 믿어야할 이 남아있는 것이다.
은 사탄을 키 위한 싸움의 이다. 사탄을 하려면 을 쳐야하나니 이는 사탄도 의 과 을 하여 그와 의 를 맺지않으면 그 힘을 하지 못함으로 사탄은  의 을 로 하고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라는 것은 사탄의 을 할 수 있는 을 시켜 그의 이 됨으로 의 힘을 하하는 것을 말한다. 을 하고 와 와 과 과 을 버리려하는 것은 사탄의 을 할 수 있는 이러한 들을 버림으로써 의 힘을 할 수 있는 사탄의 길을 막기 함이니 이 이 곧 로 한 이다.
쉬지말고 하라(살전 5/17) 하심은  사탄의 을 하고 있기 때문이요 사탄이  할 수 있음은 할 수 있는 이 있기 때문이요 이 은 예수님의 을 사탄에게 내어줌으로써 그의 된 우리의 도 으로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된 이다.
이렇듯이 예수님은 그의 몸을 사탄에 내어줌으로써 의 은 치 못했으나 의 피의 으로 한 의 의 를 함으로써 의 2인 만을 하셨다. 그러므로 의 의 는  뿐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의 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땅에 남아있게 되었음으로 그의 은 인 이 되었다. 예수께서 에 오신 이 다 이루어졌으면 다시 오실 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셔서 우리의 까지 히 할 때에야 우리는 히 되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가령 여기 물 속에 빠져 숨을 쉬지 못하고 물만 먹고있는 한 사람이 있다하자. 이것이 바로 한 아담의 이다. 이를 히 하려면 물에서 건져 빠지기  인 에로 해야될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아담의 을 건지기 하여  로 오신 분이다.
그러나  아담을 믿는 첫 아담의 은 물 위에 코를 내어놓고 함으로 겨우 죽음은 하였으나 아직도 그 몸은 물 속에 잠겨 하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하면서도 이제는 히 받았다고 스스로 를 속여가며 스스로 하며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이 오늘까지의 우리의 이 아니었던가. 이제 이 아담의 의 몸마저 물에서 건져 로 다시 끌어올려야할 가 다시 오셔야할 것이니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렇듯이 에 달리러 오셨던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의 을 에 두고 새로운 로 를 읽어보기로 하자.
 예수님의 의 의 길이  이었다면 「할만하면 이 잔을 케 하옵소서」(마 26/39)하고 세 번씩이나 올리신 예수님의 의 는 한 의 라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스데반도 그 한 의 을 웃으면서 끝마쳤고 바울 베드로 그 의 많은 들도 꼭같은 의 길을 걸었거든 하물며 의 로 오신 예수께서 아무래도 걸어야할 를 앞두고 이것을 하기를 하는 그러한 를 올렸을 것인가 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길은 을 하는 이스라엘의 의 에서 된 한 길이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2 이나 하여온 인 믿음의  위에 예수님을 산 로 한 를 하였더라면 4 의 은 되어  는 살아서  하여 을 받아 를 벗고 의 를 하여 사랑과 만이 에덴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데 이제 저들의 으로 하여  아닌 에 달리게되니 사랑하는 들은 을 할 것이요 또 까지 를 믿는 많은 들이 할 것을 히 여기시어 예수께서는 그러한 를 올리신 것이었다.
가 이라면 예수를 내어주는 사람은 어차피 있어야할 것이며 따라서 가룟 유다도  있어야할 인데 왜 그는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다(막 14/21)고 말슴하셨을 것인가.
로 가룟 유다  예수님을 내어줄 사람은 없어야할 것이었다. 내어주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이요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울러 의 이 되었을 것이다. 이사야에 「대개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남이여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그 어깨에 정사를 메임이여 그 이름을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하리로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여 다윗의 위와 그 나라를 굳게 세워 자금 이후 영영토록 공평과 의로움으로 치리하시리니 만군의 영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로다」(사 9/6~7)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다윗의 를 가지고 그 나라를 굳게 세워 이 나라를 과 로써 토록 하시려는 의 으로 오셨던 분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보라 네가 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  다윗의 를 저에게 주시리니 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고 말씀하시어 저는 히 할 의 으로 오실 것을 하였다. 그러기에 헤롯이 저를 죽이려하였고 네가 유대의 이냐고하는 빌라도의 에는 히도 네말이 옳다고 하셨다(막 15/2). 저는 유대의 으로 오셨길래 이를 이루지 못하고 에 달리는 것을 보고는 그를 하기 하여 「유대의 」이라고  에 써 붙였던 것이다.  아울러 의 으로 오신 예수님은  은 다음 다시 오셔서 이루실 것으로 남기시고  만을 하셨음으로 예수님은 오늘까지  의 으로만 계시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을 얼마나 하셨으며 그들의 를 보고 몇 번이나 우셨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하여 올라가실 때도 그 을 보고 울며 「오늘이라도 네가 한 일을 알았더라면 하였으려니와 오직 네 눈에 숨겼으니··· 이는 권고하시는 날을 네가 아지못함이라」(눅 19/41~44)고 하시며 이스라엘의 이  그 을 하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없는 에까지 을 미치게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을 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뜻을 아지못하는 까닭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언제까지나 내가 너를 품어야하는가(마 23/37)고 예수님은 를 믿어주기를 얼마나 했던가. 그러므로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 하시되 하나님이 보내신 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29)고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더라면 누가 예수님을 에 내어주었을 것인가.
꺼지는 불도 끄지않으시며 부러진 갈대도 마저 꺾지않으시는 것이 사랑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어든 어찌 구태어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님을 에 달리게하시고 그 의 예수님을 믿게하여 의 을 믿는 들까지 또 의 을 겪도록 하실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님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들이 하여온 의 은 살아서 이루려 오신 예수님을 하였음으로 그 의 으로 오는 것이다. 살아서 하러 오신 예수님은 그들의 으로 하여 죽어서라도 이루기 하여 를 지시고 의 길을 거쳐 하심으로  의 를 하셨으니 우리도  의  에 들어가려면 그리스도가 넘은 를 우리 도 넘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져야할 의 도 하나님의 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의 의 로 말미암아 오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메시아 하실 때까지의 4 를 보라!
믿음의  아브라함 한 사람을 찾기 하여 하나님은 2을 수고하신 것이 아닌가.
이와같이 4 하나님이 하신 일은 마치 가 씨를 뿌리기 하여 밭을 갈듯이 메시아된 예수님 한분을 의 으로 세우기 한 믿음의 터를 닦아온 것이니 이는 곧 이스라엘로하여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만은 잘 믿고 하여 하지 않도록 하기 한 임에 틀림없었다.  예수께서  죽어야만 를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믿음의 을 찾아세우기 한 2의 수고는 하실 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의 하나님의 된 유대들의 은 어찌하여 그렇게도 하게 되었는가하는 도 의  으로는 되지 않는다. 만일 예수님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하고 새 에덴을 하여 이 는 으로 되었을 것이니 이 의 이야 누가 히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일어나 빛을 하라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이 네 위에 비치었음이라··· 네 눈을 들어 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되 네 아들은 에서 오고 네 딸들은 안겨오리라··· 바다의 함이 네가 돌아오고 의 이 네게로 옴이라 허다한 약대가 네 에 하리니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도 올 것이고 스바로부터 사람이 다 과 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하며··· 들이 네 을 쌓을 것이요 그 들이 너를 할 것이니··· 네 이  열려 로 닫기지 아니함은 사람들이 네게로 의 을 가져오고 그 들을 이끌어옴이요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과 나라는 하리니 그 들은 반드시 되리라··· 네가 과 의 을 받기를 어린 아이가 젖 먹듯하여··· 내가 을 가져 을 하며 을 가져 을 하며 으로 나무를 하며 로 돌을 하며 을 세워 을 삼고 를 세워 를 삼으리니··· 네가 네 을 이라 하며 네 을 이라하고··· 오직 여호와 네게 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이 되리니 네 해가 다시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함은 여호와 네 한 빛이 되실 것이요 네 슬픔의 날이 마침이로다··· 수효 적은 가 을 이루고 한 가 을 이룰지니 때가 되면 나 여호와 히 이루게 하리라」(사 60장).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의 를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하나님의 이 뜻이 땅 위에 이루어졌을 것인가.
하늘의 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끝날에는 에게 하다는 것으로 을 받을 것이니 를 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못할 때는 그 로써 을 받을것이다. 이스라엘이 받은 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다. 그러나 그들이 이것을 치 못하여 예수님을 하고나니 그들에게 주셨던 는 그들을 하여 마침내 인 과 싸우면서 오늘까지의 2동안 설움의 을 밟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 은 왜 있었던 것인가를 알아보자. 하나님만을 믿고 살아야할 이 이미 으로 되어 사탄에 떨어졌음으로 들이 하나님의 에 하여 믿고 아니믿는 것은 의 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세우시사 이스라엘을 하여 가나안까지 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하나님의 을 길이 누리도록하려 하심이 하나님의 이었으나(출 3/8) 들이 하나님을 하는 에 설 때에는 사랑으로 하사 사탄 에 내어주시어 한 의 으로서 가져야할 갖은 을 다 겪게하시어 길러놓으신 이라할지라도 그들을 하시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남기셨던 것이다(민 26/65). 이와같이 뚜렷한 하나님의 과 이 있을지라도 이를 받드는 들이 뜻 가운데 서지 못할 때에는 세워진 도 도 이루어지지않은 는 이스라엘 를 하여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한 의 로 이 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신 은  아담의 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를 코자하심이었으나 들이 으로 돌아가면 를 져야할 것도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 두 으로 하신 것이니 첫째는 보내신 메시아를 이스라엘이 믿으면 이사야 9과 11 및 60에 된대로 메시아는 다윗의 를 가지고 과 로움으로 를 하여 에덴동산으로  함으로 지금 우리가  말씀에 하여 바라고 있는대로의 은 그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요 둘째는 만일 믿지 아니하면 이사야 53의 대로 의 을 한다는 것이다.
히도 이스라엘의 으로 하여 의 1 는 이루어지지않고 의 에 한 2인 만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으로 2 에 다시 오셔서 1인 를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의 을 하실 때 이것을 하는 베드로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마 16/23)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으로 하여 이미 의 의 길이 된 인 까닭이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온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한 부터는 하나님의  을 받아야할 에 다시 인 사탄에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와같이 예수님에 한 으로 하여 사탄과 하나된 이스라엘 과 그를 둘러싼 를 하나님 품으로 옮겨놓기 하여는 그의 으로서 를 한  인 예수님을 으로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이 되었다. (예수를 한  ) 예수님은 이와같이 의 을 하지 않고는 만의 도 할 수 없음을 아시고 이 을 해 나아가고 있었는데 베드로는 이 길을 막으려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러한 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에서 하시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으니 이것도 의 인 의 를 말씀하심이 아니요 저들의 으로 하여 이미 하고 하여온 의  가 다 이루어졌다함을 한다.
이로써 의 믿음에 한 은  뿐이요  은 하셔서야 이루어질 다음 의 로 남아졌다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을 섬기고 로는 의 법을 섬긴다」(롬 7/25)고 하심도 의 은 뿐이요 은 아직도 사탄 에 있다함을 하는 말씀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께서는 그가 로 오신 을 에 하시지 못하셨는가 예수님은 의 를 앞두고 사랑하는 들에게까지도 들이 치 못할 것을 하여 하시지 못하고 남기고 가신 말씀이 여러 가지로 있었다(요 16/12). 그러나 이것은 일로 을 하여 가르쳐 주시마고 하시고 떠나셨다.
예수께서 오셨던 도 에는 하실 수 없는 이었다. 로마  과 유대들의  가운데서 싹트기 시작한 가 만 가지고도 그러한 한 길을 걸어내려온 것이다.  예수께서 을 하셨더라면 유대들의 과 로마 들의 이 어떠했을 것인가는 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한 (사 9/6~, 계 12/5~, 눅 1/31~33)은 의 힘이나 이나 다른 이 어떠한 으로도 될 것이 아니요 오직 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의 으로만 될 것은 할 도 없는 바이지만 의 로마 으로서는 이것을 하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헤롯은 이 났다는 의 말만을 듣고도 그를 죽이기 하여 예루살렘의 들을 하였거든 어떻게 예수께서 이 의 으로 오신 뜻을 밝힐 수 있었으랴. 그러므로 이 와 에 있어서 못할 말씀은 들에게까지도 밝힐 수 없었던 것이요 들도 역시 이러한 을 알았다할지라도 으로써 밝힐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까지 하나님의 품 속에 로 감추어졌던 을 밝히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와 만을 의 에 하여 알아왔지만 그  가 밝혀진 오늘에 있어서는 의 을 다 알게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께서 에 오셨던 을 몰랐다. 따라서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을 아지못하도록 유대땅으로 하시면서 안타까워 외치신 그의 말씀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하시던 그의 도  에서 하신 그 애타는 의 말씀도 아지못하였다. 이제 예수님은 으로 맞아야할 된 우리들이 의 도 모르고 어떻게 그를 으로 맞을 수 있을 것인가.  한 에 되어 그리스도의 새로운 말씀을 들으려하지도 않는 유대을 하여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눅 5/38)고 외치셨다.
사랑하는 들이여
나 이 아니면 나타내시지 아니했던 하늘의 이 밝히 나타날 때 그를 받아들일 마음의 터는 되어있는가.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고(마 18/3) 지혜롭고 슬기있는 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마 11/25) 하나님은 스스로 섰다하는  는 넘어질가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가 되자. 스스로 섰다하는 가 되지말자.
제3장 
가 저지른 로 하여 의 뿌리는 깊이 박혔고 가인이 아벨을 함으로부터 는 과 의 으로 거듭하여 내려온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들이 란 무엇이며 의 의 은 무엇인가를 하여왔지만 아직까지 이 는 의 것으로 남아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를 하신 , 의  및 하나님의 의  의 를 아지 못한데 그 이 있는 것이다.
에서는 의 에 한 것만을 하고 그 밖의 에 한 는 에서 하기로하자.
하나님의 는 곧 를 하는 것이므로 의 을 한 는 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가 어떠한 에로 하는가를 알려면 하나님이 어떠한 를 이루시기 하여 을 하셨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하시고는 을 주시며 이르시되 하고 하여 땅에 하라(창 1/28)고 하셨다. 그러면 이 의 말씀은 무엇을 하는가.
아담과 해와가 되지 않고 되어 이 의 말씀대로 를 하였더라면 의 의 사랑과 의 사랑과 의 사랑에서 맺어진 한 을 이루어 하나님의 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의 를 할 것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와 사랑을 히 함없이 돌리고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한 사랑의 으로서의 이 이루어졌으면 이것은 히 될 수 없는 가 될 것이었다.
하나님의 의 말씀은 하되 땅에 하도록하라고 하셨으니 대로 이루어진 이 가 되어 에 하게 되었더라면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일 것이다.
사랑과 에 얽히어 와 없이 살 수 있는 를 이라고 한다면 이 이 이루어진 에덴동산이 곧 일 것이요 이 은 에 된 이니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하시고 그들로 하여 하나님이 히 하실 수 있는 기쁨의 에덴인 을 이루시려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그러면 에덴동산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1600 을 한 를 로 해버리고 노아의 여덟 식구만을 남기셨고 그 여덟 식구의 이나마 와 과 에 죽고도 오늘에 이와같이 많은 가 에 해 있거던  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의 말씀대로 하였으면 노아도 어떠한 도 도 도 없었을 것이니 지금에는  의 보다 얼마나 더 많은 가 에 했을 것인가.
그러므로 지금까지 많은 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아담가 해와가 된 그 한 만이 에덴동산이 아니라 바로 이 가 에덴동산이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하시고는 바로 이 땅에 을 하여 에덴을 이루시고 을 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이 을 하기기 하여 된 아담과 해와는 를 넘어 에 있어서도 다 자란 그 에서 되어 에로 해버리고 말았으니 이 가 곧 이다. 의 로 된 이 사탄의 에 떨어지게 되었음으로 을 중심한  도 사탄의 에 머물러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로마에 「대개 함을 받은 이 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뭇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나니 함을 받은 이 헛된 것에게 하는 것이  뜻이 아니라 오직 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니 그 바라는 것은 이 썩어짐의 종됨을  벗어나 하나님의 뭇 의 을 얻어 함에 이를 것이니라」(8/19~21)고 하셨다.
사탄을 일러 어둠을 하는 (엡 6/12)라고한 것은 이와같이 를 하고있기 때문이다. 이미 에서 한 바이지만 는 을 터로 하여서만 할 수 있으므로 에서 을 하다가 육신을 벗고간 들은 에서도 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되어   두 의 두 은 생겨난 것이다.
의 는 곧 를 한다는 것은  2에서 한 바이지만 하나님은 이와같이 에 떨어진 를 다시 하시어 잃어버렸던 에덴을 다시 찾으시고 을 하시어서 의 을 다시 이루시려는 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을 어기지않는 분이시다. 을 하시고 으로 하신 이 의 말씀을 이루어 주시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내가 말하였으매  이룰 것이요 하였으매 고연 할지니라(사 6/11~)고 말씀하셨다. 도 의 일을 시작하면 그 를 코자 하거든 하물며 에 있어서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 한번도 되지 않고 사탄만으로 내려오다가 많은 들이 믿어오듯이 해와 달이 빛을 하지 못하며 뭇 별들이 떨어지며 하늘과 땅의 이 풀어지고 만다면(벧후 3/10) 하나님의 은 로 돌아가고 말 것이요 따라서 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니 우리는 하나님을 하신 로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에 된 는 그 로서는 이미 되었으므로 이제 만을 의 로 케 하면 의 은 이루어질 것인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에 를 일으키실 것인가.
땅은 히 하지 않을 것이다. 「한 때는 가고 한 때는 오되 땅은 히 있도다」(전 1/4)라고 전도는 말하고 있다.
되어버릴 가 있는 도 아니며 되지않을 에덴을 하시고 하실 하나님도 아니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며 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할 수 있도록 된 이 되어 잃은 들로서 태어나게 되었음으로 없는 죽은 우리들을 다시 낳아주시어서 다시 살게 하시려는 것이니 이것이 곧 에 한 다. 예수께서  아울러 의 를 하시고 가셨더라면 우리들도  아울러 할 수 있었을 것인데 예수께서는 의 만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을 하게될 뿐이요  은 의 로 남아진 것이다.
이와같이 이  아울러 히 되어 히 할 수 있는 때가 오면 그때가 곧 의 는 끝나고 는 다 이루어지며 은 되어 이 다시 이루어지는 때다. 이와같이 이 으로 되어야 에서 된 들이 나타나게되어 로서 된 들이 비로소 의 을 열고 들어가게될 것이다. 이에 는 을 하기 한 을 하는 임을 알았다. 그러면 라는 것은 무엇을 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는 말씀으로 되었다(요 1/3). 이와같이 말씀으로 된 이 으로 하여 말씀을 잃어버려 말씀이 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하나님은  흙과 물과 같이 없는 로 떨어져버린 에게 다시 말씀()을 주시어 이 말씀과 하나됨으로 말씀의 을 이루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을 다시 이루게하시려는 가 곧 의 말씀에 한 의 다. 도 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못할 것임으로 도  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을 까지 하기 한 으로 주신 말씀이 요, 까지 하기 한 으로 주신 말씀이 다. 이제 까지 하기 한 으로 주셔야할 말씀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니 이것이 곧 예수께서 하셔서 주실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일을 말하여도 믿지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대로 예수께서는 가 다시 오실 때까지의 의 에 한 말씀을 하셨다. 하셔서 하실 에 한 말씀을 못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말이 많아도 지금은 치 못하리라(요 16/12)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께서 을 하여 다시 오실 때에는 반드시 그 치 못할 것을 하여 다 하시지 못하였던 그 말씀을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에 아담을 하시고 으로 하셨던 을 이루어야할 말씀임으로 라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 는 끝나려하고 있으며 에 한 는 다가오고 있다.
그러면 라는 것은 무엇을 하는가하면 가 을 짓고 에로 바꾸어지려는 를 한다. 지금은 가 로 바꾸어지는 때임으로 라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고 하셨다.
으로부터 까지 해야할 의 알파(Α)에서 오메가(Ω)까지의 한 이 생기게됨도 때문이니 알파로서 시작된 가 의 을 다 지나야 이 는 오메가로서 되고 다시 에로 된 에덴동산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까지 많은 들이 믿고 있듯이 는 의  이 일어날 때를 말함이 아니고 가 끝나 과 의 가 될 때를 하는 것이다.
노아  에도 「끝날이 이르렀으니 저희와 땅을 하리라」(창 6/13)고 하시어 그때도 임을 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으로 알파로서 시작된 를 1600을 로 하여 오메가로서 끝마치고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노아의 을 하고 코자 하셨던 것임으로 그때도 로서 땅을 할 것으로 하신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로 하여(창 9/22) 이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되었으므로 다시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써 이 를 하고 에덴을 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 도 였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로 오셨고(요 5/22) 그때도 「한 와 하는 는 다 와 같아서 이르는 날에 저희를 사뤄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하시리라」(말 4/1)고 말씀하시면서 그 때도 불로써 하신다고 하셨으며 또한 자던 의 몸이 많이 무덤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마 27/52). 그러나 오늘의 많은 들이 의 대로 되리라고 생각하고있는 것과같은 아무런 의 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불로써 하신 도 없으며 무덤에서 들이 일어났다는 아무런 도 보이지 않는다.
 에 된  그대로 의 들이 우리와 꼭같이 을 쓴 들로서 무덤에서 일어났다면 그들은 반드시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했을 것임으로 예수께서는 이미 에 달리셨지만 그의 들은 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 모든 들이 무덤에서 일어나서 하는 말을 누가 믿지 않았을 것인가. 그렇다면 구약시대의 모든 들이 무덤에서 일어났다는 은 무엇을 하는가하는 것은 에서 하기로 하자.
예수께서 하실 때도 로 오시며 그날에도 불로써 하며 무덤에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리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 은 이미 예수 에도 있으리라고 했던 것이지만  그대로 되지 않았던 것처럼 인 에도 그렇게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맞아야할 는 예수께서 죽지 않으셨더라면 2  그 에 이미 지나가 버렸을 것이었던 임으로 도 그 에 이루어졌을 것이요 따라서 오늘의 우리는 이 되었을 것은 하다.
그러면 이 가 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가 하면 이는 곧 의 을 하는 것이다.
한 의 도 그  에 달려있는 것같이 이 을 한다는 것도 사탄의 가 되고 하나님의 가 된다는 것을 하며 들이 으로 들려올라간다는 것도 에서 의 에로 한 가 된다는 것을 한다.
 에서 말씀하는 하늘()이라는 것은 우리가 으로 할 수 있는 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히 높고 거룩하시고 참되시어 우리 과는 말할 수 없이 한 에 머물러있는 곳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라하는 것은 히 높으시고 거룩하시고 참되신 분으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다.
다음으로 의 로서 햇빛이 어두워지며 달빛이 하며 별들이 떨어질 것을 하였으니(마 24/29) 이것은 무엇을 하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는 을 한 모세가 빛나던 다. 그러나 메시아의 으로 하여 가 끝났음으로 모세는 그 빛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 는 을 으로한 예수와 이 빛나는 로 바뀌어진 것이다. 이에 해는 예수님을 하였고 달은 을 한 것이다.(창 37/9)
가 끝나고 가 오듯이 는 끝나고 가 올 것임으로 을 한 예수님과 이 하늘에서 빛나던 는 끝나고 하셔서 새로운 빛을 땅에서 할 때가 올 것이다.
별들이 떨어진다는 것은 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한다. 메시아를 하여 오던 유대 들이 오신 메시아를 알지 못하고 하다가  떨어진 것같이  예수님을 하던 오늘의 들도 한 에 하게 될 것을 한 것이다. (전편 제7장 참조)
그러므로 가 이를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하셨고 의 이름으로 하는  을 하는  사귀를 쫓던 들을 보시고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을 하는 여 내게서 물러가라고(마 7/22~23)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불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는가. 혀는 곧 불이라(약 3/6)고 하였으니 불은 곧 혀의 이요 혀의 심판은 곧 말씀을 한다.
「그 입의 막대기로 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을 죽이리라」(사 11/4)고 하셨으니 입의 막대기와 입술은 곧 말씀을 하는 것이다.
「그 때에 한 가 나타나리니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죽이고···」(살후 2/8~)라고 된 것도 말씀으로 심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를 또한 그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벧후 3/7)라고 하셨고 「나를 버리고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는 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하던 말씀이 마지막날에 하리라」(요 12/48)고 하신 것을 보아도 끝날의 도 말씀으로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어찌하여 말씀으로 하셔야하는가 하나님은 으로 하여 말씀을 잃어버려 말씀의 을 이루지 못한 을 하시기 하여 다시 말씀()을 주셔서 를 하신 것이다.
말씀 이신 님은 다시 오셔서 모든 가 어느  말씀의 을 이루었는가 하실 것이다. 예수님 과 같이 이 말씀을 한 만이 에 들어갈 것이요 그 말씀의 에 되지않는 는 그 에 따라서 이 될 것이다.
이와같이 지금은 가 끝날 때가 되었기 때문에 들은 으로는  까지 하게되어 아담과 해와가  에 하나님과 하던 의 에 이르게 됨으로 오늘의 들도 역시 에 하게 되는 것이다.
에는 하나님의 을 많이 부어주시어 일을 말하게 하시마고(행 2/17) 하신 말씀대로 에는 에 그 를 볼 수 없을 로 하는 사람들이 같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도 임을 헤아릴 수 있으며 따라서 는  아담과 해와가 하였던 그 을 하여 하고 있다는 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에 한 들의 한 은 나무에로 나아가는 것이라고(계 22/14) 하였으니 이것은 이 으로 하여 에덴동산에서 나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에덴동산 가운데는 나무와 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창 2/9). 아담과 해와가 되었더라면 이 나무에로 나아갈 것이었는데 됨으로 하여 「그 사람을 쫓아낸 에 에덴동산 편에 그룹들과 두루돌며 번쩍이는 을 두어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고 말씀하신대로 그들은 그 나무에로 나아갈 수 없게된 것이다.
이와같이 아담과 해와는 나무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에로 떨어졌음으로 그 은 한 의 을 거친  이 이 가 을 지음에따라 새로이 에덴을 하여  로 하여 잃어버렸던 그 나무를 다시 찾아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조)
그러므로 는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나무를 다시 찾아 세우려는  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의 알파인 에서 잃어버렸던 나무를 의 오메가인 에서 하려는 것이  66을 세워 하신 의 인 것이다.
그러므로  21은 바로 이 새로운 에덴 에 한 을 한 것이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18)라고 되었다. 하늘이 헐고 땅이 낡아질 수는 없을 것이다. 사탄의 으로 하여 잠기었던 이 열리는 하늘과 땅임으로 새 하늘 새 땅이요 으로 하여 사탄에게 빼앗겼던 의 이 다시 오시는 님을 한 하나님 으로 바뀌어 새로운 이 새로운 으로 새로운 를 시작하게 됨으로 새 하늘 새 땅이라고한 것이다.
「내가 또 보매 거룩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로 좇아 내려오니···」라고 2에 된 것과 같이 땅이 들리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 좇아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요한이 본 것과 같은 이러한 은 오늘의 많은 한 들에게도 히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3에는 「볼지어다 하나님의 장막이 에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하시리니」라고 되었다. 들이 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막이 에 있게 되어 들이 에서 하나님을 히 모시고 할 수 있는 곳이 곧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과 더불어 하던 에덴동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히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이 없고 하는 것이나 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고 하여 되었다.
기나긴 의 을 두고 흘러온 우리들의 눈물을 하나님이 히 씻어주실 때 과 이 없어질 것이니 이것은 처음일  알파로서 시작된 가 다 끝난 다. 다시 「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불지어다 내가 을 새롭게하노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되 다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는 여러 것을 으로 얻으리라···」(계 21/5~7)고 되었다.  이 불로써 된다면 어찌하여 이 의 을 잃어버린  이 된 한 의 기쁨도 가져보지 못한 채 될 끝날을 하고 있을 것인가(롬 8/19). 그러기에 도 새 을 맞아 새 에덴을 이루어 새롭게 될 때 그때에야 하나님도 다 이루었다고 기뻐하시면서 알파로 시작된  가 오메가로서 끝났으니 새 에덴을 차지하는 새날이 새로운 들에게 아담과 해와의 으로 하여 그룹들과 으로 막았던 그 길을 열어놓으시고 나무에로 하시사 그들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가 그 에 가까워옴에 따라 는 더욱 와 와 과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히 부르짖고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는 의 에로 되는 에 머물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 으로 하여 인 를 하고 사탄의 에 머물게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는 에 사탄의 을 받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 흐름에 따라서 의 을 찾아나아가려는 이 하여질수록 사탄의 을 벗어나  를 찾으려는 이  높아가는 것이다.
어떠한 을 하고라도 를 찾으려는 이 로 한 가 되었다는 것은 벌써 를 하는 의 가 에 이르렀다는 것을 한다.
하나님의 한 으로 된 은 말할 수 없이 있는 였다. 아무리 한 라 할지라도 나와같은 는 와 와 를 하여 히 둘도 있을 수 없는 한 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나로 하여 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과 의 인 은 나라는 을 하고는 다른 어떠한 에 하여서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를 얻어도 네 을 잃으면 무슨 이 있겠는가」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바로 이 의 을 그대로 드러내신 말씀이다. 이와같이 한  로 된 이언만 으로 하여 와 같은 을 받은 가 있을 로 해버린 것이다. 가 흐름에 따라 은 이 되었던 의 를 찾아나오고 있는데 에 이르러는 와 아울러 를 부르짖음이 더욱 하게 됨도 가 의 을 할 수 있는 의 에로 되어오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해와는  한 몸으로서 한 로 되었으나 해와가 의 가 된 로는 그 의 으로 하여 은 에게 의 을 하여왔다.
그러나 는 가 다시 의 의 를 찾아세울 수 있는 새로 하고 있으므로 의 흐름도 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는 인 가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 사랑을 찾으려는 은 날로 하여지고 있으니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이 끊어졌던 임으로 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새 를 하는  에서 일어나는 이다.
이와같이 의 의 을 으로 하더라도 는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하려는 을 이루어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는 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도 이러한 를 잘 한 라고 볼 수 있다.
가인이 아벨을 한  는 으로 엮어내려오고 있는데 그 은 단지 과 이 되고 있는 에서 벌어지는 라고밖에는 생각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미 를 하여 의 의 은 를 하려는데 있다는 하나님의 을 알았다. 그리고 은 을 하여 하는 에서 되었으므로 는 하나님의 을 받는 의 로서 하지 못하고 사탄의 에서 이루어지는 의 가 먼저 되었다는 것도 알고있다. 악으로 출발한 의 은 의 세계를 하려는 것인데 의 를 그대로 하면 의 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을 세우시어 을 하는 를 하시는 것이다. 이와같이 는 이미 먼저 한 의 를 의 로 빼앗아 넘기려는 의 을 이루어 내려오고있음으로 은 인  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하시사 그로써  이스라엘을 부르셨고 이 을 기르시기 하여 의 에서 빼앗아 내었고 그의 앞에 선 아말렉과 가나안 을 하게한 것은 모두 이스라엘을 한 의 를 넓히려는 를 이루시기 함이었다.
그러므로 하늘편에 선 이 사탄편에 선 을 하는 것은 의 를 찾는 하나님의 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됨으로 이다. 그러나 마치 함 한 사람의 로 하여 노아 가 의 을 이루지 못한 것같이 을 하는  또는  그 에서 서로 싸우는 것은  를 하는 것이 됨으로 그것은 이다.
는 마치 흐르는 흙물과 같다. 이 흙물은 이 지나면 지날수록  흙은 되고 맑은 물만이 남아지는 것같이 도  가 흐르면 흐를수록 의 은 땅에 떨어지며 땅에 밟히었던 의 은 하늘을 하여 세워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늘편과 같은 모양으로 하였으나  땅으로 떨어져 내려오는 의 과 서로 되는 때가 다. 그러므로 는 과 의 이 할 수 없이 같은 에서 에 빠지는 때며 어디에다 을 두어야 할는지 을 잃고 헤매는 때다. 과 은 같은 에서 로 되어 시작되었다.( ) 이렇게 되어 의  을 하여 내려온 과 의 두 도 그  가 에는 역시 돌아가고 은 한 것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 에 한  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이 세우신 과 그 을 으로한 세로운 의 이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은밀한 뜻은 반드시 그 종에게 나타내시고야 하신다고 하셨다(암 3/7). 이것은 이스라엘의 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니 노아 때도 를 세워 의 과 그 을 보이셨고 예수님 에도 예수님을 보내시어 의 과 그 에서 시작되는 의 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 과 은 그 를 이끌고 나오던 의 이나 이나 와 하는 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새로운 를 하는 새로운 을 으로한 새로운 의 은 낡은 의  속에서 하기 때문에 그 으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에서 한 새로운 인 예수를 으로 하여  를 이끌고 가는 의 은 모세를 한 의 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하심은 바로 낡은 탈을 쓰고는 새로운 의 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 에도 그러했지만 예수님 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그 의 에 된 에서 믿을 수 없는 을 믿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예수님 도 사탄의  바알세불을 한 사람으로 몰렸었고(마 12/24) 바울이  의 (행 24/5~14)라고 한 것을 보아도 새로운 는 와 같은 을 받는 사람에 하여 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를 두려워하여 인 만을 하는 사람들은 벌써 왔다가신지 2000이나 지난 를 아직도 하고 있는 유대들과 같은 에 서게될 것이다.
이와같이 과 과의 는 오늘까지 쉬임 없이 사탄에서 하늘 것으로 시키며 내려왔다. 땅을 빼앗어 갈라세웠고 과 사람을 빼앗어 하늘편과 사탄편으로 갈라세웠으니 하늘편으로 세워진 것이 요 사탄편으로 갈라 놓인 것이 다. 하나의 를 하는 는 이제 두 로 갈라세우는데까지 이르러 벌써 으로는 과  이 두 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제 한편의 가 되면 하나의 은 이루어질 것이요 이 는 다시 새로운 의 으로 시작되어  을 거쳐 하나의 에 된  가 될 것이니 그 때에  예수는 히 하시어 는 으로 되어 에서 로 에서 에 걸쳐 과 의  는  진행될 것이다.
도 두 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첫째는 된 의 요 둘째는 이와같이 된 들이 할 수 있는 의 다.
아담이 되지 않았더라면 의 는 히 짧은  에 오늘 이 6  의 에 하여 해 놓은 의 을 했을 것이었다. 으로 하여 은 으로서의 한 을 하지 못하였음으로 이러한 까지도 이루지못하고 잃어버리게되었음으로 는  에 한 와 아울러 의 에 하여 앞으로 이루어질 의 들의 까지도 해 가는 것이다. 가 흐름에 따라 이 더욱 되어가는 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좋은 인 을 입고 있는가 위에서도 하였지만 은 을 한 이 아니라 의 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을 끝내기 위한 임으로 이제 하늘과 사탄의 마지막 판가리 싸움만 끝나면 다시는 이 없는 가 될 것이다. 하나의 를 바라보고있는 이 때에 우리는 한  한 의 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하늘과 땅에 로운 이 되자. 그렇게함으로써만 없는 는 오게될 것이다.
의 를 하여 의 모든 은  했고 또 잘 살아보았다. 로 눌려 살던  까지도 머리를 들 수 있는 와 는 세워졌다. 그러나  에 오직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 아들 딸만이 한번도 잘 살아보지 못하고 하게 살아왔다.
는 누구를 위하여 하셨던가 하지 않은 아담과 해와 그리고 그의 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이 살아계실진대 그 사랑하시는 아들 딸에게 이 를 다시 찾아 주시지 않을 것인가 은 하였을망정 이러한 에서 히 살 수 있도록 된 의 흐름이 있음으로 이루어지더라도 생각도 되지 않는 그 의 를 아득한 꿈나라에다 둔채 길도 도 모르고 하는 의 과 같이 떨어버릴 수 없는 와 겨루어가면서 도 쉬임없이 이 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앞에 새로운 의 빛이 나타났으니 어떠한 라도 다 헤치고 나면 한 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
1 의
이라는 것은 「다시 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시 산다는 뜻을 알려면 죽었다는 뜻을 알아야할 것이다.
 에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 하신 말씀은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하셨으니 이 죽음은 무엇을 하는가. 이 늙어서 이 흙으로 돌아가 묻히게되는 것이 의 로부터 오는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 를 모르는데서 오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은 하면 흙으로 된 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고 의 인 는 로 돌아가도록 하신 까닭이다.
로 된 로서 을 가지고 있는 은 하나도 없다. 이 어느 하나도 하는 것이 없다면 의 도 이 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의 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와 을 으로 한 와  을 아지 못함으로 다만 에 한 에서 빚어진 인 것이다.
 이 에서 히 한다면 의 인 의 는 없을 것이며 으로는 조차 할 수 없을 로 한 를 을 하여 지었다는 의 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흙 속에 묻혀있는 이도 흙 속의 에만 을 느껴 죽지않으려할 것이니 이것은  죽음으로써 되며 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나비로서의 넓은 의 를 모르는 까닭일 것이다.
이와같이 이  에 을 가지고 에서 하기를 하는 것은 로서 할 수 있는 의 아름다운 가 있음을 아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  되지 않았다면 은 들끼리와 꼭같이 을 벗은 들과도 로 할 수 있음으로 을 벗고 떠나는 사람도 하는 것이 아니다. 은 의 옷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임으로 의 옷이 더러워지면 벗어버리는 것같이 의 옷된 도 하면 벗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었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있는 의 죽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으로 하여 하나님께 돌려야할 를 돌리지 못하게되었음으로 의 한 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어 에서 사탄으로 하여  가 되어버렸음을 한다.( )
그러면 다시 산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가하면 이 사탄에서 에로 다시 돌아감으로 하나님의 한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는 한 의 로 하여 의 을 히 할 수 있는 을 하여 그것을 다시 찾아 세워 나아가는 의 을 한다.
를 따먹고 된 의 아담은 벌써 죽은 것이었다. 그러나 따먹기  살았을 때의 아담과 따먹은  죽었을 때의 아담과의 사이에는 그 에 인 아무런 도 보이지 않았다.  있었다면 와 에 하여 이 하는 였을 것이다. 이와같이 에서 따먹은 의 아담과같이 죽은 에 한 과 그 이 되어 따먹기  살았을 때의 아담과 같이 을 한 의 과의 사이에도 그들의 에는 인 아무런 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역시 있다면 과 으로부터 오는 의 빛을 볼 수 있는 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으로 한 사람과 와는 과 의 가 있지만 으로 보아서는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과 된 과의 사이도 그러하다. 다만 다른 것은 사탄의 을 받는 의 에서 벗어나 의 의 에로 옮겨져서 하나님의 한 사랑을 다시 받게되어 와 없는 이 되었다는 뿐이다. 마치 예수님은 히 없고 흠과 티가 없는 된 아담으로 오신 분이었으나 그 의 동생들도 할 수 없을 로 과의  를 몰랐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의 을 히 갖춘 된 으로서 된 들의 으로 오신 분이시다. 의 는 의 으로 나타날 것임으로 의 은 곧 의 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된  까지의 의 은 곧 의 인 것이다.
는  를 한다. 그러므로 도 에 하여  를 하여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의
이미 에서 한 바이지만 은 에서 되어 그 된 이 을 벗고 된 로서 함으로써 에도 된 들의 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곳이 곧 이다. 로 의 도 먼저 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 로서 있는 들의 도 이루어지지않는 것이다. 그러면 의 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아담으로부터 2 은 의 를 하신 요 ( ) 따라서 를 할 수 있는 를 하던 다. 는 믿음의  아브라함을 불러세우심으로부터 시작되며 따라서 의 의 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까지 는 에 의한 의 다. 하나님의 과 을 함으로 은 의 에 하여 그 는 에서 까지 된다. ( ) 그러므로 에 하나님을 잘 믿고 간 들은 을 한 로서 메시아 하실 때만을 하고 있었다.
II 
예수님은 의 에 하여 의 만을 하셨음으로 예수  까지 2 는 에 한 의 로 남아지게 되었다.
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여 은  의 에 하여 그 는 되어 에서 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에 하여 에서 예수님을 잘 믿고 간 들은 을 한 로서 에 머물러 예수님 하실 때만을 하고 있다.
그러면 은  들이 모여있는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을 라고 하는 것은 의 을 말함이요 따라서 에서 되었던 이 다시 이 까지 되었음을 하는 것이므로 는 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엔 아버지의 을 많이 부어주시마고 하셨음도 (행 2/17) 아담 해와가   하나님가 하던 까지 들이 되어 다시 하나님과 하게 되는 까닭이다. 된 이 이 까지 하면 으로 「너는 라」는 를 받는 것인데 우리는 그 를 알아야할 것이다.
에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하시고는 을 할 수 있는 을 그들에게 한 것인데 (창 1/28) 으로 하여 이 을 하였던 이 믿음으로 하여  의 까지 올라가면 이 했던 을 하시게 된다.
그러므로 「라」는 를 주심은 했던 을 했다는 말씀이지 라는 것을 하심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는 라」는 를 내리시는 또 하나의 가 있다.
예수님의 에 있어서 그 가  의  까지 오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 에 있어서  요한과 같이 의 길을 하여 그를 하기 한 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요한은 된 아담으로 아담 으로 의 를 키 한 사탄 의 를 함으로써 예수께서 의 를 하실 수 있는 를 한  그  위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그를 할 을 가지고왔던 분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님의 그림자와 같은 로서 그의 은 바로 예수께서 하셔야할 을  지고 왔던 사람이었다.
이제 예수님의 에 한 오늘의 하는 들은 예수 앞에 옛날의 요한과 꼭같은 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오시는 님 앞에 히 님의 로 함받은 들이다. 그런데 이 도  과  과  으로 되는 것인데 는 이 에 있어서  로 세워진 사람들이므로 「너는 라」는 를 에게 또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를 모르면 가 인 줄 알고 그러한 를 하다가는 반드시 하고 말아버린다.
지금까지의 많은 한 들이 이러한 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에서 되어 모처럼 애써서 얻은 하나님의 크신 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은 로 된 일이다.
끝날에는 그리스도가 많이 나오게되는 도 이러한  를 모르는 들이 스스로 로 하는 까닭이다.
에도 많은 들이 이러한 를 받고 스스로 를 하고 있는 들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를 깨닫고 이러한 한 를 걷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와같이 아담 해와의  의 까지 한 들도 역시 아담 해와와 같이 되기 쉬운 에 해 있다. 아담 해와가 로 넘지 못한 이 임으로 이 까지 된 들도 로써 아담 해와가 넘지못한 이 을 스스로 넘지않으면 다시 아담과 같이 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에 해 있는 것이다.
같은 를 하여 같은 을 해 나아가는 들도 가 보는 이 다르기 때문에 가 한 으로 되는 것같이 하늘의 12 을 해 나아가는 도 역시 12으로 되어있고 에 한 모든 들도 그렇게 되어있으므로 가  안에 들어서서 본다면 은 한 을 해 나아왔다는 것을 서로 알 수 있게 될 것이지만 이 을 삼고 에 널려서 바라 보고만 나아갈 때는 가 바라보고있는 과 와 의 , ,  이 하지 않음으로써 에게 보여지고 알려지는 이 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다같이 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들이라 할지라도 서로 인 에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을 하여 이와같이 하심도 로하여금 빨리 이 까지 끌어올리기 위함이 그 임으로 이러한 을 하시는 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끝날의 들은 하나님과의 인 의 만을 맺고 있으므로 들 사이에의 의 는 모르고 있다.
따라서 똑같은 을 위한 하늘의 를 하면서도 들 사이에 서로 사탄하며 날로 한 싸움을 하고 있는 는 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컨대 하나의 부서진 를 다시 만들자는 것이 6 의 이라면  들 히 들은 이 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하나를 만드는 것만이 의 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바늘을 만드는 것만이 하나님의  라고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을 만들고 잇는 사람이 하는 일을 하늘것이 아니고 사탄것이라고 하고 한다. 그리고 로 를 주시는 것도 의 을 빨리 끌어올리기 위함이요 또 그 사람이 맡은 그 일만을 하고 보면 그 사람이 그 일에는 실상 임으로 그렇게 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를 받을 때는 가장 한 에 서지 않으면 사탄이 하게되는 것이다.
오늘날 가 이라고 인 에 선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인 가 아니고 에게 맡겨진 인 에서 이라는 을 알고 보면 언제든지 한 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는 어떠한 분이신가하면 오랜 의 을 두고 만들어 놓은 을  모아서 하나의 를 꾸며놓는 분이시다.
이 분이 나타나기 에 반드시  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대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를 만들기 위한 인 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이 나올 것이니 그때에야 비로소 들의 싸움은 끝날 것이다. 이러한 가 바로 끝날에 하나의 를 하는 요한인 일 것이니 이 을 듣고 하여 한 을 가지고 그 앞으로 나와 하게 하는 사람은 그가 만든 것으로 의 한 을 찾아 맞추어 그가 애쓴 에 열매를 맺을 것이요 것만을 끝까지 붙들고 하게되면 다른 사람을  세워 그것을 이루어 맞출 것이니 그때에는 그가 애써 만든 것은 의 없는 으로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뜻을 하고 생각하면 끝날에는 된 모든 에게 이 있으며 또 를 하는 모든 들에게 가 안에 들어서서 서로 보고 하듯이 할 수 있는 하나의 가 나오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III 
예수께서 에 돌아가지않고  아울러 를 할 수 있었더라면 의 도 되었을 것이었는데  만을 이루셨으므로 의 는    의 으로 남아졌다.
예수  2 의 의 에 한  위에 선 의 들은  아울러서 오시는 예수를 믿고 모시고 따름으로 하여 를 벗고 그 는 되어 에서 를 이루게 된다.  오늘까지  를 한 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들이 살 수 있도록 된 에는 어떠한 들도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이 성립된다.
3 첫째
들의 의 은 첫째 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첫째 이란 무엇을 하는가.
첫째 이라는 것은  의 모든 들 에서 에 하여 맨처음으로 를 벗어버리고 의 를 하여 을 하는 것을 한다. 의 은 에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하실 때에 먼저 를 믿고 모시고 따름으로  아울러 히 할 수 있는 을 입어 으로 에 들어갈 수 있는  를 하는 사람이 첫째 에 하는 다.
「내가 또 보매 어린이 시온에 섰는데 같이 있는 가 이니 그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그 이마에 쓴 것이 있더라 이 노래는 땅에서 함을 얻은 밖에는 히 배울 가 없으니 저희가 사람 가운데서 함을 얻어 처음 익은 열매가 되어 하나님과 어린에게 드린 바 되니」(계 14/1~4)라고 하셨고 또 「내가 맞은 의 를 들으니 이스라엘 의 모든 에 맞은 가 이니」(계 7/4)라고 된 은 하늘 에 땅 를 하여 되는 12 곧 12의 를 말함이니 이것은 첫째 에 할 어떤 된 를 말함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이라함은 이미 바울이 밝힌 바와같이 아브라함의  인 이스라엘을 말함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한  이스라엘인 를 말함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12이 벌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에서도 마치 야곱에게 12이 있었으며 모세를 한 12 에는 12 예수님에게는 12가 있었던 것과같은 12를 찾게되니 는 144의 가 되는 것이다.
모세의 을 걸은 야곱도 12을 한 70이 으로 하였고 예수의 본보기을 한 모세도 12를 한 70로써 하였고 예수님의 을 하셔서 되풀이해야하는 예수도 이러한 된 를 찾아세운  위에서 인 를 하시게되는 것이니 이 가 곧 첫째에 할 들의 다. 이는 히 님과 더불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의 을 한 하늘의 들이다.
예수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들이 바라는 한 은 이 첫째 에 하는 것이었다. 이는 로  처음으로 의 으로 설 수 있는 들로서 의 인 임으로 하나님의 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말할 수 없이 한 들이다.
4 에 한 들의
에서 이미 한 바이지만 의 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와 으로부터 되는 와의 의 에 하여서만 되도록 창조되었음으로 는 을 떠나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 )
그러므로 이미 에서 되지 못하고 을 벗고 한 들은 하여 들이 에서 이루지못하고 간 을 들을 함으로 그를 하여  이루어 맞추지 않으면 아니된다.
「볼지어다 주께서 그 성인 여러 과 함께 하여······」(유 1/14)라고 하신 말씀대로 끝날에 모든 들이 하는 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으로서 메시아 하실 때까지 에 머물러있던 들은 메시아   에 하여 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를 할 수 있는 의 들을 함으로써 이 들이 을 벗고 으로 들어갈 때에 그 를 한 도 한 을 받아서 그 와 같이 으로 들어가게된 것이다.
예수 에 달리실 때 「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며 자던 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께서 살아나신 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여러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1~53)고 기록된 것은 의 들이 흙으로 된 무덤을 뚫고 다시 을 쓰고 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은 에서 나서 와 물과 흙에서 나온 로써만 하도록 된 까닭이다.  이 말씀의 대로 을 쓴 들이 무덤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들에 한 그 의 이 에 없을 가 없으며 또 예수님은 이미 에 돌아갔지만 그 의 들을 한 들에게 오는 는 없었을 것이다. 죽었던 들이  그대로 많이 무덤에서 일어났으면 저들은 하고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은 메시아였다는 것을 했을 것이니 그들의 을 유대들이 아니 믿었을 도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들에 한 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은 에 왔다간 들의 가 의 들을 하기 하여 한 것을 보고 한 말씀이다.
 들이   에서 본다면  들이 머물러있는 는 히 그 으로 보아 무덤과 같은 것이다. 그 들은 이 무덤에서 일어나 에 하여 의 를 받아서 그들도 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들을 본 사람들은 에서 잘 믿음으로 할 수 있는 들만이 본 것이지 누구나 다 본 것은 아니다.
이와같이 하신 예수님도 누구나가 다 본 것이 아니라 이 열린 사람들만이 보았음을 알아야 한다.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였다면 하시기 에 또 잡아 에 달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들로서 에 머물러있는 들은 어떻게 로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도 역시 하여 로 하여 에서 할 수 있는 의 들을 함으로 그  가  으로서 으로 들어갈 때 그 를 한 들도 한 을 받아  으로 하여 에 들어가게되는 것이다.
에 모든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을 말하는 것이다.
도 에서 본다면 그 으로 보아 무덤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가 로 들어가면 이 무덤에 있던 들이  하여 들의 를 받아야한다. 그러므로 의 은 하여 그를 하는 의  을 하게됨으로 그 는 무덤에서 일어난 그 의 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엘리야의 은 이 을 하는 가장 좋은 다. 메시아 하시기 에 엘리야가 먼저 한다고하신 말씀은 이미 말라기 를 하여 되었다(말 4/5).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한 엘리야는 바로 요한이라고 하셨다(마 11/14, 17/13). 이에 한 한 은  7에서 한 바이지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사탄 의 을 에서 치못한 엘리야는 요한에게 하여 그를 함으로써 그 을  이루어 맞추려했기 때문에 이 뜻을 하고 보면 요한은 엘리야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들의 는 무엇을 하는가 하면 오늘의 들이 과 을 하며 를 받으며 불을 던지며 여러 가지 의 를 하는 것은 이 에 머물고있던 들이 하여서 하는 임을 알아야한다. 에는 의 는  거두시고 하늘의 들과 들이 서로 하여 가면서 의 을 하여 하는 때임을 알아야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의 에 한 들은 이 모든 들과 서로 만나 서로 앞날의 뜻 를 하여 할 수 있는 것도 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찬함을 얻었으나 허락하신 것을 얻지 못하였으니 대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욱 좋은 것을 하셨은즉 만일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하여금 온전함을 이루지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39~40)고 한 것은 의 의 없이는 들의 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가 로 너희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마 18/18)고 하신 말씀은 에서 치 못하고 간 들의 은 들에 하여 풀지않으면 아니된다는 뜻이다. 그런로 의 뭇 들은 에서 히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고 있으며 들이 할 수 있는 을 찾기에 한 을 보내고 있다.
5 로 본
하나님의 는 인 을 키 하여  를 부르시어서 그 에 한 을 시켜 이 을 그와 한 의 에로 하여 내려오면서 한 를 두고 그 한 를 으로 하여 내려오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인 을 에 널려있는  에게 맡겨서 하시다가 끝날에 이르러서는  하여 하나의 인 을 이루어 맞추시려는 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된 인 이라 할지라도 그 은 에서 으로 은 다시 으로 그 의 를 넓혀내려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믿음의 을 세우는 이 아브라함이요 이 의 으로 나타난 분이 모세요 으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이에 한 한 것은 으로 미루겠지만 「모세가 말하되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가운데서 나같은  하나를 세울 것이니······」(행 3/22)라고 된 말씀을 보아도 나같은  하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킴이니  예수님은 모세임을 알 수 있었다.( 모세 ) 위에서도 히 한 바이지만 요한이 엘리야된 도 요한은 엘리야 사명을 해야될 을 가지고 있으므로 는 다를지라도 은 하기 때문에 을 중심하고 보면 엘리야와 요한은 하다고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오늘날 들이 「나는 바울이라」「나는 베드로라」「나는 감람나무라」「나는 나무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그  는 으로서 에 있는 바울이나 베드로나 은 감람나무 은 나무와 같은 을 갖고 에 태어났으므로 그 들과 한 의 을 해야될 이 있기 때문에 그 을 하고 보면 그 들과 한 으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을 하고 이 을 보면 으로는 그  가 에 은 바울 은 베드로였던 사람들이 한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에 해 본다면 이것은 의 을 키 위한  의 임을 알 수 있다.
에 있어서 하늘인 어떠한 을 띠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된 에 있어서는 인 것을 하고 있으므로 에 그와 의 을 띠고 왔다간 모든 들의 을 해야될 이기 때문에 인 에서 보아 곧 그들의 요 따라서 그 모든 들은 그 사람에게 하여 하게됨으로 으로 본다면 그 모든 들이 한 것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에 한 오늘  의 에 있어서도 나는 이다 다 이다 은 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도 역시 이러한 들이 그 를 하기 하여 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이 에게 맡겨진 을 치 못하면 그 가 됨은 이어니와 그로 말미암아 들의 와 을 위하여 오랜 를 두고 히 바라고 있는 들의 까지도 시키는 인 를 하게되는 것이다.
에 처한 모든  은 들은 모두가 이런 한 인 을 지고 있음으로 로 될 수 있는 인 에 토록 의 을 남길 수 있는 이기도함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6 로 본 들의            126
는 라는 것을 한다면 은 가 흐름에 따라 으로 그의 은 을 하는 으로 밝아가고 있음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의 한 의 없더라도 는 시대적인 을 이어서 받아오게되는 까닭이다. 마치 에 한 모든 들이 가 흐를수록 의 들이 한 으로 하여 인 을 입는 것같이 에 있어서도 가 흐를수록 의 사람들은 에 왔다간 들이 쌓아놓은 의 을 받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의 을 해 본다면 비록 똑같은 바탕을 타고난 사람이라할지라도 보다 는 훨씬 더 높을 수 있는 의 을 받게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인 에 따라 의 가 있음으로 을 벗고간 모든 들은 에 있는 에서 비롯하여 하는 (이것은 사탄이 한다)에 이르기까지 는 을 붙들어 그의 인 을 받으려하는 것이다. 다만 들과 하는 것은 이 높아야함으로 한 일이 아니지만 로 들과 하는 것은 히 한 것이다.
에 이 오는 것은 들이 모두 인  을 받기 위한 으로 에게 하여 하는, 곧 들의 에 한 이다. 예수께서 이 들을 내어쫓음으로 를 하신 도 여기에 있다.
현 에서는 이러한 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만으로 하여 하는 것이다.  들의 에 한 의  은 의  으로 나타나는 것임으로 ( ) 의 인 을 하여 사탄이 할 수 있는 인 을 함으로서 을 하는 것도 가 있지만 가 높은 사람이 로써 을 하면 에서 되는 것이다.
가 높은 사람은 마치 우리가 사람을 보듯이 그 에 하고 있는 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아니라 에서 무엇하다가 죽은 인가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들과 하게 되는 것도 서로 을 하는 까지 들어가야한다.
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한 을 쌓게되면 같은 으로 에 있는 의 들과 하게 되는 것이고 의 를 하고 그런 에 들어가면 에서 를 하다가 간 들과 하게되며 또 은 과 하게 되는 것이다. 때가  끝날을 하게 됨에 따라   의 을 비롯하여  모를 이 많이 일어나게되는 것도 사탄의 으로 움직이는  들의 이 하게 되는 까닭이다.
7 에 한            128
메시아를 보내시기 하여 하나님도 아브라함으로부터 을 불러 하나님의 뜻만을 받들 수 있는  을 하셨고 이  위에 다시 요한을 보내어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를 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님 에도 된 를 부르시사 께서 하실 때에 저를 잘 받들 수 있는 인 의 을 해 오셨으니 이제는 다시 이 터 위에 의 요한과 같이 의 길을 곧게하는 를 보내시사 새로운 의 를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타나시기 에 요한을 하고 를 맞을 수 있는 들이 모인 것같이 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이 요한인 를 하고 를 맞을 수 있는 들이 한곳으로 모일 것이니 이 모임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이미 위에서 한 대로 에 있는 모든 들은 하여 의 한 들로하여금 님을 맞을 를 하는 곳으로 가도록 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날에는 들의 에 하여 를 가진 들이 모이는 한 곳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바리새들이 예수에게 「여 어디오니까」하고 하실 를 물어봤을 때에 「주검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느니라」(눅 17/37)하고 예수님은 비꼬아서 하셨다.
이 말씀은 주검있는 곳에 독수리가 아니 모일 수 없는 것같이 있는 곳으로 님이 오실 것이 아닌가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있는 곳이 어디일 것인가하면 바로 들의 를 받아 하는 가장 한 들이 모이는 곳이 아닐 수 없다.
들도 의 를 받는 의 가 를 만나 히 되어야 도 그와 한 을 받을 터임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의 가 하는 에서 들을 하여 를 만나게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의 모든 한 들의 에 하여 님을 맞을 수 있는 한 곳으로 모이게 될 것임으로 의 은 이렇게 의 인 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의 을 로 하시는 에 나타나는 로서 이 하는 을 따라나아가는 는 어느 것이나 하나님의 뜻가운데서 세워지지않는 것이 없다. ( )
하나님의 의 는  이스라엘을 하여 그를 하고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의 들은 그 을 이끌어서 이 하는 으로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를 세워 그 을 하여 내려온 것이다. 을 두고보더라도 가 들어오기 에는 와 가 있어서 그것으로써 을 세워 의 을 높이고 그의 터를 넓힘으로써 에 를 받들 수 있는 의 를 하여온 것이다. 들이 다른 에 한 인 을 하기 전에는 의 는 히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한 을 위하여 의 모든 것을 다 하여가면서 을 하게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그들을  으로 보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 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걷는 길도 역시 길임에는 틀림없다. 길이 보이지 않는  그 길이나마 걷지 않았다면 은 어떠한 에 빠졌을 것인가.
곁길을 걷는 것은 길로 들어서기 위함인데 지금에는 본길이 보이는데도 하고 곁길에서만 하고 있으니까 잘못이라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요 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으니 에게는 모든 들을 곁길에서 본길로 해야할 이 남아져 있다는 것은 이미 하였다.
그러므로 에서 어떤 을 거쳐서 간 들일지라도  는 있을망정 가 거친 의 에게 하여 의 들과 마찬가지로 님을 맞을 수 있는 한곳으로 가도록 하여 주게되는 것이다.
같은 의 들사이에도 이 한 곳으로 가도록 를 받는 에는 그 의 여러 가지 인 에 따라 의 가 있는 것이다.
위에서도 한 바와같이 끝날에 이러한 들이 한 의 의 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를 이루어나아가는 새 의 들이 모이는 이 곳으로 그를 보내기 위한 는 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이 를 하는 곳으로 못가도록 를 내리는 일이 있게되는 것은 그 사람으로서의 가 아직 오지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에서의 와  없이라도 그 하는 곳에서 말하는 이라든가 또 거기서 일어나는 을 보아  로 하여 그곳으로 가게 되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의 이 열리게되는 것이니 끝날에는 오직 있는 가 깨달으리라(단 12/10)고 말씀하셨음은 곧 이것을 뜻한다. 이와같이 하는 곳으로 오게되면 그 사람이 그때까지 받아온 의 도 하여 의 를 넘어서 에 한 놀라운 를 많이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은 에게 뿐만 아니라 에 있어서도 그 가 하나님의 뜻에 되는 에 따라서 그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에는 의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에는 의 들이 에 하여 으로하여금 한 곳으로 모이도록 를 할 것만은 틀림없다. 예수님 에도 예수께서 를 쫓으려할 때 그 는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이 있는가」(마 8/29)하고 사탄도 예수님을 한 것같이 끝날에도 를 위하여 세워진 곳이라면 이곳에 하여는 들까지도 어떠한 곳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한 사람도 이나 들이 아니었고 의 였으니 끝날에도 를 모르는  들은 아무것도 몰라도 도리어 들이 이것을 하여 놀라운 를 할 것이니 오늘의  들은 옛날의 유대 들의 에 서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의 은 이렇게 되어 인 으로 남아있고 은 의 로 의 은 하늘과 땅을 하는데까지 이끌어갈 것이니 이 때가 곧 새 에덴을 한 때요 하나님이 히 하실 수 있는 이 되는 때다.
이 한날의 기쁨을 보시려고 하나님은 6이란 한 의 를 해 오신 것이다.
5
1 의 뿌리               133
된 에게 있어서 가장 큰 는 를 어떻게 하는가하는 일 것이며 하나님의 의 의 도 으로 하여금 의 탈을 벗어버리게하고 없는 의 으로 케하시려는데 있는 것이다.
 해야되는 것도  를 짓기 때문이니 마치 뜯어도 뜯어도 다시 돋아나는 봄동산의 풀잎과 같이 날마다 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하지만 하는 보람도 없이 어디선지 는 돋아나고 또 돋아난다. 의 쓴 멍애를 벗고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는 의 이 되려면 의 잎을 뜯고있는 을 거듭하면서 하신 예수님 앞에; 겨우 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 를 거치어 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과 을 하여 로 예수 앞으로 나아가 를 맞이해야될 것이다. 그러나 로 의 뿌리는 에게 알려져있지 않다. 따라서 아지 못하는 뿌리를 뽑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 의 의 들이 많이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하늘의 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하는 것은 들의 에 맡기는 바이지만 로 하여금 하게 한다면 이것은 의 나 에 되어있는 어떠한 에서 으로 세워진 이 아니요 이 말씀은 말씀대로 하늘로부터 인 를 가지고 에 내려온 것이다.
이 말씀을 는 으로 은 으로 은 으로 맞추어보는데 지나지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새 의 를 받을 수 있는 까지 올라간 사람은 이 말씀의 를 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에 쓰여있는 까지도 그대로 로써 알려주시는 까닭이다. 이 말씀을 듣고 하는데 이르면 의 들은 로써 못할 의 불을 받으며 와 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하늘에서 하는 말씀이라면 그 말씀에 히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를 주셔야 이 말씀을 하늘 것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인 신앙을 가지게되어야 한 말씀을 하고 모든 가 하나되어 한 뜻을 하여 나아가 하나의 를 이루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도 이러한 밑에 읽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를 따먹는 것이 죄의 뿌리라(창 3/6)고 는 말해준다. 그러나 부터 말한다면 이 는 이 아닌 것이 하다
은 나면서부터 가 되는 이라는 것을 보면 로부터의 는 으로 되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2 )
그렇다면 으로만 한  이 에서 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는 인 것으로 시작되었음을 할 수 있다. 은 허물있는 곳을 가리려는 것이 그 이다.  아담 해와가 을 따먹는 것이 의 이 되었다면 입이나 손을 가리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를 잎으로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었을 것인가(창 3/8~8).
벗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도록 된 아담 해와(창 2/25)가 어찌하여  에 에 한 부끄럼을 느끼게 되었는가(창 3/10). 욥에는 「내가 언제 아담처럼 허물을 가리거나 내 을 가슴에 숨겼더뇨」(욥 31/33~34)라고 되었다. 아담이 허물을 가리었다했으니 아담이 가린 곳이 허물이 되었다는 말이며 따라서 가 허물이 되어서 부끄럼을 느껴 가리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의 이러한 아담 해와의 는 무엇을 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의 뿌리는 따먹은데 있으며 따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치 않은 에서 한 를 맺었다는 것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하시고 「을 주시며 이르시되 하고 하여 땅에 하라」(창 1/28)고 하셨다. 하나님의 은 아담과 해와가 로서 되어 하는데서 이루어질 것이요 은 사랑을 거치지 않고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을 이루어야할 사랑이 어찌하여 부끄러운 것 더러운 것 한 것이 되었는가 더구나 벗고있어도 부끄럽지 않도록 된 아담 해와에게 있어서랴.
이는 곧 인 사랑으로 했다는 것을 한다. 도 도 도 와 도 그의 한 은 사랑에 있을 것인데도 하고 사랑을 이처럼 부끄러운 것 한 것으로 생각하게되었다는 은 바로 사랑이 의 이었음을 알려주는 일 것이다.
가장 한 것으로 주신 것을 사탄이 하여 를 이루어나오고 있음으로 이것이 가장 한 것으로도 보이고 에 가장 한 것으로도 생각되는 것이다. 을 하고 아이들이 하면 부터 가리게되는 것도 된 이지만 을 하는 의 움직임은 에 은 로써 되었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에게 가 되었던 것도 이 의 뿌리를 아지못하고는 풀리지 않는다. 「은 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고 하신 말씀대로 에 한 는 이렇게 인 을 세워서 를 하셨다.
로 아담이 하나님의 뜻대로 를 쓰지 못하여 되었음으로 그 을 찢어 의 피를 뽑아 을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로 설 수 없음으로 를 하는 것이다. 야곱이 얍복을 넘을 때에 환도뼈를 친 일이며(창 32/25) 이스라엘 이 깊은 를 할 때에는 환도뼈에 손을 대고 한 일(창24/2)들은 모두 의 뿌리가 에 있음을 하는 것이다.
에 있어서 가장 큰 는 이다. 많은  가 으로 하였고 소돔 고모라와 같이 도 으로 흐를 때 하나님은 저를 하였으니 이 모든  도 의 은 에서 되었음을 말하고있다. 의 도 그러하지만 에 일어나는 의 의 도 인 에 한  의  에 있다는 것은 은  에서도  하게 되었으니 이것도 의 뿌리가 어디 있는가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한 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하시고 의 길과 의 길 두 길을 보여주셨는데 도 치않고 나아가도록 아담 해와를 몰아낸 은 사랑 에 아무것도 있을 수 없으며 더구나 먹는 것이 그 이 되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해와로하여금 따먹도록하게된 는 무엇이었는가하면 그것은 뱀이라(창 3/1~4)고 되었다.
로써 밝혀진 바이지만 을 한 의 모든 은 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뱀도 인 가 아니다. 인 가 하나님의 뜻을 알며 을 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를 케한 뱀은 의 뱀이 아니라 그것은 를 한 것이다.  12을 보면 「큰 이 내어쫓기니 옛 뱀이라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니」(9절)라고 되어 있다. 옛 뱀 마귀요 은 사탄이라고 하였으니 마귀나 사탄은 곧 된 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 되었다는 인 를 찾아보면 「하나님은 를 한 를 치 아니하시고 에 던져 어두운 구렁이에 두어 할 때까지 지키게하셨으니」(벧후 2/4)라고 되었으니 이 말씀을 보더라도 가 범죄한 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천사는 어떠한 를 하였는가하는 는 유다에서 밝혀질 것이다.
「또 제 를 지키지아니하고 그 를 떠난 를 께서 한 결박으로 어두운 가운데 가두사 큰날의 을 기다리게 하셨거늘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고을이 그 모양 (의 모양)을 본받아 간음을 하고 괴이한 을 따라가다가 한 불의 을 받아 표가 되었나니라」(유 6/7)고 된대로 도 역시 아담과 해와와 같이 간음으로 인하여 된 것이 하다. 이와같이 은 하나님이 치않은 에 있어서 뱀의 에 하여 한 를 맺음으로 되었음을 알았고 도 간음으로 하였다는 도 알았으며 을 한 뱀이 바로 라는 도 알았다.
그러면 된 아담과 해와와 된 인 사탄은 어떠한 를 갖게 되었는가하는 것은 예수께서 히 하신 말씀인 「너희들은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을 너희도 하고자 하나니라」(요 8/44)하는 을 보아서 그들은 서로 를 맺었다는 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해와는 와 를 맺었기 때문에 그의 은 마귀의 이 된 것이요 또 요한도 이스라엘들을 하여 의 라고 외치어 그들도 역시 뱀으로 된 사탄의 임을 한 것이다.
을 의 이라 (레 20/5)하신 말씀을 보아도 의 의 이 에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또 「해와가 뱀의 에 된 것같이 너희 마음이 하여 그리스도를 하는 과 한 마음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고 된 것을 보더라도 의 은 마음이 한 것과 한 마음  를 잃어버린 것이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아담과 해와는 어떻게 과 를 맺게되었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2 과 해와의 과 아담의          139
사탄은 욥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듯이(욥 1/9)  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여 으로 끌어가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도「대개 우리 를 참소하던 가 쫓겨났으니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라」(계 12/10)고 하여 우리를 참소하는 사탄이 있음을 하였다. 그러나  로 에 있는 어느 한사람도 사탄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여 그를 하려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남의 을 히 아지못하면 그 사람이 인줄 알면서도 에 하여 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사탄이 한 것은 알고 있지만 사탄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를 하였는지 그 을 아지 못하였음으로 그를 하나님 앞에 참소할 을 세우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의 을 아는 사람이 없을 때는 아무리 큰 이라도 떳떳이 살아갈 수 있는 것같이 사탄이 피조세계를 떳떳이 하여온 것도 사탄이 사탄된 과 를 알아 그의 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는 사람이 없었던 까닭이다.
라는 것은 사탄을 완전히 한 임으로 이  를 할 수 있는 을 하여 를 하려면 사탄까지도  시키어 그를 하는데 이르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새에덴을 찾을 수 있는 끝날의 들은 모두 사탄이 사탄된 을 알아가지고 이것을 하나님 앞에 으로 세워서 가 사탄을  시킬 수 있는 가 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밝힐 수 없는 하늘의 을 과 로써 를 하여 먼 를 두고 하셨고 과 의 흐름을 하여 으로 보여주셨으나 은 하여 이를 깨닫지 못한 채 한 는 하였다. 하나님 품 속에 감추어있던  이 을 오늘에 이르러 뭇 에게 시킬 수 있는 를 에서 찾아세움으로 사탄의 를 밝히어 우리들이 손으로 사탄을 할 수 있는 을 올리게 되었으니 하늘땅의 기쁨이야 얼마나 클 것이며 사탄의 슬픔이야 얼마나 할 것인가.
사탄도 이제는 에 이르러 의 을 할 때는 온 것이다. 그러면 이제 와 해와와의 에서 아담의 에 이르기까지의 을 키로하자.
에는 하나님 한 분만이시오 그 밖의 모든 은 하나님의 에 하여 된 것이다. 그러므로 들도 하나님이 하신 이다. 사탄도 부터 하였다는 인 을 세우는 들도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의 에 한 에서 오는 인 것이다.
하나님은 에 를 하셨다. 그리고 를 하신 은 첫째로 하나님의 에 한 으로 세우기 함이었다. 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한 을 하였고(창 18/10) 그리스도의 의 를 하였고(마 1/20, 눅 1/31)  의 에 한 은 많이 있는 것이다(왕상 19/5, 눅 16/22, 행 12/7~). 그러므로 는 「부리는 」이라하였다(히 1/14).
둘째로 는 하나님에게 을 드리는 로서 되었다(계 5/11~12, 7/11~12). 이와 같이 를 하신 에는 마치 이스라엘 의 의 기관으로 아브라함을 세우듯이 에 한 사랑의 으로  누시엘을 세웠다. 그러므로 누시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하는 것과 같은 에 있었다. 이러한 으로 된 는 보다 에 한 에 해 있음으로 들은 들까지 한다고 하였다(고전 6/3).
하나님은 를 하신  를 하시고 그의 로서 을 하셨다. 로써 된 바와같이 은 하나님이 히 하실 수 있는 이요(고전 3/16)는 의 을 받아야 할 임으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보다 더 가까운 사랑의 에 두셨던 것이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을 하시기 이나 나 함없는 것이었지만 아담과 해와가 보다 더 하나님 앞에 가까운 사랑의 에 있는 것을 볼 때 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에 한 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누시엘은 아담과 해와에게 가는 사랑에 있어서도 가 에서 가졌던 것과 한 를 하려하였다.  누시엘이 해와를 하게 된 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누시엘이 해와와 더불어 를 할 때 해와는 누시엘에게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으로 보여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의 의 이요 과 의 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일수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같은 들 사이에 있어서도 하나님에게 가까운 한 사람일수록 아름답게 보이거든 하물며 보다 높은 사랑의 를 차지하고 있는 을 바라보는 천사장에게 있어서랴. 그러므로 아담 해와는 에게 히 아름다운 로 보였다. 더구나 해와가 의 말에 끌리우는 을 보이게 될 때 에 하여 그는 말할 수 없이 사랑의 인 을 일으켜주는 으로 나타났다.
이에서 누시엘은 죽을 것을 무릅쓰고 해와와 으로 한 를 맺게되었으니 이것이 곧 이다. 가 간음으로 되었다는 는 바로 이러한 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 와 의 가 이러한 인 를 맺을 수 있을까하는 는 인 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과 인 와의 모든 은 어떤 에 있어서나  와의 과 도 다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더 하게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번번히 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지만 과 까지도 하는 이 있는 것이다.
가 얍복을 넘기 에 야곱과 밤새도록 싸워 그의 환도뼈를 꺾은 이며 (창 32/25) 아브라함의 에게 그 를 하러왔던 가 고기를 먹었다는 것(창 18/7~8)과 소돔을 하기 하여 롯의 집에 간 두 를 가리켜 그  백성들이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고 외친  을 미루어본다면 이 는 쉽사리 될 것이다. 이와같이 사탄이란 가 먼저 있어서 해와를 시킨 것이 아니라 누시엘의 은 해와의 과 에 되어 사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도  한 바이지만 을 의 이라하였고 가 이렇게 사탄의 을 받았음으로 는 로 인 로서 되는 것이요 예수님도 이스라엘을 보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요 8/44)고 하시어 그들을 마귀의 인 이라 하셨고 요한도 「이 의 자식들아···」(마 3/7)고 외침으로써 은 사탄의  임을 하였으며 바울도 「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들도 또한  마음에 하며 됨을 기다리나니」(롬 8/23)라고 하여 에 있는 사람들은 이 다름으로 하나님 앞에는 가 되어야한다는 것을 한 것이다.
사랑에 하여 를 이루면 그 에서 그의 를 받을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해와도 누시엘과 를 이룸으로써 의 를 받았으니 첫째는 의 을 받았다. 누시엘은 하나님이 치않은  을 할 때에 을 하는 의 으로부터 오는 을 갖게 되었음으로 이 인 이 그대로 해와에게 전해진 것이다. 에게 이 들 때는 반드시 을 해서 되는 것인데 그 은 이런 인 에서 오는 것이다. 다음으로 해와가 받은 는 의 였다. 해와는 하나님에 한 사랑의 에 있어서는 보다 에 있었으나 아직 에 있었기 때문에 ( ) 에 있어서는 이미 에 한 만 못한 에 해 있었던 까닭이다.
이와같이 해와가 의 를 받고 보니 은 의  가 아니요 아담이 의 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아직 에 했던 아담과 해와는 와 같은 에서 란 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제 을 하고난 해와는 이제라도 의  를 찾아세움으로써 다시 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을 코자하여 아직 을 모르는 아담에게 「따먹으라」고 사랑을 하였다.
아담도 해와의 에 함으로써  이 되어 해와가 에게서 한 와 를 아담도 그대로 받게되니 이에서 그들은 부끄럼을 느껴 잎으로 를 가리고 숨게 되었다.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대로 되었더라면 하나님을 한 사랑의 를 이루어 하고 하여 하나님의 대로의 없는 가 땅에 케되어 을 이루었을 것이었는데 (창 1/28) 에서 사탄을 하고 사랑의 를 이룸으로써 사탄의 를 케되어 모든 는 사탄이 하는 이란 에 머물게된 것이다.
3 과 가 를 하게된              144
로써 되어 에 하여 하는 은 스스로 의 길을 걸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의 이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은 그 에 하여 을 하도록 몰아내는 의 힘보다 더 한 힘이 부닥칠 때는 그 도 에서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나 에 이 없는  는 돌 수 없으나 가 달리는 힘보다 더 한 힘에 부닥칠 때에는 케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원리의 어떤 힘보다도 한 것이 사랑의 힘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힘은 의 어떤 힘도 그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의 힘만이 과 로 하여금 를 케할 이 있음으로 「따먹지 말라」하는 을 케하여 이 을 하려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사랑의 힘을 이렇듯 의 힘도 그를 할 수 없을 로 하게 하셨는가 하면 그것은 사랑을 사랑답게하기 함이다.  은 되면 하나님의 품 속에서 어떠한 힘에도 끌려가지않을 로 한 사랑에 품겨 하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으로써 을 하려하신 것이다.
 이 사랑의 힘이 의 힘보다 이 아니라면 그런 이 한 사랑은 차라리 그 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주시되 끝에서도 끝의 사랑을 주시려하여 끝에 세워놓으니 떨어질 가 있어서 「말라」는 를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말라는 을 주신 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들이 믿고 오듯이 로 지키는가 아니지키는가를 보기 한 으로서 세운 것이 아니라 에 세워놓은 사랑이니 떨어질 가 있음으로 떨어지지 않게하기 한 의 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따먹지 말라」하는 은 언제까지든지 에게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할 때까지의 에서만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해와가 되어 하나님을 하고  을 이루었더라면 따먹는 것은 인 것으로 될 것이었던 까닭이다. 이와같이 그들이 인 를 이루어 그 인 사랑의 힘으로 되었더라면 그들을 그 인 사랑에서 끊을  는 없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사랑의 힘을 인 것으로 세웠기 때문에 에 있어서는 될 가 있어서 말라하는 이 했지만 그들이  된 에는 도리어 사랑의 힘이 이기 때문에 그것을 끊을 는 없는 것이다. 이란 것은 사랑을 한 을 하게될 때를 하는 것임으로 아직 의 에서 을 느끼지 못하는 에 한 아담 해와에게 있어서는 따먹지 말라는 은 한 것이며 또 이것을 하는 것도  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직  때문에 이런 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은 이 히 지켜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옆에 이란 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한 의 사랑에 될 때까지의 에서만 지키기를 한 것이다. 이 되어 하나님을 하고 를 이룰 때는 하나님의 를 받기 때문에 의 를 받아 눈이 밝아져서 를 가리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따먹으며 눈이 밝아지리라」는 의 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요 눈이 밝아지기를 바랐던 해와의 도 은 아니다. 다만 아직도 에 있는 으로서 된 의 것을 하려는   때 아닌 때에 때의 것을 바라는 과 의 해와에게 한 한 이 을 할 때 그 에 한 힘은 그들로 하여금 을 지향하는 를 케한 것이다. 의 를 받기 해 문을 열어놓으니 찬 바람이 들어온다. 그러나 이것은 이다. 바람은 하기 때문에 바람다운 것이요 하기 때문에 , 에 하여 비 오고 눈이 오며 하기 때문에 는 로써 의 을 받아 을 한다. 는 이러한 에 하여 을 열면 그를 해 로 하는 것은 이다. 그러므로 도 제대로 받고 바람도 막으려면 여기에는 반드시 유리을 달아야한다는 이 한 것이다. 이와같이 인 사랑도 하고 도 되지않으려면 「따먹지 말라」는 은 인 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은 로서 하나님을 섬기는가 아니섬기는가를 보기 한 ()의 은 아니다. 하나님은 된 과 같이 을 즐기는 하나님이 아니신 까닭이다. 다만 아담 해와에게 인 사랑을 하기 하여는 하나님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의 이었다. 그러므로 이 을 지켜야하는 것은 바로 아담 해와가 걷지 않으면 아니될 였던 것이다.
