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휼과 실천(아버님의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말씀과 요점 정리, 上)

무지... | 20170901231855

체휼과 실천(말씀 요점 정리, 上)
(아버님의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방법과 과정에 대한 말씀을 발췌해서 요점 정리를 해서 올립니다. 두 차례에 걸쳐 올리도록 합니다. 아래에 말씀 원문 첨부했습니다.)


신앙은 체휼을 해야 합니다.
체휼은 영적인 것이며 체휼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어떠한 내정적 심정의 인연을 갖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체휼 신앙을 한 사람은 그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체휼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이 아닌 내 마음에서부터 입니다.


1. 기본 자세


그런데 모든 사람의 본성은 다 다르므로 각자 주체 되는 하나님 앞에 수평을 맞추고 수직으로 서서 영점을 잘 맞추어야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이 있는데 그 문도 돌면서 이동하기 때문에 본인이 기도 등을 통해 하나님과 감응의 도가 가까운 시간을 찾아야 합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마음의 영점이 0도가 아닌 180도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돌려서 바르게(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 여러 사람이 있지만 영점을 찾아 하늘과 마음 문을 맞추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스스로 하늘과 마음 문이 열리는 때를 알아서 맞추는 신앙생활 태도가 필요합니다.


2. 암시


마음 문이 맞춰 지게 되면 입체적인 느낌, 암시 등을 받게 되고 춘하추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세계도 변화하는 감도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많은 기도 생활을 통해서 지금 때가 어떤 때에 처해 있는지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암암리에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일(암시)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말하는데 ‘아!’ 하고 무엇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3. 몽시, 꿈, 환상, 계시, 지시 등


그리고 몽시나 꿈, 음성 등이 오관의 감각을 통해 느끼게 됩니다.
몽시란 마음 상태가 공명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가는 것인데 비몽사몽 간에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것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말고 실체로 연결되는 것을 데이터를 내고 결과를 분석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영적 차원에 있어서 마음 상태가 공명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보고 직접 지시가 내릴 수 있는 단계로 발전합니다.


4. 공명권


이렇게 체휼과 실천은 생명의 인연을 가져와서 마음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하여 마음의 차원이 높아지게 되면 기도를 할 때 마음속에서 공명이 되듯이 마음속에서 말하는 것을 내가 듣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자는 관계된 모든 사람을 무심코 대하지 말고 언제나 배고픈 심정으로 대하며 마음속에서 무엇을 갖다 줄 것인지 찾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관계된 상대가 주체적인 존재인지 대상적인 존재인지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느껴서 알게 되는데 그것을 심파라고 합니다. 마음의 냄새를 맡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자는 관계된 모든 사람이 다 나와 더불어 관계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타락은 모든 관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부단히 개척하는 자세를 가지고 찾아야 그런 환경이 개척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암시적인 단계를 거쳐 계시적 단계를 지나 묵시적 단계에 도달합니다. 
묵시 단계는 하루 종일 영계에 들어가서 체험을 한다든가 하는 그런 세계에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에 대한 생활적인 감정권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체휼적인 신앙을 안 가지고는 위대한 하늘의 뜻의 결과세계를 우리의 생활무대에 적용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적 역사의 과정을 통해 육신을 순화시켜 나가야 우리 식구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역사를 합니다.  


영적인 힘이 찾아 들어오게 되면 우리 의식보다 강한 힘이 들어오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초인적인 감정이 찾아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타락성을 지닌 타락한 인간은 이러한 본연의 심성, 본연의 하나님의 신성과는 반발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 앞에 어떤 신의 성품이 강력하게 들어와도 자연적으로 순화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기 때문에 점점 개척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힘이 점점 강하게 작용하게 되면 그것이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자꾸하게 되면 타락성 그 자체가 전부 순화되어 가지고 100%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가 없이 하늘이 가르쳐 주는 것을 느낌으로 다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단계에 들어가면 누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려고 하는데 말을 못 하게 한다거나 혹은 좋은 말로 그 사람을 위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책망의 말이 나오는 거예요.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구요. 


