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나는 길

무지... | 20180215162154

  하나님을 만나는 길


신앙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고 또 하나님을 만나야만 신앙의 완성을 기할 수 있음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과의 만남을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성령과 만남을 이뤄 온전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이에 하나님을 만나는 길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세계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에 관해 알 만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밝히 보여 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특성들, 말하자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창조물을 통해 분명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핑계할 여지가 없습니다. (롬 1: 19-20) 
요즘은 과학자들까지 우주 만물을 연구하면 할수록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더구나 우주의 비밀을 밝히려는 과학자들은 지적설계론을 주장하며 절대적 존재이신 하나님이 구상 설계하시지 않고는 이러한 방대하고 신비한 우주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바울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을 통해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만물을 통해 우리는 직접 하나님의 사랑과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을 잘 연구해도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자연 만물만 잘 관찰하여도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원리강론에서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주장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어디에나 당신의 사랑(신성)과 만유원력(능력)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 만물과 더불어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재림주님은 자연 만물은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교재이며 제3의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면적 자아를 통해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영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 하는 죽은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쉬이 인식하지 못하고 그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느끼고 체휼하지 못 하는 영적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적인 영적 자아를 일깨우는 내면생활을 통해 조금씩 영안을 열어 하나님을 만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용어로는 바로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도 급이 있어서 성령의 급에 따라 차원을 달리하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 주의할 것은 방언이나 영통 등을 성령으로 확대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것들은 진정한 성령이 아니라 재림부활로 인한 다른 영들과 통하는 단계이므로 하나님의 성령과는 무관한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원리강론 부활론, 참조)

또한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직접 성령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중간 매체로 천사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성령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을 받는 그 자체가 영적이고 신비적이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적 현상이지 창조본연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본연의 세계, 즉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인간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느끼고 체휼하며 진리 또한 스스로 깨쳐 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림주님은 양심이 하나님보다 더 가까이 있고 더 중요한 스승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말씀 참조) 

물론 양심이라는 것도 심령의 급이나 진리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타락하지 않은 창조본연의 인간의 입장에서는 본심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느끼고 체휼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 세계와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체휼하고 깨우쳐 나가서 완전히 하나님과 신인애 일체의 경지에 가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흙으로 빚고 영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거두셨던 영을 불어넣어 주시어 하나님과 직접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통로를 본심이라고 하며 그 본심 속의 생심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원리강론 육신과 영인체의 상대적 관계, 65-69쪽 참조)

이런 입장에서 봤을 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양심을 통해 본심을 완전히 맑혀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직접 받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원리강론에서는 직접주관권이라고 합니다. (원리강론 직접주관권, 61-62쪽 참조)

결국 양심을 거스르고서는 신앙의 완성은 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요원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워 주신 중심인물을 통해

 

하나님은 언제나 중심을 세워 섭리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세워 주신 그 중심인물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우쳐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복귀섭리 역사 속에 늘 중심인물들을 세워 주셨습니다. 이는 비단 복귀섭리 속에서뿐만 아니라 창조본연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한 나뭇가지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려면 뿌리의 진액을 줄기로부터 받아서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심 줄기와 같은 중심인물을 보내 주셔서 섭리를 하셨던 것입니다. 아담 역시 그러한 중심인물이셨으며 예수님이나 재림주님은 바로 각 시대의 중심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재림주님을 떠나서는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신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요 14: 9) 그래서 예수님은 수없이 당신과 절대적 관계를 맺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를 가지라고도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요 15: 5)