4 와             147
에게 된 가장 큰 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로 하여 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들도 많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에게 있어서는 과 의 두 길이 되어 있었음으로 로써 의 길을 버리고 의 길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로 하여 되었다면 아무리 큰 으로 된 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가 있는  은 된 에도 언제든지 할 수 있을 것임으로 우리가 을 바라고 나아갈 조차 가질 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될 있는 한 을 지으셨다고 할 수 있을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을 할 수 없다는 이 될 것이다.
우리가 를 찾으려는 은 을 하려는데 있고 을 실현하려는 은 의 를 다시 찾을 수 있는 에덴동산을 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는 이 찾지 않으면 아니될 인 으로 남아진 것이다. 왜냐하면 에 있는 은 모두 사탄의 억세인 에 하여 의 로 돌아가기 한 를 잃었기 때문에 그 를 찾음으로써만 의 를 할 수 있을 것임으로 의 을 하고라도 그 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으로 하여 를 잃어버렸음으로 그 그 를 다시 찾기 해 죽는 것이니까 때문에 죽는 것같이 보여지는 것이지만  그 가 의 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가 를 찾아나아감에 따라 를 찾아 부르짖는 의 소리가 더욱 높아가게되는 것도 은 으로 하여 를 잃어버렸던 것임을 하는 이다.
를 떠난 가 있을 수 없는 것임으로 없는 나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리는 이 없는 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로 하여 하나님의 설움을 자아내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의 이 계신 곳에는 함이 있나니라」(고후 3/17)고 하셨으니 이 계신 곳에만 있을 수 있는 로 하여 이 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따먹지말라고 하신 것을 보면 따먹을 수도 있고 아니 따먹을 수도 있는 의 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에게 있어서는 위에서도 말한 바와같이 이 의 로서는 되지 않는다. 따먹는 것도 아니 따먹는 것도 모두 아담과 해와에게 있어서는 된 에는 될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가 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될 때까지의 자라는 에 있어서는 과의 을 하시어서 말라는 을 세웠던 것뿐이다.
 이라고 하는 되는 가 없었더라면 말라하는 은 세울 조차 없었을 것이다. 와 같은 에서 서로 라는 것을 모르는 에 있어서는 이런 는 할 수도 없을 것이요 그들이 서로 라는 것을 알게될 때에 벌써 된 임으로 하나님도 이 를 치 않을 수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따먹지 말라 하신 것은 되면 하나님을 하고 를 이루어야할 니 에 있어서 를 하고 그런 를 맺지말라는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하기 함이었다.
이와같이 아담과 해와가 을 알게하는 나무 앞에까지 나아간 것은 의 에 한 였음으로 가 될 수 없으나 이 을 넘어 따먹도록 해와를 이끌어낸 것은 가 아니라 의 힘보다 한 사랑의 힘이었다. 의 를 하도록 이끌어주는 의 힘보다 사랑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은 의 길로 끌리어 들어가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의 는 으로 하여금 을 넘게하는 는 되어도 그 을 넘게하는 인 은 되지않는 것이다. 이 다 자라서 이되면 어련히 로 가서 마음대로 물을 퍼먹을 수 있도록 파놓은 우물이언만 이 우물 옆에 가지말라고 어린 아이들에게 타이르는 것은 거기에 간다는 의 가 가 되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린 아이들임으로 우물 옆에 가는 것을 함으로 말미암아 빠질 수 있는 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아담 해와도 이 되면 의당히 의 로써 따먹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지만 따먹지말라고 하신 것은 그 가 가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임으로 말미암아 따먹는 것을 하면 과 그런 를 맺을 수 있는 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키지 못할 을 주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의 로써 의 어려움없이 할 수 있는 계명이었는데 다만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과 하게 되니 이로써 의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로 으로 보면 까지 나아가게한 에 하여 그 을 넘은 것같이 보여지나 실상 그 을 넘게한 것은 의 가 아니라 인 사랑의 힘이다. 그들이 되었으면 이 까지 나아간다 하여도 그들은 보다 더 큰 의 인 사랑에 되어 있기 때문에 과의 사랑에 끌리어 이 을 넘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의 라는 은 에 있는 에게도 히 남아있음으로  마치  아담 해와가 의 로써 까지 나왔었고 이 을 넘게한 것은 인 사랑의 힘이었던 것과 같이 도 의 로써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까지는 나올 수 있고 이 을 넘는 것은 인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다. 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까지 나오는 것이 에 남아진 5%의 이요 이 을 넘겨 으로 이끌어주시는 것이 95%의 하나님의 이다. 의 로 하여 까지 나온 을 시켰으니 로 의 로 하여 까지 나온 을 하는 것도 으로 될 수 있는 이다. (  ) 그러면  을 이 의 까지 이끌어낸 으로 한 을 하나님은 치 않았음으로 의 까지 을 이끌어내는 믿음으로 한 도 사탄이 치 못한다.
하나님이 을 두고 를 하실 수 있는 것은 이와같이 사탄도 할 수 없는 에 한 의 란 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에 한 모든 들이 을 잡지 못하고 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것은 이와같이 하나님 편과 사탄 편이 갈라지는 에서 하나님도 사탄도 할 수 없는 의 로써 를 하여  로 찾아 나아가야할 에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 의 이 이루어지는 것도 의 의 와 하나님의 사랑에 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5                   151
I 하나님과 같은 을 하지 못함
이 타락하게된 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을 하나님과 같은 에서 사랑치 못하고 하여 해와와의 사랑을 한데 있다.
가 사랑하는 동생을 와 같은 에서 사랑하지 못하고 하는 마음,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그 사람과 같은 에서 기뻐하지 못하고 하려는 마음 은 다 이 의 으로부터 된 것이다.
II 의 를 떠남           152
이 를 하기 에 의 없는 가 어떻게 해와를 꾀이는 에 설 수 있었던 것인가하는 를 먼저 해야될 것이다.
하나의 사랑에서 하여 하나님을 하고 해야할 이 사탄을 하고 한 것이 이다. 이렇듯이 과 은 하나의 사랑에서 시작되어 의 을 하여 된 것이므로 의 는  이 의 을 히 의 으로 돌리려는데 있나니 이 의 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에서 으로 된 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이요 하나는 이다. 는 과 해와를 시킨 이요 는 아담과 해와를 시킨 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두 을 하나의 에 모아놓고 한번에 180의 을 하러오신 분이었는데 로 하여 예수 의  을 잃고보니  만을 하고  은 의 으로 남기고 가신 것이다. (메시아의 과 그 의  )
이라는 것도 같은 에서 하여 하나님을 하고 하면 이요 사탄을 하고 하면 이다. 그러므로  그 는  하나님이 주신 이다. 다만 이것을 사탄의 뜻을 한 으로 하였기 때문에 가 되는 것이다. 믿음과 과 사랑이라했으니 이 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 편으로 나아가려는 을 한다. 이 있길래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려고 보다 더한 , 보다 더한 를 해 애쓰는 것이 아닌가. 바울이 남의 쌓은 터에 하지 않겠다고 를 찾아다니며 누구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던 그 커다란 은 마침내 그같은 과 의 한 을 남기게 한 것이다.
이와같이 에서 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은 이 사탄를 하는 곳으로 흘렀기 때문에 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를 하고 하나님의 뜻을 한 을 하게 되면 모두가 이 된다. 그러므로 에게 있어서도 은 으로 되었던 이다. 또 과 에게는 를 주셨던 것이다. 가 있는  의 이 있을 것이고 의 이 있는  에게 가는 사랑이 가 받는 사랑보다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아담 해와인 것을 아는 이 이란 이 있는  아담과 해와가 받는 사랑과 같은 사랑을 도 받고자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이 아니라 의 임을 알 수 있다. 치 않은 에게 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이 을 넘어서 아담과 해와에게 가는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하려는데서 이 된 것이다. 이 을 넘도록한 것이 곧 사랑의 힘이다. 굶주린 사람이 먹고 싶다는 을 가지는 것은 이다. 이는 의 을 한  이다. 예수께서도 목마르실 때 물을 마시려하셨고 하실 때 쉬려하신 은 하지 못하셨다(요 4/6~7). 다만 먹고싶다는 을 넘어서 훔쳐서라도 먹어야한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 비로소 는 시작되는 것이다.
「또 제 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를 떠난 ···」(유 1/6~)라고 된 말씀과 같이 을 넘어서 제 를 떠날 때 는 시작되는 것이다. 로 된 은 반드시 그 를 떠나서는 를 하지 못한다. 하나의 는 와  또 의  에서 된다.
이제 는 하나님의 에 한 사랑의 를 떠나 에 한 사랑의 를 하려고 하여 그 를 떠난 것이 의 이다. 이 를 하케하는 의 힘을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의 힘뿐이라는 것은 한 바와같다. 이와같이 벌써 사랑의 인 에 하여 하려는 을 로하여 그와 을 함으로 인 힘을 케한 가 해와요 한 해와의 를 한 것이 아담이다. 를 한 들이 의 를 깨닫지 못하고 분에 넘치는 을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의 인 것이다.
모든 는 의 를 떠나는데서 나온다. 이 해와를 시켰고 해와는 아담을 시킨 것도 그러했지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의 를 떠난 까닭이다.
III            154
도 의 을 받아야할 라함은 이미 한 바와 같다. 그러나 로 은 하직 에 한 해와를 하였고 해와는 그의 을 받은데서 은 되었다. 에 하면 아담은 하나님 인 이기 때문에 해와의 임으로 아담은 해와를 하고 해와는 아담에게 을 받아야 인 을 하여 되지 않았을 것인데 거꾸로 되어 해와가 아담을 하여 따먹기를 했고 아담은 해와의 을 받아서 케된 것이다. 모든 은 남을 하려는  의 에서 나오는 것이요 하나님까지도 하려는 의 도 으로부터 한 것이다.
IV 를 함               155
과 은 가 을 하여 한 의 를 맺는데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를 한 해와와 과의 한 에 한 인 힘은 아담을 하였다.  해와가 된  를 아담에게 시키지 않았더라면 아담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들도 를 하려는 를 바로 해와에게서 받은 이러한 에서 나온 것이다.
6 사탄과             155
I  누시엘과 사탄
된  누시엘을 사탄 은 마귀라고한다는 것은 한 바와 같다. 의 으로 된 아담과 해와를 하였으므로 사탄은  이기는 하지만 으로써  의 의 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탄을 이 의 임금(요 12/31)이라고 하였고 또 「이 의 」(고후 4/4)이라고 하였으며 모든 도 사탄의 이라하였고(요 8/44)「도 헛된 것에게 하여 한다」(롬 8/20)고 되었다. 하나님이 사탄을 로 시키지 아니하시는 것은 의 로 된 와 임으로 다시 찾으시는 의 로 의 로 된 와 임으로 다시 찾으시는 의 로 의 를 두고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탄이 의 의 를 하는데로 두고 인 을 하면서 사탄을 몰아내는 를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에 나타나는 으로만 한다면 하나님과 사탄은 인 을 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도 이런  가 있는 까닭이다.
III 에 한 사탄의                 156
사탄도 를 하여 을 치 않으면 사탄인 과 사탄인 과 사탄인 의 힘을 치 못한다. 사탄의 을 할 수 있는 는 사탄 에 있는 요 이 는 또 한 의 와 을 하는 것임으로 그 의 은 그대로 을 하는 의 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는 사람이 아닌  들은 그것을 들의 임을 치 못함으로 그것을 의 의 로만 하고 있는 것이다. 에 나타난 로 보더라도 을 품은 가룟 유다의 는 곧 사탄이 하는 와 을 하여 도 할 수 없는 힘에 끌리어 예수를 팔았다. 그러므로 「사탄이 가룟 유다라하는 에게 들어가니」(눅 22/3)라고 되었다. 사탄의 를 받는 는 베드로의 마음 속에 들어가 예수님의 의 길을 막았음으로 예수님은 그를 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마 16/23) 하신 것이다. 이러한 한 는  이렇게 사탄이 하는 로 한 인 것이다. 에 계신 예수님에게도 이와같이 의 가 나타나서 로 한 것이다.
하늘과 할 수 있는 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과 같이 의 무서운 을 받는 을 가지게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로 나타난 사탄과 싸워볼 의 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은 에서 받던 예수님의 을 알 길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사탄이 무엇인 것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인 을 가졌다 할 수 있으리오.
그뿐 아니라 하는 사람은 그 는  에서 무엇하다가 죽어간 인가 하는 것까지 히 알 수 있다.
「마귀와 그 」(마 25/41)라 하였으니 그 란 것은 곧 사탄(마귀)의 뜻에 하여 하는 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내어쫓을 때에 「네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으셨으니 그것은 그 의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의 에 이 되어있는 의 이름을 물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들은 의 에 따라 의 을 하면 의 한 가 우리의 와 을 하여 한 으로 우리를 나아가도록 함으로 이 되고 악한 을 하면 의 를 받아 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잘 믿으면 그의 에 될 수 있는 의 들과 하게되며 의 에 올라가면 예수님과  하여 예수께서 에 오셨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하게되는 것이니 오늘날 그 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이렇듯이 은  은 를 믿고간 들과 하여 또 들은  은 를 믿고간 들과 하게되는 의 은 오늘  더 그 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를 모르면서 하는 을 히 여기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될 때는 왔다. 하늘의 일은 하늘로써 을 짓지않으면 아니된다. 여기에 여러 가지 하늘의 을 하였으니 의 으로 되지 않는 사람은  이 로써 하든지 이 로써 할 이 없으면 남이 받은 를 믿든지 어느 편의 하나를 해야될 것이요 도 로써 하려 하지않고 남이 로써 한 것을 믿지도 않으려는 사람을 하여 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마 11/17)고 하실 것이다.
7 하나님의 아담과 해와의 를 치 않으신          158
하나님은 하심으로 아담과 해와의 를 모르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를 아시고 그러지않도록 하셨으면 되지 않았을 것인데 된 를 보면 하나님은 그들의 을 치 않으신 것이 하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를 아시면서도 치 않으시고 하셔서 되고 말았는가하는 는 히 한 일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가 를 하는 것을 치 않으신 데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가 있다.
I 에 그의 과 을 하기 하여             159
에 하면 이 을 하여 자라나는 인 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인 을 받을 수 없고 된 에야 하나님이 그들을  하시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는  가 아니고 아직도 그들이 에 있을 때에 그 자라는 에서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그들을  할 수 없는 그  에 있어서의 그들의 를 하고 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들이 된 에야 한다는 를 스스로 하는 에 서게된다. 가 를  하는 에 하게 되면 그 의 과 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에 그의 과 을 하기 하여는 하나님은 그들의 를 하실 수 없는 것이다. 한 이신 하나님이 하신 그 도 이요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II 하나님만이 로 계시기 하여               160
하나님은 이나 나 이나 사탄 의 인 나 은 하시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 하시지 않은 인 나 에 하여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인 와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이나 에 하여 하시게 되면 그 을 받는 이나 에는 벌써 의 를 하게 되어 그것은 인 것으로  되어버린다는 에 이르게된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의 는 하나님이 하시지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을 하시게 되면 한 에 하여 이 에 하여도 의 를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 그 을 하나님이 함으로 하여 그 까지도 인 로 한다는 새로운 를 세우는 에 이른다.  하나님은 도 하셨다는 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사탄 때문임으로 사탄도 또 하나의 를 한 의 에 서게 된다. 아담과 해와의 을 하나님이 하면 이와같이 사탄도 또 하나의 의 에 서게 됨으로 하나님 한분만이 로 계시기 하여는 그들의 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III 을 의 에 세우시기 위하여              160
하나님은 을 하시고 을 할 수 있는 을 하셨음으로 하나님은 을 그 에 할 때까지 해주실 이 있는 것이다.
된 는 그 로서는 벌써 에 한 로서 이 되어 로 설 때만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를 하려면 도 가 한 을 다 하여 를 했다는 그 에 있어서도 보다 못한 에 있어서는 아니된 것이다. 로서는 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 되어야 와 사랑을 하나님과 돌리고 받아 하나님의 인 을 받을 수 있고 그러한 까지 되어야 은 하나님과 같은 에서 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아직도 에 한 을 하나님이 하시어 하시게 되면 을 된 과 한 을 하는 에 이르게되고 마침내는  인간에게 의 을 하는 가 되어 은 도 치 않는 한 로서  앞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됨으로 히 인 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을 의 한 로 세우기 하여는 은 으로서 자랄 을 다 지나 될 때까지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한 바이지만 은 까지도 해야할 인데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의 에 한 나 를 하신다면 를 그들보다도 높은 에 세워주는 가 됨으로 에게 까지도 할 수 있는 로서의 과 을 세워주시기 하여는 들에 한 도 할 수 없고 인 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6 에서 본                  162
1 의
로 을 하고  은 이어니와 의 에 있어서 그 를 치 못하여 많은 를 일으켜온 것이다. 의 와 을 비롯하여 의 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는 모두 하나님의 으로 되어진다는 을 세울 수 있는 의  는 하다고도 볼 수 있으나 또 한편 이 을 할 수 있는  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에 한 인  를 세우지 않으면 이 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의 바른 은 의 한 을 보여줄 것이며 따라서 로 보여지는 하나님의 도 그 이 알려질 것이다.  을 먼저 한다면 의 도 이었고 따라서 의 도 임으로 하나님은 을 하시고 하시는 하나님이시오 코 의 를 하시고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에서 이미 한 바이지만 의 은 에게 의 사랑을 하시기 하여 의 으로 주셨던 한마디의 을 치 못한 의 에서 된 것이었다. 의 이 으로 되어진 라면 하나님은 을 하신 의 을 하시며 서러워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창 6/6). 의 모든 이 하나님의 으로만 되어진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대로 되어가는 그 를 하시며 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 을 삼은 것을 하셨고(삼상 15/11) 가 예루살렘을 하여 그 손을 펴서 하려할 때 여호와는 그  내리심을 하셨다(삼하 24/16).
그러면 은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은 뜻을 하실 뿐 이 뜻을 하는 사람은 이 뜻을 이룰 수 있는 에 두어 이 뜻을 이루는가 못이루는가하는 것은 그 의 으로 세워주신다. 그러므로 하신 뜻은 함 없으나 이 뜻을 해 부름받은 사람은 의 을 치 못하면 아무리 부름을 받았다할지라도 다시 의 길을 걷게됨으로 그 사람을 하고 하셨던 뜻은 이루어지지않고 그 사람의 을 세워 그 뜻을 하여나아가는 것이니 이것은 에 된 와 우리의 의 가 하는 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을 부르시는가하면 마치 난 의 을 만들기 하여는 의 되기에 한 를 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의 의 뜻을 이루어 맞추기 한 프로그램에 맞추어질 수 있는 은 그 가 할 수 있는 로부터 쌓은 하늘에의 과 그 가 타고난 의  과  의 으로 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하시고 계심으로 그 한 사람을 하시고 또 하신 사람을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롭다하시고 롭다함을 받은 이를 또한 영화롭게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롬 8/30).
하나님이 을 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하실 일과 이 할 일을 히 갈라세우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과 의 이 하여서만 하나님의 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 으로 을 하시고는 의 을 가르쳐주셨으니 이것이 곧 「따먹지 말라」하는 이요 이 을 이 지키면서 자라야 하는 이 바로  에 있을 때의 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하시고는 그 의 을 하시려는 뜻을 하셨으므로 이 뜻은 이다. 그러나 이 뜻을 이루어 맞추기 한 의 로써 아담 해와를 하셨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는 이 을 이 지킴으로써 이 을 의 으로 다 걸어야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을 치 못하였을 때 첫 아담을 한 하나님의 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아담 예수를 보내시어 아담으로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의 뜻을  이루게하려하신 것이었다. 또 아담의 으로 하여 하나님의 이 이루어지지않은 것같이 이스라엘 의 으로 하여 다시 예수님을 한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으나 하신 뜻은 할 수 없으므로 3 아담으로 예수님은 하셔서 이 뜻을 하시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제 에 된 에 한 에서 이런 를 찾아보기로하자.
하나님은 아담의 을 하고 의 뜻을 이루려하셨으나 가인이 아벨을 함으로 하여 아담으로서의 을 다하지 못하게되어 이 을 하고 하나님의 를 이루기 한 은 이루어지지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아벨  셋을 세우시고 그의 에서 아담의 으로 노아의 을 하여 의 뜻을  하려하셨다.
가인과 아벨로하여금 을 바치게함도 아담으로부터 잃어버린 믿음의 을 하려는 을 이루게하기 함이며 노아를 함도 가인이 아벨을 함으로 하여 잃어버린 믿음의 을 다시 찾아세우시려는 을 이루시기 함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120 에 를 지었던 노아의 믿음은 코 아브라함의 믿음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노아를 믿음의 으로 하신 것인데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로 말미암아 노아 에 사탄이 하여 노아를 불러 믿음의 으로 세우시려는 은 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노아 으로 아브라함을 하여 믿음의 으로 세워 이 의 뜻을 다시 이루려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믿음의 을 다시 찾아세우기 한 믿음의 을 찾는다는 뜻을 한 것이지 이 뜻을 하는 사람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뜻을 이루기 해 함받은 노아이었으나 노아 이 그의 을 치 못할 때 마치 아벨 셋을 세우신 것같이 노아  아브라함을 하여 이 을  케하심으로 의 뜻을 이루려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하심도  이스라엘을 가나안로 할 수 있는 를 세운다는 그 뜻을 한 것이지 모세 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모세에 한 를 하셨었기 때문에 그를 부르시사 로 세워 의 자리로 하시려는 뜻을 이룰 수 있는 에 세웠던 것이다.
모세는  2로 하여 의 을 치 못하였음으로 여리고을 바라보면서도 가나안 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버렸다(민 20/7~12, 20/24, 27/14).
이와같이 모세는 되었으나 를 세운다는 의 뜻은 임으로 이 뜻을 다시 이루기 하여 하나님은 모세  여호수아와 갈렙을 세우신 것이었다. 또 이스라엘 으로 하여금 시켜 사탄을 물리쳐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를 한다는 의 뜻을 하여 함받은 가 엘리야였다.( 7 ) 그러나 엘리야를 하여 그 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엘리야   요한을 세워 그 뜻을 하여 이루시려하신 것이었다. 요한이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더라면 히 그가 예수님의 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를 세우시려는 을 이루어 맞추기 하여 요한을 하신 것이었지만 요한이 이 을 다하지 못하였음으로 그 으로 베드로를 로 세워 이 의 뜻을 하여 하게하셨던 것이다.( 7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사 그로부터  이스라엘을 일으키신 은 메시아의 을 이루기 한 믿음의 터를 코자하는 의 뜻을 이루기 함이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이 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에 선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너희에게서 빼앗아 열매맺는 에게 주시리라」(마 21/43)고 하셨다.  의  은 이스라엘 에서 에게 옮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한 바와같이 아브라함의 인 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을 받은  이스라엘  모든 들이 이스라엘이라 하였다(롬 2/28~29, 롬 9/6~8, 갈 3/29). 그러므로 의 들은 예수 에 이스라엘들이 다하지 못한 하나님의 의 뜻을 하여 하여야만 이스라엘 으로 이루시려던 에덴 의 의 뜻이 우리 들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2 하나님의 과 의          167
지금까지 많은 들이 믿어오듯이 을 그대로 한다면 으로서 힘쓸 일은 없을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이 이루어지지않는 것은 없어야할 것이다.
위에서도 몇가지 를 들었지만 하나님의 은 의 잘못으로 번번히 이루어지지 않고 되어 내려온 것은 바로 에 된 이스라엘가 하는 이다.  가 하나님의 으로 되어 있다면 에게 따먹지말라는 을 주실 는 없었을 것이다.
에 하여는 어떠한 도 없는 것은 전체의 은 오로지 의 에만 달려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은 로 하시지 않았다. 에게는 의 가 되어 있음으로 따먹지 말라는 이 지켜야할 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이 의 는 을 넘게되는 한 는 되었을망정 인 은 아니었다는 것은 이미 에서 한 바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의 을 하여야 그  위에서 하나님의 책임분담이 되어 과 하나님과 하는데서 비로소 하나님의 인 이 이루어지게 되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을 닮게하여 을 가진 로서 을 하셨기 때문에 으로 하여금 그 이 스스로 자라게함으로 하나님의 인 섭리에 케하여 그 의 를 의 것으로 돌려줄 수 있는 을 세우시기 함이다. 그러므로 의 으로서 세워야 할 이 은 비록 히 작은 것이라할지라도 이 이 을 세우지 못하면 하나님의 으로서의 히 크신 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의 은  으로 그 를 따질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이 다해야할 작은 을 5%로 한다면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크신 은 95%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이 해야할 5%를 로 하여 95%의 를 하시어 100%의 뜻을 이루면 이 100%의 의 를 의 것으로 세워주시려는 크신 의 를 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 그 가  이 세워야할 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소경을 고치실 때도 예수님의 으로는 침으로 흙을 빚어서 눈에 발라주셨고 의 으로는 실로암에 가서 그것을 씻어야했으며 그 씻은  위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인 의 이 나타난 것이다(요 9/7).
예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실 때에도 무덤을 닫고 있는 돌을 굴리는 것과 살아난 나사로의 얼굴에 가리운 을 벗기는 것은 의 할 일로 하셨고 를 올리는 것은 예수님 이 하신 에야 하나님의 이 나타난 것이었다. 하나님이 을 이처럼 사랑하사 를 주심으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95%의 를 받도록 하셨다. 그러나 누구든지 저를 믿어야 치 않고 을 얻으리라하였다(요 3/16).  믿는다는 5%의 으로서의 을 다하지못하면 그리스도의 95%의 의 은 나와  이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을 얻는다고하셨으니 어느 를 으로 은 으로 하시는 하신 하나님은 아니시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가운데서만 되어진다면 를 하여 하라하신 말씀도 (약 5/14) 이 되고 말 것이며 바울이 를 하고 로마로 가면서 로마들에게 의 을 위하여 해 주기를 한 것도 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이미 된 길을 걷고 있다면 남의 를 할 는 없었을 것이다. 을 고치신 후 예수님은 에게 「네 믿음이 너를 성케하였다」(막 5/34)고 말씀하시어 믿음은 이 세워야할 의 의 것임을 밝히었다.
예수님도 에 돌아가시기 에 「내가 새 을 너희들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듯하라」(요 13/34)고 하셨으니 이란 무엇인가하면 이것은 으로써 지켜야할 의 말씀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 의 에 하여서 그 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를 세우시기 위하여 그를 불러 를 짓고 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도 그의 갈길을 히 가르쳐 주시었지만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할 때는 아무 도 하시지 않았다. 이 끝날 때까지의 일은 95%의 하나님이 하실 이요 나머지 5%는 노아이 맞추어야할 임으로 이것은 하실 수 없는 것이다. 함을 한 노아이 하여야할 은 못다 하였음으로 노아를 세워 하시고 하셨던 하나님의 도 로 돌아가고만 것이다. (노아  한  )
이런 일은 아브라함 때에도 똑같이 되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그를 불러 을 드리던 때까지 하신 로써 하나님의 은 끝났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의 이었던 에 하여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는 그로 하여 이스라엘 이 에서 400 을 하게 될 한 임을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세 때에도 그러했다. 의 과 로 이 을 사탄 에서 하셨고 지팡이로 를 갈라 그들을 로 옮겨 놓았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를 채웠고 반석을 쳐 목을 추겼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의 길을 하심으로 하나님으로서 하실 은 끝난 것이다. 이 으로 이루시려는 의 뜻은 모세와 이 의 로써 될 것이다. 이스라엘 을 그렇게도 자상히 권고해주신 하나님이시지만 시내에서 하고있는 모세를 되었다고 새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를 섬기는 이 의 의 에 하여는 조금도 치 않으셨다. 믿음으로 넘어야할 이 에 으로 흘려 이 으로 다해야할 을 치 못하였음으로 그들은  에서 쓰러져 그들을 하여 이루시려던 은 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나님이 모세를 하심도 그렇게 히 하셨지만 그가 반석 두 번 칠 때만은 조금도 치 않으셨으니 그 이유도 같은 로써만 될 것이다.
예수 에도 하나님은 이미 메시아의 을 하셨고 메시아 에도 , , 시몬·안나 히  요한 을 세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 끝났던 것이니 이제는 이 95%의 의 가 이스라엘 의 것으로 되는가 아니되는가하는 만이 그들  로 찾아 해야할 5%의  로 남아졌던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으로 하여 예수님을 함으로 이 5%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 을 받지 못한 것이다. ( 2 )
이와같이 하나님의 의  을 가지고 나타났던 모든 들은 에게 된 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는 서러움의 을 거듭하여온 것이다.
에 있을 때의 아담과 해와도 이란 를 받기 위하여는 따먹지말라는 을 이 지켜야할 것이었지만 에 된 도 에로 옮겨질 수 있는 의 을 받으려면 역시 의 을 치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서 밝혀진대로 은 으로 하여 사탄과 를 맺었음으로 사탄도 을 할 수 있는 인 이 남아졌음으로 하나님이 아무 도 없이 을 하나님 편으로 끌어가면 사탄은 반드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는 위에서도 많이 들었지만 하나님이 욥을 할 때에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까닭없이 하셨기 때문이니 그 과 를 쳐야한다고 하나님 앞에 하였다(욥 1/9~11). 사탄이 욥을 칠 때에 욥은 그 모든 의 을 이겨서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을 이 세웠기 때문에 그 으로 하여 받은 그 의 은 의 에 이르렀어도 사탄이 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는 로써, 에는 으로써, 에는 으로써 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을 이 찾아세워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소리를 듣고 을 열면 내가 저희에게로 들어가 저로 더불어 먹고 저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하신 말씀대로 는 나를 맞을 의 를 다하시고 을 두드리고 계시지만 을 여는 것은 내 이 해야할 임으로 이것을 못하면 을 두드리고 계시는 님과 나와는 아무 이 없을 것이다.
「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두드리라 열어주실 것이라」(마 7/7)하셨으니 하는 것 찾는 것 두드리는 것은 나의 으로서 이것을 하지않는 에게는 하나님이 주실 수도 만나게하실 수도 열어주실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을 떠난 이스라엘 에게 히 가나안를 주실 것을 하시고 하셨으나(출 3/7~10) 그들은 으로 하여 들에게 된 을 다하지 못하였음으로 이 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민 14/29~30).
하나님은 와 의 하나님이시다. 이미 에서 한 바이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세우신 이  한 를 하는 에 설 수 없는 것이다. 로 한 에 한 의 를 하심에도 이 를 떠나서는 하시지 않으심으로  와 그 는 인 이 없이는 하시지않는 것이다. 이러한 를 떠나 으로만 하실 수 있다면 한 아담 해와는 에서 해버리고 다시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며 을 하시기에 이렇듯이 한 의 을 할 조차 없을 것이요 하필 메시아를 보내셔서 그러한 의 길을 하여 의 를 하실 조차 없을 것이다.
 바울의 도 으로 를 하여 된 것으로 알기 쉬우나 이것도 95%의 하나님의 부르심에 한 5%의 바울의 로써 맺어진 임을 알아야 한다. 에서 하여진 이며 를 가른 일이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한 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의 모든 과 를 한 그 이 바로 하나님을 하였던  과 예수께서 고쳐주신 10의  에서 단 한만이 예수님 앞에 나왔으며, 또 나사로가 썩은 에서 하는 을 보았고 로 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었던 을 한 바로 그 이 예수님을 에 내어주었던 를 보아도 만이 하나님을 믿게하는 한 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의 에 한 들에게는 하나님이 하신 뜻에 하여 으로서의 이루어드려야할 이 남아있음을  으로써 알게되면 하나님 한분만이 로써 모든 뜻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은 치 않을 수 있은 것이다. 이러한 인 에서 하나님의 인 뜻은 이루어지는 것임으로 이 로써 하나님의 뜻을 찾아 으로서 할 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한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 이 모든 일을 간수하고 봉하여 까지 이르게함이라 많은 사람이 스스로 케하고 희게하며 함을 받을 터이나 ······ 오직 있는 만이 깨닫는다」(단 12/9~10)고 하셨다.
「여호와 하늘로서 을 굽어살피심이여 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가 있는가 보려하심이로다」(시 14/2)고 되었고 바울도 「저희가 하나님께 있는 것을 하노니 그러할지라도 이 이 를 좇아 있는 것이 아니라」(롬 10/2)고 하셨으며 믿음을 나눠주신대로 「롭게 생각하라」(롬 12/3)고 말씀하셨으니 이와같이 에게 그 를 하셨음을 으로서 다해야할 이 있음을 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도 요한이 에서 들을 보내어 「 오실 이가 님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마 11/2~3)하고 물었을 때에 가 메시아라는 것을 밝히 하시지않고 「너희가 듣고 보는 것으로 요한에게 하되 소경이 보며······」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이제 예수님을 믿고 아니믿는 것은 을 보아서 요한 이 로써 해야할 이라는 것을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는 그 한 일로 를 나타내나니라」(마 11/19)고 말씀하신 것이다. 때가 이르리니 지금도 그 때라 하나님은 하게 끝날의 을 하고 계신다.
이제 가 슬기로운 가 되어 하늘을 한 나의 가 무엇인가를 알아야할 때는 왔다. 을 하고 하던 과 는 이 밖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었었고 사마리아 와 와 이 의 에 하는 을 누렸으니 어찌 한 백성을 버리시고 을 에 부르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인가. 께서 나를 찾아오시리라는 한 생각을 버리자. 이러한 가 를 저렇듯 하게 엮어내려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3 에 되는             175
를 하여 헤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와 우리의 로써 하건대 하나님의 는 그의 이 그대로 이루어져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을 들의 에서 할 수 없는 그 을 할 수 있는  가 뚜렷한 것같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제 칼빈의 와같은 을 하는 에서 까지 그 을 해오고 있는 에 해서는 어떻게 하여야될 것인가를 알아보기로하자.
바울이 한 바에 하면 「이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사람을 미리 하사 그 아들의 모양을 본받게하시고 여러  에서 그가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미리 하신 이를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또한 롭다하심을 받은 이를 또한 롭게 하셨나니라」(롬 8/29~30)고 하였다.
위에서도 한 대로 틀어진 을 다시 뜯어맞추는 것이 임으로 에는 하신 뜻을 맞추어야할 하늘의 프로그램이 있다.
하나님은 이 프로그램에 이루어 맞추어질 수 있는 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을 하시는가하는 것은 위에서도  하였지만 하늘뜻을 하고 본  와, 같은 이라도 그의 가 쌓은 하늘에의 과, 같은 이라도 그 가 타고난 과, 같은 의 이라도 그 를 둘러싼 인 과 또 하늘이 하는  의 에 되는 사람이라야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하심으로 그를 하시고 부르시어 롭다하심으로 롭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의 을 하여주실 수 있는 까지 이 나아가는 것을 의 으로 한 이다. 그러므로 된 사람이라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의 의 에 하여 이 까지 나아가야할 이 남아있으니 에서 한 대로 하나님이 할 수 없는 이 을 스스로 다 걸어야 롭다함을 얻을 것이요 이와같이 롭다함을 얻은 라야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누려 그 를 중심하고 하신 하나님의 뜻은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에 있어서의 은 하나님의 로써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이므로 「누구든지 내가 긍휼히 여기려면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려면 불쌍히 여기리라 그런즉 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고 말씀하셨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맞추기 하여 하나의 인간을 하지않을 수 없는 임으로 이런 의 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으로서 이 세울 수 있는 어떠한 으로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 뜻을 모르는 들이 하나님을 하여 할 때 바울은 「토기장이가 진흙덩이로 하나는 한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한 그릇을 만드는 이 없느냐」(롬 9/21)하고 외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로 한 그릇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이렇게 하시더라도 이미 되어 버림받아 의 를 히 해버린 으로서는 하나님의 의 에 하여는 아무 할 이 없다는 뜻을 하기 함이다.
이미 쓰레기통에 버려진 쓰레기를 다시 골라 무엇에 쓰든지 에 그것은 쓰레기 이 할 바 아니요 오직 그것을 쓰려하는 의 이라는 것을 한 것이다. 은  하나님 앞에는 아무 없는 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버려진 쓰레기와 같이 없는 을 있는 에 세워 놓고 하나님의 인 를 헤아리려하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하여 을 갖게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에게 하기 하여 이런 을 보낸 것이다.
하나님은 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시어 된 에서는  야곱을 섬기리라고 하셨다(롬 9/11~13). 에서이기 때문에 의 아무 의 도 없을 때에 는 미워하고 는 사랑하셨으니 이것도 의 프로그램을 이루어 맞추기 위함이었다.(말 1/2~3)
한 것은 「아브라함을 한 」에 미루지만 에서와 야곱을 로 하심은  가인과 아벨의 으로 갈라세워 놓고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의 뜻을 야곱으로 하여금 에서를 시킴으로써 하려고 하셨음으로 야곱은 아벨의 이 되어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셨고 에서는 가인의 임으로 미워하셨다.
이제 으로하여금 동생을 섬기게하려하심도 가인이 아벨을 죽인 를 하여 의 프로그램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 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야곱이 아무리 함받았다할지로되 로서의 을 못다하면 야곱을 하여 이루시려던 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요 아무리 미운 에 한 에서라할지라도 스스로 의 을 다하여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 까지 나온다면 하나님은 그를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의 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에서는 야곱에게 하였음으로 야곱과 한 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했다함도 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러한 미움이 아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의 를 세울 수 있는 는 이 밖에도 많이 있지만 이라는 뜻을 으로 알면 그 모든 의 도 해질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에 하여 으로써 하여야할 도 알려질 것이다.
이 에 하여는 을 히 하면 좀더 한 을 얻을 것으로 믿는 바이다.
7 엘리야로 한 요한과 예수의           179
1 로 본 엘리야와  요한
I 엘리야로서의 을 다하지 못한 요한
하나님은 솔로몬의 을 치 못한 이스라엘 의 에 을 울리시기 하여 와 12를 보내시어 이 을 다시 이 의 까지 끌어올리시어 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를 하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야를 보내심도 하나님의 뜻을 하는 사탄을 시켜 메시아의 을 하려는 인 에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하시기 함이었다.
엘리야가 8의 바알 을 하였음도 이러한 을 키 함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으로 하여 엘리야는 그의 인 이 되지 않은대로 하였음으로 메시아의 에 사탄이 할 수 있는 은 히 되어 있었다. 이 을 함으로써 엘리야의 을 다시 에 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를 해야할 불가피한 가 에 남아졌음으로 메시아의 에 앞설 엘리야의 은 인 으로 남아진 것이다.
들의 을 하던 이스라엘의 한 은  메시아의 이었으나 보다 더 한 은 엘리야의 이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강림에 앞서  엘리야를 보내시마고 하신 것이 말라기 를 한 하나님의 함 없는 이었기 때문이다(말 4/5). 예수님과 같은 모양으로 이미 한 엘리야가(왕하 2/11) 한다고 하였음으로 이스라엘 들은 그의 도 예수님의 과 같이 하늘로부터 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들이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을 하듯이 의 모든 이스라엘들도 그 모양으로 엘리야의 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야의 에 한 은 없이 히 어제까지 의 을 하던 나사렛 예수께서 스스로 메시아를 하고 나설 때 예루살렘에는 이 일어나지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들이 가는 곳마다 한 은 너희들의 이 메시아라고 하면 엘리야는 누구며 어느 때 어디로부터 하였는가하는 에 한 이었다.
들은 이 을  예수님께 하기 하여 「어찌하여 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하니이까」(마 17/10~)하고 하였다. 이에 하여 예수님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하리라」고 그들의 의 을 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아지못하고 임의로 하였도다」라고 그들이 하고 있는 엘리야는 이미 하였으나 이 저를 알지 못하고 으로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들의 를 하셨다.
이제 그들의 의 으로 하여  의 을 하실(고전 2/8) 것을 알고있는 예수님은 「도 이와같이 그들에게 을 받으리라」(마 17/12)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들은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고 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하여 요한을 엘리야로 믿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을 하는 으로 생각하고 있는 의 유대들이야 어떻게 에서 태어난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예수님도 이러한 의 을 할 수 없으리라는 그들의 을 알고 계셨음으로 「 너희가 그것을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한 엘리야가 이 사람(요한)이니라」(마 11/14)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요한을 엘리야로 한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한낱 한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 이 는 엘리야가 아니라는 것을 히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 1/21). 엘리야의 을 듣지 못하고는 메시아는 아무리 한 에 태어난 한 존재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크게 될 것이 없었다. 오직 하늘로서 한 엘리야가 나타나서 메시아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없이 이 분을 메시아로 믿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들은 들과 레위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이러한 를 하기 하여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려한 것이었다. 에서부터 함을 받은 요한 에는 이웃 을 다 놀라게 했으며 메뚜기와 으로 한 의 의 로써 빛나는 를 보내온 요한, 그러기에 들도 그러했지만(눅 3/15) 까지도 당신이야말로 메시아입니까하고 할 로 한 있는 이 요한의 말 한마디는 유대들의 예수님에게 한 을 할 것이었다. 서럽게도 요한은 과 레위들의 에는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요 1/21)고 밝히 말하였음으로 요한을 엘리야하고 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 되지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에서 에 이르기까지 저를 메시아로 할 로 하게 보였던 요한 이 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를 엘리야로 믿을 수 있었을 것인가. 예수님을 로 만든 사람은 누구였으며 예수님을 하려는 유대들에게 또 하나의 의 을 던져주었던 는 누구였던가.
엘리야의 이 없이 메시아의 을 할 수 없는 것이 말라기 의 을 하던 유대들의 이었으니 이제 이 아니라고 하던 요한을 그래도 엘리야로 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있었을 것인가. 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을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에 하여 「내가 바로 엘리야로라」고 하고 나서야만 모든 유대들은 그의 을 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랐을 것이 아니었던가. 요한의 은 스스로 한 바와 같이 의 길을 곧게 하는 에서 외치는 소리로써(요 1/23) 불과 으로 를 주실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요단에서 예수님에게 를 주어 그를 메시아로 함으로써 그의  은 다 끝났었다. 그 부터의 그의 은 예수님을 하여  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한 에는 그 에 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예수님과 되어 히 를 베풀었으므로  은 이어니와 (눅 3/15) 까지도 저를 메시아로 할 였으며(요 1/20)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과 요한의 가 를 하여 서로 싸울 였다(요 3/25). 메시아를 해 태어나 그와 을 같이하는 요한이라면 어찌하여 메시아가 할 때 그가 할 것인가. 그러므로 「그는 해야겠고 나는 하여야겠다」(요 3/30)는 말은 곧 그와 운명을 같이 아니함을 스스로 하는 말이다. 메시아의 을 누가 먼저 해야될 것이었으며 메시아를 해 먼저 죽어야할 사람이 누구였던가. 이는 바로 그를 하여 에서부터 부름받았던 세례요한이어야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를 치않은 요한은 한마디의 도 해보지 못하고 뜻하지 않은 없는 죽음으로 한 를 마친 것이다.
II 예수를 으로 한 요한                 183
은 그 이 하늘 편에서 사탄편으로 옮겨질 때에는 도 모르게 그 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도 그 이 하늘에 있을 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하였지만 예수님을 떠나 한 로 흐를 때는 예수님을 으로 하게 되어 메시아로서의 그를 하게된 것이다. 을 떠난 이스라엘은 을 내린 하나님의 무서운 을 보았고 를 건너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시며 반석을 쳐 물을 내었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와 을 히 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모세가 보이지 않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하고 을 만들어 그를 섬겼던 것이다.
우리는  요한을 해서는 아니된다. 그도 에서 하나님을 한 민족의 임을 알아야한다.
없던 아담이 함으로 에서요 40  로 받은 노아의 재도 아브라함의 로 모세가 을 두 번 친 것도 모두 에서였다는  을 한다면 요한의 만이 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아무 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하게 된 요한이 지그까지의 으로서의 의 을 버리고 들과 같은 을 취하여 예수님 앞에 같은 로 하는 것은 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에 된 자기의 를 돌아볼 때 예수께서  메시아라면 메시아를 해 태어난 에게 그와같은 이 닥쳐온다는 것은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요한으로 돌아온 그는 된 으로 태어난 예수님의 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나타나는 것으로만 헤아리면 히 을 출발할 때까지의 로서의 예수님의 는 요한의 에 하여 훨씬 한 것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더구나 사가리아 에 태어난 을 일러 하늘로서 올 것이라고 하고 있던 엘리야라고 하는 예수님의 은 도무지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 이 메시아로 하기 한 이라고 생각되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이렇듯이 이 엘리야인 줄을 모르는  요한에게 있어서도 오리라한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은 때에 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한 일로 보여졌을 것이다.
에 유대들도 그러했지만 요한도 의 말씀을 믿으려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고 예수님을 믿으려면 를 버리지않을 수 없는 이었다. 은 을 낳는 것이다. 요한의 이러한 은 더욱 그로하여금 어둠 속을 더듬게하였다.  유대들이 믿고 또 지켜오던 의 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히 였다. 스스로 을 하면서(요 5/17~18) 를 의 이라(마 12/8)하였고 을 하나님과 한 로 올려세우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히 어려운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케하러 왔노라고(마 5/17) 하셨으나 을 케 한다는 말씀은 곧 인 을 하는 것을 한다. 으로써 얻을 수 없는 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게 됨으로(갈 2/16) 예수님은 요 따라서  은 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을 하는 것같이 보여진 예수님을 로 오신 메시아로 하는 것도 한 일이 아니었거니와  이스라엘을 하는 모든 들에게 을 하여 를 불러서 로 삼았고 와 와 들의 가 되어 먹고 마시는 예수님이었으며(마 11/19) 많은 들을 로 새로운 를 하며(눅 8/2~3) 누구보다도 를 더 사랑하라고(마 10/37) 하는 총각 예수님을 하나님의 로 오신 메시아로 믿기에는 너무도 가 멀었다. 더구나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다 붓고 머리털로 씻고있는 의 를 들조차 하는데 그것을 도리어 하고 있는(마 26/6~13) 예수님은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의 로 알고 있는 유대들에는 이러한 예수님의 는 의 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의 을 부르짖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도 이러한 예수님의 는 의 이 되겠거든 하물며 한 을 돌로 쳐 죽여도 말 못하던 2000  그 의 그 에 있어서랴.
이와같이 의 구름에 싸인  요한은 종내 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마땅히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마 11/3)하고 예수님 의 으로 의 을 풀어보려 하였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은 가 바로 그로라고 인 을 하시지 않고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으로 요한에게 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가 살아나며 가난한 에게 이 된다 하라」고 한 을 하셨으니 이것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 수 있는  하늘의 95% 는 이미 되었으니 이제 그를 믿고 아니믿는 것은 요한 이 로써 해야할 5%의 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  로써 그 나무를 깨닫게하기 위하여 그 열매를 보여줌과 같다.
가난한 에게 을 한다고(마 11/5) 던진 예수님의 말씀에는 한 서러움의 이 어리어있다. 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 히 요한은 하늘의 를 넘치도록 받은 한 들이었다.
이제 요한까지도 예수님을 치 않을 뿐아니라 하는 에 이르렀으므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를 헤매시며 사마리아를 하시어 가난한  가운데서 을 받을 들을 찾는 의 서러움을 요한의 들의 을 으로 발시킨 것이다. 실상 예수께서 하신 들은 한 들이 아니라  의 들이었을 것이다. 을 하러 오신 예수라면 이렇게 한 을 찾아야 빨리 뜻을 이룰 것이 아닌가.
을 갖고 오신 예수님 앞에는 따르는 보다도 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더 한 것이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서러운 은 드디어 「누구든지 나를 하여 하지 아니하는 는 이 있다」(마 11/6)고 의 말씀을 하게 되었다.
의 유대들은  요한을 은 메시아 은 엘리야 은 라고 볼 로 한 로 생각하였다(눅 3/15, 요 1/20~21). 그러나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누구든지」라고 하시면서 요한은 벌써 예수님을 하여 하였음으로 하나님의 하신 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을 하였다.
들이 떠나간 에 예수님은  요한의 을 말씀하시고는 하여 「내가 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가 낳은  에  요한보다 더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에서는 히 작은 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다. 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의 몸에서 태어나 을 거쳐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낳은 사람 에 가장 큰 사람이라면 에서도 가장 큰 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에서 가장 큰  요한이 에서는 히 작은 만도 못할 것인가. 에 왔다간 많은 들은  오실 메시아를 먼 의  를 두고 으로 하였으나 요한은 메시아를 으로 하기 하여 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하는 것이 선지자의 이라면  에서 보아 메시아에 한 이라는 에서 본다면 그는 가장 작은 이었다. 왜냐하면 에서는 아무리 작은 라도 벌써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하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이 을 해 부름받은  요한은 예수님과 되어 의 지극히 작은 만치도 예수님을 치 못한 까닭이다. 다시 다음 을 보면 「 요한이 올 때부터 지금까지 은 힘씀으로 얻나니 힘쓰는 는 빼앗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의 앞길을 곧게하기 하여 의 외치는 소리로 나타난 요한이 유대들을 시켜 그 터 위에 메시아를 맞아 는 의 들과 함께 예수님의 가 되었으면 예수님께는 를 찾아 헤매시던 갈릴리 의 한 은 없었을 것이요 예수님의 의 는 에서부터 불리워 를 바쳐온  요한이 아니고 다른 누가 차지하였을 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이 이 의 을 다하지 못할 때 그 의 는 힘쓰는  베드로가 빼앗었으니 이는 로 예수님 앞에는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요한이 올 때부터 지금까지」라고 인 를 지은 것은 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의 으로 「는 그 한 일로 하여 를 나타내나니라」(마 11/19)고 말씀하셨다.  요한이 가 있어서 롭게 했더라면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은 로서 남아질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의 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에 달리게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는 이 의 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알았더라면 의 를 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III 요한이 엘리야된                189
에서 한 예수님 앞에 모세와 엘리야는 히 되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 하셨으니 로 에 있는 엘리야가 어떻게 에 를 쓰고 사가리아의 에 태어난 요한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엘리야의 은 솔로몬 에 된 을 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되지 못하여 한 사탄을 시켜 된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를 하는 것이었다함은 이미 한 바와같다.
이러한 엘리야의 인 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으로 이 을 다시 이루기 위하여 엘리야를 또 보내시마고 하신 것이다. 이  엘리야로 온 분이 요한이라함은 바로 예수님 의 이었다. 그러나 엘리야와 요한이 한 사람이라함은  가 됨을 말함이 아니요 그 이 함으로 뜻을 하고 인 에서 보아 하다는 것을 말함이다.
요한은 엘리야가 에서 다하지 못하고 간 을 하여야할 이기 때문에 그를 엘리야하고 한 것이다. 에서도 이미 한 바이지만 엘리야의 는 하여 요한을 함으로 그가 에서 다 이루지 못한 의 을 요한을 하여 하여야함으로 요한은 엘리야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뜻을 둘이 하여 이루었으니 그 뜻을 하고 생각하면 그 둘은 곧 하나가 되는 것이다.
2 로 본 예수의                  190
예수님 이 하신 의 말씀에 하여(마 24/30) 예수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은 들의 가장 큰 으로 남아졌다. 그러나 의 와 와 에 하여는 많은 가 벌어져왔으나 할 만한 을 세우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날과 그 는 아는 사람이 없고 도 알지 못하고 아들도 알지 못한다(마 24/36)고 하셨음으로 이 에 하여는 조차 한 것으로 믿고 있는 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만은 아신다고 하여 말씀하셨으니 때가 이르면 이 날을 하실 것이다. 「주여호와 그 한 뜻을 그 모든 종 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반드시 하지 않으신다」(암 3/7)고 말씀하신대로 를 하기 한 의 을 이루시려는 아버지께서 어찌 들에게 알리지 않고 의 를 하실 것인가. 노아 에도 미리부터 알려주셨고 소돔과 고모라를 할 때에도 그러하였다. 메시아 도 그 때까지는 아무도 그 때를 아는 사람이 없었으나 예수님  에도   시몬 안나 요한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셨던 것이다.
어둠 속에 있어서, 보아도 보지못하고 들어도 듣지못하는 들에게는 예수님은 도둑같이 하리라고 하셨으니 마치 유대들에게 있어서는 로 오신 예수님도 도둑같이 왔다 가신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게 하지 못하리라(살전 5/4)고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와 같이 에도 빛 가운데 있는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그 와 를 알려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날이 그물같이 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빛 가운데서 깨어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로 먼저 그를 찾아 따르는 사람은 이 있을 것이다.
I  예수는 어떻게 오실 것인가
예수님의 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으로 되어질 것을 믿지 못하는 들에게는 의 로 한 예수님의 를 으로 알고 있는 이 하나 그러나    에도 들은 히 메시아의 을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은  을 함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의 을 하기 과 같은 로 할 것인데 그 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의 는 예수께서 구름타고 하실 것을 히 말씀하셨음으로(마 24/30, 계 1/7) 많은 들은 하늘을 우러러 예수님의 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에도 이와같이 하늘을 우러러 엘리야의 을 하던 유대드은 엘리야가 요한으로 에서 태어났음으로 저를 알지 못하고 따라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도 알지 못하여 그를 한 것과 같이 오늘에도 예수님의 이 에서 예수와 같이 의 몸을 하여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엘리야의 이 예수님의 의 본보기가 아니라고 할 아무 도 없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한 것과 같이 요한에 한 의 은 바로 그가 엘리야로서의 을 다하지 못한 을 한 것인데 오늘까지의 모든 들은 그가 을 다한 것으로 하고 그러한  밑에서 를 읽었기 때문에 도 그렇게 되었던 것같이 예수님의 에 하여서도 구름을 타고 온다는  밑에서 하였음으로 는 그렇게밖에는 보여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옛날 이스라엘 들이 를 하고는 조차 할 수 없는 으로 엘리야를 하게 하셨으니 오늘에 있어서도 모든 들이 지금까지 를 하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으로 예수께서는 하실지도 모를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를  하고 엘리야와 같이 으로 하실지도 모른다는  밑에서 를 다시 읽어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것을 하는 가장 한 로서 우리는 의 을 들 수 있으니 일렀으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가 에 달리실 것을 하실 때마다 서러워하는 들을 하시기 하여 하시겠다는 말씀을 거듭거듭 하여 일러 주셨다(요 14~). 그러므로 예수께서 로 돌아가신 의 그들의 은 께서 다시 오시는 것 뿐이었다.
이제 히 하시는 님을 하고 있는 들은 이와같이 하늘로 올라가신 님이시니 하늘에 계시던 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이렇게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음으로 하나님의 는 그들의 생각을 깨뜨리기 하여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하고 하였으니 이 은 으로 을 쓰고 하실 것임으로 하늘을 쳐다 볼 것이 아니라 을 바로보고 있으라는 로 한 말씀이다. 「하늘로 올리우셨다」하였으니 이 하늘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의 」에서 이미 한 바이어니와 「하늘」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듯이 인 하늘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과는 너무나 먼 에 계신 하나님이심으로 히 높으시고 으로서는 할 수 없이 참되시고 거룩하심으로 와는 없는 것임을 하기 하여 하늘이라는 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으로 보이는 인 하늘에 계시다는 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와 없는 가 이루어지면 그것은 에 있어도 하늘나라()라고 하는 것이며 는 에 있어도 그것은 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신 예수님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로 계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돌로 맞아 죽을 때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지 못하였으나 오직 이 한 스데반은 히 그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행 7/55~56).
을 걸고 있는 안에 히 나타났다가 문득 사라져버린 하신 예수님은 하시기 과 같은 로 된 이 아니었음은 한 것이다. 그런로 하시는 예수님도 누구나 다 본 것이 아니라 이 열린 사람들만이 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으로는 볼 수 없고 으로만 볼 수 있는 하신 예수께서 하신 그 하늘도 우리들의 으로 볼 수 있는 의 인 하늘이 아니라 그도 역시 으로만 볼 수 있는 하늘임을 알아야할 것이며 따라서 이 아닌 하늘을 구름을 타고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에 어그러진 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늘로 가신다고 하는 것은 를 떠나서 히 높고 히 거룩하시고 참된 로 가신다는 말씀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하였으니 예수께서는 「우리 가운데」어떻게 계셨으며 어떻게 「올리우시고」어떻게 「가셨는가」하는 것은 이미 가 한 을 하고 있지 않는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이시면서도 의 몸을 하여 「우리 가운데」나셨다. 의 으로 오셨건만 오랜 를 두고 저를 하던 들까지도 알아주는 없이 말 구유 위에 나셨고 사탄이 하여 저를 죽이려하였으므로 젖먹을 때부터 으로 을 가셨고 의 에 숨어 자라다가 한 으로 히 로서 나타나 새로운 을 던질 때저를 맞어야 할 들에게 으로 몰리어서 말할 수 없는 를 받으신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는 이와같이 「우리 가운데」나셔서 이와같이 의 길을 하여 「하늘로 올리우셨고」「하늘로 가셨다」.
그러면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셨으니 들이 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바로 위에 말한대로 우리 가운데서 의 아들로 태어나 에 돌아가실 때까지의 를 들은 본 것이다. 그러므로 본대로 오신다는 말씀은  때와 같이 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 아지못하게 자라다가 히 의 으로 나타나 새로운 을 던지다가 로 몰려서 그를 믿고 따르고 모셔야할 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과 와 을 하다가 에는 하늘나라를 에 하여 의 으로 을 하실 때 그 때에는 이 우러러 저를 의 하늘로 올리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는 갈릴리 사람들같이 인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의 하늘을 바라보아야한다는 뜻을 로써 하였다. 예수께서는 에는 많은 이길래 로 을 떠나가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에 가  됨으로 이번에는 가시지 않고  아울러 땅에서 뜻을 이루셔야한다. 그러므로 「가심을 본대로 오시리라」고 말씀한 것이다.
요한은 그 에서 「이 아이를 낳으매 곧 라  으로 을 다스릴 니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앞으로 올려가더라」(계 12/5)고 말하였다. 여기에 이라고 한 것은 말씀을 한다. 「의 」에서 이미 한 대로 불의 은 곧 말씀에 의한 을 하는 것이며 말씀은 곧 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로써 할 것이니 이 가 나오게되면 지금까지 에 남아진 라고하는 는 모두 그  앞에는 마치 에 질그릇이 부서지듯이(계 2/27)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으로 을 다스릴 는 곧 말씀을 가지고 의 으로 을 다스리려(사 9/6~7) 다시 오시는 님을 가리킨 것이다. 그리고 이 님은 의 몸에서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이라함은 된 의 이라함을 하는 것이니 를 보면 그 첫머리에 예수님이 를 하였고 히 마태에는 예수의 에 가 있었다는 것을 밝히었다. 그 는 히 의 는 의 에서 하셔서 의 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하기 함이었다. 본대로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말씀 그대로 예수께서는 다시 오실 때에도 의 을 받은 의 몸에서 하시어 한 에서 몸을 일으켜 이 의 길을 거치어서 하늘 의 의 자리에까지 올려간다는 뜻을 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 을 로 해왔던 것이니 이것은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하시리라는  밑에서 이 를 한 까닭이다. 그리고 을 로 하지 않으면 「그의 남은 으로 더불어 싸우니 이는 하나님의 을 지키며 예수의 를 받은 라」(계 12/17)는 가 되지 않는다고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남은 은 역시 의 으로써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여 하나님 앞에 (롬 8/23)으로 선 들을 말함이다.
「내가 너희더러 이르노니 히 찾아 주시리라. 비록 그러나 가 이를 때에 에 믿음을 보겠는가 하시더라」(눅 18/8)고 되어 있으니 이것은 에는 이라는 조차 찾아 볼 수 없을 로 믿는 가 없게된다는 뜻이다. 끝날이 이를수록 숨은 을 쌓고 의 눈물겨운 로 를 하며 거륵한 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가는데 어찌하여 이렇듯이 믿음을 찾아볼 수 없는 이 벌어질 것인가 그러므로 이 도 께서 구름을 타고 오셔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요 으로 을 하셔야 그렇게될 것이다.
 엘리야가 의 요한으로 하였음을 알지 못한 의 으로는 를 하기  나사렛 마을에서 자라나던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믿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에 유대 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하늘만을 쳐다보면서 예수께서 구름타고 오시리라고 믿고있는 오늘의 들 에서 에서 하신 분을 예수로 믿는 그 믿음은 히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 에는 큰 이 일어나기 때문에 믿음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하여왔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에서 을 쓰고 하시겠기 때문이다. 은 우리의 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날에 여러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여 우리가 의 이름으로  노릇하며 의 이름으로 사귀를 쫓으며 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을 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더러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못하니 을 하는 들아 내게서 떠나가라하리라」(마 7/22~23)고 말씀하셨다.
 의 이름으로  노릇하며 를 쫓으며 여러 가지 을 하리만큼 잘 믿는 들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님 앞에서 그와같이 을 하는 일이 있다고 하면 을 받을 는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도 예수께서는 구름을 타고 하시지 않고 때와 같이 본 그대로 오시기 때문이다. 예수 에도 노릇하며 를 쫓으며 을 하는 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만을 쳐다보며 엘리야 만을 하고 메시아 오신 줄도 모르고 만 하다가 간 것과같이 오늘에 있어서도  를 쫓으며 노릇하며 을 행하여 잘믿는 들이 많지만 그들은 모두 하늘만 쳐다보며 구름타고 오실 님만을 하고 있으므로  께서 으로 예수와 같이 로 나타나게 되면 그들은 그 분을 로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는데까지 이를 것이니 께서 그들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는 예수께서 반드시 으로 예수와 같이 오셔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누가 17 20 에 된 에 하여서도 지금까지 한 이 없었으나 이것도 역시 예수께서 다시 으로 하신다는 에서만 해질 것이다. 예수께서 의 나팔소리와 같이 구름을 타고 하신다면 그 나라가 하는 것은 누구나가 다 볼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나라가 함을 볼 수 없다」(20)고 하셨는가.
예수님 에도 그의 하심과 에 나라는 한 것이었으나 엘리야의 을 하던 유대들은 그 한 나라를 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도  으로 이루어지면 구름 타고 오시는 님을 하는 들은 예수님의  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유대들은 아무리 라고  하며 하였을지라도 예수님을 먼저 메시아로 믿고 따라 모신 사람들은 벌써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었던 것과 같이 가신대로 오시마하신 님이심으로 에서 하시기 때문에 그를 먼저 알고 모시는 에게 이 할 것임으로 「은 너희 안에 있나니라」(21)고 말씀하신 것이다.
유대들은 선지자들의 에 하여 메시아의 날을 보고자 을 하였던 것이었으나 하늘을 우러러 엘리야의 만을 바라고 있었으므로 메시아의 날은 왔어도 보지 못하였던 것 같이 이런 은 오늘에 있어서도 될 것이다.  구름만을 쳐다보고 있는 에게 으로 한 의 날이 보여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 날 하루를 보고자하되 보지못하리라」(22)고 말씀하셨다.
의 에는 반드시 참것이 오기 에 거짓것이 참것 모양으로 먼저 나타난다고 하였다. ( ) 끝날에 께서 에서 될 때도 그리스도보다도 그리스도가 먼저 나타날 것이니 그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될 것임으로 그것을 하여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여도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23)고 되었다.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하면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으라고 하였을 것이지 어찌하여 에서 여기도 저기도 가지말라고 했을 것인가. 그러므로 이 는 께서 에서 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를 하신 것이다. 는 하여 「대개 번개가 하늘아래 이곳에서 번듯하여 하늘아래 저곳까지 비치나니라」고 그 때의 을 말씀하였다. 여기에 되어 있는 하늘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의 인 하늘이 아니라면 그 하늘에서 보이는 번갯불도 우리 으로 보이는 번개들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메시아를 하던 예루살렘 땅에 예수께서 하셨을 때를 하여보라. 이 나셨다는 소리와 아울러 그 빛나는 새 은 에서 번갯불같이 번쩍이어서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하였다고 되어있다(마 2/2~3). 이제 가신대로 오시마하신 께서 때와 같이 에서 하시게 되면 이와 한 은 또 될 것이다.
에도 와 한 이 벌어질 것은 이러한 에서 뿐만 아니라 님의 는 와 한 이 벌어질 것은 이러한 에서 뿐만 아니라 님의 는 의 것을  하는 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임으로 본대로 오시마고 말씀하신 바와같이 다시 오셔서도 의 과 와 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도 의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을 받으며 이 에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눅 17/24~25)고 말씀하신 것이다. 구름타고 오시는 님이라면 어찌하여 먼저 을 받아야할 가 그 앞에 될 수 있을 것인가.
에서 나타나신 께서는 밤낮으로 을 열어놓고 이 그 품 속으로 들어옴을 기다리기를 마치 노아가 을 열어놓고 기다리듯 하실 것이다.
그러나 적들이 이 닫힐 때까지 만 했던 것같이 님에 하여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노아의 때에 된 것과같이 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가 나서 저희를 다 하였으며······」(눅 17/26~27)라고 되었다.
구름타고 오시는 님을 하던 들에게 에서 나타나신 님이야 어찌 으로 보이지 아니할 것인가. 더구나 새 를 이루시려고 새로운 말씀을 던지러 오신 분임에서랴. 그러므로 예수님  유대들이 그러했던 것같이 그들에게 로 보여지는 예수를 로 믿고 따르려면 을 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그런로 예수님은 다시 말씀을 이어 「무릇 누구든지 그 목숨을 하고자 하는 는 잃을 것이요 오직 그 목숨을 잃고자 하는 는 보전하리라」(마 10/39)고 말씀하셨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님이야 누구든지 믿을 수 있을 것이니 죽음을 하고 믿어야할 가 어찌 있을 것인가.
한 자리에 두 사람이 있으나 그 에 죽을 를 하고라도 믿는 는 을 얻을 것이요 저를 믿으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니 믿는 사람은 의 을 하지 못할 것이다. 맷돌 가는 두 의 도(마 24/41, 눅 17/35)  이렇게 하늘과 땅의 두 갈래로 되어 하나는 남겨두고 하나는 데려가게될 것이다. 이 말씀을 듣던 바리새들은 「여 어디오니까」하고 하실 를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이에 하여 히 말씀하시지 않고 「주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나니라」(눅 17/37)하고 한 을 하셨다.
아브라함의  위의 쪼개지 않은 비둘기에 독수리가 한 것이니 이것은 치 않은 은 사탄이 한다는 것을 한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의 말씀은 주검이 있는 곳에는 주검을 하러 사탄이 모이는 것같이 님은 있는 곳에 그들을 하러 오신다는 뜻이니  님은 한 들 가운데로 나타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미 에서 한 바이지만 에는 모든 들이 하여 의 한 들이 하여 님이 오실 한곳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이 바로 끝날에 가장 한 들이 모이는 곳이요 있는 곳임으로 님이 나타나실 곳이다.
하시는 예수님에 하여는 2에서 한 바이지만 그는 한 아담인 의 으로 오셔서 을 해야할 인데 올라가실 때 본 예수님과 같이 한 로 오신다면 어떻게 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의 가 아니면 에 한 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그를 하기 하여 아담을 로 하셨음으로 2 아담된 예수님도 그러하셨지만 따라서 예수께서 다시 3 아담으로 오실 때도 의 가 아니면 아니된다.
한 것은 모세에로 미루지만 모세은 예수님의 본보기 으로서 모세가 이스라엘 을  사탄에서 하여 과 로써 를 거쳐 가나안 로 들어가는 은 바로 예수께서 이스라엘 을 하여 과 로써 와 같은 이 사탄에서 가나안 인 에로 들어가는 의 본보기이다.
이스라엘 을 하는 모세는 가나안까지 들어가야할 것이 하나님의 이요 이었으나 이스라엘의 으로 하여 그 된 뜻을 이루지 못한대로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를  한 것같이 예수님도 를 치 못하고 에 달렸음으로 하셔서 와 함께 그 뜻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이 뜻은 반드시 으로 오셔서 으로서 이루시려다가 못이루신 뜻은 다시 으로서 이루어 맞추어야한다.
로 보면 은 와 의 의 으로 세우기 하여 와 이 서로 한 의 를 맺도록 하셨다. 그러나 은 으로 하여 과 의 의 가 끊어졌으며 따라서 과  두 의 의 으로 서지못하게 되었음으로 는 의 을 잃고 하게 되었다. ( ) 으로 밝혀진 바와같이 예수님은 를 한 아담로 오신 분임으로 예수님 한분만이   두 의 의 이요 따라서 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도 인 여서는 아니될 것이요 따라서 예수와 같이 한 을 쓴 으로 오셔야   두 의 의 이 되어 을 한 를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는 에 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에서 하겠지만 「은 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인 것은 데임으로 한 것은 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고 하신 말씀대로 는  아담으로 하여 되었음으로 예수님도 요 또한 2아담으로 오셔서 이 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을 아버지라고 함도(사 9/6, 말 4/6) 이렇게 로서의 로 오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로 보더라도 예수로 3 아담으로써 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으로 하여금  를 하도록 하셨다. 로 은 도 해야할 였는데 이 되어 을 받게되었음으로 되고 말았다. 로 이 하여 사탄까지도 할 수 있는 가 되어야 된 으로서 하나님을  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로 사탄을 에게 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도 도 을 두고 창조하셨음으로 다시 찾으심도 으로 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은 스스로 세우신 를 스스로 하는 에 서게되는 것이다. 그런로 하나님도 으로 하여금 사탄을 시키도록 하시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가 이렇게 되어 내려온 것도 하나님이 히 사탄을 시키는 인 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탄을 한 의 의 으로 오셨던 분이시다. 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가 아니면 아니될 것이요. 따라서 예수께서 으로 남기고 가신  사탄 을 하시려고 다시 의 으로 오실 때에도 된 으로 오시지 않으면 아니된다. 의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은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할 때까지 다시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리라」(눅 22/18)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나라  이 이루어질 때에야 포도주를 마시겠다는 다. 그러므로 예수는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으로 오시지 않으면 아니된다.
의 로 세우기 하여 로써 된 아담이 되었으므로 을 잃고 하는 에 의 로 오신 분이 2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두셨다고 말씀하셨다(고전 15/27). 예수님의 을 사탄에게 내어주어 에 달리심으로써 의 로서의 을 쓴 예수님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은 또 에 머물게 된 것이다(롬 8/20~22). 예수는 을 잃어버린 의 으로 오시는 3아담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와 같이 을 쓴 으로 오셔야할 것을 잘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를 쓴 으로 하셔야할 예수께서 로부터 구름을 타고 으로 하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구름을 타고 하신다는 말씀은 무엇을 하는가.
요한을 보면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하시리니 의 눈이 반드시 보겠고 저를 찌른 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여러 이 다 하여 하리니 로 그러하리라 아멘」(계 1/7)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예수과 에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첫째에 할 사람들 뿐이요 그 밖에 죽은 들은 가 지나간 에야 한다고 되어 있다(계 20/5).
그런로 예수님을  찌른   로마들도   에야 할 것임으로 그들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찌른 라는 는  로 하여 를 하다가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찌른 를 로 한다면 같은  안에 있는 구름이라는 는 어찌하여 로 하지 못할 것인가. 그러면 구름은 무엇을 하였는가 알아야할 것이다. 위에서도 한 바이지만 모세의 은 예수님의 본보기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에서 이스라엘을 한 낮(+)의 구름기둥은 앞으로 같은 의 로 오실 예수님(+)을 함이요 밤(-)의 불기둥은 예수님의 로서 불의 를 하시는 (-)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은 마치 모세에서 구름이  가나안의 가 되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도 오셔서 가나안 의 가 된다는 뜻이다. 또 구름은 물이 되어 올라간 것을 이름이요 물은 된 을 말함(계 17/15)이다.
그러므로 구름은 된 이 하여 그 마음이  땅에 있지않고 하늘에 있는 한 들을 말한다. 또 구름은 나 에서 을 하였다(히 12/1). 그러므로 구름을 타고 온다는 말씀은  여러 가지 를 하면 한 의 무리 가운데서 인 이스라엘 의 로 하신다는 뜻이다.
위에서도 한 대로 바리새들이 께서 어디로 하실 것인가를 물을 때에 주검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고하신 말씀도 한 들의 함을 받아 한 들이 모이는 곳으로 ( ) 오시겠다고하신 이지만 구름타고 오신다는 것도 한 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찌른 가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신 그 가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려면 구름을 타고 오셔서는 아니되고 반드시 에서 하셔야된다.
마치 유대들이 엘리야는 하늘로부터 하리라고 믿고 하늘만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가 요한으로 온 것은 알지못하였음으로 따라서 예수님도 메시아인 것을 알지못하게 되어 그를 찔렀던 것과 같이 오늘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믿고 하늘만을 쳐다보고 있는 들은  예수께서 엘리야와같이 에서 을 쓰고 하신다면 히 저를 메시아로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으로 하신 그 분을 하여 하고 하며 에 가두는  별별 찌르는 일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에 께서 로 나타날 때는 옛날에 그 분을 찌르던 바로 그 들이 그 눈으로 보며 그 귀로 듣고서 가슴을 치며 울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씀하시어 모든 들로 하여금 하늘을 쳐다보게 하셨는가 알아보기로 하자.
을 하심도 사랑에서요 을 치 않으심도 를 하심도 사랑에서다. 그러므로 구름을 타고 오시마하신 것도 한 사랑에서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에서 으로 다시 하시겠다고 하셨다면 에 되었을 은 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이미 예수께서 한데서 몸을 일으키셨음으로 한 들까지도 제각기 로라고 하고 일어났을 것이니 이 은 어떻게할 것이었던가. 히도 모든 들은 하늘만을 우러러 보고 땅을 바라보지 않았던 으로 많은 을 해온 것이다.
이제는 가 되었음으로 오늘까지 숨겨져있던 의 뜻을 드러내어 재림에 한 를 밝히게된 것이니 이 얼마나 한 일인가. 의 에 하여서도 예수께서는 「내가 로 밝히게된 것이니 이 얼마나 한 일인가. 의 에 하여서도 예수께서는 「내가 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모든 을 다 다니지 못하여서 가 오리라」(마 10/23)고 말씀하시어 들로 하여금 그이 은 곧 이루어질 것으로 믿게하셨다.
또 가  어떠한 죽음을 죽을 것인가를 일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요한은 어떻게될 것인가를 하였는데 한 예수님의 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이냐」(요 21/18~22)라고 하셨음으로 들은 모두 요한의 에 예수께서 하실 줄 알았던 것이다(살전 1/10). 또 마태을 보면 「내가 로 너희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에 죽지아니하여서 가 그 나라로 하는 것을 볼 가 있나니라」(마 16/28)고 하신 말씀에 하여 그들은 반드시 살아서 를 맞이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듯이 곧 하실 것으로 말씀하셨던가 이것도 역시 한 사랑에서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로마의 과 또 그들의 을 하여 의 를 하게된 유대들의 를 물리치고 그 가운데서 싹트고 자라서 열매맺은 의 은  곧 다시 오시는 님을 만날 수 있다는 한 을 하여 되었던 것이다.