이렇게 신앙생활에서는 암시로부터 시작해서 몽시.환상, 계시, 지시 등의 체휼적인 신앙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체휼과 실천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


원문 말 씀(상)


체휼과 실천


우리 자체들은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이라는 것은 자기가 체험하고 깨닫고 가는 길이 아니 되어 가지고는 일생을, 혹은 생애를 걸고 갈 수 없는 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을 듣고 그 말 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반드시 그 말을 중심삼고 체험을 통해 실제 사실인가 아닌가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입장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말씀을 듣고, 혹은 성경을 보고 다 배웠지만, 배운 그대로의 사실이 내 자체에서 형성되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체험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신앙의 대상은 보이지 않는 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신앙해 나가기 때문에 그 주체 되는 신앙 자체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것이 확실하게 현실적으로 우리가 몸으로 느끼고 만져 가지고 체험할 수 있는 내용으로 나타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척 보는 것과 같이, 우리가 평면적인 입장에서 느끼는 것과 같이 그렇게 실감적인 입장에서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동시에 무형적인 주체를 상대로 하니만큼 그 자체와 내 자체가 체휼적인 체험 단계까지 나가기란 쉬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체휼은 반드시 우리의 신앙생활에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체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서 알 수 있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어떠한 내정적 심정의 인연을 갖는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체휼의 길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행복감을 느끼고, 또 신앙생활을 통해서 보다 이상적인 새로운 소망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이 체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체휼 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독교 역사를 보더라도, 4백년 로마 박해시대에 있어서 그런 핍 박을 받으면서 사자의 밥이 되면서 신앙길을 꿋꿋이 갈 수 있었던 것은 막 연한 입장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건 반드시 그러한 자리를 넘어 갈 수 있는 체휼적인 내용, 그들에게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 환경이 그들을 제압할


121


수 있는 그런 여건이 될 수 없게 한 사실적인 입장에 선 그 자체가 순교의 길도 무난히 넘을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베드로나 바울 같은 양반들이 어려운 문제를 맞이할 적마다 반드시 하늘 앞에 기도를 했고, 그 기도를 통해 하늘은 지시를 했 습니다. 어디 어디로 가라든가 가지 말라든가 하는…. 이러한 내적인 신앙 생활의 기조가 반드시 있었다는 것은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아는 바입 니다. 이와 같은 생활의 기반이나 그런 전통이 각자에게 있으면 있을수록 그 사람은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체휼을 통한 사람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새로운 역사적인 일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반대한다 하더라도 자기가 내적으로 체휼하고, 또 그것을 경험한 그것이 오늘날 실천세계에 있어서 환경에 적용되는 사실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그 사람은 강하게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지 못하지만 자신은 출발함과 동시에 그 사실을 믿을 수 있 고,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결과 이후의 것까지도 예상하면서 강하 고 담대하게 환경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체휼 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체휼이라는 것입니다. 체휼의 길은 마음의 영점 기준을 맞추는 데서부터 시작해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이 잘 알겠지만 체휼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생각 해 봐야 되겠습니다. 대개 이 체휼의 길은…. 우리가 신앙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흠모하는 그런 입장에 서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호하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되느냐? 이 문제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서부터? 주체가 확정돼 있지만 내가 느낄 수 없다 이겁니다. 우리가 이 오관으로 알듯이 그렇다 하는 것을 확정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디서부터 살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그 주체로부터 살필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살필 수


122


체휼과 실천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로부터 살펴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 자체를 중심삼고 볼 때, 나라는 존재는 몸과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있는데 몸을 중심삼고는 이것을 살필 수 없습니다. 결국은 마음을 중심삼고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무리 인간들을 두고 볼 때, 그 마음 자체가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전부 다 같으냐? 그 바탕은 같을지 모르지만 마음 자체는 소성(素性)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하나의 원형을 그린다 하게 되면, 수평선을 그어 가지고 여기에서 1 2도 해 가지고 쭉 십 자를 그음으로 말미암아 360도의 원형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나의 수평 선을 긋고 하나의 수직선을 긋는 여기에서 90각도의 분별의 도수가 정해 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우리 마음이 원형과 같은 입장에 있으면 이것을 어떻게 긋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수평선은 긋는 사람에 따라 그 수평선의 형태는 각각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본성도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 영도에서부터 360도를 그어 나가는 데는 반드시 도수는 이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수가 가산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360도 형태와 우리 마음이, 마음 바탕이 이런 원형이라면 그 각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전 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같지 않다는 거예요. 그것은 왜 그러냐? 우리 얼굴이 다르고 우리 취미가 다르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다른 거와 마찬가지로 그 도수를 그릴 수 있는 평형선과 수직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되어 있으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돼 있고 그것이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도수를 맞추어야 된다 는 결론이 나와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영점 자리를 찾아야 돼요. 영점 자리가 어디냐? 그것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체에, 그 마음의 심성을 이와 같 이 표시하면 반드시 영점이 있다 이거예요. 영점이 있어서 그 영점 자체를 수평선으로 한다면 그 수평선을 중심삼고 어떠한 수직선이 그어질 것입니 다. 하늘이 주체라면 그 주체 앞에 내가 대상적인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주체 되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대상으로서 감응할 수 있는 바탕을 반드시