마찬가지로 재림기에는 재림주님과 절대적 관계를 맺지 않으면 심령의 열매를 결실할 수 없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영적 구원을 얻는 것은 재림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입니다. 재림주님이 오시면 예수님의 시대는 지나고 재림주님과 관계 맺지 못하면 완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재림주님이 성화하시고 안 계시는 작금에도 하나님은 반드시 섭리적 중심인물을 세워 섭리를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3대왕권임을 필자는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재림주님의 메시아 섭리 연장 시대로 3대왕권과 연결되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과 관계될 수 없으며 영생을 결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번 기고한 재림주님의 메시아 섭리 노정 참조) 지금 3대왕권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영생 축복을 하고 계시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작금의 하나님의 섭리적 중심은 바로 3대왕권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자녀로 지음 받은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야 비로소 완성을 기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자연만물을 통해서 나 자신의 영적 내면세계를 개척해서 하나님의 성령과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신앙자는 하나님이 세워 주신 섭리적 중심과 연결되어 절대적 유기체적 관계를 맺어야 온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중심은 언제나 한 분 중심을 세워서 섭리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중심과 하나 되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성령 가운데 거한다 하더라도 자기중심으로 흘러 적그리스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각자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과 만날 수 있지만 나 자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세워 주신 섭리적 중심(지금은 3대왕권)의 주관권 아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나로서 하나님과 일체를 이뤄 참생명체(생령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지는 줄기를 떠나서는 뿌리의 진액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비단 나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섭리적 중심인물의 주관 아래 있지 않으면 아무리 성령 가운데 거한다 하더라도 결국 그는 적그리스도일 뿐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의 주관 아래, 재림주님의 시대에는 재림주님의 주관 아래, 3대왕권의 시대에는 3대왕권의 주관 아래에서만이 하나님과 온전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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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림주님 말씀>

 

3대 주체사상이 뭐냐? 하나님은 참부모고 참스승이고 참왕입니다. 하나님이 스승이 되고 왕이 되고 싶지만, 부모가 못 돼 가지고는 안 됩니다. 태어나 가지고 배우고 배워 가지고 주인이 돼야지, 배우지도 않고 주인이 되고 부모가 됩니까? 부모가 돼야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부모입니다. 천지 이치가 그렇습니다. 누가 부모냐? 부모의 기원이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선생의 기원이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주인의 기원이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모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거꾸로 됐습니다. 손바닥이 이렇게 돼야 할 텐데, 이렇게 돼서 얼굴을 만져야 할 텐데 이렇게 만지고 있습니다. 뒤집어졌습니다. 뒤집어진 것을 바로 해야 됩니다. 타락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햇빛을 받아야 할 텐데 나갔기 때문에 어두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400-107,2002.12.28)


선생 중의 선생이 양심입니다. 부모 대신 자리요, 하나님 대신 자리가 양심입니다. 3대 주체사상을 지탱하는 축이 양심입니다. (249-178,1993.10.10)


인간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모두 평등한 것입니다. 양심권을 중심삼고 볼 때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대해서 제일 잘 가르치는 분이 누구냐? 선생님이 아닙니다. 자기의 양심입니다. 부모보다도 귀한 것이 양심입니다. 하나님보다 귀한 것이 양심입니다. 이 양심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애국하는 길,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은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모르더라도 양심은 압니다. 외적으로 잘 모시면 부모한테 효도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다른데 몸만 그러한 행동을 하면 세 상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인정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진짜 효도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양심이라고 하는 위대한 주인이 자기에게 서 있다고 하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50-73~74,1993.10.12)


양심은 뭐냐? 하나님이 나에게 절대 권한으로 넘겨준, 자주 완성을 시킬 수 있는 주인으로 준 것입니다. 왕부모로서 나에게 하나님 대신 심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부모입니다. 하나님이 왕스승입니다. 그게 양심입니다. 하나님 대신 전권을 가진 양심을 준 것입니다. 내 몸뚱이를 대해 마음이 전권행사를 해야 됩니다. (258-67,1994.3.16)


양심은 부모보다 앞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상을 앞서는 것입니다. 조상보다 앞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조상 아담 해와보다 앞선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상적 그 사랑의 대상권을 중심삼고 몇천 만 배, 몇억만 배 잘 나기를 바라는 그런 기준은 우리 인간이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부모에 앞서고, 스승에 앞선다는 것입니 다. 하나님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고, 스승이고, 주인 아닙니까? 3대 주체사상이 사랑에서 이뤄진다 이겁니다. 이론적으로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270-295,1995.7.16)