 들에게 하였던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던 은 님만을 다시 만나면 그만이라는 으로 하여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들은 의 한 을 하는 이 이 되어 불이 붙은 의 에 하여 을 아끼지 않고 땅에서 있는 을 하였으므로 에서 많은 을 쌓은  을 벗고 보니 누구보다도 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니 이 어찌 사랑의 에 넘치는 가 아니랴. 알파로 시작된 의 는 의 을 돌고 돌면서 의 를 하여 의 을 그리어 마침내 오메가로 끝날 것이다. 로 는 똑같은 의 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예수님 에 으로나 으로나 에 일어났던 것과 한 는 오늘 에도 되어 일어날 것이다. 의 의 유대들도 메시아에 하여는 오늘이나 다름없이 구름타고 오시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들은 메시아의 에 하여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이 이 나를 하여 하는 것이로되 너희가 내게 와서  얻기를 치 아니하는도다」(요 5/39~40)라고 말씀하셨고 다시 마태에서는 「모든  와 에 미리 말한 것이 요한까지 이르렀다」(마 11/13)고 하셨다. 은 예수를 하는 것임으로 그 은 그의 로 온 요한까지요 따라서 그리스도는 의 마침이시라(롬 10/4)고 하셨다.
그러므로 의 들 에는 다니엘의 「내가 밤에 얻은  가운데 보니 한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에게 나아올 새 무리가 하여 그 앞에 나아가니」(단 7/13)라고한 도 예수 에 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의 에 한 인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이 말씀에 하여 메시아는 구름을 타고 하실 것으로 믿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이와같이 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들은 에 을 쓰고 태어난 예수님은 메시아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을 일으켰던 것이다. 로 요한은 이들을 하기 하여 「 을 하는 가 많이 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 하심을 하는 요 그리스도니 너희는 저희를 삼가 우리의 임한 것을 잃지말고 오직 온전한 을 얻으라」(요이 7~8)고 한 것이다.
예수  의 유대들은 인 에 가 되어 그들의 에는 이 일어났던 것과같이 오늘의 모든 들의 도 인 것에 불들리게되어 날로 에 이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의 을 벗으려고 유대들은 요한을 따라 에서 한 것과같이 오늘의 들도 인 의 탈을 벗고 의  을 하여 의 을 벗으려고 애쓰며 과 들로 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메시아 의 를 듣기 해 를 해온 과 들에게는 알려주시지 못하고 의 와 치는 들에게 알려 주셨던가. 가 낳은 에게  할 수 없어서  에게 통사정하시듯 하신 하나님의 을 아는 가 에서 몇이나 될 것인가. 이 나신 것을 믿고 들을 하던 헤롯만치라도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을 알았더라면 그가 말 구유 위에 누었었을 것인가.
이 잘못하여 저로 하여금 피어린 자국을 에 남기게 하여놓고는 이것도 다 하나님의 하신 뜻이었다고 스스로 하고 있는 오늘의 가 아닌 서러움의 길을 걷고 가신 예수님의 눈물겨운 도 모르고 어떻게 그의 될 이 있을 것인가.
예수님은 을 과 들에게 던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하였으므로 이 은 들에게  해진 것같이(행 13/46) 다시 오셨어도 새 의 새 은 의 들에게 던져질 것이나  그들이 그것을 해버린다면 이 은 들에게 되어 그들 가운데서 새 의 새 이 될 것이다. 에 되어 있던 유대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이 이었던 것같이  에만 붙들려 있는 들에게도 다시오시는 님의 새로운 말씀은 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땅이 아직 어두워 밝히지 못하고 가신 하늘의 말씀(요 3/12), 들이 치못할 것을 하여 하시지 못하고 도로 가지고 가신 말씀(요 16/12)을 다시 오셔서 하시면 이는 또 으로 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하고 하여 에까지 내어주었던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함을 입고 로 예수님을 하며 를 하며 를 바치던 와 이었던 것같이 다시 오시는 님을 하여 를 들 도 역시 를 해 부름받았으나 그를 으로 할 수 있는 에 한 오늘의 들이 아니라고 누가 할 수 있을 것인가. 의 무덤을 하면서 를 하였던 의 유대들을 하던 과 들을 하고 있는 들은 다시 그들의 으로 돌아가서는 아니될 것이다.
사랑하는 들이여! 바로 하였던 에 불을 붙이고 나설 때는 되었다. 이제 발걸음을 옮겨놓기 에 지나간 를 하고 오늘의 나를 하여 걸어갈 의 에 을 하자. 히 우리 에는 두 길이 가로놓여 있으니 하나는 의 유대 들이 가던 것과 같은 길이요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가던 것과 같은 길이다. 우리는 마땅히 를 버리고 를 하여야될 것이다. 한 바와같이 로 히 우리에게 우리 이 할 길을 가르쳐 주고있지만 벌써 많은 들은 로써 뚜렷이 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안 것은 이 아니라 한 와 였고 가 아니라 과 사마리아의 요 에 달린 였다는  을 알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를 하여줄 는 오늘의 어떠한 도 아무리 훌륭하다고하는 사람도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 이 하나의 사랑에서 한 것같이 과 도 한에서 하게될 것이니 그 어느 편을 하는가 하는 는 가 지어야할 도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 하신 말씀에(마 6/6, 18)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에 들어가 하라고 하셨다. 나의 에 한 의 은 하나님과의 인 의 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8                            213
1 나무 로 본 아담과 예수
에덴동산에서 을 바라보고 하던 아담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은 나무에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됨으로 하여 하나님은 그룹들과 으로써 그가 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아버렸다(창 3/24). 그러므로 이 동산에서 쫓겨나 나무를 잃어버린 아담으로 시작된 는 에덴동산을 하여 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을 하려는 을 이루어나아가고 있다.
알파로 시작된  가 오메가로 될 때의 모든 사람들의 은 의 피로 물들인 옷을 빨아입고 나무에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된 말씀은 (계 22/14) 바로 의 은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이 나무를 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하는 것이다. 이 에 된 나무가 된 에덴동산의 예수를 한다면  에덴동산의 나무(창 2/9)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에덴동산의 나무나 된 에덴동산의 나무는 같은 동산의 같은 나무를 할 것임으로  에덴동산의 나무도 예수님을 한다고 보지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에덴동산에 예수께서 계셨을 수는 없는 것임으로  아담된 예수님을 하는 이 나무는 곧 첫아담을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에 된 나무는 을 하여 자라고 있는 첫아담을 하는 것이며  22에 된 나무는 된 에덴 동산에 한 아담으로 오실 예수님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아담이라고하는 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고전 15/45, 롬 5/14).
하나님의 은 말씀으로 된 아담이 다 자라서 되면 나무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말씀을 하여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요 다. 그러므로 나무라는 것이 로 에덴동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수님을 나무, 참감람나무, 장인이 버린 돌 으로 한 것처럼 될 아담을 하여 나무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룹들과 을 두어 그들이 나무에로 나아갈 길을 막았다」함은 아담이 나무가 될 수 있는 그 을 바라보며 하여 나아가던 에서 되었음으로 나무로서의 을 보지못하고 에덴동산에서 을 하고 말았다는 뜻이다.
이렇듯이 으로 하여 나무로서의 아담을 하시려는 말씀의 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음으로 말씀(로고스)은 말씀대로 남아져 하나님과 같이 계시게 되었고(요 1/1~) 한 아담은 나무를 이루지 못하고 말씀을 잃어버린 로서 사탄 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고로 된 의 의 은 「을 이루면 나무가 된다」(잠 13/12)는 의 말씀과 같이 잃어버렸던 에덴을 다시 하여 나무를 함으로 이 나무에로 다시 나아가 그와 하나됨으로 도 나무가 되려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계시던 이 말씀이 아담  4에 말씀 로 하여 오신 분이 곧 예수님이심으로 예수님은 아담이요 따라서 나무다.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의 함과 같이 너희도 하라」(마 5/48)고 말씀하신 것은 한 아담로 오신 예수 과 하나됨으로 과 같이 해지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죽으시지 않고  아울러 의 을 다하셨더라면 우리도  아울러 그에게 접붙임으로써(롬 11/24)  아울러 되어 을 한 나무들이 될 것이었는데 로 하여 한 예수님과 으로만 접붙이게 되었음으로  나무로서만 된 것이다. 이  의 는 바로 예수  로부터 시작되었다. 에 다락방에서 하던 120의 들 앞에 불같은 혀가 갈라지면서 그들은 을 히 받게되었음으로(행 2/3~) 비로소 하시어  나무가 되신 예수님에게 나아가  만을 받게된 것이다. 이 불같은 혀가 갈라졌다함은 에덴동산에서 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던 이 갈라져 그 길이 다시 열렸다는 것을 한다.
그러나 이 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은 으로만 열려지게되어  의 만을 받을 수 있게되었음으로 들에게 남아진 한 은  하여 다시 나무에로 나아가 까지도 벗어버리려는 것이니 이 나무가 바로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리고 온 가 한 를 두고 찾아 내려오던 나무  에 된 나무인 것이다.
2 을 알게하는 나무의                  216
에덴동산 가운데는 두 나무와 두 사람이 있었는데 두 나무는 나무와 을 알게하는 나무요(창 2/9) 두 사람은 아담과 해와였다. 그런데 그 에서 나무가 될 아담을 하는 것이라면 을 알게하는 나무는 될 해와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해와가 되어 하나님을 한 아담과 사랑을 맺었더라면 의 열매를 하였을 것이었는데 를 하고 이런 가 되어 의 열매를 하였음으로 과 은 해와를 한 하나의 사랑에서 한 것이다. 이와같이 해와는 하게 될 수도 있고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을 알게 하는 나무라하였고 해와를 한 사랑은 의 열매도 맺을 수 있고 의 열매도 맺을 수 있기 때문에 라고 한 것이다.
과 이 하나에서 하였음으로 의 와 의 도 한 에서 하는 것이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의 를  의 것으로 생각한 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 이 하나에서 하여 로 갈라지듯이 의 와 의 도 같은 모양으로 시작되지만  된 두 을 하여 의 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를 보면 과 의 를 곧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을 의 것으로 돌려버리려는 바리새들을 하여 예수님은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라고(마 12/33) 하셨으니 이 은 이러한 를 하는 좋은 라고 볼 수 있다.
에서 한 바이지만 우리가 으로 으로만 생각하기 쉬운 모든 도 하늘편으로 돌리면 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  의 를 우리는 으로만 생각하지만 이것도  하나님을 한 것이라면 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을 한 과 가 컸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의 터를 에 넓히고 간 것이다.
이와 같이 들의 모든 이 의 를 하게되는 것은 그 이 사탄의 뜻을 이루는 을 하였기 때문이므로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으로 돌려놓으면 모두가 의 를 가져올 것이다. 로 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탄에서 되어지는 모든 것을 그대로 하늘편으로 만을 돌려놓은 다. 이 을 돌릴 수 있는 으로 오시는 분이 다시 오시는 님이시다.
3 로고스의 으로 본 아담과 예수                    217
「에 말씀(로고스)이 있으니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계시매······」(요 1/1~)라고 된 을 보면 같이 계시다는 말씀은 「pros ton theon」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하여 한 으로 한다는 뜻이다. 으로 하면 로고스는 하나님의 로서 하나님과 의  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로고스의 인 하나님이 이므로 그의 인 로고스도 이 아닐 수 없다. 로고스가 이 아니라면 로고스로 된 이 으로 되었을 는 없는 것이다.
로고스가 으로 하여 하나의 로서 하여 로고스 로 나타난 가 예수님이요(요 1/14) 따라서 나무이며(묵 22/14) 에 된 아담이다.
에서 이미 밝혀진 바이지만 하나님과 사람과의 는 마음과 몸과의 로서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을 닮아서 그의 로 된 것이 인 것같이 마음의 을 닮아 그의 로 된 것이 몸이다.  의 마음의 로서 된 것이 몸인 것같이 이 하나님의 로서 된 것이 사람이다. 은 바로 이것을 하는 바이지만 얼굴 뿐만 아니라 의 과 까지도 의 이다.
이와같이 사람도 그 는 하나님을 닮았으므로 이  되지 않았더라면 마음이 몸에 나타나듯이 하나님은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요 마음과 몸을 뗄 수 없는 것같이 하나님과 사람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하는 대로 몸이 할 때 마음이 기쁜 것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이 할 때 하나님은 기쁜 것이다. 몸이 마음의 을 할 때 마음이 서러운 것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할 때 하나님이 서러워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하여 마음의 대로 몸으로 케하려는 것이 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의 이라(고전 3/16)고 하셨고 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요 14/24).
가  되지 않고 이와같이 하나님이 히 하실 수 있는 이 되었더라면 우리들도 예수님과 같이 을 가진 가 될 것이었다. 이렇듯이 은 말할 수 없이 한 하나님의 로 된 것이었으나 지금까지 의 를 몰랐기 때문에 은 의 을 치 못하였다.
은 없는 으로 해버린 것이다.
로고스 이시며 한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의 하나님의 으로 에 나타나신 분이심으로 된 우리와는 의 가 있다. 그러나 창조원리로 보아  이 되지 않고 되었더라면 우리는 예수님과  다른 것이 없다. 예수님은 된 으로서 오직 한분의 하나님의 몸으로 와 없이 나타나신 분이요 우리는 의 을 받아 에 하게 된 이라는 에서 다른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의 몸을 쓰고 로 오신 예수님은 어디까지든지 이었다. 예수께서  우리와 다른 이 있었다면 그의 동생조차 그를 몰라보았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한 가 계시매 그는 사람이니 곧 그리스도라」(딤전 2/5)고 하신 말씀도 있거니와 「한 사람의(예수) 하심으로 뭇 사람이 이 되었느니라」(롬 5/19~)고도 말씀하셨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의 도 생겼도다」(고전 15/21)라고하신 의 으로 보더라도 예수님은 사람이라는 것이 에도 되어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 도 을 라고 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요 15/5)라고 하셨으니 나무와 그 가지가 서로 다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의 을 치않은 임으로 의 머리가 되었고 우리는 된 임으로 이다. 예수님은 참감람나무요 우리는 돌감람나무니(롬 11/17) 그에게 접붙임으로써 우리도 참감람나무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하셨고(요 15/14)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같을 줄을 아는 것은 ······」(요일 3/2)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에 오셨을 때에도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에서도 그의 들과 똑같은 사람이다. 다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를 잡고 계시는 로서 그의 한 빛을 하지 계시며 들은 그의 빛을 받아 하는 로 있는 것뿐이다. 은  하지 않고 되었으면 예수님과 같이 가 될 것이었음으로 앞으로 한 에덴 의 가 오면 들도 를 이루어  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 ) 다만 예수님은 처음 익은 열매될 것뿐이요 들은 다음 익은 열매가 될 것이다(고전 15/23).
첫 아담으로 하여 된 은  아울러 히 시키기 하여  아담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이 뜻을 하지 못하고 하셨음으로 에서 이 뜻이 이루어지기를 해 아직도 하늘에서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롬 8/34).  예수께서 하나님 이라면 하나님 이 누구에게 기도할 것이며 하나님 이 에서 사탄에게 을 받을 는 어디 있으며 하나님 이 사탄에게 몰려 에 죽으실 는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의 로고스 의 인 것이다.
그러면 의 로고스가 된 예수님으로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된 예수님 앞에 의 가 있어야할 것이니 그것이 곧 이다.
4 로 본 예수와 과 의            221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창 1/28)대로 까지 하여 없는 를 하였더라면 는 참 의 사랑에서 된 참 들로서 태어나 하나님의 은 되었을 것인데 가 되었음으로  는 된 의 사랑에서 되어 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한 가 한 를 낳았으니 이것을 하려면  (  )에 하여 참 가 를 다시 낳아주지 않으면 아니된다. 여기에 의 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는 하나에서부터 한다. 그러므로 의 을 보아도 첫날 짓고 둘째날 셋째날······ 이렇게 이었고 첫날 지음도 하나의 빛을 하심으로 하였다.
도 그렇다. 아담 한사람을 하시고 그 하나의 몸에서 해와를 하셨다. 을 하심도 하나의 아담을 하는데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인 도 하나의 아담을 복귀하는데서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를 에 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 아담을 다시 찾으심으로써 의 를 하시자는 것이다. 이러한 에 하여 된 아담으로 오신 분이  아담 예수님이심으로(고전 15/45,) 예수님은 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신 아버지(사 9/6)라 하셨고 한 과 의 를 맺으러 오신다(말 4/6~)고 하셨으며 다시 오실 때에는 아버지의 으로 오신다(마 16/27)고 하셨다.
된 아담  참 아버지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된 해와  참 어머니로 오신 분이 계셔야 이 참 가 된  를 다시 낳아() 주실 것이 아닌가. 이 참 어머니로 오신 분이 이다. 된 예수님에 의 로 오신 분이 이라 함은 이미 위에서 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은 해와의 이시오 따라서 어머니 이시다. 많은 사람들이 은 이라는 를 받고 있지만 이러한  는 알지 못하고 있다. 해와가 의 뿌리가 되었음으로 에 하여 해와의 으로 오신 은 의 를 씻는 를 해야 되며 은 이므로 의 이요 또 의 이므로 을 받지 않으며 예수님 앞에 로 설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므로 하늘()에서 하시며 은 이시므로 땅()에서 하셔야된다. 과 과 의 힘은 을 하여 의 이 되는 데서만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의 힘도 예수()는 ()과 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의 힘을 하는 것이다.  은 사랑에서 시작되는데 의 에 하여 예수님을 믿게되면  참아버지된 예수님과  참 어머니된 과의 에 하여 맺어지는  참 의 사랑에 한 새 이 되면 새로운  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란 이와같이 참 가 된 우리를 다시 낳아주는 를 말함이다.
5              222
에 하여 하나님과 과의 는 되었으며  2부터 4까지에서 아담과 예수님과의 도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가 까지 되어 하나님의 에 한 한 가 되었더라면 그들이 바로 하나님을 한 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로 한 나무와 을 알게하는 나무로서 를 이루었을 것이며 따라서 는 로고스 의 에 한  을 하시려는데 그 이 있다. 으로 하여 아담 해와로서 이루지 못한 이  을 아담 해와로 오신 예수님과 으로서 이루신 것이다.
된 은 에 하여 나무와 을 알게하는 나무에로 나아가 그와 하나되면 도 나무와 을 알게하는 나무로서 될 것이니 이 두 나무가 하나님이 하는  로 세워지게 되면 하나님을 한  을 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가 된 에 있어서의 모든 은 하나님이 하시는  곧 아담 해와가 치않고 이루었어야할 것과 같은 를 하게되면 는 모두 하나님을 한  을 이루므로 온 는 한 으로된 한 와 한 가 될 것이니 이것이 곧 을 한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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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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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의 으로 하여 된 를 로 하여 하나님의 의 을 코자하는 라는 것은 이미 에서 하였다.
그러므로 는 어떤 에 어떤 에서 어떠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하는 인 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뒤에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하고있는 사탄 사이에서 하나의 을 하고 벌어지는 인 들이 그대로 에서 로서 되는 것이다.
그러나 로써 알려지는 이스라엘나 많은 들에 하여 하여오는 는 이 에서 일어난 인 만을 그대로 하였을 뿐이고 하나님과 사탄과의 인 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는 어떻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 는 어떠한 인 을 이루어 나오는 것인가 하는 에 하여서는 한 을 하여주지 못하였다.
가인이 아벨을 함으로써 시작된 과 의 는 알 수 없는 헝클어진 을 그리면서 한 을 두고 돌고 또 돌아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다시 찾아 나아가는 을 하고 있다. 된 이 의 로 다시 돌아가려면 이 헝클어진 을 찾아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길이 된 이 걷지 않으면 안 될 길이요 이른 바 이다. 에 오고간 많은 과  또 뭇  들이 하여 찾아 헤매온 길이 바로 이 길이었다.
에서 헤매는 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를 찾으며, 한숨을 지으며 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를 떠나서는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미 에서 되었다. 로써 를 하신 하나님은 인 로 를 떠나서는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에게 있어서도 한날의 를 하기 한 프로젝트가 있거든 하물며 6의 를 하시는 하나님이 인 프로젝트를 떠나서 인 를 하실 것인가.
이 헝클어진 이 인 로써 풀려질 때 온 는 다같이 한길을 하여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한 을 하여 한 곳으로 모이어 하나님의 한 로서 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을 벗어나 이 되어 의 길을 걸어야한다. 이 되려면 를 알아야겠고 의 길을 걸으려면 의 길을 알아야겠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를 알지니 가 너희를 놓아 주리라고 말씀한 것이다(요 8/32).
에 오고 간 많은 들이 부르짖은 어떠한 도 도 그는 이 의 길의 한토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를 하고 을 로한 의 도 이로써 알려질 것이다.
이 흐름에 따라 는 한 에 한  은 에서 되어지는 을 하고 하여왔다. 그리고 이 을 하는 한 은 그  은 이 가지고 있는 이며 이 의 를 하는 의 은 그 이나 의 을 하는 에 있다.
의 는 하나님의 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에는 이스라엘 을 한 요 에는  이스라엘인 를 한 로써 이루어 내려온 인 을 밝히려는데 있다. 된 는 의 없는 와 같이 의 를 한 다. 그러나 을 하고 하신  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를 하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하신 의 만을 갖추고 있는 를 다시 로 하려는 를 하신다. 그러나 이 된 는 사탄도 할 수 있는 인 이 되어 있음으로 하나님과 사탄과의 사이에 어떤 을 시키지 않고는 이를 로 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는 히 때와 곳을 터로한 을 하고 일어난 로써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 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은 반드시 하나님과 사탄과의 사이에서  을 갖고 벌어지는 의 인 로서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는 하나님과 사탄이 된 을 에 놓고 서로 을 세워가면서 싸우는 사람 빼앗기 싸움의 이라고 볼 수 있다. 는 라고 부르는 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라는 것은 무엇을 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무엇이든지 의 와 를 하였을 때 그 를 하려면 반드시 어떠한 이 되어야한다. 이와같이 의 와 를 하기 하여 이에 하는 을 세우는 것을 이라고 하며 이 을 세워 의 로 하는 것을 라고 한다.
을 세움에는 두가지 이 있다. 첫째는 의 와 에서 되었던 것과 한 의 을 세워 으로 하는 것이니 이런 에는 이라든가 이라는 의미로 할 것이다. 이나 을 하는 것은  은 할 가 없었던 의 을 하기 함이다. 「은 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인 것은 데임으로 한 것은 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고 된 모세의 은 곧 이런 의 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된 의 보다 훨씬 작은 의 을 세워 을 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의 은 를 한 이다. 의 와 를 하기 하여 은 의 이나 으로는 그 된 의  를 찾아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여 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조그만 로써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죽었다는 을 세워  의 을 받는 것이다.
의 도 로써 받은 노아의 을 하기 한 을 세우려는데 있다.  우리의 몸 를 물에 담갔다는 것으로 노아 를 거쳤다는 을 세워 40 으로 을 받은 노아의 을 하려는 것이다(벧전 3/21). 에는 머리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한 을 세우고 있다.
한 조각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로써 예수님의 를 먹었다는 를 찾아 세울 수 있음도 이것으로써 예수님과의 인 을 하기 한 을 세웠기 때문이며 이스라엘이 를 하는 것도 아담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로 하여 의 피를 받았음으로 그 을 하려면 그 를 쳐서 의 피를 뽑지 않고는 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은 어떻게 세울 수 있을 것인가 하면 의 를 하게 된 와 의 에 한 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예수님을 미워하여 에 하였음으로 이 에 빠졌으니 예수님을 하지 않고 이루었을 의 을 하려면 그와 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도 예수 와 같은 죽음의 길을 걸었다는 을 세우지않으면 아니된다. 무릇 이 의 을 받는 는 이와같이 를 한 을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하여 하나님을 서럽게 하였으니 로 내가 서러움을 하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써 을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을 하기 의 으로 복귀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에서 의 을 마치는 에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도 이와같이 의 를 키 한 을 세워야할  가 있기 때문이었다.  에덴동산의 아담은 하나님의 품 속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품 속으로 하였음으로 아담으로서 아담의 저지른 를  하러 오신 예수님께 하여서도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는 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하나님이 버리시는 에서도 하나님에 한 을 버리지 않는 을 세웠기 때문에 온 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예수님의 을 하려면 로 우리 들도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들은 이렇듯 예수님과 같이 의  를  하고 간 사람들이다. 무릇 으로서 하늘을 하여 왔다간 모든 들의 한 도 예수님과 같이 이러한 을 세워 사탄를 빨리 하늘로 하기 하여는 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으로 된 모든 들은 가 의 로 히 될 때에는 그 에 하는 를 받게되는 것이다.
한 에 세워진 도 그 의 과 를 대로 하기 한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 이 하나님 앞에 세워야할 인 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하시고 그들이 지켜야할 오직 하나의 을 주셨던 것이다. 그 은 곧 믿음이라는 이었다.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창 3/3)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리라는 으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참조)
에서 이미 한 바이지만 이 을 주신 것은 아담이 로 하나님을 하는가 아니하는가를 보시기 함이 아니요 의 힘보다 한 사랑의 힘으로 하여금 를 치 않도록 하시기 한 이면서도 한 것으로서 아니 세울 수 없는 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에만 한 것이 아니라 의 아담에게 있어서도 에 할 때까지는 의 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하나님과 을 이루어 믿음을 완성한 에게 있어서는 믿어야할 아무 조차 치 않은 것이다.
아담은 이와같이 하나님에 한 믿음의  위에 서야할 것이었는데 이 믿음의 에 사탄이 하였기 때문에 그의 에까지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된 아담이 다시 의 를 하려면 에 하여 먼저 믿음의 를 세워가지고 그  위에 아담을 하여 그를 하고  전체를 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은 아담된 메시아를 맞기 한  4이란 한 의 흐름을 치 않았던 것이다.
가인이 아벨의 이 모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 것이 되어 가인이 아벨을 하는 일이 없었다면 그 때에 믿음의 는 되어 그  위에 아담(예수)이 되어 에덴는 아담에서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함으로 이 믿음의 에는 다시 사탄이 하였음으로 그를 다시 하기 하여 노아를 세웠던 것이다.
그런로 함의 가 없었더라면 노아을 하고 믿음의 를 세워 그  위에 또 메시아는 오셨을 것이었다. 노아의 은 이 을 하여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마저 아담과 같은 으로 돌아갔음으로 함의 로 하여 잃어버린 이 믿음의 를 키 하여 믿음의  아브라함을 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가 없었더라면 그 믿음의 는 되어 그  위에 메시아는 오셔서 의 는 이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로 하여 그 에는 다시 사탄이 하게 되었음으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은 사탄에게 내어준 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는 이삭를 거쳐 야곱에게 되었음으로 야곱은 믿음의 의 뜻을 하지 않으면 아니될 을 갖고 사탄인 밧단아람과 으로 들어가 사탄과 싸우며 하늘의 를 하여 다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를 으로부터  에로 넓히어가면서 예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예수님까지의 2 은 아브라함의 로 하여 잃어버린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인 믿음의 를 하는 이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2 을 다시 하늘 것으로 하는 이 있어야할 것이니 이 이 곧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2 이므로 이 시대를 라고 부른다.
으로 보면 아담으로부터 2 은 믿음의  아브라함 한분을 찾아 세우기 한 으로 되었고 을 불러세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인 믿음의 터를 키 한 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까지 이르렀음으로 이 를 라고 한다.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은 아브라함 한 분을 찾아 세움으로써 다음 를 할 수 있는 를 한 였음으로 이 를 라고 한다. 그런로 로 하여 는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가 없었다면 인 믿음의 는 되어 에덴의 뜻을 이루었을 것이었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고 따랐다면  아울러 예수님을 한 로 바침으로써 인 믿음의 는 되어 에덴 의 뜻은 이 때에 또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된 예수님을 함으로써 마치 아브라함의 에 사탄이 한 것같이 된 예수님의 몸에 사탄이 하게 되어 이 도 역시 사탄에게 내어준 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을 또 다시 하늘편으로 하여 세우는 예수  2 이 있어야할 것이니 이 을 라고 하는 는 여기에 있다.
이렇듯이 무너진 인 믿음의 를 하기 한 는 예수  들을 불러세워 에 이르러 인 믿음의 를 하는 로 옮겨진다. 이와같이 아담으로 하여 잃어버린 믿음의 를 찾아 세우기 한 는 아브라함 에서 이스라엘 을 거쳐 를 한 에로 되어 이 터 위에 예수께서는 하셔서 를 함으로써 아담 해와가 치 않고 이루어나온 것과 같은 를 에 이루어 맞추고자 하는 것이므로 이 를 라고 부른다.
이로써 는 잃어버렸던 믿음의 를 하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였다.
그러면 이 믿음의 를 키 하여는 어떠한 을 세워야하는가를 알아 보기로 하자.
위에서도 한 바이지만 이 될 때는 하나님과 의 을 이루어 믿어야할 조차 치 않게되는 때다.
믿어야할 이 없다함은 믿음의 을 다 이루어 믿음을 하였음을 한다. 여기에 믿음의 이라함은 하나님과의 사이에 와 사랑의 를 히 함을 한다. 하면 하나님의 한 사랑을 체휼할 수 있는 의 의 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히 할 수 있는 의 는 무엇을 하는가하면 아담이 의 가 되어 의 을 받지않은  를 하여 하나님 아담 해와  이렇게 를 함으로써 의 와 와 의  사랑을 할 수 있는 를 말함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아담을 하시고 그에게 주신 의(창 1/28) 이었으나 으로 하여 아담 해와는 하나님을 하지 못하고 사탄을 하여 를 이루어 사탄의 을 받은 를 낳았음으로(요 8/44) 하나님을 한 는 사탄을 한 가 된 것이다. 하나의 가 되려면 그를 한 와 의 가 되지 않으면 안 되므로 4는 다. 그러므로 에 하나님의  가 되려면 사탄 하고 된 이 를 하나님을 한 로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러한 로써 믿음의 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한 이 를 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의 도 사탄의 를 하나님을 한 로 하려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를 한 라고한 의 는 해질 것이다. 를 한 터 위에 믿음의 를 코자 노아 40로써 믿음의  노아를 세우려 하였으나 함의 로 하여 이 에 사탄이  하였음으로 믿음의 기대에도 사탄이 하여 이것을 다시 하기 하여 400 를 세워 믿음의  아브라함을 세웠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로 하여 이 에는 사탄이 다시 하였음으로 이를 다시 하기 하여 이스라엘의  400 이 남아졌으니 이렇듯이 한 의 을 두고 하나님은 얼마나 를 세우시려 애쓰셨으며 사탄은 이를 얼마나 하였던가.  노아 40을 비롯하여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400, 이스라엘의  400, 모세의 바로  40, 미디안  40, 시내  40, 이스라엘의 가나안  40, 여리고 탐정 40,  400, 사울 40, 다윗 40 솔로몬 40 엘리야 호렙까지  40 예수님의  40  40 요나의 니느웨에 한  40 아담부터 예수님까지 4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0(아브라함 로 하여 42가 됨==)을 보면 에 애쓰신 하나님의 을 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의 에서 를 하기로 하자. 이 된 라는 것은  사탄을 히 시킨 다. 하나님은 으로 를 하셨기 때문에 이 를 다시 찾으심도 이란 에서 하지않으면 아니된다.  의 로 을 하셨음으로 은 도 해야 되고 따라서 된 인 사탄까지도 이 하는데까지 이르지 못하면 의 로서 하나님을 할 수 있는 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사탄을 시킬 때를 바라시고 하시는 것이다. 의 은 어디까지나 에 이 있지만 하나님은 하신  이 있기 때문에 사탄의 1은 하나님 이 하셨으니 이 가 곧  다. 하나님은 이 를 하여 들을  하시고 하셨다.
의 2은  아담과 해와에게 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  을 지고 오신 예수님과 ( )이 사탄 의 2 을 지고  을 하여 하신 가 곧  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은 에 있어서 하나님이 를 세워 사탄의 길을 보여주신 1을 본보기로 의 2을 걸음으로써 다음에 들이 사탄을 시킬 수 있는 3의 본보기를 보여주셨던 것이니 들이 이 3을 걷는 가 곧 다. 그러므로 는 예수님과 의 는 끝나고 하늘에서 하는 들과 의 들이 하여 사탄을 시켜야할( ) 임으로 이 는 의 요 은 하셔야할 다.
이제 우리는 이 에 맞추어질 수 있는 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다. 가 그러하듯이 무엇이든지 없이 되어지는 는 있을 수 없다. 이와같이 많은  은 을 터로한 가 얽히어지면서 의 인 은 하나의 을 하여 움직이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으로 하여 내려오면서 의 인 을 하여온 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을 하고 이루어진 이스라엘다.
그러므로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4은 에 씌어있는 이스라엘가 의 가 될 것이요 예수는 바울이 이른바 이스라엘인 로써 엮어내려온 가 그 가 되어야할 것이다.
 는 의 에 되는 와 또 에 있어서의 와 에 되는 과 이 있으며 히 이스라엘에 되는 이 있으나 에는 예수님 의 들의 만이 되어 있으므로 가 에 되는 으로 남아지려면 가운데는 예수님 2 의 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되면 만이 예수님 의 의 가 될 것이다.
와 우리와는 어떠한 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은 가장 한 일 것이다. 오늘의 나는 나 하나로서의 내가 아니다. 오늘의 나는 의 로써의 나요 오늘의 와 인 를 가진 나요 지난 를 하여 의 나를 세워야할 나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에게 있어서는 지난 의 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이제 히 들었으나 나의 으로 보아 이 무슨 인지 알려주는 은 하나도 없으니 이제는  보기는 그만두고 를 들추어 나의 을 알아내러 바른 를 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의 나의 은 지난 역사를 들추어 바른 을 내리는데만 되어있다. 지난 를 하고 하여 새로운 를 빚어내야할 나는 에서 들을 하고 하나의 뜻 가운데서 벌어졌던 그 모든 들을 으로 하여 그들이 이루지 못한 들을 내 한몸에서 의 으로 세워놓지 않으면 6 를 한 로서의 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 프로젝트를 맞추기 하여 왔다간 모든 들의 걸은 길은 모두가 우리가 되풀이하여 걸어야할 길이요 그들이 다 걷지 못하고 남긴 의 길까지도 다 걸었다하는 을 세워놓아야 예수께서 남기고 가신 을 한 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는 지나가 죽어버린 것이 아니고 지금의 것으로 살아있는 것이요 또한 앞으로 올 것이므로 이것을 아는데서만 오늘의 나를 알아 의 나의 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를 깨닫고 알아 그의 하시는 뜻을 맞추어 뼈저린 의 에 잠기울 때 하나님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으로 를 찾아오실 것이다. 에 된 와 에 하여는 이 있을 것이다. 많은 들은 의 이 6이 훨씬 넘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들이  에서 세운 이다. 5 의 는 모두 하다. 오직 에는 6 가 뚜렷이 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는 모두가 이요 이며 또한 을 띠우고 있다는 것이다.
 똑같은 을 한다 하더라도 를 따라 또는 를 받는 사람의 과 의 에 따라 또 그 을 따라  그 받는 이 치 않다. 이를테면 를 보면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전 1/5)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을 믿고 있는 의 들에게는 그들의 을 그대로 하여 해가 어떤 한 곳으로 돋기도하고 지기도하는 것처럼 를 주셨다. 우리는 해가 도는 것이 아니라 가 돌고 있다는 것을 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가 틀린다고 한다면 도리어 어리석은 가 되고말 것이다.
이와같이 설혹 의 의 가 6이 훨씬 넘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뜻을 하고 생각하면 는 로써 참이 아닐 수 없다. 로써 를 밝히었으니 이렇게 밝혀진 로써 하나님의 의 을 하려하신 것은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밝히기 하여 로써 주신 이 에 하여는 와의 를 하고 아무 도 되지 않는 것이다.
1                      242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요 이심으로(요 14/6)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된 에덴 동산으로 들어갈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 은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를 하려는데 있다. 이 는 일찍이 아담 을 하고 하여 메시아를 맞으려하였으나 가인이 아벨을 함으로써 이 는 노아 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함의 로 하여 노아도 역시 아담의 과 같이 이 를 하지 못하였음으로 이 는 또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역시 를 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하고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를 하려던 의 뜻은 다시 모세에게로 옮겨졌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를 한 이스라엘 을 불러세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를 키 한 2 은 로 아브라함의  로 하여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으로 보면 메시아를 맞게하려는 의 로서의 아브라함 한분을 찾아세우는 으로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와같이 이 는 아브라함의 로 하여 그 에 오는 의 를 한 가 되었음으로 이 를 라고 한다. 사탄 의 에서 보면 이 는 로서  에 한  의 인 것이다.
1 아담을 한             243
이나 가 된 은 어디까지나 그 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마땅히 버려야할 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을 두고 하신  이 있으므로 하나님도 그들을 하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찾으시어  로 케 하심으로써 로서의  을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은 사탄과 를 맺어 사탄에게도 을 할 수 있는  이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은 아무 도 없이 을 에로 할 수 있는 에 세울 수는 없는 것이요 사탄도 역시 의  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으므로 아무 없이 을 가 할 수 있는 에만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아담은 와 같은 에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 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할지라도 그는 하나님도 사탄도 할 수 없는 에 하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은 을 벗은  그 도 역시 도 아니고 도 아닌 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에 있는 을 하나님 편으로 하려면 반드시 어떠한 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의 로 되었기 때문에 이 도 이 세우지않으면 아니된다.( )
그러면 이 세워야할 이 은 무엇인가하면 이미 에서 한 바이지만 로 한 믿음의 를 해야된다는 이다. 이러한 이 하게됨도 아담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되었음으로 이 을 사탄에게 빼앗겼던 까닭이다.( )
이 믿음의 를 키 한 로서 세운 것이 이다. 이 을 하게 바치는가 바치지 못하는가하는 에 하여 믿음의 가 되는 것이며 이 의 에 따라 하나님 편이냐 사탄 편이냐하는 도 되는 것이다.
에는 으로 을 세웠고 에는 으로 된 예수님을 보내시어 그로 말미암아 믿음의 를 하는 을 세우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아담부터 을 바치게 하지않고 가인 아벨로부터 바치도록 하셨는가하면 이것도 로써 된 이므로 다시 찾으심도 로써 찾기 함이었다. 에 하면 은  한 을 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한 를 두 을 하는 입장에 세워놓고는 인 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을 로 하면 사탄도 아담과  를 맺었던 인 이 있으므로 사탄도 역시 아담을 할 수 있게 되어 아담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을 하는 인 에 서게된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인 를 할 수 없으므로 과 의 두 의 인 아담을 두 으로 갈라세우는 을 하도록 하기 하여 그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과 의 두 로써 시킨 것이다. 그리고 과 의 이 두 를 하나님과 사탄 각각 할 수 있는 인 에 세워놓고 각각 한 을 로 하는 인 에 하여 케하여 이 의 에 한 믿음 의 에 따라서 하나님 편이냐 사탄 편이냐를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아담의 이므로 누구를 하나님의 인 에 세우며 누구를 사탄의 인 에 세울 것인가하는 것은 히 한 일 것이다. 이것을 하기 하여는 두 의 의 인 해와의  에 하여 짓지 않으면 아니된다.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은 해와의 의 인 까닭이다.
해와의 은 두 의 한 사랑의 으로 하여 되었다. 첫 번은 의 에 하여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지려는 한 에서 하여  인 과의 사이에서 맺어진 사랑으로 한  이요 둘째번은 첫 이 였다는 것을 깨닫고 로 찾아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 를 세우려는 생각에서 하여  인 아담과의 사이에서 맺어진 사랑으로 한  이다. 이 두  에서 어느 것이 보다 이며 보다 를 받을 수 있는 인가를 해 보면  첫 번 사랑의 보다도 둘째 번 사랑의 이다. 왜냐하면 둘째 번 사랑의 는 으로는 가 되어버렸으나 첫 번 를 하고 하나님 편으로 하려는 이 그 가 되었고 또 아직 때는 되지않았으나 그들이 된 에는 하나님이 하실 사랑이기 때문이다.
가인과 아벨은 사랑의 의 열매다. 가인은 사랑의 첫 열매이므로 과의 첫 사랑으로 한  을 하는 로서 사탄이 할 수 있는 에 세웠고 아벨은 사랑의 둘째 열매이므로 아담과의 둘째 사랑으로 한  을 하는 로서 가인보다 인 편에 설 수 있는 이므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에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을 하였으면 어찌하여 낯을 붉히느냐 가(사탄이)  앞에 엎드려있나니 너는 저를 방비하라」(창 4/7)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사탄()은 가인을 할 수 있는 에 서서 가인에게 할 만을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를 하여 가 을 받지 못하고 가 을 받은 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에 의 뿐만 아니라 에 이르기까지 맏것을 친 일이며(출 12/29) 에서부터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한 것이며(창 25/23)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할 때에 를 하기 하여 손을 바꾸어 한 일이며(창 48/14)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할 때에는 아벨의 인 레위의 만이 를 메고갔었다는 것도(신 31/25) 는 가인의 이요 는 아벨의 이라는 인 에서 되어진 이다.
이러한 에 하여 가인과 아벨을 사탄과 하나님이 각각 한 으로 할 수 있는 인 에 두고 을 바치게 하였을 때 (창 4/3~) 어찌하여 하나님은 아벨의 은 받으시고 가인의 은 받지않으셨는가하는 는 아직도 의 로 남아져있다.
가인이 을 하고 아벨이 을 하게된 도 이러한 로써만 될 수 있다. 의 로 보면 하나님에  가까운 는 사람이요 다음엔 요 다음엔 이요 다음엔 이요 나중은 이다. 그러므로 아벨은 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운 을 하는 것으로 그 을 삼은 것을 보아도 가인보다 아벨이 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가인이 를 지었기 때문에 의 인 으로 을 드렸고 아벨은 을 하였기 때문에 동물로 피의 을 드린 것뿐이다.
그러므로 아벨이 피의 을 드렸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생각하는 지금까지의  에는 그의 을 할 수 없다. 「아벨은 가인보다 아름다운 을 바쳤다(히 11/4)고 한 것은 가인의 을 받지 않았다는 만을 보고 한 말씀이다. 위에서도 한 대로 아벨의 인 은 가인의 인 보다 하나님 앞에 가깝기 때문에 아름다운 이 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벨의 만을 받으시고 가인의 은 받으시지않은  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벨의 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인 에 있었으므로 받았으니 (창 4/4) 이것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만 되어 있는 라면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 받으신다는 것을 하시기 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인의 을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탄을 하고 있는 가인이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려면 어떠한 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하시기 함이니 무릇 사탄이 할 수 있는 에 한 가 하나님 편으로 옮겨지려면 반드시 을 세워야한다는 를 세우기 함이다.
그러면 가인이 세워야할 이 은 무엇인가 하면 사탄 편에 서있는 가인은 하늘 편에 선 아벨을 사랑하며 그에게 함으로 그를 로 세워 가지고 으로 하나님 앞으로 ㄴ아가야한다는 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가인은 아벨을 하여서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면 그렇게 함으로써만  ( )을 할 수 있는 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좀더 하여 보면
(1) 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을 하나님과 같은 에서 사랑하지 못하고 하여 하였으므로 이  을 벗고 을 할 수 있는 을 세우려면 그와 의 를 밟지 않으면 아니된다.( ) 그러므로 된   사탄을 하는 에 세워진 가인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의 에 세워진 아벨을 사랑하는 에 서지 않으면, 이 아담을 사랑하지 못한  을 할 수 있는, 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2) 은 아담보다 으로 되었기 때문에 그는 아담을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할 에 있었는데 그는 의 이러한 사랑의 를 떠나 보다 한층 더 의 사랑을 받아야될 에 있는 아담의 사랑의 를 하려다가 이 되었으므로 이 을 할 수 있는 을 세우려면 역시 의 를 밟기 하여 과 같은 에 세워진 가인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과 같은 에 세워진 아벨을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에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3) 은 의 을 받아야하며 해와는 아담의 을 받아야 할 것이 인데 이 되어 은 해와를 하였으며 해와는 아담을 하여 이 되었다. 이 을 할 수 있는 을 세우려면 역시 의 를 하여 의 을 받아야할 의 이며 에 아담의 을 받아야할 해와의 에 세워진 가인이 을 해야할 의 이며 해와를 해야할 아담의 에 세워진 아벨에게 하여 가인이 아벨의 을 받는 을 함으로써 아벨로 하여금 가인을 하는 을 세우도록 하지않으면 아니된다. 이와같이 함으로써만 이 을 할 수 있는 을 찾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4) 는 하나님을 버리고 되었으므로 이 을 할 수 있는 을 세우려면 역시 로 된 의 인 가인은 하나님이 그 을 받지 않고 그를 버렸다하는 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벨의 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아니된다. 아무리 너그러운 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의 로부터 오는 그 아픔이 맺친 것을 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그 은 어떠한 으로든지 하던 것과 으로 하는 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같이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세우시어 을 하던 것과 의 를 하여  을 할 수 있는 을 세우시려하신 것이다.
이것은 다 끊어졌던 의 를 하기 한  로서 의 으로 에 남아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탄 편에 선 가인인 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하늘편에 선 아벨인 를 로 세워 그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은 의 를 시키기 한  이므로 는 이 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를 두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의 을 즐거워하는 마음(롬 7/22)은 아벨인 요 의 을 섬기는 몸(롬 7/25)은 가인인 다. 그러므로 우리 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면 마치 가인이 아벨을 하여야 하듯이 몸은 마음의 에 하여 그를 통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의 이라는 것은 몸을 마음의 에 시키는 싸움의 이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몸은 항상 마음을 죽여 을 거듭 나타내는 것이다.
이 을 하여 하나님을 하는 것도 이  를 시키기 함이다. 로 보면 은 보다 하나님 앞에 가까웠지만 이 됨으로 하여 보다 거짓된 가 되니 (렘 17/9) 가인인 에 서게 되었음으로 아벨 인 을 로 세워 그를 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니 의 에는 이러한 인 를 갖고있는 것이다.
우리의 에 있어서도 이 한 가인인 사람은 이 한 아벨인 사람을 따라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좋은 나 한 친구를 하는 것도 나보다 하늘편에 가까이 선 아벨인 를 찾자는데 그 이 있는 것이다. 에서 뿐만 아니라 한 이나 나 에 있어서도 반드시 가인 아벨의 두 의 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의 를 하지 않고는 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끝날의 도 가인 인 과 아벨 인 과의 두 로 되었다. 그러므로 은 에로 하여야 의 는 올 것인데 가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도리어 을 하려하므로 는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로서 예수님을 보내심도 가인 에 있는 에게 아벨인 를 세워주시기 함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하면) 치 않고 을 얻을 것이다(요 3/16).
이와같이 크신 를 이루시기 하여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시킨 것인데 그들은 이 뜻을 아지 못하였으므로 도리어 가인이 아벨을 하고보니 이 아담의 한 을 빼앗었던 을 하여 의 로 돌아갔다.
이와같이 가인 아벨의 에 하여 을 할 수 있는 을 세우려던 뜻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을 한 아담 해와가 가인 아벨을 찾아 세워 를 하려던 에는 사탄이 하게 되었고 따라서 에 한 믿음의 가 되지 않았으므로 메시아를 맞지 못하게되어 아담을 한 는 되고 말았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가인에게 아벨을 하여 을 바칠 것을 하시지 못하였는가하면 를 하던 아담 해와를 하시지 못한 가 있기 때문에 ( ) 이  의 를 하기 한 을 세우려는 이 도 하나님은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이 저지른 이므로  에 하여 이것을 함도  이 그 을 찾아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를 사탄의 품에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은 된 를 하는 가인 이 찾아 세워야할 5%의 이다.
아담 해와가 아직 에서 의 로써 믿음의 을 지켜야할 으로서의 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되어 하나님의 으로 주실 의 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가인은 의 로써 이 5%의 을 하여야 로 한 믿음의 를 찾아세워 그  위에서 메시아를 맞음으로써 95%의 하나님의 에 한 의 을 받을 것이었다. 그러면 가인이 아벨을 하여 을 바쳐야할 것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 것인가. 마치  에 어느 한 사람도 이와같이 가인이 아벨을 하여 을 바쳐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를 몰랐어도 한 를 찾아 그를 따라야할 거승ㄹ 모르는 사람은 없었던 것과같이 가인도 하나님이 사랑하시어 그의 까지 기뻐 받으신 아벨을 죽여서는 아니될 것은 이거니와 그를 따르고 사랑해야될 것까지도 그의 으로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도 이러한 하나님의 를 몰랐다할지라도 그 의 을 따라 함과 한 만 가질 수 있었다면 그 마음의 움직임은 으로 그의 몸을 이끌어 아벨에 굴복하는 에까지 나아갔을 것이었다. 와 이 의 이 된 것은 이와같이 들이 가인 아벨의 를 도 모르는 가운데서라도 맞추어 나아가게하기 함이다. 이러한 아담을 하고 이루려던 것과 한 는 의 으로 하여 거듭거듭 되어 의 을 돌고 또 돌면서 6이란 을 거쳐서 드디어는 된 에덴동산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2 노아을 한                     252
아담을 한 는 되었으나 뜻을 하시고, 뜻을 하는 사람을 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므로( ) 하나님의 뜻을 하여온 아벨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믿음의 도 잃어버렸으나 이 믿음의 를 키 하여 아벨 셋을 세웠다(창 4/25).
그러나 은  사탄과 먼저 맺은 로 하여 하나님보다도 사탄을 따르게 되었음으로 셋의 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드리지 못하고 가인의 을 따라서 사탄의 뜻을 이루는 로 흘러 에 빠지게 되었다. 에 하여 하나의 를 두  의 에 놓고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으로 하여 사탄만을 하고 있는 를 하나님이 또 하나의 으로 그들을 하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를 하시고 하나님의 뜻만을 받드는 을 아담 으로 세우시어 아담에서 무너진 믿음의 를 함으로써 그  위에 메시아를 보내시사 를 하실 으로 을 하시어 노아의 을 불러 세우신 것이다(창 6/13). 이와같이 아담으로부터 알파로 시작된 를 노아에 이르기까지 1600년을 1로하여 오메가로 끝마치고 에덴동산을 하시려는 가 있었기 때문에 그 때도 라고 하였고 땅을 다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창 6/13).
이와같이 의 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과 의 사탄를 용감히 박차고 나와서 하나님의 을 로 하여 120이란 을 갖은 과 를 받아가면서 의 를 지었다는 한 믿음의 을 사탄 앞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는 에서 하면 믿음의 이 아브라함에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노아에서 이루어져야할 것이었다. 이와같이 노아는 1 믿음의 인 에 아담 을 세워 아담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루어야할 이기 때문에 2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는 하고 하여 땅에 하라」고 아담을 하시고 주셨던 것과 똑같은 의 말씀을 노아에게도 주신 것을(창 9/7) 보더라도 아담으로써 이루려다 못이룬 을 노아로써 이루려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을 이루시기 하여 하나님은 40에 걸친 을 하셨으니 40이란 는 어디로부터 된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로 한 믿음의 를 하는 것이 곧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가 된다는 것은 이미 하였다.
아담에서 세우지 못하였던 이 를 다시 세우기 한 노아을 찾기에 1600을 함도 를 하기 함이다.  16는 4의 로서 4의 를 한다. 이 4를 찾았기 때문에 노아를 할 수 있는 이 되었다.
이제 된 노아가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를 하려면 또 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 을 키 하여 40이라는 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는 무엇을 하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는 된 를 하는 이며 노아의 에 있어서는 아벨인 로 세워졌기 때문에 가인인 에 한 노아은 이 를 하여 그것을 한 로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으면 아니된다. 노아는 아담으로 하여 잃어버렸던 를 다시 찾아야할 이므로 를 하는 이 를 뜻맞게 찾아 세움으로써만 잃어버렸던 를 할 수 있는 이 되는 것이다. 를 3으로 한 것도 3의 을 해 된 를 하기 함이었다. 그러므로 를 하는  안에 있는 노아는 하나님을, 그 들은 를, 또 은  를 하는 것이다.
작은  하나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움으로 를 할 수 있는 을 세운 것같이  속에 있는 도  를 하나님 으로 하기 한 로 세웠기 때문에 의 를  속에 넣을 는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를 하는 를 하나님 앞에 한 것으로 세우려는  40 은 의 이 될 때까지의 (창 1/~)에 되는 이므로 40 이 끝날 때에 에서 보여진 는 하나님이 를 한 의 을 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가 40 이 끝날 무렵에 「까마귀를 에서 내어보내니 까마귀가 땅 위에 물이 마를 때까지 하는지라」(창 8/6~7)고 되었으니 이 말씀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을 으로 하여 어떠한 에 한 를 보여주실 때는 인 이 있는 것이다. , , ,  은 님을 하고 말, 개, 솔개, 까마귀 은 사탄을 하는 것이다. 빛도 흰빛은 하나님을, 분홍빛은 님을, 푸른빛은 을, 잿빛은 을, 검은 빛과 붉은 빛은 사탄을 하는 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에서 나온 까마귀로써 노아에서 된 사탄의 의 를 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모든 힘은 를 하여 의 를 맺을 때에 비로소 한다고 원리는 말한다. 사탄도 하기 하여서는 인 을 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와 될 수 있는 을 하여 의 를 맺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으로 하여 사탄의 가 되어있던 은  로써 되고 하나님을 로하는 노아만이 남아있음으로 사탄은 노아의 에나 무슨 할 이 없는가고 엿보고 있다는 를 에는 까마귀가 어디에 앉을 곳이 있는가고 물 위를 찾아 헤메는 모양으로 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에 이 해와의 사랑을 엿보고 있던 모양을 한 것이다.
다음에는 비둘기를 내어보냈는데 그 비둘기는 물 위를 하다가 발붙일 곳이 없어서 다시 로 들어가니 노아가 받아들였다고 되었다(창 8/9).
노아는 어찌하여 이와같이 를 하였던가. 에는 물이 준 를 알기 하여 비둘기를 내어보냈다고 하였으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히 그것만이 이라면 으로  내다보아서 알 수 있을 것이요 이  해있다 할찌라도 비둘기가 나간 구멍으로도 보고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이 준 것을 알기 한 것만이 그 은 아닐 것이니 이에는 보다더 큰 숨은 하나님의 를 하기 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첫 번 비둘기는 첫 아담을 한 것이다.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말씀을 보면 비둘기가 를 나간 것은 발붙일 곳을 찾기 하여 나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와같이 첫아담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무로 되어 땅에 발을 붙이기 하여 에 된 것이었으나 마치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이 없어서 로 다시 돌아간 것같이 아담도 사탄의 을 하여 생명나무로서 에덴동산에 발을 붙이지 못하였으므로 아담이 되어 나무가 되게 하시려던   말씀은 에 이루어지지 않은채 말씀은 말씀대로 남아져 하나님과 같이 계시게 되었다(요 1/~)( ).
다음은 7을 지나 다시 그 비둘기를 내어보내니 감람나무 잎을 따서 물고 로 되돌아왔다고 하였다. 다시 보낸 그 비둘기는 다시 그 말씀의 인 나무로 오신 예수님을 한다. 비둘기가 다시 에 나간 것은 물이 말랐으면 에 앉기 하여 나간 것과같이 둘째 아담 예수께서 에 오신 것도 이 저를 받으면 에 에덴을 하기 하여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비둘기는 다음에 와서는 앉을 수 있다는 의 로써 감람나무 잎만을 물고 로 다시 들어간 것과같이 예수님도 이 저를 믿으면 에덴동산을 하기 하여 에 오셨으나 믿지 않았으므로 다음에 하셔서 할 수 있다는 과 로써 의 와 말씀을 땅에 세워놓으시고 다시 하나님 품 속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여기에 7을 지났다는 것은 의 의 을 말함이니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세우시는 도 인 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한다.
또다시 7을 지나서 비둘기를 내어보냈는데 이는 다시 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되었다. 이 세쨋번 비둘기는 3 아담으로 오실 예수를 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실 예수께서는 반드시 땅에서 을 하여 다시는 와 같이 하나님 품 속으로 되돌아가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반드시 미리 보이시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그 은밀한 뜻을 그 종 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반드시 하지 아니하시리라」(암 3/7)고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은 노아를 해 를 지으시고 까마귀와 비둘기에 한 로써 의 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세쨋번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을 때 노아는 에서 땅으로 내려와 의 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니 이것도 이 에서 될 때에 하나님은 비로소 6의 을 풀으시고 하나님의 을 에 치시고 들과같이 하시어(계 21/3) 6이나 흘려온 의 눈물을 의 눈에서 다 씻어주시며 을 새롭게하시어 다시 이 없는 를 에 이루실 것이니 이 때가 새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에 내려옴으로(계 21/2) 알파로 시작된 가 오메가로 끝나 나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는 때다(계 22/13).
에서 받은 노아의 식구는 여덟이라고 하였다. 여덟식구를 하신 는 아담을 하고 를 하시려던 여덟식구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므로 노아 의 여덟식구를 하지 않고는 아담을 하고 이루려던 뜻을 하여 이룰 수 있는 을 세울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의 3를 하는 3는 하늘요 4는 을 하는 땅요 이 3와 4를 한 7는 를 하는 하늘 땅 다. 7을 지나고는 8로써 새로운 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8는 인 것이다. 이스라엘 이 8만에 를 한 것도 하나님의 로써 하는 날이기 때문이지만 아담이나 노아을 여덟 식구로 세우려하신 것도 를 하는 새임을 하기 함이었다.
을 40로 마치게됨은 믿음의 를 찾을 수 있는 를 하기 함이었다. 그러므로 40 으로 여덟 식구를 찾아세운 노아의 은 를 할 수 있는 을 세웠음으로 이제 노아 도 하나님이 할 수 없는 5%의 을 하여야 믿음의 는 되어 그  위에서 메시아의 으로 한 95%의 의 는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노아의 은 함을 하고 넘어야할 이 의 고개를 넘지못하였으므로 다시 아담과 같은 으로 돌아가게된 것이다. 그러면 함은 어떻게되어 이 을 다하지 못하고 의 을 케하였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노아는 를 지어 스스로 만든 포도주에 취하여 로  안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둘째 아들 함은 그 를 부끄러워하며 겸연쩍게 생각하여 의  셈과 야벳까지 하니 두 도 하여 옷을 하여 두 어깨에 메고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않으려고 얼굴을 돌이키고 뒷걸음쳐 들어가 덮었다. 이 으로 말미암아 함은 를 받아 가나안의 아비가 되어 로 를 섬기게된 것이다(창 9/25).
함이 이와같이 노아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했다는 이 어찌하여 가 되었는가하는 것을 아직도 의 로 남아있다. 이 를 하기 에 먼저 라는 것은 무엇을 하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사탄도 을 하여 인 을 하지않고는 의 을 치 못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할 수 있는 을 하여 그와 가 됨으로써 사탄으로서의 을 할 수 있는 로 나의 몸을 할 때 를 하는 것이다.
함의 이 가 된 것도 그로 하여 사탄이 하여 노아은 다시 사탄의 가 되어버린 까닭이다. 그러면 노아의 들이 그의 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했다는 이 어찌하여 사탄이 할 수 있는 이 되었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아담과 해와와의 사이에 있어서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은 의 는 아니다. 그것은 서로 벗고 있어도 부끄럽지않도록 하신 까닭이다(창 2/25).
이 를 부끄러워하는 은 로 하여 생기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를 부끄러워한다는 은 로 를 하였다는  이 된 것이다. 이와같이 아담과 해와는 부끄러워한다는 의 로써 로 하였다는 것을 하였기 때문에 에 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을 세워놓아야 비로소 아담 해와의  를 할 수 있는 이 세워지는 것이다. 아담  택함을 입어 아담의 지은 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노아은 부끄럽지 않은 을 하여야 부끄러운 을 해 된 아담의 를 벗을 수 있는 을 세울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5%의 을 걸어놓고 노아의 으로 하여금 이 고개를 넘도록한 것이다.
그러나 함은 가 부끄러워했을 뿐 아니라 이 을 에까지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담 해와의 를 하는 그 부끄러움의 을 한 가 된 것이다. 이 을 함으로 말미암아 에서 받은 함도  의 아담과 똑같은 에 있다는 것을 하였다 이로써 함은 으로 하여 사탄을 한 에 있지 아니하고 아직도 사탄과 를 맺은 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함으로 말미암아 마치 까마귀가 앉을 곳을 찾아 물 위를 헤매듯이 노아의 에 할 만을 엿보고 있던 사탄에게 할 수 있는 을 하게 되어 노아의 은 다시 사탄의 가 되어버린 것이다.
함의 은 이렇듯이 그 으로서 세워야할 5%의 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메시아를 맞아 에덴를 하려던 95%의 는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도 벗을 것을 부끄러워하면 가 되는가하는 것은 한 가 될 것이다.
위에서도 한 대로 아담의 로 하여 된 부끄럽다는 은 바로 를 하는 이 되었기 때문에 로 이런 을 느끼지 않는 을 하여 그러한 을 할 수 있는  을 세워야겠기에 아담 으로 세운 노아으로 하여금 이 을 할 수 있는 을 세우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 노아이 세워야할 으로 남아진 것이다.
이와같이 함의 로 하여 믿음의 를 키 한 들을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그 들은 무엇이었던가를 알아보자.
(1)  를 한 40                261
사탄 한 를 하자는 것은  를 한 로써 사탄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를 하기 한  40도 사탄을 하려는데 그 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함의 로 하여 믿음의 를 키 한 이 40 를 잃어버렸으므로 다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를 하려면 이 40 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의 은 이 40를 찾아 세우려는 를 거듭거듭 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 40는 의 프로젝트를 이루는 라고도 불 수 있는 것이다.
(2) 노아를 찾기 한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0      262
의 3를 하는 와 와 의  도 모두 3로 되므로  은 9로써 되는 것이다. 이 9를 지나야 에 하여 하나님의 로 들어가게되는 것이므로 10는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인 것이다. 노아를 찾기에 10를 했음도 노아 을 하고 를 하여 하나님의 의 를 이루기 함이었으나 함의 로 하여 이 10를 사탄에게 내어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 10로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3) 믿음의               262
노아가 를 짓는 120 의 은 노아를 믿음의 으로 세울 수 있는데까지 끌어올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함의 로 하여 노아는 믿음의 의 을 한 것이므로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4) 함
노아의 은 아담 으로 함을 입었으므로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은 아담의 둘째아들 아벨 이다. 아담을 한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아벨을 잃었기 때문이었으므로 노아을 찾을 수 있었음은 아벨 함을 찾아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은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에 있는 아들이었으나 사탄이 그를 빼앗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이 함을 다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노아의 믿음의 를 키 한 의 네 을 사탄에게 내어줌으로 노아는 믿음의 이 되지 못하였으니 노아와 같은 믿음의  아브라함을  찾아세우려면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이 네가지 을 다시 하여 믿음의 를 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 네가지  에서 40와 10를 에 하려면 40에 10를 할 수는 없기 때문에  400의 을 하였던 것이다.
한 노아의 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으로 세우기 하여서 10를 하는 400의 가 하게된 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는 1600에 10를 하였는데 노아 아브라함까지는 400에 10를 하게 되었으므로 의 이 짧아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어찌하여 장사 데라의 사랑하는 아들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믿음의 으로 세웠는가하는 를 알아야할 것이다. 위에서도 하였지만 함은 아벨으로 찾아세운 노아의 둘째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함을 사탄이 빼앗아감으로 노아가 믿음의 의 을 하였으니 다시 그 을 하려면 하나님은 그와 로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를 빼앗아 오지 않으면 의 을 세울 수 없는 것이므로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장사 데라의 사랑하는 아들을 하여 믿음의 으로 세우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으로 부를 수 있었음도 마치 노아가 의 를 짓는 이 있었던 것과같이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을 받고 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믿기어려운 것을 믿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이 사탄이 빼앗아간 네 을 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노아 믿음의 이 될 수 있는 을 찾아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3 아브라함을 한
I 아브라함의
1 믿음의 이 되었어야할 노아의 을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데라의 사랑하는 아들의 에서 을 받게된 는 이미 한 바와같다.
의 믿음의 이 될 아브라함을 사탄 품에서 부르심은 마치 1 믿음의  노아를 부르심과 같이 를 사탄에서 부르시는 이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모든 믿음의 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을 걸은 가 되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뛰어 나오기 한  가운데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과는 가장  인 장사 데라의 사랑하는 아들의 을 히 박차고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만을 받들고 든 을 떠나 그 아내 사라와 롯과 하란에서 한 과 사람을 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갔으니 (창 12/4~5) 이 은  야곱과 모세가 사탄인 하란과 에서  를 데리고 을 하여 그 어려운 을 박차고 떠나 가나안을 할 의 이요 또 예수께서 오셔서 사탄 의 모든 과 를 하나님의 로 히 찾아세워  가나안 를 할 을 보여주는 에 우리 에 있어서도 그와같이 사탄 품을 떠나 나 모든 을 하나님 앞으로 옮겨 놓아야할 인 을 아브라함 으로써 보여주었으며 한번 사탄를 박차고 나왔으니 다시는 그 에 을 남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을 받들고 나아가야한다는 것을 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여야할  을 한 다른 를 알아보자. 을 하여 아브라함이 땅으로 가서 머물려할 때에 아브라함은 그의  사라와 의 에 설것을 하고 갔다. 바로가 사라의 를 탐내어 를 빼앗아갔으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로써 아브라함은 과 함께 를 한  다시 잡혀갔던 롯과 과 를 찾은 에야(창 14/16) 하게 되었다. 이 은 를 이루어 나아가는 들이 밟지 않으면 아니될 을 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2  노아의 이므로 아담의 이다. 그러므로 아담을 하는 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에서 이므로 의 에 있던 아담에게서 해와를 사탄이 빼앗아감으로 의 를 잃어버렸고 이 에 하게 되었으니 이와같이 아담에게 있어서 빼앗겼던 모든 것을 아브라함을 세워 하는 을 보여주기 위하여 아브라함도  아담과 같이 의 에서 빼앗기어 사탄인 바로의 손에 들어갔으므로 사탄에게 빼앗겼던 해와와 같은 에 한 와 또 잃어버린 를 하는 롯과 와 또 사탄에 있는 를 하는 을 다시 빼앗아오는 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노아도 이미 이 을 걸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찾는 400 은 노아를 찾는 1600에 하는 4의 기간이요  사라와 롯과 을 찾아세우는 은 노아가 로써 와 을 찾아세우는 이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을 키 위한 을 바치는 것은 노아이 믿음의 를 키 위하여 함 한 를 한 것에 한다.
이 을 본받아 야곱도 사탄인 하란에서 와 을 해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하며 또 예수님도 사탄에 빼앗긴 해와인 된 를 과 함께 사탄에서 빼앗아 인 가나안인 에덴동산을 해야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찾아온  잡혀간 롯을 다시 찾아 그 를 하여 한 에야 의 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은 한 를  사탄 품으로부터 함으로 사탄과 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 있는 한 를 하여서만 하나님의 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것도  예수께서 오셔서 사탄에서 이스라엘을 불러세워 사탄와 하여 하나님만을 믿고 나아가는 를 하여서만 메시아를 한 의 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한 것이다. 이렇듯이 믿음의 으로 설 수 있는 에 한 아브라함은 마치 에 하여 와 와 을 찾아 1 믿음의 으로 설 수 있는 에 하였던 노아와 같은 에 서게되었으므로 이제는 노아과 같이 아브라함에게도 이 해야하며 따라서 하나님도 할 수 없는 5%의 이 남아졌으니 이것은 로써 하게 되는 것이다.
「이끌고 밖으로 나아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헤아리라. 히 헤겠는냐 또 가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 의로 여기사 가라사대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갈대아 우르에서 너를 이끌어낸 여호와로다」(창 15/5~7)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하실 때 아브라함은 「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얻어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8)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을 받기 하여 나로서 찾아세워야할 이 무엇인가를 한 것이다. 이에 하여 하나님은 「네가 나를 하여 3된 암소 하나와 3된 숫양 하나와 산비둘기 하나와 집비둘기 새끼 하나를 드리라」(창 15/9)고 하시어 아브라함으로서의 해야할 을 하셨다.
하나님이 아담으로부터 2000  믿음의 을 세우시려고 하신 열매가 하는가 못하는가하는 것이 이 의 에 해서 될 것이었다.
  를 한  에 한 의 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루어지는가 못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은 오직 이 에 하여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위에 오른 은 온 를 하는 이요 또 이것은 뜻맞게 드림으로써 의 까지도 하나님 앞으로 찾아 세우려는 이었다. 그러므로 을 하는 비둘기와 을 하는 과 을 하는 소를 로 드린 것도   을 하여 되지 않은 은 하지 않으므로 이 3의 로써  를 함을 하기 함이다.
 비둘기와 과 암소는  와 그 과  를 하는 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은 그  위에  의 를 올려놓고 이것이 하나님 편으로 서느냐 다시 사탄 편을 돌아가느냐를 지으려는 것이다. 3를 하는 3의 을 바치는 데는 또 하나의 가 있다. 하나님의 는 하면 다. 그러므로 이 의  의 를 보여주는 이 는 의 를 한다. 따라서 의 도 에 하여 과 과 의 3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 3를 하는 비둘기와 과 소를 한  위에 올려놓은 것이 하나님이  를 단번에 이루시려 하신다는 뜻을 한다. 그러나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하여 둘에 쪼개 좌우에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더니 솔개가 고기 위에 내리거늘 아부람이 쫓으니라. 해질 때에 아부람이 깊이 잠든 에 캄캄함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니 여호와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이 에서 이 되어 저희를 섬기매 저희가 400 동안 괴롭게하리니」(창 15/10~13)라고 된 말씀을 보면 쪼개야할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로 그 위에 솔개가 내렸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의 400 이라는 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단번에 이루시려던 는 이삭을 거쳐 야곱에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비둘기 쪼개지 않은 것이 그렇게도 한 가 되었으며 또 400 이라는 를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하지 않으면 아니되는가하는 는 오늘까지 로 남아있다. 하나님의 는 과 을 갈라세움으로 을 하고 을 세우시려는 를 하여 내려오셨다. 없는 으로 하셨던 아담에게 이 했으므로 이것을 하기 해 가인과 아벨을 으로 했던 것이며 노아 에도 사탄을 할 으로 로써 을 쳐 을 갈라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세워 그의 믿음을 하고  를 로 걸어놓고 하게하는 것도 과 을 가르는 를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을 쪼개는 뜻은
(ㄱ) 사탄 에 있는 를 갈라내어 하나님 편으로 를 한다는 뜻
(ㄴ) 아담 에서 못이룬 뜻을 노아 에서 이루려다 못이루었고 노아에서 못이론 뜻을 아브라함에서 이루어야함으로 아브라함은 아담에서 못이룬 뜻을 이루어야한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가 하나님 앞에 치 않게되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하기 하여 아브라함은 을 갈라서 하나는 가인의  하나는 아벨의 에 세워놓고 다시 하여야 한다.
(ㄷ) 사탄과 를 맺어 되었으므로( ) 마치 이스라엘 이 를 하듯이 을 쪼개어 의 피를 뽑아 함으로써 하나님 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쪼갠다는 에는 이런 한 를 갖고 있는데 비둘기는 쪼개지 않았으니 이 비둘기는
1. 사탄 에서 갈라세우지 않은 사탄 그대로요
2. 아벨의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을 갈라 세우지 않았으므로 사탄이 할 수 있는 만이 남아있는 이요
3. 사탄의 피를 뽑아 하지 않은채 놓았으니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이 아니다.
이러한 들이 되어있음으로 가인 아벨의 나 노아  와 같이 할 만을 찾고 있던 사탄은 가 할 만이 남아있는 비둘기 위에 하는 것은 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비둘기 위에 앉은 솔개는 바로 사탄을 한다. 을 하는 인 비둘기에 사탄이 하였으니 의  위에 서야할  을 하는 과 암소도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치려던 이 은 사탄에게 바친 가 되어버렸으니 노아로부터 400의 에는 또 사탄이 하였으므로 아브라함을 찾아 세우기 한 40 에 한 4에는 또 사탄이 하고 말았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400 이란 을 받게 되었는가 알아보기로 하자.
함의 로 말미암아  40  40의 사탄 에서 하시려던 의 에는 다시 사탄이 한 가 되었으므로 이 40은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게된 것이다. 노아의 을 다시 하기 하여 40을 다시 찾는 가 아브라함까지 400으로 되었다는 것은 이미 하였다.( 노아을 한 )
이제 노아로부터 400의 의 열매로서 함받은 아브라함의 은  40의 사탄 위에 선 노아의 을 한 이었다. 그러므로 함의 가 없었다면 노아으로서의 을 하여 의 은 히 되어 메시아 에 한 는 그 때에 되었을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그의 인 에 가 없었다면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는 되어 에덴의 는 히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에 다시 사탄의 을 하고 보니 아브라함은 400 의 함의 로 하여 되었던 노아의 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함의 를 하기 의 노아의 을 하기 위하여는 400이란 사탄을 하여서만 아브라함을 세울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아브라함도 의  의   400  노아  함이 하기 의 노아의 을 하기 하여는 다시 400이란 사탄 을 하여 모세를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하면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 하늘 편으로 세워놓지 않으면  의 아브라함의 이요 따라서  의 노아의 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으로 들어가 사탄와 더불어 싸워서 400을 찾아세우지 않으면 아니될 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의 3의 이   을 하는  를 알아보자. 하나님의 는   로 갈라서 하신다는 것은 이미 한 바와 같다.
예수님은  로 오신 분이시므로  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  인 아브라함 를 하고 하면 예수님은  비둘기 로 오신 분이다. 예수께서 요단에서 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나님의 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하였다함은(요 1/32)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로 하여 사탄에게 빼앗겼던 그 비둘기를 다시 찾아 세우려 오신 분이므로 비둘기 이시고 따라서  를 하시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하기 함이었다. 그러므로 비둘기는 을 하는 이다.
3  을 한 예수님은   이신 에   이시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 때의 예수님을 보고 「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시므로 어린양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을 예수님을 하는 에 예수님의 인 을 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꾀어 삼손의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에 삼손은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않았다면 히 나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으리라」(삿 14/18)고 하였다. 그러므로 암소는 아내를 한다. 를 암소로 한 것은  는 가 아내로서의 을 하는 이기 때문이다.  된  예수님을 맞아 을 할 수 있는 아내의 을 하는 가 이므로 아내를 하는 암소로서 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를 하시고 이스라엘의 으로 말미암아  의 뜻을 못이루시고 땅에 남겨둔채 너희는 요 나는 (계 18/23)이라는 를 남기시고 하셨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된  예수를 맞을 때에는 의 을 넘어서 아내  암소의 을 해야만 님의 과 아버지의 을 맞아(계 14/1~) 히 된 144,000무리에 될 것이다. ( ) 이와같이 암소는 를 하였다. 지금 를 소라고 받는 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한  위에 3의 을 에 바친 것은 하나님의 의 을 에 이루시려는 의 뜻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로 하여 그 는 다시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이삭을 거쳐  야곱에 이르러서야 아브라함을 하고 하신 뜻의 을 보게된 것같이  ,  ,   이와같이  가 됨도 아브라함의 로 함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다는 은 비록 한 일이었지만 이로 하여 사탄이 할 수 있는 한 이 되었으므로 아브라함의 은 의 한 를 빚어냈으며 이 는 되어 에 이르기까지 4이란 눈물겨운 의 을 보게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는 에 있는 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한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몸을 산 로 바쳐야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쪼개어 과 을 치 않으면 사탄이 할 수 있는 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를 드리는 은 우리의 몸을 로 바치는 이므로 를 하여 내 를 가인인 과 아벨인 으로 하여 된 로서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II 아브라함의 이삭                   274
믿음의 를 하려는 하나님의 는 가인과 아벨의 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로 하고 다시 로서 노아의 을 거쳐 아브라함의 에 이르렀다. 이제 이 를 해야될 아브라함에게는 이 뜻을 해야할  이 되어있으므로 아브라함의 은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나 의 인 는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로써 잃어버린 것을 로 찾기 위하여  이삭을 로 드리게되는 것이다. 이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레와 같이 하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창 15/5)은  이삭으로 이루어져야할 것인데 이러한 이삭을 로 드리라하심은 하나님도 에서 잃어버린 믿음의 을 로써 세우시기 위한 서러운 심정에서 하신 것이요 아브라함도 이 못할 를 서슴지 않고 드리게 되는 274