123


주었기 때문에 평면적인 마음 바탕의 기준 앞에 수직으로 향하는 그러한 방향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반드시 있다는 거예요.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평선을 보게 된다면, 이건 평면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이 수직으로 서게 되면 이 수직선의 기준이 전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점 기준을 어떻게 맞추느냐 이거예요. 이쪽으로 가면 반드시 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 영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발전소에 가 보면 미터기가 많이 있어요. 미터기에 영점 기준과 같은 것이 있어 가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가감의 조정을 해서 그 방향이라든가 힘이라든가 양의 기준을 잡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영점 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영점 기준은 어떤 자리냐?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날 참선을 하는 사람들이 무아경이라든가 하는 말을 쓰는데 그것도 역시 그런 경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영적 기준에 접근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이 되게 되면 반드시 자기의 수평선 기준이 반응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마음 문과 내 마음 문을 맞추는 생활이 중요해


그렇기 때문에 마음도 보면 뭐라 할까요, 마음의 문이 있습니다. 심문 (心門)이라고 하지요? 마음의 문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문이 언제나 한 면으로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자체가 돌고 있기 때문에 그 문도 이동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신이 있으면 신을 중심삼고, 플러스면 플러스를 중심삼고 마이너스 입장에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각도, 방향이 틀리게 되면 이것은 작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사람에게는 이런 심문이 있습니다. 마음 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해 보면 아는 거예요. 기도를 해 보면 말이에요, 시간에 따라 느낌이 달라요. 새벽 한 시에 기도하는 것하고 세 시에 기도하는 것하고 달라요. 그건 여러분이 체험해 보면 알아요. 신비스런 깊은 경지에


124


체휼과 실천


들어가서 기도해 보면 기도하는 시간에 따라 다르다구요. 느낌이 다르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아요? 아침에 느끼는 것하고 대낮에 느끼는 것하고 저녁에 느끼는 것하고 밤에 느끼는 것하고 다르다구요. 그와 같이 우리의 마음 상태에 있어서도 느끼는 그 기준이 우리가 육체적인 감정을 가지고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상대적인 면의 느끼는 감도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세계도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데도 어떤 시간에 잘 되는지를 알아야 돼요. 잘 되는 시간,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감응의 도가 가깝다는 거예요. 잘 된다 하는 거기를 점점점점 들어가게 되면 문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마음의 문과 인간의 마음의 문이 딱 맞아 가지고 같이 어느 기준까지만 맞추어 돌아가는 날에는 하나님이 느끼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길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와 같은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마음을 중심삼고 마음을 닦아야 됩니다. 마음의 상태를 우리가 찾아봐야 됩니다. 이것이 원래는 이 기준이 영점에 있어야 할 텐데 타락했기 때문에 이것이 180도에 와 있다 이거예요. 이 도수가 영점에 있어야 될 텐데 제 멋대로 되어 있다구요, 제멋대로. 그렇기 때문에 이걸 돌려 가지고 이렇게 정상적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시며 말씀하심)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이에요, 영점이 여기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시계바늘 가는 방향으로) 돌아서 가야 하는데, 이것의 거리가 가깝 기 때문에 이 영점을 중심삼고 이렇게 움직이면 마이너스적 감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렇게 (시계바늘 가는 반대 방향으로) 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면 천년 가도 안 됩니다, 천년 가도. 이것은 되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형상이 벌어진다구요. 오늘날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도 목적의 때에 대해서는 끝날이다, 말세다 하는 것을 다 가려야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전해 내려온 종교는 이렇게 가면 되지만, 이 자리에 와 머물러 있으면 이렇게 돌아가면 되는데, 만일 반대로 여기 있으면 이 종교는 끝날이 되게 되면 깨깨 당한다 이거예요. 어떤 사람은 각도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그 자리로 가려면 반대의