내 마음에 3대의 주체, 주인이 들어와 있습니다. 부모가 들어와 있고, 스승이 들어와 있고, 왕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부모보다 앞서 있는 것입니다. 양심은 이 세상의 어느 스승보다 앞서 있는 것입니다. 또 양심은 이 땅의 주권자 보다도 앞서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알게 될 때 얼마나 고마워요? 하나님의 제일 귀한 자체를 나에게 심어 준 것인데 이걸 얼마나 유린했습니까? (290-247,1998.3.2)


양심이 뭐냐? 3대 주체사상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모든 사랑의 본질을 그냥 그대로 대신 이어받은 것이 양심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지요? 하나님은 영원한 참부모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은 스승입니다. 절대적인 선한 스승입니다. 하나님은 주인입니다. 절대적인 주인입니다. 그러한 주체 되는 하나님이 대상 되는 인간 앞에 하나님의 주인 될 수 있는 부모 자격, 부모 대신한 것을 나에게 꽂아 준 것이 양심이고, 또 최고의 선생을 대신해서 꽂아 준 것이 양심이고, 천년만년 주인을 대신해서 꽂아 준 것이 양심입니다. 3대 주인을 양심 보따리에 넣어 가지고 하나님 자신의 뭐라고 할까, 하나의 열매와 같이 심어 준 것이 양심입니다. (291-183~184,1998.3.11)


양심은 하나님의 상대이기 때문에 주체 성격과 다른 것입니다. 주체는 이리 가려고 하면 상대는 이리 와야 됩니다. 또 다른 인격체다 이겁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것으로 하면 개성진리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 양심은 주체적 양심보다도 먼저 알게 돼 있습니다. 주체가 먼저 안다 하게 되면 그 상대적 주체는 없어지는 것이다 이겁니다. 없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하늘 앞에 상대적 존재세계는 일체적 존재 속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상대성을 줬기 때문에 양심이 하나님보다도 나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256-202,1994.3.13)


우리 창조원리에는 하나님의 95퍼센트 창조에 또 다른 5퍼센트를 보탬으로 말미암아, 협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같이 공동 창조주의 자리에 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에 양심을 중심삼고 볼 때, 양심은 제2의 하나님인 동시에 나에게 있어서는 제1하나님보다도 더 가까운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양심을 모실 줄 아는 사람은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종교가 필요 없다는, 무종교 필요성의 논리를 이러한 원칙에서 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도 더 잘 알고 나에게는 하나님보다 더 귀한 양심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 대신 존재인데 종교를 무엇 때문에 믿느냐는 것입니다. 양심이 하자는 대로 하면 종교 완성자가 되기 때문에 무사통과입니다. (256-203,1994.3.13)


하나님이 참 고마우신 분입니다. 제2의 하나님을 전부 다 넣어 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가 있으면 그림자와 같은 분을 넣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냐 하면 인류의 참부모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 참스승입니다, 전지전능하니까. 또 하나님은 왕 중의 왕입니다. 사랑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 부모이고, 스승이고, 왕입니다. 주인입니다. 이 주인의 세 가지 요소를 나에게 박아 넣어 준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이 하나님 대신이요, 나의 부모였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290-317,1998.3.4)