후편 - 사위기대 복귀를 중심한 인류역사 탕감복귀 섭리노정

  서론                

인류역사는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출발된 비원리세계를 원리세계로 복귀하여 하나님의 천주창조의 이상을 실현코자하는 복귀섭리역사라는 것은 이미 전편에서 상술하였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어떤 시대에 어떤 장소에서 어떠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하는 평면적인 요인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뒤에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고있는 사탄 사이에서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벌어지는 입체적인 사실들이 그대로 인간세계에서 실체로서 구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로써 알려지는 이스라엘역사나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전하여오는 역사는 이 섭리노정에서 일어난 평면적인 사실만을 그대로 기록하였을 뿐이고 하나님과 사탄과의 입체적인 관계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역사는 어떻게 종결될 것이며 따라서 이 역사는 어떠한 공식적인 섭리노정을 이루어 나오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서는 명확한 대답을 하여주지 못하였다.

가인이 아벨을 살륙함으로써 시작된 선과 악의 투쟁역사는 알 수 없는 헝클어진 곡선을 그리면서 유구한 기간을 두고 돌고 또 돌아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다시 찾아 나아가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타락된 인간이 창조본연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려면 이 헝클어진 섭리노정을 찾아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길이 타락된 인간이 걷지 않으면 안 될 길이요 이른 바 인지당행지도이다. 역사노정에 오고간 많은 성현과 선지선열 또 뭇 도인 철학자들이 노심초사하여 찾아 헤매온 길이 바로 이 길이었다.

미로에서 헤매는 인간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종교를 찾으며, 한숨을 지으며 도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원리를 떠나서는 운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미 창조원리에서 해명되었다. 원리로써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재창조역사인 복귀섭리로 원리를 떠나서는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한날의 행사를 거행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있거든 하물며 6천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공식적인 프로젝트를 떠나서 원리적인 복귀섭리를 하실 것인가.

이 헝클어진 역사노정이 공식적인 원리궤도로써 풀려질 때 온 인류는 다같이 한길을 통하여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한 목적을 향하여 한 곳으로 모이어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창조이상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질곡을 벗어나 자유인이 되어 자유의 길을 걸어야한다. 자유인이 되려면 진리를 알아야겠고 자유의 길을 걸으려면 원리의 길을 알아야겠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놓아 주리라고 말씀한 것이다(요 8/32).

역사이래에 오고 간 많은 선인들이 부르짖은 어떠한 종교도 철학도 그는 이 원리의 길의 한토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원리를 중심하고 종교통일을 목표로한 혁명운동의 가능성도 이로써 알려질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류역사는 동일한 환경에 처한 종족 혹은 민족에서 형성되어지는 문화권을 중심하고 발달하여왔다. 그리고 이 문화권을 형성하는 중대한 요인은 그 종족 혹은 민족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며 이 사조의 주류를 형성하는 필수의 요인은 그 종족이나 민족의 사상을 지배하는 종교에 있다.

복귀원리의 의의는 하나님의 주관권내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즉 기원절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한 종교요 기원이후에는 영적 이스라엘인 기독신도를 중심한 종교로써 이루어 내려온 공식적인 복귀섭리노정을 밝히려는데 있다. 타락된 피조세계는 창조전의 질서없는 혼돈세계와 같이 창조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비원리세계다. 그러나 영원을 표준하고 창조하신 원리적 기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계를 도말하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창조하신 원리의 형만을 갖추고 있는 비원리세계를 다시 원리세계로 복귀하려는 섭리를 하신다. 그러나 이 타락된 세계는 사탄도 취할 수 있는 원리형인 조건이 성립되어 있음으로 하나님과 사탄과의 사이에 어떤 조건을 성립시키지 않고는 이를 원리세계로 복귀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단순히 때와 곳을 터로한 인간을 중심하고 일어난 사실로써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실은 반드시 하나님과 사탄과의 사이에서 원리적 관련성을 갖고 벌어지는 섭리의 실체적인 전개로서 현현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하나님과 사탄이 타락된 인간을 중간에 놓고 서로 탕감조건을 세워가면서 싸우는 사람 빼앗기 싸움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역사는 탕감복귀역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탕감복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무엇이든지 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상실하였을 때 그 상태를 회복하려면 반드시 어떠한 조건이 성립되어야한다. 이와같이 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에 해당하는 조건을 세우는 것을 탕감이라고 하며 이 조건을 세워 본연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탕감복귀라고 한다.

탕감조건을 세움에는 두가지 형식이 있다. 첫째는 본연의 위치와 상태에서 상실되었던 것과 동일한 가치의 조건을 세워 원상으로 회복하는 것이니 이런 경우에는 보상이라든가 환상이라는 의미로 통할 것이다. 보상이나 환상을 하는 것은 보상 혹은 환상할 필요가 없었던 본래의 입장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인 것은 데임으로 상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고 기록된 모세의 율법은 곧 이런 의미의 탕감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상실된 본연의 가치보다 훨씬 작은 가치의 조건을 세워 원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십자가의 신앙은 영적복귀를 위한 탕감조건이다. 창조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회복하기 위하여 인간은 인간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그 상실된 본연의 전 가치를 찾아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조그만 가치로써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죽었다는 탕감조건을 세워 영적 복귀의 혜택을 받는 것이다.

세례의 기원도 홍수로써 구원받은 노아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는데 있다. 즉 우리의 몸 전체를 물에 담갔다는 것으로 노아 홍수를 거쳤다는 탕감조건을 세워 40일 홍수심판으로 구원을 받은 노아의 입장을 복귀하려는 것이다(벧전 3/21). 근래에는 머리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동일한 조건을 세우고 있다.

한 조각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로써 예수님의 성체를 먹었다는 가치를 찾아 세울 수 있음도 이것으로써 예수님과의 일체적인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기 때문이며 이스라엘민족이 할례를 하는 것도 아담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양부로 인하여 사망의 피를 받았음으로 그 입장을 복귀하려면 그 양부를 쳐서 사망의 피를 뽑지 않고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탕감조건은 어떻게 세울 수 있을 것인가 하면 본연의 상태를 상실하게 된 경로와 반대의 경로에 의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예수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상에 살해하였음으로 인간이 죄악에 빠졌으니 예수님을 살해하지 않고 이루었을 구원의 입장을 복귀하려면 그와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도 예수 십자가와 같은 죽음의 길을 걸었다는 탕감조건을 세우지않으면 아니된다. 무릇 타락인간이 죄의 대속을 받는 이유는 이와같이 원상복귀를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여 하나님을 서럽게 하였으니 반대로 내가 서러움을 당하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써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을 배반하기 전의 입장으로 복귀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최후의 운명을 마치는 순간에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이유도 이와같이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할 원리적 섭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즉 에덴동산의 아담은 하나님의 품 속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품 속으로 윤락하였음으로 후아담으로서 아담의 저지른 죄를 대신 속죄하러 오신 예수님께 대하여서도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는 입장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하나님이 버리시는 입장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충절을 버리지 않는 탕감조건을 세웠기 때문에 온 인류는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예수님의 영광을 복귀하려면 반대로 우리 자신들도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순교자들은 이렇듯 예수님과 같이 인류의 죄 를 대신 탕감하고 간 사람들이다. 무릇 선인으로서 하늘을 대신하여 왔다간 모든 선인들의 비참한 생애도 예수님과 같이 이러한 탕감조건을 세워 사탄세계를 빨리 하늘세계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대신탕감으로 희생된 모든 성도들은 인류역사가 선의 세계로 완전히 복귀될 때에는 그 가치에 해당하는 은사를 받게되는 것이다.

한 국가에 세워진 형법도 그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원상대로 유지하기 위한 탕감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세워야할 원리적인 탕감조건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이 지켜야할 오직 하나의 조건을 주셨던 것이다. 그 조건은 곧 믿음이라는 조건이었다.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창 3/3)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영생하리라는 계명으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타락론 참조)

타락론에서 이미 상술한 바이지만 이 계명을 주신 것은 아담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시봉하는가 아니하는가를 보시기 위함이 아니요 원리의 힘보다 강한 사랑의 힘으로 하여금 원리궤도를 탈선치 않도록 하시기 위한 절대적이면서도 불가피한 것으로서 아니 세울 수 없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타락인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타락전의 아담에게 있어서도 완성기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필수의 계명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하나님과 일체이상을 이루어 믿음을 완성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믿어야할 아무 조건조차 필요치 않은 것이다.

아담은 이와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기대 위에 서야할 것이었는데 이 믿음의 기대에 사탄이 침범하였기 때문에 그의 실체에까지 침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된 아담이 다시 창조본연의 상태를 복귀하려면 탕감복귀원리에 의하여 먼저 믿음의 기대를 세워가지고 그 기대 위에 후아담을 복귀하여 그를 중심하고 타락인간 전체를 복귀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각론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인간은 후아담된 메시아를 맞기 위한 타죄이후 4천년이란 유구한 시간의 흐름을 요치 않았던 것이다.

가인이 아벨의 제물이 모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 것이 되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일이 없었다면 그 때에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그 기대 위에 후아담(예수)이 복귀되어 에덴복귀는 아담가정에서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살육함으로 이 믿음의 기대에는 다시 사탄이 침범하였음으로 그를 다시 복귀하기 위하여 노아를 세웠던 것이다.

그런고로 함의 타락행위가 없었더라면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를 세워 그 기대 위에 또 메시아는 오셨을 것이었다. 노아의 심판은 이 목적을 위하여 감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가정마저 아담가정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갔음으로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잃어버린 이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키 위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더라면 그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그 기대 위에 메시아는 오셔서 창조이상의 세계는 이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그 기대에는 다시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음으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사탄에게 내어준 기간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는 이삭헌제를 거쳐 야곱에게 만회되었음으로 야곱은 믿음의 조상의 뜻을 완수하지 않으면 아니될 사명을 갖고 사탄세계인 밧단아람과 애급으로 들어가 사탄과 싸우며 하늘의 자녀를 번식하여 다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씨족으로부터 민족 국가에로 넓히어가면서 예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이후 예수님까지의 2천년 기간은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잃어버린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 기간이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2천년 기간을 다시 하늘 것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 있어야할 것이니 이 기간이 곧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이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시대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보면 아담으로부터 2천년 기간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한분을 찾아 세우기 위한 기간으로 되었고 선민을 불러세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민족적인 믿음의 터를 조성키 위한 복귀섭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까지 이르렀음으로 이 시대를 복귀섭리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기간은 아브라함 한 분을 찾아 세움으로써 다음 복귀섭리시대를 출발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음으로 이 시대를 복귀기대섭리시대라고 한다. 그런고로 복귀기대섭리시대로 인하여 복귀섭리시대는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다면 개인적인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에덴복귀의 뜻을 이루었을 것이었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를 믿고 따랐다면 영육 아울러 예수님을 합당한 제물로 바침으로써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에덴 복귀의 뜻은 이 때에 또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제물된 예수님을 살해함으로써 마치 아브라함의 제물에 사탄이 침범한 것같이 제물된 예수님의 몸에 사탄이 침범하게 되어 이 복귀섭리시대도 역시 사탄에게 내어준 결과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을 또 다시 하늘편으로 탕감하여 세우는 예수 이후 2천년 기간이 있어야할 것이니 이 기간을 재탕감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렇듯이 무너진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하기 위한 섭리는 예수 이후 기독신도들을 불러세워 재림기에 이르러 세계적인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하는 섭리연장시대로 옮겨진다. 이와같이 아담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믿음의 기대를 찾아 세우기 위한 역사는 아브라함 개인중심에서 이스라엘민족 중심을 거쳐 기독신도를 중심한 세계에로 확대되어 이 터 위에 예수께서는 재림하셔서 복귀섭리를 완수함으로써 아담 해와가 타락치 않고 이루어나온 것과 같은 세계를 일시에 이루어 맞추고자 하는 것이므로 이 시대를 복귀섭리완성시대라고 부른다.

이로써 복귀섭리는 잃어버렸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논하였다.

그러면 이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하여는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하는가를 알아 보기로 하자.

위에서도 논한 바이지만 인간이 완성될 때는 하나님과 일체의 이상을 이루어 믿어야할 조건조차 필요치 않게되는 때다.

믿어야할 조건이 필요없다함은 믿음의 목적을 다 이루어 믿음을 완성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믿음의 완성이라함은 하나님과의 사이에 미와 사랑의 회로를 완전히 조성함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체휼할 수 있는 미의 기대의 조성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체휼할 수 있는 미의 기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아담이 창조원리의 완성존재가 되어 타락의 혈통을 받지않은 원리적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 아담 해와 자녀 이렇게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창조본연의 부모와 부부와 자녀의 원리적 사랑을 체휼할 수 있는 기대를 말함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주신 축복의(창 1/28) 목적이었으나 타락으로 인하여 아담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하지 못하고 사탄을 중심하여 부부를 이루어 사탄의 혈통을 받은 자녀를 낳았음으로(요 8/44)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는 사탄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된 것이다. 하나의 존재기대가 조성되려면 그를 중심한 동서와 남북의 사위가 확정되지 않으면 안 되므로 4수는 존재기대수다.

그러므로 지상에 하나님의 대상실체적 존재기대가 확립되려면 사탄 중심하고 조성된 이 사위기대를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로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러한 논리로써 믿음의 기대를 조성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중심한 이 사위기대를 조성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도 사탄중심의 사위기대를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로 복귀하려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사위기대를 중심한 인류역사라고한 제목의 의의는 자명해질 것이다. 사위기대를 복귀한 터 위에 믿음의 기대를 조성코자 노아심판 40일로써 믿음의 중심 노아를 세우려 하였으나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이 사위기대에 사탄이  재침범하였음으로 믿음의 기대에도 사탄이 재침범하여 이것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400년 기대를 세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세웠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이 기대에는 사탄이 다시 침범하였음으로 이를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스라엘민족의 애급고역 400년 기간이 남아졌으니 이렇듯이 유구한 역사의 과정을 두고 하나님은 얼마나 사위기대를 세우시려 애쓰셨으며 사탄은 이를 얼마나 침범하였던가. 즉 노아심판 40일을 비롯하여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400년, 이스라엘민족의 애급고역 400년, 모세의 바로 궁중 40년, 미디안 광야생활 40년, 시내산 금식기도 40일, 이스라엘민족의 가나안복귀 광야생활 40년, 여리고 탐정 40일, 사사 400년, 사울왕 40년, 다윗왕 40년 솔로몬왕 40년 엘리야 호렙산까지 기도기간 40일 예수님의 금식기도 40일 부활 40일 요나의 니느웨에 대한 예언 40일 아담부터 예수님까지 4천년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0대(아브라함 제물실수로 인하여 42대가 됨=본문참조=)등등을 보면 사위기대복귀에 애쓰신 하나님의 심정을 역연히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임분담섭리의 입장에서 복귀역사를 개관하기로 하자. 창조이상이 실현된 세계라는 것은 결국 사탄을 완전히 자연굴복시킨 세계다. 하나님은 자유이상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세계를 다시 찾으심도 자유이상이란 원칙에서 하지않으면 아니된다. 피조세계 전체의 주관자로 인간을 창조하셨음으로 인간은 천사도 주관해야 되고 따라서 타락된 천사인 사탄까지도 인간이 주관하는데까지 이르지 못하면 천주의 주관자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원리완성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사탄을 자연굴복시킬 때를 바라시고 섭리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인간자신에 책임이 있지만 하나님은 창조하신 원리적 책임이 있기 때문에 사탄굴복의 제1책임은 하나님 자신이 부담하셨으니 이 시대가 곧 소생 구약시대다. 하나님은 이 시대를 통하여 선지자들을 직접 대하시고 섭리하셨다.

타락의 제2책임은 인간조상 아담과 해와에게 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 대신 복귀사명을 지고 오신 예수님과 성신(기독론 참조)이 사탄굴복 의 제2 책임을 지고 직접 타락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신 시대가 곧 장성 신약시대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성신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워 사탄굴복의 길을 보여주신 제1책임분담노정을 본보기로 신약시대의 제2책임분담노정을 걸음으로써 다음에 성도들이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제3책임분담노정의 본보기를 보여주셨던 것이니 성도들이 이 제3책임분담노정을 걷는 시대가 곧 완성성약시대다. 그러므로 성약시대는 예수님과 성신의 역사는 끝나고 하늘에서 재림하는 성도들과 지상의 성도들이 협력하여 사탄을 굴복시켜야할(부활론 참고) 시대임으로 이 시대는 성도의 시대요 삼위신은 안식하셔야할 시대다.

이제 우리는 이 복귀원리에 맞추어질 수 있는 사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다. 천주창조가 그러하듯이 무엇이든지 중심없이 되어지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이와같이 수많은 종족 혹은 민족을 터로한 역사가 얽히어지면서 인류의 전체적인 역사노정은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대하여 내려오면서 인류역사의 중심적인 노정을 형성하여온 역사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즉 하나님의 선민을 중심하고 이루어진 이스라엘역사다.

그러므로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4천년은 구약성서에 씌어있는 이스라엘민족사가 복귀원리의 사료가 될 것이요 예수이후는 바울이 이른바 영적이스라엘인 기독신도로써 엮어내려온 기독교사가 그 사료가 되어야할 것이다.

원래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의 율법서에 해당되는 복음서와 또 구약성서에 있어서의 예언서와 시문서에 해당되는 계시록과 사도서한이 있으며 특히 이스라엘역사서에 해당되는 사도행전이 있으나 사도행전에는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의 역사만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약성서가 구약성서에 대비되는 기록으로 남아지려면 사도행전가운데는 예수님이후 2천년 간의 기독교사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게되면 신약성서만이 예수님 이후의 복귀원리의 사료가 될 것이다.

복귀원리와 우리와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은 가장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오늘의 나는 나 하나로서의 내가 아니다. 오늘의 나는 인류역사의 결실로써의 나요 오늘의 전인류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나요 지난 역사를 정리하여 내일의 나를 세워야할 나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에게 있어서는 지난 역사의 맥박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이제 확실히 병들었으나 나의 맥박으로 보아 이 무슨 병인지 알려주는 의원은 하나도 없으니 이제는 맥 보기는 그만두고 역사를 들추어 나의 병명을 알아내러 바른 치료를 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내일의 나의 생명은 지난 역사를 들추어 바른 진단을 내리는데만 의존되어있다. 지난 역사를 정리하고 청산하여 새로운 역사를 빚어내야할 나는 역사노정에서 선지선열들을 중심하고 하나의 뜻 가운데서 벌어졌던 그 모든 사실들을 원리적으로 구명하여 그들이 이루지 못한 조건들을 내 한몸에서 승리의 조건으로 세워놓지 않으면 6천년 역사를 탕감복귀한 신부로서의 자격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귀섭리의 프로젝트를 맞추기 위하여 왔다간 모든 선인들의 걸은 길은 모두가 우리가 되풀이하여 걸어야할 길이요 그들이 다 걷지 못하고 남긴 부분의 길까지도 다 걸었다하는 조건을 세워놓아야 예수께서 남기고 가신 유업을 계승완성한 신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과거는 지나가 죽어버린 것이 아니고 지금의 것으로 살아있는 것이요 또한 앞으로 올 것이므로 이것을 아는데서만 오늘의 나를 알아 내일의 나의 생명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알아 그의 원하시는 뜻을 맞추어 뼈저린 감사의 염에 잠기울 때 하나님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으로 각자를 찾아오실 것이다. 복귀원리에 사용된 역사와 연대에 관하여는 이견이 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인류의 기원이 6천년이 훨씬 넘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자들이 고고학적 견지에서 세운 결론이다. 5천년 이상의 역사는 모두 미분명하다. 오직 구약성서에는 6천년 역사가 뚜렷이 연대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부언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는 모두가 표징적이요 암시적이며 또한 시대성을 띠우고 있다는 것이다.

즉 똑같은 내용을 계시한다 하더라도 시대를 따라 또는 계시를 받는 사람의 지능과 심령의 정도에 따라 또 그 환경을 따라 각각 그 받는 형식이 동일치 않다. 이를테면 전도서를 보면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전 1/5)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천동설을 믿고 있는 시대의 인간들에게는 그들의 사상을 그대로 시인하여 해가 어떤 한 곳으로 돋기도하고 지기도하는 것처럼 계시를 주셨다. 우리는 해가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계시가 틀린다고 반박한다면 도리어 어리석은 자가 되고말 것이다.

