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業과 經歷-독립지사 文潤國선생의 유필

훈독왕 | 20190205200036

 

學業과 經歷 (독립지사 文潤國선생의 유필)


이글은 문윤국(1877.01.30.∼1958.01.02.)선생이 한문체의 자필로 남기신 ‘학업과 경력’이란 글을 강원대 우종춘교수가 같은 대학 한문교육학과의 허남욱교수에게 의뢰하여 번역한 것을 바탕으로 편집자가 최종 정리한 내용임을 밝혀둡니다. 


이 기록 자료를 근거로 대한민국 정부는 고 문윤국선생에게 1977년12월13일 박정희 대통령의 표창장을, 1990년 12월26일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음을 부기합니다. 


1919년 3.1운동100주년을 맞아, 문선명 총재님의 종조부(從祖父)님이시기도 한 애국독립지사 문윤국선생의 행적과 유훈에 관해 여러분의 깊은 관심을 촉구합니다.

(편집자:손대오)


이렇게 정리한 것을 본인이 나름 재 판독, 재 수정을 통해 보완을 해봤습니다.

* 판독은 원본을 위주로 했음. 필사본은 참고로만 함


 <한자 판독본>

學業과 經歷


自八歲 至二十一歲난 詩賦家 詩傳에게 出就하야 史學과 經學七書와 外家雜書를 受業함.
自二十二歲 至二十五歲난 經學家 一菴白先生 禮行 丈席에게 執䞇하야 小學과 經傳五書를 傳受 講究함.
自二十六歲 至 三十二歲난 平北定州郡 德達面 德興義塾에서 漢文敎授로 視務함.
自三十四歲 庚戌合邦以後난 朝鮮基督敎 長老敎會에 獻身하야 入敎人信徒됨.
自三十五歲 至三十六歲난 平北定州郡 邑內 私立新安小學校에서 男女學生을 敎授함.
自三十七歲 至四十一歲난 平壤長老敎 神學校에 入學五年에 第十一回 卒業을 受함.
自四十一歲 至四十三歲난 平北定州郡 德彦面 德興德星과 新安面 蓮峰三 敎會 專任牧師로 視務함.
自四十三歲 己未 陰正月에 以朝鮮獨立發起人으로 平北老會 宣川邑 南禮拜堂에 開催하고 李太王奉悼式을 擧行할새 與平北 各 敎會牧師 長老 及 基督神徒 四千餘人으로 嚴敬行禮後에 待其夜深하야 密入 白時瓚長老洞房하야 旣히 深藏한 獨立請願書에 連名調印하고 自此繼續하야 全 朝鮮 十三道 代表義士를 連通하야 列名捺章하야 巴里講和會議에 提出하야 接受케 하였으며 其後 二年 秋 九月에 軍資金七萬圓을 萬洲居住 金肅濟牧師에게 附하야 上海 臨時政府에게 進呈하였으며 是年 陰 二月初 七日에 於 定州郡五山私立高等學敎에서 與敎長敎員 數十人과 小中學敎男女 學生 二千餘人과 各 敎會神徒 三千三百人과 居住民 四千餘人으로 會合하야 以 獨立萬歲主務者로 宣言大唱하며 示威運動時에 自定州守護隊 一百二十名이 包圍 被捉 時에 身上에 連中三槍하고 至死不屈이라가 氣昏하야 乃 倒如死 則 以 縛繩으로 拘束入城後에 囚在 縲絏하야 鞫問頻煩하야 預審中 四個月 拘留하고 第一審覆審上告에 二個年 懲役言渡를 受함.
庚辰(申)歲 王世子婚禮式을 因하야 懲役半減을 受하야 侥倖 出監하였으며
自四十四歲 至 五十歲난 復히 德興德星連峰三 敎會牧師 視務함.
五十一歲에 本 邑 警察署에서 以 要視察 甲種으로 指目하야 拘束이 日甚故로 本職을 辭免하고 不得已 避身하야 忠北稷山 等地에 隱逸하야 三年을 度了하고 其 後 江原道江陵郡玉溪地方에 留住하는 中 天運이 循環하사 乙酉 解放이 됨으로 即速 還鄕 則 北鮮一城이 已爲赤化地帶이라 無可往矣오 不可久住 故로 丙辰 春 正月十一日에 乃 與 老妻幼子와 遠近宗族으로 揮淚 告別하고 乃 脫身遠走하야 離北越南할새 告 天設誓一絶에 曰 老妻幼子를 此 路分일새 禱 天設誓 向南雲이라 在生當作 民權黨이요 寧死언정 不隨傀儡群 跋涉多日에 復返 于 旌善郡北面長悅里宗弟家하야 惟祈南業之平和焉.

