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앙이란?
(본 글은 개톡으로 질문받은 것에 대한 답변을 새로 정리 구성한 것입니다.)
신앙이란 문자대로는 믿고 받드는 일입니다.
누구를 믿고 받드느냐?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인간에겐 신앙의 대상이지만 하나님을 주체로 세운 터전 위에서 진정한 신앙이란 말이 성립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앙이라면 하나님을 믿고 받듦으로 인해 구원이 주어진다고 믿어 왔습니다.
즉 신앙을 하는 목적이 의존적 관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겠지요.
신이라는 전지전능하신 절대적인 존재 앞에 의지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막연한 관념에 의해 신앙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 신앙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부자지 관계임을 확실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인애 일체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정맹세 8)
그렇다면 어떻게 유형의 실체인 내가 무형의 아버지와 부자지 인연을 맺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신앙은 다시 관념의 세계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인식하고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가 어떤 분이냐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 계시며, 지극히 높고 거룩한 곳에서 영광을 누리시는 분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 헤매시는 불쌍한 하나님이십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자신의 부모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은 자식을 잃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하나님을 얼마나 내 아버지로 인식하고 느끼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봅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느끼고 체휼하는 자는 참신앙자이며 그렇지 않은 자는 비록 신앙을 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잘못 믿고 받드는 우상숭배자이겠지요.
아버님이 가르치신 통일 신앙이란 의존적 기복 신앙이 아닌 어떻게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해 드리는 내가 되느냐에 있는 것이며, 그러한 참사랑의 생활입니다.
다음으로 그 하나님, 즉 그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창조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무한 불변의 절대 하나님이시며 심정과 사랑을 가지신 분이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영원한 사랑의 실체 대상으로 인간인 나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은 육신 생활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본체는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영인체라는 것입니다.
지상 생활, 신앙생활이란 바로 그 영생할 영인체를 완성체로 결실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참사랑의 생활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영인체는 참사랑을 먹고 성장 완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참사랑을 통해 영생을 찾아가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곧 나의 영인체를 어떻게 완성시킬 것이냐를 놓고 살아가는 생활이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타락으로 잃어버린 하나님과 부자지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과 신인애일체 이상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신인애 일체이상을 이루어 영생할 영인체를 완성체로 결실시키기 위한 지상생활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부자지의 사랑 관계)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영인체의 성장, 완성을 위한 위하여 사는 참사랑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척도는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느냐, 내 영인체가 얼마나 성장했느냐에 달려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말씀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이 원수가 되기도 하는데 그거 왜 그래요? 참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참사랑이 없기 때문이에요.『제일 중요한 것이 영생 문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타락한 세계는 그래요. 『틀림없이 영생한 것을 알게 되면 다른 사람이 죄를 지으라고 해도 안 짓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라고 해도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기독교를 믿든 무슨 종교를 믿든 절대로 천국에 못 갑니다. 하나님의 이상세계에 못 가는 거예요. 참사랑은 생명을 투입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참사랑만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집 290권 138쪽)
언제든지 생활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영생의 개념