이와같이 설혹 인류역사의 실제의 연대가 6천년이 훨씬 넘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뜻을 중심하고 생각하면 계시는 계시로써 참이 아닐 수 없다. 계시로써 연대를 밝히었으니 이렇게 밝혀진 연대로써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공식노정을 명시하려하신 것은 명확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밝히기 위하여 계시로써 주신 이 연대에 관하여는 실제와의 부합여부를 막론하고 아무 조건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제1장 복귀기대 섭리시대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으로(요 14/6)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복귀된 에덴 동산으로 들어갈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귀섭리의 중점은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려는데 있다. 이 기대는 일찍이 아담 가정을 중심하고 조성하여 메시아를 맞으려하였으나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이 섭리는 노아 가정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노아가정도 역시 아담의 가정과 같이 이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였음으로 이 섭리는 또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역시 제물실수를 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려던 복귀섭리의 뜻은 다시 모세에게로 옮겨졌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선민을 불러세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재조성키 위한 2천년 기간은 실로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초래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보면 메시아를 맞게하려는 섭리의 출발자로서의 아브라함 한분을 찾아세우는 기간으로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와같이 이 시대는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그 이후에 오는 복귀섭리시대의 기대를 조성한 시대가 되었음으로 이 시대를 복귀기대섭리시대라고 한다. 사탄 분별의 견지에서 보면 이 시대는 원시분별시대로서 자유 유목생활에 의한 원시 공생공의주의의 시대인 것이다.

   제1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인간이나 천사가 타락된 책임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마땅히 버려야할 존재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원성을 두고 창조하신 원리적 기준이 있으므로 하나님도 그들을 도말하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찾으시어 원리완성 존재로 복귀케 하심으로써 창조주로서의 원리적 책임을 완수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인간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어 사탄에게도 인간을 대할 수 있는 원리형적 조건이 성립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은 아무 조건도 없이 인간을 자기에로 복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울 수는 없는 것이요 사탄도 역시 인간의 원리적 주인공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으므로 아무 조건없이 인간을 자기가 대할 수 있는 입장에만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아담은 완충지대와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양심적인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할지라도 그는 하나님도 사탄도 대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은 육을 벗은 후 그 영인체도 역시 낙원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중간위치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치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 편으로 복귀하려면 반드시 어떠한 조건이 성립되어야한다. 그리고 인간자신의 과오로 타락되었기 때문에 이 조건도 인간자신이 세우지않으면 아니된다.(예정론 참조)

그러면 인간자신이 세워야할 이 탕감조건은 무엇인가하면 이미 서론에서 상술한 바이지만 사위기대복귀로 인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해야된다는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이 필요하게됨도 아담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타락되었음으로 이 조건을 사탄에게 빼앗겼던 까닭이다.(서론 참조)

이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한 조건물로서 세운 것이 제물이다. 이 제물을 합당하게 바치는가 바치지 못하는가하는 결과에 의하여 믿음기대의 조성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며 이 결정의 여부에 따라 하나님 편이냐 사탄 편이냐하는 문제도 결정되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제물대신으로 율법을 세웠고 신약시대에는 제물대신으로 실체제물된 예수님을 보내시어 그로 말미암아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는 조건을 세우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아담부터 제물을 바치게 하지않고 가인 아벨로부터 바치도록 하셨는가하면 이것도 원리로써 창조된 인간이므로 다시 찾으심도 원리로써 찾기 위함이었다. 창조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한 주인을 대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한 존재를 두 주인을 대하는 입장에 세워놓고는 원리적인 섭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이 아담을 상대로 하면 사탄도 아담과 혈연적 관계를 맺었던 원리형인 조건이 있으므로 사탄도 역시 아담을 대할 수 있게 되어 아담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을 대하는 비원리적인 입장에 서게된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비원리적인 섭리를 할 수 없으므로 선과 악의 두 성품의 모체인 아담을 두 성품으로 갈라세우는 형식을 취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선과 악의 두 표시체로써 분립시킨 것이다. 그리고 선과 악의 이 두 표시체를 하나님과 사탄 각각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놓고 각각 한 주인을 상대로 하는 원리적인 섭리에 의하여 헌제케하여 이 헌제의 여하에 의한 믿음기대 조성의 여부에 따라서 하나님 편이냐 사탄 편이냐를 결정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아담의 자손이므로 누구를 하나님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우며 누구를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울 것인가하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이것을 결정하기 위하여는 두 타락의 자식의 모체인 해와의 타락 경로에 의하여 결정짓지 않으면 아니된다.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은 해와의 타락의 결과인 까닭이다.

해와의 타락은 두 성품의 불륜한 사랑의 행동으로 인하여 성립되었다. 첫 번은 천사장의 유혹에 의하여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지려는 불의한 욕망에서 출발하여 비원리적 상대인 천사장과의 사이에서 맺어진 사랑으로 인한 영적 타락이요 둘째번은 첫 행동이 범죄였다는 것을 깨닫고 원리로 찾아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 의를 세우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원리적 상대인 아담과의 사이에서 맺어진 사랑으로 인한 육적 타락이다. 이 두 타락행위 중에서 어느 것이 보다 원리적이며 보다 용서를 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를 분별해 보면 물론 첫 번 사랑의 타락행위보다도 둘째 번 사랑의 타락행위이다. 왜냐하면 둘째 번 사랑의 행위는 결과적으로는 타락행위가 되어버렸으나 첫 번 타락행위를 회개하고 하나님 편으로 복귀하려는 심정이 그 동기가 되었고 또 아직 때는 되지않았으나 그들이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이 허락하실 사랑이기 때문이다.

가인과 아벨은 사랑의 타락의 열매다. 가인은 사랑의 첫 열매이므로 천사장과의 첫 사랑으로 인한 타락 행동을 표징하는 표시체로서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웠고 아벨은 사랑의 둘째 열매이므로 아담과의 둘째 사랑으로 인한 타락 행동을 표징하는 표시체로서 가인보다 원리적인 편에 설 수 있는 존재이므로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입장에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였으면 어찌하여 낯을 붉히느냐 죄가(사탄이) 문 앞에 엎드려있나니 너는 저를 방비하라」(창 4/7)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사탄(죄)은 가인을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서서 가인에게 침범할 조건만을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장자가 축복을 받지 못하고 차자가 축복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의 출애급 시에 애급의 민족뿐만 아니라 금수에 이르기까지 맏것을 친 일이며(출 12/29) 복중에서부터 장자 에서를 미워하고 차자 야곱을 사랑한 것이며(창 25/23)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에 차자를 축복하기 위하여 손을 바꾸어 축복한 일이며(창 48/14) 이스라엘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복귀할 때에는 아벨의 입장인 레위의 손만이 법궤를 메고갔었다는 것도(신 31/25) 장자는 가인의 입장이요 차자는 아벨의 입장이라는 원리적인 근거에서 되어진 사실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가인과 아벨을 사탄과 하나님이 각각 한 주인으로 대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두고 제물을 바치게 하였을 때 (창 4/3~) 어찌하여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않으셨는가하는 문제는 아직도 미지의 사실로 남아져있다.

가인이 농업을 하고 아벨이 목축을 하게된 이유도 이러한 원리로써만 해명될 수 있다. 창조의 순서로 보면 하나님에 제일 가까운 존재는 사람이요 다음엔 천사요 다음엔 동물이요 다음엔 식물이요 나중은 광물이다. 그러므로 아벨은 식물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운 동물을 양하는 것으로 그 사업을 삼은 것을 보아도 가인보다 아벨이 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가인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자기의 소산인 곡식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목축을 하였기 때문에 동물로 피의 제물을 드린 것뿐이다.

그러므로 아벨이 피의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생각하는 지금까지의 신학적 견해에는 그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아벨은 가인보다 아름다운 제물을 바쳤다(히 11/4)고 기록한 것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다는 결과만을 보고 한 말씀이다. 위에서도 논한 대로 아벨의 제물인 동물은 가인의 제물인 곡식보다 하나님 앞에 가깝기 때문에 아름다운 제물이 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으시지않은 원리적 근거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있었으므로 받았으니 (창 4/4) 이것은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조건만 성립되어 있는 존재라면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 받으신다는 것을 교시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탄을 대하고 있는 가인이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려면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교시하시기 위함이니 무릇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한 존재가 하나님 편으로 옮겨지려면 반드시 탕감조건을 세워야한다는 원리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러면 가인이 세워야할 이 조건은 무엇인가 하면 사탄 편에 서있는 가인은 하늘 편에 선 아벨을 사랑하며 그에게 굴복함으로 그를 중보로 세워 가지고 간접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조건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가인은 아벨을 통하여서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면 그렇게 함으로써만 타락성 본성(타락론 참조)을 해탈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좀더 상술하여 보면
(1) 천사장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사랑하지 못하고 시기하여 타락하였으므로 이 타락성 본성을 벗고 창조본성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그와 반대의 경로를 밟지 않으면 아니된다.(서론 참조) 그러므로 타락된 천사장 즉 사탄을 표징하는 입장에 세워진 가인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의 입장에 세워진 아벨을 사랑하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천사장이 아담을 사랑하지 못한 타락성 본성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2) 천사장은 아담보다 저급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는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할 위치에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이러한 사랑의 위치를 떠나 자기보다 한층 더 고위의 사랑을 받아야될 입장에 있는 아담의 사랑의 위치를 취하려다가 타락이 성립되었으므로 이 타락성본성을 제거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역시 반대의 경로를 밟기 위하여 천사장과 같은 위치에 세워진 가인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과 같은 입장에 세워진 아벨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3) 천사장은 인간의 주관을 받아야하며 해와는 아담의 주관을 받아야 할 것이 창조원리인데 주관이 전도되어 천사장은 해와를 주관하였으며 해와는 아담을 주관하여 타락이 성립되었다. 이 타락성본성을 제거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역시 반대의 경로를 취하여 인간의 주관을 받아야할 천사장의 입장이며 동시에 아담의 주관을 받아야할 해와의 입장에 세워진 가인이 천사장을 주관해야할 인간의 입장이며 해와를 주관해야할 아담의 입장에 세워진 아벨에게 굴복하여 가인이 아벨의 주관을 받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아벨로 하여금 가인을 주관하는 입장을 세우도록 하지않으면 아니된다. 이와같이 함으로써만 인간이 천사장을 주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찾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4) 인간시조는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되었으므로 이 타락성본성을 제거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역시 반대로 타락된 인간의 입장인 가인은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지 않고 그를 버렸다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 아벨의 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아니된다. 아무리 너그러운 부모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자식의 불효로부터 오는 그 아픔이 맺친 것을 원상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그 자식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불효하던 것과 반대행동으로 회개하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같이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세우시어 타락성본성을 형성하던 것과 반대의 경로를 취하여 타락성 본성을 해탈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시려하신 것이다.

이것은 다 끊어졌던 수수의 관계를 복귀하기 위한 원리적 요구로서 필수의 조건으로 복귀섭리에 남아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탄 편에 선 가인적인 존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하늘편에 선 아벨적인 존재를 중보로 세워 그를 통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은 천리의 법도를 통과시키기 위한 원리적 요구이므로 복귀섭리는 이 법도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개체를 두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롬 7/22)은 아벨적인 존재요 죄의 법을 섬기는 몸(롬 7/25)은 가인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 개체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면 마치 가인이 아벨을 통하여야 하듯이 몸은 마음의 명령에 굴복하여 그를 통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도의 생활이라는 것은 몸을 마음의 명령에 굴복시키는 싸움의 생활이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몸은 항상 마음을 죽여 타락성본성을 거듭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이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하는 것도 이 원리적 법도를 통과시키기 위함이다. 창조원리로 보면 인간은 만물보다 하나님 앞에 가까웠지만 인간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만물보다 거짓된 존재가 되니 (렘 17/9) 가인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음으로 아벨적 존재인 만물을 제물로 세워 그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니 제물의 기원에는 이러한 원리적인 근거를 갖고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신앙이 약한 가인적인 사람은 신앙이 강한 아벨적인 사람을 따라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좋은 지도자나 선한 친구를 요구하는 것도 나보다 하늘편에 가까이 선 아벨적인 존재를 찾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개인에서 뿐만 아니라 한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 있어서도 반드시 가인 아벨의 두 형의 인간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섭리의 궤도를 통하지 않고는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끝날의 세계도 가인적 세계인 공산진영과 아벨적 세계인 민주진영과의 두 세계로 분립되었다. 그러므로 공산진영은 민주진영에로 굴복하여야 인류의 평화는 올 것인데 가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도리어 민주진영을 파괴하려하므로 평화는 유지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중보로서 예수님을 보내심도 가인적 입장에 있는 전인류에게 아벨적인 존재를 세워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통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 3/16).

이와같이 크신 섭리를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분립시킨 것인데 그들은 이 뜻을 아지 못하였으므로 도리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고보니 천사장이 아담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었던 타락성본성을 반복하여 재타락의 결과로 돌아갔다.

이와같이 가인 아벨의 분립역사에 의하여 타락성본성을 해탈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려던 뜻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을 중심한 아담 해와가 가인 아벨을 찾아 세워 사위기대를 복귀하려던 섭리노정에는 사탄이 재침범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위기대복귀에 의한 믿음의 기대가 조성되지 않았으므로 메시아를 맞지 못하게되어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가인에게 아벨을 통하여 제물을 바칠 것을 교사하시지 못하였는가하면 타락행위를 하던 아담 해와를 간섭하시지 못한 원리가 있기 때문에 (타락론 참조) 이 원리 탈선의 행위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는 이 행위도 하나님은 간섭하실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저지른 행위이므로 탕감복귀 원리에 의하여 이것을 복귀함도 인간 자신이 그 조건을 찾아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를 사탄의 품에서 복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조건은 타락된 존재를 표징하는 가인 자신이 찾아 세워야할 5%의 책임분담이다.

아담 해와가 아직 원리결과주관권내에서 자기의 지혜로써 믿음의 계명을 지켜야할 인간으로서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타락되어 하나님의 책임분담으로 주실 완성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가인은 자기의 지혜로써 이 5%의 책임을 완수하여야 사위기대복귀로 인한 믿음의 기대를 찾아세워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음으로써 95%의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의한 완성의 혜택을 받을 것이었다.


그러면 가인이 아벨을 통하여 제물을 바쳐야할 것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 것인가. 마치 역사 이후에 어느 한 사람도 이와같이 가인이 아벨을 통하여 제물을 바쳐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원리를 몰랐어도 선한 지도자를 찾아 그를 따라야할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던 것과같이 가인도 하나님이 사랑하시어 그의 제물까지 기뻐 받으신 아벨을 죽여서는 아니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를 따르고 사랑해야될 것까지도 그의 양심으로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도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몰랐다할지라도 그 양심의 명을 따라 온유함과 겸손한 심정만 가질 수 있었다면 그 마음의 움직임은 자동적으로 그의 몸을 이끌어 아벨에 굴복하는 입장에까지 나아갔을 것이었다. 온유와 겸손이 기독신도의 강령이 된 것은 이와같이 신앙자들이 가인 아벨의 원리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서라도 맞추어 나아가게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아담가정을 중심하고 이루려던 것과 동일한 섭리는 인간의 불신으로 인하여 거듭거듭 반복되어 상사의 나선형을 돌고 또 돌면서 6천년이란 원형과정을 거쳐서 드디어는 복귀된 에덴동산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제2절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좌절되었으나 뜻을 예정하시고, 뜻을 대하는 사람을 예정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므로(예정론 참조) 하나님의 뜻을 대하여온 아벨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믿음의 기대도 잃어버렸으나 이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키 위하여 아벨대신 셋을 세웠다(창 4/25).

그러나 인간은 원래 사탄과 먼저 맺은 혈연관계로 인하여 하나님보다도 사탄을 따르게 되었음으로 셋의 자손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드리지 못하고 가인의 후손을 따라서 사탄의 뜻을 이루는 생활체계로 흘러 패륜에 빠지게 되었다. 창조원리에 의하여 하나의 존재를 두 주인 상대의 입장에 놓고 섭리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음란으로 인하여 사탄만을 대하고 있는 전인류를 하나님이 또 하나의 주인으로 그들을 상대하여 섭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인류를 도말하시고 하나님의 뜻만을 받드는 가정을 아담가정 대신으로 세우시어 아담가정에서 무너진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함으로써 그 기대 위에 메시아를 보내시사 복귀섭리를 완성하실 목적으로 홍수심판을 단행하시어 노아의 가정을 불러 세우신 것이다(창 6/13). 이와같이 아담으로부터 알파로 시작된 죄악역사를 노아에 이르기까지 1600년을 1기로하여 오메가로 끝마치고 에덴동산을 복귀하시려는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 때도 말세라고 하였고 땅을 다 멸하겠다고 하신 것이다(창 6/13).

이와같이 심판의 위업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불순과 불신의 사탄세계를 용감히 박차고 나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절대로 준수하여 120년이란 기간을 갖은 조롱과 비소를 받아가면서 구원의 방주를 지었다는 위대한 믿음의 조건을 사탄 앞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귀섭리라는 관점에서 고찰하면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에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노아에서 이루어져야할 것이었다. 이와같이 노아는 제1 믿음의 조상인 동시에 아담대신 가정을 세워 아담가정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루어야할 존재이기 때문에 제2 인간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는 생육하고 번식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아담을 창조하시고 주셨던 것과 똑같은 축복의 말씀을 노아에게도 주신 것을(창 9/7) 보더라도 아담으로써 이루려다 못이룬 창조이상을 노아로써 이루려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륜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40주야에 걸친 홍수심판을 하셨으니 40일이란 수는 어디로부터 기인된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사위기대 복귀로 인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는 것이 곧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가 된다는 것은 이미 논하였다.

아담가정에서 세우지 못하였던 이 기대를 다시 세우기 위한 노아가정을 찾기에 1600년을 요함도 사위기대를 복귀하기 위함이다. 즉 16수는 4수의 평방수로서 4수의 완전수를 의미한다. 이 4수를 찾았기 때문에 노아를 소명할 수 있는 탕감조건이 성립되었다.

이제 소명된 노아가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려면 또 사위기대를 복귀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40일이라는 심판기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방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방주는 복귀된 신천주를 상징하는 표시이며 노아의 가정에 있어서는 아벨적인 제물로 세워졌기 때문에 가인적인 입장에 처한 노아가정은 이 방주를 통하여 그것을 합당한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으면 아니된다. 노아는 아담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천주를 다시 찾아야할 존재이므로 신천주를 상징하는 이 방주를 뜻맞게 찾아 세움으로써만 잃어버렸던 천주를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방주를 3층으로 제조한 것도 3단계의 성장과정을 통해 창조된 전천주를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천주를 상징하는 방주 안에 있는 노아는 하나님을, 그 자식들은 전인류를, 또 동물은 만물세계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작은 방주 하나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움으로 천주전체를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운 것같이 방주 속에 있는 동물도 만물세계 전체를 하나님 주관권으로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물로 세웠기 때문에 동물의 전체를 방주 속에 넣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천주를 표시하는 방주를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으로 세우려는 심판 40일 기간은 천지창조의 이상이 실현될 때까지의 혼돈기간(창 1/~)에 해당되는 기간이므로 40일 심판이 끝날 때에 방주에서 보여진 행사는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완료한 이후의 전역사노정을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가 40일 심판기간이 끝날 무렵에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어보내니 까마귀가 땅 위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왕래하는지라」(창 8/6~7)고 기록되었으니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만물만상을 상징으로 하여 어떠한 섭리에 대한 계시를 보여주실 때는 공식적인 법칙이 있는 것이다. 백호, 기린, 백룡, 백학 등은 주님을 상징하고 말, 개, 솔개, 까마귀 등은 사탄을 상징하는 것이다. 빛도 흰빛은 하나님을, 분홍빛은 주님을, 푸른빛은 성신을, 잿빛은 천사장을, 검은 빛과 붉은 빛은 사탄을 표시한는 등등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방주에서 나온 까마귀로써 노아가정에서 분립된 사탄의 현재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모든 힘은 상대를 취하여 수수의 관계를 맺을 때에 비로소 발한다고 원리는 말한다. 사탄도 존재하기 위하여서는 원리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자기와 상대될 수 있는 인간을 대하여 수수의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심판으로 인하여 사탄의 상대가 되어있던 인간은 전부 홍수로써 도말되고 하나님을 상대로하는 노아가정만이 남아있음으로 사탄은 노아의 가정에나 무슨 침범할 조건이 없는가고 엿보고 있다는 상태를 성서에는 까마귀가 어디에 앉을 곳이 있는가고 물 위를 찾아 헤메는 모양으로 표시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인간창조 직후에 천사장이 해와의 사랑을 엿보고 있던 모양을 상징한 것이다.

다음에는 비둘기를 내어보냈는데 그 비둘기는 물 위를 왕래하다가 발붙일 곳이 없어서 다시 방주로 들어가니 노아가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었다(창 8/9).

노아는 어찌하여 이와같이 역사를 하였던가. 성서에는 물이 준 여부를 알기 위하여 비둘기를 내어보냈다고 하였으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이라면 문으로 직접 내다보아서 알 수 있을 것이요 문이 전부 봉해있다 할찌라도 비둘기가 나간 구멍으로도 보고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이 준 것을 알기 위한 것만이 그 목적은 아닐 것이니 이에는 보다더 큰 숨은 하나님의 섭리를 교시하기 위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첫 번 비둘기는 첫 아담을 표징한 것이다.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말씀을 보면 비둘기가 방주를 나간 것은 발붙일 곳을 찾기 위하여 나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와같이 첫아담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나무로 창조되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하여 지상에 창조된 것이었으나 마치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이 없어서 방주로 다시 돌아간 것같이 아담도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생명나무로서 에덴동산에 발을 붙이지 못하였으므로 아담이 완성되어 생명나무가 되게 하시려던 창조이상 즉 말씀은 지상에 이루어지지 않은채 말씀은 말씀대로 남아져 하나님과 같이 계시게 되었다(요 1/~)(기독론 참조).

다음은 7일을 지나 다시 그 비둘기를 내어보내니 감람나무 잎을 따서 물고 방주로 되돌아왔다고 하였다. 다시 보낸 그 비둘기는 다시 그 말씀의 실체인 생명나무로 오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비둘기가 다시 지상에 나간 것은 물이 말랐으면 지상에 앉기 위하여 나간 것과같이 둘째 아담 예수께서 지상에 오신 것도 세상이 저를 받으면 지상에 에덴을 복귀하기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비둘기는 다음에 와서는 앉을 수 있다는 약속의 표시로써 감람나무 잎만을 물고 방주로 다시 들어간 것과같이 예수님도 세상이 저를 믿으면 에덴동산을 복귀하기 위하여 지상에 오셨으나 믿지 않았으므로 다음에 재림하셔서 완성할 수 있다는 약속과 표시로써 십자가의 도리와 말씀을 땅에 세워놓으시고 다시 하나님 품 속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여기에 7일을 지났다는 것은 천지창조의 완전수의 기간을 말함이니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세우시는 역사도 원리적인 기간을 경과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다시 7일을 지나서 비둘기를 내어보냈는데 이는 다시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었다. 이 세쨋번 비둘기는 제3 아담격으로 오실 재림예수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재림하실 예수께서는 반드시 땅에서 재림이상을 완수하여 다시는 초림시와 같이 하나님 품 속으로 되돌아가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반드시 미리 보이시고 섭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그 은밀한 뜻을 그 종 선지자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반드시 행하지 아니하시리라」(암 3/7)고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방주를 지으시고 까마귀와 비둘기에 의한 표시로써 복귀섭리노정의 전모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세쨋번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을 때 노아는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와 신천지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니 이것도 재림이상이 지상에서 완수될 때에 하나님은 비로소 6천년의 원한을 풀으시고 하나님의 장막을 인간에 치시고 인간들과같이 거하시어(계 21/3) 6천년간이나 흘려온 비애의 눈물을 인간의 눈에서 다 씻어주시며 만물을 새롭게하시어 다시 사망이 없는 세계를 지상에 이루실 것이니 이 때가 새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지상에 내려옴으로(계 21/2) 알파로 시작된 죄악사가 오메가로 끝나 생명나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는 때다(계 22/13).

홍수심판에서 구원받은 노아의 식구는 여덟이라고 하였다. 여덟식구를 택하신 이유는 아담가정을 중심하고 복귀섭리를 하시려던 여덟식구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므로 노아 가정의 여덟식구를 탕감복귀하지 않고는 아담가정을 중심하고 이루려던 뜻을 계승하여 이룰 수 있는 대신가정을 세울 수 없는 까닭이었다. 성장기간의 3단계를 표시하는 3수는 하늘수요 4수는 동서남북을 표시하는 땅수요 이 3수와 4수를 합한 7수는 천지창조를 표시하는 하늘 땅 완성수다. 창조7일을 지나고는 8일로써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8수는 재출발수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8일만에 할례를 한 것도 하나님의 자녀로써 재출발하는 날이기 때문이지만 아담이나 노아가정을 여덟 식구로 세우려하신 것도 신천지를 출발하는 새가정임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심판을 40일로 마치게됨은 믿음의 기대를 찾을 수 있는 사위기대를 복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40일 심판으로 여덟 식구를 찾아세운 노아의 가정은 사위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웠음으로 이제 노아가정 자체도 하나님이 간섭할 수 없는 5%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야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의 강림으로 인한 95%의 구원의 섭리는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노아의 가정은 함을 중심하고 넘어야할 이 책임분담의 고개를 넘지못하였으므로 다시 아담가정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가게된 것이다. 그러면 함은 어떻게되어 이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자기의 가정을 윤락케하였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홍수심판후 노아는 포도농사를 지어 스스로 만든 포도주에 취하여 나체로 장막 안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둘째 아들 함은 그 나체를 부끄러워하며 겸연쩍게 생각하여 자기의 형제 셈과 야벳까지 선동하니 두 형제도 동감하여 옷을 취하여 두 어깨에 메고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않으려고 얼굴을 돌이키고 뒷걸음쳐 들어가 덮었다. 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함은 저주를 받아 가나안의 아비가 되어 대대로 형제를 섬기게된 것이다(창 9/25).

함이 이와같이 노아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했다는 행동이 어찌하여 범죄행위가 되었는가하는 것을 아직도 미지의 사실로 남아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먼저 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사탄도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원리적인 입장을 취하지않고는 존재의 능을 발휘치 못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허락하여 그와 상대가 됨으로써 사탄으로서의 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로 나의 몸을 제공할 때 죄를 형성하는 것이다.

함의 행동이 범죄가 된 것도 그로 인하여 사탄이 침범하여 노아가정은 다시 사탄의 활동무대가 되어버린 까닭이다. 그러면 노아의 자식들이 그의 부친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했다는 행동이 어찌하여 사탄이 재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아담과 해와와의 사이에 있어서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의식은 창조본성의 발로는 아니다. 그것은 서로 벗고 있어도 부끄럽지않도록 창조하신 까닭이다(창 2/25).

이 하체를 부끄러워하는 의식은 타락행위로 인하여 생기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체를 부끄러워한다는 의식은 하체로 범죄행위를 하였다는 표시적 행동이 된 것이다. 이와같이 아담과 해와는 부끄러워한다는 의식의 발로로써 하체로 범죄하였다는 것을 암시하였기 때문에 탕감복귀원칙에 의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탕감조건을 세워놓아야 비로소 아담 해와의 타락전 상태를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이 세워지는 것이다. 아담가정 대신 택함을 입어 아담의 지은 죄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될 노아가정은 부끄럽지 않은 입장을 취하여야 부끄러운 입장을 취해 타락된 아담의 죄를 벗을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5%의 시련을 걸어놓고 노아의 가정으로 하여금 이 고개를 넘도록한 것이다.

그러나 함은 자기가 부끄러워했을 뿐 아니라 이 의식을 형제에까지 선동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담 해와의 타락행위를 표징하는 그 부끄러움의 의식을 반복한 결과가 된 것이다. 이 의식을 반복함으로 말미암아 홍수심판에서 구원받은 함도 타락 직후의 아담과 똑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을 자증하였다 이로써 함은 심판으로 인하여 사탄을 분리한 입장에 있지 아니하고 아직도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은 입장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함으로 말미암아 마치 까마귀가 앉을 곳을 찾아 물 위를 헤매듯이 노아의 가정에 침범할 조건만을 엿보고 있던 사탄에게 재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허락하게 되어 노아의 가정은 다시 사탄의 활동무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함의 행동은 이렇듯이 그 가정으로서 세워야할 5%의 책임분담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메시아를 맞아 에덴복귀를 하려던 95%의 복귀섭리는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연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현재 우리에게 있어서도 벗을 것을 부끄러워하면 범죄행위가 되는가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위에서도 상술한 대로 아담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유발된 부끄럽다는 의식은 바로 타락행위를 증거하는 표시적행동이 되었기 때문에 반대로 이런 의식을 느끼지 않는 입장을 취하여 그러한 타락행동을 제거할 수 있는 탕감 조건을 세워야겠기에 아담대신 가정으로 세운 노아가정으로 하여금 이 의식을 취소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은 노아가정이 세워야할 탕감조건으로 남아진 것이다.

이와같이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한 탕감조건들을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그 조건들은 무엇이었던가를 알아보자.

 (1) 사위기대 복귀를 위한 40일 심판수         

사탄 침범한 사위기대를 복귀하자는 것은 결국 사위기대를 중심한 역사로써 사탄을 분립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위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심판 40수도 사탄을 분립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한 이 40일 심판수를 잃어버렸으므로 다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려면 이 40일 심판수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복귀섭리의 역사노정은 이 40수를 찾아 세우려는 역사를 거듭거듭 반복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 40수는 복귀섭리노정의 프로젝트를 이루는 단위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2) 노아를 찾기 위한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0대     

성장기간의 3단계를 표시하는 소생기와 장성기와 완성기의 각 기간도 모두 3단계로 구분되므로 결국 성장기간은 9수로써 표시되는 것이다. 이 9수를 지나야 완성기준에 달하여 하나님의 직접간섭권내로 들어가게되는 것이므로 10수는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귀일수인 것이다. 노아를 찾기에 10대를 요했음도 노아 가정을 중심하고 복귀섭리를 완수하여 하나님의 직접주관의 세계를 이루기 위함이었으나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이 10대를 사탄에게 내어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 10대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3) 믿음의 조상           

노아가 방주를 짓는 120년 간의 신앙은 노아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 수 있는데까지 끌어올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노아는 믿음의 조상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므로 이것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4) 함

노아의 가정은 아담 가정대신으로 택함을 입었으므로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은 아담의 둘째아들 아벨 대신이다. 아담가정을 중심한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아벨을 잃었기 때문이었으므로 노아가정을 찾을 수 있었음은 아벨대신 함을 찾아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은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입장에 있는 아들이었으나 사탄이 그를 빼앗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이 함을 다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노아의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한 이상의 네 조건을 사탄에게 내어줌으로 노아는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하였으니 노아와 같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대신 찾아세우려면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이 네가지 조건을 다시 탕감복귀하여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 네가지 조건 중에서 40수와 10대를 동시에 복귀하려면 40년에 10대를 복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최소한 400년의 기간을 요하였던 것이다.

복귀한 노아의 입장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하여서 10대를 복귀하는 400년의 경과가 필요하게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는 1600년에 10대를 복귀하였는데 노아이후 아브라함까지는 400년에 10대를 복귀하게 되었으므로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어찌하여 우상장사 데라의 사랑하는 아들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는가하는 문제를 알아야할 것이다. 위에서도 논하였지만 함은 아벨대신으로 찾아세운 노아의 둘째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 함을 사탄이 빼앗아감으로 노아가 믿음의 조상의 명분을 상실하였으니 다시 그 명분을 복귀하려면 하나님은 그와 반대로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존재를 빼앗아 오지 않으면 탕감복귀의 조건을 세울 수 없는 것이므로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우상장사 데라의 사랑하는 아들을 취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를 수 있었음도 마치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짓는 기간이 있었던 것과같이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명을 받고 정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믿기어려운 것을 믿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이 사탄이 빼앗아간 네 조건을 탕감복귀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노아대신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 입장을 찾아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제3절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

    I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제1 믿음의 조상이 되었어야할 노아의 입장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데라의 사랑하는 아들의 입장에서 소명을 받게된 이유는 이미 상술한 바와같다.

전인류의 믿음의 조상이 될 아브라함을 사탄 품에서 부르심은 마치 제1 믿음의 조상 노아를 부르심과 같이 전인류를 사탄세계에서 부르시는 모형이므로 아브라함은 장차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모든 믿음의 자녀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전형적노정을 걸은 존재가 되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뛰어 나오기 곤란한 환경 가운데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과는 가장 대립적 입장인 우상장사 데라의 사랑하는 아들의 입장을 용감히 박차고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만을 받들고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 그 아내 사라와 롯과 하란에서 취한 재물과 사람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갔으니 (창 12/4~5) 이 노정은 장차 야곱과 모세가 사탄세계인 하란과 애급에서 각각 처자를 데리고 재물을 취하여 그 어려운 환경을 박차고 떠나 가나안을 복귀할 노정의 모형이요 또 예수께서 오셔서 사탄 세계의 모든 인간과 만물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완전히 찾아세워 세계 가나안 복귀를 완수할 노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개체에 있어서도 그와같이 사탄 품을 떠나 처자나 모든 재물을 하나님 앞으로 옮겨 놓아야할 전형적인 노정을 아브라함 일신으로써 보여주었으며 한번 사탄세계를 박차고 나왔으니 다시는 그 세계에 미련을 남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을 받들고 나아가야한다는 것을 시범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행하여야할 전형적 노정을 시범한 다른 예를 알아보자. 흉년을 당하여 아브라함이 애급땅으로 가서 머물려할 때에 아브라함은 그의 처 사라와 남매의 입장에 설것을 약속하고 갔다. 바로가 사라의 미모를 탐내어 처를 빼앗아갔으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로써 아브라함은 재물과 함께 처를 복귀한 후 다시 잡혀갔던 롯과 재물과 부녀를 찾은 후에야(창 14/16) 헌제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복귀섭리를 이루어 나아가는 인간들이 밟지 않으면 아니될 섭리노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제2 인간조상 노아의 복귀형이므로 아담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아담가정을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 미완성기에서 성혼전이므로 남매의 입장에 있던 아담에게서 해와를 사탄이 빼앗아감으로 창조본성의 자녀를 잃어버렸고 만물이 타락권내에 처하게 되었으니 이와같이 아담에게 있어서 빼앗겼던 모든 것을 아브라함을 세워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보여주기 위하여 아브라함도 타락전 아담과 같이 남매의 입장에서 빼앗기어 사탄세계인 바로의 손에 들어갔으므로 사탄에게 빼앗겼던 해와와 같은 입장에 처한 처와 또 잃어버린 자녀를 상징하는 롯과 부녀와 또 사탄권내에 있는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재물을 다시 빼앗아오는 역사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노아도 이미 이 전형노정을 걸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찾는 400년 기간은 노아를 찾는 1600년에 해당하는 4수복귀의 기간이요 처 사라와 롯과 재물을 찾아세우는 기간은 노아가 방주로써 처자와 만물을 찾아세우는 기간이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기준을 완성키 위한 제물을 바치는 것은 노아가정이 믿음의 기대를 완성키 위하여 함 중심한 역사를 한 것에 해당한다.

이 전형노정을 본받아 야곱도 사탄세계인 하란에서 처자와 재물을 취해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하며 또 예수님도 사탄세계에 빼앗긴 해와격인 신부된 전인류를 만물과 함께 사탄세계에서 빼앗아 세계적인 가나안복지인 에덴동산을 복귀해야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처 사라를 찾아온 후 잡혀간 롯을 다시 찾아 그 원수를 타파하여 승리한 후에야 약속의 헌제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은 택한 자녀를 전부 사탄 품으로부터 복귀함으로 사탄과 대립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 있는 공고한 기대를 조성하여서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것도 후일 예수께서 오셔서 사탄세계에서 이스라엘민족을 불러세워 사탄세계와 대립하여 하나님만을 믿고 나아가는 기대를 조성하여서만 메시아를 중심한 복귀섭리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이렇듯이 믿음의 조상으로 설 수 있는 입장에 처한 아브라함은 마치 홍수심판에 의하여 처와 자녀와 만물을 찾아 제1 믿음의 조상으로 설 수 있는 입장에 처하였던 노아와 같은 입장에 서게되었으므로 이제는 노아가정과 같이 아브라함에게도 자신이 완수해야하며 따라서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5%의 책임분담이 남아졌으니 이것은 헌제로써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끌고 밖으로 나아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헤아리라. 능히 헤겠는냐 또 가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 의로 여기사 가라사대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갈대아 우르에서 너를 이끌어낸 여호와로다」(창 15/5~7)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얻어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8) 라고 반문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나로서 찾아세워야할 조건이 무엇인가를 질문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네가 나를 위하여 3년된 암소 하나와 3년된 숫양 하나와 산비둘기 하나와 집비둘기 새끼 하나를 드리라」(창 15/9)고 명하시어 아브라함으로서의 완수해야할 책임분담을 지시하셨다.

하나님이 아담가정으로부터 2000년 간 믿음의 중심을 세우시려고 섭리하신 열매가 결실하는가 못하는가하는 것이 이 헌제의 결과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었다.

즉 전 인류를 중심한 전 피조세계에 대한 복귀섭리의 기대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루어지는가 못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은 오직 이 헌제에 의하여 좌우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제단 위에 오른 제물은 온 천주를 표시하는 상징제물이요 또 이것은 뜻맞게 드림으로써 전인류의 후손까지도 하나님 앞으로 찾아 세우려는 예약제물이었다. 그러므로 소생을 표시하는 비둘기와 장성을 표시하는 양과 완성을 표시하는 소를 제물로 드린 것도 소생 장성 완성을 경과하여 창조되지 않은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3종류의 제물로써 피조세계 전체를 대신함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즉 비둘기와 양과 암소는 전 인류와 그 후손과 만물세계 전체를 대신하는 표시체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은 그 제단 위에 전 천주의 표시체를 올려놓고 이것이 하나님 편으로 서느냐 다시 사탄 편을 돌아가느냐를 결정지으려는 것이다. 3단계를 표시하는 3종류의 제물을 바치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환언하면 재창조역사다.

그러므로 이 복귀섭리의 전체적 과정의 전모를 보여주는 이 헌제는 재창조역사의 전모를 상징한다. 따라서 재창조의 과정도 창조원리에 의하여 소생과 장성과 완성의 3단계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 3단계를 표시하는 비둘기와 양과 소를 한 제단 위에 올려놓은 것이 하나님이 전 복귀섭리를 단번에 이루시려 하신다는 뜻을 표시한다. 그러나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둘에 쪼개 좌우에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더니 솔개가 고기 위에 내리거늘 아부람이 쫓으니라. 해질 때에 아부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니 여호와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저희를 섬기매 저희가 400년 동안 괴롭게하리니」(창 15/10~13)라고 기록된 말씀을 보면 쪼개야할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연고로 그 위에 솔개가 내렸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400년 고역이라는 비운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단번에 이루시려던 섭리는 이삭을 거쳐 야곱에까지 연장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비둘기 쪼개지 않은 것이 그렇게도 중한 죄가 되었으며 또 400년 고역이라는 고난기를 어찌하여 이스라엘민족이 당하지 않으면 아니되는가하는 문제는 오늘까지 미해결로 남아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선과 악을 갈라세움으로 악을 멸하고 선을 세우시려는 역사를 반복하여 내려오셨다. 죄없는 인간으로 창조하셨던 아담에게 악이 침범했으므로 이것을 분리섭리하기 위해 가인과 아벨을 이성으로 분립했던 것이며 노아 시에도 사탄을 분리할 목적으로 홍수로써 악을 쳐 선을 갈라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세워 그의 믿음을 중심하고 전 피조세계를 제물로 걸어놓고 헌제하게하는 것도 선과 악을 가르는 상징역사를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제물을 쪼개는 뜻은
(ㄱ) 사탄 주관하에 있는 피조세계를 갈라내어 하나님 편으로 복귀섭리를 한다는 뜻
(ㄴ) 아담 가정에서 못이룬 뜻을 노아 가정에서 이루려다 못이루었고 노아에서 못이론 뜻을 아브라함에서 이루어야함으로 아브라함은 아담가정에서 못이룬 뜻을 이루어야한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분립헌제가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게되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제물을 갈라서 하나는 가인의 입장 하나는 아벨의 입장에 세워놓고 다시 헌제하여야 한다.
(ㄷ)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어 타락되었으므로(참고 타락원리)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를 하듯이 제물을 쪼개어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함으로써 하나님 편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쪼갠다는 행사에는 이런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는데 비둘기는 쪼개지 않았으니 이 비둘기는
1. 사탄 주관권내에서 갈라세우지 않은 사탄물건 그대로요
2. 아벨의 입장 즉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부분을 갈라 세우지 않았으므로 사탄이 취할 수 있는 부분만이 남아있는 제물이요
3. 사탄의 피를 뽑아 성별하지 않은채 놓았으니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성물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성립되어있음으로 가인 아벨의 헌제시나 노아 홍수 후와 같이 침범할 조건만을 찾고 있던 사탄은 자기가 취할 조건만이 남아있는 비둘기 위에 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비둘기 위에 앉은 솔개는 바로 사탄을 상징한다. 소생을 표시하는 제물인 비둘기에 사탄이 침범하였으니 소생의 기대 위에 서야할 장성 완성을 표시하는 양과 암소도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치려던 이 제물은 사탄에게 바친 결과가 되어버렸으니 노아로부터 400년의 섭리역사에는 또 사탄이 침범하였으므로 아브라함을 찾아 세우기 위한 40일 복귀에 의한 4수복귀기대에는 또 사탄이 침범하고 말았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스라엘민족이 애급 400년 고역이란 벌을 받게 되었는가 알아보기로 하자.

함의 타락행위로 말미암아 홍수심판 40일 즉 40일의 사탄분립 기대에서 섭리하시려던 구원의 역사에는 다시 사탄이 침범한 결과가 되었으므로 이 40일은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게된 것이다. 노아의 입장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40일을 다시 찾는 역사가 아브라함까지 400년으로 연장되었다는 것은 이미 논술하였다.(참고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이제 노아로부터 400년의 섭리의 열매로서 택함받은 아브라함의 입장은 심판 40일의 사탄분립기대 위에 선 노아의 입장을 복귀한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함의 타락행위가 없었다면 노아가정으로서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홍수심판의 목적은 완전히 달성되어 메시아 강림에 의한 복귀섭리는 그 때에 완수되었을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그의 책임분담인 헌제에 실수가 없었다면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는 완성되어 에덴복귀의 섭리는 완전히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헌제에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고 보니 아브라함은 400년 전의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초래되었던 노아의 입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함의 타락행위를 하기 전의 노아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하여는 400년이란 사탄분립기간을 통하여서만 아브라함을 세울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아브라함도 자기의 제물실수 전의 입장 즉 400년 전 노아심판 직후 함이 타락행위하기 전의 노아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하여는 다시 400년이란 사탄 분립기간을 통하여 모세를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환언하면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 하늘 편으로 세워놓지 않으면 제물실수 전의 아브라함의 입장이요 따라서 심판 직후의 노아의 입장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애급으로 들어가 사탄세계와 더불어 싸워서 400년을 찾아세우지 않으면 아니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의 3종류의 제물이 소생 장성 완성을 표시하는 성서적 근거를 알아보자.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소생구약시대 장성신약시대 완성성약시대로 갈라서 역사하신다는 것은 이미 논술한 바와 같다.

예수님은 구약섭리 완성자로 오신 분이시므로 소생섭리 완성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전체적 표시인 아브라함 헌제를 중심하고 논하면 예수님은 소생 비둘기 완성자로 오신 분이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나님의 신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임하였다함은(요 1/32)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제물실수로 인하여 사탄에게 빼앗겼던 그 비둘기를 다시 찾아 세우려 오신 분이므로 비둘기 완성자이시고 따라서 소생 구약섭리를 완수하시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비둘기는 소생을 표시하는 상징제물이다.

3년 공생애 노정을 출발한 예수님은 소생 구약섭리 완성자이신 동시에 장성 신약섭리 출발자이시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이 때의 예수님을 보고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고 하였다.

즉 예수님은 장성 신약섭리 출발자이시므로 어린양으로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양을 예수님을 표시하는 동시에 예수님의 사명분야인 장성을 표시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꾀어 삼손의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에 삼손은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않았다면 능히 나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으리라」(삿 14/18)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암소는 아내를 상징한다. 완성기를 암소로 표시한 것은 완성 성약시대는 전인류가 아내로서의 자격을 복귀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즉 신랑된 재림 예수님을 맞아 천국생활을 할 수 있는 아내의 자격을 완성하는 시대가 성약시대이므로 아내를 표시하는 암소로서 완성을 표시한 것이다. 예수님은 장성 신약섭리를 완성하시고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완성 성약섭리의 뜻을 못이루시고 땅에 남겨둔채 너희는 신부요 나는 신랑(계 18/23)이라는 명사를 남기시고 승천하셨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신랑된 재림 예수를 맞을 때에는 신부의 입장을 넘어서 아내 즉 암소의 자격을 완비해야만 주님의 인과 아버지의 인을 맞아(계 14/1~) 완전히 복귀된 144,000무리에 참여될 것이다. (총서 참조) 이와같이 암소는 완성기를 표시하였다. 지금 시대를 소시대라고 계시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한 제단 위에 3종류의 제물을 일시에 바친 것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전과정을 일시에 이루시려는 경륜의 뜻을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제물실수로 인하여 그 섭리는 다시 소생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장성 이삭을 거쳐 완성 야곱에 이르러서야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경륜하신 뜻의 출발을 보게된 것같이 소생 구약, 장성 신약, 완성 성약 이와같이 전 복귀섭리가 연장됨도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함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다는 행동은 비록 미소한 일이었지만 이로 인하여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성립되었으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은 애급고역의 비참한 역사를 빚어냈으며 이 역사는 반복되어 현세에 이르기까지 4천년이란 눈물겨운 역사의 연장을 보게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헌제는 복귀과정에 있는 인간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가를 알아야한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바쳐야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쪼개어 선과 악을 분립치 않으면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제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기도를 드리는 시간은 우리의 몸을 제물로 바치는 시간이므로 죄를 회개하여 내 자체를 가인적인 부분과 아벨적인 부분으로 분립하여 성별된 제물로서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기도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II .아브라함의 이삭 실체헌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가인과 아벨의 헌제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소생역사로 하고 다시 장성역사로서 노아의 심판을 거쳐 아브라함의 완성역사에 이르렀다. 이제 이 완성역사를 담당해야될 아브라함에게는 이 뜻을 완성해야할 원리적 조건이 성립되어있으므로 아브라함의 상징제물은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나 상징제물의 목적인 실체는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 상징제물로써 잃어버린 것을 실체로 찾기 위하여 실체자식 이삭을 번제로 드리게되는 것이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레와 같이 번성하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창 15/5)은 독자 이삭으로 이루어져야할 것인데 이러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하심은 하나님도 예약제물에서 잃어버린 믿음의 중심을 실체로써 세우시기 위한 서러운 심정에서 명하신 것이요 아브라함도 이 이해못할 번제를 서슴지 않고 드리게 되는 것은 첫 번 제물로 인하여 자손들이 이방에서 400년 간 고역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두려운 벌이 임하였던 까닭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 아브라함이 상징헌제로 잃어버린 것을 이삭을 통하여 실체로 다시 찾을 수 있는가하면 사탄이 인간조상 아담과 그 자식을 2대에 걸쳐 빼앗아 갔기 때문에 이를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 2대에 걸쳐 빼앗아올 수 있는 역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도 논한 바와같이 아브라함은 제2 인간조상인 노아 대신존재요 따라서 섭리노정에서 보면 아담 대신존재인 까닭이다.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믿지 못할 것을 믿음으로써 약속으로 받은 이삭을 다시 번제로 드리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은 과연 인류의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찾아 세우기에 족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러한 비참한 시련을 받게됨도 제물실수로 인함이니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작은 것에 실수하면 이것을 만회하기 위하여서는 그에 비할 수 없이 더 큰 탕감조건을 세워야한다는 원리를 보여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들고 아들을 죽이려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불러 가로되 「그 아이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로 내게 드리기를 아끼지 아니하니 이제야 네가 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아노라」(창 22/12)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이 이렇듯 행동으로 나타날 때 즉 몸과 마음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전한 상대기준을 조성할 때 벌써 사탄분리의 능력은 발생한 것이니 사탄이 분리된 이삭은 벌써 하늘적 제물로 남아졌으므로 죽일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제야 네가 나를 두려워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신 중에 「이제야」라는 말씀에는 심중한 의의가 있다.

즉 첫 번 예약제물 헌제시에는 네가 하나님이 두려운 줄 모르고 합당치 못한 헌제를 하더니 지금은 내가 이것을 깨닫고 이삭을 뜻맞게 헌제하니 이제야 네가 나를 두려워하는 줄을 아노라 하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제야」라는 어구에는 첫 번 제물실수에 대한 경고와 이삭제물의 성공에 대한 기쁨의 감정이 충분히 내포된 것이다. 상징제물로 잃어버린 것을 이삭 실체제물로써 다시 찾았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실체세계 전체를 실체 이삭을 세워 다시 찾을 수 있는 조건을 세웠다는 것을 전형으로 하여 야곱도 모세도 예수님도 같은 노정으로 출발하여야 된다.

아브라함은 그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사탄이 침범할 조건이 성립된 이삭을 모리아 산상에서 번제로 드려 그를 다시 하늘편으로 분립하기 위하여 3일기간을 소비하였으므로 이 3일기간은 섭리노정을 출발하기 위한 사탄분립기간으로서 남아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야곱도 사탄세계인 하란에서 자녀와 재물을 취하여 하나님 편으로 분리하는 노정을 출발키 위해서는 3일기간을 라반을 속이고 자유행동을 취하여 나왔고 (창 31/19~22) 모세도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재물을 취하여 사탄세계인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분리할 때에는 3일동안을 바로를 속이고 나왔으며 (출 8/27~29) 예수께서도 어둠과 싸워 영적복귀와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는 3일기간을 무덤에 머물러 계시었다. 그러므로 사탄분립의 기간에 있어서도 소생 장성 완성에 기인된 3일기간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III .야곱과 에서에 의한 사탄 재분립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실체로써 찾아세운 이삭이지만 이 이삭에는 아직도 사탄의 미련이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전 천주를 상징함으로 이삭도 표징되어 있는 상징제물을 사탄이 침범하였던 조건이 있는 까닭이다. 이와같이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상징적 조건이 남아있는 이삭을 중심하고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제물실수한 후에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그의 후손이 이방에서 400년 간 고역하리라고 하신 말씀에 의하면 후손의 애급노정 출발은 이삭부터 해야될 것인데 이삭부터 하지못한 이유는 이와같이 이삭에게는 아직 사탄의 미련이 남아있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에서 사탄분립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노정을 출발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삭에서 다시 사탄을 분립하는 역사를 하시지 않으면 아니된다. 아브라함은 제물실수로 인하여 그의 아담대신의 입장은 이삭에게로 옮겨진다.

하나님은 아담을 두 주인 상대로 세워서 사탄을 분립하는 역사를 할 수 없으므로 가인과 아벨로 갈라세워 역사하신 것과 같이 (참고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이삭도 역시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 상대로 섭리하시는 것이 비원리적이므로 그를 쌍태 에서와 야곱으로 갈라세워 가인과 아벨같은 두 입장의 표시적 위치에 세워놓고 사탄분립 역사를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두 성품의 제물 즉 예약 상징제물과 이삭 실체제물로서 야기된 사탄과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것이 두 입장의 쌍태를 주신 목적이다.

그러므로 에서는 첫 자식으로서 첫 번 사탄이 취한 상징제물을 표시하므로 가인의 입장이요 둘째 자식 야곱은 둘쨋번 하나님이 취한 실체제물을 표시하므로 아벨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에서와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싸우게 된다. 창세기 25장 22절 이하를 보면 에서와 야곱이 두 민족과 두 나라의 입장에서 서로 싸우리라는 것과 에서가 야곱을 섬겨야한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것은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으로써 사탄 분립을 위한 두 성품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태중에서부터 상충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신(말 1/2~3) 이유도 이러한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담으로부터 사탄을 분립하기 위하여 가인과 아벨을 세워 역사하시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그와 동일한 입장인 에서와 야곱을 세워 역사하시어 이삭에게 남아있는 사탄침범의 미련을 완전히 끊어버리려는 것이다. 야곱이 에서대신 장자의 축복을 받게되는 것도 (창 27/29)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팥죽과 떡을 받고 팔아먹은(창 25/34)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형  에서가 죽이려하므로 모친의 권고에 의하여 가나안을 떠나 사탄 세계인 하란으로 들어가(창 27/43) 거기서 처를 취하고 자녀를 번식하고 많은 재물을 취하여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복귀함으로 복귀섭리의 믿음의 기대를 점점 넓혀가는 것이다.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에 그 형 에서를 심히 두려워했으나 (창 32/7) 야곱은 예물로서 형 에서를 꾀었으므로 (창 32/13) 에서는 야곱을 환영하게 되었다(창 33/4). 만일 이 때에 에서가 야곱을 죽였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전개되었던 것과같은 비참한 역사를 또 되풀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에서가 야곱을 사랑하여 환영함으로써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고 질투하여 죽임으로 잃어버린 하늘적인 장자의 기업을 차자 야곱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란에서 20년을 고역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만 에서는 단지 야곱을 환영하여 사랑함으로 축복을 받아 가나안에서 복락을 누린 것이다. 이것은 사탄 편에 선 가인이 하늘 편에 선 아벨을 사랑하여 그를 통하여 헌제하였다면 사탄 편에게 빼앗긴 장자의 기업은 하늘 편으로 옮겨짐으로 가인도 축복을 받았을 것임을 교시하며 또 후일에 사탄편에 선 모든 인류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굴복하여 그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헌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와같이 아브라함 1대에서 이루시려던 뜻은 이삭을 거쳐 야곱에서 그 성사의 출발을 보게 되었다. 이스라엘을 아브라함이 족속이라 하지않고 야곱의 족속이라함도 (출 19/3) 야곱은 아브라함 뜻 성사의 출발자이기 때문이다. 생육하고 번식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아담에게 주신 것과 같은 축복을 그 대신사명자인 노아에게 주셨으므로 (창 9/1) 노아 대신사명자인 아브라함에게도 주셨고(창 15/5) 또 야곱에게도 같은 축복의 말씀을 주신 것(창 35/11)을 보더라도 야곱은 아브라함의 뜻을 위한 대신사명자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제물실수했을 때 「너의 자녀가 이방에서 객이 되어 400년 간 유리하리라」(창 15/13)고 하셨으나 이삭부터 애급에 들어가지 못하고 야곱부터 들어간 이유도 이와같이 야곱은 이삭에서 사탄을 분립하여 그의 제물실수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이라고 기록된 것같이 3대의 하나님이 된 것도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그 뜻이 3대에서 이루어진 것을 표시함이니 이는 바로 아브라함을 중심한 섭리노정에 남겨진 그의 중대한 과오를 의미하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서러움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이렇듯이 아담 가정으로부터 복귀섭리의 기대를 조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는데 그의 헌제의 실수로 인하여 이삭을 거쳐 야곱에서 그 기대조성의 출발을 하게된 것이니 아브라함의 한 제단에 오른 세가지의 제물로써 표시된 이 뜻 성사의 노정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대한 역사적 표시의 전모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아담을 상징함이니 마치 아브라함 1대에서 이루시려던 뜻이 이삭을 거쳐 야곱으로 연장된 것같이 아담에서 이루시려던 창조목적은 예수님을 거쳐 재림주로 연장이 되어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도 바쳤던 이삭은 전인류의 제물된 예수님을 상징함이요 이삭에서 완전 분기하지 못한 사탄의 미련을 야곱에서 청산하여 장자 기업의 기대를 조성한 것같이 예수님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은 사탄세계는 재림예수의 심판을 통하여 청산되어 복귀섭리를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출발의 기대는 야곱에서 조성되었으나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한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고역 400년이 남아 있으므로 야곱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고역기간을 지난 후에야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는 모세를 중심하고 조성될 것이었다.

제2장 복귀섭리시대(2000년)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받은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다면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고 그 기대 위에 메시아를 맞아 창조이상의 세계는 완전히 복귀되었을 것이므로 아브라함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4000년의 복귀섭리역사는 필요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는 인류를 다시 죄악역사를 이루어 나아가는 방향으로 내몰았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섭리해 오시던 아담으로부터의 2000년 기간은 전부 사탄에게 내어주어 사탄의 뜻을 이루어나온 결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을 다시 하늘 편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 있어야할 것이니 이것이 곧 아브라함 이후 예수님까지 2000년 기간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시대라고도 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출발의 기대는 야곱의 장자복귀로 인하여 조성되었으나 아직 야곱의 앞에는 제물실수로 인한 애급고역의 노정이 남아 있으므로 이 노정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걷지 않으면 아브라함이 제물실수없이 설 수 있었던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찾아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노정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민을 불러 세우는 것으로 출발하여 이 선민을 번성케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조성치 않으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한 모세의 반석이타로 말미암아 이 노정은 다시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여 2000년에 이르러서야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는 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이후 2000년 기간은 메시아를 맞아 복귀섭리를 종결지어야할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일러 복귀섭리시대라고 부른다.

인간 자신의 불신에 의하여 타락된 인간이므로 타락의 전체적인 책임은 인간자신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도 피조물로서 타락된 것이므로 하나님도 창조주로서의 원리적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제1 책임분담노정을 담당하시고 선지자를 직접 대하시어 계명과 율법을 주심으로 사탄을 굴복시키는 섭리를 하셨으니 이 시대를 소생구약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는 다시 7기간으로 구분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구분되는가하면 하나님은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찾아세울 때까지를 7기간으로 구분하여 섭리하셨으므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탕감복귀시대도 역시 7기간으로 구분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복귀섭리시대가 7기간으로 구분되어있는 것도 원리적인 프로젝트를 맞추기 위함이다. 6일째 되는날 창조된 인간이 타락되었으므로 6수는 사탄이 침범한 수로서 불길수 요 따라서 하나님이 찾아야할 수다. 하나님은 6수를 사탄에게 내어 주었으므로 7일 안식수를 채우지 못한 것이다. 6000년으로 죄악역사를 마치고 1000년 왕국의 1000년을 채워 7000년으로 천국이상을 이루시려는 섭리는 바로 잃어버린 6수를 찾고 7수를 채워 원리적 섭리의 프로젝트를 이루어 맞추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섭리시대가 7기간으로 구분된 것은 이 기간으로 메시아를 맞아 에덴복귀를 완성키 위한 7수를 찾아 세우시기 위함이다.

이와같이 아담으로부터 2000년 간이나 사탄만을 대하고 있는 암흑세계에서 뛰쳐 나온 아브라함을 불러 그의 후손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세우시고 악의 판도를 물리치며 선의 판도를 넓히어 민족적인 복귀섭리의 기대를 조성하면서 예수님에까지 이른 것이다.

제1절 애급고역시대 (400년)      
    
    I .복귀섭리로 본 야곱노정의 의의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400년 간 고역을 당하게된 이유는 이미 상술하였다.

노아와 같은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하여 찾아 세웠던 400년 기대에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다시 분립하기 위하여 이스라엘민족이 사탄세계인 애급에 들어가 400년 간 사탄과 다시 싸우지 않으면 아브라함으로 찾아 세우려던 믿음의 조상의 입장은 다시 찾아세울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민족의 애급고역기간은 사탄과 싸워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기간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의 출발은 사탄의 미련이 남아있는 이삭부터 할 수 없으므로 장자의 기업을 복귀한 야곱부터 하게된 것이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찾아 세우기 위한 애급고역출발자로서의 자격은 야곱에게 부여된 것이다.

이와같이 야곱은 하늘뜻을 받들고 복귀섭리시대를 이루어 나아가는 첫 출발자로서 다음 시대에 하늘 뜻을 받들고 나아가는 중심인물들이 걸어야할 본보기 노정을 걸은 것이다. 그러므로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복귀한 야곱이 사탄세계를 표시하는 하란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그 노정은 다음에 모세와 예수님이 걸어야할 표시적 노정인 동시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걸어야할 전형노정이기도하며 또 끝날에 주를 따르는 각 성도들이 걸어야할 상징노정이 될 것이다.

즉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의 기업을 빼앗은 후 하란에서 하늘적인 처자와 아울러 재물을 취하여 4수복귀의 탕감조건을 세운 후 1대로서의 복귀를 완성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다음에 모세도 애급에서 장자를 전부 침으로 차자의 입장에 있는 존재를 장자의 입장에 세워줌으로 장자기업을 빼앗는 탕감조건을 세운 후 이스라엘선민과 아울러 그 재물까지도 빼앗아 야곱과 같이 4수복귀의 탕감조건을 세워서 민족적인 가나안복귀를 완성해야된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 예수님도 인류역사를 먼저 장자의 입장에서 이루어 나오는 사탄세계를 쳐 차자의 입장에 있는 신부와 자녀와 만물을 복귀하여 장자의 입장에 세워줌으로 장자기업을 세계적으로 복귀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또 야곱이 죽과 떡으로써 장자의 기업을 빼앗은 것(창 25/34)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예수님도 야곱의 입장에서 팥죽으로 표시된 피와, 떡으로 표시된 살로써 잃어버렸던 장자의 기업을 완전히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자녀와 아울러 만물세계를 사탄세계에서 에덴으로 복귀하여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성하여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1대에서 하늘적인 가정과 만물을 취하여 가나안으로 돌아와 하늘적인 장자의 기업을 1대로써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웠기 때문에 1대 가나안복귀 완성자요 모세는 야곱의 이러한 노정을 민족적으로 완성해야할 사명자이었으므로 민족 가나안 복귀 완성자로 왔었고 예수님은 이것을 세계적으로 완성하여야되므로 세계가나안 복귀 완성자로 오셨었다.