本籍平安業道 定州郡 德彦面 德興洞
現住 江原道 旌善郡 北面長悅里 文昌運 方
文潤國 當 七十八歲


<한글 판독본>

학업과 경력


자팔세 지이십일세는 시부가 시부에게 출취하야 시학과 경학7서와 외가잡서를 수업함.
자이십이세 지이십오세는 경학가 일암백선생 예행 장석에게 집지하야 소학과 경전오서를 전수 강구함.
자이십육세 지 삼십이세는 평북정주군 덕달면 덕흥의숙에서 한문교수로 시무함.
자삼십사세 경술합방이후는 조선기독교 장로교회에 헌신하야 입교인신도됨.
자삼십오세 지삼십육세는 평북정주군 읍내 사립신안소학교에서 남녀학생을 교수함.
자 삼십칠세 지사십일세는 평양장로교 신학교에 입학오년에 제십일회 졸업을 수함.
자사십일세 지사십삼세는 평북정주군 덕언면 덕흥덕성과 신안면 연봉삼 교회 전임목사로 시무함.
자사십삼세 기미 음정월에 조선독립발기인으로 평북노회 선천읍 남예배당에 개최하고 이태왕봉도식을 거행할새 여 평북 각 교회목사 장로급 기독신도 사천여명으로 엄경행례후에 대기야심하야 밀입 백시찬장로 동방하야 기히 심장한 독립청원서에 연명조인하고 자차계속하야 전 조선 십삼도 대표 의사를 연통하야 열명날장하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야 접수케 하였으며 그후 이년 추 구월에 군자금칠만환을 만주거주 김숙제목사의게 부하야 상해 임시정부에게 진정하였으며 시년 음 이월초 칠일에 어정주군오산사립고등학교에서 여교장교원 수십인과 소중학교남녀 학생 이천여인과 각 교회신도 삼천삼백인과 거주민 사천여인으로 회합하야 이 독립만세주무자로 선언대창하며 시위운동시에 자정주수호대 일백이십명이 포위 피착 시에 신상에 연중삼창하고 지사불굴이라가 미혼하야 내 도여사 칙 이 박승으로 구속 입성 후에 수재 누설하야 국문빈번하야 예심중 사개월 구류하고 제일심복심상고에 2개년 징역언도를 수함.
경신세 왕세자혼례식을 인하야 징역반감을 수하야 다행 출감하였으며
자사십사세 지 오십세는 복히 덕흥덕성연봉삼 교회목사 시무함.
오십일세에 본 읍 경찰서에서 이 요시찰 갑종으로 지목하야 구속이 일심고로 본직을 사면하고 부득이 피신하야 충북(충남) 직산 등지에 은일하야 삼년을 도료하고 그 후 강원도강릉군옥계지방에 유주하는 중 천운이 순환하사 을사 해방이 됨으로 즉속 환향 즉  북선일역이 이위적화지대이라 무가왕의오 불가구주 고로 병신 춘 정월십일에 내 여 노처유자와 원근종족으로 휘눈물 고별하고 내 탈신원주하야 이북월남할새 고 천설세일절에 왈 노처유자를 이 노분일세 도 천설세 향남운이라 재생당작 민권당이요 녕사언정 불수괴뢰군 발섭다일에 복반 우 정선군북백장열리종제가하야 유기남북지평화언.

