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강론 - 총서(축약 훈독본)

무지... | 20180524105010

원리강론


 총 서(축약 훈독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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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불행을 물리치고 행복을 찾아 이루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러면 행복은 어떻게 될 때 오게 되는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질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욕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본의를 흐려서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그 욕망이 선보다도 악으로 나아가기 쉬운 생활환경 가운데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을 지향하는 욕망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욕망을 따라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불의의 욕망을 따라가서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누려본 사람이 어디에 있었던가 ? 
인간은 누구나 그러한 욕망을 채울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고민하게 된다. 
 
특히 이러한 본심이 지향하는 욕망을 따라 선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바로 도인들의 생활이지만, 유사이래 그 본심대로만 살다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하였으며, 또 인간의 이러한 참경에 직면하였던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개탄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선한 욕망을 성취하려는 본심의 지향성과 이것과는 반대로 악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사심의 지향성이 동일한 개체 속에서 각기 서로 다른 목적을 앞세우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간의 모순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안에 모순성을 갖게 될 때에는 파멸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모순성을 가지게 된 인간 자체는 바로 파멸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모순성은 당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존재도 모순성을 내포하고서 생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러한 모순성을 지닌 운명적인 존재였다면 애당초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모순성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파멸상태를 일컬어 기독교에서는 타락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와 같이 타락되어 자기 파멸에 이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악한 마음으로부터 오는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본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선의 욕망을 따라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의 모순성을 제거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궁극에 있어서 선과 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타락을 지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무지에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과 몸의 내외 양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인 면에 있어서도 내 외 양면의 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지에도 내적인 무지와 외적인 무지의 두 가지가 있게 된다. 
내적인 무지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무지란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자연계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내적인 무지에서 내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종교요, 외적인 무지에서 외적인 지에로 도달하기 위하여 외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과학이다. 
이와 같이 알고 보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로부터 양면의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양면의 진리를 찾아 나온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무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가지고 본심의 욕망이 지향하는 선한 방향으로만 나아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종교와 과학이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 내외 양면의 진리가 상통하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의 실제에 있어서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을 두 가지로 대별하여 본다면, 첫째는 물질로 된 이 결과의 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길이다. 
이러한 길을 지상으로 생각하고 걸어온 사람들은, 극도로 발달된 과학 앞에 굴복하여 과학의 만능과 물질적인 행복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이러한 육신을 중심한 외적인 조건만으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의 그 둘째는 결과적인 현상세계를 초월하여 원인적인 본질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어느 철인과 성현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여 우리의 갈 길을 뚜렷이 보여 주었던가? 그들이 제시한 주의와 사상이란 것은 도리어 우리들이 해결하고 가야 할 잡다한 회의와 수많은 과제들을 제기해 놓은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사회악이 또 있다. 
음란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리는 이것을 죄 중의 가장 큰 죄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오늘의 기독교 사회가 현세인들의 윤락의 길을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눈물겨운 실정인가?
 
이것은 바로 종래의 기독교가 현대인류에 대한 구원섭리에 있어서 얼마나 무능한 자리에 있는가 하는 사실을 뚜렷이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합해야만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것과 같이, 본질과 현상의 두 세계가 완전히 합치되어야만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끊어버릴래야 끊어버릴 수 없는 현실과, 떼어 버릴래야 떼어 버릴 수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육신의 행복욕은, 끈덕지게 도인들을 붙들어 오뇌의 골짜기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인들의 도의 생활에도 이러한 모순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모순성을 내포한 도인생활의 파멸, 이것이 바로 오늘의 종교인들의 생태인 것이다. 
 
이제 종교가 이와 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즉 과학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지성이 최고로 계발된 나머지, 현대인은 모든 사물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종교의 교리에는 그런 과학적인 해명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논리적이며 실증적인 것 즉 과학적인 것이 아니면 인식할 수도 없게 되어 결국 종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적인 진리에도 논증적인 해명이 필요하게 되어, 종교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통하여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시대를 추구해 나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를 타개하기 위한 사명을 각각 분담하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상충하여 서로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양상을 보여 왔다.
따라서 인간이 그 양면의 무지를 완전히 극복하여 본심이 요구하는 선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자면 종교와 과학을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주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새 진리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 신도들에게는 못마땅하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서가 이미 그것만으로써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절대적이다. 

