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 22: 37)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모세의 십계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처음으로 말씀을 주신 것이 바로 십계명인데 이 십계명에서 첫 번째 계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님도 하나님의 한을 해원해 드리고 하나님을 모시고 사랑하는 것을 가장 강조하셨습니다.
2대 왕님께서도 지난 '하나님 왕국의 사랑'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신앙하는 자는 누구나 한결같이 하나님을 잘 사랑해드려야 함을 알고 있고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잘 사랑해드릴 수 있을지 물으면 구체적인 방안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다시 되새김질해 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37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장 39절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똑같이 크고,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셨습니다.
왕님께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관계 속에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친구를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목숨을 걸고 이웃을 지키고 모시라고 했습니다.
왕님께서는 사탄은 모든 것을 사랑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사랑하면 사탄까지 사랑해야 되므로 죄악도 사랑하는 것이 되어 선악을 분별 못하게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8절 이하에 또 눈은 눈으로 , 이는 이로 갚으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동장 43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 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버님도 원수까지 송두리째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영광의 왕관 시 참조)
하나님을 사랑하려니 하나님은 무형이셔서 내 스스로 직접 하나님과 관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원리에서는 분명 가르쳤습니다.
주체를 하나님 대신으로 사랑해야 함을... 주체는 대상을 하나님 입장에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심정(마음)으로 주체는 대상을, 대상은 주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주체, 나의 대상이 바로 나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우리는 직접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의 하나님을 찾았을 때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원리에서 말하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떠나서 혼자서 살아갈 수 없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원리에서는 하나님을 중심하고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주체는 대상을, 대상은 주체를 하나님 대신 사랑하는 것입니다.
대상은 주체를 하나님 대신 모시고 사랑하고, 주체는 대상을 하나님 입장에서 사랑하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왕님께서도 관계 속에서 즉, 친구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도 남편을 하나님 대신 사랑할 수 있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복귀섭리 시대에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 대상이 꼭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바로 원수일 경우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딪히는 현실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원수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님도 그런 원수를 송두리째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왕님은 모든 것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이런 경우 우린 사랑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기 쉽습니다.
죄인을 사랑할 것인가, 미워할 것인가?
악인을 사랑할 것인가, 미워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기 쉽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해야 합니다. 악은 미워하되 악인은 사랑해야 합니다.
죄까지, 악까지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 죄인이 죄인 되어 불쌍하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악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 악인이 악인 되어 악하게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 악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랑하지 못한 것이 타락성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도, 악인에게도 다 한결같이 선한 자에게 빛을 비춰주시고 비를 내리듯이 사랑하십니다.
죄인에게 악인에게 빛을 비춰주시지 않고 비를 내려주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떠나서 죄인이나 악인을 보면 쉽게 정죄하고 심판하고 비판하거나 저주까지 합니다.
누구의 피입니까? 누구의 방법입니까?
이는 바로 마귀 사탄의 방법입니다.
그 피를 전수받은 자는 그렇게 살아가겠지요.
타락한 인간은 이런 사탄의 피를 전수받아 쉬이 그렇게 행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려면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죄인을 미워하려면 먼저 나부터 미워해야 합니다. 나부터 심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를 죄에서 구원하려니 죄인을 사랑하면서 그 죄에서 구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그 죄에서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원리강론 203쪽 낙원 이외의 영인들의 재림부활 참조)
그래서 왕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공산주의를 미워하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증오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사랑해야 한다고...
아버님은 공산주의를 미워하시고 증오하셨지만 공산주의 괴수인 고르바초프나 김일성은 사랑하셨습니다.
원리에서 죄라는 것은 사탄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킴으로써 천법을 위반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내가 악인이나 죄인과 상대성을 띠어 사탄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키는 행위가 바로 악인이나 죄인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천법을 위반하는 것이니 사탄을 사랑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인을 섬멸하고 악인을 멸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판하기 쉽습니다.
죄인이나 악인은 그렇게 해서 섬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하면 왜 하나님께서 6000년이란 긴 세월을 피눈물 흘리시면서 복귀섭리를 해 오셨겠습니까?
왜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물이 되었겠습니까?
왜 아버님은 원수를 송두리째 사랑하시면서도 심판의 채찍을 들지 않으셨을까요?
사탄을 섬멸하고 죄인과 악인을 섬멸하는 것은 말씀과 사랑으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먼저 죄인이나 악인이 스스로 죄인이고 악인인 것을 인정하고 깨닫게 하지 않고서는 그 사람 속에서 죄와 악을 뽑아낼 수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어렵다고 죄인이나 악인을 다 죽여버린다면 이 지구 상에는 예수님이나 아버님 두 분만 남아야 합니다.
아니 그분들도 태어날 수 없었겠죠. 그분들도 역시 죄인의 몸을 통해 태어나셨으니까...
죄와 악은 멸해야 하지만 죄인과 악인은 그 죄와 악에서 구원해야할 복귀의 대상들입니다.
결코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인과 악인을 선으로 돌려세우기 위해 먼저 그들의 죄와 악을 깨우치기 위한 기대를 쌓아야 합니다. 즉 상대기준을 조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으로 깨우치려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대를 먼저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대가 쌓아지지 않았는데 말씀을 주면 반발하여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 것(마7:6)과 같거나, 길가에 뿌려진 씨앗(막4:15)처럼 되어 새들(사탄)이 바로 와서 먹어버립니다.
그래서 결과는 뻔하지요. 서로 논쟁을 하게 되고 비판으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면 저주까지 퍼붓게 됩니다. 그
렇게 되면 하나님은 탄식하며 떠나시고 사탄은 활개를 치고 날아듭니다.
사탄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켰으니 하나님을 미워하고 사탄을 사랑하게 된 것이죠. 공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악인이나 죄인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나를 깨우쳐 주는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은인으로 여겨야 합니다.
먼저 이런 심정적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처럼 하나님 입장에서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단히 말씀으로 깨우치기를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켜 하나님이 역사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절대 심판의 마음이 아닌 긍휼의 마음 애통하는 심정으로 상대를 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원수(가인)를 자연 굴복시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먼저 가인을 사랑하여 나의 사랑으로 인하여 감동을 받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가인적 존재가 나에게 절대 자연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악인이나 죄인을 사랑하여 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여야 하나님을 중심하고 상대기준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대기준이 조성된 연후에야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켜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죄인이나 악인이 죄를 벗어 던지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즉,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반성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을 뉘우치고 선으로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했을 때 우리는 바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죄악 가운데 있는 자를 구했으니 나 자신도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주 기도문 참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시고...)
이러한 탕감복귀원리를 우리는 배웠습니다.
죄인을 용서했을 때 죄인인 내가 용서받을 수 있고, 죄인을 구했을 때 죄인인 내가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악과 부딪히며 사는 삶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기란 이렇게 끊임없는 사랑의 노정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