야곱이 부친을 기만한 것도 그가 간교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천륜의 섭리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죄가 되지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행위가 된 것이다.
구약성서에는 이와같이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선지자들이 감행한 사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것도 원리를 모르고는 해명되지 않을 것이다. 야곱이 이와같이 장자의 축복을 에서대신 받음도 그 모친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모자협조에 의해서만 야곱의 축복이 이루어졌으니 이것도 다음에 오실 모세와 예수님의 전형적 노정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모세도 그 모친이 3개월 간을 숨겨 키웠고(출 2/2) 바로궁중에서 그 유모에 의하여 숨은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출 2/9)모세의 위인은 볼 것이 없었을 것이다. 또 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됨도 바로궁중으로 들어가는 도중에서 하나님이 죽이려할 때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자식 즉 모자의 협조에 의하여 모세가 살아났기 때문이었다(출 4/20~26). 이와같이 예수님도 헤롯왕이 그를 죽이려할 때 그 모친 마리아가 그를 데리고 애급으로 피난갔던 것 등등 모자의 협조없이 구원의 섭리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모자협조란 조건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알아보자. 인류의 타락은 해와로부터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않았다면 이에서 구원의 섭리는 이루어졌을 것인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류죄악사는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뿌리는 모친 해와에 있고 죄악사의 열매는 자식 가인에서 결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인류의 죄악사는 모자로 인하여 시작된 것이므로 이것을 탕감복귀하는 것도 모자가 협조하여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야곱은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얍복강을 넘기 전에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여 승리한 후 환도뼈를 치고 나서야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게 된 것이다(창 32/22~28). 복귀섭리로 보면 아브라함이 아담대신 입장이라는 것은 위에서 이미 논하였다. 이제 아브라함 뜻은 연장되어 야곱으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니 야곱도 아담 대신입장으로서 아담으로 이루시려던 뜻을 야곱으로 계승해야할 것이므로 야곱은 아담이 지은 죄를 탕감복귀해야할 사명을 가졌다. 즉 아담이 환도뼈를 잘못 쓴 죄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야곱의 환도뼈를 대신 친 것이다.

이로써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는 사실은 아담이 성문제로 타락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것은 그를 1대복귀 완성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시련이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내기 위하여 바로궁중으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는 시련을 넘은 후에야(출 4/24) 민족복귀 완성자의 자격을 얻었고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의 시련을 이긴 후에야 비로소 인류구원의 공생애 노정을 출발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나서는 사람은 반드시 큰 시련을 거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은 야곱에게 12자식이 있게된 원리적근거를 알아보자.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잃어버린 10대와 40일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10대에 400년을 요하였다는 것은 이미 논한 바이다. (참고 노아가정 중심한 복귀섭리)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다면 이와같이 노아로부터 400년과 10대를 찾아세운 40일 복귀의 기대 위에서 아브라함을 중심한 섭리는 이루어졌을 것이었지만 제물실수로 인하여 이 섭리는 이삭 야곱 2대로 연장되어 12대가 된 것이다. 즉 12대로써 10대를 탕감복귀하는 결과가 되었으므로 복귀섭리의 뜻으로 보면 12대는 10대에 해당된다. 복귀섭리시대의 뜻 중심한 출발자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도 40대로 종결되어야할 것인데 이삭 야곱의 2대의 연장으로 인하여 42대가 되었다. 이것도 뜻 중심하고 보면 42대는 40대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부터 4000년 아브라함부터 40대로서 예수는 복귀섭리를 완수해야할 것이었다.

이와같이 노아로부터 야곱까지의 12대는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제2차로 사탄에게 내어준 것이므로 이것을 복귀할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야곱의 12자식을 세워서 복귀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1대 복귀완성자 야곱이 12자식 중심으로 섭리노정을 출발했으니 민족복귀 완성자 모세도 그 전형노정을 본받아 12지파 중심으로 섭리해야되며 세계복귀 완성자 예수님은 12제자 중심으로 역사하셔야된다. 이스라엘 역사에 삼손을 중심한 12사사와 12소선지의 역사가 있는 것은 이러한 원리로서만이 해명될 것이다. 천성에서 12진주문이 중심이며 땅에서 12개월을 중심한 24절계며 12시간을 중심한 24시간 등은 모두 이런 원리 가운데서 되어졌다.

끝날에 하늘적 큰 사명을 띤 대한민국이 12부를 중심하고 조직된 정부로서 출발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야곱을 중심한 70 식구가 애급으로 들어갔으니 (창 46/27) 모세도 70 장로를 중심하고 사탄세계와 싸워야하며 예수님도 70 문도를 중심하고 사탄세계와 싸워야 한다. 야곱이 지팡이를 가지고 얍복강을 넘어 1대에 가나안으로 복귀했으니 (창 32/22) 모세도 지팡이로 홍해를 건너서 민족적으로 가나안에 복귀해야 되며(출 14/16) 예수님은 철장으로 고해와 같은 이 세상을 심판함으로써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성해야한다(시 2/9, 계 2/27). 야곱이 하란에서 우상을 도둑하여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으니 (창 35/4) 모세는 우상을 갈아서 물에 띄워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하였고 (출 32/20) 예수님은 모든 사탄을 불사르려 오셨다(말 4/1). 야곱은 그 시체까지도 사탄과 싸워 분별된 40일 기대 위에 서야할 것이므로 그 시체에 40일동안 방부제를 발랐다(창 50/3). 그러므로 모세도 그 시체를 놓고 사탄과 싸웠으며 (유 1/9) 예수님도 그 시체를 놓고 서로 취하려고 싸운 것이다.

야곱의 본보기 노정은 이미 아브라함으로 보이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이삭헌제를 놓고 사탄과 독자적으로 싸우던 3일기간을 본보기로 걷기 위하여 야곱도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 사탄과 스스로 싸우는 자유허여의 3일기간이 있었고 모세도 민족을 인도하여 가나안복지로 향할때 하늘의 협조없이 독자적으로 바로를 속이고 출발해야될 3일기간이 있었고 예수님도 영적복귀의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 무덤 속에 3일기간을 계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흉년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애급땅에 갔다온 것같이(창 12/10) 야곱도 흉년의 간난으로 인하여 애급으로 갔었고 모세도 바로의 살해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애급 바로궁중으로 갔었고 예수님도 헤롯왕의 살해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애급땅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노아홍수가 끝날 무렵에 까마귀와 비둘기로써도 그렇게 보여주셨지만 은밀한 뜻을 보여주시고야 섭리하시는 하나님(암 3/7)은 이렇듯이 타락한 인간이 걸어야할 구원의 길을 이모 저모로 상징과 암시와 비유로써 교시하신 것이니 이것이 즉 성서요, 구원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본원리를 알지 못하면 성서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니 그러고야 어찌 바른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으리요. 예수께서 오시면서부터 그의 행적은 구약시대의 기성관념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각도로 전개된 것같이 예수께서 재림하신 후의 성약역사도 지금까지의 신약역사로서는 상상도 못하였던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지자라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II .애급고역시대의 의의 
         
애급고역이라는 눈물겨운 노정이 어찌하여 이스라엘 선민에게 남아졌는가하는 문제는 이미 여러차례 거듭하여 논술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 뜻을 받들어야할 사명이 큰 만큼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에 오는 그에 대한 탕감도 큰 것이다.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시려는 하나님의 예정의 뜻은 변함 없으므로 이 뜻을 대하는 인간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 대신 사명자를 세워 기어코 이 뜻을 성취하시고야 마는 것이다. 아담을 중심하고 이루시려던 뜻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 좌절되니 아벨대신 셋을 세우셨고 셋의 후손에서 노아를 아담 대신으로 택하시어 아담으로 이루시려던 뜻을 노아로써 이루려하셨다.

그러나 노아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지 못하였으므로 노아대신 아브라함을 택하셨으나 아브라함 마저 노아의 입장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러나 아브라함에서는 기어코 뜻을 이루어야할 원리적 조건이 있으므로 이삭을 거쳐 야곱을 세움으로써 그로부터 선민의 터를 넓혀 가면서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400년을 다시 찾아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할 애급고역의 노정을 출발치 않으면 아니된다. 애급고역 400년이 있게된 원인은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기간인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을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요 또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기간이 생긴 원인은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기간인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600년을 탕감복귀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애급고역시대가 남아지게된 원인은 결국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600년을 탕감복귀하기 위함이라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복귀기대섭리시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복귀섭리시대가 나오게된 것인데 복귀기대섭리시대 가운데서도 인간시조로부터 노아까지 1600년 기간을 탕감복귀키 위한 기간이 애급고역 400년이다. 이와같이 뜻 성사의 중심은 옮겨져 야곱이 아담의 입장에 서게 되었으므로 뜻 성사를 위한 애급노정을 출발하려면 아담이 이루지 못한 것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 야곱은 하늘 편의 처와 자녀를 찾아 가정을 세우며 재물을 취하여 잃어버린 아담가정과 만물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4수복귀의 탕감조건을 세워야하며 또 얍복강의 시련을 거쳐야 1대복귀완성자의 자격을 가지고 애급고역의 노정을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말할 수 없는 수난기인 동시에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여 에덴복귀의 영광을 어느 민족보다도 먼저 누리도록 이끌어주는 중요한 시대다.

야곱의 애급노정은 요셉을 길잡이로하여 출발한 것이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째 만득자로서 그 모든 형들에게 있어서는 아벨의 입장이었으므로 야곱은 그를 특별히 총애하고 있었으며 가인의 입장인 그 형들은 모두 요셉을 증오하였다. 요셉은 자기가 형들과 같이 추수할 때에 형들의 곡식단이 자기의 곡식단에 절하였고 또 열한개의 별이 자기에게 절하였다(창 37/5~11)는 몽시를 발표하여 그 형들의 자기에 대한 증오감을 더욱 깊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형들에게 있어서 차자의 입장에 있는 요셉을 이 노정의 선봉으로 세우기 위하여는 그 형들이 전부 그에게 굴복하여 가인이 아벨에게 굴복한 입장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야한다는 것을 교시하기 위함이었다. 과연 그 형들이 아무리 요셉을 미워하여 이스마엘상대에 팔아먹었으나(창 37/27) 후일에 요셉이 애급의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는 그 몽시로써 교시하신대로 그 형들은 동생에게 와서 완전히 굴복한 후에야 다시 본향으로 돌아가 그 부친 야곱을 비롯한 그의 70가족을 인솔하여 가지고 애급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에서 400년 간 고역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으나(창 15/13) 그들이 애급을 떠난 것은 430년이 끝나는 그날이었다(출 12/41). 이와같이 하나님의 섭리가 30년이 연장된 것도 역시 이스라엘민족 자체가 애급을 떠날 수 있는 기대를 세우지 못한 까닭이다.

6000년 역사의 노정도 이와같이 공식적인 섭리노정이라 할찌라도 그 뜻을 대하는 인간의 책임완수 여하에 따라 원리적 연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야곱 이후 모세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민족에는 한 사람의 예언자도 출현함이 없이 애급민족들에게 처참한 학살과 학대를 받아가면서 단지 할례(출 4/24~26)와 제사(출 8/25~28)와 안식일(출 16/23)을 지키는 것으로 그들이 신앙생활을 유지해온 것이다.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바로궁중에 준비해두었던 모세를 불러세우시사 「여호와 가라사대 내가 애급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급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햇족속 아모리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브스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급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하는 학대로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내게 하리라」(출 3/7~10)고 명령하시어 어둠에서 헤매던 이스라엘민족에게 새로운 서광이 비친 것이다.

III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              

    一 모세노정의 의의

인간시조가 타락된 후에 하나님은 한탄하시고 후회하셨다(창 6/6). 하나님은 자기의 몸으로 지으신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서러움이 곧 하나님의 서러움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로서의 원리적 책임을 다하시기 위하여 복귀섭리의 제1책임을 하나님이 친히 져주신 것이다. 탕감복귀의 원칙에 의하여 인간이 타락했으니 인간으로 복귀해야되는 것이 원리이므로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탄생하시어 역사하셔야 될 것은 필연적인데 이미 하나님 앞에서도 순종 굴복하지 않았던 사탄이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를 순종 굴복시키는 전형적 노정을 친히 보여주시기 위하여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과 모세를 세우시어 하나님적 제1 책임분담 역사를 하여 내려오신 것이다.

이미 위에서도 논술한 바이지만 모세는 야곱이 1대로서 복귀의 기준을 찾아세운 터 위에서 야곱의 근본 목적을 완수하여야한다. 모세는 이 목적을 위하여 야곱의 노정을 본보기로 민족적 복귀섭리노정을 명시함으로써 후일에 예수께서 오셔서 완수해야할 세계적 가나안 복귀 섭리노정을 그대로 예시한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모세노정을 본보기로하여 그대로 걷지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로 오셨던 사람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말씀을 보더라도 「모세가 말하대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다.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사람은 다 멸망시키리라」(행 3/22~23)고 하셨으니 이 선지자는 곧 예수님을 가리킴이다. 요한복음 5장 19절 이하를 보면 「······아들이 아버지의 행하신 일을 본 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신 것을 다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해 여기게 하시리라」고 기록하여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 이미 모세를 통하여 보여 주셨고 또 그대로 보여주시고 있는 노정을 따라 역사하심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심도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사탄 품에서 스스로 뛰어 나왔기 때문이다. 즉 모세는 바로궁중의 영화를 진개와 같이 생각하고 이스라엘민족된 하늘의 혈통적 지조와 충절을 변하지 않고 있었던 까닭이다(히 11/24~26). 모세의 민족애는 이스라엘민족을 학대하는 애급인을 살해(출 2/11~12)함으로 폭발되었으니 이렇듯이 모세의 애급사람에게 대한 적개심의 발로는 모세로하여금 그들과 타협할 수 없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민족의 인도자로서의 택함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 대신존재요(출 4/16) 사탄상징인 바로 앞에 신으로서 (출 7/1) 역사하여 하나님적 책임섭리 노정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모세가 애급에서 기사와 이적으로써 이스라엘민족을 빼앗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복지로 복귀하여야될 것같이 예수님도 타락인간을 원수 사탄 품에서 기사와 이적으로써 빼앗아 하나님의 창조이상 세계로 복귀하여야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로 인한 이 본보기노정은 예수께서 걸어야할 노정인 동시에 그를 따르는 성도들도 걷지 않으면 아니될 노정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二 예수의 복귀섭리노정으로 표시된 모세의 출애급노정          

이제 우리는 모세노정은 어떻게 예수의 노정을 상징하였는가를 알아보기로하자.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여 애급에서 이스라엘민족을 구출할 것을 명하시니 모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인도자인 것을 무엇으로 알게할 것인가고 반문하였다(출 4/1). 하나님은 이 증거로서 모세에게 세가지 기사의 능을 부여하셨으니 (출 4/1~9) 첫째는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하는 기적이다. 하나님 대신 신으로서(출 4/16, 출 7/1) 이스라엘민족을 대표하여 사탄의 실체적 대표형인 바로 앞에 서게될 모세의 손에 쥐어있는 지팡이는 하나님 앞에 설 다음에 오실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팡이로 사명자로 오신 분이다. 지팡이는 대신 의지자요 대신 보호자며 불의한 것을 쳐 의로 세우며 바른 길잡이의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지팡이로 오신 예수님은 바로 이와같은 사명을 가지고 인류 앞에 나타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가 던진 그 지팡이로 나타난 예수님은 하늘뱀적 사명자로 오셔서 인간시조를 타락시킨 사탄뱀을 멸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상징역사다. 다시 말하면 뱀이 인간을 타락시켰으니 복귀하는 것도 뱀으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고 자기를 뱀으로 상징하셨다.

예수께서 전도를 나가는 제자들을 보시고 「지혜는 뱀과 같이 하고 순하기는 비둘기같이 하라」(마 10/16)고 말씀하신 것도 뱀이 죄없는 인간을 꾀어 타락시킨 것같이 너희들도 타락된 인간을 꾀어서 하나님 편으로 인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으로 보여주신 이 기사는 후아담된 예수님을 (고전 15/45) 찾아세운다는 뜻이니 즉 인간시조 아담복귀를 상징한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모세가 첫 번 품어서 문둥병이 된 그 손이 둘째번 품을 때 깨끗이 나아버리게함으로써 치병의 능을 보여주셨다. 첫 번 손을 품어 인간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렸다함은 처음으로 천사장이 해와를 품음으로써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입장으로 인간이 타락해버렸다는 것을 표시함이요 그 손을 다시 품어 이 병이 깨끗해졌다함은 예수께서 오셔서 신부된 전 인류를 다시 품음으로써 완전복귀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三 40일 복귀섭리로 본 모세노정        
   
 노아의 가정은 40일 심판으로 사탄을 분립하여 복귀섭리의 기대를 조성할 수 있는 40일 사탄 분립기준선상에 처하게 된 것이었으나 함의 타락행위로 말미암아 이 40일에는 사탄이 재침범하게되어 이것은 사탄에게 내어준 40일로 돌아갔으므로 노아의 입장과 같은 섭리의 기대를 다시 조성하려면 잃어버렸던 40일을 탕감복귀하여 하늘 40일로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참고 노아가정 중심한 복귀섭리)

복귀섭리노정으로 보아 심판 40일로 인하여 제2 인간 조상이요 제1 믿음의 조상의 입장에 처했던 노아의 입장을 복귀한 아브라함을 찾아세우기 위하여 400년을 요한 것도 함으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재분립키 위한 40일을 하늘 편으로 다시 찾아세우려는 것이 그 목적이 었다.(참고 아브라함 중심한 복귀섭리)

아브라함은 제물 실수로 인하여 함의 실수로 인한 노아가정과 같이 40일 기대를 사탄에게 내어준 입장에 다시 서게되어 노아로부터의 400년 기대를 파하였으므로 함 실수전 노아의 입장을 다시 복귀하려면 40일을 찾기 위한 400년 기대를 다시 조성치 않으면 아니되게되었다.

이스라엘민족의 애급 400년 고역은 이렇듯이 필연적 노정으로 남아진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다면 노아 중심하고 경륜하시려던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이루어졌을 것인데 제물실수로 인하여 사탄 재침입을 보게되니 부득기 이스라엘백성은 400년이란 기간을 다시 사탄과 싸워 그를 완전히 분립하지 않으면 400년 전 노아의 입장을 복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애급 400년의 고역기간을 경과한 이스라엘민족을 중심한 모세의 입장은 바로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 전의 입장이요 따라서 40일 심판기대 위에 섰던 함의 실수 전의 노아의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노아의 가정적 입장을 민족적으로 복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아가정은 노아를 중심하고 하나되어 지혜로 찾아 세워야할 자기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될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백성들로 모세를 중심하고 하나되어 그들의 지혜로 찾아세워야할 책임분담을 완수해야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이 우상을 받들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동을 취했으며 모세 역시 반석 2타라는 중대한 범행을 하게되어 이 백성은 함의 실수로 인한 노아가정과 같은 입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즉 모세를 중심한 12지파의 이스라엘 백성은 함실수 전 노아의 입장을 복귀한 기대였던 애급고역 400년을 다시 사탄에게 내어준 결과로 돌아갔으므로 이 입장을 다시 복귀키 위해서는 삼손을 중심한 12사사를 세워 40일의 기대를 재조성하기 위한 사사 400년의 사탄 재분립기간이 또 필요하게된 것이다.

40일을 중심하고 모세 한 사람을 찾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어떠했는가를 알아보자. 1대 복귀노정을 출발하기 위한 야곱이나 민족복귀노정을 출발키 위한 모세나 부활하여 영적 세계복귀노정을 출발한 예수님은 마치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상에서 이삭헌제로서 사탄을 분립키 위한 3일 기간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으로 사탄과 싸우는 3일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모세 역시 이 3수를 찾기 위한 3개월 기간을 모친이 사탄 바로의 눈을 속여 양육하는데서 그 생애는 시작되었다. 즉 사탄과 싸우는 이 기간을 경과한 후에야 모세는 바로궁중으로 들어가 이스라엘민족의 가나안복귀 완성자로서의 생애가 시작된다. 모세가 바로궁중에서 40년 간 자라게되는 것도 모세는 아브라함이나 노아를 세워 아루시려다 못이룬 하나님의 뜻을 완성해야할 존재이므로 모세를 사탄에게 내어주어서 잃어버렸던 아브라함이나 노아의 입장에 모세를 세워놓고 그를 다시 찾아오는 복귀노정을 걷게함으로써 잃어버렸던 노아나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40일을 복귀한 기대 위에 섰던 아브라함이나 노아의 입장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모세도 40년 간 사탄 바로와 싸워 사탄을 분립하는 기간을 탕감복귀치 않고는 바로궁중을 박차고 나올 수 있는 기대가 조성되지 않는다(행 7/21~23).

그러므로 모세는 40세에 애급에 대한 증오감이 극도로 비등하여 애급인을 쳐 죽이고 미디안 광야 40년 생애로 들어가 40년 바로궁중에서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사탄 40일 기대를 미디안 광야에서 하늘 40일 기대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80세에 출애급하게 된다(출 7/5~7). 애급에서 사탄과 싸워 400년 고역을 마친 이스라엘백성과 40년 바로궁중 생활을 거쳐 40년 미디안 광야생활을 마친 모세는 400년 기대 위에 섰던 아브라함이나 40일 심판기대 위에 섰던 노아와 같은 입장에 처 하게 되었던 것이므로 가나안복귀의 출애급노정을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기사로써 홍해를 건넘으로 바로의 병차를 완전히 괴멸한 이스라엘민족은 홍해를 분기선으로 하여 사탄을 완전 분리한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백성은 모세를 중심하고 하나님 뜻만을 완전히 받들어 사탄이 침범할 조건을 만들어서는 아니될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비난하여 정탐 40일의 결과를 믿음으로 넘지 못하였다.

12지파의 대표로 선출된 12인의 정탐보고를 듣도 놀란 이 백성의 태도는 하나님의 심정을 더욱 아프게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 가호의 은총을 입어 오직 기사와 이적으로 인도된 이 백성이 가나안족을 두려워하거나 여리고성의 견고함에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정탐보고를 듣고는 대성통곡하여 「어찌하여 여호와는 우리를 이 땅에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힐진대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으리오」(민 14/1~4)하면서 한 두령을 세워 애급으로 돌아갈 의논을 한 것이다.

이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한 20세 이상의 백성들을 전멸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에 강하고 담대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모세의 뜻을 계승하여 후손을 이끌고 허락된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 백성은 불신으로 말미암아 정탐 40일을 믿고 넘지못한 결과로 돌아가 사탄침범의 조건이 생겼으므로 하나님은 정탐 40일의 1일을 1년으로 계산하여 그 후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케하고 40년 간 유리고객시킴으로써 그들의 광야의 고난은 하나님을 싫어 버린 죄값임을 알게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민 14/29~34).

이와같이 이스라엘민족이 야곱 가나안복귀 21년의 수를 맞추기 위한 21일이면 넘을 수 있었던 광야를 40년이나 유리한 것도 불신으로 잃어버린 정탐 40수를 탕감복귀키 위함이었다.

다음으로 모세의 금식 기도 40일의 원리적 근거를 알아 보기로 하자. 말씀의 실체인 아담 해와가 타락됨으로 인간은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복귀원리란 인간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말씀의 목적을 복귀키 위한 재창조 역사인 것이다. 모세가 40일 금식기도로써 받은 말씀은 재창조의 말씀이다. 말씀이 두 석판에 기록되었음은 말씀의 실체인 아담과 해와를 상징키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잃어버렸던 아담과 해와를 복귀섭리로써 재창조한다는 상징으로서 두 석판의 말씀의 기록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반드시 사탄 분립의 40일 기대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원리이므로 재창조의 말씀도 이 기대를 조성치 않고는 부여될 수 없는 것이다. 40일 금식기도 후에서만 말씀(계명)을 받을 수 있다는 원리적 근거는 여기에 있다(출 24/18).

그러므로 모세가 받은 석판을 파함과 동시에 이 40일 기대수가 무너져 사탄을 내어준 결과가 되었으므로 다시 석판을 받기 위하여서는 재차 40일 금식기도를 반복함으로써 이 40일을 탕감복귀치 않으면 아니된다(출 34/27~28).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도 이러한 원리로서 불가피한 것이다.

즉 모세가 40일 금식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찾았다함은 이것도 다음 오실 예수께서 40일 금식으로 말미암아서 말씀의 실체된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함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것도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바로궁중에서의 열 번의 기사와 이적으로 세워야할 기준을 상실하였음으로 이 기준을 복귀하는 탕감조건으로 십계명을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다시 사탄과 짝하지 않았으면 십계명은 필요없는 것이다. 사탄이 재침범하였기 때문에 이 사탄을 재분립하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을 주신 것이다.

세례요한을 중심한 이스라엘민족들이 찾아 세워야할 40일 기대가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조성되지 못하였으므로 이 기대를 예수님 자신이 조성하기 위해 40일 금식을 단행하신 것이다. (후편 제7장 참조)

예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죄인들을 품었다고 말씀하셨다(마 23/37). 그러므로 이 기적은 신랑으로 오실 예수님으로 인한 신부성복귀를 표시함이니 즉 신부의 신이시오 해와의 신성이신 성신복귀에 의한 전인류의 신부성복귀를 상징하는 것이다. 다음엔 강수를 던져 피가 되는 기적을 보여주셨으니 이것은 생명없는 무기물(물)과 같은 존재가 생명있는 유기물(혈; 피)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물은 타락되어 생명을 잃은 세상사람을 표시하므로 (계 17/15) 이 기적은 생명을 잃어버린 세상사람을 예수께서 오셔서 생명의 자녀로 복귀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므로 자녀복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3종의 기적의 능을 보여주심은 이스라엘민족과 바로 앞에 설 수 있는 조건을 세우기 위함인 동시에 다음 예수 오셔서 행사하실 수 있는 기대의 조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성되어 신부된 해와를 맞아 하나님의 축복대로(창 1/23) 죄없는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 아담 해와 자녀 이렇게 사위기대를 조성해야할 것이었는데 타죄로 인하여 이것을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므로 이것을 복귀하는 탕감조건으로 모세를 중심한 이 세가지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으로 모세는 자기는 말씀을 할 줄 모른다고 말씀 대신존재를 요구했으니 이것은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 타락이므로 말씀완성자 예수님을 세워 말씀으로 창조된 대상실체 전부를 복귀한다는 뜻이다.

말씀의 대상실체는 곧 예수님과 성신을 이름이니 모세에게 말씀대신 아론과 (출 4/14) 여선지 미리암(출 15/20)을 주셨다함은 구약시대에 있어서의 구원의 말씀의 상징체인 두 석비와 그의 실체인 예수님과 성신을 보내실 것을 형상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뜻을 받들어 이스라엘 대신 속죄사명을 한 것은 다음 예수님과 성신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스라엘의 대신 속죄사명을 할 것을 표시한 것이다.
모세는 이러한 조건들을 찾아 세운 기대가 있으므로(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은 나의 장자라 내가 너더러 내 아들을 놓아 보내어 나를 섬기게하라 하여도 네가 놓아 보내지 아니하니 내가 네 장자를 죽이리라」(출 4/22~23)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처자를 데리고 길을 갈 때에 여호와 나타나 모세를 죽이려하니 처 십보라가 자식을 할례함으로 모세가 살아났다(출 4/24~26). 이것도 역시 할례로 인하여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이 살 수 있었던 것같이 다음에 할례의 근본목적 완수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이스라엘민족도 할례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근본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한다.

예수님으로 인한 할례라함은 물론 율법시대의 그 형식을 말함은 아니다. 이제 할례의 의의를 알아보자. 해와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음으로 영적 타락을 보았고 아담까지 주관함으로써 원리를 위반하여 내적타락까지 성립되었기 때문에 할례가 요구된다. 즉 양부를 통하여서 어둠의 피를 받아 타락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을 복귀하려면 양부를 쳐서 어둠의 피를 뽑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할례는 아브라함의 영원한 규례로 되어있어 이것으로 말미암아 남자의 주관성을 복귀하는 조건을 세운 것이다. 할례에는 마음할례(신 10/16)가 있고 육적할례(창 17/10) 만물할례(레 19/23)가 있다. 더럽힌 피조물로 하여금 그 창조본성을 복귀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니 그의 근본의의는 다음과 같다.
(1) 사망의 피를 빼는 표
(2) 남자의 주관성을 다시 찾는 표
(3) 근본 뜻의 자녀의 길을 다시 찾는 약속의 표

바로를 대하여 싸울 수 있는 이러한 제조건을 찾아 세운 모세는 바로와 대립하여 그를 굴복시키는 역사를 시작하였다. 라반이 열 번이나 야곱을 속여 괴롭게 하였으니(창 31/7) 야곱노정을 본보기로 걸어가는 모세도 열 번이나 이적을 행해도 바로는 점점 더 강퍅하여 열 번이나 모세를 속여 괴롭게 하였다(출 7~12). 그러면 하나님도 어찌하여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는가하면
(1) 택한 백성에 대한 사탄(바로)의 침략의 의사를 근절키 위함
(2) 사탄(바로)으로 하여금 자기의 무력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순종굴복할 것을 자각케하기 위함
(3) 원수의 모든 것을 멸하기 위함
(4)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는 망한다는 것을 자각케 하기 위함

바로를 강퍅케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주려는 것은
(1) 사탄(바로)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게하기 위함
(2) 바로 편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
(3) 이스라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같이하심을 알리기 위함
(4) 애급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미련을 끊게하기 위함
(5) 이스라엘백성으로 하여금 애급사람과 정을 통하는 자 없게하기 위함
(6) 하나님이 애급을 증오하는 정도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올라오게하기 위함
이렇듯이 바로를 승리한 이스라엘백성은 소망하던 이상이 이루어지는 곳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하였으니 이 노정은 세계적인 가나안을 바라고  나아가는 오늘날의 우리 신앙생활 노정을 표시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애급 편에 3일 간의 흑암이 있었고 이스라엘민족에게 3일 간의 광명이 있었음은 후일 예수께서 오시면 사탄편은 흑암이요 하늘편은 광명으로 분기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애급의 장자가 육축의 맏것을 쳤으나 이스라엘은 양피로 이것을 면하였다.

사탄편에 있어서는 장자는 가인이나 에서나 세라(태중장자)의 입장이므로 이를 쳐서 아벨이나 야곱이나 베레스(태중차자)의 입장에 있는 차자로 하여금 장자의 입장을 복귀케하기 위함이다. 이 재앙도 예수 오셔서 장자의 입장으로 섭리노정을 먼저 출발한 사탄 편은 멸하고 차자의 입장인 하늘 편은 예수님의 피의 대속으로 구함을 받는다는 것을 표시한다. 모세가 많은 재물을 취하여 온 것도 예수 오셔서 만물까지 복귀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바로를 굴복시킨 모세는 바로에게 3일기간노정의 거리에 가서 헌제를 한다고 속여서 (출 8/27)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하여가지고 나온 것이니 이 3일기간은 이스라엘민족에게 있어서 생사의 분기를 결하는 기간인 것이다.

이 자유허여의 기간이 없으면 이스라엘의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버린다. 이것은 야곱의 가나안 복귀섭리 노정에로 허여된 것이지만 예수 오셔서도 이 3일의 사탄 분립기간이 있어야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이 기간을 살아서 넘지 못하고 십자가로 인하여 무덤에서 3일기간을 지남으로 부활하여 영적세계와 가나안복귀만을 완성하였다. 애급을 떠나 3일기간을 잘넘은 후 의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는 생활로 들어갔으니 우리 신앙자들도 자기가 넘어야할 3일기간을 잘 넘고나면 이와같이 하나님이 친히 원리에 의한 간섭을 해주시는 권내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도피하였음을 알게된 바로는 병차를 동원하여 이스라엘민족을 따라갔다. 이 소식을 안 이스라엘민족은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이고 뒤에는 바로의 추병차가 따르니 크게 소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출 14/5~10). 모세는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지팡이로 홍해를 쳐 갈라세움으로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고 추격하던 애급병차는 전부 수장되었으니 (출 14/21~23) 이것도 예수님을 중심한 신앙생활의 노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앙자가 사탄 품을 떠나 예수 품으로 들어올 때에는 모세가 바로궁중의 영화와 인연을 끊듯이 우리도 우리의 모든 환경과 인연을 끊어야 하지만 끊어버린 다음에도 사탄은 마치 바로가 병차로 이스라엘을 추적한 것같이 신앙자를 추격하여오는 것이다. 그러나 지팡이된 예수님으로 그를 칠 때 우리 앞에 홍해와 같이 가로놓인 고해는 평탄한 길로 갈라짐으로 갈길이 열리고 따라오던 사탄은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에 호렙산 반석 생수까지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무조건으로 주어서 먹었으니 (출 16/13) 이것도 다음 예수 오셔서 인간의 생명의 요소인 예수님의 살(만나) (요 6/51)과 피(메추라기)를 무조건으로 주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시험을 거치면 이스라엘민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무조건으로 주시듯이 우리에게도 무조건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이렇듯이 무조건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백성 앞에는 아말렉족속의 공격이 있었던 것과같이 예수님의 생명 소생의 요소를 받은 신앙자에게도 그러한 시험이 또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심이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아말렉을 멸하여 사탄의 공격을 승리하여 사탄 굴복 자격자가 된 후에는 또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시내 광야까지 인도하신 것같이 (민 14/14) 신앙자들도 사탄시험을 승리하여 사탄까지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 후에야 근본 자녀의 입장을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은사가 부여되는 것이다. 모세노정에서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한 낮(+)의 구름기둥은 다음에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할 예수(+)를 표시함이요 밤(-)의 불기둥은 성신(-)을 말한다.

이스라엘이 르비듬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에 모세는 여호수아를 시켜 출전케하고 자기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아론과 훌과 같이 산꼭대기에 섰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승리하였다. 모세의 손이 피곤하여 아론과 훌이 돌을 쌓고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저희가 좌우에서 그 손을 붙들어 해가 지도록 흔들리지 않케하였더니 여호수아가 칼로 아말렉왕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였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아닛시(나의 기)라 하고 가라대 「손을 들어 여호와의 보좌(기)를 대적함이 있으니 여호와 아말렉을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출 17/15~16)고 하셨다. 하나님을 대신한 인도자로 나선 모세가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이 품으신다는 뜻이요 아론과 훌이 두 손을 붙든 것은 하나님의 품에 품길 수 있도록 협조한다는 뜻이다. 이 사실도 예수 오신 이후의 섭리의 경로를 상징하신 것이다.

여호수아는 신앙자를 대표함이요 여호수아 앞에 있는 아말렉은 신앙자 앞에 있는 사탄세계를 표시하는 것이며 아론과 훌은 예수와 성신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섰는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멸하였다는 것은 예수님과 성신의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품에 품기울 수 있는 은총을 받고 있는 신앙자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신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예수 오셔서 우리 인간에게 무조건으로 사랑을 세워주셨으니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산 자로 하여금 원수 사탄과 대립케하여 그 자체는 다시는 원수와 합하지 않게하려하심이 그 목적이다. 후일에 제1차 하나님적 책임분담 섭리의 기대 위에 제2차 책임분담 사명자로 오시는 예수와 성신이 신앙자와 하나되어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복귀하여야 아담 해와로 인하여 못이루신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복귀섭리를 완성한다는 것을 모세를 중심한 아론과 훌 또 그 앞에서 역사한 여호수아로써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이렇듯이 하나님이 직접 품으심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은 이스라엘민족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새 언약을 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열방 중에서 너희로 나의 보배를 삼아 제사장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게하리라」(출 19/5~6)고 하셨으니 이 말씀도 다음 예수 오셔서 대제사장으로 서실 때에 그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다윗왕의 위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군림하여 공평과 의로움으로 영영세세토록 통치하실 약속을 (사 9/6~7) 모세로써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는 장로 70인을 거느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보이셨다(출 24/9).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상에 부르시사 석판에 기록한 십계명을 받도록 명하시었다.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타락되었으니 이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뜻이 모세에서 민족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게 되었으므로 여기에 십계명의 말씀을 주셔서 재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기간인 6일동안을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이 시내산 위를 덮었고 안식일에 해당하는 제7일에 여호와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었으니 산 위에 나타난 여호와의 광영의 형상이 이스라엘백성의 눈에 불꽃같이 보이더니 모세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 40주야를 금식하였다.(출 24/15~18) 모세에게 주신 이 계명의 말씀은 타락인간에게 처음으로 주시는 재창조의 말씀이다. 인간 재창조의 역사는 노아 홍수심판과 같이 사탄을 분립시킨 기대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심판 40수의 사탄 분립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가장 인내를 요하는 기간이었으나 이스라엘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하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이루어지는 때는 그만치 사탄의 역사도 큰 것이다. 가인 아벨의 헌제 시에도 사탄이 문 앞에서 그들을 침범할 틈만을 엿보고 있었고(창 4/7) 노아 홍수 때도 물 위를 왕래하는 까마귀같이 사탄은 노아의 가정에 무슨 침범할 조건이 있는가고 찾고 있다가 함이 타락행위를 하자 곧 침범하였고 아브라함 헌제시에도 대기하고 있던 사탄은 제물을 쪼개지 않을 때 곧 침범하였으니 이와같이 사탄의 태도는 항상 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선이자 사탄 일선임을 알아야 한다. 잘 믿는 성도들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선에서 항상 사탄과 싸워야하므로 고난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새로운 섭리의 역사를 시작할 때에도 사탄은 더욱 이스라엘백성의 불신과 불순종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민족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모세가 금식 기도하는 기간 지도자 모세를 잃었다고 소동하면서 아론을 사주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로다」(출 32/4)하며 그렇게까지 기사와 이적의 권능으로 나타나 보호하셨고 사랑으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들은 또다시 사탄 품으로 들어간 것이니 무릇 인간이라는 것은 사탄에게 이끌리게 되면 이와같이 교활해지고 배은망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렇게까지 애쓰시어 불러세우신 세례요한이 이 이스라엘민족과 같은 입장에 서게되었다함도 가히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은 지도자 모세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 자신이 지혜로 찾아 나아가야할 5%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않으면 아니될 기간이었다.

그러므로 그렇게도 기사와 이적과 교시로써 소상히 가르치시고 인도하신 여호와이시지만 이 기간만은 마치 아담 해와의 타락행위를 간섭 못하신 것같이 이 민족의 타락행위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지혜를 찾아 맞추어야할 책임을 못할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에게 벌을 주시게되었으니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지라 너는 잠잠하라 내가 진노하여 저희를 멸하고 너로 큰 족속이 되게하리라」(출 32/9)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 때에 모세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춤추는 백성들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 가진 두 석판을 던져 파하였으므로 (출 32/19) 이스라엘을 중심한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는 다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된 것이다. 말씀으로 받은 두 석판은 말씀완성의 실체로 창조된 아담과 해와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말씀을 다시 모세가 두 석판으로 찾았다는 것은 잃어버린 아담 해와를 다시 실체로 찾을 수 있다는 표시이니 다시 찾은 이 두 석판은 곧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말씀이 기록된 두 석판을 믿어 구원을 얻었지만 신약시대에는 두 석판의 실체로 오신 예수와 성신을 믿어야 사는 것이다. (참고 중생의 의의)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는 두 석판을 파했다는 것은 다음에 오실 예수와 성신의 역사도 이스라엘이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보내신 본래의 뜻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다시 40일을 금식함으로 준비한 두 석판에 다시 말씀을 받았으니 (출 34/4, 27~28) 이것은 예수 이후에 저를 믿는 성도들에 의하여 메시아를 다시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한 터 위에 말씀의 실체적 완성자이신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구원의 섭리를 하신다는 것을 예시하신 것이다.

두 석판을 복귀한 모세는 다시 그 광채도 복귀하여 그 얼굴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이 이미 우상을 만들어 사탄 품으로 들어갔던 조건이 있으므로 사탄은 항상 미련을 갖고 이 백성의 뒤를 따르게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백성은 모세를 반역하여 애급에서 나온 것을 한탄하게 되었다.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할 새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다면 좋을 번하였도다 너희는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인도하여 이 광야에 이르러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하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를 애급에서 나오게하여 이 악한 곳에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종자나 무화과나 포도나 석류가 다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2~5) 하고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할 때에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떠나 회막 내에 이르러 엎드리니 여화와의 광채가 저희에게 나타나 형 아론과 더불어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회중과 짐승들을 먹이라고 명하시었다(민 20/7~8). 모세는 명대로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두 번 쳐 물을 내어 먹였는데 여호와는 곧 이르기를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를 거룩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인도하여 내가 너희에게 준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민 20/12)고 모세의 실수로 인하여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다른 성구를 인용하면 「아론이 그 열조에게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라」(민 20/24)고 하셨고 또 「여호와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산에 올라가 내가 이스라엘자손에게 준 땅을 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이 조상에게로 돌아감과 같이 너도 돌아가리니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하매 물 가에서 저희 목전에 나를 거룩케할 것이어늘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함이라 이 물은 신광야에 있는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라」(민 27/12~14)고 기록한 것을 보면 므리바물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사실을 분명히 밝히었다.

그러면 이 실수는 무엇인가하면 한번 쳐야할 반석을 두 번 친 연고다. 반석을 두 번 친 행위가 왜 그다지도 중대한 범죄행위가 되었는가하는 것도 모세의 행사는 탕감복귀섭리의 전체적 표시로 된 중심역사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명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을 보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고 그리스도는 제2 아담으로 오신 분이시다(고전 15/45, 롬 5/14). 그러므로 반석은 제2의 아담을 상징하는 동시에 제1 아담도 표시한다.

그러면 어찌하여 아담된 반석을 한번 치는 것은 허락하셨는가하면 사탄은 반석된 아담을 쳐서 타락시켰기 때문에 하나님도 타락한 아담을 표시하는 반석을 한번 쳐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으므로 한번 치는 것은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모세가 치기 전 샘물 내지못하는 반석은 타락한 아담을 표시하는 것이요 이것을 하늘 편에서 한번 친 후의 샘물 나는 반석은 복귀한 아담 즉 제2 아담된 예수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반석을 두 번 쳤다는 것은 샘물 나는 반석을 또 한번 쳤다는 것이니 즉 생명수 샘물을 내는 반석으로 오신 복귀한 아담된 예수님을 다시 쳤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한 이 모세의 행동은 곧 다음 오실 예수님도 이스라엘이 불신의 입장에 서게 되면 그를 다시 칠 수 있다는 표시적 행동이 된 것이다. 이렇듯이 잃었던 반석을 다시 찾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한번 칠 것을 허락하신 것인데 한번 침으로 찾아진 반석을 다시 침으로써 다음에 반석의 실체로 오시는 예수님 앞에까지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허락한 바가 되어 아브라함의 제물실수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모세는 반석을 한번 쳐도 샘물이 나온다는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두 번 친 것은 이스라엘의 원망으로 인하여 그의 혈기로써 하나님의 뜻을 반하여 친 것이므로 모세가 친 행동이지만 결국 그것은 사탄이 친 것과 같은 결과가 되어버렸다.

이렇게되어 돌은 사탄이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스라엘이 불신의 입장에 서게 될 때 예수님은 이 돌을 찾으려고 광야로 나가신 것이다. 사탄은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돌은 찾지말고 돌로 떡이나 되게해 먹으라는 시험을 예수님에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받은 광야의 시험은 이와같이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볼 수 있는 몸으로 나타나신 분이므로 그리스도를 표시하는 석판은 하나님의 볼 수 있는 몸을 표시하는 것이요 석판의 뿌리되는 반석은 그리스도에게 현현된 하나님의 내적성상과 형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두 석판은 다시 찾을 수 있으나 석판의 뿌리되는 반석을 치는 행동은 하나님 자신을 침범하는 표시적 행동이 되어 만회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행동은 사탄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으로 남아진 것이다.

모세노정은 예수님의 표시적 노정이므로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반석을 쳐야할 입장에 놓여 반석을 두 번 치는 결과가 초래된 것같이 반석된 예수님도 이스라엘이 불신하면 사탄이 그를 쳐 십자가에 돌아간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의 원인은 모세노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행한 열 재앙을 비롯하여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하였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의 기아를 멈추었으며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갈길을 인도하신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상히 지도해주신 하나님이셨지만 모세가 반석을 치는 일에 관하여서만은 간섭치 않으셨으니 이것은 모세 자신이 지혜로 넘어야할 책임분담이었기 때문이다. 모세 자신이 이 5%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복귀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을 것이었으나 이제 모세가 이 책임분담을 완수치 못하여 사탄이 재침범케되니 400년 애급고역의 사탄분립 기대 위에서 이루어 나오던 이스라엘의 가나안 복귀노정에도 사탄이 재침범하고만 것이다(민 20/12). 그러므로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백성의 이러한 불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불뱀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하셨다」(민 21/6)고 말씀하셨으니 이 뱀은 해와를 타락시킨 옛 뱀(계 12/9)을 말한다. 아무리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라 하더라도 인간에게 사탄이 침범할 조건만 성립되면 사탄에게 내어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뱀을 보내어 백성을 물게하심이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본의는 아니지만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어있으므로 하나님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뱀으로 말미암아 죽었으나 모세의 말을 믿고 그가 장대 끝에 단 구리뱀을 바라본 사람은 누구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으니 이것도 역시 앞으로 예수께서 오실 때에 저를 믿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에는 다시 사탄뱀이 침범할 것이요 이 백성이 다시 살려면 십자가에 달린 하늘뱀된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이렇듯이 불순종의 백성들은 전부 광야에서 쓸어지고 애급에서 나온 사람 중에는 믿고 따른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후손을 인도해 가지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그런고로 이 사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믿고 순종하는 자만이 기업으로 받을 곳이라는 것을 표시하며 또 우리 이상천국도 믿고 따른 자만의 소유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에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은 사랑이상의 행복이 넘친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여 기업을 받게된 것은 가나안족속을 멸한 후에야 완성된 것이니 이것 역시 예수 오셔서 하늘나라를 건설함에도 그렇게 원수와 싸워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모세노정이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표시적노정이라 했으니 모세는 예수님의 전형이다(행 7/37). 모세는 그의 출생부터 벌써 예수님의 출생의 본보기로써 예시하신 것이다. 모세는 출생하자 바로왕의 손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그 모친이 그를 숨겨 3개월을 키운 후에야 바로궁중에 들어와 원수의 손에서도 완전히 성장한 것이다. 모세의 출생부터 그의 출애급노정 전체가 그러했지만 모세의 말로도 역시 예수님의 말로를 표시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심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복귀를 완성케 하기 위한 것이 예정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못하므로 모세와 그 백성은 전멸되어 영적으로만 복귀하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영육 아울러 실체로서 모세의 뜻을 계승하여 이스라엘의 후손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복귀했으니 이것도 다음 예수 오실 때 될 일을 예고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심은 모세와 같이 예수로 하여금 전인류를 영육 아울러 복귀케함으로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수코자함이 예정이었으나 이스라엘백성들이 저를 믿지 아니하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가시어 모세와 같이 영적 복귀만을 완수하고 육적 복귀사명은 다하지 못하게 되므로 마치 모세의 뜻을 여호수아와 갈렙이 계승하여 가나안복귀를 완성한 것같이 예수께서도 재림하셔서 초림시의 뜻을 신부와 더불어 계승하여 영육구원을 완수함으로 후손된 인류의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수한다는 것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모세의 뜻을 계승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예수님의 뜻을 계승완성할 재림주와 신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노정을 보아서도 아무리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라할지라도 그 뜻을 받드는 인간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정사실이 아니라는 것과 재림 예수는 육신 쓰고 땅으로 탄생하셔야된다는 논거가 확실하여지는 것이다.

제2절 사사시대(400년)           
 
이스라엘민족이 애급에서 400년간 고역하여 민족적으로 심판 40일 기대를 탕감복귀하였으므로 이 기대 위에 선 모세는 노아로부터 400년 기간을 탕감복귀하여 개인적인 40일 탕감복귀기대 위에 선 아브라함과 동일한 입장에 처하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애급고역 400년의 재탕감기간이 남아진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불신과 모세 반석 2타로 인하여 사사 400년의 재탕감기간이 또 남아지게 된 것이다.

복귀기대섭리시대의 2000년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시대가 복귀섭리시대의 2000년 기간이므로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600년을 탕감복귀키 위하여 애급고역시대가 있었으므로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기간을 탕감복귀키 위하여 사사400년 기간이 오게되는 것이다.

모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민족들이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여 그들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였다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들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 곧 성전을 건설하였을 것이었으며 이와같이 조성된 믿음의 기대 위에 메시아는 오셔서 창조이상의 세계는 그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의 뜻이 이삭을 거쳐 야곱에서 이루어져 요셉으로부터 애급고역시대가 시작된 것과 같이 모세로부터 이루려던 뜻이 좌절되었으므로 이 뜻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거쳐 웃니엘로부터 사사시대는 시작되는 것이다.

가나안복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모세를 대신하여 나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너는 이제 일어나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요단강을 건너 내가 네 조상에게 허락한 땅을 얻으라는 격려로써 인도하시었다(수 10장).

마치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 앞에 홍해가 갈라지듯이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 앞에 요단강은 갈라졌다. 이 때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이스라엘자손 중 매지파에서 한사람씩 예비한 12인을 불러 매 지파를 대신하는 돌 하나씩을 세우게 하시고 이것은 언약궤 앞에서 요단강이 갈라진 것을 후손에게 알리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수 4/1~9).

여기에 언약궤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말씀이요 돌은 그리스도요(고전 10/4) 강수는 타락세상(계 17/15)을 이름이니 강수가 갈라졌다는 것은 심판에 의하여 죄악세상이 산양과 면양으로 갈리운다는 뜻이요 이러한 기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돌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행사로 앞날의 섭리를 암시한 것으로서 12지파를 중심하고 돌로써 성전을 건설할 것을 보여줌이요 따라서 실체성전된 예수께서 오셔서 될 일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언약궤)앞에 전개될 심판은(강수가 갈라짐) 12지파를 대신하여 세운 12제자를 중심한 그리스도(돌)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후손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선 이스라엘민족들은 성문을 견고하게 닫고 있는 여리고의 사탄성벽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이제는 40년이나 내리시던 만나도 그쳤으므로 인간의 땀으로 된 곡식으로 생활해야될 것이며 최후의 관문을 돌기 위하여는 인간으로서 할 책임을 다해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4만의 병사가 선두에 진군하고 그 뒤를 따라 제사장 7인이 나팔을 불면서 행진하고 그 뒤에 언약궤가 따르고 최후선에는 이스라엘 전군이 행진하였다(수 6/1~9).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하루에 한번씩 매일 나팔을 불면서 6일인 성을 돌아도 아무 변동이 없었다.

이스라엘민족은 이제 끝까지 믿고 복종해야할 입장에 선 것이다. 6일째 창조된 인간을 사탄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6수는 잃어버린 불길수다.

6일을 찾아야겠기에 6000년을 걸려 여기에 여섯 번이나 돌았으니 6수를 찾았으므로 7일째 되는 날 나팔 부는 7인의 제사장을 위시한 이스라엘민족이 성벽을 7회를 돌면서 7회의 나팔소리를 끝내자 「부르라 여호와 너희들에게 이 성을 주셨나니라」고 부르는 호령에 의하여 전 여리고성은 붕괴된 것이다. 이 기사는 하늘과 땅 사이에 막혔던 장벽이 무너졌음을 표시하는 기사이므로 이 성벽은 다시 쌓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시 건축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 정초할 때에 장자가 죽고 입문할 때에는 그 차자가 죽으리라고하셨다(수 6/26).

제사장의 나팔소리에 여리고성이 무너졌다함은 끝날에 천사장의 나팔소리에 사탄세계가 멸망한다는 뜻이요 천사장의 나팔소리는 끝날에 선포되는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표시하는 것이니 나팔소리로 여리고성이 붕괴된다는 것은 말씀심판에 의하여 사탄세계가 괴멸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끝날의 불심판은 곧 말씀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전편 제3장 참조)

이와같이 파죽지세로 사탄세계를 멸하는 여호수아는 벳호론 싸움에서 19왕을 멸하고 메롬격전에서 12왕을 멸하였으니 (수 10~12) 이것도 끝날에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실 때에 이방의 왕들이 전부 폐하게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민족은 점령한 땅의 만물할례를 행하고 이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였으니 이것도 끝날에 이루어질 것을 그대로 부여주신 것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갈렙을 중심하고 이스라엘민족은 가나안의 잔족을 토평하기에 힘썼다. 갈렙이 드빔을 공격할 때에 그 딸 악사를 현상으로 걸어놓고 독전하였는데 웃니엘이 역전하여 득승하매 악사를 취하여 갈렙의 사위가 되었으니 이가 첫 사사가 된 것이다.

애급을 나선 이스라엘민족은 홍해를 분기점으로 하여 사탄과는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불신은 또다시 사탄 침입을 초래하여 사탄은 이스라엘민족을 따라서 가나안 복지까지 들어온 것이다.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가나안땅에 있는 이방인들을 전멸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일 너희가 그 땅의 주민을 축출하지 않으면 잔존한 자가 반드시 너희 눈 가운데 가시와 옆을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할 것이요 또 내가 저에게 행하려한 것과 같이 너희에게도 행하리라」(민 33/55)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그들을 용납하였으므로 사탄의 무대는 점점 더 넓어져서 이 싸움은 사사를 중심하고 400년간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하여금 애급에서 나오게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에 들어가게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약속을 영원히 위반하지 아니하리니 오직 너희는 이 땅 거민으로 더불어 약속을 세우지말며 그 제단을 헐라하나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그런고로 내가 전에 말하기를 반드시 이 백성을 너희 앞에서 축출하지 아니하리니 저희가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되며 저희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도다」(삿 2/1~3)라고 말씀하시어 그들의 불신을 책하셨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자손이 남겨준 가나안 헷 아모리 브레스 히위 여브스족과 동주할 새 그들로부터 악습관이 전염되어 바알과 아세라우상을 섬기며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순수한 선민으로서의 신앙과 혈통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인들에게 붙여 다시 애급고역과 같은 탕감기간을 주신 것이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사가 나와 마치 모세와 같이 그들을 인도해내는 것이다. 이런 것을 반복하는 약 400년 기간을 사사시대라고 한다.

야곱을 중심하고 12자식이 있고 모세를 중심하고 12지파가 있고 성전을 중심하고 12소선지가 있고 예수님을 중심하고 12제자가 있듯이 사사로 삼손을 중심하고 12사사가 있어야할 것인데 삼손으로 종결되지 못한 뜻은 다시 엘리와 사무엘로 연장되어 결국은 15사사가 되었으니 마치 아브라함 뜻이 이삭과 야곱으로 모세의 뜻이 여호수아와 갈렙으로 사울왕의 성전건설의 뜻이 다윗왕과 솔로몬왕으로 아담의 뜻이 예수와 재림주로 연장된 것과 같다.

이와같이 삼손은 12사사의 결실로 출생했기 때문에 그는 야곱이나 모세나 솔로몬왕이나 예수와같이 모태로부터 성별되었으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처에게 나타나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마땅히 너는 포도주와 독주를 삼가 마시지말다가 아들을 낳거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말라 이 아이는 모태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자니 장차 「이스라엘」을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삿 13장 2~5)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마치 아담이 해와에게 꼬임을 받듯이 삼손이 그 처의 꾀임에 빠져 머리를 깎이우고 눈알이 뽑히워 12사사의 목적을 완수해야될 택함을 받은 삼손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제3절 통일왕국시대(120년)       
    
사울왕조와 솔로몬왕조로써 복귀섭리의 한 기간을 담당한 시대가 통일왕국시대다.
사사시대의 말엽 삼손이후는 정치가 점차로 정돈되었는데 특히 사무엘의 지혜로운 통치는 이스라엘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게하였다. 사무엘이 연로함에 이스라엘민족이 사무엘에게 청하여 왕을 세워 자기들을 다스리게하여주기를 원하니 사무엘이 이 뜻을 여호와께 고하여 명을 받고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 사람이 이스라엘민족의 초대의 왕이 되었다(삼상 8/19~22, 10/1~24).

사울은 하나님이 특히 불러 기름부은 왕이었으나 그는 번번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않았다. 특히 아말렉 사람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큰 승리를 얻었을 때 하나님은 당시의 제사장이요 또한 선지자인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을 쳐서 그의 전 소유를 몰수하고 남녀노유와 우양태려를 용서없이 전멸하라고 하셨으나 사울왕은 포로된 아말렉왕 아각도 죽이지 않고 우양의 살찐 놈은 아껴 감추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사무엘에게 임하여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 왕삼은 것을 후회하셨다고 하였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며 거역하는 것이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이 사신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으니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하는 고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거절하여 왕이 되지못하게 하셨다(삼상 15/9~23)고 말씀하셨다. 사울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의 용장 다윗을 죽이려고 무쌍의 노력을 하였고 다윗으로 인하여 대제사장과 제제사장을 살해하였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거역하였으므로 사울왕은 드디어 불레셋 사람들의 살에 맞고 발금자살하였으니 재위 40년에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뜻을 이루지 못하고 향수 70년을 일기로 가련한 생애를 마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울왕을 세우신 원리적 의의는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애급고역시대를 탕감복귀하는 기간이 사사시대요 애급고역시대를 거쳐 이스라엘민족 광야40년의 사탄침범기간을 하늘 편으로 찾아 세우려는 기간이 사사시대를 거친 후의 사울왕 40년 기간이다.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가 되었다면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광야40년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을 하늘 편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사울왕 40년 기간이 있어야할 것인데 사울왕이 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이 기간은 다시 사탄에게 내어준 결과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 하여 믿음복귀의 뜻이 이삭을 거쳐 야곱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사울왕의 반역행위로 인하여 성전이상복귀의 뜻은 다윗왕을 거쳐 솔로몬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가 가나안복지로 들어와 성전을 건설하려던 뜻은 그의 불신으로 인하여 사사시대와 통일왕국시대를 거쳐서야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왕국시대는 광야 40년, 시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있어야할 기간이므로 탕감복귀의 뜻을 중심하고 생각하면 통일왕국 120년은 광야40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사울 왕 40년을 재탕감키 위한 사명자로서 다윗왕은 부름받았던 것이다.

사울왕이 아말렉 싸움에서 불순종한 후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시켜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의 계자 다윗에게 왕으로서의 기름을 붓게하셨다.

다윗은 쌍모도 형연한 홍안의 미남으로 유시로부터 담략과 용맹이 비범하고 적막한 광야의 목자생활에서 길리운 경건한 심정에서 울어나오는 시상과 낙상이 넘치는 호협남아였다.

그 유명한 시편은 그의 천품의 묘사요 성서의 금과옥조인 것이다. 다윗이 자기는 백향목궁에 거하나 하나님의 법궤는 장막에 있음을 황송하게 생각하여 금은동철과 각종 재목을 예비해놓고 성전을 건축할 뜻을 선지자 나단에게 상의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많은 전쟁에 유혈이 심하였다 하여 이것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네 살 날이 다 차서 네가 너의 조상들로 더불어 같이 잘 때에 네게서 나서 네 뒤를 이을 자손을 내가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니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지을 것이다」삼하 7/1~1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같이 성전건설의 뜻은 그의 아들 솔로몬왕에게로 연장된 것이다.

하나님이 다윗왕에게 약속하신대로 솔로몬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더불어 즉위의 대전을 행하였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정교의 숙청을 을 단행하고 신내각을 조직하여 국정에 내우외환을 없이 함으로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황금으로 된 방패가 500개요 그의 사용하는 모든 기구는 금과 은으로 되었고 정사당을 세우고 보좌를 만들되 6층대요 그 위에 놓인 침상은 상아로 꾸미고 금으로 쌌으며 6층대 좌우에 있는 12사자와 침상 좌우에 있는 사자 둘은 금으로 만들었으니 이로써 솔로몬이 축복받은 부귀의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3왕조에 걸친 120년 기간은 광야 40년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있었는데 복귀기대섭리시대에 있어서의 어떠한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 시대가 있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기간을 탕감복귀키 위하여 애급고역시대가 있었고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기간을 탕감복귀키 위하여 사사 400년 시대가 있었고 다음엔 주전 1928년에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난 후 이삭을 거쳐 주전 1811년에 야곱이 떡과 팥죽으로 에서에게서 장자의 기업을 빼앗을 때까지의 약 120년 기간이 있었는데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통일왕국시대가 생기게된 것이다. 사울왕은 아브라함을 다윗왕은 이삭을 솔로몬왕은 야곱을 상징하며 아브라함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뜻이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이루어진 것같이 사울왕 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성전건설의 뜻이 다윗왕을 거치어 솔로몬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함은 이미 상술한 바와 같다.
 
   I .성전이상을 중심한 복귀섭리          
솔로몬왕은 드디어 이스라엘자손이 애급땅에서 나온지 480년만에 성전건축을 시작하였으니 (왕상 6/1) 이것은 그들이 애급에서 떠난 후 광야 40년과 사사 400년과 뜻으로 본 통일왕국시대 40년을 경과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노아로부터 세우려던 믿음의 조상의 뜻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이루어진 것같이 모세로써 이루려던 성전 건설의 이상은 사울왕과 다윗왕을 거쳐 솔로몬왕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이것도 사위기대를 복귀키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함이 그 목적이다. 왕을 세우시어 성전을 건설하심은 다음에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키 위함이다.

사울왕을 세우심은 제1차 왕격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며 사울왕에서 이루려던 성전이상을 완성한 솔로몬왕은 아담이 이루려던 창조이상을 완성할 왕으로 오실 재림주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다윗왕은 예수님의 상징자이므로 예수님은 다윗왕의 위를 가지고 오시는 평강의 왕이라하였고(사 9/6~7) 「볼지어다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하라 저가 크게되고 지극히 높은 자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주시리니 세세로 야곱의 집에 왕이 되사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고 하셨다.

다윗이 30세에 왕이 된 것같이 예수님도 30세에 만왕의 왕으로 출발했으며 다윗왕이 성전을 건설하려다가 건설할 수 있는 모든 준비만 하여놓고 죽은 것같이 예수님도 창조이상을 완성하려다가 다음에 완성할 수 있는 영적구원의 기대만을 조성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재림주는 솔로몬왕격으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영광의 왕으로 오시는 분이시다. 성전을 건설한 이후 솔로몬왕이 또 타락되었으므로 성전이상의 기대에는 또 사탄이 침범하게 되어 다시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사탄재분립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 오실 때까지는 이 성전이상을 복귀하려는 섭리노정이 공식적인 프로젝트에 의하여 전개되는 것이다.

   II .복귀섭리로 본 성막의 의의       
        
시내산 40일 금식 기도기간에 모세는 계명을 받음과 동시에 성막 건설의 명을 받았다(출 25/1~). 이것은 장차 실체성전인 예수께서 오실 것을 상징역사로써 보여주신 것이요 솔로몬이 그 기대 위에 성전을 지은 것은 오실 예수님의 형상역사로써 보여주신 것이고 이 성전역사의 열매로 오신 분이 바로 실체성전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기를 성전으로 비유하셨다(요 2/21). 성전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와 보통 제사 때에 들어가는 성소의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지성소는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영인체를 상징함이고 성소는 예수님의 몸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지성소는 하늘 무형세계를 성소는 지상 실체세계를 상징한 것이므로 성소와 지성소가 일체를 이룬 성전은 하늘과 땅의 일체 이상을 완성한 존재를 나타나신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는데 그 위에는 속죄소도 덮었고 속죄소 좌우에는 두 그룹을 금으로 쳐 만들어 속죄소를 덮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두 석판을 법궤 속에 넣으면 두 그룹 사이 속죄소에서 여호와 나타나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 모든 명령을 교시하시겠다고 하셨다(출 25/16~22).