2) 양심은 부모보다, 스승보다, 하나님보다 앞서 있다


양심은 몸뚱이가 한 것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왜 속이냐는 것입 니다. 부처끼리 싸움하면서도 누가 옳은지 그른지 다 알면서 싸우는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허재비가 아닙니다. 양심은 하나님보다 앞서 있다는 것입니 다. 하나님도 양심을 중심삼고 커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몸이 있으면 하나님도 양심에 따라 가지고 키워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나기 몇 천년, 몇 억만년 전에, 하나님이 커 나오기 전부터 양심의 명령을 따라서 몸이 하나돼 가지고 커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은 하나님보다 앞서 있다는 말이 이해됩니다. 그거 하나만 알아도 여러분이 죄를 못 짓습니다. 양심은 스승보다 앞서 있습니다. 백과사전의 모든 것에 능통한 학 박사, 박박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 박사가 결정했다고 전부 다 옳을 수 없습니다. 그 양심이 몇 퍼센트 나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521-273, 2006.3.22)


내 양심은 부모보다 앞서 있다!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의 절대가치의 상대적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의 목적을 완성 시킬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나는 부모보다 앞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양심은 스승보다 앞서 있다! 양심은 왕보다 앞서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자기에게 있는 모든 제일 귀한 것을 갖다 옮겨 심어 줬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은 영원히 절대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452-294,2004.6.7)


양심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데서만 ‘본연의 자아’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부모 중의 부모요, 스승 중의 스승이요, 주인 중의 주인인 것입니다. 이것들이 천지를 중심한 3대 주체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양심만이 주체사상을 달성할 대상의 자리에서 절대 일체가 되어야 하므로 양심의 위치는 우리를 낳아 준 부모보다 스승보다 어떤 나라의 왕보다 나은 자리에 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자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양심은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대신 절대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내가 하는 일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전부 다 압니다. 양심은 몸이 나쁜 일을 하려 할 때 언제나 반대하지만, 몸뚱이가 제멋대로 마음을 끌고 다니는 것은 타락한 사랑의 힘이 타락할 때의 양심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양심이 완성에 도달하여 하나님과 참사랑의 관계를 맺었다면 아무런 문제도 안 되는 것입니다. (259-41~42,
1994.3.27)


3) 양심의 소리


양심의 명령 양심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면 그 사람이 망할까요, 환영받을까요? 환영받습니다. 위대한 발견이 자기에게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양심은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인정했을 때, 그건 위대한 발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양심을 따라서 살았다고 하면 틀림없이 좋은 곳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양심은 원뿌리가 좋은 곳임에 틀림없다고 하는 것을 인정했을 때, 양심이 말하는 대로 했을 때, 그다음의 길이 꾸불꾸불입니까, 수직입니까? 똑바로입니까, 지그재그입 니까? 똑바로입니다. (250-74,1993.10.12)


부모에게서 태어나 선생님한테 교육받고 왕을 중심삼고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3대 욕망을 모두 감지시키는 주체의 입장에 서는 것이 자기 양심입니다. 양심은 위대한 선생입니다. 선생은 거짓말을 하는 때가 있을지라도 양심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자기의 위대한 선생이 양심입니다. 다른 선생을 방문하여 묻기 전에 자기 양심에게 부끄럽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부끄럽지 않고 당당한 입장에 섰을 때는, “하나님이여, 저를 보다 정직한 길로 가도록 지명해 주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확실하게 꿈같은 것을 봅니다. 간접적인 계시의 방법이 꿈입니다.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 꿈 가운데서 가르쳐 줍니다. 본 궤도에 오른 기차는 석탄을 넣고 불을 지피면 달리게끔 되어 있습니다. 양심을 쭉 따라가면 틀림없이 천국으로 갑니다. 이중의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250-115~116,1993.10.12)


모든 인간은 저마다 자신 속에 가장 소중한 스승을 일생 동안 내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스승을 잘못 대우하고 짓밟고 남용합니다. 그 스승은 바로 인간의 양심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항상 우리 자신에도 도움이 되도록 말을 하며 우리를 참사랑과 연결 시켜 주고자 합니다. 부모와 같이 우리의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선하고 비이기적인 사람이 되라고 촉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도록 인도해 줍니다. 그러나 각자의 마음속에는 또한 양심의 소리에 항상 거역하는 반란자가 있습니다. 그 반란자는 바로 육체인 것입니다. 육체는 양심을 비참하게 짓밟고 남용해 왔습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양심의 적이었던 육체, 우리 자신의 생명과 인성을 크게 손상시킨 육체의 편을 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양심은 항상 마음속의 스승이요, 부모로서 인류의 궁극적인 부모인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때 양심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대신자가 되며, 나아가서는 ‘제 2의 하나님’으로까지도 불릴 수 있습니다. (201-208,1990.4.9)