그러나 경서란 진리 자체가 아니고 진리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교과서로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로 그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져 온 각 시대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때문에, 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와 방법에 있어서는 시대에 따라서 달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교과서마저 절대시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그 본심의 지향성에 의하여 하나님을 찾아 선의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방편으로 나오게 된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목적은 동일한 것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실 것은 성서 가운데에도 여러군데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새 진리는 어떤한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인가 ? 
이 진리는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 종교가 찾아 나온 내적인 진리와 과학이 찾아 나온 외적인 진리를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때문에, 모든 인간들을 내 외 양면의 무지에서 내 외 양면의 지에로 완전히 도달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타락인간으로 하여금 사심이 지향하는 그 악의 길을 막고 본심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 선의 목적을 이루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악 양면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순성과 위에서 이미 논한 바 종교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도의 생활의 모순성을 극복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새 진리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하여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반역하는 타락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유구(悠久)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구원하시려고 애써 오신 애달픈 심정을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싸움이 하나 남아 있으니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의 내적인 이념의 싸움이다. 
그들은 서로 무서운 무기를 마련하고 외적인 싸움을 겨루고 있으나, 그 실은 내적인 이념의 싸움의 판가리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최종적인 이념의 싸움에 누가 승리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주주의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오늘의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를 굴복시킬 수 있는 아무런 이론도 실천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완전히 이루어지려면 바로 이 새 진리가 지금까지 민주주의 세계에서 주창해 온 유심론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켜 유물론을 흡수함으로써, 온 인류를 새 세계에로 옮겨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진리는 역사 이래의 모든 주의나 사상은 물론, 모든 종교까지도 하나의 길로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종교를 믿지 않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와 내세의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적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만 한다면 믿으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궁극의 목적을 세우고 나아가는 그 누구도 마침내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역시 인간의 천성의 발로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고, 인생의 근본 목적을 현실세계가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 두고 가야 함을 깨달을 때에는, 인류는 한 하나님 아래 하나의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인생의 양면의 무지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쳐 온 인간들이, 그 암흑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진리의 빛 가운데서 함께 만나 가지고 하나의 대가족을 이룬 세계이다.
 
그런데 진리의 목적이 선을 찾아 이루려는 데 있고, 선의 본체가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그 진리에 의하여 도달된 이 세계는 바로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서로
형제애로 더불어 사는 세계인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웃을 희생시킬 때에 느껴지는 불의한 만족감보다도,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오는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는, 결코 그 이웃을 해칠 수 없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형제애가 솟구칠 때, 도저히 그 이웃에 고통을 끼치는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의 일거일동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부모가 되시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그 사회의 인간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이 새 진리가 인류 죄악사를 청산한 새 역사의 시대에서 이루어 놓은 새 세계는,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범죄를 하게 되었던 것은 실상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어디까지나 관념적이요, 실감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성을 실감하는 자리에서 범죄한 인간은 부득이 지옥으로 보내질 수밖에 없는 천법을 안다면, 거기에서 누가 감히 죄를 범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죄 없는 세계를 천국이라 할진대, 타락인간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찾아 나온 이 세계야말로 바로 그 천국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천국은 지상의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지상천국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지상천국을 이루시려는 데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따라서 새 진리는 타락인간을 그 창조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복귀과정에 있는 타락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야 된다. 
상징과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성서의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이미 예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 바와 같이 비사로써가 아니고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밝히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진리로서만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는 성구를 저마다 각양각이하게 해석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교파 분열을 지양하고, 그것들을 통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이 최종적인 진리는 어떠한 경서나 문헌에 의한 종합적인 연구의 결과로나, 혹은 어떠한 인간의 두뇌에서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성서에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이 땅 위에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한 분을 보내셨으니, 그 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이시다. 
이 분은 수십 성상을 두고 역사이래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창망한 그 무형세계를 헤매시면서 하늘만이 기억하시는 진리 탐구의 피어린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인간으로 걸어야 할 최대의 시련의 길을 다 걷지 않고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최종적인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원리를 아셨기에 선생은 혈혈단신으로 영계와 육계의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의 수많은 성현들과 자유로이 접촉하시며, 은밀히 하나님과 영교하는 가운데서 모든 천륜의 비밀을 밝혀내신 것이다.


 * 원리강론 총서의 색도 부분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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