이 법궤도 장차 오실 예수와 성신을 중심한 복귀섭리와 모형을 보여주신 것이니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은 복귀한 아담 해와 격으로 오신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는 것이며 성신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게되면 거기에 속죄가 성립되고 하나님은 속죄한 곳 즉 속죄소에 나타나시므로 인간 시조의 타락 후에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길을 막았던 그룹을(창 3/24) 좌우로 갈라헤치고 생명나무(예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즉 복귀 섭리를 완성함으로써 하나님은 자기의 몸으로 나타나신 예수와 성신을 통하여 각 사람의 죄를 속하신 후에 성전된 각 사람의 마음에까지 찾아와 계시고자 하시는 뜻을 알려주시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이러한 기대를 조성하시는 존재로 오실 것과 누구든지 성전된 예수님과 일체를 이루면 그도 또한 하나님을 모시어 하늘(지성소)과 땅(성소)의 일체적 이상을 완성한 본성의 성전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둘로 갈라졌다함은(마 27/51) 지성소와 성소가 하나됨으로써 하늘과 땅이 하나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니 이것은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화동의 중심으로서 성전이상을 완성한 실체 성전으로 오셨음을 형상 성전으로써 보여주신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아말렉을 쳐 승리한 후에야 성전 건설의 시작을 명하셨으니 이것은 후일의 신앙자들도 원수 사탄을 승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 후에야 각자가 성전으로서 설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고전 3/16).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나무된 예수님에게 접붙임으로써 각자도 생명나무가 되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성전으로 완성되는 것이 최후의 목적인 것이다.

 제4절 남북왕조 분립시대(400년)      
  
이와같이 모세에게 이루려하셨던 성전건설은 솔로몬 왕에서 이루어졌으므로 하나님적 책임분담의 사명은 제1단계를 짓게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민족에게 남아진 유일한 과업은 성전을 중심하고 그들이 하나되는 것이다. 성전이 요구하는 뜻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뜻대로 사는 것이 이스라엘 전생명의 기본이 되며 그 이상완성의 첩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백성이 성전의 뜻을 높이며 그것을 중심하고 하나되어 각자가 분성전으로 세워져 다음에 실체성전된 예수께서 오시면 그와 접하여 한 몸을 이룸으로 각자도 실체성전으로 조성되어 메시아의 이상을 완수토록 하려는 것이 구약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 반면으로 사탄은 기묘한 수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수를 뻗쳐 그들을 불신과 불순의 길로 몰아넣어 그들의 분열을 조장시킨 것이다. 인간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음란의 신을 봉사하는 방향으로 흘러 성전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이 정경을 보시는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이야 누가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인가.

성전이상을 완수하기 위하여 부름받은 솔로몬왕이었으나 일찍이 역사상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강을 이루게되니 다시 타락의 일로를 걷게된 것이다. 그가 애급왕 바로의 공주 외에도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등으로부터 여인들을 취하니 왕비가 700이요 빈궁이 300이었다. 솔로몬 왕이 그들에게 유혹되어 시몬의 신 암몬의 신 모압의 신 등을 따라 그들의 신당을 짓고 이에 분향하였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은 진노하여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아사 네 신하에게 주리라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왕상 11/1~13)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솔로몬왕국은 10지파와 2지파로 분열되어 10지파는 애급에 망명해있던 여로보암을 세워 북조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하고 2지파는 솔로몬왕의 아들 르호보암을 세워 남조 유대왕국을 건설하였다. 즉 예언의 말씀대로 솔로몬 왕국을 열분하여 하나는 신하에 내어주어 가인적인 왕국을 세웠다.

그러므로 북조는 260년 간에 19왕이 있었고 살륙에 의하여 왕실이 9차나 변혁되었고 열왕중에는 한사람도 선한 왕이 없어 어느 왕이나 거의 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는 자란 이름을 마치 익호와 같이 받았던 것이다.

이 열왕들은 국민을 유혹하여 우상을 숭배케 하였으므로 전국민은 사도로 흘러 그의 비참한 상태는 어느 사기에서도 그 유례를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남조는 솔로몬왕의 아들 르호보암으로부터 시드기아에 이르기까지 다윗으로부터 정통1계이며 394년 간에 긍하여 20인의 왕중에는 선군이 많이 났으며 그 중에도 특히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등 4인의 유명한 선군이 있었다. 마치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가인과 아벨로 분립하였고 이삭에게 사탄의 미련이 남아있으므로 에서와 야곱으로 갈라서 사탄을 분립시키려고 하셨던 것과 같이 솔로몬왕이 범죄하므로 이 왕국을 남북으로 갈라세웠으니 이제는 가인의 입장에 있는 북조 이스라엘은 아벨의 입장에 있는 남조 유대에 굴복하지 않으면 장자기업을 복귀한 에서와 야곱의 입장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대로부터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제단이 갈라지는 이적을 보여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듣지않고 도리어 그를 잡아죽이려하였고(왕상 13장) 엘리야와 같은 선지를 보내어 제단에 불을 내리우며 850의 바알선지자를 멸하여 그들을 회개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그를 체포하여 살해하려 하였고 (왕상 18/19~40) 엘니사 요나 호세아같은 선지자들도 보내었으며 유대의 아모스같은 선지도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중심지인 벳엘로 보내어 목숨을 내어놓고 전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을 중심한 전국민이 그들을 바로의 강폭한 손에서 구출하사 가나안 복지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잊고 이방인의 규례를 따라 우상들에게 분향하며 그를 숭배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지 않고 선지자들을 주시어 권고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금송아지 일월성신 아세라 바알을 여전히 숭배하고 자녀를 분헌하며 사술과 복술을 일삼아 회개치 아니하므로 하나님은 그를 진노하시어 종시 앗수르에 포로로 내어주어 이방인과 교혼까지 하게되니 그들은 영원히 선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왕하 17/17~23). 이와같이 북조 이스라엘은 야곱에게 굴복한 에서의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아벨을 죽인 가인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남조유대도 요시야왕 이후에는 악한 왕들이 속출하여 북조의 악감화를 받아 우상숭배에 빠지게되니 남조 역시 북조와 같은 노정을 취하여 바벨론에 포로를 당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남조유대도 장자기업을 복귀한 야곱의 입장에 서지못하고 가인에게 살해된 아벨의 입장에 서게되어 성전이상을 완수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다시 이것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그들은 사탄세계인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가서 사탄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남북왕조 분립시대가 오게되는 것은 솔로몬의 타죄에 연유한 것이지만 또 한편 이 시대는 복귀기대 섭리시대의 어떠한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있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후 야곱이 팥죽과 떡으로 에서에게서 장자기업을 빼앗을 때까지 120년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통일왕국시대 120년 기간이 있었다. 이삭에서 사탄의 미련을 청산키 위하여 야곱이 에서로부터 장자기업을 빼앗은 후 에서와 야곱이 서로 분리되어 40년 간을 싸우다가 드디어 야곱은 1대복귀의 하늘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란 광야로 출발하였으므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솔로몬왕조가 400년 동안 남북조로 분리되어 서로 싸우는 남북왕조 분립시대가 오게된 것이다.

다음으로 4대선지와 12소선지가 이 시대에 오게되는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사위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탕감복귀섭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상술한 바와같다. 그러므로 아담가정도 아담과 그 세 자식을 세워 사위중심으로 역사하셨고 노아를 비롯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렇게 사위중심이요 성전이상을 완수하시는 것도 모세를 비롯하여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 이렇게 사위중심으로써 이루려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사위중심으로 이루려하셨던 성전이상이 왕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 뜻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4대선지가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중심한 3제자로써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모든 구원의 역사를 일으킨 원인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12소선지가 오지않으면 아니될 원리적 근거를 알아야할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0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노아로부터 10대를 경과하여 아브라함을 찾았으나 아브라함이 제물실수로 인하여 이삭 야곱으로 연장되어 12대가 된 것이다.

그 제물실수는 12대를 사탄에게 내어주게하였으므로 이 12대는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야곱의 12자식이 나오게하였다. 이제 12지파를 중심한 성전이상의 모세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삼손을 중심한 12사사가 있었으며 이 뜻이 다시 솔로몬 왕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 성전이상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12소선지가 나와서 사탄을 분립시켜 우상숭배를 타파하려한 것이다.

 제5절 이스라엘민족 포로시대(70년)

위에서도 이미 상술한 바이지만 아담으로 침입된 사탄을 분립키 위하여 가인 아벨로 갈라세우고 역사하신 것같이 솔로몬왕의 타락행위로 말미암아 침입된 사탄을 분립키 위하여 남조와 북조를 갈라 세우고 모든 선지들을 보내시어 예언과 경고로써 남조를 하나님의 뜻가운데 세워놓고 북조는 남조의 뜻을 따르라고 권고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지않으면 가인과 아벨의 본연의 입장을 복귀한 에서와 야곱의 민족적인 입장을 탕감복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조의 열왕은 모두 우상숭배로써 멸망하여 선민으로서의 자취를 완전히 감추어 버렸고 따라서 남조 유대로 요시야왕의 므깃도전에서 죽은 후의 열왕들은 모두 혼암하여 우상숭배에 더러워지고 인민들도 공공연하게 범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와같이 솔로몬왕의 타죄로 인하여 이루어 지지않은 성전이상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남북왕조 분립시대의 400년 간의 섭리도 또한 사탄에게 내어주게 되었다.

솔로몬왕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그 나라는 열분하였지만 다윗과 이스라엘선민을 위하여 한 지파를 남겨두시마고 하신 약속에 의하여 세워진 이 남조유대도 다시 사탄세계에로 내어주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이와같이 유대의 불신으로 인하여 성전은 파괴되고 유대는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가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에레미아는 담대하게 예루살렘의 함몰과 파멸은 면치못할 것이니 속히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권고하였으니 이것은 새로운 탕감복귀섭리시대의 노정을 걷지 않을 수 없는 이스라엘민족의 운명을 예언한 말씀이다.

그러나 예레미아는 도리어 국적으로 몰리어 투옥을 당하게까지 된 것이었다(렘 37/1~15). 이와같이 유대인들은 기원전 605년에 제1회 포로로서 여호야김왕을 비롯하여 다니엘과 기타 왕족과 귀인의 자질들이 잡혀갔으며 성전기명도 노략하여갔다. 제2회 포로로서는 기원전 604년에 여호야김왕을 비롯하여 태후와 정부대신과 방백과 관리와 용사 7000과 공장 1000 등을 포로로 잡아갔고 제3차 포로로서 시드기아왕을 체포하여 눈알을 뽑아 바벨론으로 압송하였고 바벨론 군대로써 예루살렘성을 파훼하고 성전을 위시하여 많은 건물을 소각하고 귀족과 청년과 공장들을 전부 압송하였으니 이 때가 기원절 593년이었다.

이와같이 솔로몬왕에 의하여 건설된 성전이 무너졌으므로 성전복귀를 위한 재탕감기간으로 전에 이스라엘민족 앞에 있었던 애급고역시대와 같은 포로시대가 남아지게된 것이다.

또 한편 이 시대는 복귀기대섭리시대에 있어서의 어떠한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시대인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야곱이 에서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빼앗은 후 하란 광야로 출발할 때까지 에서와 싸우던 40년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남북왕조 분립시대 400년이 있었다.

그러므로 야곱이 광야로 간 후 라반이 집에서 레아를 취하게 되는 것으로 사탄상징자인 라반으 요구를 채우기 위하여 고역하게 된 7년기간을 탕감복귀하는 70년 포로기간이 복귀섭리노정에 남아지게된 것이다.

그 다음에 야곱은 라헬을 취하고 자녀를 번식하여 재물을 취하여 가나안으로 돌아오기 위한 준비를 라반의 집에서 13년간을 고역하고 14년만에야 사위기대를 조성키 위한 노아 가정과 같이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가정을 이루어 1대 가나안복귀 완성자로서 가나안으로 돌아온(창 31/41) 기간이 있었으므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여 성전복귀의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키 위한 140년 간의 귀환시대가 이스라엘민족 앞에 남아지게된 것이다.

  제6절 이스라엘민족 귀환시대(140년)      
 
선지자 하박국은 타락한 예루살렘이 갈대아인에게 정복 당할 것을 예고하는 동시에(합 1/6~11)의 갈대아인도 미구에 멸망할 것을 예언한 것이다(합 2/8).

이와같이 이스라엘민족으로 하여금 원리적인 탕감노정을 걷게하기 위하여 그들을 바벨론에 내어주었지만 이 바벨론도 파사와 고레스왕에게 멸망하여 이스라엘민족의 해방의 길은 열리게 되었으니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바벨론과 갈대아인의 땅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라 너희는 열방중에 광고하라 공포하라 기를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여 므로닥이 부서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서진다 하라 이는 한 나라가 북방에서 나와서 그를 쳐서 그 땅으로 황폐하게하며 그 중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함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그와함께 유다 자손들이 돌아오되······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앗수르왕을 벌한 것같이 바벨론왕과 그 땅을 벌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그 목장으로 돌아오게 하리니······」(렘 50/1~20) 라고 하신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와같이 파사왕 고레스는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고국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유대인은 자유로 귀환하여 성전을 건축할 것을 허락하였으며 원치않는 유대인은 금은을 기뻐 헌납하여 성전건축의 경비에 충용하게 하였으며 왕궁사고에 명하여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에서 약취한 성전기명 전부를 유대 방백에게 교부하였다.

이스라엘민족들은 바벨론에 의하여 폐허된 성전을 모세의 율법에 비추어 신축하니 이것이 제2성전이었다. 이와같이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사 44/28)고 하신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진 것이다. 포로를 당할 때도 3차에 걸쳐서 하였지만 귀환할 때도 3차에 걸쳐 귀환하였다.

귀환한 유대인들도 범죄를 행하므로 성전이 준공될 때까지 원수의 모략과 방해는 쉬지않아 일시는 절망 상태에까지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는 인민의 범죄상태를 조사하여 누구든지 이방인을 취하여 자녀를 생산한 자는 그 여인과 그 자녀를 축출하였고 기원전 445년 느헤미아가 제3차 귀환의 유대인을 영솔하고 귀국하여 방백이 되고 성을 수축한 후에는 모든 규율을 세우고 성전의 뜻을 높이며 7월 24일에는 전이스라엘이 모여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먼지를 쓰고 매일 3시간의 율법 강의를 들으며 각자의 죄와 열조의 죄를 자복하며 아브라함을 소명하신 이후 때를 따라 이적과 기사로서 풍성하신 은혜를 베푸셨으나 선조들이 완고하고 우매하여 범죄하였으므로 이방의 열왕들에게 붙이셨다가 또다시 주의 자비하심으로 구출하신 지금에도 이방인과 잡혼함으로 범죄하였음을 회개하고 방백과 레위인과 제사장이 날인하여 굳은 언약을 세웠으니 「······내가 앗수르왕을 벌한 것같이 바벨론왕과 그 땅을 벌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그 목장으로 돌아오게 하리니······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구할 것임이니라」(렘 50/18~20)고 하신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민족들은 솔로몬왕이 성전을 건설한 때를 복귀한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전절에서 이미 논술한 바이지만 이스라엘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70년 기간은 사탄 세계인 바벨론의 뜻에 응하기 위한 시대였으므로 이것은 야곱이 라반의 뜻에 응하여 레아를 취하기 위한 7년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기간이요 다음 귀환시대 140년간은 이스라엘민족이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한 성전건설을 목적하고 나아가던 시대이므로 이 시대는 야곱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의 뜻을 세우기 위한 1대 가나안 복귀를 목적하고 라헬과 재물을 취하던 14년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시대인 것이다.

 제7절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400년)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다시 찾아세우기 위하여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고역한 후 재물을 취하고 택한 가정을 이루어 21년만에 다시 가나안으로 귀환함으로 1대가나안 복귀를 완성한 것같이 솔로몬왕의 타죄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성전이상을 복귀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야곱과 같은 입장에서 바벨론에 포로되었다가 210년만에 재물을 취하여가지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므로 성전의 재건을 완성하였다함은 이미 상술한 바와같다.

이제 1대가나안 복귀를 완성한 야곱 가정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이후 애급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40년 준비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시대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앞에 남아졌으니 이 시대가 곧 메시아 강림준비시대의 400년 기간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있어서는 마치 야곱 가정이 요셉을 잃어버린 후 그를 찾기 위하여 갖은 파란과 고난을 당하였듯이 유대인들은 사탄세계에 속방을 당하면서 잃어버린 아담대신 후아담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기 위하여 갖은 파란과 고난의 노정을 취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처음에는 파사에 속방되었고 (397~333 BC) 다음에는 헬라에(333~320 BC) 다음에는 애급에 (320~200 BC) 다음에는 수리아 (200~165 BC)에 속방되었고 다음에는 마카피어스 왕국을 건설하였다가 (165~32 BC) 나중에는 나마 (63 BC~)에 속방되어 유대의 역사는 1대비극으로 막 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애급 고역시대를 거친 후에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를 완수해야할 것이었던 것과 같이 유대인들도 이 눈물겨운 역사를 거친 후에 메시아를 맞아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수해야할 역사적 사명을 가졌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말라기선지의 명백한 예언에 의한 메시아의 강림이었다. 선지자 말라기는 기원전 428년대의 인물로서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그리운 고향을 찾기는 하였지만 폐허를 찾아온 그들은 황막한 광야에 선 것같았다.

양곡의 궁핍으로 인하여 인민들의 의기는 소침되어 하나님께 향하는 열심은 식어 버렸고 의심의 암운은 다시 그들을 덮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헛된 일이요 그의 명령을 준수한 대로 유익함이 없다고 생각하게되었으며 불평 불만과 의심과 자포자기의 번뇌는 제사장 등 지도층에게까지도 엄습하여 성전봉사도 만홀히 여기어 멸시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었다.

이러한 암흑시대에 선지자 말라기는 분기하여 두려운 심판이 임할 것과 메시아가 강림하실 것을 예언하면서(말 4/1~6) 인민들의 종교적 정열을 회복케한 것이다. 말라기는 메시아의 강림 전에 엘리야가 재림한다고 명시하여(말 4/5) 메시아 강림의 한계를 지었기 때문에 그 후에는 선지자도 없이 오로지 성경에만 의지하여 엘리야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사탄세계와 싸우며 나아가던 시대다.

인간 시조가 타락된 후 사위기대를 위한 40일을 복귀하려는 섭리는 사탄의 침범에 의하여 반복을 거듭하여 내려왔으나 그 40일 복귀의 기대는 한번도 조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사위기대를 반드시 조성해야되므로 과거에 복귀섭리의 중심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부름받았던 사람들이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그 모든 사위기대를 동시에 하늘 편으로 찾아 세워야한다.

그러면 이 시대에 있어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시대적인 배경은 어떻게 조성되어 있었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로마제국의 발흥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탄생 당시의 로마의 정치적 판도는 지중해를 둘러싼 원형의 광대한 범위를 포함하고 있었고 사통팔달한 도로는 교통되어 편을 주었으며 문화적으로는 당시대에 가장 완비된 헬라어를 중심하고 모든 문명국가의 문화를 통일소화하였으므로 그리스도를 중심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중심한 로마, 로마를 중심한 세계에로 메시아의 사상이 확장될 수 있는 평면적 기대는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

선진 문명국의 언어인 희랍어를 지식계급에서 사용했다함도 그렇지만 충군애국의 정신이 강한 로마인들이 이스라엘민족을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함도 장차 부자의 관계로 충효의 도를 맺기 위한(말 4/6) 사명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이상이 통일된 언어와 준비된 이 민족성을 통하여 빨리 이루어지게하기 위함이다.

충효의 도가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도요 애국의 정신이 바로 하늘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의 표징인 까닭이다. 이 시대에 있어서 로마의 정치와 무력은 그 통치하에 있는 각 민족의 풍속과 제도를 타파하지 않고 도리어 그 방언과 자치권과 종교 의식을 존중히 여겼던 것도 이스라엘민족에 의한 섭리의 촉진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막연하나마 로마인들의 마음 속에는 그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초인적인 힘이 있다고 믿고있었으므로 의식과 제사로써 이 힘과 관계를 지으려는 원시 종교가 있었다. 로마인들이 로마제국을 신국화하였으며 국가와 황제를 위하여 신당을 각도에 세우고 그를 숭배한 것도 이러한 나 아닌 다른 힘에 의탁하려는 종교적 심정의 소산이었으니 이것도 장차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사 9/6)에게 대하여 이스라엘민족과 전 인류가 취해야할 태도를 사탄 세계를 통하여 예시하신 예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방인국가가 이러한 영적 움직임의 경향을 보여준 것은 이스라엘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복귀되어 오는 이스라엘민족의 심령의 빛의 여파가 이방인들에게도 미쳐온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창조주되신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로부터 이루어지는 섭리와 선행과 악행에 관한 천국과 지옥의 응보와 타락인간의 타죄의 진리 등을 교시하는 종교를 요구하게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욕망으로 남아진 것이다. 이와같이 이방에도 그 판도로나 정치로나 언어로나 종교적 의식으로나 기타 각 방면으로 메시아 탄생을 위하여 준비하는 섭리를 하신 것이다.

I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一 예수의 40일 금식기도와 3대 시험의 의의

이미 상술한 바이지만 구약시대는 하나님적 제1 책임분담 노정으로서 이 기대 위에 이루어져야할 예수님의 제2 책임분담 노정의 전형적 표시노정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서 보여진 모든 사실은 장차 예수 오셔서 행하여야할 노정을 예시하는 복귀섭리의 지침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복귀 노정에서 모세를 중심한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말씀인 두 석판을 깨뜨린 것이며 또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바로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의 믿지 않으면 제2 아담 즉 복귀한 아담될 예수님의 몸도 칠 수 있다는 조건을 사탄에게 허락하는 표시적 행동이었다함은 이미 논하였다. (모세노정 참조) 그러므로 이 조건을 피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해야할 오직 하나의 사명은 성전 뜻을 중심하고 믿고 따르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이런 근본원리를 모르고 다시 불신의 길을 밟음으로 사탄 침범의 조건을 허여하게 되니 다시 이 조건을 제거하기 위해 세례 요한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완전히 사탄을 재분립하여 40일 복귀에 의한 사위 기대를 완전히 조성한 터 위에 메시아를 모시어서 마치 40일 기대 위에 섰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솔로몬 성전과 동일한 기대를 예수 앞에 조성해야될 것이었는데 세례요한이 이러한 천부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 자신이 사탄과 싸워서 이 기대를 조성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예수께서 광야 40일 금식 기도에서 사탄과 싸워 승리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될 원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죄없는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예수님에게 광야 40일이라는 설음의 노정이 있었음도 세례 요한을 둘러싼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초래된 결과인 것이다. (전편 제7장 참고)

그러므로 모세노정에 있어서 장차 뜻 성사에 관한 표시적 약속물에 침범하였던 사탄은 다시 그와 동일한 조건이 세례 요한으로 인하여 성립되었으므로 이제는 실제로 침범할 조건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출현하는 것을 예수께서 실체로써 방지하여야할 근본 터를 찾아 세우고자 하는 기간이 이 40일 금식 기간이었다. 사탄은 하나님의 실체로서 나타나신 예수님을 굴복시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뜻을 파하기 위하여 대립하게 된 것이다.
사탄이 시험 주인격으로 설 수 있었기 때문에 다시 그 때와 같은 불순과 불신의 조건이 성립되었으므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사탄은 예수께서 강림하신 목적을 깨뜨리기 위한 가장 중대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걸어놓은 시험에 승리하지 못하면 메시아의 전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근본적인 중요한 시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첫 번 시험은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범죄로 인하여 상징적으로 잃어버렸던 두 석판과 반석을 예수께서 실체로써 찾아세우기 위한 시험이다.

모세 40일 금식 기도를 찾았던 석판을 다시 찾으려니 예수께서도 40일 금식기도로써 찾지 않으면 아니된다. 다시 말하면 모세가 40일 사탄 분립기대 위에 선 석판을 깨뜨린 것과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벌써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행동이므로 결과적으로 보면 모세가 친 것이 아니고 사탄이 친 것이 되며 따라서 그 둘은 사탄의 소유가 된 것이다. 예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신 후에 이와같이 사탄을 따라다니신 것은 모세로 인하여 이미 사탄이 소유한 돌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 사탄의 입장이다. 돌을 떡이 되게하라는 시험은 모세의 표시 노정을 실체로 이루려 오신 예수님이시므로 마치 이스라엘민족이 광야에서 굶주림으로 인하여 불신으로 흘러 모세로 하여금 석판을 깨뜨리게하며 반석을 두 번 치게하여 돌을 사탄이 가지게 되었던 것과 같이 지금 광야에서 굶주린 예수님도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은 입장이니 불신으로 돌아가서 돌을 찾으려 하지 말고 돌을 떡이나 되게하여 주림을 채우고 그 돌을 영원히 사탄이 가지고 있겠다는 뜻이다.

이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하셨다. 즉 떡이 아니라 말씀을 찾아야 살 것이라는 대답이다. 말씀의 실체는 도성인신하신 즉 말씀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를 말함이요(요 1/14) 그리스도는 곧 반석(고전 10/4)이니 이 「말씀」은 곧 돌을 의미하므로 이 대답은 결국 먹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탄이 쥐고 있는 돌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찾아야겠다하심은 돌을 찾아야겠다는 것을 의미함이요 따라서 돌을 찾아야겠다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찾아야겠다는 의미다. 즉 사탄 손에 쥐어 있는 돌을 현재 사탄의 시험을 받고 있는 예수 자신을 표시함이니 먹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구주로 온 내 자신이 지금은 너의 손에 쥐어 있는 돌로써 너에게 시험을 받아야할 입장에 있지만 여기에서 뛰어나와 승리의 기대를 조성해야만 전 인류가 살아난다는 뜻이다.

모세가 금식 40일로써 말씀이 기록된 두 석판을 찾았기 때문에 예수님도 금식 40일로써 말씀의 실체된 자신을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첫 번 시험에 승리하여 실체 성전으로서의 개성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셨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하나님의 뜻은 성사될 것이니 이와같이 잃어버렸던 반석과 석판의 터도 예수님 한 분으로써 기반을 지었으므로 다음에는 뜻의 실천성사가 남아졌다.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공으로 오셔서 모든 백성들을 분성전으로 세워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창조본연의 본성성전으로 복귀코자하심이 그 목적이었다. 사탄도 원리는 원리대로 증거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므로 성전의 머리로 오신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것은 지당한 일이다. 그리고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만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뛰라고 하였다(마 4/5~6).

내려뛰라는 것은 주인공의 위치를 버리고 타락한 인간의 입장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요 그렇게되면 자기가 성전 주관자의 위치를 점령하겠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비원리 존재인 사탄은 원리 세계의 주인공으로 설 수 없는 것이므로 오직 원리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몸으로 나타나신 예수 자신만이 태초부터 원리세계의 주인공이니 너는 시험하지 말고 물러가라는 뜻이다. 즉 예수께서는 일차 시험의 승리로써 복귀된 실체성전의 기대 위에 선 성전 주인공이니 더 시험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이 시험에 승리함으로 신랑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분성전으로 세워 신부의 입장을 취하게하여 자녀로서 복귀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였다. 즉 둘째 시험을 승리함으로 신부성 복귀기대를 조성하였다.

아담은 타락함으로 만물세계의 주인공의 자격을 상실하였다(창 1/28). 그러므로 아담을 주관하는 사탄이 대신 주인공으로 서게된 것이다(롬 8/20). 이제 완성한 아담격자로 오신 예수님이 비로소 피조세계의 주관자로 오신 것이다(고전 15/27).

그러므로 사탄도 예수께서 오신 그 목적을 알고 있으므로 높은 산 위에 세워놓고 그의 목적물을 보여주면서 「엎디어 절하면 이것을 다 주겠다」고 시험한 것이니 예수님을 높은 산 위에 인도한 것은 그는 피조세계의 주관자로 오심을 사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태초에 아담이 사탄에게 굴복하듯이 제2 아담도 사탄에게 굴복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홀로 그를 섬기라」고 하시어 섬겨야할 분은 오직 창조주 한 분이시니 너도 그에게 경배하는 것이 원리요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의 몸으로 나타난 나에게 굴복하는 것이 원리적이라고 하여 셋째 시험에도 원리로써 승리함으로 피조세계의 주관성 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신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40일 금식 기도의 열매로 사탄을 승리함으로 40일 기대를 복귀하여 아담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찾아 세웠기 때문에 표시적 역사노정에 나타나 40일 기대 위에 섰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솔로몬 성전의 입장을 복귀하였다.

이 시험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것이었다는 이유는 메시아의 목적이 이 세가지 조건을 이루려는데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 주신 축복의 말씀은 첫째로 그 개성이 완성될 것과 둘째는 자녀를 번식할 것과 셋째는 천지만물을 주관할 것(창 1/28)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타락으로 인하여 이 세가지 축복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은 후아담으로 오셔서 첫아담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 축복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사탄은 이 세가지 조건을 가지고 시험을 하게된 것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는 우리 신도들도 이 세가지 조건을 복귀하지 못하면 타락전 아담의 입장에 설 수는 없는 것이다.

二 예수의 십자가의 의의    

40일 금식으로 사탄을 승리한 기대 위에 선 예수님을 중심한 이스라엘의 할 의무는 무엇인가하면 그들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모세의 표시적 역사노정에서 실패한 것을 예수께서 실체로서 복귀할 수 있도록 각자의 책임 분담을 완수하는 것이다. 이 성사를 위하여 모세가 12지파를 중심한 70 장로를 택하여 역사한  것같이 예수님도 12 제자를 중심한 70 문도를 세워 제2 책임분담 노정을 출발하셨다.

 예수님 앞에 참패를 당한 사탄은 예수님 앞을 얼마동안 떠났다고 하였다(눅 4/13). 이 말씀은 사탄이 아주 떠나버렸다는 말이 아니요 따라서 다시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즉 사탄은 예수님 자신에게는 패하였지만 다시 예수님의 구원의 대상인 민족을 통하여 대립할 길이 있다함을 의미한다.

과연 사탄은 제사장 교법사 등을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과 심지어는 사랑하시는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를 통하여 예수님 앞에 다시 대립하여 나섰던 것이다.

이런 우매한 백성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던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되 너희가 우리의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이 세상일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너희가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밖에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으니 이는 하늘에 있는 인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또 들려야 하리니」(요 3/11~14)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하늘 일을 말씀하실 수 없는 것이며 마치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불 뱀이 들어왔으므로 모세가 구리 뱀을 든 것같이 너희들도 불신으로 흘러 다시 예수님의 금식 40일 기대에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으므로 부득이 인자도 십자가에 들려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도 모세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야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광야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 본래 하나님이 모세를 세우신 목적이 아니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본래 하나님이 예수님을 땅에 보내신 목적이 아니요 세례요한과 유다와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초래된 결과였다. (참고 전편 제2장) 광야 금식 기도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40일의 기대 위에 섰으므로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완수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지만 이스라엘민족은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완전히 사탄 편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나서 아비의 욕심을 너희들도 행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으며 (요 8/44) 또 그들을 향하여 7화의 말씀을 퍼부어 그 조상들이 원수 사탄과 합할 수 있는 터를 잡아서 지금까지 내려옴으로 예수님을 대하여서까지 사탄의 역사를 자행케하여 그들의 조상의 악의 양을 채우려 한다고 책망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은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어주고라도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셨으며 사탄은 자기 편에 입각한 전 인류보다도 더 긴요한 목적은 메시아된 예수님 한 분을 죽이려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하면 4천년 복귀섭리의 목적은 하나님 편으로 보면 메시아를 보내심으로 전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하려는 것이므로 오직 그를 죽이려는 것만이 사탄의 유일한 요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반대하여 사탄 편에 서게된 전 인류를 하나님이 구원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우기 위하여 그 탕감조건으로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어주셨다.

사탄은 자기의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자기의 전 요구의 목적을 달성하여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영적 참소의 조건을 완전히 청산하였다. 그러므로 인류는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적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4000년 간 사탄이 요구하던 모든 참소의 조건을 완전히 청산한 십자가의 승리의 기대 위에 이루어진 부활권내에는 사탄의 미련은 완전히 근절되었으므로 여기는 사탄이 다시는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권으로 된 것이다. 사탄이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였으니 하나님도 최대의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탕감복귀의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사탄의 최대실권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지요 하나님의 최대의 실권은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시는 데까지인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같이 탕감복귀 원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부활하신 예수 앞에는 사탄은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 그와 하나되면 사탄이 분리되는 것도 이런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40일 금식기도로써 영육 합하여 40일의 사탄분립 기대 위에 섰던 예수와 이스라엘민족이 하나 되었다면 그들도 영육 합하여 예수님과 동일한 기대 위에 서게되므로 영육 합한 복귀섭리를 완수하였을 것인데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십자가로 그 육신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으므로 그를 믿는 우리들도 육신은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영육 합하여 찾아 세웠던 40일의 기대에는 다시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으므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영적구원 섭리를 출발하려면 다시 이 40일을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40일 기간이 있어야하는 것은 바로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부활 40일로써 다시 사탄 분립 기간을 찾아세워 40일 기대를 조성하셨기 때문에 부활권은 사탄 불가침권이다.

부활한 예수님과 하나되어 그와함께 이 사탄 분립의 40일 기대 위에 서게되면 사탄은 자연분리되어 영적구원의 섭리는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리를 세우시어 성신과 합하여 전 세계를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선의 것으로 복귀하기 위한 섭리를 시작하셨다.

십자가를 예수님 앞에 허락하여 사탄 뜻 완성의 양을 채워 악의 영적 부활의 종국을 짓게하기 위하여 타락한 인류 대신 탕감조건으로서 세워진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노정이었다. 이와같이 죄의 뿌리의 영적 근절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시작되므로 선과 악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분수령으로 하고 신앙과 불신을 조건삼아 좌우로 분기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지금까지 예수님 앞에 공격태세를 취하여온 사탄은 십자가로 인하여 보수적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반대로 예수님은 공격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모세가 바로를 대한 3일 기간을 찾아 세웠음으로 가나안 복귀 노정을 출발한 것같이 예수께서도 영적 가나안 복귀 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는 사탄과 싸우는 무덤 3일 기간을 넘어 다시 부활 40일로써 사탄 대한 영적 분립기간을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 예수님은 모세가 반석 두 번 침과 석판을 깨뜨렸음으로 침범할 조건을 갖고 나온 사탄들이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실체로써 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넘어 부활하심으로 영적으로만 그의 미련을 전부 청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육 합한 세계가나안 복귀노정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지 못하고 다만 영적 생명요소를 온 인류앞에 부여하는 영적 세계가나안 복귀노정만을 개척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광야에서 죽음으로 영적 가나안 복귀만을 완수하고 실체의 가나안 복귀노정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대신한 것같이 영적 세계 가나안 복귀노정만을 완수할 예수님의 실체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재림하셔서 재림예수와 신부가 합하여 계승 완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육신을 쓰고 지상에 탄생해야되는 원리적 근거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고 전편 제7장)

그런고로 예수 이후 2000년은 예수와 성신을 중심한 영적 부활섭리를 완수하는 기간이요 따라서 재림하셔서 완수할 영육 합한 실체적 세계가나안 복귀노정의 기대를 조성하는 기간이다.

이와같이 예수 이후의 2000년은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의 범죄로써 초래된 기간이므로 예수님의 재림 역사는 그 초림 당시에 완수했어야할 노정을 되풀이하는 역사인 것이다. 예수께서 본대로 오시마하신 것도 이와같이 초림시의 것을 되풀이하게되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참으로 예수 재림을 앞둔 현시대는 초림예수의 강림시대를 그 얼마나 방불케하는가는 누구나 잘 이해하고 있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의 육신을 사탄에게 내어주어 영적 탕감복귀의 조건을 세웠으므로 누구든지 그의 부활권내에 참여할 수 있는 입장을 복귀하였다.

이제 이러한 은사의 권내에 처한 사람들이 예수부활의 생명요소를 향유하는가 못하는가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각자가 세워야할 책임분담으로 남아져 있으므로 이것을 완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혜택은 하등 관계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도 각자가 완수해야할 신앙이라는 이 책임분담을 조건으로 하여서만 구원의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계시는 부활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조건으로 영적 구원을 받는 것같이 육신 쓰고 지상에서 나타나는 재림예수를 실체로 믿고 모셨다는 조건으로 육적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말씀인 성서의 목적은 믿음과 소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복귀케 하려는데 있다(고전 13/13). 이제 하나님은 사탄 불가침의 부활권을 수립하여 놓고 이 권내에 참여할 수 있는 첫째 조건으로 믿음을 세우셨다. 아담의 타락은 믿음을 잃은데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아담의 타락 전의 입장을 복귀하러 오신 제2 아담된 예수님은 아담이 잃어버렸던 이 믿음을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창조원리적 입장을 찾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님을 중심하고 사탄 편이냐 하나님 편이냐의 이자택일의 유일한 조건으로 세우신 것이다.

둘째 조건은 소망이다. 이것도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 너희는 완성하여 죄없는 자녀를 땅 위에 편만토록 번식하여 천지 만물을 주관하라는 (창 1/28) 축복을 바라보고 성장하는 도중에서 타락하였으므로 이 축복은 타락인간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소망이 되어 이것도 복귀해야할 조건으로 남아진 것이다.

셋째 조건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타락이라함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사랑의 인연이 끊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복귀하는 것이 타락인간에게 남아진 최후의 목적이므로 기독교의 중심은 사랑으로 되어있다. 이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각기 외적으로 표시한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믿음을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요 소망을 잃었기 때문에 진리를 찾지 못하였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잃었기 때문에 생명을 잃어버렸으니 내적으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지만 외적으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아야 하겠기에 내적인 하나님의 외적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은 길이었고 진리였고 또한 생명이었으므로 그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앞으로 갈 자가 없는 것이다(요 14/6). 이렇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써 길을 찾고 진리를 찾고 생명을 찾은 인간은 영적 구원의 완성을 보나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천사장 누시엘과 혈연관계를 맺어 영적 사망을 가져온 것을 예수님은 실체로써 사망의 혈연을 끊어 하나님과 영적 생명의 혈연 관계를 맺음으로 사탄 권에서 하늘 권내로 옮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뜻하지 않은 고난의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승리의 영광을 얻었으니 신앙자들도 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고난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지 않으면 아니된다. 기독교가 수난의 종교된 원인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난은 인간 자신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제3장 복귀섭리연장시대(예수이후 2000년)    
  
복귀섭리시대의 목적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부터 믿음의 자녀를 불러세워 씨족에서 부족으로 민족에 이르기까지 선민의 터를 넓히어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여 그 기대 위에 메시아를 맞아 복귀섭리를 완성하려는데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적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믿음의 제단을 쌓고 예수님을 이 제단의 제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헌제를 드려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살해하였으므로 아브라함 이후 2000년간 준비하여온 이 제단은 무너지게되어 복귀섭리시대의 2000년 간을 다시 사탄에게 내어준 결과로 돌아갔음으로 이 기간을 다시 하늘 편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한 예수 이후 2000년 기간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니 이 기간을 곧 재탕감복귀시대라고 한다.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좌절되었으므로 그의 후손에서 선민을 불러세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려는 섭리를 하신 것과같이 이 시대는 예수님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않았으므로 기독신도를 불러세워 새로이 세계적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여 재림하시는 메시아를 중심하고 복귀섭리를 완성하기 위하여 연장된 시대임으로 이 시대를 복귀섭리 연장시대라고도 한다.

타락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제1차적 책임을 지시고 하나님이 섭리하신 시대가 소생구약시대엿고 아담과 해와 대신 사명자로 오신 예수와 성신(기독론 참조)이 제2차적 책임을 분담하시고 섭리하시는 시대가 곧 장성 신약시대다.

그리고 이 시대의 프로젝트에 적응될 사료에 관하여는 이미 서론에서 상술되어있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살해함으로써 아브라함이 혈통에서 불리운 선민은 벌써 선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음으로 예수님에게 부름받은 영적 이스라엘인 기독신도로써 이루어진 기독교사가 이 시대의 복귀섭리의 원리적 노정을 이루어 나온 역사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복귀섭리의 원리적 프로젝트에 적응될 사료는 기독교사인 것이다. 이 시대도 7기간으로 구분하여 섭리하셨다. 그 이유는 7기간으로 구분하여 섭리하셨던 복귀섭리시대의 2000년을 그대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인 까닭이다.

제1절 로마제국 박해시대(400년간)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상실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스라엘민족의 애급고역시대 400년간이 있었음으로 민족적인 제단 위에 예수님을 산 제물로 바치는 헌제의 실수로 인하여 상실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기독신도들 앞에도 애급고역시대와 같은 로마제국박해시대 400년간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와같이 이 시대는 애급고역시대를 탕감복귀하는 시대임으로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급에서 당하던 것과 같은 고난을 기독신도들은 로마제국에서 당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야곱이 12자식을 중심한 70가족이 사탄 세계인 애급에 들어가 400년 간 그들의 박해와 학살을 당하던 것과같이 예수님의 12제자를 중심한 70문도는 사탄세계인 로마제국에서 400년 간 그들의 박해와 학살을 당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스라엘민족은 애급에서 400년을 고역한 후에 애급왕 바로를 굴복시키고 해방을 당한 것과 같이 기독신도들도 로마제국에서 4세기간의 수난기를 거친 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에 의하여 기독교의 공인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그의 기반에서 해방을 당한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모세는 비로소 십계명과 성서를 받고 그를 중심하여 성막을 건설한 것같이 기독신도들도 기독교 공인에 의하여 해방된 후 니케야회의를 비롯한 수차에 걸친 종교대회에서 어거스틴 등을 중심하고 사도신경과 신약성서는 결정되어 이 위에 그때까지 혼란상태에 처한 교회는 복귀되어 새로운 기초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되어 이스라엘이 성막을 중심하고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온 것같이 기독신도들도 교회를 중심하고 재림예수를 맞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받들어 나온 것이다.

 제2절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400년~800년)         
  
이 시대는 복귀섭리시대에 있어서 사사를 중심하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영도하여 나아가던 사사 400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교구장 (Patriarch)을 중심하고 기독교를 영도하던 시대다.

이스라엘민족이 사탄세계인 애급에서 가나안복지로 들어가 12지파로 분배된 새 땅에 새로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일으킨 것과 같이 기독교도 역시 사탄세계인 로마제국에서 해방을 당한 후 4세기에 몽고족의 일파인 훈족(Hun)의 서침에 의하여 서구로 이동된 게르만 민족에게 기독교리를 전파하여 4세기 이후에는 서구의 새 땅에 게르만민족을 중심한 새로운 선민인 기독신도들을 불러 세우시어 12지파형의 교회를 중심하고 발전한 것이다.

가나안 복지로 들어간 이스라엘선민은 민족적인 가나안화운동을 일으킨 것같이 게르만 민족을 중심하고 서구에서 부름받은 기독신도들은 세계적인 가나안화운동을 전개시킨 것이다.

사사시대에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영도자는 사사였으니 이 사사는 다음 시대에 분립되어 예언자와 제사장과 국왕의 사명을 겸임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 시대에 있어서의 기독교국의 영도의 중심은 교구장이었는데 교구장도 다음 시대에 분립되는 수도원과 교황과 국왕의 사명을 겸임하여 통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구장은 사사와 동일한 천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민족은 가나안땅에 들어간 후 잡신을 신봉하는 가나안의 선주민의 영향으로 그들의 신앙에 혼란을 일으킨 것과 같이 서구에 확산된 기독교에도 잡도의 영향으로 인하여 신조의 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제3절 기독왕국시대(800년~918년)                

이 시대는 사울왕으로 시작된 통일왕국시대를 찰스대제로 시작된 기독왕국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다. 아브라함으로부터 800년 되던 때에 이스라엘민족을 통치할 사울왕이 즉위하였음으로 기원 800년 되던 해 크리스마스날에 기독신도를 통치할 찰스대제가 즉위한 것은 탕감복귀원리로 보아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제 모세에 의한 성막이상이 통일왕국시대의 이상인 성막이상으로 나타난 것같이 어거스틴에 의한 기독교이상은 기독왕국건설의 이상으로 나타나 신정정치의 프랑크왕국을 재건하였다.

사사시대에 있어서의 사사의 사명은 통일왕국시대로 들어오면서 셋을 분립되었으니 첫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받는 선지자의 사명이요 둘째는 이스라엘의 성막을 받드는 제사장의 사명이요 셋째는 백성을 통치하는 국왕의 사명이었다. 이것을 탕감하기 위한 기독왕국시대에 있어서도 역시 그 전시대의 교구장의 사명은 셋으로 분립되었으니 첫째는 선지자에 해당되는 수도원의 사명이요, 둘째는 제사장에 해당되는 교황의 사명이요 셋째는 백성을 통치하는 국왕의 사명이다.

이 두 시대에 있어서의 주도권은 제사장과 교황에 있었다. 그러므로 사울왕의 즉위의 주고를 선지자 사무엘이 한 것같이 찰스대제 즉위의 금관은 교황 레오 제3세가 씌워준 것이다. 통일왕국시대가 120년 간 계속된 것같이 기독왕국의 왕조도 119년만에 끊어지고 말았다.

제4절 동서분립시대(918년~1305년)       

통일왕국시대의 성전이상이 좌절되면서 이 왕국은 남조와 북조로 분리되어 남북조분립시대가 400년간 계속되었으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하는 동서분립시대가 오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왕국도 분립되어 처음에는 동서 프랑크와 이태리로 분열되었다가 동프랑크는 신성 로마제국을 계승하여 이태리왕을 겸임하였으므로 사실상 동서로 분립된 것과 같으며 이스라엘의 중심이 남조에 있었던 것과같이 이 분립된 왕조의 중심도 신성로마제국인 동프랑크에 있었다.

통일왕국시대에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국왕은 제사장의 명을 받아 성전이상을 이루어야할 것이었던 것같이 이 시대에 있어서의 왕은 교황의 명령에 의하여 기독왕국의 이념을 실현해야될 것이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사실상 제국의 실권은 교황에게 있었음으로 교황 그레고리7세는 독일황제 헨리4세를 파문할 수 있었으며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불국왕 필립2세를 굴복시켰고 영국왕 존을 파문하는 등 교황권은 이 시대에 그 절정에 달하여 기독왕국 전성시대를 이루었던 것이다. 남북조분립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민족들이 이 성전이상에 배치되는 입장에 서게될 때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내적 확청운동을 일으키시었다. 선지자 엘리야를 중심한 4대선지와 12소선지를 보내신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동서분립시대에 있어서도 교황청이 부패함에 따라 그 내적 확청운동은 수도원에서 일어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프랑시스 교단 등이 나타난 것은 모두 이러한 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민족이 선지자들에 의한 내적 확청운동에도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애급 갈대아 수리아 앗수리아 바벨로니아 등 이방들에게 붙여 외적확청운동을 일으켰던 것과 같이 교황청이 수도원에 의한 내적확청운동에도 회개하지 않고 타락과 부패가 우심하여지매 그들도 이방인들에게 붙여 외적확청운동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곧 십자군전쟁이다. 예루살렘 성지가 카리프제국에 속하여 있을 때는 그들은 기독교인의 순례자들을 후대하였는데 카리프제국이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s)에게 망하여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점령을 당한 후에는 그들은 순례자들을 학대하였다. 이에 분개한 교황은 이 성지를 회복하려고 십자군을 일으킨 것이다.

십자군전쟁은 1096년에 시작되어 약 200년 간에 7회의 원정을 하였으나 패전을 거듭하였고 설상가상으로 몽고제국의 서침에 의하여 동서로 분립된 기독왕국은 붕괴되어 하나님의 섭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지못한 기독왕국을 확청키 위한 것이 그 목적이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섭리에서 이루어진다고 믿고있던 기독왕국이 이교도에 의하여 패전을 거듭함에 따라 교황권은 그 권위와 신망을 완전히 잃게되자 또한 국민정신의 중심을 잃어버렸다. 한편 봉건사회를 유지하던 영주들과 기사의 전사로 인하여 정치적인 기반을 잃고 말았으며 또 장기간에 걸친 전비의 의하여 경제적인 곤궁에 빠지게되어 봉건사회는 붕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5절 교황포로시대(1305~1375)               

솔로몬왕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않은 성전이상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남북조 분립시대를 통하여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으며 또 이방인에 붙이기도하여 내적 외적으로 확청운동을 일으켰으나 회개치 않은 결과로 파괴된 성전을 재건설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새로운 기대를 조성키 위하여 이스라엘민족은 다시 사탄세계인 바벨론으로 포로되어갔던 70년 기간이 있었음으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교황포로시대다.

그러므로 교황청의 부패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기독왕국이상을 복귀하기 위하여 동서분립시대를 통하여 많은 수도자들을 보내었으며 또 십자군전쟁에 붙이기도하여 내적 외적으로 확청운동을 일으켰으나 교황이 회개치 않은 결과로 좌절된 이 이상을 다시 세워 재림주를 맞을 수 있는 새로운 기대를 조성키 위하여 역대의 교황이 70년간 포로를 당하는 시대가 오게되는 것이다.

십자군전쟁의 영향으로 인한 봉건제도의 몰락과 근대국가의 성립에 따라 왕권이 신장되었고 한편 신앙열이 냉각하여 교황과 승려가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교황과 불국왕이 충돌하자 국민이 왕을 지지하게 되어 교황 보니후아키우쓰 8세가 남불 아비뇽에 금고된 후 1대를 지나서 기원 1305년에 구레멘스5세로부터 역대의 교황은 70년간 불왕의 구속을 받으면서 남불 아비뇽에서 포로생활을 하게된 것이다.

제6절 교황귀환시대(1375~1517)     
  
이스라엘 민족을 포로로 잡아갔던 바벨론이 파사에게 망한 후 그들이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140년 기간이 있었음으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교황이 남불 아비뇽으로부터 로마로 귀환하는 140년 기간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되어 이방의 잡신교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멀리하게된 것같이 이 중세인 가운데도 하나님을 반역하는 인생관이 나왔으니 이것이 곧 문예부흥운동을 타고 나온 인본주의사상이다.

이스라엘민족 귀환시대의 목적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민족이 새로이 성전을 건축하고 죄를 회개하며 율법을 공부하여 쇄신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데 있었던 것과 같이 이 시대에도 교황이 로마로 귀환한 후에는 중세의 기독교계에는 일대혁신운동이 일어나 암운 가운데 신음하던 중세의 기독신자들에게 신앙의 새로운 서광을 비춰주어 재림예수를 맞을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의 기대를 조성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귀환시대는 선지자 말라기를 중심한 성전건설과 신앙쇄신운동으로 다음 시대를 출발한 것이다.

제7절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1517~1917)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민족이 메시아 강림준비시대를 지나고 나서 예수님을 맞았음으로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시대가 포로되었던 교황이 귀환한 후의 중세 기독신도들의 앞에도 남아졌으니 이 시대가 곧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다.

사위기대를 조성키 위한 복귀섭리가 사탄의 침범으로 인하여 연장을 거듭하여 내려왔던 아담이후의 4000년 역사노정에서 거듭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그 40일 복귀섭리의 기대를 동시에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메시아강림 준비시대가 있었던 것과같이 아담으로부터 6000년 역사노정에서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40일 복귀섭리의 그 모든 기대를 동시에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가 있어야할 것이다.

전절에 기록된 바와같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이 느부갓네살왕에 의하여 파괴된 성전을 신축하고 말라기의 영도에 의하여 사신을 숭배하던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율법을 공부하여 신앙의 혁신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던 것과 같이 교황이 로마로 귀환한 이후의 중세 기독교인들은 루터를 중심하고 종교의 개혁운동을 전개시켜 중세 암흑시대의 암운을 뚫고 새로운 복음의 빛을 따라 신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재림예수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여온 것이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귀환하여 애급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40년 준비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메시아강림준비시대요 이 시대를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한 시대가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임으로 이 시대의 모든 기독신도들은 마치 야곱가정이나 이스라엘민족들과 같이  갖은 파란과 고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아니된다. 구약시대는 외적조건 즉 율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워 내려오던 시대임으로 메시아강림준비시대는 외적고역을 당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파사 희랍 애급 수리아 로마 등 이방에 속방되었던 것과 같이 신약시대는 내적 조건 즉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워 나아가는 시대임으로 내적인 수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문예부흥에 의한 인문주의와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르는 계몽사조 및 유물사상과 또 종교개혁에 의한 신앙의 자유 및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절규 등등의 영향으로 종교와 사상에 일대 혼란을 일으켜 기독신도들은 말할 수 없는 내적 고민을 당하는 시대다.

이 시대는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신앙의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심령만을 부흥시킬 뿐아니라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사회환경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라 생활환경이 장족의 발달을 하게되는 것도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상세계의 과학적인 생활환경을 복귀하기 위한 섭리에서 보여지는 필연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 시대는 다시 다음의 3기간으로 구분된다.

I .종교개혁기(1517~1648)     
  
중세는 그 봉건제도로부터 오는 사회적환경으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을 발휘할 수 없는 시대였다. 예언자의 사명을 다해야할 수도원도 가끔 도덕적으로 타락하였고 국민의 신앙과 안녕질서를 보장해야될 교황권은 착취계급을 옹호하는 기관으로 되어버린 때도 있었으며 교황의 과세와 교회의 간섭은 인민의 생활에 대한 압박과 개성의 자유에 대한 구속을 가중하였고 상하교직은 윤락해버렸음으로 경건된 신앙자들은 눈물과 피로써 개혁운동을 갈망치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십자군전쟁에 의하여 교황권의 권위가 상실된 후 14세기부터 이미 영국의 승려들 사이에도 태동되었었고 15세기 말에는 교황세력이 강한 이태리에서도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여 처형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교황포로는 이 운동에 박차를 가하여 마침내 마틴 루터에 이르러 비로소 무르익은 사회적 정세하에서 폭발되어 혁혁히 전개되어 마침내 신교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된 것이다. 이 혁명운동의 세력은 점차로 확대되어 불란서의 칼빈, 서서의 츠빙글리 등이 일어났고 뒤미쳐 화란 영국 스코틀랜드 등 제국으로 퍼지게된 것이다.

이리하여 이 신교운동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국제 간의 싸움은 백여년간이나 계속하여 오다가 마침내 독일을 무대로 하고 일어났던 30년전쟁이 1648년 베스트팔렌(Westphalia) 조약으로 종식되면서 신구종파의 싸움은 일단락을 지은 것이다.

이렇듯이 북구의 게르만족은 프로테스탄트로 승리하였고 나전민족의 남구는 구교의 영토로 남아지게된 것이다.

   一 .복귀섭리로 본 종교개혁의 의의           

로마를 중심으로한 가톨릭구교의 교황은 그 판도내의 모든 권력을 홀로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정신과 사상까지도 구속하고 있었음으로 인간의 모든 자유는 완전히 교권에 예속되고 말았다.

II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1648~1800)            

이 기간은 웨스트파리아(Westphalia) 강화로써 30년 전쟁이 종결된 후 불란서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약 150년 기간을 말한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교권의 기반을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얻게된 근세인들은 종교와 사상의 자유에 의한 혼란과 투쟁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같이 이 기간은 끊일 사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은 종교와 사상과의 관련성을 갖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종교 및 사상이 혼효한 중에서 인생의 제반 문제가 얽히어졌던 시대다.

그러나 복귀원리적인 견해로 보면 이 사조는 두 갈래로 지향되어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인간세계를 가인과 아벨의 두 형의 세계로 분립키 위한 탕감복귀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필연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一 .가인형의 인생관
          
문예부흥에 의한 인문주의는 자연성과 인간성의 평면적인 존엄성을 고조하였으며 이 사조는 유물주의와 합리주의에 따르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아울러 평면적인 인생관을 자아내었으니 이것이 곧 가인형의 우주관과 인생관이다.

연역법에 의한 합리주의자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와 귀납법에 의한 경험론자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홉스(Hobbes 1588~1679) 록크(Locke 1632~1704) 버클리(Berkeley 1685~1753) 흄(Hume 1711~1776) 등의 사상은 신을 떠난 이성을 존중하고 경험에 기인한 인간 중심의 철학사상이 되었다.

이 사상의 영향으로 영국에서는 초월신교가 생기고 이것이 다시 불국에서 초보적인 유물론이 되고 독일에서 계몽사상이 되었다. 이 계몽사상의 대표자들은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볼테르(voltaire 1694~1778) 루소(Rousseau 1712~1778)이며 권위와 전통과 관습을 부정하고나선 그들의 반종교적 사상은 기독교와 대척적인 입장을 취하여 가인형의 인생관을 수립한 것이다.

  二 .아벨형의 인생관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정당한 유신론적인 우주관에 입각한 자연성과 인간성의 입체적인 존엄성을 고조하여 창조본연성을 지향하는 입체적인 인생관은 아벨형의 인생관을 수립하였다.

인간의 정신면을 깊이 파고 들어 하나님의 면모를 찾아 볼 수 있는 양심의 윤리성을 강조하는 철학자들이 나왔으니 칸트(Kant 1724~1804) 피히테(Fichte 1762~1814) 쉘링(Schelling 1775~1854) 헤겔(Hegel 1770~1831) 등이다.

이와같이 철학자들이 종교적 또는 사상적 논쟁을 하는 중에 프로테스탄트교회도 일종 중세적인 스콜라 신학과 같은 경향으로 흐를 때에 이에 반항하여 종교적 정열과 내적 생명을 중요시하여 교리와 형식보다도 신비적 체험에 치중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스페너(Philip Jakob Spener 1635~1705)를 중심하고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Pietism)의 운동이다. 이 경건파의 영향이 영국에 파급되어 영국민의 생활 속에 젖은 종교심과 융화하여 종교도덕이 심히 소침상태에 빠졌던 당시에 복음파로서의 새로운 종교적 경종을 울린 교파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웨슬레(John Wesley)의 형제를 중심한 메소디스트 교파였다.

이러한 아벨형인 내적 종교사조의 주동역할을 한 사람은 폭스(George Fox 1624~1690)와 스웨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이다. 폭스는 성경을 받아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내적 광명을 체휼할 때 비로소 성서의 진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퀘이커(Quaker) 파로서 알려져 있는 이 신비파는 영국뿐만 아니라 미대륙에 있어서까지 박해를 받으면서 포교한 것이다. 저명한 과학자 스웨덴보리의 영안을 열어 그 일생을 통하여 천계의 신비의 일부를 지상에 발표하신 것은 벌써 자연과학의 세계와 종교세계와의 불가분한 연관성을 보여주시기 위한 섭리에서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같이 가인형의 인생관이 뚜렷한 방향을 취함에 따라서 아벨형의 인생관도 뚜렷이 성숙하여 왔다. 이러한 사상의 동향에 따라서 그 위에 건설되는 사회도 뚜렷이 두 형의 사회를 건설하게 되어 끝날에는 가인형과 아벨형의 두 세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2차대전이 종결되면서 공산과 민주의 두 세계는 완연히 분립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가인형과 아벨형의 두 인생관에서 맺어진 결실인 것이다. 우리가 현세를 말세라고 부르게된 이유도 이와같이 하나의 세계로 귀일하는 역사적 추이로 보아서 능히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III .정치와 경제 급 사상의 성숙기(1801~1920)        

전시기에 있어서 사상의 투쟁은 가인과 아벨의 두 형의 인생관을 수립하였고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이 두 형의 인생관은 각자의 방향대로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두 갈래의 인생관이 성숙하여감에 따라서 사회의 기구도 이 두 인생관에 입각한 사회형태로 정리되어 가면서 정치와 경제도 이상사회에로 전환될 수 있는 전단계의 것으로 성숙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불란서 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시작되어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一 .정치와 경제의 성숙

이 시대에 있어서의 정치 경제가 어떻게 앞날의 새 세계의 것을 지향하여 성숙되어가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 기간은 정치와 경제의 면에서 보아 3기간으로 구분하여 고찰할 수 있다.

1 .불란서혁명과 영국산업혁명기(40년)

피조세계 전체는 사람 하나를 표본으로 하여 그를 닮도록 창조되었지만 인간시조가 타락되지 않고 이루어야할 인간사회도 완성된 하나의 유기적인 형태와 구조와 기능을 닮도록 건설하시려는 것이었다.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다면 아담의 후손은 이러한 사회를 건설하였을 것이고 아담이후 극히 단시일 내에 6천년의 인류역사가 이루어놓은 오늘의 과학세계를 건설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이러한 사회를 잃어버리고 이러한 과학세계를 잃어버렸음으로 복귀섭리의 목적은 창조본연의 인간과 이 본성의 인간으로 조직된 사람 하나의 모양인 사회구조와 과학의 발달에 의한 생활환경을 복귀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과학문명의 세계를 복귀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인간의 형태와 구조와 기능을 닮은 사회는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인체의 모든 기관이 두뇌의 절대적인 명령에 의하여 기동하는 것과같이 이상사회의 모든 기관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에 의하여 영위되어야하며 두뇌로부터의 명령이 중추신경을 중심한 신경계통을 통하여 사지백체에 전달되는 것과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은 중추신경에 해당되는 그리스도와 그를 중심한 신경계통과 같은 성도들을 통하여 사회 전체에 유루없이 미쳐져야한다. 그러므로 인체에 있어서의 신경계통에 해당되는 국가의 정당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성도들로써 구성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폐장과 심장과 위장은 신경계통을 통하여 전달되는 두뇌의 명령에 의하여 서로 상충과 당착이 없는 원만한 수수의 작용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이 삼장기에 해당되는 입법과 사법과 행정의 삼권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완전한 수수의 원리적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사지는 인간의 생활목적을 위한 두뇌의 명령에 의하여 활동해야되는 것처럼 사지에 해당되는 경제기대는 이상사회의 목적을 달성키 위한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여야한다.

인류역사가 흐름에 따라서 사회의 발전과정은 이와같이 사람 하나의 형태와 구조와 기능을 닮기위한 노정을 밟아온 것이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과 정당과 정책의 전체적 역할을 국왕 한 사람이 전담하여오던 시대는 변천하여 국왕이 삼권 장악하고 교황을 중심한 사회가 정당과 같은 사명을 하고 정책적 사명을 수도원이 하던 시대로 바뀌어졌고 다시 이 시대의 정치제도는 불란서의 정치혁명에 의하여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으로 분립되었고 정당이 뚜렷한 정치적 사명을 갖게됨으로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완성하게 되었으니 이와같이 정치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사람 하나를 닮게하기 위한 섭리에서 이루어지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이와같이 완성된 이상사회에 있어서의 개체는 인체에 있어서의 각 세포에 해당될 것이다. 각 세포는 각각 성품이 다른 독립된 생리적 개성체이지만 서로 분리되어 다른 세포와의 유기적 관계가 끊어질 때 죽어버리는 것과 같이 이상사회에 있어서의 인간도 이 세포와 같은 관련성을 가지고 서로 맺어지게되는 것이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것도 자연과학의 고도적 발달에 따라 기계화한 다량생산에 의하여 이상사회의 경제적기대를 조성키 위함이다. 창조이상으로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종적으로 각자에게 부여된 창조본연의 가치에는 서로 추호의 차이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횡적인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서로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임으로 누구에게나 균등한 환경과 평등한 생활조건이 부여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창조이상이 실현된 세계에 있어서는 어느 한 개인이나 한 민족이나 한 국가에만 유복한 생활조건이 부여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웃의 희로와 애락이 바로 나의 것으로 반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생명있는 유기체로서 이루어진 이상사회라 할진대 이 사회의 경제기구도 각 개체의 균등한 행복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면 아니될 것이다. 이와같이 생산과 분배와 소비도 각각 그에 해당되는 인체에 있어서의 위장과 심장과 폐장이 서로 그러하듯이 과부족이 없는 유기적인 수수의 관계를 가져야할 것임으로 생산과잉에 의한 판로전쟁이나 편파적인 분배로부터 일어나는 전체적인 생활목적을 떠난 축적이나 소비가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필요하고도 충분한 생산과 공평하고도 과부족없는 분배와 전체적인 목적을 위한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으며 인체에 있어서의 간장과 같이 전체적인 기능의 활동을 위한 저축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러한 경제기대를 조성키 위한 섭리에서 영국의 산업혁명은 일어나게된 것이다. 산업혁명에 의한 다량생산은 영국으로하여금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하여 세계적인 복음전파의 사명을 달성케 한 것이다.