 


하나님에 관한 지식(세계경전)
 
인간은 어떻게 궁극적 실재를 알 수 있는가? 철학자들은 항상 이 문제에 대해 탐구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비록 이와 같은 논의는 이 선집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떤 종교의 경전에서는 이 논의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어디엔가 남겼으며, 만일 사람들이 알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이르는 첫 번째 길은 피조물 속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찾는 것이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자연에 대해 연구하면 할수록 자연을 설계한 어떤 제작자의 존재를 증거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발명가인 토머스 에디슨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단언하건대, 우주에는 우주적 지성이 충만해 있다. 이 세계의 배후에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은 채 자연의 신비함과 긴밀하게 교감한다든가 과학을 탐구한다고 할 수 없다. 어떤 초월적인 우주적 지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나님에 이르는 두 번째 길은 하나님의 실재를 감지할 수 있는 내면적 자아를 통해 도달하게 될 명상의 길이다. 하나님은 지성이 아니라 신비로운 방식으로 감지된다. 블래즈 파스칼은 “하나님은 이성이 아니라 심정으로 감지된다.”고 말하였다. 문선명 선생도 하나님을 가장 본질적인 인류의 부모라고 가리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부모를 아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직접 체휼해야 한다.
 
하나님에 이르는 세 번째 유형은 초자연적인 길이다. 극소수의 특정한 사람들만 이러한 초자연적인 원천에 접근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와 같은 체험을 한 사람들을 신뢰할 만한 종교적 지도자로 간주한다. 그들이야말로 영적 세계를 여행한 종교의 창시자들이다.
 
1. 피조물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흔적
 
종교 경전


하나님에 관해 알 만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밝히 보여 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특성들, 말하자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창조물을 통해 분명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핑계할 여지가 없습니다. 로마서 1.19-20(기독교)
 
하나님은 대지 위에, 그리고 그들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예증들을 보여 주리니, 그들이 그것이 진리임을 깨달을 때까지라. 꾸란 42.53(이슬람)
 
그분의 징표 중의 하나는 이러하니라, 그분이 흙에서 너희를 창조하여 인간으로 번성케 하심이니라. 그분의 징표 중의 하나는 이러하니라. 너 자신으로부터 너희 배필을 창조하여 배필과 함께 안주케 하심이니라. 또한 너희들 마음속에 사랑과 자비를 주셨으니, 생각하는 백성을 위한 분명한 징표이니라.
그분의 징표 중의 하나는 이러하니라. 천지를 창조하고 각기 다른 너희의 언어와 피부색을 만드심이니, 실로 그 속에는 자각하는 백성을 위한 분명한 징표가 있느니라.
그분의 징표 중의 하나는 이러하니라. 너희가 밤에는 숙면을 취하고 낮에는 그분의 은혜로부터 양식을 구하게 됨이거늘, 실로 그 속에는 듣는 백성을 위한 분명한 징표가 있느니라.
그분의 징표 중의 하나는 이러하니라. 너희에게 공포와 희망을 갖도록 번갯불을 보이심이며, 하늘에서 비를 내리어 죽은 대지를 소생케 하심이니라. 실로 그 속에는 지혜 있는 백성을 위한 분명한 징표가 있느니라.
그분의 징표 중의 하나는 이러하니라. 하늘과 대지가 그 분의 명령에 의해 존재함이며, 그분이 언제나 지하의 너희를 부르실 때 너희가 지상으로 나타남이니라.
꾸란 30.20-25(이슬람)
 
