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 리포트 훈독 소감((The King's Report 2018 / 4 /20)

무지... | 20180422085700

  킹스 리포트 훈독 소감((The King's Report 2018 / 4 /20)


그저께 킹스 리포트 말씀을 정리하다가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왕님의 말씀이 계셔서 제 나름 소감을 말씀드립니다.


먼저 그저께 제가 특별히 마음에 와 닿은 말씀 먼저 훈독하겠습니다.


오늘의 리마는 누가복음 7장입니다. 오늘의 리마는 누가복음 7장입니다.
한 여자가 예수께 향유를 붓는 구절입니다.
36 한 바리새인 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법을 잘 따랐기 때문에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에 감동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많은 원리강론을 열심히 공부하고 탕감조건을 세우는 분들은 자신이 탕감조건을 통해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만한 자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모 마리아와 묵주를 50번을 외우면 자신의 죄가 용서해 진다라고 믿는 카톨릭신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많은 원리강론을 공부한 사람들이 자신이 도덕적으로 높다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인 하나님의 은혜조차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우리의 탕감조건을 보시고 감동하시지 않으십니다.
탕감조건은 우리가 지은 죄를 통감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게 드리는 '공식적인 사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탕감조건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지거나 우리의 구원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하나님께 저지른 죄가 그냥 우리가 무슨 탕감조건을 세웠다고 없어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들은 자신들이 조건을 세움으로써 바래새인들처럼 의롭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7장에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이 죄가 많은 여성에게 그녀의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바리새인에게 하지 않으시지요.


이 여성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
아십니까?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할 정도로 그나마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너무나 법을 잘 지키고(조건을 다 세워서 죄가 다 사해지고)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가 이것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저것을 주신다는 식의 물물교환의 관계에 있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동기와 행동과 말이 일치하여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받은 그 은혜는 우리가 무엇을 이 지상에서 한다 하더라도 갚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게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내신 값과 참아버님께서 칠사부활과 팔단완성으로 나를 구하기 위해서 내신 값은 우리가 몇 천생을 살아서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 없는 값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주시고도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순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돌려드리는 아들딸을 가지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제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아버님께서는 저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셨습니다.
물론 한씨 어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보고 참아버님께 불평만 토로하고 주변의 한국 리더들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참아버님께 자금을 타 내려고 혈안이었으니 참아버님과 그냥 시간을 보내려고 했던 그 시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가 기르는 동물들을 데리고 가서 참아버님께 보여드리고 같이 종합격투기를 보시면 참아버님께서는 너무나 기뻐 하셨습니다.
속으로부터 나오는 호탕하게 크게 소리를 내어 웃기도 하시고 빛이 나오는 것만 같은 미소를 짓기도 하셨습니다.
그 미소를 볼 때 저는 저의 영혼이 기쁨으로 가득차 오르는 것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
너무나 멋지고 흥분되는 삶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회개해야 하는 죄가 있다면 그 죄를 주님 앞에 회개 하십시오.
그리고 그 진정한 회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주님의 은혜 속에 사는 삶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권 속에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주님의 은혜 속에 사는 삶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권 속에 사는 삶입니다. (The King's Report 2018 / 4 /20)


출처: http://cafe.daum.net/rainbowKINGDOM/HamQ/256


위 말씀에서 구약시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신앙생활을 잘 했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자만했습니다. 


왕님은 탕감조건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지거나 우리의 구원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탕감조건을 세우는 정성 등을 통해 죄를 사하고 구원에 이르기엔 너무나 역부족이라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탕감조건을 세워 죄를 청산하기엔 그 죄가 너무나 커서 천생을 살며 갚아도 다 갚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도 우리가 축복의 자격을 다 갖추어서 축복을 받으려면 6000년을 정성들여도 그 자격을 갖출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죄를 벗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청산하기 위해서 당신이 육체를 쓰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탕감하셨던 것입니다. 그 육체를 쓰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해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신 분이 바로 메시아이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나 아버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가셨습니다. 