2 열국의 강화기(40년)            

혼란된 인생관도 두 갈래로 갈라져 성숙되어가며 불란서 정치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에 의하여 정치와 경제의 제도에 일대변혁을 일으켰으므로 이에 새로운 영향을 받은 열국도 각각 통일강화되어간 것이다. 이태리와 독일이 각각 통일강화되었고 영국은 구주 제일강국으로 강화되었고 기타 오스트리아 미국 노서아 토이기 등도 각각 강화되었다.

불란서 정치혁명의 영향으로 인하여 계급은 타파되어가며 따라서 사회조직에 격변을 일으켜 평민의 노력은 현저하게 증진되었으며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음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민주사회의 기대는 더 공고하여졌다.

  3 열국의 식민지 분할기(40년)       
     
산업혁명에 의하여 경제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날로 신기계는 발명되어 공업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되니 과잉한 생산품의 판로와 공업원료를 획득할 수 있는 신지역을 개척하기 위하여 열국 간에 식민지 쟁탈전은 일증월가하여 자본주의시대에 따르는 제국주의시대는 초래되었다.

상술한 바와같이 기계공업의 비약적인 발달과 인구의 격증은 이 시대의 부산물로서 실업자를 범람케 하였으나 이러한 시대적인 현상은 식민지 개척에 의한 세계제패의 열로 화하였으며 이러한 시대적 추세는 세계적인 복음 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특히 기독교 국가인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획득하여 세계적으로 급격한 복음운동을 전개시켰다는 것은 복귀원리에 지대한 의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나 자본주의가 초래되는 것도 하늘의 판도를 넓히기 위한 섭리에서 오는 시대적인 필연적 산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후편 제4장 제1절 참조)

십자군 전쟁에 의한 동서세계의 접촉은 지리에 관한 많은 지식을 넓혀 주었으며 나침반 사용으로 항해와 탐험이 성행하여 지구상에 숨겨진 땅을 모조리 들추어내게된 것이다.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숨기고 간직하여 두었던 미주대륙이 독실한 기독신도들의 피와 땀으로 개척되어 세계적인 복음운동의 온상이 되었다는 것도 복귀섭리로 보아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이상의 실현을 위한 미국인민들의 끝날의 사명은 지극히 큰 것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이와같이  각자의 판도를 넓히기 위한 식민지 개척운동은 교통기관의 발달에 의하여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니 이것도 가인과 아벨 두 형의 세계적인 판도를 조성키 위한 섭리에서 이루어진 현상이다. 이와같이 교통기관의 발달에 의하여 지구의 표면이 축소성을 띰에따라서 일어나는 정치 경제 군사를 비롯한 모든 면에 있어서의 혁신으로 인하여 열국의 식민지 분할정책은 더욱 활발해진 것이다.

  탕감복귀섭리로 본 세계대전의 필연성       

세계대전의 원인으로서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등등의 제조건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외적인 원인은 이미 많은 사가들이 연구하여왔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원인은 외적인 어떠한 천륜에서 빚어지는가는 아지 못하였다. 그러면 대전의 필연성을 탕감복귀섭리의 입장에서 알아보기로 하자.

인류역사는 악으로 출발하게 되었음으로 원리적 창조세계는 비원리세계로 전개되어왔다. 이와같이 사탄 편은 원리적 역사 프로젝트를 앞질러 원리형으로 전개시켜 나오며 하나님은 그 뒤를 따라 이 비원리적인 역사의 전개를 하나님 편으로 빼앗아 원리적인 역사의 전개로 전환시키면서 창조본연의 세계를 지향하여 내려온다. 참것이 오기 전에 거짓것이 먼저 참것을 흉내내어 역사노정에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원리적 근거가 있는 까닭이다. 한 진리가 나타날 때에는 그 시대의 환경은 비원리세계임으로 핍박을 당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시대가 바뀌어 원리적 역사 노정으로 전환될 때는 그것은 반드시 진리로써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적그리스도가 먼저 온다 한 것도 이러한 원리로서만 해명될 것이다.

속담에 죄 지은 자가 먼저 죄없는 양으로 발뺌한다는 말도 이러한 원리를 설명해 주는 말이다. 사탄 편을 중심한 악주권 역사의 프로젝트는 재림주의 현현에 의하여 종말을 짓고 하나님을 중심한 선주권 역사로 전환되어 새로운 역사의 전개가 시작될 것임으로 사탄은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되어 사탄편의 세계에서 하늘편의 세계에 대한 최후의 발악은 세계대전으로 유도하게 되는 것이다.

재림주의 사명은 6000년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사탄에게 내어 주었던 악주권의 전체적 역사노정을 하늘 편으로 탕감복귀하는 것임으로 1차대전으로 인한 하늘 편의 승리의 기대 위에서 세계 가나안 복귀 40년 노정은 출발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를 축복하여 죄와 상관없는 자녀를 지상에 편만하게하려하심이 그 창조 이상이었다(창 1/27). 그러나 아담의 타죄로 말미암아 아담을 중심한 이 세계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음으로 이 세계를 탕감 복귀하기 위하여 사탄 편의 아담 상징존재인 카이젤을 중심한 독일을 중추로서 사탄 편 세계형을 허락해 놓고 이것을 타도하여 하늘 편으로 탕감복귀하는 전쟁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니 이것이 제1차 대전이다. 이와같이 카이젤은 사탄 편 아담의 상징존재로서 범게르만 정책을 세워 세계를 제패할 왕위의 야망을 가지고 출현하였으므로 그가 패망한 것은 탕감복귀원리에 의하면 카이젤과 같은 하늘 편 세계의 왕으로 오실 아담이 출현함을 표시한다.

하늘적인 역사프로젝트를 사탄이 먼저 흉내내어 이루어 나오는 것이 탕감복귀 역사임으로 노서아에 공산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메시아의 재강림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중심한 그러한 세계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으로 사탄편의 재림주 상징자인 스탈린을 중심한 공산세계를 사탄이 먼저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노서아가 1차대전 말엽에 공산혁명으로 인하여 사탄국화한 것은 하늘 편 국가인 미국을 세워 1차대전이 하늘 편 승리로 돌아가게 하였음으로 그의 탕감으로 노서아를 사탄에게 내어주어 가인형의 세계를 이루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탕감복귀의 원리에 의하여 고찰하면 카이젤은 패망하면서 동시에 공산혁명이 일어나는 시기에 1차대전의 승리로 인한 복귀섭리의 기대를 조성한 터 위에 메시아 재강림역사는 태동하여 40년 세계가나안 복귀노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제2 아담된 예수님을 보내시어 첫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않은 세계를 복귀하시려다가 다시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어주었음으로 그 세계까지 사탄에게 다시 내어주었으니 이것을 다시 하늘편 세계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사탄편의 예수님 상징존재인 히틀러를 중심한 독일을 중추로 하고 형성된 세계형을 허락해 놓고 이것을 타도하여 하늘편으로 탕감 복귀하는 전쟁이 있어야할 것이니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독일이 1차대전 후 수십년 내에 세계를 제패할 야망을 가질 정도로 발전된 것도 재림역사를 시작 할 수 있는 원리적 조건이 성숙하게 되었음으로 이러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과 해와와 천사장의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세계임으로 이것을 탕감 복귀하기 위하여 제2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과 해와신성이며 따라서 어머니신성인 성신과 천사장이 합하여 역사하였으나 이 세계를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었음으로 이 세계를 다시 복귀하려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한 제2차대전은 이것들을 상징하는 하늘편과 사탄편의 국가진으로서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 편의 아담과 해와와 천사장을 상징하는 국가인 미국과 영국과 불국으로 구성된 연합국과 사탄 편의 아담과 해와와 천사장을 상징하는 국가인 독일과 일본과 이태리로 구성된 사탄 편 추축국가가 대립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1912년 11월 루덴도르프가 요구한 3군단 증설안이 독일의 제국의회에서 용납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독일도 전쟁의 절박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2차대전은 독일도 예기하지 않았던 때에 발발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이것도 신부를 맞을 수 있는 재림역사의 시기가 성숙되어 있음으로 이러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즉 초림예수의 역사가 끝난 기대 위에서 출발하여야할 재림역사 시기가 절박하여 예수님을 중심하고 이루어졌어야할 세계를 상징하는 사탄세계를 조속히 괴멸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겠음으로 2차대전이 이렇게 뜻하지 않은 때에 발발된 것이다.

사탄 편인 소련이 미영의 하늘 편에 가담하게된 이유도 하나님의 섭리로 보면 사탄 편으로 본 예수 상징인 히틀러를 중심한 세계를 괴멸하여 사탄 편으로 본 재림주 상징인 스탈린을 중심한 가인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와같이 사탄세계를 이루어주는 조건은 도리어 하늘 편을 도와 예수 상징인 하늘 편 국가진에 가담하는 결과가 되어 재림 역사를 시작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2차대전이 종료된 후부터는 재림역사는 현저한 움직임을 보여주어야하며 말세라는 의식은 점점 더 높아지고 신자의 신앙은 날로 혼돈되어 중심을 잃고 은혜를 갈망하여 헤매게 된다. 그러므로 이 때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세례요한을 따라서 산으로 광야로 찾아 헤매던 때와 같은 시대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3대시험으로 본 세계대전의 필연성을 고찰하기로 하자.

인류역사는 탕감복귀 원칙에 의하여 하늘 편과 사탄 편을 분립하시려는 섭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구한 역사를 두시고 아담과 해와로 인하여 뿌려진 선과 악의 씨를 싹트고 자라나게하여 각각 하늘 편과 사탄 편의 세계형인 열매로 결실케하시는 분립의 섭리를 하시어 세계대전에까지 이르렀다. 모세가 가나안 복귀하던 노정을 예수께서 걸어야하며 예수께서 걸어야할 세계가나안복귀노정을 전인류가 걸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로써 3차의 시험에 승리하여 세계가나안 복귀노정의 출발의 기대를 잡던 것같이 하늘편 세계에서도 재림주를 중심한 세계가나안 복귀 40년 기간에 있어서 세계를 걸어놓고 세계적으로 넘어야할 3차의 시련인 3차의 세계대전에 승리하여야 그 기대 위에서 복귀섭리를 완성하여 천주창조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1차 시험에서 개성복귀의 기대를 조성한 것같이(참고 예수 3대시험의 의의) 하늘 편에서는 제1차 대전으로 인하여 사탄 편을 분리할 수 있는 소생적 기대를 조성하였고 예수께서 제2차 시험의 승리로서 성전 주인공의 위치를 복귀한 것같이 하늘편 세계에서도 제2차 대전의 승리로 인하여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수할 수 있는 장성적 기대를 조성하였다. 이제 예수께서는 세 번째인 최후의 시험에 승리하여 사탄을 완전히 물리침으로 피조세계의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것같이 하늘편 세계에서도 제3차 대전의 승리로 인하여 사탄편 세계를 완전히 괴멸하고 천주의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게될 것이다.

복귀섭리의 종말기에 있어서는 문예부흥도 3차를 거듭하게된 것이다. 문예부흥은 복귀섭리의 평면적인 발전과정을 취해나온 것이라함은 이미 논한 바이지만 이 문예부흥은 더 평면적으로 육성되어 계몽시대를 초래하였으니 이것이 곧 제2 문예부흥이요 이것이 더 평면적인 노정으로 육성을 완성하여 유물사관에 입각한 공산세계를 초래한 것이니 이것은 제3 문예부흥이다.

중세 봉건사회를 붕괴하는 내적인 역할을 제1 문예부흥이 한 것같이 불란서 혁명을 일으켜 전제군주사회를 붕괴한 내적 역할을 한 것은 제2 문예부흥에 의한 계몽사상이었고 민주사회의 일부를 유도하여 공산독재사회를 건설한 내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제3 문예부흥에 의한 유물사관이다. 문예부흥에 의한 평면적인 발전과정은 반드시 종교개혁에 의한 입체적인 발전과정을 취하게되는 것임으로 종교개혁도 3차에 걸쳐 일어나지않으면 아니된다.

제1 문예부흥에 뒤이어 루터를 중심한 제1 종교개혁이 있었으며 제2 문예부흥인 계몽시대에 뒤이어 웨슬레 폭스 스웨덴보리를 중심한 새로운 복음과 영적 운동이 말할 수 없는 박해 가운데서 발흥된 것이니 이것이 제2 종교개혁이요 이제 제3 문예부흥에 뒤이어 또 한번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니될 단계에 머물러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기독교에 새로운 개혁운동이 일어나지않을 수 없다는 현실이 더 긴절하게 요망되고 있는 것이지만 복귀원리로 보아도 필연적인 노정으로 남아진 것이다.

이제 정치적인 면에서 일어난 변혁을 보더라도 3단계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봉건사회는 제1 문예부흥과 제1 종교개혁의 내적인 역할로 붕괴되었고 전제군주사회는 제2 문예부흥과 제2 종교개혁의 내적 원인에 의하여 완전한 하늘나라로 바꾸어지지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이제 종교와 정치의 변혁에 따르는 경제개혁도 3단계의 과정을 거치어 발전되어온 것이니 증기에 의한 제1 산업혁명이 있었고 전기와 가솔린에 의한 제2 산업혁명이 있었으며 이제 원자력을 이용한 제3 산업혁명은 오늘 우리의 당면 과업으로 남아진 것이다.

이제 제3 문예부흥에 의한 공산세계는 괴멸될 것이며 제3 종교개혁에 따르는 신정시대는 올 것이요 이 시대에는 제3 산업혁명에 의하여 고도로 발달된 원자력에 의한 경제사회가 건설될 것이니 이것이 곧 하나님이 6천년 동안 바라시고 이루시려던 에덴동산인 것이다.

   二 .사상의 성숙         

지금까지는 이 기간에 있어서의 정치와 경제가 한날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전단계의 것으로 어떻게 성숙하여왔는가를 설명하였다. 다음으로는 전시대에 있어서 가인과 아벨의 두 갈래의 인생관으로 갈라진 사상계는 어떻게 성숙하여왔는가를 알아보기로하자.
어떠한 피조물이든지 원리를 떠나서 창조된 것이 없다함은 이미 상술한 바와같다. 그러므로 유형실체세계와 그의 총합실체상으로 된 육신은 물론이어니와 무형실체세계의 그의 총합실체상으로 된 영인체도 원리를 떠나서 창조되었을 수는 없다. 유형실체세계의 원리를 캐어 그 본연의 성상을 찾아나아가는 방법을 자연과학이라하고 무형실체세계의 원리를 찾아서 그 본연의 성상을 찾아 나아가는 방법을 초자연과학이라한다.

그러면 유형실체세계는 자연과학의 원리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무형실체세계는 초자연과학의 원리에 의하여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세계는 완전한 수수의 관련성을 갖고 있는 화동의 세계이므로 이 두 세계의 자연과학과 초자연과학도 완전한 수수의 관련성을 갖고 완전히 조화되어 어떠한 상충적인 면도 없는 입체적인 과학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이 두 세계는 두 세계의 총합실체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중심하고 화동되는 것이므로 이 두 세계의 과학은 하나의 인간에서 조화되어 전체적인 창조의 목적을 향하여 동하고 정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육신과 영인체가 분리된 입장에 서게되었으므로 유형실체세계와 무형실체세계가 서로 화동하여 조화될 수 있는 입장을 취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자연과학과 초자연과학도 또한 그렇게 되어 창조목적을 지향하는 입체적인 과학을 찾지 못한 것이다. 자연과학도 그 자체만으로써 해명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복귀섭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 두 과학에 의한 두 세계의 원리를 찾아 육신과 영인체로 하여금 창조본연의 원리적인 상대기준을 조성케 하여 창조의 목적을 달성케 하려는 섭리를 말하는 것이다.

종교는 이 목적을 달성케 하려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임으로 종교와 과학이 상충적인 입장을 취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반드시 이 두 과학이 유기적인 입체적 연관성을 갖고 요구하는 목적을 지향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영인체와 육신이 완전한 수수관계로써 조화융합하는 것이 본연의 인간이어늘 이 두 면의 존재를 지배하고 있는 두 면의 과학을 조화시키는 방향을 떠나서 어떻게 본연의 인간을 찾으려는 종교의 목적이 달성될 것인가.

그러면 과학이 발달되어 인지가 밝아짐에 따라서 종교혁명이 반복되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알아야할 것이다.

종교는 두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과학과 초자연과학이 유기적인 입체적 연관성을 갖고 요구하는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므로 이 두 과학의 발달에 따라서 종교도 발전성을 갖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한 시대에 있어서의 교리는 과학이 발달된 다음 시대의 인간을 영도할 수 있는 종교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민족과 종족에 따라 각각 다른 종교를 갖게되며 같은 종교에 있어서도 시대를 따라서 많은 개혁을 하게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며 말세가 다가옴에 따라 종교가 분열되면서도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로 귀일되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총서 참조)

문예부흥 이후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라서 흐르는 평면적인 사상은 가인적인 인생관을 수립하였으며 이에 초자연과학의 발전과정을 따라 흐르는 입체적인 사상은 아벨적인 인생관을 수립한 것이다. 그리고 계몽사상기의 가인적인 인생관이 성숙하여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상체계가 나타났다. 경험론자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 실증주의 콩트(Comte 1798~1857) 진화론자 다윈(Darwin 1809~1882) 등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상을 전개시키는 동시에 포이어바흐(Feuer Bach 1804~1872)의 유물론을 채택하고 이에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성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가인적인 최종의 우주관 인생관을 만들어냈다.

이에 따라서 아벨적 인생관도 성숙하여 신칸트 학파의 빈델반트(Windelband 1848~1915) 릭케르트(Rickert 1863~1936)를 위시하여 실존주의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 키에르케고르(Kierkegoard 1813~1855) 등등의 인물이 나왔으며 영계의 사실을 지상에 잘 드러낸 인도의 성자 싼다씽이 나와서 가인적인 인생관과 대결하게된 것이다.
인류역사의 종말기로 들어오면서 이 두 인생관은 이와같이 각각 성숙되어온 것이니 여기에 천륜의 신비가 그 면목을 드러내면 이 두 인생관도 하나로 통일되고 모든 종교도 하나의 진리로 통일되며 따라서 모든 철학과 윤리 역시 하나의 완전한 진리 밑에 귀착될 것이다.

제4장  복귀섭리 완성시대(1920~)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당한 첫째 시험과 같은 시험을 세계적으로 넘어야할 복귀노정이 인류 앞에 남아진 것이 바로 제1차 대전이 발발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의 하나라는 것은 이미 상술한 바이다.

예수께서 첫째 시험에서 승리함으로써 사탄의 손에 쥐어져있던 돌 즉 말씀의 실체된 자신을 복귀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것과 같이 1차 대전의 승리에 의하여 하늘적 세계에서 사탄 편 세계를 괴멸함으로 말씀의 실체로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탕감복귀의 기대가 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1차 대전의 패전에 의하여 사탄 편 아담표시의 존재인 카이젤이 망했다는 것은 1차 대전의 승리에 의하여 하늘 편의 제3 아담을 중심한 섭리가 시작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짓것이 참것과 같은 모양으로 먼저 나타나는 것이 복귀섭리노정에서 보여지는 원리적 현상임으로 1차 대전이 종료되어감에 따라서 스탈린을 중심한 공산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은 재림주를 중심한 창조이상 세계가 이루어질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예수 이후의 사탄분립의 섭리는 이 세계를 두 형으로 갈라세우는데 이르렀고 제1차 대전이 하늘 편 세계의 승리로 돌아감에 따라 예수재림의 기대는 조성되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은 이러한 탕감복귀의 섭리로 보아서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과 성신을 중심하고 조성하여온 세계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 메시아는 재강림하셔서 복귀섭리 완성시대는 시작되는 것이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이루시는 시대임으로 완성 성약시대라고 한다.

피조세계는 원리로써 창조되었음으로 잃어버렸던 이 세계를 다시 찾으심도 원리를 떠나서는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탄까지도 강제로 굴복시키지 않으시고 원리에 의하여 자연굴복할 때를 바라서 나오시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피조세계의 주관자로 창조되었음으로 천사까지도 주관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며 따라서 사탄까지도 주관할 수 있는 기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직접주관할 수 있는 완성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기준까지 올라오게하기 위한 섭리를 하여오신 것이다. 소생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세우시어 사탄굴복의 길을 보여주셨고 장성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과 성신이 합하여 이 길을 실천함으로써 사탄 굴복의 길을 보여주셨고 완성 성약시대에는 성도들 각자가 이 길을 실천함으로써 성도들 자신이 사탄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책임이 있기 때문에 타락인간에 대한 복귀섭리도 그 제1 책임분담을 하나님 자신이 지시기 위하여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어 계시로써 인도하셨고 다음에는 타락의 책임이 아담과 해와에게 있으므로 제2 책임분담으로서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과 성신이 인간조상 대신으로 오시어서 계시로써 인도하셨고 다음에는 제3 책임분담으로서 성약시대에는 영계에 있는 전 성도들이 재림하여 지상의 성도와 합하여 사탄을 굴복시켜야한다. 그러므로 성약시대는 성도들의 시대로서 삼위신은 안식하여야할 시대다.

특히 1차대전 이후 약 40년 간은 영계와 지상의 모든 성도들이 합하여 사탄과 최후의 판가리싸움을 하지않으면 아니될 시대다.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걸은 민족적 가나안 복귀의 40년 광야노정을 예수게서 재림하셔서 되풀이하여 걷는 기간이 바로 1차대전 이후 40년 기간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 간을 민족적으로 당한 그 모든 고난을 전인류가 세계적으로 당해야할 기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광야시대」라고 하는 계시를 받고있는 것은 이러한 원리적 노정을 세계적으로 걷고있는 때인 까닭이다.

제1절 복귀섭리로 본 역사발전과 제3차대전의 의의  

선으로 창조된 인간시조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음으로 그는 선과 악의 두 성품의 모체가 되었다. 이 두 성품이 분립된 표시적 존재로서 가인과 아벨 두 자식이 있었는데 가안이 아벨을 살륙함으로 아담과 해와가 뿌린 악의 터 위에 악의 열매를 맺게되어 인류역사는 선으로 출발해야할 원리노정을 악으로써 먼저 출발하여 인류 죄악사를 이루어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개체에 있어서도 아벨적인 존재인 마음과 가인적인 존재인 몸이 있어서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여 하나님께 귀일하려하나 마치 가인이 아벨을 살육하듯이 몸은 마음의 명령을 거역하여 그의 지향하는 길을 막고 방해하여 마음과 몸의 싸움은 날마다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목적은 몸을 마음에 굴복시켜 원리적 자아의 미를 복귀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과 악의 싸움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또는 국가와 국가와의 사이에도 벌어지는 것이니 이와같이 인류역사는 선의 목적을 지향하는 선주권과 이를 방해하는 악주권 간의 투쟁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탄을 중심한 비원리세계는 먼저 이루어 나오고 있는데 인류역사의 목적은 창조이상이 실현된 선의 세계를 복귀하려는데 있음으로 사탄 편 중심인 악주권을 하늘 편 중심인 선주권으로 바꾸기 위한 투쟁은 불가피한 섭리로서 역사노정에 남아진다.

그러므로 역사상에서 전개되는 모든 전쟁과 투쟁은 먼저 출발한 악의 판도를 빼앗아 넘겨 선의 판도를 확장하기 위한 섭리에서 벌어지는 필연적 현상이다. 즉 인류역사는 사탄분리의 역사임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사탄을 분립하여 내려온 것이다. 혹은 노아심판이나 소돔과 고모라를 멸한 것과 같은 천재로써 혹은 전쟁으로 혹은 질병으로 이 목적을 수행하여 오셨다. 근시안적 견해로 보면 이 모든 비참상은 불행으로만 그쳐지는 것같이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전체적 역사 섭리로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하여 사탄을 분립하여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도 결국은 선을 목표로 하는 종교국가의 승리로 돌아갔고 종교국가가 타락하면 다른 세력으로 이것을 쳐서 경성시켜 내려왔다. 악세력이 일시 승리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도 선주권을 세우기 위한 탕감적 섭리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소유권 제도가 발달되는 것도 승리는 결국 하늘 편의 것임으로 한번 취한 것에 대하여는 사탄이 재침범치 않도록 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유물사관적 인류역사의 발전단계를 보면 이것도 사탄분별의 복귀역사와 상사의 형선으로 전개된 것을 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이 지적한 발전단계는 (一)원시공산주의시대 (二)씨족사회주의시대 (三)노예주의시대 (四)봉건주의시대 (五)자본주의시대 (六)제국주의시대 (七)사회주의시대 (八)공산주의시대로 구별하고 있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런 발전과정을 형성하였는가하는 것은 복귀섭리의 원리를 모르면 해명되지 않을 것이다.
원시 공산주의시대에서 시작된 인류역사가 다시 원시시대형으로 돌아가서 공산주의시대를 재현한다고 보는 것은 인류역사라는 것을 의미함이요 원시 공산주의시대에서 씨족사회주의시대로 떨어지는 것은 사탄편 세계를 분기하여 씨족단위로 분립케한 후 선과 악의 상통의 길을 막음으로써 선의 터를 넓히기 위함이다.

다음으로 노예주의시대가 연하여 오는 것도 분립된 소유를 보지하여 하늘 편과 사탄 편의 판도를 갈라세우기 위함이요 다음으로 자본주의시대로 전환되는 것도 사람과 재물을 취하여 각자의 판도를 넓히고 강화함으로써 서로 세계를 정복하기 위함이다.

자본주의는 일찍이 노예주의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봉건주의시대를 거쳐 그 이후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발달하여 왔다. 각국은 자본을 중심하고 서로 융흥하여 그 세력은 점차로 제국주의시대를 초래하여 세계제패의 추세를 갖게 된다.

다음으로 오는 것은 사회주의시대로서 현세를 이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논하여 공산주의시대에로의 전환기임을 지적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형태의 하늘 편 세계의 전개를 사탄 편이 먼저 흉내내어 출발함으로써 원리형인 비원리 세계를 앞서서 이루어 내려오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민족으로하여금 아말렉족을 정복하게한 것이며 여리고성을 파멸하고 가나안 7족을 패망케한 것도 사탄을 갈라세워 하늘 편의 판도를 넓히기 위함이었다. 무릇 전쟁이란 것은 이와같이 사탄 분립을 위한 섭리로서 수행되는 필연적인 현상임으로 하늘 편을 대신하여 사탄 편 세계를 괴멸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정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신자로서 사탄형의 공산주의국가를 타도하는 전쟁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는 행위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살륙행위는 마치 함 개인의 타락행위에 의하여 노아의 가정에 사탄이 침범한 것과 같이 선 자체에 사탄 침범의 조건을 성립시켜 하늘 편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불의가 되지만 사탄 편의 세계를 괴멸하기 위한 전쟁의 살륙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목적을 달성키 위한 사탄 분립의 목적을 이루는 행동임으로 정의로 세워지는 것이다.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셨으니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인가. 개체를 두고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본성본연의 자아를 복귀하는 것이요 전체성을 두고 논하자면 창조본연의 이상세계인 에덴을 빨리 복귀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훈도 결국은 타락성본성을 벗어버리고 창조본성의 자아를 복귀하기 위한 사탄 분립의 방법을 교시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야곱과 모세가 각각 하란과 애급을 떠날 때에 그들의 재물을 절취하여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온 것도 인간 도덕으로만 생각하면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복귀섭리의 원리노정을 맞추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는 행동임으로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 뜻에는 의로운 것이 되었다. 구약성서를 보면 이와같이 인간 도덕면으로 생각하여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 하나님 앞에 의로 세워진 예가 많이 있는데 그 이유도 그 모든 행동들은 바로 탕감복귀의 원리적 섭리를 맞춰야할 하나님의 뜻을 위한 행동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가인적인 존재와 아벨적인 존재를 둘러싼 탕감복귀를 목적한 싸움은 개체에서 비롯하여 가정으로 사회로 국가로 결국에는 세계와 하늘 땅으로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도 명시한 바이지만 피조세계의 주관성은 인간에게 허락한 약속임으로 가인적인 존재에게도 이 약속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하늘 편의 세계와 사탄 편의 세계를 둘 다 같이 이루어가는 노정을 취해온 것이니 제1차 제2차 대전으로 인하여 가인적 세계형으로 공산주의 세계와 아벨적 세계형인 민주주의 세계는 완전히 분립하게된 것이다. 하늘 편 세계를 대표한 미국과 사탄편을 대표한 소련이 합류되었다가 2차대전이 끝나자 완전히 대립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사탄 분립의 섭리에서 되어진 결과인 것이다. 이와같이 인류역사 이래의 선과 악의 투쟁은 공존 공영할 수 없는 두 세계의 분립으로 정리되었다. 이제 한편만 패망하면 하나의 세계의 형태는 이루어질 것이다. 세계대전은 외적으로는 유형세계를 쟁탈하기 위하여 비행기와 잠수정으로써 공중과 지상과 수중에 벌어졌던 지상세계에 있어서의 입체적인 전쟁이지만 내적으로는 무형세계를 쟁탈하기 위하여 하늘 편과 땅 편이 갈라져 싸우는 영적세계에 있어서의 입체적인 투쟁이다.

한편 가인이 아벨을 살륙함으로 인하여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파탄되어 아담을 완전히 사탄세계에로 내어주었고 따라서 에덴을 완전히 사탄주관세계에로 내어주었음으로 이것을 완전히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아벨적인 세계형인 민주주의세계에서 가인적 세계형인 공산주의세계를 타도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렇게하여서만 가인이 아벨에게 굴복한 입장을 세계적으로 탕감복귀할 수 있으며 따라서 복귀한 아담 즉 제3차 아담격자로 오시는 재림주를 맞아 잃어버렸던 에덴을 다시 찾아 인간시조가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나온 것과 같은 세계를 일시에 이루어 맞출 수 있는 것이다. 1차대전이 종료됨에 따라서 메시아의 재강림에 의하여 이루어질 하늘적인 세계를 사탄이 먼저 흉내내어 스탈린을 중심하고 이루어 나오는 것이 공산세계라는 것은 이미 논한 바이다.

그러므로 탕감복귀원리에 의하여 공산주의세계는 반드시 괴멸되어야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공생공영 공의주의세계가 도래할 것이므로 사탄편인 공산세계에서 하늘 편인 민주세계에 자연굴복하여 가인이 아벨에게 굴복한 세계적인 입장을 찾아세우지않는 한 제3차 대전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제3차 시험을 승리한 후에야 개성 복귀에서 신부성 복귀를 거치어 우주주관성을 복귀하신 것과 같이 전 인류도 이 3차에 걸친 사탄과의 세계적인 싸움에 승리한 후에야 천주복귀의 이상을 실현하게될 것이다.

제2절 6000년 복귀섭리의 최후의 실마리는 어디서부터 풀릴 것인가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여 6000년의 유구한 복귀섭리노정을 굴러 내려온 인류역사는 드디어 두 세계를 빚어 놓았다.

하나는 하늘 편이요 하나는 사탄편이다. 이제 대주재 하나님은 눈물과 피로써 엮어진 복귀섭리를 통하여 벌써 산양과 면양의 두 진영의 세계로 갈라 놓으셨다. 이제 다시 한번 능력의 팔을 드시어 산양을 멸하시면 이 때에 면양의 목자는 개가도 높이 영광 중에 현현하시리니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노랫소리와 아울러 게으른 다섯 처녀의 울음소리 이를 가는 소리 가슴을 치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케할 것이다.

이제 다시 분별의 손길은 면양에게 옮겨질 것이다. 어진 목자, 저는 바로 언젠지도 모르게 구름을 타고 오셨고 도적같이 임하신 분이시니 음성도 새로워 혹 기라하고 혹 아니라하며 하나는 따르고 하나는 배척하리니 맷돌 가는 두 여인이 서로 갈리고 한 자리에 누운 부부가 서로 떠나며 부자의 혈연이 끊기고 형제자매의 사랑이 서로 갈리며 친구의 의분이 멀어지며 사제의 관계가 끊어져 혈육의 알력과 동족의 상극 동신도 간의 핍박은 날로 심하여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종말관 그대로(마 10/34~36)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병기를 일으키게될 것이며 한 집안에서 원수가 생기에 서로 네어주게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말세의 현상은 어디로부터 시작될 것인가? 하나님은 아담으로부터 2000년을 애쓰시어서 비로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한분을 세우셨고 그로부터 번식된 이스라엘민족을 선민으로 세우심은 하나님의 뜻만을 잘 받들 수 있는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여 그 기대 위에 오신 메시아를 신종하고 순종함으로 4000년 간 섭리하신 열매를 저들로 하여금 거두게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천륜을 배역하는 것을 보시고 그리스도는 무어라고 말씀하셨나. 그들은 농장을 맡은 불의한 농부에 비유하면서 그 나라를 빼앗아 열매맺는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하시었으니 (마 21/33~44) 이것은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를 살해함으로 하늘나라를 이루어야할 사명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열매 맺는 다른 나라에게 주시겠다는 뜻이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자기를 살해할 그 백성에게는 재림하시지 않을 것을 이미 분명히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논술한 복귀섭리로써 잘 이해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자기를 배반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존재를 중심하고는 아무 섭리도 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민족에게 재림하실 것으로 말씀하심은 어떠한 이유에서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스라엘이란 명사는 얍복강에서 야곱이 천사와의 씨름에서 승리하였음으로 승리하였다는 뜻으로 받은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승리한 민족을 칭함이요 그 혈통적인 민족을 말함은 아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마음에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하지말라 내가 너희게 말하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하시리라」(마 3/9)고 말하여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계승한 자손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명시하였고 바울도 육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요 영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하였다(롬 9/6~8).

애급에서 400년 고역을 마치고난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약속한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으로 예정되었던 것이나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애급을 출발한 사람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민족은 전멸하였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치 못하였음으로 야곱의 손이면서도 이스라엘이 아니었고 여호수아와 갈렙과 그 후손만이 이스라엘의 후예로서 그의 사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왕 직후 여러보암을 중심하고 10지파로 구성된 북조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배신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멸하고 2지파를 중심한 남조 유대국만이 선민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선민 중에서도 선민으로 불리운 유대나라이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 인하여 그들도 역시 선민 이스라엘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합당하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음으로 구원의 은사는 이방인에게 돌아갔다(행 13/46, 롬 11/11). 이와같이 선민의 자격은 예수를 잘믿는 이방인에게로 옮겨졌음으로 예수재림의 영광의 혜택을 누릴 민족도 팔레스타인에서 육성되어 그리스도를 살해함으로 천륜을 반역한 아브라함의 혈통을 계승한 민족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앙을 계승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리스도의 복음의 열매를 맺음으로 영적 이스라엘된 다른 민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 날의 영광을 위한 영적 이스라엘은 어디서 부름을 받을 것인가. 사도요한은 구원의 역사는 동방에서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다(계 7/2). 계시록 6장 12절에서 여섯째 인봉의 개봉을 마치고 최후의 봉인을 풀기 전에 중간 삽경으로서 제7장을 기록하였는데 최후의 하나님의 구원의 뿔(각)이 들리울 곳은 동방임을 표시하였다. 즉 최후의 심판에서 택함을 입을 14000무리에게 찍을 인은 동방 해돋는 나라에서 천사가 가지고 나온다는 것을 명백히 표시하였다.

그러면 동방의 어느 민족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여 재림주님을 맞을 수 있는 영적 이스라엘된 혜택을 입을 것인가. 하나님은 스스로의 몸으로 창조된 인간이 타락된 후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한탄하였다(창 6/6). 그리고 이 탄식은 창조이상이 완전히 실현될 때까지 연면히 지속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뜻을 이루기 위한 뜻의 대신사명을 갖고 땅위에 태어난 어느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도 고난과 핍박의 비애를 면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신음하는 부모를 옆에 두고 단잠을 자고 있을 효자가 있을 것인가. 그러면 동방에서 오랜 역사를 두고 가장 비참한 역사를 꾸며내려온 민족은 어느 민족일 것인가. 선과 악은 하나의 사랑을 중심하고 방향을 달리한 것임으로 선과 악은 동일점에서 되어짐으로 이 점상에 입각하게 될 때 바른 방향을 취하지 못하면 선악을 분별할 수 없는 혼돈상태에 빠지게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악의 주권을 선의 주권으로 빼앗아 뒤넘겨야할 복귀섭리의 최종의 사명을 담당한 민족에게는 반드시 이러한 교차점 상에 서서 방황할 때가 올 것이다. 즉 중심을 어디다가 두어야 할는지 혼돈하여 지금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외의 그 어떤 다른 것을 자기도 모르게 찾아서 헤매게될 것이다.

그러면 동방에서 가장 혼돈상태에 빠져 중심을 잃고 침식을 잊어가면서 산으로 들로 헤매는 민족은 어느 민족일 것인가. 재강림하시는 주를 맞아 에덴 복귀의 중심이 되어야할 사명을 띠고 난 민족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민족임으로 사탄이 가장 증오하는 민족이요 하나님이 제사장 국가로 세우시려는 국가임으로 사탄이 최대의 역량을 발휘하여 파괴하려는 국가요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의 역사가 하늘 편 중심한 선주권의 역사로 교체되는 지역이요 국가요 또 민족임으로 6천년 섭리역사의 가인적인 결실과 아벨적인 결실이 이 지역에서 이 국가의 민족을 중심하고 동시에 맺혀져 하늘 편과 사탄 편이 서로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게될 것이요 따라서 인류역사 이래 미증유의 쟁탈전이 벌어져 온갖 신산고초 속에 비애의 탄식을 면할 수 없게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사탄의 증오, 하나님의 건설과 사탄의 최후적인 파괴공작이 벌어지는 곳 이곳의 분쟁이 곧 세계분쟁의 출발점이요 이곳의 평화가 곧 세계 평화의 초점이 될 것이니 전 인류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자석에 끌리는 철분같이 이 지점을 향하여 끌리워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마음이라 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으로 그 마음이 끌리지 않을 것인가. 그러면 동방의 어떤 지역의 어느 국가민족을 중심하고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바리새교인들이 주께서 어디로 다시 오시겠는가고 묻는 말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은 「주검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눅 17/37)고 하시었다. 선과 악이 하나에서 출발했으니 생명과 사망도 기쁨과 설음도 웃음과 한숨도 하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 것인가. 이제 악은 동일한 초점에서 선으로 바뀔 터이니 사망도 동일한 접촉면에서 기쁨과 웃음으로 뒤넘어갈 것이다. 이와같이 주검있는 곳에 산 사람이 있을 것이요 주검있는 곳에 모이는 독수리는 산 사람 있는 곳에 모이는 천사와 동일한 지점에서 뒤넘이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찾아오는 사탄은 바로 산 사람을 찾아오는 주님과 동일한 선에서 접촉될 것이다. 그러면 주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는 말씀은 무엇인가하면 이와같이 도탄 중에서 사망과 더불어 싸우는 민족으로써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서 그 곳으로 다시 오시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동방의 어떤 지역의 민족을 중심한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가. 몸 굽여 땅에 엎드려 비운의 민족으로 태어났음을 한탄하고 있는 사랑하는 동포들이여 이제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고 들으라 기쁜 소식을 전하겠노라. 눈물어린 눈을 닦고 보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드리겠노라. 이 땅을 바로 에덴을 지으셨거늘 당신의 눈에 보이는 땅과 하늘이 바로 그 에덴의 그 땅과 그 하늘이러니 벌써 어느 사이엔가 낡은 햇빛과 달빛은 다 어두워지고 별도 또한 간 곳 없고 천사장의 나팔소리조차 들린지도 오래거늘 구름 타고 오시마 하신 주님은 목수의 가정에  30년을 감추셨던 그 몸을 어디로 다시 오사 감추시기 몇몇해런가.

하늘도 좇아 내려온 새 예루살렘이 바로 이 땅이어니 오랜 탄식에 백발된 백두산도 눈물지어 천지요 두만강 압록수로 흘러 동해와 황해를 이루더니 금강산 보석을 등에 지고 내리지도 못한채 꿇어앉아 손모아 합장하며 신랑 맞는 기도를 올리기 6000년, 삼천리 강산 위에 삼천만 민족이 손길을 모우고 3천교단을 제물로 드리는 3·1정신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하사 몸소 계오실 장막을 한 나라 한 민족으로 하여금 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세세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리로다(계 21/3).

이제 6000년을 흘러온 눈물을 우리 눈에서 다 씻어 주시고 알파로 시작된 인류죄악사는 이 땅에서 오메가로 끝날 것이니 이제 우리는 빨리 죄악의 피묻은 옷을 빨아입고 에덴의 생명나무에로 나아가야 하리로다(계 22/14, 계 22/19). 유대 백성이 제단국가를 우리들의 손으로 다시 일으켜 다시 오시는 주님을 합당한 제물로 다시 바쳐 사망에 허덕이는 인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제단국가이길래 이 국가를 삼팔선으로 쪼개어 하나는 가인상징으로 사탄 편에 세웠고 하나는 아벨상징으로 하늘 편에 세워 놓았으니 이제 우리는 뜻맞는 헌제를 드려야 가인과 아벨의 입장을 세계적으로 탕감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 삼팔선은 인류역사 이래에 혼동되어 뒤넘이쳐 오던 선과 악을 분립하여 생명과 사망을 가르며 빛과 어둠을 분립하여 섭리노정에 맺혔던 설음과 탄식 모든 눈물과 온갖 불행을 기쁨과 웃음으로 뒤집어 넘겨야할 하나님과 사탄의 최후의 결전선인 것이다.

6000년의 투쟁역사는 이 전선에서 종지부를 찍을 것이니 이 최후의 결전에 하늘 편과 사탄편의 민족들이 총궐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삼팔전선에 모든 국가들이 참전하게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니 영원한 조국의 광복에 면목을 세우기 위하여는 이 땅에 정의의 피를 흘리고 의의 뼈를 묻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그러면 이 전선에 하늘을 대신하여 역사적인 죄악을 탕감하기 위한 정의의 피를 어느 민족이 가장 많이 흘렸는가. 아벨이 흘린 정의의 피가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듯이(창 4/10) 이 민족이 흘린 정의의 피의 호소가 가장 많이 이 전선에서 들려지고 있으니 이것은 이 민족이 바로 앞날의 영광을 누리기 위한 제물된 민족인 까닭이다.

애급에서 발단된 고대의 대륙문명은 희랍 이태리의 반도문명으로 옮겨졌고 이 반도문명은 다시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영국의 도서문명으로 종결지어야할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님 당시에 이태리 반도를 중심하고 종결지어야 할 문명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다시 대륙을 거치어 되돌아와서 한반도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는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도 그렇지만 산수의 경색과 기후의 명랑성을 보더라도 과연 동방에 오시는 주님은 이곳을 떠나 다른 지역에 없으리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기후와 바탕는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 이 땅이 하도 탐이 나서 모든 강국이 먹었다가는 토하곤하는 바람에 그 본래의 바탕은 이리저리로 찢기고 흐려졌다.

더구나 가인형과 아벨형을 열매맺어야할 역사적 사명을 띤 민족이므로 오늘의 한민족은 가장 악한 형도 가장 선한 형도 다 갖추어있다.

이제 나타난 가인형의 부분을 걷어치우고 숨어있는 아벨형의 동포들을 찾아세워 주님이 친히 나타나서 이 뜻을 이룰 수 있는 터를 닦아야할 것이다.

한민족은 선천적으로 종교심의 천품을 타고났으므로 앞날의 메시아를 대망하면서 살아온 민족이다. 그러므로 의의 왕이 배달민족에서 나와 평화의 세계를 이루리라는 신앙은 이조500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적인 고난이 심하여질수록 점점 더 깊이 이 민족의 가슴 속에 사무쳐온 것이다.

 제3절 언어혼잡의 원인과 그 통일의 필연성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노아의 가정은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세우지 못하였음으로 심판 전 인간의 타락상태에로 다시 돌아갔다함은 이미 논술한 바이다.

특히 함의 후손인 가나안족들은 사탄의 뜻을 높이려고 바벨탑을 높이 쌓았는데 셈과 야벳족속들도 이 공사를 협조하여 모두 사탄의 뜻을 이루어주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음으로 하나님은 이들을 저주받은 가나안 족속에게서 분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하셨다(창 11/7). 이것은 언어를 각각 다르게함으로 상호간의 의사를 통할 수 없도록하여 사탄 편으로 가담하는 인간들을 막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사랑의 섭리다. 복귀섭리가 점점 종말기를 바라봄에 따라서 선진국가의 언어를 학습하여 과정적인 통일의 현상을 보여주고있다. 그러나 복귀섭리가 완성할 때에는 언어도 완전히 통일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사탄의 뜻을 높이려는 바벨탑으로 언어가 혼잡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높이려는 탑으로 인하여 이 언어도 복귀되어 한 나라의 한 말로 통일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주님이 사용하시는 조국의 말로 언어는 통일되어 뜻도 하나요 민족도 한 민족이요 나라도 한 나라요 말도 한 나라말로써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이 일찍이 현군 세종대왕을 세우시사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과학적인 문자를 창작케하셨으니 이 민족을 애호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

제4절 말세에 처한 한국민족의 사명        

믿기 어려운 꿈과 같은 사실을 발표하고 보니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두렵다함은 필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이 발표를 보고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러하다. 과연 이 말씀이 나가서 각자의 가슴에 부딪힐 때 어떻게 결실될 것인가는 실로 생명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복귀섭리의 노정은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환경을 오늘날 우리 앞에도 그대로 되풀이하여 전개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메시아를 맞아야할 기독신도들은 옛날에 예수님을 받들어야할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입장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경성하여 그들이 걸었던 범죄의 길을 되밟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스라엘민족들은 예수께서 현현하시기 전까지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믿음과 소망으로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약역사의 열매요 이스라엘의 신앙의 목적체인 예수께서 현현될 때에는 이미 바라보고 믿고만 있을 때는 지나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목적체인 예수님을 찾아야할 때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 때를 헤아리지 못하고 옛날의 그 태도를 고집하였음으로 메시아를 보아도 보지 못하였으며 그 음성을 들어도 듣지 못하여 드디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까지 내어주어 자신이 지옥의 길을 걸은 것은 물론 천추만대에 원한의 터를 후손에게 남겼던 것이다. 보라 때는 왔으니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라 그를 본받음으로 구원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의 열매요 기독신자의 신앙의 목적체인 재림예수께서 현현하실 때가 되니 이미 바라보고 믿고만 있을 때는 지났다. 주 여호와는 그 은밀한 뜻을 그 모든 종에게 보이시지 아니하시고는 반드시 행하지 아니하시는 것이다(암 3/7).

그러므로 노아홍수도 120년 전부터 노아를 세워 알려주셨고 소돔 고모라를 멸하실 때도 그러했고 예수오실 때도 동방박사 목자 시몬 안나 세례요한 등등의 증거자들을 세우시어 메시아 강생을 알려 주셨던 것이다. 자녀를 구하시려는 것이 아버지의 심정이어든 신랑이 오실 때를 신부에게 알려 주시지 않을 것인가. 도적같이 임하신다고 하셨으나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게 임하지 못하리라」(살전 5/4)고도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은 즉 빛 가운데 있는 자녀에게는 반드시 그날을 알려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메시아 강생의 소리를 듣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마 2/2~3)고 하였으나 아기 예수를 찾아모시어 그를 옹호한 사람은 하나도 없지 않았던가.

오늘에도 만약 재림주 현현의 소동이 일어나며 동방박사의 증언이 들리게된다고 한들 우러러 하늘만을 쳐다보던 머리를 돌리고 발길을 돌려 그를 찾아 모실 자 가 몇이나 될 것인가? 우리는 재림주 현현의 소동이 어디서 들려오는가 조심하여 들어보자. 동방박사의 걸은 자국이 어디나 남아지지 않았나하고 살펴보자. 양치는 목자의 간 길은 어딘가고 찾아보자. 세례요한 의 음성은 어디서 들리지 않는가고 귀를 기울이자. 하늘로 구름타고 오리라고 믿던 엘리야 어찌 뜻하였으랴 인간 세례요한으로 재림할 때 2000년을 길러온 이스라엘민족은 다 넘어졌다.

그들은 육신을 벗고 보니 갈 곳은 지옥이라 생애를 두고 하나님을 봉사하던 그들의 말로가 왜이러했던고. 하늘만을 쳐다보며 재림예수를 고대하고있는 오늘의 기독신도들이여 만일 예수께서 지상에서 여인의 몸을 빌어 강생하시면 이를 믿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되었는가.

그러므로 「믿는 것을 보겠는가」(눅 18/8)고 주는 탄식하신 것이다. 그들의 받은 은사가 혹은 선지자며 혹은 병고치는 능이며 혹은 사귀를 쫓는 능을 받았으리만치 크더라(마 7/22) 주께서 다시 인간으로 지상에 태어나 오실 때 저를 반대하면 그 순간부터 그대는 지옥의 나그네될 것임을 옛날의 이스라엘민족의 말로를 보아 알아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는 이런 사람들을 보시고 「그때 내가 저희더러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아지 못하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23)고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로 그를 찌른 그 손 바로 그를 흘려본 그 눈 바로 그를 욕설한 그 입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후일에 그 분이 만민 앞에 공의로 영광 중에 나타나는 것을 볼 것이니 그때에야 어떻게 이를 갈며 애곡하는 가련한 자가 됨을 면할 것인가.

다시 오시는 주님은 새로운 말씀을 가지고 오셔야할 것이다. 재림주는 첫 번 오셔서 다 이루시지 못한 유업을 다시 오셔서 계승완성하시려고 오시는 분이시니 먼저 오셨을 때 말씀하시려다가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다하지못하고 가신 말씀(요 16/12)을 다시 오셔서 하실 것이다.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하거든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고 하시면서 믿지못할 것을 염려하시어 감추어 두신채 승천하신 주님이심으로 다시 오시면 이 하늘의 말씀을 선포하실 터이니 이런 새로운 하늘의 말씀을 전하시는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분을 주로서 믿고 따를 수 있을 것인가. 겸손한 자 중에도 가장 겸손한 자가 되어야하며 어린아이 중에도 가장 어린 아이와 같은 성품을 가져야할 때는 왔다.

인습적인 신앙관념의 탈을 쓰고 전통적인 고루한 교리에 집착되어 있음을 볼 때 주는 다시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라」고 책망하실 것이 아닌가. 형제들이여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마음의 가냘픈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새로운 구원의 음성은 형제의 가슴 속 어느 부분에 공명되어 마음의 명령으로 들려질 것이다. 옛날 제사장 교법사 바리새교인들은 이 마음의 음성을 그 지위와 명예와 권세와 전통으로써 말살해 버렸던 탓으로 메시아를 살해한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울린 숨은 신앙의 흐름은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서 토로한 고백으로 표현되었으니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려는 신앙은 역시 마음의 가냘픈 명령으로써 그들에게도 들려왔던 것이다.

말세에 하나님은 영을 많이 부어주시마고 약속하셨다(행 2/17). 그 목적은 자녀와 젊은이와 늙은이들로 하여금 장래일을 예언하며 혹은 환상으로 혹은 꿈으로 앞날일을 계시하시기 위함이다.

지금 신약의 완성시대에 처한 신앙인들 시대적 혜택을 입어 타락 직전 아담 해와의 심령기준까지 도달할 수 있는 때임으로 영계에 통하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됨은 복귀원리의 타당성을 증거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미 창조원리에서 상술한 바이지만 무형세계까지도 주관하도록 창조된 인간임으로 타락으로 인하여 그를 주관할 수 없는 입장에로 떨어졌지만 복귀섭리에 의하여 다시 복귀되어 타락전 인간의 심령기준까지 올라오면 영계를 통하게 되는 것은 자연원리로서 하등 신기한 것은 아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옛날 종의 사명으로 왔다간 선지들이 하나님과 대화한 사실을 믿으면서도 현재 예수님 앞에 신부된 우리들에게 보여지는 그 엄연한 영통의 사실은 방관시하려하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지도급에 속하는 신자들이 자기들로서는 전연 아지도 못하는 세계에서 되어지는 사실을 일소에 붙여버리려는 태도는 실로 통탄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시대의 영통인들은 현기독교인으로서는 이해못할 사실을 많이 발표하고 있다.

이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가지고 오실 새로운 말씀의 편편을 상징적으로 계시하시는 까닭이다. 우리가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이라면 새로이 영을 부어주시어 계시로써 알려주시마고 약속하실 하등의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영통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아니될 때가 왔다. 이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심혈을 경주하여 기도한 선물로서 받은 은사임을 안다면 어찌 이를 소홀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가 이제 모든 영통인들에게 권고하고 싶은 것은 이 발표의 내용의 진부에 관한 응답기도를 올려보라는 것이다.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자녀라 할진대 끝날의 생명에 관한 최후의 문제를 걸어놓고 올리는 결사적인 단판의 기도에는 반드시 응답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져야할 것이다. 만일 기도로써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영통인에게 대신 기도를 부탁하여 해결하기를 바란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기도로써 완전히 해결한 바이지만 지능만으로 그 진부를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은 하루 바삐 영적으로 해결하여 이 진리로 무장한 하늘의 정병으로 나서서 부패한 현하 기독교 혁명의 선봉의 대열에 참가하자.

기독교의 통일이 없이 종교의 통일은 기할 수 없는 것이요 종교의 통일이 없이 하나의 세계는 올 수 없는 것이다.

와서 보라. 이 진리로 무장한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성신의 역사는 옛날 마가의 다락방 120명에게 나타난 성신의 불의 역사에 비할 바 아니다. 벌써 우리는 2000년 전 그 시기에 비하여 말할 수 없이 영계에 가까워진 시대적인 혜택권내에 들어와있는 것이다. 「나를 믿지못하거든 내가 행하는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원리가 믿어지지 아니하거던 이 원리를 중심하고 일어나는 성신의 놀라운 역사와 그 결과를 보라.

설교자의 교훈은 너무도 많이 들었다. 이제는 제목만 들어도 그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들었다. 이제는 설교자의 말로는 심령의 고갈을 채울 수 없게 되었다. 사랑은 점점 더 식어가고 마음은 점점 더 클클하여 은혜의 결핍을 느껴 그 무엇으로 채워주기를 요구하여 산으로 들로 침식을 잊고 허덕이며 헤매고 있지 않는가. 바울이 이른 바 체휼적인 신앙의 갈망은 날로 심하여진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찌하여 사마리아로 갔던가. 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만을 받았을뿐 아직 성신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음으로 그들에게 성신을 받도록 기도하기 위함이었다(행 8/15).

예언도 좋거니와 환상도 방언도 성신의 불도 하늘의 노래도 좋다. 아무런 체휼적인 신앙도 없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형식적인 세례를 받는 것으로만 안심할 수 없는 때는 왔다. 때는 바로 천지가 개벽하여 뒤집혀지는 때다.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남의 아버지를 부르는 이부자식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내가 또 보매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는데 같이있는 자가 144000이니 그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그 이마에 쓴 것이 있더라(계 14/1)고 하였다. 144000무리의 하나되기를 기도하는 성도의 이마에는 주님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어서는 아니된다.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야한다. 내가 주를 알았다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안심할 시대는 지났다. 성소에 엎드려 기도만 하다가 메시아를 선포하는 세례요한의 말을 거부한 제사장 학자 교법사는 모두 지옥으로 들어갔고 그들에게 약속하였던 은사는 사마리아의 창녀와 세리와 죄인과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에게로 돌아간 것이니 지금도 바로 그 때다.

보라 지금은 바로 아버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 「이제는 내가 너를 아노라」하고 친히 아버지의 이름을 우리 이마에 기록하여 주실 것을 바랄 때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형제들이여 이제는 기도하던 머리를 들고 방방곡곡에서 들려오는 세례요한의 끝날을 최촉하는 음성을 들으라.

하나님은 이 민족이 나아갈 오직 하나의 문만을 남겨 놓았으니 이는 정치의 문도 아니요 경제의 문도 문화나 어떤 다른 문도 아니다. 오직 하늘가는 진리의 문만을 남겨 놓으시고 이 문을 지향하여 이 민족을 몰아내는 것이다. 더욱이 6·25의 동란을 거친 한민족은 육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 남은 길은 굻어앉아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는 것뿐이다.

아니갈래야 아니갈 수 없는 험한 이 길을 통하여 천국의 좁은 문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배달의 민족은 이런 돌작밭 가시길을 이리저리 쓰러지면서 갈래갈래 찢어진 피투성이 옷을 벗지 못 한 채 반만년의 길 저문 나그네의 설음의 길을 걷고 또 걸어 이제는 바로 천국문의 턱까지 당도하였다.

보라! 이제 6천년이나 굳게 닫혔던 이 문이 한반도로부터 열릴 것이니 우리는 최후의 한숨을 줄기차게 들여쉬고 이 문을 향하여 돌진함으로써 이스라엘민족이 다하지못한 사명을 우리 한민족이 기필코 이루어 드리자.

지축을 울리는 할렐루야의 찬송소리에 아울러 지극히 높은 곳에서도 천군천사 천천만성도들이 응원의 소리를 맞춰 호산나라 하리로다. 너 배달 백의의 겨레야 이제는 머리를 들고 흰 옷을 다시 갈아 입으라 눈물도 거두고 한숨도 그치라.

바야흐로 신랑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준비한 등에 불을 붙이고 다시 보라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품 속에서 포근한 잠을 자던 에덴이 예 아닌가 무화과잎도 무성한 그 사이로 보이는 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바로 그 앞길을 지키던 그룹들도 간 데 없고 무섭게 휘두르던 화염검도 이제는 걷히었다.

새 날을 약속하는 여명은 솟아나는 서광을 바라보며 어둠의 지난날을 회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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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세대를 위해서 한자로 된 낱말을 한글(漢字)식으로 고쳤다. 그 중에 속자(俗字)를 통용되는 한자로 고쳤다. 예) 울(鬱)=>欝
표준어로 고친 낱말과 띄어쓰기를 한 낱말
가마귀 => 까마귀 (p. 258)
감남나무 => 감람나무
건설코자 => 건설하고자
것과같이 => 것과 같이
겸연-적-게 => 겸연쩍게 (p. 259) - -는 임의로 넣었다.
 =>  (p. 251)가 더 어울릴 것 같지만 고치지 않았다.
구(救)하였더면 => 구(救)하였더라면 21페이지부터 고침
궤휼 =>
그러길 래 => 그러기에
기대(基台) => 기대(基臺)
나트리움 => 나트륨
남아지 => 나머지 (p. 170)
낳다는 => 났다는
너희게 => 너희에게 (p. 187, 208)
너희게서 => 너희에게서
눌리워 => 눌려
뉴-톤 => 뉴턴
 =>  (오류를 바로 잡음 p. 154)
다를 것뿐이다 => 다른 것 뿐이다 (p. 219)
닥아오고 => 다가오고
담겄다는 => 담갔다는 (p. 230)
 =>
돌고있는 => 돌고 있는
되풀이하게되는 => 되풀이하게 되는
들어내신 => 드러내신
들어내어 => 드러내어 (p. 207)
띠어서 => 떼어서 (p. 218)
로고쓰 => 로고스 (p. 214)
마땅이 => 마땅히
맞어야할 => 맞아야할
맺히운 => 맺힌
모이고있다 => 모이고 있다
못하고있는 => 못하고 있는
 =>
묵 => 묵 (묵시록 = 요한계시록을 의미하여 원문 그대로 기록함)
물론이어니와 => 물론이거니와
百% => 100%
빼앗어 => 빼앗아 (p. 266)
번개불 => 번갯불 (p. 200)
불레셋 => 블레셋 (p. 272)
 =>  (오류를 바로잡음 p. 154)
사뤄 => 불살라, 태운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생각케 => 생각하게
서슴치 => 서슴지 (p. 274)
설어 => 서러워
설은 => 서러운 (p. 187)
설음 => 설움(서러움)
수없게 => 수 없게
수없는 => 수 없는
수없을 => 수 없을
수있는 => 수 있는
수있을 => 수 있을
數字的 => 숫자적(數字的)
쓸어져 => 쓰러져 (p. 171)
아니된다 => 아니 된다 => 안 된다
아부라함 => 아브라함
아지 => 알지
아지못하면 => 알지 못하면
앉은방이 => 앉은뱅이 (p. 186)
않은면 => 않으면
어두어 => 어두워 (p. 211)
어두어질 = 어두워질
없었더면 => 없었다면 (p. 234)
에부라임 => 에브라임 (p. 246)
零 => 0 으로 바꾸어 이해하면 좋겠다
오래동안 => 오랫동안
옴겨 => 옮겨 (p. 170)
옴겨져야 => 옮겨져야
위선 => 우선으로 바꾸어 이해하면 좋겠다.
이기어서 => 이겨서 (p. 172)
이어니와 => 이거니와
이렇게되어 => 이렇게 되어
이루었더면 => 이루었더라면
一一히 => 일일이
잃어버릴가 => 잃어버릴까
있을가하는 => 있을까하는
자죽을 => 자국을 (p. 210)
잠울쇠 => 자물쇠
좋을번 => 좋을 뻔
쪼각의 => 조각의 (p. 230), 한 조각의
쪼기지 => 쪼개지
지팽이로 => 지팡이로 (p. 170)
칼리움 => 칼륨
테레비죤 => 텔레비전
~하지도않은 =>~하지도 않은
표시노정 => 전형노정으로 이해하면
푸로 => 프로그램
푸로 => 프로젝트 (p. 227), 설계
핑ㄱ ㅔ => 핑계
홀몬 => 호르몬
 제목 옆에 있는 숫자는 원문속의 페이지를 의미한다.
 198페이지~200페이지까지의 이 기록되지 않은 성구 인용은 모두 누가복음 17장~20절까지의 절을 가리킨다.
책을 보고 워드로 옮기는 과정에서 가급적 원어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애썼지만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동교회장 김정섭)
원리해설(原理解說) 서기 1957년 8월 15일 초판 서기 1962년 10월 28일 4판
[정가 200원]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1가 71의 3
저작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발행처 성화사
전화 ④3674번
(등록번호 제286호
1961·2·11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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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소 京和印刷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