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에서 타락성 유발

무지... | 20171015065711

  생활 속에서 타락성 유발

 

타락한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타락성을 유발하여 하늘과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므로 무지 가운데 빠져 자신이 타락성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른채 종의 근성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타락성은 원래 본성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타락성이란 인식을 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타락성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 허다합니다.

이렇게 타락성은 본성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어서 그것을 생활 속에서 분석하는 것이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또한 타락성인줄 모르고 타락성을 유발하여 종의 근성으로 살아간다면 타락성을 벗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에 본인은 나름 타락성을 극복하기 위한 고민으로 생활 속에서 타락성을 유발하는 것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1, 상대의 장점을 보려 하지 않고 단점을 찾아낸다.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타락성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개성진리체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창조해주신 가치를 망각하고 어떤 상대가 언행 하는 것을 보고 칭찬을 하기보다는 상대의 단점이나 문제점을 먼저 발견하거나 찾아냅니다.

그리고 더 타락성이 강한 사람은 주저 없이 상대의 단점이나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방하여 이기려고 합니다.

결국 심령 성장의 절대 해악인 비판의 길로 가서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셨고(마 7:1-5 ), 아버님도 비판은 자신을 망하게 하는 길로 간다는 말씀을 주셨지만 단점을 찾아내는 자는 쉬이 비판의 길로 가고 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은 나의 타락성을 찾아 뿌리뽑기 위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의 잘못을 깨우쳐 선으로 하늘 편으로 인도하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이는 하나님의 입장을 취한 하늘 편 마음이어서 본성의 발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잘못하는 것을 깨우쳐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대신 사랑하려는 입장, 최소한 아벨의 심정은 가지고 상대기준을 먼저 조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길 참조) http://cafe.daum.net/rainbowKINGDOM/Gve8/2

(내가 가야할 아벨의 길) :http://cafe.daum.net/rainbowKINGDOM/Gve8/8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여 깨우쳐주려고 했을 때 상대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나는 상대의 심정을 유린한 것이 되고 나 자신은 상대를 비판한 입장이 되어 타락성만 유발한 결과가 되고 상대를 더욱 악으로 가게 만든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악을 번성시킨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상대를 깨우쳐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상대가 나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기대를 우선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잡아 살려주려고 하는 심정을 가졌다면 먼저 상대의 장점을 찾아 3배 이상 10배까지 칭찬을 해서 자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대기준을 조성한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보다 더 나은 것은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상대의 장점을 찾아 그것을 칭찬해주어 상대가 스스로 단점을 극복하게 인도해야 현명한 본성의 길인 것입니다.

왕님께서는 늘 개개인의 장점을 칭찬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본성에 다가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자기도 모르게 남을 주관하려 한다.

우리는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늘 관계 속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과 맞닥뜨립니다.

그럴 때마다 상대를 자기 구미에 맞게 고치려 합니다.

'너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잘못된 언행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바로 상대를 자기도 모르게 주관하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타락성은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본성의 그림자여서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이렇게 자연스레 타락성을 유발하는 것입니다.(타락성을 벗기 어려운 이유 참조 )

http://cafe.daum.net/rainbowKINGDOM/H0A2/75

 

지난 번 기고에서 인간의 주관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관)

http://cafe.daum.net/rainbowKINGDOM/H0A2/82

인간이 인간을 주관하려는 것은 바로 종인 천사로부터 물려받은 종의 근성(타락성)입니다.

설사 상대방이 잘못하더라도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나를 따라오게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따라오지 않는다고 질책을 하면 이는 과분한 욕망에 의한 억지 주관이 되어 독재적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자신도 올바른 길로 가지 못하면서 상대가 잘못하는 것만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상대가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행위를 할 때 '너 왜 그렇게 하느냐,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의 자유의지에 의한 자유행동을 간섭하는 행위가 되어 자기도 모르게 상대를 내 주관 아래 두려고 하는 타락성을 유발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을 간섭, 주관하려는 타락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바로 자기도 모르게 상대를 주관하려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말씀만 주셨지 따먹는 행위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고 복귀섭리를 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3.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고 판단한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많은 상대적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관계 속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들은 대로 판단합니다.

즉 보고 들은 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할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보고 듣고 판단하면 타락으로 무지에 빠진 그 눈 그 귀로 보고 듣게 됨으로 바로 타락성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6000년 복귀섭리의 결실체입니다.

더구나 그 열매로 결실된 축복가정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 귀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그냥 보고 들은 것으로 판단하게 되면 여지없이 타락성을 유발하여 사탄이 역사할 수 있는 상대기준을 조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기준이 바로 6000년 복귀섭리의 결실체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 하나님께 문의하고 결제를 받아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를 만드시기 훨씬 전부터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만물을 있는 그대로 대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인간이야 두말할 나위 없겠지요.