기독교도 그렇습니다. 기독교도 지금까지 신앙을 해 나왔더라도 끝 날이 되어 환경이 변하면 변할수록 전부 다 휘어저버리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영생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생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생명을 내 놓고 환경을 넘어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다 거기에 소속되어 사방을 돌아보면서 현재의 생활 방편에 따라 그 길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세속적인 풍습에 끌려가고 만다 이거예요. 『신앙길이라는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인생살이, 육신생활의 준비가 아니고 영원한 세계의 생활을 위한 준비라는 신념만 가지게 되면 그건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시일이 가면 갈수록, 40이 넘고 50이 넘을수록 죽을 날이 가까워 오기 때문에 영생 개념을 놓고 심각해진다는 것입니다.』전부 다 나이 많으면 그래요. 『사랑이라는 것은 나이가 많을수록 희박해지지만 영생 개념만 집어 넣으면 나이가 많아질수록 점점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 이념만이 앞으로 세계를 요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악한 환경, 혼란된 변화가 얼마나 빈번합니까? 그러나 영생 개념만 철저하면 빈번히 변하는 환경을 뚫고 넘어갈 수 있고 어떤 곳에서 희비극이 부딪쳐 오더라도 모든 것이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자신 있다는 거예요. 『참사랑 길을 통해 가지고, 하나님의 참사랑의 대상인 아담 해와를 참사랑의 파트너로 짓지 않았어요? 그건 뭐, 틀림없다구요.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참사랑의 대상을 이루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만이 아니고 실감해야 되고, 또 체휼해야 됩니다.』직접적으로 느껴야 된다는 거예요. 알아야 하는 거예요. 『참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냐 하는 것만 느껴지게 되면 이 길을 가지 말라고 해도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생활할 때 주력해야 할 것은, 어떻게 영생의 개념을 집어넣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집어넣으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아무리 핍박이 있고 아무리 사지 경지에 가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는 거예요.(선집 290권 139-140쪽)
진정한 신앙자의 생활
이런 심정이 마음을 격동시키고 그 마음이 몸을 재촉하여 사지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한한 경지를 향하여 걸어 나가게 되는 생활의 일편 일편을 체휼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속세에 살고 있는 신앙자의 생활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감촉과 이러한 충격의 생활을 할 수 있고 멀리 있는 이념을 실제 생활의 힘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나아가 그 힘의 충격으로 주위에서 휩쓸려 들어오는 사망의 물결까지 밀어낼 수 있는 심적 기반을 닦아야, 하늘이 그러한 사람을 대하여 진정한 신앙자로 인정하리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어떠한 입장에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게 될 때에, 거기에서 자아의 인식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 어떤 주의나 사상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보다도 더 크고, 그것이 심적 혹은 육적, 또는 생활 환경의 핵심적인 빛의 가치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결정적인 입장에서 승리의 일로를 거쳐 나가는 놀음이 신앙생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에는 핍박이 가중되어 왔고, 슬픔이 가중되어 왔으며, 십자가의 길, 혹은 죽음의 길이 가중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노정을 통하여 잘 아는 바입니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도 이러한 역사적인 신앙노정을 배반해서는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바른 신앙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려운 신앙의 길을 늠름히 넘어가려면 이런 신앙의 길을 가면서 어려움의 길, 핍박의 길, 죽음의 길을 늠름하게 넘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느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 한 자체가 생겨난 것도 자신이 생겨나고 싶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나라에 태어나고 싶어서, 이러한 나라의 백성으로 이러한 부자유스런 환경에 태어나고 싶은 의식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알 수 없는 어떤 움직임에 휩쓸려서 이 땅에 태어났고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러한 동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하였고, 이러한 결과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될 때에, 이 나라는 존재는 나 스스로 자랑할 나가 아니라 나에게는 역사를 들어, 전체를 들어 혹은 미래를 들어 이념적인 권내(圈內)에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이 이런 신념과 느낌을 갖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의 신앙길에는 오늘날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일이 벌어지게 되고, 슬픈 일이 미쳐지게 되고, 어려운 일이 미쳐지게 되고, 억울한 죽음까지 부딪치게 되며, 천륜의 인연을 저버리는 신앙자의 태도를 취하기 쉽게 되고, 하늘을 배반하기 쉬운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념에 대한 사무친 심정을 지녀야 되겠고 내 생활을 이 이념에 의해 관찰해야 되겠습니다. 무한한 신앙 세계의 이념과 인연을 맺으면서 자신은 우주적인 인연을 빛내기 위한 하나의 제물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이념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런 느낌이 심중에서 떠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는 한 이 땅 위에 감히 여러분을 침범하거나 굴복시킬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선집 6권 71-72쪽)
신앙자의 태도
하나님이 고대하는 인간 그 다음 신앙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고대하는 심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인연을 갖고 있는 연고로 고대하지 않을래야 고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은 무엇을 고대하느뇨?