125


길을 가게 되는 현상도 벌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벌어진 종교도 있지만 사탄의 뜻을 중심삼고 벌어진 종교도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전부 다 이렇게 섞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려 가지고 가기란 지극히 어렵다는 거예요. 이와 같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세계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마음도 선한 마음이 있음과 동시에 악한 마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자신들의 마음이 ‘ 나는 선하다.’ 아!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마음 자체도 선하지 않다 이겁니다.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악한 마음권, 악한 사탄권에 감염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고 선한 권내의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천태만상의 차이로 벌어진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이 영도를 어떻게 찾느냐, 영도를? 영도를 어떻게 찾느냐? 마음 문을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 과정에서 언제나 주의해야 할 것은 마음 문이 열리는 때를 알아서 하늘의 마음 문과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언제나 준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이 시간이 마음의 문에 맞는 시간이 아니냐. 혹은 학생이면 공부하는 이 시간이 혹시나 그런 때가 아니냐. 혹은 내가 세상을 잊고 재미있게 노는 그 시간이 그런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언제나 수시로 찾아 맞추는 생활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심도를 가려 가면서 마음 문을 열게 하고, 그래 가지고 하늘이 향하는 문과 어떻게 일치화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문이 맞추어지면 입체적인 느낌, 암시를 받게 된다


점점점점 이 상대적 입장에 서면 무슨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입체적인 느낌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인지 모르게 온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겨울과 같은 기분만 느꼈는데 가을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고, 가을과 같은 기분만이 아니라 여름과 같은 기분도


126


체휼과 실천


느껴지고 봄과 같은 기분이 느껴지는 거예요. 왜 그러냐? 이 우주는 돌고 있다는 거예요. 마음도 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돌면서 춘하추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의 세계도 돌면서 그와 같이 변화하는 감도를 느끼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것이 일년을 두고 보면 사시, 춘하추동이 있지만, 일년을 축소한 것이 하루인데 하루에도 춘하추동이 있다 이거예요. 아침은 봄에 해당하는 것이요, 낮은 여름에 해당하는 것이요, 저녁은 가을에 해당하는 것이요, 밤은 겨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춘하추동의 계절적 형태가 하루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사이에. 또 아침이면 아침을 두고 보더라도 봄과 같은 계절도 그렇습니다. 거기에서도 봄과 같은 아침을 느끼고, 여름과 같은 것을 느끼고, 가을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고, 겨울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큰 것은 큰 것을 중심삼고 단위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작은 것도 상대적인 그 단위의 형태를 각자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느껴지는 느낌이 언제나 같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계절을 따라서 자기가 봄이다, 봄 절기다 하는 것을 알면 좋지만 모른다는 거예요. 또 여름 절기다 하는 것을 알면 좋지만 그걸 모른다는 거예요. 혹은 겨울이다 하는 걸 모른다구요. 이것을 많은 체험을 통해서, 많은 기도생활을 통해서
‘ 지금 때가 어떤 때에 처해 있구나.’ 아! 하는 걸 가릴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어떠한 현상이 벌어지느냐? 여러분은 대개 그렇잖아요? 우리 말에 암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암시라는 말이 있지요? 암시!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길을 무심코 쓱 가는데 어떤 좋은 집 담벽에 앉아 있던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을 때, 새는 날아갔지만 퍼뜩 새가 날아가는 그 자체를 보게 될 때 그 마음의 문이 딴 것으로…. 그 사실을 통해서 암암리에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 그런 형태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거예요. 암시적 조건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말하는데 ‘아!’ 무엇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점점점점 많아진다는 거예요.