본적평안업도 정주군 덕언면덕흥동

현주 강원도 정선군 북면 장열리 문창운 방
문윤국 당 칠십팔세

  <번역본>

文潤國선생의 學業과 經歷(학업과 경력)


自八歲至二十一歲난 詩賦家師傅의계 出就하야 史學과 經學七書와 外家雜書를 受業함
8세(1884년)부터 21세(1897년)까지는 시부를 짓던 스승에게 입문하여 사학과 경서칠서(사서삼경)와 외가잡서(유학의 경서와 『史記』를 제외한 책)를 수업함.


自二十二歲至二十五歲난 經學家一菴白先生禮行丈席에게 執贄하야 小學과 經傳五書를 傳受講究함
22세(1898년)부터 25세(1901년)까지는 경학가 일암선생 백예행(정주, 독립운동, 옥중병사, 육영학교 설립) 장석(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에게 집지(제자가 스승을 처음 뵐 때 예물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함)하여 『소학』과 경전오서(『詩經』․『書經』․『周易』․『禮記』․『春秋』)를 전수받고 연구함.

自二十六歲至三十二歲난 平北定州郡德達面德興義塾에셔 漢文敎授로 視務함
26세(1902년)부터 32세(1908년)까지는 평안북도 정주군 덕달면 덕흥의숙에서 한문교수로 시무함.

自三十四歲庚戌合邦以後난 朝鮮基督敎長老敎會에 獻身하야 入敎人信徒됨
34세 경술합방(1910년)이후부터는 조선기독교장로교회에 헌신하여 입교, 신도가 됨.

自三十五歲至三十六歲난 平北定州郡邑內私立新安小學校에셔 男女學生을 敎授함
35세(1911년)부터 36세(1912년)까지는 평안북도 정주군 읍내에 있는 사립 신안소학교에서 남녀 학생들을 가르침.


自三十七歲至四十一歲난 平壤長老敎神學校에 入學五年에 第十一回卒業을 受함
37세(1913년)부터 41세(1917년)까지는 평양의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이 지나 제11회 졸업생이 됨.


自四十一歲至四十三歲난 平北定州郡德彦面德興德星과 新安面蓮峰三敎會專任牧師로 視務함
41세부터 43세(1919년)까지는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덕흥과 덕성, 신안면 연봉 등 3개 교회에서 전임목사로 시무함.

自四十三歲己未陰正月에 以朝鮮獨立發起人으로 平北老會를 宣川邑南禮拜堂에 開催하고 李太王奉悼式를 擧行할새 與平北各敎會牧師長老及基督敎信徒四千餘人으로 嚴敬行禮後에 待其夜深하야 密入白時瓚長老洞房하야 旣히 深藏한 獨立請願書에 連名調印하고
43세 기미년(1919년) 음력 정월에 조선독립발기인으로 ‘평북노회’를 선천읍 남쪽 예배당에서 개최하고 이태왕(高宗, 1852~1919.1.21)의 봉도식을 거행하였는데, 평안북도 각 교회의 목사와 장로 및 기독교 신도 4천여 명과 함께 엄숙하고 경건하게 예식을 거행한 후에, 그날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백시찬 장로의 집에 남몰래 들어가 깊이 숨겨 보관하고 있었던 독립청원서에 백시찬 장로와 연명, 조인하였다.