아버님 역시 우리의 죄를 탕감하시기 위해 형언할 수 없는 십자가의 삶을 사셨고, 우리는 똑똑히 보아왔습니다. (말씀 참조)


우리는 아버님이 재림주님이심을 믿고 따르는 그 조건 하나로 원죄를 청산 받는 축복을 받았고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결코 나 자신이 어떤 탕감조건을 세우는 정성을 많이 들이고 원리를 많이 공부했다고 해서 죄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정성으로 죄를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원리를 많이 공부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역사가 없이는 그 어떤 깨달음도 죄사함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공부한 원리로, 내가 들인 정성으로 교만해진다면 더 큰 사망에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과 다짐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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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난 4월 10일 킹스 리포트에서 왕님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리마는 요한복음 1장 10절입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다음주 월요일은 참부모의 날인데요, 참아버님의 말씀을 읽어보니 참아버님께서 어떻게 참부모의 날이 다른 그 어떤 교회 명절보다 가장 먼저 지어졌는지를 말씀을 주셨습니다. 

타락으로 우리가 먼저 지상 부모를 잃었으니 모든 것은 먼저 부모를 복귀하여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부모로부터 모든 것이 오는데 특히 자녀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그러한 참부모의 날을 정하신 후 참하나님의 날을 제정하셨다는 것입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참아버님의 1966년대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주님을 닮으려고 해도 혈통이 다르기 때문에 양자의 위치밖에 가지 못하는데 재림주님께서 오심으로써 축복과 혈통의 복귀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혈통을 가진 직계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12년에 참아버님의 성화를 우리가 거치면서 혈통의 싸움이 피터지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제 많은 식구들이 참아버님의 권한권으로 돌아오는 축복을 받고 참아버님과의 본연의 혈통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천성경 참효의 생활의 제 3장 충효의 도리에서입니다. 

1)생명까지 아끼지 않는 진정한 충효

신랑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치면 열녀라고 합니다. 효자는 부모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을 말하고, 충신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참아버님께서는 그 '다하고' 그 다 하여서의 기준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는데요, 그 '다' 라는 것은 이제껏 있었던 열녀 열사들의 정성보다 더 뛰어넘은 기준을 말씀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The King's Report 04/10/2018)


출처: http://cafe.daum.net/rainbowKINGDOM/HamQ/251


이렇게 아버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직계 자녀가 될 수 있는 혈통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아무런 댓가 없이 오직 아버님을 재림주님으로 믿고 따른 그 조건 하나로 원죄까지 사함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1만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동관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만 달란트나 탕감을 받은 동관이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바로 돈을 갚으라고 감옥에 처넣는 내용이 있습니다. (지난번 기고한 글을 소개합니다.)


 빚진 자의 비유(용서에 관하여, 18: 21-34)


마태복음 1821절에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여쭈니 예수님께서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고 난 바로 뒤(18: 23-35)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하여 주는 주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던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하여 주지 않고 갚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간청하는 동관을 기다려 주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

이에 보다 못한 다른 동관들이 그 종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주인을 찾아가 그 일을 고하니 주인이 종을 불러다 말합니다.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그리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하고 옥에 가둡니다.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동장 35절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우리 타락한 인간의 종의 근성(타락성)인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형제의 눈에 티는 볼줄 알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깨닫지 못한다고 한탄하시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용서를 한다는 자체가 이미 저의 심령에는 사치임을 통감합니다.

저 자신은 구원의 대상이지 구원의 주체가 아닙니다.

즉 용서를 받아야 할 대상이지 용서의 주체가 아닙니다.

더구나 심판의 주체는 더욱 될 수 없는 구원의 대상, 용서의 대상일 뿐입니다.


용서는 죄가 없는 자,  죄를 사해줄 수 있는 자가 죄 있는 자에게 베풀 수 있는 은총이지 죄사함을 받은 자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그 자체가 교만이요 건방이라고 느꼈습니다.

은총을 입은 자는 그저 감사함으로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http://cafe.daum.net/rainbowKINGDOM/H0A2/98


이렇듯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행위는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행위는 바로 형제간에 불화하는 것입니다.

이는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가 백데나리온 빚진 것도 탕감해주지 못하는 행위와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요,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계명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첫째 계명과 같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를 넘어서서 이웃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듯 사랑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될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내 심령 속에 결의와 각오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나의 이웃은 바로 하나님이 육을 쓰고 현현하신 실체하나님들이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