인드라는 일체만유의 기틀이니,
보이는 모든 것이 그의 형상이로다.
인드라는 자신의 창조력으로
온갖 형상이 되나니,
그의 수레에 매어진 군마가 수천이로다.
리그베다 6.47.18(힌두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권능과, 하늘과 땅의 법칙을 보여주어 그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게 했도다. 밤이 되어 어둠이 그를 덮자, 그는 별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주님이다”하고, 별이 지자 다시 그가 말하기를 “나는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함이라”라고 하였다.
그가 찬연하게 떠오르는 달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이나의 주님이뇨”하더니, 달이 지자 다시 말하기를 “만약 주님이 나를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분명코 방황하는 무리들 속에 있게 되리라”하였다. 그가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주님이고 만물 중에 가장 위대하시도다”고 하더니, 태양이 사라질 때 그가 말하기를 “나의 백성들이여, 이제야 내가 하나님께 비견할 상대를 두는 너희의 잘못을 분명히 알았나니”라고 하더라.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해 나의 얼굴을 돌렸으니, “나는 결코 하나님과 비견할 우상을 두지 않으리라”하더라.
꾸란 6.75-79(이슬람)
 
보라, 만물은 각기 닮은 것이 있고, 나를 증거 하기 위해 창조되고 지음을 받았나니, 속세의 것이나 영의 것을 막론하고 우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안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 위에 있는 것이나 아래에 있는 것, 모든 것이 다 나를 증거 하느니라 하셨더라.
값진 진주, 모세서 6.63(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 줍니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 갑니다. 시편 19,1-4(기독교)
 
말씀선집


무형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신성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피조세계를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라고 기록하였다. 마치 모든 작품은 그 작자의 보이지 않는 성품의 실체적인 전개인 것같이, 피조세계의 삼라만상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니님이 그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그의 실체대상으로 전개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보아 그 작자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것같이, 이 피조만물을 보아서 하나님의 신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리강론, 창조원리 1.1.1)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왕국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몇 십만, 몇 백만 명이 있어도 아직까지 모르는 것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과 의사는 ‘이제 연구할 것이 없다. 그만둬라’ 할 수 없습니다. 눈에 대해서 전부 다 알 때까지 몇 단계나 갔겠습니까? 초입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과학자들이 하나님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95.123, 1977.11.06)
 
눈이 생겨날 때, ‘내가 이렇게 생겨나고 싶다’ 한다고 눈 자체가 그렇게 생겨날 수 있습니까? ‘나는 돌아가야 되겠다. 눈꺼풀이 깜빡깜빡하는 그 속에 들어가야 되겠다. 물을 뿌려서 축이는 놀음을 해야 되겠다. 공기에는 먼지가 있기 때문에 여기 눈썹으로 스크린을 만들어야 되겠다’ 이렇게 눈이 생각해서 태어났겠습니까?
 
 속눈썹이 있는 걸로 볼 때, 눈썹이 이 세상에 공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생겼겠습니까, 없다는 것을 알고 생겼겠습니까? 이렇게 된 것을 이미 알고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눈 자신이 알아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벌써 눈으로 생겨날 때 이 우주의 공기에 먼지가 있다는 걸 알고 생겨났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바람이 불고 먼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눈 자체가 알고 생겨났습니까, 모르고 생겨났습니까? 모르고 생겨났지만, 그 자체의 누군가가 알아 가지고 눈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구상에 생긴 복사열에 의해서 수증기가 증발된다는 것을 알고 그걸 방어하기 위한 장치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눈 자체가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눈 자체가 알았습니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생겨나기 전에 이 우주적인 지식을 가진 배경적 관념이 있었다 하는 논리를 추리할 수 있습니다.
(117.78-79, 1992.02.01)
 