自此繼續하야 全鮮十三道代表義士를 連通하야 列名捺章하야 巴里講和會에 提出하야 接受케하여스며 其後二年秋九月에 軍資金七萬圜을 滿洲居住金肅濟牧師의게 附하야 上海臨時政府의게 進呈하여스며 
이때부터 계속해서 조선 전국 13도의 대표 의사들과 서로 연락하여 서명하고 날인해서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여 접수하게 하였다. 그 후 2년이 지난(1921년) 가을 9월에 군자금 칠만환을 만주에 거주하는 김숙제 목사에게 부쳐 상해 임시정부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是年陰二月初七日에 於定州郡五山私立高等學校에셔 與校長敎員數十人과 小中學校男女學生二千餘人과 各敎會信徒三千三百人과 居民四千餘人으로 會合하야 以獨立萬歲主務者로 宣言大唱하며
이 해(1919년) 음력 2월 초7일에 정주군 오산사립고등학교에서 교장과 교원 수십 명, 소․중학교 남녀학생 2천여 명, 각 교회 신도 3천 3백 명, 주민 4천여 명과 함께 회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관하여 맡은 사람으로서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크게 불렀다.

示威運動時에 自定州守備隊一百二十名이 包圍被捉時에 身上에 連中三槍하고 至死不屈이라가 氣昏하야 乃倒如死則以縛繩으로 拘束入城後에 囚在縲絏하야 鞠問이 頻煩하야 豫審中四個月拘留하고 第一審覆審上告에 二個年懲役言渡를 受함
시위 운동할 때에 정주 수비대 120명에게 포위되었고, 붙잡혔을 때에는 신상에 연이어 3번 창에 찔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굽히지 않았다가 기절하여 혼수상태가 되었다. 이에 죽은 듯이 쓰러지니 곧바로 포승줄에 묶여 체포되어 도성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포승줄에 묶인 채 감옥에 갇혀 반복되는 혹독한 고문 속에 예심에서 4개월의 구류에 처해졌고, 제1심․복심(항소법원이 제1심과는 관계없이 새로이 심리․판결하는 일)․상고에서 2년의 징역을 언도 받았다.


庚辰歲 王世子婚禮式을 因하야 懲役半減을 受하야 僥倖出監하여스며
경신년(庚辰은 1940년이므로 庚申의 착오임) 왕세자(英親王 李垠, 1897~1970.5.1, 1920년 4월 28일 일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의 딸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강요당하여 妃로 맞았다.)의 혼례식 특사로 징역이 절반으로 줄어 다행히도 출감하였다.


自四十四歲至五十歲난 復히 德興德星蓮峰三敎會牧師로 視務함
44세(1920년)부터 50세(1926년)까지는 다시 덕흥․덕성․연봉 등 3개 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함.


五十一歲에 本邑警察署에셔 以要視察甲種으로 指目하야 拘束이 日甚故로 本職을 辭免하고 不得已避身하야 忠北稷山等地에 隱逸하야 三年을 度了하고 
51세(1927년)에 본읍 경찰서에서 요시찰 인물 갑종으로 지목되어 탄압이 날로 심해졌기 때문에 본직(목사)을 사임하고 부득이하게 피신하여 충남(충남으로 사료 됨, 직산은 충청남도에게 있기 때문) 직산 등지에 은일하며 3년을 지냈다.

其後江原道江陵郡玉溪地方에 留住하난 中天運이 循環하사 乙酉解放이 됨으로 卽速還鄕則北鮮一域이 已爲赤化地帶矣라 
그 후 강원도 강릉군 옥계 지방에 머물러 살다가 천운이 도래하여 을유년(1945년, 69세)에 해방이 되자 곧바로 고향으로 갔더니, 북조선 지역이 이미 적화지대가 되어버렸다.


無可往矣오 不可久住故로 丙戌春正月十七日에 乃與老妻幼子과 遠近宗族으로 揮涕告別하고 乃脫身遠走하야 離北越南하새
왕래도 할 수 없고 오래 거주할 수도 없는 까닭에 병술년(1946) 봄 정월 17일에 비로소 사랑하는 처자식, 그리고 멀고 가까운 친척들과 눈물로 고별하고, 몸을 빼어 멀리 도주하여 북을 떠나 남으로 넘어갔다.


