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와 므나의 비유(마 25:14-30, 눅 19:11-27)

H.I.S | 20161222105259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마 25:14-30, 눅 19:11-27)

 

마태복음 25장 14절 이하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각각 열 달란트와 네 달란트로 증식해 주인에게 보고를 했으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간직하고 있다 한 달란트 그대로 갖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9장 11절 이하에는 세 사람이 모두 한 므나씩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은 10므나, 또 한 사람은 5므나로 증식해 주인에게 보고를 했으나 한 므나를 받은 자는 간직하고 있다 한 므나 그대로 갖고 나왔습니다.

 

이 때 주인은 증식한 자에게는 축복을 했고  간직하다 그대로 갖고 나온 자를 향해서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물론 므나의 비유에서는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는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누가복음 18:18~27)는 말씀에서 해방시켜준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럼 과연 우린 원리적 관점에서 이 비유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문자 그대로 이해를 하면 모두가 돈, 즉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육신의 문제로 말씀을 하신 적은 별로 없습니다. 더구나 경제문제로 말씀하실 분이 아니죠.

예수님은 언제나 육적인 것에 빠져있는 우리들에게 영의 문제, 심령의 문제를 알아듣기 쉽게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달란트나 므나의 비유 역시 영의 문제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먼저 달란트 비유와 므나의 비유 이 둘의 차이점은 액수에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5, 2, 1로 차이가 있지만 므나의 비유는 모두가 동일하게 한 므나씩 받았습니다.

다만 늘린 결과는 모두 10, 4, 1로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다섯을 받거나 둘이나 하나 받은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받은 것을 통해 두 배나 열 배로 늘린 자는 칭찬을 받았고 늘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자는 책망을 받았고 그 가진 것도 빼앗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누구나 각자의 달란트(므나)를 받았습니다.

원리적 용어로 개성진리체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개성진리체란 각자 자기만의 특색을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뜻이죠.

 

이윤을 낸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잘 수행하여 위하는 삶을 살아서 전체의 이익을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 주어진 개성(특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썩히면 게으른 자(한 달란트나 한 므나 그대로 갖고 있던 자)로 책망받고 그 가진 것(개성)도 무의미하게 되니 빼앗기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빼앗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맞게 쓰지 못하고 육을 중심하고 무의미한 곳에 자신의 인생을 투입했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내가 가진 개성, 즉 각자 나름의 재주나 특기를 통해 주변에 도움이 되고 심령의 이익을 내는 영의 삶을 살아야 함을 깨우쳐 주신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위해서 살아야하는 이유가 영적인 이윤을 내기 위한 것 아닙니까?

위해서 산다는 것은 막연히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유익함을 만들어 내 심령이 성장 발전하여 빛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쁨을 창출해야 한다는 뜻이죠.


하나님이 기쁨을 얻으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돌려드리는 최고의 기쁨은 나 자신이 하나님이 주신 3대축복(생육, 번성, 만물주관)을 이루어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서 기쁨을 돌려드리는데 있습니다. (창 1: 28)

하나님이 마지막 여섯째 날 인간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신 그 말씀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 1: 31)

우리도 우리 가진 개성 즉 자신이 잘하는 것을 통해 관계속에서 영적인 이윤, 즉 기쁨을 창출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일깨워주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영적인 이윤, 영적인 기쁨은 위하여 사는 삶을 통해 창출됩니다.

 

본연의 혈통과 연결된 위하는 생활을 통하여 심정문화세계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게 하신 재림주님의 뜻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