하나님을 상상하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상관하려고 하는 세계적인 조직이 무엇입니까? “종교입니다.” 세계적인 국가가 어떤 국가입니까? 그럼 종교를 분석해 보면 그런 게 있습니까? 없으면 그거 다 하나님이고 뭐고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 속에는 그런 사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사상을 무엇보다도 강력히 주장하고 내적인 내용을 갖춘 그러한 세계적이며 초민족적인 애국사상을, 초민족적인 부자관계의 효자 사상을 지니고 ‘민족을 초월하고 세계를 위해서 가자’고 주장하는 종교가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고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95.53, 1977.10.23)
 
2. 인간 자체에 내재한 하나님의 모습
 
종교 경전


눈으로 볼 수 있는 이가 아니며, 언설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이가 아니다.
감관으로도, 고행으로도, 혹은 거룩한 제사로도 그는 알려지지 않으며, 다만 마음이 지혜의 은총을 입어 청정하게 될 때,
명상 가운데 자기를 드러내 보이나니, 그는 부분 없는 일자이니라.
문디카 우파니사드 3.18(힌두교)
 
도라는 것은 있는 듯 없는 듯 황홀하기만 하다. 황홀하면서도 그 안에 형상이 있고, 그 속에 모든 것이 있다. 깊고 그윽하여 보이지 않지만, 그 속에 생명의 본질인 정령이 있고, 그 정령은 심히 진실하여 그 속에서 뻗어 나타난다.
예부터 오늘까지 여전히 도라고 부르며, 만물의 근원을 총체적으로 통솔한다. 우리가 무엇으로 만물의 근원의 실상을 알 수 있는가? 바로 도를 가지고 알 수 있다.
도덕경 21(도교)
 
오, 지혜의 주여! 나는 당신이
거룩한 분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선한 마음으로 나타났을 때
무언의 생각이 되어, 내게 지고선을 일어 주었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널리 외쳤습니다.
아베스타, 야스나 45.15(조로아스터교)
 
실로 누가 이것을 아는가? 지금 누가 언명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길이 실로 신들에게 이르게 하는가? 최고의 천상에서 굽어보는 이, 다만 그 존재의 가장 낮은 측면들만 드러나 보이도다.
리그베다 3.54.5 (힌두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귀신의 성정과 공효는 위대한 것이다.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아니 하되, 만물의 본체가 되어 있어서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귀신은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목욕재계하고 옷을 단정히 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들 위의 어느 곳에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그들의 좌우 어느 곳에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시경에 ‘신의 강림하심은 사람으로서는 감지할 수 없는 것인데, 사람이 어찌 그것을 꺼리고 피할 수 있으랴!’ 라고 노래하였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잘 감지할 수 없는 귀신의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중용 16(유교)
 
말씀 선집


‘하나님이 있다’ 하는 것은 말 뿐이 아닙니다. 원리를 통해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은 불가피적으로 있어야 된다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있기 전에 있었으며, 내가 생각하기 전에 있었으며, 내 모든 감각, 나의 일체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라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식하고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닙니까? 알고 인식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 인식하고 알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우면 추운 것을 느껴서 아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이 계시다면 신이 계신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세포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 경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체휼적 입장을 어떻게 우리가 확정짓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58.291-292, 1972.06.25)
 
하나님은 살아 있습니다. 악마도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과 악마가 살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관념과 실재가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전부다 관념입니다. 추상명사입니다. 양심도 관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랑도 관념입니다. 추상명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관념이 아닙니다. 실생활의 모든 면에서 접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186.67, 1989.01.29)
 
여러분은 사랑을 갖고 있습니까? 생명을 갖고 있습니까? 혈통과 양심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생명, 혈통, 양심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알지만, 이것들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으로 느껴서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할 때, 또는 하나님을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 물을 때, 못 보았다는 말도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면 마음이 압니다.
(447.154-155, 2004.05.01)
 