127


몽시란 마음 상태가 공명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감을 나타낸다


이 단계를 지나가게 되면 어떠한 형태가 벌어지느냐 하면, 몽시 같은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꿈 가운데 일어나는 일인데 꿈도 깊은 잠 가운데서의 꿈이 아니라구요. 비몽사몽간에…. 바울 같은 양반도 비몽사몽간에 3층천을 체험했다구요. 꿈 같기도 하고 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꿈 안에 있는지 사실 안에 있는지…. 옆에서 누가 말하는 것을 다 들으면서, 3분의 2는 캐치하면서, 비몽사몽간에 그런 현상이라든가 혹은 음성이라든가 하는 것, 이 오관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감각이 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런 걸 무심코 흘려 보내지 말라는 거예요. 그걸 종합해 가지고 어떤 방향의 인연을 나에게 연결시키기 위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과학적인 면에서 데이터를 내라는 거예요. 일생동안 매일매일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반드시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잊을 수 없는 몽시 같은 것은 백 퍼센트 적중한다 이거예요. 그런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몽사몽간에 누구하고 얘기하고 있는데, 어떠한 사람이면 사람, 물건이 면 물건이 그 꿈 가운데 인연돼 있지만 그것이 사실 가운데서 실체로 연결 된다는 거예요. 내가 꿈 가운데서 누구하고 노래를 하고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 꿈 가운데 노래가 아니고 옆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가 그 노래였다, 이런 사실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영적 차원에 있어서 마음 상태가 공명(共鳴)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음차(音叉; 소리굽쇠)라는 것이 있지요, 음차? 공명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지극히 귀하게 여겨야 돼요.


체휼과 실천은 생명의 인연을 가져온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말이에요….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이 어디에 나타나느냐? 공중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과 내가 둘인 것을 알아요. 딴 존재인


128


체휼과 실천


것을 안다구요. 여러분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지요? 왜 그러냐 하면 마음이 아직까지 존재성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지, 몸뚱이한테 끌려 다니는 사람이 됐기 때문에 그렇지, 그 마음이 존재성을 확립해 가지고 또 다른 하나의 주체다 하는 그런 인격적인 차원의 자리가 형성되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다르다는 거예요. 차원이 높아지게 되면 은은한…. 기도를 하게 되면 마음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음하고. 공명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원 높은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속에서 말하는 것을 내가 듣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로 발전해 나가는 거예요. 맨 첫 단계에서는 암시와 같은 사실들이 여러분의 생활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자는 이런 막대한 자료를 수집해야 됩니다. 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심코 대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 줄 것이냐? 언제나 배고픈 자의 심정이 돼야 됩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 줄 것이냐? 그렇게 찾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결국 그 자체는 뭐냐? 내가 언제나 주체가 되든가 대상이 되는 거예요. 확정적인 주체요, 확정적인 대상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 내가 언제나 찾고 있다는 사실은 그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주체 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면 대번에 안다는 거예요. 혹은 대상적인 존재가 나타나면 대번에 압니다. 내가 누굴 전도할 사람이 있으면 대번에 안다는 거예요. 괜히 그저 마음이 좋아서 간다는 거예요. 그걸 심파(心波)라고 하지요? 마음의 파장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게 있을 거 아니냐. 여러분 보게 되면, 고기 장사하는 사람은 푸주 냄새가 나지요? 그렇잖아요? (옷감) 장사하는 사람은 천 냄새가 나요, 냄새가. 냄새가 난다구요. 여러분 몸에서도 냄새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그 마음의 냄새를 맡는다는 거예요. 그런 형태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촉각 같은 것이 있어 가지고 전부 접선한다, 이렇게 생각하 는 거예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전파 같은 것을 발사해 가지고 상대적 대상을 찾고 있다는 생활…. 사실 그렇다구요. 내 마음은 이쪽으로 생각하려 고 해도 거절한다구요. 지남철의 방향성과 마찬가지로 플러스와 마이너


129


스…. 이렇게 가더라도 ‘ ’ 아! 하고 그런 작용을 깨달을 수 있는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하는 사람의 태도는 전부 다 나와 더불어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타락은 무엇이냐 하면 모든 관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관계, 본연의 인간에 대한 관계, 본연의 신에 대한 관계를 전부 절단해 버린 것입니다. 절단된 관계의 세계를 우리가 다시 접속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내 자체가 이걸 접속시킬 수 있는 작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작용을 해야만이 관계가 개척되지, 접속시키고자 하는 태도를 갖지 않는 한 이 환경은 개척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건 가장 이론적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전부 다 무엇을 찾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기도하고 나면 ‘ 오늘 좋은 일이 있다.’ 아, 하는 것을 안다는 거예요. ‘ 일이 있으니까 그냥 좋은 일이 나타나겠지.’ 좋은 이게 아니라구요. 그걸 찾아야 된다구요. 이러한 생활태도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돼야 돼요. 그러므로 체휼과 실천이라는 것은 생명의 인연을 가져온다는 것 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거예요. 비몽사몽간에 이런 사실이 벌어져요.