告天設誓一絶에 曰 “老妻幼子를 此路分일새 禱天設誓向南雲이라 在生에 當作民權黨이오 寧死언뎡 不隨傀儡群” 
이때 하늘에 고하여 맹세를 하면서 시 한 수를 지었는데, “사랑하는 처자식과 이 길로 헤어지니, 하늘에 기도하여 맹세하며 남녘 구름을 바라보노라. 내 생애에 마땅히 민권당(백성이 주권이 있는 당)이 되어야지, 차라리 죽을지언정 괴뢰의 무리를 따르지 않으리라.” 하였다.


跋涉多日예 復返于旌善郡北面長悅里宗弟家하야 惟祈南北之平和焉
오랜 세월 산전수전을 겪다가 정선군 북면 장열리의 종제(아래의 文昌運으로 보임) 집에 돌아와서는 오직 남북의 평화만을 기원하였다.

本籍平安北道定州郡德彦面德興洞
본적: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덕흥동

現住江原道旌善郡北面長悅里文昌運方
현 거주지: 강원도 정선군 북면 장열리 문창운 내

文潤國當七十八歲
문윤국 당년 78세(1954년)


 *  쉽게 오역하는 경우


老妻幼子

이를 흔히 문자 그대로 늙은 아내와 어린 자식으로 번역을 하는데

고문에서 老는 단순히 늙었다라는 뜻으로만 아닌 '오랜', 즉 '정이 오래 든'으로 해석해야 더 무난하다고 판단됨.

상대적으로 '幼'역시 '老'와 댓구적으로 쓰여진 글자로 '어리다'는데 중점을 두어 해석하면 이상해짐.

때문에 '老幼'는 모두 '정든', '사랑하는' 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視務함

視務함을 사무를 보았다고 번역하는 것은 아무래도 잘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냥 '시무함'으로 번역함이 더 무난할 듯 합니다.


 跋涉多日

직역하면 '산 넘고 물 건너 많은 날'이란 뜻이다.

여기서 '跋涉'를 산 넘고 물 건너로 직역하면 이상해 짐.

정황상 산전수전을 다 겪은 생애를 빚대어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할 것 같습니다.

'多日'은 많은 날이니 '오랜 세월'로 해석함이 더 무난할 듯 합니다.


密入白時瓚長老洞房

이는 백시찬의 집(방)에 윤국할아버님이 몰래 들어갔다고 해석하기 보다는 정황상 할아버님이 남의 눈(당시 일본 경찰)을 피해 백시찬 장로와 같이 은밀히 행동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이어진 문장은 백시찬 장로와 함께 獨立請願書에 連名調印한 것으로 해석을 해야 무난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 오기 오타로 추정되는 것


(申)歲 중 辰은 申의 오타로 추정됨

왜냐 하면 1920년은 庚申년임

辰을 신으로도 읽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함


忠北(南) 稷山 여기서 忠北은 忠南의 오타로 추정함

왜냐 하면 稷山은 忠南에 있기 때문임

 

金肅濟목사는 金用濟 목사로 의심 추정되기도 함
金用濟목사는 독립운동사에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金肅濟목사는 독립운동사에 기록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윤국할아버님의 이력서 형식의 학업과 경력을 판독하고 번역한 후 소감>

 

윤국 할아버님은 조선을 대표하고 문씨 종중을 대표하여 아버님께서 탄생하실 수 있는 내적이고 영적인 기대를 쌓으신 분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가 1919년 음력 1월(양력 2월)에 조선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또한 집안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당시 7만환의 거액의 군자금을 마련하여 상해임시정부에 헌납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독립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하여 후일 유관순 여사를 중심한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3.1 만세 운동 후에 40일 탕감수를 지나 아버님은 잉태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윤국할아버님은 아버님이 탄생하실 수 있는 내적이고 영적인 기대를 쌓으신 결정적인 인물로 판명이 났습니다.

결국 재림주님이신 아버님이 이 땅에 탄생하실 수 있는 영적인 기대를 세우신 분은 바로 윤국 할아버님이셨습니다.

 <文潤國선생의 유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