자식을 낳아 보아야 부모님께 진정한 의미의 효도를 할 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실천해 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같이 하신다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것입니다.
(29.198, 1970.02.28)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본심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고 본성의 선한 부모를 통해서 태어났던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변론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자연히 안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뱃속에서부터 젖 먹는 법을 배워 가지고 나옵니까? 나자마자 눈앞에 젖이 있으면 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자동적으로 알고, 자동적으로 해결하고, 자동적으로 가야 할 입장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전부 다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논의하고 의심하는 결과의 세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참한 사실입니다.
(20.306-307, 1968.07.14)
 
양자를 중심삼고 전자가 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전자와 같은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양자와 같은 하나님 마음의 핵심과 관계를 맺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여 복귀섭리를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헤아려 볼 때, 우리가 혼자라도 진리의 말씀을 찾아나간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약동하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이 화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진리의 길을 거쳐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찾아나가는 길이 가치 있는 내가 될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2.137-138, 1957.03.17)
 
여러분이 심정으로 그리는 세계는 어떤 곳입니까? 그 세계는 외계의 감각을 통하여 들어오는,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식 세계에서 빚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 정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아주 작은 하나의 미립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t랑을 느낄 수 있는 정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마 11: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통념적인 감성을 가지고는 주체적이요 원형적인 이념세계를 느낄 수 없습니다.
(7.255, 1959.09.20)
 
성약시대에는 본 전통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영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본고향이 어디냐 하면 영계입니다. 영계를 모르면 하늘나라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영계를 알아야만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하나님이 살고 계신, 활동할 수 있는 영계를 모르면 안 됩니다.
(365.302, 2002.01.14)
 
3. 역사 배후의 하나님
 
종교 경전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 보이셨다.
요한복음 1.18(기독교)
 
높은 언덕과 산봉우리와 우거진 참나무를 비롯해 무성한 온갖 나무 밑에서 모든 우상들에게 분향하다가, 거기에서 칼에 찔려 우상들이 서 있는 제단 둘레에 쓰러지게 되어야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 것이다.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지 나는 손을 뻗쳐 그 땅을 리블라에 이르는 사막보다 더 황량하게 만들리라. 그제야 사람들은 내가 여화와임을 알 것이다.
에스겔 6.13-14(기독교)
 
여호와여, 당신의 온갖 피조물들이 감사 노래 부르고 신도들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들어 말하고 당신의 공적을 이야기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공적을 사람에게 알리고 당신 나라의 그 찬란한 영광을 알리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당신만이 만세에 왕이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언제나 진실하고, 그 하시는 일 모두 사랑의 업적이도다.
누구나 쓰러지면 붙들어 주시고 거꾸러지면 일으켜 주신다.
모든 눈들이 당신만 쳐다보고 기다립니다. 철을 따라 양식을 주실 분 당신밖에 없사옵니다.
당신께서 손만 벌리시면 살아 있는 모든 것 원대로 배부릅니다.
여호와 가시는 길은 언제나 바르시고, 그 하시는 일 모두 사랑의 업적이도다.
시편 145.10-17(기독교)
 
말씀 선집


이 절대자는 결코 관념적 존재(觀念的存在)가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그 자체를 드러내 온 실재적 존재(實在的存在)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상에 수많은 종교지도자 또는 성현(聖賢)들이 시간이나 장소를 달리하여 출현했던 것을 알고 있으며, 이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양심과 심정에 호소하여 이웃에의 사랑을 실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에 한 민족이나 국가가 순응할 때 평화와 융흥(隆興)을 누렸던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혼란과 쇠망에 빠지곤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이 세계적인 혼란 속에서 인류를 구할 수 있는 현대적인 성현의 출현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대망(待望)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사랑의 주체이신 절대자가 있어서 역사나 현실의 배후에서 종교지도자나 성현들을 세워 그들을 통하여 자체의 사랑을 구현해서 도덕적 가치의 세계를 실현하고자 기획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69.238, 1973.11.26)

출처: http://cafe.daum.net/rainbowKINGDOM/HsPJ/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