계시 단계가 지나게 되면 묵시 단계가 온다

단계가 높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그 다음엔 여러분이 계시라든가 지시라든가 이런 것이 벌어져요. 계시라는 것은 우리가 분석해야 됩니다. 지시라는 것은 직접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계시는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반드시 해석을 해야 된다구요. 무엇을 가르쳐 줄 때도, 가르쳐주는 데는 음성으로 들려 주기도 하지만 환상으로도 보여 준다는 거예요. 좋은 봄날을 맞이하여 사슴 한 쌍이 시냇가에서 생수를 마시면서 먼 산을 바라본다, 이런 환상은 지극히 행복스러운 소망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런 모든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 것이 우연한 사실이 아니예요. 내 마음의 밭을 계발하기 위한 하늘의 역사라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우리 마음의 밭이라는 것이 유리 판같이 평평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거예요. 울뚝불뚝하다는 거예요. 형은


130


체휼과 실천


수평 같은 면을 가졌지만 그 자체는 울뚝불뚝하다는 거예요. 울뚝불뚝한 여기에 하늘의 감도가 반사되어 가지고 오게 되면 빛의 굴절과 마찬가지로 들어오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반사돼 나간다는 거예요. 그러니 전부 다르다는 거예요. 이것을 전부 다 가리려니 그런 놀음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 가지 부분 부분을 계발하려니 그런 역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시의 단계를 지나게 되면 묵시 단계입니다. 여러분, 묵시록 있지요? 하루 종일 영계에 들어가서 체험을 한다든가, 저 나라의 세계가 어떻다든가…. 전부 다 그런 세계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활적인 감정권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러한 체휼적인 신앙을 안 가지고는 위대한 하늘의 뜻의 결과세계를 우리의 생활장, 생활 무대에 적용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을 갖지 않는 신앙자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체휼적인 신앙이 얼마나 고귀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이걸 계발해 나가야 됩니다. 영적 역사의 과정을 통해 육신을 순화시켜 나가야 우리 식구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역사를 합니다. 역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인 힘이 전기작용과 마찬가지로 들어와요. 여러분이 체험을 해 봤 으면 알겠지만, 고압에 접한 것과 같은 힘이 찾아 들어오게 되면, 우리 의식보다 강한 힘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건 딴 세계의 의식이예요. 초자연적, 초인적인 의식적인 감정이 찾아 들게 되면, 우리 몸, 이 육신이라는 것이 타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본연의 심성, 본연의 하나님의 신성과는 반발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 앞에 어떤 신의 성품이 강력하게 들어와도 자연적으로 순화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어오는 데는 플러스 마이너스와 같이, 음파도 강약으로 전파되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그 힘도 한꺼번에 쑥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하게 들어왔다 약하게 들어왔다 이러면서 개척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진동이 벌어지고 자기의 의식이 없어지고 영적 힘이 강하게


131


작용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자꾸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몸뚱이가, 육성(肉 性)이라는 것이, 타락성 그 자체가 전부 순화되어 가지고 자연히 백 퍼센트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현상이 없이 역사 이상의 자리에 들어가서 하늘이 가르쳐 주는 것을 다 받으면서도 감쪽같다는 거예요. 모른다는 거예요. 이러한 현상의 과정을 거쳐 가지고 순화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단계적 현상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암시라든가 몽시라든가 계시라든가 지시라든가 하는 이런 과정을 여러분이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체휼 단계에 들어가면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을 명령하 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이. 누구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말을 못 하게 한다는 거예요. 혹은 내가 좋은 말로 그 사람을 위해서 말해야 할 텐데 책망의 말이 나오는 거예요.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구요. 이렇게 이해 할 수 없는 현상이 가끔 벌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할 줄 알아야 돼요. 까딱 잘못 하다가는 이건 미치광이로 취급 받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조정할 줄 모르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이와 같은 체휼적 신앙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그 체휼적 신앙을 가지고, 마음으로 느낀 것을, 체휼한 것을 가지고 실험을 통한 체험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거예요. (선집 76권 119-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