 

창조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분신으로 유일무이하고 하나님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즉 각자 개성진리체로서 다양한 실체하나님(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분신, 제2의 하나님으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실체하나님을 대해 우리가 함부로 보이는대로 들리는 대로 판단하고 대한다면 이는 사탄이 좋아하는 타락성의 유발인 것입니다.

내 귀로 듣고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하면 타락성이요, 아버지의 성령의 귀로 듣고 아버지의 성령의 눈으로 보아야 본성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소리를 듣고 마음의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의논해서 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말씀 참조)

 

우리 성가에 '카메라의 후렛쉬도 심판 날을 고 하누나'고 했습니다. (성가 11장, 고난과 새 생명, 4절)

내 눈으로 내 귀로 본 대로 들은 대로 판단해도 타락성을 유발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렇게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종의 근성을 유발하여 하늘과 멀어지는 행위를 할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 자신의 심령이 늘 아버지의 성령 가운데 거하게 하지 않으면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상대를 보고 나를 보기 어렵게 되어 있고 우리의 귀는 상대의 소리를 듣고 나의 소리는 듣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을 뜨고 심령의 귀를 열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하나님께 나아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서나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나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작성자: 무지개왕국 종족왕) 


말씀

 

만일 하나님이 받기 위해서 섭리해 나오셨다면 이 땅은 망하는 것입니다.

주기 위해서 나오신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아들을 고대해 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죄지은 자를 어떻게 동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가 지은 죄를 나무라기보다 그를 동정하는 마음이 앞서서 그 죄를 잊어버리는 자리까지 어떻게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 여자는 무엇을 잘못했다고 말하거나 저 남자는 어떻지 하고 결점을 들추기 전에 먼저 불쌍한 마음이 앞서는 심정적 자세가 갖추어지면 하늘의 역사는 발전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인류를 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에 여러분도 그런 마음으로 불쌍한 자를 구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책임자의 사명입니다.

구해 줄 때에는 구원받는 사람의 힘보다도 내 힘을 더 소모시키고, 그 사람의 소원보다도 내 소원을 더 가중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구해 준 후에 내가 보람을 느낀 것을 상속해 주어야만 구원받은 사람도 산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족적인 메시아의 사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집 29권178-179쪽)

 

선생님은 “마음보고 의논해서 살아라.” 하는 거예요.

어려운 일이 있게 되면 “마음아, 너는 하늘의 제일 귀한 것을 나에게 붙여준 부모 대신이요, 하나님 대신이요, 주인이 아니냐?” 그러면 마음이 맨 처음에는 이런다는 거예요. (표정을 지어 보이심)

그러다가 점점점 하게 되면 좋으면 이러고 나쁘면 이래요.

이쪽을 보게 되면 좋은 사람은 이러고, 나쁜 사람은 이런다는 거예요. 그렇게 가르쳐줘요.


그 다음에는 마음속에 가만히 명상만 하고 있더라도 음성이 들려와요.

“그 녀석 그거 도적놈의 새끼인데 둬두고 봐라. 3년 후에는 너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나타날 것이다.” 그래요.

그러니 그런 곳을 가지를 않아요. 안 가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요.


내가 남미에 갈 때에 기성교회, 신교 구교가 합해 가지고 문 총재를 잡아 가지고 없애려고 한 거예요.

“저 사람을 저렇게 둬둘 것이 뭐야? 몇 사람만 해 가지고 없애버리면 되지.” 그래요.

없애겠다면 가는 길 앞에 복병을 두어 가지고 순식간에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차를 타고 가면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스트레이트(straight; 곧바로)!” 그래요.

입이 말을 해요. 가다가 “왼쪽으로 돌아라.” “바로 가라.” “낮추어 가라.” “똑바로 가라.” 한다는 거예요.

그걸 선생님이 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려운 길을 피해 가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거기에 지키던 사람들이 “참, 어쩌면 그렇게 피해 가지고 가느냐?” 하는 거예요.

몇 십 리도 아니에요. 몇 미터 딱 전에 샛길에서 갈라져 가지고 딱 돌아가 버려요.

그게 무슨 재간이냐 이거예요.

그것 모르면 문 총재를 그렇게 잡으려고 하지 말라 이거예요.

그렇게 혼자 싸워 왔습니다, 혼자. 지금도 그래요.

여러분하고 의논 안 합니다. (선집 614, 237-238)

 

마태복음 7: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