신앙자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실천하는 자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나도 신앙자가 되기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실천하는 자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나라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서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고대하고 있으나 그러한 단계를 넘어서 생활적인 신앙을 해야 되겠습니다.
즉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식구,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백성,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즐길 수 있고 노래할 수 있으며,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역사 과정의 수많은 우리 선조들 앞에 신앙이라는 명사를 세워 놓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해 고대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 자리에서 싸우고 있는 신앙자로서의 그 자체가 아니라 끝날까지 남아져 아버지와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셨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고대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대하신 것은 신앙을 위하여 기꺼이 사라져 갈 수 있는 나, 신앙을 위하여 죽었다가 부활할 수 있는 나, 사망권을 벗어나 생명권 내에서 부활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고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 수 있는, 그런 나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이 고대하던 나, 그 나를 그리워할 줄 알고, 그 나를 찾기 위하여, 그 나를 만나기 위하여 허덕이는 여러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여기에 서 있지만 여러분은 하늘이 고대하는 그 나가 아닌 것을 잘 알 것입니다. 하늘이 찾고 있는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하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고, 하늘을 위하는 마음이 있고, 하늘과의 인연이 있다 할진대 본연의 나를 고대하는 간절한 마음이 자신의 생활 표준으로 세워져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나를 찾는 때에는, 그 나를 자랑하고 나의 가치를 노래하면서 그런 나를 찾던 아버지를 모시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나를 고대하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심정을 잃어버린다 할진대는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자의 제일 표준이 되는 본연의 나
사람은 자기를 중심삼고 시작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해결짓고, 자기를 중심삼고 비판하여 나가는 길이 제일 효과적인 길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들은 하늘이 찾고 있는 상대적인 나를 추구하는 것보다도 상대적인 나의 가치를 추구하는 그 마음에 더(加)하여 직접적 인연을 가진 자기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나를 찾기 위하여 울고 싸우고 하는 충격이 나에게서 시작하여 나 자신을 격동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격동된 나와 소망의 내가 인연을 맺는 느낌을 가져야만 어려운 신앙의 행로를 무난히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이 따르고 있는 이 선생은 오늘의 인간을 대해 무한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처한 인연을 내적으로 무한히 저주하고 싶은 일면 소망하는 그 나를 대해서는 노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와 같은 마음을 시간 시간을 통하여, 생애를 통하여 느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나 교회 관계에 있어서나 어떠한 환경과 처지도 개의치 아니하고 그런 나를 찾아가는 걸음이거늘, 그 일을 내 어이 저버릴 수 있으며, 내 어이 더디 할 수 있으며, 내 어이 주저하고 바라볼 수만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노정에서 후퇴하는 자라면 바라던 그 나를 소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 시간서부터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던대로의 생활을 계속하면 탄식과 자포자기와 자멸적인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고,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자체를 탄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 신앙자에 제일 가까운 표준은 그 소망의 나를 찾아 고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어느 한 날 그 나를 상봉할 것이냐 하는 심정에 사무쳐 있다 할진대 하늘을 바라볼 줄 알 것이요, 그 나를 찾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선집 6권 85-87쪽)
신앙의 근본 목적
내가 믿고 천당 가겠다는 신앙이 아니라, 내가 믿어서 가정을 구원시키겠다는 신앙을 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믿어서 민족을 구원하고 세계를 구원하고 하나님을 해방시키겠다는 신앙, 이것이 정통적인 신앙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선집 10권 167쪽)
그러기에 수고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의 수고가 제일 크다고 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몸부림치는 모습이라야만 정상적인 신앙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심판 과정이 남아지게 된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기억합시다. (선집 16권 337쪽)
신앙 행로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면, 그 첫마음! 첫 마음! 첫 마음은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첫 마음을 잃어버리고는 다시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무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흠모하면서 그 아들이 되겠다고 결의하고 다짐했다면 그때가 가장 귀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를 싸게 팔아먹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선집 25권 2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